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5전반부에는 ‘잘못하였노라자복하고’라는 말씀이 나오지만 후반부의 속건제에 들어가면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성물에 잘못을 범한 사람은 그 잘못을 ‘보상’하고 거기에 ‘오분의일을더하여’ 제사장에게 주어야 합니다. 실제 손상이 발생했다면 실제 회복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회개를 마음의 상태로만 생각하면 우리는 ‘내가잘못했다는것을깨달았고하나님께용서를구했으니끝났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나의 악이 다른 사람이나 어떤 질서에 실제 손상을 입혔다면 그 결과는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훔친 물건은 여전히 상대에게 없고, 거짓말로 훼손된 명예는 여전히 손상되어 있으며, 내가 회피한 책임은 누군가가 대신 짊어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회개는 가능한 경우 그 손상을 바로잡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이 점에서 속건제는 매우 실제적인 거듭남의 제사입니다. 회개가 진실한지는 감정의 강도만으로 알 수 없습니다. 때로는 눈물을 많이 흘리고 죄책감을 크게 느끼면서도 실제 행동은 하나도 바뀌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감정 표현은 크지 않아도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돌려줄 것을 돌려주며 다시 같은 악을 행하지 않도록 삶을 바꾸는 사람이 있습니다. 레5의 속건제는 후자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특히 ‘오분의일을더하여’라는 말씀이 흥미롭습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649(창6:15)는 레5:16을 직접 인용하면서 보상 후 더해지는 오분의 일을 말씀에서 ‘다섯’이 어떤 것 또는 조금을 의미하는 사례와 연결합니다. 그리고 ‘계시록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1759, AE) 548(계9:5)은 레5:16을 비롯하여 율법에서 오분의 일을 더하도록 한 여러 경우를 직접 열거하면서, 양과 관련된 이 ‘오분의일’이 ‘충분한만큼’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규정을 단순한 고대의 벌금제도로만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잘못을 대충 덮어 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로잡기에 충분하도록 회복하려는 태도와 연결하여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모든잘못에는반드시20퍼센트를더갚아야한다’는 식으로 오늘날 문자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상응의 핵심은 숫자를 현대의 계산식으로 옮기는 데 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회개가 최소한의 면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과했으니됐지’, ‘원금은돌려줬으니됐지’가 아니라 내가 일으킨 손상을 진실하게 바라보고 가능한 범위에서 충분히 바로잡으려는 마음입니다.
물론 모든 손상을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에게 직접 사과할 수 없을 수도 있고, 오래전의 말 한마디가 남긴 상처를 완전히 없앨 수도 없습니다. 이런 경우 회개가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선을 찾는 것입니다. 같은 악을 반복하지 않고, 비슷한 상황에서 이제는 진실을 선택하며, 과거에 해쳤던 종류의 이웃을 이제는 돕는 방향으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불가능한 과거 복원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자유 안에서 삶의 방향이 실제로 바뀌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레5에서 ‘자복’과 ‘보상’은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자복은 속의 인정이고 보상은 가능한 경우 그 인정이 겉의 삶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속 사람에서 ‘내가잘못했습니다’라고 인정한 것이 겉 사람의 행동에서는 ‘그러므로내가바로잡겠습니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계속 살펴보고 있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입니다.
레5의 속건제는 우리에게 아주 간단하지만 피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용서를구한그일가운데아직내가바로잡을수있는것이남아있는가?’입니다. 있다면 회개는 거기까지 가야 합니다. 주님의 사함은 책임으로부터 도망치게 하는 은혜가 아니라, 진실을 직면하고 가능한 것을 바로잡으며 새로운 삶을 시작할 힘을 주시는 은혜입니다. ‘잘못하였노라자복하고’에서 시작된 회개가 ‘잘못을보상하되’에까지 이르는 것, 그것이 레5가 보여 주는 살아 있는 거듭남의 모습입니다. (SW.7레5심화2)
레5의 속죄제에서 가장 따뜻한 장면 가운데 하나는 제물이 사람의 형편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형편이 되는 사람은 어린양이나 염소를 드리지만, ‘그의힘이어린양을바치는데에미치지못하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것조차 감당할 수 없으면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가져오면 됩니다. 실제로 레5:7과 11은 경제적 능력에 따라 이 대체 제물을 명시합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가 보입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길은 인간이 가진 외적인 재산의 크기에 의해 결정되지 않습니다. 어린양을 드릴 수 없는 사람에게 비둘기의 길이 있고, 비둘기조차 드릴 수 없는 사람에게 고운 가루의 길이 있습니다. 제물의 외적 크기는 달라도 ‘제사장이그를위하여속죄한즉그가사함을받으리라’는 결론은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없는 것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 사람이 실제로 가진 상태 안에서 당신께 돌아올 길을 열어 주시는 분입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833(창15:10)은 레5:7-8을 직접 인용하면서 속죄제에 사용된 비둘기 역시 제사의 상응 질서 안에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값싼 제물을 드린 사람의 예배가 값비싼 제물을 드린 사람보다 영적으로 열등하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각 제물은 서로 다른 영적 상태를 표상합니다. 중요한 것은 외적 가격이 아니라 그 사람이 주님 앞에서 실제로 응답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가장 놀라운 것은 마지막 단계입니다. 동물도 새도 없이 ‘고운가루’만으로 속죄제가 됩니다. 이것은 레위기의 제사에서 피가 매우 중요하다고 해서 모든 개별 속죄제에 반드시 동물의 피가 있어야만 사함이 가능했다고 단순화할 수 없음을 본문 자체가 보여 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레5:11-13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은 고운 가루를 가져오며, 제사장은 그것의 한 움큼을 제단에서 불사르고 그를 위하여 속죄하며, 본문은 똑같이 ‘그가사함을받으리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속죄 이해와도 잘 어울립니다. 