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94 심화

2. 생명의 숨은 왜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뜻하는가?

 

창2:7의 ‘여호와 하나님이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는 말씀은 흔히 인간의 육체에 생물학적 생명이 주어진 장면으로 읽힙니다. 그러나 AC.94에서 스베덴보리는 ‘그의 콧구멍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을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주시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왜 ‘생명의 숨’이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뜻하는 것일까요?

 

먼저 AC.94의 주제가 최초 인간의 육체가 어떻게 호흡을 시작했는지를 설명하는 데 있지 않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AC.89부터 계속 다루는 것은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창2:7의 ‘형성’, ‘생명의 숨’, ‘생령’도 이 거듭남의 과정 안에서 해석됩니다. ‘생명의 숨’을 받는 것은 이 문맥에서 사람에게 영적인 생명, 곧 신앙과 사랑의 생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앞의 내용과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AC.83에서는 천적 인간이 될 때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며 사랑이 주된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 AC.91에서는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평온이 겉 사람을 적신다고 했고, AC.92에서는 그 평온이 단지 싸움의 그침이 아니라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 안에서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이 생명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이제 AC.94는 그 생명을 더욱 직접적으로 ‘신앙과 사랑의 생명’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숨’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공기의 출입 자체가 아닙니다. 본문에서 숨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불어넣으시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이 사람 자신에게 있지 않고 주님께 있다는 사실이 이 표현 안에 들어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안에서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그것을 받습니다.

 

이것은 AC.88에서 말한 새 창조와도 이어집니다. 새 창조, 곧 거듭남은 주님 홀로의 일입니다. AC.94에서도 사람을 형성하시는 분,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는 분, 그 결과 겉 사람까지 살아 있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숨’은 사람이 스스로 획득한 종교적 능력이나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낸 선함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앙과 사랑을 서로 분리된 두 종류의 생명으로 이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흐름에서 천적 인간에게서는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며 사랑이 주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과 사랑의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사람 안에서 신앙과 사랑으로 살아 움직이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마지막의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말은 이 생명이 속 사람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AC.94는 이것을 ‘그의 겉 사람도 생명을 얻게 되었다’고 풀이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앙과 사랑의 생명이 겉 사람에까지 미치면서 사람 전체의 삶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2:7의 ‘생명의 숨’은 단순한 육체적 호흡의 시작을 넘어, 현재의 속뜻에서는 주님께서 사람에게 주시는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겉 사람에까지 미칠 때 사람은 ‘생령’이 됩니다. 거듭남은 내면에 어떤 생각 하나가 더해지는 일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마침내 사람의 겉 삶에까지 이르는 과정입니다. (AC.94 심화 2)

 

 

 

AC.94, 창2:7,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 - 겉 사람도 살아 있게 되다’ (AC.94-9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And Jehovah God formed man, dust from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and man became a l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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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4 심화 1, 왜 겉 사람은 이전에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하는가?

AC.94 심화1. 왜 겉 사람은 이전에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하는가? AC.94에는 처음 읽으면 상당히 낯설게 느껴지는 표현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지면의 흙으로 사람을 형성하셨다’는 것은 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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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4 심화

1. 왜 겉 사람은 이전에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하는가?

 

AC.94에는 처음 읽으면 상당히 낯설게 느껴지는 표현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지면의 흙으로 사람을 형성하셨다’는 것은 겉 사람을 형성하신 것이며, 그 겉 사람은 ‘이전에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겉 사람도 분명 그 사람의 일부인데, 왜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이전에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할까요?

 

먼저 이것은 그 사람이 이전까지 인간이 아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AC.94의 문법상 ‘이전에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은 바로 앞의 ‘그의 겉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근거로 창2:5의 ‘지면을 경작할 사람이 없었다’는 말씀을 듭니다. 따라서 질문의 초점은 ‘인간이 언제 인간이 되었는가?’가 아니라 ‘왜 겉 사람을 아직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가?’에 있습니다.

