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PR.008 | 개신교인(Protestants)의 무의식 속 오류와 뒤섞인 신앙 100선

 

‘구원받았는지 확신하지 못한다면 아직 믿음이 부족한 것이다’ - 구원의 확신은 믿음의 크기인가, 주님을 신뢰하는 삶의 열매인가?

 

해설

개신교 신앙에서 ‘구원의 확신’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많은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을 뿐 아니라, 자신이 이미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신해야 한다고 배웁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구원받으셨습니까?’라고 묻고, 그 사람이 ‘그렇습니다. 저는 구원받았습니다’라고 대답하면 믿음이 분명한 사람으로 여기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또는 ‘주님께서 아시겠지요’라고 대답하면 아직 믿음이 부족하거나 구원의 진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사람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태도에는 주님의 구원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어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연약함과 죄 때문에 끊임없이 불안해하는 사람에게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신뢰하도록 권면하는 일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확신하는 정도가 실제 믿음의 깊이를 결정하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이 자신의 구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면 그는 반드시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이며, 반대로 자신의 영적 상태를 조심스럽게 돌아보면서 구원을 확언하지 못하는 사람은 믿음이 부족한 것입니까? 스베덴보리는 구원의 확신 자체를 부정하지 않지만, 그 확신이 어디에서 비롯되는가를 매우 중요하게 다룹니다. 그는 주님에게서 오는 영적인 확신과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종교적 확신을 구별하면서, 참된 믿음의 확신은 단순히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강한 신념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영적 생명과 관계된다고 설명합니다.

 

먼저 전통적인 개신교의 구원의 확신에 관한 가르침을 정확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개신교 안에는 구원의 확신을 강하게 강조하는 전통이 있으며, 특히 복음주의적인 신앙생활에서는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믿음의 중요한 증거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모든 개신교 전통이 확신의 유무를 참된 믿음의 유무와 동일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8장은 이 문제에 관하여 매우 신중한 설명을 제시합니다. 제18장 1항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고 사랑하며 선한 양심으로 살아가려는 사람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제18장 3항에서는 이러한 확신이 믿음의 본질에 반드시 속하는 것은 아니므로, 참된 신자라도 확신을 얻기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리고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명시합니다. 또한 제18장 4항은 참된 신자라도 죄와 유혹, 여러 영적 어려움 때문에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거나 약해지거나 한동안 사라질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개혁주의의 대표적인 신앙고백 자체가 구원의 확신을 귀중하게 여기면서도, 확신이 부족하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에게 참된 믿음이 없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원받았는지 확신하지 못한다면 믿음이 부족하다’는 표현은 개신교의 공식적인 구원론 전체를 정확하게 나타내기보다, 일부 신앙생활에서 지나치게 단순화되어 나타날 수 있는 판단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 역시 구원의 확신과 관련하여 서로 구별해야 할 말씀들을 제시합니다. 요일5:13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고 기록했다고 말씀합니다. 롬8:16에서는 성령께서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신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신자가 주님의 구원을 신뢰하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성경은 동시에 인간이 자신을 지나치게 확신하는 태도를 경계합니다. 고전10:12는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권면하며, 마7:21-23에서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 이름으로 많은 일을 행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주님의 뜻과 다른 삶을 살았을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또한 빌3:12에서 바울은 자신이 이미 얻었다거나 온전히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붙잡으신 목적을 향해 계속 나아간다고 고백합니다. 물론 바울의 이 말씀을 그가 구원을 전혀 확신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을 향한 깊은 신뢰와 자신의 영적 성숙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인식이 한 사람 안에서 함께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확신은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하여 조금의 의문도 가져서는 안 된다는 명령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하면서도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주님의 말씀에 따라 계속 살아가도록 이끄는 믿음과 관계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예루살렘의 교리’(The 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NJHD, 1758) NJHD.115에서 믿음이 주는 확신의 성격을 직접 설명합니다. 그는 체어리티와 분리된 믿음에서 비롯되는 확신을 영적인 확신이 아니라 자연적인 확신이라고 구별합니다. 여기서 자연적인 확신이란 어떤 종교적 명제를 강하게 믿거나,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의심하지 않도록 마음을 굳히는 상태와 관계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올바른 교리를 알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며, 성경의 구원 약속을 확실하게 믿기 때문에 자신의 구원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는 자신의 악을 사랑하고 이웃을 해치면서도 그 행동을 고치려 하지 않는다면, 그 확신은 그의 영적 생명을 올바르게 나타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영적 확신이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사랑의 선으로부터 생명과 본질을 얻는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구원의 확신을 선행의 양으로 측정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와 선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가운데 형성되는 영적 신뢰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자신의 구원을 강하게 확신한다고 해서 그 확신이 반드시 영적인 것은 아니며, 반대로 자신의 영적 상태를 겸손하게 살피는 사람에게 확신이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 참된 믿음이 없다고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같은 NJHD.115에서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영적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도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분명하게 설명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영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자신을 믿고 자신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는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그들은 자신을 거듭나게 하시고 천국에 합당하도록 준비시키시는 분이 오직 주님이시며, 그 모든 일이 주님의 순전한 자비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겸손은 자신의 구원에 관하여 어떠한 신뢰나 소망도 가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확신은 더욱 깊고 분명해야 합니다. 다만 자신의 영원한 상태가 이미 확정되었다는 자기 판단과, 주님께서 자신을 구원하고 거듭나게 하신다는 신뢰는 구별해야 합니다. 전자는 자신의 영적 상태에 관한 판단이지만, 후자는 주님의 사랑과 능력에 관한 믿음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내면을 완전하게 알지 못하지만,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시며 진실하게 회개하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은 믿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참된 구원의 확신은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 완전한 판결을 내리는 일이 아니라, 자신을 구원하시는 주님의 자비를 신뢰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에 응답하는 삶과 관계됩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왜 자신의 영적 상태를 완전히 확신하기 어려운 것일까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인간이 자신의 내면을 지배하는 사랑을 완전하게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어느 정도 살필 수 있지만, 그 생각과 행동을 움직이는 모든 동기와 사랑을 충분히 파악하지는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교회에 봉사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봉사 안에는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나 자신의 명예를 높이려는 욕망이 함께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이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상대방이 자신의 기대에 맞게 행동할 때에만 그 사랑을 유지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자신을 매우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내면에는 이미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사랑하고 악을 멀리하려는 진실한 의지가 자라고 있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HH.479-480에서 인간의 영적 상태가 그를 지배하는 사랑과 깊이 관계되며, 사후에도 그 사랑의 성격이 계속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영원한 상태가 순간적인 감정이나 종교적 확신의 강도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궁극적으로 사랑하고 어떤 생명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지배적인 사랑조차 완전하게 파악하지 못할 수 있으므로, 자신의 구원을 확신한다는 감정 자체를 최종적인 영적 판결로 삼는 일에는 신중해야 합니다.

