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2:1)

 

AC.82

말씀은 이제 사람이 여섯째 (sixth day) 만큼 영적으로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늘(heaven) 그의 사람이고, (earth) 그의 사람이며, 그것들의 만상(the army of them) 사랑과 신앙 그것들에 관한 지식들인데, 이것들은 앞에서 광명체들과 별들로 의미되었습니다. 사람이 하늘(heaven)이라 불리고 사람이 (earth)이라 불린다는 것은 장에서 이미 인용한 말씀의 구절들로부터 분명하며, 여기에 이사야의 다음 말씀을 덧붙일 있습니다. By these words is meant that man is now rendered so far spiritual as to have become the sixth day”; heaven is his internal man, and earth his external; the army of them are love, faith, and the knowledges thereof, which were previously signified by the great luminaries and the stars. That the internal man is called heaven, and the external earth, is evident from the passages of the Word already cited in the preceding chapter, to which may be added the following from Isaiah:

 

12내가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 인생을 오빌의 금보다 희귀하게 하리로다 13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가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 (13:12, 13) I will make a man more rare than solid gold, even a man than the precious gold of Ophir; therefore I will smite the heavens with terror, and the earth shall be shaken out of its place (Isa. 13:1213).

 

13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너를 멸하려고 준비하는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 학대자의 분노가 어디 있느냐, 16내가 말을 입에 두고 그늘로 너를 덮었나니 이는 내가 하늘을 펴며 땅의 기초를 정하며 시온에게 이르기를 너는 백성이라 말하기 위함이니라 (51:13, 16) Thou forgettest Jehovah thy maker, that stretcheth forth the heavens, and layeth the foundations of the earth; but I will put my words in thy mouth, and I will hide thee in the shadow of my hand, that I may stretch out the heaven, and lay the foundation of the earth (Isa. 51:13, 16).

 

말씀들로부터 하늘(heaven) (earth) 모두 사람에 대하여 서술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비록 말씀들이 주로 태고교회를 가리키지만, 말씀의 내적인 것들은 교회에 관하여 말한 것은 무엇이든 교회의 사람에게도 말할 있는 그러한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신이 교회가 아니면 결코 교회의 일부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님의 성전이 아닌 사람은 성전이 의미하는 , 교회와 천국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태고교회가 단수로 사람(man)이라 불립니다. From these words it is evident that both heaven and earth are predicated of man; for although they refer primarily to the most ancient church, yet the interiors of the Word are of such a nature that whatever is said of the church may also be said of every individual member of it, who, unless he were a church, could not possibly be a part of the church, just as he who is not a temple of the Lord cannot be what is signified by the temple, namely, the church and heaven. It is for this reason that the most ancient church is called man, in the singular number.

 

해설

AC.82부터 창2 본문의 상세 해설이 시작됩니다. 앞의 AC.73-81이 창2:1-17 전체의 개요였다면, 이제 스베덴보리는 창2:1천지와 만물이 이루어지니라를 구체적으로 풀이합니다. 첫 문장에서 그는 이 말씀이 사람이 이제 여섯째 이 될 만큼 영적으로 되었다는 뜻이라고 밝힙니다. 그리고 하늘은 그의 속 사람, ‘은 그의 겉 사람, ‘그것들의 만상은 사랑과 신앙 및 그것들에 관한 지식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여섯째 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1의 여섯 날은 자연계의 창조 순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속뜻에서는 인간의 거듭남을 묘사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여섯째 이 되었다는 것은 육체적으로 여섯 번째 날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거듭남의 과정에서 영적 인간으로 형성된 상태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바로 앞 AC.81에서 스베덴보리가 창1죽은 사람으로부터 형성된 영적 인간을 다루었다고 한 것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따라서 AC.82는 창1과 창2 사이의 경계도 다시 확인해 줍니다. 1의 여섯째 날에 이르러 사람은 영적 인간이 되었습니다. 2에서는 그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는 일이 다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창2:1천지와 만물이 이루어지니라는 말씀은 속뜻에서 창1의 거듭남 과정이 여섯째 날의 상태에 이르렀음을 전제로 합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하늘을 사람 안에서 풀이합니다. ‘하늘은 속 사람이고 은 겉 사람입니다. 이것은 AC를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 상당히 낯선 해석일 수 있습니다. 성경의 하늘과 땅을 보통 인간 밖에 있는 우주와 자연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에서 하늘과 땅이 인간의 내적·외적 구조를 나타낼 수 있다고 봅니다.

