17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And unto the man he said, Because thou hast hearkened unto the voice of thy wife, and hast eaten of the tree of which I commanded thee, saying, Thou shalt not eat of it; cursed is the ground for thy sake; in great sorrow shalt thou eat of it all the days of thy life. (창3:17)

 

 

267.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는 아담, 혹은 래셔널(rational, 合理)의 동의를 상징하며, 이렇게 되면, 처음엔 래셔널 자신을, 결과적으로는 겉 사람 전체를 외면하거나 저주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가 가리키는 것입니다. By the “man hearkening to the voice of his wife” is signified the consent of the man, or rational, by which it also averted or cursed itself, and consequently the whole external man, denoted by “cursed is the ground for thy sake.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는 그의 미래의 삶은 비참할 것이며, 이것은 심지어 그 교회의 종말 때까지, 혹은 ‘네 평생에’ 그럴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To “eat thereof in sorrow” means that the future state of his life would be miserable, and this even to the end of that church, or “all the days of his life.

 

 

268. ‘’이 겉 사람을 상징함은 앞서 ‘’(earth, 창1:1, AC.16), ‘지면’(ground, 창2:5, AC.90), ‘’(field, 창2:5, AC.90) 관련 내용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e “ground” signifies the external man is evident from what was previously stated concerning “earth,” “ground,” and “field.

 

사람이 거듭날 때, 그를 가리켜 더 이상 ‘’이라 하지 않고, 대신 ‘지면’이라고 합니다. 천적 씨가 그의 안에 심겼기 때문입니다. When man is regenerate, he is no longer called “earth,” but “ground,” because celestial seed has been implanted in him;

그는 또한 ‘지면’으로 비유되며, 말씀 여러 곳에서 ‘지면’으로 불립니다. he is also compared to “ground” and is called “ground” in various parts of the Word.

선과 진리의 씨앗들은 속 사람 안이 아닌, 겉 사람, 즉, 그의 어펙션과 기억 안에 심깁니다. 속 사람 안에는 그의 고유 본성과 관련된 아무것도 없고, 대신 겉에 있기 때문입니다. The seeds of good and truth are implanted in the external man, that is, in his affection and memory, and not in the internal man, because there is nothing of one’s own in the internal man, but only in the external.

 

속 사람 안에는 선들과 진리들이 있으며, 이것들이 더 이상 안 보이면, 그 사람은 겉, 혹은 몸이 됩니다. In the internal man are goods and truths, and when these no longer appear to be present, the man is external or corporeal;

 

하지만 이들은 사람의 지식이 아닌, 주님으로 말미암아 속 사람 안에 차곡차곡 보관되어 있습니다. 겉 사람이 마치 죽은 사람처럼 되는 상황, 가령, 시험들, 불행들, 질병들, 그리고 임종의 때와 같은, 그런 상황이 아니면 밖으로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they are however stored up in the internal man by the Lord, without the man’s knowledge, as they do not come forth except when the external man as it were dies, as is usually the case during temptations, misfortunes, sicknesses, and at the hour of death.

 

래셔널은 또한 겉 사람에게 속하며(AC.118), 실상은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 일종의 중간역할을 합니다. The rational belongs also to the external man (n. 118), and is in itself a kind of medium between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속 사람은 래셔널을 통해 몸과 겉에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for the internal man, through the rational, operates on the corporeal external.

 

그러나 래셔널이 동의를 하면, 겉 사람은 속과 분리되는 일이 일어나고, 그러면 속 사람의 존재를 더 이상은 알 수 없게 되며, 그 결과 속에 속한 것들인 지성과 지혜 역시 알 수 없게 됩니다. But when the rational consents, it separates the external man from the internal, so that the existence of the internal man is no longer known, nor consequently the intelligence and wisdom which are of the internal.

 

 

269. 여호와 하나님(즉, 주님)은 ‘’, 혹은 겉 사람을 ‘저주하시지’ 않습니다. 반대로 겉 사람이 속 사람으로부터 자신을 외면하게 하거나 분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자신에 대한 저주이지요. 이것은 앞서 본 내용(AC.245)으로 분명합니다. That Jehovah God (that is, the Lord) did not “curse the ground,” or the external man, but that the external man averted or separated itself from the internal, and thus cursed itself, is evident from what was previously shown (n. 245).

