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14-17)

 

AC.32

사랑과 신앙을 처음에는 함께 광명체들(great luminaries)이라 하고, 그다음에는 사랑을 광명체(greater luminary), 신앙을 작은 광명체(lesser luminary) 합니다. 또한 사랑을 가리켜서는 낮을 다스린다(rule by day) 하고, 신앙을 가리켜는 밤을 다스린다(rule by night) 합니다. 이런 내용이 바로 아르카나(arcana)인데, 특히 마지막 시대에 숨겨져 있는 것을 이제 제가 설명해도 좋다는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 있었습니다. 아르카나가 특히 마지막 시대에 가려져 있는 이유는, 지금이 세대의 종말(the consummation of the age)이기 때문이며, 이때에는 사랑이 거의 없고, 결과 신앙도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복음서에서 다음과 같이 친히 예고하신 바와 같습니다. Love and faith are first called “great luminaries,” and afterwards love is called a “greater luminary,” and faith a “lesser luminary”; and it is said of love that it shall “rule by day,” and of faith that it shall “rule by night.” As these are arcana which are hidden, especially in this end of days, it is permitted of the Lord’s Divine mercy to explain them. The reason why these arcana are more especially concealed in this end of days is that now is the consummation of the age, when there is scarcely any love, and consequently scarcely any faith, as the Lord himself foretold in the evangelists in these words:

 

그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24:29) The sun shall be darkened, and the moon shall not give her light, and the stars shall fall from heaven, and the powers of the heavens shall be shaken (Matt. 24:29).

 

여기서 (sun) 사랑, 어두워지는 사랑을, ‘(moon) 신앙, 특히 빛을 내지 못하는 신앙을, ‘별들(stars) 신앙 관련 지식(the knowledges of faith), 하늘에서 떨어지는, 그러니까 하늘의 권능들(virtues and powers of the heavens) 의미합니다. By the “sun” is here meant love, which is darkened; by the “moon” faith, which does not give light; and by the “stars,” the knowledges of faith, which fall from heaven, and which are the “virtues and powers of the heavens.

 

[2] 태고교회는 사랑 자체 외에 무슨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습니다. 천적 천사들 역시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 무슨 다른 신앙을 알지 못합니다. 천국은 사랑의 천국이며, 천국(heavens)에는 사랑의 생명 외에 다른 생명은 없습니다. 모든 천국 행복이 여기서 나오는데, 그레이트(great)함은 어떤 말로도 설명할 없고, 어떤 인간의 생각으로도 결코 상상할 없습니다. 사랑의 영향을 받는 이들은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지만, 동시에 모든 사랑과, 결과 모든 생명, 사랑에서만 나오는 모든 생명과 모든 행복이 오직 주님에게서만 온다는 사실을 알고, 고백하며, 지각합니다(perceive). 그들은 자신에게서 나오는 사랑이나 생명이나 행복은 조금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압니다. 모든 사랑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은, 주님의 변화산 사건에서 광명체, (sun)로도 표현되었습니다. 기록되기를, The most ancient church acknowledged no other faith than love itself. The celestial angels also do not know what faith is except that which is of love. The universal heaven is a heaven of love, for there is no other life in the heavens than the life of love. From this is derived all heavenly happiness, which is so great that nothing of it admits of description, nor can ever be conceived by any human idea. Those who are under the influence of love, love the Lord from the heart, but yet know, declare, and perceive, that all love, and consequently all life—which is of love alone—and thus all happiness, come solely from the Lord, and that they have not the least of love, of life, or of happiness, from themselves. That it is the Lord from whom all love comes was also represented by the great luminary or “sun” at his transfiguration, for it is written: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얼굴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17:2) His face did shine as the sun, and his raiment was white as the light (Matt. 17:2).

