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8-27(D1)-주일예배(2501, 눅12,35-40),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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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b6qJdAJUEes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37 주인이 와서 깨어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38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그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39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0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눅12:35-40)

 

 

영적 생명이 없는 자연적 생명은 자체로 잠든 것이지만, 영적 생명이 있는 자연적 생명은 깨어있는 것이다. 영적 생명이 있는 자연적 생명은 사람이 각자의 빛 안에서 진리를 깨닫고 그것에 따른 삶을 살 때 얻을 수 있다. Natural life, considered in itself, or without spiritual life, is nothing else but sleep; but natural life, in which there is spiritual life, is watchfulness; and this cannot be acquired otherwise than by truths, which are in their own light and in their own day, when man is in the life according to them. (AR.158)

 

 

마태복음 26장에는 주님께서 십자가의 시험을 앞두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들어가시는 모습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기도하러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셨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몸을 입으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어떤 시험이 기다리고 있을지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 시험을 결국 완벽하게 이기실 것도 아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제자들에게 내가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나와 함께 깨어있자 하셨을까요? 십자가의 고통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십자가를 지기까지 유대인들로부터 받을 폭행과 모욕이 두려워서였을까요? 물론 그러한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에 계실 때 주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육신을 입으신 인간이기도 하셨으니까요. 주님도 보통의 인간들처럼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 마지막 기도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이신 주님이 당신 안의 여호와를 향해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주님의 고민이 육신의 생명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겟세마네 동산과 십자가의 시험은 주님 자신의 싸움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인간 개개인의 시험에서 주님이 그들과 함께 싸우시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죽게 되었다고 하신 것은 주님 자신이 죽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시험 가운데서 죽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시험이 올 때 인간은 주님이 주신 자유의지를 수단으로 스스로 싸워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그를 위해 싸우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싸워보려고도 않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시험이 오더라도 담대히 맞서 싸울 수 있고 그때 주님이 그 싸움에 관여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인간이 시험 가운데서 넘어질 때 그렇게 죽을 것 같은 아픔을 느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내가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 하신 것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에서 비롯한 연민과 안타까움의 표현입니다. 제자들에게 깨어있으라 당부하신 주님께서 본문 3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허리는 무슨 뜻일까요? 고대의 사람들은 부부의 사랑이 허리에서 나온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허리의 영적 의미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등불은 진리 또는 믿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라는 것은 주님을 믿고 또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입으로만 주님을 믿고 행동은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며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사랑이 있는 믿음, 행동하는 믿음이라야 악을 밀어내고 선을 가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하시는 것은 깨어있으라는 말씀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36절에서 주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여기서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혼인집은 세상 혼인집이 아니라 영적인 혼인집인 천국을 의미합니다. 천국은 선과 진리 또는 믿음과 사랑의 결혼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볼 때,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오는 것은 주님이 천국을 통해 각 사람에게 오시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문을 두드리신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진리와 선의 유입(influx)을 뜻합니다. 주님은 선과 진리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항상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지만 정작 우리는 그 문을 열지 않습니다. 마음의 문을 열어야 주님으로부터 모든 선하고 진실한 것이 흘러들어오고 지옥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께 문을 열어드리는 것일까요? 그것에 대해 37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37 주인이 와서 깨어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깨어있는 사람이 되라 하십니다. 그래야 마음을 열고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깨어있는 것’에 대해 계시록 해설 187:3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깨어있는 사람은 영적으로 깨어있어 주님으로부터 영적 생명을 받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진리에 속한 지혜와 지성의 빛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영적 생명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진리에 관한 한 캄캄한 어둠 속에 있다. 그러므로 전자는 깨어있는 것이고 후자는 잠자는 것이다.

 

주님은 깨어있는 사람에게 오시며, 그때 허리에 띠를 두르고 그들에게 하늘의 양식을 먹여주십니다. 말씀에서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는 것은 그런 의미로 하신 말씀입니다. 38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8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그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말씀에서 숫자 3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 과정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주인이 이경에나 삼경에 오시는 것은, 주님은 개인의 영적 상태를 처음부터 끝까지 주시하시면서 깨어있을 때 가르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깨어있는 종들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 여기 이경, 삼경하는 ‘경’(更)은 일몰부터 일출을 저녁 7시부터 두 시간씩 다섯으로 나눠 부르는 것으로, 각각 초경, 이경, 삼경... 식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경은 저녁 7시부터 밤 9시, 이경은 밤 9시부터 밤 11시, 삼경은 밤 11부터 새벽 1시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향해 항상 깨어있기란 쉽지 않습니다. 보통은 졸기도 하고 깊은 잠에 빠지기도 하지요. 신앙인들이 잠잘 때 주님은 수시로 그들의 마음을 두드리시며 깨어있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기도하시는 동안 세 번 내려오셔서 제자들이 깨어있는지 살피셨습니다. 그리고 깊이 잠든 것을 보시고는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며 안타까워하셨지요.

