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1, ‘다 찬양하여라’와, 찬66, ‘다 감사드리세’입니다.
오늘은 창1 네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9절로 13절, AC 글 번호로는 27번에서 29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9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10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1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창1:9-13)
이 본문을
땅이 드러나고 씨 맺는 것들, 열매를 향한 셋째 날
라는 제목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시티아’(Arcana Coelestia)에 주목하여 귀 기울이고자 합니다.
이렇게 해서 창1 셋째 날, 곧 거듭남의 세 번째 상태를 마칩니다. 이 ‘셋째 날, 세 번째 상태’에 나온 중요한 표현, 개념들은 속 사람과 겉 사람 간 ‘유입과 저장의 질서’, ‘기억 지식’, ‘마른 땅’, ‘물’, ‘바다’ 및 오늘 본문에 나오는 ‘풀’, ‘씨 맺는 채소’,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 그리고 ‘inanimate’, ‘living soul’, ‘repentance’ 등입니다. 이들 개념이 각 절 본문 및 해설, 그리고 심화에 빠짐없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으니 부디 거듭 읽고, 또 읽고 하여 확실히 이해, 안 보고도 타인에게 설명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공지입니다. 어느덧 AC 리딩 및 해설 병행 주일예배 설교가 자릴 잡아가는 중인데요, 지난주부터이지만, 앞으로 ‘AC본문 번역-해설-심화’로 구성된 원고를 리딩하는 형태의 주일설교로 쭉 갈 것 같습니다. 해설에 심화까지 곁들이다 보니 이 정도면 그냥 읽기만 해도 정말 귀한 주일설교 한 편 한 편이 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다만 주일예배는 또 시간의 제한도 고려해야 해서 그 주 범위에 해당하는 모든 글을 다 다룰 수는 없고, 그래서 오늘처럼 맨 끝 AC 글 한 편만 리딩하고자 합니다. 다만 그 앞 범위 글들은 오늘처럼 모두 프린트해서 나눠드리고요. 프린트가 없어도 제 블로그에 글 번호별로 계속 올리고 있으니 참고하세요.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1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And God said, Let the earth bring forth the tender herb, the herb yielding seed, and the fruit tree bearing fruit after its kind, whose seed is in itself,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And the earth brought forth the tender herb, the herb yielding seed after its kind, and the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was in itself,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third day.(창1:11-13)
AC.29
‘땅’(earth), 곧 사람이 이렇게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 씨앗을 받을 준비가 되고, 선과 진리에 속한 어떤 싹을 낼 수 있는 상태가 되면, 주님은 먼저 아주 연약한 것을 돋아나게 하시는데, 이것이 바로 ‘풀’(tender herb)입니다. 다음으로는 더 괜찮은 것이 나오는데, 이것은 그 안에 씨를 지니고 있어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라고 하지요. 마지막으로는 선한 것이 나와 열매를 맺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이며, 이 모든 것은 ‘각기 종류대로’입니다. 거듭나는 중인 사람은 처음에는 자기가 행하는 선과 자기가 말하는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모든 선과 모든 진리는 주님에게서만 오지요. 그러므로 그것들이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직 참된 신앙의 생명을 갖고 있지 않은 상태인데,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나중에 그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 그것들이 주님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며, 다만 신앙의 생명을 받아들일 준비 상태에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는 여기서 생명 없는(inanimate) 것들로 표현되고, 그다음에 오는 신앙의 생명 상태는 생명 있는(animate) 것들로 표현됩니다.When the “earth,” or man, has been thus prepared to receive celestial seeds from the Lord, and to produce something of what is good and true, then the Lord first causes some tender thing to spring forth, which is called the “tender herb”; then something more useful, which again bears seed in itself, and is called the “herb yielding seed”; and at length something good which becomes fruitful, and is called the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 each according to its own kind. The man who is being regenerated is at first of such a quality that he supposes the good which he does, and the truth which he speaks, to be from himself, when in reality all good and all truth are from the Lord, so that whosoever supposes them to be from himself has not as yet the life of true faith, which nevertheless he may afterwards receive; for he cannot as yet believe that they are from the Lord, because he is only in a state of preparation for the reception of the life of faith. This state is here represented by things inanimate, and the succeeding one of the life of faith, by animate things.
