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3장은 ‘너희는기름과피를먹지말라’는 매우 강한 명령으로 끝납니다. 더구나 이것은 한 번의 제사에만 적용되는 임시 규정이 아니라 ‘너희의모든처소에서너희대대로지킬영원한규례’라고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기름과 피를 특별히 먹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이 질문에는 스베덴보리가 놀랄 만큼 직접적인 답을 줍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33(출29:22)은 제사와 번제에서 모든 피를 제단에 붓고 모든 기름을 제단 위에서 불살랐던 이유를 설명하면서 ‘피’는 신적 진리를, ‘기름’은 신적 선을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 레3:17의 ‘너희는기름과피를먹지말라’를 직접 인용합니다. 즉 레3마지막 절의 의미를 추측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셈입니다.
피가 신적 진리를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상응입니다. 주님의 피 역시 가장 높은 의미에서 주님에게서 발출하는 신적 진리와 관계합니다. 기름은 신적 선, 곧 신적 사랑의 선과 관계합니다. 따라서 피와 기름은 제사의 수많은 요소 가운데서도 특별히 거룩하게 구별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먹지말라’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실제 음식 규정이었지만 그 안의 영적 의미는 훨씬 깊습니다. 신적 선과 신적 진리는 인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 근원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아 마치 자기 것처럼 자유롭게 생각하고 원하고 행하지만, 그것을 자신의 고유한 생명에서 나온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서 proprium의 문제가 나타납니다. 인간의 proprium은 선을 행하고 나면 ‘내가했다’고 말하고 싶어 합니다. 진리를 깨달으면 ‘내가안다’고 생각하고 싶어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올바르게 살면 자신의 선함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신앙생활과 봉사와 체어리티까지 자기 공로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레3은 말합니다. ‘모든기름은여호와의것이니라.’ 선은 네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고 합니다. 선도 주님의 것이며 진리도 주님의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교리에서는 인간이 자유롭게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피하며, 선을 행해야 합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선을 행할 힘과 진리를 볼 수 있는 빛이 실제로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모든것이주님에게서오니나는아무것도할필요가없다’고 하는 것도 잘못이고, ‘내가선을행했으니이것은내선이다’라고 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인간은 전력을 다해 선을 행하되 그 선의 근원을 주님께 돌립니다. 진리를 열심히 배우고 이해하되 그 빛의 근원을 주님께 돌립니다.
그래서 기름과 피를 먹지 않는다는 규정은 매우 깊은 겸손을 가르칩니다. 겸손은 ‘나는아무가치가없다’고 자신을 깎아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겸손은 내 안의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레3의 마지막 한 절이 장 전체를 닫는 완벽한 결론이 됩니다.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고, 내장과 콩팥과 간 주변의 기름을 떼어 제단 위에서 불사른 모든 과정이 결국 한 고백을 향합니다. ‘선은주님의것입니다.진리도주님의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인정 안에서 참된 화목이 이루어집니다. 내가 선의 주인이 되려는 욕망과 진리의 주인이 되려는 교만을 내려놓을수록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내 안에서 자유롭게 결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름과피를먹지말라’는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살아 있습니다. 선을 행하되 그 선을 먹어 자기 공로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진리를 깨닫되 그 진리를 먹어 자기 지혜의 소유물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과 진리를 받아 삶으로 살되 언제나 그 근원을 주님께 돌리라는 것입니다.
레3의 마지막 고백은 그래서 아주 단순하면서도 깊습니다. ‘모든기름은여호와의것이니라.’ 내가 행한 선 가운데 참으로 선한 것은 주님에게서 왔고, 내가 깨달은 진리 가운데 참으로 진리인 것은 주님에게서 왔습니다. 이것을 마음으로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주님과의 화목과 결합을 보존하는 깊은 겸손입니다. (SW.5레3심화3)
레위기 3장을 처음 읽는 사람에게 가장 낯선 부분은 아마 제물의 내장을 세세하게 묘사하는 대목일 것입니다. ‘내장에덮인기름’, ‘내장에붙은모든기름’, ‘두콩팥과그위의기름’, ‘간에덮인꺼풀’이 소와 양과 염소의 제사에서 거의 똑같이 반복됩니다. 현대 독자에게는 굳이 성경이 이런 해부학적인 세부까지 기록해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곳에서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이 놀라운 힘을 발휘합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57(출29:19)은 제사와 번제의 수많은 세부 규정을 열거하면서 ‘누가조금이라도계몽된이성으로생각한다면이런세부안에천국의아르카나가감추어져있음을보지못하겠는가?’라고 묻습니다. 그는 특별히 내장의 기름, 간의 기름, 콩팥과 그 위의 기름을 제단에서 불사르는 규정을 직접 언급합니다.
먼저 기름은 선을 표상합니다. AC.10029(출29:13)는 제물의 기름을 선과 연결합니다. 그리고 제사의 문맥에서는 인간의 자연적 또는 겉 사람 안에 받아들여져 진리와 결합할 수 있도록 마련된 선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기름을 요구하신다는 것은 단순히 동물의 가장 좋은 지방 부위를 요구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 안의 선이 그 근원인 주님께 돌려지는 것을 표상합니다.
그런데 기름의 위치에 따라 의미가 더 세밀해집니다. AC.10072(출29:22)는 ‘내장을덮은기름’을 ‘가장낮은것들안에있는선’이라고 설명합니다. 내장은 인간의 가장 낮고 바깥쪽 자연적 삶과 관계합니다. 그러므로 내장의 기름은 주님의 선이 인간의 고상한 종교적 생각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의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온 상태를 보여 줍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생각하면 이것이 얼마나 실제적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는 경건하지만 집에 돌아가면 가족에게 거칠 수 있습니다. 교리는 정확히 설명하면서 돈 문제에서는 자기 이익만 좇을 수 있습니다. 사랑과 체어리티를 말하면서 운전할 때나 인터넷에서 다른 사람에게 분노를 쏟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영역들이 바로 우리의 자연적 삶의 ‘낮은곳’입니다. 거듭남은 이런 곳까지 내려와야 합니다.
간에 덮인 꺼풀은 또 다른 층위를 보여 줍니다. AC.10073(출29:22)은 이것을 ‘정결하게된자연적인간의내적선’이라고 설명합니다. 간은 피를 정화하는 기관이므로 상응에서도 정결과 관계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뿐 아니라 그 행동을 낳는 자연적 인간 안쪽의 정서와 동기까지 정결하게 하십니다.
