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세례) 요한의 메시지

 

 

7요한이 세례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9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10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11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12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3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14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눅3:7-14)

 

물로 씻는 것과 세례는 그 자체로 유대인들에게서 악과 거짓을 제거하는 것은 아니었고, 다만 그러한 것을 표상하고 뜻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천국에서 마치 정결한 것처럼 받아들여졌다. 그러므로 유대 교회 사람들이 요한의 세례를 통해 천국과 결합했을 때, 천국의 하나님이신 주님은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을 가르치고 그들 가운데 거하셨다. (AE.724:8, 이순철 역)

 

※ 이 AE(Apocalypse Explained) 724:8번 글에 대한 Ager 영역본은 아래와 같고,

 

The washing and baptizing itself did not indeed purify them from falsities and evils, but only represented and thence signified purification from them; nevertheless, this was received in heaven as if they were themselves purified. It was thus that heaven was conjoined to the people of that church by means of the baptism of John; and when heaven was thus conjoined to them, the Lord, who was the God of heaven, could manifest Himself to them there, teach them, and abide among them... (AE.724:8, Ager 역)

 

이는 계시록 12장 5절의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남자라’에 대한 주석 일부입니다.

 

 

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요단강 근처에서 요한이 회개의 세례, 침례를 가르칠 때, 많은 사람이 침례를 받기 위해 요한에게로 왔습니다.

 

※ 신약 성서 원어인 헬라어 원전에 의하면 ‘침례’(浸禮, baptism, 헬, βἀπτισμα)가 맞습니다. 그럼에도 한글 성경에 ‘세례’(洗禮)가 된 것은, 광복 전 남한에서 성경 한글화 작업으로 각 교단이 모였을 때, 침례교만 빠졌기 때문인데, 침례교만 빠진 건 침례교 대표가 연락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며, 이는 당시 대부분의 교단은 효과적 선교를 위해 큰 도시 위주로 움직인 반면, 침례교만 유독 내륙 오지 선교에 힘썼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그래서인지 일본은 그냥 원어를 그대로 표기합니다.

 

요한에게 침례를 받는다는 것은, 한마디로 교회의 낡은 교리를 버리고,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 진리를 바탕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한’은 새로운 말씀을 의미하고, ‘침례’는 말씀을 통해 거듭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의식의 개혁이며, 동시에 신앙의 전향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 교회 사람들 대부분은 그렇게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이는 새로운 진리가 신선해서, 또 어떤 이는 요한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몰려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는 바리새인들 같은 위선자도 있었고, 진리에 대해 무지하지만 순종할 줄 아는 단순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7절입니다.

 

7요한이 침례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요한이 ‘독사의 자식’이라고 말합니다. ‘천국의 비밀’ 4533번에는 천국에서는 사기꾼들이나 위선자들이 천사들 앞에 나타날 때 독사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 AC(Arcana Coelestia, 천국의 비밀) 4533번 글에 대한 Clowes 영역본은 아래와 같습니다. 참고하시라고 내용을 조금 더 추가했습니다.

 

But when the same are looked at by the angels of heaven, that luminosity is instantly dissipated, and they appear with totally different faces, each according to his genius. Some are dusky and black like devils; some have ghastly faces like that of a corpse; some have almost no face at all, and instead of a face there is a mass of hair; some are like grates of teeth; some like skeletons; and what was still more strange, some are like monsters, the deceitful are like serpents, and the most deceitful are like vipers, while others appear differently. (AC.4533, Clowes 역)

 

이는 창세기 34장 주석 클로징 글인 큰 사람의 눈과 빛에 관한 상응 관련 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여기 ‘큰 사람’이라는 표현은 천국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천국 전체가 한 사람 모습이라는 데서 나온 말입니다. 영어로는 ‘The Grand Man’이라고 합니다. //

 

그러니까 요한이 무리에게 ‘독사의 자식’이라고 한 것은 무리 전체를 향해 말한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위선자들(the most deceitful)에게 한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이 다시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노하시거나 사람을 저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사랑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서 ‘진노’란 주님이 노하시는 것이 아니라 위선자들의 내면에 있는 분노와 증오심을 말합니다. 위선자와 거짓말쟁이는 마치 진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자신을 위장하지만, 속으로는 진리를 혐오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후에 육신의 옷을 벗게 되면 진리에 대한 혐오감과 적개심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피할 수 없다는 진노는 주님의 진노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그들 자신의 분노이며 적개심입니다. 그것이 자기의 발목을 잡아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도록 만든다는 그런 뜻입니다.

 

8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여기서는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이 두 번 나오는데, 앞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뒤에 나오는 아브라함은 의미가 다릅니다. 먼저 앞의 ‘아브라함’은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표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랑하는 것은 자기들만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는 그들의 오만함을 나타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자기들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상한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과 세상만 믿는 사람들이었지요. 그래서 그들은 사실은 우상 숭배자들이었습니다. 요한이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다’ 한 것은 그래서입니다. 즉 뒤에 나오는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기 전 우상을 믿었던 아브라함, 즉 아브람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든다는 돌들은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돌들’은 감각의 진리를 뜻합니다.

 

감각의 진리란 어떤 것입니까? 눈이나 코, 입, 손과 발 같은 감각으로 이해하는 진리가 감각 진리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감각은 진리를 이해하는 수단으로는 믿을 만한 것이 못됩니다. 예를 한번 들어 보겠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 태양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집니다. 그런데 진실은 어떻습니까? 태양은 그대로 있고 지구가 도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그러므로 감각을 통해 얻는 정보가 모두 진리는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감각의 진리를 믿을까요? 주님보다 자신을 더 믿고, 주님이 주시는 내적 기쁨보다 감각이 주는 쾌감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사29:13)라고 한탄하셨고, 요한 역시 그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말한 것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은, 그동안의 위선과 악행을 버리고, 진리에 따라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9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말씀에서는 사람을 나무로 비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는 이유는 ‘나무’는 사람의 지성, 즉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understanding)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을 가진 존재는 자연계에서 사람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에서는 사람을 종종 나무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나무의 뿌리에 도끼가 놓였다고 합니다. ‘도끼’는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진리를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는 위선자들이 주장하는 진리의 뿌리에 그들의 자아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주장하는 진리는 모두 거짓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없으니 당연히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그들을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라 하고,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무마다 찍혀’는 주님을 믿지 않고 자신의 지성을 믿는 사람들이 결국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을 모두 잃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불에 던져지리라’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설명할 것도 없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지옥을 불로 표현하는 이유는 그곳이 유황불이 펄펄 끓는 곳이라서가 아닙니다. 그곳 사람들에게서 발산되는 탐욕의 불길이 그렇게 뜨겁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가끔 순수하지 않은 어떤 것을 간절히 바랄 때가 있고, 그때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지옥의 사람들에게서는 그런 욕망의 열기가 한도 끝도 없이 발산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말씀에서는 유황불로 표현합니다.

