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갈림길에서 읽는 잠언

 

악에 악으로 대응하지 않으면서도 지혜롭게 자신의 길을 선택하는 법

 

살다 보면 어느 길을 선택해야 할지 몰라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인간관계가 어려워지고 상대방의 부당한 태도로 자신의 앞날까지 불안해질 때, 그리스도인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성경적인가? 참고 견디는 것이 믿음인가, 아니면 그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지혜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선택이란 반드시 더 많은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는 것은 선악의 문제이지만,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이 어떤 길을 선택하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는 지혜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잘못된 행동을 분별했다고 해서 반드시 상대방을 설득하거나 변화시켜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그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지혜로울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선택을 하든 정직하고 책임 있게 행동하며, 자신도 악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나아가다가 해를 받느니라’(잠22:3) 잠언은 위험을 알아보고 피하는 사람을 슬기롭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흔히 어려운 상황에서도 끝까지 견디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지만, 모든 고통을 무조건 참는 것이 성경적 인내는 아닙니다. 실제로 위험하거나 부당한 관계가 반복된다면 적절한 거리를 두는 것도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물론 일시적인 갈등과 지속적인 위협은 구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위험이 분명한데도 믿음이라는 이유로 계속 그곳에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주신 판단력과 분별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능력을 사용하여 악을 피하고 선한 길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는 참된 이웃 사랑, 곧 ‘체어리티’(charity)가 단순한 호의나 무조건적인 관용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참된 사랑에는 무엇이 상대방과 공동체를 위한 선인지 분별하는 지혜가 함께해야 합니다. 악을 방치하거나 부당한 요구를 계속 받아들이는 것이 반드시 사랑은 아닙니다. 상대방을 미워하지 않으면서도 거리를 둘 수 있고, 복수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용서하는 것과 계속 함께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또한 사랑한다는 것이 상대방의 잘못된 행동에 무조건 협력해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때로는 분명한 경계를 세우는 것이 자신과 상대방 모두를 위한 선한 행동일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으나 슬기로운 자는 자기의 행동을 삼가느니라’(잠14:15) 갈등이 깊어지면 사람은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거나, 반대로 분노 때문에 성급하게 행동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잠언이 말하는 지혜는 자신의 감정에 끌려가지 않고 상황을 신중하게 살피는 것입니다. 믿을 만한 사람들의 조언을 듣고, 필요한 사실을 확인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지와 그 결과를 충분히 생각해야 합니다. 상대방과 직접 부딪힐수록 갈등이 커진다면 적절한 공식 절차나 제삼자의 도움을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정당한 절차를 따르는 것은 상대방을 배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불필요한 충돌을 줄이면서도 자신의 책임과 권리를 지키는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신중함은 결정을 끝없이 미루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확인한 뒤 책임 있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 주님의 인도하심을 믿는다는 것은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고 특별한 응답만 기다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 이해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이해를 사용하여 진리를 분별하고, 자신의 의지로 그 진리에 따라 행동해야 합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의 자유로운 판단과 책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따라서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있다면 기도하면서 동시에 현실적인 준비도 해야 합니다. 가능한 길을 살피고, 각 선택의 결과를 생각하며, 정직하고 책임 있는 방법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만 반드시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서로 다른 선택이 모두 정당할 수 있으며, 중요한 것은 어떤 동기로, 어떤 방법으로, 무엇을 이루기 위해 행동하느냐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선과 진리의 결합’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선은 사랑과 의지에 관계되고, 진리는 지혜와 이해에 관계됩니다. 선한 의도가 있어도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이 잘못되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있으며,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이기심이나 복수심을 위해 사용한다면 참된 선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상대방을 미워하지 않겠다는 마음은 선한 의도이지만, 그렇다고 부당한 행동까지 모두 받아들이는 것은 지혜롭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는 생각은 정당하지만, 그 과정에서 부정직한 방법을 사용하거나 상대방에게 보복하려 한다면 그것 역시 옳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선택 앞에서는 ‘내가 원하는 것이 참으로 선한가?’와 함께 ‘그 선을 이루려는 방법도 진실하고 지혜로운가?’를 물어야 합니다. 참된 지혜는 선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 선을 올바르게 실천하는 진리가 결합할 때 나타납니다.

