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2:24, AC.160-162

2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Verse 24.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 24절 속뜻

 

주님의 허락으로 천적 인간의 속 사람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즉 겉 사람과 함께 있게 되었는데, 같이 있는 그 둘의 모습이 마치 ‘한 몸을 이룬’ 것처럼 보였습니다.

 

 

160. 부모를 떠나(To leave father and mother)는 속 사람(the internal man)으로부터 물러나는 것인데요, (the external)을 잉태하고 낳는 것은 속(the internal)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내와 합하여(to cleave unto his wife)는 속이 겉 안에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to be one flesh)는 그들, 곧 겉과 속이 거기 같이 있는 것입니다. 전에는 속 사람과 속에서 나온 겉이 영이었지만(were spirit), 지금은 이 둘은 육이 되었기(have become flesh) 때문입니다. 그렇게 천적, 영적 생명은 하나처럼 보이는 본성(the own)에 인접해 있게 되었습니다. To “leave father and mother” is to recede from the internal man, for it is the internal which conceives and brings forth the external; to “cleave unto his wife” is that the internal may be in the external; to “be one flesh,” that they are there together; and because previously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from the internal were spirit, but now they have become flesh. Thus was celestial and spiritual life adjoined to the own, that they might be as one.

 

 

161. 이들 태고교회의 후손은 악하지 않았고, 여전히 선했는데요, 그렇지만 그들은 그러면서도 겉 사람 안, 즉 그들의 본성 가운데 살기를 원했기 때문에, 주님은 이를 허락하셨습니다. 주님의 자비로 그런 그들 안으로 영적, 천적인 것들이 스며들듯 심어지면서 말입니다. 속과 겉이 어떻게 하나로 움직이는지, 어떻게 하나로 나타나는지 하는 건 이쪽에서 저쪽으로의 인플럭스(the influx of the one into the other, 入流)라는 걸 모르면 알 수 없는데요, 이걸 알기 위해 어떤 행위를 하나 생각해 보면, 어떤 행위에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 즉 사랑과 신앙, 그리고 그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 한, 그 행위는 체어리티의 일, 즉 신앙의 열매라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This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not evil, but was still good; and because they desired to live in the external man or in their own, this was permitted them by the Lord; what is spiritual celestial, however, being mercifully instilled therein. How the internal and external act as a one, or how they appear as a one, cannot be known unless the influx of the one into the other is known. In order to conceive some idea of it, take for example an action. Unless in an action there is charity, that is, love and faith, and in these the Lord, that action cannot be called a work of charity, or the fruit of faith.  

 

※ 주님, 사랑, 신앙은 속(the internal), 그것이 체어리티의 행위로 표현되는 건 겉(the external)이라는 뜻입니다.

 

 

162. 모든 진리 및 올바름의 법(All the laws of truth and right)은 그 기원이 천적이거나(from celestial beginnings) 천적 인간의 생활 질서에(from the order of life of the celestial man) 있습니다. 천국 전체가 천적 인간이기 때문인데, 이는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모든 천국과 천적 인간의 모든 것 되시기 때문에, 그래서 이 모든 진리 및 올바름의 법을 천적이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진리 및 올바름의 법이 천적 기원, 즉 천적 인간의 생활 질서에서 내려오는 것처럼, 결혼의 법(the law of marriages) 역시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그렇습니다. 이는 지상의 모든 결혼이 그 기원을 두거나 따라야 하는 천적(혹은 천국적 heavenly) 결혼인데, 이는 한 분 주님과 하나의 천국, 즉 한 분 주님과 하나의 교회, 주님을 머리로 하는 하나의 교회가 있는 그런 결혼입니다. 여기서 비롯되는 결혼의 법은 한 남편과 한 아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럴 경우, 그 부부는 천적 결혼(the celestial marriage)을 표상하며, 천적 인간의 한 전형이 됩니다. 이 법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계시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속 사람에게 새겨져 있었는데요, 그래서 그때는 한 남자는 한 명의 아내만 가졌고, 그렇게 그들은 한 가정을 구성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후손이 속 사람 되기를 중단, 겉 사람이 되면서 그들은 여러 명의 아내와 결혼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결혼에 있어 천적 결혼을 표상했기 때문에, 결혼애(結婚愛, conjugial love)가 그들에게 일종의 천국과 천국적 행복이었지만, 그 교회가 기울어졌을 때, 즉 쇠퇴했을 때 그들은 더 이상 결혼애가 주는 행복 대신, 숫자, 곧 겉 사람의 쾌락인 숫자가 주는 즐거움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주님은 마음의 완악함(hardness of heart)이라 하셨는데요, 주님 친히 가르치시기를, 이것이 그들이 여러 명의 아내와 결혼하는 것을 모세로 하여금 허락하게 하신 이유라 하셨습니다. All the laws of truth and right flow from celestial beginnings, or from the order of life of the celestial man. For the whole heaven is a celestial man because the Lord alone is a celestial man, and as he is the all in all of heaven and the celestial man, they are thence called celestial. As every law of truth and right descends from celestial beginnings, or from the order of life of the celestial man, so in an especial manner does the law of marriages. It is the celestial (or heavenly) marriage from and according to which all marriages on earth must be derived; and this marriage is such that there is one Lord and one heaven, or one church whose head is the Lord. The law of marriages thence derived is that there shall be one husband and one wife, and when this is the case they represent the celestial marriage, and are an exemplar of the celestial man. This law was not only revealed to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but was also inscribed on their internal man, wherefore at that time a man had but one wife, and they constituted one house. But when their posterity ceased to be internal men, and became external, they married a plurality of wives. Because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in their marriages represented the celestial marriage, conjugial love was to them a kind of heaven and heavenly happiness, but when the church declined they had no longer any perception of happiness in conjugial love, but in pleasure from a number, which is a delight of the external man. This is called by the Lord “hardness of heart,” on account of which they were permitted by Moses to marry a plurality of wives, as the Lord himself teaches:

 

5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6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7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막10:5-9) For the hardness of your heart Moses wrote you this precept, but from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God made them male and female. For this caus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twain shall be one flesh; wherefore they are no more twain but one flesh; what therefore God hath joined together let not man put asunder. (Mark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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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23, AC.156-159

2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Verse 23.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use she was taken out of man [vir].

 

※ 23절 속뜻

 

천적 인간은 겉 사람과 속 사람의 차이, 그리고 그 상호관계를 분명히 압니다. 천적 인간의 겉 사람과 속 사람의 관계는 남편과 아내의 하나 됨, 곧 결혼의 관계와도 같습니다.

 

 

156.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은 겉 사람의 본성을 말하며, 여기서 (bone)는 이 본성이 생기가 거의 없음을, ‘(flesh)은 생기 있는 본성을 의미합니다. 또한 남자는 속 사람을 의미하며, 이어지는 구절에 보면 이 속 사람은 겉 사람과 결합하기 때문에, 앞서 여자(woman)라고 했던 본성을 여기서는 아내(wife)라고 합니다. ‘이제(Now)는 이 시점에서 이렇게 되었음을 말하는데요, 이때 상태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 signify the own of the external man; “bone,” this own not so much vivified, and “flesh,” the own that is vivified. Man, moreover, signifies the internal man, and from his being so coupled with the external man as is stated in the subsequent verse, the own which was before called “woman” is here denominated “wife.” “Now” signifies that it was thus effected at this time because the state was changed.

 

※ 우리말 개역개정에는 이 ‘이제’에 대한 번역이 누락되어 있습니다.

 

 

157.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이 그 안에 인터널(the internal, 속에 해당하는 것, 內的인 것)이 있는 겉 사람의 본성을 의미하는 한, 그래서 고대에는 자신들의 본성(their own [proprii])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게 한 가족(one house)이든, 가계(one family), 기타 어떤 종류의 관계(any degree of relationship)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로 불렸습니다. 그래서 라반도 야곱을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Inasmuch as “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 signified the own of the external man in which was the internal, therefore in ancient times all those were called “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 who could be called their own [proprii], and were of one house, or of one family, or in any degree of relationship. Thus Laban said of Jacob,

 

라반이 이르되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하였더라 야곱이 한 달을 그와 함께 거주하더니 (창29:14) Surely thou art my bone and my flesh. (Gen. 29:14)

 

그리고 아비멜렉 또한 자기 어머니의 혈육들(his mother’s brethren)과 외가 사람들(the family of the house of his mother’s father)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And Abimelech said of his mother’s brethren, and of the family of the house of his mother’s father,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 하니 (삿9:2) Remember that I am your bone and your flesh. (Judges 9:2)

 

이스라엘 지파들(The tribes of Israel)도 다윗에게 자신들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The tribes of Israel also said of themselves to David,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한 골육이니이다 (삼하5:1) Behold, we are thy bone and thy flesh. (2 Sam. 5:1)

 

 

158. 사람(man, 아담)은 속 사람, 즉 같은 말이지만, 총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사야를 보면 분명합니다. That man signifies the internal man, or what is the same, one who is intelligent and wise, is plain from Isaiah:

 

내가 본즉 한 사람도 없으며 내가 물어도 그들 가운데에 한 말도 대답할 조언자가 없도다 (사41:28) I behold, and there is no man [vir], even among them, and there is no counselor, (Isa. 41:28)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이 없다는 뜻이지요. 예레미야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meaning none wise and intelligent. Also in Jeremiah: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렘5:1) Run ye to and fro through the streets of Jerusalem, and see if ye can find a man, if there be any executing judgment, seeking the truth. (Jer. 5:1)

 

정의를 행하는 자(One who executes judgment)는 지혜로운 사람을, ‘진리를 구하는 자(one who seeks the truth)는 총명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One who executes judgment” means a wise person; and “one who seeks the truth,” an intelligent one.