 

이러한 설명은 구원의 확신이 부족한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하는 목회적인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어떤 신자는 자신의 죄와 연약함을 매우 민감하게 느끼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을 쉽게 갖지 못합니다. 그는 자신이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지, 자신의 회개가 충분한지, 여전히 반복되는 잘못 때문에 결국 구원에서 멀어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확신하지 못한다는 것은 믿음이 부족하다는 증거’라고 말한다면, 그는 자신의 믿음을 더욱 의심하고 불안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자신의 신앙을 정직하게 살펴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불안과 의심이 곧 영적인 불신앙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기를 원하기 때문에 자신의 부족함을 더욱 깊이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막9:24에서 한 아이의 아버지는 주님께 자신이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자신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달라고 간구합니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완전한 확신을 먼저 증명하라고 요구하시는 대신 그의 간구를 들으십니다. 이 장면은 믿음 안에 의심과 연약함이 존재할 수 있으며, 그러한 상태에서도 사람이 주님께 도움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이 부족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확신을 억지로 높이라는 압박보다, 주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그분의 자비와 인도하심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는지를 배우도록 돕는 일입니다. 또한 그가 자신의 삶에서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멀리하려는 실제적인 노력을 계속할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여기서 구원의 확신을 얻기 위해 자신의 선행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태도도 경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체어리티와 삶의 중요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자신의 행동을 세밀하게 기록하고 선행의 양을 계산하여 구원의 가능성을 판단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기 위해 충분히 기도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도왔는지, 얼마나 자주 죄를 범했는지를 계속 점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자칫 자신의 영적 상태를 주님이 아니라 자신의 성과에 근거하여 판단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인간이 자신의 공로를 쌓아 하나님께 인정받으려는 태도와 다릅니다. 모든 참된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오며, 인간은 그것을 자신의 자유 안에서 받아들일 뿐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목적은 자신이 구원받기에 충분한 점수를 얻었는지 확인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신이 지금 어떤 악을 정당화하고 있으며, 주님께서 알려 주신 진리에 따라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지 살피는 데 있습니다.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509-510은 참된 믿음과 체어리티가 회개 없이 존재할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TCR.528-530은 참된 회개가 자신의 죄를 살피고 인정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기 위해 선행의 증거를 축적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오늘 자신에게 드러난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반대로 자신의 구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 반드시 깊은 평안과 영적 성숙을 누리고 있다고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종교적인 확신은 때로 신앙의 깊은 신뢰에서 비롯되지만, 때로는 자신의 교리적 입장이나 종교적 경험에 대한 강한 자기 확신에서 비롯될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NJHD.116-118에서 사람이 말씀과 교회의 가르침을 믿으면서도 실제로 그에 따라 살아가지 않을 수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명예와 이익을 위해 종교적 진리를 강하게 확신하기도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겉으로 나타나는 확신의 강도와 그 믿음의 영적 생명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올바른 교회에 속해 있고 정확한 교리를 알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구원을 전혀 의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을 쉽게 정죄하고, 자신의 신앙적 우월성을 즐긴다면 그 확신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확신이 강한 사람을 모두 자기중심적이라고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참된 믿음 안에서 깊은 평안과 신뢰를 누리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확신의 크기가 아니라 그 확신이 어떤 사랑과 삶에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주님의 자비를 신뢰하는 확신은 자신을 높이거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근거가 되기보다, 더욱 겸손하게 회개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구원의 확신과 구원의 소망을 구별하면서도 서로 분리하지 않아야 합니다. 확신은 주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믿음과 관계되며, 소망은 그분의 자비와 인도하심을 신뢰하면서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는 마음과 관계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영적 상태를 완전하게 알 수 없으므로, 이러한 확신과 소망을 자신의 영원한 운명에 관한 절대적인 자기 판결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DP.187에서 스베덴보리는 신적 섭리를 앞에서가 아니라 뒤에서, 곧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미리 보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진 뒤에 영적인 상태에서 인식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 말씀은 자신의 구원에 관한 확신을 직접 다루는 대목은 아니지만, 인간이 주님의 섭리를 신뢰하는 방식에 중요한 빛을 비춥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앞으로 자신을 어떻게 인도하실지, 어떤 시험과 변화를 통하여 자신의 내면을 새롭게 하실지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서 주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붙들고 인도하셨는지를 조금씩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자신의 미래와 영원한 상태를 모두 알고 있어야 비로소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까지 아시는 주님께 맡기면서, 오늘 자신에게 주어진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참된 신뢰는 모든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아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믿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구원에 관하여 질문을 받았을 때 우리는 어떻게 대답하는 것이 적절할까요? 어떤 사람은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분의 자비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확신합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고백은 주님의 구원 능력을 신뢰한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나는 주님을 믿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가려고 노력하지만, 나 자신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는 주님께 맡기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이 두 표현 가운데 어느 하나만을 참된 믿음의 증거로 삼을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실제로 주님을 어떤 분으로 믿고 있으며, 그 믿음이 자신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자신의 구원을 확신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반드시 교만한 것도 아니고, 자신의 구원을 주님께 맡긴다고 말하는 사람이 반드시 믿음이 부족한 것도 아닙니다. 특히 다른 사람에게 구원의 확신을 요구하고 그 대답을 근거로 그 사람의 영적 상태를 판단하는 일에는 신중해야 합니다. 인간의 내면을 완전하게 아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신앙적인 대화에서 더욱 중요한 질문은 ‘당신은 구원받았다고 확신합니까?’ 하나만이 아닙니다. ‘당신은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기를 원합니까?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을 때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돌아서려고 합니까? 그리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일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와 같은 질문도 함께 필요합니다. 이러한 질문들은 사람의 영적 상태를 최종적으로 판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성찰하도록 돕기 위한 것입니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구원받았는지 확신하지 못한다면 아직 믿음이 부족한 것입니까? 주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며, 그분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사실을 신뢰하는 것은 참된 신앙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또한 주님의 자비와 구원의 약속에 대한 확신은 신자에게 평안과 소망을 주고, 더욱 성실하게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도록 하는 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구원에 관한 확신의 강도를 실제 믿음의 깊이와 동일시하거나,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을 믿음이 부족한 사람으로 판단하는 것은 바르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와 분리된 믿음에서 나오는 자연적인 확신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한 삶에 뿌리를 둔 영적인 확신을 구별합니다. 참된 구원의 확신은 자신의 영적 상태를 이미 완성된 것으로 선언하는 데 있지 않고, 자신을 거듭나게 하시고 천국에 합당하도록 준비시키시는 주님의 자비를 신뢰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단지 ‘나는 구원받았다고 얼마나 확신하는가?’가 아닙니다. ‘나는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진심으로 믿는가? 그분의 말씀에 따라 자신의 악을 살피고 멀리하며,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실제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그리고 나 자신의 영적 상태를 판단하는 일보다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삶에 마음을 두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믿음의 성숙은 자신에 관한 의심이 완전히 사라지는 상태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더라도, 그 연약함보다 크신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신뢰하면서 오늘도 그분의 인도하심에 응답하는 삶에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결국 참된 구원의 확신은 자신이 이미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확보했다는 자기 확신이 아니라, 오직 주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시고 새롭게 하실 수 있다는 영적인 신뢰이며, 그 신뢰가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실제 삶에서 선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구원의 확신과 믿음의 성숙, 그리고 주님께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맡기는 참된 신뢰의 의미입니다. (PR.008 해설)