 

그 답을 이해하려면 AC.90-93의 흐름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영적 인간일 때의 겉 사람은 아직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으며, 그 때문에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이 되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고,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평화의 생명을 받습니다. 따라서 겉 사람이 여기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겉 사람이라는 기능이나 기관이 처음 생긴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참으로 살아 있는 인간적인 것이 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사람’이라는 말은 단순히 생물학적 인간을 지칭하는 말보다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겉 사람은 감각과 이성과 기억지식 등을 가지고 활동할 수 있지만, 그것들이 속 사람과 분리되어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면 아직 AC.94가 말하는 의미에서 살아 있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그 생명에 따라 활동할 때 비로소 겉 사람도 살아 있는 인간적 질서 안에 들어갑니다.

 

이것은 겉 사람을 멸시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주님께서 거듭나게 하시는 목적은 겉 사람을 버리는 데 있지 않고 겉 사람까지 살아 있게 하는 데 있습니다. AC.94의 마지막은 ‘그의 겉 사람도 생명을 얻게 되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감각과 이성과 기억지식과 외적인 삶 자체가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받아 참된 질서 안에서 살아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전에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표현은 인간의 존엄이나 인간됨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거듭남의 질서를 묘사하는 말입니다. 사람 안의 어떤 것이 단지 존재하고 활동한다고 해서 곧 영적으로 살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속 사람과 하나의 질서 안에서 활동할 때, 겉 사람까지 참으로 살아 있는 것이 됩니다.

 

창2:5의 ‘지면을 경작할 사람이 없었다’는 말씀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면’은 천적 인간의 겉 사람과 연결되고, 이제 그 지면을 경작할 ‘사람’이 형성됩니다. 결국 주님께서 이루시는 거듭남은 사람의 내면 어느 한 부분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 그의 겉 사람과 실제 삶까지 생명 있게 하시는 역사입니다. (AC.94 심화 1)

 

 

 

AC.94 심화 2, 생명의 숨은 왜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뜻하는가?

AC.94 심화2. 생명의 숨은 왜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뜻하는가? 창2:7의 ‘여호와 하나님이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는 말씀은 흔히 인간의 육체에 생물학적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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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4, 창2:7,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 - 겉 사람도 살아 있게 되다’ (AC.94-9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And Jehovah God formed man, dust from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and man became a l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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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3 심화

2. 왜 ‘새벽’, ‘비’, ‘들의 성장’이 천적 인간의 상태를 함께 묘사하는가?

 

AC.93에 인용된 말씀들을 보면 서로 다른 선지서에서 ‘새벽’, ‘비’, ‘들의 성장’, ‘여호와께서 심으신 가지’와 같은 표현들이 잇따라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왜 이러한 말씀들을 한데 모아 천적 인간의 상태를 설명하는 것일까요?

 

그 실마리는 앞의 AC.90-92에 있습니다. AC.90에서는 ‘비’와 ‘안개’가 싸움이 그칠 때의 ‘평화의 평온’이라고 했고, AC.91에서는 그 평온이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적시고 이슬로 촉촉하게 하는 수증기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적셔진 겉 사람에서 ‘들의 관목’과 ‘들의 초목’이 산출됩니다. AC.92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평온을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AC.93의 ‘비’는 단순히 자연계의 비를 아름다운 비유로 가져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앞에서 설명한 평화의 생명이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에게 미치는 상태와 연결됩니다. 에스겔에서 ‘복된 소낙비’가 내리자 ‘들의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그 소산을 낸다’고 하는 것도 같은 흐름입니다. 비가 내리고, 땅이 적셔지고, 그 결과 생명이 자라납니다.

 

‘들의 성장’도 마찬가지입니다. AC.90에서는 들의 관목과 초목을 일반적으로 겉 사람이 산출하는 모든 것이라 했고, AC.91에서는 구체적으로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에스겔에서 교회가 ‘들의 풀 같이’ 자란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수가 많아지거나 외적으로 번성한다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AC.93의 문맥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에 의해 사람이 자라고 새로운 것을 산출하는 상태와 연결됩니다.