 

 

159. 그러나 천적 인간의 상태(the state of the celestial man)를 이해하지 못하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를 지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천적 인간 안에서 속 사람은 겉 사람과 구별되되, 실제로는 너무도 구별되어 속 사람, 겉 사람에게 속한 것은 각각 무엇이며,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해 주님에 의해 어떻게 통치되는지를 천적 인간은 지각합니다. 그러나 이들 천적 인간의 후손들의 상태(the state of the posterity of this celestial man)는 자신들의 본성, 곧 자신들의 겉 사람에게 속한 본성을 징그럽게 원한 결과, 너무도 변질, 더 이상은 겉 사람과 속 사람을 구별할 수 없게 되었고, 오히려 속 사람이라는 거하고 겉 사람이라는 거하고 같은 거 아냐? 할 지경이 되었는데요, 이런 일은 사람이 자신의 본성으로 기울어질 때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But it is not easy to perceive how the case is with these things unless the state of the celestial man is understood. In the celestial man the internal man is distinct from the external, indeed so distinct that the celestial man perceives what belongs to the internal man, and what to the external, and how the external man is governed through the internal by the Lord. But the state of the posterity of this celestial man, in consequence of desiring their own, which belongs to the external man, was so changed that they no longer perceived the internal man to be distinct from the external, but imagined the internal to be one with the external, for such a perception takes place when man inclines to his 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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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22, AC.151-155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Verse 22.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 22절 속뜻

 

주님은 사람의, 생명 없는 본성을 일으키셔서 대신 주님의 생명으로 생생하게 업그레이드된 새로운 본성으로 만드십니다.

 

 

151. 만드시고(to build)는 쓰러져있던 것을 일으켜 세우는 것을, ‘갈빗대(the rib)는 생명 없는 상태에 있는(not vivified) 사람의 본성을, ‘여자(a woman)는 주님에 의해 생명을 갖게 된(vivified) 사람의 본성을,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he brought her to the man)는 그의 본성인 것(what is his own)을 그에게 승인하였음(was granted him)을 의미합니다. 이 교회의 후손은 그들의 선조처럼 천적 인간 되는 걸 원치 않고, 대신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살아가고자(to be under their own self-guidance) 하였고,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본성 쪽으로 기울어졌는데, 결국은 그런 본성이 그들에게 승인, 곧 그들이 원하는 대로 되었습니다(it was granted to them). 하지만 주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갖게 된 본성 역시 여전히 허락되었고, 그래서 이것을 여자(a woman), 나중에 아내(a wife)라고 하였습니다. By to “build” is signified to raise up what has fallen; by the “rib,” man’s own not vivified; by a “woman,” man’s own vivified by the Lord; by “he brought her to the man,” that what is his own was granted him. The posterity of this church did not wish, like their parents, to be a celestial man, but to be under their own self-guidance; and, thus inclining to their own, it was granted to them, but still an own vivified by the Lord, and therefore called a “woman,” and afterwards a “wife.”  

 

※ 지금까지 ‘본성’으로 번역해오고 있는 ‘own’을 NCE 역에서는 ‘a sense of self’, ‘selfhood’, ‘a sense of autonomy’, 혹은 ‘identity’ 등으로도 옮기고 있다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52.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것(woman was not formed out of the rib of a man)과 지금까지 사람들이 알아차렸던 그 어떤 것보다도 더 깊은 아르카나(deeper arcana)가 여기 들어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봐도 금방 눈치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자(the woman)가 사람의 본성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도 알 수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속아 넘어간 사람이 다름 아닌 여자였다(it was the woman who was deceived)는 사실입니다. 사람을 속일 수 있는 건 사람의 본성밖에는, 즉 자기 사랑, 세상 사랑(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말고는 없기 때문입니다. It requires but little attention in anyone to discern that woman was not formed out of the rib of a man, and that deeper arcana are here implied than any person has heretofore been aware of. And that by the “woman” is signified man’s own may be known from the fact that it was the woman who was deceived; for nothing ever deceives man but his own, or what is the same,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3:1-6)

 

 

153. 갈빗대를 가리켜 여자를 만드시고(to be built into a woman)라고는 하시지만, 전에 거듭남을 다룰 때처럼, ‘창조하다’(created), ‘짓다’(formed), ‘만들다’(made)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만드는 것’(to build)은 쓰러져 있는 걸 일으켜 세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이 뜻으로 쓰이는 곳마다, ‘만드는 것’(to build)은 주로 악에 관한, ‘일으켜 세우는 것’(to raise up)은 거짓에 관한, 그리고 새롭게 하는 것’(to renew)는 둘 다에 관한 서술일 때입니다. 이사야입니다. The rib is said to be “built into a woman,” but it is not said that the woman was “created,” or “formed,” or “made,” as before when treating of regeneration. The reason of this is that to “build” is to raise up that which has fallen; and in this sense it is used in the Word, where to “build” is predicated of evils; to “raise up,” of falsities; and to “renew,” of both; as in Isaiah: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옛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사61:4) They shall build the wastes of eternity, they shall set up again the ancient desolations, and they shall renew the cities of the waste, the desolations of generation and generation. (Isa. 61:4)

 

이 구절과 다른 구절에서 황폐함(Wastes)는 악을, ‘무너짐(desolations)은 거짓을 의미하며, ‘쌓는 것(to build)은 전자, ‘다시 일으키는 것(to set up again)은 후자에 적용됩니다. 선지서 이곳저곳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 이런 구분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예를 들면, 예레미야입니다. Wastes” in this and other passages signify evils; “desolations,” falsities; to “build” is applied to the former, to “set up again” to the latter, and this distinction is carefully observed in other places by the prophets, as where it is said in Jeremiah: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춤추며 나오리라 (렘31:4) Yet still will I build thee, and thou shall be built, O virgin of Israel. (Jer. 31:4)

 

 

154. 사람의 본성이 아니면서, 그리고 사람의 본성에서 나온 것도 아니면서(not man’s own, and from man’s own) 악하고 거짓된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악 그 자체이며, 그 결과, 사람이라는 것은 악과 거짓 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인데요, 이것이 사실임을 저는 영들의 세계에서 계속 보고 있어서 분명하게 아는 것입니다. 거기서는 사람의 본성에 속한 것들이 눈에 보이게 제시되는데(presented to view in the world of spirits), 그때 그것들은 너무나 기형적이어서 어떻게 형용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추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본성의 정도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말입니다(yet with a difference according to the nature of the own). 그때 자신의 본성에 속한 것들을 자기 눈으로 보는 사람은 그 실제 모습을 보고는 공포에 휩싸일 정도로 충격을 받아 마치 악마로부터 도망가듯 자신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어 하지요. 하지만 참으로 주님으로 말미암아 소생한 사람의 본성에 속한 것들(truly the things of man’s own that have been vivified by the Lord)은 반대로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주님께 속한 천적 특성들(the celestial of the Lord)이 적용될 수 있는, 그런 삶을 따라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실제로 체어리티를 받거나 체어리티로 소생한 사람들(those who have been endowed with charity, or vivified by it)은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소년, 소녀처럼 보입니다. 또 벌거벗은 유아처럼 이노센스 가운데 있는 사람들(those who are in innocence, like naked infants)은 가슴과 머리 위 왕관을 두른 꽃 화환으로 다양하게 장식되어 있는데요, 다이아몬드 같은 오로라 가운데서 즐겁게 지내며(living and sporting in a diamond-like aura), 가장 내적인 데서 오는 행복에 관한 퍼셉션(a perception of happiness from the very inmost)을 갖고 살아가지요. Nothing evil and false is ever possible which is not man’s own, and from man’s own, for the own of man is evil itself, and consequently man is nothing but evil and falsity. This has been evident to me from the fact that when the things of man’s own are presented to view in the world of spirits, they appear so deformed that it is impossible to depict anything more ugly, yet with a difference according to the nature of the own, so that he to whom the things of the own are visibly exhibited is struck with horror, and desires to flee from himself as from a devil. But truly the things of man’s own that have been vivified by the Lord appear beautiful and lovely, with variety according to the life to which the celestial of the Lord can be applied; and indeed those who have been endowed with charity, or vivified by it, appear like boys and girls with most beautiful countenances; and those who are in innocence, like naked infants, variously adorned with garlands of flowers encircling their bosoms, and diadems upon their heads, living and sporting in a diamond-like aura, and having a perception of happiness from the very inmost.

