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는 지옥에 가는가 - 재산이 아니라 사랑의 문제

 

‘부자는 지옥에 가는가?’라는 질문은 복음서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주님께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고 말씀하셨고, 이어서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19:23-24)고까지 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서도 부자는 죽은 뒤 음부에 있습니다. 이런 말씀들만 놓고 보면 마치 부유함 자체가 구원을 가로막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와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남기신 그의 저작들을 함께 보면 결론은 그렇지 않습니다. ‘부자이기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도 아니고, 가난하기 때문에 천국에 가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 자체가 재산의 많고 적음을 구원의 기준으로 삼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많은 가축과 은금을 소유한 부자였고, 욥 역시 큰 재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마태복음이 명시적으로 ‘부자’라고 부르는 사람이면서 주님의 제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부유함 자체를 악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가?’입니다. 재산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고 그것을 자기 존재의 안전과 가치, 그리고 행복의 근원으로 삼는다면 부는 영적인 위험이 됩니다. 그러나 재산을 자신과 가족을 돌보고 이웃과 사회에 유익을 끼치며 맡겨진 일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면 재산 자체가 천국을 가로막지는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 구별은 더욱 분명합니다. 사람이 사후에 가져가는 것은 집도, 토지도, 그리고 통장도 아닙니다.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동안 자신 안에 형성한 ‘지배적 사랑’(ruling love)을 가지고 갑니다. 따라서 똑같이 많은 재산을 가진 두 사람도 내적으로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돈을 통해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자신의 쾌락과 명예를 높이는 것을 사랑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자신의 재산과 능력을 맡겨진 것으로 여기며 정직하게 사업하고 가족을 책임지며 많은 사람에게 ‘유용한 일’(use, 쓰임, 쓰임새)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둘 다 ‘부자’이지만 그 재산을 움직이는 내적인 사랑은 정반대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그토록 강하게 말씀하셨을까요? 마태복음 19장의 문맥을 보면 바로 앞에 부자 청년이 있습니다. 그는 계명을 지켰다고 말했지만 주님께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시자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떠났습니다(마19:21-22). 그 순간 그의 재산이 단순히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이 ‘붙들고 있는 것’임이 드러났습니다. 주님과 재물 가운데 어느 하나를 놓아야 하는 순간이 오자 재물을 놓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핵심은 재산의 액수보다 ‘마음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있습니다.

 

