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2:8)

 

AC.100

동산(garden) 지성을, 에덴(Eden) 사랑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사야의 다음 말씀에서도 분명합니다. That agardensignifies intelligence, andEdenlove, appears also from Isaiah: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사막을 에덴 같게,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51:3) Jehovah will comfort Zion, he will comfort all her waste places, and he will make her wilderness like Eden, and her desert like the garden of Jehovah; joy and gladness shall be found therein, confession and the voice of singing (Isa. 51:3).

 

구절에서 광야(wilderness), 기뻐함(joy), 감사함(confession) 신앙의 천적인 것들, 사랑에 관계되는 것들을 표현하며, 사막(desert), 즐거워함(gladness), 창화하는 소리(the voice of singing) 신앙의 영적인 것들, 이해에 속한 것들을 표현합니다. 전자는 에덴(Eden), 후자는 동산(garden) 관계됩니다. 선지서에서는 같은 것에 관하여 표현이 계속해서 함께 나오는데, 하나는 천적인 것을, 다른 하나는 영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에덴의 동산(garden in Eden) 밖에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뒤의 10절에서 있습니다. In this passage, “wilderness,” “joy,andconfessionare terms expressive of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or such as relate to love; butdesert,” “gladness,andthe voice of singing,of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 or such as belong to the understanding. The former have relation toEden,the latter togarden”; for with this prophet two expressions constantly occur concerning the same thing, one of which signifies celestial, and the other spiritual things. What is further signified by thegarden in Eden,may be seen in what follows at verse 10.

 

해설

AC.100AC.98에서 제시한 동산에덴의 의미를 이사야의 말씀으로 확증합니다. AC.98에서는 동산이 지성을, ‘에덴이 사랑을 의미한다고 했고, 그 결과 동쪽 에덴의 동산이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천적 인간의 지성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사51:3에서 광야를 에덴 같게하고 사막을 여호와의 동산 같게한다는 두 표현을 함께 제시함으로써, 에덴과 동산이 각각 사랑과 지성에 관계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51:3은 황폐해진 시온을 여호와께서 다시 위로하시고 회복시키시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광야가 에덴처럼 되고 사막이 여호와의 동산처럼 되며, 그곳에 다시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게 됩니다. 문자적으로는 황폐한 곳이 풍요롭고 기쁜 곳으로 회복되는 모습이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안에서 인간의 내적인 회복을 봅니다. 황폐했던 인간 안에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지성이 다시 살아나고, 그에 따라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함께 회복되는 상태가 묘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사야의 표현들을 두 계열로 구별한다는 점입니다. ‘광야’, ‘기뻐함’, ‘감사함은 신앙의 천적인 것들, 곧 사랑에 관계되는 것들을 표현하고, ‘사막’, ‘즐거워함’, ‘창화하는 소리는 신앙의 영적인 것들, 곧 이해에 속한 것들을 표현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자는 에덴과 관계되고 후자는 동산과 관계됩니다. 에덴이 사랑을 의미하고 동산이 지성을 의미한다는 AC.98의 설명이 이사야의 병행 표현 안에서도 확인되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각각의 단어를 문맥과 관계없이 언제나 같은 뜻으로 대응시키는 상응 사전처럼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100에서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이사야가 같은 하나의 일을 말하면서 서로 짝을 이루는 두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두 표현 가운데 하나는 천적인 것, 곧 사랑에 관계되고, 다른 하나는 영적인 것, 곧 이해에 관계됩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개별 단어를 따로 떼어 외우는 것보다, 말씀 안에서 사랑에 속한 것과 이해에 속한 것이 서로 구별되면서도 하나의 전체를 이루어 표현된다는 구조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의 AC.99와도 잘 연결됩니다. AC.99에서는 천적 인간에게 주님께서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통하여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이해는 서로 단절된 두 영역이 아닙니다. 사랑이 주된 것이 되고 그 사랑으로부터 이해에 속한 것들이 생명을 받을 때 본래의 질서가 회복됩니다. AC.100에서 에덴과 동산이 한 구절 안에서 서로 대응하여 나타나는 것도 이러한 질서를 보여 줍니다. 사랑을 의미하는 에덴과 지성을 의미하는 동산은 구별되지만, ‘에덴의 동산안에서는 하나의 질서 안에 함께 있습니다.

