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은 명절이 끝난 뒤 이혼이 늘어나는 현상에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영상이 실제로 다루는 것은 ‘명절 때문에 이혼하는 부부’가 아닙니다. 오랫동안 쌓여 있던 부부 관계의 균열이 명절이라는 특별한 환경에서 한꺼번에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영상의 표현대로 명절은 ‘원인이라기보다 촉매제’입니다. 시댁과 처가, 방문 순서, 음식 준비, 설거지, 육아, 용돈, 제사, 친척들의 질문과 비교가 며칠 안에 집중되면서 평소에는 감추어져 있던 관계의 질서가 밖으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영상은 그 수많은 갈등을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모읍니다. ‘우리는 정말 팀인가?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켜면 영상에서 말하는 ‘ ’이라는 표현이 훨씬 깊어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결혼은 단순히 두 사람이 공동생활을 하는 계약이 아닙니다. ‘결혼애(Conjugial Love, 1768, CL)에서 그는 참된 결혼의 본질을 두 마음(minds)이 하나를 향하여 결합되어 가는 데서 찾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육체적으로 한집에 사는 것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서로의 선과 진리가 결합하면서 두 사람의 삶이 점차 하나의 삶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결혼애에는 ‘하나가 되고자 하는 의지’가 있습니다(CL.215). 성경의 ‘둘이 몸이 될지니라(2:24)는 말씀 역시 단순히 육체적 결합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내적 결합의 질서를 품고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영상 속 지영 씨를 무너뜨린 것은 정말 전 몇 장이나 설거지가 아닙니다. 영상에서도 정확히 그 점을 짚습니다. 시어머니의 말은 여러 해 견뎠지만 남편이 ‘우리 엄마가 틀린 말했어? 네가 조금만 노력하면 되잖아’라고 말하는 순간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왜 그 한마디가 그렇게 무거웠을까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결혼을 통해 형성되어야 할 ‘우리’가 그 순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내가 요구했던 것은 남편이 어머니와 싸워 달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나는 하나의 새로운 삶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여전히 자신의 원가족을 중심으로 판단하고 배우자에게 그 질서에 적응할 것을 요구합니다. 외적으로는 결혼했지만 내적인 관계의 중심은 아직 이동하지 않은 셈입니다.

 

여기서 창세기 2장의 말씀이 놀랍도록 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몸을 이룰지로다(2:24). 이 말씀에서 ‘부모를 떠난다’는 것을 부모를 버리거나 효도를 중단한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문자적으로도 결혼은 부모와의 관계를 끊는 명령이 아닙니다. 그러나 결혼 후 관계의 질서에는 분명한 변화가 생깁니다. 이제 남편과 아내 사이에 새로운 가장 가까운 공동체가 형성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에 대한 사랑이 배우자와의 결혼적 결합을 지속적으로 침범하거나 파괴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많아서 생긴 문제가 아니라 사랑들의 ‘질서’가 뒤바뀐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상에서 특히 예리한 대목이 바로 ‘ 부모는 내가 챙긴다’는 제안입니다. ‘아들이 효도하고 싶은데 며느리가 일을 하고, 딸이 효도하고 싶은데 사위가 비용을 부담한다’는 지적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생각해 볼 만한 대목입니다. 선(good)은 단지 외적으로 선해 보이는 행동이라고 해서 선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행동 안에 들어 있는 사랑과 목적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선합니다. 그러나 ‘내가 효자가 되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배우자의 노동과 시간과 감정을 당연한 자원처럼 사용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외형은 ‘효도’이지만 그 안에는 자기 사랑(proprium)이 숨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집은 원래 그래’, ‘며느리라면 정도는 해야지’, ‘사위가 정도도 못하나’라는 말에는 전통이라는 이름을 입은 proprium이 숨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렌즈를 반대쪽에도 똑같이 적용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시댁을 비판하기 위한 렌즈도, 며느리나 사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렌즈도 아닙니다. 배우자가 언제나 ‘ ’을 들어야 한다는 주장 역시 잘못 이해하면 또 하나의 proprium이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배우자니까 내가 옳든 그르든 편이어야 ’라는 요구는 결혼애가 아닙니다. 참된 결혼적 결합은 두 사람이 서로의 자기성을 강화해 주는 동맹이 아니라 함께 주님의 질서 아래 들어가는 결합이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잘못했으면 부모의 잘못을 인정하고, 배우자가 잘못했으면 배우자의 잘못 역시 사랑 가운데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영상의 ‘ ’이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무조건 나를 편드는 사람’이 아니라 ‘나와 함께 선과 진리를 향해 서는 사람’으로 한 단계 정화되어야 합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부당한 말을 했을 때 남편이 ‘우리 엄마 원래 그래. 네가 참아’라고 말하는 것은 배우자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아내가 ‘당신 어머니가 저런 말을 했으니 이제 다시는 만나지 ’라고 요구한다면 그것 역시 반드시 올바른 질서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가장 건강한 반응은 영상이 제안한 것처럼 남편이 자신의 어머니에게 ‘엄마, 문제는 우리가 알아서 할게’라고 경계를 세우면서도 어머니를 미워하거나 모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히려 체어리티(charity)에 가깝습니다. 체어리티는 모든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영원한 선을 바라보며 질서를 세우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모 공경과 배우자 사랑은 본래 서로 경쟁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문제는 ‘누구를 사랑하느냐’가 아니라 각각의 사랑을 어느 자리에 놓느냐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질서의 나라입니다. 높은 사랑이 낮은 사랑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을 제자리에 놓습니다.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하면서도 배우자와 함께 형성한 새로운 가정의 경계를 지킬 수 있습니다. 오히려 제대로 세워진 결혼 관계 안에서 부모를 사랑할 때 그 효도 역시 더 자유롭고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배우자를 희생시켜 부모를 만족시키는 것은 결국 부모와 배우자 모두에게 좋지 않은 열매를 남깁니다.