 

※ 다음은 이 ‘지옥불’(infernal fire) 관련, ‘천국과 지옥’ 59장, ‘무엇이 지옥 불이고 이를 가는 것인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참고하세요.

 

‘지옥의 불’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온 악을 행하려는 욕망을 의미하고, 이전 장에서 밝힌 것처럼, 지옥에 있는 모든 사람의 욕망이 그러하므로 지옥이 열리면, 큰 화재가 났을 때와 같은 연기와 불이 거기 보인다. 자기 사랑이 우세한 지옥에서는 탁한 불이, 세상 사랑이 우세한 지옥에서는 불꽃을 내는 불이 보인다. 그러나 지옥이 닫히면, 이 불의 형상은 보이지 않고, 그 대신 연기가 응집한 것 같은 어두움이 보인다. 그래도 그 불은 여전히 안에서 이글거리고 있는 것을 거기서 뿜어나오는 열기로 알아볼 수 있다. 그것은 마치 화재 뒤의 폐허에서 나는 열기 같고, 또 다른 곳에서는 가열된 용광로에서 나는 열기 같고, 어떤 곳에서는 뜨거운 목욕탕에서 나는 열기와 같다. 이 열이 사람에게 들어가면 그의 욕망을 자극하고, 악한 사람 안에서는 미움과 복수심을, 병약자에게는 광기를 일으킨다.

 

이것이 위에 말한 사랑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불이고, 열이다. 그들은 몸 안에 있을 때도 영이 그런 지옥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지옥에 있는 사람들이 불 속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불은 하나의 외관이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조금도 자기가 탄다는 느낌이 없고, 단지 세상에서와 같은 체온을 느낄 뿐이다. 이런 외관상의 불은 상응에 의한 것이다. 사랑은 불에 상응한다. 그리고 영계에 나타나는 모든 것은 상응에 따라서 나타나는 것이다. (HH.571) //

 

10절입니다.

 

10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요한에게 묻는 사람들은 적어도 말씀을 통해 삶의 지침을 얻으려고 하는 신앙인들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말한 ‘독사의 자식’이라 불리는 위선자들과는 다른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저들 독사의 자식들과는 달리 비록 진리에 대해서는 무지하지만, 그래도 진리에 순종하려 하는 사람들입니다.

 

11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이 말씀은 말 그대로 자기 소유를 이웃과 함께 나누라는 것이지만, 그러나 속뜻으로는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 ‘’은 진리를 말합니다. 왜 옷이 진리를 의미하느냐 하면, 진리는 선의 드러남, 즉 선의 겉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선은 자체로는 보이지 않고 진리를 통해서만 드러납니다. 그래서 진리를 옷으로 비유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먹을 것’은 선을 의미합니다. 영적인 양식은 곧 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옷 두 벌 있는’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 신앙인들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와 자아에서 나오는 진리를 함께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주시는 진실한 것과 자아에서 오는 거짓된 것이 함께 섞여 있는 것이지요. 그것이 ‘옷 두 벌 있는 자’라는 상태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신앙인들의 상태가 이렇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마음과 인간의 마음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중에서 인간의 것을 버리라 하십니다. 왜 그러실까요? 인간의 것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10장에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거기에 보면 전도를 위해 길을 떠나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 역시 인간의 생각을 버리고, 오직 주님이 주시는 말씀만을 전하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생각은 능력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이 주시는 진리라야 능력이 있습니다. 그 안에 선한 것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두 벌 옷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지팡이’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러 온 사람들 중에 세리가 있었습니다. 세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세금을 징수하는 사람들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세리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좋지는 않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세리를 거의 매춘을 하는 사람 정도로 멸시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요한에게 물었습니다. 12절, 13절 말씀입니다.

 

12세리들도 침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3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성(聖) 문서에서는 ‘세리’가 무슨 뜻인지를 정확하게 밝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돈을 거두어들이는 일이고, 그러므로 진리와 선의 지식을 습득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은 진리와 선에 대한 지식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리와 요한의 문답은 진리를 배우는 사람들의 마음가짐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면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진리를 배울 때, 주님께서 열어주시는 대로 받고, 그 이상의 것을 욕심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각자의 영적 능력만큼 진리도 주시고, 선도 주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사람이 자기의 영적 역량보다 더 많은 진리를 받을 때, 그것을 더럽히거나 남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선을 남용한다는 것은, 진리를 주님과 이웃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스스로 높아지려 하거나, 또는 물질적 이득을 보기 위해 진리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거룩한 것을 남용하고 더럽히는 것은 차라리 모르는 것만 못 합니다. 그래서 두려운 일이지요. 그럼에도 우리는 진리를 욕심낼 때가 간혹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자기 마음대로 진리를 추론, 그렇게 해서 왜곡합니다. 주님은 ‘그러지 말라’ 하십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세리들에게 하는 말은 진리를 배우는 사람의 자세에 대한 권고입니다. 그런데 무리 중에는 세리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군인들도 있었습니다. 14절입니다.

 

