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8-13(D1)-주일예배(2499, 눅12,13-21),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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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라

 

 

13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눅12:13-21)

 

 

쓰임(uses)이란 자신과 자신의 소유(one’s own)를 위한 음식과 의복, 주거 같은 생활의 필요들을 의미할 뿐 아니라 자신의 나라, 공동체, 동료 시민들의 선 또한 뜻합니다. 사업도 사업 자체가 궁극적 목적일 뿐, 돈은 그저 중간, 부차적일 때, 그리고 사기(fraud)와 악행(bad practices)을 죄로 알고 피하며 싫어할 때는 선이 됩니다. 하지만 반대로 돈이 궁극의 목적이요, 사업은 그저 중간, 부차적일 때는 다릅니다. 이럴 경우, 그런 사업은 탐욕이며 모든 악의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DP.220:11) By uses not only the necessities of life are meant, such as food, raiment, and habitation for oneself and one’s own, but also the good of one’s country, community, and fellow citizens. Business is such a good when it is the end-love and money is a mediate, subservient love, as it is only when the businessman shuns and is averse to fraud and bad practices as sin. It is otherwise when money is the end-love and business the mediate, subservient love. For this is avarice, which is a root of evils (on this see Luke 12:15 and the parable on it, verses 16–21). (DP.220:11)

 

 

다음은 마태복음 20장 20절 이하에 나오는 에피소드입니다.

 

20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22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23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24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25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20:20-28)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어렵고도 험난한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겠느냐? 라고 물으셨는데, 요한 형제는 ‘할 수 있나이다’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그들에게 천국은 왕이신 주님과 함께 살면서 모든 사람으로부터 추앙을 받는 곳이었습니다. 요한의 어머니가 아들들을 주님에게 부탁했을 때 다른 제자들이 분하게 여긴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들이 천국의 영화를 모두 독점하려 하는구나! 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요한의 어머니가 주님께 아들들을 부탁한 것이나, 다른 제자들이 그것을 분하게 여긴 것이나 모두 그들 마음속에 탐심(貪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이 가장 멀리해야 할 것이 바로 탐심입니다. 탐심은 다른 사람들보다 높아지려는 마음이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웃의 것을 빼앗아 자기 소유로 만들려는 마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탐심은 모든 악의 근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성난 제자들을 향해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말씀하심으로 제자들 가운데 불기 시작한 이 탐심을 잠재우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탐심 또는 탐욕과 관련된 말씀인데요, 본문 13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3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말씀에서 형제는 이웃을 뜻합니다. 그리고 유산은 주님이 주시는 생명인 선과 진리를 뜻합니다. 그렇다면 무리 중 하나가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라고 말한 것은 무슨 뜻일까요?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의 믿음을 시샘하는 모습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어떤 사람은 사랑이 많아 보이고, 어떤 사람은 진리에 대한 이해가 특별히 깊다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경우 자기도 모르게 시샘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앞에서 주님의 제자들이 요한의 형제를 시샘했던 것과 비슷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본문에서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라는 것은, ‘주님, 저 사람에게는 사랑도 주시고, 진리도 많이 주시면서 왜 저에게는 주시지 않습니까?’ 하는 일종의 시샘이며 불평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십니다. 14절,

 

