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69

사람은 주님에 의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실제로 태곳적에는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사람은 몸을 입은 영이므로 그들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 속에 너무 깊이 잠기게 되어, 밖의 것에는 거의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게 되었고, 그리하여 길이 닫히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이 잠겨 있는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기만 하면 길은 다시 열리며, 그는 영들 가운데 있게 되고 그들과 공동의 안에 있게 됩니다. Man was so created by the Lord as to be able while living in the body to speak with spirits and angels, as in fact was done in the most ancient times; for, being a spirit clothed with a body, he is one with them. But because in process of time men so immersed themselves in corporeal and worldly things as to care almost nothing for aught besides, the way was closed. Yet as soon as the corporeal things recede in which man is immersed, the way is again opened, and he is among spirits, and in a common life with them.

 

해설

AC.69는 앞의 두 번호에서 제기된 문제를 인간의 창조 질서와 연결합니다. AC.67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이 다른 삶을 향하고 있다고 했고, AC.68에서는 자신이 영들과 천사들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사람들이 상상이라고 여길 것을 알면서도 보았고, 들었으며, 느꼈기때문에 물러서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제 AC.69에서는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말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그의 대답은 사람이 주님에 의해 처음부터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근거로 제시되는 문장이 중요합니다. 사람은 몸을 입은 이므로 영들과 하나라고 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육체만으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육체 안에서 살아가는 현재의 인간에게도 영적 차원이 있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육체를 입지 않은 영들과 전적으로 무관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AC.69가 말하는 영들과의 관계는 인간에게 전혀 낯선 능력이 외부에서 추가되는 것으로 설명되지 않고, 인간이 어떤 존재로 창조되었는가에서 출발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실제로 태곳적에는이러한 일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현재 메인 해설처럼 태고교회 사람들이 자연계와 영계를 동시에 인식했으며 영적 교통이 일상적 삶이었다고 여기서부터 자세히 확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AC.69가 직접 말하는 것은 태곳적 사람들이 육체 안에서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었다는 데까지입니다. 그들의 내적 상태와 퍼셉션,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는 이후의 설명을 따라가면서 점차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렇다면 왜 지금은 이러한 일이 일반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요? AC.69는 그 원인을 인간이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 속에 너무 깊이 잠기게 에서 찾습니다. 여기서 육체와 세상 자체를 악하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원문이 문제 삼는 것은 사람이 그것들에 너무 깊이 잠겨 그 밖의 것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게 된 상태입니다. 인간의 관심이 감각으로 접하는 것과 세상에 속한 것에 압도되면서, 영들과 천사들과 말하던 길이 닫혔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길이 닫혔다는 표현 역시 조심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메인 해설은 길은 파괴된 것이 아니라 닫혔으므로 인간의 본성 안에 영적 교통의 가능성이 차단된 상태로 남아 있다고 설명합니다. 충분히 가능한 해석이지만, AC.69가 직접 설명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간 표현입니다. 이 번호에서 분명한 것은 육체적인 것들에 잠김으로 길이 닫혔고, 그것들이 물러가면 다시 열린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상의 인간론적 구조는 뒤의 설명과 함께 확인하는 편이 좋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그래서 매우 중요하면서도 오해하기 쉽습니다. ‘사람이 잠겨 있는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기만 하면 길은 다시 열린다고 합니다. 이것을 읽고 그렇다면 나도 육체적인 것들을 물러가게 하면 영들과 말할 있는가?라고 묻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AC.69 자체는 그것을 이루기 위한 방법이나 수행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육체적 감각을 억제하라거나 세상생활을 떠나라거나 영들과의 접촉을 의도적으로 추구하라는 권고도 없습니다. 이 번호는 그 길이 어떤 조건에서 닫혔고 어떤 조건에서 다시 열리는지를 설명할 뿐입니다.

