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3:8, AC.218-225

8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Verse 8,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 in the air of the day; and the man and his wife hid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God in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 8절 속뜻

 

이들 태고교회 네 번째 후손은 선조들의 그 찬란했던 황금시대의 영광과 퍼셉션은 거의 다 사라지고, 이제 겨우 그 흔적만 남아 자신들이 악 가운데 있음을, 즉 주님의 선과 진리가 다 떨어져 나가 벌거벗은 상태임을 지각, 두려워하며 부끄러워 숨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218.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내면의 소리(an internal dictate, an inner dictate, the inner call)입니다. 그들로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건데요, 이 소리는 그들이 전에 소유했던 퍼셉션(perception) 가운데 아직 남아 있던 겁니다. ‘그날 바람이 불 때(the air or breath of the day)는 그 교회가 아직 약간의 퍼셉션을 소유하던 기간을 가리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지라(to hide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God)는 그 소리를 두려워하는 것이지요, 마치 악을 의식하는 사람들한테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을 숨긴 곳에 있는 ‘동산 나무 사이에(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자연적 선(natural good)을 의미합니다. 여기 가장 안쪽(inmost)사이에(the midst)라 하며, ‘나무(the tree)는 앞서 살핀 대로 퍼셉션을 가리킵니다만, 그러나 이제는 남아 있는 퍼셉션이 거의 없어서 마치 유일하게 남은 것인 양 나무를 단수로 말하고 있습니다. By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 is signified an internal dictate which caused them to feel afraid, this dictate being the residue of the perception which they had possessed; by the “air” or “breath” of the “day” is denoted a period when the church still possessed some residue of perception; to “hide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God” is to fear the dictate, as is wont to be the case with those who are conscious of evil; by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in which they hid themselves, is signified natural good; that which is inmost is called the “midst”; the “tree” denotes perception as before; but because there was little perception remaining, the tree is spoken of in the singular number, as if there were only one remaining.

 

 

219.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는 그들이 두려워한 내면의 소리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말씀에서 소리(voice)가 상징하는 걸 보면 분명한데요, 말씀에서 여호와의 소리(the voice of Jehovah)는 말씀 그 자체, 신앙의 교리, 양심이나 내적으로 주의, 경고하기, 그리고 또 그 결과 이어지는 모든 책망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곤 합니다. 그래서 천둥소리를 여호와의 소리라고 하는데요, 요한계시록입니다. That by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 is meant an internal dictate of which they were afrai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voice” in the Word, where the “voice of Jehovah” is used to designate the Word itself, the doctrine of faith, conscience or a taking notice inwardly, and also every reproof thence resulting; whence it is that thunders are called the “voices of Jehovah,” as in John:

 

사자가 부르짖는 것 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그가 외칠 때에 일곱 우레가 그 소리를 내어 말하더라 (계10:3) The angel cried with a loud voice, as a lion roareth, and when he had cried seven thunders uttered their voices, (Rev. 10:3)

 

그때 외적, 내적 둘 다인 어떤 소리가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계속해서 denoting that there was then a voice both external and internal. Again: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의 나팔을 불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하나님의 그 비밀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계10:7) In the days of the voice of the seventh angel the mystery of God shall be consummated. (Rev. 10:7)

 

시편입니다. In David:

 

32땅의 왕국들아 하나님께 노래하고 주께 찬송할지어다 33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내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시68:32-33) Sing unto God, sing praises unto the Lord, who rideth upon the heavens of heavens which were of old; lo, he shall send out his voice, a voice of strength. (Ps. 68:32–33)

 

옛적 하늘들의 하늘(The heavens of heavens which were of old)은 태고교회의 지혜를 말하며, ‘소리는 계시, 그리고 또한 내면의 소리를 뜻합니다. 계속해서 The “heavens of heavens which were of old,” denote the wisdom of the most ancient church; “voice,” revelation, and also an internal dictate. Again:

 

3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4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5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 7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 8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시키시도다 9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그의 성전에서 그의 모든 것들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 (시29:3-5, 7-9) The voice of Jehovah is upon the waters; the voice of Jehovah is in power; the voice of Jehovah is in glory; the voice of Jehovah breaketh the cedars; the voice of Jehovah divideth the flames of fire; the voice of Jehovah maketh the wilderness to shake; the voice of Jehovah maketh the hinds to calve and uncovereth the forests. (Ps. 29:3–5, 7–9)

 

이사야입니다. And in Isaiah:

 

30여호와께서 그의 장엄한 목소리를 듣게 하시며 혁혁한 진노로 그의 팔의 치심을 보이시되 맹렬한 화염과 폭풍과 폭우와 우박으로 하시리니 31여호와의 목소리에 앗수르가 낙담할 것이며 주께서는 막대기로 치실 것이라 (사30:30-31) Jehovah shall cause the excellency of his voice to be heard, for through the voice of Jehovah shall Asshur be beaten down. (Isa. 30:30–31)

 

 

220. 거니시는 소리(the voice going to itself)는 남아 있는 퍼셉션이 거의 없음을, 말하자면 마치 그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상태를 의미하는데요, 다음 절에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Jehovah called to the man)를 보면, 거기서도 분명한 것처럼 말입니다. By the “voice going to itself,” is meant that there was but little perception remaining, and that alone as it were by itself and unheard, as is manifest also from the following verse where it is said, “Jehovah called to the man.”  

 

※ ‘아담을 부르시며’의 ‘부르시며’는 ‘shouted’에 가까운 ‘called’입니다. 사람이 자기 본성에 깊이 잠긴 상태를 ‘깊이 잠들게 하시매’라 표현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죄를 지었으나 양심의 소리가 들리는 사람한테는 이런 소리가 천둥 번개의 소리처럼 들릴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에서 So in Isaiah:

 

 

3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6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사40:3, 6) The voice of one crying in the wilderness; the voice said, Cry. (Isa. 40:3, 6)

 

광야(The wilderness)는 신앙이라는 게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교회를, ‘외치는 자의 소리(the voice of one crying)는 주님의 오심에 대한 수태고지(受胎告知, the annunciation of the Lord’s advent), 곧 일반적으로는 주님의 오심에 대한 모든 소식입니다. 거듭난 사람들과 그 안에 내면의 소리가 있는 사람들과 함께 말이지요. The “wilderness” is a church where there is no faith; the “voice of one crying” is the annunciation of the Lord’s advent, and in general every announcement of his coming, as with the regenerate, with whom there is an internal dictate.

 

 

221. That by the “air” or “breath” “of the day” is signified a period when the church had still somewhat of perception remaining,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day” and of “night.” The most ancient people compared the states of the church to the times of the day and of the night, to the times of the day when the church was still in light, wherefore this state is compared to the breath or air “of the day,” because there was still some remnant of perception by which they knew that they were fallen. The Lord also calls the state of faith “day,” and that of no faith “night”; as in John: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요9:4) I must work the works of him that sent me, while it is day; the night cometh when no man can work. (John 9:4)

 

The states of the regeneration of man were for the same reason called “days” in chapter 1.

 

 

222. That to “hide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means to be afraid of the dictate, as is wont to be the case with those who are conscious of evil, is evident from their reply (verse 10): “I heard thy voice in the garden, and I was afraid because I was naked.” The “face of Jehovah,” or of the Lord, is mercy, peace, and every good, as is clearly evident from the benediction:

 

25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민6:25-26) Jehovah make his faces to shine upon thee, and be merciful unto thee; Jehovah lift up his faces upon thee, and give thee peace. (Num. 6:25–26)

 

And in David: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시67:1) God be merciful unto us, and bless us, and cause his faces to shine upon us. (Ps. 67:1)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시4:6) There be many that say, Who will show us any good? Jehovah, lift thou up the light of thy faces upon us. (Ps. 4:6)

 

The mercy of the Lord is therefore called the “angel of faces,” in Isaiah:

 

7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의 찬송을 말하며 그의 사랑을 따라, 그의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8그가 말씀하시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 9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사63:7-9) I will make mention of the mercies of Jehovah; he hath requited them according to his mercies, and according to the multitude of his mercies; and he became their savior. In all their affliction he was afflicted, and the angel of his faces saved them; in his love and in his pity he redeemed them. (Isa. 63:7–9)

 

 

223. As the “face of the Lord” is mercy, peace, and every good, it is evident that he regards all from mercy, and never averts his countenance from any; but that it is man, when in evil, who turns away his face, as is said by the Lord in Isaiah: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사59:2) Your iniquities have separated between you and your God, and your sins have hid his face from you; (Isa. 59:2)

 

and here, “they hid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because they were naked.

 

 

224. Mercy, peace, and every good, or the “faces of Jehovah,” are the cause of the dictate with those who have perception, and also, although in a different manner, with those who have conscience, and they always operate mercifully, but are received according to the state in which the man is. The state of this man, that is, of this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one of natural good; and they who are in natural good are of such a character that they hide themselves through fear and shame because they are naked; while such as are destitute of natural good do not hide themselves, because they are insusceptible of shame; concerning whom, in Jeremiah 8:12–13. (See above, n. 217.)

 

12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렘8:12-13)

 

 

225. That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signifies natural good, in which there is some perception which is called a “tree,” is also evident from the “garden” in which the celestial man dwelt; for everything good and true is called a “garden,” with a difference according to the man who cultivates it. Good is not good unless its inmost is celestial, from which, or through which, from the Lord, comes perception. This inmost is here called the “midst,” as also elsewhere in the W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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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3:7, AC.211-217

7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Verse 7,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les.

 

※ 7절 속뜻

 

그들은 내면의 소리를 통해 자신들은 더 이상 선조들의 이노센스 대신 악 가운데 있음을, 천적 영적 선은 다 사라지고 대신 자연적 선만 남았음을 깨닫고 부끄러워하며 변명했습니다.

 

 

211. 그들의 눈이 밝아져(eyes being opened)는 그들이 어떤 내적 음성(an interior dictate)을 듣고, 자기들이 벗은(naked) 줄을 알게 되었다, , 더 이상 전처럼 자기들이 이노센스(innocence)가 아닌, 악 가운데 있음을 알게 되었고, 시인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Their “eyes being opened” signifies their knowing and acknowledging, from an interior dictate, that they were “naked,” that is, no longer in innocence, as before, but in evil.

 

 

212. 눈이 밝아져(the eyes opened)가 무슨 내적 음성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 나오는 유사한 표현들, 가령, 발람(Balaam)이 자신을 가리켜 말하는 구절을 보면 분명한데요, 그 구절에서 발람은 전능자의 환상을 보고 나서는 자신을 가리켜 눈을 감았던 자(the man whose eyes are opened)(24:3)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That by having the “eyes opened” is signified an interior dictate is evident from similar expressions in the Word, as from what Balaam says of himself, who in consequence of having visions calls himself the “man whose eyes are opened.” (Num. 24:3)

 

이 부분, 한글 개역개정에서는 감았던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위 영역을 보면 분명 ’, 혹은 밝아진입니다. ‘전엔 감았으나 지금은 뜬’, 차라리 이렇게 번역했더라면...

