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5 심화

 

1.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42:3)

 

AC.25에서 스베덴보리는 사42:3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를 인용하면서 거듭남의 매우 중요한 원리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상한 갈대꺼져가는 등불 각각에 별도의 세밀한 상응을 붙이는 것보다, 주님께서 사람 안의 오류를 꺾지 않으시고 욕정을 끄지 않으시며 그것들을 참되고 선한 것 쪽으로 굽히신다AC.25 자체의 설명입니다. 이 표현은 주님께서 아직 불완전한 사람을 어떤 방식으로 거듭나게 하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거듭남을 시작하는 사람에게는 처음부터 순수한 선과 진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진리를 배우면서도 자기 생각을 고집할 수 있고, 선을 행하면서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섞여 있을 수 있으며, 주님을 찾으면서도 자기에게 돌아올 유익을 먼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의 생각과 의도에는 감각에서 오는 착각,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욕정, 이미 굳어진 습관과 잘못된 판단들이 함께 존재합니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그런 것들이 있다는 이유로 사람의 현재 상태 전체를 한꺼번에 부수고 전혀 다른 상태를 강제로 만들어 내시는 것은 아닙니다.

 

AC.25가 말하는 굽히심은 바로 여기서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현재 서 있는 자리에서부터 그를 이끄십니다. 아직 낮은 동기가 섞여 있는 상태에서도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선을 행할 수 있게 하시며, 그 과정에서 점차 무엇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고 무엇이 주님에게서 오는 것인지를 분별하게 하십니다. 처음에는 자기 유익 때문에 선을 행하던 사람이 차츰 이웃의 유익을 생각하게 되고, 처음에는 자신이 옳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진리를 말하던 사람이 차츰 진리 자체와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말하게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사람의 현재 상태에서 시작하시되 그 상태에 그대로 머물게 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굽힌다는 말을 오류 자체가 점차 진리가 되고 욕정 자체가 점차 선한 사랑으로 변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거짓을 잘 다듬으면 진리가 되는 것도 아니고, 자기 사랑을 정화하면 그대로 천국적 사랑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아직 오류와 욕정의 영향을 받고 있는 상태에서도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 그의 자유와 수용 능력에 따라 점차 거짓에서 진리로, 악한 사랑의 지배에서 선한 사랑의 질서로 방향을 바꾸도록 이끄십니다. 따라서 굽힘은 악을 선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을 선과 진리 쪽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섭리적 역사입니다.

 

이 점에서 AC.24AC.25는 매우 긴밀하게 이어집니다. AC.24에서는 사람이 감각의 착각이나 욕정과 같은 자기 자신의 것들에 의해서도 주님에 의해 참되고 선한 것들로 이끌리고 굽혀진다는 아르카나가 제시되었습니다. AC.25에서는 사42:3을 통하여 바로 그 원리가 말씀 안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이미 완전해진 뒤에야 그를 이끄시는 것이 아니라, 아직 자기 자신의 것들 속에 있는 바로 그 상태에서부터 그를 붙드시고 거듭남을 진행하십니다.

 

따라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한다는 말씀을 단순히 주님은 온유하시다는 위로의 말씀으로만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AC.25의 문맥에서는 이것이 실제 거듭남의 방식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으시며, 아직 혼합되고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질서 안에서 이끄십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현재 상태를 그대로 보존하는 데 있지 않고, 마침내 사람 자신의 것에서 나온 것으로 여겼던 삶의 중심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의 질서 아래 놓이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AC.25에서 말하는 꺾고 끄는 대신 굽히시는 주님의 거듭남의 역사입니다. (AC.25 심화 1)

 

 

 

AC.25, 창1:6-7, ‘하늘과 땅을 펴심 : 파괴가 아니라 굽힘으로 이루어지는 거듭남의 질서’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6, 7) AC.25‘땅을 펼치고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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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4 심화

