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2:19-20, AC.142-146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Verses 19, 20 And Jehovah God formed out of the ground every beast of the field, and every fowl of the heavens, and brought it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it; and whatsoever the man called every living soul, that was the name thereof. And the man gave names to every beast, and to the fowl of the heavens, and to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 but for the man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

 

※ 19, 20절 속뜻

 

주님은 천적 인간의 안에 천적, 영적 정서들, 곧 천적 인간의 의지와 지성에 관한 것들을 조성하시고, 그로 하여금 그것들이 어떤 건지 느낄 수 있게 하셨으며, 그는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그것들을 느꼈고, 그것들을 잘 알았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천적 인간의 본성을 천국의 것으로 업그레이드시켜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천적 인간은 여전히 자신의 것, 자기 본성에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142. 짐승, 가축(beasts)은 천적 애정(celestial affections), ‘공중의 새(fowls of the heavens)는 영적 애정(spiritual affections)을 의미하는데요, 다시 말씀드리면, ‘짐승(beasts)은 의지에 속한 것(things of the will), ‘(fowls)는 이해에 속한 것(things of the understanding)을 의미한다는 말씀입니다.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To bring them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them)는 그로 하여금 그것들의 퀄러티를 알게 하심(to enable him to know their quality)이며, 아담이 그들에게 이름을 주니라(giving them names)는 그가 그것을 알고 있었음(he knew it)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에게 주신 선에 속한 애정의 퀄러티(the quality of the affections of good), 그리고 진리에 관한 지식의 퀄러티(the quality of the knowledges of truth)를 그가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 그는 여전히 자신의 고유 본성으로 기울어졌는데요(he inclined to his own), 이를 전과 같이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처럼 같은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By “beasts” are signified celestial affections, and by “fowls of the heavens,” spiritual affections; that is to say, by “beasts” are signified things of the will, and by “fowls” things of the understanding. To “bring them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them” is to enable him to know their quality, and his “giving them names” signifies that he knew it. But notwithstanding that he knew the quality of the affections of good and of the knowledges of truth that were given him by the Lord, still he inclined to his own, which is expressed in the same terms as before—that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

 

 

143. 고대에는 가축(beasts)짐승(animals)이 사람한테 있는 애정과 그와 같은 걸(affections and like things in man) 의미했다는 사실이 오늘날엔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 사람들은 천적 사고(a celestial idea)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영계(the world of spirits)에서는 동물을 가지고 그런 거, 곧 애정 같은 걸 표현하며, 실제로도 동물의 생긴 모양대로(by such animals as they are like) 해당 애정을 표현했기 때문에, 그 당시 그들은 그런 식으로 말했고, 그때 그들은 그밖에 무슨 다른 의미로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에서도 짐승들이 언급되는 곳마다 일반적이든 구체적이든 무슨 다른 걸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언의 말씀 전체가 이런 걸로 가득하며, 그렇기 때문에 각 짐승이 특별히 뭘 의미하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그 말씀에 담긴 속뜻(what the Word contains in the internal sense)이 무엇인지를 절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앞서도 보았듯, 짐승들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악한, 즉 해로운 짐승이 있는가 하면, 선한, 즉 무해한 짐승이 있지요. 선한 짐승들은 선한 애정들, 예를 들면, (sheep), 어린 양(lambs), 비둘기 같은 것들이지요. 여기서 다루는 인간이 천적 인간, 혹은 천적, 영적 인간(the celestial, or the celestial spiritual man)이기 때문에, 이들 선한 짐승들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짐승(beasts)이 의미하는 바가 일반적으로 애정(affections)이라는 것을 위, 곧 말씀 몇몇 구절들에서 확인할 수 있었으므로(AC.45, 46), 여기서 굳이 다시 상세히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That by “beasts” and “animals” were anciently signified affections and like things in man, may appear strange at the present day; but as the men of those times were in a celestial idea, and as such things are represented in the world of spirits by animals, and in fact by such animals as they are like, therefore when they spoke in that way they meant nothing else. Nor is anything else meant in the Word in those places where beasts are mentioned either generally or specifically. The whole prophetic Word is full of such things, and therefore one who does not know what each beast specifically signifies, cannot possibly understand what the Word contains in the internal sense. But, as before observed, beasts are of two kinds— evil or noxious beasts, and good or harmless ones—and by the good beasts are signified good affections, as for instance by sheep, lambs, and doves; and as it is the celestial, or the celestial spiritual man, who is treated of, such are here meant. That “beasts” in general signify affections may be seen above, confirmed by some passages in the Word (n. 45–46), so that there is no need of further confirmation.