콩팥은 더욱 흥미롭습니다. AC.10074(출29:22)는 콩팥을 ‘정결하게된자연적인간의내적진리’와 연결하고, 그 위의 기름을 그 진리에 속한 선과 연결합니다. 그리고 AC.10032은 콩팥이 몸 안에서 걸러 내고 정화하는 기능을 하는 것처럼 영적으로는 ‘살피고,정결하게하고,바로잡는진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말씀에는 주님께서 ‘콩팥과마음’을 살피신다는 식의 표현이 등장합니다. 마음이 사랑의 선과 관계한다면 콩팥은 인간 안의 진리를 살피고 분별하는 것과 관계합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만이 아니라 그 행동 속에 어떤 진리와 어떤 동기가 있었는지가 주님 앞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제 레3의 장면을 다시 바라보면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제사장이 내장과 콩팥과 간 주변의 기름을 하나하나 떼어내는 장면은 단순한 도축 과정이 아닙니다. 인간의 자연적 삶의 가장 깊고 낮은 곳까지 주님의 선과 진리가 들어가 살피고, 정결하게 하고, 바로잡는 거듭남의 과정을 표상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정결하게 된 것들이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제단 위의 불로 올라간다는 점입니다. 자연적 인간 자체를 없애 버리는 것이 거듭남이 아닙니다. 우리의 몸과 감각과 일상생활과 직업과 인간관계를 버리고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이 정결하게 되어 주님의 사랑을 섬기는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그래서 레3의 반복은 오히려 아름답습니다. ‘내장의기름도,간의꺼풀도,콩팥과그위의기름도.’ 주님께서는 인간의 어느 한 부분만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보여 드리는 종교적 모습만이 아니라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의 생각과 욕망과 습관까지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화목은 표면적인 평온이 아닙니다. 인간의 깊은 곳과 낮은 곳까지 선과 진리가 정결하게 되고 서로 결합하여, 속과 겉이 함께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3의 낯선 내장 규정은 오히려 매우 실제적인 거듭남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겉’만 고치시는 분이 아니라 가장 깊고 가장 낮은 곳까지 정결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SW.5레3심화2)
‘화목제’라는 이름을 들으면 우리는 먼저 ‘하나님과사이가나빠진인간이제물을드려하나님과다시사이좋게되는제사’를 떠올리기 쉽습니다. 더 강하게 표현하면 인간의 죄 때문에 분노하신 하나님께 제물을 드려 그분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제사처럼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391(출24:5)은 이스라엘 백성이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장면을 해설하면서, 이것이 ‘선으로부터,그리고선에서나오는진리로부터드리는주님에대한예배’를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번제가 특별히 사랑의 선으로부터 드리는 예배를 의미한다면, 제사는 선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로부터 드리는 예배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화목제의 중심에도 선과 진리가 함께 있습니다.
레3의 의식 자체가 이것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제물의 피는 제단 사방에 뿌려지고 기름은 제단 위에서 불살라집니다. AC.10033(출29:22)은 피가 신적 진리를, 기름이 신적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화목제의 중심에는 ‘신적진리와신적선’이 함께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은 무엇일까요? 하나님 쪽에서 인간을 미워하시다가 제물을 보고 마음을 바꾸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변해야 하는 쪽은 인간입니다. 인간 안의 악과 거짓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고, 그 결과 인간 스스로 주님과의 결합에서 멀어집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진리를 통해 인간에게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지를 보여 주십니다. 인간이 그 진리에 따라 악을 죄로 여겨 피하기 시작하면 주님께서 선을 심으실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진리가 선과 결합되면서 인간의 의지와 이해, 사랑과 신앙,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점차 하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런 의미에서 ‘화목’은 단순한 감정적 관계 회복보다 훨씬 깊습니다. 그것은 ‘결합’입니다.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인간에게 받아들여지고,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가 서로 결합함으로써 인간이 주님과 결합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화목제에서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는 행위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AC.10047(출29:16)은 피를 제단 둘레에 뿌리는 것이 신적 진리와 신적 선의 결합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의 거듭남 역시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를 결합시키시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화목제를 ‘하나님의분노를달래는제사’로만 읽으면 레3의 가장 깊은 아름다움을 놓칠 수 있습니다. 화목제는 오히려 주님께서 인간을 다시 당신과 결합시키시는 거듭남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인간 안에서 악과 거짓이 물러가고, 주님의 진리가 받아들여지고, 그 진리가 선과 결합하며, 그 선이 삶의 가장 바깥쪽까지 내려올 때 인간은 점점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 결과가 ‘평화’입니다. 성경의 평화는 단순히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인간의 내면에서 서로 싸우던 것들이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와 하나가 되는 상태와 깊이 관계합니다. 진리와 선이 하나가 되고,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의 방향을 향하며, 인간의 뜻이 점차 주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게 될 때 평화가 옵니다.
따라서 화목제는 ‘내가무엇을드려하나님을내편으로만들것인가?’를 묻는 제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내안에서무엇을바로잡으셔야내가다시그분의생명을온전히받을수있는가?’를 묻게 하는 제사입니다.
화목은 하나님을 변화시키는 일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에 의해 변화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진리로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고, 그 진리를 선과 결합시키시며, 마침내 우리의 사랑과 생각과 행동이 하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게 하실 때 우리는 주님과의 결합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화목제의 깊은 중심입니다. (SW.5레3심화1)
레위기 3장에 들어서면 세 번째 제사인 ‘화목제’가 등장합니다. 레1에서는 번제를, 레2에서는 소제를 살펴보았습니다. 번제에서는 제물 전체가 제단 위에서 불살라졌고, 소제에서는 고운 가루에 기름과 유향을 더하여 일부를 제단 위에서 불사르고 나머지를 제사장들이 받았습니다. 이제 화목제에서는 다시 동물과 피가 등장하지만, 번제와는 제사의 구조가 다릅니다. 제물 전체를 불사르지 않고 특별히 ‘기름’을 떼어 제단 위에서 불사릅니다. 그리고 장 마지막에는 ‘너희는기름과피를먹지말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레3을 여는 중요한 열쇠 가운데 하나는 ‘왜화목제에서는피와기름이이토록중요하게다루어지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제사에 사용되는 짐승들이 아무 의미 없이 선택된 것이 아니라고 거듭 강조합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823(창15:9)은 소, 염소, 숫양, 어린양,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 등이 각각 고유한 의미를 가졌으며, 바로 그 때문에 한 종류를 다른 종류로 임의로 바꾸어 드릴 수 없었다고 설명합니다. 일상의 번제, 안식일과 절기의 제사, 자원제와 서원제, 화목제, 속죄와 정결의 제사마다 특정 동물이 정해져 있었던 것은 각각 다른 천적·영적 상태를 표상했기 때문입니다.