 

여기서 속 사람이 하늘이라고 해서 속 사람 자체가 천국이라는 단순한 공간적 등식을 세우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겉 사람이 이라고 해서 겉 사람은 낮고 악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거듭난 인간에게서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모두 주님의 질서 안에 놓입니다. 중요한 것은 속 사람이 주님과 천국을 향하여 열리고, 겉 사람이 그 속 사람과 질서 있게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것들의 만상은 사랑과 신앙 및 그것들에 관한 지식들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들이 앞에서 광명체들과 별들로 의미되었다고 덧붙입니다. 이것은 창1의 상세 해설을 다시 연결하는 표현입니다. 창조 이야기에서 하늘의 광명체와 별들이 단순한 천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나는 사람 안에 형성되는 사랑과 신앙 및 그에 속한 것들을 나타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2:1천지와 만물이 이루어지니라는 말씀은 속뜻에서 한 사람의 속 사람과 겉 사람,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사랑과 신앙 및 그에 관한 지식들이 하나의 질서 안에 형성된 상태를 묘사합니다. 자연계 창조의 완성이 인간 안에서는 거듭남의 한 단계가 완성되는 것으로 읽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AC.82에서 더욱 중요한 부분은 그다음에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왜 하늘 = 사람’, ‘ = 사람이라고 읽을 수 있는지를 말씀 자체로 확증하기 위해 이사야의 두 본문을 인용합니다. 13:12-13과 사51:13, 16입니다. 이 인용의 목적은 단순히 하늘이라는 단어가 성경 다른 곳에도 나온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이 사람과 교회의 내적 상태를 가리키는 방식으로 말씀에서 사용된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13에서는 사람이 순금보다 희귀하게 되고 하늘이 진동하며 땅이 그 자리에서 흔들리는 것이 함께 말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말씀을 단순히 물리적 우주의 격변으로만 읽지 않고 인간과 교회의 내적·외적 상태의 변화와 연결합니다. 51에서도 여호와께서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신다는 말씀이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두시는 것과 함께 나타납니다. 이것이 하늘을 사람에게 적용하여 읽을 수 있는 성경적 근거가 됩니다.

 

그러나 AC.82의 가장 중요한 해석 원리는 이 두 인용 뒤에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들이 주로 태고교회를 가리키지만, 말씀의 내적인 것들은 교회에 관하여 말한 것은 무엇이든 그 교회의 각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본성을 지닌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이번 두 이사야 구절을 설명하기 위한 부연이 아니라 AC 전체의 성경 해석을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즉 말씀에서 교회가 다루어질 때 그것은 거대한 종교 집단이나 역사적 제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이루는 한 사람 안에서도 같은 영적 질서가 존재해야 합니다. 교회 전체에 관하여 말하는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 타락과 회복의 문제는 한 사람의 내적 생명에도 적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매우 강하게 표현합니다. ‘ 자신이 교회가 아니면 결코 교회의 일부가 없기 때문입니다.이것은 교회론을 외적인 소속에서 내적인 상태로 옮겨 놓는 중요한 문장입니다. 어떤 사람이 외적으로 교회 명부에 속해 있다는 사실만으로 말씀에서 말하는 의미의 교회의 일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 자신 안에 교회를 이루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외적인 교회 공동체가 불필요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교회 공동체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동체를 실제로 교회가 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더 깊이 보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들로 이루어지며, 각각의 사람 안에 주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의 질서가 없다면 외적인 조직만으로는 말씀에서 의미하는 교회의 본질을 이룰 수 없습니다.

 

이어지는 성전의 비유가 이 원리를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주님의 성전이 아닌 사람은 성전이 의미하는 , 교회와 천국이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도 건물로서의 성전과 사람 안의 영적 실재가 연결됩니다. 성전이 말씀에서 교회와 천국을 의미한다면, 그 교회와 천국의 질서가 한 사람 안에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 안에 천국이 있다는 말을 막연하게 낭만적으로 이해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AC.82의 문맥에서는 매우 구체적입니다. 사람의 속 사람은 하늘’, 겉 사람은 으로 묘사되고, 그 안에 사랑과 신앙 및 그것들에 관한 지식들이 질서를 이루어야 합니다. 즉 인간이 하나의 작은 교회이며 성전이라는 말은 그의 내적·외적 삶 전체가 주님의 질서 안에 놓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가 단수로 사람이라 불린다고 설명합니다. 태고교회라는 하나의 교회와 그 교회를 이루는 한 사람 사이에 상응하는 구조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전체에 있는 것이 각 사람 안에도 있으며, 각 사람이 교회의 질서를 자기 안에 받아들일 때 그들이 함께 교회를 이룹니다.

 

여기서 태고교회가 사람이라 불린다는 말을 태고교회 전체가 실제 한 개인이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라는 단수 표현은 그 교회의 내적 성격과 질서를 나타냅니다. 앞서 창1사람역시 거듭나는 인간과 교회의 상태를 묘사하는 방식으로 읽혀 왔습니다.

 

AC.82의 이 원리는 말씀의 속뜻이 왜 동시에 교회와 개인에게 적용될 수 있는지도 설명해 줍니다. 예를 들어 교회의 타락에 관한 말씀이 개인의 거듭남과 무관한 역사적 사건으로만 머물지 않고, 한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의 질서가 무너지는 과정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교회의 회복에 관한 말씀도 한 사람의 내적 회복과 연결됩니다. 말씀의 속뜻에서는 교회와 인간이 서로 분리된 두 주제가 아니라 상응하는 질서 안에 있습니다.