구원의 능력이 동물의 물질적 피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제사가 주님의 신적 구원 역사와 인간의 정결을 표상했기 때문입니다. 외적인 제물은 달라질 수 있지만 실제로 인간을 악과 거짓에서 정결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가진 것이 적은 사람이라고 해서 주님의 정결과 사함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이 장면은 오늘 우리에게도 큰 위로가 됩니다. 우리는 때때로 주님께 나아가기 위해 무엇인가 충분히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이 더 좋아져야 하고, 마음이 더 깨끗해져야 하고, 기도도 더 잘해야 하며, 회개도 더 깊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회개는 완성된 사람이 주님께 가져가는 제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완성해 가시도록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그분께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5의 제물은 점점 작아지지만 사함은 작아지지 않습니다. 어린양을 가진 사람에게도 길이 있고, 비둘기밖에 없는 사람에게도 길이 있으며, 한 줌의 고운 가루밖에 없는 사람에게도 길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제물의 시장가격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진실하게 악을 인정하고 주님께 돌아오는가입니다. 거듭남의 문턱에는 ‘이만큼가진사람만들어올수있다’는 표지판이 없습니다. 가장 가난한 사람에게까지 정결과 사함의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 레5의 아름다운 아르카나 가운데 하나입니다. (SW.7레5심화1)
레위기 5장은 4장의 속죄제를 이어가면서 거듭남의 길을 한층 더 실제적인 삶 속으로 끌어옵니다. 레4에서 반복된 핵심 표현은 ‘그가범한죄를깨달으면’이었습니다. 인간은 먼저 자기 안의 악을 보아야 하며, 말씀의 진리가 그것을 비출 때 비로소 회개가 시작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레5에서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이중하나에허물이있을때에는아무일에잘못하였노라자복하고.’ 깨닫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그것을 자기의 죄라고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 후반의 속건제에 이르면 한 걸음이 더 이어집니다. 잘못으로 손상된 것을 ‘보상’하고 거기에 오분의 일을 더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레5전체에는 ‘깨달음→자복→정결→보상→사함’이라는 매우 실제적인 회개의 흐름이 있습니다.
1절로 4절은 그 회개가 필요한 구체적인 삶의 상황들을 보여 줍니다. 알고 있는 사실을 증언하지 않는 것, 부정한 짐승이나 사람의 부정에 접촉하는 것, 함부로 맹세하는 것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서로 전혀 다른 문제처럼 보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죄는 단지 눈에 띄는 악행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해야 할 말을 하지 않는 침묵에도, 자기도 모르게 접촉한 부정에도, 생각 없이 내뱉은 말에도 영적인 결과가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1절은 매우 실제적입니다. 거짓말을 직접 하지 않았다고 해서 언제나 진실한 것은 아닙니다. 진실을 말해야 할 때 알고도 침묵함으로 거짓이 힘을 얻도록 만들 수도 있습니다. 4절의 함부로 한 맹세 역시 말의 책임을 보여 줍니다. 거듭남은 예배 시간의 종교적 상태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보고도 침묵하는지, 무엇에 접촉하는지, 어떤 말을 생각 없이 내뱉는지까지 다룹니다.
그런데 2절과 3절에는 레4에서 보았던 ‘부지중’이라는 문제가 다시 등장합니다. 인간은 어떤 부정에 접촉하고도 그것을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것을깨달았을때에는허물이있을것이요’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인간이 알지 못한 것을 빌미 삼아 정죄하신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에게는 아직 자기가 보지 못하는 악과 거짓의 영향이 있으며, 주님께서 말씀의 빛으로 그것을 보여 주실 때 새로운 책임과 새로운 회개의 가능성이 시작된다는 데 있습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39(출29:14)는 속죄제가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죄를 깨닫는 것은 정결의 시작입니다. 아직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되었을 때 인간은 그것을 숨기거나 변명할 것인지, 아니면 주님 앞에서 인정하고 피할 것인지를 선택하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5절의 ‘자복’이 등장합니다. 레4에서는 주로 ‘깨달음’이 강조되었다면 레5에서는 ‘잘못하였노라자복하고’라고 합니다. 영적으로 이 둘은 같지 않습니다. 자기 안에서 잘못된 것을 발견하는 것과 ‘이것은나의죄입니다’라고 인정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악을 발견하고도 환경 탓, 다른 사람 탓, 성격 탓으로 돌릴 수 있습니다. ‘그사람이먼저그랬기때문에’, ‘나는원래성격이이렇기때문에’, ‘상황이어쩔수없었기때문에’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복은 그 모든 설명을 넘어 ‘이것은내가주님앞에서피해야할악입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회개는 죄를 입술로 열거하는 행위 자체에 머물지 않습니다. 악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실제로 그것을 피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레5의 자복은 단순한 종교적 죄책감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꾸는 출발점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레5는 매우 아름다운 장면을 보여 줍니다. 속죄제물을 드려야 하지만 모든 사람이 같은 경제적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형편이 되는 사람은 암컷 어린양이나 염소를 드립니다. 그러나 ‘그의힘이어린양을바치는데에미치지못하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것마저 힘들면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실제 본문 자체가 제물의 경제적 차등을 분명히 규정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고대의 복지 규정 이상으로 깊은 인상을 줍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정결의 길이 재산에 의해 막히지 않는 것입니다. 어린양을 드릴 수 없는 사람에게 비둘기의 길이 열리고, 비둘기조차 드릴 수 없는 사람에게 한 줌의 곡식으로 나아갈 길이 열립니다. 누구도 ‘나는가진것이없어서주님께돌아갈수없다’고 말할 수 없게 하신 것입니다.
