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And Adah bare Jabal; he was the 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 and of cattle. 21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And his brother’s name was Jubal; he was the father of everyone that playeth upon the harp and organ. 22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And Zillah, she also bare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and the sister of Tubal-Cain was Naamah. (4:19-22)

 

AC.333

그때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는데, 아다와 씰라(Adah and Zillah) 이를 의미하며, 그들의 아들들인 야발(Jabal), 유발(Jubal), 두발가인(Tubal-Cain)으로 성격을 있습니다. 야발 교회의 천적인 것들을, 유발 영적인 것들을, 두발가인 자연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19-22) A new church then arose, which is meant by Adah and Zillah, and is described by their sons Jabal, Jubal, and Tubal Cain; the celestial things of the church by Jabal, the spiritual by Jubal, and the natural by Tubal-Cain. (verses 1922)

 

해설

AC.333은 가인 계열의 이야기를 읽다가 상당히 뜻밖의 전환을 만나는 글입니다. 바로 앞 AC.332에서는 가인으로부터 생겨난 여러 이단들이 계속 변질되어 오다가 마지막 라멕에 이르렀고, 그 안에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가인으로 표상된 그 교리적 계열은 완전히 종말에 이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AC.333에서 스베덴보리는 그때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교회를 아다와 씰라라고 합니다.

 

여기서 먼저 새로운 교회라는 표현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가인으로 시작된 분리된 신앙의 계열이 원래의 태고교회 상태로 되돌아갔다는 뜻이 아닙니다. 라멕에 이른 그 교리적 상태는 이미 신앙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은 종말에 도달했습니다. 그러나 한 교리적 계열이 종말에 이른다고 해서 주님의 교회와 섭리까지 함께 종말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종말 가운데서도 새로운 교회적 상태를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아다와 씰라는 바로 그러한 새로운 교회를 표상합니다.

 

이 점은 앞의 AC.330-332와 함께 읽을 때 더욱 선명해집니다. AC.330에서는 장차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지게 될 것이므로 신앙에 속한 것이 보존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AC.332에서는 가인으로부터 이어진 한 교리적 계열이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마저 잃게 됩니다. 그렇다고 주님의 섭리가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AC.333은 오히려 바로 그 종말 가운데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음을 보여 줍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이 새로운 교회가 아다와 씰라라는 두 여자로 표상된다는 점입니다. 말씀에서 여자는 교회를 표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AC.333의 단계에서는 아다와 씰라 각각의 세부적인 의미를 너무 앞서 정리하기보다, 우선 두 사람이 함께 새로운 교회를 의미한다는 큰 틀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 교회의 보다 구체적인 상태와 당시의 상황은 이어지는 번호에서 더 자세히 설명됩니다.

 

또한 이 새로운 교회의 성격은 그들의 아들들인 야발, 유발, 두발가인을 통하여 묘사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야발은 교회의 천적인 것들, 유발은 영적인 것들, 두발가인은 자연적인 것들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 새로운 교회 안에 교회의 천적, 영적, 자연적 차원에 해당하는 것들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천적인 것들은 주님 사랑과 선에 관계된 것들, ‘영적인 것들은 신앙과 진리에 관계된 것들, ‘자연적인 것들은 그것들이 외적 삶과 형식 안에서 나타나는 차원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AC.333 한 번호만으로 이 셋의 구체적인 성격이나 상호 관계를 모두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후 AC에서 야발, 유발, 두발가인이 각각 무엇을 더 구체적으로 표상하는지가 자세히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333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라멕의 종말 뒤에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고, 교회 안에 다시 천적, 영적, 자연적인 것들에 해당하는 요소들이 나타났다는 큰 구조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가 한 교리적 계열의 실패에 묶여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인간 편에서는 한 상태가 종말에 이를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그 종말 가운데서도 새로운 시작을 마련하십니다.

 

여기서 새로운 교회라는 말을 곧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와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아다와 씰라로 표상되는 교회는 아직 창4의 홍수 이전 문맥 안에서 등장하는 새로운 교회입니다. 이후 노아로 표상되는 고대교회는 태고교회의 종말 이후 인간의 거듭남 질서 자체가 달라지는 더 큰 전환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같은 새로운 교회라는 표현이라도 그 범위와 의미를 문맥에 따라 구별해야 합니다.

