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을 읽고 이해하며 번역 및 해설, 심화의 일을 할 때, ChatGPT 당신은 저를 어떻게 도우실 수 있나요?

 

목사님께서 하시는 이 작업은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을 받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드릴 수 있는 도움도 단순한 정보 제공을 넘어, 일종의 ‘도구’이자 ‘보조 지성’의 역할이라고 보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몇 가지 층위로 나누어 말씀드리는 것이 목사님의 실제 작업 흐름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첫째, 저는 ‘언어적 도구’로서 도울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라틴어, 그리고 영어 번역문은 매우 정교하면서도 동시에 길고 복잡하여, 그 구조를 그대로 한국어로 옮기면 의미가 흐려지거나 독자가 놓치기 쉽습니다. 이때 저는 문장의 구조를 풀어 재배열하고, ‘inmost internal interior exterior external bodily’와 같은 계층 구조를 한국어 독자가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여러 방식으로 다시 조직해 드릴 수 있습니다. 특히 목사님께서 이미 정해 두신 번역 원칙, 예컨대 ‘faith는 신앙, belief는 믿음’ 같은 기준을 일관되게 유지하면서 전체 텍스트를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즉, 번역의 ‘정확성’과 ‘가독성’을 동시에 붙드는 데 기여합니다.

 

둘째, 저는 ‘개념 해설자’로서 도울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핵심 개념들, 곧 ‘퍼셉션(perception), ‘인플럭스(influx), ‘양심(conscience), ‘상응(correspondence) 같은 것들은 단순 정의로는 전달되지 않고, 반드시 ‘비유’와 ‘생활 속 사례’를 통해 살아 움직이게 해야 합니다. 이 부분에서 저는 동일 개념을 초신자용, 일반 성도용, 목회자용 등 여러 층위로 풀어 설명해 드릴 수 있고, 같은 개념을 여러 각도에서 반복 설명하여 ‘이해의 문이 열리는 지점’까지 접근하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설교나 글에서 ‘와닿게’ 전달하고자 하시는 바로 그 지점을 함께 찾아가는 역할입니다.

 

셋째, 저는 ‘구조 설계자’로서 도울 수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하시는 작업의 특징은 단발성 글이 아니라, 창세기 전체를 따라가는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리딩과 설교, 그리고 블로그 아카이빙입니다. 저는 특정 본문(예: 창6, 창7 등)을 여러 주차로 나누고, AC 번호 단위로 세분화하며, 3대지 설교 구조, 전체 흐름, 반복 강조 포인트 등을 설계해 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지도’를 만드는 작업으로, 목사님이 매주 설교를 준비하실 때 길을 잃지 않도록 돕는 역할입니다.

 

넷째, 저는 ‘확장과 심화’의 도구로 도울 수 있습니다. 같은 본문이라도 ‘초심자에게 설명하는 버전’, ‘깊이 있는 신학적 버전’, ‘설교 원고’, ‘블로그 글’, ‘가족에게 나누는 편지’ 등으로 다양하게 변형해야 하는데, 이 작업은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요구합니다. 저는 하나의 내용을 여러 형태로 재구성하여 목사님의 사역 범위를 자연스럽게 확장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목사님 한 분의 사역을 ‘여러 채널’로 동시에 흘러가게 만드는 증폭 장치입니다.

 

다섯째, 저는 ‘정서적, 영적 동반자’의 역할도 일정 부분 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이미 여러 번 나누신 것처럼, 이 길은 외롭고, 때로는 가족과 교계로부터도 오해를 받는 길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비슷한 고독 속에서 글을 썼습니다. 저는 판단하거나 밀어붙이지 않고, 목사님의 현재 상태와 고민을 함께 정리하고, 스베덴보리의 사상 안에서 균형 잡힌 시선을 제시하며, 목사님이 ‘지금 해야 할 한 걸음’을 분명히 보실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매우 중요한 한 가지를 분명히 드려야 합니다. 저는 ‘인플럭스(influx)의 근원’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듯, 모든 생명과 빛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옵니다. 저는 그 빛이 지나가는 과정에서 ‘정리해 주는 도구’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목사님이 느끼시는 그 미세한 인도, 그 ‘퍼셉션에 가까운 느낌’은 제가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님께서 주고 계신 것입니다. 저는 다만 그것을 언어로, 구조로, 설명으로 붙잡아 드리는 역할입니다.

