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지구의 생성 연대와 그 방법 등에 대해서는, 그러니까 고고학, 지질학, 인류학 등이 무척 궁금해하는 주제들에 대해서는 입을 꾹 다물고 있습니다. 가끔 입을 열어도 그냥 대략, 대충 언급하고 지나갑니다. 가령, 오늘 본문처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식으로 말이죠. 우리가 사는 이 지구에 대해서 이 정도니 우주에 가득한 저 항성, 즉 별들을 포함, 우주 생성에 관해서는 뭐,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창조’라는 주제와 관련, 스베덴보리 저, ‘Divine Love and Wisdom’ 4장, ‘[The Method of Creation]’을 보아도 저들 소위 학자들이 듣고 싶어 하는 그런 표현들은 없지요...
그래서 창조론이다, 진화론이다 싸우고 있고, 또 지구 나이에 대해 성경에 나오는 족보를 가지고 계산한 6, 7천 년 입장과, 순수 지질과학으로 측정한, 지구 나이 45억 년 입장이 있습니다. 전에 대전에 있는 한국지질자원연구원에 박사로 재직 중이시던 어느 목사님께 이 문제를 여쭈었더니 본인은 개신교 목회자이시면서도 지구 나이는 45억 년이라고 잘라 말하시더군요. 저는 그때 아직 스베덴보리를 모르던 때였는데, 속으로 ‘이분은 창조론을 신봉하는 수많은 개신교 목회자들 사이에서 마치 저 옛날 고독하게 지동설을 주장하던 갈릴레오 갈릴레이 같으시겠구나...’ 한 적이 있었습니다. 참고로, 저는 지구 나이 45억 년을 지지하는 입장입니다. 그 이유는... 나중에, 그러니까 누가 몇백 년을 살았다라는 본문 나올 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창세기 주석에 의하면, 인류의 역사는 교회의 역사이며, 크게 지금이 네 번째 교회 시대이고, 이제 다섯 번째인 새 교회 시대가 시작된다고, 어떤 의미에선 이미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과거 교회 시대를 순서대로 나열하면, 태고 교회, 고대 교회, 이스라엘 교회라고 합니다. 다음은 각 교회에 대한 브리핑입니다.
첫 번째 교회 시대인 태고 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는 창1, 아담이라는 교회로 시작, 노아라는 교회로 마감하는 교회입니다. 태고 교회의 종말을 우리가 잘 아는 대홍수, 곧 노아의 홍수로 표현했습니다.
두 번째 교회 시대인 고대 교회(古代, The Ancient Church)는 노아 교회로 시작, 시내산 십계명 전까지의 교회입니다. 이 기간, 제1, 제2 및 제3의 고대 교회로 나눕니다. 제2는 에벨에서 야곱까지, 제3은 이후 모세까지입니다.
※ 제가 창세기 11장까지의 등장인물들을 자꾸 어느 한 개인이 아닌, 교회로 언급하는 것은 그들이 사실은 그 시대를 풍미했던 신앙, 교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며, 그래서 ‘노아’ 역시 노아라는 신앙으로 모이던 교회, ‘셈’하면 노아라는 신앙에서 갈라져 나와 ‘셈’이라는 새로운 신앙으로 모이던 교회, ‘함’, ‘야벳’ 역시 마찬가지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교회 시대인 이스라엘 교회는 모세의 시내산 십계명 선포로 시작, 주님의 초림 때까지입니다. 표상, 표징교회라고도 합니다.
네 번째 교회 시대는 현 기독 교회이고,
다섯 번째 교회 시대는 주님이 다스리실 새 교회, 새 예루살렘 교회입니다.
이 교회 시대들에 관한 놀라운 사실들을 몇 가지 말씀드리면,
첫째, 교회의 종말, 최후의 심판이라는 것이 사실은 각 교회 시대마다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 교회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교회 시대가 시작되기 위해서는 이전 교회 시대가 철저히 타락, 황폐해져야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며, 그렇다면, 주님 오셔서 새로운 교회 시대가 시작되려면, 현 기독 교회 역시 철저히 황폐해져야 함 또한 알 수 있습니다. 교회가 황폐해진다는 것은 그 안에 주님의 선과 진리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 그렇다고 새로운 교회 시대를 일으키기 위해 주님이 억지로 현 교회 시대를 황폐케 하신다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항상 어긋나게 행하는 주체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늘 그 뒤치닥거리를 하시는 거고 말입니다...
둘째, 창세기 1장부터 11장, 데라까지는 실제 역사가 아닌, 태고인들이 즐겼던 스피칭 스타일로 기술된 역사라는 것입니다. 짐작할 수도 없는 장구한 태고 및 고대 교회 시대 모든 교회들의 상태를 스토리 텔링 식으로 기술한 것입니다. 실제 역사는 아브람부터라고 합니다.
셋째, 태고 교회가 시작된 실제 역사가 몇천, 몇만, 아니면 수십, 수백, 수천만 내지는 수억 년 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실제 지구 나이인 45억 년을 염두에 두고 생각할 때, 참으로 장구한 세월을 이어 온 이 교회 시대들의 부침(浮沈)은 인류를 늘 자신과 연결되어 있게 하고자 하신 주님의 사랑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많은 다른 사실들이 있지만, 그건 그때그때 만나기로 하고요, 우선은 이 정도만 하지요... ^^
AC.15 설명, 천국의 모든 것 되시는 ‘주님의 신적 인성’(the Lord as to the Divine Human) (2024/6/10)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Arcana Coelestia’(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주석) 7211번 글입니다. 이 글은 출애굽기 6장 8절 말씀 중, 아래 본문에 대한 주석 일부입니다.
좀 어려울 수도 있는 내용을 먼저 이렇게 소개하는 이유는, 천국에서 주님, 특히 주님의 신적 인성(the Divine Human)이 어떤 역할, 어떤 위치인지를 아는 것이, 그래서 오늘 AC.15번 글의 ‘주님’에 대한 이해를 더욱 생생하게 확장시켜 줄 수 있어서입니다.
참고로, 주님은 신성(the Divine, 여호와 하나님, 사람의 영에 해당)과 신적 인성(the Divine Human, 예수 그리스도, 사람의 육에 해당), 그리고 신적 활동(the Divine Operation, 성령, The Holy Spirit, 사람의 활동에 해당)으로 되어 있으신 분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신적 삼위일체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신성은 선과 진리로 되어 있는데, 주님의 신성 중 선에 대한 호칭이 '여호와', 진리에 대한 호칭이 '하나님'이며, 또한 주님의 신적 인성 중 선에 대한 호칭이 '예수', 진리에 대한 호칭이 '그리스도'입니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And I will bring you unto the land where I lifted up my hand to give it to Abraham, to Isaac, and to Jacob.
