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4:22)

 

AC.423

 

두발가인을 일컬어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모든 장인의 스승, 트레이너)라 합니다. 야발과 유발의 경우처럼 ‘조상’(father, 아버지)이 아니고 말입니다. 그 이유는, 이들 야발과 유발 전에는 천적이고 영적인, 즉 내적인 것들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다시 말해, 이런 것들은 이들 야발과 유발의 때부터 나타났기 때문에 이들을 가리켜 ‘조상’이라 한 것입니다. 자연적인, 즉 외적인 것들은 두발가인 전에도 있었는데요, 그래서 두발가인한테는 ‘조상’이라 하지 않고,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 즉 이들을 훈련시킨 트레이너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이들 외적인 것들이 이제는 내적인 것들과 연결된 상태이지만 말입니다. Tubal-Cain is called the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and not the “father,” as was the case with Jabal and Jubal; and the reason is that before there were no celestial and spiritual or internal things. And the term “father” is applied to Jabal and Jubal, to denote that such internal things then first began to exist; whereas natural or external things did exist before, but were now applied to internal things, so that Tubal-Cain is not called the “father,” but the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해설

 

AC.423에서 스베덴보리는 ‘두발가인(Tubal-Cain)이 왜 ‘조상(father, 아버지)이 아니라 ‘교사(instructor)로 불리는지를 통해, 새 교회가 형성되는 질서의 방향을 매우 정밀하게 설명합니다. 이는 단순한 명칭 차이가 아니라, 교회 내적 구조가 어떻게 처음 생겨나고, 그다음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보여 주는 핵심 단서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야발과 유발이 ‘조상’으로 불린 이유를 상기시킵니다. 야발(천적 차원)과 유발(영적 차원)은,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내적 차원—곧 사랑의 거룩함과 신앙의 영적 질서—이 처음으로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시점을 대표합니다. 그러므로 이 둘에게는 ‘조상’이라는 칭호가 적합합니다. ‘조상’은 시간상의 최초가 아니라, 존재 양식의 최초, 곧 이전에는 없던 것을 처음 낳은 근원적 시작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두발가인이 대표하는 자연적 차원은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닙니다. 자연적 선과 진리—도덕, 기술, 질서, 사회적 유익—은 이전에도 이미 존재했습니다. 가인의 계보 전체만 보아도, 도시는 세워졌고, 기술은 발달했으며, 사회 질서는 나름대로 유지되었습니다. 문제는 자연적 차원이 없었다는 데 있지 않고, 그것이 내적 차원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굴러가고 있었다는 점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연적 차원은 ‘새로 태어날’ 필요가 없었고, 대신 새롭게 사용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두발가인은 ‘조상’, 곧 ‘아버지’가 아니라 ‘교사’로 불립니다. ‘교사’란, 무(無)에서 생명을 낳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을 바른 목적과 질서로 이끄는 역할을 뜻합니다. 두발가인은 자연적 선과 진리를 새로 창조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것들을 천적 사랑과 영적 신앙에 봉사하도록 가르치고 단련합니다. 놋과 철을 다루는 장인의 교사라는 표현은, 자연적 차원이 내적 차원의 도구로 재정렬되었음을 상응적으로 보여 줍니다.

 

이 구분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원리를 드러냅니다. 교회의 회복은 결코 외적 삶을 부정하거나 파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은 자연적 삶—기술, 문화, 도덕, 제도—을 없애지 않으시고, 그 용도를 바꾸십니다. 이전에는 자기 목적과 자기 영광을 위해 사용되던 자연적 능력들이, 이제는 사랑과 신앙을 표현하고 구현하는 수단으로 재교육됩니다. 두발가인이 ‘교사’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순서입니다. AC.423은 교회의 참된 질서가 내적 → 외적임을 분명히 합니다. 먼저 천적인 사랑과 영적인 신앙이 살아나야 하고(야발, 유발), 그 다음에 자연적 차원이 그 내적 질서에 맞추어 훈련되고 지도되어야 합니다(두발가인). 만일 이 순서가 뒤바뀌면, 자연적 차원은 다시 독자적으로 굴러가며, 가인의 길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결국 AC.423은 새 교회가 어떻게 전인적 구조를 갖추는지를 명확히 보여 줍니다.