 

요약

‘구원받았는지 확신하지 못한다면 아직 믿음이 부족한 것이다’라는 말에는 주님의 구원 약속을 신뢰하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는 정도를 실제 믿음의 깊이와 동일시하거나, 확신이 부족한 사람을 영적으로 미성숙한 사람으로 판단하는 것은 오류가 될 수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8장 3-4항도 참된 신자에게 구원의 확신이 늦게 찾아올 수 있으며, 이미 가진 확신도 죄와 유혹, 영적 어려움으로 흔들릴 수 있다고 인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예루살렘의 교리’(The 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NJHD, 1758) NJHD.115에서 체어리티와 분리된 믿음의 확신을 자연적인 확신으로,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선에 뿌리를 둔 확신을 영적인 확신으로 구별합니다. 또한 영적 믿음을 가진 사람은 주님께서 자신을 거듭나게 하시고 천국에 합당하도록 준비시키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으며, 그 모든 일이 주님의 자비로 이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NJHD.116-118은 강한 종교적 확신이 반드시 참된 믿음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자기중심적인 목적에서 비롯된 확신도 존재할 수 있다고 경계합니다.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HH.479-480에 따르면 인간의 영적 상태는 순간적인 종교 감정이나 확신의 강도보다 그를 지배하는 사랑과 깊이 관계됩니다. 따라서 자신의 구원에 관한 불안이나 의심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참된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구원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고 해서 반드시 영적으로 성숙한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자비를 신뢰하면서 자신의 악을 죄로 인정하고 멀리하며, 그분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실제 삶에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구원의 참된 확신은 자신의 영원한 상태를 스스로 확정하는 판단이 아니라, 자신을 구원하시고 거듭나게 하시는 주님을 믿으며 그분의 사랑과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영적인 신뢰입니다.

 

 

 

PR.007. ‘착하게 사는 것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구원에서 훨씬 중요하다’

SL.PR.007 | 개신교인(Protestants)의 무의식 속 오류와 뒤섞인 신앙 100선 ‘착하게 사는 것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구원에서 훨씬 중요하다’ - 믿음과 선한 삶은 비교할 대상인가, 하나의 영적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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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EO.007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의 본질은 알 수 없지만 그 에너지에는 참여할 수 있다’ - 신적 참여와 주님의 인플럭스

 