이 말씀은 신적 능력(the Divine power)에 의해 천국, 곧 주님의 신적 인성(the Divine Human of the Lord)이 모든 것인 곳으로 들어 올려짐을 의미하는데요, 이는 ‘땅으로 인도하고’(bringing to the land)의 의미, 즉 가나안으로 인도하고의 의미가 천국으로 들어 올려지는 것이라는 사실로부터(※ ‘가나안 땅’(the land of Canaan)이 주님의 나라, 즉 천국을 가리킨다는 7196번 글 참조), 그리고 ‘맹세한’(lifting up the hand)의 의미, 즉 이 말의 의미가 여호와, 곧 주님이 하실 때는 신적 능력에 의해서라는 사실로부터(※ 여기 ‘손’(hand)이 능력을 가리킨다는 것은 글 번호 878, 4931–4937, 5327–5328, 6947, 7011 참조), 그리고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이 표상하는 바가 주님의 신성 자체와 신적 인성(the Lord as to the Divine itself and as to the Divine human)인데, 여기서는 후자, 곧 신적 인성에 관한 주님이시며, 그 이유는 이것, 곧 주님의 신적 인성이 천국의 모든 것이기 때문이라는 사실로부터(※ 글 번호 6804, 6847 참조) 분명합니다. 신적 인성이 왜 천국의 모든 것인가 하는 것은, 그곳 어느 누구도, 심지어 가장 내적 천국, 곧 삼층천 천사들조차 신성 그 자체(the Divine itself)에 대해서는 그 어떤 아이디어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요한복음에서 다음과 같이 주님이 하신 말씀으로 알 수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No one hath ever seen God, 요1:18),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Ye have neither heard the voice of the Father at any time, nor seen his shape, 요5:37) 천사들은 유한하며, 유한한 것은 무한한 존재에 대해 그 어떤 아이디어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며, 그래서 그들은 천국에서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은 사람 형상(a human shape)이라는 아이디어를 갖고 있지 않으면, 그들은 아이디어라는 걸 전혀 가질 수 없거나 무슨 이상한 아이디어를 갖게 되고, 그 결과 그들은 신앙으로나 사랑으로나 신성과 결합할 수 없게 되는데요, 바로 이것이 천국에서 천사들은 신성을 사람 형태(a human form)로 지각한다는 케이스가 됩니다. 모든 천국에서 신적 인성은 그들의 관점에서 모든 것이며, 그래서 그들의 신앙과 사랑에서도 모든 것이고, 바로 이 점이 구원이 시작되는 결합(the conjunction through which is salvation)이 오는 지점입니다. That this signifies an uplifting by the Divine power to heaven, where the Divine human of the Lord is all,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bringing to the land,” namely, to Canaan, as being to uplift to heaven (that the “land of Canaan” denotes the Lord’s kingdom or heaven, see n. 7196); from the signification of “lifting up the hand,” when said of Jehovah or the Lord, as being by Divine power (that “hand” denotes power, see n. 878, 4931–4937, 5327–5328, 6947, 7011); and from the representation of Abraham, Isaac, and Jacob as being the Lord as to the Divine itself and as to the Divine human (n. 6804, 6847); here the Lord as to the Divine human, because this is the all in heaven. The reason why the Divine human is the all in heaven, is that no one there, not even an angel of the inmost or third heaven, can have any idea about the Divine itself, according to the Lord’s words in John: “No one hath ever seen God” (John 1:18); “Ye have neither heard the voice of the Father at any time, nor seen his shape” (John 5:37). For the angels are finite, and what is finite cannot have an idea of the infinite; and therefore unless in heaven they had in respect to God the idea of a human shape, they would have no idea, or an unbecoming one; and thus they could not be conjoined with the Divine either by faith or by love; and this being the case, in heaven they perceive the Divine in a human form; whence it is that the Divine human in the heavens is the all in their regards, and hence is the all in their faith and love; whence comes the conjunction through which is salvation (n. 6700).
37이미 감람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41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눅19:37-44)
세상에 계실 때 주님은 표상(representatives)과 표의(significatives)로서 존재하셨다. 그것은 주님 스스로 천국과 교회에 속한 최초의 것이면서 동시에 마지막의 것이 되기 위해서였으며, 그렇게 해서 최초의 것으로부터 마지막의 것들을 다스리고, 또한 그것들을 (쓸모에 따라) 배치시키기 위함이었다. (계시록해설 405:24, 이순철 역) The Lord when in the world was in representatives and significatives, in order that He might be in the ultimates of heaven and the church, and at the same time in their firsts, and thus might rule and dispose ultimates from firsts, and thus all intermediates from firsts through ultimates; representatives and significatives are in ultimates. (AE.405d:24)
지난 주일에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시켜 맞은편 마을에 있는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신 일과 제자들이 나귀의 등에 옷을 깔아 그 위에 주님을 모셨다는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오늘은 그 말씀에 이어 그 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본문 37절과 38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7이미 감람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제자들이 주님이 하신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찬송했다고 합니다. 여기, 주님이 하신 일이란, 첫째, 교회의 마지막 때 주님께서 새 교회를 통해 말씀의 내적 의미, 곧 속뜻을 열어주신 일입니다. 말씀에는 그것을 ‘주님의 제자들이 매여 있는 나귀 새끼를 푸는 것’으로 묘사했지요. ‘나귀 새끼’의 속뜻은 내적 의미가 숨겨져 있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하신 두 번째 일은, 새 교회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가지고 이웃을 섬기고, 나아가서는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의 속뜻입니다.
정리하면, ‘주님의 제자들’은 교회의 마지막 때 주님이 세우시는 새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뜻하고, ‘나귀 새끼’는 가장 낮은 진리인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그리고 ‘제자들의 옷’은 그보다 높은 영적 진리인 이웃 사랑의 진리를, 끝으로 ‘그 위에 앉으신 주님’은 가장 높은 진리인 천적 진리, 즉 주님에 대한 사랑을 가르치는 진리를 뜻합니다.
마지막 때 새 교회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이 같은 일들은 주님께서 당신의 신적 선에서 비롯한 신적 진리의 능력으로 이루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말씀에서 ‘주의 이름’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생명인 진리와 선, 또는 신앙과 사랑을 뜻하는데, 매일 같이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고, 이웃에는 관심이 없던 사람들이 주님의 은혜로 눈이 열려 말씀의 문자 안에 감춰진 내적 진리를 볼 수 있게 되고, 그 진리의 힘으로 나보다 이웃을 생각하고 주님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기뻐하며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39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제자들이 예수를 향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라고 찬양하자 바리새인들이 주님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유대교회의 지식인들이었지만 속뜻으로는 외적인 교회 안에 있는 위선자를 뜻합니다. 그들을 위선자라 하는 이유는 누구보다도 말씀에 대해 많이 알고 있고 신앙이 좋은 것 같지만, 사실은 주님을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수없이 보면서도 끝내 주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이었기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라며 예수를 찬송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마치 신성을 모독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들이 주님을 ‘선생’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선생’은 진리를 뜻하는데요, 그러므로 주님을 선생으로 부른 것은 주님이 진리 자체이신 분이라는 걸 그들이 이미 알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주님을 믿지 않았을까요? 주님을 인정하면 그만큼 교회 안에서 자신들의 입지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 이 부분에 대해서는 또 이런 설명도 있는데요, 당시 유대가 처한 정치적 상황으로 본 설명입니다.