[2] 씨를 뿌리는 이는 주님이시며, 씨는 주님의 말씀이고, 땅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주님 자신 친히 밝혀 주셨습니다.(마13:19-24, 37-39; 막4:14-21; 눅8:11-16)The Lord is he who sows, the “seed” is his Word, and the “earth” is man, as he himself has deigned to declare (Matt. 13:19–24, 37–39; Mark 4:14–21; Luke 8:11–16).
19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려진 자요20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21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22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23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24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37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38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39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마13:19-24, 37-39)
14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15말씀이 길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16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17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18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19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20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막4:14-20)
11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12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13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14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15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8:11-15)
같은 뜻으로 주님은 이렇게도 설명하십니다.To the same purport he gives this description:
26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27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28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막4:26-28)So is the kingdom of God, as a man when he casteth seed into the earth, and sleepeth and riseth night and day, and the seed groweth and riseth up, he knoweth not how; for the earth bringeth forth fruit of herself, first the blade, then the ear, after that the full corn in the ear(Mark 4:26–28).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는 가장 보편적 의미로는 전체 천국을 뜻하고, 덜 보편적으로는 주님의 참된 교회를, 가장 개별적 의미로는 참된 신앙에 속한 사람, 곧 신앙의 삶으로 거듭난 각 사람을 뜻합니다. 이런 이유로 이러한 사람을 ‘천국’(heaven)이라 하는데, 이는 천국이 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이며, 또 그를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라고도 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주님은 누가복음에서 친히 이렇게 가르치십니다.By the “kingdom of God,” in the universal sense, is meant the universal heaven; in a sense less universal, the true church of the Lord; and in a particular sense, everyone who is of true faith, or who is regenerate by a life of faith. Wherefore such a person is also called “heaven,” because heaven is in him; and likewise the “kingdom of God,” because the kingdom of God is in him, as the Lord himself teaches in Luke:
20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 21)Being demanded of the Pharisees when the kingdom of God should come, he answered them, and said, The kingdom of God cometh not with observation; neither shall they say, Lo here! or, Lo there! for behold, 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Luke 17:20–21).
이것이 사람 거듭남의 세 번째 연속 단계로서, 곧 회개(repentance)의 상태이며, 이 역시 그늘에서 빛으로, 곧 저녁에서 아침으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13절에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라고 하는 것입니다.This is the third successive stage of the regeneration of man, being his state of repentance, and in like manner proceeding from shade to light, or from evening to morning; wherefore it is said (verse 13),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third day.”
해설
AC.29에서는 셋째 날의 거듭남이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앞의 AC.27-28에서는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마른 땅이 드러나는 장면을 통하여,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모이고 그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수용체가 준비되는 상태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그 준비된 ‘땅’에서 처음으로 무엇인가 돋아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큰 나무와 풍성한 열매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연한풀’이 나오고, 다음으로 ‘씨맺는채소’가 나오며, 마지막으로 ‘씨가진열매맺는나무’가 나옵니다. 이것은 거듭남이 단번에 완성되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를 점차 자라게 하시는 질서 있는 과정임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때 땅, 곧 사람이 ‘주님에게서오는천적씨앗’을 받을 준비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씨앗의근원’입니다. 땅이 씨앗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씨앗을 받아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자기 안에서 선과 진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셋째 날에 비로소 무엇인가 자라기 시작하지만, 그 생명의 근원은 땅 자체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씨앗에 있습니다.