 

얼굴은 가장 안쪽의 것들을 뜻하고, 옷은 거기서 나오는 것들을 뜻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신성(the Lord’s Divine) (sun), 사랑으로, 그의 인성(his human)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 (light)으로 상징되었습니다. Inmost things are signified by the face, and the things that proceed from them by the raiment. Thus the Lord’s Divine was signified by the “sun,” or love; and his human by the “light,” or wisdom proceeding from love.

 

해설

AC.32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조 넷째 날의 ‘ 광명체’가 왜 처음에는 함께 ‘ 광명체들’이라 불리다가, 이어서는 하나는 ‘ 광명체’, 다른 하나는 ‘ 작은 광명체’라고 불리는지를 설명합니다. 그 속뜻에서 사랑과 신앙은 모두 사람을 밝히는 광명체이지만, 둘의 관계에는 분명한 질서가 있습니다. 사랑이 ‘ 광명체’이고 신앙이 ‘ 작은 광명체’입니다. 또한 사랑은 ‘낮을 다스리고’, 신앙은 ‘밤을 다스립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랑이 신앙보다 더 중요하다는 가치 비교가 아닙니다. AC.30에서 이미 밝혔듯이 생명 있는 신앙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신앙은 서로 경쟁하는 두 원리가 아니라 하나의 질서 안에 있습니다.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옵니다. 이 때문에 둘 다 광명체이지만 사랑은 더 큰 광명체로, 신앙은 더 작은 광명체로 표현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아르카나’라고 부르면서, 특히 당시의 ‘마지막 시대’에는 이 사실이 감추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세대의 종말’에 이르러 사랑이 거의 없고,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순서입니다. 그는 ‘신앙이 없어져서 사랑도 없어졌다’고 하지 않고, ‘사랑이 거의 없고, 결과 신앙도 거의 없다’고 합니다. 이것만으로도 AC.32가 말하려는 사랑과 신앙의 관계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마24:29을 인용합니다.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진다’는 말씀에서, ‘’는 사랑을, ‘’은 신앙을, ‘별들’은 신앙에 관한 지식들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속뜻에서는 사랑이 어두워지고, 신앙이 빛을 잃으며, 신앙에 관한 지식들까지 그 본래의 자리를 잃는 교회의 영적 상태가 묘사됩니다.

 

이 관계는 매우 중요합니다. 사랑이 사라지면 신앙만 따로 온전히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생명이 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교리와 신앙고백과 성경 지식이 남아 있을 수 있어도,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서 분리되면 그것은 본래의 생명을 잃어 갑니다. 그래서 해가 어두워질 때 달도 빛을 내지 못하고 별들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 태고교회와 천적 천사들을 예로 듭니다. 태고교회는 ‘사랑 자체 외에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다’고 하며, 천적 천사들 역시 ‘사랑에 속한 신앙’ 외의 신앙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진리가 없었다거나 신앙에 속한 것을 몰랐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과 신앙이 오늘날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들에게 신앙은 사랑과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 있는 신앙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 천국은 사랑의 천국’이라고 말합니다. 천국에는 사랑의 생명 외에 다른 생명이 없으며, 모든 천국의 행복도 여기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천국의 행복은 단순히 좋은 환경이나 즐거운 감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천적 상태에 있는 이들은 자신들의 사랑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들은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면서도, 모든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모든 생명과 행복이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며, 지각합니다’. 이것은 AC.29-30에서 계속 이어져 온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셋째 날의 사람은 아직 자신이 행하는 선과 말하는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지만,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사람은 그 생명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음을 점차 인정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사실을 주님의 변화산 사건과 연결합니다. 마17:2에서 주님의 얼굴은 해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그는 ‘얼굴’이 가장 안쪽의 것들을, ‘’이 거기에서 나오는 것들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신성은 ‘’, 곧 사랑으로 표현되고, 그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는 ‘’으로 표현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도 같은 질서가 나타납니다. 사랑이 근원이고, 지혜와 빛은 그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AC.32에서 해가 사랑이고 달이 신앙이라는 것은 단순한 상응표 하나를 배우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 상응 안에는 거듭남과 천국의 근본 질서가 들어 있습니다. 사랑과 신앙은 서로 분리되어서는 안 되며,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사랑이 사라지면 신앙도 빛을 잃고, 신앙에 관한 지식들 역시 본래의 영적 기능을 잃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근원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천적 천사들이 사랑과 생명과 행복을 자기에게서 조금도 얻지 않는다고 지각하듯, 사람의 참된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역시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이 깊어진다는 것은 단순히 더 많은 진리를 알게 되는 것만이 아니라, 사랑과 신앙의 올바른 질서가 사람 안에서 회복되고 그 모든 생명의 근원이 주님임을 점점 더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AC.32에서 ‘ 광명체’와 ‘ 작은 광명체’가 보여 주는 아르카나입니다. 사랑은 해처럼 중심에 있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이 질서가 사라진 시대에 바로 그 질서를 다시 밝혀 주는 것이, 스베덴보리가 이 글에서 설명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심화