 

이것은 AC를 읽으면서 자주 만나게 될 교회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 고대교회, 유대교회, 기독교회 등을 다룰 때 우리는 역사적 집단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들의 영적 특성은 동시에 인간 안의 상태와도 연결됩니다. AC.82는 바로 그 적용이 가능한 이유를 직접 설명해 주는 번호입니다.

 

또한 이 원리는 거듭남이 개인적인 문제이면서 동시에 교회적인 문제라는 사실도 보여 줍니다. 교회의 갱신을 말하면서 구성원 각 사람의 거듭남을 제외할 수 없습니다. ‘ 자신이 교회가 아니면 교회의 일부가 없다는 문장은 교회의 참된 갱신이 결국 한 사람 한 사람 안에서 주님의 질서가 이루어지는 것과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문장을 완전히 거듭난 사람만 교회에 들어올 자격이 있다는 배타적인 의미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AC.82는 교회 회원의 자격 심사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에서 교회와 개인이 왜 서로 대응하여 서술될 수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문장의 초점은 다른 사람을 교회인지 아닌지 판정하는 데 있지 않고, 교회라고 불리는 것이 먼저 나 자신 안에서 실제가 되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AC.82를 이렇게 읽으면 하늘의 의미도 더욱 깊어집니다. 하늘과 땅은 사람 밖에 있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연결되고, 사랑과 신앙 및 그것들에 관한 지식들이 그 안에서 제자리를 찾을 때 인간 안에 하나의 하늘과 이 형성됩니다.

 

이 점은 창2의 천적 인간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AC.81까지는 죽은 사람, 영적 인간, 천적 인간의 차이를 설명했습니다. 이제 AC.82는 먼저 여섯째 날의 영적 인간이 어떤 상태까지 형성되었는지를 다시 확인합니다. 그의 속 사람과 겉 사람, 사랑과 신앙 및 그에 관한 지식들이 형성되어 천지와 만상이 이루어진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제 이어지는 안식과 일곱째 날을 통하여 천적 인간의 상태가 본격적으로 설명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AC.82는 창2:1의 짧은 말씀을 해설하면서 동시에 세 가지 중요한 원리를 세웁니다. 여섯째 날은 거듭난 영적 인간의 상태이며, 하늘과 땅은 그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이고, 교회에 관하여 말한 말씀은 그 교회를 이루는 각 사람에게도 적용됩니다. 이 세 번째 원리 때문에 이번 번호는 창2 한 절의 해설을 넘어 AC 전체를 읽는 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특히 자신이 교회가 아니면 교회의 일부가 없다는 문장을 기억해 둘 만합니다. 교회는 먼저 외부에 존재하는 조직이고 내가 거기에 가입함으로써 교회의 일부가 되는 것만이 아닙니다. 말씀의 선과 진리,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이 내 안에서 실제 삶의 질서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함께 있을 때 외적인 교회도 그 내적 실재를 담는 교회가 됩니다.

 

결국 AC.82하늘과 은 먼 우주의 이야기에서 인간 자신의 내면으로 다가옵니다. 하늘은 속 사람이고 땅은 겉 사람이며, 그 만상은 사랑과 신앙 및 그것들에 관한 지식들입니다. 그리고 이 질서는 한 사람 안에서 실제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교회이기 위해서는 교회를 이루는 사람이 먼저 자기 안에서 교회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원리 때문에 말씀에서 교회에 관하여 말한 것은 동시에 그 교회의 각 사람에 관하여 말할 수 있으며, 태고교회도 단수로 사람이라 불릴 수 있습니다. (AC.82)

 

 

 

AC.83, 창2:1,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될 때, 사랑이 주된 것이 된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창2:1) AC.83‘하늘과 땅과 그 모든 만상’(heavens and the earth and all the army of them)은 사람이 ‘여섯째 날’(sixth day)이 되었을 때 ‘다 이루어졌다’(finished)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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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1, 창2:1-17 배경, '죽은 사람, 영적 인간, 천적 인간의 세 가지 차이'

AC.81이 장은 천적 인간을 다루며, 앞 장은 죽은 사람으로부터 형성된 영적 인간을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고, 영적 인간이나 죽은 사람이 무엇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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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1

