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사람과 겉 사람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를 이해하려면 먼저 아주 간단한 원리를 기억하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삶은 항상 ‘안에서 바깥으로’ 흘러갑니다. 즉 먼저 속 사람이 있고, 그 다음에 겉 사람이 있습니다. 속 사람은 방향을 정하고, 겉 사람은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냅니다. 겉 사람은 표현이고, 속 사람은 그 표현의 근원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에서 지갑을 발견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겉 사람의 행동만 보면 선택은 두 가지입니다. 주인을 찾아 돌려줄 수도 있고, 그냥 가져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행동이 나오기 전에 이미 속 사람 안에서는 생각과 마음의 움직임이 일어납니다. ‘주인을 찾아줘야 한다’는 마음이 생길 수도 있고, ‘아무도 모르니까 가져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올라올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이 보이지 않는 내부의 움직임이 속 사람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결국 겉 사람은 그 내부의 방향을 따라 행동하게 됩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누군가에게 화가 났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겉 사람은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말과 행동은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속 사람 안에서 이미 판단과 감정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속 사람 안에서 ‘참아야겠다’는 생각이 생기면 겉 사람은 조용히 있게 됩니다. 반대로 속 사람 안에서 ‘가만있으면 안 된다’는 마음이 강해지면 겉 사람은 말로 공격하거나 행동으로 드러냅니다. 겉 사람은 항상 속 사람의 영향을 받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관계를 종종 ‘도구와 사용자’의 관계로 설명합니다. 겉 사람은 도구이고, 속 사람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펜은 글을 쓰는 도구일 뿐입니다. 펜이 무엇을 쓸지는 손을 움직이는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겉 사람의 말과 행동은 속 사람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러나 현실의 삶에서는 이 관계가 항상 단순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겉 사람도 다시 속 사람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친절하게 행동한다고 해보겠습니다. 처음에는 마음이 따라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행동을 반복하다 보면 속 사람의 마음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합니다. 반대로 나쁜 행동을 계속하면 속 사람의 생각도 점점 거칠어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겉 사람의 훈련도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이 관계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좋은 비유는 ‘창문’입니다. 속 사람은 빛이 들어오는 방과 같고, 겉 사람은 창문과 같습니다. 창문이 깨끗하면 빛이 잘 들어옵니다. 창문이 더러우면 빛이 흐려집니다. 빛의 근원은 밖에 있지만, 빛이 방 안으로 얼마나 잘 들어오는지는 창문의 상태에 영향을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과 진리는 속 사람으로 들어오지만, 그것이 겉 사람의 삶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는 우리의 생활 방식과 선택에 영향을 받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서 특히 중요한 점은, 인간이 두 층 사이에 ‘자유로운 연결 지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속 사람에서 오는 더 높은 생각과, 겉 사람에서 올라오는 낮은 욕구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 선택의 순간이 바로 인간의 도덕적 삶이 이루어지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단순히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 선택하고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일상생활에서 이 상호작용은 매우 자주 나타납니다.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놀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긴장이 나타납니다. 누군가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마음이 따라주지 않을 때도 같은 현상이 일어납니다. 이때 사람이 어떤 선택을 반복하느냐에 따라 속 사람의 방향이 점점 더 분명해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성장, 곧 거듭남이 이 두 영역의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고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겉 사람이 세상의 습관과 욕망에 더 많이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선을 선택하기 시작하면 속 사람이 점점 더 힘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겉 사람의 삶도 점차 새로운 방향으로 정리됩니다.

 

결국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상호작용은 인간 삶의 거의 모든 순간에서 일어납니다. 생각이 행동이 되고, 행동이 다시 마음을 형성합니다. 보이지 않는 속 사람의 방향이 겉 사람의 삶을 만들고, 겉 사람의 반복된 선택이 속 사람의 상태를 더 분명하게 만들어 갑니다. 이 두 층이 서로 연결되고 조화를 이루는 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인간 삶의 건강한 질서입니다.

 

 

 

SC.25, '만일 나도 영계를 체험한다면, 좀 더 쉽게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제가 스베덴보리를 부러워하는 이유는, 혹시 제게도 그와 같은 경험이 허락된다면, 사람들에게 좀 더 쉽게 잘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인데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런 제 마음속 소원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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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

이러한 생명이 없다면, 문자로서의 말씀은 죽은 것입니다. 이 점은 기독교 세계에 알려져 있듯이, 인간이 속 사람(internal man)과 겉 사람(external man)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속 사람과 분리되면 겉 사람은 몸일 뿐이며, 그러므로 죽은 것입니다. 살아 있으며 겉 사람을 살아 있게 하는 것은 속 사람이기 때문이며, 속 사람은 영혼입니다. 말씀도 이와 같아서, 문자만으로 보자면 영혼 없는 몸과 같습니다. Without such a life, the Word as to the letter is dead. The case in this respect is the same as it is with man, who—as is known in the Christian world—is both internal and external. When separated from the internal man, the external man is the body, and is therefore dead; for it is the internal man that is alive and that causes the external man to be so, the internal man being the soul. So is it with the Word, which, in respect to the letter alone, is like the body without the soul.