첫 번째로 나오는 것은 ‘연한풀’(tender herb)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주님께서 처음 돋아나게 하시는 ‘어떤연약한것’이라고 표현합니다. 거듭남의 처음에는 선과 진리가 아직 매우 미약합니다. 사람은 진리를 조금 알게 되고 그것에 따라 살고자 하지만, 이전의 습관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힘도 여전히 강합니다. 그러므로 처음 나타나는 선은 연한 풀처럼 쉽게 흔들리고 아직 충분히 자리 잡지 못한 상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작고 연약하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것이 주님으로부터 사람 안에서 돋아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씨맺는채소’입니다. 여기서는 처음의 연약한 상태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더유용한것’이라고 표현하며, 그 안에 다시 씨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씨가진열매맺는나무’가 나옵니다. 이제 선한 것이 열매를 맺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따라서 이 세 표현은 주님께서 사람 안에 선과 진리를 처음 싹트게 하시고, 그것을 점차 자라게 하여 마침내 열매를 맺게 하시는 하나의 진행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AC.29의 매우 중요한 반전이 나타납니다. 이렇게 선과 진리가 싹트고 열매까지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스베덴보리는 이 단계의 사람에게 아직 ‘참된신앙의생명’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자기가 행하는 선과 자기가 말하는 진리가 ‘자기에게서나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모든 선과 모든 진리가 주님에게서 오지만, 이 단계의 사람은 아직 그것을 진정으로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미 완성된 영적 생명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생명을받아들이기위한준비상태’에 있습니다.
이 점을 이해해야 왜 식물들이 여기서 ‘생명없는것들’(inanimate things)로 표현되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자연계의 식물이 문자 그대로 생명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구별하는 것은 거듭남의 상태입니다. 셋째 날에는 선과 진리에 속한 무엇인가가 사람 안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지만, 사람은 아직 그것들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참으로 인정하지 못합니다. 다음 단계에서 등장하는 ‘생명있는것들’은 신앙의 생명을 실제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열매맺는나무’까지 왔다고 해서 거듭남이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셋째 날 전체는 여전히 다음 생명의 단계를 위한 준비입니다.
그렇다고 이때 사람이 행하는 선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바로 이 불완전한 상태에서 사람을 이끌어 가십니다. 사람은 처음에는 ‘내가선을행한다’, ‘내가진리를말한다’, ‘내가악을버린다’고 느끼며 행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듭남에서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 스스로 하는 것처럼 악과 싸우고 선을 행해야 합니다. 다만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그 선과 진리의 실제 근원과 능력이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 있다는 것을 점차 인정하게 됩니다. AC.29의 셋째 날은 바로 그 인정에 이르기 전의 중요한 준비 단계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어서 주님의 씨 뿌리는 비유들을 인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 자신이 ‘씨’를 말씀과 연결하시고, 씨가 뿌려지는 ‘땅’을 사람과 연결하여 설명하셨기 때문입니다.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와 좋은 땅의 차이는 같은 씨가 주어져도 그것을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창1장의 땅에서 식물이 돋아나는 모습은 단순한 자연계 식물의 창조를 넘어, 주님의 말씀이 사람 안에 받아들여지고 점차 열매를 향하여 자라 가는 거듭남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막4:26-28의 비유는 이 성장의 또 다른 중요한 면을 보여 줍니다.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린 뒤 밤낮 자고 깨는 동안 씨는 자라지만, 그는 ‘어떻게그리되는지를알지못합니다’.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 됩니다. 창1:11의 식물들과 각각을 일대일로 대응시킬 필요는 없지만, 두 말씀 모두 생명이 단번에 완성된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질서를 따라 점차 성장한다는 동일한 원리를 보여 줍니다. 인간은 거듭남의 모든 내적 과정을 스스로 볼 수도 통제할 수도 없지만, 주님께서는 사람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에서도 받아들인 선과 진리를 질서 있게 자라게 하십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나라’를 세 범위로 설명합니다. 가장 보편적인 의미에서는 전체 천국이고, 덜 보편적인 의미에서는 주님의 참된 교회이며, 개별적인 의미에서는 참된 신앙에 속한 사람, 곧 신앙의 삶으로 거듭난 각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단지 개인의 도덕적 개선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한 사람 안에 천국의 질서를 세우시는 일입니다.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에 따라 살아갈수록, 그의 안에는 주님의 나라에 속한 질서가 형성됩니다. 눅17:20-21의 ‘하나님의나라는너희안에있느니라’는 말씀이 이 문맥에서 인용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이 셋째 단계를 ‘회개(repentance)의상태’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AC.29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여기서 회개를 단지 죄를 슬퍼하거나 잘못을 후회하는 감정으로만 이해해서는 부족합니다.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씨앗을 받아 선과 진리에 속한 것을 실제로 내기 시작하는 상태, 곧 이전의 삶에서 돌아서 새로운 삶을 향하여 움직이기 시작하는 상태가 셋째 날입니다. 다만 아직 사람은 자기가 행하는 선과 말하는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회개 역시 완성된 거듭남이 아니라 참된 신앙의 생명을 받기 위한 과정입니다.