해설

동방정교회가 ‘하나님의 본질은 알 수 없지만 그 에너지에는 참여할 수 있다’고 가르칠 때, 그 중심에는 인간이 하나님과 실제로 결합할 수 있는가 하는 매우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앞선 EO.006에서는 하나님의 본질과 에너지를 구별하는 이유와 그 신학적 배경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에너지에 참여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간이 하나님의 신적 생명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떤 경험이며, 그러한 참여는 인간의 내면과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옵니까? 동방정교회는 하나님의 본질 자체는 어떤 피조물도 이해하거나 소유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창조되지 않은 에너지에는 실제로 참여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에너지에 참여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거나 특별한 종교적 감동을 느끼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생명과 은혜를 인간에게 전달하시고, 인간이 그 은혜를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과 참된 친교를 이루는 일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동방정교회의 구원론과 영성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 역시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생명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들이는 존재라고 가르칩니다. 인간의 이해와 의지, 사랑과 지혜, 그리고 거듭남의 모든 과정이 주님의 ‘인플럭스’(influx)에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교회가 말하는 신적 에너지에의 참여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적 생명의 유입은 같은 영적 현실을 설명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비슷해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가르침입니까? 이 질문을 살펴보려면 두 전통이 말하는 신적 참여의 의미와 인간의 수용, 그리고 그 참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영적 변화를 차례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동방정교회에서 신적 에너지에의 참여는 ‘신화’(theosis)라는 가르침과 분리하여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화란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닮아 가며, 하나님의 신적 생명에 참여함으로써 그분과 결합하는 것을 뜻합니다. 처음 이 표현을 접하면 인간이 결국 하나님이 된다는 뜻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교회는 인간이 창조주와 동일한 신적 본질을 가지게 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인간은 영원히 피조물로 남아 있으며,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구별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되지 않은 은혜에 참여함으로써 실제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정교회가 강조하는 것은 신화가 단순히 하나님을 닮은 행동을 외적으로 모방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인간이 사랑과 자비와 거룩함을 실천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변화의 근원은 인간 자신의 도덕적 노력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인간에게 실제로 역사하시고, 인간이 그 은혜에 참여하기 때문에 영적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정교회는 이러한 신적 참여가 인간의 개별성을 없애거나 의지를 무력화하는 것도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오히려 하나님과의 결합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창조된 목적에 더욱 충실한 존재가 됩니다. 따라서 정교회의 신화는 인간이 신성을 소유하여 독립적인 신이 되는 과정이 아니라, 자신의 피조물성을 유지하면서 하나님의 생명에 점점 더 깊이 참여하는 과정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신적 에너지와 하나님의 본질을 구별하는 이유가 단순한 형이상학적 논쟁에 있지 않고, 인간의 구원과 영적 완성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정교회가 이러한 가르침의 성경적 근거로 중요하게 여기는 말씀은 벧후1:4입니다. 이 구절은 신자들이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도록 부름받았다고 증언합니다. 여기서 ‘참여’(koinonos)는 하나님의 생명과 무관한 외적인 보상을 받는다는 뜻보다 훨씬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정교회는 이 말씀을 인간이 하나님의 생명과 거룩함에 실제로 참여하도록 창조되고 구원받았다는 증언으로 이해합니다. 또한 요15:4-5에서 주님께서는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제자들도 주님 안에 거하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인간이 자기 능력만으로 영적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갈2:20에서 바울은 이제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사신다고 고백하며, 엡3:19에서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단순히 외부에서 명령을 내리고 복종하는 관계에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성경이 인간의 신적 참여를 증언한다고 해서 곧바로 정교회의 본질과 에너지 구별 전체를 명시적으로 가르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본질과 에너지라는 신학적 개념은 이러한 성경의 증언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과정에서 발전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증언하는 주님과의 실제적인 결합이라는 진리와, 각 신학 전통이 그 결합을 설명하는 개념적 구조를 구별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정교회에서 인간은 어떤 과정을 거쳐 신적 에너지에 참여하게 됩니까? 동방정교회의 영성 전통은 일반적으로 ‘정화’(katharsis), ‘조명’(photismos), ‘신화’(theosis) 또는 하나님과의 결합이라는 흐름으로 영적 성장을 설명합니다. 정화는 인간이 죄와 정념에서 벗어나 자신의 내면을 깨끗하게 하는 과정입니다. 조명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인간의 마음이 밝아지고 영적 진리를 더욱 깊이 이해하는 과정입니다. 신화는 이러한 정화와 조명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에 더욱 충만하게 참여하며 그분과 결합하는 영적 완성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를 반드시 순서대로 한 번씩 통과하고 끝나는 기계적인 단계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영적 삶을 살아가는 동안 계속 회개하고, 하나님의 빛을 받아들이며, 더욱 깊은 사랑과 거룩함으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정교회는 기도와 금식, 성찬과 회개, 자선과 이웃 사랑을 이러한 영적 삶의 중요한 요소로 여깁니다. 특히 ‘시너지’(synergeia), 곧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이라는 개념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동등한 능력을 가진 두 주체로서 구원을 절반씩 이루어 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원의 근원과 능력은 하나님의 은혜에 있지만,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사용하여 그 은혜에 응답하고 협력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강제로 거룩하게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롭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도록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 그리고 주님의 인플럭스를 받아들이는 과정과 비교할 만한 중요한 접점을 제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1763) DLW.4에서 하나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천사들과 인간은 생명을 받아들이는 존재라고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이것은 그의 신학 전체를 이해하는 근본적인 원리입니다. 인간이 살아 있고 생각하고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인간 자신에게 생명의 근원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생명은 오직 주님에게 있으며, 인간은 그 생명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또한 인간은 자신이 스스로 살아 있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것처럼 경험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경험을 단순한 착각이라고 무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처럼 느끼는 일이 신적 섭리와 거듭남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가르칩니다. 만일 인간이 자신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외부의 힘에 의해 강제로 움직이는 것으로만 경험한다면, 그는 자신의 의지로 주님을 사랑하거나 악을 멀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주님께서 끊임없이 생명을 공급하시기 때문에 인간은 존재하며, 그 생명을 마치 자기 자신의 것처럼 사용하면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설명에서 인플럭스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때때로 특별한 능력을 보내시는 사건이 아닙니다. 피조물이 존재하고 살아가며 생각하고 사랑하는 모든 순간을 가능하게 하는 주님의 지속적인 생명 공급입니다. 인간은 한순간도 이 신적 생명의 유입 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단순히 종교적인 행위를 할 때만 발생하는 특별한 관계가 아니라, 인간의 모든 존재와 활동을 떠받치는 가장 근본적인 관계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생명을 공급하신다는 사실과 모든 인간이 주님과 영적으로 결합해 있다는 사실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선하든 악하든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악한 사람도 생각하고 사랑하고 선택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그 역시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악이 주님에게서 나온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것은 언제나 선과 진리이며, 악과 거짓은 인간이 그 생명을 잘못된 방향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발생합니다. 이것은 햇빛이 깨끗한 물과 오염된 물에 동일하게 비추더라도 그 빛을 받아들이는 대상의 상태에 따라 서로 다른 현상이 나타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자연계의 햇빛과 인간의 영적 상태를 완전히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생명의 근원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수용자의 상태를 구별하는 데에는 도움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1764) DP.28-33에서 신적 섭리의 목적이 인류로 천국을 이루고 인간을 주님과 결합시키는 데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인플럭스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이 단순히 살아 있도록 유지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올바르게 받아들여 점점 더 깊은 영적 결합에 이르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보편적인 생명의 공급과 구원에 이르는 영적 결합은 구별되지만 서로 무관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생명을 공급하시는 것은 그 생명을 받아들이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과 결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결합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스베덴보리는 DLW.242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는 영적 빛은 인간의 여러 단계에 흘러들어올 수 있지만, 영적 열은 인간이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고 주님을 바라보는 정도에 따라 받아들여진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영적 빛은 지혜와 진리에, 영적 열은 사랑과 선에 상응합니다. 