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는 결혼을 하지 않았고, 자녀도 두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독자들께서는 그렇다면 그는 우리가 살아가며 결혼과 자녀를 통해 겪는 풍성한 기쁨과 때로는 무거운 아픔을 정말 알고 있었을까? 하고 자연스레 궁금해하십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생애를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그는 단순히 결혼과 부모됨의 외적 경험이 없었을 뿐, 그 안에 담긴 정서적, 영적 세계에 대해선 매우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1. 스베덴보리는 젊은 시절부터 매우 따뜻한 가정 속에서 성장했다

 

스베덴보리는 엄격하지만 경건하며, 서로를 귀하게 여기는 가정에서 성장했습니다. 그의 아버지 예스퍼 스베덴보리는 루터교 주교로서 매우 바쁜 사람이었지만, 자녀들에게 남긴 편지들을 보면 자상하고 따뜻한 부정(父情)이 곳곳에 묻어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안에서 가족 간의 사랑, 존중, 격려, 그리움 같은 감정들을 어린 시절부터 깊이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가족 구성원 간의 사별도 수차례 겪었습니다. 어머니, 그리고 형제자매 몇 명과 일찍 이별했고, 나중에는 아주 친했던 누이까지 잃게 됩니다. 그는 이때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을 잃는 고통을 누구보다 생생히 느꼈습니다. 이 경험들은 그가 남긴 기록 곳곳에 잔잔하게 나타나며, 훗날 영계에 대한 저술에서도 이별, 그리움, 가족 간 애정의 본질을 섬세하게 다루는 데 토대가 되었습니다.

 

 

2. 청년기와 중년기에는 조카들과 제자들을 따뜻하게 품었던 아버지 같은 인물이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에게 친자녀는 없었지만, 조카들을 특별히 귀히 여겼습니다. 기록을 보면 조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생활을 돌봐주고, 여러 모임에 함께 데리고 다니며, 때로는 재정적 도움까지 아끼지 않았습니다. 또한 왕립과학아카데미에서 제자들과 후학을 길러낸 스베덴보리는 강단과 연구실에서 늘 부드럽고 인격적으로 대하는 스승으로 기억됩니다. 많은 제자가 그를 두고 “아버지 같았다.”라고 회상합니다. 이러한 관계성 속에서 스베덴보리는 ‘자녀를 직접 키우는’ 경험은 없었지만, 젊은 세대의 성장을 돕고, 그들의 걱정과 고민을 듣고, 조언하고 돌보는 삶을 실제로 오래 살았습니다.

 

 

3. 노년기에는 영계를 왕래하면서 오히려 인간 마음의 깊이를 더 선명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스베덴보리가 50대 후반부터 경험한 영계 체험은 인간 감정의 본질을 훨씬 깊이 들여다보도록 만들었습니다. 그가 ‘Heaven and Hell’, ‘Conjugial Love’ 등에서 보여주는 통찰은 단순히 ‘종교적 관념’이 아니라, 인간 마음의 작동을 세밀하게 관찰한 결과입니다. 특히 결혼과 부모됨에 대하여 그는 놀라울 만큼 감성적으로 세밀합니다. 예를 들어, ‘Conjugial Love’를 보면:

 

- 배우자 사이의 미묘한 감정의 흐름

- 사랑이 식어가는 과정

- 재결합의 기쁨

- 배우자 상실의 슬픔

- 자녀를 향한 깊은 애정

 

이런 내용들이 실제 경험한 사람의 기록처럼 생생하게 묘사됩니다. 이는 단순히 외적 경험이 아니라, 영계를 왕래하며 수많은 영혼이 실제 겪은 결혼과 가족의 이야기를 듣고 관찰한 결과였습니다. 그는 천국의 부부들이 보여주는 사랑, 지상에서 경험한 가정의 고통과 기쁨이 영적으로 어떻게 이어지는지 등을 매우 구체적으로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그가 남긴 결혼과 가족에 대한 기술은 오히려 직접 결혼한 저자들보다 더 포괄적이고 깊습니다.

 

 

4. 무엇보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의 감정이 경험의 양이 아니라 영적 이해의 깊이에서 나온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 감정의 실체가 육체적 경험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사랑과 의지의 작동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사람의 감정은 외적 사건보다 내면의 질(quality)에 의해 규정된다.’ 즉, ‘결혼을 했나, 안 했나’, ‘자녀가 있나, 없나’보다, 그 마음 안에 있는 사랑의 깊이와 방향성이 감정의 세계를 규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 자신의 경험이 좁았다기보다, 오히려 그는 수많은 인간의 내면을 직접 관찰한 사람이었고, 그만큼 인간의 기쁨과 슬픔을 누구보다 넓고 깊게 이해했습니다.

