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8 심화

2. 황폐(vastation, vastatio) 무엇인가?

 

AC를 영어로 읽다 보면 오늘날에는 다소 낯선 vastation이라는 단어를 만나게 됩니다. AC.18에서 Potts선지자들이 자주 말하는 인간의 황폐라는 대목에 vastation을 사용합니다. 현대 영어 독자에게는 devastation이나 desolation이 훨씬 익숙하기 때문에, 왜 이런 단어가 사용되었으며 정확히 어떤 의미로 읽어야 하는지가 자연스럽게 문제가 됩니다. 이 경우에는 영어 단어 자체에서 의미를 추측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사용한 라틴어와 AC 안에서의 용례를 함께 보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라틴어 원문에서 중요한 말은 vastatio입니다. 이것은 황폐하게 함, 비워짐, 황폐 상태와 관련된 말이며, 영어 번역의 vastation은 이 라틴어를 형태상 매우 가깝게 따라간 번역어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일반 영어에서 vastation이 얼마나 흔한가만 가지고 그 뜻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Potts 번역에서 이 단어를 만날 때는 일상 영어의 자연스러운 표현이라기보다 스베덴보리의 라틴어 전문 개념을 가능한 한 일관되게 전달하려는 번역어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다면 vastatio를 한국어로 무엇이라 해야 할까요?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황폐가 가장 적절합니다. 황폐는 무언가가 비어 가고 이전의 것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AC의 여러 문맥을 비교적 폭넓게 담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일상 한국어에서 황폐라고 하면 전쟁으로 도시가 파괴되거나 마음이 완전히 망가진 상태처럼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를 먼저 떠올릴 수 있으므로, AC에서의 뜻은 반드시 문맥을 통해 이해해야 합니다.

 

AC.18은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출발점을 직접 제공합니다. 사람이 참된 것을 알고 선한 것에 의해 감동될 수 있으려면 그것들의 유입을 방해하고 거스르는 것들이 제거되어야 한다고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황폐는 단순한 파괴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 선과 진리를 이루시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이 처리되고 물러나는 과정과 관련됩니다. 그래서 AC.18에서는 깊음이 마르거나 황폐해진다는 표현과 옛사람은 사람이 잉태되기 전에 죽어야 한다는 표현이 서로 연결됩니다.

 

이 때문에 vastatio를 단순히 고난이나 시련이라고 번역하는 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외적으로 큰 고난을 겪는다고 해서 그것이 언제나 AC가 말하는 황폐인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황폐의 과정이 반드시 눈에 띄는 외적 재난의 모습으로만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황폐의 핵심은 외적인 사건의 종류보다 사람의 영적 상태와 관련됩니다. 이전에 의지하던 것, 선과 진리를 방해하던 것, 거짓이라고 깨닫지 못했던 것들이 그 힘을 잃고 사람이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되는 과정입니다.

 

또 하나 주의할 것은 황폐를 곧바로 악이 완전히 제거되는 이라고 이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AC.18의 표현은 분명 강하지만,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교리 전체에서 사람의 proprium과 유전적 악이 단순히 소멸하여 존재하지 않게 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사람을 지배하고 있는가입니다. 주님께서 선과 진리의 유입을 가로막는 것을 물리치시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심에 따라, 이전에 사람을 지배하던 것이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주도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황폐는 파괴보다 질서를 위한 비움과 준비라는 방향에서 이해할 때 AC.18의 문맥에 더 잘 맞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vastatio의 용례를 하나의 간단한 정의로 고정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을 개인의 거듭남뿐 아니라 교회의 상태, 진리와 선의 결핍, 시험과 준비 등 여러 문맥에서 사용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AC에서 vastatio가 나올 때마다 무조건 악의 지배력이 약화되는 과정이라고 기계적으로 대입하기보다 그 번호의 문맥에서 무엇이 황폐해지고 있으며 왜 그런 상태가 필요한지를 살펴야 합니다. 한국어 용어는 황폐로 일관되게 유지하되, 그 구체적인 의미는 각 문맥에서 해설하는 방식이 가장 안전합니다.

