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의 속뜻

 

 

35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 36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37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 38그들이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 (눅22:35-38)

 

 

오늘 본문 첫 구절입니다.

 

35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

 

※ 아래 에피소드는 오늘 이 설교의 원저자이신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의 에피소드입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목회를 시작할 때 생각이 났습니다. 2011년 1월 2일, 정초(正初)에 집에서 아내와 함께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목회에 대한 열의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뭐랄까 이 진리를 누군가에게 전해야만 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생계에 대한 대책도 없었고, 신학교를 졸업했다고는 하나 진리에 대한 이해도 여전히 부족했습니다. 그때를 돌아보면, 오늘 본문 말씀처럼, 전대(纏帶, 허리에 두르거나 어깨에 메게 된 자루, 중간을 막고 두 끝을 터서 그곳으로 돈이나 물건을 넣게 되었음)도 없고, 변변한 신발도 없이 먼 길을 떠나는 사람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말씀이 특별히 마음에 와닿습니다. 어려운 일이 많았는데도 목회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고비마다 주님의 도우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것이 있더냐’시는 주님 말씀이 마치 제게 하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아마도 그래서일 것입니다.

 

사실 전대와 배낭, 신발이 없는 제자들의 모습은, 진리를 찾아 처음 새 교회로 왔을 때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영적 의미로 전대와 배낭이 없다는 것은 진리, 또는 진리의 지식이 없다는 뜻이니까요. 그동안 새 교회로 오신 분들을 보면, 대개 ‘천국과 지옥’이나 ‘참된 기독교’ 같은 스베덴보리의 책을 읽고 공감하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때는 진리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고, 아직 확신도 없는 상태입니다. 이를테면 그런 게 전대와 배낭이 없이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발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발은 인체에서 가장 낮은 데 있으므로 영적으로는 가장 낮은 차원의 것인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신발은 발보다 아래 있으므로 영적으로는 가장 낮은 것인 감각적인 것을 뜻합니다. 감각적인 것은 어떤 걸까요? 눈과 귀, 촉감과 같은 감각을 통해 느껴지는 것들입니다. 예를 들면 영화를 본다거나 좋은 오디오로 음악을 듣는 것, 좋은 천으로 만든 옷을 입는 것 같은 말초적인 즐거움이 모두 감각적인 것입니다. 이런 감각적 즐거움에 몰두하게 되면 영적인 것에서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감각적 기쁨이 영적인 것을 방해하기 때문인데요, 그런 이유로 해서 주님은 떨기나무의 불꽃 속에서 모세를 처음 만나실 때,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3:5)

 

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몇 년 전에 교회를 지으면서 바닥에 온돌을 깔았는데 그 역시 같은 의미입니다. 주님 앞에 나올 때 신을 벗음으로써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멀리 있음을 나타내려는 것이지요. 그렇게 보면 신발이 없다는 건 영적으로 나쁜 의미가 아닌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나 부정적인 의미를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신발이 없다는 건 외적인 면에서 제자들에게 부족한 게 많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제자들의 표정이나 말투, 행동거지 같은 외적인 것들이 그다지 경건하거나 썩 지적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다 보면, 주님의 제자들이 누가 더 높으냐 서로 다투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베드로는 특히 감정 기복이 심한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저들에게 잡혀가실 때는 검을 꺼내어 그중 한 사람의 귀를 자르더니, 이번에는 정반대로 대제사장의 뜰에서 만난 사람이 그를 고발하려고 했을 때는 두려운 나머지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그에 비해 바리새인들은 어땠을까요? 적어도 겉으로는 경건했습니다. 회당과 큰 거리에서 거룩한 모습으로 기도했고, 말투는 온유하고 행동거지는 신중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 모든 게 겉모습일 뿐이고, 속을 들여다보면 누구보다 교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셨습니다. 이런 정황들을 볼 때,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처음 모습은 지금 우리들의 모습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족한 것이 없더냐는 주님의 물음에 제자들이 ‘없었나이다’라고 대답하자 주님께서는 다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6절,