비둘기가 등장하는 것도 레1에서 이미 보았던 상응과 연결됩니다. AC.870(창8:8-9)은 비둘기를 거듭나는 사람 안의 신앙의 진리와 선에 연결하며, 제사에서 비둘기가 사용된 사실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AC.1833(창15:10)은 레5:7-8의 속죄제까지 직접 인용하면서 제사에서 새를 완전히 둘로 나누지 않았던 규정에 영적 의미가 있음을 밝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난한 사람이 더 낮은 가치의 예배를 드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소나 양이 표상하는 선의 상태와 새가 표상하는 진리와 신앙의 상태가 서로 다를 뿐, 주님께서는 각 사람이 실제로 받을 수 있고 응답할 수 있는 상태에서 정결의 길을 여십니다. 거듭남에는 획일적인 한 가지 외적 형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 놀라운 것은 비둘기조차 드릴 수 없는 사람에게 고운 가루를 속죄제물로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레2에서 고운 가루는 소제의 중심이었고, 거기에는 기름과 유향이 함께 놓였습니다. ‘계시록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1759, AE) 324(계5:8)는 레2:1-2를 직접 인용하면서 고운 가루는 순수한 진리를, 기름은 천적 사랑의 선을, 유향은 영적 사랑의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레5의 가난한 사람의 속죄제에서는 같은 고운 가루를 가져오면서도 ‘기름을붓지말며유향을놓지말라’고 합니다. 본문도 그 이유를 단호하게 ‘이는속죄제인즉’이라고 밝힙니다. 여기서는 레2의 소제처럼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기쁨의 예배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드러나 정결되어야 하는 상태를 다루기 때문입니다. 다만 현재 확보한 스베덴보리 원전에서 레5:11의 ‘기름과유향의부재’를 각각 직접 해설하는 대목은 확인되지 않았으므로, 그 세부를 지나치게 확대하여 단정하지는 않겠습니다. 확실한 것은 같은 고운 가루라도 제사의 문맥이 달라지면 그 전체적인 의미와 쓰임도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이 부분은 레위기의 제사를 읽는 데 매우 중요한 원칙을 가르쳐 줍니다. 상응은 사전처럼 ‘고운가루=진리,기름=선,유향=이것’이라고 낱말을 대입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각각의 상응은 전체 계열과 문맥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레2에서는 고운 가루에 기름과 유향이 더해져 선과 진리의 결합과 예배를 나타냈지만, 레5에서는 같은 고운 가루가 죄로부터의 정결이라는 전혀 다른 제사 안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제사의 세세한 규정마다 천국의 아르카나가 있다고 말한 이유를 조금씩 이해하게 됩니다. 한 가지 재료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과 함께 있고, 무엇이 빠져 있으며, 어떤 제사 안에서 사용되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14절부터는 새로운 제사인 ‘속건제’가 시작됩니다. 첫 경우는 ‘여호와의성물에대하여부지중에범죄’한 경우입니다. 흠 없는 숫양을 가져오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잘못한 성물에 대해 ‘보상’하고 거기에 ‘오분의일’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주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속죄제와 구별되는 속건제의 매우 중요한 특징이 나타납니다. 죄는 인간의 내면에 부정만 남기는 것이 아니라 실제 관계와 질서에 손상을 일으킬 수 있으며, 그런 경우 회개는 ‘잘못했습니다’라는 말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가능한 것은 바로잡아야 합니다. 빼앗은 것이 있으면 돌려주고, 손상시킨 것이 있으면 회복하며, 잘못된 관계에서 내가 감당해야 할 책임이 있다면 그것을 감당해야 합니다. 레5의 속건제는 회개가 실제 삶의 회복으로 이어져야 함을 보여 줍니다.