 

그가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민24:3)

 

그리고 요나단인데요, 그는 벌집의 꿀을 조금 맛본 후, 지금 그들이 처한 상황이 악하다는 내적 음성을 듣습니다(had a dictate from within).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지요.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his eyes saw), , 자신의 내적 시야가 열려 전엔 몰랐던 것을 지금은 보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And from Jonathan, who when he tasted of the honeycomb and had a dictate from within that it was evil, said that his “eyes saw,” that is, were enlightened, so that he saw what he knew not. (1 Sam. 14:29)

 

요나단이 이르되 내 아버지께서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 (삼상14:29)

 

더더욱 말씀에 보면, ‘(the eyes)은 종종 이해(the understanding)와 거기서 나오는 내적 음성(an interior dictate therefrom)을 가리키는 데 사용됩니다. 시편입니다. Moreover in the Word, the “eyes” are often used to denote the understanding, and thus an interior dictate therefrom, as in David: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시13:3) Lighten mine eyes, lest I sleep the sleep of death, (Ps. 13:3)

 

여기 (eyes)은 이해를 가리킵니다. 에스겔에서도 보면, 의도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자들,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는(have eyes to see, and see not)(12:2) 족속들에 대해 말씀하시는 부분입니다. where “eyes” denote the understanding. So in Ezekiel, speaking of those who are not willing to understand, who “have eyes to see, and see not.” (Ezek. 12:2)

 

인자야 네가 반역하는 족속 중에 거주하는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 (겔12:2)

 

이사야입니다. In Isaiah: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사6:10) Shut their eyes, lest they see with their eyes, (Isa. 6:10)

 

위 말씀은 그들로 볼 수 없게 해야지, 안 그러면 그들이 이해하게 될 거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것입니다. denotes that they should be made blind, lest they should understand. So Moses said to the people,  

 

※ 우리 생각엔 ‘어? 사람들이 깨닫는 게 더 좋은 거 아닌가? 왜 그걸 막으시는 거지?’ 하지만,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게,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은 차라리 깨닫지 못하는 게 더 그들에겐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민족적 특성상, 그들은 오히려 깨닫게 되면 나중에 반드시 돌이켜 배신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차라리 몰랐더라면 그냥 그 정도에 머무를 텐데, 알고 나서 다시 예전 상태로 돌아가게 되면, 그때는 그의 사후 상태가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됩니다. 이런 것이 바로 신성모독이며, 이 신성모독의 죄가 정말 무서운 이유는, 이 신성모독의 삶을 산 사람은 그 영이 오염되기 때문입니다. 이 영이 오염된다는 건 영의 상태가 계속 이랬다저랬다 영원히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신29:4) Jehovah hath not given you a heart to know, and eyes to see, and ears to hear, (Deut. 29:4)

 

여기서 마음(heart)은 의지(the will), ‘(eyes)은 이해(the understanding)를 가리킵니다. 이사야에서는 주님을 가리켜,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he should open the blind eyes)(42:7)라 하십니다. where “heart” denotes the will, and “eyes” denote the understanding. In Isaiah it is said of the Lord, that “he should open the blind eyes.” (Isa. 42:7)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사42:7)

 

계속해서 이사야에서,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The eyes of the blind shall see out of thick darkness and out of darkness)(29:18)라 하십니다. And in the same prophet: “The eyes of the blind shall see out of thick darkness and out of darkness.” (Isa. 29:18)

 

그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 (사29:18)

 

 

213.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knowing that they were naked)는 자기들이 더 이상 전처럼 이노센스(innocence)가 아닌, 악 가운데 있음을 알게 되었고, 시인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데요, 이것은 앞장 마지막 구절,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2:25)를 보면 분명합니다. 이걸 그들이 벌거벗었으므로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not to be ashamed because they were naked)로 읽고는, 이노센스(to be innocent)를 의미하는 걸로 보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그들의 부끄러워함(being ashamed)의 의미는 오히려 정반대인데요, 본 절의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고는 자신들을 숨겼다(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hid themselves)는 데를 보면 말입니다. 이는 이노센스가 전혀 없는 곳에서는, 벌거벗음(nakedness)이라는 것은 일종의 스캔들이요, 창피이기 때문입니다. 저절로 악이 떠오르기(attended with a consciousness of thinking evil) 때문이지요. By “knowing that they were naked” is signified their knowing and acknowledging themselves to be no longer in innocence as before, but in evil, as is evident from the last verse of the preceding chapter, where it is said,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and where it may be seen that “not to be ashamed because they were naked” signifies to be innocent. The contrary is signified by their “being ashamed,” as in this verse, where it is said that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hid themselves”; for where there is no innocence, nakedness is a scandal and disgrace, because it is attended with a consciousness of thinking evil.

 

※ 이 ‘벌거벗음(nakedness)이라는 것은 이노센스의 유무에 따라 완전 정반대의 의미를 갖는다는 말입니다.

 

이런 이유로, 말씀에서 벌거벗음(nakedness)은 어떤 수치스럽고 악한 걸로 사용되며, 전도된(顚倒, perverted) 교회를 서술할 때 사용됩니다. 에스겔입니다. For this reason “nakedness” is used in the Word as a type of disgrace and evil, and is predicated of a perverted church, as in Ezekiel:

 

네가 어렸을 때에 벌거벗은 몸이었으며 피투성이가 되어서 발짓하던 것을 (겔16:22) Thou wast naked and bare, and trampled on in thy blood. (Ezek. 16:22)

 

그들이 너를 벌거벗은 몸으로 두어서 네 벗은 몸을 드러낼 것이라 (겔23:29) They shall leave her naked and bare, and the nakedness shall be uncovered. (Ezek. 23:29)

 

계시록에서는, In John: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계3:18) I counsel thee to buy of me white raiment that thou mayest be clothed, and that the shame of thy nakedness do not appear. (Rev. 3:18)

 

그리고 마지막 날에 관하여는, And concerning the last day:

 

보라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계16:15) Blessed is he who watcheth, and keepeth his garments, lest he walk naked and they see his shame. (Rev. 16:15)

 

신명기에서는, In Deuteronomy:

 

사람이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줄 것이요 (신24:1) If a man hath found some nakedness in his wife, let him write her a bill of divorcement. (Deut. 24:1)

 

같은 이유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제단에 나아가 봉사할 때, 베로 속바지를 만들어 입어 하체를 가리게 하라 안 그러면 죄를 짊어진 채 죽으리라(to cover the flesh of their nakedness, lest they should bear iniquity, and die) 하시는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For the same reason Aaron and his sons were commanded to have linen breeches when they came to the altar, and to minister, to “cover the flesh of their nakedness, lest they should bear iniquity, and die.” (Exod. 28:42–43)

 

42또 그들을 위하여 베로 속바지를 만들어 허리에서부터 두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여 하체를 가리게 하라 43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나 제단에 가까이 하여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에 그것들을 입어야 죄를 짊어진 채 죽지 아니하리니 그와 그의 후손이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출28:42-43)

 

 

214. 그들은 자신의 본성(their own)만 남은 상태이기 때문에, ‘벌거벗겨졌다(naked)고 합니다. 본성, 즉 자기 자신(themselves)만 남은 사람들은 지성과 지혜, 혹은 신앙의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상태이며, 그래서 결국 진리와 선에 대하여 벌거벗겨진(naked) 상태이고, 그 결과는 악 가운데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They are called “naked” because left to their own; for they who are left to their own, that is, to themselves, have no longer anything of intelligence and wisdom, or of faith, and consequently are “naked” as to truth and good, and are therefore in evil.

 

, 우리는 주님의 진리와 선이라는 옷을 입어야 천국 갈 수 있는데, 반대로 이 옷이 다 벗겨져서 악과 거짓의 알몸 상태가 되면 천국 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일은 지금도 우리가 선악과를 따먹으면일어나는 일입니다.

 

 

215. 인간의 본성(man’s own)은 악과 거짓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nothing but evil and falsity) 저는 그동안 다음과 같은 사실로 분명히 알게 되었는데요, 그것은 영들이 스스로(from themselves) 하는 말, 곧 주님 말씀이 아닌, 영들 본인 생각에서 나오는 말은 그게 무슨 말이든 언제나 모두 악하고 거짓이더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그런 식으로 말하고 있음을 제가 알게 될 때마다, 저는 듣는 즉시 그 말은 거짓이며, 심지어 그들이 자기들이 하는 말이 진리임을 자기들은 정말 철저히 확신하고 있으니 전혀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That man’s own is nothing but evil and falsity has been made evident to me from the fact that whatever spirits have at any time said from themselves has been so evil and false that whenever it was made known to me that they spoke from themselves I at once knew that it was false, even though while speaking they were themselves so thoroughly persuaded of the truth of what they said as to have no doubt about it.

 

※  영계는 실상을 확인할 수 있는 곳입니다. 이 세상은 그래도 몸으로 살짝 가릴 수 있어 겉과 속이 달라도 시치미 떼고 살아갈 수 있지만 영계는 몸을 벗고 가는 데라 선이든 악이든 어느 한쪽으로 겉과 속이 같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위와 같은 영계 체험과 증언을 통해 사람의 자아, 인간 본성이라는 게 실제로는 어떤 건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즉 자기 생각으로 말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같습니다. 같은 말인데요, 어떤 사람들이 영적, 천적인 일들이나 신앙의 일들에 관하여 이성적 접근을 시작할(have begun to reason) 때마다, 저는 그들은 의심, 심지어 부인(denied)까지 하고 있음을 지각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에 관한 걸 이성으로 접근한다는 건(to reason concerning faith) 의심하고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것이 자아, 곧 그들의 본성으로 말미암는 것이어서, 그들은 그저 거짓들 가운데로 가라앉으며, 그 결과, 짙은 어둠, 곧 거짓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습니다. 그들이 이 심연 가운데 있을 때는 아주 작은 것 하나로도 수천의 진리들을 압도할 수가 있는 것이, 마치 눈동자 표면에 내려앉은 먼지 한 조각만으로도 온 우주와 그 안에 담긴 모든것에 관해 눈을 감게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런 사람에 관해 주님은 이사야에서 말씀하시기를, The case is the same with men who speak from themselves. And in the same way, whenever any persons have begun to reason concerning the things of spiritual and celestial life, or those of faith, I could perceive that they doubted, and even denied, for to reason concerning faith is to doubt and deny. And as it is all from self or their own, they sink into mere falsities, consequently into an abyss of thick darkness, that is, of falsities, and when they are in this abyss the smallest objection prevails over a thousand truths, just as a minute particle of dust in contact with the pupil of the eye shuts out the universe and everything it contains. Of such persons the Lord says in Isaiah: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사5:21) Woe unto those who are wise in their own eyes, and intelligent before their own faces. (Isa. 5:21)

 

10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 11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원을 알지 못할 것이며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력이 없을 것이며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알지 못할 것이니라 (사47:10-11) Thy wisdom and thy knowledge, it hath turned thee away, and thou hast said in thine heart, I, and none else besides me; and evil shall come upon thee, thou shalt not know from whence it riseth, and mischief shall fall upon thee, which thou shalt not be able to expiate, and vastation shall come upon thee suddenly, of which thou art not aware. (Isa. 47:10–11)

 

예레미야에서는, In Jeremiah:

 

사람마다 어리석고 무식하도다 금장색마다 자기가 만든 신상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렘51:17) Every man is made stupid by knowledge [scientia], every founder is confounded by the graven image, for his molten image is falsehood, neither is there breath in them. (Jer. 51:17)

 

만든 신상(A graven image)은 거짓이요, ‘부어 만든 우상(a molten image)은 악, 곧 인간의 본성 속 악입니다. A “graven image” is the falsity, and a “molten image” the evil, of man’s own.

 

 

216.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les.

 

잎을 엮어(To sew leaves together)는 자신들을 변명하는 것(to excuse themselves), ‘무화과나무(the fig tree)는 자연적 선(natural good), ‘치마로 삼았더라(to make themselves girdles)는 부끄러워했다는 것(to be affected with shame)입니다. 태고인들은 이렇게 말했고, 그들은 그 교회의 후손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이 묘사는 그들이 전에 즐거워하던 이노센스(the innocence) 대신 이제는 자연적 선만, 곧 그 안에 그들의 악이 들어 있는 그런 선만 소유하게 되었고, 그리고 그런 자연적 선 안에 있게 된 것을 그들은 부끄러워했다는 그런 묘사입니다. To “sew leaves together” is to excuse themselves; the “fig tree” is natural good; and to “make themselves girdles” is to be affected with shame. Thus spoke the most ancient people, and thus they described this posterity of the church, signifying that instead of the innocence they had formerly enjoyed, they possessed only natural good, by which their evil was concealed; and being in natural good, they were affected with shame.