1. 세대의 종말  수백 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일까?

 

AC.32, 심화 1, ‘세대의 종말’은 왜 수백 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일까?

AC.32.심화1. ‘세대의 종말’은 왜 수백 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일까? 위 AC.32 본문, ‘지금이 세대의 종말이기 때문이며’(now is the consummation of the age) 말인데요, 이 글, 곧 ‘Arcana Coe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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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랑이 사라지면 사랑과 신앙의 아르카나도 가려지는가?

 

AC.32, 심화 2, 왜 사랑이 사라지면 사랑과 신앙의 아르카나도 가려지는가?

AC.32.심화2. 왜 사랑이 사라지면 사랑과 신앙의 아르카나도 가려지는가? 위 AC.32 본문, ‘이 아르카나가 특히 이 마지막 시대에 가려져 있는 이유는, 지금이 세대의 종말이기 때문이며, 이때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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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여기서 말하는 태고교회, 천적 천사들의 의미

 

AC.32, 심화 3, 여기서 말하는 ‘태고교회, 천적 천사들’의 의미

AC.32.심화 3. 여기서 말하는 ‘태고교회, 천적 천사들’의 의미 위 AC.32 본문, ‘태고교회는 사랑 자체 외에 무슨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습니다. 천적 천사들 역시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 무슨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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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 창1:14-17, 생명과 기쁨, 행복의 근원은 ‘사랑’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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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창1:14-17, ‘큰 광명체들’의 속뜻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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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14-17)

 

AC.31

큰 광명체들(great luminaries)의 의미가 사랑과 신앙이며, 또한 ,,(sun, moon, and stars)이라 한다는 사실은 선지자들의 글을 보면 분명합니다. 에스겔에서처럼 말입니다. That the “great luminaries” signify love and faith, and are also called “sun, moon, and stars,” is evident from the prophets, as in Ezekiel:

 

7내가 너를 불 끄듯 할 때에 하늘을 가리어 별을 어둡게 하며 해를 구름으로 가리며 달이 빛을 내지 못하게 할 것임이여 8하늘의 모든 밝은 빛을 내가 네 위에서 어둡게 하여 어둠을 네 땅에 베풀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2:7, 8) When I shall extinguish thee, I will cover the heavens and make the stars thereof black; I will cover the sun with a cloud, and the moon shall not give her light; all the luminaries of the light of heaven will I make black over thee, and I will set darkness upon thy land (Ezek. 32:7–8).

 

이 구절들은 바로와 애굽을 다루는데, 말씀에서 바로와 애굽은 감각적인 것과 단지 지식적인 것의 원리를 뜻합니다. 여기서는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었음을 말합니다. 이사야에서도 그렇습니다. In this passage Pharaoh and the Egyptians are treated of, by whom are meant, in the Word, the principle of mere sense and of mere knowledge [sensuale et scientificum]; and here, that by things of sense and of mere knowledge, love and faith had been extinguished. So in Isaiah:

 

9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 10하늘의 별들과 별 무리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추지 아니할 것이로다 (13:9, 10) The day of Jehovah cometh to set the land in desolation, for the stars of heaven and the constellations thereof shall not give their light; the sun is darkened in his going forth, and the moon shall not cause her light to shine (Isa. 13:9–10).

