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4:19)

 

AC.409

가인(Cain)이라 불린 이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단은 시간이 흐르면서 황폐해졌습니다. 사랑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신앙을 으뜸으로 삼아 사랑보다 앞세웠기 때문입니다. 이단에서 파생된 이단들은 점차 그것에서 벗어났으며, 가인으로부터 순서상 여섯 번째인 라멕은 마침내 신앙마저 완전히 부인했습니다. 이때가 되자 새로운 , 아침이 밝아 왔고, 여기서 아다와 씰라(Adah and Zillah) 불리는 교회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들은 라멕의 아내들(wives of Lamech)이라 불립니다. 라멕에게는 아무런 신앙도 없었지만 이들이 그의 아내들이라 불리는 것은, 역시 아무런 신앙도 없었던 유대인들의 교회와 교회가 말씀에서 아내들(wives)이라 불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들은 야곱의 아내인 레아와 라헬로 표상되는데, 레아는 교회를, 라헬은 교회를 표상합니다. 교회들은 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일 뿐입니다. 교회에서 분리된 교회, 표상적 교회는 우상 숭배적인 또는 죽은 것과 같지만, 교회와 교회가 함께 있을 하나의 교회를, 실로 동일한 하나의 교회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다와 씰라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야곱과 그의 후손들은 라멕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신앙도 없었으므로, 교회가 그들에게 머물 없었고 불신앙이 아니라 무지 가운데 살고 있던 이방인들에게 옮겨졌습니다. 교회가 황폐해졌으면서도 자기들 가운데 진리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머무는 일은 드물며, 있다 하더라도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진리들에 관하여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옮겨집니다. 이들은 앞의 사람들보다 신앙을 훨씬 쉽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The case was the same with the heresy calledCain,which in process of time was vastated, for although it acknowledged love, yet it made faith the chief and set it before love, and the heresies derived from this one gradually wandered from it, and Lamech, who was the sixth in order, altogether denied even faith. When this time arrived, a new light, or morning, shone forth, and a new church was made which is here namedAdah and Zillah,who are called thewives of Lamech.They are called the wives of Lamech, although he possessed no faith, just as the internal and external church of the Jews, who also had no faith, are also in the Word calledwives,being represented by Leah and Rachel, the two wives of JacobLeah representing the external church and Rachel the internal. These churches, although they appear like two, are yet only one; for the external or representative, separate from the internal, is but as something idolatrous, or dead, whereas the internal together with the external constitute a church, and even one and the same church, as Adah and Zillah do here. As however Jacob and his posterity, like Lamech, had no faith, the church could not remain with them, but was transferred to the gentiles, who lived not in infidelity but in ignorance. The church rarely, if ever, remains with those who when vastated have truths among them [apud se] but is transferred to those who know nothing at all of truths, for these embrace the faith much more easily than the former.

 

해설

AC.409는 가인의 계보에서 일어난 황폐와 새로운 교회의 출현을 설명하면서, 교회의 속과 겉이 어떤 관계에 있어야 하는지를 밝힙니다. 앞의 AC.405에서는 라멕이 신앙의 황폐를 의미하고 그의 두 아내 아다와 씰라가 새 교회의 출현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AC.408에서는 이전 교회가 황폐해진 뒤에야 새로운 빛, 아침이 밝아 온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번호는 이 두 설명을 연결하여, 가인에게서 시작된 분리가 라멕에게서 신앙의 소멸에 이르렀을 때 새로운 교회가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가인이라 불린 이단이 처음부터 사랑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그들은 사랑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신앙을 으뜸으로 삼아 사랑보다 앞세웠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분리였습니다. 참된 질서에서는 신앙이 사랑에 속하고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얻어야 하지만,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은 그 질서를 뒤집어 신앙이 사랑보다 우위에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후 그 이단에서 파생된 이단들은 점차 최초의 상태에서 더 멀어졌고, 마침내 여섯 번째인 라멕에게서는 신앙마저 완전히 부인되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가인의 처음 상태와 라멕의 마지막 상태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인은 사랑을 인정하면서도 신앙을 사랑보다 앞세웠습니다. 반면 라멕은 신앙마저 부인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계보는 처음부터 모든 신앙과 사랑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의 질서가 뒤집힌 데서 시작하여 그 분리가 점차 진행된 끝에 신앙 자체도 소멸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AC.409는 이러한 진행을 점차 그것에서 벗어났다는 말로 압축합니다.