 

 

155.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a rib was built into a woman)라는 이 말에는 지금까지 사람들이 글자로 된 겉뜻만 가지고 발견할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깊이 감추어져 있는데요, 그 이유는 주님의 말씀은 그 가장 깊은 뜻에 있어 주님 자신과 주님의 나라에 관한 것이며, 이 사실에서 말씀의 모든 생명이 나오는,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보고 있는 이 본문에서 그 가장 핵심은 바로 천국의 결혼(the heavenly marriage)입니다. 천국 결혼은 그 본성에 있어 주님에 의해 소생될 때, 주님의 신부요 아내(the bride and wife)라 일컬음을 받는 그런 것입니다. 이렇게 소생된 인간 본성은 모든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에 관한 퍼셉션을 가지며, 그 결과, 표현 불가한 행복과 함께 모든 지혜와 지성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신부요 아내라고 하는, 이 소생된 본성은 어떻게 간결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천사들한테서 관찰할 수 있는 사실, 곧 자신들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걸 지각하고 있다는 것인데요, 천사들한테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비록 그들일지라도 이런 주제를 벗어나 한눈파는 순간, 그들 역시 순전히 자신들 힘으로 살아간다는 생각밖에는 할 수 없지만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럴지라도 그들에게는 어떤 것이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에서 살짝만 벗어나도 그 변화를 지각하는, 그런 본성에 관한 어펙션(a general affection of such a nature)이 일반적으로 있는데요, 그 결과, 그들은 자신들은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퍼셉션 가운데 누구나 있는 동안,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평화와 행복의 즐거움이 그들 가운데에는 존재합니다. 아래 예레미야에서 말하는 바 역시 바로 이런 본성을 의미합니다. The words “a rib was built into a woman” have more things inmostly concealed in them than it is possible for anyone ever to discover from the letter; for the Word of the Lord is such that its inmost contents regard the Lord himself and his kingdom, and from this comes all the life of the Word. And so in the passage before us, it is the heavenly marriage that is regarded in its inmost contents. The heavenly marriage is of such a nature that it exists in the own, which, when vivified by the Lord, is called the “bride and wife” of the Lord. Man’s own thus vivified has a perception of all the good of love and truth of faith, and consequently possesses all wisdom and intelligence conjoined with inexpressible happiness. But the nature of this vivified own, which is called the “bride and wife” of the Lord, cannot be concisely explained. Suffice it therefore to observe that the angels perceive that they live from the Lord, although when not reflecting on the subject they know no other than that they live from themselves; but there is a general affection of such a nature that at the least departure from the good of love and truth of faith they perceive a change, and consequently they are in the enjoyment of their peace and happiness, which is inexpressible, while they are in their general perception that they live from the Lord. It is this own also that is meant in Jeremiah, where it is said:

 

반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 (렘31:22) Jehovah hath created a new thing in the earth, a woman shall compass a man. (Jer. 31:22)

 

이 구절에서도 여자(a woman)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소생된 본성을 의미하며, 이것을 둘러싸리라(to compass)라는 표현으로 서술한 것은, 이 본성이 둘러싸고 있는 모양이 마치 갈비뼈가 심장을 둘러싸 보호하고 있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It is the heavenly marriage that is signified in this passage also, where by a “woman” is meant the own vivified by the Lord, of which woman the expression “to compass” is predicated, because this own is such that it encompasses, as a rib made flesh encompasses the he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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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21, AC.147-150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Verse 21. And Jehovah God caused a deep sleep to fall upon the man, and he slept; and he took one of his ribs, and closed up the flesh in the place thereof.

 

※ 21절 속뜻

 

사람은 모든 걸 제힘으로 하는 줄 압니다. 이런 사람의 본성이 ‘갈빗대’이며, 사람이 이런 상태에 있는 것이 ‘깊이 잠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그러나 사실은 그게 아니고, 사람은 오직 주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임을 깨닫는 것, 그것이 바로 ‘’입니다.

 

 

147. 가슴에 속한 뼈인 갈빗대(a rib)는 사람의 고유 본성(man’s own)을 의미하는데요, 그 안에 생기라고는 거의 없지만, 실제로는 그가 무척 소중히 여기는 그런 본성(an own which is dear to him)입니다. ‘살로 대신 채우시고(flesh in the place of the rib)는 그 안에 생기가 있는 본성(an own in which there is vitality), ‘깊이 잠들게(a deep sleep)는 그의 현 상태를 말하는데요, 사람이 이 상태가 되면, 그는 자신의 본성이 자신으로부터 말미암는 줄(he might seem to himself to have what is his own) 알게 되지요. 이 상태는 잠든 상태(sleep)와 유사한데요, 이 상태에 있는 동안은 사람은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말미암는 게 아닌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가 사실은 그렇지 않음을, 이것이 거짓임을 알게 되면서부터 그는 정신을 차리며, 잠에서 깬 상태가 되지요. By a “rib,” which is a bone of the chest, is meant man’s own, in which there is but little vitality, and indeed an own which is dear to him; by “flesh in the place of the rib” is meant an own in which there is vitality; by a “deep sleep” is meant the state into which he was let so that he might seem to himself to have what is his own, which state resembles sleep, because while in it he knows not but that he lives, thinks, speaks, and acts, from himself. But when he begins to know that this is false, he is then roused as it were out of sleep, and becomes awake.

 

 

148. 사람의 고유 본성(man’s own), 실제로 그가 무척 소중히 여기는 본성을 가슴에 속한 뼈인 갈빗대(a rib)라 하는 이유는, 태고인들 사이에서 가슴은 체어리티(charity)를 상징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심장과 폐가 들어있기 때문이지요. (bones)라는 건 아주 꺼림칙한 걸 의미했는데요, 그 안에 생기라고는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flesh)은 생기있는 걸 가리켰지요. 이들 상징들은(The ground of these significations)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알려진 가장 깊은 아르카나(the deepest arcana) 중 일부인데요, 이 아르카나는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에 속한 것으로서,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The reason why what is man’s own (and indeed an own which is dear to him) is called a “rib,” which is a bone of the chest, is that among the most ancient people the chest signified charity, because it contains both the heart and the lungs; and bones signified the viler things, because they possess a minimum of vitality; while flesh denoted such as had vitality. The ground of these significations is one of the deepest arcana known to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149. 말씀에서도 사람의 고유 본성은 (bones)로 상징되며, 실제로 주님에 의해 살아난 본성(an own vivified by the Lord)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입니다. In the Word also, man’s own is signified by “bones,” and indeed an own vivified by the Lord, as in Isaiah: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사58:11) Jehovah shall satisfy thy soul in droughts, and make thy bones alert, and thou shalt be like a watered garden. (Isa. 58:11)

 

너희가 이를 보고 마음이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여호와의 손은 그의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의 원수에게 더하리라 (사66:14) Then shall ye see, and your heart shall rejoice, and your bones shall sprout as the blade. (Isa. 66:14)

 

시편입니다. In David: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구냐 그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이라 하리로다 (시35:10) All my bones shall say, Jehovah, who is like unto thee? (Ps. 35:10)

 

이는 에스겔에서 더욱 분명한데요, 거기 뼈들에 대해 살을 입히고(receiving flesh),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having spirit put into them) 하시는 부분입니다. This is still more evident from Ezekiel, where he speaks of bones receiving flesh, and having spirit put into them:

 

1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4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5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6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겔37:1, 4-6) The hand of Jehovah set me in the midst of the valley, and it was full of bones; and he said to me, prophesy upon these bones, and say unto them, O ye dry bones, hear the word of Jehovah; thus saith the Lord Jehovih to these bones, Behold, I bring breath [spiritus] into you, and ye shall live, and I will lay sinews upon you, and will make flesh come upon you, and cover you with skin, and I will put breath in you, and ye shall live, and ye shall know that I am Jehovah. (Ezek. 37:1, 4–6)

 