 

‘새벽’은 또 다른 측면을 보여 줍니다. AC.86에서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기 시작하는 상태를 ‘안식일의 저녁’이라 하고, 천적 인간은 ‘아침’이라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왜 천적 인간이 아침인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AC.93의 호세아 인용에서는 사람이 셋째 날에 살아나고 일으켜져 주님 앞에서 살게 되는 것과 함께, 주님의 나타나심이 ‘새벽빛’과 같다고 합니다. 이어서 그분은 ‘비와 같이’ 사람에게 임하십니다.

 

이렇게 보면 ‘새벽’과 ‘비’와 ‘들의 성장’은 서로 떨어진 세 개의 상응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 과정처럼 이어집니다. 새벽은 새로운 상태가 밝아오는 것을 보여 주고, 비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평화의 생명이 사람에게 미치는 것을 보여 주며, 들의 성장은 그 생명으로 인해 겉 사람에서 실제로 새로운 것이 산출되는 것을 보여 줍니다. 새로운 날이 밝고, 비가 내리며, 들에서 생명이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새벽 = 이것, 비 = 저것, 들 = 저것’이라는 고정된 상응표로만 기억해서는 안 됩니다. AC.93에서 중요한 것은 이 표현들이 서로 어떤 관계를 이루는가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살리시고 일으키시며, 그분의 생명이 사람에게 임하고, 그 생명으로 사람이 자라 열매를 맺습니다. 자연계의 새벽과 비와 성장의 질서가 천적 인간의 형성과 놀랍도록 맞물려 있습니다.

 

마지막에 인용된 ‘여호와께서 심으신 가지’와 ‘여호와 하나님의 손으로 하신 일’은 이 모든 과정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다시 밝혀 줍니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 안에 새벽을 만들고 비를 내리며 자신을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AC.87에서는 주님 홀로 사람을 위하여 싸우신다고 했고, AC.88에서는 새 창조, 곧 거듭남은 주님 홀로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AC.93의 새벽과 비와 성장도 바로 그 주님의 역사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새벽’, ‘비’, ‘들의 성장’은 각각 따로 외워야 할 상응어라기보다 천적 인간에게 일어나는 하나의 살아 있는 과정을 함께 보여 줍니다.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의 상태가 밝아오고, 내적인 평화의 생명이 겉 사람에게 미치며, 그 생명으로부터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이 자라 열매 맺습니다. 이것이 AC.93이 여러 선지서의 말씀을 한자리에 모아 보여 주는 천적 인간의 모습입니다. (AC.93 심화 2)

 

 

 

AC.93, 창2:5-6, ‘평화의 언약과 복된 비, 셋째 날에 일으켜지는 천적 인간’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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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3 심화 1, 왜 ‘셋째 날’은 ‘일곱째 날’과 같은 것을 뜻하는가?

AC.93 심화1. 왜 ‘셋째 날’은 ‘일곱째 날’과 같은 것을 뜻하는가? AC.93에서 스베덴보리는 호6:2-3을 인용하면서 천적 인간의 이 상태가 ‘셋째 날’에 이루어지며, ‘셋째 날’은 말씀에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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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3 심화

1. 왜 ‘셋째 날’은 ‘일곱째 날’과 같은 것을 뜻하는가?

 

AC.93에서 스베덴보리는 호6:2-3을 인용하면서 천적 인간의 이 상태가 ‘셋째 날’에 이루어지며, ‘셋째 날’은 말씀에서 ‘일곱째 날’과 같은 것을 뜻한다고 합니다. 숫자로 보면 3과 7은 전혀 다른데, 어떻게 둘이 같은 것을 뜻할 수 있을까요?