 

먼저 내적 차원은 아버지로서 새로 태어나고, 그다음 자연적 차원은 교사에 의해 그 방향을 바로잡습니다.

 

이로써 스베덴보리는, 참된 교회란 자연적 삶을 무시하는 영적 도피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자연적 삶 전체를 내적 사랑과 신앙에 복종시키는 질서임을 분명히 합니다. 두발가인이 ‘아버지’가 아니라 ‘교사’라는 사실 하나에, 교회 회복의 깊은 섭리적 구조가 응축되어 있습니다.

 

 

 

AC.424, 창4:22, 'artificer'의 속뜻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4 말씀에 나오는 ‘기능공, 공장(工匠), 장색(匠色), 장인(匠人), 숙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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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2, 창4:22, '아다와 씰라, 라헬과 레아, 유대 교회의 속과 겉'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2 이 새 교회가 어땠는지는 유대 교회를 보면 알 수 있는데요, 유대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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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4:22)

 

AC.422

 

이 새 교회가 어땠는지는 유대 교회를 보면 알 수 있는데요, 유대 교회는 속(internal)과 겉(external), 그러니까 내적인 면과 외적인 면이 함께 있었습니다. 천적, 영적인 것들로 구성된 내적 교회와 자연적인 것들로 구성된 외적 교회 말입니다. 내적 교회는 라헬로, 외적 교회는 레아로 표현되었지요. 그러나 야곱으로, 즉 말씀에서 ‘야곱’(Jacob)의 후손으로 이해되는 그들은 외적인 것만을 원하는, 그러니까 예배에서도 겉만 원하는 사람들이어서, 그래서 라헬에 앞서 레아가 주어진 것이고, 그래서 눈이 침침한 레아로는 유대 교회를, 라헬로는 이방인들의 새 교회를 표현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야곱’은 선지서에서 두 가지 의미를 가지는데요, 하나는 왜곡된, 비뚤어진 상태 가운데 있는 유대 교회를, 다른 하나는 이방인들의 참된 외적 교회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야곱이 내적 교회와 상응할 때는 특별히 ‘이스라엘’(Israel)이라 합니다만, 이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 나중에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How the case was with this new church may be seen from the Jewish church, which was both internal and external; the internal church consisting of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and the external church of natural things. The internal church was represented by Rachel, and the external by Leah. But as Jacob, or rather his posterity understood by “Jacob” in the Word, were such as to desire only external things, or worship in externals, therefore Leah was given to Jacob before Rachel; and by blear-eyed Leah was represented the Jewish church, and by Rachel a new church of the gentiles. For this reason “Jacob” is taken in both senses in the prophets, in one denoting the Jewish church in its perverted state, and in the other the true external church of the gentiles. When the internal church is signified, he is called “Israel”; but of these matters, by the Divine mercy of the Lord, more will be said hereafter.

 

해설

 

AC.422에서 스베덴보리는 새 교회의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유대 교회(Jewish church)의 예를 들어, 내적 교회와 외적 교회의 관계를 분명히 합니다. 그는 유대 교회가 겉으로는 하나의 교회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내적 차원(천적, 영적)과 외적 차원(자연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말합니다. 내적 교회는 사랑과 신앙의 내면적 실재로 이루어지고, 외적 교회는 의식, 규례, 행위와 같은 자연적 형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둘이 결합될 때 교회는 온전해지지만, 겉만 남고 속이 사라질 때, 교회는 형식만 유지하는 상태로 기울게 됩니다.

