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유튜브 채널 ‘말씀의서사’의 이번 영상은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보기에 상당히 중요한 영상입니다. 주제가 바로 ‘삼위일체’이기 때문입니다. 자막 전체를 보면 이 영상은 전통적인 니케아-아타나시우스적 삼위일체론을 대중적으로 아주 쉽게 설명하려는 영상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중간중간 사용하는 비유와 표현 가운데는 스베덴보리의 삼위일체 이해에 매우 가까이 접근하는 부분이 있는 반면, 결정적인 대목에서는 스베덴보리가 가장 강하게 문제 삼았던 ‘영원전부터서로구별되는세신적위격’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은 단순히 ‘맞다, 틀리다’로 판정하기보다, 전통적 삼위일체론이 무엇을 지키려 했으며 스베덴보리가 그것을 어떻게 다시 한 분 하나님 안에서 이해했는지를 보여 주기에 아주 좋은 자료입니다.
영상은 오랫동안 교회를 다닌 사람도 ‘삼위일체가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쉽게 설명하지 못한다는 데서 출발하며, 이것을 신앙이 얕기 때문이 아니라 삼위일체가 그만큼 깊고 신비로운 진리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출발점에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삼위일체가본래부터인간의이해를초월할만큼모순적인신비인가, 아니면교회가하나님을세영원한위격으로설명하면서이해하기어려워진것인가?’라고 질문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후자에 훨씬 가깝습니다. 그는 삼위일체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기독교에는 반드시 삼위일체가 있다고 말합니다. 다만 그 삼위일체를 ‘세신적인격의연합’으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하고,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 자체, 신적 인간, 발출하는 신성의 삼위일체로 이해합니다. 영상과 스베덴보리 모두 ‘하나님은한분이며삼위일체가있다’고 말하지만, ‘그셋이어디에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서 길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영상은 신명기 6장 4절의 ‘하나’인 히브리어 ‘에하드’가 창세기 2장 24절의 ‘한몸’에도 쓰인다는 사실을 들어, 하나가 반드시 단순한 숫자적 하나만을 뜻하지 않고 ‘여럿이연합된하나’일 수도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어 창세기 1장 1절의 ‘엘로힘’이 형태상 복수인데 동사는 단수라는 점도 삼위일체를 암시하는 하나의 힌트처럼 제시합니다. 다행히 영상도 이것들만으로 삼위일체가 ‘증명되는것은아니다’라고 선을 긋는데, 이 신중함은 좋습니다. 그러나 ‘에하드’가 집합적 하나를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이 곧 하나님이 복수 인격으로 구성된 존재라는 뜻은 아니며, ‘엘로힘’의 형태 역시 그것만으로 삼위일체의 증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하나 되심을 먼저 온전히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성은 세 존재가 하나의 목적과 사랑으로 연합하여 이루는 하나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영상이 창세기 1장 26절의 ‘우리의형상을따라우리의모양대로우리가사람을만들고’를 설명하면서 ‘혼자가아니었던겁니다’, ‘하나님안에는이미서로대화하고의논하시는우리가계셨던것’이라고 말하는 대목은 더욱 조심해서 보아야 합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의 창조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을 인간의 거듭남과 태고교회의 형성을 다루는 말씀의 속뜻으로 읽습니다. 따라서 창1:26의 ‘우리’를 곧바로 영원 전부터 서로 의논하던 세 신적 위격의 대화로 읽는 것은 AC의 해석과 상당히 멀어집니다. 더구나 ‘서로대화하고의논하시는우리’라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성부가 성자에게 말하고 성자가 성부에게 응답하며 성령이 그 옆에 계시는 세 신적 주체가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스베덴보리가 전통적 삼위일체 교리에서 가장 우려했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은한분’이라고 고백하면서 생각 속에서는 세 분을 그리게 되는 것입니다.
영상이 가장 강력한 증거로 제시하는 것은 요단강에서 예수께서 세례받으시는 장면입니다. 물속에는 성자, 비둘기같이 내려오는 성령, 하늘에서는 성부의 음성이 있으므로 ‘성부, 성자, 성령세분이같은순간에각자의자리에서동시에나타났다’고 설명하며, 이것이 한 분이 세 역할을 하는 ‘1인3역’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삼위일체를 단순한 양태론, 곧 한 하나님이 때로는 아버지 역할을 하고 때로는 아들 역할을 하고 때로는 성령 역할을 한다는 식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영상이 경계하는 단순한 ‘1인3역론’에 스베덴보리를 넣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세례 장면이 ‘영원히서로구별되는세신적인격’을 증명하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구별은 실제적인 구별이지만 세 하나님 사이의 구별이 아닙니다.