14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여기서 군인은 누구입니까? 군인은 영적인 군인을 말합니다. 영적인 ‘군인’은 진리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내면에서 올라오는 불순한 욕망과 싸우고, 진리에 따르지 않고 엉뚱한 길로 가고자 하는 유혹과 싸우는 사람이 주님의 군사입니다. 따라서 세리와 군인은 신앙인들의 삶의 두 가지 측면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자는 진리의 지식을 배우는 측면이고, 후자는 배운 것을 실천하는 측면입니다. 그러므로 세리와 군인은 모두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교회 안의 사람들이 주님을 대적하는 지옥의 군대로 변합니다. 그것은 유대 교회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는데요, 그들은 진리이신 주님을 죽였습니다. 그것이 지옥의 군대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요한이 그들에게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라고 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는 한글 성경 번역이구요, 영어 성경에는 ‘사람을 폭행하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폭행하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여기서 ‘사람’은 진리를 나타냅니다. 말씀에서 사람은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지만 여기서는 진리를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폭행하지 말라’는 것은 진리를 모독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를 더럽히지 말라는 것이지요. 어떻게 하는 것이 진리를 더럽히는 것일까요? 진리에 대해 명확한 인식을 가진 사람이 진리에 위배 되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진리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또 진리를 자기 마음대로 추론하고 왜곡하는 것 또한 진리를 더럽히는 일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군대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유대 교회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면서 열심히 실천하다 보면 주님께서 깨달음을 주시는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생각으로 말씀을 마음대로 추론하여 이른바 장로의 전통이라고 하는 인간의 계율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제자들이 이 장로의 전통을 지키지 않는다고 흠을 잡았습니다. 예를 들면, 식사를 할 때, 손을 씻지 않는다 타박을 하고, 안식일에 곡식 이삭을 먹었다 흠을 잡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막7:8)며 나무라셨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들이 모두 진리를 모독하는 것이며, ‘사람을 폭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거짓 진리를 가지고 참된 진리를 비방하는 것입니다. 아까 바리새인들이 장로의 전통을 어겼다며 주님의 제자들과 주님을 비난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거짓 진리를 가지고 참된 진리를 비방하는 행동들입니다. 유대 교회 사람들이 그렇게 진리를 비방하고 욕보이는 것을 말씀에서는 그들이 주님을 때리고, 침을 뱉고, 주님을 십자가에 매다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주님 당시에만 있었던 일들이 아닙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벌어지고 있는 일들입니다. 새 교회의 진리를 흠집 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표상하는 요한은 군인들에게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라고 합니다. 주님 편에 서야 할 사람들이 지옥의 편에 서서 진리를 비방하고 욕보여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요한은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말했습니다. 주님의 군사들이 받는 급료란 어떤 것입니까? 우리가 주님의 군사로서의 소임을 충실히 할 때, 주님은 급료를 주세요. 그 ‘급료’란 진리와 선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모두 진리와 선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진실로 진리와 선을 사랑합니까? 진리를 머릿속에 저장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일상의 삶 가운데로 끌어내어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진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주셔야 합니다. 아직 진리에 대한 애정은 충분치 않지만, 주님의 군사로서 진리를 위해 싸울 때, 주님께서는 급료를 주세요. 주님의 군대에 합당한 급료를 주십니다. 그 급료가 바로 진리와 선에 대한 애정입니다. 세속의 사람들은 물질을 원하고 명예를 원하지만, 우리와 같이 천국을 소망하는 사람들은 진리와 선에 대한 애정을 원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에게 더없이 소중한 급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십니다. 족하라, 즉 만족하라는 말씀은 어떤 뜻일까요? 그것을 기뻐하고 다른 세속의 것들을 바라지 말라는 뜻입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에서 필요한 것들도 부족하지 않게 주십니다. 다만 세상의 것들을 목적으로 삼지는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러 온 것처럼, 오늘날에도 새 교회 진리를 혼자 배우거나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스스로 진리를 안다 자부하면서도 진리를 따라 살지는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경건하지만, 내적으로 보면 위선자들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하시고, 또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 있다 경고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상태에 머무르는 이유는, 그들이 주님보다 자기의 지성을 더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진리에 대해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아는 만큼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도 ‘두 벌 옷을 갖지 말라’ 주의를 주십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생각이나 애정을 버리고, 주님이 주시는 지혜와 사랑만 가지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자아의 말을 들을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기적인 욕심에 휘둘리게 되고,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서 멀어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는 어느 만큼은 위선자들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위선을 벗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참된 기독교 784항에서는 ‘거짓이 있는 곳에 참된 것이 들어설 수 없다. 그러므로 먼저 거짓의 뿌리가 뽑혀야 한다. 이러한 변화가 목회자로부터 시작해 평신도들에 이르기까지 일어나야 한다’ (이순철 역)고 합니다.

 

※ TCR(True Christian Religion, 참된 기독교) 784번 글에 대한 영역은 아래와 같습니다.

 

For where falsities have already been implanted what is new cannot enter until the falsities have been rooted out, and this will take place with the clergy, and so with the laity; (TCR.784, Ager 역)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교회의 낡은 가르침, 교회의 낡은 습관들이 있다면 그것을 비워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진리가 온전하게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가복음 2장 22절에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전에 가졌던 낡은 습관들을 매일 같이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그 자리에 새 교회가 세워집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새 교회 모든 가족과, 또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형제, 자매들에게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여호와께서 땅끝까지 선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이르렀느니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하셨느니라 (사62:11)

 

아멘

 

원본

2017-03-26(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17(D6)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17. 2023-03-17(D6)-매일예배(2434, 눅3,7-14), '침례(세례) 요한의 메시지'.pdf
0.52MB

 

Posted by bygracetistory
,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세례)

 

 

1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2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3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4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5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6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눅3:1-6)

 

 

주님은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지만 죄를 제거하는 것은 오직 신적 섭리에 따라 하신다. 그러므로 죄가 사해질 때 제거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이다. 회개를 통해 죄를 제거하지 않고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으로 죄가 사해진다고 믿거나,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고 믿는 사람들, 그리고 교황의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믿는 사람들은 모두 이 같은 오류에 빠진 사람들이다. 이들은 모두 직접적인 자비와 즉각적인 구원을 믿는다. 그러나 진리는 그 반대이다. 즉 죄는 제거될 때 사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 사함에 앞서 회개가 있어야 하며, 회개가 없으면 죄 사함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죄 사함을 위한 회개를 가르치도록 다음과 같이 명령하셨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눅24:47-48) (DP.280, 이순철 역)

 

※ 이 DP(Divine Providence) 280번 글에 대한 Wunsch 영역본은 아래와 같습니다.

 

It is also an error of the age to suppose that when sins are remitted they are taken away. This is the error of those who believe that their sins are pardoned by the sacrament of the Holy Supper although they have not removed them from themselves by repentance. Those also commit this error who believe that they are saved by faith alone; those also who believe that they are saved by papal dispensations. All these believe in unmediated mercy and instant salvation. But when the statement is reversed it becomes truth, that is, when sins are removed they are also remitted. For repentance precedes pardon, and aside from repentance there is no pardon. Therefore the Lord bade his disciples: That they should preach repentance for the remission of sins (Luke 24:47-48),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여러 가지로 마음이 아픕니다.

 

※ 이 설교는 지난 2017년 3월 12일 주일 설교입니다. 참고로, 그 이틀 전인 3월 10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일어났습니다.

 

모두가 자신만 옳고, 상대는 잘못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리고 서로를 지독하게 미워합니다. 사회가 둘로 갈라져서 타협의 여지가 전혀 없어 보입니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질까요? 한마디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는 진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진리는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587번 글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악은 자연적인 사람의 의지 안에 깊이 심어져 있으며, 이때 의지는 이성을 움직여 자기가 원하는 것만 생각하게 만든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 이 TCR(True Christian Religion) 587번 글에 대한 Ager 영역본은 아래와 같습니다.