 

결국 성경적인 삶이란 언제나 더 어려운 길을 선택하거나 더 많은 고통을 견디는 삶이 아닙니다. 때로는 머무르는 것이 인내이고, 때로는 떠나는 것이 지혜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권리를 양보하는 것이 사랑이지만, 때로는 정당한 권리를 지키는 것이 자신과 이웃을 위한 선한 행동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두려움이나 분노가 아니라 주님께 받은 선과 진리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잠언은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5–6)고 말씀합니다. 이는 자신의 판단을 전혀 사용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지혜를 절대화하지 않고 모든 참된 지혜의 근원이신 주님을 인정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이나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행동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부당하게 행동하더라도 자신까지 부당하게 행동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생각하기를 멈추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지혜로 분별하고 주님께 받은 자유로 선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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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C.004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천주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이 참된 신앙의 중요한 보증이다’ - 교회의 정통성은 개인의 참된 신앙까지 보증하는가?

 

해설

‘천주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이 참된 신앙의 중요한 보증이다.’ 이 명제에는 천주교 신자가 자신이 속한 교회를 바라보는 신앙적 확신과, 그 확신이 잘못 이해될 때 발생할 수 있는 영적인 위험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천주교는 자신을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의 역사적이고 가시적인 연속체로 이해하며, 사도적 계승과 성사, 교도권과 전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진리와 은총이 보존되고 전달된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천주교 신자에게 교회에 속한다는 것은 단순히 특정한 종교단체의 회원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의 질서 안에 머물며, 교회가 보존해 온 신앙의 유산을 받아들이고, 성사와 전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은총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보다 오랫동안 전해져 온 신앙의 가르침을 존중하고, 공동체 안에서 함께 주님을 섬기려는 귀중한 요소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교회가 참된 신앙을 가르치는 공동체라는 사실과, 그 교회에 속한 사람이 실제로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같은 것일까요? 바른 교회의 가르침을 듣고 있다는 것만으로 그 가르침이 자신의 내면에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더 나아가 특정 교회의 역사적 정통성과 제도적 권위가 그 구성원 개개인의 영적 상태까지 보증할 수 있을까요? 이번 문제의 핵심은 참된 교회가 어디에 있는가보다, 교회에 속해 있다는 외적인 사실과 그 사람 안에 참된 교회의 생명이 존재한다는 내적인 사실을 어떻게 구별해야 하는가에 있습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 가르침을 정확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836–838항은 가톨릭교회와의 일치를 설명하면서, 신앙고백과 성사와 교회 통치 및 친교의 유대 안에서 교회와 온전히 결합한 사람들을 언급합니다. 그러나 837항은 교회에 온전히 결합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체어리티 안에 머물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명시합니다. 그 사람은 교회의 품 안에 외적으로 머물러 있을 뿐, 마음으로는 참되게 속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14항 역시 교회의 자녀들이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은총에 응답하지 않는다면 구원받지 못할 뿐 아니라 더 엄중한 판단을 받게 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천주교는 교회에 등록하고 세례를 받고 미사에 참석한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의 구원이 자동으로 보장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의 가르침과 성사생활이 인간 안에서 사랑과 선한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천주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이 참된 신앙의 중요한 보증이다’라는 명제를 천주교의 공식 교리 자체로 단정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이 명제는 교회가 보존하고 전달하는 구원의 수단들에 대한 신뢰가, 일부 신자들의 의식 속에서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한 확신으로 바뀔 때 발생할 수 있는 신앙적 통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통념은 천주교가 공식적으로 가르치는 체어리티의 필요성과도 긴장 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나 공식 교리가 이러한 위험을 경계한다고 해서, 교회 소속에 대한 신앙적 확신이 잘못된 방향으로 발전할 가능성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역사와 권위, 전통과 규모에서 심리적인 안정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특히 그 공동체가 자신을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된 교회라고 이해하고 사도들로부터 이어지는 역사적 계승과 신앙의 연속성을 강조한다면, 그 안에 속한 신자들은 자신이 올바른 신앙의 길 위에 있다는 확신을 갖기 쉽습니다. 물론 이러한 확신은 신앙의 지속성과 안정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확신의 근거가 점차 주님과의 실제적인 결합에서 교회 제도에 대한 소속감으로 옮겨갈 때입니다. 