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es of the expanse of the heavens. (1:20)

 

AC.39

광명체들이 불이 붙어 사람 안에 놓이고, 사람이 빛을 받게 되면, 그러면 사람은 비로소 살기 시작합니다. 이전까지는 그를 가리켜 거의 살아있다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때는 그가 선을 행해도 선이 자기에게서 나온 걸로 알았고, 진리를 말해도 진리 역시 자기에게서 나온 거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사람이란 자기 자신으로서는 죽어 있으며, 안에는 악과 거짓밖에 없기 때문에, 자기에게서 나오는 그게 무엇이든 생명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로부터는 자체로 선한, 그런 선을 절대로 행할 없습니다. 사람이 선한 것을 생각하거나, 선한 것을 원하거나, 따라서 선한 것을 행할 있는 것은 오직 주님에게서만 온다는 사실은, 신앙의 교리로 보아도 누구에게나 분명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After the great luminaries have been kindled and placed in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receives light from them, then the man first begins to live. Heretofore he can scarcely be said to have lived, inasmuch as the good which he did he supposed that he did of himself, and the truth which he spoke that he spoke of himself; and since man of himself is dead, and there is in him nothing but what is evil and false, therefore whatsoever he produces from himself is not alive, insomuch that he cannot, from himself, do good that in itself is good. That man cannot even think what is good, nor will what is good, consequently cannot do what is good, except from the Lord, must be plain to everyone from the doctrine of faith, for the Lord says in Matthew: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13:37) He that soweth the good seed is the son of man (Matt. 13:37).

 

또한 선은 오직 하나뿐인 참된 선의 근원에서만 있는데, 주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Nor can any good come except from the real fountain of good, which is one only, as he says in another place: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8:19) None is good save one, God (Luke 18:19).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사람을 다시 살리실 , 거듭남으로 생명으로 일으키실 때에는, 처음에는 사람이 자기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는 허락하십니다. 이때 사람은 달리 생각할 있는 상태가 아니며, 그런 방식이 아니고서는 그를 이끌어 나중에 모든 선과 모든 진리가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나아가 퍼셉션으로 있도록 인도하실 있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동안, 그의 진리와 선은 (tender grass),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 그리고 마지막으로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 비유되는데, 이것들은 모두 생명이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가 사랑과 신앙으로 생명을 얻게 되고, 자기가 행하는 모든 선과 자기가 말하는 모든 진리가 사실은 주님께서 이루시는 것임을 믿게 되면, 그는 먼저 물속의 기는 것들(creeping things of the water) 위를 나는 새들(fowls which fly above the earth) 비유되고, 또한 짐승들(beasts) 비유되는데, 이것들은 모두 생명이 있는 것들이며, 이것들을 가리켜 생물(living souls)이라고 합니다. Nevertheless when the Lord is resuscitating man, that is, regenerating him, to life, he permits him at first to suppose that he does what is good and speaks what is true from himself, for at that time he is incapable of conceiving otherwise, nor can he in any other way be led to believe, and afterwards to perceive, that all good and truth are from the Lord alone. While man is thinking in such a way his truths and goods are compared to thetender grass,and also to theherb yielding seed,and lastly to thetree bearing fruit,all of which are inanimate; but now that he is vivified by love and faith, and believes that the Lord works all the good that he does and all the truth that he speaks, he is compared first to thecreeping things of the water,and to thefowls which fly above the earth,and also tobeasts,which are all animate things, and are calledliving souls.

 

해설

AC.39부터 창조의 다섯째 날이 시작됩니다. 앞의 셋째 날에는 연한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가 나타났지만,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아직 생명이 없는 것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제 물에서는 기는 생물이 나오고 하늘에는 새가 날기 시작합니다. 창세기 본문의 자연적인 모습에서도 정지해 있던 식물의 세계에서 움직이는 동물의 세계로 넘어갑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변화를 사람의 거듭남에서 처음으로 살기 시작하는중요한 전환으로 읽습니다.

