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은 ‘본성(own, proprium)에 대한 원전(原典, 라틴) 설명입니다.

 

라틴어 proprium은 원전에서 사용된 용어로, 여기와 다른 여러 곳에서 ‘own’이라는 표현으로 번역되어 온 말입니다. propius의 사전적 의미는 형용사로서는 ‘one’s own,’ ‘proper,’ ‘belonging to one’s self alone,’ ‘special,’ ‘particular,’ ‘peculiar’입니다. 이 proprium은 중성인데 명사로 사용되면, ‘possession,’ ‘property’를 의미하며, 또 ‘a peculiarity,’ ‘characteristic mark,’ ‘distinguishing sign,’ ‘characteristic’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영어 형용사 ‘own’은 웹스터에 ‘belonging to,’ ‘belonging exclusively or especially to,’ ‘peculiar’를 의미하는 걸로 봐서,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이 ‘own’이라는 말은 proprius와 매우 정확히 일치하며, 라틴 proprium에 맞는 어떤 명사를 만들면, 아주 가까운 번역 효과를 얻지 싶습니다. The Latin word proprium is the term used in the original text that in this and other places has been rendered by the expression “own.” The dictionary meaning of propius, as an adjective, is “one’s own,” “proper,” “belonging to one’s self alone,” “special,” “particular,” “peculiar.” The neuter of this which is the word proprium, when used as a noun means “possession,” “property”; also “a peculiarity,” “characteristic mark,” “distinguishing sign,” “characteristic.” The English adjective “own” is defined by Webster to mean “belonging to,” “belonging exclusively or especially to,” “peculiar”; so that our word “own” is a very exact equivalent of proprius, and if we make it a noun in order to answer to the Latin proprium, we effect a very close translation. [Reviser]

 

 

해설

 

이 주석은 스베덴보리 저술의 핵심 용어 가운데 하나인 ‘proprium’(프로프리움)—한국어로 흔히 “자기 고유한 것”, 혹은 “본성”(本性)—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언어학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먼저 라틴어 ‘proprius’는 형용사로 “자기 자신의”, “고유한”, “특유의”, “다른 것과 구별되는”이라는 뜻을 가지며, 그 중성형 명사 ‘proprium’은 “자기 소유물”, “고유성”, “특징”, “독자적 성질”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proprium은 어떤 존재에게서 고유하게, 독립적으로, 스스로 존재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영어 “own”은 편집자가 지적했듯이 “자기 자신의”, “특유의”, “배타적으로 속한”이라는 의미를 가지므로, proprius의 뜻과 거의 완전하게 일치합니다. 문제는 거듭남을 다루는 스베덴보리 신학 안에서는 proprium이 단순한 개인의 개성이나 특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분리된 인간 자신의 고유한 성향’을 뜻한다는 점입니다. 그는 일관되게 “사람 자신의 것(own, proprium)은 본질적으로 악이며, 거짓으로 기울어 있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도덕적 평가라기보다,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에 근거한 존재론적 진술입니다.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자기 자신에서 나온 것”이라고 느끼는 모든 생각, 판단, 욕망은 영적 실재에서 보면 빛이 없는 상태이며, 그래서 proprium은 항상 어둠, , 흑암, 죽음과 연결되어 설명됩니다. 반대로, 사람 안에서 선하고 참된 것은 모두 주님에게서 나온 것이므로 인간의 proprium이 아니라 ‘주님의 proprium(신적 본성)’이 사람 안에서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proprium은 철저히 부정적 개념”임을 일관되게 강조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proprium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것을 ‘굴복시키고, 재배열하고, 주님의 질서 안으로 재구성’할 때에만 인간은 참된 영적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언어학적 주석은 proprium이라는 단어가 단순한 “자기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인간론 전체의 기초 용어임을 보여 주며, 번역 시에도 자기 고유한 것, 자기 본성, 자기에게서 나온 것과 같은 표현으로 신중하게 옮겨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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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light day, and the darkness he called night.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1:4, 5)

 

AC.21

 