 

따라서 현재 메인 해설의 마지막 부분처럼 AC.69만으로 스베덴보리가 육체적 일상생활을 하면서 동시에 영계를 지속적으로 지각했고, 두 가지 활동을 동시에 수행했다고 구체적으로 확정하는 것은 조금 이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의 특별한 상태가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앞으로 그의 증언을 더 읽으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붙들어야 할 핵심은 더 근본적입니다. 인간은 단순히 육체적인 존재가 아니라 몸을 입은 이며, 그래서 영적 세계와 전적으로 무관한 존재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AC.67-69를 함께 읽으면 흐름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AC.67은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이 다른 삶을 향하고 있다고 밝히고, AC.68은 스베덴보리가 그것을 직접 경험했다고 증언하며, AC.69는 그러한 경험의 가능성을 인간이 몸을 입은 이라는 사실과 연결합니다. 동시에 인간이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에 깊이 잠김으로 그 길이 닫혔다고 설명합니다. 이로써 앞으로 이어질 영계에 관한 증언은 인간과 전혀 관계없는 낯선 세계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이 어떤 존재이며 육체의 삶 이후에도 어떻게 계속 살아가는가라는 문제와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AC.69 해설)

 

심화

1.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AC.69 심화 1,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AC.69 심화1.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AC.69의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 매우 자연스러운 질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 속

bygrace.kr

 

 

 

AC.70, 창2 앞, ‘죽음은 삶의 연속이다’

AC.70여러 해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을 밝히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사람이 소생될 때, 곧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갈 때 그 상태가 어떠한지를 말하고자 합

bygrace.kr

 

AC.68, 창2 앞, ‘나는 보았고, 들었고, 느꼈다’

AC.68저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들과 천사들과 말하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이 상상이라고 할 것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TCR(True Christian Religion) 소개, 그러니까 왜 이름을 이렇게 지었으며, 왜 세상 떠나기 전 이런 책을 썼고, 왜 주님은 이 책이 나오자 제자들을 불러 온 천국에 전하게 하셨는지, 그리고 이 책은 보니까 거의 조직신학같아 보이는데,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을 처음 리딩하기 시작할 때, 이 책은 언제쯤 읽는 게 좋을지 등에 대한 자세한 해설을 부탁합니다.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TCRArcana Coelestia의 연장선 위에 있으면서도, 성격 자체는 전혀 다른 책입니다. AC가 ‘창세기, 출애굽기의 속뜻을 따라가며 인간의 거듭남 과정을 풀어낸 주석서’라면, TCR은 그 모든 내용을 한 번에 정리하여 ‘기독교 전체를 다시 세우는 종합 교리서’, 곧 일종의 ‘영적 조직신학’이라고 보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왜 이름이 ‘True Christian Religion’(참된 기독교)인가 하는 질문은 이 책의 존재 이유와 직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당시 교회가 이미 본래의 기독교에서 벗어나 있다고 보았습니다. 특히 ‘신앙만으로 의롭게 된다’는 식의 분리된 신앙 이해, 삼위일체의 오해, 삶과 단절된 교리 중심 신앙 등을 문제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처음 주님께서 세우신 기독교’, 곧 사랑(체어리티)과 신앙이 하나로 결합된 본래의 기독교를 다시 드러내기 위해 이 책을 썼습니다. 여기서 ‘True’라는 단어는 단순히 ‘정확한’이 아니라 ‘원래의, 회복된, 본질적인’이라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말하자면 ‘기독교의 리셋판’, ‘본래 상태로 복원된 기독교’라는 선언입니다.

 

왜 생애 말년에 이 책을 썼는가도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미 AC를 비롯한 수많은 저작에서 방대한 진리를 풀어놓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대부분 ‘조각들’처럼 흩어져 있었습니다. TCR은 그 조각들을 하나로 모아, 하나님, 신앙, 체어리티, 회개, 거듭남, 성례, 성경, 교회, 종말 등 기독교의 핵심 주제들을 체계적으로 재구성한 ‘최종 정리’입니다. 그래서 TCR은 단순한 한 권의 책이 아니라, 그의 전 생애 사상의 ‘결론’이자 ‘봉인’에 해당합니다. 마치 오랜 시간 쌓아 온 내용을 마지막에 한 권으로 정리하는 것과 같습니다.