장은 천적 인간을 다루며, 장은 죽은 사람으로부터 형성된 영적 인간을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고, 영적 인간이나 죽은 사람이 무엇인지조차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므로, 차이를 있도록 각각의 본성이 어떠한지를 간략히 말하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첫째, 죽은 사람은 몸과 세상에 속한 외에는 아무것도 참되고 선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그것을 숭배합니다. 영적 인간은 영적·천적인 진리와 선을 인정하지만, 사랑으로부터라기보다는 신앙의 원리로부터 그렇게 하며, 또한 그것을 바탕으로 행동합니다. 천적 인간은 영적·천적인 진리와 선을 믿고 퍼셉션하며, 사랑으로부터 오는 신앙 외에는 다른 신앙을 인정하지 않고, 또한 사랑으로부터 행동합니다. This chapter treats of the celestial man, as the preceding one did of the spiritual, who was formed out of a dead man. But as it is unknown at this day what the celestial man is, and scarcely what the spiritual man is, or a dead man, it is permitted me briefly to state the nature of each, that the difference may be known. First, then, a dead man acknowledges nothing to be true and good but what belongs to the body and the world, and this he adores. A spiritual man acknowledges spiritual and celestial truth and good; but he does so from a principle of faith, which is likewise the ground of his actions, and not so much from love. A celestial man believes and perceives spiritual and celestial truth and good, acknowledging no other faith than that which is from love, from which also he acts.

 

[2] 둘째, 죽은 사람을 움직이는 목적은 오직 육체적·세상적 삶만을 향하며, 그는 영원한 삶이 무엇인지, 주님이 누구신지도 알지 못합니다. 안다 하더라도 믿지 않습니다. 영적 인간을 움직이는 목적은 영원한 삶을 향하며, 그로 말미암아 주님을 향합니다. 천적 인간을 움직이는 목적은 주님을 향하며, 그로 말미암아 주님의 나라와 영원한 삶을 향합니다. Second: The ends which influence a dead man regard only corporeal and worldly life, nor does he know what eternal life is, or what the Lord is; or should he know, he does not believe. The ends which influence a spiritual man regard eternal life, and thereby the Lord. The ends which influence a celestial man regard the Lord, and thereby his kingdom and eternal life.

 

[3] 셋째, 죽은 사람은 싸움 가운데 있을 거의 언제나 굴복하며, 싸움 가운데 있지 않을 때에는 악과 거짓이 그를 지배하므로 그는 종입니다. 그를 묶는 것은 외적인 결박들, 법에 대한 두려움, 생명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재산과 이익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그것들 때문에 중요하게 여기는 평판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같은 것들입니다. 영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지만 언제나 승리합니다. 그를 억제하는 결박들은 내적인 것이며, 양심의 결박이라 불립니다. 천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지 않으며, 악과 거짓의 공격을 받을 그것들을 멸시하므로 정복자라 불립니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결박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것처럼 보입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그의 결박은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Third: A dead man when in combat almost always yields, and when not in combat, evils and falsities have dominion over him, and he is a slave. His bonds are external, such as the fear of the law, of the loss of life, of wealth, of gain, and of the reputation which he values for their sake. The spiritual man is in combat, but is always victorious; the bonds by which he is restrained are internal, and are called the bonds of conscience. The celestial man is not in combat, and when assaulted by evils and falsities, he despises them, and is therefore called a conqueror. He is apparently restrained by no bonds, but is free. His bonds, which are not apparent, are perceptions of good and truth.

 

해설

AC.81은 창1과 창2의 속뜻을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번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1죽은 사람으로부터 형성된 영적 인간을 다루었다면 창2천적 인간을 다룬다고 다시 확인합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영적 인간과 죽은 사람이 무엇인지조차 거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세 사람의 차이를 직접 설명합니다. 그 비교 기준은 세 가지입니다. 무엇을 참되고 선한 것으로 인정하는가, 무엇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가, 그리고 악과 거짓을 만났을 때 무엇에 의해 억제되고 어떻게 싸우는가입니다.

 

먼저 여기서 죽은 사람을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73에서도 이미 주의했던 것처럼, 이것은 창1의 거듭남 이전 상태에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는 육체적으로는 살아 있고 생각하고 활동하지만, 속뜻에서는 아직 영적 생명에 들어오지 않은 상태이므로 죽은 사람이라고 불립니다. AC.81은 이제 그 의미를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첫 번째 차이는 사람이 무엇을 참되고 선한 것으로 인정하는가에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몸과 세상에 속한 것만을 참되고 선한 것으로 인정하며 그것을 숭배합니다. 여기서 숭배한다는 말은 반드시 종교 의식을 행한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그의 마음과 삶의 중심이 육체적·세상적인 것에 놓여 있고, 그것을 궁극적인 선과 진리처럼 여긴다는 뜻입니다.

 

영적 인간은 이와 다릅니다. 그는 영적·천적인 진리와 선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중요한 제한을 덧붙입니다. 그는 그것들을 사랑으로부터라기보다는 신앙의 원리로부터인정하고, 또한 그 신앙을 바탕으로 행동합니다. 이것은 영적 인간에게 사랑이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적 인간의 특징은 진리와 신앙을 통하여 선으로 인도된다는 데 있습니다. 먼저 참된 것을 배우고 믿으며, 그것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양심을 통해 행동하는 질서가 두드러집니다.

