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72
그러므로 이 장의 끝에서,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지를 말하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At the end of this chapter, accordingly, I am allowed to tell how man is raised from the dead and enters into the life of eternity.
해설
AC.72는 한 문장뿐인 매우 짧은 글입니다. 그러나 위치를 알고 읽으면 앞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가 어떻게 전개될지를 알려 주는 중요한 예고입니다. 바로 앞 AC.71에서 스베덴보리는 사후세계에 관한 내용들을 말씀 본문 해설 사이에 끼워 넣으면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되므로,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느 정도 순서를 갖추어 덧붙이겠다고 했습니다. AC.72는 바로 그 원칙에 따라 ‘이 장의 끝에서’ 무엇을 다룰 것인지를 미리 알려 줍니다.
여기서 ‘그러므로’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AC.72는 독립적으로 떨어진 선언이 아니라 AC.71의 직접적인 결론입니다. 사후세계에 관한 기록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일정한 순서로 배치하겠다고 했으므로, 이제 창2 해설을 시작하기에 앞서 이 장의 끝에서는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가는지’를 설명하겠다고 예고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AC.71은 편집 원칙이고 AC.72는 그 원칙이 앞으로 어떻게 적용될지를 보여 주는 첫 예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구조를 정확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AC.72 다음에 곧바로 소생 과정이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음 AC.73부터는 창2:1-17의 개요와 절별 속뜻 해설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장의 본문 해설을 마친 뒤에야 AC.72가 예고한 사후 소생에 관한 기록이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AC.72는 ‘이제 바로 소생 과정을 설명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이 장의 끝에서 그것을 설명하겠다’는 안내입니다. 이 차이를 분명히 해 두면 AC의 독특한 구성을 이해하기가 훨씬 쉬워집니다.
이번 예고의 주제는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지는가’입니다. 바로 앞 AC.70에서는 이미 이 문제를 짧게 소개했습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소생될 때’, 곧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말하겠다고 했으며, 육체의 죽음 후 다른 삶에 있기까지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죽음은 삶의 연속’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AC.72는 그때 제시한 주제를 창2 해설이 끝난 뒤 구체적으로 다루겠다고 다시 한번 예고하는 셈입니다.
‘죽음에서 일으켜져’라는 표현도 정확하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영어는 ‘raised from the dead’입니다. 이것을 곧바로 죽음이라는 낮은 상태에서 위로 상승한다는 상응적 의미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사람이 육체의 죽음 이후 어떻게 소생하여 의식적인 영적 삶으로 들어가는가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앞서 AC.70에서 사용한 ‘resuscitated’와 같은 주제를 다른 표현으로 말하고 있다고 이해하면 충분합니다.
또 이것은 자연적 육체가 다시 살아난다는 뜻도 아닙니다. AC.69에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몸을 입은 영’이라고 설명했고, AC.70에서는 육체의 죽음 이후 사람이 매우 짧은 과정 안에서 다른 삶에 있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죽음에서 일으켜진다’는 것은 죽은 육체가 되살아나는 자연적 소생이 아니라, 자연적 육체의 삶이 끝난 사람이 영으로서 의식적인 삶에 들어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 구체적인 과정은 이 장의 끝에서 설명될 것입니다.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간다’는 표현 역시 중요합니다. 다만 여기에도 본문보다 너무 많은 의미를 넣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현재 해설에서는 ‘영원은 끝없는 시간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아 있는 상태’라고 설명했지만 AC.72는 여기서 영원의 본질을 정의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선 가장 직접적인 뜻은 육체의 죽음으로 인간의 생명이 끝나지 않고,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는 삶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바로 AC.70의 ‘죽음은 삶의 연속’이라는 설명과 연결됩니다.