 

바로 그때 새로운 빛, 곧 아침이 밝아 왔고 새 교회가 이루어졌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새 교회를 아다와 씰라라고 부릅니다. AC.405에서 아다는 새 교회의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이며, 씰라는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이 구별을 교회의 속과 겉이라는 관점에서 더욱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새 교회는 내적인 것만을 가진 교회도 아니고 외적인 것만을 가진 교회도 아닙니다. 속과 겉이 함께 하나의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라멕에게 아무런 신앙도 남아 있지 않았다면, 왜 새 교회를 나타내는 아다와 씰라가 하필 라멕의 아내들이라고 불리는 것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이 문제를 야곱의 두 아내 레아와 라헬에 비교하여 설명합니다. 그의 해석에서 야곱과 그의 후손들에게도 참된 신앙이 없었지만, 그들과 관련된 교회의 속과 겉은 말씀에서 아내들로 표상됩니다. 따라서 아다와 씰라가 라멕의 아내들이라고 불린다는 사실만으로 라멕 자신에게 참된 신앙이 있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비교에서 레아는 겉 교회를, 라헬은 속 교회를 표상합니다. 겉 교회는 예배의 형식과 의식, 말씀의 외적인 표현과 생활의 자연적인 차원에 관계되고, 속 교회는 그 안에 있어야 할 주님을 향한 사랑과 체어리티,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살아 있는 신앙에 관계됩니다. 물론 이번 번호가 레아와 라헬의 모든 상응을 상세히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두 아내의 표상을 통하여 교회의 속과 겉이 구별되면서도 하나를 이루어야 한다는 원리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는 이 원리를 매우 분명하게 말합니다. 속 교회와 겉 교회는 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교회입니다. 교회의 속과 겉은 서로 독립하여 따로 존재하는 두 교회가 아닙니다. 속 교회가 겉 교회에 생명을 주고, 겉 교회는 속 교회가 자연적인 삶 가운데 나타나는 형식이 됩니다. 따라서 둘은 구별되지만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앞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설명할 때 확인한 원리와도 통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구별된다고 해서 서로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듯, 교회의 속과 겉도 구별되지만 하나의 교회를 이루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속 교회에서 분리된 겉 교회, 곧 표상적 교회는 우상 숭배적인 또는 죽은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외적인 예배 형식 자체가 악하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문제는 그 형식이 속에 있는 사랑과 신앙에서 분리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예배와 의식이 아무리 정교하고 말씀의 외적인 형식을 충실히 보존하더라도, 그 안에 주님을 향한 사랑과 체어리티가 없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교회의 외적 표현이 되지 못합니다. 반대로 속 교회와 겉 교회가 함께 있을 때에는 하나의 살아 있는 교회를 이룹니다.

 

이것이 아다와 씰라에게도 적용됩니다. 아다는 새 교회의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과 관련되고, 씰라는 자연적인 것들과 관련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서로 경쟁하는 두 교회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두 사람은 새 교회의 서로 다른 차원을 나타내며, 그 차원들이 함께 하나의 교회를 이룹니다. 따라서 아다와 씰라의 의미를 이해할 때에는 어느 한쪽만을 참된 교회로 여기거나 다른 한쪽을 불필요한 것으로 보지 않아야 합니다. 새 교회는 내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이 함께 있어야 온전한 하나의 교회가 됩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왜 교회가 야곱과 그의 후손들에게 머물지 못하고 이방인들에게 옮겨졌는지를 설명합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야곱과 그의 후손들은 라멕과 마찬가지로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교회가 그들에게 계속 머물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교회가 옮겨졌다는 것은 어떤 민족의 혈통이나 문화가 본질적으로 더 우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영적 상태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차이는 불신앙무지의 구별에서 드러납니다. 이번 번호에서 불신앙은 단순히 진리를 아직 알지 못하는 상태가 아닙니다. 이미 진리들이 자기들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와 관련됩니다. 반면 무지는 진리 자체를 아직 알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미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황폐해진 사람들보다 신앙을 훨씬 더 쉽게 받아들인다고 설명합니다. 진리를 처음 접하는 사람은 그것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열려 있지만, 이미 진리를 알고도 거부하는 상태에서는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이기가 더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 구별은 앞의 AC.408에서 설명한 모독의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거룩한 것을 인정하고 믿으면서 모독적인 것과 뒤섞는 상태에서는 새로운 빛과 체어리티를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러한 방식으로 거룩한 것을 모독한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일 길이 열려 있습니다. AC.409에서 교회가 무지 가운데 있던 이방인들에게 옮겨졌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영적 질서와 관련됩니다.