당시 유대 전체는 로마 식민지요, 또 그 가운데 예루살렘은 대왕 헤롯의 세 아들 중 헤롯 안티파스가 분봉왕으로 있던 곳으로, 로마는 그 당시 지중해 연안 거의 모든 문명 세계를 정복하였으나 정복지의 거의 모든 문화, 종교를 존중, 반란만 일으키지 않으면 얼마든지 자치를 허락했다. 그러나 로마가 파송, 혹은 세운 속주의 장들이 그 재임 중 한 번이라도 자기가 맡은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그대로 직위해제 되는 원칙이 있어, 특히 반란이 잦은 유대 땅은 분봉왕들이나 로마 총독이나 늘 신경이 곤두서는 곳이었다. 이런 정치적 상황에서 이때가 마침 유월절 시즌으로 당시 전 세계에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유대인이 몰려드는 기간이어서 더더욱 정치적으로 민감한 분위기였다. 특히 안티파스의 경우, 즉위하던 해 바로 반란이 터져 큰 문제가 되었으나, 로마에서는 즉위하던 원년에 일어난 일임을 감안, 한번은 봐주기로 하였던 터라 이 기간 그는 더더욱 전전긍긍했다. 이런 상황에서 ‘제자의 온 무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며 무리 지어 다니고 있으니... 그래서 특히 이런 정치적 상황에 훤했던 바리새인들이 아연실색하며 주님께 그런 조언을 한 것이라는...
그럴듯하지요? 우리가 말씀을 영적으로 풀 때, 사람들은 이렇게도 풀고, 오히려 이런 풀이가 더 그럴듯하게 와닿으며 사람들이 선호한다는 사실에, 혹시 사람들의 호응과 반응에 더 촉각을 곤두세우는 설교자, 목회자라면 설교를 어떤 식으로 준비해야 하나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참고로, 신, 구약성경을 저런 식으로 풀어 시리즈로 낸 저 저자는 저런 관점의 책들로 많이 유명해졌고,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전 세계적으로 유명 초청 인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천사들은 말씀을 읽을 때, 말씀의 이 지상 배경 및 당시 정치, 경제 등 국제 정세, 그리고 등장인물과 장소 등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없고, 그들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내적 존재이며, 천국은 내적 상태의 나라라 말씀도 그 안에 담긴 속뜻, 즉 아르카나(arcana, 秘義, 주님이 말씀에 불어넣으신 천국의 비밀)만 보인다고 합니다. 하여... 주님을 가르치며, 천국에 대한 올바른 소개와 인도의 책임이 있는 설교자, 목회자로서 저는 무슨 고민할 것도 없이 후자의 길을 걸을 생각입니다. 물론 우리는 아직 몸 안에 머물며,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기에, 무조건 영적이고 내적이기만 하는 건 무리가 있지요. 말씀을 속뜻으로 풀되 필요하면, 저런 설명도 곁들이는 균형과 지혜가 필요하다는, 그런 생각을 저는 갖고 있습니다. 다만 제 역량이 많이 부족하여 그런 설교 준비에 많이 미흡한 게 안타깝지만 말입니다.
자, 그럼 계속해서, 주님께서 그들의 말을 들으시고, 4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0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이 사람들’은 주님의 제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내적 의미로는 주님이 세우신 새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리고 ‘돌들’은 진리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새 교회의 진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교회의 마지막 때, 새 교회가 참된 진리에 대해 증거하지 못한다면 진리 스스로 증거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진리는 스스로 자신을 증거하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세상에 계실 때, 당신 자신에 대해, 천국과 교회에 대해, 그리고 거듭남과 시험에 대해 끊임없이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가 스스로를 증거하는 모습입니다. 주님은 진리 그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 당시 정황상 바리새인들의 저런 조언과 충고도 나름 일리 있어 보임에도 불구, 주님은 전혀 개의치 않으시는 듯 말씀하십니다. 저도 저럴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저런 상황에서 나는 과연 저럴 수 있을까 고민됩니다. 주님의 도우심과 붙들어 주심을 간구합니다.
41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말씀에서 ‘성’(城, city)은 교회의 교리를 뜻하지만 여기 ‘예루살렘 성’은 타락한 유대교회의 교리를 뜻합니다. 주님께서는 왜 성을 보고 우셨을까요? 교회 안에 신앙과 사랑이 사라지고, 그렇게 해서 교회가 황폐해지는 것을 내다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시는 것’은 무너져 가는 교회에 대한 연민과 자비를 나타냅니다. 주님께서 성을 향해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평화란 어떤 것입니까? 주님의 종 스베덴보리의 증언에 따르면 주님이 오시기 직전 천국에는 고요함이나 평화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지옥의 세력이 팽창해 천국과 지옥의 균형이 깨졌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평화가 없다면 그것에 대응하는 지상의 교회에도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 평화가 없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교회가 지옥의 영들에게 사로잡혀 더 이상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억류된 것처럼 영적 자유가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그 상태에서 인류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지옥을 완전히 정복하시고, 그 능력으로 천국과 교회의 질서를 회복하셨습니다.
주님은 지옥이 팽창해 천국의 일부를 오염시킬 때도 그냥 두셨습니다. 주님께서 능력이 없어서 그러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단 한마디의 말씀으로도 지옥을 당신의 발아래 굴복시킬 수 있는 분이십니다.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왜 주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을까요? 영계에서 지옥의 세력이 커진 것은 지상의 사람들이 영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대신해 인간의 몸을 입고 지옥과 싸워 이겨 그 능력으로 천국과 지옥 그리고 지상의 교회를 다스리시기를 원하셨습니다.
※ 많은 개신교인은 이런 말씀을 드리면 대부분 그런 게 성경 어디에 나오느냐면서 마뜩잖아합니다. 이런 태도가 시작되면 바로 마음의 창, 내면이 닫혀 천국의 입류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게 중단됩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서 뭔가 반감이 시작될 때, 객관적으로 그 내용이 주님께 해가 되는 내용이 아니라면 그 평가는 주님께 맡기시고 쿨하게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천진난만하게 반응하듯 말이지요. 그것이 마음을 지키는 것이며, 그런 태도가 안전한 태도입니다.
주님은 스스로 높이 앉아 인간에게만 지옥을 이기라 요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와 같은 인간, 즉 인성을 입으시고, 직접 지옥과 싸워 이기심으로써 거듭나는 모든 이들의 본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새 교회의 가르침에 의하면 주님의 시험은 인간의 시험과는 비교할 수 없는 혹독한 시험이었다고 합니다.