14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영적 의미로 재판장은 저주하거나, 또는 구원하는 자를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옥에 보내거나 천국에 보내는 자’가 재판장인 것입니다. 그러면 나누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사람을 차별하거나 편애하는 자가 나누는 자입니다. 사람을 편애하는 것은 결국 사람들 사이를 나누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주님은 재판장도 아니시고, 나누는 자도 아니십니다. 주님은 어느 누구도 저주하지 않으시며, 어느 누구도 더 사랑하거나 덜 사랑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되물으셨습니다. 누군가를 시샘하는 것은 결국 주님이 공평하지 않으시다 불평하는 것과 같습니다. 영적인 면에 있어서나 자연적인 면에 있어서 모든 사람의 능력이 모두 똑같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신 분인 까닭은,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고, 사후에 각자의 쓰임새에 따라 천국에서 봉사할 기회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저마다의 역량에 따라 정해지는 것입니다. 주님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그만큼 주님을 더 가까이, 더 많이 누리는 것이고, 주님을 덜 사랑한 사람은 그 역시 그가 주님을 사랑한 그만큼만 주님과의 거리며 누림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더 큰 일을 하고, 더 높은 지위에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나 천국에서 주님과 이웃을 위해 유익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일을 통해 무한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은 각 사람이 가진 잔의 크기 만큼만 허락하시되 넘치도록 허락하십니다. 누구나 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고백하도록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절대적으로 공평하신 분입니다. 탐심은 내가 남보다 더 큰 일을 하고, 더 존경받아야만 한다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다 보니 모두들 거리의 청소부보다 시장이나 국회의원이 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실 때는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중요합니다. 단지 그들이 하는 역할만, 그리고 역량, 즉 주님을 사랑하는 정도만 다를 뿐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데 학력이나 배경, 지위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각 사람에게 주어진 역할에 따라 주님과 이웃을 위해 봉사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일을 통해 주님과 함께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각 사람에게 주어진 역할은 그가 자기 역량 가지고 감당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각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최선의 것으로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형의 유산을 원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5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주님께서는 사람의 진정한 생명인 선하고 진실함이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고 하십니다. 소유가 넉넉하다, 많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위가 높거나 돈이 많은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보통은 세상의 유한한 삶을 좀 더 편하게 사는 데나 필요한 것이지 영원한 삶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천국에서는 이웃을 섬기는 자가 높은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천국에서는 주님의 신적 진리를 사랑하는 자가 이웃을 사랑하는 자이며, 많이 사랑할수록 그는 그 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 탐심은 사람을 살리는 약이 아니고 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천국을 향해서는 장님이 되게 하고, 대신 이 세상에만 집중, 집착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탐심을 물리치라고 하셨습니다. 탐심에 대해 주님은 다음과 같이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16절로 19절입니다.

 

16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말씀에서 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으며, 스스로 진리를 많이 안다 자부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서 알 수 있듯 그들은 겉으로만 부자이지 속으로는, 내적으로는 부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말씀에 관한 지식일 뿐 진정한 진리, 즉 말씀을 실천할 때 만나게 되는, 그 안에 선이신 주님이 계시는 진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진정한 진리가 없는 이유는 속 사람이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속 사람이 주님을 향해 열려 있어야 주님으로부터 영적인 빛이 흘러 들어와 말씀 깊은 곳에 감추어진 진리를 볼 수가 있는데, 속사람이 닫혀 있으니 진리를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부자는 말씀에 대해 많이 안다 생각하고, 그것을 가지고 천국에서 영원히 먹고 마시며 살 수 있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나오고 인간한테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식을 가지고는 천국에서 영원히는 고사, 살 수조차 없습니다. 주님께서 부자에게 말씀하십니다.

 

20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주님은 부자에게 어리석은 자라 하시고,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겠다 하십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인간의 욕심으로 이룬 것은 그것이 지식이든, 물질이든, 명예든, 사람을 영원히 살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마다 삶의 목표가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에 사는 동안 행복하게 사는 것이 목표이고, 우리 같은 신앙인들은 사후에 천국에서 영원히 복되게 사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이 포기하지 못하는 한 가지가 있는데요, 그것이 바로 탐심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세상에서나 나중에 천국에 가서나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려 하고, 큰일 하기를 원합니다. 오죽하면 주님의 제자들도 서로를 비교하며 시샘했겠습니까? 누구에게나 잠재적으로 그런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의 인척 가운데 한 분은 어릴 적부터 공부를 아주 잘했다고 합니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전문직 자격증을 취득, 큰 회사에서 임원으로 일한 후에는 미국으로 이민을 갔는데, 그곳에서도 성공, 큰 부를 이뤘다고 합니다. 그는 늘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을 바에는 제일 잘 믿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든 1등이 되어야 한다고 말이지요... 주님의 나라에도 1등이 있고 2등이 있을까요? 영적인 일이든 세상 일이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무슨 일에나 최고가 되려고 하는 것은 자칫 탐심일 수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일 자체를 위해 해야지 최고가 되려는 마음, 일을 이용해 마음속 숨은 목표를 이루려고 하면 안 됩니다. 나라를 사랑하기 위해 정치인이 되려고 해야지, 자신의 부와 명예 따위를 이루기 위해 정치를 하려고 하면 안 되듯 말이지요. 탐심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탐심이야말로 삶의 원동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늘 도둑이 소도둑이 된다는 말처럼 탐심을 그대로 두면 거듭남을 방해하는 거대한 악이 됩니다.