 

다만 이 설명을 오늘날 특정 종교나 민족에 속한 사람들의 실제 신앙 상태를 일괄적으로 판정하는 근거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그의 신학적 해석 안에서 교회의 황폐와 이전을 설명하는 원리입니다. 실제로 한 사람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인정하며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외적인 소속만으로 알 수 없습니다. 또한 진리를 많이 배웠다는 사실 자체가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이는 데 장애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이미 알고 있는 진리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이제 AC.405-409의 흐름을 함께 보면 라멕과 두 아내의 의미가 한층 선명해집니다. 가인에게서는 사랑을 인정하면서도 신앙을 사랑보다 앞세우는 분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분리는 여러 이단을 낳으며 진행되었고, 라멕에게서는 신앙마저 부인되는 황폐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때 새로운 아침이 밝아 왔고 아다와 씰라로 표상되는 새 교회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새 교회는 천적이고 영적인 내적 차원과 자연적인 외적 차원이 함께 하나를 이루는 교회입니다.

 

결국 AC.409는 두 가지 질서를 함께 보여 줍니다. 하나는 신앙을 사랑보다 앞세우는 분리가 계속될 때 결국 신앙마저 소멸할 수 있다는 황폐의 질서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전 교회의 황폐 이후에도 새로운 빛이 비치고, 속과 겉이 함께 하나를 이루는 새 교회가 일어난다는 회복의 질서입니다. 이때 참된 교회의 본질은 외적인 형식만을 보존하는 데 있지 않고, 그 형식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가 살아 있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아다와 씰라는 바로 그 내적·외적 질서가 함께 이루는 하나의 새 교회를 보여 줍니다. (AC.409 해설)

 

 

 

AC.410, 창4:19, ‘교회의 황폐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 알면서 거부하는 상태와 아직 알지 못하는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10황폐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알면서도 알려 하지 않거나, 보면서도 보려 하지 않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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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8, 창4:19, ‘교회가 황폐해진 뒤에야 새 아침이 밝는 이유 - 거룩한 것의 모독과 새로운 시작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8 교회가 더 이상 아무런 신앙도 남아 있지 않을 만큼 황폐해졌을 때, 그때 비로소, 그 이전이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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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8 심화

1. 진리를 모르면 모독할 없다면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나은가?

 

