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00.심화

 

3. ‘18: 2, 28-29, 31

 

2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28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29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31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 (18: 2, 28-29, 31)

 

AC.300에서 스베덴보리가 시18:2, 28-29, 31을 인용한 이유도 앞의 이사야 본문들과 동일한 맥락입니다. 그는 시편 전체를 해설하려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서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일정한 원리에 따라 구별되어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이 구절들을 인용합니다.

 

18은 다윗이 주님의 구원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그런데 그 찬양 속에는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두 이름이 자연스럽게 교차하여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2절에서는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한 뒤 곧이어 ‘나의 하나님이시요’라고 말합니다. 또 28절에서는 ‘여호와 내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함께 사용되고, 29절에서는 ‘주를 의뢰하고’와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가 나란히 나타납니다. 마지막으로 31절에서는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라고 하여 두 이름을 다시 함께 사용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표현들이 우연한 반복이 아니라 내적 의미에 따른 것이라고 봅니다.

 

먼저 ‘여호와’라는 이름은 흔들리지 않는 반석과 피난처,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반석, 요새, 산성이라는 표현은 모두 변하지 않는 신적 존재와 보호를 상징하며, 이는 스스로 존재하시고, 모든 생명의 근원 되시는 주님의 본질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이 시편에서 ‘여호와’라는 이름은 주님의 신적 존재와 사랑을 강조하는 이름으로 사용됩니다.

 

반면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주님께서 실제로 사람을 도우시고 힘을 주시며, 승리를 이루시는 능력의 측면을 나타냅니다.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라는 말씀에서는 주님의 능력이 사람 안에서 역사하여 어둠을 밝히고 원수를 이기게 하시는 모습이 강조됩니다. AC.300은 바로 이러한 점을 들어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신적 능력과 작용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28절의 ‘여호와 내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AC.300의 핵심 사상을 잘 보여줍니다. 여기서는 두 이름이 하나로 결합되어 사용됩니다. 이는 존재와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과, 그분의 능력이 실제로 역사하시는 측면이 서로 분리될 수 없음을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가 창2에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중요하게 다루는 것도 바로 같은 이유입니다. ‘여호와’와 ‘하나님’은 서로 다른 두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 분 주님의 서로 다른 신적 측면을 나타냅니다.

 

마지막으로 31절은 이러한 논의를 결론짓는 역할을 합니다.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라는 말씀은 참된 하나님이 오직 한 분뿐이심을 선언합니다. 다시 말해, ‘여호와’와 ‘하나님’은 서로 다른 신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라, 동일하신 주님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다만 ‘여호와’는 그분의 신적 존재와 본질을, ‘하나님’은 그 신적 본질이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측면을 각각 강조하는 것입니다.

 

AC.300에서 시18:2, 28-29, 31을 인용한 핵심 이유는, 시편 안에서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두 이름이 서로 구별되면서도 함께 사용되는 예를 통하여, 말씀이 주님의 신적 본질과 신적 능력을 각각 다른 이름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앞서 인용된 사49와 사55의 경우와 같은 원리를 또 다른 말씀을 통해 확인해 주는 증거가 됩니다.

 

 

 

AC.300, 심화 4, ‘시31:14’

AC.300.심화 4. ‘시31:14’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시31:14) AC.300에서 스베덴보리가 시31:14를 인용한 이유는 앞서 인용한 사49, 사55,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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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0, 심화 2, ‘사55:7’

AC.300.심화 2. ‘사55: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사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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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55: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55:7)

 

 

AC.300에서 스베덴보리가 사55:7을 인용한 이유 역시 앞의 사49:4-5와 같습니다. 이 구절을 자세히 해설하려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서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각각 다른 의미를 가지고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증거로 제시한 것입니다.

 

55:7은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한 뒤, 이어서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말합니다. 같은 한 절 안에서 ‘여호와’와 ‘하나님’이 연이어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표현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말씀은 같은 뜻을 단순히 반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른 이름이 사용되었다면, 그 이름마다 내적 의미, 곧 속뜻으로는 구별되는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는 말씀은 사람이 생명과 존재의 근원이신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나타냅니다. 죄를 떠나 회개하는 것은 단순히 생활을 조금 고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proprium을 떠나 생명 자체이신 주님께 방향을 돌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의 ‘여호와’는 주님의 신적 존재와 사랑, 곧 모든 생명의 근원을 나타냅니다.