 

요엘에서도입니다. Again, in Joel:

 

1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 이 땅 주민들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2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새벽빛이 산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와 같은 것이 옛날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대대에 없으리로다, 10그 앞에서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떨며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도다 (2:1-2, 10) The day of Jehovah cometh, a day of darkness and of thick darkness; the earth trembleth before him, the heavens are in commotion; the sun and the moon are blackened, and the stars withdraw their brightness (Joel 2:1–2, 10).

 

[2] 다시 이사야에서는 주님의 강림과 이방인들의 밝아짐, 곧 새 교회와, 특히 어둠 가운데 있다가 빛을 받아 거듭나는 모든 사람에 대해 말하면서, Again, in Isaiah, speaking of the advent of the Lord and the enlightening of the gentiles, consequently of a new church, and in particular of all who are in darkness, and receive light, and are being regenerated:

 

1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2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3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20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 (60:1-3, 20) Arise, shine, for thy light is come; behold darkness covers the earth, and thick darkness the peoples, and Jehovah shall arise upon thee, and the gentiles shall come to thy light, and kings to the brightness of thy rising; Jehovah shall be to thee a light of eternity, thy sun shall no more go down, neither shall thy moon withdraw itself, for Jehovah shall be to thee a light of eternity (Isa. 60:1–3, 20).

 

시편도 이렇게 말합니다. So in David:

 

5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6땅을 물 위에 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7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8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9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36:5-9) Jehovah in intelligence maketh the heavens; he stretcheth out the earth above the waters; he maketh great luminaries, the sun to rule by day, the moon and stars to rule by night (Ps. 136:5–9).

 

3해와 달아 그를 찬양하며 밝은 별들아 다 그를 찬양할지어다 4하늘의 하늘도 그를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그를 찬양할지어다 (148:3, 4) Glorify ye Jehovah, sun and moon, glorify him, all ye stars of light, glorify him, ye heavens of heavens, and ye waters that are above the heavens (Ps. 148:3–4).

 

[3] 이 모든 구절에서 광명체들(luminaries)은 사랑과 신앙을 뜻합니다. 광명체들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나타내고 뜻했기 때문에, 유대교회에서는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타는 등불을 두도록 했습니다. 그 교회의 모든 규례는 주님을 대표, 즉 표상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이 등불에 관한 기록입니다. In all these passages, “luminaries” signify love and faith. It was because “luminaries” represented and signified love and faith toward the Lord that it was ordained in the Jewish church that a perpetual luminary should be kept burning from evening till morning, for every ordinance in that church was representative of the Lord. Of this luminary it is written:

 

20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않게 등불을 켜되 21아론과 그의 아들들로 회막 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보살피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지킬 규례이니라 (27:20, 21) Command the sons of Israel that they take oil for the luminary, to cause the lamp to ascend continually: in the tabernacle of the congregation without the veil, which is before the testimony, shall Aaron and his sons order it from evening even until morning, before Jehovah (Exod. 27:20–21).

 

이 모든 것이 주님께서 속 사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을 불붙이시고 빛나게 하시며,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 안에서도 그렇게 하신다는 뜻임은, 주님의 신적 자비로 적절한 곳에서 밝힐 것입니다. That these things signify love and faith, which the Lord kindles and causes to give light in the internal man, and through the internal man in the external, 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shown in its proper place.