레3에서는 소와 양과 염소가 차례로 등장합니다. 레1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소 떼에 속한 동물은 겉 또는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정서를, 양 떼에 속한 동물은 속 또는 영적 인간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정서를 표상합니다. AC.9391(출24:5)은 소와 송아지가 자연적 인간의 선과 관계하고, 양과 어린양 등이 속 또는 영적 인간의 선과 관계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레3의 화목제 역시 인간의 어느 한 부분만을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의 결합은 속 사람에서만 이루어지고 겉 사람은 그대로 남는 일이 아니라, 속과 겉이 함께 질서 안으로 들어오는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화목제에서는 ‘수컷이나암컷이나’ 드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번제에서는 수컷을 요구했지만 화목제에서는 둘 다 허용됩니다. 이것이 의미 있는 차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현재 확보한 직접 원전만으로 레3의 수컷과 암컷을 각각 세밀하게 나누어 단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우리가 이미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제물의 종류와 성별까지도 대표교회의 제사에서 아무 의미 없는 규정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원전이 직접 밝혀 주는 데까지만 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제물을 가져온 사람은 그 머리에 안수합니다. 레1에서 살펴본 것처럼 안수는 단순히 손을 얹는 의식이 아닙니다. AC.10023(출29:10)은 머리에 손을 얹는 것이 전달과 받아들임, 곧 커뮤니케이션과 리셉션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머리는 전체를 대표하기 때문에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는 행위에는 그 제사가 예배자의 전 존재와 관계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화목은 바깥에서 어떤 의식 하나를 행함으로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일과 관계합니다.
제물을 잡으면 제사장들이 그 피를 ‘제단사방에’ 뿌립니다. 피는 신적 진리를 표상합니다. 그리고 제단은 주님의 신적 선과 그분께 드리는 예배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는 것은 진리가 선과 결합하는 것을 보여 줍니다. 바로 여기에서 화목제의 깊은 중심이 드러납니다. AC.10047(출29:16)은 제단 둘레에 피를 뿌리는 것이 신적 선과 신적 진리의 결합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며, 인간의 거듭남 역시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를 결합하시는 과정이라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화목’을 단순히 ‘하나님께화가나셨는데제물을드려마음을풀어드린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부족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교리에서 주님과 인간의 결합을 방해하는 것은 주님 편의 분노가 아니라 인간 안의 악과 거짓입니다. 인간이 진리를 받아 악을 피하고, 그 진리가 선과 결합될 때 인간은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더 온전히 받을 수 있게 됩니다. 화목제의 피가 제단 사방에 뿌려지는 장면은 바로 이 ‘진리와선의결합’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런데 레3에서 특별히 반복되는 것은 ‘기름’입니다. 소를 드릴 때도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을 떼어내고, 양을 드릴 때도 기름진 꼬리와 내장의 기름을 떼어내며, 염소를 드릴 때도 같은 명령이 반복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마침내 ‘모든기름은여호와의것이니라’고 선언합니다. 왜 기름이 이토록 중요할까요?
AC.10033(출29:22)은 이 문제에 대해 매우 분명한 답을 줍니다. 제사의 ‘피’는 신적 진리를, ‘기름’은 신적 선을 표상합니다. 그래서 제사의 모든 피가 제단에 드려지고 모든 기름이 제단 위에서 불살라졌습니다. 레3의 기름은 단순히 고대인들이 가장 좋은 부위를 하나님께 바쳤다는 정도를 넘어섭니다. 기름은 선을, 가장 높은 의미에서는 주님의 신적 선을 표상하기 때문에 여호와께 속한 것으로 구별된 것입니다.
여기서 레3의 구조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피와 기름이 함께 있습니다. 신적 진리와 신적 선입니다. 피는 제단 사방에 뿌려지고 기름은 제단의 불에 올라갑니다. 진리와 선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레2에서도 고운 가루와 기름을 통해 선과 진리의 결합을 보았는데, 레3에서는 그것이 피와 기름이라는 더욱 강렬한 표상으로 다시 나타납니다. 말씀의 진리는 인간을 선으로 이끌기 위해 주어지고, 선은 진리를 통하여 자신의 올바른 형태와 방향을 얻습니다. 거듭남은 이 둘이 인간 안에서 하나가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냥 ‘기름을떼어내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어느 부위의 기름인지 매우 세밀하게 지정하신다는 점입니다. ‘내장에덮인기름’, ‘내장에붙은모든기름’, ‘두콩팥과그위의기름’, ‘간에덮인꺼풀’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얼핏 보면 현대 독자에게 가장 낯설고 불필요해 보이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세부에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아르카나가 들어 있습니다.
AC.10072(출29:22)는 내장을 덮는 기름이 ‘가장낮은것들안에있는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내장은 자연적 인간의 가장 낮은 것들과 관계하고, 그 위의 기름은 그 가장 낮은 차원까지 내려와 있는 선을 표상합니다. 이것은 거듭남이 인간의 고상한 종교적 생각에만 머물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우리의 말투, 습관, 돈을 쓰는 방식, 일상의 관계, 몸과 감각의 즐거움을 다루는 방식처럼 삶의 가장 바깥쪽까지 주님의 선이 내려와야 합니다.
간에 덮인 꺼풀도 의미가 있습니다. AC.10073(출29:22)은 그것을 ‘정결하게된자연적인간의내적선’과 연결합니다. 간이 몸에서 피를 정화하는 기능을 하는 것처럼 이 표상에도 정결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외적인 행동만 조금 고치시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인간 안쪽에 숨어 있는 동기와 정서까지 정결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이 있습니다. AC.10074(출29:22)는 콩팥이 ‘정결하게된자연적인간의내적진리’를, 그 위의 기름은 그 진리에 속한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AC.10032은 콩팥의 기능에서 그 상응을 설명하면서, 콩팥은 살피고 정결하게 하고 바로잡는 진리와 관계한다고 말합니다. 말씀에서도 주님께서 ‘마음과뜻을살피신다’고 할 때 원문에서 콩팥이 등장하는 경우가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따라서 레3의 제단 위에는 단순히 동물의 지방 조직이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상응의 언어로 보면 인간의 자연적 삶 가장 깊은 곳까지 선과 진리가 들어와 정결하게 되고, 그 정결해진 선과 진리가 사랑의 불 안에서 주님께 돌려지는 모습입니다. 주님과의 화목은 인간의 일부만 주님께 드리고 나머지는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상태가 아닙니다. 속 사람에서 시작된 주님의 질서가 자연적 인간의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오는 것입니다.
양의 화목제에서는 한 가지 독특한 것이 더 등장합니다. ‘미골에서벤기름진꼬리’입니다. 이 역시 아무 의미 없는 세부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제사의 세세한 부위까지 천국의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나 현재 확보한 직접 원전만으로 레3의 ‘기름진꼬리’ 자체의 의미를 충분히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기름=선’이라는 확실한 원칙을 넘어 꼬리의 세부 의미를 임의로 만들어 내지 않겠습니다.