처음에는 ‘우리 교회는 주님의 진리를 가르치므로 나는 그 가르침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우리 교회는 참된 교회이므로 나는 이미 참된 신앙 안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두 문장은 비슷해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앞의 문장은 교회의 가르침을 자신의 삶에 적용해야 할 책임으로 받아들이는 반면, 뒤의 문장은 교회의 권위와 정통성을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한 보증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는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수단에서, 자신의 영적 안전을 확인하는 외적인 근거로 변할 위험이 있습니다. 결국 문제는 교회에 대한 신뢰 자체가 아니라, 그 신뢰를 자신의 참된 신앙에 대한 확신으로 옮겨 놓는 데 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위험을 이미 여러 곳에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마7:21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을 향하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지는 22절과 23절에서는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조차 주님께서 그들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은 주님의 이름을 알고 그 이름으로 종교적 활동을 했다는 사실과, 실제로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아왔다는 사실이 동일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또한 요8:31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의 말에 거해야 참으로 자신의 제자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약1:22 역시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참된 신앙의 표지는 외적인 종교적 정체성에만 있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알고 인정하는 일이 실제적인 순종과 사랑의 삶으로 이어지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교회의 가르침이 아무리 귀중하더라도 그 가르침이 인간의 의지와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그 사람에게 주어진 진리는 아직 살아 있는 신앙으로 충분히 형성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참된 교회에 속한다는 사실과 참된 교회의 생명을 자기 안에 받아들이는 일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예루살렘과 그 천적 교리’(The 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NJHD, 1758) NJHD.241–248에서 교회의 본질을 설명합니다. 특히 NJHD.242는 교회가 주님에게서 오는 주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에 의하여 성립한다고 가르치며, NJHD.243은 말씀에서 비롯된 교리가 필요하지만, 교리만으로는 인간 안에 교회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교리에 따른 삶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리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리가 왜 중요한지를 분명히 하는 가르침입니다. 교리는 인간이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무엇이 참되고 거짓인지를 분별하도록 가르치며, 주님께서 어떤 삶을 원하시는지 알려 줍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 진리를 이해 속의 지식으로만 보존하고 실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진리는 아직 그의 생명과 온전히 결합되지 않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웃 사랑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설명하면서도 실제로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멸시한다면, 그의 이해에는 사랑에 관한 진리가 있을지라도 의지에는 그 사랑이 살아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교리적 이해에 부족함이 있더라도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악을 피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려 한다면, 그 사람 안에는 주님의 생명이 실제로 작용하기 시작한 것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정통성이나 교리적 정확성을 개인의 참된 신앙과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참된 교회의 생명은 진리가 선과 결합하여 실제적인 삶으로 나타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AC.1798과 AC.8152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AC.1798에서 스베덴보리는 교회들이 교리적인 차이로 나뉘어 서로 다른 이름을 갖게 되었음을 언급하면서, 사랑과 체어리티를 신앙의 중심에 둔다면 그러한 차이가 교회를 분열시키는 근본적인 이유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그는 모든 교리가 동일하게 참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리의 차이는 여전히 검토되어야 하며, 잘못된 교리는 인간의 신앙과 삶에 실제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리적 차이를 근거로 다른 공동체 전체를 배척하거나, 자기 공동체만이 참된 신앙의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고 여기는 태도는 경계해야 합니다. 특히 AC.8152에서 스베덴보리는 참된 영적 교회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신앙의 선, 곧 체어리티가 본질적인 것이며, 그것이 교리와 삶에서 첫자리를 차지한다고 가르칩니다. 이어 교회를 이루는 것은 삶이지 교리 자체가 아니며, 교리도 삶이 되는 만큼 교회를 이룬다고 설명합니다. 이 말씀은 이번 명제의 핵심을 매우 정확하게 드러냅니다. 인간의 이해 안에 있는 진리는 그 자체로 아직 그의 생명이 아닙니다. 그 진리가 의지 안에 받아들여지고 실제적인 삶의 원리가 될 때, 비로소 인간 안에 참된 교회의 생명이 형성됩니다. 