 

해설

AC.31에서 스베덴보리는 앞의 AC.30에서 밝힌 광명체들의 의미를 말씀 전체의 여러 구절을 통하여 확인합니다. 1의 해와 달과 별은 단순히 자연계의 천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속뜻에서는 사랑과 신앙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선지서에서 해와 달과 별이 어두워지거나 빛을 잃는 장면은 자연계의 천체에 일어날 사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나 교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이 쇠하거나 소멸되는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겔32:7-8을 인용합니다. 이 말씀은 바로와 애굽을 다루는데, 그는 말씀에서 바로와 애굽이 여기서는 감각적인 것과 단지 지식적인 것의 원리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는 상태가 해와 달과 별이 어두워지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감각이나 지식 자체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도 단지 감각적인 ’, ‘단지 지식적인 에 초점이 있습니다. 사람이 감각과 기억 지식에만 머물러 그것을 영적인 것보다 앞세울 때, 사랑과 신앙의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3:9-10과 욜2:1-2,10에서도 해와 달과 별이 어두워지는 모습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들을 여기서 인용하는 이유는 같은 상응이 말씀의 여러 곳에서 일관되게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해와 달과 별이 문자적으로는 천체이지만, 속뜻에서는 사랑과 신앙에 관계된 것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것들의 빛이 사라지는 모습으로 사랑과 신앙이 쇠하고 어두워지는 상태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AC.31은 어두워짐만 말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사60:1-3,20에서는 반대의 상태가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이 주님의 강림과 이방인들의 밝아짐, 따라서 새 교회에 관한 것이며, 특별히 어둠 가운데 있다가 빛을 받아 거듭나는 모든 사람에 관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앞에서는 해와 달과 별의 빛이 사라졌지만 여기서는 빛이 임하고, 여호와께서 영원한 빛이 되시며, 해가 다시 지지 않고 달도 물러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랑과 신앙의 빛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이 이 말씀을 통하여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것은 AC.30과도 직접 연결됩니다. 앞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랑과 신앙이 사람의 의지와 이해 안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것들을 불붙이고 빛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해와 달의 빛은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영적 빛을 뜻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랑하고 믿고 진리를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랑과 신앙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창조 넷째 날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놓이는 것도 이러한 사랑과 신앙이 속 사람 안에 자리 잡는 거듭남의 상태와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 시136:5-9와 시148:3-4도 인용합니다. 136에서는 큰 빛들과 해와 달과 별이 창조되고 낮과 밤을 주관하는 모습이 나오며, 148에서는 해와 달과 밝은 별들이 여호와를 찬양합니다. 이러한 여러 인용을 통하여 스베덴보리가 보여 주려는 핵심은 말씀에서 광명체들이 사랑과 신앙을 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창1의 넷째 날도 자연계의 천체에 관한 문자적 서술 안에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사랑과 신앙의 질서를 담고 있습니다.

 

AC.31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 의미가 유대교회의 예배 규례와도 연결됩니다. 27:20-21에서는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을 사용하여 회막 안의 등불을 저녁부터 아침까지 계속 밝히도록 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광명체들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표상하고 뜻했기 때문에 이러한 규례가 주어졌다고 설명합니다. 유대교회의 규례들이 주님을 표상하는 것이었으므로, 성막의 등불 역시 단순히 공간을 밝히기 위한 조명 이상의 대표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의미를 마지막 문장에서 매우 중요하게 정리합니다. 그 등불에 관한 규례는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을 불붙이시고 빛나게 하시며, 사람을 통해 사람 안에서도 그렇게 하시는 을 뜻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그 자세한 의미를 여기서 모두 설명하지 않고 적절한 곳에서밝히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AC.31에서는 등불의 세부적인 상응을 앞당겨 확정하기보다, 사랑과 신앙의 근원이 주님이며 그것들이 속 사람에서 겉 사람으로 나타난다는 큰 원리를 붙드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렇게 보면 AC.31의 여러 성경 인용은 각각 별개의 주제를 설명하기 위해 모아 놓은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 이사야, 요엘, 시편, 출애굽기를 가로질러 하나의 일관된 원리를 보여 줍니다.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면 광명체들이 어두워지는 것으로 표현되고, 사랑과 신앙이 주님에게서 새롭게 받아들여지면 빛이 임하는 것으로 표현되며, 예배의 표상 안에서는 계속 밝혀지는 등불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AC.31의 중심은 해와 달과 별의 상응을 아는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더 깊은 중심은 우리의 사랑과 신앙에 생명을 주고 빛을 주시는 분이 누구인가에 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이 스스로 빛의 근원이 아니듯, 사람 안의 참된 사랑과 신앙도 사람 자신의 proprium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속 사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을 불붙이고 빛나게 하시며, 그것이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의 삶에도 나타나게 하십니다. 이것이 창조 넷째 날의 광명체들을 통하여 AC.31이 보여 주는 거듭남의 중요한 질서입니다.

