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4:19)

 

AC.407

 

일반적으로 어떤 교회의 상태는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교회는 참 신앙으로부터 멀어지다가 ‘황폐해졌다’(vastated)라고 하는, 결국 신앙이라는 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지경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런 일이 태고교회의 경우는 가인이라고 하는 사람들(Cainites) 사이에서, 또 홍수 후 고대교회와 유대교회의 경우에서도 있었습니다. 주의 강림(降臨, the Lord’s advent)의 때, 종말이 바로 이런 황폐한 상태였는데요, 그들은 자기들을 구원하러 오시기로 예정되어 있던 주님에 관하여 아무것도 몰랐으며, 그분을 향한 신앙에 대해서는 더욱더 아는 게 없었습니다. 초대 기독교회, 곧 주님 강림 후 있었던 교회 역시 그랬으며, 오늘날(※ 1750년대 유럽)교회도 그 안에 아무런 신앙이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철저하게 황폐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핵은 언제나 늘 조금은 남아 있는데, 이것은 신앙에 관해 황폐해진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하는 사실입니다. 태고교회의 경우가 그랬는데, 그 남은 자들은 홍수 때와 홍수 후까지도 계속해서 있었습니다. 이들 그 교회의 남은 자들이 바로 ‘노아’(Noah)입니다. The state of a church in general is thus circumstanced. In process of time it departs from the true faith until at last it comes to be entirely destitute of faith, when it is said to be “vastated.” This was the case with the most ancient church among those who were called Cainites, and also with the ancient church after the flood, as well as with the Jewish church. At the time of the Lord’s advent this last was in such a state of vastation that they knew nothing about the Lord, that he was to come into the world for their salvation, and they knew still less about faith in him. Such was also the case with the primitive Christian church, or that which existed after the Lord’s advent, and which at this day is so completely vastated that there is no faith remaining in it. Yet there always remains some nucleus of a church, which those who are vastated as to faith do not acknowledge; and thus it was with the most ancient church, of which a remnant remained until the time of the flood, and continued after that event. This remnant of the church is called “Noah.”

 

 

해설

 

스베덴보리는 교회의 상태가 전반적으로 겪는 영적 흐름을 설명하며, 모든 교회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참된 신앙에서 점차 이탈하여 마침내는 ‘신앙이 거의 혹은 완전히 소멸된 황폐(vastation)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고 말합니다. 가인의 계보에서 나타난 태고교회의 황폐가 그 첫 사례이며,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 그리고 유대교회 역시 동일한 과정을 겪었습니다. 특히 주님의 강림 당시 유대교회는 극도의 황폐 상태에 있었기에, 메시아가 오신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고, 주님을 믿는 신앙이 무엇인지도 거의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흐름이 초대 기독교회에도 반복되었으며, 더 나아가 오늘날의 교회 역시 신앙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황폐되었다고 단언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교회가 황폐되었다고 해서 주님의 구원 역사가 완전히 끊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언제나 교회의 중심부에는 ‘보이지 않는 핵(nucleus)’, 곧 주님께서 직접 보존하시는 ‘리메인스’가 남아 있으며, 황폐된 다수는 이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태고교회 역시 전반적으로는 가인의 계열로 황폐되었지만, 그 안에 남아 있던 이 리메인스가 홍수까지 이어졌고, 그 보존된 핵이 바로 ‘노아’로 상징됩니다. 따라서 AC.407은 교회의 황폐를 비관적으로만 보지 않고, ‘황폐 한가운데서도 주님은 항상 다음 시대를 위한 씨앗을 숨겨 두신다’는 섭리의 원리를 분명히 보여 주며, 이것이 역사 속에서 교회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 새롭게 일어날 수 있는 근거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AC.408, 창4:19, '모독'(冒瀆, profanation)의 속뜻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8 하나의 교회가 더 이상 그 어떤 신앙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황폐해지면, 전과 다르게 새로움이

bygrace.kr

 

AC.406, 창4:19, 라멕의 상태, ‘황폐’(vastation)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6 ‘라멕’이 황폐함, 즉 어떤 신앙도 없는 상태와 상응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23, 24절을 보면 분명한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vastation’은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핵심 개념 중 하나인데, 단순히 ‘타락’이나 ‘심판’으로 번역하면 그 깊이가 사라집니다.

