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6:1-7에서 가장 눈여겨볼 것은 범죄의 대상입니다. 맡긴 물건을 속이고, 도둑질하고, 착취하고, 잃어버린 물건을 주워 놓고 부인한 것은 모두 이웃에게 행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여호와께신실하지못하여범죄’한 것이라고 부르십니다. 이웃을 향한 부정직과 하나님을 향한 불신실이 분리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속건제의 순서가 의미심장합니다. 범죄한 사람은 훔친 것이나 착취한 것이나 맡은 것이나 주운 물건을 먼저 원주인에게 돌려주고 오분의 일을 더합니다. 그런 다음 숫양을 여호와께 속건제물로 가져갑니다. 본문은 실제 반환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하나의 회개 안에 묶어 놓습니다.
이것은 레5에서 보았던 ‘자복’과 ‘보상’을 한층 더 구체화합니다. 하나님께 ‘제가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내가 부당하게 가지고 있는 것은 계속 가지고 있을 수 없습니다. 회개가 참되다면 가능한 곳에서는 외적 삶도 바뀌어야 합니다. 속에서 죄를 인정한 것이 겉에서는 반환과 보상이라는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과거의 잘못을 문자적으로 원상복구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도 있고 상대를 찾을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회개의 방향입니다. 지금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 있는데도 ‘하나님께용서받았으니끝났다’며 외면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화해가 이웃에 대한 책임을 지워 버리지 않습니다.
레6은 그래서 예배를 매우 현실적으로 만듭니다. 제단 앞에서 거룩한 말을 하는 것과 장터와 집과 인간관계에서 정직하게 사는 것이 서로 다른 종교가 아닙니다. 맡긴 물건을 정직하게 돌려주고, 남의 것을 탐하지 않고, 손해를 입혔다면 가능한 만큼 회복하는 삶 자체가 체어리티의 문제입니다.
결국 속건제가 묻는 것은 이것입니다. ‘주님께용서를구하고있는그일가운데아직내가이웃에게돌려주어야할것이남아있지는않은가?’입니다. 있다면 회개는 그곳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주님께 드리는 예배와 이웃에게 행하는 체어리티가 하나가 될 때 속 사람에서 시작된 회개가 겉 사람의 삶까지 내려와 실제 거듭남이 됩니다. (SW.레6심화1)
레위기 6장은 앞의 장들과 조금 다른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레4에서는 죄를 ‘깨닫는것’, 레5에서는 그것을 ‘자복하는것’과 ‘보상하는것’이 강조되었다면, 레6:1-7에서는 그 보상이 아주 구체적인 이웃 관계 안으로 들어옵니다. 맡긴 물건을 속이고, 전당물을 부인하고, 도둑질하고, 착취하고, 남이 잃은 물건을 주워 놓고도 모른다고 하며, 거기에 거짓 맹세까지 하는 경우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성경이 이런 행동을 단순히 ‘이웃에게신실하지못한것’이라고 하지 않고 ‘여호와께신실하지못하여범죄’한 것이라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이웃에게 행한 부정직이 곧 주님께 대한 범죄가 되는 것입니다. 체어리티와 예배를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이 제사의 법 한가운데서 드러납니다.
그래서 속건제의 순서도 중요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먼저 훔치거나 착취하거나 맡아 두었던 물건을 ‘돌려보내되곧그본래물건에오분의일을더하여’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숫양을 속건제물로 여호와께 가져갑니다. 레5에서 이미 보았듯이 속건제는 단순히 마음속에서 미안해하는 것으로 끝나는 회개가 아닙니다. 잘못으로 실제 손상이 생겼다면 가능한 범위에서 그것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가져가는 종교적 행위가 이웃에게 돌려주어야 할 것을 대신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이웃에게 바로잡을 것을 바로잡는 것과 주님 앞에서 속죄하는 것이 하나의 회개 안에 함께 들어 있습니다. 레6은 그래서 매우 강하게 말합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바로잡으려 한다면 이웃과의 관계에서 내가 저지른 실제 불의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까지가 레5후반의 속건제를 완성하는 부분이라면 8절부터는 시선이 크게 바뀝니다. 이제 ‘누가어떤제물을가져오는가’보다 제사장이 그 제물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가 중심이 됩니다. 번제, 소제, 속죄제의 규례가 다시 나오지만 레1, 2, 4의 단순한 반복이 아닙니다. 앞에서는 제물을 가져오는 사람의 입장에서 제사를 보았다면 여기서는 제단과 제사장의 입장에서 그 제사가 어떻게 계속되고, 어떻게 거룩하게 다루어지며,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레6은 레1-5에서 배운 제사의 의미를 한 단계 더 안쪽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심에 9절로 13절의 ‘불’이 있습니다. ‘제단의불이그위에서꺼지지않게할것이요’, ‘제단위의불은항상피워꺼지지않게할지니’, 그리고 다시 ‘불은끊임이없이제단위에피워꺼지지않게할지니라.’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이 부분에는 매우 분명한 스베덴보리의 직접 해설이 있습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2177(창18:6)은 레6:13-17을 직접 인용하면서 제단에서 계속 타고 있어야 했던 불은 ‘주님의사랑,곧영원하고영속적인주님의자비’를 표상했다고 설명합니다. AC.6832(출3:2)도 레6:12-13을 직접 인용하면서 제단 위의 영속적인 불이 신적 사랑 자체를 표상했다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이 불은 먼저 ‘우리의열심이꺼지지않아야한다’는 명령이 아닙니다. 인간의 사랑보다 먼저 꺼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을 향한 주님의 사랑과 자비입니다.