 

먼저 ‘같은 것을 뜻한다’는 말을 숫자 3과 7의 모든 상응이 완전히 동일하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93에서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것은 지금까지 설명해 온 천적 인간의 상태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두 숫자가 이 특정한 상태를 나타내는 점에서 서로 만난다고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앞에서 ‘일곱째 날’은 천적 인간의 상태를 나타냈습니다. 여섯 날 동안의 싸움이 끝나고 주님께서 쉬시는 날이며,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의 안식입니다. AC.84-88에서 이 일곱째 날은 싸움의 종결, 주님의 안식, 그리고 주님 홀로 이루신 거듭남의 완성과 연결되었습니다.

 

그런데 AC.93에서 인용한 호세아에서는 ‘셋째 날’에 이와 매우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셋째 날은 죽음과 같은 상태에서 생명을 얻고 일으켜져 주님 앞에서 사는 새로운 상태와 연결됩니다. 이어서 주님의 나타나심은 ‘새벽빛’과 같고, 그분은 땅을 적시는 ‘비’와 같이 오신다고 합니다.

 

따라서 AC.93의 문맥에서 셋째 날과 일곱째 날이 만나는 지점은 새로운 생명의 상태입니다. 일곱째 날에는 싸움이 끝나고 천적 인간의 안식이 시작되며, 셋째 날에는 사람이 살아나고 일으켜져 주님 앞에서 삽니다. 둘 다 이전 상태가 끝나고 주님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생명의 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씀의 숫자를 단순한 산술적 수량으로만 읽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셋째 날’과 ‘일곱째 날’이라는 표현 안에서 사람이 거듭나는 상태를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3 = 7’이라는 새로운 상응 공식을 만들어 모든 성경 구절에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도 안 됩니다. AC.93이 직접 말하는 범위는 이 천적 인간의 상태와 관련하여 ‘셋째 날’이 ‘일곱째 날’과 같은 것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호세아의 인용은 단순히 ‘셋째 날’이라는 숫자의 증거 구절이 아닙니다. ‘살리심’, ‘일으키심’, ‘주님 앞에서 삶’, ‘새벽’, ‘비’가 한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이것들은 AC.84 이후 계속 설명해 온 천적 인간의 안식과 평화, 그리고 AC.90-92에서 설명한 비와 평화의 생명과도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AC.93에서 ‘셋째 날’과 ‘일곱째 날’이 같은 것을 뜻한다는 말은 두 숫자의 모든 의미가 동일하다는 선언이라기보다, 말씀 안에서 둘 다 주님께서 사람을 새로운 생명의 상태로 이끄시는 완성과 일으키심을 나타낼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더 세밀한 차이는 이후 스베덴보리가 각 숫자를 설명하는 곳에서 다시 살펴보아야 하지만, AC.93을 읽는 독자는 적어도 여기까지는 충분히 이해하고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AC.93 심화 1)

 

 

 

AC.93 심화 2, 왜 ‘새벽’, ‘비’, ‘들의 성장’이 천적 인간의 상태를 함께 묘사하는가?

AC.93 심화2. 왜 ‘새벽’, ‘비’, ‘들의 성장’이 천적 인간의 상태를 함께 묘사하는가? AC.93에 인용된 말씀들을 보면 서로 다른 선지서에서 ‘새벽’, ‘비’, ‘들의 성장’, ‘여호와께서 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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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3, 창2:5-6, ‘평화의 언약과 복된 비, 셋째 날에 일으켜지는 천적 인간’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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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2 심화

2.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이 ‘평화의 즐거움’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AC.92의 마지막에는 매우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이 태어나는데, 그것들은 ‘평화의 즐거움에서 생명을 얻는다’고 합니다. 진리와 선이 이미 진리와 선이라면, 다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앞에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어떻게 구별했는지를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AC.81에서는 영적 인간이 영적이고 천적인 진리와 선을 인정하지만 ‘사랑에서라기보다는 신앙의 원리에서’ 그렇게 한다고 했습니다. 반면 천적 인간은 진리와 선을 믿고 퍼셉션하며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외에는 다른 신앙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AC.83에서도 천적 인간이 될 때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사랑이 주된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신앙의 진리들이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진리가 이전에는 거짓이었다가 이제 참이 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는 이미 진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 안에서 어떤 근원으로부터 살아 움직이는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어 있지 않고,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 됩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단순히 알고 인정하는 내용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살아 있는 진리가 됩니다.