 

말씀하신 ‘주님께서 이 책이 나오자 제자들을 불러 온 천국에 전하게 하셨다’는 대목은, 이 책이 단순한 신학서가 아니라 ‘새 시대의 선언문’이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 책의 출간은 단순한 출판 사건이 아니라 영적 세계에서의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곧 ‘새 교회(New Church)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고, 천국과 교회 모두에 새로운 진리가 선포되는 계기였습니다. 그래서 ‘천사적 차원에서도 이 책의 내용이 전파되었다’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는 과장된 상징이 아니라, 그만큼 이 책의 위상을 강조하는 신학적 진술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이 책은 매우 ‘조직신학적’입니다. 실제로 구성도 그렇습니다. 하나님론, 구원론, 신앙과 체어리티, 회개, 거듭남, 성례, 성경, 교회 등 전통적인 조직신학의 구조를 그대로 따르면서, 그 안의 내용을 완전히 새롭게 재해석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차이는, 일반 조직신학이 ‘논리’ 중심이라면, TCR은 ‘영적 경험과 계시 + 상응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읽다 보면 단순한 교리 설명을 넘어, 인간의 실제 변화 과정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언제 읽는 것이 좋은가 하는 질문이 매우 현실적이고 중요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너무 처음에는 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너무 늦게도 아닙니다.’입니다. 처음부터 이 책을 읽으면 개념이 너무 압축되어 있고 전제가 많아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최소한 Heaven and Hell이나 초기 저작들, 그리고 AC의 일부를 통해 ‘속뜻’, ‘상응’, ‘거듭남’ 같은 기본 개념이 어느 정도 형성된 후에 읽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너무 뒤로 미루면, 전체 그림 없이 부분만 계속 파고들게 됩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시점은 ‘기본 개념이 잡히고, 이제 전체 구조가 궁금해질 때’입니다. 그때 TCR을 읽으면, 그동안 흩어져 있던 내용들이 한 번에 정리되면서 ‘, 이게 다 하나였구나’ 하는 깨달음이 옵니다.

 

정리하자면, TCR은 스베덴보리 사상의 ‘정수이자 종합’이며, 동시에 ‘새 교회의 헌장’과 같은 책입니다. AC가 ‘여정’이라면, TCR은 ‘지도’입니다. AC가 ‘과정의 기록’이라면, TCR은 ‘완성된 구조도’입니다. 그래서 두 책은 경쟁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완성시키는 관계에 있습니다. 처음에는 AC를 통해 눈을 열고, 그다음 TCR을 통해 전체를 붙잡는 것, 이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효과적인 읽기의 순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SC.58, ‘이런저런 초대를 받고...’

주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어느 정도 불순한 식사 초대에도 번번이 응하셨지요... 왜 그러셨나요? 스베덴보리는 그런 경우가 없었나요? 저 역시 선뜻 내키지 않는 크고 작은 이런저런 초대

bygrace.kr

 

SC.56, ‘궤를 붙들다가 그 자리에서 죽은 웃사’(삼하6: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삼하6:7) 이 구절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 중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68

저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들과 천사들과 말하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모든 것이 상상이라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제가 신뢰를 얻기 위해 이런 것들을 이야기한다고 것이며, 다른 사람들은 밖의 여러 반대를 제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저는 물러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보았고, 들었으며, 느꼈기 때문입니다. I am well aware that many will say that no one can possibly speak with spirits and angels so long as he lives in the body; and many will say that it is all fancy, others that I relate such things in order to gain credence, and others will make other objections. But by all this I am not deterred, for I have seen, I have heard, I have felt.