 

 

217. 말씀에서 포도나무(the vine)는 영적 선(spiritual good), ‘무화과나무(the fig tree)는 자연적 선(natural good)을 상징하기 위한 것임을 오늘날엔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말씀의 속뜻(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이 사라졌기 때문인데요, 그럼에도 이 표현들이 나오는 데들을 보면, 여전히 이런 의미를 뜻하거나 포함하고 있지요. ‘포도원(a vineyard)무화과나무와 관련, 주께서 비유들을 통해 하신 말씀들처럼 말입니다. 마태복음입니다. That the “vine” is used in the Word to signify spiritual good, and the “fig tree” natural good, is at this day utterly unknown, because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has been lost; nevertheless, wherever these expressions occur, they signify or involve this meaning; as also in what the Lord spoke in parables concerning a “vineyard” and a “fig tree”; as in Matthew: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마21:19) Jesus seeing a fig tree in the way, came to it, but found nothing thereon save leaves only, and he said unto it, Let no fruit grow on thee henceforward forever; and presently the fig tree withered away, (Matt. 21:19)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그 어떤 선도, 심지어 자연적 선조차도 땅, 곧 이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에 나오는 포도나무무화과나무역시 유사한 의미입니다. by which is meant, that no good, not even natural good, was to be found upon the earth. Similar is the meaning of the “vine” and “fig tree” in Jeremiah:

 

12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렘8:12-13) Were they ashamed when they had committed abomination? Nay, they were not at all ashamed, and they knew not how to blush; therefore I will surely gather them, saith Jehovah; there shall be no grapes on the vine, nor figs on the fig tree, and the leaf hath fallen, (Jer. 8:12–13)

 

이 말씀은 모든 선, 곧 영적, 자연적 선이 사라져 버렸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너무도 타락한 나머지 심지어 부끄러워하지도 않게 되었기 때문인데요, 마치 오늘날, 악 가운데 있어 자기들의 사악함에도 불구, 얼굴이 붉어지기는커녕 오히려 그걸 자랑하는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호세아입니다. by which is signified that all good, both spiritual and natural, had perished, since they were so depraved as to have lost even the sense of shame, like those at the present day who are in evil, and who, so far from blushing for their wickedness, make it their boast. In Hosea: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같이 하였으며 너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같이 하였거늘 그들이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가 사랑하는 우상 같이 가증하여졌도다 (호9:10) I found Israel like grapes in the wilderness; I saw your fathers as the first ripe in the fig tree in the beginning. (Hos. 9:10)

 

요엘입니다. And in Joel: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들의 풀이 싹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는도다 (욜2:22) Be not afraid, ye beasts of my fields, for the tree shall bear its fruit, the fig tree and the vine shall yield their strength. (Joel 2:22)

 

여기 ‘포도나무’는 영적 선을,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선을 가리킵니다. The “vine” here denotes spiritual good, and the “fig tree” natural 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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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3:6, AC.207-210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Verse 6, And the woman saw that the tree was good for food, and that it was pleasant to the eyes, and a tree to be desired to give intelligence, and she took of the fruit thereof and did eat, and she gave also to her man [vir] with her, and he did eat.

 

※ 6절 속뜻

 

네 번째 후손, 곧 선대와 달리 사랑할 정도로 자아를 원했고, 그 결과 감각과 세상에서 배운 걸로 이해가 안 되면 비록 주님의 신성한 계시라 하더라도 완강하게 거부하던 이들 네 번째 후손에 이르자 모든 걸 거꾸로 보기 시작, 주님의 것들, 곧 선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모든 주님 신앙과 그 교리들을 건강하고 균형 잡힌 시선이 아닌, 탐욕과 환상, 쾌락의 대상으로 보았고, 거기에 이들의 합리적 이성조차 동조함으로써 그만 선을 넘게 되었습니다.

 

 

207. 먹음직도 하고(Good for food)는 탐욕(cupidity), ‘보암직도 하고(pleasant to the eyes)는 환상(fantasy),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desirable to give intelligence)은 쾌락(pleasure)을 각각 의미합니다. 이것들은 다 본성(the own), 여자(woman)에게 속한 것들이며, ‘그도 먹은지라(the husband eating)는 이성의 동의(the consent of the rational)를 의미합니다. (AC.265) Good for food” signifies cupidity; “pleasant to the eyes,” fantasy; and “desirable to give intelligence,” pleasure: these are of the own, or “woman”; by the “husband eating” is signified the consent of the rational (n. 265).  

 

※ AC.265. ‘남편(the husband or man)이 합리적, 이성적 능력(the rational capacity)을 의미한다는 것이 본 장인 3장 6절에 보면 있는데요, 거기에 보면,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즉, 그도 동의했음을 의미합니다. 같은 내용이 158번 글, 사람에 관한 내용을 보아도 분명한데요, 거기 보면, 사람은 지혜와 지성(understanding)을 가진 존재인데요, 하지만 여기 나오는 ‘사람(the man)은 이성적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the ability to reason)에 머무를 뿐입니다. 지식의 나무, 곧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음으로써 지혜와 지성이 파괴되었고, 그 결과, 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합리적, 이성적 능력은 지적 이해(an intelligent understanding)를 모방하는 것, 혹은 그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 AC.158. 사람(man, 아담)이 내적 인간, 같은 말이지만, 지성과 지혜의 사람을 상징한다는 것은 이사야를 보면 분명합니다.

 

내가 본즉 한 사람(vir)도 없으며 내가 물어도 그들 가운데에 한 말도 대답할 조언자가 없도다 (사41:28)

 

지혜와 지성을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 위 본문의 ‘사람’은 라틴어로 ‘비르(vir)입니다. 라틴어에 ‘사람’이라는 뜻의 ‘호모(homo)라는 말이 따로 있지만, 호모에 비해 비르는 지혜와 지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레미야에도 보면은,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렘5:1)

 

여기 ‘정의를 행하는 자’는 지혜로운 사람을, ‘진리를 구하는 자’는 지성인을 각각 의미합니다.

 

 

208. 태고교회의 네 번째 후손 이야기인데요, 이들은 자기 사랑(self-love [amore proprio])에 빠져 유혹에 넘어갔고, 비록 계시라 할지라도 감각과 기억-지식으로 확인이 안 되면 계시 믿기를 언짢아하고 싫어했습니다. This was the fourth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o suffered themselves to be seduced by self-love [amore proprio] and were unwilling to believe what was revealed, unless they saw it confirmed by the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 세상에서 경험하고 학습한 지식과 주님의 계시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 후자, 곧 주님의 계시 믿기를 꺼렸다, 내켜 하지 않았다는 말인데요, 이처럼 태고교회도 그 후손으로 내려갈수록 점점 더 주님 사랑의 반대인 자기 사랑으로 경도되어 가는 걸 볼 수 있습니다.

 

 

209. 여기 사용된,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the tree was good for food, pleasant to the eyes, and desirable for giving intelligence)라는 표현은 저 태고 때 살던 사람들의 지니어스(genius)에 맞춘 표현인데, 특별히 의지(the will)와 관련해서입니다. 그들의 악이 콸콸 흘러나오기 시작한 게 바로 이 의지에서부터였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홍수 후를 살았던 사람들이 나오는 데를 보면, 위 표현들은 의지보다는 이해(the understanding)와 관련되어 사용되고 있는데요, 이는 태고인들은 선에서 비롯된 진리(truth from good)를 가지고 있었지만, 홍수 후를 살았던 사람들은 진리에서 비롯된 선(good from truth)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The expressions here employed, as that “the tree was good for food, pleasant to the eyes, and desirable for giving intelligence,” are such as were adapted to the genius of those who lived in that most ancient time, having especial reference to the will, because their evils streamed out from the will. Where the Word treats of the people who lived after the flood, such expressions are used as relate not so much to the will as to the understanding; for the most ancient people had truth from good, but those who lived after the flood had good from truth.  

 

※ 홍수 전 사람들은 그 DNA에 선을 타고났지만, 홍수 후 사람들은 진리에 대한 학습을 통해서만 선을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210. 인간의 본성(man’s own)이라는 걸 이렇게도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인간 본성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그리고 주님이나 말씀을 믿는 대신 자기 자신을 믿는, 끝으로 감각과 기억-지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즉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없거나 세상 경험과 배움에 비춰 볼 때 도저히 말도 안 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이 세 가지 태도로부터 샘처럼 솟아나는 모든 악과 거짓입니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그저 악과 거짓이 되며, 그 결과, 모든 걸 반대로 봅니다. 악한 걸 선으로 보며, 선한 걸 악으로 보고, 거짓된 걸 참으로 보며, 참된 걸 거짓으로 봅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걸 없다 하고, 없는 걸 그들은 모든것이라 하지요. 증오를 사랑이라, 어두움을 빛이라, 죽음을 삶이라 하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인데요, 말씀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일컬어 다리를 저는 사람들(the lame), ‘눈먼 사람들(the blind)이라고 합니다. 이런 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 자체로 지옥이요, 저주받은 것이지요. What man’s own is may be stated in this way. Man’s own is all the evil and falsity that springs from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and from not believing in the Lord or the Word but in self, and from supposing that what cannot be apprehended sensuously and by means of memory-knowledge [sensualiter et scientifice] is nothing. In this way men become mere evil and falsity, and therefore regard all things pervertedly; things that are evil they see as good, and things that are good as evil; things that are false they see as true, and things that are true as false; things that really exist they suppose to be nothing, and things that are nothing they suppose to be everything. They call hatred love, darkness light, death life, and the converse. In the Word, such men are called the “lame” and the “blind.” Such then is the own of man, which in itself is infernal and accur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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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3:4-5, AC.204-206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Verses 4, 5, And the serpent said unto the woman, Ye shall not surely die. For God doth know that in the day ye eat thereof, then your eyes shall be opened, and ye shall be as God, knowing good and evil.

 

※ 4, 5절 속뜻

 

주님 신앙을 주님의 퍼셉션과 계시가 아닌, 감각과 자아, 세상 학문과 배움으로 들여다보고자 하는 사람은 주님 기준이 아닌 자기 기준, 사람 기준으로 참과 거짓, 선과 악을 분별하게 되어 하나님의 자리에 서게 되고, 이후 자기 맘대로 살아가려 할 것을 주님은 다 알고 계셨습니다.

 

 

204.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Their eyes being opened by eating of the fruit of the tree)는 신앙에 관한 것을 감각과 지식, 곧 자기 자신, 그러니까 자기가 알고 있는 걸 기준 삼아 신앙에 관한 것을 헤아릴 경우, 분명히 말하지만, 오히려 신앙에 관한 게 잘못되었다 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as God, knowing good and evil)은 만일 그들이 그런 짓, 곧 스스로를 기준 삼아 그런 짓을 하면, 그들은 마치 자신이 하나님인 양 스스로를 인도하려 할 것이라는, 즉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는 대신 오직 자기 힘으로만 살아가려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Their “eyes being opened by eating of the fruit of the tree” signifies that if they were to examine the things of faith from what is of sense and knowledge [ex sensuali et scientifico], that is, from themselves, they would plainly see those things as if erroneous. And that they would be “as God, knowing good and evil,” denotes that if they did so from themselves, they would be as God, and could guide themselves.

 

 

205. 모든 구절에는 교회의 어떤 특별한 상태나 상태의 변화가 들어있습니다. 앞선 구절들에는 그들이 그렇게 기울어졌음에도 그들, 곧 그 당시 교회는 자신들의 상태가 주님 보시기에 불법이라는 걸 지각했다는 내용이 들어있는 반면, 이 구절들에는 막 시작된 의심, 곧 자신들이 볼 땐, 이들은 태고교회의 세 번째 후손들인데, 합법적이지가 않다(whether it might not be lawful for them, since they would thus see), 자신들의 감각과 세상에서 배운 걸로 봤을 땐, 자신들이 그동안 선대로부터 들어온 것들, 곧 주님과 천국, 이 세상에 관한 이야기들, 교리들이 좀 안 맞는 것 같다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서 자신들의 눈이 열렸다는, (사실은 정반대로 오히려 더 눈이 멀어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 우리가 너무 교회 중심으로, 교리 중심으로만 살아왔구나. 실제 세상 지식과 감각 경험은 전혀 다른데...하는, 그리고 결국 이런 식의 자기 사랑, 이렇게 자기중심적인 태도가 깊어지면서(at length, in consequence of the ascendancy of self-love), 그들은 이 정도면 우리 스스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주님과 같아질 수 있지 않을까?여기기 시작했다는 그런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이런 게 자기 사랑의 본질인데요, 이는 주님 따르는 건 꺼리고, 대신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to be self-guided) 걸 더 선호하며, 믿음 관련한 일들을 감각과 기억-지식으로 컨설팅하기 위해 혼자 알아서 하는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Every verse contains a particular state, or change of state, in the church: the preceding verses, that although thus inclined they nevertheless perceived it to be unlawful; these verses, an incipient doubt whether it might not be lawful for them, since they would thus see whether the things they had heard from their forefathers were true, and so their eyes would be opened; at length, in consequence of the ascendancy of self-love, they began to think that they could lead themselves, and thus be like the Lord; for such is the nature of the love of self that it is unwilling to submit to the Lord’s leading, and prefers to be self-guided, and being self-guided to consult the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as to what is to be believed.  