 

또한 AC.333라멕이라는 악한 사람이 있었는데 아들들은 갑자기 좋은 사람들이 되었다는 식으로 읽으면 속뜻의 중심을 놓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추적하는 것은 개별 인물의 도덕성보다 교회와 교리의 상태 변화입니다. 라멕은 한 교리적 계열의 종말을 표상하고, 아다와 씰라는 그 종말 가운데 새롭게 일어난 교회를, 그들의 아들들은 그 교회의 천적, 영적, 자연적인 것들을 표상합니다.

 

이 점에서 창4의 계보는 다시 한번 단순한 가족사가 아니라 교회적 상태의 계승과 변화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힙니다. ‘낳았다는 말은 속뜻에서 한 상태로부터 다른 상태가 파생되고 전개되는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아다와 씰라가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을 낳았다는 것은 그 새로운 교회 안에서 여러 교회적 요소들이 형성되고 나타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AC.333은 절망의 끝에서 시작되는 글입니다. 라멕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남지 않았지만, 거기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시고, 그 안에서 다시 교회의 천적, 영적, 자연적인 것들이 나타나게 하십니다. 인간의 한 계열은 종말에 이를 수 있지만, 주님의 섭리는 그 종말을 새로운 시작을 위한 자리로 사용하십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중요한 원리를 줍니다. 어떤 교회적 형식이나 한 시대의 신앙 구조가 쇠퇴한다고 해서 주님의 교회와 구원의 역사가 끝났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만든 형식의 종말 가운데서도 보존할 것을 보존하시고 새롭게 일으킬 것을 일으키십니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형식을 붙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지금 어떤 선과 진리, 어떤 체어리티와 신앙의 질서를 새롭게 일으키고 계시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AC.333의 가장 큰 메시지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라멕의 종말아다와 씰라의 새로운 교회가 맞닿아 있습니다. 인간의 종말이 곧 주님의 종말은 아닙니다. 인간 편에서 더 이어 갈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에도 주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새로운 교회적 상태를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심화

1. 라멕에서 신앙마저 사라졌는데 어떻게 곧바로 새로운 교회 일어날 있는가?

 

AC.333 심화 1, 라멕에서 신앙마저 사라졌는데 어떻게 곧바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날 수 있는가

AC.333 심화1. 라멕에서 신앙마저 사라졌는데 어떻게 곧바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날 수 있는가? AC.332에서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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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4, 창4:23-24,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모독이 극에 이르렀을 때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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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 창4:18, 라멕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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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 심화

4. 가인 계열의 생명 주기는 오늘날 기독교와 어떻게 겹쳐 보일  있는가?

 

가인 계열을 따라 읽다 보면 오늘날 기독교, 특히 개신교의 모습이 겹쳐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한 가지 경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것은 가인 계열이  오늘날 개신교다라는 역사적 동일시가 아닙니다. AC.332가 오늘날 특정 교단을 직접 예언하거나 규정한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 가능한 것은 창4가 보여 주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분리될  나타나는 교회의 영적 패턴을 오늘의 교회에도 적용하여 성찰해 보는 것입니다.

 

가인 계열의 시작에는 신앙 자체를 버리려는 의도가 없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문제는 그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 독립적인 것으로 만들고, 마침내 체어리티보다 높이는 데 있습니다. 이 점은 어느 시대 어느 교회에서도 반복될 수 있는 위험입니다.

 

살아 있는 종교 운동은 처음에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말씀에 대한 열정, 삶의 변화에 대한 강한 요구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교리와 제도와 신조가 정리됩니다. 이것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를 보존하고 다음 세대에 전하기 위해 필요한 일입니다.

 

문제는 어느 순간 그 교리적 형식이 그것을 낳은 생명보다 앞서기 시작할 때입니다. ‘어떻게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하는가?보다 어떤 명제를 정확하게 믿는가?가 거의 전부처럼 여겨지고, 신앙의 정확성이 체어리티와 삶의 선에서 분리되면 가인으로 표상되는 원리가 다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개신교의 일부 모습이 창4와 겹쳐 보이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신조와 교리적 분화, 교단과 신학적 논쟁 자체가 곧 악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교리는 필요하고 진리의 분별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분화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는 삶보다 더 중요한 것이 된다면 우리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를 다시 살펴야 합니다.