특히 ‘오분의일을더하여’라는 규정은 그냥 임의의 벌금이 아닙니다. AC.649(창6:15)는 레5:16을 직접 인용하면서 보상 후 더하는 ‘오분의일’을 최소한의 추가분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말씀에서 ‘다섯’이 ‘어떤것,조금’을 의미하는 용례 가운데 하나로 제시합니다. 그런데 ‘계시록해설’ 548(계9:5)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레5:16을 비롯한 여러 ‘오분의일’ 규정을 직접 열거하면서, 양과 관련된 문맥에서 ‘오분의일’이 ‘충분한만큼’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레5의 보상은 단지 원상복구를 계산적으로 해 놓고 끝내는 최소주의적 회개가 아닙니다. 잘못을 바로잡기에 충분하도록 회복하려는 방향을 보여 줍니다. 다만 여기서 AC의 모든 ‘오분의일’ 용례를 곧바로 동일한 세부 상응으로 합쳐서는 안 됩니다. 레5:16에 대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보상이 실제적이어야 하며, 거기에 추가분까지 요구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회개를 매우 구체적으로 만듭니다.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해 놓고 하나님께만 ‘용서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으로 충분할까요? 남의 것을 부당하게 취하고도 마음으로 회개했다고 끝낼 수 있을까요? 거짓말로 관계를 손상시켰다면 가능한 범위에서 진실을 바로잡아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모든 잘못을 과거 그대로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지나간 시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도 있습니다. 그러나 속건제가 보여 주는 방향은 분명합니다. 참된 회개에는 ‘내가할수있는회복은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따라옵니다. 사함은 책임을 없애는 핑계가 아니라 책임을 정직하게 감당할 수 있게 하는 은혜입니다.
17절로 19절에서는 다시 ‘부지중’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여호와의계명중하나를부지중에범하여도허물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레4와 레5전반의 주제를 다시 확인합니다. 인간이 아직 인식하지 못한다고 해서 악이 선으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것을 깨닫게 하실 때 정결의 길이 열립니다. 그리고 이 장 전체를 지나며 그 길은 점점 구체적으로 깊어집니다. ‘몰랐다’에서 ‘깨달았다’로, ‘깨달았다’에서 ‘자복한다’로, ‘자복한다’에서 ‘속죄한다’로, 그리고 실제 손상이 있는 경우에는 ‘보상한다’로 나아갑니다. 이것은 죄책감을 점점 더 무겁게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인간을 악의 지배에서 실제로 자유롭게 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레5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회개는진실해질수록구체적이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내 안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보게 됩니다. 그다음 그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내가잘못했습니다’라고 인정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형편과 상태에 맞게 정결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그리고 내 죄가 실제로 무엇인가를 손상시켰다면 가능한 범위에서 그것을 회복하게 하십니다. 그 모든 과정의 끝에 반복되는 말씀은 레4와 같습니다. ‘제사장이그의허물을위하여속죄한즉그가사함을받으리라.’ 사함은 현실을 외면하는 선언이 아니라 인간을 악과 거짓에서 건져 내어 다시 선과 진리의 질서 안으로 돌려놓으시는 주님의 역사입니다.
레4가 우리에게 ‘그가범한죄를깨달으면’이라고 말했다면 레5는 묻습니다. ‘깨달은다음에는무엇을할것인가?’입니다. 레5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잘못하였노라자복하고’, 그리고 바로잡을 것이 있다면 바로잡으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신 악을 인정하고 피하며, 손상시킨 것을 가능한 만큼 회복하고, 다시 선과 진리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 이것이 속죄제에서 속건제로 이어지는 거듭남의 길입니다. 회개는 마음속 후회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참된 회개는 마침내 삶의 방향을 바꾸고, 가능한 곳에서는 깨어진 것을 다시 세우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SW.7레5해설)
레4와 레5를 이어 읽으면 매우 중요한 변화가 보입니다. 레4에서 반복되는 말은 ‘그가범한죄를깨달으면’이고, 레5에 들어오면 ‘잘못하였노라자복하고’가 더해집니다. 깨달음에서 자복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경 본문 자체도 죄를 인식한 뒤 그것을 고백하도록 명시합니다.
그러나 죄를 ‘깨닫는것’과 ‘자복하는것’은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기 잘못을 알아도 그것을 자기 죄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말을심하게한것은맞지만그사람이먼저시작했다’, ‘내가거짓말한것은맞지만상황상어쩔수없었다’, ‘내가화낸것은맞지만그것은정의로운분노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악을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자복은 이 방어를 내려놓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사람이무엇을했는가’보다 먼저 ‘나는주님앞에서무엇을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무조건 비난하는 자기혐오와 다릅니다. 오히려 매우 정확한 자기 인식입니다. 내가 하지 않은 죄까지 내 것으로 짊어질 필요는 없지만 내가 실제로 행한 악은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회개 교리에서 이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회개는 죄를 입술로 열거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기 삶을 살피고, 악을 발견하고, 그것을 죄라고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실제로 그 악을 피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복의 진실성은 결국 다음 삶에서 드러납니다. 같은 상황이 다시 왔을 때 이전과 다른 선택을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죄를 깨닫게 되는 순간은 두려운 순간이면서 동시에 은혜의 순간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악을 보여 주시는 목적은 그 사람을 절망시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악은 피할 수 없지만 보이기 시작한 악은 주님의 도움을 받아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자기 자신이 점점 더 완벽해 보이기보다 오히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미세한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빛이 밝아졌기 때문에 먼지가 더 잘 보이는 것입니다.