 

※ 이 글 번역은 특별히 쉽지가 않아 여러 날 걸렸고, 이해를 돕기 위해 최대한 풀어 번역했습니다.

 

 

206.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된 사람들, 그리고 자기를 사랑하고 동시에 세상 배움에 탁월한 사람들, 이 둘 중 누가 더 대단한 믿음(a stronger belief)을 가진 걸까요? 그러나 사실은 누가 더 눈이 먼 걸까요? 그들에게 단지 질문만 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은, 그들은 영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기는 고사하고, 심지어 알지도 못하며, 영적, 천적 삶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정말이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낯설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영원한 삶을 인정하지 않는데요, 그들은 스스로를 사라질 짐승과도 같은 존재라 믿으며, 주님도 인정하지 않고, 대신 오직 자신들과 자연만 숭배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가운데 좀 신중하게 말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르기를, 어떤 최고의 존재(a certain supreme existence [ens])가 만물을 다스리지만, 자신들은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고 합니다. 그들이 감각 및 기억-지식과 관련 일들을 가지고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들을 입증할 때 사용하는 원리들(the principles)이 있는데요, 그들은 맘만 먹으면 온 우주를 앞에 놓고도 그럴 겁니다. 그들은 남에게 신(神, gods)처럼, 또는 정말 지혜로운 사람처럼 여겨지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만약 그들의 본성(their own) 가운데 없는 게 뭔지 아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대답하기를, 그런 건 없다고, 다만 자신들의 본성 전부를 잃게 되면 자신들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될 거라고 대답들을 할 겁니다. Who have a stronger belief that their eyes are open, and that as God they know what is good and evil, than those who love themselves, and at the same time excel in worldly learning? And yet who are more blind? Only question them, and it will be seen that they do not even know, much less believe in, the existence of spirit; with the nature of spiritual and celestial life they are utterly unacquainted; they do not acknowledge an eternal life; for they believe themselves to be like the brutes which perish; neither do they acknowledge the Lord, but worship only themselves and nature. Those among them who wish to be guarded in their expressions, say that a certain supreme existence [ens] of the nature of which they are ignorant rules all things. These are the principles in which they confirm themselves in many ways by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and if they dared, they would do the same before all the universe. Although such persons desire to be regarded as gods, or as the wisest of men, if they were asked whether they know what it is not to have anything of their own, they would answer that it is to have no existence, and that if they were deprived of everything that is their own, they would be nothing.  

 

※ 조금이라도 영의 존재를 시인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사후 자기 영의 상태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이런 사람에게 맨 먼저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다른 모든 빛나는 성취를 이루었어도 정작 그가 자기 영에 대하여 전혀 무지하며, 관심조차 없고, 그저 철저히 세속적이며, 물질적이기만 하다면, 이 사람에겐 가장 시급한 질문이 바로 이 영, 다른 말로는 그의 본성과 관련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타고난 자연 상태로는 악 그 자체이기 때문에, 얼른 주님의 생명에 접붙임을 받아 그 안에 주님의 생명이 흘러들어 새로운 상태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게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그런 건 일종의 환상(a fantasy)이라고 생각합니다. 양심(conscience)이라는 걸 아느냐는 질문에는, 그건 그저 상상 속 산물로서, 천민들(賤民, the vulgar)을 통제하는 방법으로 써먹을 수 있는 거라고 할 겁니다. 퍼셉션(perception)이 무엇인지는 아느냐는 질문에는, 그들은 씨익 비웃으며, 그런 건 광적인 쓰레기, 곧 종교 마니아들 간 사용하는 일종의 무슨 싸인 같은 거라고 할 겁니다.If they are asked what it is to live from the Lord, they think it a fantasy. If asked whether they know what conscience is, they would say it is a mere creature of the imagination, which may be of service in keeping the vulgar under restraint. If asked whether they know what perception is, they would merely laugh at it and call it enthusiastic rubbish.

 

※ 스베덴보리 시절인 1750년대 유럽의 영적 분위기가 이랬나 봅니다. 이 하나하나의 사례가 모두 스베덴보리가 직접 겪었던 사례이지 싶은데요, 오늘날 한국 사회라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개신교를 비롯, 거의 모든 기독교가 외적(外的, external) 사고, 즉 ‘겉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인데, 말로는 ‘영성, 영성’ 하지만 그 사고의 뿌리는 ‘겉’에 있습니다. 내적(內的, internal) 사고, 즉 ‘속’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말해도 거의 이해를 못 합니다.

 

이런 게 그들의 지혜이며, 이런 게 그들이 말하는, 소위 ‘눈이 밝아지는 것’(open eyes)입니다. 이런 게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gods)입니다. 이런 원리들, 그들 생각에는 대낮보다 더 밝은 원리들인데, 이런 원리들을 가지고 그들은 모든것의 출발점 삼으며, 이런 식으로 그들은 계속해서 신앙의 신비들에 대한 이성질(理性, reason)을 하는데요, 그 결과는 과연 어둠의 깊은 심연밖에 뭐가 더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이런 것이 바로 세상을 꾀는 ‘뱀’(the serpents)인 것입니다만, 그러나 태고교회의 후손은 아직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되는 건 본 장 14절로 19절에서 다루게 됩니다.Such is their wisdom, such “open eyes” have they, and such “gods” are they. Principles like these, which they think clearer than the day, they make their starting point, and so continue on, and in this way reason about the mysteries of faith; and what can be the result but an abyss of darkness? These above all others are the “serpents” who seduce the world. But this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not as yet of such a character. That which became such is treated of from verse 14 to verse 19 of this chap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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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3:2-3, AC.198-203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Verses 2, 3, And the woman said unto the serpent, We may eat of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But of the fruit of the tree which is in the midst of the garden, God hath said, Ye shall not eat of it, neither shall ye touch it, lest ye die.

 

※ 2, 3절 속뜻

 

태고교회 선조들로부터 밝히 계시되어 내려온 주님 신앙에 관한 선과 진리에 대해, 주님으로 말미암은 퍼셉션이 아닌, 감각과 세상 학문, 지식을 가지고 들여다보려 하는 것은 주님이 금하신 바, 만일 그런 짓을 하면, 그동안 주님 주신 모든 지혜와 지성이 사라질 것입니다.

 

 

198. 동산 나무의 열매(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는 태고교회로부터 그들에게 계시(revealed), 계승된 선과 진리이며,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 그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the fruit of the tree which is in the midst of the garden, of which they were not to eat)은 주님께 속한 신앙의 선과 진리인데, 이는 그들이 자신들한테서 배워서는 안 되는(were not to learn from themselves) 것입니다. ‘만지지도 말라(not to touch it)는 금지(a prohibition)입니다. 그들 자신이나 감각과 기억-지식(sense and memory-knowledge [sensuali et scientifico])에 속한 걸 가지고 감히 주님께 속한 신앙의 선과 진리 생각하는 행위를 금하는 것이지요.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lest ye die)는 그랬다가는 신앙, 즉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지혜와 총명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is the good and truth revealed to them from the most ancient church; the “fruit of the tree which is in the midst of the garden, of which they were not to eat” is the good and truth of faith, which they were not to learn from themselves; “not to touch it” is a prohibition against thinking of the good and truth of faith from themselves, or from what is of sense and memory-knowledge [sensuali et scientifico]; “lest ye die” is because thus faith, or all wisdom and intelligence, would perish.

 

 

199. 그들이 먹을 수 있는 나무의 열매(the fruit of the tree of which they might eat)가 태고교회로부터 그들에게 계시, 계승된 선과 진리, 즉 신앙에 관한 지식(the knowledges [cognitiones] of faith)을 의미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 분명한데요, 앞서 천적 인간, 곧 태고교회를 다루던 창2:16에서는 동산의 나무(the tree of the garden)라 한 반면, 여기서는 대신 그들이 먹을 수 있는 동산 나무의 열매(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of which they might eat)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That the “fruit of the tree of which they might eat” signifies the good and truth of faith revealed to them from the most ancient church, or the knowledges [cognitiones] of faith,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it is said to be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of which they might eat,” and not the “tree of the garden,” as before when treating of the celestial man, or the most ancient church (Gen.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창2:16)

 

※ 우리말 개역 개정에서는 위 창2:16 번역을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라 하여 원전에는 없는 ‘열매’를 첨가했습니다. 원전에는 ‘동산 각종 나무’인데요, 이런 속뜻을 알 길이 없었던 번역자들은 ‘나무를 먹는다고?’ 하면서 이 부분을 원전 그대로 번역하기가 굉장히 어색했을 것입니다.

 

위 창2:16 본문의 ‘동산 나무’(The tree of the garden)는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퍼셉션(the perception of what is good and true)이며, 이 선과 진리는 퍼셉션의 산물이기 때문에(which good and truth, because they are from that source), 여기서 ‘열매’(fruit)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나오는 ‘열매’는 자주 이 선과 진리를 의미합니다. The “tree of the garden,” as it is there called, is the perception of what is good and true; which good and truth, because they are from that source, are here called “fruit,” and are also frequently signified by “fruit” in the Word.

 

 

200. 앞서 창2:9에서는 동산 중앙에(in the midst of the garden) 있는 나무는 생명나무이지 지식의 나무가 아니라고 하더니, 여기서는 지식의 나무(the tree of knowledge)라고 하는 이유는, 동산 중앙(the “midst” of the garden)이라고 하는 게 가장 내적인(the inmost), 가장 깊은 내면을 상징하기 때문인데요, 천적 인간, 즉 태고교회의 가장 깊은 내면은 이 생명나무(the tree of lives), 곧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었던 반면, 여기 이 사람, 천적 영적 인간(a celestial spiritual man)이라고 하는, 혹은 그 후손이라고 하는 이 사람한테서는 신앙이 동산의 중앙’, 즉 가장 깊은 내면이었기 때문입니다. 태곳적 사람들의 퀄리티(quality)를 아주 제대로 묘사하는 건 불가능한데요, 왜냐하면, 오늘날은 그들에 대해서 알려진 게 전혀 없고, 그들의 지니어스(genius)는 지금까지 발견된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정말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지니어스에 대한 어떤 걸 좀 전달, 알려드리고자 할 목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 곧 그들은 선을 통해 진리를 알았고, 사랑을 통해 신앙이라는 게 뭔지를 알았다는 걸 언급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 세대가 막을 내렸을 때, 그다음에 일어난 세대는 완전히 다른 지니어스를 가졌는데요, 그들은 이전 세대처럼 선을 통해 진리를 알거나, 사랑을 통해 신앙이라는 게 뭔지를 아는 대신, 선이 무엇인지를 진리를 가지고 습득하거나 신앙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사랑에 관한 걸 아는, 즉 선과 사랑을 지식으로 습득, 학습으로 아는 그런 세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들 중 거의 대부분이 지식(knowledge [quod scirent])밖에는 거의 가진 게 없었습니다. 이것이 홍수 후 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한 생긴 변화였지요. The reason why the “tree of knowledge” is here spoken of as being “in the midst of the garden,” although previously (Gen. 2:9), the tree of lives was said to be in the midst of the garden, and not the tree of knowledge, is that the “midst” of the garden signifies the inmost; and the inmost of the celestial man, or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the “tree of lives,” which is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whereas with this man, who may be called a celestial spiritual man, or with this posterity, faith was the “midst” of the garden, or the inmost. It is impossible more fully to describe the quality of the men who lived in that most ancient time, because at the present day it is utterly unknown, their genius being altogether different from what is ever found with anyone now. For the purpose however of conveying some idea of their genius, it may be mentioned that from good they knew truth, or from love they knew what is of faith. But when that generation expired, another succeeded of a totally different genius, for instead of discerning the true from the good, or what is of faith from love, they acquired the knowledge of what is good by means of truth, or what is of love from the knowledges of faith, and with very many among them there was scarcely anything but knowledge [quod scirent]. Such was the change made after the flood to prevent the destruction of the world.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201. 이렇게 홍수 이전에 존재했던 태고인들의 이런 지니어스가 오늘날엔 발견되지도, 존재하지도 않는 이런 상황 속에서, 이 본문에 들어있는 참된 의미, 곧 속뜻을 제대로 설명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다릅니다. 천국에서는 온전한 이해가 가능한데요, 천적이라고 하는 천사들과 천사적 영들(angelic spirits)은 홍수 전에 거듭난 태고인들과 같은(same) 지니어스를 지닌 반면, 영적이라고 하는 천사들과 천사적 영들은 홍수 후 거듭난 사람들과 유사한(similar) 지니어스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비록 두 경우 모두 무한히 다양하지만 말입니다. Seeing therefore that such a genius as that of the most ancient people anterior to the flood is not found and does not exist at the present day, it is no easy matter to explain intelligibly what the words of this passage in their genuine sense imply. They are, however, perfectly understood in heaven, for the angels and angelic spirits who are called celestial are of the same genius as the most ancient people who were regenerate before the flood; while the angels and angelic spirits who are termed spiritual are of a similar genius to the regenerate after the flood, although in both cases with indefinite variety.