 

심화

1.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는 실제 사례

 

AC.31, 심화 1,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는 실제 사례’

AC.31.심화 1.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는 실제 사례’ 위 AC.31 본문, ‘여기서는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었음을 말합니다.’(and here, that by 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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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에 나오는 새 교회

 

AC.31, 심화 2, 사60에 나오는 ‘새 교회’

AC.31.심화 2. 사60에 나오는 ‘새 교회’ 위 AC.31 [2]에서 사60:1-3, 20을 인용하며 ‘새 교회’를 언급하는데요, 이 ‘새 교회’는 어떤 새 교회인가요? 지금은 현 기독교 이후에 오는 교회를 ‘새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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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내적 의미를 몰라도 어떻게 거룩한 표상을 지킬  있었을까?

 

AC.31, 심화 3, ‘유대교회의 항상 타는 등불의 규례’

AC.31.심화 3. ‘유대교회의 항상 타는 등불의 규례’ 위 AC.31 [3]의 ‘유대교회에서는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타는 등불을 두도록 했다’는 부분 말인데요, 그들은 정말 ‘영원히’ 이 규례를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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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 창1:14-17, ‘큰 광명체’는 사랑, ‘작은 광명체’는 신앙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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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 창1:14-17,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AC.30-37)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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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And God said, Let there be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distinguish between the day and the night; and let them be 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 And let them be for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And God made two great luminaries, the greater luminary to rule by day, and the lesser luminary to rule by night; and the stars. And God set them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1:14-17)

 

AC.30

큰 광명체들(great luminaries)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먼저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새로 창조되고 있는 사람들 안에서 신앙이 어떻게 자라 가는지를 알지 않으면 분명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본질과 생명은 오직 주님이시며,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는 주님 친히 요한복음에서 밝히신 바입니다. What is meant by “great luminaries” cannot be clearly understood unless it is first known what is the essence of faith, and also what is its progress with those who are being created anew. The very essence and life of faith is the Lord alone, for he who does not believe in the Lord cannot have life, as he himself has declared in John: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3:36) He that believeth on the son hath eternal life, but he that believeth not on the son shall not see life, but the wrath of God shall abide upon him (John 3:36).

 