 

천적 인간은 다시 다릅니다. 그는 영적·천적인 진리와 선을 믿고 퍼셉션합니다’. 그리고 사랑으로부터 오는 신앙 외에는 다른 신앙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AC.77에서 나온 퍼셉션의 의미가 다시 중요해집니다. 천적 인간은 선과 진리를 외적인 교리나 논증을 통해서만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그것을 내적으로 퍼셉션합니다.

 

특히 사랑으로부터 오는 신앙 외에는 다른 신앙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표현은 천적 인간에게 신앙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어 독립적인 첫째 원리로 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출발점으로 두드러지고 그 신앙으로부터 행동하는 반면,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먼저이며 신앙은 그 사랑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래서 같은 선과 진리를 인정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내적 질서가 서로 다릅니다.

 

두 번째 차이는 목적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람이 무엇을 알고 있느냐보다 더 깊은 차원입니다. 죽은 사람을 움직이는 목적은 육체적·세상적 삶에 한정됩니다. 그는 영원한 삶과 주님을 모르거나, 설령 들어서 알고 있다 하더라도 믿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과 삶의 방향이 현세적인 것 안에 닫혀 있는 것입니다.

 

영적 인간의 목적은 영원한 삶을 향하고, ‘그로 말미암아 주님을 향합니다. 반면 천적 인간의 목적은 먼저 주님을 향하고, ‘그로 말미암아 주님의 나라와 영원한 을 향합니다. 이 순서의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영적 인간에게는 영원한 삶과 구원이 중요한 목적이 되고 그것을 통하여 주님을 향하는 질서가 두드러집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에게는 주님 자신이 첫째 목적입니다. 주님의 나라와 영원한 삶조차 주님으로부터 이어집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이 영원한 삶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목적의 중심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내가 영원히 살기 위해 주님을 믿는다는 데 머물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나라와 영원한 삶을 향합니다. 자기 자신의 구원보다 주님이 먼저 놓이는 질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차이는 영적 싸움과 인간을 억제하는 결박에서 나타납니다. 죽은 사람은 싸움 가운데 있을 때 거의 언제나 굴복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싸움이 없을 때에는 악과 거짓이 그를 지배하므로 그는 종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싸움은 거듭남 과정에서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사이에 일어나는 영적 싸움의 문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죽은 사람을 붙들어 악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주로 외적인 결박입니다. 법이 두렵고, 생명이나 재산이나 이익을 잃는 것이 두렵고, 평판을 잃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행동을 억제합니다. 이것은 외적 질서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법과 사회적 질서는 인간 공동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다만 그 사람이 악을 피하는 내적 이유가 아직 선과 진리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외적인 손실에 대한 두려움에 있다는 것입니다.

 

영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으며 언제나 승리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언제나를 거듭나는 사람이 현실에서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문장은 죽은 사람과 영적 인간의 상태를 유형적으로 대조하는 문맥에 있습니다. 영적 인간은 실제 영적 싸움에 들어가며, 그를 악에서 붙드는 것은 외적인 두려움만이 아니라 양심의 결박이라는 내적인 것입니다.

 

양심은 영적 인간을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그는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신앙을 통해 받아들이고, 그것에 어긋나는 일을 할 때 내적으로 고통을 느낍니다. 그래서 아무도 보지 않고 법적인 처벌도 없더라도 이것은 주님 앞에서 해서는 된다는 내적 결박이 작용합니다. 외적인 결박에서 내적인 양심의 결박으로 옮겨진 것은 거듭남에서 매우 큰 변화입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에게서는 또 다른 상태가 나타납니다. 그는 싸움 가운데 있지 않다고 합니다. 악과 거짓이 공격해 올 때 그것들을 멸시하며, 그래서 정복자라고 불립니다. 이것을 천적 인간에게는 유혹이나 악의 접근 자체가 전혀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도 악과 거짓의 공격을 받을 라고 합니다. 차이는 그것들이 내적인 싸움을 일으켜 그를 흔들 정도의 힘을 갖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영적 인간은 이것이 옳은가 그른가를 양심 가운데 싸우며 진리를 붙듭니다. 천적 인간은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기 때문에 악과 거짓을 그것들과 대등한 선택지처럼 놓고 오래 씨름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악하고 거짓임을 퍼셉션하고 배척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를 단순히 싸워 이기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정복자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천적 인간의 자유에 관한 매우 중요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결박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것처럼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아무런 질서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결박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자유가 단순히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과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 줍니다. 죽은 사람은 외적으로는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악과 거짓의 종입니다. 영적 인간은 양심의 결박 가운데 악과 싸웁니다. 천적 인간은 선과 진리를 사랑하고 퍼셉션하기 때문에 선을 행하는 것이 그의 자유 자체가 됩니다. 외부에서 억지로 붙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 상태의 차이는 단순히 나쁜 사람, 좋은 사람, 아주 좋은 사람의 세 등급이 아닙니다. 인간의 생명을 지배하는 중심과 질서가 서로 다릅니다. 죽은 사람은 몸과 세상을 중심으로 살며 외적 결박에 의해 억제됩니다. 영적 인간은 신앙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인정하고 양심에 의해 살아갑니다. 천적 인간은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며, 그것을 따르는 것이 그의 자유가 됩니다.