 

이 내적–외적 구조는 ‘라헬(Rachel)과 ‘레아(Leah)의 표상으로 설명됩니다. 라헬은 내적 교회, 곧 천적, 영적 실재를 대표하고, 레아는 외적 교회, 곧 자연적 예배와 삶의 형식을 대표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레아가 먼저 야곱에게 주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라, 당시 교회의 영적 상태를 드러내는 섭리적 배열입니다. 곧 사람들은 내적 실재보다 외적 형식과 보이는 예배를 더 원했고, 그 결과 외적 교회가 먼저 서게 된 것이지요.

 

스베덴보리는 레아를 ‘시력이 약한(blear-eyed, 29:17) 인물로 묘사한 점에 주목합니다. 이는 단순한 외모 묘사가 아니라, 진리를 보는 영적 시야가 흐릿한 상태를 표상합니다. 이렇게 레아로 표상된 유대 교회는 외적 예배와 규례에는 열심이었으나, 그 안에 담긴 사랑과 신앙의 내적 의미는 보지 못했습니다. 반면 라헬은 새 교회, 곧 이방인 가운데 세워질 교회를 표상하는데, 이는 외적 형식이 아닌 내적 실재를 중심으로 세워질 교회를 가리킵니다.

 

이 대조는 ‘야곱(Jacob)이라는 인물의 이중적 의미에서도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예언서에서 ‘야곱’이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는 왜곡된 상태의 유대 교회, 곧 외적 예배만을 추구한 교회를 뜻하고, 다른 하나는 참된 외적 교회, 곧 이방인 가운데 세워진 교회를 뜻합니다. 같은 이름이 서로 다른 교회를 가리키는 것은, 외적 형식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외적 형식이 내적 실재와 결합되어 있는가가 관건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스베덴보리는 내적 교회가 강조될 때 야곱은 ‘이스라엘(Israel)로 불린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진리와 선이 내적으로 결합된 상태, 곧 내적 교회가 살아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따라서 같은 인물, 같은 공동체라도 내적 실재가 있을 때는 ‘이스라엘’로, 외적 형식만 남았을 때는 ‘야곱’으로 불립니다. 이는 성경의 명칭 사용이 얼마나 정밀한 상응의 질서 위에 놓여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결국 AC.422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새 교회는 유대 교회의 외적 형식을 단순히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외적 형식에 내적 실재를 다시 결합시키는 교회입니다. 라헬과 레아는 서로 대립하는 두 교회가 아니라, 한 교회의 두 차원이며, 문제는 순서와 중심입니다. 외적이 먼저 서더라도, 그것이 내적을 향해 열려 있을 때 교회는 살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통해, 참된 교회는 언제나 내적 사랑과 신앙을 중심에 두고, 외적 삶과 예배를 그 열매로 삼는 질서 안에 있어야 함을 분명히 가르칩니다.

 

 

 

AC.423, 창4:22, '두발가인이 father가 아닌, instructor인 이유'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3 두발가인을 일컬어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instructor of ev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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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1, 창4:22,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AC.421-426)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And Zillah, she also bare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and the sister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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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And Zillah, she also bare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and the sister of Tubal-Cain was Naamah. (4:22)

 

AC.421

 

‘씰라’(Zillah)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새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the mother of the natural things of the new church)와, ‘두발가인,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는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the doctrine of natural good and truth)와 상응합니다. 여기서 ‘구리’(brass)는 자연적 선을, ‘쇠’(iron)는 자연적 진리를 가리킵니다. ‘나아마, 두발가인의 누이’(Naamah, the sister of Tubal-Cain)는 유사한 교회, 즉 그 교회 밖에 있는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a similar church, or the doctrine of natural good and truth outside of that church)와 상응합니다. By “Zillah” is signified, as previously stated, the mother of the natural things of the new church; by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the doctrine of natural good and truth, “brass” denoting natural good, and “iron” natural truth. By “Naamah, the sister of Tubal-Cain” is signified a similar church, or the doctrine of natural good and truth outside of that church.

