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0.심화

 

2. 스베덴보리의 경험

 

위 심화 1번에 이어지는 질문인데요, 스베덴보리는 이런 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본인이 직접 이런 과정을 밟은 건가요?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 연구에서 매우 핵심적인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인간 내면의 과정을 어떻게 그렇게 구체적으로 알았는가?’ 하는 문제는 결국 그의 저술이 어떤 경험과 근거에서 나온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대체로 세 가지 층위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가장 단순한 차원은 ‘개인적 영적 경험의 층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저술 여러 곳에서 자신이 단순한 사상가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통해 실제로 거듭남의 과정을 겪었다’고 말합니다. 특히 그의 개인 기록인 ‘Spiritual Diary’와 ‘Adversaria’ 같은 글들을 보면, 그는 자신이 겪는 생각의 변화, 유혹, 내적 싸움, 깨달음 등을 매우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기록들을 보면, 그가 단순히 교리를 정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내면에서 일어나는 영적 변화들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어떤 생각이 자신에게서 나온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영들의 영향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도 하고, 어떤 선한 감정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점차 알게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이런 기록들을 보면 AC에서 설명하는 많은 심리적 과정들이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체험하고 관찰한 것들’이라는 점이 드러납니다.

 

두 번째 층위는 ‘영계 경험의 층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1740년대 중반 이후 영계가 열려서 천사들과 영들과 교통하게 되었다고 여러 번 말합니다. 그는 자신이 그들과 수십 년 동안 교통하며, 인간 영혼의 상태, 거듭남의 과정, 선과 진리의 작용 등을 직접 관찰했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영계에서는 사람의 생각과 의도가 거의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에, 어떤 선이 자기 사랑에서 나오는지, 어떤 선이 주님에게서 오는지 매우 분명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이런 관찰을 통해 그는 인간의 선이 어떻게 왜곡되는지, 왜 거듭남이 점진적으로 진행되는지, 왜 리메인스가 보호되어야 하는지 등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우리가 볼 때는 이것이 믿기 어려운 주장처럼 보일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 자신은 그의 신학 대부분이 이런 ‘영적 관찰을 통해 얻은 지식’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세 번째 층위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통해 얻은 이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을 읽을 때 문자적 의미가 아니라 그 안의 영적 의미가 열린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를 읽을 때, 그는 그것을 우주의 물리적 창조가 아니라 ‘인간 거듭남의 과정’으로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 해석은 단순한 상징적 해석이 아니라, 천사들이 말씀을 이해하는 방식과 동일한 방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창세기의 ‘여섯 날’을 인간 내면의 여섯 단계로 보고, 각 단계에서 일어나는 영적 상태들을 설명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성경의 여러 구절을 통해 인간 영혼의 구조와 거듭남의 과정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이 세 가지를 서로 분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설명이 ‘개인 경험, 영계 관찰, 그리고 말씀의 내적 의미’가 서로 일치하는 데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 그는 단순히 자기 경험만 말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성경 해석만 한 것도 아니며, 단순히 영적 체험만 말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서로 확인되면서 하나의 교리가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 AC.20 같은 설명도 단순히 인간 심리를 추측해서 쓴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 자신이 보기에는 ‘자신의 내적 경험과 영적 관찰, 그리고 말씀의 내적 의미가 모두 가리키는 동일한 원리’였습니다. 그는 사람이 처음에는 자기 선을 선으로 생각하다가, 점점 빛 속으로 들어가면서,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런 과정은 그가 자신에게서도 보았고, 영계에서도 관찰했으며, 성경의 창조 이야기 속에서도 발견했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순한 신학자가 아니라 ‘영계를 관찰하는 자연과학자처럼 인간 영혼을 연구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인간 마음을 단순히 도덕적으로 평가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가 인간 안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왜 거듭남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지, 왜 자기 선이 먼저 무너져야 하는지를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AC.20 같은 문장은 바로 그런 연구의 한 부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말하면, 스베덴보리가 이런 내용을 알게 된 이유는 한 가지가 아니라 세 가지가 겹쳐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내적 경험, 영계에서의 관찰, 그리고 말씀의 내적 의미에 대한 통찰’이 서로 맞아떨어지면서 이런 설명이 나오게 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20, 심화 3, ‘요8:24’