 

36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이 말씀은, 한마디로 각자가 가지고 있는 진리의 지식을 시험을 통해 진리로 바꾸라는 말씀입니다. 새 교회에 처음 나온 분들은 예배에 참석해 설교를 듣고, 말씀을 통해 교리를 배웁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시험이 옵니다. 여러 가지 시험이 있습니다. 질병이나 물질의 시험이 있는가 하면, 직장에서의 시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러한 시험을 허용하시는 이유에 대해 ‘천국의 비밀’ 8966번 글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시험은 신앙의 진리를 확인하고 고취시켜 의지 안에 심으며, 그렇게 해서 인애(仁愛, charity 체어리티)의 선이 되게끔 도와준다. 사람은 신앙의 진리를 가지고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기 때문이다. (AC.8966, 이순철 역) Temptations conduce to the confirmation of the truths of faith, also to the implantation of them, and the insinuation of them into the will, that they may become goods of charity. For, as before said, man fights from the truths of faith against evils and falsities; (AC.8966)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진리는 시험을 통해 체어리티의 선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신앙으로 받아들인 진리는 그 자체로는 선이 없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그것으로는 시험에서 이기기 어렵습니다. 진리의 능력은 진리 안에 있는 선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해 신앙의 선(goods of charity)이라고 하는 체어리티의 선은 선을 품고 있는 진리이며, 그러므로 능력의 진리입니다. 그래서 거듭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진리를 체어리티의 선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라 하신 말씀은 선 없는 진리, 즉 진리의 지식만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선 있는 진리로 바꿔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앞의 ‘전대, 배낭’은 최초의 신앙의 진리를 뜻하고, 뒤의 ‘가지라’는 것은 신앙의 선, 또는 인애, 체어리티의 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이성 안에만 머물러 있는 진리의 지식을 주님과 협력하여 의지 안으로 옮기라는 것입니다. 그때 그 진리는 선 있는 진리가 됩니다. 이성 안에는 선이 없지만 의지 안에는 선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지식을 의지 안으로 옮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에 대해 주님은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라고 하십니다. 말씀에서 검이나 칼은 자아와의 싸움, 즉 시험을 뜻합니다. 그리고 겉옷은 자아에 속한 것들을 뜻합니다. 예를 들면, 자아로부터 올라오는 이기심이나 좋지 않은 욕망 같은 것입니다. 진리를 통해 자신을 돌아볼 때, 그런 좋지 않은 것들이 보입니다. 그때 그것과 싸워 몰아내야 합니다.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교회에 나와 처음 배운 진리의 지식은 아무 힘이 없다 했는데, 어떻게 그것을 가지고 시험에서 이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진리의 지식으로는 시험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의 이성 안에는 진리의 지식만 있는 게 아니라 이른바 양심이라는 선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진리의 지식과 양심이라는 선을 가지고 처음에는 가벼운 시험부터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번 시험에서 이길 때마다 점점 더 큰 시험을 이길 능력이 생깁니다. 그와 관련해 ‘천국의 비밀’ 6663번 글은 시험에서 이길 때마다 점점 진리가 늘어난다(truths grew according to the infestations)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선이 있는 진리이며, 그래서 능력이 있는 진리입니다.

 