 

해설

 

AC.421에서 스베덴보리는 ‘씰라(Zillah)를 새 교회에서 자연적 차원의 어머니로 규정합니다. 앞서 아다가 천적인 것(사랑의 거룩함)과 그로부터 나온 선을 낳는 어머니였다면, 씰라는 그 사랑과 신앙이 자연계의 삶과 행위 속으로 내려와 구체화되는 차원을 낳는 어머니입니다. 이는 새 교회가 내적 차원(천적, 영적)에만 머무르지 않고, 일상의 판단, 행위, 도덕, 질서로까지 확장됨을 뜻합니다. 교회는 마음과 생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자연적 삶 속에서 구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씰라가 낳은 ‘두발가인(Tubal-Cain)은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로 묘사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장인과 기술을 물질문명의 진보로 보지 않고,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의 형성으로 해석합니다. ‘구리(brass, )는 성경 전반에서 자연적 선을, ‘(iron, )는 자연적 진리를 표상합니다. 자연적 선이란 외적 삶에서 실천되는 선한 행위와 유익함이며, 자연적 진리란 그 행위를 올바르게 인도하는 도덕적, 합리적 진리입니다. 두발가인이 ‘스승(instructor)으로 불린 것은, 이러한 선과 진리가 무질서한 관습이 아니라 가르쳐지고 전수되는 교리의 형태로 정착되었음을 뜻합니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구분이 나타납니다. 자연적 선과 진리는 천적, 영적 선과 진리의 단순한 복제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더 거칠고, 더 외적이며, 감각과 경험에 가까운 형태를 띱니다. 그러나 새 교회에서는 이 자연적 차원조차도 천적 사랑과 영적 신앙에서 내려온 질서 안에 놓입니다. 두발가인이 놋과 철을 다룬다는 표현은, 인간의 외적 삶이 선과 진리라는 재료로 형성되고 단련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즉, 자연적 삶 역시 교회의 일부로 회복됩니다.

 

또한 두발가인의 누이로 소개되는 ‘나아마(Naamah)는, 그 교회 밖에 있는 유사한 교회, 혹은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표상합니다. ‘누이(sister)라는 표현은 동일한 본질을 지니되, 직접적인 계보 안에는 속하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는 새 교회 밖에서도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가르침이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대목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교회가 아닌 곳에도 도덕, 정직, 질서, 유익함에 관한 참된 가르침이 있을 수 있으며, 그것들 역시 자연적 차원에서는 진리와 선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유사성’과 ‘동일성’을 엄격히 구분합니다. 나아마로 표상된 교리는 새 교회와 유사하지만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교리는 천적 사랑과 영적 신앙으로부터 직접 흘러내린 것이 아니라, 자연적 이성과 경험의 차원에 머무를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이’로 불린 것은, 그러한 교리들 역시 주님의 섭리 안에서 교회와 접촉하고 연결될 수 있는 여지를 지니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결국 AC.421은 새 교회의 구조가 천적(아다)–영적(야발, 유발)–자연적(씰라, 두발가인)으로 온전히 갖추어졌음을 보여 줍니다. 교회는 사랑과 신앙의 내적 차원에서 시작되어, 자연적 삶의 선과 진리로 완성됩니다. 그리고 이 자연적 차원은 교회 안에서뿐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으나, 참된 생명은 언제나 위로부터 내려오는 질서 안에서만 온전히 유지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통해, 새 교회가 결코 관념적이거나 내면에만 머무는 종교가 아니라, 삶 전체를 형성하는 전인적 질서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AC.422, 창4:22, '아다와 씰라, 라헬과 레아, 유대 교회의 속과 겉'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2 이 새 교회가 어땠는지는 유대 교회를 보면 알 수 있는데요, 유대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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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0, 창4:21, '말씀에 나오는 다양한 악기들이 가지는 상응'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4:21) AC.420 말씀에는 다양한 악기들이 나오는데요, 저마다 나름의 상응을 가지지요. 이 저마다의 상응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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