 

 

270.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가 삶이 비참해짐을 상징한다는 것은, ‘먹는’ 것이 그 속뜻으로는 사는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고, 앞선 내용들과 이어지는 내용들로 분명합니다. That to “eat of the ground in great sorrow” signifies a miserable state of life is evident from what precedes and follows, not to mention that to “eat,” in the internal sense, is to live.

 

다음과 같은 사실로도 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그런 삶의 상태는 악한 영들은 싸움을 시작하고, 수행 천사들은 고생할 때 따라옵니다. The same is evident also from the fact that such a state of life ensues when evil spirits begin to fight, and the attendant angels to labor.

 

이런 삶의 상태는 악한 영들이 주도권을 잡기 시작할 때 더욱 비참해집니다. This state of life becomes more miserable when evil spirits begin to obtain the dominion;

 

그때 그들은 겉 사람을 다스리고, 천사들은 단지 속 사람만 다스리는데, 속 사람 안에는 리메인스가 거의 없어, 천사들은 그 사람을 방어하는데 필요한 것을 거기서 거의 못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for they then govern the external man, and the angels only the internal man, of which so little remains that they can scarcely take anything thence with which to defend the man;

 

그래서 비참과 염려가 일어납니다. hence arise misery and anxiety.

 

죽은 사람들은 이런 비참과 염려에 거의 예민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더 이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인데요, 비록 그들이 자신들을 더욱 사람으로 정말로 생각하더라도 말이지요. Dead men are seldom sensible of such misery and anxiety, because they are no longer men, although they think themselves more truly so than others;

 

그들은 더 이상 영적이고 천적인 것, 그리고 영원한 삶에 관해 짐승들보다 더 아는 게 없으며, 짐승들처럼 땅에 속한 것들을 향해서는 아래를, 세속적인 것들을 향해서는 밖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for they know no more than the brutes of what is spiritual and celestial, and what is eternal life, and like them they look downward to earthly things, or outward to worldly ones;

 

그들은 자신들의 본성에만 호의를 보이며, 래셔널의 완전한 동의 하에 자신들의 성향과 감각에만 탐닉합니다. they favor only their own, and indulge their inclinations and senses with the entire concurrence of the rational.

 

이들은 죽은 상태이기 때문에 아무런 영적 전투나 시험 없이 살아가며, 다 드러난 사람들이 되어, 이들의 삶은 그 무게로 가라앉고, 그래서 그 결과, 점점 더 자신들을 저주하고, 재촉해서 계속해서 더 깊이깊이 지옥의 저주 아래 들어가게 할 것입니다. Being dead, they sustain no spiritual combat or temptation, and were they exposed to it their life would sink under its weight, and they could thereby curse themselves still more, and precipitate themselves still more deeply into infernal damnation:

 

이들은 다른 삶, 곧 지옥이지요, 거기서는 무슨 시험이나 불행 때문에 죽음에 이를 위험이 전혀 없지만, 그러나 가장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되는, 그런 삶의 입구에 이를 때까지 이런 삶을 살게 되기 때문에, 바로 이런 상태를 본문에서는, ‘땅은 저주를 받고 너는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로 상징한 것입니다. hence they are spared this until their entrance into the other life, where, being no longer in danger of dying in consequence of any temptation or misery, they endure most grievous sufferings, which likewise are here signified by the ground being cursed, and eating of it in great sorrow.

 

 

271. ‘네 평생에’가 그 시대 교회의 종말에 대한 상징인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 분명한데요, 여기서 다루는 주제가 어느 한 개인이 아닌, 교회와 교회의 상태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That “all the days of thy life” signifies the end of the days of the church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subject here treated of is not an individual man, but the church and its state.

 

그 교회 시대의 종말은 홍수의 때였습니다. The end of the days of that church was the time of the flood.

 

2021-04-29(D5)-창세기(창3,17, AC.267-271), '듣고, 땅, 저주, 수고, 평생에'.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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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And unto the woman he said, I will greatly multiply thy sorrow and thy conception; in sorrow thou shalt bring forth sons, and thine obedience shall be to thy man [vir], and he shall rule over thee. (창3:16)

 

 

261. 지금 ‘여자’가 상징하는 것은 프로프리움(proprium, 固有本性)에 관한 교회인데, 이 프로프리움을 교회가 사랑한 것입니다. By the “woman” is now signified the church as to proprium, which it loved;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가 상징하는 것은 전투이며, 그리고 그것이 야기하는 불안입니다. by “greatly multiplying her sorrow” is signified combat, and the anxiety it occasions;

 

임신’은 모든 생각을, by “conception,” every thought;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는 그래서 그녀가 낳게 될 진리들을, by the “sons whom she would bring forth in sorrow,” the truths which she would thus produce;

 

남편은 여기서도 앞서 살핀 대로, 그것이 따르게 될, 그리고 다스리게 될 래셔널을 상징합니다. by “man,” here as before, the rational which it will obey, and which will rule.