AC.20.심화 3. ‘요8:24’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요8:24) Except ye believe that I am, ye shall die in your sins (John 8:24). 이 요한복음 8장 24절이 AC.20에 인용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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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 심화 1, ‘실제 사례들’

AC.20.심화 1. ‘실제 사례들’ AC.20, ‘But when man is conceived anew, he then begins for the first time to know that his goods are not goods, and also, as he comes more into the light, that the Lord is, and that he is good and truth it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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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심화

1.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님을 안다는 것 : 실제 사례들

 

AC.20, But when man is conceived anew, he then begins for the first time to know that his goods are not goods, and also, as he comes more into the light, that the Lord is, and that he is good and truth itself.에 해당하는 구체적 사례를 예를 들어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실제 목회현장에선 이 마저도 정말 쉽지 않은, 정말 보기 힘든 경우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느끼는 어려움은 매우 현실적인 목회 경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AC.20의 문장은 읽으면 간단해 보이지만, 실제 인간 삶에서는 거의 드물게 보이는 변화처럼 느껴지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이 상태는 갑자기 성인(聖人)이 되는 어떤 극적인 사건이라기보다, 사람이 조금씩 더 빛 속으로 들어가면서 ‘자기 자신을 다르게 보게 되는 과정’을 가리킵니다. 몇 가지 실제적인 유형을 통해 설명해 보겠습니다.

 

먼저 AC.20의 문장을 다시 보면 두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선이 선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시작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주님이 선과 진리 자체이심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두 단계는 사실 하나의 경험 안에서 이어집니다. 사람이 자기 선의 한계를 보게 될 때, 비로소 참된 선의 근원을 찾게 되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유형은 목회 현장에서 종종 만나는 ‘열심 있는 신앙인의 깨달음’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 봉사도 열심히 하고, 헌신도 많이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신앙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사람은 자기 마음속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봉사를 하면서도 인정받지 못하면 서운해지고,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더 헌신했다고 생각하면 마음속에 우월감이 올라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때 그는 처음으로 ‘내가 하는 선한 일도 사실은 완전히 순수한 것은 아니구나’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바로 AC.20에서 말하는 첫 단계입니다.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기 선의 한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유형은 ‘실패를 통해 오는 깨달음’입니다. 어떤 사람이 평생 도덕적으로 살려고 노력해 왔다고 합시다. 그는 자신이 비교적 선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느 사건에서 예상하지 못한 분노나 이기심이 폭발합니다. 그때 그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은 자기 사랑이 안에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경험은 매우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이전에는 자신이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내 힘만으로는 참된 선을 이루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험이 조금 더 깊어지면 두 번째 단계가 시작됩니다. 사람이 자기 선의 한계를 깨달으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참된 선은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두 번째 깨달음이 나타납니다. 즉 ‘주님이 선과 진리 자체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교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통해 알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 현장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예는 ‘용서의 경험’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큰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는 성경 말씀도 알고 있고, 용서해야 한다는 교리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상황에서는 마음이 쉽게 풀리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점점 깨닫습니다. ‘내가 노력해서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 마음을 바꾸어 주셔야 가능한 일이구나.’ 그러면 그 사람은 점점 기도하게 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전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건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신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AC.20이 말하는 두 번째 단계입니다.

 

목회 현장에서 느끼시는 것처럼 이런 변화는 실제로 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완벽한 성인(聖人)의 상태가 아니라 ‘빛이 조금 더 들어온 상태’입니다. 사람이 완전히 자신을 부정하는 단계까지 가는 것은 드물지만, 자기 선의 한계를 조금이라도 보는 순간 이미 거듭남의 과정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빛 속으로 더 들어갈수록’ 이런 깨달음이 깊어진다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내가 완벽하지 않다’는 정도로 시작합니다. 그다음에는 ‘내 선에도 자기 사랑이 섞여 있다’는 것을 봅니다. 더 깊어지면 ‘참된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선을 행할 때 자연스럽게 ‘주님에게서 온 것이라는 인식’을 갖게 됩니다.

 

사람이 처음에는 ‘내가 선을 행한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더 자라면 ‘내 선에도 부족함이 있다’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더 깊어지면 ‘참된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은 바로 이런 ‘점진적인 빛의 증가’입니다.

 

그래서 AC.20의 문장은 어떤 이상적인 신앙인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조금씩 더 빛 속으로 들어갈 때 나타나는 ‘아주 현실적인 영적 경험의 방향’을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AC.20, 창1:3,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창1:3) AC.20 첫 번째 상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더 높은 어떤 것임을 알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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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심화

3. 리메인스는 겉의 것들이 황폐해질 때까지 드러나지 않는가?