 

 

5. 결론적으로 그는 결혼과 자녀 양육의 외적 경험은 없었지만, 그 감정의 실제를 누구보다 깊이 알고 있었다

 

목사님께서 느끼시는

 

- 자녀를 향한 애틋한 마음

- 손주를 볼 때의 말할 수 없는 기쁨

- 가족 안에서 생기는 오해와 아픔

- 부모, 친척의 병과 죽음에서 오는 무거운 상실감

 

이 모든 것을 스베덴보리는 생애 전반과 영계 체험을 통해 매우 깊이 이해하고 있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결혼 여부’나 ‘자녀 유무’라는 생물학적 사실을 넘어, 인간의 사랑, 상실, 회복, 결합, 애정의 본질에 대해 누구보다 넓은 시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글을 읽을 때, ‘이 사람은 결혼도 안 해보고 무슨 말을 하나?’라는 느낌보다는, 오히려 ‘이 사람은 나보다 더 깊이 결혼과 가족을 이해하고 있구나’ 하는 인상을 받는 것입니다.

 

 

 

SC.60, ‘ChatGPT가 학습한 스베덴보리 관련 기록, 자료들의 범위’

1. 제가 읽은(학습한) 스베덴보리 관련 자료의 범위 저는 스베덴보리의 모든 주요 저작 전권이 학습 데이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다음의 대표 저작들은 전부 학습, 분석된 상태입니다. ① A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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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58, ‘이런저런 초대를 받고...’

주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어느 정도 불순한 식사 초대에도 번번이 응하셨지요... 왜 그러셨나요? 스베덴보리는 그런 경우가 없었나요? 저 역시 선뜻 내키지 않는 크고 작은 이런저런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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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2:7)

 

AC.97

생명이 호흡(breathing) (breath)으로 묘사되는 하나의 이유는 태고교회 사람들이 사랑과 신앙의 상태를 호흡의 상태를 통해 지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호흡은 그들의 후손에게서 점차 변화되었습니다. 호흡에 관해서는 아직 아무것도 말할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그러한 것들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태고 사람들은 이것을 알고 있었고, 저세상에 있는 이들도 그러하지만, 땅에서는 이제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그들이 또는 생명을 바람(wind) 비유한 이유입니다. 주님께서도 사람의 거듭남에 관하여 말씀하시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1) The reason why life is described by breathing and by breath is also that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perceived states of love and of faith by states of respiration, which were successively changed in their posterity. Of this respiration nothing can as yet be said, because at this day such things are altogether unknown. The most ancient people were well acquainted with it, and so are those who are in the other life, but no longer anyone on this earth, and this was the reason why they likened spirit or life to wind. The Lord also does this when speaking of the regeneration of man, in John:1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사람도 그러하니라 (3:8) The wind bloweth where it listeth, and thou hearest the voice thereof, and knowest not whence it cometh, or whither it goeth; so is everyone that is born of the spirit (John 3:8).

 

시편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So in David: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만상을 그의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33:6) By the word of Jehovah were the heavens made, and all the army of them by the breath of his mouth (Ps. 33:6).

 

29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30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104:29, 30) Thou gatherest their breath, they expire, and return to their dust; thou sendest forth thy spirit, they are created, and thou renewest the faces of the ground (Ps. 104:2930).

 

(breath)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뜻한다는 것은 욥기의 다음 말씀에서도 있습니다. That the breath [spiraculum] is used for the life of faith and of love, appears from Job:

 

그러나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 (32:8) He is the spirit in man, and the breath of Shaddai giveth them understanding (Job 32:8).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33:4) The spirit of God hath made me, and the breath of Shaddai hath given me life (Job 33:4).

 

1, 원어에서는 바람(wind), (spirit), (breath) 모두 같은 단어로 표현됩니다. In the original languages, wind, spirit, and breath are all expressed by the same word. [Reviser]

 

해설

AC.97은 생명이 왜 말씀에서 호흡으로 묘사되는지 또 하나의 이유를 설명합니다. AC.96에서는 코와 기쁜 향기가 퍼셉션과 관련되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의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셨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번에는 태고교회 사람들의 실제적인 상태를 근거로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그들은 사랑과 신앙의 상태를 호흡의 상태를 통하여 지각했습니다. 따라서 창2:7은 단순히 육체가 호흡하기 시작했다는 자연적인 생명의 표현에 그치지 않고,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사랑과 신앙이라는 내적 생명과도 깊이 관련된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태고교회의 호흡이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를 추측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호흡에 관해서는 아직 아무것도 말할 없다고 명시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그러한 것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고도 합니다. 다만 태고 사람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저세상에 있는 이들도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AC.97에서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사랑과 신앙의 내적 상태와 호흡의 상태 사이에 어떤 실제적인 관계가 있었다는 데까지입니다. 그 호흡의 방식이나 변화가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는 이 번호만으로 더 나아가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 사람들이 영 또는 생명을 바람에 비유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바람과 숨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작용을 통하여 존재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도 생명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지만, AC.97의 핵심 근거는 단순한 자연 관찰에 있지 않습니다. 태고 사람들이 자신의 사랑과 신앙의 상태를 호흡을 통하여 지각했던 경험과 말씀의 언어가 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에서는 바람과 숨과 영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나타납니다.