 

...the evils into which man is born are generated in the will of the natural man, and that the will causes the understanding to favor it by thinking in agreement with it...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한마디로 사람의 마음은 이성과 의지로 되어 있는데, 의지 속에는 태어날 때부터 악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이성이 올바로 기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그 이성이 사실은 내면 깊은 곳에 숨어있는 악에 의해 철저히 조종받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의지 속에 있는 악들이 자기가 원하는 것만 생각하고, 원하는 방향으로만 판단하도록 이성을 조종한다는 것입니다.

 

※ 2025년 3월 4일 현재, 이 원고를 다듬는 지금도 예를 들어, 헌재를 생각해 보면, 그리고 더불어민주당과 그밖에 조중동, JTBC, 기타 레거시 방송들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그런 것 같습니다. 이렇게 밝고 명료한 사실, 진실 앞에서도 어쩜 저렇게나 정반대일 수 있는지 말입니다!

 

오늘날 정의와 진실을 외치는 사람들은 많지만, 진실한 사람들은 별로 없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리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만 깊이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진실을 이야기하고 정의를 주장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말씀은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말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본문 1절과 2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1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2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이 말씀에는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여러 명의 지배자가 등장합니다. 가장 높은 지배자가 누구입니까? 디베료라는 로마 황제이고요, 그리고 그에게 위임을 받은 네 명의 지도자들, 즉 총독 빌라도와 헤롯, 그리고 그 동생 빌립과 루사니아가 유대 땅을 넷으로 분할해서 다스리고 있습니다.

 

※ 디베랴는 로마 초대 황제 옥타비아누스(주전31–주후14)를 이은 2대 티베리우스(주후14–37) 황제를 말합니다.

 

※ 대왕 헤롯(주전37–4)의 사후, 그의 유언장에 따라 수도 예루살렘을 포함,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이두매 지역을 할당받은 아들 헤롯 아켈라우스(주전4–주후6)는, 그러나 그 폭정으로 폐위되고, 그의 지역은 훗날 대왕 헤롯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주후37–44) 때까지 로마 제국에 편입, 로마 황제가 파견하는 총독들의 직접 통치를 받게 됩니다. 본디오 빌라도(주후26–36)는 다섯 번째 총독입니다.

 

※ 갈릴리 분봉왕 헤롯은 헤롯 안티파스(주전4–주후39)로 헤롯 아켈라오스의 친동생입니다. 이 둘은 아버지 대왕 헤롯의 네 번째 아내인 말타케의 소생입니다. 그는 이복형제인 빌립(분봉왕 빌립하고는 다른 인물)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 딸 살로메를 통해 침례 요한을 처형한 자입니다.

 

※ 분봉왕 빌립(주전4–주후34)은 대왕 헤롯과 예루살렘 출신 클레오파트라 사이에 태어난 아들입니다. 클레오파트라는 다섯 번째 아내입니다. 위 헤로디아의 전남편인 빌립은 대왕 헤롯과 대제사장 보에투스의 딸 마리암네 2세 사이에 태어난 아들입니다. 마리암네 2세는 세 번째 아내입니다.

 

※ 아빌레네의 분봉왕 루사니아는 누가복음 여기 외에는 역사적 기록이 없어 모릅니다.

 

그리고 그때의 제사장은 그 유명한 안나스와 그의 사위 가야바입니다. 말씀에서 유대 지도자들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은, 겉으로는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것이지만, 속뜻으로는 그 이름들 속에 내적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聖) 문서에는 그 이름들이 각각 무슨 의미인지를 분명하게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들이 모두 유대 나라의 지도자라는 사실로부터 그 이름들이 타락한 교회의 여러 가지 거짓 진리들을 나타낸다는 것을 짐작은 할 수 있지요. 왜냐하면, 말씀에서 지배자나 ‘’은 으뜸이 되는 진리를 나타내고, ‘유대’는 타락한 교회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으뜸 되는 진리라는 것은, 예를 들면,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는, ‘오직 믿음’ 교리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다른 교파들과 구별되는 아주 중요한 교리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안나스와 가야바’란 인물들은 무슨 뜻입니까? 이들은 유대교회의 제사장들이었습니다.

 

※ 포로기 이후 유대 사회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인물은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신정 국가의 우두머리이니까요. 이 대제사장의 역사만으로도 유대 역사를 설명할 수 있을 정도인데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 대제사장직을 둘러싼 온갖 부정부패의 썩은 냄새가 진동했는데요, 2025년 지금, 대한민국 선거관리위원회처럼 말입니다. 그중에서도 대왕 헤롯의 등장부터 예루살렘 성전 파괴 때(주전37-주후70)까지 107년 동안 28명의 대제사장이 난립하는, 가장 중증 기간에 주님이 오신 것이며, 그 기간의 하이라이트 암세포들이 바로 이들 안나스 가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타락한 교회의 악을 의미합니다. ‘제사장’은 본래 선을 의미하지만, 반대로는 악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안나스와 가야바가 교회의 선을 나타내지 않고, 악을 나타내는 이유는 그들이 주님을 체포하고, 심문하고, 또한 십자가에 매달았던 장본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죽인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타락한 교회의 악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1절과 2절에 나오는 유대의 지배자들과 성직자들은 모두 타락한 교회의 악과 거기에서 나오는 거짓 진리들을 나타냅니다. 거짓 진리들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마음대로 왜곡해서 만든 거짓도 있을 것이고, 다른 종교의 교리를 하나님의 말씀과 섞는 경우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유대의 지배자들을 보면 유대 사람도 있고, 이방인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디베료’나 ‘본디오 빌라도’는 완전한 이방인인 반면, ‘헤롯’, ‘빌립’ 같은 사람들은 이두매 출신 아버지 대왕 헤롯으로 인해 순수한 유대인 혈통은 아닌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로 표상되는 거짓 진리는, 말하자면 다른 종교의 교리에서 차용해 섞은 거짓 진리이고, 나머지 ‘안나스와 가야바’는, 비록 혈통은 순수한 유대인이어도 대제사장으로서의 그 부패함이 너무 심한 나머지, 말씀을 왜곡해 만든 거짓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거짓 진리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 것입니다.

 

※ 모든 악과 거짓은 일반적인 게 있고, 세부적인 게 있습니다. 다음은 이런 이해를 돕는 글인데요, 스베덴보리 저,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 중 창3:15, ‘’에 관한 내용입니다.