 

영상에서 명절의 또 다른 특징은 평소 숨겨져 있던 것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거듭남의 관점에서 특히 흥미롭습니다. 우리는 평온할 때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피곤하고, 돈이 들고, 교통이 막히고, 아이가 울고, 부모가 압박하고, 배우자가 예민해지면 평소 숨어 있던 자기 사랑과 지배욕과 인정 욕구가 밖으로 올라옵니다. 그렇다면 명절은 단순히 피해야 할 스트레스 기간만은 아닙니다. 영적으로 보면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여 주는 작은 시험(temptation)의 장이 될 수도 있습니다. ‘ 아내가 우리 부모에게 이것밖에 하지?’, ‘ 남편은 우리 친정에서는 저렇게 무뚝뚝하지?’, ‘ 내가 손해 봐야 하지?’ 하는 감정들이 올라올 때, 우리는 그 감정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상 제목인 ‘존버의 경제학’도 이 렌즈 아래에서는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결혼에서 무조건 오래 버티는 것이 선은 아닙니다. 그러나 불편함이 생길 때마다 관계를 포기하는 것 역시 결혼의 깊은 의미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참느냐, 떠나느냐’라는 이분법보다 ‘ 관계 안에서 무엇이 거듭나고 있는가?’입니다. 일곱 번의 명절 동안 한 사람이 계속 참고 다른 사람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참음이 반드시 거듭남으로 이어진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참음이 사랑에서 나온 인내가 아니라 두려움과 체념으로 굳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갈등을 계기로 남편과 아내가 자기 안의 proprium을 발견하고 서로의 고통을 듣고 관계의 질서를 다시 세운다면, 바로 그 갈등이 거듭남의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영상 마지막의 질문은 매우 좋습니다. ‘오늘 불편한 없었어?’ 겉으로 보면 아주 평범한 한마디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것은 상당히 깊은 질문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당신 마음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알고 싶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결혼적 결합은 상대를 소유하는 데서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내면을 존중하며 알려고 하는 데서 깊어집니다. 다만 여기에 한마디를 더 보탤 수 있겠습니다. ‘오늘 내가 당신을 힘들게 것은 없었어?’입니다. 첫 질문이 상대의 고통을 듣는 질문이라면 두 번째 질문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질문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proprium의 벽에 작은 틈이 생깁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결혼의 최종 목적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완벽한 배우자가 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두 사람 모두 불완전한 인간이며 각자 자기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혼의 중심에 배우자만 놓으면 결국 서로에게 감당할 수 없는 요구를 하게 됩니다. 참된 중심은 주님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도,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는 것도 결국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서로에게 흘려보내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결혼은 스베덴보리에게 단순한 행복의 제도가 아니라 거듭남의 매우 깊은 학교가 됩니다. 가장 가까이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 proprium이 가장 많이 드러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가장 깊은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도 있는 관계입니다.

