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5:1)

 

AC.470

 

‘출생의 책’(book of the births), 곧 ‘계보’가 태고교회에 속했던 사람들의 명단이라는 것은 이어지는 내용에서 매우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 장부터 11장, 즉 에벨 시대까지, 이름은 결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사물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태고 시대에 인류는 집(houses), 가족(families), 그리고 민족(nations)으로 구분되었습니다. 집은 남편과 아내,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로 구성되었으며, 그들의 가족 중 일부는 봉사했습니다. 가족은 더 많거나 적은 수의 집으로 구성되었으며, 서로 멀리 떨어져 살지는 않았지만, 함께 살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라는 더 많거나 적은 수의 가족으로 구성되었습니다. That the “book of the births” is an enumeration of those who were of the most ancient church is very evident from what follows, for from this to the eleventh chapter, that is, to the time of Eber, names never signify persons, but actual things. In the most ancient time mankind were distinguished into houses, families, and nations; a house consisting of the husband and wife with their children, together with some of their family who served; a family, of a greater or lesser number of houses, that lived not far apart and yet not together; and a nation, of a larger or smaller number of families.

 

해설

 

스베덴보리는 AC.470에서 창세기 5장을 ‘계보’, 곧 ‘출생의 책’으로 이해해야 하는 이유를 한층 더 분명히 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이 장이 태고교회에 속한 자들의 열거라는 사실은 ‘뒤따르는 내용으로부터 매우 분명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5장부터 11장, 곧 에벨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등장하는 이름들은 어느 하나도 개인을 뜻하지 않고, 모두 ‘실제적인 것들(actual things)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 구간의 성경은 역사적 인물 전기가 아니라, ‘교회의 내적 실재들’, 곧 신앙과 사랑, 인식과 상태의 변화를 이름으로 표현한 장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actual things’는 추상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태고교회 사람들의 삶 속에서 실제로 존재했던 영적 상태, 곧 그들이 어떻게 사랑했고, 어떻게 인식, 즉 지각(퍼셉션, perception)했고, 어떻게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는지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아담’, ‘’, ‘에녹’, ‘노아’라는 이름은 어떤 개인의 호적명이 아니라, ‘그 시대 교회를 규정하던 중심 상태’를 대표하는 표지, 즉 표상과 같습니다. 이 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창세기 5장부터 11장까지는 끝내 설교의 언어가 되지 못하고, 단지 해명해야 할 난제의 집합으로 남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태고교회 시대의 인류가 어떻게 구분되어 있었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태고의 시대에는 인류가 ‘(house), ‘가족(family), ‘민족(nation)으로 구분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행정적 단위나 혈연 중심의 사회 구조와는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태고교회에서 이러한 구분은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필요 때문이 아니라, ‘사랑의 정도와 질서’, 곧 내적 상태의 유사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습니다.

 

먼저 ‘’이란, 단순히 한 지붕 아래 사는 사람들의 묶음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집은 ‘남편과 아내, 그들의 자녀들, 그리고 함께 섬기던 가족 일부’를 포함하는 공동체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집이 단순한 생활 단위가 아니라, ‘하나의 사랑과 하나의 인식이 살아 움직이던 작은 교회’였다는 점입니다. 태고교회의 혼인은 단순한 사회 제도가 아니라, 사랑과 지혜의 결합이었고, 그 결합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같은 영적 분위기 속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러므로 한 집은 곧 ‘하나의 영적 생태계’였습니다.

 

