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64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 안에 너무나 많은‘아르카나’(arcana)가 있어서 수많은 책으로도 그것들을 모두 펼쳐 내기에 충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그런데‘아르카나’는‘속뜻’과 같은 말일까요?또AC에서 자주 만나는‘퍼셉션’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먼저 단어 자체를 보면‘arcana’는 라틴어‘arcanum’의 복수형으로, ‘감추어진것들’, ‘비밀들’이라는 뜻을 가집니다.그래서ArcanaCoelestia라는 제목도 문자 그대로 생각하면‘천적인비밀들’, ‘천국의비밀들’정도의 뜻이 됩니다.다만 여기서‘비밀’이라고 할 때는 일부 사람만 알고 남에게 숨겨 두는 비밀 정보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AC.64의 문맥에서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깊은 내용들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아르카나’와‘속뜻’은 정확히 같은 말일까요?완전히 같은 용어라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AC.64는 먼저‘이것이말씀의속뜻이며말씀의가장참된생명’이라고 말한 다음, ‘그아르카나는너무많아서수많은책으로도충분하지않다’고 합니다.따라서 적어도 이 문맥에서는‘속뜻’이 말씀의 내적 의미 자체를 가리킨다면, ‘아르카나’는 그 속뜻 안에서 밝혀지는 수많은 감추어진 내용들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너무 기계적으로‘속뜻=그릇,아르카나=내용’이라는 공식으로 고정할 필요는 없습니다.스베덴보리는 언제나 그런 철학적 구분표를 제시하면서 두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문맥에 따라 서로 매우 가까운 의미 영역에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중요한 것은‘아르카나’가 말씀 밖에 따로 감추어져 있는 비밀 지식이 아니라는 점입니다.AC.64에서 말하는 아르카나는 바로 말씀의 속뜻과 관련하여 밝혀지는 감추어진 것들입니다.
창세기1장이 좋은 예입니다.문자에서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여섯 날을 읽습니다.그런데AC.6부터AC.63까지 스베덴보리는 그 말씀 안에서 인간의 거듭남에 관한 수많은 내용을 밝혔습니다.빛과 어둠,물과 궁창,식물과 씨,해와 달과 별,물고기와 새와 짐승,하나님의 형상과‘심히좋았더라’등이 거듭남과 어떻게 관계되는지를 설명했습니다.AC.64는 지금까지 제시한 이 모든 것조차 말씀 안의 아르카나 가운데‘극히일부’라고 말합니다.
이 점에서 아르카나는 단순한‘상징의뜻풀이’보다 넓습니다. ‘빛은이것을뜻한다’, ‘물은저것을뜻한다’는 대응 하나를 알아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그 의미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거듭남의 질서와 상태,주님의 역사를 밝혀 줍니다.따라서 아르카나를 재미있는 성경 암호나 숨은 정보처럼 접근하면AC가 말하려는 핵심을 놓치기 쉽습니다.
그러면‘퍼셉션’과는 어떻게 다를까요?퍼셉션은AC에서 별도로 설명되는 인간의 영적 상태와 인식에 관한 용어입니다.따라서 아르카나와 퍼셉션을‘하나는내용이고하나는그것을알아보는능력’이라고 간단히 짝지어 정의할 필요는 없습니다.서로 관련될 수는 있지만 동일한 범주의 두 용어가 아닙니다. ‘아르카나’가 무엇인가를 묻는 이번 심화에서는 퍼셉션의 전체 교리까지 가져오지 않고,그것이 아르카나의 다른 이름은 아니라는 정도로 구별하면 충분합니다.
무엇보다‘아르카나’라는 말을 들을 때AC자체가 성경보다 더 높은 비밀 지식을 담은 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스베덴보리가 밝힌다고 주장하는 아르카나는AC안에서 독립적으로 만들어진 비밀이 아니라 말씀 안에 있는 아르카나입니다.AC.64의 순서도 먼저‘말씀의속뜻’을 말하고 그 안의 헤아릴 수 없는 아르카나를 말합니다.