 

 

262. 앞서 교회를 ‘여자’로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지금까지 계속해서 보아왔다면, 여기서는 전에는 자기 자신이었던 그 고유본성 때문에 지금은 비뚤어진 교회를 ‘여자’로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태고교회의 비뚤어진 후손들을 지금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That the church is signified by the “woman” has been previously shown, but here the church perverted by the own which was itself formerly signified by the “woman,” because the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had become perverted, is now treated of.

 

 

263. 그러므로, 감각 파트가 자신을 외면하거나, 자신을 향해 욕을 할 때, 그 결과는, 악한 영들은 싸움에서 파워풀해지는 반면, 수행 천사들은 애를 먹게 되고... 그래서 이 전투를 묘사하여 이르기를,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즉, 진리를 생각하고, 생각한 진리를 실천에 옮기는 과정을 전투라고 할 만큼 쉽지 않은 과정이 됩니다. When therefore the sensuous part averts itself or curses itself, the consequence is that evil spirits begin to fight powerfully, and the attendant angels to labor, and therefore this combat is described by the words, “I will greatly multiply thy sorrow, in relation to the conception and birth of sons,” that is, as to the thoughts and productions of truth.

 

 

264. 이 말씀에 나오는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은 영적인 뜻으로 가져온 것입니다. ‘임신’이 마음에 품은 생각과 그 방법을, ‘자식’은 진리를 말하는 것임은, 호세아를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e “conception and birth of sons,” in the Word, are taken in a spiritual sense—“conception” for the thought and device of the heart, and “sons” for truths—is evident from Hosea:

 

11에브라임의 영광이 새 같이 날아가리니 해산하는 것이나 아이 배는 것이나 임신하는 것이 없으리라 12혹 그들이 자식을 기를지라도 내가 그 자식을 없이 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떠나는 때에는 그들에게 화가 미치리로다 As for Ephraim, their glory shall fly away like a bird, from the birth, and from the womb, and from the conception; though they shall have brought up their sons, yet will I bereave them, that they be not man; yea, woe also to them when I depart from them, (호9:11-12)

 

여기 ‘에브라임’은 지성 혹은 진리에 대한 이해를, where “Ephraim” signifies the intelligent, or the understanding of truth;

 

그리고 ‘자식’은 진리들 자체를, and “sons,” truths themselves.

 

에브라임’에 관한 어떤 곳이든지, 그가 지성을 가졌든,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든 마찬가지라고 하고 있습니다. It is likewise said elsewhere concerning Ephraim, or one who is intelligent, who has become foolish:

 

해산하는 여인의 어려움이 그에게 임하리라 그는 지혜 없는 자식이로다 해산할 때가 되어도 그가 나오지 못하느니라 The sorrows of one in travail have come upon him, he is an unwise son, for at the time he will not stand in the breach of the womb of sons. (호13:13)

 

이사야입니다. And in Isaiah:

 

4시돈이여 너는 부끄러워할지어다 대저 바다 곧 바다의 요새가 말하기를 나는 산고를 겪지 못하였으며 출산하지 못하였으며 청년들을 양육하지도 못하였으며 처녀들을 생육하지도 못하였다 하였음이라 5그 소식이 애굽에 이르면 그들이 두로의 소식으로 말미암아 고통 받으리로다 Blush, O Zidon, for the sea hath spoken, the fortress of the sea, saying, I have not travailed, nor brought forth, nor have I brought up young men, nor caused girls to grow up; as at the report concerning Egypt, they shall bring forth according to the report of Tyre, (사23:4-5)

 

여기 ‘시돈’은, 신앙의 지식들을 가졌었으나 나중에 기억-지식들을 가지고 그것들을 파괴하여 지금은 척박해진 사람들을 말합니다. where “Zidon” means those who have been in the knowledges of faith, but have destroyed them by memory-knowledges, and so have become barren.