따라서 교회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나 정통 교리를 인정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 안에 참된 신앙이 존재한다고 보증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천주교의 오랜 역사와 풍부한 전통, 성사와 전례, 수도생활과 자선활동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이러한 것들이 무의미하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동안 외적인 질서와 형식을 통하여 영적인 것을 배우고 실천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예배의 질서는 인간이 주님께 마음을 향하도록 도울 수 있으며, 기도문은 신앙을 표현하는 언어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은 인간이 선과 악을 분별하도록 도울 수 있고, 자선과 봉사는 이웃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인 수단이 인간의 내적인 사랑과 결합하지 않는다면 그 궁극적인 목적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같은 미사에 참여하고 같은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내적인 상태는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종교적 의무를 충실히 지키면서도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고, 다른 사람은 교리적인 지식이 충분하지 않더라도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자신의 악을 피하려 노력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판단할 수 없지만, 외적인 종교생활의 풍부함이 반드시 내적인 거듭남의 정도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종교적 활동의 외적인 모습만이 아니라 그 활동을 움직이는 내적인 사랑입니다. 교회가 참으로 인간에게 유익한 것은 그 사람을 자기 제도에 의존하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도록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천주교와 스베덴보리 사이의 중요한 접점도 존재합니다. 천주교의 공식 교리 자체가 체어리티 없는 교회 소속은 구원을 보증하지 못한다고 가르친다는 점에서, 교리와 삶을 분리해서는 참된 교회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가까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두 전통이 교회의 본질과 성사의 역할을 이해하는 방식까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천주교는 가톨릭교회 안에 신앙과 성사와 교회 통치의 온전한 질서가 보존되어 있다고 가르치며, 그러한 교회적 일치를 신앙생활의 중요한 요소로 이해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참된 교회를 이루는 본질적인 요소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의 결합에 두며, 외적인 교회의 소속보다 인간 안에서 실제로 거듭남이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번 명제에서는 이 교회론 전체를 다시 논증하기보다, 공식 교리와 신앙적 통념을 구별하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천주교는 교회 소속만으로 구원을 보증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오류로 검토해야 할 것은 가톨릭교회의 모든 교회론이 아니라, 교회가 지닌 권위와 은총의 수단에 대한 신뢰를 자신의 내적인 영적 상태에 대한 보증으로 바꾸는 이해입니다. 교회가 참된 가르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그 가르침이 개개인의 삶에서 참된 생명이 되었다는 사실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천주교 밖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개신교 신자 역시 자신이 성경 중심의 정통교회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나 오랫동안 예배에 참석하고 봉사해 왔다는 사실에서 신앙적 안정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떤 목회자는 자신이 정통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안수를 받았으며 오랜 세월 말씀을 가르쳐 왔다는 사실을 자신의 영적 성숙에 대한 근거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그러한 외적인 경력과 지위는 참된 신앙을 자동으로 증명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고 새로운 교회에 관한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도 자신이 상응론과 내적 의미를 이해한다는 이유로 영적으로 더 높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동일한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프로프리움’(proprium)은 종교적인 이름과 지식을 자신의 우월성을 확인하는 수단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진리를 많이 알게 된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보다 자기 안의 악을 더욱 세밀하게 발견하고, 자신이 받은 빛에 따라 살아가야 할 책임을 깊이 느껴야 합니다. 참된 교회에 관한 가르침은 다른 공동체를 내려다보는 기준이 아니라,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기준이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참된 교회를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 교회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실제로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이 문제를 주님의 말씀으로 돌아가 생각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5장 4절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시면서,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포도나무와 가지 사이의 살아 있는 결합입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속한다는 이름을 가졌더라도 실제로 생명을 공급받지 못한다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 속한 사람이라는 종교적인 이름이 있더라도, 주님의 선과 진리를 실제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이름 자체가 참된 신앙의 생명을 보증하지는 못합니다. 교회는 인간에게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분과 결합하도록 돕는 거룩한 공동체여야 하지만, 그 교회에 속한다는 외적인 사실이 주님과의 실제적인 결합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나는 어느 교회에 속해 있는가?’에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그 교회를 통하여 배운 주님의 진리가 나의 이해와 의지 안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는가? 나는 그 진리의 빛으로 악을 피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선한 쓰임을 행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교회가 부여하는 종교적 신분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인간 안에서 실제적인 생명이 되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SL.RC.004 해설)