 

이 세 번째 비교는 창1에서 창2로 넘어가는 이유도 잘 보여 줍니다. 1의 여섯 날은 죽어 있던 사람이 거듭나 영적 인간이 되는 과정을 묘사합니다. 그러나 창2에서는 그보다 더 깊은 천적 상태가 다루어집니다. 따라서 창1에서 거듭남이 끝났다고 해서 창2가 단순한 반복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AC.81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 사이에 실제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보여 줌으로써 창2가 왜 별도로 필요한지를 설명합니다.

 

다만 이 세 상태를 오늘날 모든 사람에게 기계적인 세 단계표로 적용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창1과 창2의 속뜻, 그리고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성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지금 죽은 사람 단계인가, 영적 단계인가, 천적 단계인가?를 점수표처럼 판정하는 데 이 번호를 사용하는 것은 본문의 목적과 거리가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 안에서 무엇이 삶의 중심이 되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지를 비추어 보는 기준으로 읽는 것이 유익합니다.

 

특히 외적 결박, 양심, 퍼셉션이라는 세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겉으로 똑같이 악을 행하지 않는 세 사람이 있어도 그 내적 이유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처벌과 손해가 두려워 악을 피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그것이 신앙의 진리에 어긋난다는 양심 때문에 피할 수 있으며, 또 다른 사람은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악 자체를 싫어할 수 있습니다. 외적 행동만으로는 비슷해 보여도 내적인 생명의 질서는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거듭남이 단순한 행동 교정이 아니라는 사실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법이 무서워 악을 억제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양심으로 악을 피하며, 더 깊게는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악을 원하지 않는 상태로 이끄십니다. 그러나 이것을 인간이 자기 힘으로 올라가야 하는 영적 성취의 사다리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1부터 계속된 모든 거듭남의 주체는 주님입니다.

 

AC.81의 세 번째 비교는 AC.79-80과도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AC.79에서는 천적 인간이 동산의 모든 것을 누리면서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는다고 했고, AC.80에서는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알려 하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퍼셉션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81에서는 바로 그 퍼셉션이 천적 인간의 보이지 않는 결박이라고 합니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기 때문에 외적 강제에 의해 움직이지 않고 자유롭게 선을 행합니다.

 

이렇게 보면 천적 인간의 자유와 주님께 대한 의존은 서로 반대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질서 안에 있을수록 인간은 악과 거짓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 가운데 있게 됩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살려고 하는 것이 자유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악과 거짓의 지배 아래 놓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사랑하는 상태에서는 선을 행하는 것이 강제가 아니라 자신의 기쁨과 자유가 됩니다.

 

AC.81은 또한 신앙에서 사랑으로라는 표현을 조심스럽게 이해하게 해 줍니다. 영적 인간은 신앙으로부터 행동하고, 천적 인간은 사랑으로부터 오는 신앙으로 행동합니다. 그렇다고 영적 인간의 신앙이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은 거듭남의 실제적인 질서이며 주님께서 사람을 이끄시는 방식입니다. 다만 천적 상태에서는 신앙과 진리가 사랑 안에 더욱 깊이 결합되어,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는 상태가 됩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을 영적 인간보다 단순히 등급이 높은 사람이라고만 이해하는 것보다, 두 사람이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과 양심이 두드러지고,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과 퍼셉션이 두드러집니다. 이 차이가 창1과 창2의 차이를 이루는 중요한 배경입니다.

 

AC.81은 결국 세 가지 질문으로 세 상태를 구별합니다. ‘무엇을 선과 진리로 인정하는가?’, ‘무엇을 목적으로 살아가는가?’, ‘무엇에 의해 악에서 억제되는가?입니다. 죽은 사람은 몸과 세상을 중심으로 하며 육체적·세상적 삶을 목적으로 삼고 외적 두려움에 의해 억제됩니다. 영적 인간은 영적·천적인 선과 진리를 신앙으로 인정하고 영원한 삶을 목적으로 하며 양심의 결박 가운데 싸웁니다. 천적 인간은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믿고 퍼셉션하며 주님 자신을 목적으로 하고,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AC.81은 창2의 천적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일종의 기준표와 같은 번호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분류하기 위한 기준표라기보다, 거듭남이 인간의 중심을 얼마나 깊이 변화시키는지를 보여 주는 기준입니다. 몸과 세상이 중심이던 상태에서 신앙과 양심의 상태로, 그리고 마침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 자유 자체가 되는 상태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2에서 다루는 천적 인간은 바로 이러한 사람입니다. (AC.81)