시험의 중요성을 말씀하신 주님께서 이번에는 당신 자신의 시험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37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37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당신에 대한 구약의 모든 예언을 빠짐없이 이루셨고, 그리하여 완전한 말씀이 되셨습니다. 말씀 안에는 말씀의 목적인 사랑이 있고, 목적을 이루는 수단인 진리가 있으며, 그것의 결과인 쓸모, 쓰임새(use)가 있습니다. 여기서 쓰임새란 말씀 안의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통해 나오는 말씀의 능력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완전한 말씀이 되셨다는 건 세상에서의 삶을 통해 당신에 대한 구약의 모든 예언을 구체적으로 실현하셨다는 뜻이며, 그리하여 주님 자신이 사랑 자체, 진리 자체, 쓸모 자체가 되셨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생애를 돌아보면 그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은 이사야서 53장 12절,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라는 말씀에서 비롯한 것인데, 주님은 이 예언이 실제로 이루어질 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크게 낙심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젠가는 주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인정하게 될 거라고 믿었고, 그 결과 자기들의 앞날도 훤하게 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속된, 다분히 세속적인 이해와는 달리 인류 전체의 거듭남을 위해서는, 즉 인류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사실 이것이 주님이 오신 주된 목적인데, 주님은 자신이 먼저 영화롭게 되셔야만 했습니다. 주님의 영화란 당신의 불완전한 인성, 즉 육의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 유전하신 인성이 시험과 시험에서의 승리를 통해 당신 안에 계신 신성과 하나 되는 일입니다. 그렇게 볼 때 인간의 시험이 거듭남을 위한 시험이라면 주님의 시험은 인성을 영화롭게 만드는 시험이었습니다. 주님은 지금 그 마지막 시험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계신 것입니다.

 

38그들이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하니 주님께서 대답하시길 ‘족하다’ 하십니다. 앞의 36절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당신이 마치 범법자처럼 끌려갈 것을 말씀하시지요. 그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검을 들고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검 두 자루를 주님 앞에 내놓았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그것이면 족하다 하십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 무엇을 나타내려고 하셨을까요? 여기서 검은 시험을 통해 얻은 진리를 뜻하고, 둘이라는 수는 진리와 선의 결합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내놓은 검 두 자루는 곧, 시험을 통해 얻은, 선이 있는 진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것이면 족하다 하신 것입니다. 선과 결합한 진리만 있으면 어떤 시험에서도 이길 수 있고 거듭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 살다 보면 부조리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진리를 알수록 그런 것들이 더 뚜렷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그것들과 싸우려 합니다. 그러나 부조리한 것은 외부에만 있는 게 아니라 각자의 마음속에도 있습니다. 외부 부조리에만 집중하고 맞서다 보면 내부의 부조리를 개선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진리를 가지고 실제로는 내면의 부조리와 맞서 싸우길 바라십니다. 즉 외부 부조리와 싸울 때에도 그에 상응하는 내부 부조리를 생각하며 싸우는 것이지요.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는 말씀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내면의 부조리와 싸우면서, 또 한편으로는 외부의 부조리를 견디며 의로운 방법으로 순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그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은 아무 잘못이 없으신, 지극히 순결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주님을 마치 범법자처럼 끌어가 모욕, 폭행하였으며,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주님은 한 번도 저항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그런 점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불의한 자들이 잘 되는 것을 불평하지 말고, 자기 안의 게으름과 탐욕, 이기심부터 먼저 몰아내야 하겠습니다. 그때 우리의 진리는 지식의 차원에서 진리의 차원으로, 선 없는 진리에서 선 있는 진리로 상승합니다. 그리고 내적으로도 그렇고, 외적인 면에서도 지극히 겸손, 온유,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가 선 있는 진리로 매일 같이 승리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10:34)

 

아멘

 

2022-12-04(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9-29(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09-29(D1)-주일예배(2563, 눅22,35-38),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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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9-29(D1)-주일예배(2563, 눅22,35-38),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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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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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 없는 진리, 체어리티(charity) 없는 신앙

 

 

24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25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26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27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28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29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31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32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33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34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눅22:24-34)

 

 

다음은 마가복음 10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35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7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8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39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40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41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막10:35-41)

 