 

 

144. 이름으로 부르기(to call by name)는 그 퀄리티를 안다(to know the quality)는 의미인데요, 이는 고대인들은 이름(the name)을 가지고 어떤 것의 에센스(the essence of a thing)를 이해했기 때문이며, 무엇을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e)를 통해 그들은 자신들이 그 퀄리티에 대해 아는 걸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자녀에게 이름을 지어 줄 때, 어떤 의미를 담아 주었기(according to the things which were signified) 때문인데요, 모든 이름은 그 안에 무언가 고유한(something peculiar in it), 그 이름으로부터나 그 이름에 의해서나, 자녀의 어떤 기원과 고유 특성(the origin and the nature of their children)을 알 수 있는, 그런 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기원과 특성에 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로 하고 있는, 지금 이 아르카나 주석 작업 중반, 야곱의 열두 아들을 다루는 부분에서 아시게 됩니다. 이름들에는 그렇게 이름하는 것의 근원과 퀄리티(the source and quality of the things named)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이름으로 부르기(calling by name)를 그밖에 무슨 다른 걸로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것이 그 시대 사람들의 언어관습(the customary mode of speaking among them)이었습니다만, 그러나 이걸 이해하지 못하시는 분은 말씀에 나오는 이름들을 그런 의미들을 부여하며 읽어야 한다는 사실에 굉장히 놀라실 수도 있겠습니다. That to “call by name” signifies to know the quality, is because the ancients by the “name” understood the essence of a thing, and by “seeing and calling by name” they understood to know the quality. The reason was that they gave names to their sons and daughters according to the things which were signified, for every name had something peculiar in it, from which, and by which, they might know the origin and the nature of their children, as will be seen in a future part of this work, when, of the Lord’s Divine mercy, we come to treat of the twelve sons of Jacob. As therefore the names implied the source and quality of the things named, nothing else was understood by “calling by name.” This was the customary mode of speaking among them, but one who does not understand this may wonder that such things should be signified.

 

 

145. 말씀에서도 이름(name)은 어떤 것의 에센스(the essence of a thing),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e)는 그 퀄리티에 관해 아는 걸(to know the quality) 의미합니다. 이사야입니다. In the Word also by “name” is signified the essence of a thing, and by “seeing and calling by name” is signified to know the quality. As in Isaiah:

 

3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 네 이름을 부르는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 4내가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자 이스라엘 곧 너를 위하여 네 이름을 불러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 (사45:3-4) I will give thee the treasures of darkness, and hidden riches of secret places, that thou mayest know that I, Jehovah, who call thee by thy name, am the God of Israel. For Jacob my servant’s sake, and Israel my chosen, I have even called thee by thy name, I have surnamed thee, and thou hast not known me. (Isa. 45:3–4)

 

이 구절에서 ‘네 이름을 불러’(to call by name)와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to surname)는 그 퀄리티를 예견한다(to foreknow the quality)는 의미입니다. 계속해서 In this passage, to “call by name” and to “surname” signifies to foreknow the quality. Again: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사62:2) Thou shalt be called by a new name, which the mouth of Jehovah shall declare, (Isa. 62:2)

 

앞뒤 구절에 나오는 것처럼, 또 다른 캐릭터가 될 것(to become of another character)을 의미하지요. 계속해서 signifying to become of another character, as appears from the preceding and subsequent verses. Again: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43:1) Fear not, O Israel, for I have redeemed thee, I have called thee by thy name; thou art mine, (Isa. 43:1)

 

그가 그들의 퀄리티를 알고 계셨음을 가리키시면서, 계속해서 같은 이사야 말씀입니다. denoting that he knew their quality. Again in the same prophet: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사40:26) Lift up your eyes on high, and behold who hath created these things, that bringeth out their army by number. He will call them all by name, (Isa. 40:26)

 

그는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셨음을 의미합니다. 계시록입니다. meaning that he knew them all. In the Revelation:

 

4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계3:4-5) Thou hast a few names even in Sardis who have not defiled their garments: he that overcometh, the same shall be clothed in white raiment, and I will not blot out his name out of the book of life, but I will confess his name before my Father, and before his angels. (Rev. 3:4–5)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계13:8) Whose names are not written in the lamb’s book of life. (Rev. 13:8)

 

이들 구절에서 이름(names)은 결코 말 그대로 이름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퀄리티를 의미하는데요, 심지어 천국에서는 그 누구도 이름이 아닌, 그의 퀄리티로만 알려지지요. By “names” in these passages are by no means meant names, but qualities; nor is the name of anyone ever known in heaven, but his quality.