‘낙타와 바늘귀’도 같은 문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흔히 ‘바늘귀’가 예루살렘의 작은 성문이어서 낙타가 짐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으면 통과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 전해지지만, 이를 뒷받침할 확실한 역사적 근거는 없습니다. 본문의 자연스러운 뜻은 실제 낙타와 바늘구멍을 극단적으로 대비하여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라고 놀라자 주님께서는 곧바로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19:25-26)고 말씀하십니다. 이 마지막 말씀이 앞의 말씀을 푸는 열쇠입니다. 주님께서는 ‘부자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선언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 힘으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벗어나 천국 사람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주님께서는 사람의 사랑 자체를 변화시키실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속뜻으로 들어가면 ‘부자’의 의미는 물질적 재산을 넘어 더욱 넓어집니다. 말씀에서 ‘부’, ‘재물’, ‘보물’은 좋은 의미에서는 선과 진리의 지식, 곧 영적 부요함을 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 의미에서는 자신이 가진 지식과 능력, 자기 의와 자기 지혜를 자기 것으로 여기며 의지하는 상태를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프로프리움’(proprium)의 문제가 나타납니다. ‘내가 가지고 있다’, ‘내가 알고 있다’, ‘내가 이루었다’, ‘나는 옳다’는 것이 주님을 대신하여 마음의 중심을 차지하기 시작하면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도 영적 의미에서는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라오디게아 교회가 좋은 예입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3:17). 여기서 문제는 단순히 라오디게아 사람들이 돈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나는 부족한 것이 없다’는 영적 자기충족이 문제입니다.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아야 하는 존재가 자신에게 이미 모든 것이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부유하지만 속으로는 가난할 수 있고, 반대로 겉으로는 가난하지만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영적으로 부유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 역시 ‘부자 = 지옥, 가난한 사람 = 천국’이라는 경제적 구원론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부자의 문제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자기 문 앞에 누워 있는 나사로를 외면하면서 자신의 풍요를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의 재산이 체어리티(charity)로 흘러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많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보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웃을 보지 못하는 상태’가 문제입니다. 부가 자기 사랑 안에 갇히면 그것은 사람을 주님과 이웃에게서 멀어지게 하지만, 부가 이웃의 유익과 ‘유용한 일’을 위해 사용되면 같은 재산도 전혀 다른 기능을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부자’를 한 가지 의미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문자적으로는 실제 재산이 많은 사람을 가리킬 수 있고, 좋은 의미에서는 선과 진리라는 영적 재산을 풍성하게 가진 사람을 뜻할 수 있으며, 반대 의미에서는 자신이 가진 재산과 지식, 능력을 자기 것으로 여기며 주님보다도 더 그것을 의지하는 사람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부자’가 등장할 때마다 먼저 그 문맥에서 어떤 종류의 ‘부’를 말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결국 주님께서 문제 삼으시는 것은 ‘소유’ 자체라기보다 ‘소유에 대한 사랑’입니다. 부유한 사람에게는 부를 주님보다 사랑하게 될 특별한 시험이 있고, 가난한 사람에게도 부를 탐내고 부자를 시기하며 재물을 삶의 궁극적인 행복으로 여기게 될 시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난하다는 사실도 영적인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통장에 돈이 없으면서 마음 전체로 돈을 사랑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많은 재산을 소유하면서도 마음은 그것에 매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부자는 지옥에 가는가?’라는 질문에는 분명하게 ‘아닙니다’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죽은 뒤 그의 재산 목록을 조사하여 천국과 지옥을 결정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재산을 소유하고 사용하는 동안 그 사람 안에 ‘어떤 사랑이 형성되었는가’를 보십니다. 재산은 죽을 때 모두 남겨 두고 가지만, 그것을 사용하면서 형성된 사랑은 가지고 갑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부자는 돈이 많아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돈이 주님을 대신하여 마음의 주인이 될 때 영적인 위험에 빠집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죽을 때 우리가 가지고 가는 것은 재산이 아니라, 그 재산을 사랑하고 사용하면서 형성된 우리의 사랑입니다.’

 

 

 

SL.7, ‘한번 혈연은 영원한 혈연?’

한번 혈연이면 영원히 혈연인가 - 천국에서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한번 부모와 자녀가 되었으면 영원히 부모와 자녀인가? 형제자매는 영원히 형제자매인가?’ 이 질문은 사후세계와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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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5, ‘좌파도 구원 받을 수 있나’

좌파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 - 주님은 정치적 좌표로 사람을 심판하시는가 ‘좌파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다소 도발적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들이대면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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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 - 주님은 정치적 좌표로 사람을 심판하시는가

 