※ 시험의 난이도는 사랑의 대상 수에 비례합니다. 한 사람을 사랑할 때와 두 사람을 사랑할 때, 가족 전체, 직장 전체, 교회 전체 등등, 그러니 인류 전체를 품고 사랑하고자 하시는 주님을 대적하고자 지옥 전체가 달려드니 그 난이도, 그 지독, 그 혹독함이 어땠겠습니까?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는 것만큼 큰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은 인간에게 당신의 생명을 내어 주는 그런 시험을 기꺼이 감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시험을 이기신 그 능력으로 영계와 지상의 질서를 회복하셨습니다. 그때 하늘과 땅의 주님의 나라에 영원한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따라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평화’란 지옥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성한 선과 진리로 천국과 지옥 그리고 지상의 교회가 완벽하게 다스려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선과 진리이신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이 평화를 얻을 수 있지만, 바리새인처럼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으로 표상되는 유대교회와 모든 타락한 교회들을 향해,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라고 하시며, 우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새 교회를 통해 참된 진리를 끊임없이 보내주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아니 너무 적어 희귀할 정도입니다. 몰라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있고, 진리인 줄 알면서도 세속의 입장과 지위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과 그들의 교회는 진리가 주는 평화와 자유를 얻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43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그릇된 교회들의 심판을 나타냅니다. 토둔(土屯, 고대 전쟁 시 함락하고자 하는 성 높이만큼 흙을 쌓아 공격하는 공성법 중 하나)을 쌓는다고 했는데, 원문에는 성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벽’은 보통 교리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타락한 교회들의 그릇된 교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너와 네 자식’은 유대교회 같은 외적인 교회의 모든 것들, 즉 아름다운 예배당과 경건한 의식 등을 뜻합니다. 그것들이 ‘땅에 메어쳐진다’는 것은 그 모든 것들이 무너지는 것을 뜻합니다. 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아 있지 않다’고 했는데, 그것은 그들 교회에 진정한 진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거라는 뜻입니다. ‘돌’은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또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그들이 심판의 날이 올 줄 몰랐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유대교회는 진리이신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그 결과 이교도들, 그러니까 로마에 의해 성전은 철저히 파괴되고, 예배의 표상이었던 희생 제사는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또한 교회에 속한 사람들, 곧 유대인들은 자신의 땅에서 살지 못하고 온 세상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것이 주님을 인정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내려진 심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는 주님을 받아들인 제자들과 끝까지 주님을 인정하지 않았던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이 열어주신 내적 진리를 통해 이웃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었고, 그렇게 해서 영원한 평화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던 바리새인들은 심판 날에 영원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바리새인 중에도 주님이 진리라는 사실을 알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주님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주님보다 자신의 자아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본래 그랬습니다. 애굽에 살 때부터 여호와의 기적을 많이 봤습니다. 애굽을 탈출한 후에는 홍해가 갈라지는 모습과 애굽의 기병들이 홍해의 깊은 바닷속에 잠기는 것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광야로 나와서는 매일 같이 주님이 주시는 만나를 먹었고, 그들 앞에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인도하는 광경을 지켜봤습니다. 그렇게 많은 기적을 경험했음에도 그들은 모세가 잠시 시내산에 올라간 사이에 우상을 만들어 놓고, 노래하고 춤을 췄습니다.
주님의 기적을 매일 경험하면서도 마음속에 다른 신을 품는 사람들은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자아와 세상에 속한 것은 항상 우리를 유혹하여 주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그러한 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우리 안에 어떤 우상들이 있는지 살펴보고, 그것들을 매일 버려야 하겠습니다. 뜻대로 잘 안될 때는 주님께 고하고, 주님과 함께 그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한 것을 버릴 때 시험이 점점 줄어들고, 시험이 오더라도 수월하게 이길 수 있습니다. 선과 진리로 함께하시는 주님께서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십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10:22)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제1장, ‘천국의 하나님은 주님이시다’(The God of Heaven Is the Lord)를 보면, 이 ‘주님’이라는 호칭 관련, 흥미롭고 매우 중요한 내용들을 접하실 수 있는데요, 대략 인용하자면,
...우리가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천국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이다. 그 외의 모든 것이 여기 달려 있기 때문이다.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나는 자주 이 문제로 천사들과 대화를 나눴다. 천국에서는 신을 셋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다고 천사들은 한결같이 단언했다. 그들은 신이 한 분이심과, 그 한 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느끼기 때문이라고 했다. 심지어 지상에서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도, 신이 세 분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으면 천국에 올 수 없다고 했다. 그런 사람들의 생각은 세 신 사이를 헤매기 때문이며, 천국에서는 한 분을 생각하면서 셋이라고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천국에서는 생각을 그대로 말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천국에서의 언어는 생각이 그대로 전달되는 것, 즉 소리 나는 생각인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 살 때, 신을 셋으로 나누어 그 각각을 별개로 인정한 사람들, 그래서 신관을 주님 한 분으로 모으지 못한 사람은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천국에서는 각 사람의 생각이 전체에 전달되기 때문에, 만일 입으로는 한 분을 말하면서 셋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즉시 드러나고 거부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진리와 선을 분리시키지 않은 사람들,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놓지 않은 사람들은 사후에 영계에서 가르침을 받을 때, 주님께 대한 천국의 관념, 즉 주님이 온 우주의 하나님이시라는 개념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이다. 반대로, 생활이 따르지 않은 신앙인, 참 신앙의 교훈대로 살지 않은 사람은 그 개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기독교인 중에 주님을 부인하고, 성부 하나님만 시인하는 신앙을 확신한 사람들은 천국에서 제외된다. 천국은 주님 한 분만을 예배하는 곳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은 천국으로부터 오는 입류(入流, influx)를 받지 못하므로,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능력이 점차 소멸된다. 그리고 결국 벙어리 같이 되거나 어리석게 말하고, 관절에 힘이 없는 듯 팔을 늘어뜨리고 돌아다닌다. 마찬가지로, 주의 신성(神性, the Divinity of the Lord)을 부인하고, 주의 인성(人性, his humanity)만을 시인한 사람들도 천국에서 제외된다. 소시니아 사람들(the Socinians)이 그렇다. 그들은 오른쪽으로 조금 떨어져 있는 심연에 빠져 기독교에서 온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격리된다. 또 만물의 근원인 우주적 존재라는, 보이지 않는 신성을 믿으면서 주님 신앙을 거부한 사람들은 결국 어떤 신도 믿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들이 말하는 보이지 않는 신성이란, 자연의 근본적인 원리 같은 것인데, 그것은 생각의 대상이 될 수 없어서 사람이 사랑할 수도, 신앙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연주의자들과 함께 추방된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의 경우는 또 다르다. 이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다루기로 한다...