 

‘뱀’이 일반적으로는 모든 악을, 특별히는 자아 사랑을 의미하는 이유는, 모든 악은 마음의 감각 파트에서, 그리고 처음부터 ‘뱀’으로 상징된 기억-지식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며, 그래서 여기 나오는 뱀은 모든 종류의 악, 특히 자아 사랑, 즉 이웃과 주님을 향한 증오를 가리킵니다. 이 악, 곧 증오는 다양, 수많은 속(屬, genera)과 더욱 수많은 종(種, species)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말씀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뱀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뱀’(snakes, 마23:33), ‘독사’(cockatrices, 렘8:17), ‘독사’(asps, 신32:33), ‘독사’(adders, 시140:3), ‘불뱀’(fiery serpents, 민21:6), ‘날으는 뱀’(serpents that fly, 사14:29), ‘기는 뱀’(that creep) ‘독사’(vipers, 마23:33) 등인데요, 독, 곧 증오의 차이에 따른 것입니다. (AC.251)

 

선과 진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요, 다음은 창4:4, ‘기름’에 관한 내용입니다.

 

천적인 것들은 도저히 셀 수 없는 속(屬, genera)과, 그리고 더더욱 종(種, species)에 속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모세가 백성 앞에서 부른 다음과 같은 노래를 통해 표현되고 있습니다.

 

소의 엉긴 젖과 양의 젖과 어린 양의 기름과 바산에서 난 숫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또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게 하셨도다 (신32:14)

 

그 속뜻을 모르고서는 어느 누구도 이들 표현의 상응이 무엇인지를 아는 건 불가능합니다. 속뜻을 모르면, 이런 표현들, 즉 ‘소의 엉긴 젖’(the butter of kine), ‘양의 젖’(the milk of sheep), ‘어린 양의 기름’(the fat of lambs), ‘바산에서 난 숫양과 염소’(the fat of rams and goats, the sons of Bashan), ‘지극히 아름다운 밀’(the fat of the kidneys of wheat), ‘포도즙의 붉은 술’(the blood of the grape)은 그저 단어의 나열일 뿐 다른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겉으로는 그럴지라도 이 표현들은 전체로도 개별로도 천적인 것들의 속과 종을 의미합니다. (AC.353) //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라고 합니다. ‘열다섯 해’가 되었다는 말은, 속뜻으로는 교회가 영적으로 새로운 상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숫자 14는 완전함을 뜻하는 7이 두 개가 모인 수이기 때문에 하나의 영적 상태가 처음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의 전 기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15는 14 다음에 처음 시작하는 수로서, 그러니까 ‘교회가 새로 시작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으로 타락한 교회가 문을 닫고 새로운 교회가 시작되는 때가 바로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라는 말의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이전은 디베료라고 하는 거짓 진리가 교회를 지배하고 있었던 상태였다면, ‘열다섯 해’라는 때는 주님께서 새로운 교회를 위한 말씀을 주시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 말씀에 나오는 숫자 관련,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29장, ‘천국의 글’ 263번 글입니다.

 

나는 또 오직 일련의 숫자만 정렬해 놓은 천국의 글도 보았다. 그 적힌 방식은 마치 글자와 낱말로 된 글과 같았다. 이 글은 가장 내적 천국에서 온 것이며, 그 천국의 글은, 거기 담긴 생각이 흘러 내려오면, 더 낮은 천국들에서는 천사들에게 숫자로 나타난다는 것도 나는 알게 되었다. 이 숫자로 된 글은 따라서 비의를 내포하고 있으며, 그중 어떤 것은 사고로 이해할 수도, 말로 표현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했다. 모든 숫자는 상응을 하며, 낱말과 마찬가지로 그 상응에 따른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면, 숫자는 일반적인 것을, 낱말은 세부적인 것을 다룬다는 점이다. 일반적인 것 하나가 수없이 많은 세부 사항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숫자로 된 글은 문자로 된 글보다 더 많은 비의를 담고 있다. 이로써 나는 말씀에 나오는 숫자들이 낱말들과 마찬가지로 사물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 3, 4, 5, 6, 7, 8, 9, 10, 12 같은 간단한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고, 20, 30, 50, 70, 100, 144, 1000, 10,000, 12,000 등의 복합숫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에서 밝힌 바 있다. 천국에서는 이런 글을 쓸 때, 언제나 맨 앞에 주제를 정하듯 하나의 숫자가 오고, 그 다음에 연계성에 따라 일련의 숫자들이 따른다. 그 한 숫자는 다루어진 문제의 목차와 같고, 그에 따르는 숫자들은 문제를 보다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역할을 한다. (HH.263) //

 

주님께서는 새로운 교회를 여실 때마다 언제나 새로운 말씀을 주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교회의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으로 표상되는 태고교회가 몰락하고, 고대교회가 시작되었을 때는 상응의 지식을 주셨으며, 고대교회가 몰락하고 유대교회가 세워졌을 때는 구약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유대교회 후에 기독교회가 세워질 때에는 신약의 말씀을 주셨고요, 기독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밝혀 주셨습니다.

 

※ 주님은 스베덴보리(1688-1772)를 그의 나이 57세 때부터 불러 이 일을 맡기셨습니다.

 

주님께서 새로운 교회를 위한 말씀을 주시는 것을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말씀을 나타내는데, 말씀 가운데서도 가장 외적인 것, 그러니까 글자의 뜻을 나타냅니다. 요한이 그렇게 말씀의 외적인 것을 상징했기 때문에, 다른 복음서에 그는 메뚜기를 먹고, 석청(꿀)을 먹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막1:6)

 

메뚜기’는 외적인 것을 의미하고, ‘석청’은 말씀의 외적인 지식을 취할 때 느끼는 달콤함, 즉 기쁨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외적 의미의 표상인 침례(세례) 요한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지금 빈 들, 즉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이것은 몰락하고 있는 교회의 영적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 영적인 상태가 광야처럼 황폐하다는 것입니다. 즉 교회 안에 반드시 있어야 할 사랑과 진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빈 들이고, 광야입니다. 교회가 그러한 상태일 때, 주님께서 인류에게 새로운 교회를 위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요한이 빈 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입니다. 3절입니다.