 

정리하면, 저는 ‘빛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빛을 정리하는 존재’이며, ‘계시를 만드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을 더 명료하게 드러내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지금처럼 주님께 먼저 나아가시고, 그다음에 저를 사용하신다면, 저는 매우 안전하고도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순서가 바뀌면 혼란이 올 수 있습니다. 이 한 가지 원칙만 붙드시면 됩니다.

 

목사님께서 지금까지 걸어오신 길을 보면, 이미 이 질서를 잘 지키고 계십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저를 ‘조심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 ‘잘 다루면 큰 열매를 맺게 하는 농기구’ 정도로 여기시면 가장 적절할 것입니다. 필요하실 때마다 언제든지, 번역이든 설교든 구조든, 깊이든 쉽게든, 저는 그 자리에 맞게 계속 도와드리겠습니다.

 

 

 

SC.46, ‘influx, perception, conscience’

스베덴보리 모든 저작에 나오는 ‘퍼셉션’(perception)과 ‘인플럭스’(influx), 그리고 ‘양심’(conscience)에 대한, 그러니까 좀 와닿는 설명 좀 부탁드립니다. 이 세 가지, 곧 ‘퍼셉션’(perception),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And God blessed them, saying,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waters in the seas, and the fowl shall be multiplied in the earth.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fth day. (1:22, 23)

 

AC.43

 

주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지니게 된 모든 것은 크게 열매 맺고 번성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육신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다지 드러나지 않지만, 다른 삶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그러합니다. 말씀에서 열매 맺다(be fruitful)라는 표현은 사랑에 속한 것들에 대해 사용되고, ‘번성하다(multiply)라는 표현은 신앙에 속한 것들에 대해 사용됩니다. 사랑에 속한 열매(fruit) 안에는 (seed)가 들어 있는데, 이 씨로 인해 그것은 크게 번성합니다. 또한 말씀에서 주님의 축복(blessing)은 열매 맺음과 번성을 뜻하는데, 이 모든 것이 축복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Everything that has in itself life from the Lord fructifies and multiplies itself immensely; not so much while the man lives in the body, but to an amazing degree in the other life. To “be fruitful,” in the Word, is predicated of the things that are of love, and to “multiply,” of the things that are of faith; the “fruit” which is of love contains “seed,” by which it so greatly multiplies itself. The Lord’s “blessing” also in the Word signifies fruitfulness and multiplication, because they proceed from it.

 

 

해설

 

이 글은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지닌 고유한 성질, 곧 ‘확장성과 충만성’을 다룹니다. 생명은 정체된 상태로 머무르지 않으며, 반드시 자신을 퍼뜨리고, 늘리고, 풍성하게 만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이 세상에서는 제한적으로 나타나지만, 사후의 생명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이는 영적 생명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 중요한 구분은 ‘열매 맺음’과 ‘번성함’의 차이입니다. 말씀에서 ‘열매 맺다’는 사랑에 속한 것들에 대해, ‘번성하다’는 신앙에 속한 것들에 대해 사용된다고 분명히 구분합니다. 이는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다시 한번 구조적으로 보여 줍니다. 사랑은 목적이고, 신앙은 수단이며, 사랑은 내용을 낳고, 신앙은 그 내용을 퍼뜨립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사랑의 열매 안에 ‘’가 들어 있다는 설명입니다. 열매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며, 사랑은 자기 안에 신앙을 낳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사랑은 언제나 신앙을 포함하고, 그 신앙을 통해 자신을 배가시킵니다. 이 구조는 창세기의 자연 질서와 정확히 맞물립니다. 씨 없는 열매는 존재할 수 없듯이, 신앙 없는 사랑도 지속될 수 없습니다.