 

주님은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시는데 오래도록 잠에서 깨어나지 못할 때 신앙인들에게 시험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지옥의 영들에 의해 그동안 가지고 있던 선한 것, 진실한 것들이 파괴됩니다. 말씀에는 그것을 도둑이 들어 집을 뚫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도둑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데 우리는 잠만 잡니다. 그래서 본문 39절과 40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39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0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주님은 지옥의 도둑들이 언제 닥칠지 잘 아십니다. 그럼에도 말씀에는 집 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하십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뭘까요? 주님은 계속 문을 두드리시는데 사람들은 아무 준비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맞으려면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 준비란 어떤 것입니까? 주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순진과 겸손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문을 열어도 여는 것이 아닙니다. 순진과 겸손의 정도가 주님이 원하시는 만큼 될 때 주님과 인간 사이 접점이 생기고 교류가 일어납니다. 그때가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그렇고 오늘 말씀에서도 그렇고 제자들에게 늘 깨어있으라 하셨습니다. 깨어있다는 것은 믿음과 사랑을 잃지 않고 잘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말씀을 가까이하고, 한 편으로는 죄를 고백하고 악을 멀리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말씀을 읽기보다 세상 소식과 재미에 빠져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먼저 보는 신앙인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깨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깨어있을 때 주님으로부터 순진과 겸손을 비롯, 모든 종류의 선의와 근면, 순결한 부부 사랑이 흘러들어옵니다. 반대로 잠들어 있을 때는 자기를 높이는 마음과 미움과 나태와 온갖 종류의 정욕이 지옥으로부터 흘러들어옵니다. 매일 말씀을 읽고 반성을 하는데도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실수를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니 하물며 세상사에만 관심을 두고 자아의 욕심대로만 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영적 변화가 없습니다. 오히려 교회에 대한 처음 사랑과 이웃에 대한 순수한 정을 잃게 됩니다. 말씀에서는 그것을 도둑이 집을 뚫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우리의 그런 문제들에 대해 두 번 말씀하셨습니다. 한번은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무슨 일을 하든 속 사람으로부터 해야 하는데 겉 사람이 이런 속 사람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는 그들의 눈이 피곤하다 하셨습니다. 눈은 영적인 지성, 또는 분별력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눈이 피곤하다는 것은 영적인 분별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영적 분별력이 없는 사람은 자기는 옳은 일을 한다 하는데 그것이 남에게는 폐를 끼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잘못을 하고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깨어있음으로 해서 해결될 수 있습니다. 늘 말씀을 가까이하고 아는 만큼 행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영적 지성이 밝아지고,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게 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계3:3)

 

아멘

 

 

 

원본

2020-07-26(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8-27(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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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8-13(D1)-주일예배(2499, 눅12,13-21),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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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E02g6WgaH1k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라

 

 

13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눅12:13-21)

 

 

쓰임(uses)이란 자신과 자신의 소유(one’s own)를 위한 음식과 의복, 주거 같은 생활의 필요들을 의미할 뿐 아니라 자신의 나라, 공동체, 동료 시민들의 선 또한 뜻합니다. 사업도 사업 자체가 궁극적 목적일 뿐, 돈은 그저 중간, 부차적일 때, 그리고 사기(fraud)와 악행(bad practices)을 죄로 알고 피하며 싫어할 때는 선이 됩니다. 하지만 반대로 돈이 궁극의 목적이요, 사업은 그저 중간, 부차적일 때는 다릅니다. 이럴 경우, 그런 사업은 탐욕이며 모든 악의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DP.220:11) By uses not only the necessities of life are meant, such as food, raiment, and habitation for oneself and one’s own, but also the good of one’s country, community, and fellow citizens. Business is such a good when it is the end-love and money is a mediate, subservient love, as it is only when the businessman shuns and is averse to fraud and bad practices as sin. It is otherwise when money is the end-love and business the mediate, subservient love. For this is avarice, which is a root of evils (on this see Luke 12:15 and the parable on it, verses 16–21). (DP.220:11)

 

 

다음은 마태복음 20장 20절 이하에 나오는 에피소드입니다.