 

해설

AC.3은 AC.1과 AC.2에서 말한 ‘말씀의 생명’을 인간의 몸과 영혼이라는 매우 선명한 비유로 설명합니다. AC.1에서는 말씀의 겉 글자 안에 내적인 것들이 있다고 했고, AC.2에서는 말씀 안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가리키기 때문에 말씀에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에서는 그 내적인 생명과 겉 글자의 관계를 ‘속 사람과 겉 사람’, 더 직접적으로는 ‘영혼과 몸’의 관계에 비유합니다.

 

첫 문장인 ‘이러한 생명이 없다면, 문자로서의 말씀은 죽은 것입니다’에서 ‘이러한 생명’은 바로 앞 AC.2와 연결됩니다. AC.2에서는 말씀의 모든 것이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내적으로 바라보고 그분을 가리키기 때문에 말씀에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AC.3의 ‘이러한 생명’은 막연히 성경을 읽을 때 느끼는 감동이나 교훈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 안에 있는 내적인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것이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향하는 데서 오는 생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인간에게 비유합니다. 인간에게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고, 속 사람과 분리된 겉 사람은 몸일 뿐이며 죽어 있습니다. 살아 있는 것은 속 사람이고 겉 사람을 살아 있게 하는 것도 속 사람이며, 여기서 그는 속 사람을 영혼에 비유합니다. 그리고 이 구조를 그대로 말씀에 적용하여 ‘문자만으로 보자면 영혼 없는 몸과 같다’고 합니다. 따라서 AC.3의 핵심은 문자와 속뜻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자만을 그것을 살리는 내적인 것과 분리하여 볼 때 무엇을 잃게 되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문자적 의미를 낮추어 볼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영혼 없는 몸’이라고 한 것은 몸이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비유의 초점은 몸 자체의 무가치함이 아니라 영혼과 분리된 몸의 죽음에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의 문자도 버려야 할 껍데기가 아니라, 그 안의 내적인 것과 함께 읽혀야 합니다. 이후 AC 전체에서 스베덴보리가 실제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문자를 한 구절씩 붙들고 그 속뜻을 해설하는 것 자체가 이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는 문자를 떠나 속뜻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문자 안에서 내적인 것을 밝히고자 합니다.

 

따라서 AC.3은 AC.1-3의 흐름을 매우 간결하게 완성합니다. AC.1은 ‘겉 글자 안에 내적인 것들이 있다’고 했고, AC.2는 ‘그 내적인 것들이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가리키기 때문에 말씀에는 생명이 있다’고 했으며, AC.3은 ‘그 생명과 분리된 문자는 영혼 없는 몸과 같다’고 합니다. 이제 독자는 왜 스베덴보리가 창세기의 문자에만 머물지 않고 그 안의 속뜻을 열어 가려 하는지 이해할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말씀의 문자는 몸과 같고, 그것을 살아 있게 하는 내적인 것은 영혼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궁극적인 근원은 앞선 AC.2에서 밝힌 대로 주님이십니다. (AC.3 해설)

 

심화

1. ‘속 사람’(internal man)

 

AC.3 심화 1, ‘속 사람’(internal man)

AC.3 심화1. ‘속 사람’(internal man) AC.3에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에게 ‘속 사람’(internal man)과 ‘겉 사람’(external man)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앞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전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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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 서문, ‘창세기는 거듭남과 태고교회를 말한다’

AC.4마음이 오직 문자적 의미에만 붙들려 있는 동안에는, 그 안에 이러한 것들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첫 장들에서 문자적 의미로 발견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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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 서문, ‘말씀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

AC.2그러나 기독교 세계는 아직도 말씀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아니 가장 작은 세부적인 것 하나하나, 가장 미세한 점 하나에 이르기까지도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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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

그러나 기독교 세계는 아직도 말씀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아니 가장 작은 세부적인 것 하나하나, 가장 미세한 점 하나에 이르기까지도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의미하고 그 안에 품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구약 성경은 거의 소중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참으로 그러한 성격을 지닌다는 사실은 단 한 가지 숙고만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이 주님의 것이며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천국과 교회와 종교적인 믿음에 속한 것들을 그 안에 지니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주님의 말씀이라 불릴 수 없을 것이며, 그 안에 생명이 있다고도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그것이 생명에 속한 것들에서 오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오는 것이겠습니까? 곧 그 안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가리키기 때문에 그 말씀에는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내적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은 살아 있지 않으며, 말씀 가운데 어떤 표현이든 그 안에 그분을 품고 있지 않다면, 다시 말해 그 나름의 방식으로 그분을 가리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성한 것이 아니라고 참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The Christian world, however, is as yet profoundly unaware of the fact that all things in the Word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nay, the very smallest particulars down to the most minute iota, signify and enfold within them spiritual and heavenly things, and therefore the Old Testament is but little cared for. Yet that the Word is really of this character might be known from the single consideration that being the Lord’s and from the Lord it must of necessity contain within it such things as belong to heaven, to the church, and to religious belief, and that unless it did so it could not be called the Lord’s Word, nor could it be said to have any life in it. For whence comes its life except from those things that belong to life, that is to say, except from the fact that everything in it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bears reference to 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so that anything which does not inwardly regard him is not alive; and it may be truly said that any expression in the Word that does not enfold him within it, that is, which does not in its own way bear reference to him, is not Divine.