 

 

202. 천적 인간이었던 태고교회는 지식의 나무를 먹는 것(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 즉 신앙에 속한 걸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가지고 배우는 일을 삼가야(to abstain from learning) 할 뿐 아니라, 그 나무를 만지는 것조차, 즉 신앙에 관한 걸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가지고 생각하는(not even allowed to think) 것조차 허용될 수 없었던 그런 캐릭터였는데요, 안 그러면, 그들은 천적 삶에서 영적 삶으로, 그리고 계속해서 아래로 가라앉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천적 천사들의 삶 또한 그런데요, 그들이 더욱 내적, 더욱 천적일수록, 신앙이라고 이름하는 경험도, 영적인 걸 약간 접해보는 경험도 그들에게는 일절 불허됩니다. 이 신앙이라는 말을 남들을 통해 들을 경우, 그들에게는 신앙 대신 사랑의 퍼셉션이 있는데요, 이게 어떻게 다른 건지는 오직 그들만 알지요. 이렇게 무엇이든 신앙에 속한 것을 그들은 사랑과 체어리티로부터 기원(derive from), 시작합니다. 그들은 신앙에 관한 그 어떤 이성질하는 말(理性질, any reasoning about faith) 정말 굉장히 못 견뎌 하며, 그와 관련된 그 어떤 기억-지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요,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사랑으로 퍼셉션, 곧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주님으로 말미암는 퍼셉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퍼셉션으로 어떤 일이 과연 그런지 안 그런지를 즉시 압니다. 그런 까닭에, 어떤 신앙에 관한 말을 듣게 되면, 그들은 그저 단순히 그렇다, 아니다로 대답하는데요, 그들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그걸 지각, 즉시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마태복음에서 주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의미, 이유입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was a celestial man, was of such a character as not only to abstain from “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 that is, from learning what belongs to faith from sensuous things and memory-knowledges, but was not even allowed to touch that tree, that is, to think of anything that is a matter of faith from sensuous things and memory-knowledges, lest they should sink down from celestial life into spiritual life, and so on downward. Such also is the life of the celestial angels, the more interiorly celestial of whom do not even suffer faith to be named, nor anything whatever that partakes of what is spiritual; and if it is spoken of by others, instead of faith they have a perception of love, with a difference known only to themselves; thus whatever is of faith they derive from love and charity. Still less can they endure listening to any reasoning about faith, and least of all to anything of memory-knowledge respecting it; for, through love, they have a perception from the Lord of what is good and true; and from this perception they know instantly whether a thing is so, or is not so. Therefore when anything is said about faith, they answer simply that it is so, or that it is not so, because they perceive it from the Lord. This is what is signified by the Lord’s words in Matthew: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마5:37) Let your communication be Yea, yea; nay, nay; for whatsoever is more than these cometh of evil. (Matt. 5:37)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지식의 나무 열매를 만지지 못하게 하셨다는 말의 의미, 속뜻입니다. 그들이 그걸 만지면, 그들은 악 가운데 있게 될, 즉 결과적으로 그들은 죽게(die) 될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런 특별한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천적 천사들은 다양한 주제에 관해 다른 천사들처럼 서로 대화합니다. 다만 천적 언어(天的, a celestial language)로 하지요. 이 언어는 사랑으로 되어 있고, 사랑에서 나오며, 영적 천사들의 언어보다 더욱 형용, 형언할 수 없는 언어입니다. This then is what was meant by their not being allowed to touch the fruit of the tree of knowledge; for if they touched it, they would be in evil, that is, they would in consequence “die.” Nevertheless the celestial angels converse together on various subjects like the other angels, but in a celestial language, which is formed and derived from love, and is more ineffable than that of the spiritual angels.

 

 

203. 영적 천사들도 신앙에 관한 대화를 하는데요, 이들은 신앙에 관한 것들을 심지어 지성과 이성, 그리고 많이 배운 사람들의 언어로 확실히 보여 주지만, 그러나 그들은 신앙과 관련된 일들에 이런 걸로 무슨 자기들만의 결론을 내리는 짓은 절대로 안 합니다. 그런 짓을 하는 자는 악 가운데 있기 때문이지요. 이들은 또한 신앙에 관한 모든 진리의 퍼셉션을 주님으로부터 부여받는데요, 비록 천적 천사들의 것과 같은 그런 퍼셉션은 아닐지라도 말입니다. 영적 천사들의 퍼셉션은 일종의 양심(conscience) 같은 건데요, 이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생명력을 갖는, 마치 천적 퍼셉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건 아니고, 단지 영적 퍼셉션일 뿐인 그런 겁니다. The spiritual angels, however, converse about faith, and even confirm the things of faith by those of the intellect, of the reason, and of the memory, but they never form their conclusions concerning matters of faith on such grounds: those who do this are in evil. They are also endowed by the Lord with a perception of all the truths of faith, although not with such a perception as is that of the celestial angels. The perception of the spiritual angels is a kind of conscience which is vivified by the Lord and which indeed appears like celestial perception, yet is not so, but is only spiritual perception.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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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3:1, AC.194-197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Verse 1,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than any wild animal of the field which Jehovah God had made; and he said unto the woman, Yea, hath God said, Ye shall not eat of every tree of the garden?

 

※ 1절 속뜻

 

태고교회 세 번째 후손에 이르러서는 이들은 선조들에게는 당연했던 주님의 계시들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주님의 계시들일지라도 자기들의 감각과 세상 학문, 철학 등으로 확인, 검증을 하고자 했습니다.

 

 

194. 여기 (the serpent)은 인간이 신뢰하고 있는 감각 파트(the sensuous part of man in which he trusts)를 말합니다. 여기 들짐승(the wild animal of the field)은 앞에서처럼 겉 사람의 모든 애정(every affection of the external man), ‘여자(the woman)는 인간의 본성(man’s own)을 말하며, 뱀이 하고 있는 말,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Yea, hath God said, Ye shall not eat of every tree?)는 그들이 의심하기 시작했다(began to doubt)는 말입니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태고교회의 세 번째 후손으로서, 그들은 계시된 것들(things revealed)에 관하여 그것이 과연 그런지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볼 수 있어야만(unless they saw and felt that they were so) 믿기 시작했습니다. 본 절과 다음 절은 그들의 첫 번째 상태, 즉 의심의 상태에 대한 설명입니다. By the “serpent” is here meant the sensuous part of man in which he trusts; by the “wild animal of the field” here, as before, every affection of the external man; by the “woman,” man’s own; by the serpent’s saying, “Yea, hath God said, Ye shall not eat of every tree?” that they began to doubt. The subject here treated of is the third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began not to believe in things revealed unless they saw and felt that they were so. Their first state, that it was one of doubt, is described in this and in the next following verse.

 

 

195. 태고인들(The most ancient people)은 인간의 모든것(all things in man)을 짐승과 새에 비유하는(compare to) 대신 실제로 그렇게 명명하였으며(denominated), 이런 식으로 말하는 그들의 스피킹은 홍수 후 고대교회(the ancient church after the flood)에까지도 이어져, 이후 선지자들한테까지 전해졌습니다. 사람 안의 감각적인 것(The sensuous things in man)을 그들은 (serpents)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뱀이 땅에 가까이 붙어 지내는 것처럼, 감각적인 것들(sensuous things) 역시 몸하고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앙의 신비(the mysteries of faith)에 관한, 감각적 증거에 기초한 이성 활동(reasonings founded on the evidence of the senses), 즉 신앙의 신비를 감각을 가지고 이해하려는 일련의 이성적 활동을 뱀의 독(the poison of a serpent)이라 하였고, 그런 짓을 하는 사람들(the reasoners themselves)이라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많은 걸 감각, 즉 보이는 걸(visible things) 가지고 하기 때문에, 이르기를 뱀은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the serpent was more subtle than any wild animal of the field) 하는 것입니다. 이 보인다는 것은 땅에 속한 거, 육적인 거, 일상적인 거, 자연적인 거(things terrestrial, corporeal, mundane, and natural)를 말합니다. The most ancient people did not compare all things in man to beasts and birds, but so denominated them; and this their customary manner of speaking remained even in the ancient church after the flood, and was preserved among the prophets. The sensuous things in man they called “serpents,” because as serpents live close to the earth, so sensuous things are those next the body. Hence also reasonings concerning the mysteries of faith, founded on the evidence of the senses, were called by them the “poison of a serpent,” and the reasoners themselves “serpents”; and because such persons reason much from sensuous, that is, from visible things (such as are things terrestrial, corporeal, mundane, and natural), it is said that “the serpent was more subtle than any wild animal of the field.”

 

[2] 그리고 또 시편에 보면, 이성 놀이(reasonings)를 통해 사람을 유혹하는 자들에 대해 이르기를, And so in David, speaking of those who seduce man by reasonings:

 

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 (시140:3) They sharpen their tongue like a serpent; the poison of the asp is under their lips. (Ps. 140:3)

 

3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4그들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그들은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5술사의 홀리는 소리도 듣지 않고 능숙한 술객의 요술(주1)도 따르지 아니하는 독사로다 (시58:3-5) They go astray from the womb, speaking a lie. Their poison is like the poison of a serpent, like the deaf poisonous asp that stoppeth her ear, that she may not hear the voice of the mutterers, of a wise one that charmeth charms [sociantis sodalitia]1. (Ps. 58:3–5)

 

현자(賢者)가 하는 말이나 현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조차 하지 않으려는 그런 캐릭터를 가진 사람들의 이성 놀이, 이성질(Reasonings)을 가리켜 여기서는 뱀의 독(the poison of a serpent)이라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고대인들 사이에서 뱀이 귀를 막는다(The serpent stoppeth the ear)는 말이 하나의 속담이 되었지요. 아모스입니다. Reasonings that are of such a character that the men will not even hear what a wise one says, or the voice of the wise, are here called the “poison of a serpent.” Hence it became a proverb among the ancients, that “The serpent stoppeth the ear.” In Amos:

 

19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20여호와의 날은 빛 없는 어둠이 아니며 빛남 없는 캄캄함이 아니냐 (암5:19-20) As if a man came into a house, and leaned his hand on the wall, and a serpent bit him. Shall not the day of Jehovah be darkness and not light? even thick darkness, and no brightness in it? (Amos 5:19–20)

 

손을 벽에 대는 것(The hand on the wall)은 자기가 힘의 근원(self-derived power)이라는 것, 그리고 감각적인 것들을 신뢰한다는 의미이며, 여기에 나오는 실명(失明, the blindness)이 이런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The “hand on the wall” means self-derived power, and trust in sensuous things, whence comes the blindness which is here described.