 

20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22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23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24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25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20:20-28)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어렵고도 험난한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겠느냐? 라고 물으셨는데, 요한 형제는 ‘할 수 있나이다’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그들에게 천국은 왕이신 주님과 함께 살면서 모든 사람으로부터 추앙을 받는 곳이었습니다. 요한의 어머니가 아들들을 주님에게 부탁했을 때 다른 제자들이 분하게 여긴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들이 천국의 영화를 모두 독점하려 하는구나! 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요한의 어머니가 주님께 아들들을 부탁한 것이나, 다른 제자들이 그것을 분하게 여긴 것이나 모두 그들 마음속에 탐심(貪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이 가장 멀리해야 할 것이 바로 탐심입니다. 탐심은 다른 사람들보다 높아지려는 마음이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웃의 것을 빼앗아 자기 소유로 만들려는 마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탐심은 모든 악의 근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성난 제자들을 향해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말씀하심으로 제자들 가운데 불기 시작한 이 탐심을 잠재우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탐심 또는 탐욕과 관련된 말씀인데요, 본문 13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3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말씀에서 형제는 이웃을 뜻합니다. 그리고 유산은 주님이 주시는 생명인 선과 진리를 뜻합니다. 그렇다면 무리 중 하나가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라고 말한 것은 무슨 뜻일까요?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의 믿음을 시샘하는 모습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어떤 사람은 사랑이 많아 보이고, 어떤 사람은 진리에 대한 이해가 특별히 깊다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경우 자기도 모르게 시샘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앞에서 주님의 제자들이 요한의 형제를 시샘했던 것과 비슷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본문에서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라는 것은, ‘주님, 저 사람에게는 사랑도 주시고, 진리도 많이 주시면서 왜 저에게는 주시지 않습니까?’ 하는 일종의 시샘이며 불평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십니다. 14절,

 

14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영적 의미로 재판장은 저주하거나, 또는 구원하는 자를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옥에 보내거나 천국에 보내는 자’가 재판장인 것입니다. 그러면 나누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사람을 차별하거나 편애하는 자가 나누는 자입니다. 사람을 편애하는 것은 결국 사람들 사이를 나누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주님은 재판장도 아니시고, 나누는 자도 아니십니다. 주님은 어느 누구도 저주하지 않으시며, 어느 누구도 더 사랑하거나 덜 사랑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되물으셨습니다. 누군가를 시샘하는 것은 결국 주님이 공평하지 않으시다 불평하는 것과 같습니다. 영적인 면에 있어서나 자연적인 면에 있어서 모든 사람의 능력이 모두 똑같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신 분인 까닭은,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고, 사후에 각자의 쓰임새에 따라 천국에서 봉사할 기회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저마다의 역량에 따라 정해지는 것입니다. 주님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그만큼 주님을 더 가까이, 더 많이 누리는 것이고, 주님을 덜 사랑한 사람은 그 역시 그가 주님을 사랑한 그만큼만 주님과의 거리며 누림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더 큰 일을 하고, 더 높은 지위에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나 천국에서 주님과 이웃을 위해 유익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일을 통해 무한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은 각 사람이 가진 잔의 크기 만큼만 허락하시되 넘치도록 허락하십니다. 누구나 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고백하도록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절대적으로 공평하신 분입니다. 탐심은 내가 남보다 더 큰 일을 하고, 더 존경받아야만 한다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다 보니 모두들 거리의 청소부보다 시장이나 국회의원이 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실 때는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중요합니다. 단지 그들이 하는 역할만, 그리고 역량, 즉 주님을 사랑하는 정도만 다를 뿐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데 학력이나 배경, 지위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각 사람에게 주어진 역할에 따라 주님과 이웃을 위해 봉사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일을 통해 주님과 함께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각 사람에게 주어진 역할은 그가 자기 역량 가지고 감당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각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최선의 것으로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형의 유산을 원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5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주님께서는 사람의 진정한 생명인 선하고 진실함이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고 하십니다. 소유가 넉넉하다, 많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위가 높거나 돈이 많은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보통은 세상의 유한한 삶을 좀 더 편하게 사는 데나 필요한 것이지 영원한 삶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천국에서는 이웃을 섬기는 자가 높은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천국에서는 주님의 신적 진리를 사랑하는 자가 이웃을 사랑하는 자이며, 많이 사랑할수록 그는 그 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 탐심은 사람을 살리는 약이 아니고 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천국을 향해서는 장님이 되게 하고, 대신 이 세상에만 집중, 집착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탐심을 물리치라고 하셨습니다. 탐심에 대해 주님은 다음과 같이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16절로 19절입니다.