제사장은 이 기름들을 제단 위의 ‘번제물위에서’ 불사릅니다. 이 표현도 중요합니다. 화목제가 번제와 완전히 별개의 세계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제단 위에 있는 번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번제가 사랑의 선으로부터 드리는 예배를 표상한다면, 화목제 역시 그 사랑의 질서 위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진정한 화목과 결합은 사랑 없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본문은 이것을 ‘여호와께드리는음식’이라고도 부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실제로 음식을 필요로 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제사와 번제가 ‘떡’ 또는 음식이라고 불린 이유가 그 안에서 표상된 천적 선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AC.10079(출29:23)는 떡이 사랑의 선을 의미하며, 제사와 번제 역시 이러한 이유로 ‘떡’이라 불렸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고기와 지방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이 표상하는 사랑의 선과 그 선에서 나오는 참된 예배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향기로운냄새’가 됩니다. 레1과 레2에서 반복해서 만났던 표현입니다. 향기로운 냄새는 주님께 받아들여지는 예배를 표상합니다. 주님께서 동물의 타는 냄새를 좋아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가 주님께 기쁘게 받아들여진다는 뜻입니다. 결국 레1의 번제, 레2의 소제, 레3의 화목제는 서로 다른 제사이면서도 모두 한곳을 향합니다.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가 결합되고, 그 사람의 삶이 사랑에서 나오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17절은 이 모든 것을 하나의 강력한 명령으로 마무리합니다. ‘너희는기름과피를먹지말라.’ AC.10033은 바로 레3:17을 직접 인용하면서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피는 신적 진리를, 기름은 신적 선을 표상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을 자기 것으로 취하여 먹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신적 선과 신적 진리는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영적 삶에 매우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내가 어떤 진리를 깨달았다고 해서 ‘내가알아냈다’고 생각하고, 어떤 선을 행했다고 해서 ‘내가선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영적으로 피와 기름을 자기 것으로 취하려는 위험에 빠집니다. 인간은 선과 진리를 받아 자유롭게 살아야 하지만 그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려서는 안 됩니다. 선도 주님의 것이고 진리도 주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레3은 ‘모든기름은여호와의것이니라’고 선언합니다.
화목제의 핵심은 결국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신적 진리를 주시고, 그 진리를 통해 인간을 정결하게 하시며, 인간 안의 진리와 선을 결합시키십니다. 그 결합이 속 사람에서 겉 사람으로, 높은 곳에서 자연적 삶의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옵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선과 진리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심을 인정합니다. 바로 그때 주님과 인간 사이에 참된 결합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레3앞에서 우리는 ‘나는하나님과화목한가?’라는 질문만 할 것이 아니라 조금 더 깊이 물어야 합니다. ‘내가알고있는진리가선과결합되어있는가?’, ‘내자연적삶의가장낮은부분까지주님의선과진리가내려와있는가?’, ‘나는내가행하는선을나의공로로여기고있지는않은가?’, ‘내가아는진리를나의지혜로여기고있지는않은가?’입니다.
레1에서 우리는 전부를 불살라 주님께 드리는 번제를 보았습니다. 레2에서는 고운 가루와 기름이 하나가 되는 소제를 보았습니다. 이제 레3에서는 피와 기름, 곧 진리와 선이 함께 제단에 드려지는 화목제를 봅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자기에게서 선과 진리를 찾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더욱 깊이 인정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레3의 마지막 선언은 화목제 전체를 꿰뚫는 고백이 됩니다. ‘모든기름은여호와의것이니라.’ 우리의 선도 주님의 것이고, 우리의 진리도 주님의 것입니다. 그 선과 진리가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될 때 우리의 삶은 주님과 결합하는 화목의 삶이 됩니다. (SW.5레3해설)
레위기 1장의 번제와 레위기 2장의 소제 사이에는 눈에 띄는 차이가 있습니다. 번제에서는 제물 전체를 제단 위에서 불살랐습니다. 그래서 레1에는 반복해서 ‘그전부를제단위에서불살라’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레2에서는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 가운데 일부만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불사르고,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자손들에게 돌립니다. 왜 하나님께 드린 예물을 사람이 다시 먹는 것일까요?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2177(창18:6)은 이 부분을 매우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남은 소제를 먹는 것이 ‘인간편에서의상호성’과 ‘자기것으로받아들임’을 표상하며, 그로 말미암아 사랑과 체어리티를 통한 결합이 이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자기것으로받아들임’은 인간이 선과 진리의 주인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선과 진리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것들을 인간의 바깥에 놓아두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생각하고, 원하고, 행함으로써 마치 자신의 것처럼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래야 실제 결합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음식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 식탁 위에 놓여 있어도 바라보기만 해서는 몸의 생명이 되지 않습니다. 먹고 소화하여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의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책 안에 있는 진리, 설교에서 들은 진리, 머릿속으로 이해한 교리는 아직 완전히 우리의 삶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받아 실제로 살아야 합니다.
‘원수를사랑하라’는 말씀을 아는 것과 나를 힘들게 한 사람에게 실제로 악으로 갚지 않는 것은 다릅니다. ‘거짓말하지말라’는 진리를 아는 것과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직하게 말하는 것은 다릅니다. 체어리티가 중요하다는 교리를 이해하는 것과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실제 선을 행하는 것도 다릅니다. 진리가 의지와 행동으로 내려와 삶이 될 때 비로소 영적으로 ‘먹은것’이 됩니다.
그런데 소제의 일부는 먼저 제단 위에서 불살라집니다. 이것도 중요합니다. 인간이 진리와 선을 자기 삶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그 모든 것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질서가 먼저 서 있습니다. 내가 선을 행했다고 해서 그 선의 근원이 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진리를 깨달았다고 해서 그 진리를 내가 만들어 낸 것도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인간이 자유롭게 받아 자신의 삶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제에는 매우 아름다운 왕복 운동이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가 옵니다.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인간은 그것을 자신의 삶에서 실제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삶의 선을 다시 주님께 돌립니다. 주님께서 주시고, 인간은 받아 응답하며, 그 응답을 통해 다시 주님과 결합합니다.
AC.2177이 이것을 ‘상호성’이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과 인간의 결합은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물론 모든 선의 능력은 주님에게서 오지만, 인간에게는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응답하는 일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고 인간이 그 사랑에 응답하며, 주님께서 진리를 주시고 인간이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찬과도 매우 깊은 연결을 생각하게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소제와 전제가 교회와 천국에 속한 것들을 표상하며, 성찬의 떡과 포도주 역시 같은 방식으로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AC.10137, 출29:40). 성찬에서도 떡을 바라보기만 하지 않고 ‘먹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 자신의 영적 생명으로 삼는다는 표상입니다.
