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92 심화

2.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이 ‘평화의 즐거움’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AC.92의 마지막에는 매우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이 태어나는데, 그것들은 ‘평화의 즐거움에서 생명을 얻는다’고 합니다. 진리와 선이 이미 진리와 선이라면, 다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앞에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어떻게 구별했는지를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AC.81에서는 영적 인간이 영적이고 천적인 진리와 선을 인정하지만 ‘사랑에서라기보다는 신앙의 원리에서’ 그렇게 한다고 했습니다. 반면 천적 인간은 진리와 선을 믿고 퍼셉션하며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외에는 다른 신앙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AC.83에서도 천적 인간이 될 때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사랑이 주된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신앙의 진리들이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진리가 이전에는 거짓이었다가 이제 참이 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는 이미 진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 안에서 어떤 근원으로부터 살아 움직이는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어 있지 않고,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 됩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단순히 알고 인정하는 내용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살아 있는 진리가 됩니다.

 

‘사랑의 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선과 진리가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 그것들에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AC.87-88에서 싸움을 수행하고 사람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분은 주님 홀로라고 했습니다. AC.91에서는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평온이 겉 사람을 적신다고 했고, AC.92에서는 그것을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선과 진리가 생명을 얻는 근원 역시 사람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평화에서’가 아니라 ‘평화의 즐거움에서’ 생명을 얻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천적 인간의 순종이 억지 복종이 아니라는 점과도 연결됩니다. AC.85에서 천적 인간은 자기 자신의 바람을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행하며, 그 주님의 뜻이 그의 ‘바람’이 된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질서에 따르는 것이 외적인 강제가 아니라 그의 사랑과 바람이 되었기 때문에 그 안에는 평화와 즐거움이 있습니다.

 

이 점에서 ‘평화의 즐거움’은 단순한 기분 좋은 감정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싸움이 그치고,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며, 사랑과 신앙이 하나를 이루는 질서에서 오는 즐거움입니다. 그 질서 안에서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이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AC.92는 ‘진리를 알고 있는 것’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살아 있는 것’ 사이의 차이를 생각하게 합니다. 진리를 기억하고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여기서 말하는 천적 생명의 전부가 아닙니다. 사랑과 신앙이 하나를 이루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인 평화의 생명이 사람의 겉 사람에까지 미칠 때 진리와 선은 그 사람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평화의 즐거움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표현이 가리키는 방향입니다. (AC.92 심화 2)

 

 

 

AC.92, 창2:5-6, '평화는 싸움의 그침만이 아니라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다'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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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2 심화 1, 평화가 어떻게 ‘생명’일 수 있는가?

AC.92 심화1. 평화가 어떻게 ‘생명’일 수 있는가? AC.92에서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의 평화에 관하여 매우 독특한 말을 합니다. 그것은 단지 싸움이 그친 상태가 아니라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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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2 심화

1. 평화가 어떻게 ‘생명’일 수 있는가?

 

AC.92에서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의 평화에 관하여 매우 독특한 말을 합니다. 그것은 단지 싸움이 그친 상태가 아니라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평화를 갈등이나 불안이 없는 상태로 생각하는데, 어떻게 평화 자체가 ‘생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먼저 AC.92가 말하는 평화는 단순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정적 상태가 아닙니다. 그 직전까지 사람 안에는 싸움이 있었습니다. AC.91에 따르면 영적 인간일 때에는 겉 사람이 아직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기 때문에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이 되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고, 그 결과 싸움이 그치며 평온이 뒤따릅니다. 따라서 평화는 단순히 싸움 하나가 없어졌다는 데서 끝나지 않고, 사람 안의 질서가 달라진 결과로 찾아오는 상태입니다.

 

AC.92가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싸움이 그쳤기 때문에 생명이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전에는 싸움과 저항 때문에 충분히 나타나지 못하던 것이 이제 겉 사람에게까지 미치기 시작합니다. AC.91에서는 이것을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적시고 이슬로 촉촉하게 하는 수증기에 비유했습니다. 평화는 텅 빈 고요가 아니라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에게 생명이 미치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천적 인간의 안식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동적인 상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84부터 계속 나온 ‘안식’도 주님께서 피곤하여 일을 중단하신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주님 홀로 사람을 위하여 싸우셨고 그 일이 완성되어 싸움이 그쳤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완성된 질서 안에서 이제 평화로부터 생명이 흘러나옵니다.

