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의 속뜻
35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 36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37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 38그들이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 (눅22:35-38)
오늘 본문 첫 구절입니다.
35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
※ 아래 에피소드는 오늘 이 설교의 원저자이신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의 에피소드입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목회를 시작할 때 생각이 났습니다. 2011년 1월 2일, 정초(正初)에 집에서 아내와 함께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목회에 대한 열의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뭐랄까 이 진리를 누군가에게 전해야만 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생계에 대한 대책도 없었고, 신학교를 졸업했다고는 하나 진리에 대한 이해도 여전히 부족했습니다. 그때를 돌아보면, 오늘 본문 말씀처럼, 전대(纏帶, 허리에 두르거나 어깨에 메게 된 자루, 중간을 막고 두 끝을 터서 그곳으로 돈이나 물건을 넣게 되었음)도 없고, 변변한 신발도 없이 먼 길을 떠나는 사람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말씀이 특별히 마음에 와닿습니다. 어려운 일이 많았는데도 목회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고비마다 주님의 도우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것이 있더냐’시는 주님 말씀이 마치 제게 하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아마도 그래서일 것입니다.
사실 전대와 배낭, 신발이 없는 제자들의 모습은, 진리를 찾아 처음 새 교회로 왔을 때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영적 의미로 전대와 배낭이 없다는 것은 진리, 또는 진리의 지식이 없다는 뜻이니까요. 그동안 새 교회로 오신 분들을 보면, 대개 ‘천국과 지옥’이나 ‘참된 기독교’ 같은 스베덴보리의 책을 읽고 공감하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때는 진리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고, 아직 확신도 없는 상태입니다. 이를테면 그런 게 전대와 배낭이 없이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발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발은 인체에서 가장 낮은 데 있으므로 영적으로는 가장 낮은 차원의 것인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신발은 발보다 아래 있으므로 영적으로는 가장 낮은 것인 감각적인 것을 뜻합니다. 감각적인 것은 어떤 걸까요? 눈과 귀, 촉감과 같은 감각을 통해 느껴지는 것들입니다. 예를 들면 영화를 본다거나 좋은 오디오로 음악을 듣는 것, 좋은 천으로 만든 옷을 입는 것 같은 말초적인 즐거움이 모두 감각적인 것입니다. 이런 감각적 즐거움에 몰두하게 되면 영적인 것에서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감각적 기쁨이 영적인 것을 방해하기 때문인데요, 그런 이유로 해서 주님은 떨기나무의 불꽃 속에서 모세를 처음 만나실 때,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3:5)
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몇 년 전에 교회를 지으면서 바닥에 온돌을 깔았는데 그 역시 같은 의미입니다. 주님 앞에 나올 때 신을 벗음으로써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멀리 있음을 나타내려는 것이지요. 그렇게 보면 신발이 없다는 건 영적으로 나쁜 의미가 아닌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나 부정적인 의미를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신발이 없다는 건 외적인 면에서 제자들에게 부족한 게 많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제자들의 표정이나 말투, 행동거지 같은 외적인 것들이 그다지 경건하거나 썩 지적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다 보면, 주님의 제자들이 누가 더 높으냐 서로 다투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베드로는 특히 감정 기복이 심한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저들에게 잡혀가실 때는 검을 꺼내어 그중 한 사람의 귀를 자르더니, 이번에는 정반대로 대제사장의 뜰에서 만난 사람이 그를 고발하려고 했을 때는 두려운 나머지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그에 비해 바리새인들은 어땠을까요? 적어도 겉으로는 경건했습니다. 회당과 큰 거리에서 거룩한 모습으로 기도했고, 말투는 온유하고 행동거지는 신중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 모든 게 겉모습일 뿐이고, 속을 들여다보면 누구보다 교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셨습니다. 이런 정황들을 볼 때,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처음 모습은 지금 우리들의 모습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족한 것이 없더냐는 주님의 물음에 제자들이 ‘없었나이다’라고 대답하자 주님께서는 다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6절,
36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이 말씀은, 한마디로 각자가 가지고 있는 진리의 지식을 시험을 통해 진리로 바꾸라는 말씀입니다. 새 교회에 처음 나온 분들은 예배에 참석해 설교를 듣고, 말씀을 통해 교리를 배웁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시험이 옵니다. 여러 가지 시험이 있습니다. 질병이나 물질의 시험이 있는가 하면, 직장에서의 시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러한 시험을 허용하시는 이유에 대해 ‘천국의 비밀’ 8966번 글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시험은 신앙의 진리를 확인하고 고취시켜 의지 안에 심으며, 그렇게 해서 인애(仁愛, charity 체어리티)의 선이 되게끔 도와준다. 사람은 신앙의 진리를 가지고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기 때문이다. (AC.8966, 이순철 역) Temptations conduce to the confirmation of the truths of faith, also to the implantation of them, and the insinuation of them into the will, that they may become goods of charity. For, as before said, man fights from the truths of faith against evils and falsities; (AC.8966)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진리는 시험을 통해 체어리티의 선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신앙으로 받아들인 진리는 그 자체로는 선이 없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그것으로는 시험에서 이기기 어렵습니다. 진리의 능력은 진리 안에 있는 선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해 신앙의 선(goods of charity)이라고 하는 체어리티의 선은 선을 품고 있는 진리이며, 그러므로 능력의 진리입니다. 