1.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이라는 표현은 처음 접하면 조금 낯설지만, AC를 읽으면서 자주 만나게 되는 중요한 용어입니다. AC.24의 영어 번역에서 Potts는 라틴어 scientificamemory-knowledges라고 옮깁니다. 여기 붙은 개정자의 주(Reviser)는 이것을 외적 기억 속에 들어 있는 것들로, 신학적인 것이든 밖의 것이든 온갖 종류가 대량으로 축적되어 있는 것들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기억 지식은 특별히 신비하거나 영적인 지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보고 듣고 배우고 읽어 외적 기억에 축적한 수많은 지식과 정보들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역사적 사실이나 지리 정보, 과학 지식, 언어와 직업에 관한 지식뿐 아니라 성경에 관하여 배운 사실들도 기억 지식이 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아버지이다,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나셨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도 그 내용이 성경적이라는 이유만으로 곧 속 사람의 지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외적 기억에 저장되어 내가 필요할 때 떠올리고 말할 수 있는 지식으로 있는 한, 그것은 기억 지식의 차원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scientifica의 핵심은 단순히 세속적인 지식이라는 데 있지 않고, 그것이 사람의 외적 기억에 속해 있다는 데 있습니다.

 

AC.24가 이 용어를 특별히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는 궁창 위의 궁창 아래의 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을 cognitiones라 하고, 겉 사람에 속한 기억 지식을 scientifica라 합니다. 개정자의 주는 cognitiones를 우리가 단순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것을 안다고 할 때의 앎이라고 설명합니다. 다만 이 구별을 scientifica 죽은 지식이고 cognitiones 살아 있는 지혜다라는 식으로 너무 단순하게 고정해서는 안 됩니다. AC.24에서 중요한 것은 먼저 이 둘이 속하는 층위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기억 지식 자체가 나쁘거나 거듭남에 불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사람이 외적 세계에서 습득하고 기억해 둔 수많은 것들을 사용하여 그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십니다. AC.24의 핵심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거듭나는 사람은 아직 자신이 행하는 선과 말하는 진리를 자기에게서 나온 것처럼 여기지만, 주님께서는 그가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느끼는 것들을 통해서도 그를 선과 진리로 이끄십니다. 따라서 겉 사람과 그 안의 기억 지식은 없애 버려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속 사람과 올바른 질서 안에서 연결되어 주님께 쓰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 점에서 성경 지식도 좋은 예가 됩니다. 사람이 말씀의 내용을 많이 기억한다고 해서 그 자체로 거듭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지식은 주님께서 사람을 가르치시는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전에 외워 두었던 한 구절이 어느 순간 자신의 악을 보게 하거나, 이웃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게 하거나,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깨닫게 하는 데 쓰일 수 있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기억 지식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더 높은 질서 아래 놓이고 올바른 쓰임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억 지식은 쉽게 말하면 외적 기억에 축적되어 있는 지식들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그것을 단순히 머릿속에 있다는 이유로 경시할 필요도 없고, 많이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곧 영적 지혜라고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AC.24가 보여 주는 거듭남의 질서는 이러한 겉 사람의 기억 지식과 속 사람 안의 것들이 처음에는 혼란스럽게 섞여 있다가, 주님께서 그 둘을 구별하시고 각각 제자리에 놓으시는 과정입니다. 바로 그 구별을 나타내는 것이 궁창 위의 궁창 아래의 입니다. (AC.24 심화 1)

 

 

 

AC.24, 창1:6-7(AC.24-25), ‘궁창의 구별 :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구별되기 시작하는 때’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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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 심화

1.  스베덴보리는 8:14, 26 저녁과 아침을 인용했는가?

 

AC.22를 처음 읽을 때 가장 어리둥절한 부분 가운데 하나가 단8:14, 26의 인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없을 때가 저녁이고 신앙이 있을 때가 아침이라고 설명한 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때는 신앙이 없었으므로 저녁이며 주님의 오심 자체는 아침이라고 말하면서 다니엘서를 인용합니다. 그렇다면 단순히 다니엘서에도 저녁아침이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에 가져온 것일까요? 그렇게 보기에는 스베덴보리의 논지가 너무 깊습니다.