 

이것은 자연의 모습으로 생각하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폭풍이 그쳤다고 해서 자연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요한 비와 이슬이 땅을 적실 때 식물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AC.90-91에서 ‘비’와 ‘안개’가 평화의 평온을 뜻하고, 그것에 의해 ‘들의 관목’과 ‘들의 초목’이 산출된다고 한 것도 같은 흐름입니다. 평화는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 공백이 아니라 생명이 자라날 수 있는 상태입니다.

 

다만 여기서 ‘평화가 곧 생명이다’라는 하나의 고정된 상응 공식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AC.92의 표현은 더 정확합니다. 그것은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입니다. 중요한 것은 평화가 어디에서 오며 무엇을 하는가입니다. 그것은 사람 자신이 만들어 내는 편안함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나와 겉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거기에서 선과 진리가 살아나게 하는 생명입니다.

 

따라서 AC.92에서 말하는 평화는 싸움의 부재보다 훨씬 적극적인 상태입니다. 탐욕과 거짓으로 말미암은 불안이 그친 뒤,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겉 사람에게 자유롭게 미치기 시작합니다. 그 생명으로 인해 사람 안의 선과 진리가 살아납니다. 이런 의미에서 천적 인간의 평화는 단순한 ‘쉼’이 아니라 생명으로 충만한 안식입니다. (AC.92 심화 1)

 

 

 

AC.92 심화 2,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이 ‘평화의 즐거움’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AC.92 심화2.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이 ‘평화의 즐거움’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AC.92의 마지막에는 매우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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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2, 창2:5-6, '평화는 싸움의 그침만이 아니라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다'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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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1 심화

2. 천적 영적 기원에서 나오는 이성과 기억지식이란 무엇인가?

 

AC.91 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들의 관목’과 ‘들의 초목’이 구체적으로 ‘천적 영적 기원에서 나오는 이성에 속한 것들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이라고 합니다. 천적 인간을 다루고 있는데 왜 단순히 ‘천적 기원’이라고 하지 않고 ‘천적 영적 기원’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먼저 여기서 확실한 것은 천적 인간이 된다고 해서 이성과 기억지식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AC.75에서는 천적 인간의 기억지식과 이성을 안개로 적셔지는 지면의 관목과 초목으로 묘사한다고 했고, AC.78에서는 이성과 기억지식이 겉 사람에게 속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91은 그것들을 다시 ‘들의 관목’과 ‘들의 초목’이라고 하면서 그 기원을 ‘천적 영적’이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차이를 ‘영적 인간에게는 신앙과 이성이 있지만 천적 인간에게는 사랑만 있고 이성과 지식은 없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83에서 천적 인간이 될 때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사랑이 주된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 신앙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하나를 이루며, 사랑이 주된 것이 됩니다. 이성과 기억지식도 마찬가지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 안에 놓입니다.

 

이 점에서 ‘천적 영적 기원’이라는 표현을 이해할 실마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문맥에서 ‘천적’인 것은 사랑이 주된 상태와 연결되고, ‘영적’인 것은 신앙과 진리에 속한 것과 연결되어 왔습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도 신앙과 진리에 속한 것들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와 사랑을 섬기는 질서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겉 사람에 속한 이성과 기억지식도 자기 자신에게서 독립적으로 생명을 갖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주된 천적 질서로부터 나오는 영적인 것들을 통하여 생명을 얻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AC.91 한 번호만으로 ‘천적 영적’이라는 표현 전체에 고정된 정의를 내려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celestial spiritual origin’이라고 분명히 말하지만, 이 표현 자체를 별도로 풀어 정의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천적 영적’이라는 말을 발견할 때마다 하나의 공식처럼 같은 뜻을 대입하기보다, 지금의 문맥에서 무엇을 설명하는지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현재 문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기원’입니다. AC.91은 평온이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적시고, 바로 그 평온에서 ‘들의 관목’과 ‘들의 초목’이 산출된다고 합니다. 즉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은 겉 사람에게 나타나지만 그 생명의 근원은 겉 사람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평화와 생명이 겉 사람에 미치고, 그로부터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이 새로운 상태로 산출됩니다.