 

‘사랑의 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선과 진리가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 그것들에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AC.87-88에서 싸움을 수행하고 사람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분은 주님 홀로라고 했습니다. AC.91에서는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평온이 겉 사람을 적신다고 했고, AC.92에서는 그것을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선과 진리가 생명을 얻는 근원 역시 사람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평화에서’가 아니라 ‘평화의 즐거움에서’ 생명을 얻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천적 인간의 순종이 억지 복종이 아니라는 점과도 연결됩니다. AC.85에서 천적 인간은 자기 자신의 바람을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행하며, 그 주님의 뜻이 그의 ‘바람’이 된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질서에 따르는 것이 외적인 강제가 아니라 그의 사랑과 바람이 되었기 때문에 그 안에는 평화와 즐거움이 있습니다.

 

이 점에서 ‘평화의 즐거움’은 단순한 기분 좋은 감정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싸움이 그치고,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며, 사랑과 신앙이 하나를 이루는 질서에서 오는 즐거움입니다. 그 질서 안에서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이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AC.92는 ‘진리를 알고 있는 것’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살아 있는 것’ 사이의 차이를 생각하게 합니다. 진리를 기억하고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여기서 말하는 천적 생명의 전부가 아닙니다. 사랑과 신앙이 하나를 이루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인 평화의 생명이 사람의 겉 사람에까지 미칠 때 진리와 선은 그 사람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평화의 즐거움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표현이 가리키는 방향입니다. (AC.92 심화 2)

 

 

 

AC.92, 창2:5-6, '평화는 싸움의 그침만이 아니라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다'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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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2 심화 1, 평화가 어떻게 ‘생명’일 수 있는가?

AC.92 심화1. 평화가 어떻게 ‘생명’일 수 있는가? AC.92에서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의 평화에 관하여 매우 독특한 말을 합니다. 그것은 단지 싸움이 그친 상태가 아니라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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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2 심화

1. 평화가 어떻게 ‘생명’일 수 있는가?

 

AC.92에서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의 평화에 관하여 매우 독특한 말을 합니다. 그것은 단지 싸움이 그친 상태가 아니라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평화를 갈등이나 불안이 없는 상태로 생각하는데, 어떻게 평화 자체가 ‘생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먼저 AC.92가 말하는 평화는 단순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정적 상태가 아닙니다. 그 직전까지 사람 안에는 싸움이 있었습니다. AC.91에 따르면 영적 인간일 때에는 겉 사람이 아직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기 때문에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이 되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고, 그 결과 싸움이 그치며 평온이 뒤따릅니다. 따라서 평화는 단순히 싸움 하나가 없어졌다는 데서 끝나지 않고, 사람 안의 질서가 달라진 결과로 찾아오는 상태입니다.

 

AC.92가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싸움이 그쳤기 때문에 생명이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전에는 싸움과 저항 때문에 충분히 나타나지 못하던 것이 이제 겉 사람에게까지 미치기 시작합니다. AC.91에서는 이것을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적시고 이슬로 촉촉하게 하는 수증기에 비유했습니다. 평화는 텅 빈 고요가 아니라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에게 생명이 미치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천적 인간의 안식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동적인 상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84부터 계속 나온 ‘안식’도 주님께서 피곤하여 일을 중단하신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주님 홀로 사람을 위하여 싸우셨고 그 일이 완성되어 싸움이 그쳤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완성된 질서 안에서 이제 평화로부터 생명이 흘러나옵니다.