[2] 새로 창조되고 있는 사람들 안에서 신앙이 자라 가는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그들에게 생명이 없습니다. 생명은 선과 진리 안에만 있고, 악과 거짓 안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다음에 그들은 신앙을 통해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데, 먼저는 기억에 속한 신앙, 곧 단지 지식에 불과한 신앙인 기억 지식의 신앙을 받습니다. 다음에는 이해에 속한 신앙, 곧 이성적 신앙을 받고, 마지막으로는 마음에 속한 신앙, 곧 사랑의 신앙이며 구원의 신앙을 받습니다. 앞의 두 종류의 신앙은 3절로 13절에서 생명 없는 것들로 표현되며, 사랑에 의해 생명을 얻는 신앙은 20절로 25절에서 생명 있는 것들로 표현됩니다. 이 때문에 여기서는 이제 처음으로 사랑과 거기서 나온 신앙을 다루는데, 이것들이 바로 광명체들(luminaries)입니다. 사랑은 낮을 다스리는 큰 광명체(the greater luminary which rules by day)이고, 사랑에서 나온 신앙이 밤을 다스리는 작은 광명체(the lesser luminary which rules by night)입니다. 이 두 광명체는 하나가 되어야 하므로, 광명체들이 있어(Let there be luminaries, [sit luminaria])라는 라틴어 단수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라틴어 복수 표현인 [sint luminaria]가 아니고 말입니다. The progression of faith with those who are being created anew is as follows. At first they have no life, for it is only in the good and the true that there is life, and none in the evil and the false; afterwards they receive life from the Lord by faith, first by faith of the memory, which is a faith of mere knowledge [fides scientifica]; next by faith in the understanding, which is an intellectual faith; lastly by faith in the heart, which is the faith of love, or saving faith. The first two kinds of faith are represented from verse 3 to verse 13, by things inanimate, but faith vivified by love is represented from verse 20 to verse 25, by animate things. For this reason love, and faith thence derived, are now here first treated of, and are called “luminaries”; love being “the greater luminary which rules by day”; faith derived from love “the lesser luminary which rules by night”; and as these two luminaries ought to make a one, it is said of them, in the singular number, “Let there be luminaries” [sit luminaria], and not in the plural [sint luminaria].

 

[3] 속 사람 안에서의 사랑과 신앙은 겉 사람의 육체적 차원에서의 열과 빛과 같으므로, 전자는 후자로 표현됩니다. 이런 이유로 광명체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set in the expanse of heaven)라고 하는데, 이는 속 사람 안에 놓였다는 뜻입니다. 큰 광명체는 의지 안에, 작은 광명체는 이해 안에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날 뿐입니다. 의지를 사랑으로 움직이게 하고, 이해를 진리 또는 신앙으로 비추는 것은 오직 주님의 자비뿐입니다. Love and faith in the internal man are like heat and light in the external corporeal man, for which reason the former are represented by the latter. It is on this account that luminaries are said to be “set in the expanse of heaven,” or in the internal man; a great luminary in its will, and a lesser one in its understanding; but they appear in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only as does the light of the sun in its recipient objects. It is the Lord’s mercy alone that affects the will with love, and the understanding with truth or faith.

 

해설

AC.30의 중심은 창조 넷째 날에 나타나는 광명체들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해와 달의 상응부터 설명하지 않고 먼저 신앙의 본질과 생명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그 답은 매우 분명합니다. 신앙의 본질과 생명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신앙이 생명을 가지는 것은 사람이 어떤 교리를 알고 있거나 그것을 지적으로 인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신앙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3:36을 인용하여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음을 먼저 밝힙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새로 창조되는 사람, 곧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신앙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세 단계로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기억에 속한 신앙’, 곧 단지 지식으로 알고 있는 신앙입니다. 말씀과 교리를 배우고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진리인지를 기억 속에 가지고 있지만, 아직 그것이 사람의 내적 생명이 된 것은 아닙니다. 다음에는 이해에 속한 신앙’, 곧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인정하는 신앙이 옵니다. 사람은 이제 배운 진리가 왜 참인지 어느 정도 이해하고 그것에 지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아직 신앙의 완성은 아닙니다.

 

마지막에는 마음에 속한 신앙이 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사랑의 신앙또는 구원의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앙이 단순히 더 많은 지식을 얻거나 더 정교한 이해에 도달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사랑과 결합함으로써 생명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의 두 종류의 신앙은 창1:3-13생명 없는 것들로 표현되고, 사랑에 의해 생명을 얻은 신앙은 창1:20-25생명 있는 것들로 표현됩니다. 셋째 날까지 나타난 빛과 궁창과 땅과 식물은 반드시 필요한 준비이지만, 아직 사랑으로 생명을 얻은 신앙 자체는 아닙니다.