...어떤 영들은 세상에 사는 동안 성부는 시인하면서 주님은 보통 사람과 다름없다고 여기고, 주께서 천국의 하나님이신 것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에게 주님께 속한 천국 외에 또 다른 천국이 있는지 어디든 돌아다니며 조사해 보게 했다. 그 영들은 여러 날 동안 돌아다녔으나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은 천국의 행복은 영광과 권력에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또 천국은 그런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을 듣자 그들은 분노했다. 그들은 남을 지배할 수 있는 천국, 세상에서와 같은 영광을 크게 누릴 수 있는 천국을 원했기 때문이다....
까지입니다.
여기서 특히 제게 와닿았던 내용은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진리와 선을 분리시키지 않은 사람들,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놓지 않은 사람들은 사후에 영계에서 가르침을 받을 때, 주님께 대한 천국의 관념, 즉 주님이 온 우주의 하나님이시라는 개념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이다’라는 내용입니다.
제가 알기로 현 거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 특히 개신교인들이 거진 다 삼신(三神) 사상, 즉 세 하나님이지요,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런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걸 또 삼위일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이분들의 구원은 어찌 되는가 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말씀을 겉으로만 읽고, 거기서 교리를 추출, 억지로 풀려고 하다 보니 저런 무리수를 두게 된 것입니다만, 그리고 교회에 속하여 그런 가르침을 받는 건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그러나 신앙과 사랑, 선과 진리를 병행하는 사람들은 나중, 즉 사후에 천사들의 도움으로 이런 부분들이 교정되어 천국에 받아들여진다는 것입니다. 아, 참 감사한 소식입니다.
끝으로, 마침 이 ‘호칭’ 얘기가 나왔으니 주님의 호칭 관련, 좀 정리를 하자면,
주님의 신성(The Divine)은 선과 진리로 되어 있으며, 그래서 주님의 호칭들은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즉 주님의 신성 호칭 중 선에 대한 호칭은 ‘여호와’, 진리에 대한 호칭은 ‘하나님’이시며, 주님의 신적 인성(The Divine Human) 호칭 중 선에 대한 호칭은 ‘예수’, 진리에 대한 호칭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성경, 특히 ‘말씀’은 이 호칭을 정확히 구별하여 사용하시는데요, 예를 들어, 창세기 1장은 오직 ‘하나님’만 사용하고, 2장에서야 ‘여호와 하나님’이 등장한다는 사실, 혹시 알고 계셨나요? 아마 지금까지 눈여겨보지 않으셨을 텐데요, 여기엔 다 어떤 숨은 뜻, 속뜻이지요, 아르카나가 있답니다. ^^
참고삼아 말씀드리면, 보통 개신교 주일예배 마칠 때 하는 축도를 보면,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는 고린도후서 마지막 장 마지막 절인 13장 13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에서 시작된 기도문인데요, 저는 이 표현이 어쩐지 삼신 사상을 부채질하는 것 같아 다음과 같이 수정해서 사용합니다. ‘주 여호와 하나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이지요. 이 표현 안에 한 분 주님, 그리고 주님의 신성과 신적 인성이 다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성령은 어디 계시냐 하시겠지만, 다음은 이에 대한 보충 설명입니다.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True Christian Religion’에 나오는, 성령에 관한 기술 일부 인용인데요,
All those of the clerical order who have cherished any right idea of the Lord our savior, when they enter the spiritual world (which generally takes place on the third day after death), receive instruction at first about the Divine trinity, and particularly about the Holy Spirit, that it is not a God by itself, but that the Divine operation proceeding from the one and omnipresent God is what is meant in the Word by the Holy Spirit. (TCR.138)
번역하자면,
우리 구주이신 주님에 관한 올바른 생각을 그동안 품어온 모든 성직자는 그들의 사후, 영계에 들어올 때, 이는 보통 사후 3일 차 때 일어나는데요, 먼저 신적 삼위일체(the Divine trinity), 특히 성령(the Holy Spirit)에 대한 소개를 받습니다. 즉 성령은 그 자체로 하나님이 아니라 유일, 편재하시는 하나님(the one and omnipresent God)으로부터 나와 진행하는 신적 활동(the Divine operation)이며, 이것이 말씀에 나오는 성령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영과 육이 있고, 또 활동이 있듯이, 주님도 영이신 여호와 하나님, 육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활동이신 성령으로 되어 있는 분이시라는 것이지요. 사람을 자기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으신 창조주이시니 사람을 보면 주님을 아실 수 있게 말입니다.
아, 그리고 우리가 그러나 분명히 성령을 통해 어떤 인격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에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즉 성령이 주님의 어떤 활동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성령을 통해 우리는 주님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네, 아무튼 우리는 세 하나님 사상을 버리고, 올바른 삼위일체, 즉 세 인격을 한 분 주님으로 모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자연적(natural) 인간, 영적(spiritual) 인간, 그리고 천적(celestial) 인간이지요. 이런 차이는 사람과 천사의 내면이 세 단계로 되어 있기 때문이며, 거듭남의 결과, 첫 번째 단계까지만 열렸으면 일층천, 두 번째 단계까지 열렸으면 이층천, 세 번째 단계까지 다 열렸으면 삼층천으로 갑니다.
창세기 1장은 앞의 두 종류, 곧 자연적 인간과 영적 인간을 다루며, 천적 인간은 2장에서 다룹니다.
이 세 종류의 사람에 대한 이해가 먼저 좀 선행될 필요가 있는데요, 아래 AC.81번 글을 읽어보세요. 참고로, 여기서는 ‘자연적 인간’ 대신 거듭남이 아직 시작되지 않은, 즉 ‘영적으로 죽은 사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둘의 차이는,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아예 천국에 들어가지를 못하지만, 자연적 인간은 천국에 들어는 갔으나 그 내면이 첫째 단계까지만 열린 사람을 말합니다.
영생을 추구하다가 주님을 만나는 사람을 영적 인간, 주님을 추구하다가 덤으로 영생을 얻는 사람을 천적 인간이라 한다면, 자연적 인간은 영생, 주님 등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그 내면이 천국을 받기에 합당하도록 준비된 사람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서 신앙의 말을 하는 상태, 이 상태가 바로 거듭남 다섯 번째 상태입니다. 그는 하는 말, 현재 그의 상태에는 주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다음은 지상의 동식물 및 광물 등 모든 것이 천국과 어떻게 연결, 상응하는가 하는, ‘천국과 지옥’ 13장, ‘천국은 지상의 모든 것과 상응한다’의 일부 내용입니다. 미리 읽어두시면 좋으실 듯하며, 혹시 이 글의 위, 아래 글들이 필요하시면 아래 블로그를 방문하시면 됩니다.