 

성(聖) 문서에 보면, 탐심이 아주 많은 사람들은 겉으로는 재물에 관심이 없는 듯 보이고, 자신의 부를 자랑하지도 않으며 교만한 행동을 하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몸이나 의복, 음식 같은 것에 관심이 없고 오로지 돈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고 돈을 소유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다른 사람 위에 올라서는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고 합니다. 탐심 안에는 그렇게 교활함과 천박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탐심을 그대로 두면 속 사람이 닫히고 나중에는 선이 무엇이고 진리가 무엇인지도 모르게 됩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8:44) 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런 까닭입니다. 탐심을 그대로 두면 자기의 이익을 위해 이웃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 끝절입니다.

 

21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하신 것입니다. 사소한 일을 하더라도 정성껏 하고 그 일로 인해 이웃과 사회에 보탬이 되고자 할 때 주님께서는 그 일을 큰일로 여기십니다. 주님께서 인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심으로써 섬기는 자의 본이 되신 것처럼 우리도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라 이웃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27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20:27-28)

 

아멘

 

원본

2020-06-28(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8-13(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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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8-06(D1)-주일예배(2498, 눅12,8-12),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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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s-FaLBfUOmw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의 속뜻

 

 

8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9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10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11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12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눅12:8-12)

 

 

우리나라에서 시민운동은 대략 1980년대에 학생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시민들의 정치의식이 높아졌고, 당시 운동권에 있던 사람들이 대거 시민단체를 만들거나 참여하면서 시민운동이 활성화되었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직업적인 시민운동가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시민운동과 생계 활동이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그렇고요, 그런 활동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다진 후, 결국 정계에 진출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최근 윤석열 정부가 들여다보고 있는 바로는 우리나라 시민운동 거의 대부분이 사실은 다 돈과 관련된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런 것들이 어쩐지 순수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시민운동의 태생적 역할은 정부나 지자체에 대한 비판입니다만...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두 가지 덕목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엄격해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남을 겨누는 진리 안에 반드시 사랑을 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진리는 무자비한 칼과 같아서 세상을 분열시키고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이상적인 영적 시민운동가이셨습니다. 오늘 본문 8절, 9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8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9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주님을 시인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진리를 받아들이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주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고 따르는 것이고요, 오늘날에는 말씀의 속뜻으로 오신 주님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이 주님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마태복음 24장에서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30절) 하셨는데, 여기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이 바로 말씀의 속뜻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해야 한다 하셨습니다. 주님은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여기서 ‘사람’은 그 속뜻으로는, 각자의 내면에 있는 속 사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겉 사람만 가지고 하면 안 되고, 반드시 속 사람으로부터 해야 하는데요, 그것이 사람 앞에서 주님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와 관련해 ‘계시록 해설’ 794번 글 3번 항은,

 

사람은 영적인 마음과 자연적 마음 두 마음을 가지고 있다. 영적 마음은 속 사람이라 불리는 것이고, 자연적 마음은 겉 사람이라 불리는 것이다. 속 사람은 천국과 연결되어 있고, 겉 사람은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통해 하는 일은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해 하는 것이고, 속 사람과 무관하게 겉 사람을 통해 하는 일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하는 것이다. (AE.794:3)

 