그래서 셋째 날에도 다시 ‘저녁이되고아침이됩니다’. 사람은 아직 그늘 속에 있지만 빛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으며,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던 선과 진리가 실제로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더 깊은 인식을 향하여 인도받고 있습니다. 연한 풀에서 씨 맺는 채소로, 다시 열매 맺는 나무로 나아가는 성장도 바로 이 저녁에서 아침으로의 진행 안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완성된 열매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현재 상태에서 시작하여 그가 받을 수 있는 만큼 선과 진리를 싹트게 하시고 점차 다음 단계로 이끄십니다.
AC.29의 아름다움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셋째 날의 사람은 아직 자기 선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있으며 참된 신앙의 생명에도 완전히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그 불완전한 상태를 버리지 않으시고 거듭남의 과정으로 사용하십니다. 사람에게서 겨우 ‘연한풀’만 돋아나는 때에도 주님께서는 그 작은 시작을 다음 단계로 이끄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모든 성장의 근원은 땅인 사람에게 있지 않고 씨를 주시는 주님에게 있습니다. 결국 거듭남은 사람이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이 자기 안에서 자라고 열매 맺도록 주님께 이끌리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And God called the dry [land] earth, and the gathering together of the waters called he sea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창1:10)
AC.28
말씀에서‘물’(waters)로는여러지식(knowledges, cognitionesetscientifica)을,‘바다’(seas)로는그많은물,곧지식의집합을의미할때가참많은데요,이사야에보면,It is a very common thing in the Word for “waters” to signify knowledges [cognitiones et scientifica], and consequently for “seas” to signify a collection of knowledges.As in Isaiah:
AC.28은 창1:10의 ‘하나님이뭍을땅이라부르시고모인물을바다라부르시니’를 설명하면서, 앞의 AC.27에서 밝혀진 ‘물’, ‘바다’, ‘땅’의 의미가 말씀의 다른 곳에서도 실제로 사용된다는 것을 여러 성경 구절을 통해 보여 줍니다. 핵심은 비교적 단순합니다. ‘물’은 여러 지식(cognitiones et scientifica)을, ‘바다’는 그렇게 모인 지식들의 집합을, ‘땅’은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그릇을 의미합니다.
