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2026/08/02)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41, ‘내 영혼아 주 찬양하여라’, 230,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성찬), 87, ‘내 주님 입으신 그 옷은입니다.

 

오늘 3 아홉 번째, 본문은 창3:23-24이고, AC 글 번호로는 305번에서 313번입니다. 오늘로 창3 본문을 마치며, 다음 주는 AC 3 뒤와 창4 , 그러니까 사후 사람이 영생에 들어가는 것’, 그리고 사후 사람이 영혼, 즉 영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내용을 연결하여 다루겠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설교 후 성찬 있습니다.  

 

먼저 본문입니다. 본문은 지난주처럼 창3 세 번째 파트 전체를 읽겠습니다.

 

20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22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24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3:20-24)

 

제목은

 

그룹들, 두루 도는 불 칼,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심

 

이며, 다음은 오늘 범위인 AC.305-313의 요약입니다.

 

AC.305 (23) 요약

 

3:23은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장면을 통하여, 타락한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던 지성과 지혜의 상태를 잃고, 새로운 영적 질서 아래 살아가게 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는 단순히 장소에서 추방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에서 비롯되는 지혜와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을 더 이상 직접 누리지 못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동산은 진리를 이해하는 지성을, ‘에덴은 사랑으로부터 오는 지혜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는 것은 사랑과 지혜가 함께 무너지고, 천적 생명의 상태를 상실하였음을 뜻합니다. 사람은 여전히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지만, 이제는 자기 자신과 세상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자연적 인간의 상태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이어지는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는 거듭나기 이전의 자연적 인간으로 돌아갔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심판이 아니라 새로운 구원의 질서를 마련하신 주님의 섭리였습니다. 사람은 퍼셉션은 잃었지만, 말씀을 배우고, 양심을 형성하며, 신앙과 체어리티를 통해 점진적으로 거듭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얻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에덴에서의 추방은 생명을 빼앗으신 사건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을 위한 새로운 구원의 시작을 마련하신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를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AC.306-313 (24) 요약

 

3:24는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내쫓으시는 심판의 장면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이 더 깊은 영적 파멸에 이르지 않도록 보호하시는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는 단순히 어떤 장소에서 추방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더 이상 천적 인간으로서 주님으로부터 직접 선과 진리를 지각(perception)하는 상태에 머물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완전히 버리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적 상태에 맞는 새로운 구원의 질서를 마련하셨습니다.

 

에덴동산 동쪽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지혜의 근원을 의미하며, 그곳에 두신 그룹들은 사람이 아직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앙의 가장 깊은 아르카나를 함부로 접하여 모독(profanation)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그룹은 생명의 길을 막는 존재가 아니라, 장차 사람이 다시 생명에 이를 수 있도록 그 길을 거룩하게 보존하는 존재입니다. 이어지는 두루 도는 불 칼은 자기 사랑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광적 욕망(insane desires), 그리고 진리를 왜곡,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persuasions을 뜻합니다. 사람이 이러한 상태에 있는 동안에는 생명나무에 이를 수 없으며, 오히려 그것이 주님의 보호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의미가 창세기뿐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일관되게 나타난다고 설명합니다. 성막과 성전의 그룹들, 언약궤 위의 그룹들, 에스겔의 환상에 나타나는 그룹들은 모두 같은 원리를 나타냅니다. 곧 주님께서는 사람의 영적 상태에 따라 계시를 열어 주시기도 하고 감추시기도 하시며, 거룩한 것이 profanation 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보호하십니다. 따라서 계시를 제한하시는 것 역시 심판이 아니라 자비의 한 형태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진리를 허락하시며, 그 이상의 빛이 오히려 사람을 더 깊은 파멸로 이끌게 될 때에는 사랑으로 그것을 감추십니다.

 