 

AC.332의 라멕은 여기에서 특히 무거운 경고를 줍니다. 출발점에서는 신앙을 높였지만 마지막에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 오늘날 교회도 외적으로는 건물과 조직, 신학교와 교단, 설교와 성경공부, 선교와 교육이 매우 활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내적인 교회의 생명이 건강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교회의 외적 제도와 활동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라멕 상태라고 판정해서도 안 됩니다. 외적인 것은 내적인 생명을 위한 귀중한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안에 선과 진리의 결합,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이 실제로 살아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아다와 씰라, 그리고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의 존재가 의미심장합니다. 한 교회적 상태가 내적으로 쇠퇴해도 그 안에서 신학, 예배, 음악, 교육, 선교, 연구, 사회적 봉사와 같은 유용한 외적 요소들이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것이 많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내적 상태를 자동으로 판단할 수도 없고, 반대로 내적 쇠퇴의 위험이 있다고 해서 그 안의 모든 것을 악하다고 버릴 수도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의 종말을 단순한 외적 붕괴와 동일시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외적 제도와 활동은 오래 지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내적인 생명, 곧 선과 진리, 체어리티와 신앙의 결합이 약해지고 마침내 사라지면 내적으로는 종말을 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원리를 오늘날 기독교에 적용할 때 가장 먼저 시선을 밖으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 교단이 가인이다’, ‘ 교회가 라멕이다라고 판정하는 순간 창4가 주는 말씀의 칼날을 다른 사람에게만 돌리게 됩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안의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를 알고 AC를 읽는 사람 역시 이 위험에서 면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속뜻과 상응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지식이 이웃을 사랑하고 악을 피하며 쓰임을 행하는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바로 그 AC 지식이 체어리티보다 앞서는 가인적 기능을 할 수도 있습니다. 진리의 종류가 아무리 고상해도 선과 분리되면 위험합니다.

 

따라서 창4를 오늘의 개신교와 겹쳐 읽는다면 목적은 개신교가 끝났다는 선언을 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살아 있는 교회가 어떻게 교리적 형식을 만들고, 그 형식이 어떻게 생명에서 분리될 수 있으며, 분리가 계속되면 어떻게 처음의 신앙 자체까지 약화될 수 있는지를 성찰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희망도 있습니다. 한 특정 교회적 상태가 종말에 이른다고 해서 주님의 교회 자체가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AC 전체에서 주님께서는 교회의 종말 가운데서도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다음 교회를 준비하십니다. 인간의 형식은 쇠퇴하고 끝날 수 있지만 주님의 구원의 섭리는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창4와 겹쳐 볼 때 가장 중요한 질문은 누가 가인인가?가 아니라 우리 가운데 무엇이 가인처럼 되고 있는가?이며,  개신교가 끝나는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지금도 무엇을 보존하시고 어떻게 선과 진리, 신앙과 체어리티를 다시 결합시키고 계시는가?일 것입니다.

 

이러한 독법이라면 창4는 과거의 태고교회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어느 시대의 교회에도 적용될 수 있는 영적 거울이 됩니다. 그러나 그 거울을 다른 사람에게 들이대기 전에 먼저 자신과 자신이 속한 교회의 상태를 살피는 데 사용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도 유익한 적용입니다.

 

 

 

AC.332, 창4:18, 라멕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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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 심화 3, 라멕에서 신앙이 사라졌는데 아다와 씰라의 계열에서는 왜 유용한 것들이 나타나는

AC.332 심화3. 라멕에서 신앙이 사라졌는데 아다와 씰라의 계열에서는 왜 유용한 것들이 나타나는가? AC.332에서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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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 심화

3. 라멕에서 신앙이 사라졌는데 아다와 씰라의 계열에서는  유용한 것들이 나타나는가?

 

AC.332에서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곧이어 등장하는 아다와 씰라, 그리고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후의 AC를 읽다 보면 이들이 단순히 악과 거짓만을 표상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가인 계열은 이미 라멕에서 끝난  같은데   뒤에 유용해 보이는 것들이 다시 나타나는가?