처음 읽는 독자라면 먼저 ‘왜물이지식을의미하는가?’라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AC.28은 그 이유를 이론적으로 길게 설명하기보다 말씀의 실제 용례를 제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사11:9입니다. ‘물이바다를덮음같이여호와를아는지식이세상에충만할것임이니라.’ 여기서는 ‘물’과 ‘여호와를아는지식’이 한 문장 안에서 직접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말씀들을 근거로 ‘물’이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 말씀에서 매우 흔한 용법이라고 설명합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사19:5-6에서는 ‘바닷물이없어지고’, ‘강이말라버리는’ 모습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지식의결핍’이 다루어지는 예로 제시합니다. 물이 지식을 나타낸다면 물이 없어지고 마르는 것은 그에 대응하여 지식이 결핍된 상태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더 구체적으로 어떤 종류의 지식이 어떻게 사라지는지까지 AC.28이 설명하는 것은 아니므로, 이 글에서는 우선 ‘물의있음과없음’이 ‘지식의있음과결핍’을 표현하는 말씀의 방식이라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바다’는 왜 지식의 집합을 의미할까요? 창1:10자체가 이미 하나의 단서를 줍니다. 흩어져 있던 물들이 모이고, 하나님께서 그 ‘모인물’을 바다라고 부르십니다. 따라서 물이 여러 지식을 나타낸다면, 그 물들이 모인 바다는 자연스럽게 여러 지식이 모여 있는 집합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앞의 AC.27에서 거듭나는 사람의 기억 속에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저장되어 기억 지식 가운데 분류된다는 설명과도 이어집니다.
학2:6-7, 슥14:7-8, 시69:33-34의 인용도 물과 바다와 땅이 단순한 자연물만을 가리키지 않고 말씀 안에서 영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제시됩니다. 다만 AC.28은 이 각각의 구절에 등장하는 모든 표현의 세부적인 상응을 여기서 풀어 주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슥14:8의 ‘동해’와 ‘서해’가 각각 무엇을 뜻하는지까지 이 글에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인용들의 세부 상응을 미리 확정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무엇을 증명하기 위해 이 구절들을 인용했는지를 따라가는 편이 안전합니다. 곧 ‘물’과 ‘바다’가 말씀에서 지식과 그 집합을 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슥14:8의 ‘생수’라는 표현을 보고 ‘그렇다면살아있는지식과죽은지식이따로있다는뜻인가?’라고 궁금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문제는 스베덴보리의 더 넓은 가르침 안에서 살펴볼 수 있지만, AC.28자체의 논지는 그것을 자세히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 글에서 물은 우선 지식의 상응을 보여 주기 위해 인용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생수’를 곧바로 ‘생명으로변화된지식’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이 문단이 직접 말하는 범위를 넘어갑니다.
마지막에는 시선이 ‘물’과 ‘바다’에서 ‘땅’으로 옮겨 갑니다. 스베덴보리는 슥12:1을 인용하면서 ‘땅’이 ‘그릇’(recipient)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그릇이라는 말은 무엇인가를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앞의 AC.27에서는 ‘마른땅’이 겉 사람을 의미한다고 했으므로, 두 글을 함께 읽으면 거듭나는 사람의 겉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받아들이는 영역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땅이그릇이다’라는 말은 땅 자체가 지식에 생명을 만들어 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릇은 받아들이는 것이지 생명의 근원은 아닙니다. 앞의 AC.27에서도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기억 속에 많은 지식이 쌓였다는 사실만으로 그것들이 자동으로 살아 있는 영적 생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식은 중요하지만 지식 자체가 생명의 근원은 아닙니다.
이 점은 AC를 처음 읽는 사람에게 특히 중요합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교리를 많이 배운다는 것은 분명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많이안다’는 것과 ‘그진리로산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AC.28은 아직 그 다음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먼저 주님께서 거듭남을 이루어 가시는 가운데 지식들이 ‘물’과 ‘바다’로 표현되고,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겉 사람이 ‘땅’이라는 그릇으로 표현된다는 기본 구조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AC.28에서 ‘물–바다–땅’을 지나치게 복잡하게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물은 여러 지식, 바다는 그 지식들의 집합, 땅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그릇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과정에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이 ‘땅’에서 실제로 무엇이싹트기 시작하는지는 바로 이어지는 창1:11-13과 AC.29에서 설명됩니다. 스베덴보리가 글을 전개하는 순서대로 따라가면, 지식이 모이는 것과 실제 영적 생명이 나타나는 것을 서로 혼동하지 않으면서 셋째 날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