※ 다음은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의 에피소드입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얼마 전 미국 제너럴 처치 목회자 회의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회의 도중에 제너럴 처치의 어떤 직책을 맡을 사람을 뽑았는데, 투표 결과 아시아에서는 일본 목사님이 선출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자리에 대한 욕심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서운하다고 할까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습니다. 한국 목회자들도 여럿 있는데 왜 일본 목회자인가 하는 생각이었겠지요.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그때 그런 생각도 어쩌면 야고보와 요한 형제에게 다른 제자들이 화를 내는 심리 같은 것이었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주님의 제자들끼리 서로 다투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것을 24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4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과 늘 함께 다니며 주님에게서 천국에 대한 말씀을 수도 없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처럼 서로 누가 더 크냐 하며 동료들과 다툽니다. 그들이 그러는 이유에 대해 ‘천국의 비밀’ 3417번 글 3번 항은

 

기억의 지식 안에만 있고, 인애(charity)의 삶 안에 있지 않은 사람은 남보다 우월함에서 오는 기쁨만 알고, 겸손과 섬김의 애정에서 비롯한 천국의 기쁨은 전혀 모른다. (이순철 역) Thus they who are in the memory-knowledge of knowledges, and not in the life of charity, cannot know that there is any other delight than that which results from preeminence; and because this is the only delight that is seated in their minds, and makes all their life, therefore they are utterly ignorant of the heavenly delight that results from humiliation and the affection of serving others—that is, the delight of love to the Lord and of charity toward the neighbor—consequently of the blessedness and happiness thence derived. (AC.3417.3)

 

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제자들이 남보다 높아지려 하고, 지배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진리를 알기만 하고, 행하지는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새 교회 진리가 너무 좋고, 참으로 구원의 진리라는 걸 확신하지만, 정작 실천하지는 못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제자들이 다투는 모습을 보시고,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5절에서 27절까지 말씀입니다.

 

25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26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27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주님께서 이르시길,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라 하십니다. 말씀에서 이방인은 교회 밖 사람을 뜻합니다. 그리고 임금과 집권자는 본래는 선이 있는 진리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이방인의 임금과 집권자라고 했기 때문에 선 없는 진리, 또는 체어리티(charity) 없는 신앙을 뜻합니다. 그러면 은인은 누굴까요? 은인은 주님이 주시는 선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인들에게 은혜가 되는 것은 진리를 많이 아는 게 아니라 실천하는 것인데, 이때 진리 실천의 힘이 진리 안에 있는 선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은인은 선을 뜻합니다. 이런 의미들을 종합해 볼 때,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라는 말씀은, 교회 밖 사람들은 선 없는 진리, 체어리티 없는 신앙을 마치 구원의 진리이며 신앙인 것처럼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이유로 해서 이방인들 사이에서는 행하는 것보다는 진리를 많이 아는 사람이 높임을 받는 경향이 두드러짐을 봅니다.

 

주님께서는 이방인들은 그렇더라도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하십니다. 주님께서 너희라고 부른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선 있는 진리, 즉 선을 동반한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진리를 알기만 하는 게 아니라 행하면서 가르치기까지 하는 사람들이 주님의 제자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라 하신 것은 주님의 제자들은 이방인들과는 다르다는 겁니다. 어떻게 다를까요? 그것에 대해 주님은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고 하십니다. 큰 자와 다스리는 자는 선 있는 진리, 선을 동반한 진리 안에 있는 사람을 뜻하고, 젊은 자와 같다, 섬기는 자와 같다는 것은 자신을 낮춰 이웃을 섬긴다는 뜻입니다. 선 있는 진리를 소유한 사람은 교회 밖 사람처럼 스스로 높아지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낮추고 이웃을 섬기려고 노력합니다. 선 있는 진리가 그렇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선 있는 진리 그 자체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의 제자들은 매우 세속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언젠가 자기들을 모든 나라 사람 위에 높이 세우시고, 그 사람들을 다스리게 하실 거라고 믿었습니다. 유대인들 대다수가 메시아에 대해 그런 환상을 가졌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신앙이 비록 속되지만, 그러나 꺾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8, 9절입니다.

