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exalted? An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and 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4:7)

 

AC.328

그리고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있으며, 신앙이 주된 것이 되어 체어리티보다 높임을 받지만 않는다면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7) And that the quality of the faith is known from the charity; and that charity wishes to be with faith, if faith is not made the principal, and is not exalted above charity. (verse 7)

 

해설

AC.328은 앞의 AC.325-327에서 계속되어 온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문제를 한층 더 깊이 다루면서도, 매우 중요한 가능성 하나를 보여 줍니다. AC.325에서는 태고교회가 본래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으나 이후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한 사람들이 생겨났다고 했습니다. AC.326에서는 그 분리가 예배에까지 나타나 가인의 제물아벨의 제물이라는 서로 다른 예배가 되었고, AC.327에서는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졌습니다. 그런데 AC.328에서는 아직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체어리티는 여전히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먼저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있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quality)은 그 신앙이 어떤 성질의 신앙인가를 뜻합니다. 단지 어떤 교리를 믿는다고 고백하는가만으로는 신앙의 내적인 질을 충분히 알 수 없습니다. 그 신앙이 실제 삶에서 어떤 선을 낳고 있으며, 사람을 어떤 사랑으로 이끌고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과 별개로 나중에 덧붙이는 장식이 아니라 그 신앙이 살아 있는지를 드러내는 중요한 표지가 됩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신앙을 낮게 평가하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밝혀 주는 말입니다. 신앙의 진리는 사람이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알게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의지와 삶 안으로 들어가 선과 결합하지 않는다면 아직 그 목적을 이루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진리는 선을 향하고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이어지는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표현은 창4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제거하려 하지 않습니다. 아벨은 본래 가인의 적이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하나를 없애고 다른 하나만 남기는 것이 주님의 질서가 아닙니다. 둘은 구별되지만 함께 있어야 합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하고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할 때 교회 안에서 하나의 생명을 이룹니다.

 

그러나 여기에 조건이 붙습니다. ‘신앙이 주된 것이 되어 체어리티보다 높임을 받지만 않는다면입니다. 문제는 신앙이 존재한다는 데 있지 않고, 신앙이 자신을 주된 (principal)으로 세워 체어리티보다 높이려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주된 은 단순히 중요하다는 뜻보다 질서를 주도하는 것을 뜻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 두고 체어리티의 질을 결정하려 할 때 본래의 질서가 뒤집힙니다.

 

다만 이것을 신앙은 낮은 것이고 체어리티만 높은 것이다라는 식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가치 경쟁이 아니라 결합 안의 질서입니다. 진리는 반드시 필요하고 신앙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선을 위해 존재하고 신앙이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 인간의 거듭남에서는 사람이 먼저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하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과정이 중요하지만, 그 진리는 결국 선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시간적으로 무엇을 먼저 배우느냐와 궁극적으로 무엇이 주도하는가를 구별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가인과 아벨의 관계도 새롭게 보입니다. 아벨이 가인을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체어리티가 신앙을 밀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높이고 주된 것으로 만들려 할 때 둘의 관계가 깨집니다. 그리고 그 분리가 끝까지 진행되면 다음 AC.329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곧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창4: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는 말씀에는 아직 가능성이 남아 있습니다. 아벨은 아직 살아 있으며, 체어리티는 여전히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완전히 밀어내기 전까지는 결합의 길이 닫힌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말씀하시며 그의 상태를 드러내고, 앞으로 어떤 길로 나아갈 것인지를 그 앞에 놓으십니다.

 

이것은 앞의 AC.327에서 가인의 상태가 악해졌다고 했음에도 주님께서 그에게 계속 말씀하신다는 점과도 연결됩니다. 주님은 인간의 상태가 악해졌다고 해서 곧바로 그를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이 악으로 더 깊이 들어가기 전에 진리를 통하여 그의 상태를 드러내시고 돌아설 길을 보여 주십니다. 4:7은 바로 아벨의 죽음 직전에 주어지는 말씀이라는 점에서 더욱 무겁게 다가옵니다.

 

AC.328은 또한 신앙의 질을 판단하는 기준을 우리 자신에게 돌리게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올바른 교리를 알고 있는가?만이 아닙니다. 물론 올바른 진리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 내가 알고 믿는 진리가 삶에서 무엇을 낳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 신앙이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선을 행하게 하며, 자기 자신보다 주님과 이웃을 향하게 한다면 그 열매를 통하여 신앙의 질이 드러납니다.

 

특히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으며 많은 속뜻과 상응을 배우는 우리에게도 이 기준은 중요합니다. 얼마나 많은 아르카나를 알고 있는지가 신앙의 질을 자동으로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진리를 통하여 자신의 악을 더 분명히 보고,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며, 이웃을 더욱 지혜롭게 사랑하고 실제 쓰임의 삶으로 나아가는가가 중요합니다. 진리가 선과 결합될 때 우리가 배우는 아르카나도 살아 있는 진리가 됩니다.