한마디로 말하면, 무슨 일이든지 속 사람으로부터 해야 진실하며,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옳은 일을 한다고 하면서 놓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속 사람이 아닌, 겉 사람으로부터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을 시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에 대한 시인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시인하실 때,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진실합니다. 그러나 부인하신다면 그 일은 언제나 거짓이 됩니다.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10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함을 받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하십니다. 주님을 ‘인자’(人子, Son of Man, 사람의 아들)라고 부를 때, 인자는 주님의 본질인 선과 진리 중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인자는 진리의 측면에서 주님을 뜻하고, 구체적으로는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를 뜻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하나님의 아들’은 선의 측면에서 주님을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자를 거역한다’는 것은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를 잘못 해석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에 대해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천국의 천사들이나 완전히 거듭난 사람이 아니면 말씀의 진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의 의미를 얼마든지 잘못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잘못 해석하더라도 나쁜 의도가 아니라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하십니다. ‘성령’은 천국 천사들의 진리인 말씀의 속뜻, 곧 내적 의미(inner meaning)를 뜻합니다. 성령이 말씀의 내적 의미를 뜻하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너희에게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보내겠다’고 하신 것으로, 그리고 부활하신 다음 제자들에게 ‘너희가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을 보내시겠다, 또는 받으라 하신 것은 ‘감추어졌던 내적 진리를 이제 드러내 보여 주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말씀의 속뜻으로 오신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며,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임의로 왜곡함으로써 내적 진리까지도 왜곡하고 변질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의 모든 구절 안에는 선과 진리 간 결혼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선 또는 진리를 임의로 없애거나 분리하는 것은 선과 진리의 결혼이라는 말씀의 생명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일이 되는 것이고,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의 내적 진리와 관련하여 ‘계시록 해설’ 778번 글 4번 항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진정한 선과 진정한 진리는 말씀의 영적 의미 안에 들어있다. 그것들이 말씀의 자연적 의미 안에 있을 때는 모두 옷을 입고 있고, 몇 군데만 옷을 입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자연적 의미 안에 있는 선과 진리들을 우리는 외견상의 선이요 진리라고 부른다. (AE.778.4)

 

이 말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통해서는 진정한 선과 진리의 일부만 볼 수 있고, 전체는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 안에서는 진정한 선과 진리가 대개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가리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말씀 속에 진정한 선과 진리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부분은 어느 곳일까요? 예를 들면 마태복음 7장 19절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니라’라고 말씀하신 부분이라든가, 마태복음 7장 21절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문자적인 뜻만으로도 그것이 믿음과 삶의 행위가 함께 있어야 한다는 뜻임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요한복음 14장 6절에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세상에 오신 주님이 곧 진리이며 생명이신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뜻인데, 문자적인 뜻만으로도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은 인간의 구원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내용은 문자적인 의미를 통해서도 누구나 알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를 해석할 때, 구원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부분은 잘못 해석하면 안 됩니다. 성령을 거역하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독교회 안에서도 말씀의 문자적인 진리와 내적 진리가 서로 충돌할 가능성은 항상 있다고 하겠습니다. 실제로 문자적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 내적 진리 또는 내적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일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들은 말씀의 내적 진리를 이단의 진리라고 비난합니다. 거짓 진리를 진리로 굳게 믿는 사람들을 설득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주님께서 그런 사정을 아시고, 11절 이하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1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12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말씀에서 회당은 교회의 교리를 뜻합니다. 주님 당시 회당은 말씀을 가르치고, 말씀에 관한 상이한 해석들을 조정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회당이나 권세 있는 자에게 끌려가는 것은 참된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인간의 지식으로 무장한 거짓 교리의 신봉자들과 교리적 논쟁을 벌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고, 그때 그 순간 할 말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가끔 내적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문자적인 진리를 앞세워 공격해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들의 현란한 지식과 화술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두려움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내일을 걱정하는 사람들에 대해 ‘천국의 비밀’ 8478번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일 일을 걱정하는 것은 현재 주어진 운명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신을 믿는 사람들이 그런 걱정을 한다.’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내일 일에 대해 생각하더라도 걱정하지 않는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든 얻지 못하든 우울해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에 만족한다. 부를 얻거나 명예를 얻는다고 다른 사람보다 가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고, 가난해도 슬퍼하지 않으며, 비천한 상황이 와도 낙담하거나 기죽지 않는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때그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영원한 행복의 상태로 나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에게 내일 일을 걱정하는 것은 그렇게 좋은 습관이 아닙니다. 다른 교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공격하고 시험할 수 있습니다. 그때 마땅한 말이 떠오르면 말하고, 그렇지 않으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를 뜨면 됩니다. 우리에게 닥친 모든 일들을 영원한 행복으로 이끄는 수단으로 사용하신다는 주님의 섭리를 믿으면서 말입니다. 주님께서 만나를 내려주시면서 그날 먹을 것만, 즉 일용할 양식만 거두고, 내일까지 남겨 두지 말라고 하신 것은 속뜻으로는 그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입으로는 정의와 공정을 외치면서 속으로는 정의롭지도 공정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판을 치는 이유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기의 속 사람의 소리, 영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겨누는 진리의 칼로 자신의 환부를 도려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람 앞에서 주님을 시인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무슨 일을 하더라도 겉 사람으로부터 하지 말고 속 사람으로부터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실합니다. 주님은 또 ‘성령을 거역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거역하는 죄는 말씀을 안다는 사람들이 저지르기 쉬운 죄입니다. 그들이 말씀의 문자적인 뜻을 넘어서 내적 진리까지 훼손시키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문자적인 의미를 잘못 해석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적 진리를 훼손하고 변질시키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영계 체험’ 2706번 글을 보면, ‘천사들은 내적 진리에 반하는 욕망의 습관을 끊지 못하는 것도 성령을 거역하는 죄로 이해한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새 교회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더 해당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내적 진리에 대해 비교적 더 많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깊이, 그리고 많이 아는 사람들의 책임이 크다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내적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내일을 걱정하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고, 모든 일 가운데서 섭리하시는 주님을 믿지 못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매 순간 자기에게 닥치는 일들이 영원한 행복을 위한 주님의 섭리임을 믿어야 합니다. 좋은 일이 있다고 우쭐대거나 나쁜 일이 있다고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일을 담담하게 견딘다면 결국 평화와 행복의 길이 열립니다. 우리 모두 속 사람으로부터 주님을 시인하고 성령을 거역하지 않으며, 내일 일을 걱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메시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 (마6:33-34)