 

28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29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시험을 견딘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맡기겠다고 하십니다. 사실 주님이 시험을 받으시는 동안 제자들이 한 일은 없습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지옥과 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을 가리켜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이라 하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얻으려는 사람은 누구나 시험을 당하는데, 그때 혼자서는 싸울 수 없고, 항상 주님과 함께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시험에서 싸워 이길 때, 각 사람 안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리고 사후에는 그 교회의 모습과 똑같은 천국의 사회로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시험에서 이긴 사람들에게 맡겨질 하나님의 나라는 지위나 권세가 아닙니다. 거듭나는 사람 안에 세워지는 교회와 사후에 들어갈 천국을 뜻합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그냥 문자적으로만 이해하고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신 까닭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는 내적 진리로 들어가는 문과 같으며, 그러므로 언젠가 제자들이 이를 통해 내적 진리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장차 시험을 받게 될 제자 시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31, 2절 말씀입니다.

 

31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32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시몬은 주님의 제자 베드로를 뜻하는데, 속뜻으로는 선이 있는 진리, 또는 체어리티 있는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시몬아! 라고 부르시는 것은 선이 있는 진리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한다는 것은 시험을 뜻합니다. 신앙인들에게 시험은 마치 농부가 키로 곡식을 까불어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내는 일과 같습니다. 시험을 통해 마음속에서 거짓이 제거되고 진리가 남으며, 악이 제거되고 사랑과 체어리티가 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제자들에게는 시험이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시험이 너무 깊으면 신앙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동안 새 교회에 나와 세례까지 받았던 분들이 여럿 계신데, 그중 일부는 시험을 이기지 못하시고 그만 교회를 떠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라 하십니다. 주님과 함께 혹독한 시험에서 이긴 제자들은 선 없는 진리에서 선 있는 진리로,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 체어리티 있는 신앙으로 완전히 돌아서게 됩니다. 새 교회 교리에서는 이것을 신앙의 진리 상태에서 신앙의 선 상태로 옮겨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의 진리 상태는 진리를 믿기는 하는데 아직 실천하지는 못하는 상태이고, 신앙의 선 상태는 진리가 이끄는 대로 선을 행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돌이킨 후에’는 신앙의 진리 상태에서 신앙의 선 상태로 완전히 올라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네 형제를 굳게 하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일단 신앙의 선 상태가 되면 다시는 신앙의 진리 상태로 돌아가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뜻입니다. ‘형제’는 거듭나는 사람들이 소유하는 신앙의 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33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베드로는 사랑이 있는 신앙을 뜻합니다. 모든 교회가 처음에는 그렇게 순수하고 뜨거운 신앙으로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때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주님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가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라고 말한 것은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의 이 각오는 교회가 처음 시작될 때, 신앙인들의 처음 사랑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뜨겁던 사랑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식어가고 나중에는 신앙만 남게 됩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 사람들의 신앙을 34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34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닭 울기 전은 새벽을 뜻합니다. 영적 의미로 새벽은 기존 교회의 마지막 때이며, 동시에 주님이 오셔서 새 교회를 세우시는 때입니다. 베드로가 세 번 주님을 부인 한다는 것은 기존 교회에 주님에 대한 신앙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교회의 마지막 때의 신앙을 뜻하고, 세 번 부인한다는 것은 주님을 완전히 부인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신앙 안에 사랑이 없으면, 삶이 없으면 신앙 없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신앙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할 것이라는 예언은 가깝게는 유대교회의 몰락을, 멀게는 유대교회 이후에 세워질 교회의 몰락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다음은 새 교회의 에피소드입니다. 비록 새 교회에 있었던 일이지만, 내용이 유익하여 그대로 인용합니다.