따라서ArcanaCoelestia라는 책 제목도 결국 독자의 눈을 이 책 자체에 묶어 두기보다 말씀으로 돌려보냅니다. ‘천국의비밀’은 스베덴보리가 새로 창조한 비밀이 아니라,그의 주장에 따르면 주님께서 주신 말씀 안에 이미 있으나 문자적 의미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영적이고 천적인 내용들입니다.
한마디로 정리한다면,AC.64에서‘아르카나’는 말씀의 문자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그 속뜻 안에 담겨 있는 수많은 감추어진 영적이고 천적인 내용들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창세기1장을 다 설명한 이 자리에서도 자신이 밝힌 것은 그 가운데‘극히일부’라고 말합니다.
이것이바로말씀의속뜻(theinternalsenseoftheWord)이며,말씀의가장참된생명입니다.이는문자적의미에서는전혀드러나지않습니다.그안에담긴아르카나는너무나많아서,그것들을모두풀어내려면수많은책으로도충분하지않을것입니다.여기에서는다만극히일부만제시되었는데,그것도이말씀이거듭남을다루고있으며,그거듭남이겉사람(theexternalman)에서속사람(theinternalman)으로나아간다는사실을확인해주는것들뿐입니다. 천사들은말씀을이렇게지각합니다.그들은문자속에있는것들,심지어단어하나의가까운의미조차도전혀알지못합니다.하물며말씀의역사서와예언서에매우자주등장하는나라,성읍,강,사람의이름들은더더욱알지못합니다.그들은오직그말들과이름들이의미하는것들만을관념으로가집니다. 그래서낙원에있는아담을통해그들은태고교회를지각하지만,그교회자체가아니라그교회의주님에대한신앙을지각합니다.노아를통해서는태고교회의후손들에게남아아브람시대까지계속된교회를지각합니다.아브라함을통해서는그개인을전혀지각하지않고,그가표상한구원하는신앙을지각합니다.이와같이천사들은말과이름에서완전히떠나영적이고천적인것들을지각합니다. This then is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its veriest life, which does not at all appear from the sense of the letter.But so many are its arcana that volumes would not suffice for the unfolding of them.A very few only are here set forth, and those such as may confirm the fact that regeneration is here treated of, and that this proceeds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It is thus that the angels perceive the Word.They know nothing at all of what is in the letter, not even the proximate meaning of a single word; still less do they know the names of the countries, cities, rivers, and persons, that occur so frequently in the historical and prophetical parts of the Word.They have an idea only of the things signified by the words and the names.Thus by Adam in paradise they perceive the most ancient church, yet not that church, but the faith in the Lord of that church.By Noah they perceive the church that remained with the descendants of the most ancient church, and that continued to the time of Abram.By Abraham they by no means perceive that individual, but a saving faith, which he represented; and so on.Thus they perceiv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entirely apart from the words and names.