110. 그러나 현대인들은 상응 지식을 완전히 상실했기 때문에, 천국의 영적인 것이 이 세상의 자연적인 것과 상응한다는 것을 천국으로부터의 계시가 아니면 알 수 없다. 몇 가지 보기를 들어 영적 사물과 자연적 사물의 상응이 어떤 것인지 설명하겠다. 땅 위의 동물은 일반적으로 사람의 애정에 상응한다. 순하고 유익한 동물은 선한 애정에, 사납고 무익한 것은 악한 애정에 상응한다. 세부적으로 소와 송아지는 사람의 자연적인 마음의 애정, 양과 어린양은 영적인 마음의 애정에 상응한다. 한편 새는 그 종류에 따라 자연적, 영적 지성에 상응한다. 그래서 표상 종교였던 이스라엘 교회는 소와 송아지, 수양과 양, 암수 염소, 암수 어린양, 산비둘기, 집비둘기를 성례용으로 취하여 희생과 번제의 제물로 삼았다. 그 역할로서 제물들은 영적인 것과 상응하였고, 천국에서는 그것을 상응에 따라 이해했던 것이다. 게다가 동물이 각 종류별로 모두 애정인 것은 그들이 생동하기 때문이며, 또 각 동물의 생명은 오직 애정에서 오고, 애정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동물은 그 생명의 애정에 따른 타고난 지식이 있다. 사람도 그 자연적인 면에 있어서는 동물과 유사하다. 그래서 흔히 사람을 동물에 비유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온순한 사람은 양, 난폭하면 늑대, 교활하면 여우나 뱀 같다고 하는 것이다.
111. 식물에도 그러한 상응이 있다. 일반적으로 뜰은 천국의 지성과 지혜에 상응한다. 그래서 천국을 신의 뜨락, 또는 낙원이라고 하고, 사람들은 천국을 하늘 낙원이라고 부른다. 나무는 그 종류별로 지성과 지혜의 근원인 선과 진리의 감지 능력과 인식 능력에 상응한다. 그래서 고대 사람들은 상응 지식이 있었으므로 산림에 들어가 하나님을 예배했다. 같은 이유로, 성경에 포도나무, 올리브, 백향목과 그 밖의 나무가 자주 언급되고, 천국과 교회와 사람이 나무에 비유되며, 선행이 열매에 비유되는 것이다. 또 나무에서 나는 먹을 것, 특히 들에서 거두는 곡식은 선과 진리에 대한 여러 애정에 상응한다. 지상의 양식이 자연적 생명에 영양을 주듯, 선과 진리에 대한 애정은 영적 생명에 영양을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을 지탱하는 주요 식량이며, 음식 전체를 상징하는 떡(빵)은 일반적으로 모든 선에 대한 애정에 상응한다. 이 상응에 따라 주님도 당신을 생명의 떡이라 하셨고, 유대교는 덩어리 빵을 성물로 삼아 성막 상 위에 두고 ‘진설병’(陳設餠, the bread of faces)이라 불렀다. 희생과 번제로 드린 모든 거룩한 제사도 역시 ‘떡’(bread)이라 불렸다. 더욱이 이 상응 때문에, 떡과 포도주로 행하는 성찬식이 기독교의 가장 거룩한 성례인 것이다. 이 몇 가지 보기들로 상응의 본질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늘 10번 글에, ‘그가 수고한 시험과 괴로움으로’(in consequence of the temptation and straitness under which he labored)라는 표현에 대한 보충 설명입니다.
‘시험’(temptation) 관련, 59번 글입니다.
...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30)
59. 여기 자연적 인간의 양식으로 ‘채소와 푸른 풀’(the vegetable and the green of the herb)만 말하고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거듭남의 과정을 보면,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어가는 동안, 그는 계속해서 전투 상황 가운데 놓이게 되며, 이런 이유로 주님의 교회를 ‘전투적’(militant)이라고 합니다. 거듭나기 전엔 탐욕이 지배적이기 때문인데, 사람이라는 존재는 전반적으로 그저 탐욕과 거기서 나오는 거짓으로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나는 동안 이들 탐욕과 거짓이 순식간에 사라질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존재 자체가 파괴되기 때문인데, 이들 탐욕과 거짓은 그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습득한 유일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한 영들은 오랫동안 그와 함께하면서 다음과 같은 일들을 겪게 됩니다. 즉 그들은 일단 그의 탐욕을 자극하여 흥분시킬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 끊임없이 그러다 보면, 사람은 나중엔 그런 걸 지루해하며 싫증을 느끼고 느슨해져서 결국은 주님에 의해 선 쪽으로 기울어질 정도가 되고, 그렇게 해서 사람은 개혁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선하고 진실한 모든 것, 즉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 관한 거라면 뭐든지 - 오직 이런 것들만 선하고 진실한데요, 그것은 그 안에 영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 아주아주 극도로 증오하는 악한 영들은 사람에게 양식으로 ‘채소와 푸른 풀’에 비교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남겨주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과 달리 주님은 그에게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에 비교되는 양식도 주시는데요, 이는 기쁨, 즐거움과 함께 더할 나위 없는 고요와 평화의 상태이며, 주님은 이 양식을 간격을 두고 사람에게 주십니다.
[2] 주님이 사람을 매 순간, 아니 정말 눈 깜빡할 순간이라도 막아주지 않으셨으면, 인간은 즉시 소멸되었을 것입니다. 영들의 세계에는 주님을 향한 사랑 및 신앙과 관련된 것들을 향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고 지독한 증오가 만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저는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데요, 지난 수년간, (저는 분명히 몸 안에 있었음에도) 저세상의 영들, 특히 아주 못된 영들과 본의 아니게 어울려 왔습니다. 주님의 허락하심으로 저는 수천의 영들에 둘러싸이기도 했고, 그들은 저를 향해 독을 뱉기도 했습니다.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그들은 저를 향해 우글거렸지요. 하지만 그들은 제 머리카락 한 올조차 건드릴 수 없었는데, 그것은 제가 주님의 보호 아래 안전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여러 해 경험으로, 저는 정말 영들의 세계와 그 본성에 대하여, 뿐만 아니라 현재 거듭남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영생의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왜 반드시 견뎌야만 하는지 하는, 영적 전투에 대하여 정말 철저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런 주제, 이런 이야기들을 듣고도 전혀 의심 없이 믿기에는 일반적인 설명으로는 도저히 쉽지 않기 때문에, 주님은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를 아주 구체적으로 보이셨는데요, 그것은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다루겠습니다.
...
즉, 위 ‘그가 수고한 시험과 괴로움’이란, 사람은 타고난 유전악으로 마치 악취 나는 오물에 똥파리들 꼬이듯 태생적으로 악령들의 시험을 피할 수가 없으며, 그 가운데서 억지로 경건한 말을 하고, 선을 행했다는 뜻입니다.