빛을(good)이라고 합니다. 빛은 주님으로 말미암으며, 주님은 선 그 자체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둠(darkness)은 모든 것, 곧 사람이 새롭게 잉태되어 태어나기 전, 그동안 빛처럼 보여 그런 줄 알았던 모든 걸 말하는데요, 사람이 새롭게 태어나기 전에는 악은 선처럼 보이고, 거짓은 진리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실상은 이들 악과 거짓은 어둠, 곧 사람한테나 어울리는, 그래서 여전히 사람 안에 있는 걸로만 구성되는 어둠입니다. 주님에게 속하는 건 그게 뭐든지 다 (day)과 비교됩니다. 빛에 속하기 때문이지요. 반면, 사람의 본성(own, proprium,자아,고유 속성)은 뭐든지 다 (night)과 비교됩니다. 어둠에 속하기 때문인데, 이런 비교는 말씀에서 자주 나옵니다. Light is called “good,” because it is from the Lord, who is good itself, The “darkness” means all those things which, before man is conceived and born anew, have appeared like light, because evil has appeared like good, and the false like the true; yet they are darkness, consisting merely of the things proper to man himself, which still remain. Whatsoever is of the Lord is compared to “day,” because it is of the light; and whatsoever is man’s own is compared to “night,” because it is of darkness. These comparisons frequently occur in the Word.

 

 

해설

 

AC.21은 창1: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의 영적 의미를 풀어 주며, 거듭남 과정에서 ‘빛과 어둠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빛이 ‘좋다’고 불린 것은 그 빛이 주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선 그 자체이시며, 그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선하고 참되며 생명을 주는 것이기에, 영적인 빛은 곧 주님의 선의 작용입니다. 반대로 “어둠”은 사람이 거듭나기 전에 스스로 가지고 있던 모든 사고와 감정 상태를 뜻하는데, 이러한 것들은 본래 어둠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에게는 종종 빛처럼 보입니다. 즉, 악이 선처럼, 거짓이 진리처럼 보이는 자기중심적 착시가 거듭남 이전의 자연적 인간을 지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사람의 고유 본성(man’s proprium)의 본질이며, 주님의 빛이 없을 때 사람은 자신의 욕망과 지혜를 마치 빛인 것처럼 의지하지만, 실제로는 영적 실재와 전혀 맞닿아 있지 않은 어둠 속에 있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주님이 비추시는 진정한 빛이 들어오면, 이전에 빛처럼 보였던 자기 지혜와 자기 사랑의 판단들이 모두 어둠으로 드러납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에서는 주님에게 속한 모든 것을 “(day)에 비유하고, 사람 자신에게서 나온 모든 것을 “(night)에 비유합니다. 낮은 주님의 빛 안에서 분별과 생명이 있는 상태이고, 밤은 주님의 빛이 없고 자기 고유의 상태만이 작용하는 어둠의 상태입니다. 이러한 낮과 밤의 비유는 시편과 예언서, 복음서 등 성경 전반에서 반복되는 주제이며, “빛과 어둠”, “낮과 밤”의 구분은 곧 ‘주님에게 속한 것과 인간에게 속한 것의 영적 구분’을 뜻합니다. AC.21은 그래서, 창세기의 첫 창조 행위인 빛의 분리가 곧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첫 번째 영적 분별—주님의 것과 자기 고유의 것의 분리—임을 강조하며, 거듭남의 근본 원리가 바로 이 구별에서 시작됨을 보여 줍니다.

 

 

 

AC.20, 창1: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창1:3) AC.20 거듭남이 시작된 사람의 첫 번째 상태는 그가 선과 참이 뭔가 더 높은 거라는 걸 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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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1:3)

 

AC.20

 