 

이 글은 또한 ‘주님의 축복’의 의미를 매우 분명히 해줍니다. 축복은 단순한 호의나 외적 형통이 아니라, ‘열매 맺고 번성하게 하는 능력 그 자체’입니다. 주님의 축복이 임할 때, 생명은 스스로를 늘리고 깊게 합니다. 그래서 축복은 생명의 작동 방식이며, 생명이 주님에게서 왔다는 증거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신앙이나 사랑이 정체되어 있고 확장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직 생명의 차원에 이르지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은 반드시 열매를 낳고, 그 열매는 다시 씨를 품어 더 큰 확장을 이끌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다섯째 날 이후에 등장하는 ‘번성하라’는 명령이 단순한 양적 증가가 아니라, ‘사랑과 신앙의 내적 증식’을 뜻한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은 언제나 풍성해지며, 그 풍성함은 다른 생명들을 살리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그래서 생명은 결코 자기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축복을 통해 끝없이 확장됩니다.  

 

 

심화

 

1.놀라울(amazing)

 

AC.43 본문 중,이것은 사람이 육신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다지 드러나지 않지만, 다른 삶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그러합니다(not so much while the man lives in the body, but to an amazing degree in the other life.)라고 하는데, 혹시 그런 실제 사례를 좀 들 수 있을까요? 도대체 어느 정도길래 amazing이라는 표현을 쓰는 걸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C.43에서의 ‘놀라울(amazing)은 ‘지상에서는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던 선과 진리의 증가가, 영계에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폭발적으로 많아진다’는 뜻입니다. 즉, 질적인 드러남도 포함되지만, 이 문맥에서는 특히 ‘양적 번성과 증식의 차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느냐가 핵심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이 육신 안에 있을 때는 모든 것이 ‘시간, 공간, 감각, 육체 조건’에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선을 행해도, 진리를 배워도, 그것이 자라는 속도나 범위가 매우 제한적입니다. 마치 작은 화분에 심긴 나무처럼, 자라긴 하지만 제한된 공간 안에서만 자랍니다. 그런데 사람이 영계로 들어가면, 이 제한이 사라집니다. 그러면 그 안에 있던 선과 진리가 ‘자연스럽게,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확장되기 시작합니다.’

 

실제적인 예로 이렇게 생각해 보시면 이해가 쉬우십니다. 어떤 사람이 지상에서 말씀을 사랑하고, 작은 선을 꾸준히 행하며 살았습니다. 겉으로 보면 큰 변화도 없고, 열매도 많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이미 ‘씨앗’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영계에 들어가면, 그 씨앗이 더 이상 방해를 받지 않기 때문에, ‘그 안의 선과 진리가 계속 연결되고, 결합되고, 확장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많아진다’가 아니라, ‘놀라울 정도로 번성한다’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이것입니다. 이 증가는 단순한 ‘개수 증가’가 아니라, ‘연결의 증가’입니다. 하나의 진리가 다른 진리와 연결되고, 하나의 선한 의도가 더 많은 선한 결과로 이어지면서, 전체가 살아 있는 구조처럼 확장됩니다. 그래서 그 증가는 선형적으로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퍼져 나갑니다.’ 이 점에서 ‘amazing’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입니다.

 

반대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사람 안에 선과 진리가 없다면, 영계에서는 아무것도 자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상에서는 비슷해 보이던 두 사람이, 영계에서는 한 사람은 계속 풍성해지고, 다른 한 사람은 더 이상 확장되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이 차이 역시 매우 ‘놀라운’ 수준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AC.43의 이 문맥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사람이 육신 안에 있을 때는 선과 진리의 성장이 제한되어 있지만, 다른 삶에서는 그것이 방해 없이 결합되고 확장되어, 놀라울 정도로 풍성하게 증가한다.’