[2] 사람의 본성(The own of man)은 천국에서 바라보았을 때는 뭔가 완전히 뼈처럼(bony) 보이는, 못 움직이며 매우 추한,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그 자체로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주님에 의해 생기를 얻으면, 그때는 살처럼(like flesh) 보입니다. 사람의 본성이라는 것은 그저 죽어있는 어떤 것(a mere dead thing)에 불과합니다. 본인에게는 어떤, 실제로는 모든 것으로 보일지라도 말입니다. 그의 안에 있는(lives in him)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모두 주님의 생명에서 나온 것(from the Lord’s life)이며, 만일 이 생명이 사라지면 그는 쓰러져 죽은 상태가 되는데 마치 돌처럼 되고 맙니다. 사람은 생명의 기관일 뿐(only an organ of life)이며, 이런 게 기관이고, 이런 게 생명의 애정(the life’s affection)이기 때문입니다. 주님만이 자신의 본성이라는 것을 가지고 계십니다(The Lord alone has what is his own). 이것으로(by this own) 그는 사람을 구속하셨으며(redeemed man), 이것으로 그는 사람을 구원하십니다(saves him). 주님의 본성은 생명이시며(The Lord’s own is life), 주님의 본성으로부터 사람의 본성, 이것은 그 자체로 죽은 것인데, 이 본성이 살아나게 됩니다(is made alive). 주님의 본성은 또 누가복음의 다음 주님 말씀으로도 상징됩니다. The own of man, when viewed from heaven, appears like a something that is wholly bony, inanimate, and very ugly, consequently as being in itself dead, but when vivified by the Lord it looks like flesh. For man’s own is a mere dead thing, although to him it appears as something, indeed as everything. Whatever lives in him is from the Lord’s life, and if this were withdrawn he would fall down as dead as a stone; for man is only an organ of life, and such as is the organ, such is the life’s affection. The Lord alone has what is his own; by this own he redeemed man, and by this own he saves him. The Lord’s own is life, and from his own, man’s own, which in itself is dead, is made alive. The Lord’s own is also signified by the Lord’s words in Luke: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눅24:39) A spirit hath not flesh and bones as ye see me have. (Luke 24:39)

 

이는 또 유월절 어린 양의 뼈를 꺾지 말라(not a bone of the paschal lamb being broken)는 의미이기도 합니다(12:46). It was also meant by not a bone of the paschal lamb being broken (Exod. 12:46).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지며 (출12:46)

 

 

150. 사람이 자신의 본성 가운데 있거나(when in his own), 가정하기를 나는 내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 거야(he supposes that he lives from himself) 하는 상태를 깊은 잠(deep sleep)에 비유하고 있으며, 실제로 고대인들이 이렇게 했습니다. 말씀에서는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they have poured out upon them the spirit of deep sleep, 사29:10), 그리고 그들이 잠을 잔다(they sleep a sleep, 렘51:57)고 말합니다. The state of man when in his own, or when he supposes that he lives from himself, is compared to “deep sleep,” and indeed by the ancients was called deep sleep; and in the Word it is said of such that they have “poured out upon them the spirit of deep sleep” (Isa. 29:10), and that they sleep a sleep (Jer. 51:57).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 (사29:10)

 

만군의 여호와라 일컫는 왕이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 고관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도백들과 태수들과 용사들을 취하게 하리니 그들이 영원히 잠들어 깨어나지 못하리라 (렘51:57)

 

사람의 본성은 그 자체로 죽은 것이며, 아무도 자신에게서는 어떤 생명도 얻을 수 없다(no one has any life from himself)는 사실을 영들의 세계인 중간 영계에서 그동안 매우 분명하게 보아왔는데요, 자신의 본성밖에는 사랑할 줄 모르는, 그리고 자기는 오직 자신의 힘으로만 살아간다고 고집스럽고 완강하게 주장하던 악한 영들은 그러나 실제 겪어보고 나서야(by sensible experience) 그게 아니라고, 자신들은 자기 힘으로 사는 게 아니었다고, 인정하긴 싫지만 할 수 없이 억지로 고백하는(forced to confess) 것이었습니다. 수년간 저에게는 사람의 본성의 경우는 어떻게 되는지를(how the case is with what is man’s own)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알 수 있도록 허용되었으며, 또 다음과 같은 사실들, 곧 나 스스로는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는 것, 모든 생각의 실마리가 외부에서 제 안으로 흘러들어온다는 것, 그리고 종종 그것이 어떻게, 그리고 언제 흘러들어오는지를 저는 알(perceive) 수 있었다는 것 등의 사실들에 대해 수년간 저는 분명히 지각하며(to perceive) 지내왔습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사는 거야 하는 사람은 그러므로 거짓됨 가운데 있으며, 그걸 믿기까지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악과 거짓에게 내맡기는(appropriates) 셈이 되는데요, 이 악과 거짓은 그가 만일 이 경우의 실상을 알았더라면(in accordance with the real truth of the case)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그런 것입니다. That man’s own is in itself dead, and that no one has any life from himself, has been shown so clearly in the world of spirits, that evil spirits who love nothing but their own, and obstinately insist that they live from themselves, were convinced by sensible experience, and were forced to confess that they do not live from themselves. For a number of years I have been permitted in an especial manner to know how the case is with what is man’s own, and it has been granted to me to perceive clearly that I could think nothing from myself, but that every idea of thought flows in, and sometimes I could perceive how and whence it flowed in. The man who supposes that he lives from himself is therefore in what is false, and by believing that he lives from himself appropriates to himself everything evil and false, which he would never do if his belief were in accordance with the real truth of the c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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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19-20, AC.142-146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Verses 19, 20 And Jehovah God formed out of the ground every beast of the field, and every fowl of the heavens, and brought it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it; and whatsoever the man called every living soul, that was the name thereof. And the man gave names to every beast, and to the fowl of the heavens, and to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 but for the man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

 

※ 19, 20절 속뜻

 

주님은 천적 인간의 안에 천적, 영적 정서들, 곧 천적 인간의 의지와 지성에 관한 것들을 조성하시고, 그로 하여금 그것들이 어떤 건지 느낄 수 있게 하셨으며, 그는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그것들을 느꼈고, 그것들을 잘 알았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천적 인간의 본성을 천국의 것으로 업그레이드시켜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천적 인간은 여전히 자신의 것, 자기 본성에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142. 짐승, 가축(beasts)은 천적 애정(celestial affections), ‘공중의 새(fowls of the heavens)는 영적 애정(spiritual affections)을 의미하는데요, 다시 말씀드리면, ‘짐승(beasts)은 의지에 속한 것(things of the will), ‘(fowls)는 이해에 속한 것(things of the understanding)을 의미한다는 말씀입니다.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To bring them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them)는 그로 하여금 그것들의 퀄러티를 알게 하심(to enable him to know their quality)이며, 아담이 그들에게 이름을 주니라(giving them names)는 그가 그것을 알고 있었음(he knew it)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에게 주신 선에 속한 애정의 퀄러티(the quality of the affections of good), 그리고 진리에 관한 지식의 퀄러티(the quality of the knowledges of truth)를 그가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 그는 여전히 자신의 고유 본성으로 기울어졌는데요(he inclined to his own), 이를 전과 같이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처럼 같은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By “beasts” are signified celestial affections, and by “fowls of the heavens,” spiritual affections; that is to say, by “beasts” are signified things of the will, and by “fowls” things of the understanding. To “bring them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them” is to enable him to know their quality, and his “giving them names” signifies that he knew it. But notwithstanding that he knew the quality of the affections of good and of the knowledges of truth that were given him by the Lord, still he inclined to his own, which is expressed in the same terms as before—that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

 

 

143. 고대에는 가축(beasts)짐승(animals)이 사람한테 있는 애정과 그와 같은 걸(affections and like things in man) 의미했다는 사실이 오늘날엔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 사람들은 천적 사고(a celestial idea)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영계(the world of spirits)에서는 동물을 가지고 그런 거, 곧 애정 같은 걸 표현하며, 실제로도 동물의 생긴 모양대로(by such animals as they are like) 해당 애정을 표현했기 때문에, 그 당시 그들은 그런 식으로 말했고, 그때 그들은 그밖에 무슨 다른 의미로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에서도 짐승들이 언급되는 곳마다 일반적이든 구체적이든 무슨 다른 걸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언의 말씀 전체가 이런 걸로 가득하며, 그렇기 때문에 각 짐승이 특별히 뭘 의미하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그 말씀에 담긴 속뜻(what the Word contains in the internal sense)이 무엇인지를 절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앞서도 보았듯, 짐승들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악한, 즉 해로운 짐승이 있는가 하면, 선한, 즉 무해한 짐승이 있지요. 선한 짐승들은 선한 애정들, 예를 들면, (sheep), 어린 양(lambs), 비둘기 같은 것들이지요. 여기서 다루는 인간이 천적 인간, 혹은 천적, 영적 인간(the celestial, or the celestial spiritual man)이기 때문에, 이들 선한 짐승들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짐승(beasts)이 의미하는 바가 일반적으로 애정(affections)이라는 것을 위, 곧 말씀 몇몇 구절들에서 확인할 수 있었으므로(AC.45, 46), 여기서 굳이 다시 상세히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That by “beasts” and “animals” were anciently signified affections and like things in man, may appear strange at the present day; but as the men of those times were in a celestial idea, and as such things are represented in the world of spirits by animals, and in fact by such animals as they are like, therefore when they spoke in that way they meant nothing else. Nor is anything else meant in the Word in those places where beasts are mentioned either generally or specifically. The whole prophetic Word is full of such things, and therefore one who does not know what each beast specifically signifies, cannot possibly understand what the Word contains in the internal sense. But, as before observed, beasts are of two kinds— evil or noxious beasts, and good or harmless ones—and by the good beasts are signified good affections, as for instance by sheep, lambs, and doves; and as it is the celestial, or the celestial spiritual man, who is treated of, such are here meant. That “beasts” in general signify affections may be seen above, confirmed by some passages in the Word (n. 45–46), so that there is no need of further confirmation.