이러한 보호의 필요성은 특히 홍수 이전 태고교회의 마지막 사람들에게서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사랑에서 진리를 직접 지각하는 천적 인간이었지만, 자기 사랑이 의지를 완전히 지배하게 되면서 이해마저 거짓을 진리로 확신하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선과 진리를 모두 자기 사랑을 위하여 이용하게 되었고, 그 결과 광적인 persuasions 속에서 거의 회복이 불가능한 영적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들이 더 깊은 거룩한 것까지 profane 하지 않도록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셨으며, 이것이 바로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의 영적 의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섭리는 심판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는 끝났지만, 주님께서는 홍수 이후 인류를 위하여 새로운 구원의 질서를 마련하셨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사랑에서 신앙으로 나아가는 천적 인간이었지만, 홍수 이후의 사람들은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삶으로 실천함으로써 양심을 형성하고,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에 이르는 영적 인간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비록 퍼셉션은 잃었지만, 거듭남의 길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의 아담을 최초의 한 개인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합니다. ‘아담은 태고교회 자체를,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참된 인간이 된 교회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창3은 한 개인의 범죄와 추방의 이야기가 아니라, 태고교회의 형성과 타락, 그리고 그 이후에도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새로운 구원의 길을 마련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생명나무의 길은 닫힌 길이 아니라, 주님께서 언젠가 다시 인간을 그 길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끝까지 지키고 보존하시는 소망의 길인 것입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305, 창3: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Therefore Jehovah God sent him forth from the garden of Eden, to till the ground from which he was taken. (창3:23) AC.305 ‘에덴동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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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6, 창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AC.306-313)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And he cast out the man; and he made to dwell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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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7, 창3:24, ‘여섯째와 일곱째 후손’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07 여기서는 홍수로 멸망한 여섯째와 일곱째 후손에 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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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8, 창3:24, ‘그룹들’(cherubim)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08 앞에서 ‘동쪽’(east)과 ‘에덴동산’(garden of Eden)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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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9, 창3:24, ‘두루 도는 불 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09 ‘두루 도는 불 칼’(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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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0, 창3:24, ‘홍수 이전 사람들과 홍수 이후 사람들의 근본적인 차이’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10 이 절에 나오는 각각의 표현에는 매우 깊은 아르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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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1, 창3:24, ‘홍수로 멸망한 사람들의 내세에서의 상태’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11 홍수로 멸망한 사람들의 내세에서의 상태는 이와 같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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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2, 창3:24, ‘창3 마지막 절의 표현 하나하나’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12 이 구절에서는 홍수 이전 사람들의 상태가 충분히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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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3, 창3:24, ‘유전악’(hereditary evil)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13 여기서 첫 사람에 관하여 말한 것으로부터, 오늘날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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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이 가운데 필수 리딩 목록은 리딩 순서대로 다음과 같습니다.

 

 

AC.306, 창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AC.306-313)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And he cast out the man; and he made to dwell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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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8, 창3:24, ‘그룹들’(cherubim)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08 앞에서 ‘동쪽’(east)과 ‘에덴동산’(garden of Eden)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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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3, 창3:24, ‘유전악’(hereditary evil)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13 여기서 첫 사람에 관하여 말한 것으로부터, 오늘날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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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1, 창3:24, ‘홍수로 멸망한 사람들의 내세에서의 상태’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11 홍수로 멸망한 사람들의 내세에서의 상태는 이와 같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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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성찬 있습니다.

 

잠깐 광고 하나 드리면, 지난 2개월에 걸친 작업 끝에 ‘3, AC.182-319 번역, 해설 및 심화 ChatGPT’를 어제 마쳤습니다. 블로그에 pdf 버전으로 올려놓았으니 자유롭게 보시기 바랍니다. 부디 주님이 빛을 비추셔서 이 내용들이 깨달아지고, 영혼에 큰 유익과 기쁨들 되게 하시기를 간구합니다.

 

 

창3, AC.182-319 번역, 해설 및 심화 - ChatGPT.pdf 소개

창3, AC.182-319 번역, 해설 및 심화 - ChatGPT.pdf 소개 ‘창3, AC.182-319 번역, 해설 및 심화 - ChatGPT.pdf’는 흔히 ‘인간의 타락’이라고 불리는 창세기 3장을, 단순한 최초 인간의 범죄 기록이나 불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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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8-02(D1)

 

 

2662, 9, 창3.9, 2026-08-02(D1)-주일예배(창3,23-24, AC.305-313, 성찬), ‘그룹들, 두루 도는 불 칼,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심’.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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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7/26, 창3:20-22, AC.280-304), ‘하와, 가죽옷, 영생할까 하노라’

※ 오늘(2026/07/26)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40, ‘찬송으로 보답할 수 없는’, 찬86, ‘내가 늘 의지하는 예수’입니다. 오늘은 창3 여덟 번째, 본문은 창3:20-22이고, AC 글 번호로는 280번에서 304번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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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0 심화

2.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임종, 그러니까 지상에서 숨을 거두는, 정말 수없이 다양한 케이스가 있습니다. 평안한, 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쓸쓸히 홀로 고독사하는 사람도 있고...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편안하게 떠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교통사고 등 갑작스런 사고사나 전쟁이나 강도, 감옥 형장의 이슬, 혹은 자살 등... 제가 말씀드리고픈 것은 저는 고등학생 때 모친을 교통사고로 잃은 경험이 있는데요, 그러니까 이런 사별의 경험은 정말 선 굵은 인생의 자국을 남기더라는 거죠. 아마 숨을 거두시는 분도 그러지 싶은데... 그런데 어떻게 사후 자기가 죽은지조차 모를 수가 있는 건가요? 모든 게 이어진다면서 말이죠...