이 구별은 인간이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과 그 진리를 실제로 사랑하고 실천하는 능력이 언제나 동일한 수준에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과 신학을 깊이 연구하여 상당히 높은 수준의 영적 진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교만과 이기심을 버리지 않고, 자신에게 유리한 거짓을 정당화하며, 이웃을 사랑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의 의지가 주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해는 영적 빛을 받아들였지만 의지는 그에 상응하는 영적 열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영적 성숙이 진리를 얼마나 많이 아는가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진리가 의지 안에서 사랑과 결합하고, 실제 삶에서 선한 행위로 나타나는가 하는 점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인플럭스에 참되게 응답한다는 것은 단순히 신적인 빛을 경험하거나 높은 교리를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있는 악을 죄로 인정하고, 그것을 멀리하려 애쓰며,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가 자신의 생각과 선택과 행동을 변화시키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동방정교회의 신화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사이에 매우 중요한 공통점을 발견합니다. 두 전통 모두 인간이 자신의 자연적 능력만으로 영적 완성을 이룰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인간이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한다는 것이 단순히 외적인 신앙고백이나 지식의 축적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정교회에서는 인간이 성령의 은혜에 협력하면서 정념을 정화하고 하나님을 닮아 가야 하며,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인간이 주님의 인플럭스를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악을 멀리하고 선과 진리를 결합해야 합니다. 두 경우 모두 인간은 스스로 신적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없지만, 자신의 자유로운 응답과 삶의 변화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차이도 분명합니다. 정교회의 신화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적 생명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되며, 그 참여를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이 창조되지 않은 신적 에너지입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은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에게서 나오는 신적 사랑과 지혜의 유입과 수용을 중심으로 이해됩니다. 정교회는 인간이 신적 에너지에 참여하지만 하나님의 본질에는 참여하지 않는다고 설명하고,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생명 자체가 아니라 생명을 받아들이는 존재이며,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수용함으로써 그분과 결합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두 전통은 인간의 영적 변화를 설명하는 데 상당한 접점을 가지지만, 삼위일체와 신적 생명, 그리고 하나님과 피조물의 결합을 이해하는 신학적 구조에서는 같지 않습니다. 이러한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각각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정교회의 신화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을 비교할 때 한 가지 더 깊은 질문이 생깁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결합할수록 인간 자신의 자유와 개별성은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과의 결합이 깊어지면 인간은 점차 자신의 고유한 생각과 의지를 잃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 움직이는 수동적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까? 동방정교회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하는 인간은 자신의 인격을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참된 인간의 모습을 회복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신적 에너지에의 참여가 인간을 창조주와 동일한 본질로 변화시키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DP.42-44에서 주님과의 결합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더욱 자유로워지고 자신이 자기 자신인 것처럼 더욱 분명하게 느끼지만, 동시에 자신에게 있는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더욱 깊이 인정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역설처럼 느껴집니다. 주님께 더욱 의존할수록 인간이 더욱 자유로워진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자유는 자기 욕망에 얽매여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사랑하고 진리를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영적 능력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악한 사랑에서 벗어나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일수록, 그는 외부의 강제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선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과의 참된 결합은 인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더욱 온전한 인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신적 참여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도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을 특별한 영적 체험을 얻는 일로 생각합니다. 기도 중에 강렬한 평화를 느끼거나, 신비로운 빛을 보거나, 평소에는 알 수 없었던 영적 세계에 관한 지식을 얻는 일이 신적 참여의 증거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동방정교회의 헤시카즘 전통에는 신적 빛에 관한 가르침이 있지만, 그 전통 역시 외적인 신비 현상 자체를 영적 완성의 기준으로 삼지 않습니다. 마음의 정화와 겸손, 회개와 사랑이 결여된 상태에서 특별한 체험만을 추구하는 것은 오히려 영적 미혹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서도 참된 영적 상태는 특별한 체험이나 높은 지식만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천국의 빛에 속한 진리를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의지가 여전히 이기적인 사랑을 따르고 있다면, 그는 아직 그 진리를 자신의 생명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특별한 영적 체험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어려운 이웃을 돕고, 자신의 이익보다 정직을 선택하며, 주님의 계명을 따라 살아가려 한다면, 그의 삶에서는 이미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외적인 행동만으로 한 사람의 내면 전체를 최종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참된 영적 상태는 그 행동의 내적인 사랑과 동기에 관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적 참여가 실제 삶의 사랑과 선을 향해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쓰임’(use)에 관한 가르침이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가 인간 안에서 결합할 때 그것이 실제적인 쓰임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사랑은 단순히 마음속에 따뜻한 감정을 가지는 것이 아니며, 지혜는 단순히 올바른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선을 이루고자 하며, 지혜는 그 선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를 밝혀 주고, 쓰임은 그 사랑과 지혜가 실제로 열매 맺는 자리입니다. DLW.241에서는 사랑과 지혜와 쓰임의 관계를 목적과 원인과 결과에 비유합니다. 인간이 무엇을 사랑하는가에 따라 그의 생각과 선택이 형성되며, 결국 그 사랑은 실제 행동과 삶의 방향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관점에서 주님과의 결합은 교회 안에서 경험하는 특별한 종교적 순간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가족을 돌보고,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며, 어려운 사람을 돕고, 공동체 안에서 정의와 정직을 지키는 일도 주님의 사랑과 지혜가 실제적인 쓰임으로 나타나는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동방정교회 역시 참된 영적 삶이 예배당과 수도원 안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며, 가난한 이웃을 돌보고 자비를 실천하는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신적 참여를 말하면서 일상의 선한 쓰임을 소홀히 한다면, 우리는 두 전통이 함께 강조하는 중요한 영적 진리를 놓치게 됩니다. 하나님께 가까워진다는 것은 세상을 떠나 추상적인 신비 속에 머무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사랑과 지혜를 가지고 세상 속에서 더욱 선한 사람이 되어 가는 일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더욱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서 영적 지식을 많이 쌓았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랑이시며, 모든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이나 이웃이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지 않을 때 쉽게 분노하고, 자신이 옳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상대방을 모욕하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변명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신학적 지식만이 아닙니다.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진리가 자신의 의지와 사랑을 변화시키도록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일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특별한 신학적 지식은 많지 않더라도 자신의 분노를 살피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려 애쓰며, 잘못했을 때 사과하고, 누군가에게 실제적인 도움이 되려고 노력한다면,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의 범위 안에서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고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은 자신의 노력만으로 거듭날 수 없으며, 선을 행했다고 해서 그 선의 공로를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께서 선을 행할 능력과 기회를 주셨으며,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행동하면서도 그 선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정교회가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협력, 그리고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적 인플럭스와 인간의 자유로운 수용은 바로 이러한 일상적인 삶의 문제에서 의미 있는 비교의 대상이 됩니다. 신적 참여의 참된 의미는 결국 인간이 얼마나 특별한 영적 존재가 되었는가보다, 그가 얼마나 주님께 받은 사랑과 진리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알 수 없지만 그 에너지에는 참여할 수 있습니까? 동방정교회는 그렇다고 고백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무한한 본질을 소유하거나 완전히 파악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창조되지 않은 신적 에너지에 참여함으로써 그분과 실제로 결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영원히 접근할 수 없는 분으로 남아 계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과 은혜를 실제로 전달하시며 인간을 거룩하게 변화시키신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인간은 생명 자체가 아니라 생명을 받아들이는 존재이며, 모든 영적 생명과 사랑과 지혜는 주님에게서 온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의 결합을 창조되지 않은 신적 에너지에의 참여라는 개념보다, 주님에게서 흘러들어오는 신적 사랑과 지혜의 인플럭스와 인간의 수용, 그리고 선과 진리의 결합을 통한 거듭남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두 전통은 인간이 하나님과 실제로 결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만나지만, 그 결합의 신학적 구조와 의미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신적 에너지와 인플럭스를 단순히 같은 개념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두 전통의 가르침을 통해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결합은 단순한 지적 이해나 외적인 종교 행위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생명과 사랑과 지혜를 공급하시며, 인간은 자신의 자유 안에서 그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며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고, 받은 진리를 사랑으로 실천하며, 일상의 선한 쓰임을 기쁨으로 감당할 때, 주님과의 결합은 우리의 내면과 삶에서 점점 더 깊어집니다. 결국 참된 신적 참여는 인간이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가 되는 일이 아니라, 무한하신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면서 더욱 참된 인간으로 거듭나는 일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신적 에너지에의 참여와 주님의 인플럭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과 결합한다는 것의 영적 의미입니다. (EO.007 해설)