 

이어지는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에서는 주님의 긍휼과 용서가 실제로 사람에게 역사하는 측면이 강조됩니다. 용서는 주님의 신적 사랑이 사람 안에서 효력을 나타내는 작용이며,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능력입니다. 따라서 여기의 ‘하나님’은 주님의 신적 능력과 역사하심을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러한 구별을 근거로 ‘여호와’는 본질을, ‘하나님’은 능력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인용은 AC.300의 중심 논지를 다시 확인해 줍니다. 말씀은 어떤 때에는 ‘여호와’만 사용하고, 어떤 때에는 ‘하나님’만 사용하며, 또 어떤 때에는 이처럼 두 이름을 함께 사용합니다. 이것은 문체의 변화가 아니라 내적 의미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존재와 생명 자체를 강조할 때에는 ‘여호와’라는 이름이, 그 존재가 능력으로 역사하여 사람을 구원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측면을 강조할 때에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사용됩니다.

 

AC.300에서 사55:7을 인용한 핵심 이유는, 한 절 안에서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두 이름이 나란히 사용되는 예를 통하여, 말씀에서 ‘여호와’는 주님의 신적 본질과 존재를, ‘하나님’은 그 본질이 사람을 향해 역사하는 신적 능력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역시 창1에서 ‘하나님’이, 창2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사용되는 이유를 이해하도록 돕는 중요한 증거 가운데 하나입니다.

 

 

 

AC.300, 심화 3, ‘시18: 2, 28-29, 31’

AC.300.심화 3. ‘시18: 2, 28-29, 31’ 2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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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0, 심화 1, ‘사49:4-5’

AC.300.심화 1. ‘사49:4-5’ 4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 참으로 나에 대한 판단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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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9:4-5

 

4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 참으로 나에 대한 판단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 5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나니 그는 태에서부터 나를 그의 종으로 지으신 이시요 야곱을 그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는 이시니 이스라엘이 그에게로 모이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 보시기에 영화롭게 되었으며 나의 하나님은 나의 힘이 되셨도다 (49:4, 5)

 

 

스베덴보리가 AC.300에서 사49:4-5를 인용한 목적은 이사야 전체를 해설하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같은 문맥 안에서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두 이름이 각각 다른 의미를 가지고 사용된다는 사실입니다. 곧 ‘여호와’는 주님의 신적 존재와 본질을, ‘하나님’은 주님의 신적 능력과 역사를 나타낸다는 AC.300의 주장을 성경으로 입증하기 위해 이 구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49:4에서는 ‘참으로 나에 대한 판단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 말합니다. 이어지는 5절에서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나니’라고 하면서 ‘나의 하나님은 나의 힘이 되셨도다’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처럼 매우 짧은 문맥 안에서 ‘여호와’와 ‘하나님’이 나란히 사용되는 것을 주목합니다. 만일 두 이름이 완전히 같은 뜻이라면 굳이 구별하여 사용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불필요한 반복을 하지 않으며, 서로 다른 이름에는 언제나 서로 다른 내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여호와’는 판단하시고 부르시며 사명을 맡기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스스로 존재하시며, 모든 것의 근원 되시는 주님의 신적 존재를 나타냅니다. 반면 ‘나의 하나님은 나의 힘이 되셨도다’라는 말씀에서는 능력과 힘이 강조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주님의 신적 능력이 실제로 역사하는 측면을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러한 차이를 근거로 ‘여호와’는 본질을, ‘하나님’은 능력을 의미한다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인용은 또한 창세기 첫째 장과 둘째 장의 하나님의 이름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창1에서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계속 사용되는 것은 주님의 능력이 사람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과정을 다루기 때문이며, 창2에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나타나는 것은 존재와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과 그분의 신적 능력이 함께 나타나는 상태를 다루기 때문입니다. 사49:4-5는 이러한 구별이 창세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에 일관되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예로 인용된 것입니다.

 

AC.300에서 사49:4-5를 인용한 핵심 이유는,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두 이름이 단순한 동의어나 문체상 반복이 아니라,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각각 주님의 신적 본질과 신적 능력을 구별하여 나타낸다는 사실을 성경 자체로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AC.300, 심화 2, ‘사55:7’

AC.300.심화 2. ‘사55: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사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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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0, 창3:22, 첫 번째 아르카나, ‘여호와 하나님’(Jehovah God)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3:22) AC.300 첫 번째 아르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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