해설
AC.64는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에 대한 해설을 마친 자리에서, 스베덴보리가 지금까지 자신이 무엇을 설명해 왔는지를 한 걸음 물러서서 밝히는 글입니다. 그는 이것을 ‘말씀의속뜻’이라고 부르며, 그것이 말씀의 ‘가장참된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창세기 1장을 읽으면 문자적으로는 천지와 빛, 궁창과 물, 식물과 해와 달과 별, 물고기와 새와 짐승, 그리고 사람의 창조가 나옵니다. 그런데 AC.6부터 AC.63까지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 안에 인간의 거듭남이라는 속뜻이 들어 있다고 설명해 왔습니다. AC.64는 이제 바로 그것이 말씀의 속뜻이며, 그 속뜻은 문자적 의미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문자적의미에서는전혀드러나지않는다’는 말을 ‘문자적의미는중요하지않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속뜻은 말씀을 버리고 그 밖에서 만들어 낸 별도의 영적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그 말씀 안에 있는 뜻입니다. 창1의 빛, 물, 식물, 해와 달과 별, 생물과 사람이라는 말씀의 표현들이 있기 때문에 그 안에 담긴 속뜻도 밝혀집니다. 따라서 AC를 읽으면서 문자와 속뜻을 서로 경쟁시키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문자는낮고속뜻은높으니이제문자는필요없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말씀의 문자 안에 우리가 처음에는 알지 못했던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이 AC.64의 출발점입니다. 특히 우리의 독법에서는 언제나 말씀 자체가 먼저이고 AC는 그 말씀 안에 담긴 속뜻을 밝혀 주는 해설이라는 순서를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안의 아르카나가 너무 많아 수많은 책으로도 충분히 펼쳐 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창1을 설명하면서 자신이 제시한 것은 그 가운데 ‘극히일부’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 말은 지금까지의 설명이 창세기 1장의 모든 속뜻을 다 밝혔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을 알려 줍니다. 그가 특별히 골라 제시한 것은 ‘이말씀이거듭남을다루고있으며,그거듭남이겉사람에서속사람으로나아간다는사실’을 확인해 주는 아르카나들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을 ‘거듭남에관한여섯단계’라고 이해했다고 해서 그 말씀의 내적 내용 전체를 다 파악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AC.64자신이 지금까지 제시한 것은 극히 일부라고 선을 긋고 있습니다.
여기서 ‘거듭남이겉사람에서속사람으로나아간다’는 표현도 그대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에서 우리는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에 이른다는 질서도 여러 차례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AC.64의 이 문장은 지금 그것을 설명하는 문장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창1의 여섯 날에 나타난 거듭남의 진행이 ‘fromtheexternalmantotheinternal’, 곧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이 두 표현을 성급히 하나가 틀리고 하나가 맞는 것처럼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에게서 생명이 유입되는 질서와, 사람이 거듭남을 경험하며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 인도되는 진행을 구별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문제는 이후 AC가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더 자세히 설명할 때 점차 분명해질 것입니다.
AC.64의 두 번째 큰 주제는 천사들이 말씀을 어떻게 지각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이 말씀의 문자에 있는 것들을 알지 못하며, 심지어 단어 하나의 가까운 의미조차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역사서와 예언서에 등장하는 나라와 성읍, 강과 사람의 이름도 알지 못하고, 오직 그 말들과 이름들이 의미하는 것들을 지각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천사들이 성경의 역사에 무지하다는 일반적인 지식론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말씀을 읽을 때 천사들에게 그 말씀이 어떻게 지각되는지를 설명하는 문맥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그 예가 아담과 노아와 아브라함입니다. 천사들은 낙원의 아담을 통해 태고교회를 지각하지만 거기에서도 태고교회라는 역사적 교회 자체에 머무르지 않고 그 교회의 ‘주님에대한신앙’을 지각합니다. 노아를 통해서는 태고교회의 후손들에게 남아 아브람 시대까지 계속된 교회를 지각하고, 아브라함을 통해서는 아브라함이라는 개인을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표상한 ‘구원하는신앙’을 지각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통해 말씀의 고유명사들이 천사에게 단순한 역사적 이름으로 머무르지 않고 그 이름들이 의미하고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으로 지각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아담도노아도아브라함도실제인물이아니었다’는 결론을 끌어내서는 안 됩니다. AC.64의 관심은 그 인물들의 역사성 여부를 논증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천사들이 말씀을 지각할 때 ‘아브라함’이라는 개인에게 머무르지 않고 그가 표상하는 것을 지각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속뜻을 인정하는 것과 문자에 기록된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을 무조건 부정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처음 AC를 읽는 독자에게는 이 구별이 특히 중요합니다.
