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C.10 심화

5. 나답과 아비후는 죽었는데 아론의 규례 위반은 받아들여졌을까?’

 

10을 끝까지 읽으면 한 가지 매우 흥미로운 대조가 나타납니다. 장의 처음에서는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지 않은 다른 불로 분향했다가 죽습니다. 그런데 장의 마지막에서도 명령대로 행하지 않은 일이 발생합니다. 속죄제 염소를 제사장이 먹어야 했는데 이미 불살라 버린 것입니다. 모세는 크게 노하지만 아론의 설명을 듣고 좋게 여겼습니다.왜 앞의 일은 죽음으로 끝나고 뒤의 일은 받아들여졌을까요?

 

먼저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레10:19-20의 아론의 행동을 직접 상세하게 해설하여 두 사건의 차이를 항목별로 설명한 강한 원전은 이번 검토에서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이 마지막 장면에 세밀한 상응을 임의로 부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본문 자체가 보여 주는 차이는 분명합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을 적극적으로 가져와 예배에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주님에게서가 아닌 다른, 사랑과 말씀 이외의 다른 근원에서 나온 예배로 직접 해설합니다.

 

반면 아론의 경우에는 다른 불을 가져오거나 자기 방식의 예배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두 아들을 잃은 바로 그날, 자신에게 닥친 비극 가운데서 속죄제물을 먹는 것이 과연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실 일인지 묻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그 설명을 듣고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이 두 사건은 하나님의 규칙을 어기면 죽는다는 동일한 범주로 묶이지 않습니다. 나답과 아비후 사건의 중심은 스베덴보리가 직접 설명한 대로 예배의 근원이 바뀐 데 있습니다. 주님의 불 대신 다른 불, 말씀에서 나온 교리 대신 다른 근원에서 나온 것이 거룩한 예배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마지막 사건은 오히려 외적 규례와 그 규례가 섬기는 내적 목적 사이의 관계를 생각하게 합니다. 아론은 규례를 무시하여 자기 뜻대로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 아니라 오늘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는데 이것을 먹는 것이 여호와 보시기에 과연 옳겠느냐고 묻습니다.

 

여기에는 영적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욕망을 하나님의 뜻보다 위에 놓고 거룩한 것을 자기 방식으로 바꾸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뜻을 진실하게 따르려 하기 때문에 오히려 상황에서 뜻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종은 기계적 복종과 같지 않습니다. 참된 순종에는 분별이 있습니다. 물론 인간이 자기 편의대로 말씀을 고치는 것을 분별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외적인 문자만 지켰다는 사실이 자동으로 내적인 순종을 보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점에서 레10 마지막은 10절의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라는 말씀과도 잘 어울립니다. 이 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순한 규칙 준수보다 더 깊은 분별을 요구합니다. 다른 불과 주님의 불을 분별하고,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하며, 마지막에는 주님께서 실제로 무엇을 기쁘게 여기시는지를 묻습니다.

 

그래서 레10은 엄격함으로 시작하지만 율법주의로 끝나지 않습니다. 거룩함은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외적 형식을 기계적으로 실행하는 데서 자동으로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거룩함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를 받아 그분의 뜻을 진실하게 분별하고 따르는 데 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다른 을 가져왔고, 아론은 여호와께서 어찌 좋게 여기셨으리요?라고 물었습니다. 바로 이 차이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는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거룩한 곳으로 가져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비통한 상황에서도 무엇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인지 묻는 것입니다. 거듭남이 깊어진다는 것은 규칙을 많이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주님의 사랑과 진리 안에서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을 점점 더 분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SWC.10 심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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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나답과 아비후는 진영 밖으로 옮겨졌을까?’

 

나답과 아비후가 죽은 뒤 모세는 미사엘과 엘사반에게 그들을 성소 앞에서 진영 밖으로메고 나가라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시신 처리 이상의 표상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1759, AE) 324(5:8)는 레10:1-5를 직접 인용하며 나답과 아비후가 진영 밖으로 옮겨진 의미를 설명합니다. 그들의 예배가 천국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예배는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으며, 이스라엘의 진영은 천국과 교회를 표상했습니다.

