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로또하는 기독교인들, 특별히 뭘 좀 해 볼려고 해도 종잣돈 자체가 없어 힘들어하는 아들들을 위해 로또 생각을 하는 기독교인, 그러나 한편으로 아들들을 향하신 주님의 계획에 혹시 차질을 빚는 건 아닐까, 간섭하는 건 아닐까 하는 마음에 고민하는 기독교인을 위해 스베덴보리는 무슨 말을 할까요? 기독교인들은 로또하면 안 되나요?

 

 

이 질문을 스베덴보리의 자리에서 듣는다면, 그는 아마 이전보다 더 깊고 조용한 어조로 말을 건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단순한 경제적 절박함이나 부모의 애정만이 아니라, ‘주님의 계획을 내가 방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신앙적 두려움이 함께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마음을 매우 귀하게 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먼저 이렇게 말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네가 지금 두려워하는 것은 돈의 부족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를 해칠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이 지점에서 그는 이 기독교인을 가볍게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고민 자체가 이미 섭리를 믿고 있다는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자리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곧바로 한 단계 더 깊은 질문으로 들어갑니다. ‘그렇다면 지금 너는 주님의 섭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스베덴보리에게 섭리는 인간의 선한 의도를 필요로 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조급한 개입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아들들을 위해 길을 열어주고 싶어 하는 마음은 섭리에 속하지만, 그 길을 ‘우연과 확률이라는 비질서적 수단으로 앞당기려는 시도’는 섭리를 돕는 것이 아니라 흔들 수 있다고 그는 보았을 것입니다. 특히 ‘혹시 내가 간섭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때는, 이미 그 선택이 섭리의 리듬과 어긋나고 있다는 내적 신호로 보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스베덴보리는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계획은 네가 돕지 않아도 무너지지 않는다.’ 이것은 냉정한 말이 아니라 오히려 위로에 가까운 말입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의 조급함보다 훨씬 크고, 인간의 불안보다 훨씬 정교합니다. 아들들의 종잣돈이 없는 현재의 상태 역시 섭리의 한 부분일 수 있으며, 그것이 반드시 실패나 지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그는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로또를 하면 안 되느냐’라는 질문에 대해, 이 경우에도 스베덴보리는 규칙으로 답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로또를 산다고 해서 네가 즉시 섭리를 파괴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선택이 네 마음을 어디에 고정시키는지는 분명히 살펴보아야 한다.’ 로또는 주님의 계획을 기다리는 인내를 강화하기보다, 그 인내를 단축시키고 싶게 만드는 방향으로 마음을 끌고 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이미 ‘이게 혹시 주님의 일에 내가 간섭하는 건 아닐까’라는 질문이 마음에 떠오른 상태라면,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단순한 양심의 소리가 아니라 ‘섭리가 보내는 미세한 경고음’으로 들었을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부모에게 이렇게 권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들의 미래를 대신 해결해 주려 하지 말고, 함께 섭리를 신뢰하는 법을 가르쳐라.’ 돈을 마련해 주는 것보다, 기다리는 법과 질서를 존중하는 태도를 함께 견디는 것이 더 깊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역할은, 주님의 계획을 앞당기는 것이 아니라 ‘그 계획이 작동하도록 조용히 공간을 남겨두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아마 이렇게 정리했을 것입니다. ‘이 질문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네가 로또보다 섭리를 더 신뢰하고 있다는 증거다.’ 스베덴보리는 이 기독교인을 향해 ‘하면 안 된다’고 단정하지 않으면서도, 분명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이 선택은 돈의 문제가 아니라, 네가 주님의 계획을 얼마나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대부분의 신앙인은 이미 마음속으로 방향을 알고 있다고 그는 보았을 것입니다.

 

 

 

SC.11,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창4:15)의 속뜻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먼저 이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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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2:2, 3)

 

AC.88

 

영적 인간이 천적 상태가 될 때, 그를 가리켜 ‘하나님의 일(the work of God)이라고 합니다. 이는 오직 주님께서 그를 위하여 싸우셨고, 그를 창조하시고, 형성하시며, 만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 ‘하나님이 그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셨다(God finished his work on the seventh day)라고 하시고, 또 ‘그의 하시던 모든 일에서 안식하셨다(he rested from all his work)라고 하시는 등 두 번이나 반복하시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선지자들에 의해서 사람은 여러 차례 ‘여호와의 손과 손가락의 일(the work of the hands and of the fingers of Jehovah)이라 불립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에서, 거듭난 사람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데를 보면 그렇습니다. When the spiritual man becomes celestial, he is called the “work of God,” because the Lord alone has fought for him, and has created, formed, and made him; and therefore it is here said, “God finished his work on the seventh day”; and twice, that “he rested from all his work.” By the prophets man is repeatedly called the “work of the hands and of the fingers of Jehovah”; as in Isaiah, speaking of the regenerate man:

 

11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또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느냐 12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내 손으로 하늘을 펴고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였노라, 18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21너희는 알리며 진술하고 또 함께 의논하여 보라 이 일을 옛부터 듣게 한 자가 누구냐 이전부터 그것을 알게 한 자가 누구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45:11-12, 18, 21) Thus hath said Jehovah the holy one of Israel, and his former, Seek ye signs of me, signs concerning my sons, and concerning the work of my hands command ye me. I have made the earth, and created man upon it; I, even my hands have stretched out the heavens, and all their army have I commanded. For thus hath said Jehovah that createth the heavens, God himself that formeth the earth and maketh it; he establisheth it, he created it not a void, he formed it to be inhabited; I am Jehovah and there is no God else besides me (Isa. 45:11–12, 18, 21).