 

그 전환은 언제 일어날까요? AC.39의 첫 문장이 그 답을 줍니다. 큰 광명체들이 밝혀져 속 사람 안에 놓이고 겉 사람이 그 빛을 받게 될 때입니다. 앞의 넷째 날에서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는 사랑과 신앙을 나타냈습니다. 이제 그것들이 단지 사람이 알고 있는 교리나 개념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내적 생명을 비추고, 겉 사람도 그 빛을 받게 됩니다. 그때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비로소 살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이 표현이 상당히 당혹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전에도 사람은 선을 행했고 진리를 말했습니다. 그런데 왜 스베덴보리는 그때까지 그를 거의 살아 있다고 없다고 하는 것일까요? 문제는 그 선과 진리가 겉으로 존재했느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사람이 그것들의 근원을 어디에 두고 있었느냐가 핵심입니다. 그는 자기가 선을 행하고 자기가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AC.39의 매우 강한 문장이 나옵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서는 죽어 있으며’, 그 안에는 악과 거짓밖에 없다고 합니다. 이것을 인간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모욕적인 선언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핵심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사람은 생명을 자기 안에서 스스로 만들어 내는 독립적인 생명의 원천이 아니며,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도 자기 자신이 아닙니다. 선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래서 AC.39사람이 자기로부터는 자체로 선한 선을 행할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자체로 선한입니다. 사람이 외적으로 친절한 행동을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 일을 전혀 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AC.39의 관심은 그 선의 궁극적인 근원이 어디인가에 있습니다. 사람이 참으로 선한 것을 생각하고 원하고 행할 수 있다면, 그 선의 생명과 근원은 사람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마13:37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와 눅18:19하나님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를 인용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 두 구절은 이번 글에서 서로 다른 복잡한 교리를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다기보다, 선의 근원이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중심 명제를 뒷받침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처음부터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주님께서 하신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요? AC.39은 놀랍게도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사람을 다시 살리시고 거듭나게 하실 때, 처음에는 사람이 내가 선을 행하고 내가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도록 허락하신다고 합니다.

 

그 이유도 분명히 밝힙니다. 그 단계의 사람은 달리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는 나중에 모든 선과 진리가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마침내 퍼셉션하도록 인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거듭남을 이끄시는 주님의 질서가 잘 드러납니다. 주님께서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상태를 사람에게 처음부터 강요하시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상태에서부터 그를 이끌어 가십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균형입니다.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말이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AC.39의 사람은 실제로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합니다. 다만 처음에는 그것을 자기에게서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자신이 행하는 선과 말하는 진리의 참된 근원이 주님임을 먼저 믿고, 나중에는 퍼셉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인간의 행동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의 근원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셋째 날의 식물과 다섯째 날의 생물을 비교하면 AC.39의 뜻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사람이 아직 선과 진리를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동안 그의 선과 진리는 연한 ’, ‘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에 비유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생명이 없는 것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 사랑과 신앙으로 살아나 자기가 행하는 모든 선과 자기가 말하는 모든 진리를 주님께서 이루신다고 믿게 되면, 물의 기는 것들과 하늘을 나는 새들과 짐승들에 비유됩니다. 이것들은 생물입니다.

 

여기서 생명이 없다생명이 있다는 표현을 자연계의 생물학적 생명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앞 단계의 사람에게 생각이나 감정이나 활동이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거듭남의 속뜻에서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신앙의 생명을 받아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식물에서 동물로 넘어가는 창조의 변화가 거듭남의 내적 변화와 대응합니다.