레5는 바로 그 순간에 ‘자복하라’고 합니다. 숨기지 말고, 다른 이름을 붙이지 말고,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미움이면 미움이라고, 거짓이면 거짓이라고, 지배욕이면 지배욕이라고 주님 앞에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것을 피하려는 실제 싸움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자복은 ‘저는형편없는죄인입니다’라는 막연한 자기비하보다 훨씬 구체적입니다. ‘주님,저는이사람을미워하고있습니다’, ‘제가인정받고싶은마음때문에이일을했습니다’, ‘제가손해보기싫어서진실을숨겼습니다’처럼 말씀의 빛에서 발견된 실제 악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가 구체적일수록 무엇을 피해야 하는지도 구체적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레5후반의 속건제가 보여 주듯 자복은 마침내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내가 잘못한 것을 인정했다면 가능한 경우 바로잡습니다. 그래서 레5에는 매우 아름다운 하나의 흐름이 있습니다. ‘깨닫는다→자복한다→피한다→바로잡는다.’ 이것은 죄책감의 계단이 아니라 자유의 계단입니다. 한 단계씩 올라갈수록 악은 인간을 붙잡을 힘을 잃고 주님의 선과 진리가 그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죄를 깨닫는 것은 거듭남의 실패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죄를 전혀 보지 못하는 것이 더 위험합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신 것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잘못하였노라’ 자복하며, 그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가능한 것은 바로잡을 때 인간은 실제로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레5의 자복은 입술에서 끝나는 고백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돌리는 고백입니다. (SW.7레5심화3)
4. ‘왜속죄제의고운가루에는기름과유향을넣지않았을까?’
레5:11은 레2를 이미 읽은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레2의 소제에서는 고운 가루에 반드시 기름을 붓고 유향을 놓았습니다. 그런데 레5에서는 형편이 어려워 비둘기조차 드릴 수 없는 사람이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속죄제로 가져오도록 하면서 정반대로 명령합니다. ‘이는속죄제인즉그위에기름을붓지말며유향을놓지말고.’ 같은 고운 가루인데 왜 소제에서는 기름과 유향을 더하고, 속죄제에서는 그것들을 의도적으로 빼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는 놀랍게도 스베덴보리가 거의 그대로 답한 대목이 있습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137(출29:40)은 여러 소제의 규정을 설명하다가 레5:11을 직접 인용합니다. 그리고 죄와 허물을 위한 제사의 소제에는 십분의 일 에바의 고운 가루를 사용하되 ‘그위에기름이나유향을두지않았다’고 한 뒤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기름’은 사랑의 선을, ‘유향’은 그 선에 속한 진리를 의미하지만, 속죄제와 속건제는 악과 거기에서 나오는 거짓으로부터의 ‘정결과속죄’를 의미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선 및 선에서 나오는 진리와 섞여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레5:11을 직접 다루는 원전이므로 이 부분의 상응은 매우 확실합니다.
이 설명을 이해하려면 레2를 잠시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레2에서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은 함께 있었습니다. 고운 가루는 선에서 나오는 진리와 연결되고, 기름은 사랑의 선을, 유향은 그 선에서 나오는 진리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소제는 주님께서 주신 선과 진리가 인간의 삶 안에서 결합되어 예배와 쓰임으로 나타나는 아름다운 상태를 보여 주었습니다. 거기에서는 기름과 유향이 빠질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함께 있어야 소제가 나타내는 영적 상태가 온전히 표현됩니다.
그러나 레5의 상황은 다릅니다. 지금 인간은 이미 선과 진리가 조화롭게 결합된 상태를 표현하려고 제단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안에서 악과 거짓이 드러났고 그것으로부터 정결하게 되어야 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고운 가루를 가져오지만 거기에 기름과 유향을 넣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사람에게사랑의선과진리가전혀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 이 제사가 표상하는 중심 사건이 ‘선과진리의결합’이 아니라 ‘악과거짓으로부터의정결’이라는 뜻입니다. 제사의 재료는 같아도 제사의 목적과 계열이 달라지면 상응의 배열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레위기의 상응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한 원칙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흔히 ‘기름=사랑’, ‘유향=진리’, ‘고운가루=진리’와 같이 대응표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기계적으로 대입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상응은 그렇게 단순한 암호풀이가 아닙니다. 무엇이 무엇과 함께 있는지, 어떤 제사 안에 놓여 있는지, 그 제사가 전체적으로 무엇을 표상하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AC.10137의 설명이 바로 그 좋은 예입니다. 기름과 유향 자체는 선한 것을 표상하지만, 속죄제에서는 바로 그 선한 것들을 ‘넣지않는것’까지 의미가 있습니다. 악과 거짓을 정결하게 하는 과정과 이미 정결해진 선과 진리의 상태를 뒤섞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거듭남에서도 매우 실제적입니다. 자기 안에서 악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너무 빨리 그것을 좋은 것으로 포장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화를 내고도 ‘정의를위한분노였다’고 하고, 사람을 지배하려 하고도 ‘그사람을사랑해서그랬다’고 하며, 인정받으려는 욕망을 ‘주님의영광을위한열심’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악을 악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속죄제의 고운 가루에 기름과 유향을 넣지 않는 장면은 영적으로 이런 혼합을 경계하는 모습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정결해야 할 것은 먼저 정결해야 합니다. 악을 선이라고 부르거나 거짓을 좋은 의도라고 포장하지 않고 주님의 빛 앞에서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2와 레5의 차이는 매우 아름답습니다. 레2에서는 ‘고운가루에기름을붓고유향을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 주님께 드려지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레5에서는 ‘기름을붓지말며유향을놓지말라’고 하십니다. 지금은 악과 거짓으로부터 정결하게 되는 일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거듭남을 통해 이루어지는 선과 진리의 결합을 보여 주고, 다른 하나는 그 결합을 방해하는 악과 거짓을 제거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서로 반대되는 제사가 아니라 거듭남이라는 하나의 큰 역사 안에서 서로 다른 일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왜 레위기의 그토록 사소해 보이는 규정 하나까지 함부로 지나칠 수 없는지를 보여 줍니다. ‘기름을넣는다’와 ‘기름을넣지않는다’, ‘유향을놓는다’와 ‘유향을놓지않는다’의 차이 안에 인간의 거듭남에서 ‘정결’과 ‘결합’을 구별하는 아르카나가 숨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악과 거짓을 선과 진리로 위장하지 않고 드러내어 정결하게 하시며, 그렇게 깨끗하게 된 자리에서 비로소 선과 진리가 참으로 결합되게 하십니다. 레5:11의 비어 있는 고운 가루는 그래서 결핍의 표상이 아니라, 거듭남의 질서를 정확하게 보여 주는 제물입니다. (SW.7레5심화4)
5. ‘모르고지은죄도죄인가?-무지와이노센스,그리고책임의문제’
레5:17은 읽는 사람을 멈추게 하는 말씀입니다. ‘만일누구든지여호와의계명중하나를부지중에범하여도허물이라벌을당할것이니.’ 알면서 고의로 계명을 어긴 것이 아니라 ‘부지중에’, 곧 알지 못하고 범했는데도 왜 허물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이것만 떼어 읽으면 하나님께서 인간이 알지도 못했던 잘못까지 찾아내어 책임을 묻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원전을 함께 보면 이 문제는 훨씬 섬세하게 읽어야 합니다.