 

이로부터 새 창조, 곧 거듭남은 오직 주님의 일임이 분명합니다. ‘창조하다(to create), ‘형성하다(to form), ‘만들다(to make)라는 표현들은 위의 구절에서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createth the heavens, God himself that formeth the earth and maketh it)라는 말씀처럼 구별되어 사용되었고, 같은 이사야 다른 곳에서도 동일하게 구별되어 사용됩니다. 예컨대, Hence it is evident that the new creation, or regeneration, is the work of the Lord alone. The expressions to “create,” to “form,” and to “make,” are employed quite distinctively, both in the above passage—“creating the heavens, forming the earth, and making it”—and in other places in the same prophet, as: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43:7) Everyone that is called by my name, I have created him for my glory, I have formed him, yea, I have made him (Isa. 43:7),

 

이러한 구별은 창세기 앞 장과 본 장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며, 여기 본문에서도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안식하시니라(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라고 표현됩니다. 내적 의미에서 이러한 표현들은 언제나 서로 구별된 뜻을 전달하며, 주님을 ‘창조자(creator), ‘지으신 이(former), ‘만드시는 이(maker)로 부르는 경우에도 동일합니다. and also in both the preceding and this chapter of Genesis; as in the passage before us: “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 In the internal sense this usage always conveys a distinct idea; and the case is the same where the Lord is called “creator,” “former,” or “maker.”

 

 

해설

 

이 글은 창세기 2장의 안식이라는 주제를 다시 한번 더 깊은 중심으로 끌어당깁니다. AC.87이 싸움의 종식과 주님의 싸우심을 강조했다면, AC.88은 그 결과로서 ‘사람의 정체성 자체가 어떻게 바뀌는가’를 다룹니다. 천적 인간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한다는 말은, 그가 이제 자기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이는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존재론적 진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사람이 천적 상태에 이르는 과정에서 싸운 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결과물 역시 사람의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일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일’이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하신 어떤 외적 업적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이루신 상태’를 가리킵니다. 사람 자신이 곧 주님의 일이며, 주님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본문에서 ‘하나님이 그의 일을 마치셨다’는 말과 ‘그의 모든 일에서 쉬셨다’는 말이 반복됩니다. 반복은 강조가 아니라 구조를 드러냅니다. 주님의 일은 외부 세계의 창조가 아니라, 인간 안에서의 새 창조이며, 그 일이 마쳐질 때에 안식이 옵니다. 안식은 일이 끝났기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 ‘일이 사람 안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에’ 옵니다.

 

이 점을 밝히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선지서들을 폭넓게 인용합니다. 사람을 ‘여호와의 손과 손가락의 일’이라 부르는 표현들은, 인간을 독립적 존재로 세우려는 사상과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특히 이사야에서 거듭난 사람을 가리켜 ‘내 손의 일’이라고 부르는 대목은, 거듭남이 자기 계발이나 도덕적 향상의 문제가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거듭남은 ‘새로운 창조 행위’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창조하다’, ‘형성하다’, ‘만들다’라는 세 동사가 구별되어 사용된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문학적 변주나 수사적 반복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이 세 표현이 각각 ‘서로 다른 내적 국면’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창조는 목적의 설정이고, 형성은 질서의 구성이며, 만들기는 실제 삶의 실현입니다. 이 구별은 창세기 1–2장의 전 구조를 관통하는 핵심 원리입니다.

 

이사야의 구절에서 하늘을 창조하고, 땅을 형성하며, 그것을 거주하게 만들었다는 표현은, 우주에 대한 설명이면서 동시에 인간에 대한 설명입니다. 하늘과 땅은 사람 안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을 뜻하며, 거주하게 만든다는 것은 주님께서 그 안에 머무실 수 있는 상태로 만드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새 창조는 단지 새출발이 아니라, ‘주님이 거하실 처소가 다시 세워지는 일’입니다.

 

이 모든 논의는 한 결론으로 모입니다. 거듭남은 오직 주님의 일이라는 결론입니다. 인간은 동의하고 받아들이며 따르지만, 창조의 주체는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을 ‘창조자’, ‘형성자’, ‘만드시는 이’로 부르는 모든 표현은, 각각 다른 국면에서 동일한 진리를 가리킵니다. 인간의 구원은 인간의 작품이 아니라, 주님의 작품이라는 진리입니다.

 

AC.88은 안식의 의미를 다시 한번 정제합니다. 안식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내가 더 이상 나 자신을 만들려고 애쓰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때 비로소 주님의 일이 내 안에서 온전히 드러나며, 나는 ‘하나님의 일’로서 쉬게 됩니다.

 

이 지점에서 안식은 종교적 개념이 아니라, 존재의 안정 상태가 됩니다. 그리고 그 안정은, 주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됩니다.

 

 

 

AC.87, 창2:2-3, 주님께서 ‘쉬셨다’(rested)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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