‘좌파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다소 도발적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들이대면 의외로 중요한 문제가 드러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물론입니다.’ 좌파라는 정치적 성향 자체가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지 않으며, 우파라는 정치적 성향 자체가 사람을 천국으로 보내지도 않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판단하시는 기준은 그 사람이 어느 정치 진영에 속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을 진리라고 받아들였으며 그것을 어떻게 삶으로 살았느냐에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좌파와 우파의 사상에는 아무런 영적 차이가 없다’거나 ‘어떤 정치사상이든 모두 똑같이 선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정치사상도 진리와 거짓, 선과 악의 관점에서 분별해야 합니다. 개인의 자유와 책임, 약자 보호, 공동체적 연대, 법질서, 재산권, 국가 권력의 한계 등 정치가 다루는 문제에는 실제로 선과 진리의 문제가 얽혀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정책이나 이념이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거나 거짓을 정당화하고, 증오와 폭력을 조장하거나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의 권리를 짓밟는다면 그것은 어느 진영에서 나왔든 비판하고 분별해야 합니다. 반대로 인간의 존엄을 보호하고 이웃의 유익을 증진하며 정의와 질서를 세우는 요소라면 어느 진영의 주장인지와 별개로 그 안의 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중요한 원리가 등장합니다. 사람에게 어떤 ‘거짓’이 있다는 것과 그 사람이 ‘거짓을 사랑한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신이 태어난 시대와 나라, 가정과 교육, 사회환경에 따라 많은 생각을 받아들입니다. 정치적 신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진심으로 사회적 약자를 돕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고 싶어서 좌파적 정책을 지지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자유와 책임, 법질서와 공동체의 안정을 지키는 것이 이웃에게 더 큰 유익이라고 생각하여 우파적 정책을 지지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같은 사회문제를 놓고 정반대의 정책을 지지한다고 해서 어느 한쪽의 영원한 상태까지 정치적 선택만으로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정책 판단에는 사실에 대한 오해도 있을 수 있고, 경제와 사회에 대한 판단 착오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치가 영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왜 그것을 지지하는가?’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진심으로 돕고 싶어서 복지 확대를 지지하는 것과, 부유한 사람에 대한 증오와 시기 때문에 그들의 재산을 빼앗고 싶어 하는 것은 외적으로 비슷한 정책을 지지하더라도 내면에서는 다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유시장과 재산권을 인간의 자유와 사회 전체의 유익을 위해 지지하는 것과, 자신의 재산과 특권만 지키면서 가난한 사람의 고통에는 무관심한 것도 전혀 다른 상태입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정치적 표어 뒤에 있는 바로 그 ‘사랑’입니다.

 

따라서 ‘좌파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곧 ‘우파면 구원받는가?’라는 질문을 불러옵니다.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보수적인 신학을 고백하고, 전통적인 가족관을 지지하고, 자유와 책임을 강조하며, 공산주의를 강하게 반대한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거듭남의 증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런 가치들을 말하면서도 자기 이익을 위해 거짓말하고, 사람을 멸시하며, 돈과 권력을 사랑하고,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증오한다면 정치적으로 아무리 ‘옳은 편’에 서 있다고 확신해도 그 사람의 내면까지 자동으로 옳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앞서 ‘참된 이단은 누구인가?’에서 살펴본 원리와 정확히 같습니다. ‘올바른 교리를 가지고 있는 것’과 ‘올바른 삶을 사는 것’이 동일하지 않듯, ‘올바른 정치적 판단을 하는 것’과 ‘천국적인 사랑을 가진 것’도 동일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에 관한 설명을 적용하면 이 점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사람이 죽을 때 정당 가입증이나 투표 기록을 가지고 영계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계에서 자신 안에 형성한 사랑과 그 사랑에 결합된 진리 또는 거짓을 가지고 갑니다. 사후에는 외적 체면과 사회적 역할이 벗겨지면서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했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래서 자연계에서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졌던 두 사람이 내적으로는 모두 이웃의 유익을 사랑했을 수도 있고, 같은 정치 진영에서 나란히 활동했던 두 사람이 사후에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는 한 가지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정치적 신념이 ‘프로프리움’(proprium)과 결합하면 사람은 진리를 찾기보다 ‘우리 편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기 쉽습니다. 우리 편의 거짓에는 눈을 감고 상대편의 거짓에는 분노하며, 우리 편의 잘못은 사정을 이해해 주면서 상대편의 잘못은 그 사람 전체의 악함을 증명하는 증거로 사용합니다. 이때 좌파와 우파 가운데 어느 쪽에 서 있는가보다 더 심각한 영적 문제가 생깁니다. 진리 자체보다 ‘내 편’을 사랑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어느 진영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든 싫어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든 진리이며, 거짓 역시 내가 지지하는 진영에서 나왔다고 해서 진리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정치적 분별을 없애는 렌즈가 아니라 오히려 더 엄격하게 만듭니다. 좌파의 주장도 살피고 우파의 주장도 살피되 같은 잣대를 적용해야 합니다. 사실은 사실대로 확인하고, 거짓은 어느 편의 것이든 거짓이라고 해야 하며, 선한 것은 상대편에서 발견되더라도 선하다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동시에 한 사람의 잘못된 정치적 판단을 발견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영원한 내면까지 우리가 판정해서는 안 됩니다. 정책과 사상은 분별할 수 있지만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는 주님께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결국 이렇게 바뀝니다. ‘좌파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가 아니라 ‘좌파든 우파든 무엇이 사람을 천국에 적합한 사람으로 만드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답은 정치적 진영이 아니라 ‘거듭남’(regeneration)을 향합니다. 사람이 주님을 향하고, 악을 죄이기 때문에 피하며, 진리를 배우고, 체어리티(charity)에 따라 이웃의 실제적인 유익을 구하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정치 역시 그런 삶이 표현되는 여러 영역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따라서 가장 짧게 답한다면 이렇습니다. ‘좌파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우파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좌파라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우파라서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내 정치적 신념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봉사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의 증오와 두려움과 자기 의를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고 있는가?’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을 자신에게 돌리는 순간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꽤 날카로워집니다. ‘상대편이 얼마나 틀렸는가?’를 묻기 전에 ‘나는 진리를 사랑하는가, 아니면 내가 옳다는 것을 사랑하는가?’를 묻게 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정치에 관한 가장 중요한 영적 분별은 바로 여기서 시작될 것입니다.