 

16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말씀에서 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으며, 스스로 진리를 많이 안다 자부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서 알 수 있듯 그들은 겉으로만 부자이지 속으로는, 내적으로는 부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말씀에 관한 지식일 뿐 진정한 진리, 즉 말씀을 실천할 때 만나게 되는, 그 안에 선이신 주님이 계시는 진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진정한 진리가 없는 이유는 속 사람이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속 사람이 주님을 향해 열려 있어야 주님으로부터 영적인 빛이 흘러 들어와 말씀 깊은 곳에 감추어진 진리를 볼 수가 있는데, 속사람이 닫혀 있으니 진리를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부자는 말씀에 대해 많이 안다 생각하고, 그것을 가지고 천국에서 영원히 먹고 마시며 살 수 있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나오고 인간한테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식을 가지고는 천국에서 영원히는 고사, 살 수조차 없습니다. 주님께서 부자에게 말씀하십니다.

 

20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주님은 부자에게 어리석은 자라 하시고,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겠다 하십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인간의 욕심으로 이룬 것은 그것이 지식이든, 물질이든, 명예든, 사람을 영원히 살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마다 삶의 목표가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에 사는 동안 행복하게 사는 것이 목표이고, 우리 같은 신앙인들은 사후에 천국에서 영원히 복되게 사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이 포기하지 못하는 한 가지가 있는데요, 그것이 바로 탐심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세상에서나 나중에 천국에 가서나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려 하고, 큰일 하기를 원합니다. 오죽하면 주님의 제자들도 서로를 비교하며 시샘했겠습니까? 누구에게나 잠재적으로 그런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의 인척 가운데 한 분은 어릴 적부터 공부를 아주 잘했다고 합니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전문직 자격증을 취득, 큰 회사에서 임원으로 일한 후에는 미국으로 이민을 갔는데, 그곳에서도 성공, 큰 부를 이뤘다고 합니다. 그는 늘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을 바에는 제일 잘 믿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든 1등이 되어야 한다고 말이지요... 주님의 나라에도 1등이 있고 2등이 있을까요? 영적인 일이든 세상 일이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무슨 일에나 최고가 되려고 하는 것은 자칫 탐심일 수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일 자체를 위해 해야지 최고가 되려는 마음, 일을 이용해 마음속 숨은 목표를 이루려고 하면 안 됩니다. 나라를 사랑하기 위해 정치인이 되려고 해야지, 자신의 부와 명예 따위를 이루기 위해 정치를 하려고 하면 안 되듯 말이지요. 탐심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탐심이야말로 삶의 원동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늘 도둑이 소도둑이 된다는 말처럼 탐심을 그대로 두면 거듭남을 방해하는 거대한 악이 됩니다.

 

성(聖) 문서에 보면, 탐심이 아주 많은 사람들은 겉으로는 재물에 관심이 없는 듯 보이고, 자신의 부를 자랑하지도 않으며 교만한 행동을 하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몸이나 의복, 음식 같은 것에 관심이 없고 오로지 돈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고 돈을 소유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다른 사람 위에 올라서는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고 합니다. 탐심 안에는 그렇게 교활함과 천박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탐심을 그대로 두면 속 사람이 닫히고 나중에는 선이 무엇이고 진리가 무엇인지도 모르게 됩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8:44) 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런 까닭입니다. 탐심을 그대로 두면 자기의 이익을 위해 이웃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 끝절입니다.