 

또한 선지서에서는 같은 것에 관하여 표현이 계속해서 함께 나온다는 설명은 이사야를 비롯한 말씀의 표현 방식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줍니다. 겉으로 보면 비슷한 말을 되풀이하는 시적 병행법처럼 보일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는 속뜻에서는 그 두 표현이 완전히 같은 말을 중복하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하나가 사랑과 선에 관계되는 천적인 것을 표현한다면 다른 하나는 이해와 진리에 관계되는 영적인 것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말씀의 반복처럼 보이는 표현에도 속뜻에서는 구별과 질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AC.100은 마지막으로 에덴의 동산의 의미가 창2:10 이하에서 더 밝혀질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이것은 지금 모든 의미를 한꺼번에 완성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합니다. 현재까지는 동산이 지성이고 에덴이 사랑이며, 이 둘이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관계 속에서 이해된다는 데까지 밝혀졌습니다. 앞으로 강과 네 갈래의 물줄기에 관한 설명이 이어지면서 에덴동산의 구조는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은 AC.98-100이 세워 놓은 기본 질서,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주된 것이 되고 그 사랑으로부터 지성이 생명을 받는다는 구조를 붙들고 다음 설명을 따라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AC.98-100)

 

 

 

AC.99, 창2:8, ‘뒤집힌 질서가 회복될 때, 모든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옴을 지각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99영적 인간에게서 생명, 곧 생명의 질서는 이러합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와 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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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는 영계를 왕래하면서 ‘영적으로 다른 상태의 가족이 서로를 만나느냐’는 질문을 수백 명에게 받았고, 또 실제 장면들을 여러 번 보면서 그 답을 아주 정교하게 정리했습니다. 결론은 단순합니다. 영적 수준, 즉 상태가 달라도 일시적 재회는 가능하다. 그러나 영원한 결합은 오직 영적 친화성이 있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즉, ‘만남은 가능’, 그러나 ‘함께 사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가지를 매우 정확하게 구분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본 실제 장면, 다른 수준에 살더라도, 사랑하면 찾아온다

 

스베덴보리는 어느 남성과 어머니의 관계를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아들은 지상에서 신앙을 진실하게 살았고, 천국의 한 공동체로 갈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반면, 어머니는 지상에서는 신앙을 고백했지만, 내적 삶은 그렇지 못해 중간 영계에서 오랫동안 정화 과정을 겪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천국 공동체에 이미 소속된 상태였지만, 어머니가 중간 영계의 한 단계에 도달했을 때, 그는 사랑의 인도하심으로 그곳에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기록합니다. ‘그는 어머니가 있는 곳에 곧바로 나타났고, 그녀는 즉시 아들을 알아보았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아들이 ‘천국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흐름이 그를 어머니의 상태, 즉 어머니와 같은 눈높이로 ‘임재’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영계의 자연스러운 원리입니다.

 

 

만남은 가능하지만, 함께 사는 것은 영적 친화성에 달려 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사례를 관찰하면서 확인했습니다. 서로 다른 천국 층위에 있어도 서로의 상태에 맞출 수 있으면 만날 수 있다. 왜냐하면 영계에서는 ‘수준 차이’가 공간적 거리가 아니라 상태의 밀도 차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함께 사는 것, 그러니까 거처를 함께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자신과 비슷한 선과 진리의 수준을 가진 이들과 자연히 함께 살게 된다.’ 즉, 잠시 만나는 것은 사랑으로 가능, 그러나 영원한 결합은 본질(affectional state)에 따라 결정된다는 원리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본 세 가지 재회 형태

 

스베덴보리는 수많은 재회 장면을 관찰한 뒤, 이를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습니다.