 

 

 

SL.6, ‘부자는 지옥 가나’

부자는 지옥에 가는가 - 재산이 아니라 사랑의 문제 ‘부자는 지옥에 가는가?’라는 질문은 복음서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주님께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고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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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4, ‘참된 이단’은 누구인가

‘참된 이단’은 누구인가 - 교리의 경계보다 더 깊은 주님의 판단 기독교에서 ‘이단’이라는 말은 대개 ‘정통 교리에서 벗어난 사람이나 집단’을 뜻합니다.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신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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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이단’은 누구인가

 

교회 안에서 ‘이단’이라는 말은 매우 무겁습니다. 어떤 사람이나 집단이 이단으로 규정되면 그 순간부터 그가 하는 말은 거의 들을 필요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 사람의 신앙과 인격, 심지어 영원한 구원까지 이미 판정된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물론 교회가 거짓된 가르침을 분별하고 성도들을 위험한 교리로부터 보호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진리와 거짓은 아무 차이가 없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하느냐, 인간과 죄와 구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신앙의 방향과 삶이 크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리는 중요하지 않고 착하게만 살면 된다’고 말하는 것도 스베덴보리의 관점과는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떤 교리가 참인가 거짓인가’를 판단하는 것과 ‘그 교리를 가진 사람이 주님 앞에서 어떤 영원한 상태에 있는가’를 판단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한 사람이 고백하는 교리와 외적인 행동을 어느 정도 볼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그 사람이 왜 그것을 믿게 되었는지, 어떤 빛을 받았는지, 진리를 알 기회가 얼마나 있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왔는지를 보십니다. 인간이 내릴 수 있는 교리적 판정과 주님께서 내리시는 영적 심판 사이에는 우리가 함부로 넘어가서는 안 되는 경계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거짓을 가지고 있는 것’과 ‘거짓을 사랑하는 것’을 구별하는 일입니다. 사람은 태어난 환경과 교육, 교단과 문화의 영향으로 잘못된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자신은 그것이 진리라고 진심으로 믿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빛 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며, 더 밝은 진리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의 내면을 단순히 현재의 교리적 오류만으로 판정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겉으로는 매우 정확한 교리를 고백하면서도 진리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보호하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신조를 정확히 암송하며, 이단과 정통을 능숙하게 구별하면서도 그 진리로 다른 사람을 지배하거나 자신의 명예와 권위를 지키고, 자신에게 불리한 진리는 의도적으로 외면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문제는 단순히 머릿속에 어떤 문장이 들어 있느냐가 아니라 그 사람이 진리를 무엇을 위해 사용하느냐에 있습니다.