그래서 레2에서 제사장이 남은 소제를 먹는 장면은 사소한 제사 규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말씀의 진리가 어떻게 인간의 삶이 되는가를 보여 줍니다. 진리는 읽는 것에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이해하는 데서도 끝나서는 안 됩니다. 먹어야 합니다. 곧 받아들여 의지하고 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레1의 번제가 ‘나의전부가주님께속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면, 레2의 소제는 ‘주님에게서받은것을내가실제삶으로살아야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 드리는 것과 주님에게서 받아 먹는 것이 서로 반대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의 순환입니다. 주님에게서 받고, 그것을 살아 내고, 다시 주님께 돌리는 것, 바로 그 안에서 주님과 인간의 결합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소제의 남은 것을 먹는다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실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말씀을읽고있는가?’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는말씀을먹고있는가?’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가 오늘 나의 말과 선택과 관계와 행동이 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삶이 될 때, 주님께서 주신 선과 진리는 비로소 우리 안에 살아 있게 됩니다. (SW.4레2심화3)
레위기 2장에서 가장 흥미로운 규정 가운데 하나는 누룩과 꿀은 제단에서 불사르지 못하게 하면서 소금은 모든 소제에 반드시 넣도록 한 것입니다. 특히 꿀까지 금지했다는 것이 뜻밖입니다. 성경에서 꿀은 흔히 좋은 것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규정을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137(출29:40)은 레2:11-13의 규정을 직접 다루면서 누룩은 ‘악에서나오는거짓’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악이 먼저 있고 그 악을 정당화하기 위해 거짓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소제에 누룩을 넣지 않는 것은 주님께 드리는 예배 안에 악에서 나온 거짓이 섞여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꿀은 조금 다릅니다. 꿀은 그 자체로 언제나 악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꿀이 자연적 인간의 즐거움, 외적인 즐거움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세상 사랑과 자기 사랑의 즐거움에 오염되어 거룩한 것과 섞이는 경우입니다. AC.5650(창43:11)은 바로 레2:11을 인용하면서 꿀이 세상에서 감각을 통해 오는 외적 즐거움과 관계하기 때문에 소제에서 금지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섬세한 문제입니다. 신앙생활에는 기쁨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오는 선에는 깊은 기쁨이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무엇때문에기쁜가?’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서 기쁜 것인지,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해서 기쁜 것인지, 종교적인 일을 통해 명예나 영향력을 얻어서 기쁜 것인지, 아니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이웃에게 실제 선이 이루어져서 기쁜 것인지가 다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은 예배와 선행이라도 그 안에 ‘꿀’이 섞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칭찬을 기대하고 행하는 선, 자기 의를 즐기는 봉사, 인정받지 못하면 금세 낙심하거나 분노하는 헌신이라면 외적인 즐거움이 예배의 동기 속에 깊이 들어와 있을 수 있습니다. 레2는 그런 것을 제단의 불에 올리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누룩과 꿀을 빼라고만 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네모든소제물에소금을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AC.9207(출22:22)은 레2:13을 직접 인용하면서 소금이 ‘진리가선을갈망하고선이진리를갈망하는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언약의소금’이라고 부릅니다. 언약은 결합이고, 소금은 그 결합을 향한 갈망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하기를 원합니다. 내가 ‘용서해야한다’는 진리를 참으로 받아들였다면 그 진리는 실제 용서의 선으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이웃을사랑해야한다’는 진리를 받아들였다면 그것은 실제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삶으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반대로 참된 선은 진리를 원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무엇이 상대방에게 실제로 유익한지 알지 못한다면 선한 의도만으로 잘못된 일을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선은 진리를 통해 형태와 방향을 얻습니다.
그래서 소금은 단순히 ‘변하지않게보존한다’는 정도를 넘어섭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서 소금의 핵심은 ‘결합을향한갈망’입니다. 진리와 선이 서로를 바라보며 하나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예물에 있어야 합니다.
레2의 이 세 가지를 나란히 놓으면 놀라운 영적 원리가 보입니다. ‘누룩은빼라.꿀도제단의불에올리지말라.그러나소금은절대로빼지말라.’ 악에서 나오는 거짓은 버리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물든 외적 즐거움도 예배의 동기로 삼지 말되, 선과 진리가 결합하려는 갈망만은 절대로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와 신앙생활을 돌아보며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내신앙에는어떤누룩이들어있는가?’, ‘내가주님을섬기면서은밀히맛보고싶은꿀은무엇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내게는소금이있는가?내가아는진리가실제선한삶이되기를간절히원하는가?’
주님께서 찾으시는 소제는 겉으로 화려한 소제가 아닙니다. 거짓이 섞이지 않고, 자기 사랑의 즐거움이 지배하지 않으며, 선과 진리가 서로 결합하기를 갈망하는 소제입니다. 그래서 ‘네모든예물에소금을드릴지니라’는 짧은 말씀은 우리의 모든 예배와 삶을 관통하는 명령이 됩니다. (SW.4레2심화2)
레위기 2장의 소제를 가장 짧게 표현한다면 ‘고운가루+기름+유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 세 가지를 함께 드리도록 하셨을까요? 단순히 향기롭고 좋은 제물을 만들기 위한 조리법이었을까요? 스베덴보리는 이 세 가지의 결합 속에서 소제의 핵심적인 영적 질서를 봅니다.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1759, AE) 324(계5:8)은 놀랍게도 레2:1-2를 직접 인용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고운 가루가 진정한 진리를 의미하고, 기름은 천적 사랑의 선, 유향은 영적 사랑의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하면 소제의 세 재료는 단순한 음식 재료가 아니라 ‘진리와주님을향한사랑과이웃을향한사랑’이 함께 있는 예배를 보여 줍니다.
고운 가루부터 살펴보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995(출29:2)는 고운 가루를 ‘선에서나오는진리’라고 설명합니다. 이 표현이 중요합니다. 진리는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신적 선에서 신적 진리가 나오며, 인간 안에서도 참된 진리는 결국 선을 섬기고 선으로 인도합니다. 따라서 고운 가루는 단순히 많이 배운 교리 지식이 아닙니다. 삶을 선하게 만드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고운 가루만 드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위에 기름을 붓게 하셨습니다. 기름은 사랑의 선을 표상합니다. 진리에 사랑이 스며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정확한 진리라도 사랑과 분리되면 사람을 살리는 진리가 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기 위한 진리,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진리, 지적 우월감을 위한 진리는 고운 가루만 있고 기름이 없는 상태와 비슷합니다. 주님의 진리는 사랑 안에서 사용될 때 그 본래의 목적을 이룹니다.