 

 

144. 이름으로 부르기(to call by name)는 그 퀄리티를 안다(to know the quality)는 의미인데요, 이는 고대인들은 이름(the name)을 가지고 어떤 것의 에센스(the essence of a thing)를 이해했기 때문이며, 무엇을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e)를 통해 그들은 자신들이 그 퀄리티에 대해 아는 걸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자녀에게 이름을 지어 줄 때, 어떤 의미를 담아 주었기(according to the things which were signified) 때문인데요, 모든 이름은 그 안에 무언가 고유한(something peculiar in it), 그 이름으로부터나 그 이름에 의해서나, 자녀의 어떤 기원과 고유 특성(the origin and the nature of their children)을 알 수 있는, 그런 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기원과 특성에 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로 하고 있는, 지금 이 아르카나 주석 작업 중반, 야곱의 열두 아들을 다루는 부분에서 아시게 됩니다. 이름들에는 그렇게 이름하는 것의 근원과 퀄리티(the source and quality of the things named)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이름으로 부르기(calling by name)를 그밖에 무슨 다른 걸로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것이 그 시대 사람들의 언어관습(the customary mode of speaking among them)이었습니다만, 그러나 이걸 이해하지 못하시는 분은 말씀에 나오는 이름들을 그런 의미들을 부여하며 읽어야 한다는 사실에 굉장히 놀라실 수도 있겠습니다. That to “call by name” signifies to know the quality, is because the ancients by the “name” understood the essence of a thing, and by “seeing and calling by name” they understood to know the quality. The reason was that they gave names to their sons and daughters according to the things which were signified, for every name had something peculiar in it, from which, and by which, they might know the origin and the nature of their children, as will be seen in a future part of this work, when, of the Lord’s Divine mercy, we come to treat of the twelve sons of Jacob. As therefore the names implied the source and quality of the things named, nothing else was understood by “calling by name.” This was the customary mode of speaking among them, but one who does not understand this may wonder that such things should be signified.

 

 

145. 말씀에서도 이름(name)은 어떤 것의 에센스(the essence of a thing),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e)는 그 퀄리티에 관해 아는 걸(to know the quality) 의미합니다. 이사야입니다. In the Word also by “name” is signified the essence of a thing, and by “seeing and calling by name” is signified to know the quality. As in Isaiah:

 

3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 네 이름을 부르는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 4내가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자 이스라엘 곧 너를 위하여 네 이름을 불러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 (사45:3-4) I will give thee the treasures of darkness, and hidden riches of secret places, that thou mayest know that I, Jehovah, who call thee by thy name, am the God of Israel. For Jacob my servant’s sake, and Israel my chosen, I have even called thee by thy name, I have surnamed thee, and thou hast not known me. (Isa. 45:3–4)

 

이 구절에서 ‘네 이름을 불러’(to call by name)와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to surname)는 그 퀄리티를 예견한다(to foreknow the quality)는 의미입니다. 계속해서 In this passage, to “call by name” and to “surname” signifies to foreknow the quality. Again: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사62:2) Thou shalt be called by a new name, which the mouth of Jehovah shall declare, (Isa. 62:2)

 

앞뒤 구절에 나오는 것처럼, 또 다른 캐릭터가 될 것(to become of another character)을 의미하지요. 계속해서 signifying to become of another character, as appears from the preceding and subsequent verses. Again: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43:1) Fear not, O Israel, for I have redeemed thee, I have called thee by thy name; thou art mine, (Isa. 43:1)

 

그가 그들의 퀄리티를 알고 계셨음을 가리키시면서, 계속해서 같은 이사야 말씀입니다. denoting that he knew their quality. Again in the same prophet: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사40:26) Lift up your eyes on high, and behold who hath created these things, that bringeth out their army by number. He will call them all by name, (Isa. 40:26)

 

그는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셨음을 의미합니다. 계시록입니다. meaning that he knew them all. In the Revelation:

 

4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계3:4-5) Thou hast a few names even in Sardis who have not defiled their garments: he that overcometh, the same shall be clothed in white raiment, and I will not blot out his name out of the book of life, but I will confess his name before my Father, and before his angels. (Rev. 3:4–5)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계13:8) Whose names are not written in the lamb’s book of life. (Rev. 13:8)

 

이들 구절에서 이름(names)은 결코 말 그대로 이름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퀄리티를 의미하는데요, 심지어 천국에서는 그 누구도 이름이 아닌, 그의 퀄리티로만 알려지지요. By “names” in these passages are by no means meant names, but qualities; nor is the name of anyone ever known in heaven, but his quality.

 

 

146.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을 통해, 그 상징하고 있는 속뜻(the connection of what is signified)을 보실 수 있는데요, 18절에 보면,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with him) 하시고는, 지금은 짐승(beasts)(birds)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는 전에 다룬 적이 있던 것이지요. 그리고는 즉시 또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for the man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 일련의 흐름의 속뜻은 이렇습니다. 곧 그가 비록 자신의 퀄리티, 곧 선에 관한 애정과 진리에 관한 지식(the affections of good, and knowledges of truth)에 대해 자신의 퀄리티가 어느 정도인지를, 또는 어떤 상태인지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어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본성을 향해 기울어졌다는 것(still he inclined to his own)입니다. 자신의 고유 본성을 간절히 원하는(to desire what is their own) 그런 사람들은 주님에게 속한 것들(the things of the Lord)에 대한 멸시를 시작하기 때문인데요, 주님에게 속한 것이 아무리 그에게 분명하게 표현되고 보여도 말입니다. From what has been stated, the connection of what is signified may be seen. In verse 18 it is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with him,” and presently “beasts” and “birds” are spoken of, which nevertheless had been treated of before, and immediately it is repeated that “for the man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 which denotes that although he was permitted to know his quality as to the affections of good, and knowledges of truth, still he inclined to his own; for those who are such as to desire what is their own, begin to despise the things of the Lord, however plainly they may be represented and shown to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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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18, AC.138-141

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Verse 18,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with him.

 

※ 18절 속뜻

 

주님의 인도 아래 살되 무슨 로봇이나 갓난아이처럼 아주 작은 것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그런 유약한 상태가 아닌, 건강한 자아, 성장한 자아를 가지고 자발적으로 주님의 인도 아래 천사들처럼 사는 것, 이를 위해 주님은 천적 인간에게 자치를 허락하시며, 그의 자치를 돕도록 도우십니다. 이것을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신 것입니다.

 

 

138. 혼자(alone)는 사람이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만족하는 대신, 자기 자신(self)과 세상의 인도를 받으며 살기를 간절히 원했음을,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은 사람의 고유 본성(man’s own)을 의미하는데, 이는 뒤에서 여자가 된 갈빗대(a rib built into a woman)라고 하는 것입니다. By “alone” is signified that he was not content to be led by the Lord, but desired to be led by self and the world; by a “help as with him” is signified man’s own, which is subsequently called a “rib built into a woman.”