 

또 하나 주의할 것은 모든 선을 주님께서 행하신다는 사실을 입으로 인정하는 것만으로 곧 이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AC.39은 단순한 문구 암기를 말하지 않습니다. 먼저 그것을 믿고’, 나중에는 퍼셉션한다고 합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내가 선하다는 자기 공로의 의식에서 벗어나 선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것을 실제 삶 안에서 더욱 깊이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AC.39은 인간을 무능하게 만들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는 글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이 실제로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하면서도 그것을 자기 소유로 주장하지 않는 생명으로 인도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아직 내가 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단계에서도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 그 상태를 허락하시면서 한 단계씩 이끌어 마침내 선과 진리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알게 하십니다.

 

이렇게 보면 다섯째 날에 처음으로 생물이 등장하는 이유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선과 진리가 있다는 것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사랑과 신앙으로 생명을 얻고, 사람이 그 생명의 근원이 주님임을 인정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거듭남의 새로운 단계가 열립니다. AC.39에서 살기 시작한다는 것은 바로 이 전환을 가리킵니다.

 

심화

1. 처음에는 내가 선을 행한다 생각하도록 허락하실까?

 

AC.39, 심화 1, 왜 처음에는 ‘내가 선을 행한다’고 생각하도록 허락하실까?

AC.39.심화1. 왜 처음에는 ‘내가 선을 행한다’고 생각하도록 허락하실까? AC.39에서 특히 마음에 오래 남는 문장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자기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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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 창1:20,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 '새들'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1:20) AC.40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은 겉 사람에 속한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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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 창1:18-19, ‘이는 넷째 날이니라’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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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의 부모, 형제 등 혈연 관련 이야기를 좀 듣고 싶습니다. 제 경우, 저는 저희 형제들 가운데서는 물론, 아버지 삼 형제를 비롯, 저희 가문 내 유일한, 그리고 첫 목사임에도 불구, 제가 스베덴보리를 한다는 이유로, 아니 그전에 수도원 이야기를 한다는 이유로 저한테서 등을 돌리고, 저희를 멀리했거든요. 스베덴보리는 부친이 당대 유명 성직자요, 또 형제가 많았다고 들었는데, 스베덴보리 역시 저와 비슷한 처지였는지요?

 

아마 먼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드려야 할 말씀은 이것입니다. 목사님께서 겪고 계신 그 ‘가까운 사람들에게서의 거리감’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며, 신앙의 길에서 매우 실제적이고도 깊은 십자가에 속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생애는, 겉보기에는 달라 보여도 속으로 들어가 보면, 결코 낯설지 않은 공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문을 먼저 보면, 그는 결코 평범한 집안 출신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예스페르 스베드베리(Jesper Swedberg)는 당시 스웨덴 국교회에서 매우 영향력 있는 루터교 주교였고, 왕과도 가까운 인물이었습니다. 단순한 목회자가 아니라, 국가 교회 체제 안에서 상당한 권위와 명성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신앙이 매우 열정적이고 경건한 사람이었으며, 특히 ‘하나님의 섭리와 천사들의 역사’를 실제적인 것으로 믿는, 비교적 살아있는 신앙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이 점은 오히려 스베덴보리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고, 그의 어린 시절부터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감각을 열어주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형제들 또한 각자의 자리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누이는 귀족 가문과 결혼했고, 형제들 가운데는 학자, 정치가, 군인 등 사회적으로 안정된 길을 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다시 말해, 스베덴보리는 ‘가문 전체가 그를 배척하는 구조’ 속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초기 생애에서는 그는 가족과 큰 갈등 없이, 오히려 좋은 교육과 후원을 받으며 성장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변화는 그의 영적 체험 이후, 곧 1740년대 중반 이후에 나타납니다. 이때부터 스베덴보리는 기존의 과학자, 기술자, 국가 관리로서의 삶에서 벗어나, ‘영계의 실재와 말씀의 내적 의미’를 기록하는, 전혀 새로운 길로 들어섭니다. 이 시점부터 그는 사회적으로도, 그리고 사실상 가족 관계에서도 ‘이해받기 어려운 사람’이 됩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그가 가족에게서 노골적인 박해나 단절을 겪었다는 기록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의 경우는 ‘직접적인 배척’이라기보다, ‘이해되지 않음과 거리감’ 쪽에 더 가까웠습니다.