 

[2] 다시 같은 선지서인데요, 거듭남을 다루는 부분입니다. 여기서도 신앙의 진리들이 ‘아이’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Again in the same prophet, treating of regeneration, and where likewise the truths of faith are signified by “sons”:

 

7시온은 진통을 하기 전에 해산하며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아를 낳았으니 8이러한 일을 들은 자가 누구이며 이러한 일을 본 자가 누구이냐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한 순간에 태어나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진통하는 즉시 그 아들을 순산하였도다 9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아이를 갖도록 하였은즉 해산하게 하지 아니하겠느냐 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해산하게 하는 이인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 하시니라 Before she travailed she bringeth forth; and before her pain came, she was delivered of a man child; who hath heard such a thing? Who hath seen such things? Shall the earth bring forth in one day, and shall I not cause to bring forth? saith Jehovah; shall I cause to bring forth, and close up? saith thy God. (사66:7-9)

 

천국 결혼을 통해 잉태되고 태어나는 선들과 진리들을 가리켜, 그래서 ‘아들들’이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에서 주님 하신 말씀입니다. Goods and truths, being conceived and born of the heavenly marriage, are therefore called “sons” by the Lord in Matthew:

 

37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38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He that soweth the good seed is the son of man; the field is the world and the seed are the sons of the kingdom. (마13:37-38)

 

구원하는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을 가리켜 주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요8:39)이라 하십니다. And the goods and truths of a saving faith he calls “sons of Abraham” (John 8:39);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They answered and said to Him, Abraham is our father. Jesus says to them, If you were Abraham’s children, you would do the works of Abraham. (요8:39)

 

후손’은 (255번 글에서 다룬 대로) 신앙을 가리키며, 그리고 ‘후손’에 속한 ‘자손’은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이기 때문입니다. for “seed” (as stated n. 255) denotes faith, wherefore “sons,” which are of the “seed,” are the goods and truths of faith.

 

이런 이유로, 또 주님은 그 자신을 ‘후손’으로 여기시기 때문에, 자신을 가리켜 ‘인자’, 즉, 교회의 신앙이라 하셨습니다. Hence also the Lord, as being himself the “seed,” called himself the “Son of man,” that is, the faith of the church.

 

 

265. ‘남편’이 래셔널을 상징한다는 것이 이 장 6절에 보면 있는데요, 거기에 보면,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즉, 그도 동의했음을 의미합니다. That by “man” [vir] is signified the rational appears from verse 6 of this chapter, in that the woman gave to her man with her, and he did eat, by which is meant his consent;

 

같은 내용이 158번 글, 아담에 관한 내용을 보아도 분명한데요, 거기 보면, 아담(남자, 사람, vir)은 지혜와 지성을 가진 사람을 의미합니다. and the same is also evident from what was said of the man in n. 158, where by him is meant one who is wise and intelligent.

 

하지만 여기 나오는 ‘남편’은 래셔널을 가리킵니다. 지식의 나무를 먹음으로써 지혜와 지성이 파괴되었고, 그 결과, 아무것도 안 남았기 때문이며, 이렇게 된 이유는, 외관상 그럴듯하게 지성을 흉내 내는 것으로 전락한 것이 바로 레셔널이기 때문입니다. Here however “man” denotes the rational, because in consequence of the destruction of wisdom and intelligence by 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 nothing else was left, for the rational is imitative of intelligence, being as it were its semblance.

 

 

266. 모든 법과 수칙(守則, precept)은 참된 출발점인 천적, 영적인 것에서 나오므로, 다음과 같은 사실, 곧, 이 결혼의 법칙 또한 그렇다는 것이며, 그러려면 아내는 반드시 남편의 사려분별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내는 이성으로 움직이는 남편과 달리 그녀의 고유본성에 속한 디자이어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As every law and precept comes forth from what is celestial and spiritual, as from its true beginning, it follows that this law of marriage does so, which requires that the wife, who acts from desire, which is of what is her own, rather than from reason, like the man, should be subject to his prudence.

 

2021-04-28(D4)-창세기(창3,16, AC.261-266), '여자, 고통, 임신, 자식, 남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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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And I will put enmity between thee and the woman, and between thy seed and her seed; he shall trample upon thy head, and thou shalt bruise his heel. (창3:15)

 

 

257. ‘뱀의 머리’가 악, 특히 자아 사랑의 지배를 의미한다는 것은, 그 본성을 보면 확실한데요, 이 본성은 단지 지배 자체에 대한 추구뿐 아니라, 심지어 지상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자 하며, That by the “head of the serpent” is meant the dominion of evil in general, and specifically of the love of self, is evident from its nature, which is so direful as not only to seek dominion, but even dominion over all things upon earth;

 

이 정도로는 양이 안 차 계속해서 이번에는 천국의 모든 것을, 더 나아가 급기야 바로 주님까지도!. 그리고도 여전히 만족을 모르는, 아주 끔찍한 본성입니다. nor does it rest satisfied with this, but aspires even to rule over everything in heaven, and then, not content with this, over the Lord himself, and even then it is not satisfied.