 

 

146.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을 통해, 그 상징하고 있는 속뜻(the connection of what is signified)을 보실 수 있는데요, 18절에 보면,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with him) 하시고는, 지금은 짐승(beasts)(birds)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는 전에 다룬 적이 있던 것이지요. 그리고는 즉시 또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for the man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 일련의 흐름의 속뜻은 이렇습니다. 곧 그가 비록 자신의 퀄리티, 곧 선에 관한 애정과 진리에 관한 지식(the affections of good, and knowledges of truth)에 대해 자신의 퀄리티가 어느 정도인지를, 또는 어떤 상태인지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어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본성을 향해 기울어졌다는 것(still he inclined to his own)입니다. 자신의 고유 본성을 간절히 원하는(to desire what is their own) 그런 사람들은 주님에게 속한 것들(the things of the Lord)에 대한 멸시를 시작하기 때문인데요, 주님에게 속한 것이 아무리 그에게 분명하게 표현되고 보여도 말입니다. From what has been stated, the connection of what is signified may be seen. In verse 18 it is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with him,” and presently “beasts” and “birds” are spoken of, which nevertheless had been treated of before, and immediately it is repeated that “for the man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 which denotes that although he was permitted to know his quality as to the affections of good, and knowledges of truth, still he inclined to his own; for those who are such as to desire what is their own, begin to despise the things of the Lord, however plainly they may be represented and shown to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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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실천하는 사람과 결합하시는 주님' (2022/10/24)

 

※ 작년 오늘 있었던 일이 생각나 공유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선을 행할 때 우리와 결합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 모두, 이웃들을 선대하며, 사랑으로 공손, 겸손히 선을 행해야 하겠습니다.

 

천국에서 주님을 사랑함이란 주님을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주님의 신성, 곧 주님의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웃을 사랑함이란 이웃 안에 깃든 주님의 신성을 사랑하는 것이며, 더 확장하면, 지으신 모든 피조물에 깃든 주님의 신성을 예의 바르게 대하는 것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은 모든 것 안에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

 

오후 동네 한 바퀴 산책 직전, 영감(靈感) 있어 그 자리에서 바로 윗글을 어느 카톡 방에서 나눈 후, 산책 마치고 우리 아파트 라인 현관으로 들어오는데...

 

웬 살짝 허름한 잠바 차림의 다소 작은 키, 오동통한 마스크 차림 아가씨가 저 앞에서 급히 제게 다가오며 묻습니다.

 

“여기가 택배인가요?”

 

말도 좀 어눌한데다 질문 자체가 좀 이상하여 그 연유를 살피니 자기는 네팔에서 왔는데 지금 서울로 피아노를 보내야 해서 택배 보내는 데를 찾아왔다는군요!

 

연유마저 참 뚱딴지같아 할 수 없이 좀 더 자세히 보니... 보낸다는 피아노는 다름 아닌 길쭉하니 얇은 키보드였고, 그걸 박스 포장, 택배로 보낼 생각이었는데, 택시 기사가 뭘 잘못 알고 우리 아파트 바로 우리 동에 내려 주고 간 모양입니다. 아이고...

 

혹시 마침 아파트 마당에 와있는 택배 차량이 있나 보니 한 대도 없고... 그렇다고 아가씨가 제시하는 ‘로젠택배 전민 지점’이라는 데로 가시라 할 수도 없고... 근처 우체국 택배 관련해서는 송강 시장 곁 간이우편취급국이 유일한데, 아가씨가 이 키보드를 들고 거기까지 걸어가기엔...

 

나는 어떤 예정에 없던 돌발상황 같은 것에 참 약한 사람이라 살짝 좀 망설여지는 순간, 아까 올린 윗글이 생각나면서 ‘아, 혹시 어쩌면 지금 주님이 이 네팔 아가씨 모습으로 내 앞에 계심인지도 모르겠다...’ 하는 생각에!

 

“아가씨, 여기 잠깐 있어요. 내, 얼른 가서 지하 주차장 차 꺼내 올 테니까... 내가 데려다 줄께요. 내가 지금 차 키가 없어 먼저 키 가지러 가야 해 ^^”

 

걸어가기엔 한참이지만 차로는 금방이어서 금방 도착, 주정차 금지 구역이라 양쪽 깜빡이 켜고 얼른 내려 주고 나는 출발해야 하는데, 이 아가씨...

 

잠깐만 기다리실 수 있으셔요? 하는 눈치가 뭔가 고마움의 선물을 사러 가려는... 그래서 한사코 아이고, 나는 괜찮아, 아가씨, 돈 아껴야지... 하는데도 아니라고 하면서 키보드는 둔 채 얼른 내려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한참 만에 나타나서는 페레로 로체 초콜렛을 선물하며 하는 말,

 

“아저씨, 정말 고맙습니다. 아저씨가 마치 아버지 같으셔서고요, 마침 오늘이 저희 네팔 명절이에요, 거기다 이틀 후 저는 캐나다에 가요. 겸사겸사 고맙고 감사해서 드리니 받아주세요.” 하는 취지의 말을...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래요, 아가씨, 잘 먹을께요. 그리고 캐나다 잘 가고...”

 

“네, 감사합니다.”

 

“안녕”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이 무슨 일인가... 어안이 벙벙...

 

‘아, 이웃을 사랑함이 이런 거구나! 저 아가씨 안에 계신 주님을 정성을 다해 모신다는 게 이런 거구나...’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을 아주 생생하게 경험한, 아주 따끈따끈한 일화였습니다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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