 

아멘

원본

2020-05-24(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8-0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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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前生), 환생(幻生) 및 윤회(輪廻)에 관하여’(2023/8/5)

 

지난날 이 주제, 이슈에 관하여 관심(?)을 갖던 중, 스베덴보리를 접하고 그에 대한 실마리를 찾은듯하여 있던 차, 마침 새 교회 홈페이지 게시판(http://www.newchurch.or.kr/board_vOYt45)에 과거 누가 이런 질문을 올린 게 보여 어제오늘 생각을 좀 정리해봤습니다.

 

자유 게시판 - 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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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 이슈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이것이 기독교의 관점과 정면 대치함에도 불구, 최면에 빠진 내담자가 실제로 이런 말들을 자기 입으로 술술 말하기 때문이지요.

 

다음은 그 게시판에 올라온 질문이며,

 

 

부산에 사는 이**이라합니다.

요즘 힘든 일도 많고 마음도 심란하고 부산에 새 교회도 없고 ^^

 

제가 스베덴보리 신학자님 책을 몇 권 읽고 e-Library에 매일 성문서 읽기도 다 읽어가는데...

천국, 지옥은 나오는데 환생, 전생은 언급이 있는 것 같기도,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저의 믿음이 약해서인지 이해가 부족해서인지 모르겠습니다.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근데 전생, 환생이 있든 없든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 사랑합니다.

 

 

다음은 여기 달린 답변입니다.

 

 

글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새 교회 가르침은 전생과 환생은 없다고 가르칩니다. 꿈, 데자뷰, 과거에 대한 어떤 막연한 느낌 때문에 마치 전생 또는 환생이 있다고 종종 느낄 수도 있습니다. 또 이런 느낌은 우리가 중간영계의 영인들과 연계되어 있다는 특성, 그리고 특히 그들이 우리에게 끼치는 어떤 특정한 영향에 따라서 예외적으로 뚜렷하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의 삶은 각자에게 한 번씩 주어지는 고유한 기회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이 땅에서의 일생은 저세상을 위한 준비기간이자 시험대이며, 영적으로 봤을 때 나란 사람이 누구인지를 결정해 나가는 과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루하루의 선택이 중요합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매 순간 주님께서 함께하시고 역사하십니다!