그다음 단계가 ‘가족’입니다. 가족은 여러 집들이 모여 이루어진 공동체로, 서로 멀지 않은 곳에 살되 한 집처럼 완전히 섞여 살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질서가 ‘무질서한 집단화’가 아니라, 각 집의 고유한 영적 색채를 존중하면서도 더 큰 조화를 이루는 구조였음을 보여줍니다. 각 집은 고유한 사랑의 강조점을 가지고 있었고, 가족은 그러한 다양한 집들이 하나의 더 큰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단위였습니다. 이 역시 행정적 필요가 아니라, 내적 친밀성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합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민족’은 더 많은 가족들이 모여 이루어진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민족은 오늘날의 국가 개념이나 정치 공동체가 아닙니다. 태고교회의 민족은 ‘같은 종류의 사랑과 신앙을 공유하는 가족들의 연합체’였습니다. 다시 말해, 혈통이 아니라 ‘내적 상태의 공통성’이 민족을 이루는 기준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성경에서 한 민족의 이름이 곧 하나의 영적 상태를 가리키게 되었고, 훗날 이스라엘 열두 지파 역시 이 구조 위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 모든 설명은 왜 창세기 5장부터 11장까지의 이름들이 개인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들’을 뜻하는지를 분명히 해줍니다. 태고교회에서는 개인보다 상태가 먼저였고, 사람은 자기 이름으로 기억되기보다, 자신이 속한 집과 가족, 민족의 영적 성격 속에서 이해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이름을 나열하는 것은 사람 수를 세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상태가 어떻게 분화되고 확장되었는지를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결국 AC.470은 창세기 족보를 읽는 우리의 시선을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성경은 ‘옛날에 이런 사람들이 살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처음에는 이렇게 하나였고, 이렇게 다양해졌으며, 이렇게 구조를 이루어 갔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관점 위에서만, 창세기 5장과 11장 사이의 모든 이름들은 살아 있는 신앙의 언어가 됩니다. 그리고 이 언어는 오늘날 교회를 이해하는 데에도 여전히 유효한 기준을 제공합니다.

 

 

 

AC.471, 창5:1, ‘홀로 거함’(living alone), ‘장막에 거함’(dwelling in tents)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1 그들이 이처럼 서로 떨어져 살면서 오직 집과 가족과 민족으로만 구분되었던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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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69, 창5:1,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AC.469-474)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This is the book of the births of man. In the day that God created man, in the likeness of God made he him. (창5:1) AC.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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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This is the book of the births of man. In the day that God created man, in the likeness of God made he him. (5:1)

 

AC.469

 

‘계보’(book of the births)는 태고교회에 속했던 사람들을 열거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in the day that God created man)는 그가 영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in the likeness of God made he him)는 그가 천적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것은 태고교회에 대한 설명입니다. The “book of the births” is an enumeration of those who were of the most ancient church; “in the day that God created man” denotes his being made spiritual; and “in the likeness of God made he him” signifies that he was made celestial: thus it is a description of the most ancient church.

 

해설

 

창세기 5장은 얼핏 보면 족보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AC.469에서 이 장의 성격을 분명히 규정합니다. ‘계보(book of the births)란 개별 인물들의 혈통 기록이 아니라, ‘태고교회에 속했던 자들의 상태가 어떻게 이어지고 변화해 갔는지를 열거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여기서 ‘출생’이란 육체적 탄생이 아니라, ‘새로운 영적 상태의 출현’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 5장은 누가 누구의 아들이었는지를 말하려는 장이 아니라, ‘태고교회라는 하나의 교회가 어떤 영적 상태에서 시작하여 어떤 과정을 거쳐 쇠퇴와 전환에 이르렀는지를 보여주는 영적 연대기’입니다. 이 관점을 놓치면 이 장은 끝내 이해되지 않지만, 이 관점을 붙들면 창세기 5장은 성경 전체에서도 매우 깊은 교회론적 장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in the day that God created man)라는 표현을 시간적 의미로 보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은 언제나 ‘상태’를 의미하며, 여기서 말하는 창조란 흙으로 사람을 빚으신 사건이 아니라, ‘사람이 영적 존재로 세워진 상태’, 곧 영적(spiritual) 인간이 되었음을 가리킵니다. 태고교회의 인간은 단순히 자연적 생명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받아 그것에 따라 사는 영적 인간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5장의 출발점은 인류의 생물학적 시작이 아니라, ‘교회의 영적 시작’, 다시 말해 인간이 참된 의미에서 인간이 된 상태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AC.469의 핵심은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in the likeness of God made he him)라는 말은 단지 영적 인간이 되었다는 뜻을 넘어서, ‘그가 천적(celestial) 인간이었다’는 뜻이라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영적 상태란 진리를 통해 선으로 인도받는 상태이지만, 천적 상태란 ‘사랑 자체 안에서 선을 곧바로 인식하는 상태’입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선과 진리를 배워서 알지 않았고, 교리를 통해 판단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함으로써 무엇이 참이고 선한지를 즉각적으로 인식하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태고교회의 독특성이며, 이후 어떤 교회에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회복되지 않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5장은 타락 이후의 인간사를 정리한 장이 아니라, ‘타락 이전 혹은 타락의 문턱에 있던 태고교회의 내적 구조를 보여주는 장’입니다. 각 이름은 한 개인이라기보다 교회의 한 국면을 나타내며, 장수는 그 상태가 교회 안에서 지속된 기간을 의미합니다. ‘낳았으며... 죽었더라’라는 반복 표현은 단순한 생사 기록이 아니라, ‘하나의 영적 상태가 끝나고 다음 상태로 넘어갔음을 알리는 표지’입니다.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는 모두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 의미가 왜곡됩니다.