 

3:8에서 주님께서 거듭남을 설명하시며 바람을 말씀하신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인용됩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사람도 그러하니라는 말씀에서 주님은 바람을 통하여 성령으로 난 사람의 상태를 설명하십니다. AC.97에서 중요한 것은 바람의 자연적 특성을 하나하나 거듭남에 대응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거듭남을 말씀하시면서 바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다는 사실입니다. 2:7의 생명의 숨과 요3:8의 바람은 모두 인간의 거듭나는 생명이 인간 자신에게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이어 시편의 두 구절은 숨과 영이 창조와 생명에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33:6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어지고 그 입의 기운으로 그 만상이 이루어졌다고 하며, 104:29-30에서는 주께서 호흡을 거두시면 피조물이 먼지로 돌아가고 주의 영을 보내시면 다시 창조되어 지면이 새롭게 된다고 합니다. 특히 후자의 말씀은 창2:7과 매우 가까운 모습을 보여 줍니다. 생명은 피조물이 자기 안에 독립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받는 것이며, 주님께서 생명을 주심으로써 창조와 새롭게 됨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거듭남을 새로운 창조라고 한 AC.88의 설명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욥기의 두 구절은 이 이 특히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의미한다는 것을 뒷받침합니다. 32:8에서는 사람 안의 영과 전능자의 숨결이 이해를 주는 것으로 묘사되고, 33:4에서는 하나님의 영이 사람을 지으시고 전능자의 기운이 그를 살리신다고 합니다. 따라서 AC.94에서 생명의 을 신앙과 사랑의 생명이라고 한 것은 창2:7 한 구절만을 고립시켜 얻은 해석이 아닙니다. 말씀 곳곳에서 주님의 영과 숨이 인간에게 이해와 생명을 주고, 창조하며, 새롭게 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동일한 용법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 모든 성경 인용의 언어적 배경을 압축해서 밝혀 줍니다. 원어에서는 바람’, ‘’, ‘이 같은 단어로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이 표현들이 서로 연결되는 것은 우연한 비유의 반복이 아닙니다. 다만 이것 역시 세 단어가 언제나 모든 문맥에서 완전히 같은 의미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각각의 문맥에서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따로 살펴야 합니다. AC.97이 보여 주는 핵심은 말씀의 언어 자체에서 바람과 영과 숨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2:7생명의 역시 그 넓은 의미망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AC.97)

 

 

 

AC.98, 창2:8, ‘에덴동산 -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천적 인간의 지성’ (AC.98-101)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And Jehovah God planted a garden eastward in Eden, and there he put the man whom he had formed. (창2:8) AC.98‘동산’(garden)은 지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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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6, 창2:7, ‘코와 향기와 퍼셉션 -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6‘여호와 하나님이 그의 코에 숨을 불어넣으셨다’(Jehovah God breathed into his nostri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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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2:7)

 

AC.96

여호와 하나님이 그의 코에 숨을 불어넣으셨다(Jehovah God breathed into his nostrils) 것에 관해서는 이렇습니다. 고대에는, 그리고 말씀에서는 (nostrils) 냄새로 말미암아 기쁘게 느껴지는 모든 것을 이해했으며, 이것은 퍼셉션을 의미합니다. 이런 이유로 번제와 주님 주님의 나라를 표상하는 것들로부터 여호와께서 안식의 향기를 맡으셨다(smelled an odor of rest) 거듭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신앙에 속한 것들이 주님께 가장 기쁜 것이므로, 그의 코를 통하여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셨다(he breathed through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것입니다. 때문에 4:20에서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 주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우리 코의 (breath of the nostrils)이라 합니다. As to its being said that Jehovah Go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case is this: In ancient times, and in the Word, by nostrils was understood whatever was grateful in consequence of its odor, which signifies perception. On this account it is repeatedly written of Jehovah, that he smelled an odor of rest from the burnt offerings, and from those things which represented him and his kingdom; and as the things relating to love and faith are most grateful to him, it is said that he breathed through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Hence the anointed of Jehovah, that is, of the Lord, is called the breath of the nostrils (Lam. 4:20).