그리고 거기에 유향이 더해집니다. 유향은 영적 사랑의 선과 관계합니다. 특별히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이웃 사랑과 체어리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소제 안에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질서가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사랑의 선이 오고, 그 선에서 진리가 나오며, 그 사랑과 진리가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우리가 신앙을 점검하는 매우 좋은 기준이 됩니다. ‘나는진리를알고있는가?’만 물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진리에는기름이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유향이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가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 더 온유하고 정직하며 이웃의 유익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제는 신앙과 사랑과 체어리티를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신앙의 진리가 사랑에서 분리되면 메마른 지식이 되기 쉽고, 사랑이라고 하면서 진리가 없으면 무엇이 참으로 선한 것인지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주님 사랑을 말하면서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가 없다면 그 사랑 역시 삶에서 완성되지 않은 것입니다.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이 한 소제 안에 함께 놓이는 것은 그래서 매우 아름다운 상응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진리를 ‘아는사람’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진리가 사랑과 결합되고, 그 사랑이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로 흘러가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때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은 하나의 소제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과 사랑과 삶도 하나가 됩니다. (SW.4레2심화1)
레위기 1장이 피 흘리는 동물의 번제였다면 레위기 2장은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피도 없고 짐승의 죽음도 없습니다. 대신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이 등장하고, 화덕과 철판과 냄비에서 음식을 만들어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러나 두 장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레1의 번제가 사랑의 선으로부터 드리는 예배를 보여 주었다면, 레2의 소제는 그 사랑이 진리와 결합하여 인간의 삶 안에서 어떻게 구체적인 예배가 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소제는 먹을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단순한 곡물 제사가 아니라 선과 진리가 결합하여 주님께 드려지는 삶의 예배를 표상합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원전 가운데 하나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2177(창18:6)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소제가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고 유향을 더하여 드리는 제사였다고 설명하면서, 이러한 것들이 모두 사랑과 체어리티에 속한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표상했다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그는 레위기 2장 전체가 소제를 어떻게 준비하는지를 다루는 장이라고 직접 언급합니다. 따라서 레2를 읽을 때 우리는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을 각각 따로 떨어진 상징으로 보는 데서 멈추지 말고, 그것들이 어떻게 하나의 소제가 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첫 번째 재료는 ‘고운가루’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고운 가루가 ‘선에서나오는진리’를 의미한다고 분명히 설명합니다(AC.9995, 출29:2). 그냥 진리가 아니라 ‘선에서나오는진리’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천국의 모든 진리와 선은 주님의 신적 선에서 발출하는 신적 진리에서 비롯되며, 진리는 선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소제의 고운 가루는 머릿속에 저장된 교리 지식이나 성경 지식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 그 선을 표현하고 섬기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그 고운 가루 위에 반드시 ‘기름’을 붓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기름은 사랑의 선, 특별히 주님을 향한 사랑의 선을 표상합니다. 그래서 고운 가루와 기름이 함께 있다는 것은 진리와 선이 결합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AC.10136(출29:40)은 고운 가루와 기름이 결합된 것을 ‘천적선으로부터나오는영적선’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진리가 사랑에서 나와 사랑을 섬길 때 그것은 더 이상 머릿속 지식에 머물지 않고 삶을 움직이는 진리가 됩니다.
여기에 다시 ‘유향’이 놓입니다.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1759, AE) 324(계5:8)은 레2:1-2를 직접 인용하면서 소제의 고운 가루는 진정한 진리를, 기름은 천적 사랑의 선을, 유향은 영적 사랑의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유향은 이웃을 향한 사랑, 곧 체어리티와 관계합니다. 그러므로 레2첫 두 절에는 매우 아름다운 질서가 들어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의 선이 있고, 그 선에서 나오는 진리가 있으며, 그 사랑이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로 흘러갑니다. 소제는 이 세 가지가 서로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예배가 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매우 실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진리를 많이 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소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고운 가루에는 기름이 부어져야 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가 사랑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유향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이웃에게 무정하다면 아직 소제의 질서가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은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로 흘러가야 합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생활에서는 ‘무엇을알고있는가’, ‘주님을얼마나사랑하는가’, ‘그사랑으로이웃을어떻게대하는가’가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제사장은 그 가운데 ‘고운가루한움큼과기름과그모든유향’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사릅니다. 여기서 ‘한움큼’도 의미 없는 양의 규정이 아닙니다. AC.2177은 손이나 손바닥이 능력을 의미하기 때문에 ‘한움큼’은 힘을 의미하며, 소제에서 한 움큼을 취하는 것은 온 힘 또는 온 영혼으로 사랑하는 것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제단의 불은 사랑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소제의 일부를 한 움큼 취하여 불사르는 것은 인간이 가진 선과 진리가 사랑 안에서 주님께 돌려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것을 본문은 ‘기념물’이라고 부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잊으셨다가 그 연기를 맡고 기억하신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소제 전체 가운데 주님께 드려지는 부분이 제단의 불 위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됩니다. 레1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불은 사랑을, 향기로운 냄새는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가 주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소제 역시 결국 사랑으로 돌아갑니다. 진리는 사랑에서 나오고, 사랑과 결합하며,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타나고, 다시 사랑의 불 안에서 주님께 드려집니다.
그런데 소제 전체를 불사르지는 않습니다. ‘소제물의남은것은아론과그의자손에게돌릴지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레1의 번제와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번제는 전부를 불살랐지만 소제는 일부만 제단 위에 드리고 나머지는 제사장들이 먹습니다. AC.2177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남은 소제를 먹는 것이 인간 편에서의 응답과 자기 것으로 받아들임, 그리고 그로 말미암는 사랑과 체어리티를 통한 결합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는 인간 바깥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받아들여 자신의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의미에서 ‘먹는것’입니다.
그러므로 소제에는 ‘주님께드림’과 ‘인간이받아삶으로삼음’이라는 두 방향이 함께 있습니다.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자기 삶에서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면서 ‘이선은내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주님께 돌립니다. 주님에게서 받고, 삶으로 받아들이며, 다시 주님께 돌리는 이 순환이 살아 있는 예배입니다.
