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36 심화
1. 왜 체어리티가 심어지자 다시 ‘사람’[homo]이라 불리는가?
AC.336에서 가장 깊이 생각해 볼 표현은 ‘another man [homo]’, 곧 ‘또 하나의 사람’일 것입니다. 왜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에노스는 새로운 교회였다’고 하지 않고 굳이 ‘또 하나의 사람’이라고 했을까요?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에게 ‘사람’이라는 말이 어떤 영적 의미를 가지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창세기 초기의 속뜻에서 사람은 단순히 인간의 외적 형체를 가진 존재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인간을 참으로 사람답게 하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며, 그 생명이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으로 받아들여질 때 인간은 영적인 의미에서 더욱 참된 사람이 됩니다. 따라서 ‘사람’이라는 표현은 교회의 상태를 나타내는 이름으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가인의 상태와 에노스의 상태가 대조됩니다. 가인은 신앙을 의미했지만 그 신앙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이 무너지면서 교회적 생명도 무너졌고, 그 분리는 마침내 체어리티의 소멸과 신앙 자체의 변질로 이어졌습니다.
반면 AC.335에서는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심으셨다고 합니다. 그 새로운 신앙이 셋이며, 이제 AC.336에서는 그렇게 심어진 체어리티를 에노스라고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에노스를 ‘또 하나의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올바른 관계 안에 놓이면서 하나의 교회적 생명이 형성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앙만 따로 존재하거나 체어리티와 분리된 상태에서는 교회의 생명이 온전하지 않지만,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심으시고 그 둘이 다시 결합될 때 하나의 살아 있는 교회적 상태가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또 하나의 사람’이라는 말은 단지 에노스라는 개인에게 붙여진 별명이 아닙니다. AC.336은 바로 이어서 ‘이것이 그 교회의 이름’이라고 말합니다. 에노스는 한 개인의 이름인 동시에 속뜻에서는 그 상태를 가진 교회의 이름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심으로써 교회가 다시 ‘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됨의 근원이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신앙과 체어리티를 만들어 결합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신앙도 주님께서 주셨고, 체어리티 역시 주님께서 심으십니다. 인간이 참으로 사람이 되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의 생명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이라는 말에는 인간의 영적 존엄과 함께 인간의 전적인 의존도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proprium으로 참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만큼 사람다운 생명을 갖게 됩니다. 교회 역시 조직이나 이름 때문에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살아 있을 때 참된 교회가 됩니다.
가인의 상태에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었습니다. 그래서 외적으로는 신앙에 관한 교리와 예배가 있어도 그 안의 생명은 점차 무너질 수 있었습니다. 반면 에노스에서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지고, 그 결과 새로운 교회가 ‘또 하나의 사람’이라는 이름을 받습니다. 이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이 교회의 인간다운 형상을 이루는 데 얼마나 본질적인지를 보여 줍니다.
다만 이 ‘또 하나의 사람’을 최초의 태고교회와 완전히 같은 상태의 회복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에노스 역시 태고교회의 흐름 안에 있지만, 앞선 상태와 동일한 교회라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another man’, 곧 ‘또 하나의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새로운 교회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 구체적인 성격과 변화는 이어지는 AC의 설명을 따라가며 확인해야 합니다.
또한 셋과 에노스의 관계를 곧바로 홍수 이후 영적 인간의 일반적인 거듭남 단계로 옮겨 놓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먼저 진리를 배우고 신앙으로 행하다가 나중에 체어리티가 생긴다’는 식의 단계는 후대 영적 인간의 거듭남을 설명할 때 중요한 의미를 가지지만, AC.336의 에노스는 아직 태고교회 문맥 안에 있습니다.
바로 다음 AC.337에서도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를 천적 인간이라고 하며, 그들에게는 사랑으로부터 주님께 받은 신앙, 곧 신앙에 속한 것들을 아는 퍼셉션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AC.336에서는 우선 ‘주님께서 주신 새로운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졌고, 그 체어리티와 교회가 에노스, 곧 또 하나의 사람이라 불렸다’는 직접 진술을 중심에 두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이 원리를 우리의 거듭남에 적용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셋 단계가 지나면 에노스 단계가 온다’는 식의 고정된 시간표로 적용하기보다, 참된 인간의 생명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주님 안에서 결합될 때 나타난다는 영적 원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안전합니다.
이것은 오늘의 교회를 바라볼 때에도 중요합니다. 교회가 교리를 정확히 가지고 있고 많은 지식을 가르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사람’이라 불릴 만한 살아 있는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진리가 실제로 선과 결합되고,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사람들의 삶 안에 나타나야 합니다.
반대로 체어리티를 말한다고 해서 진리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드는 것도 올바른 질서가 아닙니다. 에노스는 셋을 없앤 뒤 나타난 것이 아니라 셋으로 의미된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입니다.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를 제거하는 경쟁 관계가 아니라, 주님께서 하나의 살아 있는 교회 안에서 결합시키시는 것입니다.
결국 AC.336의 ‘또 하나의 사람’이라는 짧은 표현은 참된 인간과 참된 교회가 무엇인지를 압축해서 보여 줍니다. 참된 사람은 자기 지식이나 자기 선으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그 둘이 결합된 생명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가 공동체 안에 이루어질 때 그 교회 역시 하나의 ‘사람’이라 불릴 수 있습니다.
가인에게서 무너졌던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이 셋과 에노스에서 다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회복의 중심에는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이 계십니다. 새로운 신앙을 주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바로 그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교회가 ‘에노스’, 곧 ‘또 하나의 사람’입니다.
AC.336, 창4:26, ‘에노스’(Enosh)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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