 

21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하신 것입니다. 사소한 일을 하더라도 정성껏 하고 그 일로 인해 이웃과 사회에 보탬이 되고자 할 때 주님께서는 그 일을 큰일로 여기십니다. 주님께서 인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심으로써 섬기는 자의 본이 되신 것처럼 우리도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라 이웃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27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20:27-28)

 

아멘

 

원본

2020-06-28(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8-13(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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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8-06(D1)-주일예배(2498, 눅12,8-12),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의 속뜻'.pdf
0.37MB

https://youtu.be/s-FaLBfUOmw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의 속뜻

 

 

8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9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10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11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12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눅12:8-12)

 

 

우리나라에서 시민운동은 대략 1980년대에 학생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시민들의 정치의식이 높아졌고, 당시 운동권에 있던 사람들이 대거 시민단체를 만들거나 참여하면서 시민운동이 활성화되었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직업적인 시민운동가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시민운동과 생계 활동이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그렇고요, 그런 활동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다진 후, 결국 정계에 진출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최근 윤석열 정부가 들여다보고 있는 바로는 우리나라 시민운동 거의 대부분이 사실은 다 돈과 관련된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런 것들이 어쩐지 순수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시민운동의 태생적 역할은 정부나 지자체에 대한 비판입니다만...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두 가지 덕목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엄격해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남을 겨누는 진리 안에 반드시 사랑을 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진리는 무자비한 칼과 같아서 세상을 분열시키고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이상적인 영적 시민운동가이셨습니다. 오늘 본문 8절, 9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8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9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주님을 시인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진리를 받아들이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주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고 따르는 것이고요, 오늘날에는 말씀의 속뜻으로 오신 주님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이 주님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마태복음 24장에서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30절) 하셨는데, 여기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이 바로 말씀의 속뜻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해야 한다 하셨습니다. 주님은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여기서 ‘사람’은 그 속뜻으로는, 각자의 내면에 있는 속 사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겉 사람만 가지고 하면 안 되고, 반드시 속 사람으로부터 해야 하는데요, 그것이 사람 앞에서 주님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와 관련해 ‘계시록 해설’ 794번 글 3번 항은,

 

사람은 영적인 마음과 자연적 마음 두 마음을 가지고 있다. 영적 마음은 속 사람이라 불리는 것이고, 자연적 마음은 겉 사람이라 불리는 것이다. 속 사람은 천국과 연결되어 있고, 겉 사람은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통해 하는 일은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해 하는 것이고, 속 사람과 무관하게 겉 사람을 통해 하는 일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하는 것이다. (AE.794:3)

 

한마디로 말하면, 무슨 일이든지 속 사람으로부터 해야 진실하며,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옳은 일을 한다고 하면서 놓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속 사람이 아닌, 겉 사람으로부터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을 시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에 대한 시인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시인하실 때,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진실합니다. 그러나 부인하신다면 그 일은 언제나 거짓이 됩니다.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10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함을 받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하십니다. 주님을 ‘인자’(人子, Son of Man, 사람의 아들)라고 부를 때, 인자는 주님의 본질인 선과 진리 중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인자는 진리의 측면에서 주님을 뜻하고, 구체적으로는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를 뜻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하나님의 아들’은 선의 측면에서 주님을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자를 거역한다’는 것은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를 잘못 해석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에 대해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천국의 천사들이나 완전히 거듭난 사람이 아니면 말씀의 진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의 의미를 얼마든지 잘못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잘못 해석하더라도 나쁜 의도가 아니라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하십니다. ‘성령’은 천국 천사들의 진리인 말씀의 속뜻, 곧 내적 의미(inner meaning)를 뜻합니다. 성령이 말씀의 내적 의미를 뜻하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너희에게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보내겠다’고 하신 것으로, 그리고 부활하신 다음 제자들에게 ‘너희가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을 보내시겠다, 또는 받으라 하신 것은 ‘감추어졌던 내적 진리를 이제 드러내 보여 주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말씀의 속뜻으로 오신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며,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임의로 왜곡함으로써 내적 진리까지도 왜곡하고 변질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의 모든 구절 안에는 선과 진리 간 결혼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선 또는 진리를 임의로 없애거나 분리하는 것은 선과 진리의 결혼이라는 말씀의 생명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일이 되는 것이고,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의 내적 진리와 관련하여 ‘계시록 해설’ 778번 글 4번 항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진정한 선과 진정한 진리는 말씀의 영적 의미 안에 들어있다. 그것들이 말씀의 자연적 의미 안에 있을 때는 모두 옷을 입고 있고, 몇 군데만 옷을 입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자연적 의미 안에 있는 선과 진리들을 우리는 외견상의 선이요 진리라고 부른다. (AE.778.4)

 