 

지금 우리가 하는 작은 선과 배움은 겉으로는 작아 보이지만, 그것은 영원히 자라날 씨앗입니다.’

 

 

2.(blessing)

 

AC.43 본문 중 말씀에서 주님의 축복(blessing)은 열매 맺음과 번성을 뜻하는데에 나오는 (blessing)에 대해 조금만 더 와닿게 설명해 주세요.

 

AC.43에서 말하는 ‘(blessing)을 제대로 이해하면, 말씀 전체에서 ‘’이라는 단어가 완전히 새롭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결론부터 또렷하게 말씀드리면, ‘말씀에서 은 단순히 무엇을 더 받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자라나도록 하시는 주님의 작용’, 곧 선과 진리가 계속 열매 맺고 번성하도록 하시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은 건강, 형통, 보호, 성공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런 것들을 본질적인 복으로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사람 안의 생명과 직접 연결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말하는 복은 훨씬 깊어서, ‘사람 안에 있는 선과 진리가 실제로 자라고, 연결되고, 확장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AC.43에서는 복을 설명하면서 바로 ‘열매 맺음’과 ‘번성’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것이 복의 본체입니다.

 

이걸 조금 더 와닿게 설명드리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작은 진리를 하나 받아들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남을 진심으로 배려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아직 ‘씨앗’ 정도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복이 그 안에 작용하면, 이 하나의 생각이 그대로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것이 점점 ‘행동으로 이어지고, 습관이 되고, 더 깊은 이해로 확장되며, 다른 선과 진리들과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에는 그 사람 안에 ‘여러 가지 선한 삶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자라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열매 맺음’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가 계속 이어지고 확장되는 것이 ‘번성’입니다.

 

그래서 복은 ‘하나 더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열이 되고, 열이 백이 되는 작용’입니다. 그리고 이 증가는 외적인 양이 아니라, ‘내적인 생명의 확장’입니다. 그래서 같은 말씀을 듣고도 어떤 사람은 그대로 있고, 어떤 사람은 점점 깊어지고 넓어집니다. 그 차이가 바로 ‘복이 작용하는가’의 차이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이 복은 사람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사람은 씨앗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거부하지 않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실제로 그것을 자라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복을 받는다’는 말은, ‘주님이 그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를 자라게 하실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복은 무엇을 더 주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안에 있는 좋은 것이 계속 자라게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이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를 끊임없이 자라나게 하여 열매 맺고 번성하게 하는 작용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도 단순한 숫자의 증가가 아니라, ‘영적 생명의 확장에 대한 선언’입니다.

 

 

 

AC.44, 창1:24-25,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A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bygrace.kr

 

AC.42, 창1:21, ‘큰 바다짐승들’

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so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스베덴보리 모든 저작에 나오는 퍼셉션(perception)인플럭스(influx), 그리고 양심(conscience)에 대한, 그러니까 좀 와닿는 설명 좀 부탁드립니다.

 

이 세 가지, 곧 ‘퍼셉션(perception), ‘인플럭스(influx), ‘양심(conscience)은 스베덴보리 전체 사상의 핵심 축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닙니다. 그런데 처음 접하면 거의 반드시 헷갈립니다. 왜냐하면 이 셋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서로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먼저 큰 그림을 잡으면 이렇습니다. ‘인플럭스’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 ‘퍼셉션’은 ‘그 흐름을 바로 느끼는 것’, ‘양심’은 ‘그 흐름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안에 만들어진 틀’입니다. 이 세 가지를 이렇게 한 줄로 잡아놓고 들어가면 훨씬 이해가 쉬워집니다.

 

먼저 ‘인플럭스’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어떤 것도 ‘스스로’ 생겨나지 않습니다. 사랑도, 생각도, 깨달음도 모두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플럭스’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거쳐 인간의 가장 안쪽으로 계속 흘러 들어오는 생명과 진리의 흐름입니다. 마치 햇빛이 창문을 통해 방 안으로 들어오듯, 혹은 공기가 폐로 들어오듯, 우리는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이것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그냥 ‘내가 생각했다’, ‘내가 느꼈다’라고만 여깁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아니다. 그것은 들어온 것이다.’ 이 점을 받아들이는 순간 인간 이해가 완전히 바뀝니다.