 

desolation이나 devastation과의 관계도 이 관점에서 보는 것이 좋습니다. 현대 영어에서 이 단어들은 vastation보다 훨씬 익숙하지만, 단어 하나하나의 현대적 뉘앙스를 가지고 스베덴보리의 라틴어 개념을 역으로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Potts 어떤 특별한 신학적 뉘앙스를 살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vastation 창안하거나 선택했다고 단정할 근거가 없다면 그런 설명은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우리 번역의 최종 기준은 Potts의 영어 단어 자체가 아니라 스베덴보리의 라틴어 원문과 그가 AC 전체에서 그 말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앞으로의 번역 원칙도 비교적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라틴어 vastatioPottsvastation은 기본적으로 황폐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나 독자가 완전한 파괴나 단순한 고난으로 오해할 가능성이 있는 곳에서는 해설을 통해 그 문맥의 뜻을 밝혀 줍니다. AC.18에서는 특히 참된 것과 선한 것의 유입을 방해하고 거스르는 것들이 제거되어 사람이 잉태될 준비가 이루어지는 상태라는 설명이 그 의미를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결국 AC.18vastatio는 절망의 단어가 아닙니다. 그 자체만 보면 무너짐과 비어짐을 말하지만, 거듭남의 전체 질서 안에서는 그 뒤에 올 새 생명을 위한 준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깊음이 마르는 것은 그곳에 아무것도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길이 나게 하기 위해서이고, 옛사람이 죽는 것은 죽음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새 사람이 잉태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황폐라는 말을 만날 때 우리는 무엇이 사라지는지만 볼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빈자리에서 무엇을 새롭게 시작하시려 하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AC.18 심화 2)

 

 

 

AC.18, 창1:2, ‘깊음과 황폐 : 옛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잉태되기까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8‘깊음’(faces of the deep)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욕정(cupidities)과, 그로 말미암는 거짓(fals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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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 심화 1, ‘황폐를 거치면 욕정과 거짓은 정말 없어지는가?’

AC.18 심화1. ‘황폐를 거치면 욕정과 거짓은 정말 없어지는가?’ AC.18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거듭나기 전에 ‘깊음’이 마르고 황폐해져야 하며, 참된 것을 알고 선한 것에 의해 감동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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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 심화

1. 황폐를 거치면 욕정과 거짓은 정말 없어지는가?’

 

AC.18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거듭나기 전에 깊음이 마르고 황폐해져야 하며, 참된 것을 알고 선한 것에 의해 감동될 수 있으려면 그것들의 유입을 방해하고 거스르는 것들이 먼저 제거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설명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거듭남이 진행되면 사람 안의 욕정과 거짓이 실제로 없어지는 것인가? 악한 성향이 완전히 사라져 다시는 나타나지 않게 되는 것인가? 실제 삶을 돌아보면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 사람에게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욕망이나 잘못된 생각이 다시 고개를 들 때가 있기 때문에, AC.18제거황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먼저 AC.18은 인간 안의 모든 악한 성향이 존재론적으로 완전히 소멸한다고 설명하는 단락이 아닙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강조하는 것은 참된 것과 선한 것이 사람에게 들어오는 것을 방해하고 거스르는 것들이 제거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황폐의 핵심은 사람 안에 있던 모든 악의 흔적이 사라지는가보다, 지금까지 선과 진리의 유입을 가로막고 있던 것들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사람을 지배하지 못하게 되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 새로운 것을 사람 안에 이루시려면 옛 질서가 주도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AC.18 마지막의 옛사람은 사람이 잉태되기 전에 죽어야 한다는 말과 연결됩니다.

 

여기서 죽는다는 표현도 조심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옛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자연적 인간 자체가 없어지거나 사람의 개성과 기억과 감정이 파괴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악에 대한 모든 가능성이 한순간에 사라진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던 삶의 질서가 더 이상 절대적인 주인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여전히 자기 자신에게서 올라오는 욕망과 생각을 느낄 수 있지만, 그것을 곧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여 따르지 않고 주님의 진리 앞에서 분별하고 거절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거듭남은 자연적 인간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그것을 새로운 질서 아래 두는 일입니다.