 

이 점은 바로 앞의 AC.29와도 매우 중요하게 연결됩니다. 셋째 날에는 이미 땅에서 풀이 돋고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까지 나타났습니다. 실제로 선하고 참된 것이 사람의 삶에서 어느 정도 열매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도 스베덴보리는 그 단계가 아직 생명 없는 것들에 속한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이 자기가 행하는 선과 말하는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넷째 날에 이르러 결정적인 변화가 시작됩니다. 사랑과 신앙이 광명체들로 나타나고, 그 생명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음을 점점 인정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넷째 날의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는 단순히 자연계의 해와 달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낮을 다스리는 광명체는 사랑을, ‘밤을 다스리는 작은 광명체는 사랑에서 나온 신앙을 뜻합니다. 여기서 순서가 중요합니다. 신앙이 먼저 있고 거기에 나중에 사랑이 덧붙는 것이 아니라, 생명 있는 신앙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사랑이 큰 광명체이고 신앙이 작은 광명체인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신앙은 서로 분리된 두 생명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둘이 하나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라틴어 표현까지 주목합니다. 본문에서 광명체들을 말하면서도 동사가 복수형 sint가 아니라 단수형 sit으로 쓰였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사랑과 사랑에서 나온 신앙이 하나를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과 연결합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면 그 신앙에는 본래 있어야 할 생명이 없으며, 사랑 역시 그 사랑에서 나오는 진리와 신앙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 속 사람 안의 사랑과 신앙을 겉 사람의 육체적 차원에서 경험하는 열과 빛에 비유합니다. 그래서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놓였다고 하는 것은 그것들이 속 사람 안에 놓였음을 뜻합니다. 큰 광명체인 사랑은 의지 안에, 작은 광명체인 신앙은 이해 안에 있습니다. 여기서 의지와 이해는 단순한 인간의 심리 기능이 아니라,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중요한 두 능력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욱 중요한 구별이 하나 나옵니다. 사랑과 신앙이 사람의 의지와 이해 안에 있으므로 얼핏 보면 그것들이 사람 자신의 것처럼 보입니다. 내가 사랑하고, 내가 이해하며, 내가 믿는 것처럼 경험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나타날 이라고 말합니다. 마치 태양의 빛이 어떤 대상을 비추면 그 대상 자체가 빛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빛의 근원은 그 대상에 있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의지를 사랑으로 움직이게 하고 이해를 진리 또는 신앙으로 비추는 근원은 오직 주님의 자비입니다.

 

이것은 셋째 날과 넷째 날 사이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 특히 중요합니다. 셋째 날의 사람도 이미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아직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깁니다. 넷째 날에는 사람이 점차 그 선과 진리의 생명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합니다. 사람이 선을 행하지 않는다는 뜻도 아니고, 자신의 의지와 이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뜻도 아닙니다. 사람은 여전히 자유롭게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합니다. 다만 그 선과 진리의 생명과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주님께 돌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AC.30에서 말하는 넷째 날은 단순히 신앙이 강해지는단계가 아닙니다. 신앙의 성질 자체가 달라지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기억에만 있던 신앙, 이해에 머물던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여 마음의 신앙이 되고, 비로소 구원의 신앙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사랑과 사랑에서 나온 신앙이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로 표현됩니다.

 

결국 넷째 날의 핵심은 내가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도 아니고 내가 얼마나 논리적으로 믿고 있는가도 아닙니다.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신앙의 생명은 궁극적으로 사람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것을 깨닫고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앞선 날들 동안 준비되어 온 사람의 내면에 비로소 광명체들이 놓이고, 그 빛 아래에서 다음 단계의 살아 있는 것들이 나타날 준비가 이루어집니다.

 

심화

1. 의지와 이해 안에 나타나지만 그 근원은 주님께 있다는 것

 

AC.30, 심화 1,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

AC.30.심화 1.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날 뿐’ 위 AC.30 분문 [3], ‘그러나 그것들은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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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창1:14-17, ‘큰 광명체들’의 속뜻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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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 창1:11-13,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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