 

여기서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은 내적인 교회의 생명이 소멸되었다는 것과  계열에서 모든 외적인 것까지 즉시 쓸모없어졌다는 것이 같지 않다는 점입니다. 한 교회적 상태가 내적으로 종말에 이를 수 있어도 그 안에서 형성된 지식과 기술, 예배와 교리의 외적 형식 가운데 후대에 사용될 수 있는 것들이 남을 수 있습니다.

 

라멕에서 신앙에 속한 것이 남지 않았다고 해서 그 이후에 나타나는 모든 것이 악이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 사회와 교회의 쇠퇴 가운데서도 후대에 쓸 수 있는 것들을 보존하실 수 있습니다. 이후 야발, 유발, 두발가인을 설명하는 AC에서는 천적인 것, 영적인 것, 자연적인 것과 관련된 여러 외적 형식과 기능이 구별되어 나타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용한 외적인 것이 나타났다는 사실과 가인으로 시작된 교회적 상태가 다시 본래의 생명을 회복했다는 것을 혼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라멕에서 신앙의 내적 생명이 종말에 이르렀다는 설명은 그대로 유지됩니다. 그 이후에 유용한 것들이 나타난다고 해서 가인 계열이 다시 태고교회의 순수한 천적 상태로 돌아간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줍니다. 내적인 것이 약해지거나 사라진 뒤에도 외적인 지식과 기술, 형식은 한동안 남을 수 있고 오히려 크게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들은 나중에 올바른 내적 생명과 결합될 때 좋은 쓰임에 사용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종말도 모든 외적 종교 활동이 한순간에 사라진다는 뜻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본질적인 생명인 선과 진리, 체어리티와 신앙의 결합이 더 이상 그 교회적 상태 안에서 유지되지 못할 때 내적으로는 종말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 형식과 교리적 지식과 여러 유용한 외적 요소는 계속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4와 창5를 읽을 때에도 가인 계열은 악한 사람들,  계열은 선한 사람들이라는 단순한 두 혈통의 대립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중심 관심은 각각의 계보가 표상하는 교회적 상태와 그 변화에 있습니다. 5의 계보 역시 언제까지나 동일하게 순수한 상태로 유지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태고교회 전체는 결국 쇠퇴하고 종말을 향해 갑니다.

 

그러므로 홍수 역시 단순히 악한 가인 혈통은 멸망하고 선한  혈통은 살아남았다는 구조로 읽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속뜻과 맞지 않습니다. 노아는 단순한  계열의 착한 생존자라기보다 새로운 교회적 상태, 곧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거듭나는 영적 교회의 시작을 표상합니다.

 

후속 AC 전체에서 보면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는 인간의 의지 자체가 깊이 부패하면서 더 이상 지속될 수 없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이해와 진리를 통하여 새로운 의지가 형성되며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새로운 거듭남의 질서를 마련하십니다. 노아는 바로 그 전환과 연결됩니다.

 

이렇게 보면 아다와 씰라 계열에서 유용한 것들이 나타나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한 교회적 상태가 종말을 향하고 있다고 해서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주님께서 버리시는 것은 아닙니다. 보존할 수 있는 것은 보존하시고, 후대의 교회와 인간 사회에 사용될 수 있는 것은 쓰임을 위해 남겨 두십니다.

 

따라서 이 심화가 보여 주는 중요한 원리는 종말 가운데서의 보존입니다. 내적 생명이 쇠퇴해도 모든 외적인 유용성이 즉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주님의 섭리는 쇠퇴한 것 가운데서조차 후대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을 건져 보존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다와 씰라,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을 만나면서 우리는 가인 계열이 다시 살아났구나라고 보기보다, ‘내적인 교회적 생명이 종말을 향하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는 어떤 외적인 것들을 보존하여 이후의 쓰임을 준비하시는가?라는 질문으로 읽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AC.332 심화 2, 가인의 표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는 라멕에서 실패한 것인가?

AC.332.심화2. 가인의 표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는 라멕에서 실패한 것인가? AC.330에서는 주님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어 신앙이 침해받지 않도록 보존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도 분명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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