 

이 점에서 눅15장의 돌아온 아들을 떠올려 보는 것은 좋은 적용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비유가 AC.18황폐를 직접 해설하기 위해 주어진 말씀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둘 사이에는 구조적으로 생각해 볼 만한 유사성이 있습니다. 작은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가서 자기 뜻대로 살다가 모든 것을 허비하고 궁핍해집니다. 마침내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해도 주는 자가 없는 상태에 이릅니다. 그때 비로소 이에 스스로 돌이켜 아버지의 집을 생각합니다. 자기 힘으로 충분히 살 수 있다고 여겼던 이전의 질서가 무너지고, 아버지에게로 돌아갈 가능성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작은아들의 궁핍 자체가 그를 자동적으로 거듭나게 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고난을 당했다고 해서 누구나 주님께 돌아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같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더 완고해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상태에서 사람이 무엇을 보고 어떻게 응답하는가입니다. 그러므로 탕자의 궁핍을 AC.18의 황폐와 비교한다면 고난 = 황폐라는 공식으로 연결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의지하던 것이 무너지고 이전의 삶의 방식으로는 생명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되면서 새로운 방향이 열리는 모습에서 유사성을 찾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실제 삶에서 겪는 실패와 상실을 해석할 때도 중요합니다. 질병, 경제적 어려움, 관계의 파탄, 계획의 실패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그것을 곧바로 주님께서 나를 황폐하게 하신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AC.18의 황폐는 단순히 외적인 고통의 크기로 판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핵심은 선과 진리의 유입을 방해하던 것이 약화되고, 사람이 이전에 붙들고 있던 거짓과 자기 확신에서 벗어나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을 수 있는 상태로 준비되는가에 있습니다. 외적 고난이 그런 과정에 사용될 수도 있지만, 고난 그 자체와 황폐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과정이 필요한 것일까요? 사람은 자기 욕정과 거짓이 자신에게 생명과 행복을 줄 수 있다고 확신하는 동안에는 그것을 쉽게 내려놓지 않습니다. 머리로 진리를 배우는 것과 실제로 그것을 삶의 원리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자유를 파괴하여 악을 강제로 제거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이 붙들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보고 그것에서 돌아설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이전에는 당연하게 여겼던 욕망이나 생각이 더 이상 생명으로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선과 진리를 방해하는 것으로 보이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황폐가 거듭남을 준비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욕정과 거짓이 제거된다는 말을 나는 거듭났으므로 이제 안에는 악한 욕망이 전혀 없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오히려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사람은 자기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더 분명히 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보이지 않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지배하는가입니다. 욕정과 거짓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주님의 진리로 분별하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선과 진리가 삶의 중심을 차지하도록 주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 거듭남의 실제적인 싸움입니다.

 

AC.18의 마지막 표현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옛사람은 사람이 잉태되기 전에 반드시 죽어야 한다. 아직 사람이 완성된다거나 심지어 태어난다고 하지 않고 잉태된다고 합니다. 황폐는 완성이 아니라 준비입니다. 주님께서 새 생명을 시작하실 수 있도록 옛것의 지배가 물러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황폐의 목적은 사람을 빈자리로 남겨 두는 것이 아니라 새 사람이 잉태될 자리를 마련하는 데 있습니다. 깊음을 마르게 하시는 것도 주님이시고, 그 깊은 곳에 길을 내시는 것도 주님이시며, 그 길을 통하여 사람을 새로운 생명으로 이끄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AC.18 심화 1)

 

 

 

AC.18 심화 2, ‘황폐’(vastation, vastatio)란 무엇인가?

AC.18 심화2. ‘황폐’(vastation, vastatio)란 무엇인가? AC를 영어로 읽다 보면 오늘날에는 다소 낯선 ‘vastation’이라는 단어를 만나게 됩니다. AC.18에서 Potts는 ‘선지자들이 자주 말하는 인간의 황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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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 창1:2, ‘깊음과 황폐 : 옛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잉태되기까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8‘깊음’(faces of the deep)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욕정(cupidities)과, 그로 말미암는 거짓(fals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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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7 심화

1. 속 사람 안을 비출 빛을 좀 앞당겨 켤 수는 없을까?

 

AC.17혼돈, 공허, 흑암을 자신의 삶에 대입해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오랫동안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했는데도 속 사람이나 거듭남, 주님의 선과 진리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한 채 지낼 수 있다면,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과 지인들을 생각하면 사람의 사람을 비출 빛을 조금이라도 일찍 수는 없을까? 하는 마음도 생깁니다. 이것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영적 생명을 염려하는 데서 나오는 매우 실제적인 질문입니다.