 

요약

‘천주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이 참된 신앙의 중요한 보증이다’라는 명제에는 교회 공동체가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신앙을 실천하며 이웃을 사랑하도록 돕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천주교의 공식 교리는 교회에 속해 있다는 사실만으로 개인의 구원이 보장된다고 가르치지 않으며, 체어리티 없이 외적으로만 교회에 머무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분명히 경고합니다. 따라서 이번 명제는 공식 교리 자체의 오류라기보다, 교회의 정통성과 권위에 대한 신뢰가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한 보증으로 바뀔 때 발생하는 신앙적 통념의 오류로 이해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교회를 이루는 것은 교리 자체가 아니라 그 교리가 실제적인 삶이 되는 것이며, 신앙의 진리는 체어리티의 선과 결합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생명이 됩니다. 따라서 오류의 핵심은 교회의 역사와 전통, 교리와 제도를 존중하는 데 있지 않고, 그러한 외적인 요소들이 자신의 내적인 신앙을 대신하거나 보증한다고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참된 신앙의 여부는 교회 소속이나 종교적 경력만으로 결정되지 않으며,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인간의 의지와 이해 안에 받아들여져 실제적인 삶으로 나타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단순히 교회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주님의 교회가 자기 안에 살아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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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2026/11/01, 성찬)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0, ‘큰 영광 중에 계신 주’, 찬230,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 찬133, ‘하나님의 말씀으로’입니다.

 

오늘은 창5 절별 주석 그 네 번째, 21절로 24절, AC 글 번호로는 516번에서 522번입니다. 먼저 창세기 본문입니다.

 

 

21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1-24)

 

 

제목은

 

에녹

 

 

이며, 다음은 이 특별한 AC 본문 리딩 예배를 위한 ‘3분 요약’입니다.

 

오늘 리딩에 들어가기 전에, 지금까지의 큰 흐름을 잠깐 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라틴 Arcana Coelestia, 영어 Secrets of Heaven, 天界秘義, 1749–1756,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속뜻 주석, 총 10,837개 글)를 따라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를 존중하면서 그 속뜻을 함께 읽고 있습니다.

 

창1에서는 천지창조를 인간의 거듭남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여섯 날의 과정을 통하여 사람을 영적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일곱째 날의 안식에 이르러 사랑으로 살아가는 천적 인간으로 이끄십니다.

 

창2에서는 에덴동산을 통하여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알아차리는 ‘퍼셉션’(perception)을 지녔으며, 신앙은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창3에서는 사람이 주님보다 자신의 감각과 ‘프로프리움’(proprium)을 신뢰하면서 이 질서가 무너졌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인간이 더 깊은 파멸에 이르지 않도록 보호하시며 구원의 길을 보존하셨습니다.

 

창4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charity)의 관계를 살펴보았습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가인의 계열은 라멕에 이르러 황폐해졌지만, 주님께서는 ‘가인의 표’를 통하여 신앙 자체가 완전히 소멸하지 않도록 보존하셨습니다. 또한 셋과 에노스를 통하여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가 다시 이어지게 하셨습니다.

 

창5에서는 아담에서 노아까지의 족보가 단순한 개인들의 출생과 죽음이 아니라,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진 여러 교회의 계승과 상태 변화를 나타낸다는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최초의 태고교회에서 셋과 에노스, 게난으로 이어지면서 선과 진리를 직접 알아차리던 퍼셉션은 점차 덜 명료하고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특히 마할랄렐 교회에서는 ‘쓰임에서 오는 기쁨보다 진리를 아는 기쁨을 더 좋아하는’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퍼셉션의 쇠퇴가 단순한 인식 능력의 약화가 아니라 사랑과 선한 쓰임의 생명이 약해지는 것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지난주에는 야렛이 마할랄렐과 에녹 사이의 중간 상태에 있었으며, 에녹에 이르러 이전 교회들이 퍼셉션했던 것들을 교리로 보존하는 새로운 단계가 나타남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이 에녹 교회의 특별한 역할과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는 말씀의 속뜻을 살펴보겠습니다. 특히 퍼셉션이 사라져 가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어떻게 후대를 위한 선과 진리를 보존하셨는지에 주목하며, 오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다음은 오늘 리딩 범위인 AC.516-522 요약입니다.