 

 

이 답변 중, ‘우리가 중간영계의 영인들과 연계되어 있다는 특성, 그리고 특히 그들이 우리에게 끼치는 어떤 특정한 영향에 따라서 예외적으로 뚜렷하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는, 바로 이 부분인데요, 앞서 제가 무슨 실마리를 찾은듯하다 한 게 바로 이 부분이어서 이걸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33장, ‘천국과 인류는 결합되어 있다(The Conjunction of Heaven with the Human Race)에 나오는 글들입니다.

 

292. 각 사람에게는 선한 영들과 악한 영들이 와있다. 선한 영들을 통해서는 사람은 천국과 결합되고, 악한 영들을 통해서는 지옥과 결합된다. 이 영들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놓여있는 중간영계에 있다. 이곳에 대해서는 앞으로 특별히 따로 다룰 것이다. 이 영들이 사람에게 오면 사람의 기억 전체 안으로 들어가고 그렇게 해서 생각 전체에 들어간다. 이때 악한 영은 사람의 악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선한 영은 선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들어간다. 이 영들은 자기들이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그들이 사람과 같이 있을 때, 그 사람의 모든 기억과 생각이 자기 것인 줄 안다. 또 그들에게는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 태양계 내의 것은 아무것도 그들 시각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영들이 자기가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도록 각별히 배려하신다. 만일 그들이 알아차리면 사람에게 말을 걸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악한 영의 경우 사람을 파괴하려 들기 때문이다. 악한 영들은 지옥과 결합되어 있으므로 그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바로 사람의 영혼을, 즉 그의 신앙과 사랑을 파괴하고, 사람의 몸까지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들이 사람과 대화를 하지 않으면 그럴 일이 없다. 이 경우 그들은 자기들의 말과 생각이 사람에게서 온 것임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서로 나누는 말도 사람에게서 온 것인데도 그들은 자기가 하는 생각과 말이 자기 것인 줄 믿는다. 그리고 누구나 자기 것은 소중히 여기고 사랑한다. 이렇게 해서 영들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도록 그들이 모르는 제재를 받는다. 나는 여러 해 동안 계속되는 경험의 결과로 사람과 영들과의 이러한 결합에 대해 너무도 잘 알게 되었다. 내가 이보다 더 잘 아는 것이 없을 정도이다.

 

295. 사람과 함께 있는 영들은 그 애정, 즉 사랑에 있어서 그 사람과 동질인 영들이다. 선한 영들은 주께서 사람에게 보내시지만, 악한 영들은 그 사람 자신이 불러들인다. 그러나 사람의 애정이 변함에 따라 다른 영들이 함께 있게 된다. 따라서 사람의 유아기,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에 각기 그 함께 있는 영들이 바뀐다. 유아기에는 순진성 안에 있는, 따라서 순진성의 천국인 가장 내적 천국, 즉 삼층천과 교통하는 영들이 함께 있다. 소년기에는 알고 싶어 하는 애정 안에 있는, 따라서 가장 외적인 일층천과 교통하는 영들이 함께 있다. 청년기와 장년기에는 진리와 선에의 애정, 즉 지성 안에 있는 영들이 함께 한다. 이들은 중간 천국, 즉 이층천과 교통하는 영들이다. 그러나 노년에는 지혜와 순진성 안에 있는 영들, 따라서 가장 내적 천국인 삼층천과 교통하는 영들이 함께 있다. 주께서는 고쳐지고 거듭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이 연합을 유지하신다. 고쳐지고 거듭날 수 없는 사람들은 사정이 다르다. 이들을 가능한 한 악으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이들에게도 선한 영들이 함께 있지만, 이 사람들은 자기와 동질인, 지옥과 교통하는 악한 영들과 직접 결합한다. 만일 그들이 사랑하는 것이 자기 자신이거나 물질, 복수, 간음 등이면, 각각 똑같은 것을 사랑하는 영들이 와서 그들의 악한 애정 속에 머문다. 그 사람들은 선한 영들에 의해 악으로부터 저지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악한 영들의 선동을 받고, 악한 영들은 그 사람들에게 악한 애정이 우세한 한 그들에게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악한 사람은 지옥에, 선한 사람은 천국에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298. 사람과 함께 있는 영들은 천국에 결합된 영들이나 지옥에 결합된 영들 모두 결코 자기들의 기억과 생각을 사람에게 유입시키지 않는다. 만일 영들이 자기들의 기억과 생각을 가지고 사람에게 유입해 오면 사람은 영들의 것을 모두 자기 것으로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들을 통해 사람에게 흘러드는 것이 있는데, 천국으로부터는 선과 진리를 사랑함에 따르는 애정이, 지옥으로부터는 악과 거짓을 사랑함에 따르는 애정이 유입된다...