그래서 거듭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진리를 체어리티의 선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라 하신 말씀은 선 없는 진리, 즉 진리의 지식만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선 있는 진리로 바꿔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앞의 ‘전대, 배낭’은 최초의 신앙의 진리를 뜻하고, 뒤의 ‘가지라’는 것은 신앙의 선, 또는 인애, 체어리티의 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이성 안에만 머물러 있는 진리의 지식을 주님과 협력하여 의지 안으로 옮기라는 것입니다. 그때 그 진리는 선 있는 진리가 됩니다. 이성 안에는 선이 없지만 의지 안에는 선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지식을 의지 안으로 옮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에 대해 주님은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라고 하십니다. 말씀에서 검이나 칼은 자아와의 싸움, 즉 시험을 뜻합니다. 그리고 겉옷은 자아에 속한 것들을 뜻합니다. 예를 들면, 자아로부터 올라오는 이기심이나 좋지 않은 욕망 같은 것입니다. 진리를 통해 자신을 돌아볼 때, 그런 좋지 않은 것들이 보입니다. 그때 그것과 싸워 몰아내야 합니다.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교회에 나와 처음 배운 진리의 지식은 아무 힘이 없다 했는데, 어떻게 그것을 가지고 시험에서 이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진리의 지식으로는 시험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의 이성 안에는 진리의 지식만 있는 게 아니라 이른바 양심이라는 선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진리의 지식과 양심이라는 선을 가지고 처음에는 가벼운 시험부터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번 시험에서 이길 때마다 점점 더 큰 시험을 이길 능력이 생깁니다. 그와 관련해 ‘천국의 비밀’ 6663번 글은 시험에서 이길 때마다 점점 진리가 늘어난다(truths grew according to the infestations)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선이 있는 진리이며, 그래서 능력이 있는 진리입니다.
시험의 중요성을 말씀하신 주님께서 이번에는 당신 자신의 시험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37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37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당신에 대한 구약의 모든 예언을 빠짐없이 이루셨고, 그리하여 완전한 말씀이 되셨습니다. 말씀 안에는 말씀의 목적인 사랑이 있고, 목적을 이루는 수단인 진리가 있으며, 그것의 결과인 쓸모, 쓰임새(use)가 있습니다. 여기서 쓰임새란 말씀 안의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통해 나오는 말씀의 능력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완전한 말씀이 되셨다는 건 세상에서의 삶을 통해 당신에 대한 구약의 모든 예언을 구체적으로 실현하셨다는 뜻이며, 그리하여 주님 자신이 사랑 자체, 진리 자체, 쓸모 자체가 되셨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생애를 돌아보면 그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은 이사야서 53장 12절,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라는 말씀에서 비롯한 것인데, 주님은 이 예언이 실제로 이루어질 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크게 낙심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젠가는 주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인정하게 될 거라고 믿었고, 그 결과 자기들의 앞날도 훤하게 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속된, 다분히 세속적인 이해와는 달리 인류 전체의 거듭남을 위해서는, 즉 인류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사실 이것이 주님이 오신 주된 목적인데, 주님은 자신이 먼저 영화롭게 되셔야만 했습니다. 주님의 영화란 당신의 불완전한 인성, 즉 육의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 유전하신 인성이 시험과 시험에서의 승리를 통해 당신 안에 계신 신성과 하나 되는 일입니다. 그렇게 볼 때 인간의 시험이 거듭남을 위한 시험이라면 주님의 시험은 인성을 영화롭게 만드는 시험이었습니다. 주님은 지금 그 마지막 시험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계신 것입니다.
38그들이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하니 주님께서 대답하시길 ‘족하다’ 하십니다. 앞의 36절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당신이 마치 범법자처럼 끌려갈 것을 말씀하시지요. 그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검을 들고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검 두 자루를 주님 앞에 내놓았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그것이면 족하다 하십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 무엇을 나타내려고 하셨을까요? 여기서 검은 시험을 통해 얻은 진리를 뜻하고, 둘이라는 수는 진리와 선의 결합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내놓은 검 두 자루는 곧, 시험을 통해 얻은, 선이 있는 진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것이면 족하다 하신 것입니다. 선과 결합한 진리만 있으면 어떤 시험에서도 이길 수 있고 거듭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 살다 보면 부조리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진리를 알수록 그런 것들이 더 뚜렷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그것들과 싸우려 합니다. 그러나 부조리한 것은 외부에만 있는 게 아니라 각자의 마음속에도 있습니다. 외부 부조리에만 집중하고 맞서다 보면 내부의 부조리를 개선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진리를 가지고 실제로는 내면의 부조리와 맞서 싸우길 바라십니다. 즉 외부 부조리와 싸울 때에도 그에 상응하는 내부 부조리를 생각하며 싸우는 것이지요.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는 말씀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내면의 부조리와 싸우면서, 또 한편으로는 외부의 부조리를 견디며 의로운 방법으로 순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그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은 아무 잘못이 없으신, 지극히 순결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주님을 마치 범법자처럼 끌어가 모욕, 폭행하였으며,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주님은 한 번도 저항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그런 점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불의한 자들이 잘 되는 것을 불평하지 말고, 자기 안의 게으름과 탐욕, 이기심부터 먼저 몰아내야 하겠습니다. 그때 우리의 진리는 지식의 차원에서 진리의 차원으로, 선 없는 진리에서 선 있는 진리로 상승합니다. 그리고 내적으로도 그렇고, 외적인 면에서도 지극히 겸손, 온유,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가 선 있는 진리로 매일 같이 승리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10:34)
아멘
2022-12-04(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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