 

 

139. 고대에는 천적 인간들로서 주님의 인도하심 아래(under the Lord’s guidance as celestial men)홀로 산다(to dwell alone)는 말을 듣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더 이상 악이나 악령에 감염되지 않았기 때문인데요, 이것을 또한 유대교회에서는 가나안 족속들을 몰아낸 후, 이스라엘이 혼자 사는 걸로 표상하고 있지요. 그래서 말씀에서 주님의 교회를 종종 홀로, 혼자(alone)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에서처럼 말입니다. In ancient times those were said to “dwell alone” who were under the Lord’s guidance as celestial men, because such were no longer infested by evils, or evil spirits. This was represented in the Jewish church also by their dwelling alone when they had driven out the nations. On this account it is sometimes said of the Lord’s church, in the Word, that she is “alone,” as in Jeremiah: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는 일어나 고요하고도 평안히 사는 백성 곧 성문이나 문빗장이 없이 홀로 사는 국민을 치라 (렘49:31) Arise, get you up to a quiet nation that dwelleth confidently, saith the Lord, which hath neither gates nor bar; they dwell alone. (Jer. 49:31)

 

모세오경에서는 In the prophecy of Moses: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신33:28) Israel hath dwelt confidently alone. (Deut. 33:28)

 

그리고 계속해서 발람의 예언을 보면 더 분명하게 드러나지요. And still more clearly in the prophecy of Balaam: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민23:9) Lo, the people dwelleth alone, and shall not be reckoned among the nations, (Num. 23:9)

 

여기 여러 민족(nations)은 악을 의미합니다. 이 태고교회 후손은 홀로 살기, 즉 천적 인간이 되거나 천적 인간으로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려 하거나 하지 않고, 대신 유대교회와 마찬가지로 여러 민족 중 하나 되기를, 즉 열방 가운데서 그들과 함께 지내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이 이것, 곧 악을 원했기 때문에,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하신 것입니다. 마음속으로 원한다는 얘기는 이미 악 가운데 있다는 얘기이기 때문인데, 그렇게 그들은 원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where “nations” signify evils. This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not disposed to dwell alone, that is, to be a celestial man, or to be led by the Lord as a celestial man, but, like the Jewish church, desired to be among the nations. And because they desired this, it is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for he who desires is already in evil, and it is granted him.  

 

※ 그러므로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는 그 속뜻으로 다시 표현하면, ‘태고교회의 후손은 천적 인간으로서 오직 주님의 인도하심만으로 살기를 원치 않았다’가 되겠습니다.

 

 

140.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이 사람의 고유 본성(man’s own)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것의 본질(the nature of this own) 및 그 이어지는 내용 둘 다를 보면 분명합니다. 여기서 다루는 교회인(the man of the church)은 성품이 괜찮았으므로 어떤 또 하나의 본성(an own)이 그에게 주어졌는데, 이 새로운 본성은 마치 처음부터 그 자신의 것처럼 보이는(it appeared as it were his own) 그런 본성이었고, 그래서 돕는 배필이라고 한 것입니다. That by “a help as with him” is signified man’s own, is evident both from the nature of this own, and from what follows. As however the man of the church who is here treated of was well disposed, an own was granted him, but of such a kind that it appeared as it were his own, and therefore it is said “a help as with him.

 

 

141. 인간의 고유 본성(man’s own)에 관해 세 종류의 인간, 곧 육적, 세속적 인간(the corporeal and worldly man)과 영적 인간(the spiritual man), 그리고 천적 인간(the celestial man)을 가지고 설명할 때, 무수히 많은 걸 말할 수 있습니다. 먼저 육적, 세속적 인간의 경우, 그의 본성은 그가 가진 전부로서, 그는 자기 자신밖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앞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그는 만일 자기가 이걸 잃으면 자기는 소멸하고 말 것이라고 여길 정도입니다. 두 번째인 영적 인간도 비슷한데요, 비록 그가 주님은 만유의 생명이시며, 사람들에게 지혜와 이해할 수 있는 능력(wisdom and understanding)을 주시고, 그 결과, 생각하는 능력과 그걸 행할 수 있는 힘(the power to think and to act)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러나 그의 이런 지식은 아직은 그의 입술 상의 고백일 뿐 마음으로 이어지는 믿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은 주님은 만유의 생명이시며, 생각하고 행동할 힘 주시는 분이심을 알아차리는데요(discerns), 그는 이것이 사실임을 실제로 지각하기(perceives) 때문입니다. 그는 결코 자신의 본성을 원치 않는데요, 분명 그에게도 주님이 주신 어떤 본성, 곧 선하고 진실한 것을 아는 모든 퍼셉션(all perception of what is good and true) 및 모든 행복과 결합한 본성이 있는데도 말입니다. 천사들이 바로 이런 본성 가운데 있으며, 그래서 그들은 동시에 가장 내적인 평화와 평온(the highest peace and tranquility) 가운데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본성 안에 주님의 것들(hings which are the Lord’s)이 있기 때문인데, 주님은 그들의 본성을 다스리시거나, 혹은 그들의 본성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이 본성은 가장 천적인 본성 그 자체(the veriest celestial itself)이지만, 그러나 육적 인간의 것은 지옥적입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나중에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Innumerable things might be said about man’s own in describing its nature with the corporeal and worldly man, with the spiritual man, and with the celestial man. With the corporeal and worldly man, his own is his all, he knows of nothing else than his own, and imagines, as before said, that if he were to lose this own he would perish. With the spiritual man also his own has a similar appearance, for although he knows that the Lord is the life of all, and gives wisdom and understanding, and consequently the power to think and to act, yet this knowledge is rather the profession of his lips than the belief of his heart. But the celestial man discerns that the Lord is the life of all and gives the power to think and to act, for he perceives that it is really so. He never desires his own, nevertheless an own is given him by the Lord, which is conjoined with all perception of what is good and true, and with all happiness. The angels are in such an own, and are at the same time in the highest peace and tranquility, for in their own are those things which are the Lord’s, who governs their own, or them by means of their own. This own is the veriest celestial itself, whereas that of the corporeal man is infernal. But concerning this own more hereaf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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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18-25, AC.131–137

 

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with him.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And Jehovah God formed out of the ground every beast of the field, and every fowl of the heavens, and brought it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it; and whatsoever the man called every living soul, that was the name thereof.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And the man gave names to every beast, and to the fowl of the heavens, and to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 but for the man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And Jehovah God caused a deep sleep to fall upon the man, and he slept; and he took one of his ribs, and closed up the flesh in the place thereof.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2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use she was taken out of man [vir]. 2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25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THE CONTENTS

 

131. 태고교회의 후예, 후손(The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자신들의 고유 본성을 향해 기울어졌던(inclined to their own) 저들의 이야기를 여기서 다루고 있습니다. The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inclined to their own,(주3) is here treated of.

 

 

132. 사람은 주님의 인도하심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에 더해 자기 자신과 세상, 즉 자신의 고유 본성으로도(also by himself and the world, or by his own) 인도받기를 원하는데요, 이런 이유로 여기서는 사람에게 허락된 그의 고유 본성(the own which was granted him) 다루고 있습니다. (18) Since man is such as not to be content to be led by the Lord, but desires to be led also by himself and the world, or by his own, therefore the own which was granted him is here treated of (verse 18).

 

 

133. 그리고 먼저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에 대한 애정과 진리에 대한 지식(the affections of good and the knowledges of truth) 아는 것이 그에게 주어졌지만, 그러나 여전히 그는 자신의 고유 본성으로 이끌립니다. (19-20) And first it is given him to know the affections of good and the knowledges of truth with which he is endowed by the Lord; but still he inclines to his own (verses 19–20).

 

 

134. 그런 이유로 그는 자신의 고유 본성 상태(a state of his own)에 놓이게 되며, 이때 어떤 본성(an own)이 그에게 제공되는데, 본문에서는 이 본성을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the rib built into a woman)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21-23) Wherefore he is let into a state of his own, and an own is given him, which is described by the rib built into a woman (verses 21 to 23).

 

 

135.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은 사람의 고유 본성(the man’s own)에 인접, 하나(a one)로 나타납니다. (24) Celestial and spiritual life are adjoined to the man’s own, so that they appear as a one (verse 24).

 

 

136. 그리고 주님으로 말미암는 이노센스(innocence from the Lord)가 이 본성에 서서히 심어지고(instilled into this own), 그렇게 해서 이 본성은 계속 받아들여질 수 있는 상태가 됩니다. (25) And innocence from the Lord is instilled into this own, so that it still might not be unacceptable (verse 25).

 

THE INTERNAL SENSE

 

137. 창세기 처음 세 장은 전반적으로는 태고교회, 사람(man [homo])이라고 하는, 태고교회의 첫 시기부터 끝, 곧 멸망하던 시기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본 장 전반부에서는 이 교회가 가장 융성하던 상태(its most flourishing state), 곧 천적 인간이었던 때(when it was a celestial man)를 다루고 있다면, 후반부인 여기에서는 자신들의 본성에 이끌린 사람들(those who inclined to their own), 그들의 후손을 다루고 있습니다. The first three chapters of Genesis treat in general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is called “man” [homo] from its first period to its last, when it perished; the preceding part of this chapter treats of its most flourishing state, when it was a celestial man; here it now treats of those who inclined to their own, and of their poste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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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17, AC.126-130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Verse 17. 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 for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dying thou shalt die.