거듭남이 시작된 사람의 첫 번째 상태는 그가 선과 참이 뭔가 더 높은 거라는 걸 알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거의 외적이기만 한 사람들, 그러니까 겉이기만 한 겉의 사람들은 선과 진리라는 게 무엇인지조차 모르는데요, 그들은 자기 사랑(the love of self)과 세상 사랑(the love of the world)에 속한 모든 게 선이며, 그런 사랑들한테 호의적인 게 진리라는 이상한, 뒤집힌 환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선은 악이며, 그런 진리는 거짓임을 그들은 깨닫지를 못하기 때문인데, 그러나 사람이 새롭게 잉태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 곧 자기의 선은 사실은 선이 아니며, 또한 그가 빛 가운데 더욱 들어갈수록, 이 빛은 주님이신데요, 주님은 선과 진리 그 자체이신 분이라는, 이런 사실들을 그는 처음으로 알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주님이 존재하신다(the Lord exists)는 사실을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한다고 주님은 요한복음에서 친히 가르치셨습니다. The first state is when the man begins to know that the good and the true are something higher. Men who are altogether external do not even know what good and truth are; for they fancy all things to be good that belong to the love of self and the love of the world; and all things to be true that favor these loves; not being aware that such goods are evils, and such truths falsities. But when man is conceived anew, he then begins for the first time to know that his goods are not goods, and also, as he comes more into the light, that the Lord is, and that he is good and truth itself. That men ought to know that the Lord exists he himself teaches in John: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8:24) Except ye believe that I am, ye shall die in your sins (John 8:24).

 

또 주님은 선 그 자체, 즉 생명이시며, 진리 그 자체, 즉 빛이시라는 사실과, 그 결과,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은 그 어떤 것도 선도, 진리도 아니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선언하십니다. Also, that the Lord is good itself, or life, and truth itself, or light, and consequently that there is neither good nor truth except from the Lord, is thus declared: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1, 3-4, 9)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God was the Word. All things were made by him, and without him was not anything made that was made. In him was life, and the life was the light of men. And the light shineth in darkness. He was the true light, which lighteth every man that cometh into the world (John 1:1, 3–4, 9).  

 

 

해설

 

AC.20은 거듭남의 첫 번째 상태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상세하게 밝히며, 그것이 단순히 어둠 속에서 빛이 비추기 시작하는 상태가 아니라, ‘선과 진리에 대한 최초의 참된 인식이 열리는 순간’임을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거듭남의 첫 단계는, 사람이 처음으로 “선과 진리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보다 더 높은 것(higher)”임을 깨닫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거듭나기 전의 사람은 선을 자기에게 유리한 것, 진리를 자기 욕망과 생각을 뒷받침해 주는 것 정도로 이해하며,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속한 것들을 모두 선으로 착각하고, 그것을 지지하는 생각들을 모두 진리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자비가 움직여 속 사람이 조금이라도 열리기 시작하면, 사람은 처음으로 ‘자기 안의 선이라 여겼던 것이 사실은 악이며, 진리라고 믿었던 것이 사실은 자기중심적 거짓’임을 감지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에 찾아오는 최초의 영적 각성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새로 잉태되는 단계conceived anew”라 부르며, 바로 이때 사람이 비로소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선과 진리 자체이시다”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이 인식은 지적 동의가 아니라, 영적 빛이 내면에 처음 스며들어오는 체험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요한복음 824절,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는 말씀을 인용하며, 거듭남의 첫 단계는 반드시 ‘주님이 계심을 아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강조합니다. 이어서 요한복음 1장의 위대한 선언—“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를 제시하여, 선과 진리의 모든 근원이 주님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즉, 사람의 어떤 선도, 어떤 진리도 스스로 낳을 수 없고, 모두 주님으로부터 흐르는 생명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는 말씀처럼, 이 단계는 여전히 무지와 혼돈 속에 있으면서도, 주님의 빛이 처음으로 비추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정리하면, AC.20이 말하는 첫 상태는 종교적 자각의 시작을 넘어, ‘자기중심적 선과 진리의 붕괴’, ‘주님이 선과 진리의 유일한 근원임을 인식하는 첫 빛’, ‘영적 인간으로 잉태되는 시작점’이라는 매우 깊고 결정적인 영적 전환의 순간입니다.

 

 

 

AC.21, 창1:4, 5,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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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 창1:2, '수면 위, 리메인스' (AC.17-19)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9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은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를 의미하는데, 이를 가리켜 ‘운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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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1:2)

 

AC.19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은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를 의미하는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ove)라든지, 혹은 마치 암탉이 자기 알을 품듯 품으시다(brood)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는 주님이 사람 안에 숨겨 보석처럼 소중하게 보관해 오신 것들을 가리키는데요, 말씀 전반에 걸쳐 이것을 리메인스(remains), 남은 자(a remnant)라고 합니다. 이는 참과 선에 관한 지식으로 되어 있습니다.이 리메인스라는 것은, 겉의 일들이 황폐해질 때까지는 결코 빛, 즉 낮 가운데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들 지식을 여기서는 수면 위(the faces of the waters)라 하고 있습니다. By the “spirit of God” is meant the Lord’s mercy, which is said to “move,” or “brood,” as a hen broods over her eggs. The things over which it moves are such as the Lord has hidden and treasured up in man, which in the Word throughout are called remains or a remnant, consisting of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of the good, which never come into light or day, until external things are vastated. These knowledges are here called “the faces of the waters.  