AC.408-410을 읽으면 매우 자연스럽게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의 거룩한 것들을 알면서 그것들을 인정하고 믿은 뒤 모독적인 것들과 뒤섞는 상태를 매우 위험하게 설명하는 한편, 그것들을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는 사람은 그런 방식으로 모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진리를 배우지 않는 것이 안전한 것 아닐까요? 주님과 말씀에 관하여 적게 알수록 모독할 위험도 줄어든다면, 무지가 오히려 유리한 상태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AC.408의 요점은 무지가 좋은 상태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핵심은 모독이 단순한 무지나 불신앙과 같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거룩한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면 그것을 자기 안에서 거룩한 것으로 받아들였다가 다시 악과 거짓에 결합시키는 방식의 모독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반면 사람이 진리를 알고 인정하며 그것을 신앙의 거룩한 것으로 받아들인 뒤, 그것을 의도적으로 그 반대되는 악과 거짓에 결합시키면 서로 함께 있을 수 없는 것들이 그의 내면에서 뒤섞입니다.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위험하다고 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모르는 사람알면서 거부하는 사람사이의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AC.410은 황폐에도 두 종류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알면서도 알려 하지 않고, 보면서도 보려 하지 않는상태이며, 다른 하나는 무지 때문에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상태입니다. 후자의 사람에게 진리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은 그 사람의 완성된 영적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직 진리를 받아들일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이미 알고 보면서도 그것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상태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새로운 교회가 때때로 이전 교회의 중심이 아니라 이방인이라고 불리던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난다고 설명합니까? AC.408-410의 문맥에서는 이미 계시된 거룩한 것들을 알고도 계속 거부하고 뒤섞어 온 곳보다, 아직 그것들을 알지 못했던 곳에서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떤 민족이나 종교 집단 자체가 다른 집단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것은 교회의 상태입니다. 어느 곳이든 진리를 알고도 완강하게 거부하는 상태가 될 수 있고, 어느 곳이든 아직 알지 못했지만 받아들일 준비가 된 상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가르침을 복음을 듣지 않는 것이 안전하다거나 진리를 배우지 않는 것이 영적으로 유리하다는 결론으로 가져가서는 안 됩니다. 진리는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고 거듭나게 하기 위해 주어집니다. 문제는 진리를 아는 이 아니라, 진리를 받아들인 뒤 그것을 어떻게 대하는가입니다. 진리를 알게 된다는 것은 위험 자체가 아니라 큰 선물이며, 동시에 그 진리를 삶으로 받아들이라는 부르심입니다. 위험은 빛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빛을 받아들여 빛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의도적으로 어둠과 결합시키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408새로운 아침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무지를 보존하기 위해 새 교회를 일으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새로운 빛을 주시기 위해 일으키십니다. 이전 상태에서는 거룩한 것과 모독적인 것이 뒤섞여 새로운 빛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그 상태가 끝에 이르면 아직 그렇게 뒤섞이지 않은 곳에서 다시 진리가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지는 목적이 아니라 새로운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출발 상태일 뿐입니다. 목적은 결국 진리를 알고, 인정하고, 믿으며, 그것을 체어리티의 삶과 결합하는 데 있습니다.

 

목회적으로도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우리는 모르면 책임이 적으니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낫다고 가르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빛을 주실 때 그 빛을 감사히 받고 그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복입니다. 동시에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을 정죄해서도 안 됩니다. 그가 아직 알지 못한다는 사실과 진리를 알고도 거부한다는 것은 같은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AC.408-410은 주님께서 인간의 상태를 얼마나 세밀하게 구별하시며, 황폐 가운데서도 다시 진리를 받을 수 있는 곳을 마련하여 새로운 아침을 여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AC.408 심화 1)

 

 

 

AC.408, 창4:19, ‘교회가 황폐해진 뒤에야 새 아침이 밝는 이유 - 거룩한 것의 모독과 새로운 시작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8 교회가 더 이상 아무런 신앙도 남아 있지 않을 만큼 황폐해졌을 때, 그때 비로소, 그 이전이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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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4:19)

 

AC.408

 

교회가 이상 아무런 신앙도 남아 있지 않을 만큼 황폐해졌을 , 그때 비로소, 이전이 아니라, 교회는 새롭게 시작됩니다. 새로운 빛이 비치기 시작하는데, 이것을 말씀에서는 아침(morning)이라고 부릅니다. 교회가 황폐해지기 전에는 새로운 , 아침(morning) 밝아 오지 않는 이유는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이 모독적인 것들과 뒤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는 동안에는 빛이나 체어리티에 속한 어떤 것도 안에 스며들게 없습니다. 가라지(tares) 모든 좋은 (good seed)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이상 남아 있지 않으면 신앙을 이상 모독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전해지는 것을 이상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인정하고 믿지는 않으면서 단지 알고 있기만 하는 사람들은 모독할 없습니다. 오늘날의 유대인들이 그러합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 가운데 살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주님을 자신들이 기다려 왔고 지금도 계속 기다리는 메시아로 인정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인정하거나 믿지 않으므로 모독할 없습니다. 주님에 관하여 들은 무슬림들(Mohammedans) 이방인들(gentiles)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교회가 아무것도 인정하거나 믿지 않게 때까지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지 않은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When a church has been so vastated that there is no longer any faith, then and not before, it begins anew, that is, new light shines forth, which in the Word is called themorning.The reason why the new light ormorningdoes not shine forth until the church is vastated, is that the things of faith and of charity have been commingled with things profane; and so long as they remain in this state it is impossible for anything of light or charity to be insinuated, since thetaresdestroy all thegood seed.But when there is no faith, faith can no longer be profaned, because men no longer believe what is declared unto them; and those who do not acknowledge and believe, but only know, cannot profane, as was observed above. This is the case with the Jews at the present day, who in consequence of living among Christians must be aware that the Lord is acknowledged by Christians to be the messiah whom they themselves have expected, and still continue to expect, but yet they cannot profane this because they do not acknowledge and believe it. And it is the same with the Mohammedans and gentiles who have heard about the Lord. It was for this reason that the Lord did not come into the world until the Jewish church acknowledged and believed nothing.