 

[3] 예레미야입니다. In Jeremiah:

 

22애굽의 소리가 뱀의 소리 같으리니 이는 그들의 군대가 벌목하는 자 같이 도끼를 가지고 올 것임이라 2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황충보다 많아서 셀 수 없으므로 조사할 수 없는 그의 수풀을 찍을 것이라 24딸 애굽이 수치를 당하여 북쪽 백성의 손에 붙임을 당하리로다 (렘46:22-24) The voice of Egypt shall go like a serpent, for they shall go in strength, and shall come to her with axes as hewers of wood. They shall cut down her forest, saith Jehovah, because it will not be searched; for they are multiplied more than the locust, and are innumerable. The daughter of Egypt is put to shame; she shall be delivered into the hand of the people of the north. (Jer. 46:22–24)

 

애굽(Egypt)은 신성한 것(Divine things), 주님께 속한 일을 감각적인 것과 기억-지식, 곧 세상에서 학습한 지식으로 헤아리는 것(reasoning)을 말합니다. 그런 짓(reasonings)을 가리켜 뱀의 소리(the voice of a serpent)라 하며, 그로 인해 야기된 실명(the blindness)북쪽 백성(the people of the north)이라고 한 것입니다. 욥기입니다. Egypt” denotes reasoning about Divine things from sensuous things and memory-knowledges. Such reasonings are called the “voice of a serpent”; and the blindness thereby occasioned, the “people of the north.” In Job:

 

16그는 독사의 독을 빨며 뱀의 혀에 죽을 것이라 17그는 강 곧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을 보지 못할 것이요 (욥20:16-17) He shall suck the poison of asps; the viper’s tongue shall slay him. he shall not see the brooks, the flowing rivers of honey and butter. (Job 20:16–17)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Rivers of honey and butter)은 영적, 천적인 것들(things spiritual and celestial)인데, 이는 단지 이성적이기만 한 사람들은(by mere reasoners) 볼 수 없는 것들입니다. 위 본문에서는 이성적이기만 한 것(reasonings)을 일컬어 독사의 독(the poison of the asp), ‘뱀의 혀(the viper’s tongue)라고 합니다. 뱀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14, 15절에서 보시기 바랍니다. Rivers of honey and butter” are things spiritual and celestial, which cannot be seen by mere reasoners; reasonings are called the “poison of the asp” and the “viper’s tongue.” See more respecting the serpent below, at verses 14 and 15.

 

 

196. 고대에는 계시된 것들에서보다 감각적인 것들에서 더 확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serpents)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은 사정이 더욱 안 좋은데요, 지금 사람들은 자기들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see and feel) 수 없는 것은 무엇이든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고대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과학 지식이라는 걸 가지고 더욱 자신들을 그런 불신 가운데 있게 하기 때문이며, 그 결과 스스로를 더욱 더 깊이 눈먼 상태 가운데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눈멀게 하는지, 그 결과 나중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게 하는지, 이 사람들은 천국에 관한 일들(heavenly matters)을 감각과 기억-지식, 그리고 철학에 관한 걸(the things of sense, of memory-knowledge, and of philosophy)로 자신들의 결론을 내리며, 그리고 말씀에서 자주 귀머거리 뱀(deaf serpents)이요, ‘날아다니는 뱀(the flying serpents)으로 언급되는 사람들인데, 이 경우가 훨씬 더 치명적이지요, 이런 게 사람들에게 알려지도록 우리는 영에 대해 그들이 믿는 게 뭔지 한 가지 예를 들고자 합니다. In ancient times those were called “serpents” who had more confidence in sensuous things than in revealed ones. But it is still worse at the present day, for now there are persons who not only disbelieve everything they cannot see and feel, but who also confirm themselves in such incredulity by knowledges [scientifica] unknown to the ancients, and thus occasion in themselves a far greater degree of blindness. In order that it may be known how those blind themselves, so as afterwards to see and hear nothing, who form their conclusions concerning heavenly matters from the things of sense, of memory-knowledge, and of philosophy, and who are not only “deaf serpents,” but also the “flying serpents” frequently spoken of in the Word, which are much more pernicious, we will take as an example what they believe about the spirit.

 

[2] 감각적인 사람, 즉 오직 감각의 증거(the evidence of his senses)만을 믿는 사람은 영의 존재(the existence of the spirit)를 부인합니다. 그가 영을 볼 수 없기 때문인데요, ‘그건 아무것도 아닌 게, 내가 그걸 느낄 수 없으니까 당연한 거 아냐? 만약 내가 그걸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다면, 그땐 당연히 존재하는 거지. 그걸 내가 왜 모르겠어?(It is nothing because I do not feel it: that which I see and touch I know exists.)라고 말하면서 말이지요. 기억-지식의 사람, 곧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결론을 내리는 사람은 말하기를, ‘영이라는 게, 말하자면 눈앞에서 허공 중에 사라지는 수증기나 열기, 혹은 그 밖의 무슨 과학적 실체가 아니면, 영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동물에게도 일종의 몸, 감각 및 이성과 유사한 뭔가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동물은 죽지만, 인간의 영은 산다고들 하네요.이런 식으로 그들은 영의 존재를 부인합니다. The sensuous man, or he who only believes on the evidence of his senses, denies the existence of the spirit because he cannot see it, saying, “It is nothing because I do not feel it: that which I see and touch I know exists.” The man of memory-knowledge [scientificus], or he who forms his conclusions from memory-knowledges says, What is the spirit, except perhaps vapor or heat, or some other entity of his science, that presently vanishes into thin air? Have not the animals also a body, senses, and something analogous to reason, and yet it is asserted that these will die, while the spirit of man will live. Thus they deny the existence of the spirit.

 

[3]철학자들의 경우입니다. 인류의 대부분보다 훨씬 예리한 이들 철학자들도 영에 대해 말할 때는 결과적으로 자신들도 이해할 수 없는 말로 말하는데요, 이들은 서로 논쟁하기를, 물질이나 유기물, 혹은 그 밖의 것들에 관한 그 어떤 하나의 표현으로도 이 영을 설명할 수 없다고 하면서 다투기 때문이며, 그래서 이들은 영에 대해 머리를 쥐어짜 너무 추상화한 나머지(so abstract it from their ideas that) 영에 대한 장황한 설명이라는 게 결국은 그냥 사라져 버리고,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그중에서 좀 나은 사람은 영은 생각(thought)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생각에 대한 그들의 소위 이성적이라는 주장을 보면, 생각에서 모든 실재(substantiality), 알맹이를 다 분리하는 것이었고, 그러다 보니 그들은 결국 몸이 끝나면 영도 사라져야 하는 결론에 도달하지요. 결국 감각에 속한, 기억-지식에 속한, 그리고 철학에 속한 걸 가지고 이성적 사고를 한다 하는 사람들은 모두 영의 존재를 부인하며, 영과 영적인 것들에 관하여 하는 모든 말을 전혀 믿지 않지요. 마음이 단순한 사람들(the simple in heart)은 그렇지 않은데요, 그들은 영이 존재하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대답하기를, 자기들은 그게 존재한다는 걸 안다고 해요. 주님 말씀하시기를, 자기들은 사후에도 살 것이라 하셨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이성을 소멸시키는 대신, 주님의 말씀으로 그것을 생생하게 하지요. Philosophers also, who would be more acute than the rest of mankind, speak of the spirit in terms which they themselves do not understand, for they dispute about them, contending that not a single expression is applicable to the spirit which derives anything from what is material, organic, or extended; thus they so abstract it from their ideas that it vanishes from them, and becomes nothing. The more sane however assert that the spirit is thought; but in their reasonings about thought, in consequence of separating from it all substantiality, they at last conclude that it must vanish away when the body expires. Thus all who reason from the things of sense, of memory-knowledge, and of philosophy, deny the existence of the spirit, and therefore believe nothing of what is said about the spirit and spiritual things. Not so the simple in heart: if these are questioned about the existence of spirit, they say they know it exists, because the Lord has said that they will live after death; thus instead of extinguishing their rational, they vivify it by the Word of the Lord.

 

 

197. 태고인들, 천적 인간들(celestial men)이었지요, 이런 태고인들 가운데서 은 세심함, 신중함(circumspection)을 의미했으며, 또한 감각 파트(the sensuous part) 의미했지요. 이를 통해 그들은 신중함을 훈련, 부상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습니다. ‘에 관한 이러한 의미는 제자들에게 하신 주님 말씀으로도 알 수 있는데요, Among the most ancient people, who were celestial men, by the “serpent” was signified circumspection, and also the sensuous part through which they exercised circumspection so as to be secure from injury. This signification of a “serpent” is evident from the Lord’s words to his disciples: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마10:16) Behold, I send you forth as sheep into the midst of wolves; be ye therefore prudent as serpents, and simple as doves. (Matt. 10:16)

 

그런가 하면 또 광야에 세워진 놋뱀(the brazen serpent)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요. 놋뱀은 주님의 감각 파트를 상징하는데요, 주님만이 홀로 천적 인간이시며, 홀로 모두를 돌보시고,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분이시지요. 그래서 이 놋뱀을 쳐다본 모두가 산 것입니다. And also from the “brazen serpent” that was set up in the wilderness, by which was signified the sensuous part in the Lord, who alone is the celestial man, and alone takes care of and provides for all; wherefore all who looked upon it were preserved.  

 

※ 놋뱀 에피소드는 아래 민수기 본문에 나옵니다.

 

4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5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6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7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민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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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3:1-13, AC.190-193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than any wild animal of the field which Jehovah God had made; and he said unto the woman, Yea, hath God said, Ye shall not eat of every tree of the garden?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And the woman said unto the serpent, We may eat of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But of the fruit of the tree which is in the midst of the garden, God hath said, Ye shall not eat of it, neither shall ye touch it, lest ye die.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And the serpent said unto the woman, Ye shall not surely die.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For God doth know that in the day ye eat thereof, then your eyes shall be opened, and ye shall be as God, knowing good and evil.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And the woman saw that the tree was good for food, and that it was pleasant to the eyes, and a tree to be desired to give intelligence, and she took of the fruit thereof and did eat, and she gave also to her man [vir] with her, and he did eat. 7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les. 8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 in the air of the day; and the man and his wife hid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God in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And Jehovah God cried unto the man [homo], and said unto him, Where art thou?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And he said, I heard thy voice in the garden, and I was afraid, because I was naked; and I hid myself.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And he said, Who told thee that thou wast naked? Hast thou eaten of the tree whereof I commanded thee that thou shouldest not eat?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And the man said, The woman whom thou gavest to be with me, she gave me of the tree, and I did eat. 13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woman, Why hast thou donethis? And the woman said, The serpent beguiled me, and I did eat.

 

 

속뜻 개요

 

190.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의 세 번째 상태를 다루는데요, 이 상태는 자신의 본성을 사랑할 정도로 원하던(so desired its own as to love it) 상태입니다. The third state of the most ancient church is treated of, which so desired its own as to love it.

 

 

191. 자기 사랑, 즉 자신의 본성을 향한 사랑(the love of self, that is, their own love)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자신들의 감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은 아무것도 안 믿기 시작했으며, 그래서 본문에서는 감각적인 건(the sensuous part)(the serpent)으로, 자기 사랑, 즉 자신의 본성을 향한 사랑은 여자(the woman), 그리고 이성적, 합리적인 건(the rational)남자(the man)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Because from the love of self, that is, their own love, they began to believe nothing that they did not apprehend by the senses, the sensuous part is represented by the “serpent”; the love of self, or their own love, by the “woman”; and the rational by the “man.”

 

 

192. 이런 배경 가운데 ’, 곧 감각 파트가 여자를 설득, 주님 신앙에 관한 것들(matters pertaining to faith in the Lord)이 과연 그런지를 알아보게 하였는데, 이것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는 것(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으로, 사람의 이성이 동의한 것은 그도 먹은지라(the man that he did eat)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1-6) Hence the “serpent,” or sensuous part, persuaded the woman to inquire into matters pertaining to faith in the Lord in order to see whether they are really so, which is signified by “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 and that the rational of man consented is signified by “the man that he did eat.” (verses 1–6)

 

 

193.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악 가운데 있음을 지각했는데요, 그들의 눈이 밝아져(eyes being opened)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hearing the voice of Jehovah)(7-8)라는 표현을 보면, 그들에게 아직 퍼셉션이 남아 있음(which remnant of perception),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고(7), 부끄러워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을(8-9) 뿐 아니라, 자신들이 저지른 짓을 시인하고 고백하는(10-13) 모습들을 볼 때, 아직 자연적 선(natural goodness)도 남아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But they perceived that they were in evil; from which remnant of perception, signified by their “eyes being opened,” and by their “hearing the voice of Jehovah” (verses 7–8), and from the fig-leaves of which they made themselves girdles (verse 7), and from their shame or hiding in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verses 8–9), as well as from their acknowledgment and confession (verses 10–13), it is evident that natural goodness still remained in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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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3, AC.182-189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THE ENTRANCE INTO ETERNAL LIFE OF 

THOSE WHO ARE RAISED FROM DEATH

 

 

182. 어떤 소생한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천적 천사들은 그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 영혼이 천적 천사들과 함께할 수 없는, 즉 천적 천사들하고는 맞지 않는 그런 캐릭터(such a character that he can no longer be in the company of the celestial angels)일 경우, 그 영혼은 그들로부터 떠나기를 간절히 원하는(is eager to)데요, 그럴 경우, 이번에는 영적 천사들이 옵니다. 영적 천사들은 와서 그가 빛을 사용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전까지는 그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어요. 그저 생각만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When the celestial angels are with a resuscitated person, they do not leave him, for they love everyone; but when the soul is of such a character that he can no longer be in the company of the celestial angels, he is eager to depart from them; and when this takes place the spiritual angels arrive, and give him the use of light, for previously he had seen nothing, but had only thought.  