 

AC.325부터 이어진 흐름을 정리하면 이제 매우 선명합니다.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었고, 그 분리는 예배에 나타났으며,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의 상태는 악해졌습니다. 그러나 AC.328에서는 아직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다음 단계가 결정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높여 마침내 그것을 소멸시킬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다음 AC.329에서 우리는 그 비극적인 결과를 만나게 됩니다.

 

심화

1.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있다

 

AC.328 심화 1,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알 수 있다

AC.328 심화1.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알 수 있다 이 한 문장은 오늘날 신앙을 돌아보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기준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흔히 어떤 사람의 신앙을 그의 신앙 고백이나 성경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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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9, 창4:8-9,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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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7, 창4:5-6,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And unto Cain and unto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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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7 심화

1.  분리가 결국 이 되는가?

 

AC.327에서 가장 깊이 생각해 볼 문제는 이것입니다. 사랑과 신앙을 분리한 것이 왜 결국 사람의 상태를 악하게 만드는가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교리적으로 잘못 이해했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람이 곧 악해진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AC.327을 그렇게 개인에 대한 단순한 판정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는 태고교회 안에서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뒤 그 교회적 상태가 계속 진행되면서 어떤 결과에 이르렀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말하는 선과 진리의 관계를 생각해야 합니다. 선과 진리는 서로 결합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진리는 무엇이 선인지 보여 주고 선으로 인도하며, 선은 진리를 받아들여 삶이 되게 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신앙의 진리는 체어리티의 선과 결합될 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따라서 문제는 구별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선과 진리는 구별되고 신앙과 체어리티도 구별됩니다. 서로 다른 기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구별이 분리로 변할 때입니다. 진리가 선과의 관계를 잃고 신앙이 체어리티와의 관계를 잃으면, 진리는 더 이상 자신이 존재하는 본래의 목적을 온전히 수행할 수 없습니다.

 

이 점에서 가인의 상태는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가인은 신앙을 버린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을 가지고 있고 제물도 드립니다. 외적으로는 매우 종교적인 상태가 계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관심의 중심이 점차  진리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서 무엇이 옳은 교리인가?’, 더 나아가 내가 옳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로 옮겨갈 위험이 생깁니다.

 

진리 자체가 악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는 여전히 진리입니다. 그러나 선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진리는 인간의 proprium에 의해 자기 사랑이나 자기 우월성을 위해 사용될 수 있습니다. 원래 진리는 사람 자신의 악을 비추고 주님의 뜻에 따라 살도록 이끌어야 하는데, 오히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자신을 높이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진리 자체가 아니라 진리를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사람의 사랑과 목적이 달라지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왜 가인의 분노가 AC.327에서 중요한지가 드러납니다. 자신의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이것이 자신을 돌아보고 사랑과 신앙의 질서를 회복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인으로 표상되는 상태에서는 분노가 일어납니다.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하려 하기보다 오히려 체어리티를 향한 적대가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리가 악이 된다는 말은 단순히 두 교리를 구별하여 설명하는 순간 악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이 자기 생명인 체어리티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적인 것을 자처하고, 그 상태가 계속되면서 삶과 애정의 질서까지 뒤집히는 것을 말합니다. AC.325의 분리가 AC.326에서는 예배의 분리로 나타났고, AC.327에서는 사람들의 상태 자체가 악해지는 데까지 진행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경고가 있습니다. 말씀과 교리를 깊이 공부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무엇이 참된지를 정확하게 분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진리가 나를 주님께 더 가까이 이끌고 이웃을 더 사랑하게 하는 대신,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알고 더 옳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 사용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진리의 목적을 다시 돌아보아야 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의 말씀 해석과 속뜻을 공부하는 우리에게도 이 경고는 그대로 적용됩니다. 아르카나를 많이 알고 상응을 이해하는 것 자체가 영적인 생명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지식이 체어리티와 분리되면 자신을 높이는 또 하나의 지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배우는 목적은 진리를 소유하는 데 있지 않고, 그 진리에 따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주님과 이웃을 더욱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AC.327 상태가 악해졌다는 말은 매우 엄중합니다. 4의 최초 살인은 어느 순간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속뜻에서 보면 그 비극의 시작은 훨씬 앞에 있었습니다.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고,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나며, 마침내 사람의 내적 상태까지 악하게 되었을 때 아벨을 죽이는 다음 단계가 준비됩니다.

 

결국 AC.327이 보여 주는 것은 분리의 위험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 진리와 선은 서로 구별되지만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진리는 선 안에서 목적을 이루고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리를 붙들 때 가장 깊이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 얼마나 정확한가?만이 아니라  진리가 나를 어떤 사랑과 어떤 삶으로 이끌고 있는가?입니다.