 

해설

AC.408은 교회의 황폐와 새로운 시작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앞의 AC.407에서 스베덴보리는 교회가 시간이 흐르면서 참된 신앙에서 떠나 마침내 신앙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 이르지만, 그 가운데서도 교회의 어떤 핵심은 보존된다고 했습니다. 태고교회의 남은 부분이 홍수를 지나서도 계속되었으며, 그 남은 부분을 노아라고 부른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이제 AC.408은 왜 이전 교회가 황폐해진 뒤에야 새로운 교회가 시작되는지를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가 더 이상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을 만큼 황폐해졌을 때 비로소 새롭게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빛이 비치기 시작하는 이 상태를 말씀의 아침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아침은 단순히 어둠이 끝난 다음의 시간대를 뜻하지 않습니다. 이전 교회의 황폐 이후에 새로운 신앙과 체어리티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시작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아침은 교회의 영적 상태가 새로워지는 일과 관련됩니다.

 

그렇다면 왜 이전 교회가 완전히 황폐해지기 전에는 새로운 아침이 밝아 올 수 없는 것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이 모독적인 것들과 뒤섞여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문제는 단순히 거짓된 생각이 존재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것을 인정하고 믿으면서도 그것을 모독적인 것과 결합시키는 상태가 문제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계속되는 동안에는 새로운 빛이나 체어리티를 그 안에 스며들게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가라지가 모든 좋은 를 파괴한다고 말합니다. 가라지와 좋은 씨는 서로 다른 성격의 것들이 한곳에 뒤섞여 있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이번 문맥에서 좋은 씨는 새롭게 받아들여질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과 관련되며, 가라지는 그것들을 파괴하는 모독적인 것들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이 비유의 핵심은 교회 안에 거룩한 것과 모독적인 것이 뒤섞인 상태에서는 새로운 영적 생명이 제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완전히 사라지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때에는 그것을 더 이상 모독할 수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전해지는 것을 더 이상 인정하거나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구별은 아는 인정하고 믿는 의 차이입니다. 어떤 사람이 거룩한 진리에 관하여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진리를 자기 신앙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지 알고 있을 뿐 인정하거나 믿지 않는 경우에는 이번 문맥에서 말하는 모독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번호에서 말하는 모독은 단순한 무지나 불신앙과 구별됩니다. 거룩한 것에 관한 정보를 접했다는 사실만으로 모독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논지는 거룩한 것을 실제로 인정하고 믿는 상태와 그것을 모독적인 것에 결합시키는 상태 사이의 관계에 있습니다. 교회가 황폐해져 더 이상 신앙을 인정하지 않게 되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거룩한 것을 모독하는 상태도 지속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구별을 설명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시대에 기독교인들 가운데 살던 유대인들을 예로 듭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자신들은 그것을 인정하거나 믿지 않으므로 그 신앙을 모독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주님에 관하여 들은 무슬림들과 이방인들도 같은 원리의 예로 제시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려는 것은 특정 집단에 대한 도덕적 평가가 아니라, 어떤 진리를 외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그것을 자신의 신앙으로 인정하는 것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이 대목의 오늘날AC가 집필되던 스베덴보리의 시대를 가리킵니다. 또한 그가 유대인과 무슬림과 이방인을 예로 든 것은 그의 신학적 관점에서 모독의 조건을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를 오늘날 해당 종교에 속한 모든 사람의 실제 신앙 상태에 대한 일반적인 사실 판단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사람마다 무엇을 알고, 무엇을 인정하며, 실제로 무엇을 믿는지는 외적인 종교적 소속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유대교회가 아무것도 인정하거나 믿지 않게 될 때까지 세상에 오시지 않은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강림 시기를 교회의 황폐와 모독의 문제에 연결하는 그의 신학적 해석입니다. 