 

요약

동방정교회는 하나님의 본질은 인간이 파악하거나 소유할 수 없지만, 창조되지 않은 신적 에너지에는 실제로 참여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인간이 하나님과 참된 친교를 이루고 신화에 이른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참여는 단순한 신비 체험이나 도덕적 모방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인간의 내면과 삶이 실제로 변화되는 과정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인간은 생명 자체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들이는 존재라고 설명하며, 모든 영적 변화가 신적 사랑과 지혜의 인플럭스에 의존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정교회의 신적 에너지와 스베덴보리의 인플럭스는 서로 다른 신학적 구조에 속하므로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정교회는 인간이 창조되지 않은 신적 에너지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과 결합한다고 설명하고,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자신의 자유 안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함으로써 거듭난다고 설명합니다. 두 전통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 없이 영적 완성에 이를 수 없으며, 참된 신앙이 삶의 변화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만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영적 진리를 이해하는 것과 그 진리를 실제로 사랑하는 것을 구별하면서, 주님의 인플럭스를 올바르게 받아들이는 일이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참된 결합은 신적 본질을 소유하거나 특별한 체험을 얻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여 더욱 자유롭고 선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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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EO.006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의 본질과 에너지는 구별된다’ - 인간은 하나님 자신과 어떻게 결합하는가

 