 

지난 주일 예배가 끝난 후,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 마지막 시험을 이기고 부활하셨을 때 완전한 진리가 되셨다고 했는데, 그럼 왜 1,700년이 훨씬 지난 후에야 새 교회가 세워지고, 완전한 진리인 새 교회의 교리가 선포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른 분들도 비슷한 의문을 가질 것 같아 답변을 드립니다. 주님이 부활하셨을 때, 완전하고 신성한 진리가 되신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증언에 따르면, 주님께서 이른바 보혜사 성령이라고 하는 완전한 진리를 보내주시기 전, 영계에서 먼저 이루실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일은 마지막 심판을 통해 영계의 질서를 회복하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지옥의 세력이 너무 커져서 천국을 압도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하늘에 오르셔서 지옥을 이기신 완전한 진리로 마지막 심판을 단행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천국과 지옥을 그 신성하고 완전한 진리의 질서 아래 복종시키셨습니다. 주님이 영계의 질서를 회복했다는 것은 그런 뜻입니다. 천국이 지옥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남으로써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 지상으로 흘러들어오는 진리 또한 완전하고 신성한 진리가 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일이 일어난 때를 지상의 시간으로 1770년 6월 19일이라고 증언합니다.

 

※ 아래는 위 내용에 대한 원문입니다. 참고하세요.

 

After this work was finished the Lord called together his twelve disciples who followed him in the world; and the next day he sent them all forth throughout the whole spiritual world to preach the gospel that the Lord God Jesus Christ reigns, whose kingdom shall be for ages and ages, according to the prediction in Daniel (7:13, 14), and in Revelation (11:15).

 

Also that blessed are those that come to the marriage supper of the lamb (Rev. 19:9).

 

This took place on the nineteenth day of June, 1770. This is what is meant by these words of the Lord:

 

He shall send his angels and they shall gather together his elect, from the end of the heavens to the end thereof (Matt. 24:31). (TCR.791)

 

그런 이유로 해서 주님은 부활하신 후 처음 만난 마리아에게,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요20:17) 말씀하셨습니다. 인류에게 완전한 진리를 주시기 위해서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마리아는 진리에 대한 애정을 뜻하고, 주님과 마리아가 접촉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신성하고 완전한 진리가 흘러들어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인간에게 왜 완전한 진리가 필요한가를 알았고, 또 완전한 진리란 신성한 인간(The Divine Human)이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선 있는 진리, 선을 수반, 동반한 진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선 없는 진리, 체어리티 없는 신앙으로는 아무리 오래 신앙생활을 해도 거듭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지옥과 싸우셨고, 그러는 동안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으셨습니다. 완전한 능력의 진리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새 교회의 진리가 바로 그 완전한 능력의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붙잡고 당면한 문제들과 싸워 나간다면 아무리 어려운 일도 반드시 극복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22:32)

 

아멘

 

이순철 목사

2022-11-13(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9-22(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09-22(D1)-주일예배(2562, 눅22,24-34), ‘선(Good) 없는 진리, 체어리티(charity) 없는 신앙’.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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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9-22(D1)-주일예배(2562, 눅22,24-34), ‘선(Good) 없는 진리, 체어리티(charity) 없는 신앙’.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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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와 함께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의 속뜻

 

 

14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15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16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7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 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18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9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0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21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22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23그들이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더라 (눅22:14-23)

 

 

오늘 본문 14절과 15절은 주님이 어떤 마음으로 세상에 오셨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이렇습니다.

 