또 ‘천사들은말과이름에서완전히떠나영적이고천적인것을지각한다’는 말을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사람 이름과 사건을 무시해야 한다는 지침으로 받아들여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자연계에서 문자로 주어진 말씀을 읽습니다. 천사의 지각 방식과 인간의 말씀 읽기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AC.64가 보여 주는 놀라운 점은 우리가 자연계에서 같은 말씀을 읽는 동안 그 말씀에는 천사들이 지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뜻도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인간과 천국을 잇는 방식으로 주어져 있다는 더 큰 주제의 입구가 여기서 열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AC.64는 ‘성경이야기를이제역사로읽지말고상징으로만읽으라’는 선언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훨씬 깊습니다. 말씀에는 인간이 문자만 보아서는 알 수 없는 속뜻이 있으며, 그 속뜻이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입니다. 천사들은 바로 그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합니다. 인간에게는 아담, 노아, 아브라함이라는 이름과 이야기가 보이지만, 천사에게는 그 이름들이 의미하는 교회와 신앙에 관한 것이 지각됩니다. 자연계의 문자와 천국의 지각이 하나의 말씀 안에서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속뜻’은 인간이 본문을 읽다가 자유롭게 떠올리는 영적 감상과도 구별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을 읽으며 ‘나는아브라함처럼용감하게살아야겠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고, 그것이 유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AC가 말하는 속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AC.64에서 아브라함은 그가 표상하는 ‘구원하는신앙’과 연결됩니다. 속뜻은 독자의 주관적인 연상이나 감동이 아니라 말씀의 말과 이름들이 실제로 의미하고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에 관한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아르카나’라는 말도 중요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 안에 우리가 문자만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수많은 아르카나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재미있는 비밀 지식을 많이 안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창1에서 밝혀진 거듭남의 질서처럼 말씀 안에 감추어져 있는 깊은 내용들을 가리킵니다. ‘아르카나’와 ‘속뜻’이 정확히 같은 말인지, 서로 어떻게 구별되는지는 현재 연결된 심화에서 따로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 하나 처음 읽는 독자에게 자연스럽게 생길 질문은 ‘그렇다면AC가말하는‘말씀’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경 66권 전체와 정확히 같은 범위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중요한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theWord’라는 말을 상당히 엄밀한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문제를 잘못 설명하면 ‘어떤성경책에는주님의생명이있고다른성경책에는없다’는 식으로 지나치게 단순화할 위험이 있으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충분히 구별하여 살펴보겠습니다.
AC.64를 읽고 나면 지금까지의 창1해설도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첫째 날의 빛부터 여섯째 날의 사람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따라온 것은 단순히 스베덴보리가 창세기에 임의로 붙인 영적 비유가 아니라, 그가 ‘말씀의속뜻’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를 설명하면서 천사들의 말씀 지각을 제시합니다. 천사들은 인간이 보는 문자와 이름에 머무르지 않고 그 말과 이름이 의미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설명의 출발점과 돌아갈 곳은 여전히 말씀입니다. AC를 많이 읽을수록 성경의 문자가 시시해지고 AC의 설명만 중요해지는 방향으로 간다면 오히려 순서가 뒤집힌 것입니다. AC.64가 말하는 아르카나는 말씀 밖에 있는 비밀이 아니라 말씀 안에 있는 아르카나이고, 속뜻 역시 말씀의 속뜻입니다. 따라서 AC의 역할은 말씀을 대신하는 데 있지 않고, 우리가 읽고 있던 바로 그 말씀 안에 얼마나 깊은 생명이 들어 있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AC.64의 첫 문장을 그대로 붙드는 것이 가장 좋겠습니다. ‘이것이바로말씀의속뜻이며,말씀의가장참된생명입니다.’ 창세기 1장의 말씀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말씀 안에서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 신앙과 사랑에 관한 영적이고 천적인 세계가 열립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지금까지 자신이 보여 준 것조차 그 헤아릴 수 없는 아르카나 가운데 ‘극히일부’라고 말합니다. AC.64는 그래서 창1해설의 결론인 동시에, 앞으로 우리가 말씀과 AC를 어떤 관계로 읽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중요한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AC.63마지막에는 처음 읽는 사람을 잠시 멈추게 하는 문장이 나옵니다. ‘인간은하늘,곧천적낙원으로인도되는데,이에대해서는다음장에서다루겠습니다.’지금까지 창세기1장을 한 사람의 거듭남의 과정으로 읽어 왔는데,그 사람이 죽었다는 말도 없는데 갑자기‘하늘’로 인도된다고 하니 자연스럽게‘이것이사후천국에들어간다는뜻인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먼저 가장 중요한 단서는 스베덴보리 자신이 바로 뒤에 붙인 말입니다. ‘이에대해서는다음장에서다루겠습니다.’따라서AC.63만 가지고‘하늘,천적낙원’의 뜻을 모두 확정하려 하기보다,이것이 다음 장의 일곱째 날 설명으로 넘어가는 연결 문장이라는 사실을 먼저 보는 것이 좋습니다.