특히 주님의 성육신과 영화의 과정에서는 아직 완전히 하나가 된 상태를 시간 속에서 이루어 가시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복음서에는 아들이 아버지께 기도하고, 아버지의 음성이 들리고, 성령이 임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이것을 곧바로 ‘영원전부터존재하던세인격이잠시한장면에동시에등장했다’고 읽으면 성육신과 영화라는 거대한 과정이 사라져 버립니다. 성육신하신 주님은 단순히 이미 완성된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 인간의 옷을 입고 잠시 지상에 내려오신 것이 아니라, 모친 마리아에게서 취한 인성을 통하여 시험을 겪으시고 악과 지옥을 이기시며 그 인성을 점차 신성과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서에 나타나는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이해할 때에는 이 ‘영화’의 과정이 반드시 함께 고려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번 영상에서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 있습니다. 9분대에 등장하는 ‘태양비유’입니다. 영상은 하나의 태양에서 ‘빛, 열, 생명을살리는에너지’가 나온다고 설명하면서 ‘우리에게다가오시는모습은셋이지만그본질은완전히하나’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은 뜻밖에도 스베덴보리의 신학을 설명하기에 훨씬 적합한 방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신적 지혜를 태양의 열과 빛에 상응시켜 설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의 태양에서 열과 빛이 나오듯 신성의 근원이 나뉘어 여러 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신성이 서로 구별되는 방식으로 나타나고 발출합니다. 따라서 이 영상은 여기에서 조금만 방향을 달리했더라면 스베덴보리의 삼위일체 이해에 상당히 가까이 갈 수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 비유를 제시한 직후 다시 ‘성부가계획하고, 성자가실행하고, 성령이적용한다’는 세 주체의 분업 구조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복음주의 교회에서 삼위일체적 구원을 설명할 때 매우 익숙하고 교육적으로도 이해하기 쉽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자칫 ‘성부라는한분이계획하고, 성자라는다른분이지상으로내려와값을치르고, 성령이라는또다른분이그것을인간에게전달한다’는 구조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영상의 ‘예수님은그한번의죽음으로우리의값을단번에그리고영원히갚아주셨습니다’라는 문장은 전통적인 대속·형벌대속적 구원론과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십자가는 구속의 핵심적인 마지막 시험이며 영화의 완성이지만, 성부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형벌의 값을 성자가 대신 지불하여 성부의 태도를 바꾸었다는 식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성육신 전에는 진노하시다가 성자의 희생 때문에 인간을 사랑하게 되신 분이 아닙니다. 바로 그 한 분 하나님께서 사랑 때문에 친히 인간에게 오셔서 지옥을 정복하고 자신의 인성을 영화하심으로 인간에게 다시 구원의 길을 여신 것입니다.
영상 후반에 제시하는 ‘삼위일체를일상에서누리는다섯가지실천법’에서도 이 차이는 매우 실제적으로 나타납니다. 영상은 ‘하나님아버지, 오늘하루를주관해주세요. 예수님, 십자가의사랑을기억합니다. 성령님, 오늘저를인도해주세요’라고 각각 부르도록 권하고, 찬송도 1절은 성부, 2절은 성자, 3절은 성령께 드리라고 하며, 하루의 감사 역시 세 분에게 역할별로 나누어 드리도록 권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문제 제기가 실제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이것을 오랫동안 반복하면 신자의 마음속에는 자연스럽게 세 개의 신적 중심이 형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한하나님’이라고 하지만 기도할 때는 세 분을 차례로 찾아가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새 교회 신학에서 중심은 ‘주예수그리스도’입니다. 성부는 주님 밖에 따로 계시는 또 다른 신적 인격이 아니라 주님의 내적 신성이며, 성자는 그 신성이 세상에서 취하셨다가 영화하신 신적 인간이며, 성령은 그 한 분 주님에게서 발출하여 인간에게 역사하시는 신적 진리와 신적 활동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성부를 건너뛰는 것도 아니고 성령을 제외하는 것도 아닙니다. 한 분 주님께 나아감으로써 신성 전체에 나아갑니다. 이 점에서는 오히려 영상 자체가 14분대에 말한 ‘여러분은기도할때마다삼위일체하나님전체와만나고있는겁니다’라는 표현이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라면 그것을 ‘세분이동시에기도를듣는다’고 설명하기보다 ‘한분주님안에신성의충만이있기때문’이라고 설명했을 것입니다.