이것은 거듭남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영적 상태에는 아침과 저녁이 있고 뜨거울 때와 차가울 때가 있습니다. 어떤 날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충만하지만 어떤 날은 말씀을 읽는 것조차 힘들 수 있습니다. 만일 거듭남이 인간의 종교적 열심이라는 불에 달려 있다면 그 불은 오래전에 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단의 불은 인간이 처음 만들어 내는 불이 아닙니다. 주님의 신적 사랑이 먼저 끊임없이 흐르고 있으며 인간은 매일 아침 그 불 위에 나무를 놓고 번제를 벌여 놓습니다. 그러므로 ‘아침마다’라는 말씀과 ‘꺼지지않는불’이 함께 있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끊이지 않지만 인간은 날마다 새롭게 그 사랑에 응답해야 합니다. 거듭남은 한 번 뜨거워진 신앙으로 평생을 버티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흐르는 주님의 사랑을 매일 새롭게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과정입니다.
10절과 11절에서는 번제가 다 타고 남은 ‘재’가 등장합니다. 제사장은 세마포 옷을 입고 재를 제단 곁에 두었다가, 다시 옷을 갈아입고 그 재를 ‘진영바깥정결한곳’으로 가져갑니다. 여기에서도 세부를 함부로 상응시키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만, 세마포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AC.9959(출28:42)는 세마포가 외적 또는 자연적 진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하면서 바로 레6:10-11의 제사장이 재를 치울 때 세마포 옷과 속바지를 입었던 규정을 직접 인용합니다. 따라서 제사의 마지막 남은 것까지 진리의 질서 아래 처리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재가 ‘진영밖’으로 나가지만 아무 데나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정결한곳’으로 옮겨진다는 사실입니다. 제사가 끝났다고 해서 그 결과가 부정한 폐기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재 자체의 세부 의미에 대해서는 이번에 확보한 직접 원전보다 더 나아가 단정하지 않겠습니다.
14절로 18절의 소제 규례는 레2를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의 일부를 제단에서 불사르고 나머지를 아론과 그의 자손이 거룩한 곳에서 먹습니다. 그런데 AC.2177은 이 본문을 직접 해설하면서 고운 가루는 체어리티의 영적인 것을, 기름은 체어리티의 천적인 것을, 유향은 그렇게 주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한 움큼을 취하는 것은 온 힘과 온 영혼으로 사랑하는 것을, 누룩 없이 먹는 것은 순수하고 불결함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고 풀이합니다. 그리고 특히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남은 것을 먹는 것은 인간 편에서의 ‘상호성’과 ‘자기것으로삼음’을 표상하며, 그 결과 사랑과 체어리티를 통한 결합이 이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제물은 제단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께 드려진 선이 다시 인간에게 주어지고 인간의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레6에서 ‘먹는다’는 행동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AC.2187(창18:8)에서 거룩한 제물을 먹는 것은 ‘교통,결합,자기것으로삼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면서 레6:16, 18, 26을 직접 열거합니다. 제사장이 거룩한 것을 먹는 것은 단순히 제사장의 식량을 마련하기 위한 제도가 아니었습니다. 표상적으로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인간 안에 받아들여져 실제 생명의 일부가 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진리를 듣기만 하는 것과 그 진리가 내가 살아가는 선이 되는 것은 다릅니다. 말씀을 이해하는 것과 그것을 ‘먹어’ 자기 삶으로 만드는 것도 다릅니다. 거듭남은 결국 주님의 선과 진리가 내 생각과 의지와 행동 안으로 들어와 나의 삶이 되는 과정입니다.
19절로 23절에는 또 하나 특이한 소제가 나옵니다. 아론과 그의 자손이 기름 부음을 받는 날에는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아침과 저녁으로 나누어 드리되, 이 제물은 제사장이 먹지 않고 ‘온전히불사르라’고 합니다. AC.9993은 아론이 기름 부음을 받는 날 드리는 레6의 소제를 직접 언급하면서 누룩 없는 떡과 기름이 결합된 여러 형태가 천적 선의 서로 다른 층위를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는 모든 세부를 억지로 풀기보다 중요한 차이를 붙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일반 소제에서는 일부가 제사장에게 돌아가지만 제사장 자신을 위한 이 소제는 온전히 여호와께 돌려집니다. 주님께 봉사하는 직분 자체도 자기 소유가 될 수 없으며, 그것의 근원과 목적 전체가 주님께 있음을 보여 주는 매우 인상적인 규례입니다.