 

 

임종, 곧 지상에서 숨을 거두는 모습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안히 숨을 거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도 곁에 없는 가운데 홀로 생을 마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오랜 치료 끝에 떠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교통사고나 재난, 전쟁이나 범죄처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 역시 고등학생 때 모친을 교통사고로 잃은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 갑작스러운 사별은 남겨진 사람의 삶에 아주 깊고 오래가는 자국을 남깁니다.

 

그래서 AC.320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죽음의 모습이 이렇게 다양하고, 어떤 죽음은 너무나 갑작스럽고 충격적인데, 어떻게 죽은 사람이 처음에는 자신이 죽은 사실조차 모를 수 있을까요? 더구나 스베덴보리는 죽음 이후에도 삶과 의식이 이어진다고 말합니다. 모든 것이 이어진다면 사고나 죽음의 순간에 대한 의식도 그대로 이어져야 하는 것 아닐까요?

 

여기서 먼저 구별할 것은 ‘의식의 연속’과 ‘자신이 처한 새로운 상태에 대한 인식’입니다. AC.320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사람이 죽은 뒤에도 자신이 여전히 감각하고, 원하고, 생각하는 한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연속성이 너무나 자연스럽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처음에는 알지 못합니다. 자신에게는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흔히 ‘의식이 끊어지는 사건’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죽은 사람이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즉시 알아야 할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AC.320의 설명은 그 반대입니다. 육체의 생명은 끝났지만 사람 자신은 계속 살아 있기 때문에, 그는 오히려 ‘나는 죽지 않았는데 내가 죽었다고 하는가?’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누군가 자신에게 영이라고 말해 주었을 때 놀라고 경이로워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자신은 여전히 감각과 욕구와 생각을 가진 온전한 사람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교통사고나 전쟁, 범죄와 같은 갑작스러운 죽음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AC.320만으로 각각의 경우에 죽은 사람이 정확히 무엇을 경험하는지까지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 항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증언하는 것은 죽음의 방식에 따른 세부 과정이 아니라, 사람이 저세상에 들어가도 자신의 존재와 의식이 계속되기 때문에 처음에는 자신이 저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일반적인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특정한 임종의 경우를 상상하여 그 사람이 반드시 이런 순서로 경험할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지상에서 남겨진 사람이 경험하는 ‘죽음’과, 죽은 사람 자신이 경험하는 ‘계속되는 ’은 서로 다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겨진 사람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어느 순간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너무나 큰 단절입니다. 특히 갑작스러운 사별은 그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AC.320에서 스베덴보리가 전하는 죽은 사람의 경험은 ‘나는 없어졌다’가 아니라 오히려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입니다.

 

이것은 제가 어린 시절 모친을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떠나보낸 경험을 생각할 때에도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남겨진 저에게 그 사건은 너무나 갑작스러운 단절이었지만, AC.320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어머니 자신의 생명까지 그 사고의 순간에 함께 끊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 이후 어머니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경험하셨는지를 제가 알 수 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육체의 죽음이 그분의 존재 자체를 소멸시킨 것은 아니라는 스베덴보리의 증언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저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말은 사람이 죽음이라는 사건을 부정하거나 혼란에 빠져 있다는 뜻으로만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AC.320의 초점은 삶의 놀라운 연속성에 있습니다. 사람은 죽었는데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는 죽었지만 사람 자신은 계속 살아 있기 때문에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결국 AC.320은 우리에게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어 줍니다. 지상에 남은 사람에게 죽음은 분명 슬프고 때로는 견디기 어려운 이별입니다. 그 슬픔을 가볍게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증언을 따른다면 그 이별의 순간에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육체의 죽음 너머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생각하고 느끼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AC.320이 들려주는 첫 번째 사후세계의 소식은 어쩌면 아주 단순합니다. ‘죽음 뒤에도 사람은 살아 있습니다.