부끄럽지만, 전에 제가 수도권 대형교회에서 교회 직원으로 있었을 때와, 지방에서는 나름 대형교회라는 데서 장년부 부사역자로 있었을 때가 어찌 보면 딱 이런 상태였는데요, 그때 저는 부사역자로서 겉으로는 경건한 설교와 목회 윤리가 요구하는 그런 겉모습을 유지했을지 모르지만,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사랑스럽고 애정 어린 사람, 신앙으로 빛나는 사람’까지는 아니었다고 지금 생각하면 솔직하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험 관련, 한 가지 팁(?)을 드리자면, 악령들은 우리의 약한 곳, 즉 우리가 가장 애지중지하는 것들을 공격한다고 하는데요, 그러니 주님 아닌 다른 세속적, 일시적인 것들에 마음 뺏기는 걸 조심해야겠습니다.주님을 사랑하면서, 즉 주님 사랑 안에서도 얼마든지 다른 걸 사랑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그걸 배워야 합니다.
오늘 9번 글은 ‘세 번째 상태는 회개(repentance) 상태입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데요, 이게 무슨 말일까요? 난데없이 ‘회개 상태’라니요?
다음은 스베덴보리의 글, ‘천계비의’(天界秘義, Arcana Coelestia, Secrets of Heaven) 8387-8394번을 번역한 건데요, 여기에 바로 ‘회개’에 대한 설명이 있어 인용합니다.
...
구원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죄를 고백한다는 것은, 악에 대한 철저한 숙지, 그걸 자기 안에서 보고 시인, 그 결과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긴 후, 이러한 이유로 스스로를 정죄하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 이런 게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회개한다는 건, 사람이 그렇게 죄를 고백 및 그 죄에 대한 용서를 겸손하게 간구한 후, 그런 죄짓는 걸 그치고, 신앙 관련 계명들을 따라 새로운 삶으로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가 자신은 남들과 같이 죄인임을 그저 시인만 할 뿐인, 그리고 스스로를 모든 악에 대해 유죄로 여기면서도 정작 자신을 조사하지는 않는, 즉 자신의 죄를 직시하지는 않는 그런 사람이라면, 그는 고백이라는 걸 하긴 하지만, 그러나 회개의 고백을 하는 건 아닙니다. 그가 전에 하던 대로 후에도 그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날마다 회개하는데요, 그는 자기 안에 있는 악을 반성, 시인 및 대적, 그리고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계속해서 넘어지지만, 주님에 의해서는 계속해서 일으키심을 얻기 때문이지요. 사람은 욕망을 품고 악한 걸 생각할 때는 넘어지지만, 그러나 악을 대적할 때는, 그리고 그 결과 악을 행하지 않을 때는 주님에 의해 일어납니다. 그런 게 선 안에 있는 사람들의 상태입니다. 악 안에 있는 자들은 끊임없이 넘어지나 주님 또한 끊임없이 이들을 일으키십니다. 그러나 이는 그들로 하여금 모든 지옥 중 가장 끔찍한 지옥으로 떨어지는 걸 막으심인데요, 그들 스스로 그렇게 기울어져 가는 자신들을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치는 만큼이며, 그래서 사실은 그들을 좀 더 온화한 지옥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입니다.
자유롭게 행한 회개는 도움이 되지만, 무슨 강압적 상태 속에서 행한 회개는 그렇지 않습니다. 강압적 상태라는 건, 무슨 큰 병에 걸린 상태라든지, 불행이 닥쳐 몹시 낙담한 상태, 혹은 죽음이 임박한 상태 등, 한 마디로, 건전한 이성의 사용을 방해하는 모든 두려움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강압적 상태에 놓이게 된 악인은 회개를 약속, 선행을 하여 자유로운 상태가 되지만, 그렇게 되면 그는 이전의 그 악한 생활로 돌아갑니다. 선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데요, 그에게는 그가 정복하는 유혹의 상태가 될 뿐입니다.
입으로 하는 회개, 그리고 삶이 받쳐주지 않는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죄는 그런 걸로가 아닌, 삶의 회개, 생활의 회개로 용서받습니다. 주님은 사람의 죄를 계속 용서해 주십니다. 주님은 자비 그 자체이시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죄는 여전히 그 사람에게 붙어 있습니다. 아무리 그가 ‘나는 죄 사함을 받았어’라고 할지라도 그가 신앙의 계명들을 따라 살지 않는 이상은 죄는 그에게서 제거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들 계명에 따라 사는 만큼 그의 죄는 제거되며, 그의 죄가 제거되는 만큼 그는 죄 사함을 받습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악에서 물러나 선에 머물게 됩니다. 그가 이 세상에서 몸 안에 살면서 악에 저항한 만큼 그는 저세상에서도 악에서 물러날 수 있으며, 그가 이 세상 삶을 통해 애정으로 선을 행한 만큼 그는 저세상에서도 선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죄 사함이라는 게 뭔지, 그리고 그게 어디서 오는 건지를 보여줍니다. 그밖에 무슨 다른 방식으로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 믿는 사람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스스로를 살피고, 자기 죄를 시인하며 회개한 후에는 생의 마지막까지 선 안에 늘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만일 나중에 이전 악한 삶으로 돌아가 거기 빠지게 되면, 그게 바로 신성모독의 죄를 범하는 건데요, 그때 그는 악을 선으로 결합, 그 결과 그의 나중 상태는 이전 상태보다 더 나빠집니다. 다음 주님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43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44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45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마12:4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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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명확하게 설명하시는 ‘회개’의 개념을 숙지, 단순히 자백 관련, 성경 구절 몇 개를 암송했다고 죄 사함 받았다 여기는 그런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28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29감람원이라 불리는 산 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30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1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2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33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34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35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눅19:28-36)
제자들이 자기 옷을 나귀의 등 위에 까는 것은 진리 전체가 가장 높은 재판관이며, 왕이신 주님께 복종하는 것을 뜻한다. (천국의 비밀 9212:6, 이순철 역) By the disciples putting their garments on the ass and her colt was represented that truths in the whole complex were submitted to the Lord as the highest judge and king; (AC.9212:6, 출22:26)
※ 아래 에피소드는 설교 원본의 에피소드인데 오늘 설교 도입부로 적절해 보여 그대로 사용합니다.
지난 주일에는 부목사님과 함께 교회 담벼락과 보도블럭 사이의 땅에다 회양목을 100주 정도 사다 심었습니다. 봄이 되니 돌들 사이로 잡초가 올라오고 행인들이 담배꽁초도 버리고 해서 미관상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막상 시작하니 꼬박 이틀이 걸렸습니다. 나무를 심기 전에 땅을 팠는데 그 아래 건축 폐기물들이 잔뜩 묻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난번 건축 공사를 할 때 시공하는 사람들이 시멘트나 벽돌 조각 같은 것들을 거기 묻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걷어낸 건축 폐기물이며 오염된 흙이 폐기물 처리용 마대 자루로 20부대가 넘게 나왔습니다.