문맥상 이 사람이 여기서 육체적으로 죽었다고 볼 이유는 없습니다.AC.62는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여섯 상태를 말했고,AC.63은 여섯째 날 끝에서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고 전투가 그치며 악한 영들이 떠나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고 말합니다.그러므로 이어지는‘하늘,곧천적낙원으로인도된다’는 말 역시 지금까지 설명해 온 거듭남의 연속선상에서 읽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곧바로‘하늘은장소가아니라오직마음의상태라는뜻이다’라고 결론 내려도 될까요?그것도 조금 조심하는 것이 좋습니다.스베덴보리는 실제 사후의 천국도 분명히 말합니다.따라서 이번 표현 하나를 근거로‘천국은장소가아니고인간내면의상태일뿐이다’라고 하면 스베덴보리의 천국 이해를 지나치게 축소하게 됩니다.
반대로‘하늘로인도된다’는 말이 있으니 이 사람이 여기서 죽어 실제 사후 천국으로 들어간다고 읽는 것도 현재의 문맥과 맞지 않습니다.지금 설명되는 것은 창조의 여섯 날에 대응하는 인간의 거듭남이고,스베덴보리는 그 다음 상태를 다음 장에서 계속 설명하겠다고 합니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 가장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하늘,곧천적낙원’이 여섯째 날 이후에 이어지는 거듭남의 상태와 관계된다는 것입니다.그것이 정확히 어떤 상태이며 왜‘하늘’과‘천적낙원’이라고 불리는지는 창2와 이어지는AC의 설명을 따라가면서 밝혀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AC.63의 마지막 문장은 독자에게 일종의 예고편과 같습니다.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진행된 거듭남의 창조가 이제 새로운 상태로 넘어갑니다.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전투가 그치고,악한 영들이 떠나며 선한 영들이 대신하고,사람은‘하늘,곧천적낙원’으로 인도됩니다.그리고 스베덴보리는 바로 거기서 멈추며‘다음장에서’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여기서 멈추는 것이 좋겠습니다.물론AC전체를 이미 알고 있다면 일곱째 날,천적 인간,안식,천상의 사람의 상태 등을 미리 연결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따라 설명하는 순서를 그대로 경험하게 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창세기1장이 끝났으니 이제 창세기2장의 말씀 자체가 먼저 나오고,그 말씀을AC가 어떻게 여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과AC의 관계를 생각할 때에도 중요합니다.AC.63의 마지막 한마디를 가지고 다음 장의 의미를 우리가 먼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먼저 창2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의 속뜻을 스베덴보리가 어떻게 설명하는지 따라가는 것입니다.AC는 말씀보다 앞서 독자를 끌고 가는 책이 아니라 말씀 안에 있는 것을 밝히는 해설이어야 합니다.
따라서‘살아있는사람이어떻게하늘로인도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현재 단계의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이것은 사망 장면을 묘사하는 문장이 아니라 거듭남의 여섯째 상태에서 다음 상태로 넘어가는 문맥에 있습니다.그러나‘하늘,곧천적낙원’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스베덴보리 자신이‘다음장에서’설명하겠다고 했으므로,우리도 그 설명을 기다리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