 

이 점을 잘 보여 주는 사람이 회심 전의 사울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버리려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은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을 내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기고 교회를 박해하면서도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행8:1-3). 훗날 그는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고백합니다(행26:9).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보여 줍니다. 사람이 진실하게 믿고 있다는 사실과 그가 진리를 믿고 있다는 사실은 같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이야기는 동시에 우리에게 또 하나의 경고를 줍니다. 우리는 회심 전의 사울을 보고 ‘저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했으니 본질적으로 악한 사람이다’라고 최종 판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께서 그를 만나셨을 때 사울은 자신의 확신을 내려놓고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잘못이 사소했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이 볼 수 있었던 사울의 외적 모습만으로 그의 최종적인 내면까지 알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사울 안에서 우리가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프로프리움’(proprium)의 위험이 드러납니다. 인간의 자기중심성은 종교 안에서도 작동합니다. ‘내가 믿는 교리가 참되다’는 고백이 어느 순간 ‘그러므로 나는 옳은 사람이다’로 바뀌고, 다시 ‘나와 다른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다’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것과 ‘내가 옳다는 사실’을 사랑하는 것은 겉으로 매우 비슷해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진리 쪽으로 움직이려 하지만, 자기의 옳음을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조차 자기 입장을 지키기 위해 사용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교리적 오류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거짓은 실제로 위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잔인하고 보복적인 분으로 이해하면 사람도 종교적 이름으로 잔인해질 수 있고, 구원을 한 번의 고백으로만 이해하면 거듭나는 삶을 가볍게 여길 수 있으며, 자신이 속한 집단만 하나님께 선택받았다고 믿으면 다른 사람을 멸시할 수도 있습니다. 진리는 우리의 길을 비추는 빛이며, 거짓은 그 길을 흐리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리를 분별하고 오류를 바로잡는 일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거짓 교리를 가진 사람과 거짓 자체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거짓 가운데 있으면서도 자신이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 선을 사랑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많은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악한 사랑을 섬기는 데 사용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진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이 진리를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통하여 선을 보고, 그 선을 사랑하며, 실제로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진리가 삶으로 내려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직 인간의 내면을 온전히 변화시킨 진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참된 이단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사람에게 붙이는 최종적인 낙인으로 사용하기보다 먼저 나 자신에게 돌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거짓을 가지고 있는가?’도 중요하지만 더 깊은 질문은 ‘나는 진리를 사랑하는가, 아니면 내가 옳다는 것을 사랑하는가?’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가 나를 더 겸손하게 하고 이웃을 더 사랑하게 하며 악을 죄로 알고 피하게 하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내 우월함을 확인하는 수단이 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 자신을 읽을 때에도 똑같이 적용해야 합니다. ‘나는 이제 스베덴보리를 알았으니 기존 교회 사람들보다 더 깊은 진리를 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바로 그 순간 스베덴보리의 가르침마저 종교적 프로프리움의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AC와 HH를 많이 읽었다는 사실이 우리를 천국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진리를 통하여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더 깊이 알고, 자신의 악을 더 분명히 보며,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을 이웃에게 체어리티(charity)로 살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리를 분별해야 합니다. 거짓을 거짓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위험한 가르침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을 하면서도 한 사람의 영원한 운명까지 대신 판결해서는 안 됩니다. ‘이 가르침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과 ‘이 사람은 지옥에 갈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판단입니다. 전자는 우리가 진리를 분별하면서 해야 할 수 있는 일이고, 후자는 사람의 내면 전체를 아시는 주님께 속한 일입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어느 교단의 명부에 이름을 올렸는지, 어떤 신조를 정확하게 암송했는지, 사람들에게 정통이나 이단이라는 평가를 받았는지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받은 진리를 어떻게 대했는지, 더 밝은 진리가 왔을 때 받아들이려 했는지, 진리를 이용하여 자신을 높였는지 아니면 진리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는지, 그리고 결국 무엇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아왔는지를 보십니다.

 

그래서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교리적 오류는 분명히 분별해야 하지만, 한 사람이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영원한 내면까지 우리가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 글에서 더 깊이 남겨 두고 싶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진리를 사랑하는가, 아니면 내가 옳다는 것을 사랑하는가?’

 

주님 앞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사람들이 나를 ‘이단’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진리를 안다고 하면서도 그 진리가 요구하는 선한 삶을 거부하고, 결국 내 자기 사랑을 지키기 위해 진리마저 이용하는 것입니다.

 

 

 

SL.5, ‘좌파도 구원 받을 수 있나’

좌파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 - 주님은 정치적 좌표로 사람을 심판하시는가 ‘좌파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다소 도발적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들이대면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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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3, ‘예수님 영접 기도’ 안 하면 구원 못 받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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