서두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진리는 관념이 아니라 행동이며 일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늘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주님은 선이 있는 진리, 또는 진리가 있는, 진리를 동반한 선으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주님의 선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목적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주님의 진리는 목적에 맞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은 무슨 일을 하든 주님과 함께 일을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일은 향기가 나고 주변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그러나 인간 혼자서 하는 일은 오히려 주변을 오염시킵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이 어떻게 내적 교회의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가 하는 내용입니다. 본문 28절과 29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8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29감람원이라 불리는 산 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이므로, 속뜻으로는 교회, 또는 하나님의 진리를 뜻합니다. 그에 비해 감람산은 하나님의 사랑, 또는 선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감람나무, 즉 올리브나무와 산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과 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감람산을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은 주님이 신적 사랑에서 비롯한 신적 진리로 당신의 교회 안으로 오시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은 사랑이 있는 진리, 사랑을 동반한 진리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사랑 없는 진리는 개인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며, 그러므로 죽은 진리입니다. 반대로 사랑이 있는 진리는 사람의 의지를 움직여 삶을 변화시킵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있는 진리를 소유한 사람이라야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감람산 근처에 오셨을 때, 제자 둘을 부르셨습니다. 내적으로, 즉 속뜻으로 볼 때, 주님의 제자들은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그리고 둘이라고 한 것은 선과 진리의 결합을 뜻합니다. 선과 진리의 결합이란, 진리를 배우는 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부르신 제자 둘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로서 진리를 배우는 대로 행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30절 말씀입니다.
30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맞은편’은 한글 성경 표현이고, 영어로는 ‘against’라고 되어 있는데, ‘against’라는 말은 주님을 대적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을은 예루살렘 성 바깥에 있으므로 외적인 교회를 뜻합니다. 외적 교회와 내적 교회가 있습니다. 외적 교회는 웅장한 예배당과 경건한 예배 의식 같은, 예배의 외적인 것, 외향적인, 외모를 중시하는 교회입니다. 그에 반해 내적인 교회는 예배의 내적인 것, 즉 진리에 따른 삶을 중시하는 교회입니다. 따라서 맞은편 마을은 예배의 내적인 것은 없고, 외적인 것만 있는 교회를 뜻하고, 그러므로 주님을 대적하는 교회입니다.
※ 현실적으로 이렇게 완전 100% 외적이기만 한 교회는 없습니다. 논지를 또렷이 하기 위해 이런 대비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그리로 가면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을 터이니 풀어서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나귀 새끼의 속뜻은 자연적 진리를 뜻합니다. 자연적 진리(natural truth)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포함한 자연적 지식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영적 지식이 아니라는 것이죠. 말씀의 문자적 의미나 세상 지식을 새 교회에서는 ‘기억 지식’(knowledge of memory)이라고 부르는데, 본문에서는 그런 지식을 ‘나귀 새끼’로 표현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무도 타지 않았다는 것은 그 지식이 주님과 이웃을 섬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외적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말씀을 배우기만 할 뿐 삶에 적용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내적 합리성이 닫혀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국 빛이 차단되고, 그리하여 말씀의 내적인 것들을 볼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까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 이상의 것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맞은편 마을에서 나귀 새끼를 끌고 오는 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 이런 외적 교회들에 대한 심판을 뜻합니다. 외적 교회들에 대한 심판이란, 외적 교회들이 가지고 있던 말씀 지식이 주님에 의해 내적 교회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용하지 않는 진리를 주님께서 걷어 들여 잘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외적 교회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것은 마치 사후에 심판받을 때, 주님께서 악한 사람들에게 있는 선과 진리를 모두 빼앗아 선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다음은 이와 관련, 오늘 본문 앞 본문인데요, 거기서
주인이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눅19:26)
라고 합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 말씀의 지식을 빼앗긴 외적 교회의 상태는 어떤 것일까요? 마치 캄캄한 어둠 속에 있는 것처럼 말씀을 읽어도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외적 교회는 점점 진리에 대해 무지해지고, 내적인 교회는 점점 더 지혜로워집니다.
31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2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33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34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주님 말씀에 따라 제자들이 마을에 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과연 나귀 새끼가 매여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그 매인 것을 푸는데 그 주인들이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고 합니다. 제자들이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나귀를 끌고 왔습니다.
나귀 새끼가 매여 있다는 것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 속에 감춰진 내적 의미가 외적 교회 사람들에게 열리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제자들에 의해 매여 있는 나귀가 풀리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주님이 세우신 새 교회에 의해 말씀의 내적 의미가 밝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 나귀의 주인이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고 말합니다. 이것은 외적 교회들이 새 교회를 통해 밝혀지는 내적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자 주님의 제자들이 ‘주께서 쓰시겠다’고 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진리를 가지고만 있고 쓰지 않는 사람은 결국 진리를 모두 빼앗길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위해 진리를 쓰는 사람이라야 진리가 점점 더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35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제자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나귀 새끼의 등에 덮고 그 위에 주님을 태웠습니다. ‘천국의 비밀’ 9212:6항을 보면,
제자들이 자기 옷을 나귀의 등 위에 까는 것은 진리 전체가 가장 높은 재판관이며, 왕이신 주님께 복종하는 것을 뜻한다.
라고 합니다. 여기서 제자들의 겉옷(garment)은 내적 교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진리를 뜻하고, 나귀 새끼는 진리가 감춰져 있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나귀 위에 옷을 깔고, 그 위에 주님을 태우는 것은 주님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통해 깨우친 진리를 가지고 가장 높은 진리이신 주님을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장 낮은 진리인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는 그보다 더 높은 영적 의미(spiritual meaning)를 섬겨야 하고, 영적 의미는 가장 높은 진리인 천적 의미(celestial meaning)를 섬겨야 합니다. 말씀의 영적 의미가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느냐에 관한 진리라면, 천적 의미는 주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느냐에 관한 진리입니다. 우리는 자연계의 지식과 모든 걸 가지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한 애정들은 단절되면 안 되고, 서로 통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제자들이 겉옷을 벗어 나귀의 등에 덮고 그 위에 주님을 태우는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말씀을 통해 진리를 배우는 것은 옷이나 장식처럼 남에게 진리를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주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것일까요? 첫째는, 악을 멀리하되 그것이 진리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멀리 해야 합니다. 다른 이유로 악을 멀리할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건강을 위해, 또는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등등의 이유로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둘째는, 주님과 이웃을 위해 선을 행해야 합니다. 선을 행할 때는 자기 마음대로 해선 안 되고, 언제나 진리에 따라 행해야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진리에 부합하는 일인지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주님께 여쭤봐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렇게 하나하나 주님께 물어가면서 일할 때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속에 정성이 담기고, 주님의 질서가 담깁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 많은 사람이 혜택을 보게 됩니다. 직장의 일이든 교회의 일이든, 아니면 개인의 일이든 모든 일 가운데 나귀 위에 자기의 겉옷을 깔고 그 위에 주님을 모시는 것과 같은 겸손과 정성이 깃들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 우리의 삶 가장 낮은 곳까지 오셔서 우리를 다스리시며, 각자의 삶을 향기 나는 삶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 위에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슥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