 

이것이 자아 사랑의 스파크가 일어나는 곳마다 그 안에 숨어 있는 것입니다. This is latent in every spark of the love of self.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하는 사실은, 사후(死後)에 규제가 풀려 하고픈 대로 마음껏 할 수 있게 되면, 이런 본성이 즉시 우리 안에서 거침없이 터져 나오며, 심지어 가장 높은 데까지 올라가고자 자라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If it were indulged, and freed from restraint, we should perceive that it would at once burst forth and would grow even to that aspiring height.

 

그러므로 분명한 것은, ‘’, 곧 자아 사랑이라는 이 악은 지배하는 삶을 정말 간절히 원하고, 그리고 이런 삶을 거절하는 사람들을 증오한다는 사실입니다. Hence it is evident how the “serpent,” or the evil of the love of self, desires to exercise dominion, and how much it hates all those who refuse its sway.

 

이것이 ‘뱀의 머리’의 의미, 곧 자신을 지극히 높이는 것이며, 그래서 주께서 ‘상하게’, 땅에까지 밟히게 하시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앞 절에서 기술한 대로, ‘배로 다니며 흙을 먹을지니라’의 삶인 것입니다. This is that “head of the serpent” which exalts itself, and which the Lord “tramples down,” even to the earth, that it may “go upon its belly, and eat dust,” as stated in the verse immediately preceding.

 

그래서 또한 이사야서에서는, ‘’, 혹은 ‘루시퍼’라 하는 ‘’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Thus also is described the “serpent” or “dragon” called “Lucifer” in Isaiah:

 

12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13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14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15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O Lucifer, thou hast said in thy heart, I will ascend the heavens, I will exalt my throne above the stars of God, and I will sit upon the mount of the congregation, in the sides of the north, I will ascend above the heights of the cloud, I will be made equal to the most high; yet thou shalt be brought down to hell, to the sides of the pit. (사14:12-15)

 

계시록에서는 ‘’, 혹은 ‘’을 그가 자기 머리를 어떤 방식으로 높이는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The “serpent” or “dragon” is also described in the Revelation in regard to the way in which he exalts his head:

 

3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 9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A great red dragon, having seven heads, and ten horns, and many diadems upon his heads; but he was cast into the earth. (계12:3, 9)

 

시편에서는, In David:

 

1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2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6뭇 나라를 심판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깨뜨리시며 7길 가의 시냇물을 마시므로 그의 머리를 드시리로다 The saying of Jehovah to my Lord, Sit thou at my right hand, until I make thine enemies thy footstool: Jehovah shall send the rod of thy strength out of Zion, he shall judge the nations, he hath filled with dead bodies, he hath bruised the head over much land; he shall drink of the brook in the way, therefore shall he lift up the head. (시110:1-2, 6-7)

 

 

258. ‘상하게 할 것이요’, 혹은 ‘상하게 할 것이니라’가 디프레션을 의미하며, 그 결과, ‘배로 다니며 흙을 먹을지니라’가 되게 하려는 것이 지금 분명한 것은, 본 절과 선행절들을 보면 됩니다. That by “trampling on” or “bruising” is meant depression, so as to compel it to “go on the belly and eat the dust,” is now evident from this and the preceding verses.

 

이사야서에서도 이와 같은데요, So likewise in Isaiah:

 

4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5높은 데에 거주하는 자를 낮추시며 솟은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셨도다 6발이 그것을 밟으리니 곧 빈궁한 자의 발과 곤핍한 자의 걸음이리로다 Jehovah hath cast down them that dwell on high; the exalted city he will humble it; he will humble it even to the earth; he will prostrate it even to the dust; the foot shall tread it down. (사26:4-6)

 

2보라 주께 있는 강하고 힘 있는 자가 쏟아지는 우박 같이, 파괴하는 광풍 같이, 큰 물이 넘침 같이 손으로 그 면류관을 땅에 던지리니 3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이 발에 밟힐 것이라 He shall cast down to the earth with the hand; they shall be trampled on by feet—a crown of prid. (사28:2-3)

 

 

259. ‘발꿈치’가 가장 자연적인 것, 혹은 육체적인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먼저 태곳적 사람들이 사람에 관한 다양한 것들을 어떤 식으로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을 때까지는 알 수가 없는 건데요, That by the “heel” is meant the lowest natural or corporeal cannot be known unless the way in which the most ancient people considered the various things in man is known.