 

 

 

AC.80, 창2:1-17 개요, '주님으로부터 알고,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려 하지 말라' (16-17절)

AC.80그는 또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해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아는 것이 허락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렇게 해서는 안 되며,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sensu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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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0

그는 또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해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아는 것이 허락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렇게 해서는 되며,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sensualia et scientifica) 통해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해서도 됩니다. 그렇게 하면 그의 천적 본성이 죽게 됩니다. (16-17) He is also permitted to acquire a knowledge of what is good and true by means of every perception from the Lord, but he must not do so from himself and the world, nor search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memory-knowledge [sensualia et scientifica]; which would cause the death of his celestial nature (verses 1617).

 

16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16, 17)

 

해설

AC.80은 창2:16-17의 금령을 이해하는 핵심 원리를 개요 단계에서 제시합니다. 바로 앞 AC.79에서는 천적 인간이 에덴동산과 같은 존재이지만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며, 인간은 그 안의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80은 그 원리가 인간의 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설명합니다. 천적 인간은 선과 진리를 아는 것이 금지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해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아는 것이 허락됩니다. 문제는 그것을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알려 하는 데 있습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2:16-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는 말씀을 지식이나 이성 자체에 대한 금지로 읽으면 스베덴보리의 뜻과 멀어집니다. 앞의 AC.75AC.78에서 이미 천적 인간에게 지식과 이성이 있으며, 이성과 기억지식도 올바른 질서 안에서는 그의 겉 사람에게 속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지식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인간이 선과 진리를 어디로부터알고자 하느냐입니다.

 

천적 인간에게 허락된 길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해선과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AC.77에서 에덴동산의 보기에 좋은 나무들은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은 선에 대한 퍼셉션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AC.80은 그 퍼셉션의 근원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그것은 인간 자신에게서 솟아나는 직감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퍼셉션입니다. 천적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며, 그것을 자신의 생명 안에서 누립니다.

 

반대로 금지되는 것은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선과 진리를 알려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 자신세상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지혜의 근원으로 삼고, 외부 세계에서 감각으로 받아들인 것과 자기 기억에 축적된 지식을 최종적인 판단 기준으로 삼아 신적인 것들을 판단하려 할 때 본래의 천적 질서가 뒤집히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AC.80의 핵심은 이성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지식을 버리라는 것도 아니며, 세상에 관한 지식을 배우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AC.78에서 이성과 기억지식은 겉 사람에게 속하며 모두 지혜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속 사람 위에 서서 신적인 것들을 자기 기준으로 심판하려 하는 데 있습니다. 이성과 기억지식은 질서 안에서는 유용하지만, 그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판단하는 최고의 권위가 될 때 질서가 전도됩니다.

 

이 점에서 sensualia et scientifica’,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감각적인 것들은 인간이 육체의 감각을 통하여 접하는 가장 외적인 차원의 것들과 관련되고, ‘기억지식은 그렇게 받아들여지고 학습된 것들이 기억 속에 축적된 앎과 관련됩니다. 이것들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감각과 기억지식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가지고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하여 신적인 진리를 자기 힘으로 판정하려 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여기서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한다는 말도 오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신앙에 관하여 질문하거나 말씀의 깊은 뜻을 연구하는 것 자체를 금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 자신의 방대한 저술과 말씀 해설부터 성립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문제는 탐구 자체가 아니라 탐구의 질서입니다.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출발점이자 최종 기준으로 삼아 신적인 것들이 참인지 아닌지를 인간 자신이 판정하려는 태도가 문제입니다.

 

따라서 AC.80신앙은 무조건 믿어야 하며 이성적으로 질문해서는 된다는 반지성주의의 근거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이성과 신앙의 대립이 아니라 질서의 문제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성과 기억지식이 그것을 이해하고 확인하며 자연적 삶에서 섬기는 것은 올바른 질서입니다. 반대로 감각과 기억지식을 최상위에 놓고 그것으로 신앙의 아르카나를 재단하면서, 감각적으로 입증되지 않거나 인간의 자연적 이성에 맞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천적 질서와 반대됩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79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지 말라는 말씀과도 직접 연결됩니다. 선과 진리를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려 하는 것은 결국 지혜와 판단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는 것입니다. AC.79에서 동산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는 문제가 제시되었다면, AC.80에서는 그것이 인식의 차원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는 대신, ‘내가 스스로 알아내고 내가 판단한다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여기서 proprium과의 연결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인간의 proprium은 자기에게서 생명과 선과 진리가 나오는 것처럼 여기려는 성향과 연결됩니다. 천적 인간의 질서에서는 선과 진리를 주님으로부터 퍼셉션하지만, 그 질서에서 벗어나면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알려 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AC.80의 금령은 단순히 특정한 지식을 얻지 말라는 금지가 아니라, 인간이 자기 자신을 선과 진리의 근원과 심판자로 세우지 말라는 보호의 명령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하는 것이 그의 천적 본성의 죽음을 초래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 아닙니다. 2:17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의 속뜻에서 천적 인간의 천적 본성이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으로부터 퍼셉션하며 살아가는 천적 상태가 소멸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을 읽으면서 아담과 하와가 그날 육체적으로 죽지 않았다는 문제에 곧바로 매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AC.80이 제시하는 속뜻에서는 죽음의 초점이 육체적 사망 시점에 있지 않습니다.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는 천적 질서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것들을 알려 할 때, 그의 천적 본성이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73에서 사용된 죽어 있던 사람이라는 표현과도 구별하여 읽어야 합니다. AC.73에서는 창1의 거듭남 이전 상태에서 죽어 있던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고 다시 천적 인간이 되는 흐름을 말했습니다. AC.80에서는 이미 천적 인간이 된 사람의 천적 본성이 죽게 되는 위험을 말합니다. 두 경우 모두 단순한 육체적 죽음을 뜻하지 않지만, 문맥과 기능은 서로 다릅니다.