영상의 신학적 결론은 마지막 부분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은사랑이시다. 그런데혼자서는사랑할수없다. 그러므로창조이전부터성부와성자와성령께서서로사랑하고계셨다.’ 그리고 그 사랑이 넘쳐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름답고 감동적인 설명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대목이 스베덴보리와 전통적 삼위일체론의 차이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은 하나님 안에 사랑을 주고받는 세 인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신성 자체가 사랑 그 자체이며 지혜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본질에는 자신 밖의 다른 존재를 사랑하고, 그 존재에게 자신의 것을 주며, 그 존재와 결합하기를 원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적 사랑은 창조를 향합니다. 인간과 천국을 창조하신 것도 사랑할 대상을 필요로 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완전한 신적 사랑 자체가 자신의 선과 행복을 다른 존재에게 나누어 주려 하기 때문입니다. 영상의 논리를 끝까지 밀고 가면 ‘사랑이되기위해하나님안에최소한복수의인격이필요하다’는 결론이 되지만, 스베덴보리에게 하나님의 단일성은 결핍이나 고독이 아닙니다. 오히려 무한한 사랑과 지혜와 생명의 완전한 하나 됨입니다.
그렇다고 이 영상을 ‘삼위일체를잘못가르치는영상’이라고 단순하게 평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전통적 기독교가 지키고자 했던 매우 중요한 진리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것,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신적이라는 것, 성령은 단순한 비인격적 힘으로 축소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구원 전체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영상은 진지하게 붙들고 있습니다. 또한 고난 속에서 외적 상황의 변화보다 먼저 마음이 변화되고 평안을 얻는다는 후반부의 메시지도 매우 귀합니다. 이것은 ‘문제해결’ 자체보다 인간의 내적 상태와 거듭남을 중요하게 보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충분히 귀하게 받을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보면 이 영상에는 한 가지 일관된 긴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한분’이라고 계속 말하면서 실제 설명에서는 성부·성자·성령을 각각 생각하고, 말하고, 사랑하고, 계획하고, 행동하는 세 신적 주체로 그립니다. 그래서 ‘셋이완벽하게하나로움직인다’고 아무리 강조해도 독자의 내적 사고에는 결국 세 분이 남기 쉽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삼위일체론은 이 문제에 대해 매우 급진적이면서도 단순한 답을 내놓습니다. ‘삼위일체를버리지말라. 그러나그삼위를세영원한인격에게나누지말라. 그삼위는한분주예수그리스도안에있다.’ 사람에게 영혼과 몸과 그에게서 나오는 활동이 있다고 해서 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듯, 주님 안에는 성부라 불리는 신성 자체, 성자라 불리는 신적 인간, 성령이라 불리는 발출하는 신성이 있습니다. 이 셋은 세 하나님이 서로 완벽하게 협력하여 하나가 된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의 삼위입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의 핵심 질문도 ‘세분이어떻게하나가되는가?’에서 ‘한분하나님안에서성부와성자와성령의삼위가어떻게존재하는가?’로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 제목 ‘그런데아직도어려운삼위일체’에 ‘스베덴보리의렌즈’가 답한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삼위일체가어려운까닭은반드시하나님자체가모순적인신비이기때문만은아닙니다. 우리는오랫동안한분이라고고백하면서세분을생각하도록배워왔기때문일수도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삼위일체를없애지않습니다. 오히려흩어져있던삼위를다시한분주님안에모읍니다. 그때성부께갈것인가, 성자께갈것인가, 성령께구할것인가하는신자의오래된혼란도새로운빛아래놓입니다. 주예수그리스도께나아가면됩니다. 그분안에신성의모든충만이있기때문입니다.’ 이것이 이번 영상에서 가장 역설적인 부분입니다. 영상은 ‘삼위일체의안개를걷어주겠다’고 시작하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그 안개가 완전히 걷히는 지점은 ‘세분이어떻게하나인가’를 더 정교하게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셋이한분주님안에서어떻게하나인가’를 보는 데 있습니다. 그 순간 삼위일체는 세 하나님을 억지로 하나라고 이해해야 하는 난제가 아니라, 한 분 하나님께서 사랑 자체로 계시고, 인간에게 보이도록 오셨으며, 지금도 자신의 영으로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구원의 한 질서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에서 강사가 다루는 본문은 역대상 4장 9-10절의 유명한 ‘야베스의기도’입니다. 한때 한국 교회에서도 ‘나의지경을넓혀주십시오’라는 구절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했던 기도입니다. 그 과정에서 ‘지경’은 사업의 확장, 재산의 증가, 사역의 성장, 영향력의 확대 같은 것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 야베스의 기도가 대표적인 ‘복을구하는기도’로 자리 잡았습니다. 강사가 문제 삼는 것도 바로 이 지점입니다. 그는 히브리어 본문을 자세히 살피면서 마지막 구절을 ‘내게근심이없게하옵소서’라고만 읽을 것이 아니라 ‘내가고통을일으키지않게하옵소서’라고도 읽을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그렇게 되면 야베스의 기도는 ‘하나님, 나를잘되게해주십시오’라는 기도에서 ‘하나님, 내가남을아프게하는사람이되지않게해주십시오’라는 기도로 깊어집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 볼 때 바로 이 방향 전환은 매우 주목할 만합니다.