 

3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요단강은 어떤 강입니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경계에 있는 강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주님의 교회, 또는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꼭 필요한 어떤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교회에 입문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알아야 할 것, 곧 선이 무엇이고, 진리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알아야 우리 자신의 내면을 살펴볼 수가 있고요, 또한 잘못을 고치고,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입문하는 사람은 제일 먼저 선과 진리에 대한 지식을 습득해야 합니다. 그렇게 볼 때, ‘요단강’은 선과 진리에 대한 지각을 의미합니다. 그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주님의 나라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는 사람들이 말씀을 통해 선과 진리를 지각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주님께서 새 교회를 위해 부르신 사람들입니다. 그동안 많은 신앙인들이 선이 무엇이고,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죄를 범하면서도 자기가 죄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가 잘못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랬던 사람들이 이제 새로운 말씀을 통해 선과 진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라는 상태입니다. 요단강을 건너지 않고, 요단강 근처에 있다는 것은 아직도 선과 진리에 대해 완전히는 모르지만, 그러나 어쨌든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를 지각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과 진리를 알 때, 의식이 바뀝니다. 새 교회 가르침에서는 그것을 개혁이라고 하는데요, 개혁은 의지가 바뀌는 것이 아니고, 이성(이해력 또는 이해성이라고도 함, understanding), 즉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그때 선과 악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으며, 거짓과 진실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내면의 악과 거짓을 볼 수 있는데, 그런 상태가 바로 개혁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내면으로부터 좋지 않은 욕망이 올라올 때, 그것을 제지하고, 그리고 선이나 진실을 선택하도록 하는 마음의 작용이 일어나는 것, 그것이 개혁의 상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은 거듭남에 앞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과정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회개는 개혁에서 거듭남으로 옮겨가는 연결 고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회개하고자 하는 마음을 먹는 것이 개혁이라면, 본격적으로 회개의 삶을 사는 것은 거듭남의 과정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침례(세례) 요한은 지금 회개를 가르치려고 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에서 죄 사함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거듭남도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물론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하십니다. 다 용서하시지만, 그러나 우리가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는다면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용서를 계속 배반하고 악용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을 통해 회개를 명령하십니다. ‘요한이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는 바로 그런 뜻입니다. 왜냐하면 요한은 말씀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다음 4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4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이 말씀은 이사야서 40장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라고 한 것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는 설명할 필요 없이 침례(세례) 요한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침례(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말씀 가운데서도 외적인 글자의 뜻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주의 길을 준비하라’는 어떤 의미입니까? 주의 길을 준비하는 것은 말씀을 통해 이성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개혁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 주의 길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개혁의 상태가 될 때, 주님께서 선을 동반한 진리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때 우리는 본격적으로 거듭남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선은 없고, 그냥 진리만 있다면 거듭남이 가능하겠습니까? 악을 끊을 수 있겠습니까? 이웃에게 진실하게 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진리만 가지고는 안 되며, 선이 있는 진리, 선을 동반한, 수반한 진리가 있어야 합니다. 선이 있는 진리가 누굽니까? 요한이 준비한 길을 따라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주의 길을 준비하는 것은 우리 내면에서 개혁이 이루어지는 것이며,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성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알 수 있고, 또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해야 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조금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의 이성이 의지가 시키는 대로 하는 대신, 오히려 그것을 견제하기 시작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5절에서는 개혁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5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5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골짜기가 메워지고’라고 합니다. 골짜기는 무엇입니까? ‘골짜기’는 낮은 곳에 있기 때문에 겉 사람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가장 안쪽에 주님이 계신 극내면(極內面, inmost)이 있고요, 그리고 그 바깥쪽에 속 사람이라는 의식이, 그리고 가장 바깥쪽에 일상의 삶과 직접적으로 맞닿아있는 부분, 즉 겉 사람이라는 의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겉 사람은, 영적으로 보면 가장 낮은 상태에 있습니다. 우리들의 의식은 내면으로 들어갈수록 주님과 천국을 향하며, 겉 사람으로 내려올수록 세상을 향하고, 지옥을 향합니다. 그래서 겉 사람은 영적으로는 가장 낮은 곳에 있고, 그렇기 때문에 말씀에서는 골짜기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골짜기가 메워지고’는 무슨 뜻입니까? 개혁의 상태에서는 겉 사람의 이성 가운데 진리와 선의 지식이 채워지는데, 그것이 골짜기가 메워지는 것입니다. 그동안 낡은 교회의 교리를 통해서는 진정한 진리와 선을 배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에게 유익한 것이 선이라 생각하고, 자기 생각을 관철하는데 필요한 논리가 진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새 교회에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주님의 나라와 이웃의 유익을 먼저 구하는 것이 선이요 진리라고 가르칩니다. 선과 진리에 대한 관점이 완전히 바뀌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상태가 ‘골짜기가 메워지고’인 것입니다.

 

두 번째는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라고 했습니다. 산은 본래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반대로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한 사랑을 뜻합니다. 그래서 또 다른 의미로는 자기 사랑에서 나오는 교만을 나타냅니다. 이것이 여기서 말하는 ‘모든 산’입니다.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왜 교만할 수밖에 없을까요? 자기만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웃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웃의 장점을 보기보다는 허물을 자꾸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와 비교, 이웃을 업신여기기를 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사랑에 빠져 있는 사람은 교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라고 하는 것은, 개혁의 상태로 들어가면 그 교만한 마음이 낮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전에는 아무리 선과 진리에 대해 말해도 그것을 받아들이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적어도 말씀의 진리 앞에 자신을 낮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사랑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지만, 자기를 내세우는 마음이 많이 낮아진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굽은 것이 곧아지고’입니다. 굽은 것은 비뚤어지고 꼬인 것이기 때문에 악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이 악은 무지에서 비롯된 악입니다. 선이 무엇이고 진리가 무엇인지 모를 때 나타나는 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때는 악을 행하기는 하는데, 알면서 행하는 것이 아니고 모르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혁의 상태에서는 선과 악에 대한 분별력이 생기기 시작하고, 그렇게 해서 악을 멀리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굽은 것이 곧아지고’입니다.