 

이것은 자연의 모습으로 생각하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폭풍이 그쳤다고 해서 자연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요한 비와 이슬이 땅을 적실 때 식물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AC.90-91에서 ‘비’와 ‘안개’가 평화의 평온을 뜻하고, 그것에 의해 ‘들의 관목’과 ‘들의 초목’이 산출된다고 한 것도 같은 흐름입니다. 평화는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 공백이 아니라 생명이 자라날 수 있는 상태입니다.

 

다만 여기서 ‘평화가 곧 생명이다’라는 하나의 고정된 상응 공식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AC.92의 표현은 더 정확합니다. 그것은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입니다. 중요한 것은 평화가 어디에서 오며 무엇을 하는가입니다. 그것은 사람 자신이 만들어 내는 편안함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나와 겉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거기에서 선과 진리가 살아나게 하는 생명입니다.

 

따라서 AC.92에서 말하는 평화는 싸움의 부재보다 훨씬 적극적인 상태입니다. 탐욕과 거짓으로 말미암은 불안이 그친 뒤,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겉 사람에게 자유롭게 미치기 시작합니다. 그 생명으로 인해 사람 안의 선과 진리가 살아납니다. 이런 의미에서 천적 인간의 평화는 단순한 ‘쉼’이 아니라 생명으로 충만한 안식입니다. (AC.92 심화 1)

 

 

 

AC.92 심화 2,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이 ‘평화의 즐거움’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AC.92 심화2.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이 ‘평화의 즐거움’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AC.92의 마지막에는 매우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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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2, 창2:5-6, '평화는 싸움의 그침만이 아니라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다'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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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1 심화

2. 천적 영적 기원에서 나오는 이성과 기억지식이란 무엇인가?

 

AC.91 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들의 관목’과 ‘들의 초목’이 구체적으로 ‘천적 영적 기원에서 나오는 이성에 속한 것들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이라고 합니다. 천적 인간을 다루고 있는데 왜 단순히 ‘천적 기원’이라고 하지 않고 ‘천적 영적 기원’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먼저 여기서 확실한 것은 천적 인간이 된다고 해서 이성과 기억지식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AC.75에서는 천적 인간의 기억지식과 이성을 안개로 적셔지는 지면의 관목과 초목으로 묘사한다고 했고, AC.78에서는 이성과 기억지식이 겉 사람에게 속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91은 그것들을 다시 ‘들의 관목’과 ‘들의 초목’이라고 하면서 그 기원을 ‘천적 영적’이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차이를 ‘영적 인간에게는 신앙과 이성이 있지만 천적 인간에게는 사랑만 있고 이성과 지식은 없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83에서 천적 인간이 될 때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사랑이 주된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 신앙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하나를 이루며, 사랑이 주된 것이 됩니다. 이성과 기억지식도 마찬가지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 안에 놓입니다.

 

이 점에서 ‘천적 영적 기원’이라는 표현을 이해할 실마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문맥에서 ‘천적’인 것은 사랑이 주된 상태와 연결되고, ‘영적’인 것은 신앙과 진리에 속한 것과 연결되어 왔습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도 신앙과 진리에 속한 것들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와 사랑을 섬기는 질서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겉 사람에 속한 이성과 기억지식도 자기 자신에게서 독립적으로 생명을 갖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주된 천적 질서로부터 나오는 영적인 것들을 통하여 생명을 얻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AC.91 한 번호만으로 ‘천적 영적’이라는 표현 전체에 고정된 정의를 내려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celestial spiritual origin’이라고 분명히 말하지만, 이 표현 자체를 별도로 풀어 정의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천적 영적’이라는 말을 발견할 때마다 하나의 공식처럼 같은 뜻을 대입하기보다, 지금의 문맥에서 무엇을 설명하는지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현재 문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기원’입니다. AC.91은 평온이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적시고, 바로 그 평온에서 ‘들의 관목’과 ‘들의 초목’이 산출된다고 합니다. 즉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은 겉 사람에게 나타나지만 그 생명의 근원은 겉 사람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평화와 생명이 겉 사람에 미치고, 그로부터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이 새로운 상태로 산출됩니다.