물론 스베덴보리의 전체 신학에서 영원한 생명은 단순히 시간이 끝없이 계속된다는 것보다 훨씬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천국의 생명과 지옥의 생명도 구별해야 하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생명이 무엇인지도 별도로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AC.72에서는 아직 그런 문제를 다루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사람이 죽음으로 소멸하지 않고 계속 살아간다는 사실과 그 전환 과정이 앞으로 설명될 것이라는 점에 집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말하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라는 표현은 AC.67부터 반복되어 온 스베덴보리의 표현과도 연결됩니다. AC.67에서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고,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으면서 듣고 본 것을 밝히는 것도 허락되었다고 했습니다. AC.71에서는 사후세계에 관한 기록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느 정도 순서를 갖추어 덧붙이는 것이 주님의 신적 자비로 허락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AC.72에서도 자신이 이제 이 주제를 자유롭게 선택하여 말한다고 하기보다 ‘말하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 ‘허락’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전달되었는지를 추정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바로 앞 AC.71의 기존 심화를 비공개하기로 한 이유도 그것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이 내용을 밝히도록 허락되었다고 분명히 말하지만, 이 문장에서는 그 허락이 직접적인 음성으로 주어졌는지, 내적 지각으로 알게 되었는지, 또는 다른 어떤 방식이었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자신의 사후세계 기록을 개인적 호기심이나 임의의 공개가 아니라 주님의 허락 아래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했다는 사실까지만 말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AC.72의 또 다른 의미는 독자에게 앞으로의 독서 순서를 알려 준다는 데 있습니다. 지금 이 문장을 읽었다고 해서 곧바로 사람이 죽을 때의 소생 과정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창2의 말씀을 따라가야 합니다. 창2:1-17에서 일곱째 날, 안식, 에덴동산,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강과 그 네 갈래 등 매우 중요한 속뜻을 차례로 살피게 됩니다. 그 해설을 마친 뒤에야 AC.72가 예고한 죽음과 소생에 관한 기록으로 돌아옵니다.
이것은 AC.71의 편집 원칙을 실제로 이해하는 좋은 사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후세계에 관한 이야기가 흥미롭다고 해서 창세기 본문 해설을 뒤로 미루지 않습니다. 반대로 창세기 본문만 해설하고 영계에 관한 경험을 모두 별개의 책으로 떼어 내지도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 해설을 중심축으로 진행하면서, 그와 깊이 관련된 다른 삶의 본성을 별도의 연속된 기록으로 함께 제시합니다. AC.72는 그 두 흐름 사이에서 독자에게 ‘이 주제는 이 장의 끝에서 다시 이어질 것’이라고 표시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AC.67부터 AC.72까지를 한 묶음으로 보면 그 준비 과정도 상당히 치밀합니다. AC.67에서는 말씀의 내적 의미에 속한 매우 많은 것이 다른 삶과 관계되기 때문에 자신이 영들과 천사들 가운데서 듣고 본 것을 밝히겠다고 했습니다. AC.68에서는 사람들이 그것을 믿지 않을 것을 알고 있지만 자신은 보고 듣고 느꼈다고 했습니다. AC.69에서는 사람이 몸을 입은 영이므로 영적 세계와의 관계가 인간 본성에 전혀 낯선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 AC.70에서는 사람이 죽은 뒤에도 계속 살아 있으며 ‘죽음은 삶의 연속’이라고 했습니다. AC.71에서는 이런 기록을 어떻게 배열할 것인지를 설명했고, 이제 AC.72에서는 그 배열에 따라 창2의 끝에서 무엇을 다룰 것인지 예고합니다.
따라서 AC.72를 ‘이제부터 실제 사후세계 체험담이 시작된다’는 신호로 이해하면 약간 이릅니다. 실제로 다음 AC.73부터는 다시 말씀 본문으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AC.72는 지금까지의 사후세계 서론을 잠시 닫으면서 동시에 창2 해설이 끝난 뒤 이어질 다음 기록의 주제를 미리 표시하는 글입니다. 일종의 ‘다음 사후세계 기록의 예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72는 매우 짧지만 독자를 길을 잃지 않게 해 줍니다. 지금까지 ‘다른 삶’이라는 큰 주제를 열어 놓았는데 갑자기 다음 글부터 창2 본문 해설로 돌아가면 독자는 그 주제가 끝난 것인지 궁금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렇지 않다고 미리 알려 줍니다. 지금은 말씀 본문으로 돌아가지만 이 장의 끝에서 다시 그 주제를 이어 받아,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지를 설명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AC.72의 핵심은 이 한 문장 그대로 붙들면 충분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가는가.’ 이것이 창2 해설을 마친 뒤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 주제입니다. AC.70에서 선언한 ‘죽음은 삶의 연속’이라는 명제가 그때부터는 단순한 선언에 머물지 않고, 스베덴보리가 직접 관찰했다고 증언하는 구체적인 소생의 과정으로 펼쳐질 것입니다.
AC.73, 창2:1-17 개요,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1절)
창2:1-17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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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1, 창2 앞, ‘AC의 사후세계 기록은 왜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있는가?’
AC.71그러나 이러한 내용들을 말씀 본문에 들어 있는 것들 사이에 끼워 넣게 되면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될 것이므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느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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