 

 

 

AC.327, 창4:5-6,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And unto Cain and unto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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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And unto Cain and unto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art thou wroth, and why are thy faces fallen? (4:5-6)

 

AC.327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진 것은,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한 (anger being kindled, and his countenance falling)으로 묘사됩니다. (5-6) That the state of those who were of separated faith became evil, is described by Cainsanger being kindled, and his countenance falling.(verses 56)

 

해설

AC.327AC.325-326에서 시작된 흐름이 이제 사람의 상태 자체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여 줍니다. AC.325에서는 본래 사랑과 하나였던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었고, AC.326에서는 그 분리가 예배에까지 나타났습니다. 가인도 제물을 드렸지만 그것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비롯된 예배였습니다. 이제 AC.327에서는 그 결과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졌다고 합니다.

 

여기서 상태가 악해졌다(became evil)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완전히 악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가인은 본래 교회 안에 있던 신앙에서 출발합니다. 문제는 그 신앙이 자신의 생명인 사랑에서 분리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랑과 신앙의 분리였지만,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났고, 이제는 그 분리를 붙들고 있는 사람들의 상태 자체가 악해지는 단계로 진행됩니다.

 

이것은 창4의 타락이 한순간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처음부터 아벨을 죽이자는 상태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본래 함께 있어야 할 사랑과 신앙이 서로 떨어져 나가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분리가 계속되자 예배의 질이 달라졌고, 이제는 그 결과 애정과 내적 상태 자체가 악한 방향으로 변해 갑니다. 이후에는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곧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가인이 몹시 분하였다는 것은 이러한 악화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문자 그대로의 이야기에서는 자신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데 대한 가인의 분노이지만, 속뜻에서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진 것이 이 분노를 통하여 묘사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 개인의 성격이나 순간적인 감정 분석이 아니라,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어떤 방향으로 변해 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를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신앙도 사랑과 구별되는 중요한 것이 아닌가?라는 데서 출발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신앙은 중요하며 진리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구별이 분리가 되고, 분리된 신앙이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세우기 시작하면 질서가 뒤집힙니다. 체어리티는 더 이상 신앙과 함께 있어야 할 형제가 아니라 신앙의 독립적인 지위를 위협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인의 분노는 앞으로 일어날 아벨의 죽음과 연결됩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단지 체어리티 없이 존재하는 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밀어내며 결국 소멸시키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4의 살인은 속뜻에서 이러한 영적 과정의 마지막 결과를 보여 줍니다.

 

안색이 변하였다는 표현도 가인의 상태가 이전과 달라졌음을 더욱 강하게 묘사합니다. 다만 AC.327에서는 아직 이 표현의 세부적인 상응을 풀어 주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분함안색의 변화가 함께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졌음을 나타낸다는 스베덴보리의 직접적인 설명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다고 신앙 자체를 악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AC.325부터 계속 지켜야 할 중요한 구별입니다. 문제는 신앙이 아니라 분리된 신앙입니다. 신앙의 진리는 체어리티의 선과 결합될 때 사람에게 생명을 주며,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진리가 선에서 분리되고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떨어져 나가면, 본래 선을 섬겨야 할 진리가 그 목적을 잃게 됩니다.

 

또한 창4:6에서는 이러한 상태에 있는 가인에게 여호와께서 여전히 말씀하십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AC.327은 이 질문의 속뜻을 아직 자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문자 자체에서도 주님께서 가인의 악해진 상태를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설명에서는 이 부르심과 경고의 의미가 더욱 분명해질 것입니다.

 

AC.325-327을 함께 놓으면 창4의 흐름이 매우 선명해집니다. 먼저 사랑과 신앙의 분리가 일어납니다. 다음으로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제 그 결과 사람의 상태 자체가 악해집니다. 결국 아벨의 죽음은 갑자기 등장하는 비극이 아니라 앞에서부터 진행되어 온 분리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AC.327은 우리에게 나는 화를 내는가?라는 심리적인 질문보다 더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붙들고 있는 진리와 신앙은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는가?하는 질문입니다. 진리가 선과 함께 있고 신앙이 체어리티 안에 있을 때 그것은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분리되어 신앙이 스스로 서려고 할 때, 처음에는 작은 질서의 변화처럼 보였던 것이 결국 사람의 내적 상태 전체를 바꾸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심화

1. 분리 결국 되는가?

 

AC.327 심화 1, 왜 ‘분리’가 결국 ‘악’이 되는가?

AC.327 심화1. 왜 ‘분리’가 결국 ‘악’이 되는가? AC.327에서 가장 깊이 생각해 볼 문제는 이것입니다. 사랑과 신앙을 분리한 것이 왜 결국 사람의 상태를 ‘악하게’ 만드는가 하는 것입니다.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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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8, 창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exalted? And if thou doest not well,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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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6, 창4:3-5, 가인의 제물, 아벨의 제물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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