 

지난주 우리는 창5:15-20, AC.510-515를 통하여 마할랄렐에서 야렛으로, 야렛에서 에녹으로 이어지는 태고교회 후속 교회들의 계승을 살펴보았습니다. 특히 마할랄렐 교회에서는 ‘쓰임에서 오는 기쁨보다 진리를 아는 기쁨을 더 좋아하는’ 변화가 나타났으며, 사랑과 쓰임의 생명이 약해지면서 퍼셉션도 점차 흐려졌습니다. 야렛은 마할랄렐과 에녹 사이의 중간 상태에 있었으며, 에녹에 이르러서는 이전 교회들이 퍼셉션했던 선과 진리를 교리로 보존하는 새로운 단계가 나타남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그다음 말씀인 창5:21-24, AC.516-522를 읽습니다. 여기에는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고,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셨다는 독특한 기록이 나옵니다. 지금까지 창5의 여러 교회는 모두 ‘죽었더라’는 말씀으로 끝났지만, 에녹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차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주님께서 왜 에녹의 교리를 후대를 위해 보존하셨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21절은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라고 합니다. AC.516에 따르면 ‘에녹’(Enoch)은 일곱 번째 교회를, ‘므두셀라’(Methuselah)는 여덟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여기서도 ‘낳았다’는 말씀은 단순한 생물학적 출생을 넘어, 한 교회로부터 다음 교회가 이어지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에녹은 앞선 교회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태고교회의 초기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perception)을 통해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직접 알았지만, 후속 교회들에 이르면서 퍼셉션은 점차 흐려졌습니다. 바로 이러한 변화 속에서 에녹이라는 교회의 특별한 역할이 나타납니다.

 

22절은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라고 합니다. AC.518-519에서 스베덴보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다’(walk with God)는 것이 ‘신앙에 관한 교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당시 태고교회와 그 뒤를 이은 교회들이 퍼셉션했던 것들을 모아 교리로 만든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에녹’이라 불렀습니다. 그들이 만든 교리 역시 에녹이라고 불렀으며, ‘에녹’이라는 이름 자체도 ‘가르치다’(instruct)를 의미합니다.

 

그들이 교리를 만든 목적은 후대 사람들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알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에녹의 교리가 인간의 추론으로 새롭게 만들어 낸 진리 체계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 교리의 내용은 태고교회와 그 뒤를 이은 교회들이 주님으로부터 이미 퍼셉션했던 것들이었습니다. 이전에는 내적으로 직접 알던 선과 진리를 이제 후대 사람들이 배우고 이해할 수 있도록 교리의 형태로 정리한 것입니다.

 

AC.519는 또한 ‘하나님과 동행하다’와 ‘여호와와 동행하다’를 구별합니다. 전자는 신앙의 교리에 따라 가르치고 사는 것을 의미하고, 후자는 사랑의 생명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말씀에서 ‘하나님’이 주로 신앙과 진리에, ‘여호와’가 사랑과 선에 관계되는 구별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단지 교리를 만들고 가르쳤다는 뜻이 아니라, 그 교리에 따라 살아가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또한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는 것은 에녹의 교리로부터 진리들과 선들에 관한 여러 교리적인 것들이 나왔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리의 본래 목적을 생각하게 됩니다. 교리는 진리를 많이 알고 설명하는 데서 완성되지 않습니다.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분별하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에녹의 교리 역시 단순히 지식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후대 사람들이 선과 진리의 길을 찾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23절과 24절은 에녹의 특별한 마지막을 기록합니다.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AC.520에 따르면 에녹의 삼백육십오 년은 그들의 때와 상태가 비교적 적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는 말씀은 ‘에녹의 교리가 후대의 쓰임을 위해 보존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중심입니다. 다른 교회들의 마지막에는 ‘죽었더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지만, 에녹의 경우에는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고 합니다. 속뜻으로는 에녹이라는 교회가 형성한 교리가 그 교회와 함께 사라지지 않고, 앞으로 그것을 필요로 할 사람들을 위해 보존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교리가 남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것이 ‘후대의 쓰임’을 위해 보존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 교리를 특별히 보존해야 했을까요? AC.521에서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으로 아는 것과 교리를 통해 배우는 것이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설명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celestial man)은 주님께서 내적인 길을 통해 선과 진리를 알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이미 퍼셉션으로 알고 있는 것을 외적인 교리를 통해 다시 배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살아 있는 퍼셉션을 손상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리로부터 배우는 사람들은 외적인 길, 곧 신체의 감각을 통해 지식을 받아들이고 거기서부터 선과 진리를 알아 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인식 방식의 차이를 ‘빛과 어둠의 차이’에 비유합니다. 이것은 교리 자체가 악하거나 거짓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내적인 빛 가운데서 선과 진리를 직접 퍼셉션했지만, 후대의 인간은 먼저 외적으로 배우고 이해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진리의 근원이 바뀐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태고교회의 이러한 퍼셉션 능력이 장차 소멸할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퍼셉션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그 안에 있던 선과 진리를 에녹을 통해 교리로 정리하게 하시고, 후대를 위해 보존하셨습니다. AC.521은 후대의 인간이 ‘어둠을 통해 빛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이 더 이상 이전처럼 선과 진리를 직접 퍼셉션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해서 주님께서 그들을 진리의 빛 밖에 그대로 두신 것이 아닙니다. 외적인 길에서 출발하더라도 다시 내적인 빛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마지막 AC.522에서는 에녹 교회 자체의 퍼셉션이 어떠했는지도 밝혀집니다. 그것은 ‘아무런 명료함이 없는 일종의 일반적이고 흐릿한 퍼셉션’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은 점차 자기 바깥에 있는 교리적인 것들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에녹의 교리 형성이 단순히 학문적 관심이나 지적 발전의 결과가 아니었음을 보여 줍니다. 선과 진리를 내적으로 명료하게 퍼셉션하던 능력이 약해졌기 때문에, 이제는 외적인 교리를 통해 그것들을 알고 분별할 필요가 생긴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의 AC.516-522를 하나로 모아 보면, 에녹에게서 세 가지 중요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퍼셉션의 쇠퇴와 교리의 출현’입니다. 에녹 교회에 이르러 퍼셉션은 매우 일반적이고 흐릿해졌으며, 이전에 직접 퍼셉션했던 선과 진리를 교리로 정리하는 일이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내적 상태가 달라졌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전환입니다.