 

 

 

AC.320, 창4 앞,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AC.320-323)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On The Nature Of The Life Of The Soul Or Spirit AC.320 영혼(soul)으로서의 삶, 곧 죽은 뒤 처음 영계에 들어가는 신참, 신생 영들(novitiate spirits)의 삶에 관한 일반적인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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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0, 심화 1, ‘soul’과 ‘spirit’

AC.320.심화 1. ‘soul’과 ‘spirit’ ‘soul’과 ‘spirit’의 차이가 뭔가요? 그리고 적절한 우리말 번역은? AC.320에는 흥미롭게도 ‘soul’과 ‘spirit’이라는 두 단어가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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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0 심화

1. ‘soul spirit

AC.320에는 흥미롭게도 ‘soul’과 ‘spirit’이라는 두 단어가 거의 나란히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the life of souls’라고 말한 뒤 곧바로 ‘that is, of novitiate spirits’라고 덧붙입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이 문맥에서는 soulspirit을 서로 전혀 다른 두 종류의 존재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죽음 이후 계속 살아가는 동일한 인간을 서로 조금 다른 관점에서 표현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일반적으로 soul은 ‘영혼’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특히 AC.320의 ‘the life of souls’에서는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 살아가는 인간의 생명 또는 인간 자신을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단순히 육체 안에 들어 있는 어떤 비물질적 ‘부분’으로 생각하면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말하려는 뜻을 충분히 살리기 어렵습니다. AC.320의 관심은 인간을 육체와 영혼이라는 두 부품으로 나누는 데 있지 않고, 육체가 죽은 뒤에도 인간 자신이 계속 살아간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반면 spirit은 ‘’으로 옮기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특히 ‘novitiate spirits’는 죽음 이후 처음 영계에 들어간 사람들을 가리키므로 ‘신참, 신생 영들’ 정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그 ‘’이 지상에서 살던 사람과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바로 AC.320이 이어서 설명하듯 그는 여전히 감각하고, 원하고, 생각하며, 자신을 전과 같은 한 사람으로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AC.320의 첫 문장은 ‘영혼이라는 어떤 것이 죽은 어떻게 되는가’를 추상적으로 설명하는 문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 살아가는 인간은 처음 영계에서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소개하는 문장입니다. ‘soul’이라는 표현으로 사후에 계속되는 인간의 생명을 넓게 제시하고, 곧이어 ‘novitiate spirits’라는 표현으로 지금부터 다룰 대상이 죽음 직후 영계에 들어온 사람들임을 구체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 이해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영혼’이라고 하면 육체에서 빠져나온 희미한 무엇을 떠올리고, ‘’이라고 하면 더욱 비현실적인 존재를 상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죽은 뒤에도 인간은 인간이라는 사실입니다. AC.320에서도 바로 그 때문에 새로 영계에 들어온 사람이 자신에게 ‘당신은 영입니다’라고 말하면 놀란다고 합니다. 자신은 여전히 감각하고 원하고 생각하며, 전과 마찬가지로 분명히 살아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번역에서는 soulspirit의 차이를 완전히 지워 버릴 필요도 없고, 반대로 두 단어 사이에 지나치게 엄격한 존재론적 구별을 세울 필요도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soul은 ‘영혼’, spirit은 ‘’으로 구별하여 옮기되, 이 문맥에서는 둘 다 육체의 죽음 이후 계속 살아가는 동일한 인간을 가리킨다는 점을 기억하면 됩니다.

 

결국 AC.320에서 더 중요한 질문은 ‘soul spirit 가운데 어느 것이 진짜 나인가?’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그보다 훨씬 단순합니다.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생각하고 사랑하고 느끼며 살아가는 바로 그 사람이 ‘’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인간이 사라지고 영이라는 전혀 다른 존재가 생겨나는 사건이 아니라, 육체를 벗은 인간이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임을 발견하는 사건입니다.

 

 

 

AC.320, 심화 2,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AC.320.심화 2.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임종, 그러니까 지상에서 숨을 거두는, 정말 수없이 다양한 케이스가 있습니다. 평안한, 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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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0, 창4 앞,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0-323)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On The Nature Of The Life Of The Soul Or Spirit AC.320영혼(soul)으로서의 삶, 곧 죽은 뒤 처음 영계에 들어가는 신참, 신생 영들(novitiate spirits)의 삶에 관한 일반적인 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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