4절부터는 소제를 만드는 방법이 다양해집니다. 화덕에 굽기도 하고, 철판에 부치기도 하며, 냄비에서 만들기도 합니다. 어떤 것은 기름을 섞고 어떤 것은 기름을 바르며, 어떤 것은 조각으로 나눈 뒤 다시 기름을 붓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서로 다른 소제의 조리법까지도 각각 천국의 아르카나를 담고 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실제로 AC.10137(출29:40)은 화덕, 철판, 냄비에서 만들어지는 여러 소제를 직접 언급하며, 소제의 모든 세부 규정 안에 신적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현재 확보된 직접 원전만으로 화덕·철판·냄비 각각을 레2의 문맥에서 세밀하게 구별하여 단정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형태와 준비 방식은 달라도 ‘고운가루와기름’이라는 중심 구조가 반복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사람마다 거듭남의 삶이 똑같은 외적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도 생각하게 합니다. 각 사람의 환경과 쓰임, 성품과 삶의 형편은 다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다양성 안에서 변하지 않는 중심은 선과 진리의 결합입니다. 어떤 모습의 소제든 고운 가루와 기름이 있어야 하듯, 참된 영적 삶에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그 선을 표현하는 진리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11절에서는 매우 강한 금지 명령이 등장합니다. ‘너희가여호와께드리는모든소제물에는누룩을넣지말지니너희가누룩이나꿀을여호와께화제로드려사르지못할지니라.’ 누룩뿐 아니라 꿀까지 금지한다는 것이 뜻밖입니다. 누룩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어도 꿀은 좋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거의 직접 해설합니다. AC.10137은 소제에 누룩과 꿀을 넣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면서, 누룩은 ‘악에서나오는거짓’을, 꿀은 세상 사랑의 즐거움이 많이 섞여 있는 외적 즐거움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것들이 천국의 선과 진리에 섞이면 그것들을 변질시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꿀 자체가 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 꿀이 자연적 선의 즐거움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문제는 그 즐거움이 거룩한 예배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섬기는 이유가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때문인지, 아니면 인정받는 즐거움과 성공의 만족, 자기 의가 주는 기쁨, 세상적인 보상을 얻기 위한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외적으로는 똑같은 선행과 예배처럼 보여도 그 안에 무엇이 섞여 있는가에 따라 그 질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룩과 꿀은 금하면서 모든 소제에는 반드시 ‘소금’을 치라고 합니다. 더구나 그것을 ‘네하나님의언약의소금’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레2의 가장 아름다운 상응 가운데 하나입니다. AC.9207(출22:22)은 레2:13을 직접 인용하면서 모든 예물에 소금을 넣는 것은 모든 예배 안에 ‘진리가선을갈망하고선이진리를갈망하는것’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언약은 결합을 의미하고, 소금은 그 결합을 향한 갈망을 의미하기 때문에 ‘언약의소금’이라고 불렸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레2전체의 중심을 다시 밝혀 줍니다. 고운 가루와 기름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하기를 원하고, 선은 진리를 통하여 자신을 표현하기를 원합니다. 참된 진리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참된 선은 진리를 통해 무엇이 실제로 선한지를 분별하고 행하기를 원합니다. 이 둘이 서로를 향하는 갈망이 ‘소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네모든예물에소금을드릴지니라’고 하십니다. 예배의 모든 것 안에 선과 진리가 서로 결합하려는 갈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14절부터는 ‘첫이삭의소제’가 등장합니다. 첫 이삭을 볶고 찧어서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유향을 더하여 드립니다. 말씀에서 처음 익은 것을 주님께 드리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선과 진리의 근원을 어디에 두는가와 깊이 관계합니다. AC.9300(출23:19)은 첫 열매를 여호와의 집으로 가져오는 것이 교회의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만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것들을 주님께 돌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첫 이삭을 드리는 행위에는 ‘이것은내가만들어낸것이아니라주님에게서온것입니다’라는 인정이 들어 있습니다.
이 점에서 소제는 인간의 공로와 정반대에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깨달았을 때 ‘내가알았다’고 생각하기 쉽고, 선한 일을 했을 때 ‘내가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첫 열매를 주님께 드린다는 것은 그 진리도, 그 선을 행할 능력도, 그 선을 사랑하게 된 마음도 근원적으로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 자유롭게 자신의 삶으로 살아가지만, 그 생명의 근원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이제 레위기 2장 전체를 다시 보면 하나의 매우 아름다운 흐름이 나타납니다. 고운 가루가 있습니다. 선에서 나오는 진리입니다. 그 위에 기름이 부어집니다. 사랑의 선입니다. 유향이 놓입니다. 그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영적 선, 곧 체어리티입니다. 한 움큼이 사랑의 불 위에 올라가고, 남은 것은 제사장이 먹어 인간의 삶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악에서 나오는 거짓인 누룩은 제거되고, 세상 사랑에 물든 외적 즐거움인 꿀도 제단의 불에 섞이지 않습니다. 대신 모든 것에 소금이 들어갑니다. 진리와 선이 서로 결합하기를 갈망하는 ‘언약의소금’입니다. 그리고 첫 이삭을 드리면서 이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레1과 레2는 아름답게 이어집니다. 레1이 ‘나의전부가사랑으로부터주님께드려지는가?’를 묻는다면, 레2는 한 걸음 더 구체적으로 ‘내가알고있는진리는사랑의기름과섞여있는가?’, ‘주님을향한사랑은이웃을향한체어리티의유향으로나타나는가?’, ‘내예배에는자기사랑과세상사랑의누룩과꿀이섞여있지않은가?’, ‘내안의진리는선과결합하기를갈망하는가?’, ‘그리고내가가진모든선과진리가주님에게서왔음을인정하는가?’라고 묻습니다.
소제는 피 없는 제사이지만 결코 가벼운 제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매일의 삶에 매우 가까운 제사입니다. 우리가 배우는 진리, 품는 사랑, 이웃에게 행하는 선, 일상의 수고와 쓰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누구의 것으로 인정하는가가 소제 안에 들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고운 가루만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 위에 기름이 부어지기를 원하십니다. 진리가 사랑과 결합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선과 진리가 우리 안에서 실제 삶이 되어 다시 주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때 우리의 일상은 하나의 소제가 되고, 삶은 ‘여호와께향기로운냄새’가 됩니다. (SW.4레2해설)
레위기 1장의 번제 규례 가운데 특별히 눈길을 끄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내장과정강이를물로씻을것이요’라는 규정입니다. 소의 번제에서도 나오고 양이나 염소의 번제에서도 똑같이 반복됩니다. 제물을 어차피 모두 불태울 것이라면 왜 굳이 내장과 정강이를 먼저 물로 씻어야 했을까요? 위생을 위한 절차라고만 보기에는 스베덴보리가 이 부분에 매우 구체적인 영적 의미를 부여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49(출29:17)는 ‘내장을씻는것’이 가장 낮은 것들의 정결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에게는 속 사람에서부터 가장 바깥의 자연적 삶에 이르기까지 여러 층위가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낮은 것들은 자연계와 감각에 직접 접촉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자극과 자기 사랑, 세상 사랑, 감각의 즐거움과 오류가 쉽게 들어오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이어 AC.10050(출29:17)은 ‘정강이’를 자연적 인간의 외적인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내장과 정강이를 씻는다는 것은 단순히 인간의 생각이나 종교적 감정만 정결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낮고 바깥에 있는 자연적인 삶까지 정결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거듭남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영적인 변화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고, 말씀을 더 잘 이해하고, 기도할 때 감동을 받으면 자신이 많이 변화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레위기 1장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내장과정강이까지씻으라’고 합니다. 가장 낮은 것과 가장 바깥의 것까지 정결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내장과정강이’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을 문자적으로 일대일 대응시킬 필요는 없지만 그 원리는 우리의 일상생활에 충분히 적용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대할 때 무심코 튀어나오는 말, 돈을 사용하는 방식, 가족에게 보이는 태도, 아무도 보지 않을 때의 행동, 오래 굳어진 습관, 자기 이익이 걸렸을 때 내리는 선택, 다른 사람의 실수를 바라보는 마음, 몸의 감각적 즐거움을 다루는 방식 같은 것들입니다. 신앙생활과 별개라고 생각하기 쉬운 바로 이런 영역이 자연적 인간의 실제 삶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을 ‘물로’ 씻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씻는 의식이 내적 정결을 표상하며, 물은 인간을 정결하게 하고 거듭나게 하는 신앙의 진리와 관계한다고 설명합니다(AC.9088, 출40:31). 따라서 우리의 자연적 삶을 씻는 물은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입니다. 진리는 단순히 머릿속에 저장되는 교리 지식이 아니라 우리 삶을 비추어 ‘이것은악이다’, ‘이것은피해야한다’, ‘이것은주님께서원하시는선이다’라고 분별하게 하는 빛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에 의해 씻긴다는 것은 말씀을 많이 아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진리에 비추어 자기 삶을 살피고, 악이라고 알게 된 것을 실제로 피하는 것입니다. 거짓말이 악임을 아는 것과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은 다릅니다. 용서해야 한다는 진리를 아는 것과 실제로 원한을 내려놓기 위해 싸우는 것도 다릅니다. 체어리티를 이해하는 것과 불편한 이웃을 실제로 선하게 대하는 것도 다릅니다. 진리가 자연적 삶에 내려와 행동을 변화시키기 시작할 때 비로소 ‘씻음’이 일어납니다.