 

해설

AC.2는 AC.1의 선언을 한층 더 강하게 밀고 나갑니다. AC.1에서는 구약의 겉 글자 안에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있으며, 그 안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종교적인 믿음 등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이제 AC.2에서는 그 범위를 더욱 분명히 하여, 말씀의 모든 것이 ‘가장 작은 세부적인 것 하나하나, 가장 미세한 점 하나에 이르기까지도’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의미하고 그 안에 품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 세계가 이것을 깊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구약 성경을 거의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고 진단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어떤 부분에는 속뜻이 있고 어떤 부분에는 없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의 주장은 훨씬 철저합니다. 말씀은 전체적으로뿐 아니라 개별적으로도, 심지어 가장 미세한 것에 이르기까지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주장을 자신의 영계 체험부터 내세워 증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단 한 가지 숙고’만으로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숙고란 말씀이 ‘주님의 것이며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만일 말씀이 참으로 주님의 것이며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그 안에는 반드시 천국과 교회와 종교적인 믿음에 속한 것들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을 ‘주님의 말씀’이라고 부를 수도 없고, 그 안에 생명이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AC.1이 ‘말씀 안에 내적인 것들이 있다’고 선언했다면, AC.2는 그 내적인 것들이 있어야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를 말씀의 근원, 곧 주님에게서 찾습니다.

 

여기서 AC.2의 중심어인 ‘생명’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렇다면 그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생명은 그 안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가리키는 데서 온다고 답합니다. 따라서 말씀의 생명은 단지 오래 살아남은 종교 문헌이라는 데 있지 않고, 문장이 아름답거나 인간에게 감동과 교훈을 준다는 데 있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더 근본적인 이유는 말씀의 가장 깊은 지향이 주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주님에게서 왔고, 그 안의 모든 것은 각기 그 나름의 방식으로 다시 주님을 가리킵니다.

 

이 때문에 마지막 문장은 매우 강합니다. ‘그분을 내적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은 살아 있지 않다’고 하고, 말씀 가운데 어떤 표현이든 그 안에 주님을 품고 있지 않으며 그 나름의 방식으로 주님을 가리키지 않는다면 ‘신성한 것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든 구절의 문자적 표면에 주님의 이름이 직접 나타나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구약의 족보와 역사, 율법과 전쟁, 지명과 숫자처럼 겉으로는 주님과 직접 관계없어 보이는 표현들까지도 내적으로는 각기 그 나름의 방식으로 주님을 가리킨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주장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후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가장 세밀한 표현들까지 속뜻을 따라 읽어 갑니다.

 

그러므로 AC.2는 앞으로 펼쳐질 방대한 AC 해설의 중요한 근거를 제공합니다. 왜 단어 하나, 이름 하나, 숫자 하나까지 그렇게 세밀하게 살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 이미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의 생명은 일부 유명한 구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그 안에 있으며, 그 생명의 근원은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입니다. AC.1에서 ‘말씀 안에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있다’는 문을 열었다면, AC.2에서는 왜 그 비밀들이 말씀의 가장 작은 것에까지 있어야 하는지를 밝힙니다. 말씀은 주님의 것이며 주님으로부터 왔고, 그 안의 모든 것이 그 나름의 방식으로 주님을 가리키기 때문에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AC.2 해설)

 

심화

1.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C.2 심화 1,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C.2 심화1.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C.2의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는 얼핏 보면 단순한 강조처럼 보이지만, 앞으로 ‘아르카나 코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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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AC.2 심화 2,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AC.2 심화2.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AC.2에서 스베덴보리는 주님을 단지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고 하지 않고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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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 서문, ‘문자는 몸이고, 속뜻은 생명이다’

AC.3이러한 생명이 없다면, 문자로서의 말씀은 죽은 것입니다. 이 점은 기독교 세계에 알려져 있듯이, 인간이 속 사람(internal man)과 겉 사람(external man)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속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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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 서문, ‘말씀 안에 담긴 하늘의 비밀들’

AC.1구약의 말씀을 단순히 겉 글자로만 보아서는, 그 안에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들어 있으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종교적인 믿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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