 

vastation’(황폐, 荒廢)이란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전문 용어로, 한 사람이나 한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 곧 체어리티와 신앙이 점진적으로 소멸되어 가는 영적 과정’을 뜻합니다. 이것은 갑작스러운 파괴나 외적 심판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사랑을 버리고 거짓과 악을 선택함으로써 ‘내면이 비워지고 메말라 가는 상태의 누적’입니다. ‘거듭남(regeneration)이 단계적으로 진행되듯이, 황폐 역시 단계적으로 진행되며, 처음에는 선이 약해지고 진리가 흐려지다가, 나중에는 참과 선이 더 이상 인식되지 않는 지점에 이르게 됩니다. 중요한 점은 황폐가 단순한 끝이나 절망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안에서 허용되는 과정’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사람 안에 남아 있는 거짓과 악이 드러나고 제거되지 않으면 새로운 선과 진리를 심으실 수 없기 때문에, 먼저 기존의 왜곡된 신앙과 사랑을 비워내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황폐는 종종 포로기, 광야, 어둠, 밤, 침묵, 일곱 번의 징계 같은 이미지로 표현됩니다. 창세기에서 가인의 계보가 라멕에 이르러 황폐의 극점에 도달하는 것은,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이 더 이상 생명을 낳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음을 뜻하며, 동시에 바로 그 지점에서 ‘새로운 교회의 씨앗이 준비되는 전환점’이 됩니다. 즉 vastation은 파괴 그 자체가 아니라, ‘거짓된 것을 비워 새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영적 정화의 과정’이며, 주님께서 결코 방임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 사용하시는 깊은 섭리의 방식입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4:19)

 

AC.406

 

‘라멕’이 황폐함, 즉 어떤 신앙도 없는 상태와 상응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23, 24절을 보면 분명한데요, 거기 보면,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slew a man to his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his hurt)라는 라멕의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사람’(man)은 신앙과, ‘어린아이’(little one), 즉 ‘소년’(little child)은 체어리티와 상응하기 때문입니다. That by “Lamech” is signified vastation, or that there was no faith, is evident from the following verses (23–24), in which it is said that he “slew a man to his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his hurt”; for there, by a “man” is meant faith, and by a “little one” or “little child,” charity.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4:23, 24)

 

 

해설

 

스베덴보리는 라멕이 ‘황폐(vastation)를 상징한다는 점을, 이어지는 23, 24절의 고백을 통해 분명히 드러낸다고 설명합니다. 라멕이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사람(man)은 ‘신앙’을, ‘소년(little one, little child)는 ‘체어리티’를 뜻합니다. 즉 라멕의 상태는 단순히 사랑이 사라진 단계가 아니라, ‘신앙마저 상처 입고 제거된 상태’, 곧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황폐의 극점입니다. 가인에게서는 아직 두려움과 자각이 있었지만, 라멕에게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죽임을 당했다’ 노래 될 정도로, 영적 생명이 사실상 소멸된 상태입니다. 이로써 라멕은 가인의 계보가 이르는 최종 상태, 곧 ‘신앙의 완전한 공허’를 표상하며, 이 지점 이후에야 비로소 주님께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신다는 전환의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AC.407, 창4:19, 라멕의 상태, ‘황폐’(vastation)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7 일반적으로 어떤 교회의 상태는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교회는 참 신앙으로

bygrace.kr

 

AC.405, 창4:19,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405-411)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창4:19) AC.405 가인으로부터 순서상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