 

그러므로 ‘천적 영적 기원에서 나오는 이성과 기억지식’이라는 표현은 천적 인간에게 이성과 기억지식이 필요 없다는 뜻과 정반대입니다. 그것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활동하지만 이제 그 기원이 달라져 있습니다. 사랑이 주된 질서 안에서 신앙과 진리에 속한 것들이 생명을 얻고, 그 생명이 겉 사람의 이성과 기억지식에까지 미칩니다. 천적 인간의 이성과 기억지식은 그렇게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생명에 의해 살아 있는 것이 됩니다. (AC.91 심화 2)

 

 

 

AC.91, 창2:5-6,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길 때 싸움이 그친다’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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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1 심화 1,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긴다’는 것은 무엇인가?

AC.91 심화1.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긴다’는 것은 무엇인가? AC.91은 영적 인간일 때에는 겉 사람이 아직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기 때문에 싸움이 있지만, 천적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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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1 심화

1.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긴다’는 것은 무엇인가?

 

AC.91은 영적 인간일 때에는 겉 사람이 아직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기 때문에 싸움이 있지만, 천적 인간이 되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므로 싸움이 그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긴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먼저 이것을 속 사람은 좋은 것이고 겉 사람은 나쁜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90-91에서 천적 인간에게도 겉 사람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오히려 ‘들의 관목’과 ‘들의 초목’, 곧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이 그 겉 사람에서 산출됩니다. 문제는 겉 사람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질서입니다.

 

영적 인간일 때에는 이 질서가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AC.91의 표현 그대로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기 때문에 싸움이 있습니다. 앞에서 AC.81은 영적 인간이 싸움 가운데 있으면서도 언제나 승리한다고 했고, AC.84-87에서는 여섯 날의 싸움 뒤에 일곱째 날의 안식이 온다고 했습니다. AC.91은 이제 그 싸움이 인간 안에서는 어떤 관계로 나타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가 아직 저항과 싸움의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이 되면 겉 사람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가 달라집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어지는 설명을 보면 이것이 어떤 모습인지 조금 더 알 수 있습니다.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평온이 겉 사람을 적시고 이슬로 촉촉하게 하며, 그 결과 겉 사람에서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이 산출됩니다. 즉 겉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독립적으로 움직이려 하지 않고,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 그것을 바깥의 삶 가운데 나타내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순종’은 겉 사람을 억압하거나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섬김’ 역시 인간의 몸과 감각, 이성, 기억지식을 버려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제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이성과 기억지식도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생명 안에서 기능하게 됩니다. 겉 사람은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질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은 천적 인간의 자유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AC.81에서는 천적 인간이 겉으로 어떤 결박에도 제어되지 않고 자유롭다고 했습니다. AC.85에서는 그가 자기 자신의 바람에 따라 행하지 않고 주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행하며, 그 주님의 뜻이 그의 바람이 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한다는 것은 억지로 굴복당하는 상태라기보다, 사람 안의 바람 자체가 새로운 질서 안에 들어가 더 이상 속 사람과 싸우지 않는 상태와 연결됩니다.

 

결국 AC.91의 ‘순종하고 섬긴다’는 표현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 안의 질서입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아직 싸움이 있지만, 천적 인간에게서는 겉 사람이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그것에 따라 활동합니다. 그때 싸움이 그치고 평온이 뒤따릅니다. 그러므로 천적 인간의 안식은 겉 사람이 사라져 얻는 안식이 아니라,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올바른 질서 안에 놓임으로써 얻는 안식입니다. (AC.91 심화 1)

 

 

 

AC.91 심화 2, ‘천적 영적 기원에서 나오는 이성과 기억지식이란 무엇인가?’

AC.91 심화2. 천적 영적 기원에서 나오는 이성과 기억지식이란 무엇인가? AC.91 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들의 관목’과 ‘들의 초목’이 구체적으로 ‘천적 영적 기원에서 나오는 이성에 속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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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1, 창2:5-6,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길 때 싸움이 그친다’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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