 

결국 이 영상이 묻는 ‘우리는 정말 팀인가?’라는 질문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이라는 것은 배우자가 무조건 내 편이 되어 부모와 싸워 주는 것이 아닙니다. 두 사람이 부모를 공경하면서도 서로를 희생시키지 않고, 서로의 잘못을 감싸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바로잡으며, 각자의 proprium을 상대에게 관철시키는 대신 함께 주님의 질서 아래 서는 것입니다. 그렇게 남편과 아내가 ‘ 부모’, ‘ 부모’, ‘ ’, ‘ 시간’, ‘ 희생’을 넘어 조금씩 ‘우리’가 되어 갈 때, 창세기의 ‘둘이 몸을 이룰지로다’라는 말씀은 결혼식 날 읽고 끝나는 문장이 아니라 수십 년에 걸쳐 이루어지는 거듭남의 말씀이 됩니다.

 

그러므로 명절은 어쩌면 결혼을 무너뜨리는 날이라기보다 결혼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드러내는 날인지도 모릅니다. 시댁도 처가도, 전도 설거지도, 용돈도 방문 순서도 그 자체가 본질은 아닙니다. 그것들을 통하여 ‘나는 배우자를 사랑하는가, 아니면 배우자를 통해 뜻을 이루려 하는가?’, ‘나는 부모를 공경하는가, 아니면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배우자를 사용하고 있는가?’, ‘배우자가 힘들다고 말할 나는 그의 고통을 듣는가, 아니면 즉시 나도 힘들었다며 자기변호를 시작하는가?’가 드러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명절은 불편하지만 정직한 거울입니다.

 

그리고 그 거울 앞에서 발견한 것이 아름답지 않더라도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거듭남은 자기 안에 악이 없음을 확인하는 과정이 아니라, 주님의 빛 가운데 그것을 발견하고 돌이키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명절에 싸웠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싸움 이후입니다. ‘누가 옳았는가?’만 묻는 대신 ‘이번 일을 통해 주님께서 안의 무엇을 보여 주셨는가?’라고 묻기 시작할 때, 명절의 갈등조차 결혼을 파괴하는 사건에서 두 사람을 조금 더 하나로 만들어 가는 거듭남의 재료로 바뀔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 영상을 통해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한 번 더 비추어 볼 수 있는 지점입니다.

 

 

 

SY.103, 존버의 경제학, ‘명절 이혼이 많은 진짜 이유’ - 부모의 입장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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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4 심화

1. 놋뱀은 주님의 감각적·자연적 선을 표상하는가?’

 

21:9에서 모세는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았습니다. 뱀에게 물린 사람이 그 놋뱀을 바라보면 살아났습니다. 스베덴보리는 AC.425의 마지막에서 이 사건을 언급하며, 놋뱀이 주님의 감각적·자연적 을 표상했다고 밝힙니다. 이번 번호는 그 이유를 다시 설명하지 않고 앞선 해설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그가 직접 밝힌 의미를 중심으로, 민수기의 기록과 주님께서 이 사건을 언급하신 말씀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놋뱀은 뱀에게 물린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표징이었습니다. 21장의 문자적 기록에서 백성들은 뱀에게 물려 죽어 갔고,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고 명하셨습니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달자, 뱀에게 물린 사람들이 그것을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이 기록에서 놋뱀은 단순히 사람이 만들어 낸 치료법이 아니라, 주님께서 명하신 표징으로 등장합니다.

 

주님께서는 요3:14-15에서 이 사건을 자신에게 연결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놋뱀을 바라보고 생명을 얻은 민수기의 사건은, 주님께서 들리시는 일과 그분을 믿는 자가 영생을 얻는 일에 연결됩니다. 이 연결은 우리가 임의로 만들어 낸 비유가 아니라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왜 놋뱀을 특별히 주님의 감각적·자연적 이라고 설명했을까요? AC.425에서 놋은 자연적 선을 뜻합니다. 또한 그는 놋뱀 전체가 주님의 감각적·자연적 선을 표상한다고 밝힙니다. 여기서 감각적이라는 말은 인간의 가장 외적인 차원과 관련된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번 번호만을 근거로 뱀과 놋의 의미를 각각 분리한 뒤, 주님의 인성이 영화롭게 되는 전 과정을 상세히 재구성해서는 안 됩니다. 그에 관한 설명은 스베덴보리가 앞에서 다룬 해당 번호와 함께 확인해야 합니다.