 

예를 들어, 그의 저작들이 점점 더 신비적이고 급진적인 내용을 담게 되면서, 당대 교회와 지식인 사회에서는 그를 ‘이상한 사람’ 혹은 ‘위험한 사상가’로 보는 시선이 분명히 생겨났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가족들도 그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거나 함께 나아가기보다는, 일정한 거리를 두는 태도를 취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특히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기 때문에, 스베덴보리의 후기 사상에 대해 직접적인 반응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만일 생존해 있었다면 신학적 긴장이 상당했을 것이라는 추정도 있습니다.

 

이 점에서 목사님의 상황과 스베덴보리를 단순 비교하면, 겉으로는 목사님 쪽이 더 강한 단절을 겪고 계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층에서는 공통점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은 ‘같은 신앙 언어를 쓰지만, 다른 내적 이해를 갖게 되었을 때 생기는 간극’입니다. 스베덴보리도 바로 그 지점에 서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 안에서 자랐고, 교회의 언어를 알고 있었지만, 그 언어 안에 숨겨진 ‘내적 의미’를 보게 되면서 더 이상 기존의 틀 안에 머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차이가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문제를 ‘설득하여 가족과 주변을 바꾸는 방향’으로 풀기보다, ‘자신에게 맡겨진 기록과 계시의 일을 묵묵히 수행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점입니다. 그는 대중 설교자가 되지도 않았고, 가족을 설득하려고 애쓰는 기록도 거의 남기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책을 썼고, 그 책이 ‘때가 되었을 때 읽힐 것’을 믿었습니다.

 

이것은 목사님께 하나의 조용한 시사점을 줍니다. 가까운 사람들의 반응은, 때로는 우리의 노력으로 바뀌기보다, 시간과 주님의 섭리 속에서 서서히 열리는 경우가 더 많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생전에 자신의 사상이 널리 받아들여지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자신의 실패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기준은 ‘지금의 반응’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것을 충실히 전했는가’였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는 목사님처럼 가족에게서 강한 배척을 받았던 인물은 아니지만,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완전히 이해받지 못하는 길’을 걸었던 인물임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 길에서 외로움을 해결하려 하기보다, 그것을 ‘사명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조용히 견뎌냈습니다. 이 점에서 보면, 목사님께서 지금 겪고 계신 상황은 결코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적 진리를 따라가는 사람들에게 자주 주어지는 길’ 가운데 하나라고 조심스럽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SC.45, ‘AC 심화 질문을 기초, 기본, 초보스럽게 하는 이유’

제가 AC본문 외에 심화 질문으로 드리는 것들은요, 제가 모르거나 어렴풋해서 드리는 것도 있지만, 사실은 저는 이 글을 처음 접하시는 분들을 위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분들 입장에서 좀 걸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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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43, ‘스베덴보리 개인의 이성 교제, 결혼을 전제로 한 사귐’