 

서로 사랑했지만 영적 수준이 달랐던 가족, 일시적 재회는 가능

 

예를 들면, 신앙적으로 깊이 살았던 자녀와 신앙이 얕았던 부모, 도덕적으로는 선했지만, 신앙적으로는 약한 형제, 경건했던 배우자와 세속적이었던 배우자 등은 중간 영계에서 충분히 서로를 만납니다. 이 만남은 지상에서의 감사, 못다 한 대화, 사랑의 표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그 후 각자 자기 본질에 맞는 천국의 공동체로 들어가면 영원한 동거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슬픔이 없는 헤어짐’이라고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에 들어간 영혼은 타인의 상태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적 수준이 상당히 비슷했던 가족, 천국에서도 교류가 계속된다

 

이 경우는 같은 종류의 선, 같은 방식의 신앙, 비슷한 내적 애정을 가진 가족입니다. 이들은 종종 천국에서도 서로 가까운 공동체에 들어가며, 정기적으로 서로 교류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가족은 천국에서 더욱 가까워진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영적 친화성이 만들어 내는 결합입니다.

 

지상에서는 가족이었지만, 영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경우, 만남 자체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지상에서는 가족 관계였지만, 한 사람은 선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은 자기애, 권력욕, 증오를 사랑했다면, 이 둘은 중간 영계에서도 서로를 자연스럽게 떠나게 됩니다. 이때의 ‘이별’은 지상적 슬픔을 동반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천국인은 악을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할 수 없다. 그 사랑은 천국의 사랑과 전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영적 수준이 달라서 함께 살지는 못하지만, 사랑의 기억은 존중된다

 

천국의 사람들은 지상의 가족 관계를 완전히 잊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기억은 지상적 집착이 아니라 감사와 자비의 형태로 남습니다. ‘그가 나에게 해준 사랑이 있었다.’, ‘우리는 지상에서 함께 걸어갔다.’, ‘그때 나는 보호받았다.’ 등, 이런 기억은 천국에서 빛처럼 따뜻하게 반짝입니다. 그러나 ‘왜 내 가족은 천국에 오지 않았는가?’라는 슬픔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단호히 말합니다. ‘천국에는 슬픔이 없다. 슬픔을 남기는 기억은 주님이 제거하신다.’

 

 

결정적 통찰,영적 수준 차이는 재회를 막지 않지만,본질의 차이(사랑의 종류)’는 영원한 결합을 막는다

 

스베덴보리가 수천 건의 사례에서 얻은 결론은 이것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만나게 되고, 본질(선)은 함께 살게 한다. 그러나 악은 결합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즉, 만남은 사랑에 의해, 결합은 본질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의 법칙입니다.

 

 

 

SC.71, ‘영계에서 가족끼리 자주, 그리고 드물게 만나는 경우’

영계에서는 누구와 자주 교류하고, 누구와는 특별한 때에만 만나고, 누구와는 거의 만나지 않게 되는가? 이것은 모두 내적 상태(state)에 의해 결정된다고 스베덴보리는 아주 일관되게 기록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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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69, ‘가족 중 일부가 지옥 간 경우’

가족 중 일부가 지옥에 간 경우, 스베덴보리가 본 실제 관계 이 부분은 많은 성도들뿐 아니라 스베덴보리 자신도 깊이 고민했던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살아 있을 때, 자신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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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중 일부가 지옥에 간 경우, 스베덴보리가 본 실제 관계

 

이 부분은 많은 성도들뿐 아니라 스베덴보리 자신도 깊이 고민했던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살아 있을 때, 자신의 가족 중 일부가 신앙적으로 매우 다른 길을 걸었고, 그들의 사후 상태가 어떨지 진지하게 궁금해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영계를 왕래하며 가장 먼저 확인한 사실은 이렇습니다. ‘지옥에 있는 가족과 천국에 있는 가족은 서로 만날 수 없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두 세계는 ‘장소’가 아니라 ‘마음의 본질(affection)로 구분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본 실제 장면, 서로를 보려고 하지만, 접근하지 못한다

 