 

결국 AC.469는 창세기 5장을 읽는 하나의 결정적인 해석 원리를 제시합니다. ‘태고교회는 하나님을 단지 믿기만 하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곧바로 퍼셉션으로 알던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5장은 그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그 천적 상태가 이어졌으며, 마침내 왜 새로운 교회가 필요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장입니다. 이 관점 위에서만 창세기 5장은 족보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가 압축된 영적 역사’로 읽히게 됩니다.

 

 

 

AC.470, 창5:1, '창5-11 에벨 시대까지 나오는 이름들의 의미'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0 ‘출생의 책’(book of the births), 곧 ‘계보’가 태고교회에 속했던 사람들의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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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2, 창4:26, '태고교회 이단들의 뿌리와 그 심오함'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42 위에서 설명한 이 장의 내용을 보면, 태고 시대에는 교회와 분리된 많은 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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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25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4:25, 26)

 

 

※ 오늘 부를 찬송가는 순서대로 찬301, ‘지금까지 지내온 것’과 찬554, ‘종소리 크게 울려라’입니다.

 

 

오늘은 올해 2025년 마지막 주일예배입니다. 방금 찬송가 301장 가사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처럼 찬양하게 되는 아침입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 본문은 창세기 4장 마지막 단락으로 창세기 4장 관련 모두 다섯 번의 설교를 마치게 됩니다.

 

 

여러분, 살면서 사람이 가장 절망하는 순간은 언제일까요? 어떤 의욕 충만했던 시도가 처음 의도와는 달리 결국 크게 실패했을 때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제 경우를 보면, 같은 말인데요, ‘앞이 캄캄하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히지?’ 했던 때인 것 같습니다. 지난 19809월, 고3 예비고사를 한 달 남겨두고 모친께서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을 때가 그랬던 것 같고, 주님 일에 헌신하고자 멀쩡히 다니던 대기업을 나와 여러 해 동분서주하던 대형 교회에서 결국 권고사직을 당하던 때가 그랬던 것 같습니다. 세월이 흐른 지금은 고요한 심령으로 지난날들을 돌아보게 되고, 그 결과 지금 생각하면 무척 아쉬웠던 순간들, 그러니까 ‘아,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그보다는 이렇게 저렇게 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하는 장면들이지요, 곧 사소한 말 한마디, 소소한 대인관계, 크고 작은 선택들 가운데 참 지혜롭지 못했던 순간들이 수두룩함을, 그러니까 위 두 경우 말고도 지난날의 많은 막힘과 왜곡들 가운데 사실은 내가 자초한 측면들이 많음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전체적으로 보면, 주님은 그런 너무나 서투르게 살아온 저라는 사람의 일생을, 그러나 또한 기가 막히게 보살펴주셔서 오늘 이렇게 생의 마지막을 주님께 붙들려 오직 주님 일에 쓰임 받게 하심을 봅니다. 천방지축 어디서부터 손봐야 할지 모를 인생을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지금도 여전히 이루고 계심을 봅니다.

 

우리가 지난 4주에 걸쳐 살펴온 창세기 4장이 바로 그런 장입니다. 가인은 여호와 앞을 떠났고, 그의 계보는 점점 신앙과 체어리티에서 멀어졌습니다. 문명은 발전했지만, 사랑은 사라졌고, 라멕의 노래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죽었음을 선언합니다. 다음과 같은 정신 나간 노래나 하고 말이지요.