 

※ 보통 천사들, 특히 천적 천사들하고 있으면 누구나 다 ‘와!!!’ 하고 좋아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천적 천사들은 삼층천 천사로 이해하셔도 되는데요, 이런 천사들조차 자기 곁에 있으면 굉장히 불편한 그런 사람들, 그런 영혼들이 있는 이유는, 그들의 지상에서의 삶이 기본적으로 악하고 거짓되었기 때문이지요. 빛과 어둠이 공존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 선인이든 악인이든 사후 일단 중간 영계에서 눈을 뜨는데요, 중간 영계란 천국도, 지옥도 아닌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 특히 개신교인들은 죽었다가 눈 뜨면 그곳이 바로 천국이거나 지옥인 줄 아는데요, 그러나 그것은 모든 걸 너무 단순화한 것이고요, 일단은 아직 천국도, 지옥도 아닌, 임종 시 상태 그대로 중간 영계에서 눈을 뜹니다. 그 이유는, 천국이든 지옥이든 100% 선하든지, 100% 악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 상태이기 때문이지요. 중간 영계에서 이 100% 상태가 된 후, 천국으로 올라가거나 지옥으로 떨어지며, 그 걸리는 기간은 개인마다 다 다릅니다.

 

※ 선인이든 악인이든 천사들은 이렇게 중간 영계에서 깨어나는 모든 영에게 자기들이 할 수 있는 풀 서비스를 제공하는데요, 그 모습은 마치 지상 산부인과 신생아실 모습 같기도 합니다. 눈부터 뜨게 하는 것 역시 비슷하고요. 천사들은 무슨 일에 쓰임 받든 이렇게 사랑하고 섬기며, 돌보고 시중드는 일을 가장 즐거워합니다.

 

 

183. 저는 이 일, 곧 이 영적 천사들이 이 사람의 눈을 어떻게 뜨게 하는지 보았는데요, 그들은 마치 왼쪽 눈꺼풀을 코의 중격(中隔, 구조들을 분리하는 막이나 근육, septum) 쪽으로 마는(roll off the coat of the left eye toward the septum of the nose)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비로소 눈을 떠 빛을 사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지요. 그 사람한테는 그게 진짜로 일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사실은 외관(外觀, an appearance), 즉 그렇게 보일 뿐인 것입니다. I was shown how these angels work. They seemed to as it were roll off the coat of the left eye toward the septum of the nose, in order that the eye might be opened and the use of light be granted. To the man it appears as if this were really done, but it is only an appearance.

 

 

184. 이 얇은 막이 이렇게 마치 돌돌 말린 것처럼 보인 후에, 드디어 빛이 조금 보이는데요, 하지만 아직은 희미합니다. 마치 사람이 막 잠에서 깼을 때 눈꺼풀을 통해 보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리고 이 소생 중인 사람은 이때 어떤 고요한 상태(a tranquil state) 가운데 있는데요, 이때까지도 여전히 천적 천사들의 가이드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 작은 별과 함께 일종의 하늘색 그림자가 나타나는데요, 그런데 저는 이것은 사람마다 다양하다는 걸 알았습니다(perceived). After this little membrane has been thus in appearance rolled off, some light is visible, but dim, such as a man sees through his eyelids when he first awakes out of sleep; and he who is being resuscitated is in a tranquil state, being still guarded by the celestial angels. There then appears a kind of shadow of an azure color, with a little star, but I perceived that this takes place with variety.

 

 

185. 그 후 얼굴에서 무언가 부드럽게 벗겨지는 것 같으면서 퍼셉션이 그에게 전달되는데요, 이때 천사들은 그에게서 어떤 부드럽고 상냥한, 사랑에 속한 것들(such as is of a soft and tender nature, as of love)이 아닌, 다른 생각들이 나오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특히 조심합니다. 천사들은 그에게 그가 이제 영이 되었음(he is a spirit)을 알려줍니다. Afterwards there seems to be something gently unrolled from the face, and perception is communicated to him, the angels being especially cautious to prevent any idea coming from him but such as is of a soft and tender nature, as of love; and it is now given him to know that he is a spirit.

 

 

186. 그런 다음 그는 자신의 삶을 시작하는데요, 처음에는 행복하고 기쁘지요.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영생에 들어온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것이 나중에 아름다운 황금빛 기운을 띠게 되는, 밝고 환한 빛(a bright white light that becomes of a beautiful golden tinge)으로 표현되는데요, 영적, 천적인 그의 첫 번째 삶은 이렇게 멋지게(to wit) 상징됩니다(by which is signified his first life, to wit, that it is celestial as well as spiritual). He then commences his life. This at first is happy and glad, for he seems to himself to have come into eternal life, which is represented by a bright white light that becomes of a beautiful golden tinge, by which is signified his first life, to wit, that it is celestial as well as spiritual.

 

 

187. 다음으로 그를 선한 영들의 공동체(the society of good spirits)로 데려가는 것이 표현되는데요, 그것은 말 위에 앉아 있는, 그리고 지옥을 향하고 있는, 그러나 이 말은 한 걸음도 못 움직이는, 그런 어떤 젊은이로 표현됩니다. 그는 청년으로 표현되는데요, 그 이유는 그가 처음 영생에 들어갈 때, 그가 천사들 가운데 있기 때문이며, 그래서 그에게는 이런 게 마치 자기가 젊음의 꽃(the flower of youth) 가운데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His being next taken into the society of good spirits is represented by a young man sitting on a horse and directing it toward hell, but the horse cannot move a step. He is represented as a youth because when he first enters upon eternal life he is among angels, and therefore appears to himself to be in the flower of youth.

 

 

188. 계속해서 그의 삶은 이번에는 말에서 내려 걸어가는 걸로 표현되는데요, 이는 그가 말을 그 자리에서 가게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암시하는 바는 그는 먼저 참되고 선한 것에 관한 지식(the knowledges of what is true and good)부터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His subsequent life is represented by his dismounting from the horse and walking on foot, because he cannot make the horse move from the place; and it is insinuated to him that he must be instructed in the knowledges of what is true and good.

 

 

189. 그 후 완만하니 위로 경사진 길이 보였는데, 이는 참되고 선한 것에 관한 지식과 진정성 있는 인정(self-acknowledgment)을 가지고 천국을 향해 단계적으로 인도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진정성 있는 인정과 참되고 선한 것에 관한 지식 없이는 아무도 그곳으로 인도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이 주제에 관한 내용은 이 장의 끝부분에서 계속됩니다. Afterwards pathways were seen sloping gently upward, which signify that by the knowledges of what is true and good, and by self-acknowledgment, he should be led by degrees toward heaven; for no one can be conducted thither without such self-acknowledgment, and the knowledges of what is true and good. A continuation of this subject may be seen at the end of this chap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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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 AC.168-181

 

사람의 사후, 죽음에서 깨어나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THE RESUSCITATION OF MAN FROM DEATH, AND HIS ENTRANCE INTO ETERNAL LIFE

 

 

168. 사람이 어떻게 육체의 삶(the life of the body)에서 영생의 삶(the life of eternity)으로 넘어가는지, 그 소생(蘇生, resuscitate), 깨어나는 방법을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절더러 차례대로 설명하라 하셨는데요, 이것은 제가 그저 듣기만 한 게 아니라 실제 체험을 통해, 그래서 저에게 직접 보여 주신 것입니다. Being permitted to describe in connected order how man passes from the life of the body into the life of eternity, in order that the way in which he is resuscitated might be known, this has been shown me, not by hearing, but by actual experience.

 

 

169. 저는 신체 감각에 있어 어떤 무감각 상태로 가라앉았고, 그래서 죽어가는 사람의 상태와 거의 같아졌지만, 그러나 저의 내적 생명(my interior life)은 손상되지 않았고, 생각하는 능력과 숨을 위한 충분한 호흡은 유지할 수 있었으며, 마침내 어떤 암묵적인 호흡(a tacit breathing) 가운데 있을 수 있었는데요, 이는 저로 하여금 죽은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며, 어떻게 깨어나는지를 지각하고 기억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I was reduced into a state of insensibility as to the bodily senses, thus almost into the state of dying persons, retaining however my interior life unimpaired, attended with the power of thinking, and with sufficient breathing for life, and finally with a tacit breathing, that I might perceive and remember what happens to those who have died and are being resuscitated.

 

 

170. 심장 영역(the region of the heart)을 차지한 천적 천사들(Celestial angels)이 와있었고, 그래서 심장에 관해서는 저는 그들과 하나 된 것처럼 보였으며, 마침내 생각과 그에 따른 지각을 제외하고는 저에게 남은 것이 거의 없었는데요, 이런 상태가 몇 시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Celestial angels were present who occupied the region of the heart, so that as to the heart I seemed united with them, and so that at length scarcely anything was left to me except thought, and the consequent perception, and this for some hours.

 

 

171. 그래서 저는 영들의 세계(the world of spirits)에 있는 영들하고의 커뮤니케이션이 중단되었는데요, 그들은 제가 육체의 삶에서 떠났다고 생각한 영들이었습니다. I was thus removed from communication with spirits in the world of spirits, who supposed that I had departed from the life of the body.  

 

※ 지상의 모든 사람에겐 중간 영계, 즉 영들의 세계에서 와 있는 선한 영 둘, 악한 영 둘이 있는데요, 살아있는 모든 사람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사실은 이들이 하는 것이며, 이들이 있어서 사람은 지상에 있을 때에도 영계와 연결이 되어 있고, 그래서 주님과 연결되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에서는 ‘영들의 세계에 있는 영들하고의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표현했네요.

 

 

172. 천적 천사들, 심장(the heart)에 있는 천적 천사들 외에도 두 천사가 제 머리(my head)에 앉아 있었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의 경우도 다 이렇다는 사실이 제게 지각되었습니다. Besides the celestial angels, who occupied the region of the heart, there were also two angels sitting at my head, and it was given me to perceive that it is so with everyone.

 

 

173. 제 머리에 앉아 있는 천사들은 완전한 침묵 가운데 얼굴로만 그들의 생각을 전할 뿐이었는데요, 저로 하여금 제 위에 온 것 같은 또 다른 얼굴(another face)이 있음을 지각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지요. 실제로는 둘이었습니다. 거기 천사가 둘 있었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자신들의 얼굴이 받아들여지는 걸 보면서, 이 사람이 죽었음을 압니다. The angels who sat at my head were perfectly silent, merely communicating their thoughts by the face, so that I could perceive that another face was as it were induced upon me; indeed two, because there were two angels. When the angels perceive that their faces are received, they know that the man is dead.  

 

※ 즉, 아직 심장과 폐가 멈추질 않아 아직 죽은 상태가 아니면 사람은 천사 같은 영적 존재를 알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174. 자신들의 얼굴이 인식되자 그들은 입 주변에 어떤 변화를(certain changes about the region of the mouth) 주더니 그것으로 자신들의 생각을 전했습니다. 천적 천사들은 그렇게 입과 관련된 걸로(by the province of the mouth) 말하는 게 관례이기 때문이며, 저에게는 그들의 생각에 잠긴 듯 말하는 스피치(their cogitative speech) 지각하는 게 허용되었기 때문입니다. After their faces had been recognized, they induced certain changes about the region of the mouth, and thus communicated their thoughts, for it is customary with the celestial angels to speak by the province of the mouth, and it was permitted me to perceive their cogitative speech.

 

 

175. 방부 처리된 시신에서 나는 것 같은, 무슨 향기로운 냄새가 났습니다. 이는 천적 천사들이 있는 곳에서는 시신 냄새가 마치 향기처럼 인식되기 때문인데요, 이런 향기가 나면 악령들은 가까이 다가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An aromatic odor was perceived, like that of an embalmed corpse, for when the celestial angels are present, the cadaverous odor is perceived as if it were aromatic, which when perceived by evil spirits prevents their approach.  