먼저 아주 중요한 원전이 있습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3519(창27:9)는 제사에 사용되는 염소 새끼가 이노센스를 의미한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레5:6을 직접 인용합니다. 그리고 ‘실수로범한죄’는 ‘무지에서비롯된죄’이며, 그 무지 안에는 이노센스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몰랐어도죄는죄니까고의로지은죄와똑같이책임져야한다’고 단순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지 속에 이노센스가 있는가를 함께 봅니다.
AC.9262(출23:7)는 이 문제를 더욱 분명하게 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신명기의 한 정결 의식을 해설하면서 어떤 악한 결과가 ‘이노센스가있는무지’에서 비롯된 경우에는 ‘책임이없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그 행위 자체가 잘못된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과 그 사람에게 돌아가는 죄책을 구별합니다. 무지 속에 이노센스가 있었다면 그 행위는 악한 결과를 낳았더라도 그 사람의 의지에서 악을 선택하여 나온 것과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레5:17의 ‘부지중에범하여도허물이라’는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여기서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은 ‘어떤것이객관적으로신적질서에어긋나는가’와 ‘그것을행한사람에게어느정도의죄책이귀속되는가’입니다. 인간이 모르고 독을 마셨다고 해서 독이 물로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르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해서 그 상처 자체가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어떤 악을 악인 줄 모르고 행했다고 해서 그것이 갑자기 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적 질서에 어긋난 것은 여전히 바로잡혀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면서 의도적으로 선택한 사람과 정말 모르고 행한 사람의 내적 상태까지 같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레5자체도 이 차이를 보여 줍니다. 2절과 3절에서는 어떤 사람이 부정한 것에 접촉했지만 ‘부지중’이었다가 나중에 그것을 깨닫는 상황이 나옵니다. 4절에서도 함부로 맹세한 일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그리고 17절에서도 ‘부지중’이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중요한 전환점은 ‘깨닫게되는것’입니다. 알지 못했던 때와 알고 난 뒤의 상태가 같지 않습니다. 알지 못했을 때에는 이노센스가 있을 수 있지만, 주님께서 말씀과 양심을 통해 그것을 보여 주신 뒤에도 계속 같은 악을 붙들고 있다면 더 이상 같은 의미의 무지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레5의 속죄제가 이해됩니다. 제사는 ‘몰랐으니너도고의범과똑같이유죄다’라고 정죄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직 알지 못하는 가운데 인간의 자연적 삶에 들어온 부정과 무질서를 주님께서 정결하게 하시는 길을 보여 줍니다. AC.3519가 실수로 범한 죄를 ‘무지에서비롯된죄이며그안에이노센스가있다’고 설명하면서 바로 레5의 속죄제를 연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노센스가 있는 무지는 주님께서 정결하게 하실 수 있는 상태입니다.
여기서 ‘이노센스’를 단순히 ‘아무것도몰랐으니나는잘못이없다’는 자기변명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노센스는 훨씬 깊은 상태입니다. 자기 자신에게서는 선과 진리가 나오지 않으며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고 주님의 인도를 받으려는 상태입니다. AC.9262는 이노센스를 바로 이런 태도와 연결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이노센스가 있는 사람은 ‘나는몰랐으니까책임없어’라고 버티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잘못을 알게 되었을 때 ‘주님,제가몰랐습니다.이제보여주셨으니돌이키겠습니다’라고 응답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거듭남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거듭남을 시작할 때 자기 안의 모든 악을 한꺼번에 알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아주 거친 악만 보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배우고 양심이 형성되며 주님의 빛이 더 깊이 들어올수록 이전에는 아무 문제도 없다고 생각했던 말과 행동, 동기와 욕망 속에서도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제는 몰랐던 것을 오늘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어제의 무지를 이용해 우리를 정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 보여 주심으로 오늘부터 그것에서 자유로워질 길을 여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레5:17의 ‘알지못하였을지라도허물이라’는 말씀은 두려움을 조장하기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인간의 무지가 악을 선으로 바꾸지는 않는다는 엄중한 진리인 동시에, 아직 알지 못했던 잘못까지 주님께서 정결하게 하실 수 있다는 희망의 말씀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악에서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새롭게 발견되는 더 깊은 악과 거짓에서도 계속 정결하게 됩니다.