여기에는 또 하나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장과 정강이를 없애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씻으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자연적 인간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우리의 몸, 감각, 일, 재산, 인간관계, 취미와 일상생활 자체가 제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지배를 받으며 무질서해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연적 인간을 파괴하시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 정결하게 하셔서 속 사람을 섬기도록 질서를 회복하십니다.
그리고 씻긴 내장과 정강이는 마침내 다른 부분들과 함께 제단 위에서 불살라집니다. 이것이 참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처음에는 가장 낮고 바깥에 있어서 더럽혀지기 쉬웠던 것들이 진리의 물로 씻긴 후에는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번제의 일부가 됩니다. 인간의 가장 일상적이고 자연적인 삶까지 주님을 향한 사랑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신앙과 일상의 거리는 오히려 좁아집니다. 교회에 있을 때의 나와 집에 있을 때의 내가 달라서는 안 되고, 기도할 때의 나와 돈을 사용할 때의 내가 달라서는 안 되며, 말씀을 읽을 때의 나와 사람을 대할 때의 내가 서로 다른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속에서 받아들인 선과 진리가 가장 바깥의 말과 행동에까지 내려와야 합니다.
레위기 1장의 ‘내장과정강이를물로씻으라’는 짧은 규례는 그래서 매우 실제적인 거듭남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가장 고상한 부분만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가장 낮고 일상적인 부분까지 진리로 씻어 당신의 질서 안으로 가져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부분까지 사랑의 불 위에 놓일 때 비로소 번제는 ‘전부’가 됩니다. 삶의 일부가 아니라 삶 전체가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SW.3레1심화3)
그리스도인이 레위기 1장의 번제를 읽으면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떠올립니다. 흠 없는 제물이 사람을 대신하여 죽고 피를 흘린다는 모습이 주님의 죽음과 매우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흔히 구약의 희생제사를 ‘죄인이받아야할형벌을예수님께서대신받으신사건의예표’로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번제는 예수님의 대속 죽음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도 희생제사와 번제의 최고 의미가 주님께 관한 것임을 인정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번제와예수그리스도는관계가없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관계는 매우 깊습니다. 문제는 ‘어떤방식으로관계하는가?’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2776(창22:2)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드리라’고 하신 말씀을 해설하면서 ‘번제로드리는것’이 주님께서 자신을 신성에 거룩하게 하시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주님께서 시험과 승리를 통하여 자신의 인성을 신성과 하나 되게 하신 과정과 연결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주님의 ‘영화’입니다.
따라서 번제의 최고 의미에서 우리가 먼저 보아야 할 것은 ‘성부께서죄에대한형벌을요구하시고성자께서죄인대신그형벌을받으셨다’는 장면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성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지옥의 모든 세력과 싸우시고 시험을 이기시며, 자신의 인성을 완전히 신성하게 하신 구속과 영화의 과정입니다. 십자가는 그 과정에서 가장 마지막이며 가장 큰 시험이었습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형벌대속의 구조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면 성부는 진노하여 형벌을 요구하시는 분이고 성자는 그 진노를 대신 받아 인간을 구해 내시는 분처럼 이해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구속을 이루신 분은 한 분 주님이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인성을 입고 오셔서 인간을 붙잡고 있던 지옥의 권세를 이기시고, 인간이 다시 자유롭게 주님을 향할 수 있는 질서를 회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한 신적 위격이 다른 신적 위격을 만족시키기 위한 형벌의 지불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인간 구원을 위하여 끝까지 감당하신 마지막 시험과 승리의 절정으로 이해됩니다.
이렇게 보면 레위기 1장의 번제와 십자가의 관계도 훨씬 깊어집니다. 번제물 전체가 불 위에 드려지는 모습은 단지 ‘누군가대신죽는다’는 한 장면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인성을 완전히 신성에 결합시키시는 영화의 전 과정을 표상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번제와 희생제사의 세세한 의식들이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의 영화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AC.10057, 출29:18).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주님의 영화와 우리의 거듭남이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영화와 인간의 거듭남은 서로 전혀 관계없는 두 주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성을 영화롭게 하셨기 때문에 인간의 거듭남이 가능해졌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으로 지옥을 정복하시고 인성을 신성하게 하심으로써 이제 모든 인간에게 악과 거짓을 이길 수 있는 신적 생명과 능력을 공급하십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자신을 거듭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되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거듭납니다.
그래서 희생제사와 번제는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의 영화이고, 상대적 의미에서는 인간의 거듭남입니다. 이 두 의미는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주님 안에서 완전하게 이루어진 것이 인간 안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점차 이루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시험을 통하여 인성을 신성과 완전히 하나 되게 하셨고,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시험을 통과하면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점차 하나의 질서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우리를위해죽으셨다’는 말 자체를 버려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의 죽음까지 감당하셨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입니다. 다만 그 ‘우리를위하여’를 ‘우리가받아야할형벌의정확한양을대신받으셨다’는 의미로만 제한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지옥과 싸우셨고, 우리를 위하여 모든 시험을 이기셨으며, 우리를 위하여 인성을 영화롭게 하셨고, 그리하여 우리가 악과 거짓에서 벗어나 다시 주님과 결합할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그러므로 레위기 1장의 번제를 보면서 우리는 분명히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주님은 성부의 진노를 달래기 위해 희생당하는 별개의 신적 인격이 아니라, 친히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셔서 자신의 인성을 신성하게 하시고 지옥을 이기신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영화로 말미암아 오늘 우리 안에서도 거듭남이라는 또 하나의 번제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십자가는 우리에게 ‘주님이다하셨으니나는아무것도하지않아도된다’는 자리가 아니라, 주님께서 이루신 구속의 능력 안에서 우리도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선과 진리의 삶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됩니다. 주님의 영화가 우리 안에서는 거듭남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번제와 십자가를 함께 바라볼 때 드러나는 더 깊은 연결입니다. (SW.3레1심화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