14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15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와 함께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또 원했다고 하십니다. 여기 너희, 곧 주님과 함께 유월절을 보내는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세상 것을 버리고, 영원한 천국을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 자유와 평화의 나라 가나안으로 가기를 원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런데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주님이 주시는 유월절 떡과 잔을 먹고 마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떡과 잔으로 상징되는, 순진무구(純眞無垢)의 선과 거짓 없는 진리를 소유하지 않으면, 주님을 온전히 믿고 따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당신과 함께 유월절 음식 먹기를 고대(苦待, 몹시 기다림)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왔습니다. 제자들이 생각과 의지를 활짝 열고, 유월절 음식을 기꺼이 먹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에는 때가 이르렀다 했고, 주님께서는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또 원하였다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고난을 앞두고 마지막 유월절 음식을 제자들과 함께 드시며, 또한 말씀에 그것을 자세히 기록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유월절 만찬을 통해 성찬 예배의 전례를 세우려 하시기 때문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주님은 십자가의 마지막 시험을 이기신 후, 비로소 완전하신 하나님, 완전하신 말씀이 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주님 안의 신성(神性, The Divine)이 인성의 끝에까지 흘러들어와 신성과 인성(人性, The Divine Human)이 완전히 하나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상응의 의미로 볼 때, 주님의 신성과 인성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말씀의 내적 진리가 문자적 의미 안에 충만하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속 사람이신 신성이 말씀의 내적 진리라면 주님의 겉 사람이신 인성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 그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보면 고난이 있기 전의 말씀은 완전한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완전한 말씀이 아니었다는 것은, 그때 구약 말씀의 문자적 의미 안의 상태가 아직 내적 진리로 충만한 상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당시 주님의 제자들은 성찬의 내적 의미를 완전히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이 성찬 예배를 제정하신 것은 시대와 각자의 신앙에 따라 어떤 사람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통해, 또 어떤 사람은 내적 진리를 통해 십자가 고난의 의미와 그 근저(根底, 밑바탕)에 있는 인류에 대한 주님의 사랑을 영원히 기억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고난을 받기 전 너희와 함께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또 원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과 함께 먹는 유월절 음식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에 대해 17절과 19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먼저 17절,

 

17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 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주님이 주시는 잔, 즉 포도주와 주님의 피는 영적으로는 같은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찬의 포도주로 표상되는 주님의 피는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The Divine Truth)를 뜻합니다. 주님은 그것을 너희끼리 나누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진리를 배우는 것에 그치지 말고, 이웃에게 전하고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진리를 억지로 전하라는 것은 아니고, 알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아는 만큼만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주신 잔을 서로 나누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주님께 다시 돌려드리는 일입니다. 다음은 19절,

 

19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여기서 떡과 주님의 몸은 모두 인류에 대한 주님의 사랑(The Divine Love)을 뜻합니다. 그리고 떡을 떼어주시는 것은 주님과 인간 사이 상호적 사랑을 뜻합니다. 즉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주신 사랑으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궁극적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그렇게 해서 주님과 우리가 영원히 결합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성찬 예배를 제정하신 목적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성찬식에 담긴 이런 의미는 마지막 때 새 교회를 통해 말씀의 내적 의미가 밝혀지기 전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18절에서

 