 

※ 17절 속뜻

 

주님의 신비는 오직 퍼셉션으로만 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천적인 것이 파괴되기 때문입니다.

 

 

126. 이 말씀은 방금 설명한 말씀과 함께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하는데요, 그것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모든 퍼셉션(every perception derived from the Lord)을 가지고 참되고 선한 것(what is true and good)에 익숙해지는 것은 허용되지만, 자아와 세상에서 나오는(from self and the world) 걸 가지고 그러면 안 된다는, 즉 우리는 감각과 기억에 속한 것들(the things of sense and of the memory [per sensualia et scientifica]) 가지고 신앙의 신비들(the mysteries of faith)을 알아보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신앙의 천적인 것(the celestial of faith)이 파괴되기 때문입니다. These words, taken together with those just explained, signify that it is allowable to become acquainted with what is true and good by means of every perception derived from the Lord, but not from self and the world; that is, we are not to inquire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the things of sense and of the memory [per sensualia et scientifica], for in this case the celestial of faith is destroyed.

 

 

127. 감각과 기억에 속한 걸 가지고 신앙의 신비를 알아보고 싶어 하는 것은 다음 장에서 다룰, 태고교회 후손들의 타락, 몰락(the fall of the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의 원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모든 교회가 그렇게 되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했다가는 생활, , 생명(life)의 거짓뿐 아니라 악도 함께 오기 때문입니다. A desire to investigate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the things of sense and of the memory was not only the cause of the fall of the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as treated of in the following chapter, but it is also the cause of the fall of every church; for hence come not only falsities, but also evils of life.

 

 

128. 세속적이고 육적인 사람(The worldly and corporeal man, 肉的)은 속으로 말하기를, 내가 만일 신앙과 그 관련된 모든 걸 감각(the things of sense), 즉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질 수 있게 해서 나로 하여금 믿게 하거나, 아니면, 기억(those of the memory [scientifica]), 즉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지식과 일반 상식을 가지고 나로 하여금 이해할 수 있게 하거나 하지 않으면 나는 안 믿을꺼야라고 말이지요. 또 그는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서로 절대 반대일 리 없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스스로 굳게 확신하는데요, 그는 이렇게 천국과, 그리고 신에 속한 것(what is celestial and Divine)을 감각에 속한 걸 가지고 배우기를(being instructed from things of sense) 원하는데, 이는 마치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for a camel to go through the eye of a needle)만큼이나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가 이런 식으로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면 원할수록 그는 더욱더 스스로를 눈멀게 하여 결국엔 아무것도, 심지어 어떤 영적인 것(anything spiritual)의 존재와 영생(eternal life)의 존재에 대해서조차 믿지 않게 되는데요, 이런 결과는 그가 가정하고 있는 원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to ea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이며, 누구든지 더 많이 먹을수록 그는 더욱 죽게 되지요. 그러나 세상이 아닌, 주님을 통해서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he who would be wise from the Lord, and not from the world)은 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곧 말씀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들은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반드시 믿어야 한다고 말이지요. 그는 이런 원리로 자신의 생각(thoughts)을 조절하며, 계속해서 이성, 지식, 감각 및 자연에 속한 것들을 통해(by things of reason, of knowledge, of the senses, and of nature [per rationalia, scientifica, sensualia et naturalia]) 결국 자신의 선택이 맞다 확신합니다. 아니다 싶은 것들은 버리면서 말입니다. The worldly and corporeal man says in his heart, If I am not instructed concerning the faith, and everything relating to it, by means of the things of sense, so that I may see, or by means of those of the memory [scientifica], so that I may understand, I will not believe; and he confirms himself in this by the consideration that natural things cannot be contrary to spiritual. Thus he is desirous of being instructed from things of sense in what is celestial and Divine, which is as impossible as it is for a camel to go through the eye of a needle; for the more he desires to grow wise by such means, the more he blinds himself, till at length he believes nothing, not even that there is anything spiritual, or that there is eternal life. This comes from the principle which he assumes. And this is to “ea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of which the more anyone eats, the more dead he becomes. But he who would be wise from the Lord, and not from the world, says in his heart that the Lord must be believed, that is, the things which the Lord has spoken in the Word, because they are truths; and according to this principle he regulates his thoughts. He confirms himself by things of reason, of knowledge, of the senses, and of nature [per rationalia, scientifica, sensualia et naturalia], and those which are not confirmatory he casts aside.

 

 

129. 인간은 그가 세운 원리, 원칙(the principles he assumes)에 의해 지배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다 아는데요, 심지어 그 원칙이 거짓이어도 그의 모든 지식과 이성 능력은 그 원칙을 편듭니다(all his knowledge and reasoning favor his principles). 그 원칙을 지지하려는 수많은 생각(innumerable considerations)이 그의 마음에 더해지고, 그렇게 해서 그는 그 거짓 원칙을 확신하는 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원칙, 가령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는 그 어떤 것도 믿어서는 안 돼!(a principle that nothing is to be believed until it is seen and understood)와 같은 원칙을 가진 사람은 결코 믿음이라는 걸 가질 수가 없는데요, 왜냐하면,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은 사람의 육안으로 볼 수 있거나 머릿속으로 상상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참된 질서, 순서(the true order)는 사람이 주님, 곧 주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뒤따르는 모든 것으로 말미암아 지혜로워지는 것(for man to be wise from the Lord, that is, from his Word, and then all things follow)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는 눈이 밝아지는데(enlightened), 심지어 이성과 기억-지식에 관한 것들(in matters of reason and of memory-knowledge [in rationalibus et scientificis])까지도 그렇게 됩니다. 그런다고 무슨 과학 배우는 걸 결코 금하거나 하지는 않는데요, 과학은 삶에 매우 유용하며 즐겁기 때문이며, 심지어 그가 신앙 안에 있지만 세상 학자들처럼 생각하고 말해도 되기 때문입니다. 다만 한 가지, 그렇다 하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믿기(to believe the Word of the Lord)라는 원칙 안에서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능한 한, 자연적 진리를 가지고 학자들 세계에서 쓰는 말로 영적, 천적 진리들을 확증해야 한다는 것(to confirm spiritual and celestial truths by natural truths, in terms familiar to the learned world)입니다. 그렇게 그의 출발점은 주님이셔야 하며, 결코 자기 자신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전자는 생명이지만, 후자는 죽음이기 때문이지요. Everyone may know that man is governed by the principles he assumes, be they ever so false, and that all his knowledge and reasoning favor his principles; for innumerable considerations tending to support them present themselves to his mind, and thus he is confirmed in what is false. He therefore who assumes as a principle that nothing is to be believed until it is seen and understood, can never believe, becaus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cannot be seen with the eyes, or conceived by the imagination. But the true order is for man to be wise from the Lord, that is, from his Word, and then all things follow, and he is enlightened even in matters of reason and of memory-knowledge [in rationalibus et scientificis]. For it is by no means forbidden to learn the sciences, since they are useful to his life and delightful; nor is he who is in faith prohibited from thinking and speaking as do the learned of the world; but it must be from this principle—to believe the Word of the Lord, and, so far as possible, confirm spiritual and celestial truths by natural truths, in terms familiar to the learned world. Thus his starting point must be the Lord, and not himself; for the former is life, but the latter is death.

 

 

130. 세상을 통해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He who desires to be wise from the world)은 그의 동산(garden)에 감각과 기억-지식에 관한 것들(the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sensualia et scientifica])이 있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the love of self and the love of the world)이 그의 에덴(Eden)이며, 그의 동쪽(east)은 서쪽, 곧 자기 자신(himself)입니다. 그에게 있어 유브라데 강(river Euphrates)은 그가 가진 모든 기억-지식인데 이는 정죄 받는 것(all his memory-knowledge, which is condemned)입니다. 그의 두 번째 강(second river), 거기에 앗수르(Assyria)가 있는데, 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 못 차리게 하는, 거짓을 낳는 논리 능력(infatuated reasoning productive of falsities)입니다. 그의 세 번째 강(third river), ‘구스(Ethiopia)지요, 악과 악으로 말미암는 거짓에 관한 원리들인데, 이게 그가 가진 신앙 지식들(the principles of evil and falsity thence derived, which are the knowledges of his faith)입니다. 그의 네 번째 강(fourth river)은 거기서 나오는 지혜(the wisdom thence derived)이며, 말씀에서는 이걸 마법(magic)이라고 하지요. 이런 이유로 애굽(Egypt), 애굽은 기억-지식을 말하는데, 이는 나중에 마법이 되는 지식들(memory-knowledge—after the knowledge became magical)을 말하지요, 결론적으로 애굽은 그런 사람, 곧 말씀에서 볼 수 있듯, 자아로부터 지혜로워지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he desires to be wise from self)을 의미합니다. 이런 사람에 관해 에스겔에서는, He who desires to be wise from the world has for his “garden” the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sensualia et scientifica]; the love of self and the love of the world are his “Eden”; his “east” is the west, or himself; his “river Euphrates” is all his memory-knowledge, which is condemned; his “second river,” where is “Assyria” is infatuated reasoning productive of falsities; his “third river,” where is “Ethiopia” is the principles of evil and falsity thence derived, which are the knowledges of his faith; his “fourth river” is the wisdom thence derived, which in the Word is called “magic.” And therefore “Egypt”—which signifies memory-knowledge—after the knowledge became magical, signifies such a man, because, as may be seen from the Word, he desires to be wise from self. Of such it is written in Ezekiel:

 

3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9애굽 땅이 사막과 황무지가 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네가 스스로 이르기를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만들었다 하도다 (겔29:3, 9) Thus hath said the Lord Jehovih, Behold, I am against thee, Pharaoh king of Egypt, the great whale that lieth in the midst of his rivers, who hath said, My river is mine own, and I have made it for myself. And the land of Egypt shall be for a solitude, and a waste, and they shall know that I am Jehovah, because he hath said, The river is mine, and I have made it. (Ezek. 29:3, 9)

 

같은 선지서에서, 그런 사람들을 ‘지옥에 있는 에덴의 나무들’(trees of Eden in hell)이라고도 하는데요, 그 본문에서 바로(Pharaoh), 애굽인이지요, 바로 역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Such men are also called “trees of Eden in hell,” in the same prophet, where also Pharaoh, or the Egyptian, is treated of in these words:

 

16내가 그를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스올에 떨어뜨리던 때에 백성들이 그 떨어지는 소리로 말미암아 진동하게 하였고 물을 마시는 에덴의 모든 나무 곧 레바논의 뛰어나고 아름다운 나무들이 지하에서 위로를 받게 하였느니라, 18너의 영광과 위대함이 에덴의 나무들 중에서 어떤 것과 같은고 그러나 네가 에덴의 나무들과 함께 지하에 내려갈 것이요 거기에서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누우리라 이들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라 (겔31:16, 18) When I shall have made him descend into hell with them that descend into the pit; to whom art thou thus made like in glory and in greatness among the trees of Eden? yet shalt thou be made to descend with the trees of Eden into the lower earth, in the midst of the uncircumcised, with them that be slain by the sword. This is Pharaoh and all his crew, (Ezek. 31:16, 18)

 

여기서 ‘에덴의 나무들’(the trees of Eden)은 말씀에서 나오는 지식들(knowledges [scientifica et cognitiones] from the Word)을 가리키는데, 저들, 곧 스스로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이런 지식들조차 이성 능력을 발휘(by reasonings), 자기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서만 가까이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말씀, 곧 주님을 모독하고 있는 것입니다.where the “trees of Eden” denote knowledges [scientifica et cognitiones] from the Word, which they thus profane by reason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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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16, AC.125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Verse 16. And Jehovah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Of every tree of the garden eating thou mayest eat.

 

※ 우리말 번역은 원문에는 없는 ‘열매’를 추가,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라 함으로써 아르카나가 더욱 흐릿하게, 안 보이게 하는 아주 큰 실수를 범했습니다. 성경 번역자들이 말씀을 속뜻으로 읽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전혀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 16절 속뜻

 

주님은 천적 인간에게 퍼셉션을 늘 공급하시되 마치 해가 대지를 환히 늘 비추듯 원 없이 누리게 하셨습니다. 천적 인간은 천지에 가득한 주님의 신성에 하늘의 천사들처럼 이 퍼셉션을 가지고 반응하였습니다.

 

 

125. ‘각종 나무의 열매를 임의로 먹되’(To eat of every tree)는 퍼셉션(perception)을 통해 선하고 참된 것(what is good and true)을 아는 것입니다. 앞에서 관찰한 것처럼, ‘나무’(a tree)는 퍼셉션을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To “eat of every tree” is to know from perception what is good and true; for, as before observed, a “tree” signifies perception.

 

※ ‘나무의 열매’라고 번역했지만, 사실은 그냥 ‘나무’입니다. 원본엔 없는 ‘열매’를 추가한 건 실제로 ‘나무’를 먹는다고 하면 굉장히 이상하고 어색해서가 아닐까 싶은데요. 이런 게 말씀을 속뜻, 그러니까 아르카나(arcana)를 전혀 모른 채 겉뜻으로만 번역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퍼셉션을 받았고, 그 퍼셉션으로 자기들 기억 속 소중히 여기고 있던 것들의 참되고 선한 여부를 들여다보다가(reflected on) 그 가운데 혹시 무슨 거짓된 것이 드러나면, 즉시 그 사실을 지각, 피했고, 심지어 공포심을 느낄 정도였는데요, 그런 게 또 천사들의 상태이지요. 그러나 태고교회의 이 퍼셉션을 대신해서 그 후 이 참되고 선한 것에 관한 지식은 전에 계시되어 온 것으로부터 계승되더니, 계속해서 그 다음에는 말씀 안에 계시된 것으로부터 계승되었습니다. They had from the Lord continual perception, so that when they reflected on what was treasured up in the memory they instantly perceived whether it was true and good, insomuch that when anything false presented itself, they not only avoided it but even regarded it with horror: such also is the state of the angels. In place of this perception of the most ancient church, however, there afterwards succeeded the knowledge [cognitio] of what is true and good from what had been previously revealed, and afterwards from what was revealed in the W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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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15, AC.122-124

15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Verse 15, And Jehovah God took the man, and put him in the garden of Eden, to till it and take care of it.

 

※ 15절 속뜻

 

주님이 천적 인간에게 주신 모든 것은 소유하라고 주신 게 아니라 누리라고 주신 것입니다. 천적 인간은 소유가 아닌 누림의 사람입니다.

 

 

122. 에덴동산은 설명드린 대로, 천적 인간의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to till it and take care of it)가 의미하는 것은, 곧 그가 그 모든 것을 누리는 건(to enjoy all these things) 허락하시지만, 그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는 건(to possess them as his own) 금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지요. By the “garden of Eden” are signified all things of the celestial man, as described; by to “till it and take care of it” is signified that it is permitted him to enjoy all these things, but not to possess them as his own, because they are the Lord’s.

 

 

123. 천적 인간(The celestial man)은 모든 것이 전체적이든 개별적이든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acknowledges)합니다. 그가 그런 사실을 퍼셉션으로 지각(perceives)하기 때문이지요. 영적 인간(The spiritual man)도 마찬가지로 인정하지만, 그러나 그는 입으로(with the mouth) 합니다. 그는 그걸 말씀에서 배워서(has learned) 하기 때문입니다. 세속적이고 육적인 인간(The worldly and corporeal man)은 기꺼이로도 억지로도 당최 인정하지를 않는데요(neither acknowledges nor admits), 그는 무엇이든 자기한테 있으면 자기 것(his own)이라고 하며, 만일 그걸 잃으면 자기는 완전히 망할 걸로 여깁니다. The celestial man acknowledges, because he perceives, that all things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re the Lord’s. The spiritual man does indeed acknowledge the same, but with the mouth, because he has learned it from the Word. The worldly and corporeal man neither acknowledges nor admits it; but whatever he has he calls his own, and imagines that were he to lose it, he would altogether perish.

 

 

124. 지혜, 지성, 이성, 그리고 지식(wisdom, intelligence, reason, and knowledge [scientia])이 사람에게서가 아닌 주님에게서임은 주님이 가르치신 모든 걸 보면 아주 분명한데요, 마태복음에서, 주님이 자신을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를 두르고, 농부들에게 세로 준 집주인에 비유하신 것과(21:33), That wisdom, intelligence, reason, and knowledge [scientia] are not of man, but of the Lord, is very evident from all that the Lord taught; as in Matthew, where the Lord compares himself to a householder who planted a vineyard, and hedged it round, and let it out to husbandmen (21:33);

 

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마21:33)

 

아래 요한복음에서 하신 말씀들처럼 말입니다. and in John:

 

13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요16:13-14) The Spirit of truth shall guide you into all truth; for he shall not speak of himself, but what things soever he shall hear, he shall speak; he shall glorify me, for he shall receive of mine, and shall declare it unto you. (John 16:13–14)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요3:27) A man can receive nothing except it be given him from heaven. (John 3:27)

 

이것이 정말 그렇다는 것은 천국 아르카나(the arcana of heaven)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That this is really so is known to everyone who is acquainted with even a few of the arcana of hea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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