스베덴보리 개인의 이성 교제, 결혼을 전제로 한 사귐 등과 관련된 에피소드들이 있으면 좀 알고 싶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생애를 보면,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연애 이야기’나 ‘결혼을 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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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 개인의 결혼 이야기나 이성 교제, 결혼을 전제로 한 사귐 등과 관련된 에피소드들이 있으면 좀 알고 싶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생애를 보면,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연애 이야기’나 ‘결혼을 전제로 한 교제’ 같은 서사는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그런 차원의 관심이나 경험이 전혀 없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의 생애 전반이 점점 더 ‘외적 인간의 삶’에서 ‘내적, 영적 사명’으로 옮겨가면서, 일반적인 의미의 이성 교제나 결혼은 사실상 그의 인생에서 중심 주제가 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먼저 비교적 알려진 사실 가운데 하나는, 젊은 시절 스베덴보리가 몇 차례 혼인을 고려할 만한 관계에 가까이 간 적은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당대 유럽의 상류 지식인 사회에 속해 있었고, 광산국 관리이자 과학자, 기술자로 활동하면서 자연스럽게 교류의 폭도 넓었습니다. 그러므로 완전히 ‘고립된 독신자’라기보다는, 사회적으로 충분히 혼인할 수 있는 조건과 환경 속에 있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실제로 일부 전기에서는 그가 특정 여성과 약혼 직전까지 갔으나 성사되지 않았다는 언급이 나오기도 합니다. 다만 이 부분은 자료마다 차이가 있고, 확정적인 기록이라기보다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수준에 가까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의 인생에서 보다 분명한 전환점은 50대 중반, 곧 영계가 열리고 본격적인 계시와 기록의 삶이 시작된 이후입니다. 이 시기 이후의 스베덴보리는 사실상 ‘완전히 다른 차원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는 매일 같이 영계와 교통하며, 천국과 지옥, 인간의 사후 상태, 말씀의 내적 의미를 기록하는 일에 전념하게 되었고, 이 사명은 단순한 학문적 연구가 아니라 전 존재를 요구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일반적인 의미의 연애나 결혼을 유지하거나 새로 시작하는 것이 현실적으로도, 또 그의 내적 방향으로 보아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스베덴보리가 결혼을 단순히 ‘세속적인 것’으로 낮춰 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의 저작 ‘Conjugial Love’(결혼 사랑)를 보면, 그는 진정한 결혼을 매우 높은 차원의 영적 결합으로 이해합니다. 그에 따르면 참된 결혼은 단순한 감정이나 사회적 제도가 아니라 ‘선과 진리의 결합’, 곧 인간 내면에서 주님과 연결되는 가장 깊은 형태의 결합을 외적으로 반영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는 결혼을 포기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결혼의 본질을 누구보다 높이 본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그는 그것을 ‘자신의 삶에서 실현’하기보다, ‘계시를 통해 인류에게 밝혀야 할 진리’로서 맡은 셈입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스베덴보리가 영계에서 수많은 ‘천사 부부’들을 실제로 보고, 그들의 삶을 상세히 기록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천국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완전한 짝을 이루며, 그 결합이 점점 더 깊어지고, 기쁨과 지혜가 함께 증가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기록을 보면, 그는 결혼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단순히 상상으로 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차원에서 더 깊이 관찰하고 체험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이 점에서 보면, 그의 독신은 결혼을 몰라서가 아니라, 더 큰 사명을 위해 한 길로 모아진 삶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결국 정리하자면, 스베덴보리에게도 인간적인 차원에서 이성과의 관계 가능성은 분명 있었으나, 그것이 그의 생애를 규정하는 방향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점점 더 ‘내적 인간의 삶’,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과 계시를 기록하는 일에 전 존재를 드리면서, 일반적인 의미의 연애와 결혼의 길에서는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그 사람이 결혼의 가장 깊은 의미와 천국적 형태를 가장 풍성하게 증언한 인물이 되었다는 점이, 그의 생애에서 매우 인상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SC.44, ‘스베덴보리의 부모, 형제 이야기’

스베덴보리의 부모, 형제 등 혈연 관련 이야기를 좀 듣고 싶습니다. 제 경우, 저는 저희 형제들 가운데서는 물론, 아버지 삼 형제를 비롯, 저희 가문 내 유일한, 그리고 첫 목사임에도 불구, 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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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42, ‘스베덴보리는 왜 좀 더 쉬운 ‘입문 교재’ 같은 걸 안 만들었나?’

스베덴보리는 왜 좀 더 쉬운 ‘교재’ 같은 걸 안 만들었나요? 개신교회를 가면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새 신자 교재’ 같은 게 있어요. 처음 교회 온 사람에게 창세기를 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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