스베덴보리는 지상에서 매우 친하게 지냈던 형제 둘을 관찰했습니다. 한 사람은 선한 삶을 통해 천국으로 들어갔고, 다른 한 사람은 외적 신앙만 있었고, 내적으로는 자기애와 권력욕이 강해 결국 지옥으로 흘러갔습니다. 천국에 들어간 형제는 지상 기억으로 인해 한 번쯤 ‘그를 찾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듯, 그는 순간적으로 ‘희미한 인식’을 통해 지옥에 있는 형제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마음은 극도로 불편함을 느꼈고, 더는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천국인은 지옥의 악을 참을 수 없다. 단지 악과 접촉하는 순간, 선한 사랑은 즉시 뒤로 물러난다.’ 천국인은 ‘보고 싶다’는 자연적 마음이 잠시 일어날 수는 있지만, 지옥의 상태는 그 자체로 천국인의 영적 호흡을 막는 공기와 같기 때문에 결코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지옥에 있는 가족은 천국 가족을 바라볼 수 있는가?

 

스베덴보리는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천국을 ‘위로 올려다본다’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영계에서는 위, 아래가 공간 개념이 아니라 상태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지옥 영들은 천국의 빛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천국인을 ‘보는 것 자체가 고통’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악은 선을 견디지 못하며, 선은 악을 가까이할 수 없다.’ 따라서 지옥 가족이 ‘천국에 있는 가족을 보고 싶어 한다’는 지상적 상상은 영계에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지상에서의 사랑은 사라지는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부분을 매우 섬세하게 설명합니다. 천국 가족은 지상에서의 사랑을 잊지 않습니다. 다만 그 사랑은 고통 없이 불쌍히 여기는 자비의 형태로 변합니다. 지옥 가족은 천국 가족을 자연적 기억으로는 기억하지만, 영적으로 사랑하거나 그리워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악은 본질적으로 사랑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천국 가족이 지옥 가족을 보며 느끼는 마음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슬픔이 아니라, 그가 선택한 삶의 결과를 바라보는 조용한 연민이다.’ 천국에서는 결코 ‘영원한 상실의 고통’이라는 형태가 남지 않습니다. 주님이 그 고통을 제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천국 가족은 지옥 가족을 위해 기도하는가?

 

지상에서는 기도가 가능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영계에서는 중보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의 최종 상태가 결정되면, 그것은 본질(사랑의 형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국 사람의 마음속에는 그의 과거 가족에 대한 부드러운 자비의 정서가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적 기억’입니다. 고통이 아니라, 상대가 가엾다는 자비의 정서만 남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결론, 천국의 행복은 지옥 가족의 존재로 인해 전혀 흐려지지 않는다.’

 

스베덴보리는, 어떤 영계 탐방자도 이 사실을 처음에 믿기 어려워했지만, 천국의 실제를 경험하는 순간, 이 원리를 온전히 받아들인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선한 사랑, 참된 이해, 완전한 평화가 마음을 채우기 때문에 지상적 감정인 ‘영원한 슬픔’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천국인은 지옥에 있는 가족 때문에 불행해지지 않는다. 주님은 천국인에게 불행을 결코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천국의 기쁨은 지옥에 있는 가족 때문에 흐려지는 일은 없습니다. 그들은 단지 ‘그가 선택한 길’에 대한 조용한 연민만 남기기 때문입니다.

 

 

 

SC.70, ‘영적으로 다른 상태의 가족이 서로를 만나는가’

스베덴보리는 영계를 왕래하면서 ‘영적으로 다른 상태의 가족이 서로를 만나느냐’는 질문을 수백 명에게 받았고, 또 실제 장면들을 여러 번 보면서 그 답을 아주 정교하게 정리했습니다.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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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68, ‘사후 첫 3일간 일어나는 일, 먼저 간 가족들, 그리고 돕는 천사들’

사후 첫 3일 동안의 의식 상태, ‘잠들어 있는 듯, 그러나 가장 따뜻하게 보호받는 시간’ 스베덴보리가 영계를 처음 왕래할 때, 가장 ‘신비한 현장’처럼 느꼈던 부분이 바로 사람이 죽은 직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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