 

해설

AC.68AC.67에서 시작된 스베덴보리의 영계에 관한 증언을 한 걸음 더 앞으로 내딛게 합니다. AC.67에서 그는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었으며 그동안 듣고 본 것을 이제 밝히겠다고 했습니다. AC.68에서는 곧바로 그러한 주장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자신도 잘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으면서 영들과 천사들과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 사람들, 모든 것이 상상이라고 할 사람들, 사람들의 신뢰를 얻으려고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 할 사람들이 있을 것임을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러한 반대에 대해 논증으로 답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영들과 천사들과 대화하는 것이 철학적으로 어떻게 가능한지를 증명하려 하지도 않고, 자신의 말을 믿어야 할 이유들을 길게 제시하지도 않습니다. 그의 대답은 매우 짧습니다. ‘저는 보았고, 들었으며, 느꼈기 때문입니다.AC.68에서 스베덴보리가 내세우는 것은 이론적 가능성이 아니라 자신에게 실제로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경험의 증언입니다.

 

그렇다고 보았다’, ‘들었다’, ‘느꼈다라는 세 동사에 각각 별도의 영적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현재 해설에서는 보았다는 형상과 구조와 질서를 인식했다는 뜻이고, ‘들었다는 의미와 소통이 있었다는 뜻이며, ‘느꼈다는 실재로서 경험했다는 선언이라고 세분합니다. 그러나 AC.68 자체는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세 표현을 함께 사용함으로써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경험을 단순한 생각이나 추측이 아니라 직접적인 경험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정도로 읽는 것이 더 충실합니다.

 

또한 이 세 가지 경험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증언이 상상이나 자기 암시일 수 없다고 논증해서도 안 됩니다. 현재 해설에는 상상이라면 질서 있게 보고 들을 수 없고, 자기 암시라면 일관된 구조와 반복 가능한 경험으로 남기 어려우며, 조작이라면 수십 년 동안 내부 정합성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AC.68에서 스베덴보리가 제시하는 논증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그러한 반론을 하나씩 논파하려 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경험했다고 증언하는 데 머뭅니다. 그 절제된 태도 자체를 그대로 보존하는 편이 이 단락의 힘을 더 잘 살립니다.

 

AC.68은 독자에게 스베덴보리의 증언을 무조건 믿으라고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이 보고 듣고 느꼈다고 말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번호에서 중요한 것은 독자에게 믿을 것인가, 거짓말이라고 것인가를 당장 선택하게 만드는 데 있다기보다, 앞으로 이어질 기록의 성격을 분명히 밝히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영계에 관하여 앞으로 기록할 내용들을 추측이나 철학적 사색이 아니라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하도록 허락된 것에 관한 증언으로 제시하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67AC.68은 매우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AC.67에서는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들이 다른 삶을 향하고 있으며, 그래서 그 삶의 본성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68에서는 그러한 말을 사람들이 믿기 어려워할 것이라는 사실까지 인정하면서도 그 증언을 거두지 않습니다. 독자는 바로 이 전제를 알고 이후의 기록을 읽게 됩니다.

 

그러므로 AC.68의 마지막 세 동사는 짧지만 중요합니다. ‘저는 보았고, 들었으며, 느꼈기 때문입니다.스베덴보리는 이 문장으로 모든 반론이 해결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반론을 예상하면서도 자신이 경험했다고 하는 것을 부정하거나 침묵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밝힙니다. 앞으로 그의 영계에 관한 기록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는 독자의 몫이지만, 적어도 스베덴보리 자신이 그것을 어떤 성격의 기록으로 제시하고 있는지는 이 짧은 번호에서 분명해집니다. (AC.68 해설)

 

 

 

AC.69, 창2 앞, ‘인간은 본래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AC.69사람은 주님에 의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실제로 태곳적에는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사람은 몸을 입은 영이므로 그들과 하나이

bygrace.kr

 

AC.67, 창2 앞, ‘왜 말씀의 속뜻을 알려면 다른 삶의 본성을 알아야 하는가’ (AC.67-72)

AC.67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에게는 말씀의 속뜻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 속뜻 안에는 이전에는 누구에게도 알려진 적이 없었고, 또 ‘다른 삶의 본성’(the nature of the other life)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