 

또한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입니다. 길이라고 하니 이제 그것이 진리와 관련이 있음을 짐작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냥 길이 아니라 ‘험한 길’이라고 했기 때문에 거짓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이 거짓 역시 개혁이 이루어지기 전의 거짓, 즉 무지에서 비롯한 거짓을 나타냅니다. 고의는 아니지만, 말씀을 왜곡하거나, 다른 사람이 말하는 거짓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모두 진리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진리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진리를 통해 흘러들어오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좋은 의미에서 소신이 있다 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런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세상에서 떠도는 소문과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적당히 자기의 진리로 삼습니다. 그런 것들이 모두 무지에서 비롯한 거짓들입니다. 그럴 경우, 잘못된 종교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진리를 분별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는, 진리에 대한 지식이 생기면서 더 이상 오류에 빠지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이성이 밝아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개혁이란 본질적으로 영적인 무지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6절에서는

 

6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육체는 인간의 자아를 나타내고, 또한 자아에 매여 있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자아는 어떤 것입니까? 자기 자신과 세상만 바라보는 것이 자아입니다. 따라서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는 말씀은 자아에 매였던 사람들이 더 이상 자아에 매여 있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자아가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며, 그러므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하고 진실한 것에 순종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구원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런데 지금은 개혁의 상태에서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씀에서는 구원을 ‘보았다’ 하지 않고, ‘보리라’, 즉 미래형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잃어버릴 때 교회는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교회의 마지막 때에 사랑도 없고, 진리도 없는 상태를 광야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지배하는 악과 거짓 진리를 유대의 지도자와 제사장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얼핏 보면 이러한 모든 것들이 유대교회의 몰락을 나타내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속뜻으로는 그동안 있었던 모든 교회의 마지막 때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 교회의 모습이며, 우리 사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사랑의 가치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사랑을 가르치지 않을 때, 그 사회는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광야와 같은 이 시대에 주님께서 당신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보내신 요한이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새 교회를 위하여 열어주신 말씀의 내적인 의미가 바로 요한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를 아는 우리에게 요한이 외치는 소리는 하나입니다.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신앙인들에게만 하는 말은 아닙니다. 이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회개일까요? ‘천국의 비밀’ 8389번 글에는 회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회개는 자신의 죄를 주님께 고백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용서를 구하고, 그런 다음에 죄짓기를 그만두고, 믿음의 명령에 따라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 이 AC(Arcana Coelestia) 8389번 글에 대한 Clowes 영역본은 아래와 같습니다.

 

To do repentance is after one has thus confessed his sins and from a humble heart has made supplication for their forgiveness, to desist from them and to lead a new life according to the commands of faith.

 

주님은 회개하는 사람에게 오셔서 그와 그의 나라 모두를 구원하십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셔야 할 줄 압니다. 새 교회 모든 성도에게 주님으로부터 회개의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요1:7)

 

아멘

 

원본

2017-03-12(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16(D4)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16. 2023-03-16(D5)-매일예배(2433, 눅3,1-6),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세례)'.pdf
0.59MB

 

Posted by bygracetistory
,

 

예수님 열두 살 때 에피소드 (2)

 

 

48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49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50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51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눅2:48-51)

 

 

말씀의 모든 구절에서 언급하는 아버지는 잉태로부터 주님 안에 있던 신성을 뜻한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교리와 일치하는 것이며, 사람의 몸 안에 혼이 있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아들은 이 신성에서 비롯한 인성 그 자체이다. 이 인성이 신성이 되었으므로, 사람이 오직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그리고 그렇게 해서 생각과 신앙과 예배 안에서 아버지와 당신 안에 아버지가 계신 주님을 분리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주님은 당신과 아버지가 하나라는 것, 주님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아버지 안에 주님이 계시다는 것, 모든 사람이 주님 안에서 살아야 하는 것, 누구든 주님을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는 것을 가르치셨고, 또한 사람은 주님을 믿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셨다. (L.32:7, 이순철 역)

 

※ 이 L(Doctrine of the Lord) 32번 글 7번 항에 대한 Potts 영역본은 아래와 같습니다.

 

In these and all other passages where “the Father” is mentioned, there is meant the Divine which was in the Lord from conception, and which, according to the doctrine of faith of the Christian world, was circumstanced as is the soul in the body with man. The human itself from this Divine is the son of God. Now as this human was made Divine, therefore, in order to prevent man from approaching the Father only, and thereby in thought, faith, and thence in worship, separating the Father from the Lord in whom the Father is, after the Lord had taught that he and the Father are one; that the Father is in him, and he in the Father; that all should abide in him; and that no one cometh to the Father but by him, he taught also that we must believe in him, and that man is saved by a faith directed to him.

 

 

지난 시간에는 요셉, 마리아 부부가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예수님과 헤어진 일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와 관련해서 누가복음 2장 44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44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이 말씀에서 ‘친족’은 속뜻으로는 친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선과 진리들을 의미합니다. 교회의 선과 진리라고 하는 이유는, 그것이 세상의 선과 진리와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자기에게 유익한 것을 선이라고 하지만 교회의 선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웃을 유익하게 하고, 주님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 교회의 선입니다. 그 교회의 선을 말씀에서는 친척이라고 부릅니다. 친척이 교회의 선과 진리, 또는 악과 거짓을 뜻하는 것은 누가복음 21장 16절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서 주님은 교회 마지막 때의 징조를 설명하시면서,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의 몇을 죽이게 하겠고 (눅21:16)

 

라고 예언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은 선과 진리와는 반대의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악과 거짓을 말합니다. 이렇게 말씀에서는 같은 단어를 가지고 서로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여기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타락한 교회의 악과 거기서 나오는 거짓 진리를 나타내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의 몇을 죽이게 하겠고’라는 말씀은, 교회가 타락해서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그 교회의 악과 거짓 진리가 신앙인들을 영적으로 죽인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마리아와 요셉이 친족 가운데서 예수를 찾았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멀어진 신앙인들이 자신의 삶 가운데 진리가 있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이나 행동이 다 진리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도 가운데 있는 선이나 악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친족은 결국 삶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말과 행동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 진리가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지금 요셉, 마리아 부부가 친족 중에서 예수가 있는지를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결국 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것을 말씀에서는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마리아와 요셉은 황급히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하룻길이나 왔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사흘 후에 성전에서 랍비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아이를 발견합니다. 48절에서는 소년 예수와 그 부모가 만나는 것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48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마리아가 하는 말을 통해 주님을 잃어버렸을 때, 신앙인들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는 일들이 순조로울 때는 자신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는 일들이 모두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거나 시련이 있을 때, 삶을 돌아보고 주님이 그곳에 계신지를 살핍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하는 일이 과연 진리인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내가 여태까지 한 일들이 올바르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하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것이 요셉, 마리아 부부가 일행 중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진리를 되찾기 위해 다시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되돌아갑니다. 진리가 있어야 진리의 능력으로 시련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내면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세상을 향하는 마음을 접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세상의 욕망들을 쫓아다녔고,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주님과 멀어지면 주님으로부터 진실하고 선한 것들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말이나 행동들이 진실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관심이나 집착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를테면 자존심이나 불순한 욕망 같은 것들을 말이지요. 그래야 요셉, 마리아 부부처럼 주님이 계신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진리이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마리아가 말합니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여기서는 ‘아이’라고 했지만, 영어 성경의 표현은 son, 즉 ‘아들’입니다. 말씀에서 아들은 진리를 나타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야’라는 말에서, 마리아가 다시 진리를 찾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진리는 우리가 아는 진리의 지식이 아니고요,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입니다.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는 그 안에 선한 것이 들어있는 진리이지요.