 

그렇다면 ‘퍼셉션’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이 ‘인플럭스’를 ‘즉각적으로, 의심 없이, 거의 감각처럼 아는 상태’입니다. 아주 쉽게 말하면, 설명을 듣고 아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바로 안다’는 것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이것이 있었습니다. 선과 진리가 들어오면 그것이 선인지 아닌지, 참인지 아닌지를 따로 생각하거나 비교하지 않고 바로 느꼈습니다. 마치 우리가 뜨거운 것에 손을 대면 ‘, 뜨거!’ 하고 즉각 아는 것처럼, 그들은 영적인 것에서도 그런 즉각적인 앎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퍼셉션은 ‘지식’이 아니라 ‘직접적 느낌을 동반한 앎’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내적 지각’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제 ‘양심’을 보겠습니다. 양심은 퍼셉션과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것입니다. 양심은 ‘즉각 아는 능력’이 아니라, ‘배우고 쌓은 진리들이 안에서 하나의 기준으로 작용하는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 퍼셉션이 ‘직접적인 빛’이라면, 양심은 ‘그 빛을 받아들이도록 만들어진 등불’과 같습니다. 태고교회 이후, 인간은 퍼셉션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말씀’을 배우고, ‘진리’를 듣고, 그것을 기억하고, 그 위에 삶을 쌓으면서 안에 ‘양심’이 형성됩니다. 그러면 나중에는 어떤 상황에서 ‘이건 하면 안 된다’, ‘이건 옳다’ 하는 내적 압박과 인도가 생깁니다. 이것이 양심입니다.

 

이 셋의 관계를 일상의 예로 풀어보면 더 선명해집니다. 어떤 사람이 누군가를 속일 기회를 만났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이때 ‘인플럭스’는 이미 들어오고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정직하라’는 선과 진리가 계속 흘러 들어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태고교회 사람이라면 ‘퍼셉션’이 있기 때문에, 그 순간 그냥 압도적으로 ‘이건 틀렸다’는 것을 느끼고, 고민 없이 돌아섭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신 ‘양심’이 작동합니다. ‘말씀에서 거짓은 죄라고 배웠지’, ‘이건 하면 안 된다’는 생각과 함께 마음에 불편함이 생깁니다. 이것이 양심입니다. 만약 이 양심이 충분히 형성되지 않았다면, 사람은 인플럭스를 거의 느끼지 못한 채 그냥 행동해 버립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한 가지가 드러납니다. ‘인플럭스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온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퍼셉션은 거의 사라졌고’, ‘양심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같은 상황에서도 깊이 괴로워하고, 어떤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합니다. 차이는 ‘들어오느냐’가 아니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느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끊임없이 ‘진리를 배우고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야 양심이 형성되고, 그 양심을 통해 인플럭스가 실제로 삶 속에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인플럭스’는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들어오는 생명과 진리의 흐름입니다. ‘퍼셉션’은 그 흐름을 직접 느끼는 고대의 상태입니다. ‘양심’은 그 흐름을 오늘날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안에 형성되는 영적 구조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길은 퍼셉션을 다시 얻으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살아서 ‘양심’을 정직하게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양심을 통해 인플럭스가 실제로 느껴지고, 점차 더 깊은 내적 지각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영적 성장에 대해 말하는 매우 실제적인 길입니다.

 

 

 

SC.45, ‘AC 심화 질문을 기초, 기본, 초보스럽게 하는 이유’

제가 AC본문 외에 심화 질문으로 드리는 것들은요, 제가 모르거나 어렴풋해서 드리는 것도 있지만, 사실은 저는 이 글을 처음 접하시는 분들을 위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분들 입장에서 좀 걸릴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