 

특히 놋뱀이 주님을 표상한다는 사실과,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뱀이 언제나 주님을 뜻한다는 주장은 다릅니다. 3장의 뱀과 민21장의 놋뱀은 서로 다른 문맥에 놓여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AC.425에서 일반적인 뱀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가 만든 놋뱀이 주님의 감각적·자연적 선을 표상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의미를 다른 모든 뱀의 기록에 그대로 적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자연적인 것이 주님과 무관한 낮은 영역이 아니라는 점도 생각하게 합니다. AC.425는 자연적 선을 나타내는 놋을 설명하다가 마지막에 주님의 감각적·자연적 선을 언급합니다. 자연적인 것에 관한 설명이 주님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우리의 일상적인 선행이 주님의 신적 선과 동일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밝힌 것은 놋뱀이 주님의 감각적·자연적 선을 표상한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놋뱀은 AC.425에서 놋의 의미를 확인하는 마지막 사례이면서, 그 의미가 주님께까지 이어진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민수기의 백성들은 놋뱀을 바라보고 살았고, 주님께서는 이 사건을 인자가 들리시는 일과 영생에 연결하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놋뱀이 주님의 감각적·자연적 선을 표상한다고 밝힙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자연적 선의 의미를 살피는 일이 단순한 재료의 상응을 아는 데서 끝나지 않고, 주님께서 말씀 안에서 어떻게 표상되시는지를 이해하는 데까지 이어짐을 보게 됩니다. (AC.425 심화 1)

 

 

 

AC.425, 창4:22, ‘놋은 왜 자연적 선을 의미하는가?’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5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놋’(brass)이 자연적 선을 뜻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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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4:22)

 

AC.425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brass) 자연적 선을 뜻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또한 말씀에 등장하는 모든 금속이 속뜻으로는 각각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도 알지 못합니다. 이를테면 (gold) 천적 선을, (silver) 영적 진리를, (brass) 자연적 선을, (iron) 자연적 진리를 뜻합니다. 다른 금속들도 마찬가지이며, 나무(wood) (stone) 역시 저마다 고유한 의미를 지닙니다. 궤와 성막과 성전을 만드는 사용한 ’, ’, ’, 나무 이러한 것들을 나타냅니다. 이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이러한 의미는 예언서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It is unknown to the world at the present day thatbrasssignifies natural good, and also that every metal mentioned in the Word has a specific signification in the internal senseasgold,celestial good; “silver,spiritual truth; “brass,natural good; “iron,natural truth; and so on with the other metals, and in like mannerwoodandstone.Such things were signified by thegold,” “silver,” “brass,andwood, used in the ark and in the tabernacle and in the temple,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That such is their signification is manifest from the prophets, as from Isaiah:

 

16네가 이방 나라들의 젖을 빨며 왕의 젖을 빨고 여호와는 구원자, 구속자, 야곱의 전능자인 알리라 17내가 금을 가지고 놋을 대신하며 은을 가지고 철을 대신하며 놋으로 나무를 대신하며 철로 돌을 대신하며 화평을 세워 관원으로 삼으며 공의를 세워 감독으로 삼으리니 (60:16, 17) Thou shalt also suck the milk of the gentiles, and shalt suck the breast of kings. For brass I will bring gold, and for iron I will bring silver, and for wood brass, and for stones iron; I will also make thy tribute peace, and thine exactors righteousness, (Isa. 60:1617)

 

말씀은 주님의 오심과 그분의 나라, 그리고 천적 교회에 관한 것입니다. 대신 (for brass gold) 자연적 대신 천적 선을, 대신 (for iron silver) 자연적 진리 대신 영적 진리를 뜻합니다. 나무 대신 (for wood brass) 육체적 대신 자연적 선을, 대신 (for stones iron) 감각적 진리 대신 자연적 진리를 뜻합니다. 에스겔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treating of the Lords advent, of his kingdom, and of the celestial church. “For brass gold,signifies for natural good celestial good; “for iron silver,signifies for natural truth spiritual truth; “for wood brass,signifies for corporeal good natural good; “for stones iron,signifies for sensuous truth natural truth. In Ezekiel:

 

야완과 두발과 메섹은 상인이 되었음이여 사람과 놋그릇을 가지고 상품을 바꾸어 갔도다 (27:13) Javan, Tubal, and Meshech, these were thy merchants, in the soul of man, and vessels of brass they gave thy trading, (Ezek. 27:13)

 

말씀은 두로에 관한 것입니다. 두로는 영적·천적 부요함을 지닌 사람들을 뜻하며, 놋그릇(vessels of brass) 자연적 선을 가리킵니다. speaking of Tyre, by which are signified those who possess spiritual and celestial riches; “vessels of brassare natural goods.