 

우리의 콧김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자가 그들의 함정에 빠졌음이여 우리가 그를 가리키며 전에 이르기를 우리가 그의 그늘 아래에서 이방인들 중에 살겠다 하던 자로다 (4:20)

 

그리고 주님 자신도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심(breathing on his disciples)으로써 같은 것을 의미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And the Lord himself signified the same by breathing on his disciples, as written in John: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0:22) He breathed on them and said, Receive ye the Holy Spirit (John 20:22).

 

해설

AC.96은 창2:7여호와 하나님이 그의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셨다는 말씀 가운데 특별히 가 왜 언급되는지를 설명합니다. 현대 독자에게는 생명을 불어넣는 장면에서 굳이 가 언급되는 것이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고대인들과 말씀에서 냄새로 말미암아 기쁘게 느껴지는 것이 퍼셉션을 의미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는 단순한 신체 기관으로만 언급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내적으로 지각하는 퍼셉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코가 냄새를 맡는 감각과 관련되고, 그 가운데 기쁘게 느껴지는 냄새가 퍼셉션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다만 이것을 자연적인 후각의 성질에서 우리가 임의로 영적 의미를 추론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AC.96이 제시하는 근거는 고대인들의 표상적 이해와 말씀 자체의 용법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번제와 주님 및 주님의 나라를 표상하는 것들에 관하여 여호와께서 안식의 향기를 맡으셨다고 말씀에 거듭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제시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실제로 제물에서 나는 물질적인 냄새를 즐기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AC.96은 그 이유를 사랑과 신앙에 속한 것들이 주님께 가장 기쁘기 때문이라고 직접 밝힙니다. 번제와 그 밖의 제사에 사용된 것들은 주님과 주님의 나라에 속한 것들을 표상하였고, 그것들이 나타내는 사랑과 신앙이 주님께 기쁜 것이기 때문에 말씀에서는 그것을 기쁜 향기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물의 냄새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표상하는 사랑과 신앙이며, 그 사랑과 신앙에 속한 것을 기쁘게 지각하는 것이 퍼셉션과 연결됩니다.

 

이제 그의 코를 통하여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셨다는 말의 의미도 한층 분명해집니다. AC.94에서는 생명의 을 신앙과 사랑의 생명이라고 했고, AC.95에서는 신앙의 생명이 사람을 준비시키지만 사랑의 생명이 그를 사람되게 한다고 했습니다. AC.96은 그 생명이 왜 를 통하여 주어지는 것으로 묘사되는지를 설명합니다. 천적 인간에게 주어지는 신앙과 사랑의 생명은 단지 외적으로 배우고 이해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내적으로 지각하는 퍼셉션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앞에서 천적 인간의 중요한 특징으로 나타났던 퍼셉션이 이제 창2:7라는 표현을 통해 생명의 숨과 연결되고 있습니다.

 

4:20우리 코의 이라는 말씀도 이러한 의미를 보여 주기 위해 인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구절의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를 주님과 관련하여 이해하면서, ‘이라는 표현이 단순한 육체적 호흡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AC.94-96에서 인간은 자기 안에서 영적 생명을 만들어 내는 존재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며, 인간은 그 생명을 받습니다. 따라서 신앙과 사랑의 생명도, 그것을 내적으로 지각하는 퍼셉션도 인간의 proprium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인용되는 요20:22은 창2:7과 매우 깊은 연결을 보여 줍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이 행동을 통하여 창2:7에서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신 것과 같은 것을 의미하셨다고 설명합니다. 창세기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고, 요한복음에서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두 장면 모두 생명의 근원이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고 주님께 있으며,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그 생명을 받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요20:22은 창2:7이 단순히 자연적인 호흡이나 육체적 생명에 관한 표현이 아니라 영적 생명에 관한 말씀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빛을 던져 줍니다.

 

결국 AC.96AC.94-95에서 설명한 생명의 을 천적 인간의 퍼셉션과 연결하여 더욱 깊이 이해하게 합니다.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받는다는 것은 단지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의지적으로 실천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내적으로 지각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래서 창2:7’, 말씀에 나타나는 기쁜 향기, 천적 인간의 퍼셉션, 여호와 하나님께서 불어넣으시는 생명의 숨, 그리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말씀이 서로 깊이 연결됩니다. 이 모든 표현은 영적 생명의 근원이 오직 주님께 있으며, 그 생명이 인간에게 흘러들어 신앙과 사랑을 살아 있게 하고 그것들을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지각하게 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AC.96)

 

 

 

AC.97, 창2:7, '생명이 숨과 호흡으로 묘사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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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5, 창2:7, ‘신앙의 생명은 준비시키고, 사랑의 생명은 사람 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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