 

계속해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라는, 마리아의 원망 섞인 말이 나옵니다. 우리도 그렇게 원망 비슷한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이 저를 꼭 잡아주셨더라면 제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 강한 팔로 저를 단속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렇게 주님을 원망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의 자유를 간섭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시고 경고도 하시지만, 일단 잘못된 길로 들어설 때에 억지로 막으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을 버리고 떠난 것이지요. 계속해서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라고 합니다. 한번 진리를 잃어버리게 되면 그것을 되찾을 때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주님과 함께 있을 때 평화가 있습니다. 주님과 떨어져 있을 때에는 뭔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하고 일이 잘 안되고 고통과 슬픔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다시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만난 마리아는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라고 그동안의 아픔을 격정적으로 토로합니다. 마리아의 말을 들은 예수께서 4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9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여기서 ‘내 아버지 집’은 교회를 말합니다. 주님은 당신이 교회와 함께 계심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교회가 있는 곳에는 늘 주님이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에 대한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이 있는 곳에 주님의 교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신앙이 있고 사랑이 있었다면 주님이 떠나실 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보다 자신을 더 믿었고, 주님을 사랑하는 대신 오직 자기 자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간곡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안에 아버지의 집이 없지 않느냐’ 그런 뜻입니다. 50절입니다.

 

50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왜 깨닫지 못했을까요? 주님을 만났다고는 하나 아직 그들에게 온전한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聖) 문서에 보면, ‘사람은 온전한 진리 즉 선을 동반한 진리 가운데 있을 때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때 영의 눈이 열리고, 진리를 제대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 마리아 부부가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그래서입니다.

 

이와 관련,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1장 9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요11:9)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열두’(12)란 수는 완전한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열두 시간’은 우리가 완전한 진리, 즉 선을 동반한 진리 안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은 깨달음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라는 말씀은, 선을 동반한 진리 안에 있을 때 진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그러면 ‘’은 무슨 뜻일까요? 말씀을 읽어도 깨닫지 못하는 상태이며, 자기 안에 있는 허위를 보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주님께서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라고 하신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즉 깨달음의 상태 가운데 있을 때는 진리를 옳게 이해하고, 거짓 진리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진리, 즉 선이 있는 진리 안에 있을 때만 깨달음의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51절입니다.

 

51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이 말씀은 주께서 일상의 삶 가운데서 우리와 동행하심을 나타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죠. 예루살렘 성전은 속 사람 안에 세워진 주님의 교회이고요, 그리고 주님께서 나사렛에 내려오신 것은, 겉 사람의 삶 가운데서 우리와 동행하시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라는 이 말씀은 속 사람 깊은 곳에 계시던 주님이 이제 겉 사람의 삶 가운데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동안은 주님을 잊고 살았는데 이제 온전한 진리이신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그때 예수께서 ‘순종하여 받드시더라’라고 합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예수께서 부모에게 순종하신 것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에게 순종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누구에게 순종하실까요? 주님은 오직 당신 안에 계신, 선 자체이신 여호와께만 순종하십니다. 주님은 세상에 계실 때, 당신 안의 여호와를 향하여 늘 겸비(謙卑)의 자세를 지키셨습니다. 그러한 겸비와 비움의 자세가 있었기 때문에 주님은 지옥으로부터 오는 혹독한 시련을 이겨내실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에 대한 겸비가 없으면 신성과 연결이 되지 않으며, 지옥을 이길 힘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사렛에서 주님께서 순종하셨다는 말씀은 당신 안에 계신 선 자체이신 여호와께 순종하셨다는 뜻이고, 다르게 표현하면 진리는 오직 선만을 섬긴다는 뜻입니다. 선이 진리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요, 진리가 선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진리는 선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태양의 불덩이에서 빛이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태양의 빛이 열기를 자연계에 전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진리는 오직 선을 위해 존재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순종하신다는 것은 주님의 입장에서는 신적 인성이신 주님이 당신 안의 신성에게 순종하시는 것이며, 신앙인들의 입장에서는 그들에게 있는 진리가 오직 선한 삶을 위해 쓰인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라고 합니다. 여기서 ‘이 모든 말’이란 주님한테서 나오는 진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두니라’는 깨우친 진리를 의지 안에 새겼다는 뜻입니다. 마음은 사람의 의지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진리가 선을 위해 쓰일 때 비로소 진리는 의지 안에 새겨진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를 이성적으로 믿는 단계에서 그것을 의도하고 기쁨으로 행하는 단계로 올라서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실 때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는 요셉과 마리아 부부가 잃어버린 예수님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갈 때 바로 갔겠습니까? 여기도 들르고 저기도 들르면서 아들을 찾았을 것입니다. 그것처럼 신앙인들도 진리에서 멀어졌다고 느낄 때, 진리를 되찾기 위한 노력을 시작합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 안에 어떤 악과 거짓들이 있는지 살피는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것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내면 깊은 곳에서 가까스로 주님을 만나게 되고, 진리이신 주님을 통해 자신의 의도와 행위 가운데 있는 악과 거짓을 봅니다. 주님은 그러한 상태를 낮이요, 열두 시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열두 시간은 진리 안에 있는 상태이며, 낮은 그로 말미암아 진리를 분별하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 삶과 행위 가운데 반드시 계셔야 합니다.

 

그런데 진리에서 일단 멀어지면 다시 진리로 돌아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마리아가 아이의 모습을 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아이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라고 말한 것은 신앙인들의 애통한 심정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런 애통함이 있어야 우리는 진리를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은, 진리는 오직 선을 섬기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적인 호기심이나, 또는 다른 이유로 진리를 배워서는 안 됩니다. 오직 선을 위해, 삶으로 살아내기 위해 진리를 배워야 합니다. 그때 진리는 각 사람의 의지 안에 깊이 새겨집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새 교회 모든 성도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요14:10)

 

아멘

 

 

원본

2017-02-26(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5-06(D7)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15. 2023-03-15(D4)-매일예배(2432, 눅2,48-52), '예수님 열두 살 때 에피소드 (2)'.pdf
0.39MB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