 

그리고 28장, ‘천사와 사람과의 대화(The Speech of Angels with Man)에도 관련 글이 있어 인용합니다.

 

256. 천사나 영은 그 자신의 기억을 바탕으로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오로지 사람의 기억만을 사용해야 한다. 천사와 영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기억이 있다. 만일 어떤 영이 자신의 기억을 가지고 사람에게 말을 하면, 그 사람은 그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자기 것인 줄로만 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영의 생각인 것이다. 이것은 마치 사람이 전에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한 어떤 것을 회상하는 것과 같다. 허락하심에 따라 나는 이것을 경험해 보아 알게 되었다. 이런 현상 때문에 고대인들 중에는 자기들은 수천 년을 지나 자기들의 전생과 전생에 행한 모든 것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었으며, 실제로 돌아왔다고 믿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이런 결론을 내린 것은, 때때로 전에 듣도 보도 않은 것이 기억처럼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이런 현상은 영들이 영 자신의 기억을 가지고 사람들의 생각 안으로 유입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다소 내용이 좀 길지만, 간단히 요약하자면,

 

첫째, 각 사람에게는 중간영계에서 두 종류의 영들이 와 있다. 이는 스스로 떨어져나간 인류를 어떻게 해서든 자신과 계속 연결되어 있게 하시려는 주님의 자비이다.

 

둘째, 이 영들은 선한 영들의 경우, 각 사람의 선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악한 영들은 그 사람의 악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들어가 각각 그 기억과 생각이 자기 것인 줄 안다. 사람의 생명은 본질적으로 악이다. 그러므로 악한 영들이 와 있지 않으면 그는 존재할 수 없다.

 

셋째, 이 영들은 자기들이 사람 안에 와 있는 줄 모른다.

 

넷째, 이 영들은 에이전시(agency, 代行) 영들이다. 즉 선한 영들은 천국 어느 공동체와 연결되어 있고, 악한 영들은 지옥 어는 공동체와 연결되어 있으며, 이렇게 해서 사람은 천국과, 그리고 지옥과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다섯째, 사람의 애정 상태에 따라 와서 머무는 영들이 달라진다.

 

등...

 

 

이상을 종합했을 때, 저는 다음과 같이 나름의 정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 최면에 빠진 상태에서 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말은 사실은 그에게 와있는 영들 자신의 기억과 생각이다. 이런 유입을 주님이 금하셨음에도 가끔 일어나는 것은 악한 영들은 기본적으로 주님의 명령을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불법에는 반드시 벌이 따른다. 여러 겹의 전생, 환생 등은 이런 것이 복잡하게 전개되는 그런 어떤 것이다. 사람의 지상 생활은 ‘일생’(一生)이다. 윤회 같은 것은 없다.

 

둘째, 전생, 환생, 윤회 같은 것을 알아보려 하는 것은 주님이 금하신 것이다. 이는 주님의 질서를 어지럽히기 때문인데, 따라서 누구에게 최면을 걸거나 스스로 그런 데를 찾아가는 것은 절대 삼가야 한다.

 

셋째, 절대 영들과 대화하려는 시도를 해서는 안 된다. 영들은 사람의 육안을 통해 자연계를 볼 수 있으므로 우리가 보는 모든 컨텐츠들에 조심, 유의해야 한다. 음란, 폭력, 잔인, 공포 등의 컨텐츠들을 접하면, 그로 인해 우리 안의 영들이 깨어나 우리를 망가뜨리려 하기 때문이다.

 

네, 이상입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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