해설

동방정교회의 신학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알아야 할 중요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본질과 에너지는 구별된다’는 교리입니다. 처음 이 말을 접하면 다소 낯설게 느껴집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그분의 본질과 속성과 활동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동방정교회는 하나님의 본질과 에너지를 구별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본질’(ousia)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 안에서 어떠한 분이신가를 가리키며, ‘에너지’(energeia)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고 피조물 안에 실제로 역사하시는 신적 활동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 에너지는 현대인이 흔히 생각하는 물리적 에너지나 어떤 비인격적인 힘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별도의 능력도 아니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독립적인 중간 실체도 아닙니다. 동방정교회는 하나님의 에너지 역시 창조되지 않은 신적 실재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에너지에 참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내신 어떤 효과만을 경험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실제적인 역사하심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이 가르침에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초월성을 보존하면서도 인간이 하나님과 참으로 결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려는 깊은 신학적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본질과 에너지가 구별된다면, 인간은 하나님 자신과 결합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어떤 신적 활동과만 결합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이 구별은 스베덴보리가 가르치는 신적 사랑과 지혜의 ‘인플럭스’(influx)와 어떻게 만나고 달라집니까? 바로 이 문제가 이번 해설의 중심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특히 14세기 동방정교회의 신학자이자 수도사였던 그레고리오스 팔라마스(Gregory Palamas, 1296-1359)의 논쟁을 통하여 체계적으로 정리되었습니다. 당시 아토스산의 수도사들은 마음의 고요함 속에서 끊임없이 기도하고, 정념을 정화하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신적 빛을 경험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영적 전통을 ‘헤시카즘’(hesychasm)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칼라브리아의 바라암(Barlaam of Calabria)은 수도사들이 주장하는 신적 빛의 경험과 하나님에 관한 인식의 문제를 비판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본질을 피조물이 알 수 없다면, 인간이 실제로 경험한다고 말하는 신적 빛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논쟁의 중심으로 떠올랐습니다. 팔라마스는 하나님의 본질 자체는 어떤 피조물도 파악하거나 소유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창조되지 않은 에너지는 인간에게 실제로 전달되고 경험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러한 구별을 통해 그는 하나님께서 초월적인 분으로 남아 계시면서도 인간에게 참으로 임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보존하려 했습니다. 134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비롯하여 1347년과 1351년의 공의회들은 팔라마스의 주요 가르침을 지지했으며, 이후 본질과 에너지의 구별은 동방정교회의 중요한 교리적 전통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물론 이 구별의 사상적 뿌리가 팔라마스에게서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 앞선 교부들에게도 하나님의 본질은 이해할 수 없지만 그분의 역사하심은 알 수 있다는 가르침이 나타납니다. 팔라마스는 이러한 전통을 자신의 시대에 제기된 신학적 문제와 영적 체험의 논쟁 속에서 더욱 정교하게 발전시켰다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여기서 동방정교회가 본질과 에너지를 구별하는 이유를 조금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의 본질 자체에 참여한다고 말한다면, 피조물이 창조주와 본질적으로 동일해질 수 있다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창조되지 않으신 분이시지만, 인간은 유한하며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된 선물이나 효과에만 참여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인간이 실제로 하나님 자신과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들어 내신 어떤 것과만 관계를 맺는다는 문제가 생깁니다. 동방정교회의 본질과 에너지 구별은 바로 이 두 가지 위험을 피하려는 시도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본질 자체가 되지 않으며 그 본질을 소유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에너지는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신적 역사하심이므로, 인간은 이를 통해 하나님과 참된 친교를 이루게 됩니다. 이러한 이해는 벧후1:4에서 신자들이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고 말씀하는 대목과 깊이 연결됩니다. 정교회는 이 참여를 인간이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의 존재로 변화된다는 뜻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끝까지 피조물로 남아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창조되지 않은 은혜에 참여함으로써 그분의 생명과 거룩함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본질은 참여할 수 없지만 그 에너지에는 참여할 수 있다는 구별은 인간의 구원을 단순한 법적 선언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결합으로 이해하려는 정교회 구원론의 중요한 토대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특별히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동방정교회는 하나님의 본질과 에너지를 구별하지만, 하나님 안에 서로 분리된 두 신적 존재가 있다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본질은 참하나님이고 에너지는 그보다 낮은 또 다른 신적 존재라는 뜻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본질과 에너지는 실제로 구별되지만 분리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에너지 안에 참으로 현존하십니다. 팔라마스의 가르침에서 신적 에너지는 하나님께서 만들어 내신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영원하고 창조되지 않은 역사하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신적 에너지에 참여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부를 떼어 받아 소유하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본질이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피조물에게 분배되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각각 서로 다른 신적 에너지를 가지고 독립적으로 활동하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정교회의 관점에서 신적 에너지는 세 위격이 공유하시는 하나의 신적 본질에 속하는 역사하심입니다. 이처럼 정교회는 구별과 일치를 함께 보존하려 하지만, 그 구별을 철학적으로 정확히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오늘날에도 다양한 신학적 논의가 있습니다. 따라서 본질과 에너지의 구별을 단순히 인간이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 낸 관념상의 구별이라고 축소해서도 안 되며, 반대로 하나님 안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두 실체가 있다고 설명해서도 안 됩니다. 이 구별의 핵심은 하나님이 나뉘지 않으시면서도 피조물에게 참으로 자신을 전달하실 수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이러한 문제와 연결되는 여러 말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출33:20에서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같은 장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장면도 나타납니다. 이 말씀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연적 인식으로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분이시면서도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함께 보여 줍니다. 또한 마17:1-8의 변화산 사건에서는 예수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고 기록합니다. 정교회의 팔라마스 전통은 이 빛을 단순한 자연적인 광채가 아니라 주님의 신적 영광이 드러난 것으로 이해하며, 이를 ‘타보르의 빛’(Tabor Light)이라고 부릅니다. 정교회는 이 빛을 창조되지 않은 신적 에너지의 현현과 연결합니다. 그러나 성경 본문 자체가 ‘본질과 에너지의 구별’이라는 후대의 신학적 용어를 직접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교회는 성경의 여러 증언을 종합하여 이러한 교리적 설명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한편 요14:9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을 본 사람이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시며, 요14:10에서는 아버지께서 자기 안에 계신다고 가르치십니다. 요17:3에서는 유일하신 참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함께 증언합니다. 이 두 사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연결할 것인가는 정교회와 스베덴보리가 각각 다른 신학적 설명을 제시하는 지점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1763) DLW.14-16에서 신적 사랑과 신적 지혜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를 이루며, 그것들이 하나님의 존재와 존재의 발현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DLW.28-39에서는 신적 사랑과 신적 지혜가 하나님 안에서 구별되면서도 분리되지 않는 하나를 이룬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적 사랑과 지혜는 하나님께서 소유하신 여러 속성 가운데 두 가지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지혜 자체이시고, 이 둘은 하나님의 신적 생명을 이루는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생명과 선과 진리를 전달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는 별도의 피조된 능력을 보내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생명은 주님에게서 나오며, 피조물은 그 생명을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에게서 발출하는 신적 생명을 구별하여 설명합니다. 특히 DLW.83-100에서는 영계의 태양이 주님의 신적 사랑과 지혜로부터 나타나는 최초의 발출이며, 그 태양에서 나오는 영적 열과 빛이 각각 사랑과 지혜에 상응한다고 가르칩니다. 천사들과 인간은 이 영적 열과 빛을 받아들임으로써 사랑하고 생각하며 영적 생명을 유지합니다. 여기서 영계의 태양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최초의 발출이라는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구별을 통해 무한하신 하나님과 유한한 피조물 사이에 생명이 어떻게 전달되는지를 설명합니다.

 