24절로 30절에서는 속죄제 규례가 다시 등장합니다. 여기서 반복되는 표현은 ‘지극히거룩하다’입니다. 죄를 다루는 제물인데 왜 오히려 ‘지극히거룩하다’고 부를까요? 스베덴보리는 정결이 단지 인간이 자기 악을 들여다보는 행위가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을 악과 거짓에서 실제로 건져 내시는 신적 역사라고 봅니다. AC.10132는 정결과 거듭남이 이노센스의 상태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속죄제와 속건제가 레6:17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지극히거룩하다’고 불렸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속죄제의 거룩함은 죄 자체가 거룩하다는 뜻이 아니라 죄를 제거하고 인간을 다시 주님의 질서 안으로 돌려놓으시는 주님의 정결케 하시는 역사가 거룩하다는 뜻입니다.
27절과 28절은 더욱 놀랍습니다. 속죄제의 고기에 접촉하는 것은 거룩하게 되고, 피가 옷에 묻으면 거룩한 곳에서 빨아야 하며, 고기를 토기에 삶았으면 그 그릇을 깨뜨리고 유기에 삶았으면 닦고 물로 씻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직접적인 원전이 있습니다. AC.10130(출29:37)은 레6:18, 27을 직접 인용하면서 ‘접촉’은 교통과 전달과 받아들임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AC.10105(출29:31)는 레6:28을 직접 인용하면서 토기는 ‘선과결합하지않는거짓’을, 유기는 ‘선이들어있는교리적인것’을 의미한다고 풀이합니다. 속죄제의 고기를 삶는 것은 악과 거짓에서 정결하게 되기 위한 준비를 의미하므로, 선과 결합할 수 없는 거짓은 ‘깨뜨려야’ 하지만 선을 담고 있는 교리적인 것은 버리지 않고 ‘닦고물로씻어’ 정결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레6의 가장 사소해 보이는 그릇 하나에도 거듭남의 놀라운 아르카나가 들어 있습니다.
마지막 30절에서는 속죄제 가운데서도 차이가 나타납니다. 어떤 속죄제는 제사장이 먹지만, 그 피를 회막 안 성소로 가지고 들어가 속죄한 제물은 먹지 않고 불살라야 합니다. 본문 자체가 이 둘을 분명히 구별합니다. 이것을 현재 확보한 원전 이상으로 세밀하게 상응시키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레6전체에서 한 가지 원리는 분명합니다. 제사의 모든 것이 똑같은 방식으로 처리되지 않습니다. 무엇은 제단에서 불살라지고, 무엇은 제사장이 먹으며, 무엇은 씻고, 무엇은 깨뜨리고, 무엇은 성소로 들어가고, 무엇은 다시 불살라집니다. 거듭남 역시 모든 것을 무조건 버리는 과정이 아닙니다. 악과 결합된 거짓은 깨뜨려야 하지만 선을 섬길 수 있는 진리는 정결하게 하여 보존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은 받아들여 자기 삶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서 레6은 놀랍도록 역동적인 장입니다. 처음에는 훔친 것을 ‘돌려보내라’고 하고, 마지막에는 속죄제의 그릇 하나까지 어떻게 정결하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그 모든 과정의 한가운데에는 ‘불은끊임이없이제단위에피워꺼지지않게할지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을 깨닫고, 자복하고, 돌려주고, 악과 거짓을 씻고,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삶으로 만들 수 있는 근원은 결국 우리의 의지력이 아닙니다. 꺼지지 않는 것은 우리의 열심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자비입니다. 그 영원한 불이 제단 위에 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오늘도 다시 정결하게 되고, 다시 선을 받아들이며, 다시 이웃에게 바로 행하는 삶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레6이 보여 주는 거듭남의 질서입니다. (SW.레6해설)
레5:17은 읽는 사람을 멈추게 하는 말씀입니다. ‘만일누구든지여호와의계명중하나를부지중에범하여도허물이라벌을당할것이니.’ 알면서 고의로 계명을 어긴 것이 아니라 ‘부지중에’, 곧 알지 못하고 범했는데도 왜 허물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이것만 떼어 읽으면 하나님께서 인간이 알지도 못했던 잘못까지 찾아내어 책임을 묻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원전을 함께 보면 이 문제는 훨씬 섬세하게 읽어야 합니다.