 

 

해설

 

AC.19는 창1:2의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라는 구절을 해석하면서, 거듭남의 시작에서 주님의 자비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은 ‘주님의 자비(mercy)를 뜻한다고 설명하며, “운행하시니라(move) 또는 “품으시다(brood)라는 표현을 암탉이 알을 품어 생명이 깨어나도록 하는 모습에 비유합니다. 즉, 거듭남 이전의 인간은 아직 영적 생명을 갖고 있지 않지만, 주님의 자비는 마치 어미 새가 알을 보호하는 것처럼, 사람 안에 숨겨진 잠재적 생명을 깨우기 위해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럼 이 자비가 무엇을 “운행”하는가? 스베덴보리는 그것이 바로 ‘리메인스(remains)라고 말합니다. 리메인스는 사람이 유아기부터 성장 과정 중에 경험한 선한 감정들, 신앙적 인지들, 선과 진리에 대한 작고 순수한 인상들, 하나님에 대한 어린 마음의 감각 같은 것들로, 주님이 사람 안에 조용히 저장해 두시는 신적 씨앗입니다. 이 리메인스는 평소에는 의식되지 않지만, 외적 삶이 황폐해지고(vastation), 자기 고유의 욕망과 거짓이 잠잠해질 때 비로소 빛을 발하며, 거듭남의 기반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리메인스를 창1:2의 “수면 위(the faces of the waters)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waters)은 진리의 지식들을, 그 위의 “얼굴들(faces)은 사람 안에 남아 있는 선한 인상들, 즉 주님이 보존해 두신 신적 흔적들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리메인스가 없다면 어떤 사람도 거듭날 수 없으며, 주님의 자비가 운행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AC.19는 따라서 거듭남의 시작이 인간의 결심이나 도덕적 노력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사람 안에 미리 심어 두신 선과 진리의 씨앗을 깨우는 자비의 역사’에서 비롯됨을 강조합니다.

 

 

 

AC.20, 창1: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창1:3) AC.20 거듭남이 시작된 사람의 첫 번째 상태는 그가 선과 참이 뭔가 더 높은 거라는 걸 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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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 창1:2, '깊음 위' (AC.17-19)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8 ‘깊음 위’(faces of the deep)는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 있는 사람의 탐욕과 거기서 나오는 거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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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1:2)

 

AC.18

 

깊음 위(faces of the deep)는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 있는 사람의 탐욕과 거기서 나오는 거짓인데, 그는 전적으로 이런 것들의 사람이며, 이런 것들 안에 완전히 잠긴 사람입니다. 이 상태는 빛이라는 게 전혀 없는 상태로, 그는 무슨 깊음(deep)과도 같은, 뭔가 희미하고 혼란스러운, 그런 상태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말씀 여러 곳에서는 표현하기를 깊음(deeps), ‘바다 깊은 곳(depths of the sea)이라 하는데, 이는 말리신(dried up) 상태, ‘황폐해진(wasted) 상태를 말합니다. 사람이 거듭나기 전 상태이지요. 이사야입니다. The “faces of the deep” are the cupidities of the unregenerate man, and the falsities thence originating, of which he wholly consists, and in which he is totally immersed. In this state, having no light, he is like a “deep,” or something obscure and confused. Such persons are also called “deeps,” and “depths of the sea,” in many parts of the Word, which are “dried up,” or “wasted,” before man is regenerated. As in Isaiah:

 

9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10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11여호와께 구속받은 자들이 돌아와 노래하며 시온으로 돌아오니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고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 (51:9-11) Awake as in the ancient days, in the generations of old. Art not thou it that drieth up the sea, the waters of the great deep, that maketh the depths of the sea a way for the ransomed to pass over? Therefore the redeemed of Jehovah shall return (Isa. 51:9–11).