이러한 설명을 처음 접하면 동방정교회의 본질과 에너지 구별이 스베덴보리의 신적 사랑과 지혜 및 그 발출에 관한 가르침과 거의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두 전통 사이에는 주목할 만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무한하시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무한한 본질 자체를 소유하거나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둘째, 인간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실제적인 신적 생명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영적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점입니다. 셋째, 하나님과 인간의 결합이 인간이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해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단순히 인간의 관념이나 종교적 감정으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통점 때문에 정교회의 신적 에너지와 스베덴보리의 신적 발출 및 인플럭스를 같은 교리라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정교회에서 창조되지 않은 신적 에너지는 하나님 자신의 신적 역사하심이며, 인간은 이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과 실제로 결합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가 주님에게서 발출하여 영계의 태양으로 나타나고, 영적 열과 빛을 통해 피조물에게 전달되는 질서와 그 수용을 설명합니다. 영계의 태양과 영적 열과 빛을 정교회의 신적 에너지에 그대로 대응시키면 양쪽의 신학적 구조를 혼동하게 됩니다. 특히 영계의 태양은 정교회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본질이나 신적 에너지와 동일한 항목이 아닙니다. 따라서 두 전통은 하나님과 피조물의 실제적인 결합을 설명하려는 목적에서는 만나지만, 그 결합의 존재론적 구조와 신적 발출의 의미에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서 이 문제를 더욱 깊이 이해하려면 ‘창조와 수용’이라는 개념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DLW.52-55에서 그는 모든 피조물이 신적 사랑과 지혜로부터 창조되었으며, 창조된 것들은 그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는 수용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피조물이 하나님의 신적 본질을 나누어 받아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본질 자체로 이루어졌다면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구별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별을 분명하게 유지합니다. 인간은 생명 자체가 아니라 생명을 받아들이는 존재이며, 사랑 자체나 지혜 자체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에게 생명이 있다는 사실은 단순한 환상이나 비유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끊임없이 생명을 공급하시기 때문에 인간은 실제로 살아 있고 사랑하며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인플럭스는 바로 이러한 신적 생명의 끊임없는 유입을 뜻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스스로 살아 있는 것처럼 느끼고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처럼 경험하지만, 실제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과의 결합은 인간이 자기 안에 신성을 소유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과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이면서 그분과 더욱 깊이 결합하는 과정입니다. 여기에는 정교회의 신화와 비교할 수 있는 중요한 접점이 있지만, 스베덴보리는 이를 특히 인간의 수용 능력과 영적 질서, 그리고 의지와 이해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주님에게서 흘러들어오는 신적 사랑과 지혜를 실제로 받아들입니까? 스베덴보리는 DLW.242에서 인간의 이해는 높은 수준의 영적 빛을 받아들일 수 있지만, 의지가 영적 열에 해당하는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이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고 주님을 바라보는 정도에 달려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하며,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아름다운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자신의 의지가 실제로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해가 영적 진리를 받아들이는 일과 의지가 영적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은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 생명이 충만하게 이루어지려면 이해와 의지가 함께 변화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 점에서 동방정교회의 마음의 정화와 신적 에너지에의 참여라는 가르침과 중요한 비교가 가능합니다. 정교회 역시 하나님과의 결합을 단순한 지식의 획득으로 이해하지 않고, 회개와 기도와 정념의 정화, 사랑과 거룩함의 성장 속에서 이루어지는 실제적인 변화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그 변화의 핵심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인간이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함으로써 선과 진리가 하나가 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신적 결합을 이야기하면서 실제 삶의 변화를 제외한다면, 정교회의 신화도 스베덴보리의 거듭남도 그 핵심을 잃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좀 더 구체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실제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깊은 기도 중에 특별한 빛을 경험하거나 강렬한 평화를 느낄 때 하나님과 가까워졌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성경 말씀을 읽다가 이전에 이해하지 못했던 진리를 깨달을 때 신적 조명을 경험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신앙생활에서 소중한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험 자체만으로 하나님과의 참된 결합이 얼마나 이루어졌는지를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동방정교회의 헤시카즘 전통에서도 신비로운 현상을 무조건 추구하거나 자신의 영적 체험을 절대화하는 태도는 경계의 대상입니다. 신적 빛의 경험을 논의하는 전통 속에서도 겸손과 회개와 분별은 매우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영적 빛을 많이 받아 진리를 깊이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그 진리가 의지 안에서 사랑과 결합하지 않으면 참된 거듭남에 이를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에 관한 신비로운 체험을 이야기하면서도 자신의 교만을 버리지 않고 이웃을 멸시한다면, 그의 체험만으로 영적 성숙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특별한 신비 체험은 없더라도 자신의 욕심과 분노를 살피고, 잘못을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이웃에게 진실하게 선을 행하려는 사람은 이미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를 자신의 삶에 받아들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의 참된 결합을 판단하는 데에는 외적인 체험보다 삶의 방향과 사랑의 성격이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학적 비교에서 또 하나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인플럭스가 모든 인간에게 생명을 공급한다는 사실과 모든 인간이 그 생명을 동일하게 받아들여 영적으로 선해진다는 사실은 다릅니다. 주님께서는 선한 사람에게도 악한 사람에게도 생명을 공급하시지만, 사람은 자신의 내적 사랑과 상태에 따라 그 생명을 서로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주님에게서 악이 흘러나온다는 뜻이 아닙니다. 악은 신적 생명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잘못된 수용에서 나타납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신적 결합은 단순한 존재론적 접촉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모든 인간이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다는 사실은 보편적인 의존의 관계를 나타내지만, 주님과 실제로 선과 진리 안에서 결합하는 일은 인간의 자유로운 수용과 거듭남을 요구합니다. 동방정교회 역시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유지하신다는 사실과 인간이 은혜 안에서 하나님과 구원에 이르는 친교를 누린다는 사실을 구별합니다. 따라서 두 전통 모두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에게 역사하신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피조물이 이미 구원에 이르렀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신적 은혜를 받아들이는 삶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생각할 때에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보편적인 진리와, 인간이 그 생명을 어떤 사랑과 의지로 받아들이는가 하는 영적 문제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본질과 에너지는 구별됩니까? 동방정교회는 그렇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어떤 피조물도 소유하거나 완전히 파악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창조되지 않은 에너지에는 참여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인간은 하나님 자신과 참된 친교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에는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보존하면서도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실제적인 결합을 인정하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하나님과 인간의 결합을 설명하는 중심 개념은 본질과 에너지의 구별보다는 주님 자신의 신적 사랑과 지혜, 그 발출과 인플럭스, 그리고 인간의 수용과 거듭남에 있습니다.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지혜 자체이시고, 피조물은 그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무한한 본질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지 않으면서도 주님에게서 오는 실제적인 생명을 받아들이고 그분과 결합할 수 있습니다. 정교회의 신적 에너지와 스베덴보리의 인플럭스를 동일한 교리로 보아서는 안 되지만, 두 전통은 인간이 하나님을 단순히 멀리서 바라보거나 관념적으로 이해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만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 관한 어떤 신학적 개념을 알고 있는가 하는 문제만이 아닙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과 진리를 실제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주님의 빛으로 진리를 깨닫고, 주님의 사랑으로 악을 멀리하며,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을 기쁨으로 실천할 때, 하나님과의 결합은 더 이상 추상적인 신학적 명제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과 삶에서 실제로 이루어지는 영적 현실이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하나님의 본질과 에너지의 구별,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 자신과 결합한다는 것의 참된 의미입니다. (EO.006 해설)

 

요약

동방정교회는 하나님의 본질과 에너지를 구별하면서, 하나님의 본질은 어떤 피조물도 이해하거나 소유할 수 없지만 그분의 창조되지 않은 신적 에너지에는 실제로 참여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 가르침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보존하면서 인간이 하나님 자신과 참된 친교를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려는 것으로, 특히 그레고리오스 팔라마스의 신학에서 체계적으로 발전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하나님의 무한한 본질을 피조물이 자신의 것으로 소유할 수 없으며,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존재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정교회의 본질과 에너지 구별 대신 신적 사랑과 지혜, 영계의 태양을 통한 신적 발출, 인플럭스 및 인간의 수용이라는 구조로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두 전통은 하나님과 인간의 실제적인 결합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만나지만, 신적 에너지와 신적 발출의 존재론적 의미에서는 구별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영적 진리를 이해하는 것만으로 주님과 온전히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의지와 삶에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결국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신비를 설명하거나 특별한 영적 체험을 추구하는 데 머물지 않고,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여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내는 거듭남의 삶으로 완성되어야 합니다.

 

 

 

EO.005. ‘성령은 성부에게서 발출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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