 

따라서 진영 은 단순히 공동체에서 추방당했다는 의미보다 더 깊습니다. 다른 불에서 나온 예배는 천국의 질서에 속하지 않으므로 천국을 표상하는 진영 안에 머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레4와 레6에서 보았던 진영 과도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만 각 제사의 문맥이 다르므로 모든 진영 을 완전히 같은 세부 상응으로 처리해서는 안 됩니다.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큰 원리는 천국과 교회의 질서에 속하지 않는 것이 분리되고 제거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거듭남의 중요한 면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흔히 주님께서 우리 안에 새로운 것을 넣어 주시는 것만 생각하지만, 거듭남에는 밖으로 옮겨지는 도 있습니다. 이전에는 내 신앙이라고 생각했던 자기 의, 내 열심이라고 생각했던 자기애, 진리라고 확신했던 거짓이 주님의 빛 가운데 드러나면 그것은 더 이상 마음의 중심에 머물 수 없습니다.

 

특히 나답과 아비후가 표상한 것은 노골적인 세상 악이 아니라 종교적 형태를 가진 잘못된 예배였습니다. 그래서 더 중요합니다. 인간은 세속적인 욕심보다 종교적인 proprium을 더 오래 붙들 수도 있습니다. ‘나는 주님을 위해 이렇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이 자기애라는 사실을 발견하기가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불이 비추면 그 근원이 드러납니다. 주님에게서 온 사랑인지 자기에게서 나온 다른 불인지 분명해지고, 다른 불에 속한 것은 천국의 질서 밖으로 옮겨져야 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다른 사람을 교회 밖으로 몰아내는 근거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10의 내적 의미가 먼저 향하는 곳은 다른 사람의 신앙을 심판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내면입니다. ‘ 안에서 진영 밖으로 옮겨져야 다른 불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먼저입니다.

 

거듭남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천국에 속하지 않는 것을 분리하는 과정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의 모든 종교적 열심을 없애시는 것이 아니라 그 열심 가운데 자기애에서 나온 것을 드러내어 밖으로 옮기시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만이 예배의 불로 남게 하십니다. (SWC.10 심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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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제사장에게 포도주와 독주를 금하셨을까? -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한다는

 

나답과 아비후 사건 직후 여호와께서는 아론에게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이것 때문에 나답과 아비후가 술에 취해 다른 불을 드렸던 것이 아닌가?라고 추측하기도 하지만, 성경 본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음주 여부를 사실처럼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포도주 금지 규례가 이 자리에 놓인 영적 이유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가 직접적인 단서를 줍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71(9:21)은 레10:8-10을 직접 인용하면서 취함이 신앙의 진리에 관한 오류와 혼란을 표상했기 때문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는 것이 금지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포도주 자체가 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AC.6377은 포도주가 좋은 의미에서는 영적 사랑의 선과 신앙의 선을 의미하며,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의 신적 선에서 나오는 신적 진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성찬에서도 포도주가 거룩하게 사용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포도주에는 반대 의미도 있습니다. 진리가 악과 섞여 왜곡되면 포도주는 거짓을 나타내며, ‘ 취함은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지 못하고 오류 속에서 비틀거리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레10의 핵심은 술이라는 물질보다 분별력을 잃는 상태입니다.

 

실제로 본문 자체가 이유를 말합니다.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백성에게 여호와의 규례를 가르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에게 필요한 것은 종교적 흥분이 아니라 맑은 영적 분별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의 다른 과 연결됩니다. 나답과 아비후의 문제는 거룩해 보이는 것과 실제로 거룩한 것을 분별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향로와 향과 성소와 제사장이라는 외적 요소만 보면 모두 거룩했습니다. 그러나 그 안의 불은 다른 불이었습니다. 외적 거룩함과 내적 거룩함을 구별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같은 위험이 있습니다. 감동적이라고 해서 모두 신적이지 않고, 열정적이라고 해서 모두 체어리티에서 나온 것도 아니며, 성경 구절을 사용한다고 해서 모든 교리가 말씀에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내가 강하게 느낀다는 사실과 이것이 주님의 진리다라는 사실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영적 생활은 단순한 흥분보다 분별을 향합니다. 무엇이 선처럼 보이는가보다 그 선의 근원이 무엇인지, 무엇이 진리처럼 들리는가보다 그것이 실제 말씀과 주님의 사랑에 일치하는지를 살핍니다.

 

특히 다른 사람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에게 이 분별은 더욱 중요합니다. 10:11은 제사장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여호와의 규례를 가르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진리를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포도주 금지 규례는 레10의 중심 주제와 정확히 맞닿습니다. 다른 불과 주님의 불을 분별하고,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하며,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분별하는 것, 이것이 주님의 쓰임을 맡은 사람에게 필요한 영적 맑음입니다. (SWC.10 심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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