먼저 아주 중요한 원전이 있습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3519(창27:9)는 제사에 사용되는 염소 새끼가 이노센스를 의미한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레5:6을 직접 인용합니다. 그리고 ‘실수로범한죄’는 ‘무지에서비롯된죄’이며, 그 무지 안에는 이노센스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몰랐어도죄는죄니까고의로지은죄와똑같이책임져야한다’고 단순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지 속에 이노센스가 있는가를 함께 봅니다.
AC.9262(출23:7)는 이 문제를 더욱 분명하게 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신명기의 한 정결 의식을 해설하면서 어떤 악한 결과가 ‘이노센스가있는무지’에서 비롯된 경우에는 ‘책임이없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그 행위 자체가 잘못된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과 그 사람에게 돌아가는 죄책을 구별합니다. 무지 속에 이노센스가 있었다면 그 행위는 악한 결과를 낳았더라도 그 사람의 의지에서 악을 선택하여 나온 것과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레5:17의 ‘부지중에범하여도허물이라’는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여기서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은 ‘어떤것이객관적으로신적질서에어긋나는가’와 ‘그것을행한사람에게어느정도의죄책이귀속되는가’입니다. 인간이 모르고 독을 마셨다고 해서 독이 물로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르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해서 그 상처 자체가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어떤 악을 악인 줄 모르고 행했다고 해서 그것이 갑자기 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적 질서에 어긋난 것은 여전히 바로잡혀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면서 의도적으로 선택한 사람과 정말 모르고 행한 사람의 내적 상태까지 같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레5자체도 이 차이를 보여 줍니다. 2절과 3절에서는 어떤 사람이 부정한 것에 접촉했지만 ‘부지중’이었다가 나중에 그것을 깨닫는 상황이 나옵니다. 4절에서도 함부로 맹세한 일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그리고 17절에서도 ‘부지중’이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중요한 전환점은 ‘깨닫게되는것’입니다. 알지 못했던 때와 알고 난 뒤의 상태가 같지 않습니다. 알지 못했을 때에는 이노센스가 있을 수 있지만, 주님께서 말씀과 양심을 통해 그것을 보여 주신 뒤에도 계속 같은 악을 붙들고 있다면 더 이상 같은 의미의 무지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레5의 속죄제가 이해됩니다. 제사는 ‘몰랐으니너도고의범과똑같이유죄다’라고 정죄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직 알지 못하는 가운데 인간의 자연적 삶에 들어온 부정과 무질서를 주님께서 정결하게 하시는 길을 보여 줍니다. AC.3519가 실수로 범한 죄를 ‘무지에서비롯된죄이며그안에이노센스가있다’고 설명하면서 바로 레5의 속죄제를 연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노센스가 있는 무지는 주님께서 정결하게 하실 수 있는 상태입니다.
여기서 ‘이노센스’를 단순히 ‘아무것도몰랐으니나는잘못이없다’는 자기변명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노센스는 훨씬 깊은 상태입니다. 자기 자신에게서는 선과 진리가 나오지 않으며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고 주님의 인도를 받으려는 상태입니다. AC.9262는 이노센스를 바로 이런 태도와 연결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이노센스가 있는 사람은 ‘나는몰랐으니까책임없어’라고 버티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잘못을 알게 되었을 때 ‘주님,제가몰랐습니다.이제보여주셨으니돌이키겠습니다’라고 응답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거듭남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거듭남을 시작할 때 자기 안의 모든 악을 한꺼번에 알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아주 거친 악만 보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배우고 양심이 형성되며 주님의 빛이 더 깊이 들어올수록 이전에는 아무 문제도 없다고 생각했던 말과 행동, 동기와 욕망 속에서도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제는 몰랐던 것을 오늘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어제의 무지를 이용해 우리를 정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 보여 주심으로 오늘부터 그것에서 자유로워질 길을 여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레5:17의 ‘알지못하였을지라도허물이라’는 말씀은 두려움을 조장하기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인간의 무지가 악을 선으로 바꾸지는 않는다는 엄중한 진리인 동시에, 아직 알지 못했던 잘못까지 주님께서 정결하게 하실 수 있다는 희망의 말씀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악에서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새롭게 발견되는 더 깊은 악과 거짓에서도 계속 정결하게 됩니다.
결국 문제는 ‘몰랐는가,알았는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알게된뒤어떻게하는가?’입니다. 무지 속에 이노센스가 있었다면 주님께서는 그것을 고의적인 악과 똑같이 여기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여 주신 뒤에는 새로운 자유와 책임이 시작됩니다. 그때 그것을 인정하고 피하면 어제의 무지는 오늘의 거듭남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레5의 부지중의 죄는 인간을 꼼짝 못 하게 만드는 죄책의 교리가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영역까지 조금씩 비추시고 정결하게 하여 마침내 더 온전한 자유로 이끄시는 거듭남의 아르카나입니다. (SW.7레5심화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