 

신명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In Moses: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것이라 (8:9) A land whose stones are iron, and out of whose mountains thou mayest hew brass, (Deut. 8:9)

 

여기서도 (stones) 감각적 진리를, (iron) 자연적 진리, 이성적 진리를, (brass) 자연적 선을 뜻합니다. 에스겔은 다음과 같은 모습을 보았습니다. where alsostonesdenote sensuous truth; “iron,natural, that is, rational truth; andbrass,natural good. Ezekiel saw:

 

5 속에서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 그들에게 사람의 형상이 있더라 6그들에게 각각 얼굴과 날개가 있고 7그들의 다리는 곧은 다리요 그들의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고 광낸 구리 같이 빛나며 (1:7) Four living creatures, or cherubs, whose feet sparkled like the appearance of burnished brass, (Ezek. 1:7)

 

여기서도 자연적 선을 뜻합니다. 사람의 (foot) 자연적인 것을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다니엘에게도 다음과 같은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where againbrasssignifies natural good, for thefootof man represents what is natural. In like manner there appeared to Daniel,

 

5 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순금 띠를 띠었더라 6 그의 몸은 황옥 같고 그의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의 눈은 횃불 같고 그의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의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 (10:5, 6) A man clothed in linen, whose loins were girded with gold of Uphaz, his body also was like the beryl, and his arms and his feet like the appearance of burnished brass. (Dan. 10:56)

 

놋뱀(brazen serpent, 21:9) 주님의 감각적·자연적 선을 표상했다는 사실은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That thebrazen serpent(Num. 21:9) represented the sensuous and natural good of the Lord may be seen above.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21:9)

 

해설

AC.425는 두발가인이 다루는 놋과 의 속뜻을 더 넓은 말씀의 문맥에서 확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에 등장하는 금속들이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각각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합니다. 금은 천적 선, 은은 영적 진리, 놋은 자연적 선, 쇠는 자연적 진리를 뜻합니다. 이 구별은 금속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나무와 돌에도 각각 고유한 의미가 있으며, 궤와 성막과 성전을 만드는 데 사용한 재료들 역시 그러한 의미를 지닙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모든 재료의 속뜻을 자세히 설명하기보다, 두발가인과 직접 관련된 놋과 쇠의 의미를 밝히는 데 집중합니다.

 

먼저 사60:16-17은 금속과 재료들의 의미를 서로 비교하여 보여 줍니다. ‘ 대신 은 자연적 선 대신 천적 선을, ‘ 대신 은 자연적 진리 대신 영적 진리를 뜻합니다. 이어 나무 대신 은 육체적 선 대신 자연적 선을, ‘ 대신 는 감각적 진리 대신 자연적 진리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이 주님의 오심과 그분의 나라, 그리고 천적 교회에 관한 것이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재료 교체는 단순히 값싼 물건을 값비싼 물건으로 바꾸는 일이 아니라, 서로 다른 차원의 선과 진리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이 구절을 인간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거듭남의 단계표로 곧바로 바꾸어 읽지 않는 것입니다. AC.425는 각각의 재료가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히 밝히지만, 사람이 육체적 선에서 자연적 선으로, 다시 천적 선으로 나아가는 구체적인 과정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자연적 선을 단순한 도덕적 의무감으로, 천적 선을 특정한 감정 상태로 정의하지도 않습니다. 우선 말씀 안에서 선과 진리가 서로 다른 차원으로 구별되어 표현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7:13에서는 놋그릇이 등장합니다. 이 말씀은 두로의 무역에 관한 기록이며, 스베덴보리는 두로가 영적·천적 부요함을 지닌 사람들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그 문맥에서 놋그릇은 자연적 선을 나타냅니다. 앞의 AC.424에서 세공업자가 선과 진리를 아는 사람 또는 그 기억지식과 관련되었다면, 이번 번호에서는 두로의 상품 가운데 등장하는 놋그릇을 통해 자연적 선의 의미를 확인합니다. 다만 그릇이라는 말에 별도의 의미를 더하여 인간의 마음이나 교리의 그릇이라고 풀이하는 것은 이번 번호가 직접 제시한 설명은 아닙니다.