결국 문제는 ‘몰랐는가,알았는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알게된뒤어떻게하는가?’입니다. 무지 속에 이노센스가 있었다면 주님께서는 그것을 고의적인 악과 똑같이 여기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여 주신 뒤에는 새로운 자유와 책임이 시작됩니다. 그때 그것을 인정하고 피하면 어제의 무지는 오늘의 거듭남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레5의 부지중의 죄는 인간을 꼼짝 못 하게 만드는 죄책의 교리가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영역까지 조금씩 비추시고 정결하게 하여 마침내 더 온전한 자유로 이끄시는 거듭남의 아르카나입니다. (SW.7레5심화5)
레위기 4장의 속죄제에는 얼핏 보면 매우 이상한 대비가 있습니다. 같은 수송아지인데 일부는 제단으로 올라가고 일부는 진영 밖으로 나갑니다. 내장과 콩팥 주변의 ‘기름’은 거룩한 제단 위에서 불사르지만, 가죽과 고기와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과 똥, 곧 나머지 전체는 진영 밖으로 가져가 불사릅니다.
왜 같은 제물 안에서 이렇게 정반대의 처리가 이루어질까요?
여기에는 매우 분명한 상응이 있습니다. 레3에서 살펴본 것처럼 기름은 선을 표상합니다. 그래서 속죄제에서도 기름은 버려지지 않고 제단으로 올라갑니다. 인간이 정결하게 된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과 거짓은 제거되지만 주님에게서 오는 선은 보존되고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반면 수송아지의 나머지를 진영 밖에서 불사르는 장면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가 매우 직접적으로 설명합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38(출29:14)은 수송아지의 살과 가죽과 똥을 진영 밖에서 불사르는 것이 그것들이 표상하는 악들을 지옥에 내어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진영은 천국과 교회를 표상하고, 따라서 진영 밖은 천국과 교회가 아닌 곳, 곧 지옥을 표상합니다.
이어 AC.10040은 속죄제 수송아지의 살이 여기서는 사랑의 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악’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같은 ‘살’이라는 상응도 문맥에 따라 정반대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속죄제라는 문맥에서는 제거되어야 할 악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상응을 읽을 때 매우 중요한 원칙을 가르쳐 줍니다. ‘살은언제나이것’, ‘불은언제나이것’, ‘동물은언제나이것’처럼 기계적으로 대응시키면 안 됩니다. 말씀의 문맥과 계열이 중요합니다. 같은 자연적 대상도 선한 계열에서는 긍정적 의미를, 악한 계열에서는 반대 의미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레4의 수송아지는 바로 이 원리를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기름은 제단으로 올라갑니다. 악을 표상하는 것은 진영 밖으로 나갑니다. 이것이 정결입니다.
우리의 회개도 이와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인격 전체를 없애 버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개성이나 재능이나 자연적 삶 자체를 파괴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악한 사랑과 거짓을 분리하여 물러나게 하시고, 주님에게서 받은 선한 것들은 보존하고 정결하게 하십니다.
예를 들어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의지 자체를 없애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자기 뜻을 관철하려는 지배욕은 제거되어야 하지만, 정결하게 된 강한 의지는 선한 일을 끝까지 수행하는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지적 능력이 뛰어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지성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보다 우월해지려는 교만은 진영 밖으로 나가야 하지만, 정결하게 된 이해는 진리를 보고 다른 사람을 돕는 귀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거듭남은 인간을 무색무취하게 만드는 과정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주신 고유한 능력과 쓰임을 없애지 않으시고 그것을 정결하게 하여 선을 섬기게 하십니다. 버려져야 하는 것은 악이며, 주님에게서 온 선은 주님께 돌려집니다.
여기서 ‘진영밖’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악은 조금 고쳐서 성소 안에 보관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을 악으로 인정했다면 그것과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미움을 ‘정의감’이라고 이름 붙여 보관하고, 지배욕을 ‘책임감’이라고 이름 붙여 보관하며, 자기 자랑을 ‘간증’이라고 이름 붙여 성소 안에 들여놓아서는 안 됩니다.
진리가 그것이 악임을 보여 주었다면 진영 밖으로 내보내야 합니다. 이것이 ‘악을죄로여겨피하는것’의 실제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여기서도 자신의 힘으로 악을 지옥에 던질 수 없습니다. 악을 보고 인정하고 피하려는 것은 인간이 해야 하지만, 실제로 악을 물러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인간이 주님을 바라보며 악을 거부할 때 주님께서 그 악을 인간의 중심에서 밀어내십니다.
그래서 레4의 장면은 매우 역동적입니다. 한쪽에서는 기름이 제단의 불꽃 속으로 올라갑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악을 표상하는 것들이 진영 밖으로 나갑니다. 선은 주님께 돌려지고 악은 제거됩니다.