 

둘째는 ‘후대의 쓰임을 위한 교리의 보존’입니다. 에녹의 교리는 당시 사람들의 필요보다 장차 퍼셉션을 잃게 될 사람들의 필요를 위해 보존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는 말씀의 속뜻입니다. 에녹이라는 교회 자체는 지나가더라도, 그 교회가 정리한 선과 진리는 후대의 사람들을 위해 남겨진 것입니다.

 

셋째는 ‘내적인 길에서 외적인 길로의 변화’입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내적으로 선과 진리를 퍼셉션했지만, 후대의 인간은 외적으로 교리를 배우는 데서 출발하여 내적인 빛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달라졌지만, 주님께서 인간을 선과 진리로 인도하시는 목적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 세 가지를 함께 바라보면 오늘 말씀에서 주님의 깊은 섭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처음의 천적 상태를 유지하지 못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가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대책을 마련하신 것이 아닙니다. 퍼셉션이 아직 완전히 소멸하기 전에 이미 다음 시대를 위한 길을 준비하셨습니다. 인간의 상태가 변해도 선과 진리를 향한 길이 끊어지지 않도록 미리 준비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처음의 능력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그들을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될 때에도,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을 마련하시고 계속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달라지는 것은 인간의 상태이지, 인간을 선과 진리로 인도하시려는 주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이러한 주님의 섭리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우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직접 퍼셉션하는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읽고 교리를 배우며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점차 이해해 갑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느낌이나 확신만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기보다, 주님께서 주신 말씀과 참된 교리를 통해 자신의 생각과 삶을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교리 자체가 우리의 최종 목적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에녹의 교리를 보존하신 것은 후대 사람들이 단지 더 많은 지식을 갖게 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교리를 통해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알고, 그것을 사랑하며 실제로 선한 삶을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지난주 마할랄렐 교회에서 배운 가르침과도 이어집니다. 우리는 진리를 아는 기쁨보다 그 진리로 선을 행하는 기쁨을 더욱 사랑해야 합니다. 참된 교리는 우리의 머릿속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결합하여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진리를 배우는 일이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한 쓰임이 되는 삶으로 이어질 때, 그 교리는 우리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오늘은 또한 성찬에 참여하는 주일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배우고 그 속뜻을 깨닫는 목적은 결국 주님과 더욱 깊이 결합하는 데 있습니다. 성찬에서도 중요한 것은 외적인 예식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진리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삶에서 실천하려는 것입니다. 성찬의 떡과 포도주가 나타내는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생각하면서, 우리가 배우는 모든 진리가 사랑 안에서 생명을 얻고 그 사랑이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창5:21-24는 단지 에녹이라는 특별한 인물이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늘로 옮겨졌다는 이야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 속뜻으로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사라져 가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그들이 받았던 선과 진리를 교리로 보존하시고, 후대 사람들이 다시 진리의 빛으로 나아갈 길을 준비하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것이 오늘 창5:21-24, AC.516-522를 통하여 우리가 배우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퍼셉션은 사라져도 주님께서 주신 선과 진리는 사라지지 않으며, 주님께서는 인간의 달라진 상태에 맞추어 그 선과 진리를 받을 수 있는 길을 미리 준비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과 교리를 통해 주님을 더욱 깊이 알고, 그 진리를 사랑으로 받아들이며, 성찬을 통해 주님과의 결합을 새롭게 하고,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 가운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516, 창5: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AC.516-517)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And Enoch lived sixty and five years, and begat Methuselah. (창5:21) AC.516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에녹’(Enoch)은 일곱 번째 교회를, ‘므두셀라’(Methuselah)는 여덟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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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7, 창5:21, ‘에녹’(Enoch) 이야기를 