 

그들은 그들의 천적, 영적인 일들을 사람의 머리와 얼굴로 언급했습니다. They referred his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to the head and face;

 

또한 이들로부터 나오는 선행과 자비는 가슴으로, what comes forth from these as charity and mercy, to the chest;

 

자연적인 것들은 발로, natural things, to the feet;

 

더 자연적인 것들은 발바닥으로, lower natural things, to the soles of the feet;

 

가장 자연적이고 육체적인 것들을 발꿈치로 언급했습니다. and the lowest natural and corporeal things, to the heel;

 

그들은 그저 그렇게 하기만 한 게 아니라 실제로도 그렇게 불렀습니다. nor did they merely refer to them, but also so called them.

 

사유(思惟, reason)의 가장 낮은 단계, 곧 기억-지식들의 경우 또한 그런데, 야곱이 단과 관련하여 예언한 데를 보면 그렇습니다. The lowest things of reason, that is, memory-knowledges, were also meant by what Jacob prophesied concerning Dan:

 

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Dan shall be a serpent upon the way, an adder upon the path, biting the horse’s heels, and his rider falls backward. (창49:17)

 

시편에서도 Also in David:

 

죄악이 나를 따라다니며 나를 에워싸는 환난의 날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 The iniquity of my heels hath compassed me about. (시49:5)

 

야곱 관련해서도 같은 식으로 그가 자궁으로부터 나올 때, In like manner by what is related of Jacob, when he came forth from the womb,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That his hand laid hold of Esau’s heel, whence he was called Jacob, (창25:26)

 

야곱’이라는 이름은 ‘발꿈치’에서 나오는데요, ‘야곱’으로 상징되는 유대 교회가 발꿈치에 상해를 입혔기 때문입니다. for the name “Jacob” comes from the “heel,” because the Jewish church, signified by “Jacob,” injured the heel.

 

뱀은 가장 낮은 자연적인 것들밖에는 상해를 입힐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독사의 일종이 아닌 한, 사람의 내면 자연적인 것들과, 더욱 그의 영적인 일들은 물론 더더욱 천적인 일들은 말이지요. 주님이 그것을 보존하시고 보관하시기 때문인데요, 이 리메인스에는 아직 주님의 지식까지는 없습니다. A serpent can injure only the lowest natural things, but unless it is a species of viper, not the interior natural things in man, still less his spiritual things, and least of all his celestial things, which the Lord preserves and stores up in man without his knowledge.

 

그렇게 주님으로 말미암아 보관된 것을 가리켜 말씀에서는 ‘남은 자’(리메인스, remains)라 하고 있습니다. What are thus stored up by the Lord are called in the Word “remains.

 

뱀이 감각적 원리와 자아 사랑을 가지고 홍수 전 사람들에게 있는 가장 낮은 자연적인 것들을 파괴한 유형, The mode in which the serpent destroyed those lowest natural things in the people before the flood, by the sensuous principle and the love of self;

 

또 유대인들 사이에서 감각적인 것들과 전통 및 하찮은 것들, 그리고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을 가지고 그들을 파괴한 유형, and among the Jews, by sensuous things, traditions, trifles, and by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그리고 오늘날도 그가 어떻게 감각과 기억-지식, 그리고 철학에 속한 것들을 가지고, 그리고 동시에 이런 같은 사랑들을 가지고 그들을 그동안 파괴해 왔으며, 계속해서 파괴하는지 하는 그 유형에 대한 설명을 지금부터 오직 주님의 신적 자비로 듣게 되실 것입니다. and how at this day he has destroyed and continues to destroy them by the things of sense, of memory-knowledge, and of philosophy, and at the same time by the same loves, sha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told hereafter.

 

 

260.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으로부터 분명한 것은 주님이 그들을 구원하시러 세상에 오심이 그 시대 교회에게 계시되었다는 것입니다. From what has been said it is evident that it was revealed to the church of that time that the Lord would come into the world to save them.

 

2021-04-27(D3)-창세기(창3,15, AC.257-260), '창3,15, 뱀의 머리, 상하게 하다, 발꿈치'.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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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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