 

또한 AC.80은 인간이 세상을 무시해야 한다는 가르침도 아닙니다. ‘세상으로부터 그렇게 해서는 된다는 말을 자연계의 경험이나 학문을 불신하라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자연적 사실을 알아내는 일에서는 감각과 관찰과 이성과 기억지식이 당연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문제는 그것들을 가지고 신앙의 아르카나와 신적인 선과 진리의 근원까지 인간 자신이 결정하려 하는 데 있습니다.

 

이 구별은 오늘날에도 중요합니다. 자연과학의 문제를 신앙만으로 대신 판단하는 것도 질서의 혼동일 수 있고, 반대로 자연과학이 다루는 방법만을 가지고 신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존재 여부를 최종 판정하려 하는 것도 서로 다른 차원을 혼동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80 자체가 현대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논하는 번호는 아니므로 이 문제를 지나치게 확대하기보다는,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이 신앙의 아르카나를 판단하는 최종적인 원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본문의 원리에 머무는 것이 좋겠습니다.

 

AC.80에서 특히 아름다운 것은 이 금령이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기 위한 명령이라기보다 천적 생명을 보호하는 질서로 읽힌다는 점입니다. 주님께서는 천적 인간에게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하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해 그것들을 아는 것이 허락됩니다. 금지되는 것은 생명의 근원에서 떠나 자기 자신을 근원으로 삼는 것입니다. 금령은 앎을 제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참된 앎의 질서를 보존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창2:16-17의 허용과 금지는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라는 허용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는 금지는 모두 같은 질서를 말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풍성하게 받아 누리는 것은 허락되어 있지만, 그것을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아내어 자기 것으로 삼으려 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AC.79AC.80을 함께 읽으면 에덴의 질서가 매우 선명해집니다. AC.79에서는 누리되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AC.80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알되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려 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는 소유의 질서이고 다른 하나는 앎의 질서처럼 보이지만, 사실 둘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모든 선과 진리와 생명과 지혜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앞으로 창3의 타락 이야기를 읽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타락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과일 하나를 먹은 사건으로만 이해되지 않습니다. 더 깊은 차원에서는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퍼셉션하던 질서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과 감각과 기억지식을 통해 신적인 것들을 알려 하고 판단하려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과정이 다루어집니다. AC.80은 그 문제를 창2의 개요에서 미리 명확하게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AC.80의 핵심은 알지 말라가 아닙니다. 오히려 어디로부터 아는가?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해 선과 진리를 아는 것과,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것을 알려 하는 것은 겉으로는 모두 안다는 행위처럼 보이지만 속뜻에서는 전혀 다른 질서입니다. 전자는 천적 생명의 질서이고 후자는 그 천적 본성을 죽음으로 이끄는 질서입니다.

 

AC.80은 그래서 창2:16-17의 금령을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기준을 세웁니다. 인간에게 금지된 것은 지식도, 이성도, 질문도 아닙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선과 진리의 근원으로 세우고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가지고 신앙의 아르카나를 자기 힘으로 판단하려 하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의 참된 질서는 주님으로부터 퍼셉션하고,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누리며, 그 모든 것의 근원을 주님께 돌리는 데 있습니다. 그 질서를 떠나는 것이 바로 그의 천적 본성의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AC.80)

 

 

 

AC.81, 창2:1-17 배경, '죽은 사람, 영적 인간, 천적 인간의 세 가지 차이'

AC.81이 장은 천적 인간을 다루며, 앞 장은 죽은 사람으로부터 형성된 영적 인간을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고, 영적 인간이나 죽은 사람이 무엇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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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9,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은 에덴동산이지만,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다' (15절)

AC.79천적 인간은 이와 같은 동산입니다. 그러나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므로, 이 사람은 이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그것들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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