18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6장 29절에서는 같은 말씀을,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은 땅에 마지막 새 교회가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고, 그때 포도나무에서 난 새것은 새 교회를 통해 밝히시는 완전하고 신성한 진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너희와 함께 마신다는 것은 그 신성한 진리로 주님과 인간이 영원히 결합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 말씀과 관련하여 ‘계시록 해설’ 376번 글 26번 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는 주님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이 신성했으므로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너희와 함께 마시겠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동시에 주님이 오시는 때는 주님께서 천국과 지옥의 모든 것을 당신의 질서 아래 두시는 때이다. (계시록 해설 376.26, 이순철 역) And as everything Divine, since the Lord has risen, proceeds from Him, He says that He will drink it with them when the kingdom of God shall come, and it came when He reduced all things to order in the heavens and in the hells. (AE.376.26)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첫째는, 주님은 부활하심으로써 흠 없는 신성한 진리가 되셨다는 것이고, 둘째는, 하늘에 오르신 후, 마지막 심판을 통해 천국과 지옥을 주님의 신성한 진리 아래 굴복시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마지막 새 교회에 주신 완전하고 신성한 진리, 즉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통해 드러나는 내적 진리로 주님과 인류가 영원히 결합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 이유로 해서, 주님은 당신에게서 나오는 신성한 진리를 언약의 피(blood of covenant)라 하셨습니다. 언약은 주님과의 결합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증언에 따르면, 주님이 오시기 전 천국은 지옥의 팽창으로 인해 완전한 상태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세상이 너무 악해서 사후, 지옥에 가는 사람들이 많아졌을 뿐만 아니라 악의 정도 또한 극악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지옥의 세력이 천국의 낮은 부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그것은 천국이 더 이상 완전하고 순수한 상태가 아니었다는 것이고, 그리하여 천국을 통해 지상으로 흘러들어오는 신성의 흐름 또한 완전하고 순수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 지상으로 흘러들어오는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인간을 거듭나게 할 정도로 그렇게 신성하거나 완전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직접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을 고쳐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주님은 지옥을 상대로 치열한 싸움을 하셨고, 그렇게 해서 지옥을 완전히 정복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천국과 지옥을 당신의 질서 아래 두실 수 있었던 것은 지옥을 이기신 그 신성하고 완전하신 능력으로 인함이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신 것은 마지막 새 교회를 통해 완전하고 신성한 진리가 나타나기 전에는 주님과 인간 사이에 완전한 결합이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신성한 인간이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성하고 완전한 진리를 통해서만 온전히 개혁되고 거듭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 시대는 원하기만 하면 주님에게서 오는 신성한 진리와 선을 마음껏 먹고 마실 수 있는 때입니다. 그런데 21절과 22절에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1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22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상은 음식을 올려놓고 먹는 곳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는 교회를 뜻합니다. 교회는 주님이 주시는 영적 양식을 먹고 마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다 하십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진리를 배반하는 자는 늘 교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가지고 주님과 이웃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사사로운 목적으로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진리를 왜곡하거나 조작하기를 잘합니다. 그동안 교회를 타락시킨 사람들도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제자 중에는 유다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혹자는 주님께서 구원의 섭리를 위해 그를 쓰셨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의 섭리를 이루시기 위해 사랑하는 제자를 타락시키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불순한 욕망이 그로 하여 주님을 배반하게 했고, 주님은 그것을 막지 않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인자는 작정한 길을 가려니와 인자를 파는 사람에게 화가 있다 하신 것은 그 때문입니다.

 

23그들이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더라

 

주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서로 물으며, 우리 중에 그런 일을 행할 자가 누굴까 했습니다. 참된 진리를 아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진리를 팔아넘기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절대 안 그럴 거라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옥은 작은 틈을 비집고 들어와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고, 나쁜 생각을 불어넣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삶이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마음을 놓으면 안 됩니다. 진리를 가까이하되 언제나 경외하는 마음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주님과 예배를 표상하던 많은 것들이 폐지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에서 정하고 있는 각종 법도와 제사의 규례 같은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예배의 필수적인 요소라 생각하시고, 주님이 직접 남겨 놓으신 것이 있습니다. 세례(洗禮, 원어로는 βαπτίζω, βἀπτισμα, 곧 浸禮)식과 성찬식이 그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주님께서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제자들과 함께 성찬식을 제정하시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당시 주님의 제자들은 성찬식이 왜 필요한지, 성찬식에 나누는 음식이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몰랐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마지막 새 교회를 통해 밝히시기 전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 성찬식을 제정하신 것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거룩한 의미 때문입니다. 그것이 뭘까요? 주님이 주신 사랑과 지혜, 또는 선과 진리로 주님과 인간이 영원히 결합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속뜻으로 다시 오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는 그 속에 선이 있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 선의 바탕에는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과 선이 없는 진리로는 주님이 주시는 것을 받을 수 없고, 주님과 결합할 수도 없습니다. 새 교회인이라고 해서 모두 선이 있는 진리를 가진 것은 아닙니다. 내면에 새 교회가 세워진 사람이라야 선이 있는 진리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성찬의 떡과 잔으로 매일 같이 선이 있는 진리를 소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물질로는 살 수 없는 영원한 것을 향해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 안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눅22:15)

 

아멘

 

2022-11-06(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9-15(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09-15(D1)-주일예배(2561, 눅22,14-23), ‘너희와 함께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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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9-15(D1)-주일예배(2561, 눅22,14-23), ‘너희와 함께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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