시작하며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창5:21) AC.517 ‘에녹’(Enoch)이라 하는 교회의 퀄리티는 이어지는 절들에서 설명드리겠습니다. The quality of the church “Enoch” is described in the following ver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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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8, 창5: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C.518-519)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Enoch walked with God after he begat Methuselah three hundred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창5:22) AC.518 ‘하나님과 동행하며’(walk with 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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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9, 창5:22, ‘하나님과 동행하며’(walk with God)의 속뜻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22) AC.519 그 당시에 태고교회와 그 뒤를 이은 교회들에서 퍼셉션의 대상이 되었던 것들로부터 교리를 구성한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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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20, 창5:23-24,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AC.520-522)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And all the days of Enoch were three hundred sixty and five years. And Enoch walked with God,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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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21, 창5:23-24,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3, 24) AC.521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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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22, 창5:23-24, ‘에녹’(Enoch)이라는 사람들의 퍼셉션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3, 24) AC.522 ‘에녹’(Enoch)이라 하는 이들에게서 나타난 퍼셉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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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아래는 오늘 범위 창5:21-24, AC.516-522 중 리딩 필독 세 편 링크입니다. 혹시 몹시 바쁘신 분들은 꼭 이 링크들만이라도 읽으시기 바랍니다.

 

 

AC.521, 창5:23-24,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3, 24) AC.521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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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9, 창5:22, ‘하나님과 동행하며’(walk with God)의 속뜻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22) AC.519 그 당시에 태고교회와 그 뒤를 이은 교회들에서 퍼셉션의 대상이 되었던 것들로부터 교리를 구성한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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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22, 창5:23-24, ‘에녹’(Enoch)이라는 사람들의 퍼셉션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3, 24) AC.522 ‘에녹’(Enoch)이라 하는 이들에게서 나타난 퍼셉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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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이며, 다음은 다음 주(20261108) 리딩 본문(창5:25-27, AC.523-525) 소개입니다.

 

다음 주에는 창5:25-27, AC.523-525를 통하여 ‘므두셀라’(Methuselah) 교회의 상태를 살펴보겠습니다. 므두셀라는 에녹의 뒤를 이은 여덟 번째 교회로,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점차 쇠퇴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또 하나의 교회입니다. 성경은 므두셀라가 라멕을 낳고,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다고 기록합니다. 다음 주에는 이 계보가 속뜻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에녹에서 므두셀라로 이어지면서 교회의 내적 상태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네, 이상입니다. 기도에 이어 성찬 있습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11-01(D1)

 

2675, 4, 창5.4, 2026-11-01(D1)-주일예배(창5,21-24, AC.516-522, 성찬), ‘에녹’.pdf
0.66MB
성찬.pdf
0.12MB

 

 

 

주일예배(2026/10/25, 창5:15-20, AC.510-515), ‘마할랄렐, 야렛, 에녹’

※ 오늘(2026/10/25)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9, ‘찬송하는 소리 있어’, 찬132, ‘주의 영광 빛나니’입니다. 오늘은 창5 절별 주석 그 세 번째, 15절로 20절, AC 글 번호로는 510번에서 515번입니다. 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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