이 말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통해서는 진정한 선과 진리의 일부만 볼 수 있고, 전체는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 안에서는 진정한 선과 진리가 대개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가리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말씀 속에 진정한 선과 진리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부분은 어느 곳일까요? 예를 들면 마태복음 7장 19절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니라’라고 말씀하신 부분이라든가, 마태복음 7장 21절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문자적인 뜻만으로도 그것이 믿음과 삶의 행위가 함께 있어야 한다는 뜻임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요한복음 14장 6절에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세상에 오신 주님이 곧 진리이며 생명이신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뜻인데, 문자적인 뜻만으로도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은 인간의 구원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내용은 문자적인 의미를 통해서도 누구나 알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를 해석할 때, 구원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부분은 잘못 해석하면 안 됩니다. 성령을 거역하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독교회 안에서도 말씀의 문자적인 진리와 내적 진리가 서로 충돌할 가능성은 항상 있다고 하겠습니다. 실제로 문자적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 내적 진리 또는 내적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일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들은 말씀의 내적 진리를 이단의 진리라고 비난합니다. 거짓 진리를 진리로 굳게 믿는 사람들을 설득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주님께서 그런 사정을 아시고, 11절 이하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1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12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말씀에서 회당은 교회의 교리를 뜻합니다. 주님 당시 회당은 말씀을 가르치고, 말씀에 관한 상이한 해석들을 조정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회당이나 권세 있는 자에게 끌려가는 것은 참된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인간의 지식으로 무장한 거짓 교리의 신봉자들과 교리적 논쟁을 벌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고, 그때 그 순간 할 말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가끔 내적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문자적인 진리를 앞세워 공격해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들의 현란한 지식과 화술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두려움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내일을 걱정하는 사람들에 대해 ‘천국의 비밀’ 8478번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일 일을 걱정하는 것은 현재 주어진 운명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신을 믿는 사람들이 그런 걱정을 한다.’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내일 일에 대해 생각하더라도 걱정하지 않는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든 얻지 못하든 우울해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에 만족한다. 부를 얻거나 명예를 얻는다고 다른 사람보다 가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고, 가난해도 슬퍼하지 않으며, 비천한 상황이 와도 낙담하거나 기죽지 않는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때그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영원한 행복의 상태로 나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에게 내일 일을 걱정하는 것은 그렇게 좋은 습관이 아닙니다. 다른 교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공격하고 시험할 수 있습니다. 그때 마땅한 말이 떠오르면 말하고, 그렇지 않으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를 뜨면 됩니다. 우리에게 닥친 모든 일들을 영원한 행복으로 이끄는 수단으로 사용하신다는 주님의 섭리를 믿으면서 말입니다. 주님께서 만나를 내려주시면서 그날 먹을 것만, 즉 일용할 양식만 거두고, 내일까지 남겨 두지 말라고 하신 것은 속뜻으로는 그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입으로는 정의와 공정을 외치면서 속으로는 정의롭지도 공정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판을 치는 이유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기의 속 사람의 소리, 영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겨누는 진리의 칼로 자신의 환부를 도려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람 앞에서 주님을 시인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무슨 일을 하더라도 겉 사람으로부터 하지 말고 속 사람으로부터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실합니다. 주님은 또 ‘성령을 거역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거역하는 죄는 말씀을 안다는 사람들이 저지르기 쉬운 죄입니다. 그들이 말씀의 문자적인 뜻을 넘어서 내적 진리까지 훼손시키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문자적인 의미를 잘못 해석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적 진리를 훼손하고 변질시키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영계 체험’ 2706번 글을 보면, ‘천사들은 내적 진리에 반하는 욕망의 습관을 끊지 못하는 것도 성령을 거역하는 죄로 이해한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새 교회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더 해당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내적 진리에 대해 비교적 더 많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깊이, 그리고 많이 아는 사람들의 책임이 크다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내적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내일을 걱정하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고, 모든 일 가운데서 섭리하시는 주님을 믿지 못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매 순간 자기에게 닥치는 일들이 영원한 행복을 위한 주님의 섭리임을 믿어야 합니다. 좋은 일이 있다고 우쭐대거나 나쁜 일이 있다고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일을 담담하게 견딘다면 결국 평화와 행복의 길이 열립니다. 우리 모두 속 사람으로부터 주님을 시인하고 성령을 거역하지 않으며, 내일 일을 걱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메시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 (마6:33-34)

 

아멘

원본

2020-05-24(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8-0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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