 

AC.19 해설에는 사람이 아직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크게 지배되고 있을 때에는 리메인스가 전면에 드러나 활동하기 어렵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깁니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 선과 진리를 리메인스로 보존해 두셨다면, 왜 그것을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으실까요? 왜 겉의 것들이 어느 정도 황폐해질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일까요?

 

먼저 AC.19가 직접 말하는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수면을 사람이 살아오면서 배우고 들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 곧 주님께서 사람 안에 감추어 보존하신 리메인스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겉의 것들이 황폐해지기 전에는 빛이나 가운데 나오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리메인스가 미리 나오면 즉시 왜곡되거나 오염된다는 표현은 AC.19의 문장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왜 그것들이 그렇게 보호되어야 하는지를 설명하려고 덧붙인 해설이라고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리메인스는 단순히 어린 시절의 좋은 추억을 뜻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살아오는 동안 주님께서 그 안에 보존하신 선과 진리에 관계된 모든 것, 특히 순진함과 체어리티, 주님과 이웃을 향한 선한 애정과 그것에 관계된 진리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사람은 그것을 자기 힘으로 만들어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장차 그의 거듭남에 사용하시기 위해 보존하십니다. 그래서 리메인스는 인간의 proprium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왜 곧바로 그것들이 사람의 삶을 지배하게 하지 않으실까요?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겉 사람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참된 것을 알아도 그것을 자기 목적에 맞추어 사용할 수 있고, 선한 일을 하면서도 자기 명예나 이익을 앞세울 수 있습니다. 이 상태에서는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자기 자신에게 돌리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리메인스 자체가 본래부터 불안정하거나 쉽게 썩어 버리는 데 있다기보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살아낼 사람의 외적 상태가 아직 주님의 질서에 충분히 순응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겸손해야 한다는 진리를 알고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것을 다른 사람보다 더 경건하게 보이거나 인정받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면, 겉으로는 여전히 겸손을 말하지만 실제 목적은 자기 자신에게 향해 있습니다. 이것은 AC.19가 직접 제시한 사례는 아니지만, 선과 진리가 자기 사랑의 지배 아래에서 어떻게 자기 목적에 이용될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진리를 아는 것과 그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인정하며 그에 따라 사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AC.19황폐해짐은 중요합니다. 여기서 황폐는 단순히 인생이 불행해지거나 고난을 많이 겪는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문맥에서는 사람이 의지하고 있던 겉의 것들이 약해지고, 자기에게서 선과 진리가 나온다고 여겼던 상태가 흔들리면서, 주님께서 안에 보존해 두신 것을 받아들일 여지가 생기는 과정과 관계됩니다. AC.17-19가 묘사하는 혼돈과 공허’, ‘흑암’,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도 바로 거듭남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의 이러한 상태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리메인스를 보존하신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주님은 사람이 아직 그것을 올바르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안의 모든 선과 진리를 없애 버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을 보존하시고, 거듭남의 과정에서 사람이 주님께로 돌이킬 수 있도록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리메인스는 인간의 현재 모습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주님의 자비가 이미 그 사람 안에서 오래전부터 준비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렇게 보면 왜곡되거나 오염된다는 표현도 조금 더 조심스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리메인스 자체가 밖으로 나오면 더러워진다는 뜻으로 단정하기보다는, 사람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지배 아래 있을 때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조차 자기 목적에 맞추어 이해하고 사용하려는 위험이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고, 겉의 것들이 점차 물러나 그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될 때 거듭남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이 점은 리메인스 교리를 매우 따뜻하게 바라보게 합니다. 사람이 아직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던 시기에도 주님께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계셨던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훗날 주님께로 돌아설 때 사용하실 수 있도록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을 그의 안에 보존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어느 날 갑자기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오래전부터 자비로 준비하고 보존해 오신 것들을 사용하시면서 시작됩니다.

 

 

 

AC.19, 창1:2,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9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이란 주님의 자비를 뜻하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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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 심화 2, ‘move와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심화 2. ‘move와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 본문에 ‘By the “spirit of God” is meant the Lord’s mercy, which is said to “move,” or “brood,” as a hen broods over her eggs.’가 나오는데, 여기서 move와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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