 

먼저 AC.17의 표현을 정확히 붙들 필요가 있습니다. 혼돈은 선이 없는 상태이고, 공허는 진리가 없는 상태이며, 흑암은 주님 신앙과 영적, 천적 삶에 대한 어리석음과 무지를 뜻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어떤 사람이 교회 용어나 스베덴보리의 교리를 모르기 때문에 곧 영적으로 완전히 버려진 상태라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의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주님께서 그 사람의 내면에서 보존하고 준비하시는 것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후 AC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하는 리메인스가 바로 이 문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께서는 사람이 어린 시절부터 경험하는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을 그의 내면에 보존하십니다. 사랑받고 사랑했던 경험, 순진함,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진실을 기뻐했던 순간처럼 주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는 것들이 사람 자신도 모르는 깊은 곳에 간직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보존하십니다. 훗날 사람이 거듭남의 과정에 들어갈 때 주님께서는 이러한 리메인스를 사용하여 사람 안에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을 여십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신앙 지식의 정도만으로 그 사람 안에서 주님께서 지금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다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의 빛을 앞당겨 수 있을까요? 엄밀히 말하면 빛 자체를 켜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영적 빛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속 사람을 직접 열 수도 없고, 어떤 진리를 강제로 이해하게 만들 수도 없습니다. 더구나 주님께서는 사람의 자유를 파괴하면서 거듭나게 하지 않으십니다. 진리는 자유 가운데 받아들여져야 그 사람의 삶에 뿌리를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뜻이라 하더라도 상대방의 상태를 무시한 채 영적 진리를 밀어 넣으려는 것은 주님의 방법과 같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말씀의 진리를 전할 수 있고, 상대방이 질문할 때 정직하게 대답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그 사람이 선을 사랑하고 악을 악으로 인식하도록 돕는 삶의 본을 보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한마디 말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고, 한 번 경험한 진실한 사랑이 훗날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중요한 준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순간 어떤 씨앗이 어디까지 들어갔는지 알 수 없지만, 주님께서는 각 사람의 상태와 자유를 아시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그 사람을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이 점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할 때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구원은 특정한 신학 용어를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양심적으로 살고, 악을 피하며, 자신의 종교 안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선을 추구한다면 주님께서는 그 사람이 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모든 영적 진리를 충분히 배우지 못했다고 해서 주님의 섭리가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사후에도 사람은 자신의 내적 상태에 따라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일 기회를 갖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람의 내적 상태와 영원한 운명을 성급하게 판단할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이것을 결국 모든 사람은 때가 되면 반드시 빛을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이끄시고 필요한 것을 끊임없이 공급하시지만, 인간에게는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자유가 있습니다. 리메인스가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도 인간의 자유를 없애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섭리를 신뢰하면서도 사람의 선택을 가볍게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빛은 주님에게서 오지만, 사람은 그 빛을 향해 돌아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빛을 앞당겨 켜고 싶다는 마음은 결국 우리의 역할과 주님의 역할을 구별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우리가 할 일은 사람의 내면을 억지로 열어 빛을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는 진리와 사랑을 가능한 한 순수하게 전하는 것입니다. 가족에게도, 교우에게도, 교회 밖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이 지금 당장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조급해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언젠가 저절로 다 잘될 것이라고 안심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전하고 선을 행하며, 그 진리가 언제 어떻게 생명이 될지는 주님의 섭리에 맡겨야 합니다.

 

어쩌면 빛을 조금 일찍 주고 싶다는 목회자의 마음 자체도 주님께서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하시는 하나의 도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중심은 내가 사람을 깨우겠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에게 필요한 때에 필요한 빛을 주실 , 제가 일을 방해하지 않고 쓰임 받을 있게 주십시오가 되어야 합니다. AC.17의 흑암 다음에는 곧 주님의 역사가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흑암 속에 있는 사람을 바라볼 때 우리의 마지막 시선은 그 사람의 어둠이 아니라, 그 어둠 위에서도 이미 일하고 계시는 주님께 향해야 합니다. (AC.17 심화 1)

 

 

 

AC.17, 창1:2(AC.17-19), ‘혼돈과 공허, 흑암의 상태 : 거듭남 이전 인간의 실상’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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