 

23...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4:23, 24)

 

이쯤 되면 우리는 보통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서 끝이다. 사람은 변하지 않아. 사람은 고쳐쓰는 게 아니야...’ 주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오랜 세월 가인 계보를 돌보셨음에도 말이지요. 우리라면 그냥 다 포기하고 다시 새로 리셋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바로 이 지점에서 전혀 다른 문장을 시작합니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4:25)

 

이 문장은 조용하지만, 그러나 우리에게 말합니다. ‘주님은 아직 일을 끝내지 않으셨다. ‘황폐’(vastation)는 마지막 장이 아니다.’라고 말이지요.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볼 땐 정말 엉망진창이 된 가인 계보의 끝, 곧 하나의 장구한 교회 시대의 종말의 때에,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 사랑과 자비의 여호와이신 주님이 하시는 일을 다음 세 가지로 살피고자 합니다.

 

 

먼저, ‘셋’(Seth)은 잃어버린 체어리티를 회복하는 길, ‘다른 씨’, 곧 신앙이다 (25)

 

25절에서 하와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4:25)

 

많은 사람은 셋을 ‘아벨의 대체품’처럼 생각합니다. 위 말씀은 얼핏 그렇게도 읽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와는 ‘대신에’라고는 하지만 ‘다른 씨’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아벨은 체어리티, 곧 사랑이었고,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신앙이 사랑을 제거해 버린 상태를 뜻합니다. 그런데 셋은 그 사랑을 그대로 복제한 존재가 아닙니다. 셋은 황폐를 통과한 이후에도 주님께서 보존하신 씨, 곧 리메인스의 표상입니다.

 

큰 산불이 지나간 자리를 가 본 적이 있으신지요?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 봄이 되면, 분명 아무도 뭘 뿌리거나 심지 않았는데도 거기서 풀들이, 그리고 새싹들이 조용히 올라옵니다. 그 풀들은, 그 싹들은 불에 타지 않고 땅속에 남아 있던 씨앗에서 나옵니다. 자주 뉴스에 나오는 강원도 산불처럼 말입니다. 사람들은 ‘다 끝났다’고 할 때, 땅은 이미 다음 계절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셋은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가인의 계보가 겉으로 역사를 이끌고 갈 때, 셋의 계보는 눈에 띄지 않게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겉으로 드러나는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계보가 아닌, 드러나지 않게 숨겨오신, 그러나 잘 보존된 계보를 통해 일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성공, 능력, 영향력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 안에 조용히 지켜 오신 ‘다른 씨’, 곧 아직 꺼지지 않은 신앙의 흔적이 다음 시작의 출발점이 됩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이런 씨가 잘 보관되어 오고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은 이 셋이라는 새로운 신앙을 통해 체어리티를 회복하실 것입니다.

 

 

둘째, 에노스(Enosh)는 셋을 통해 회복하게 된 체어리티를 모든 것, 곧 모든 신앙생활의 중심에 두는 새 교회이다 (26)

 

26절은 셋의 아들 에노스를 소개합니다. ‘에노스’는 셋이라는 신앙을 통해 회복된 체어리티를 그 중심에 두는 교회를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전환입니다.

 

태고교회 초기에는 인간이 사랑 안에서 진리를 즉각적으로 보는 지각, 곧 퍼셉션(perception)의 신앙을 살았습니다. 그때는 사실 신앙이 사랑과 분리될 수도 없는 개념이었지요. 그러나 그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로부터 분리되는 순간, 퍼셉션이 닫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인간은 스스로를 강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퍼셉션은 천국과, 그리고 천국을 통해 주님과 바로 연결되는 능력인데 이제 그 연결이 끊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노스가 등장합니다. 이는 인간이 처음으로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음을 뜻합니다. ‘우리는 약하다. 우리는 스스로 설 수 없다.

 

젊을 때는 신앙도 자신감으로 합니다. ‘기도하면 돼. 마음만 굳게 먹으면 되지’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인생을 조금 살아보면 알게 됩니다. 어떤 문제는 기도해도 즉시 풀리지 않고, 어떤 상처는 의지로는 감당되지 않는다는 걸 말입니다. 그때부터 비로소 사람은 명령하는 기도가 아닌, 간청하는 기도, 의탁하는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에노스의 신앙이 바로 그것입니다. 가인의 계보는 끝까지 자기 확신의 길을 갔습니다. 라멕은 살인을 노래하면서도 자신을 정당화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셋의 계보는 다릅니다. 이 계보는 연약함을 인정하는 자리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인정이 바로 다음 단계로 이어집니다.