 

※ 성인전을 읽다 보면 이런 비슷한 장면들이 나오는데요, 가령, 성 분도 요셉 라브르의 경우라든지, 성 리드비나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이분들의 시신 및 그 묘지 주위에 오랫동안 향기가 머물렀다는 증언들이 있는데요, 위 기록은 영계에서 일어나는 일 같은데 가끔 이렇게 그 효과가 지상의 시신이나 묘지에까지 나타나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이분들의 시신 및 묘지에 천적 천사들이 찾아와서 나는 향기였다면 말입니다.

 

 

176. 한편, 저는 심장 주위(the region of the heart)가 천적 천사들과 함께 굉장히 가깝게 결합된 상태라는 걸 지각했는데요, 그건 심장의 펄스, 고동으로부터 분명했습니다. Meanwhile I perceived that the region of the heart was kept very closely united with the celestial angels, as was also evident from the pulsation.

 

 

177. 죽음의 순간에 사람은 그가 품고 있던 경건하고 거룩한 생각에 머물러 있도록 천사들이 지키고 있음이 제게 불어넣어졌는데요(It was instilled to me), 다음 사실과 함께 말입니다. 그것은 임종 중인 사람들(those who are dying)은 보통 영생(eternal life)에 대한 생각을 하지, 구원과 행복에 대해서는 아니라는 것과, 그래서 천사들은 그들이 영생에 대한 생각 안에 있도록 지킨다는 것입니다. It was instilled to me that man is kept engaged by the angels in the pious and holy thoughts which he entertained at the point of death; and it was also instilled that those who are dying usually think about eternal life, and seldom of salvation and happiness, and therefore the angels keep them in the thought of eternal life.

 

 

178. 그들은 천적 천사들(the celestial angels)이 떠나기 전까지 천사들에 의해 상당히 오랜 시간, 이 생각 안에 머물러 있는데요, 그러고 나서 이 사람들은 소생, 깨어나게 됩니다. 이때 이들은 이제 영적 천사들(the spiritual angels)에게 연결되고, 영적 천사들이 와서 이들을 돌보게 되지요. 한편, 이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는 지금 몸 안에(in the body) 있다는 희미한 생각 가운데 있습니다. In this thought they are kept for a considerable time by the celestial angels before these angels depart, and those who are being resuscitated are then left to the spiritual angels, with whom they are next associated. Meanwhile they have a dim idea that they are living in the body.

 

 

179. 시신(the internal parts of the body)이 차가워지자마자 생명력들(the vital substances)이 그 사람한테서 분리되는데요, 그게 어디에 있든, 심지어 천 갈래 복잡한 미로 속에 숨어 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바로 이런 게 주님의 자비가 지닌 능력(the efficacy of the Lord’s mercy)인데요, 전에 제가 , 이런 게 살아있다는 거구나,’ 지각하며, 굉장히 제 마음을 사로잡았던 능력, 효력이지요. 이 능력은 쓸데없이 아무 데나 흘리고 다닐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As soon as the internal parts of the body grow cold, the vital substances are separated from the man, wherever they may be, even if inclosed in a thousand labyrinthine interlacings, for such is the efficacy of the Lord’s mercy (which I had previously perceived as a living and mighty attraction) that nothing vital can remain behind.

 

 

180. 머리에 앉아 있던 천적 천사들은 제가 깨어난 후에도 한동안 저와 함께하며, 그러나 묵시적으로만(only tacitly) 대화했습니다. 그들은 제 안의 모든 오류와 거짓을 보고도 그걸 조롱하는 대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빙그레 웃으며 가볍게 여기고 있음이 그들 특유의 생각에 잠긴 듯 말하는 스피치에서 지각되었는데요, 그들의 스피치는 생각에 잠긴 듯 하는, 소리는 안 나는(cogitative, devoid of sound) 말이며, 이런 종류의 언어로 그들은 이런 처음 상태에 있는 영혼들과 말하기 시작합니다. The celestial angels who sat at the head remained with me for some time after I was as it were resuscitated, but they conversed only tacitly. It was perceived from their cogitative speech that they made light of all fallacies and falsities, smiling at them not indeed as matters for derision, but as if they cared nothing about them. Their speech is cogitative, devoid of sound, and in this kind of language they begin to speak with the souls with whom they are at first present.

 

 

181. 이렇게 천적 천사들에 의해 소생된 이 사람은 아직은 희미한 생명(an obscure life)만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 상태에서 다음 순서로 그는 영적 천사들에게 인도되는데요, 약간의 딜레이 후, 천적 천사들은 영적 천사들이 온(have approached) 걸 보고 나서 이 사람한테서 떠납니다. 그리고 이후 제가 본 것은 이 사람이 빛의 혜택(the benefit of light)을 받을 수 있도록 영적 천사들이 어떻게 하는지에 관한 건데요, 이에 대한 설명은 다음 장 도입부에서 같은 주제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As yet the man, thus resuscitated by the celestial angels, possesses only an obscure life; but when the time comes for him to be delivered to the spiritual angels, then after a little delay, when the spiritual angels have approached, the celestial depart; and it has been shown me how the spiritual angels operate in order that the man may receive the benefit of light, as described in the continuation of this subject prefixed to the following chap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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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25, AC.163-167

25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Verse 25.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 25절 속뜻

 

천적 인간의 본성은 주님의 손길로 이노센스의 상태 가운데 있을 수 있었습니다.

 

 

163. 그들의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naked and not ashamed)이라는 것은 그들이 순진무구했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그들의 본성 안으로 오랫동안 순진무구함을 스며들게 하셨기(had instilled) 때문인데요, 그들의 본성이 이런 순진무구함(innocence, 이노센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걸(being unacceptable) 방지하시기 위해서 그러신 것입니다. Their being “naked and not ashamed” signifies that they were innocent, for the Lord had instilled innocence into their own, to prevent its being unacceptable.

 

 

164. 인간의 본성은 앞서 서술한 것처럼, 그저 악할 뿐이며, 만일 눈으로 볼 수 있게 드러날 경우, 그야말로 기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체어리티와 이노센스가 이 본성 안으로 스며들면(when charity and innocence from the Lord are instilled into the own), 그때는 선하고 아름답게 보이는데요, 앞서 154번 글에서 보신 것과 같습니다. 체어리티와 이노센스는 그 본성, 즉 사람 안에 있는 악하고 거짓된 것을 안 보이게 가릴 뿐 아니라(not only excuse the own) 마치 없어진 것 같게도 하는데요(as it were abolish it), 마치 유아들한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유아들한테서는 악과 거짓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즐거운 무슨 놀이처럼 보이기까지도 하는데요(in whom what is evil and false is not merely concealed, but is even pleasing), 그들이 자기들의 부모를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한, 그리고 자기들의 유아적 이노센스가 드러나는 한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 말씀처럼, 왜 사람이 어느 정도의 이노센스를 소유하지 않고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는지 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The own of man, as before stated, is mere evil, and when exhibited to view is most deformed, but when charity and innocence from the Lord are instilled into the own, it then appears good and beautiful (as before observed, n. 154). Charity and innocence not only excuse the own (that is, what is evil and false in man), but as it were abolish it, as may be observed in little children, in whom what is evil and false is not merely concealed, but is even pleasing, so long as they love their parents and one another, and their infantile innocence shows itself. Hence it may be known why no one can be admitted into heaven unless he possesses some degree of innocence; as the Lord has said:

 

14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막10:14-16) Suffer the little children to come unto me, and forbid them not, for of such is the kingdom of God. Verily I say unto you, whosoever shall not receive the kingdom of God as a little child, he shall not enter therein. And he took them up in his arms, put his hands upon them, and blessed them. (Mark 10:14–16)

 

 

165. 부끄러워하지 아니한 벌거벗음(the nakedness of which they were not ashamed)이 이노센스를 의미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 증명되는데요, 온전함(integrity)과 이노센스가 떠났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벌거벗었음을 부끄러워했고, 그런 자신들의 모습에 수치를 느꼈으며, 그래서 자신들을 숨겼다는 사실입니다. 영들의 세계에 있는 표상(表象, the representations in the world of spirits)으로도 마찬가지인데요, 영들이 자신들의 무죄를 입증하고, 죄 없음을 증명하고 싶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이노센스를 증언하기 위해 스스로 벌거벗기 때문입니다. 특히 천국에 있는 순진무구한 사람들한테서 이런 게 두드러지는데요, 그들은 그들의 이노센스한 본성에 따라 화환으로 장식된 벌거벗은 유아의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반면, 그 정도의 이노센스까지는 아닌 사람들은 선지자들이 이따금 보았던 천사들처럼 다이아몬드 실크라 할 수 있는 빛나는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That the “nakedness of which they were not ashamed” signifies innocence is proved by what follows, for when integrity and innocence departed they were ashamed of their nakedness, and it appeared to them disgraceful, and they therefore hid themselves. The same is evident also from the representations in the world of spirits, for when spirits wish to exculpate themselves and prove their guiltlessness, they present themselves naked in order to testify their innocence. Especially is it evident from the innocent in heaven, who appear as naked infants decorated with garlands according to the nature of their innocence; while those who have not so much innocence are clad in becoming and shining garments (of diamond silk as you might say), as the angels were occasionally seen by the prophets.

 

 

166. 이런 것이 본 장 말씀에 들어있는 일부인데요, 그러나 이것들은 사실은 극히 일부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기서 천적 인간을 다루었는데요, 사실 오늘날 이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처럼, 여기서 다룬 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조차 어떤 사람들한테는 모호하고 흐릿하게만 보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Such are some of the things contained in this chapter of the Word, but those here set forth are but few. And as the celestial man is treated of, who at the present day is known to scarcely anyone, even these few things cannot but appear obscure to some.

 

 

167. 만일 누군가 말씀 각 구절마다 얼마나 많은 아르카나가 담겨있는지를 안다면 그는 말문이 막힐 것입니다. 과거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것들이 엄청나게 감추어져 있기 때문인데요(for the number of arcana contained is past telling), 이런 사실이 겉 글자 상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and this is very little shown in the letter). 이걸 좀 간단히 말씀드리면, 영들의 세계(the world of spirits)에서는 말씀의 겉 글자들은 정확히 있는 그대로, 아름답고 질서정연하게, 생생하게 표현, 표상됩니다. 영들의 세계는 표상의 세계(a world of representatives)이기 때문인데요, 거기서 생생하게 표상되는 것은 무엇이든 이번에는 이층천 천사적 영들(the angelic spirits who are in the second heaven)에 의해 그 표상들에 들어있는 아주 세밀한 것들에 대해서까지 지각되며, 그리고 그렇게 이층천 천사적 영들에 의해 지각된 것들은 이번에는 삼층천 천사들(the angels who are in the third heaven)에 의해 도저히 표현 불가한 천사적 아이디어로 풍성하게, 그리고 꽉 차게 지각됩니다. 최종적으로 이것은 주님의 선하신 즐거움(the Lord’s good pleasure)에 따라 무한히 다양하게 지각되기 때문인데요, 이런 게 바로 주님의 말씀입니다. If anyone could know how many arcana each particular verse contains, he would be amazed, for the number of arcana contained is past telling, and this is very little shown in the letter. To state the matter shortly: the words of the letter, exactly as they are, are vividly represented in the world of spirits, in a beautiful order. For the world of spirits is a world of representatives, and whatever is vividly represented there is perceived, in respect to the minute things contained in the representatives, by the angelic spirits who are in the second heaven; and the things thus perceived by the angelic spirits are perceived abundantly and fully in inexpressible angelic ideas by the angels who are in the third heaven, and this in boundless variety in accordance with the Lord’s good pleasure. Such is the Word of the Lord.  

 

※ 각 천국의 역량마다 감당할 수 있는 지혜의 수준이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지상 언어로 기록된 말씀 안에는 처음부터 이 모든 것이 다 들어있지만, 지상에서 육체로 사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지혜는 가장 낮은 등급인 요만큼인 반면, 사후 일층, 이층, 삼층천 천국으로 올라갈수록 더욱 확장되고, 더욱 크게 초월적이라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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