바로 이것이 속죄제의 정결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단지 ‘용서받은죄인’이라는 이름 아래 그대로 두시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인간 안의 질서를 바꾸어 가십니다. 악은 밖으로, 선은 주님께로 향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레4의 속죄제는 우리에게 아주 실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지금내안에서제단으로올라가야할것은무엇이며,진영밖으로나가야할것은무엇인가?’입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선은 감사함으로 그분께 돌리고, 말씀의 빛에서 악으로 드러난 것은 붙들거나 변명하지 말고 피해야 합니다. 이 두 움직임이 함께 일어날 때 인간의 자연적 삶은 조금씩 정결하게 되고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SW.6레4심화3)
레위기 4장의 속죄제를 읽을 때 기독교인은 자연스럽게 십자가를 떠올립니다. 죄를 범한 인간 대신 흠 없는 제물이 죽고 피가 흘려지며, 마지막에는 ‘제사장이그를위하여속죄한즉그가사함을받으리라’고 선언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속죄제를 ‘죄인이받아야할형벌을무죄한제물이대신받는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익숙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레4를 읽으면 강조점이 상당히 달라집니다. 제물의 죽음과 피를 단순한 형벌의 이전으로 읽기보다 ‘인간을악과거짓에서정결하게하시는주님의구원역사’로 읽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임의로 속죄제의 뜻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39(출29:14)는 속죄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매우 직접적으로 설명합니다. 그것은 ‘악과거짓으로부터의정결’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설명에서 레4:3, 8, 14, 20, 21, 24, 25, 29, 33, 34를 직접 근거로 제시합니다.
이 한 문장은 레4를 바라보는 시선을 크게 바꿉니다. 속죄의 핵심이 ‘누가형벌을받는가?’보다 ‘인간에게서무엇이제거되는가?’로 이동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구원의 근본 문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화가 나셔서 누군가를 처벌해야만 용서하실 수 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인간 자신이 악과 거짓 안에 있음으로써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구원하려면 실제로 악과 거짓이 물러나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의 십자가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십자가는 주님께서 세상에서 겪으신 모든 시험의 마지막이며, 그 시험들을 통하여 지옥을 이기시고 당신의 인성을 완전히 영화롭게 하신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지옥을 정복하시고 당신의 인성을 신적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인간에게 악과 거짓을 이길 능력이 주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속죄제의 제물은 단순히 ‘하나님이죄인대신벌하신희생물’이라는 그림보다 훨씬 깊게 주님을 가리킵니다. 제사의 가장 높은 의미에는 주님의 영화가 있고, 상대적 의미에는 인간의 거듭남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악과 지옥의 세력을 이기신 그 신적 역사가 인간에게 적용될 때 인간 안에서는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과 거듭남으로 나타납니다.
피의 의미도 여기에서 달라집니다. 피는 단순히 ‘누군가죽었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AC.4735는 구약의 성별·속죄·정결 의식에 사용된 피가 주님의 신적 인간에게서 발출하는 거룩한 것, 곧 신적 진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하며 레4:6-7, 17-18, 25, 30, 34를 직접 열거합니다.
왜 진리가 속죄에서 중요할까요? 진리가 인간에게 악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없으면 인간은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진리는 단순히 죄를 폭로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인간을 선으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AC.2832(창22:13)는 레4의 제단 뿔에 피를 바르는 규정을 직접 인용하면서 모든 속죄와 정결이 진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이유는 진리가 선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사함’도 단순한 법정 선언으로 축소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악을 계속 사랑하고 붙들면서도 다른 누군가가 형벌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악을 없는 것으로 보아 주신다는 식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주님은 인간을 실제로 구원하기 원하시며, 그것은 인간이 악에서 돌이켜 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포함합니다.
물론 인간은 자기 힘으로 자신을 정결하게 할 수 없습니다. 레4의 피를 휘장 앞에 ‘일곱번’ 뿌리는 것은 바로 그것을 보여 줍니다. AC.716(창5:24)은 레4:2-3, 6을 직접 인용하면서 일곱이 거룩함을 의미하는 것은 속죄가 오직 주님에게 속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정결의 능력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아무 역할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죄를 깨달아야 하고, 인정해야 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면서 그것을 죄로 여겨 피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면서 악을 강제로 제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롭게 주님의 진리에 응답할 때 악을 물러나게 하십니다.
이것이 레4의 긴 제사 절차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죄를 깨닫고, 주님 앞에 가져오고, 진리로 정결하게 되고, 악이 제거되고, 선이 회복되며, 그 결과 ‘사함을받으리라’는 선언에 이릅니다.
그러므로 ‘속죄와사함은죄의형벌을대신받는것인가,악에서정결하게되는것인가?’라는 질문에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분명히 후자에 중심을 둡니다. 그러나 그것은 십자가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의 결과가 인간에게 실제로 무엇을 이루는지를 더 깊이 묻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단지 우리를 죄인인데도 죄인이 아닌 것으로 간주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죄의 지배에서 실제로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속죄제의 마지막에 ‘사함을받으리라’는 말씀이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함은 악을 사랑한 채 형벌만 피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진리와 신적 선을 받아 악의 지배에서 풀려나 주님과 다시 결합되는 구원의 역사입니다. 속죄제는 바로 그 정결과 회복의 아르카나를 외적인 제사의 언어로 보여 줍니다. (SW.6레4심화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