 

에노스는 비록 천적 인간처럼 체어리티를 타고 나는 인간은 아니지만, 그래서 셋이라는 신앙을 통해 체어리티를 배워가지고 살아내야 하는 영적 인간이지만, 자기를 체어리티로부터 분리했던 가인들과는 달리 체어리티를 자기의 모든 신앙생활의 중심으로 삼는, 그래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간입니다.

 

 

셋째, 그 결과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 참된 예배가 재개, 회복되었다 (26)

 

26절 마지막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4:26)

 

이 말은 ‘그때부터 기도가 시작되었다’라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앙의 방식이 바뀌었다는 선언입니다. 이전에는 인간이 사랑 안에서 진리를 보았다면, 이제는 보지 못하기 때문에 부릅니다. 확신해서가 아니라, 의지하기 때문에 부릅니다.

 

여기서 하나의 대비가 분명해집니다. 가인은 성을 쌓고 자기 이름을 남겼지만, 셋의 계보는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대비 말입니다.

 

오늘날에도 사람은 여전히 성을 쌓습니다. 경력, 성과, 명성, 업적, 심지어 신앙의 업적까지 쌓아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 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그 반대입니다. 기도는 내 이름을 내려놓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입니다.

 

체어리티가 회복되면, 그리고 회복된 체어리티를 모든 신앙생활의 중심에 두면,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예배,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요, 교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라멕은 그 신앙마저 부정한 상태를 표상합니다. 이 지점에 이르면, 더 이상 교회라고 부를 만한 내적 실체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외적 형식이나 기억 지식은 남아 있을지라도, 주님과의 내적 결합은 끊어진 상태이지요. 바로 이런 상태를 가리켜 스베덴보리는 ‘이전 교회가 소멸되었다’고 말합니다.

 

이전 교회가 이렇게 소멸된 후, 주님은 셋과 에노스로 표상된 새 교회를 일으키십니다. 이 교회는 신앙을 통해 체어리티를 회복하고, 체어리티를 신앙의 주된 것으로 삼습니다. 따라서 이 교회의 예배는 다시 여호와, 곧 사랑과 자비의 주를 향한 예배가 됩니다. 이때 성경은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말합니다. 이는 새 교회의 예배가 공식적으로 자리 잡았음을 알리는 선언입니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성경 전반에서 반복됩니다. 어떤 상태가 끝나고, 전혀 다른 질서의 상태가 시작될 때, 성경은 종종 ‘그때 비로소’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는 연대기의 표시가 아니라, 영적 시대의 구분선입니다.

 

오늘 본문은 오늘의 교회와 개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형식은 남아 있으나 체어리티가 사라진 상태에서는, 예배가 계속되는 것처럼 보여도 내적으로는 예배가 중단된 상태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체어리티가 회복될 때, 성경적 의미에서의 예배는 다시 ‘시작’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 창4 마지막 시간, 비록 가인 계보의 이야기였지만, 그래서 내내 우울하고 어두웠지만, 그러나 주님은 가장 어두웠던 라멕의 때에 오히려 아다와 씰라를 일으켜 주님의 일, 즉 교회를 새롭게 하시고, 셋과 에노스로 이어지는 흐름으로 전에 잃어버렸던 아벨이라는 체어리티를 회복, 새 교회의 중심되게 하심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주님의 일하심을 오늘 우리도 잘 관찰하였사오니, 오, 주님! 우리 개개인에게도 올해에 이어 내년 2026년에도 동일하게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주님을 찬양, 주님게 감사하오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설교

2025-12-28(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631, 24. 창4.5, 2025-12-28(D1)-주일예배(창4,25-26, AC.434-442),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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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예배(2025/12/25, 눅2:10, 11, 요1:9),'오늘 우리를 위하여 오신 참 빛 되신 주님'

오늘 우리를 위하여 오신 참 빛 되신 주님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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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5/12/21, 창4:16-24), '라멕과 그의 두 아내, 아다와 씰라'

라멕과 그의 두 아내, 아다와 씰라 16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17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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