 

그러므로 ‘천적 영적 기원에서 나오는 이성과 기억지식’이라는 표현은 천적 인간에게 이성과 기억지식이 필요 없다는 뜻과 정반대입니다. 그것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활동하지만 이제 그 기원이 달라져 있습니다. 사랑이 주된 질서 안에서 신앙과 진리에 속한 것들이 생명을 얻고, 그 생명이 겉 사람의 이성과 기억지식에까지 미칩니다. 천적 인간의 이성과 기억지식은 그렇게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생명에 의해 살아 있는 것이 됩니다. (AC.91 심화 2)

 

 

 

AC.91, 창2:5-6,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길 때 싸움이 그친다’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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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1 심화 1,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긴다’는 것은 무엇인가?

AC.91 심화1.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긴다’는 것은 무엇인가? AC.91은 영적 인간일 때에는 겉 사람이 아직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기 때문에 싸움이 있지만, 천적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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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1 심화

1.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긴다’는 것은 무엇인가?

 

AC.91은 영적 인간일 때에는 겉 사람이 아직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기 때문에 싸움이 있지만, 천적 인간이 되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므로 싸움이 그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긴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먼저 이것을 속 사람은 좋은 것이고 겉 사람은 나쁜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90-91에서 천적 인간에게도 겉 사람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오히려 ‘들의 관목’과 ‘들의 초목’, 곧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이 그 겉 사람에서 산출됩니다. 문제는 겉 사람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질서입니다.

 

영적 인간일 때에는 이 질서가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AC.91의 표현 그대로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기 때문에 싸움이 있습니다. 앞에서 AC.81은 영적 인간이 싸움 가운데 있으면서도 언제나 승리한다고 했고, AC.84-87에서는 여섯 날의 싸움 뒤에 일곱째 날의 안식이 온다고 했습니다. AC.91은 이제 그 싸움이 인간 안에서는 어떤 관계로 나타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가 아직 저항과 싸움의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이 되면 겉 사람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가 달라집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어지는 설명을 보면 이것이 어떤 모습인지 조금 더 알 수 있습니다.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평온이 겉 사람을 적시고 이슬로 촉촉하게 하며, 그 결과 겉 사람에서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이 산출됩니다. 즉 겉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독립적으로 움직이려 하지 않고,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 그것을 바깥의 삶 가운데 나타내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순종’은 겉 사람을 억압하거나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섬김’ 역시 인간의 몸과 감각, 이성, 기억지식을 버려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제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이성과 기억지식도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생명 안에서 기능하게 됩니다. 겉 사람은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질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은 천적 인간의 자유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AC.81에서는 천적 인간이 겉으로 어떤 결박에도 제어되지 않고 자유롭다고 했습니다. AC.85에서는 그가 자기 자신의 바람에 따라 행하지 않고 주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행하며, 그 주님의 뜻이 그의 바람이 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한다는 것은 억지로 굴복당하는 상태라기보다, 사람 안의 바람 자체가 새로운 질서 안에 들어가 더 이상 속 사람과 싸우지 않는 상태와 연결됩니다.

 

결국 AC.91의 ‘순종하고 섬긴다’는 표현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 안의 질서입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아직 싸움이 있지만, 천적 인간에게서는 겉 사람이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그것에 따라 활동합니다. 그때 싸움이 그치고 평온이 뒤따릅니다. 그러므로 천적 인간의 안식은 겉 사람이 사라져 얻는 안식이 아니라,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올바른 질서 안에 놓임으로써 얻는 안식입니다. (AC.91 심화 1)

 

 

 

AC.91 심화 2, ‘천적 영적 기원에서 나오는 이성과 기억지식이란 무엇인가?’

AC.91 심화2. 천적 영적 기원에서 나오는 이성과 기억지식이란 무엇인가? AC.91 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들의 관목’과 ‘들의 초목’이 구체적으로 ‘천적 영적 기원에서 나오는 이성에 속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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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1, 창2:5-6,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길 때 싸움이 그친다’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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