 

이런 사람은 또한 하늘에서 보면, 생기라고는 전혀 없는, 무슨 까만 덩어리로 보이는데요, 일반적으로 이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표현에는 인간의 황폐함(the vastation of man)이라는, 선지서에 자주 언급되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이 거듭남의 선행 상태입니다. 사람은 참된 것을 알 수 있기 전에, 그리고 선한 것으로 영향받기 전에, 먼저 이런 것의 유입을 방해하고 저항하는 것들을 제거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이런 이유로, 새 사람이 잉태될 수 있기 전에, 반드시 옛 사람이 먼저 죽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Such a man also, when seen from heaven, appears like a black mass, destitute of vitality. The same expressions likewise in general involve the vastation of man, frequently spoken of by the prophets, which precedes regeneration; for before man can know what is true, and be affected with what is good, there must be a removal of such things as hinder and resist their admission; thus the old man must needs die, before the new man can be conceived.

 

※ 위 인간의 황폐함(the vastation of man)이라는 표현에 사용된 영어 vastation은 사어(死語)에 가까운 말인지 사전에도 잘 안 나옵니다. NCE(New Century Edition)역에서는 이를 overall spiritual devastation으로 번역했습니다.  

 

 

해설

 

AC.18은 거듭남 이전의 인간 상태를 더욱 세밀하게 설명하며, 창1:2의 표현 “깊음(the deep)이 단순한 혼돈이 아니라 ‘아직 거듭나지 않은 인간 전체를 구성하는 욕망과 거짓의 혼합물’이라는 점을 밝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깊음 위(faces of the deep)라는 표현은 거듭나지 않은 인간 속에 자리 잡은 각종 욕망(cupidities)과 그 욕망에서 비롯된 거짓들(falsities)을 말합니다. 인간은 거듭나기 전에는 선하고 참된 것보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온 생각과 욕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모든 것이 뒤엉켜 있는 상태가 바로 “깊음”입니다. 이 상태는 주님의 빛이 없는 완전한 어둠이기 때문에, 사람은 스스로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진리인지 분별할 수 없고, 영적 방향감각 없이 혼란 속에 잠겨 있습니다. 성경에서 종종 인간을 “깊음”, “바다 깊은 곳”이라 부르는 것도 같은 이유인데, 거듭남 이전의 사람은 이러한 깊음이 “말리신(dried up) 혹은 “황폐해진(wasted)으로 묘사됩니다. 이사야 519-11절에서 “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여호와라고 한 것은, 주님이 인간 안의 욕망과 거짓을 물리치시고, 그 속에서 구속된 자들이 지나갈 길을 여신다는 뜻이며, 곧 주님이 거듭남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먼저 인간 내부의 혼돈을 제거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런 사람은 또한 하늘에서 보면, 생기라고는 전혀 없는, 무슨 까만 덩어리로 보인다”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외적 생명은 활발해 보일지라도 영적 생명이 전혀 없을 때 천사들에게는 빛과 생기가 전무한 상태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표현은 예언서에서 자주 말하는 “황폐(vastation)의 교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황폐는 주님이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참된 것과 선한 것이 들어올 수 있도록 이전의 거짓과 욕망이 제거되거나 약화되는 과정’을 가리킵니다. 즉, 사람 안의 ‘옛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하고, 그래야만 ‘새 사람’이 잉태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죽음은 도덕적 자멸이 아니라, 주님이 거듭남을 시작하기 위해 허용하시는 내적 정리 작업이며, 진리와 선이 들어올 공간을 만드는 작업입니다. 따라서 AC.18은 “깊음”이라는 성경적 상징을 통해, 거듭남의 초기에서 반드시 선행해야 하는 내적 분해와 정화의 과정을 설명하며, 인간의 변화는 언제나 주님의 빛이 깊음 위로 움직이기 전에, 먼저 그 깊음이 드러나고 비워지는 과정을 거침을 가르쳐 줍니다.

 

 

 

AC.19, 창1:2, '수면 위, 리메인스' (AC.17-19)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9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은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를 의미하는데, 이를 가리켜 ‘운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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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7,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AC.17-19)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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