 

먼저 개역개정만 읽으면 이 연결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8:14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본문에는 저녁아침에 해당하는 말이 실제로 들어 있으며, Potts 번역도 AC.22에서 이를 Even unto evening when it becomes morning이라는 형태로 제시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저녁-아침이라는 표현 자체에 주목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단어가 같다는 사실만으로 인용 이유가 모두 설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단8의 문맥입니다. 8에서는 성소가 짓밟히고, 항상 드리는 제사가 중단되며, 진리가 땅에 던져지는 황폐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14절에서는 일정한 저녁-아침 후에 성소가 정결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즉 이 구절에는 단순한 하루의 반복만이 아니라 거룩한 것들이 훼손된 상태와 그 뒤의 정결 및 회복이라는 구조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AC.22에서 말하는 저녁아침의 영적 의미와 만납니다.

 

AC.22에서 저녁은 거짓과 신앙 없음의 상태이며, 일반적으로는 사람 자신의 것에 속한 상태입니다. 아침은 진리와 신앙의 지식들이 있는 상태이며 주님께 속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다니엘에서 성소와 진리가 황폐해진 상태는 AC.22의 언어로 보면 저녁의 성격을 가지며, 성소가 다시 정결하게 되는 것은 아침의 성격과 연결됩니다. 이것은 단8의 문자적 역사 의미를 지워 버리고 다른 뜻을 임의로 덧씌운다는 뜻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문자적 사건 안에서 동시에 영적 상태를 읽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주님께서 오시는 때는 저녁이고, 주님의 오심은 아침이다라는 다소 역설적인 표현도 이해됩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셔야 할 만큼 신앙이 쇠퇴하고 교회가 황폐해진 상태는 저녁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저녁 가운데 주님께서 오심으로 새로운 빛이 시작되기 때문에 주님의 오심은 아침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시점에 저녁과 아침이라는 서로 모순되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오시기 전의 영적 상태와 그분의 오심으로 시작되는 새로운 상태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8:14, 26AC.22에서 매우 적절한 인용이 됩니다. 저녁-아침이라는 표현뿐 아니라 황폐에서 정결로 나아가는 문맥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 이천삼백이라는 숫자의 구체적인 속뜻까지 AC.22에 끌어올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단락에서 그 숫자를 해설하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은 저녁아침이 시간의 이름을 넘어 영적 상태의 변화를 나타낸다는 데 있습니다.

 

또한 이것을 창세기에서 저녁은 언제나 무조건 A, 아침은 언제나 무조건 B라고 정의되었으므로 말씀 어디에서나 기계적으로 같은 뜻을 대입하면 된다고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상응은 단어 하나를 사전처럼 치환하는 방식이 아니라 문맥과 연결 속에서 읽어야 합니다. AC.22에서 단8의 인용이 설득력을 갖는 것도 단지 같은 단어가 있어서가 아니라, 신앙과 거룩한 것들의 황폐 그리고 그 뒤의 회복이라는 문맥이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단8:14, 26을 인용하는 이유는 저녁과 아침이라는 두 단어의 일치보다 더 깊습니다. 신앙이 없는 저녁의 상태 가운데 주님이 오심으로 아침이 시작된다AC.22의 영적 질서가 다니엘의 황폐와 정결이라는 구조 속에서도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8의 인용은 창1의 저녁과 아침을 단순한 자연의 하루가 아니라 주님의 오심으로 일어나는 새로운 창조의 상태로 이해하게 해 주는 중요한 보조 본문이 됩니다. (AC.22 심화 1)

 

 

 

AC.22, 창1:5(AC.22-23), ‘저녁에서 아침으로 : 사람의 것에서 주님의 것으로 나아가는 첫 날의 질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창1:5) AC.22이제 ‘저녁’(evening)이 무엇을 뜻하고, ‘아침’(morning)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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