이전 교회가 거룩한 것을 인정하면서도 모독적인 것과 뒤섞는 상태에 있는 동안에는 새로운 빛을 받아들일 수 없었으므로, 그 상태가 끝난 뒤에 새로운 시작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을 당시 모든 유대인이 아무런 종교적 믿음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역사적 진술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주님에 관한 참된 신앙이라는 자신의 신학적 기준으로 유대교회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제 AC.407AC.408을 함께 읽으면 교회의 황폐와 보존, 그리고 새로운 시작의 관계가 드러납니다. 이전 교회는 참된 신앙에서 떠나 황폐해집니다. 그러나 교회의 모든 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가운데 어떤 핵심이 남아 보존됩니다. 그리고 이전 교회의 황폐가 끝에 이르러 새로운 신앙과 체어리티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열릴 때, 새로운 빛이 비치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아침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황폐를 그 자체로 좋은 일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하는 것은 교회의 비극적인 상태입니다. 다만 주님께서는 그러한 상태에서도 교회의 남은 부분을 보존하시며, 거룩한 것과 모독적인 것이 뒤섞인 상태가 더 이상 지속되지 않을 때 새로운 시작의 길을 여십니다. 따라서 새로운 아침은 인간이 신앙을 잃었기 때문에 자동으로 찾아오는 결과가 아니라, 황폐 가운데에서도 교회의 핵심을 보존하시고 새로운 빛을 주시는 주님의 섭리와 관련됩니다.

 

이것은 개인의 거듭남을 생각할 때에도 조심스럽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에게 신앙이 없다고 느끼거나 영적으로 메마른 시기를 겪는다고 해서 반드시 이번 번호에서 말하는 교회의 황폐에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더 깊이 무너져야만 주님께서 새롭게 하신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AC.408은 우선 교회 전체의 상태와 새로운 교회의 시작을 설명하는 번호입니다. 개인에게 적용할 때에는 거룩한 것을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악과 결합시키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리고 새로운 빛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러한 결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원리를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결국 AC.408의 중심은 황폐가 끝나야 아침이 시작된다는 말에만 있지 않습니다. 왜 그런 질서가 필요한지를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거룩한 것을 인정하면서 모독적인 것과 뒤섞는 상태에서는 새로운 신앙과 체어리티가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전의 신앙이 완전히 사라져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모독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면 새로운 시작의 길이 열립니다. 그리고 그때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빛이 비치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아침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새로운 시작입니다. (AC.408 해설)

 

심화

1. 진리를 모르면 모독할 없다면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나은가?

 

AC.408 심화 1, ‘진리를 모르면 모독할 수 없다면 차라리 모르는 것이 더 나은가?’

AC.408 심화1. 진리를 모르면 모독할 수 없다면 차라리 모르는 것이 더 나은가? AC.408-410을 읽으면 매우 자연스럽게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의 거룩한 것들을 알면서 그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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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9, 창4:19, ‘아다와 씰라는 왜 라멕의 아내인가? - 속 교회와 겉 교회는 하나입니다’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9‘가인’(Cain)이라 불린 이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이단은 시간이 흐르면서 황폐해졌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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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7, 창4:19, ‘교회가 황폐해져도 남아 있는 핵심 - 노아로 이어지는 교회의 보존’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7교회 전체의 상태는 이와 같습니다. 교회는 시간이 흐르면서 참된 신앙에서 떠나 마침내 신앙이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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