 

27:13에 등장하는 두발이라는 이름도 창4장의 두발가인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AC.425는 이 두 이름의 관계를 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름이 비슷하고 놋이 함께 등장한다는 이유만으로 두 인물이 동일한 속뜻을 지닌다고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 구절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밝히는 것은 두로의 의미와 놋그릇이 자연적 선을 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8:9에서는 ’, ‘’, ‘이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돌을 감각적 진리로, 쇠를 자연적 진리, 곧 이성적 진리로, 놋을 자연적 선으로 풀이합니다. 특히 여기서는 자연적 진리를 이성적 진리라고도 표현합니다. 앞에서 쇠가 자연적 진리를 뜻한다고 설명한 내용을 이 구절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만 돌은 라는 표현을 감각적 진리가 실제로 이성적 진리로 변화하는 과정에 관한 상세한 설명으로 확대하기보다는, 본문이 밝힌 두 진리의 구별에 먼저 주목해야 합니다.

 

1:7은 놋의 의미를 과 연결하여 보여 줍니다. 에스겔이 본 네 생물, 곧 그룹들의 발은 광낸 놋처럼 빛났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의 발이 자연적인 것을 표상하므로, 그 발에 나타난 놋 역시 자연적 선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는 놋이 자연적 선이라는 설명과 발이 자연적인 것을 표상한다는 설명이 서로 맞물립니다. 그러나 광낸 이 정결하게 된 자연적 선의 특정한 상태를 뜻한다거나, 이 환상의 모든 신체 부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까지 이번 번호에서 밝히지는 않습니다.

 

10:5-6도 비슷한 방식으로 인용합니다. 다니엘이 본 사람은 세마포 옷을 입고 우바스의 금띠를 띠었으며, 팔과 발은 광낸 놋과 같았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금과 놋이 한 형상 안에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에서 금이 천적 선을, 놋이 자연적 선을 뜻한다고 밝혔습니다. 따라서 다니엘의 환상은 놋이 자연적 선을 나타낸다는 설명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됩니다. 다만 이 번호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팔과 허리와 몸의 각 부분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까지 풀이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민21:9놋뱀을 언급합니다. 그는 놋뱀이 주님의 감각적·자연적 선을 표상했다는 사실을 앞에서 이미 설명했다고 말합니다. 앞의 인용들이 놋의 의미를 여러 말씀에서 확인하는 사례였다면, 놋뱀은 그 의미가 주님과 직접 관련되는 사례입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그 설명을 반복하지 않고 앞선 해설을 가리키므로, 놋뱀의 의미는 별도의 심화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결국 AC.425는 금속과 재료의 속뜻을 통해 선과 진리가 서로 다른 차원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특히 이사야와 에스겔, 신명기와 다니엘의 말씀은 놋은 자연적 , 쇠는 자연적 진리라는 앞선 설명을 뒷받침합니다. 그리고 놋뱀에 관한 마지막 언급은 자연적 선의 의미가 궁극적으로 주님과도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창4장의 두발가인이 다루는 놋과 쇠가 단순한 금속이 아니라 자연적 선과 진리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이해하게 됩니다. (AC.425 해설)

 

심화

1. 놋뱀은 주님의 감각적·자연적 선을 표상하는가?’

 

AC.425 심화 1, ‘놋뱀은 왜 주님의 감각적·자연적 선을 표상하는가?’

AC.424 심화1. ‘놋뱀은 왜 주님의 감각적·자연적 선을 표상하는가?’ 민21:9에서 모세는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았습니다. 뱀에게 물린 사람이 그 놋뱀을 바라보면 살아났습니다. 스베덴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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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6, 창4:22, ‘쇠는 왜 자연적 진리를 의미하는가?’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6‘쇠’(iron)가 자연적 진리를 뜻한다는 사실은 에스겔이 두로에 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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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4, 창4:22, ‘세공업자는 왜 선과 진리를 아는 사람을 뜻하는가?’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4말씀에서 ‘세공업자’(artificer)는 지혜롭고 총명하며 지식을 갖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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