먼저 히브리어 자체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역대상 4장 9절에서 야베스의 어머니는 ‘내가수고로이낳았다’고 말하는데, 여기 사용된 히브리어 ‘오체브’(עֹצֶב)는 고통, 슬픔, 수고 같은 뜻을 가집니다. 그리고 ‘야베스’(יַעְבֵּץ)라는 이름과 이 단어 사이에는 분명한 언어유희가 있습니다. 실제로 여러 번역과 주석도 이 점을 인정합니다. 다만 영상에서 설명하듯 야베스라는 이름이 단순히 ‘오체브의자음순서를바꾼단어’라고 어원적으로 확정하는 것은 조금 조심하는 편이 좋습니다. 본문이 두 단어의 유사한 소리를 이용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성경의 이름 풀이에서는 현대 언어학적 어원과 문학적인 언어유희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야베스라는이름과고통을뜻하는오체브사이에의도적인말놀이가있다’고 하는 정도가 가장 안전합니다. 더구나 고유명사 야베스의 첫 요드(י)를 곧바로 히브리어 미완료형의 접두사라고 분석하는 것 역시 지나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고유명사가 되면 그 자체로 이름이므로, 일반 동사의 활용형처럼 단순하게 역분석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본문 저자가 ‘야베스 - 고통 - 근심’이라는 음성적 연결을 독자에게 의식시키고 있다는 강사의 큰 관찰은 옳습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10절 끝의 ‘레빌티오츠비’(לְבִלְתִּי עָצְבִּי)입니다. 여기의 ‘오츠비’는 ‘고통하다, 슬프게하다’와 관련된 동사의 부정사 형태에 1인칭 단수 접미사가 붙은 것으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부정사에 붙은 인칭 접미사는 문맥에 따라 행위의 주체처럼 이해되기도 하고 객체처럼 이해되기도 하기 때문에, 강사가 소개한 두 방향의 가능성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 영어 번역들도 갈립니다. NASB와 NET 같은 번역은 대체로 ‘그것이나를아프게하지않도록’, 곧 야베스가 고통받지 않도록이라는 방향으로 번역하지만, NKJV와 HCSB 계열은 ‘내가고통을일으키지않도록’이라는 방향을 취한 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강사가 말하는 ‘내가고통을야기하지않게해주십시오’는 임의로 만들어 낸 번역은 아닙니다. 다만 영상에서 ‘킹제임스번역이저처럼해석했다’고 말한 부분은 정확히는 수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통적인 KJV는 ‘thatitmaynotgrieveme’, 곧 ‘그것이나를근심하게하지않도록’이라고 번역하며, ‘thatImaynotcausepain’이라고 한 것은 NKJV입니다. 작은 차이 같지만 히브리어 해석을 중심으로 하는 영상이므로 이 구분은 중요합니다.
더구나 이 절의 히브리어는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습니다. ‘웨아시타메라아’(וְעָשִׂיתָ מֵּרָעָה)라는 부분 자체가 해석상 어려움이 있는 표현입니다. 많은 번역본은 문맥을 따라 ‘나를악에서지켜주시고’, ‘재앙으로부터보호하시고’와 같이 이해하지만, 마소라 본문의 문법을 문자 그대로 풀면 매끄럽지 않습니다. NET 성경도 이 대목의 히브리어가 어렵다는 점을 주석에서 명시하고 다른 본문 가능성까지 논의합니다. 그러므로 10절 마지막을 하나의 문법 분석만으로 완전히 해결됐다고 말하기보다는, ‘본문자체가여러해석의가능성을가지고있으며, 그가운데내가고통을일으키지않도록이라는이해도실제번역전통속에존재한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오래된 유대교 주석 전통에서는 대체로 야베스 자신에게 손해와 고통이 닥치지 않게 해 달라는 의미로 읽어 왔습니다. 그러므로 ‘내가남에게고통을주지않게’라는 해석은 매우 아름답고 문법적으로 가능한 독법 가운데 하나이지만, 전통적 해석을 폐기하는 결정적 번역이라고까지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렌즈’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나에게고통이오지않게해주십시오’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곧바로 기복주의라고 규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주님께 보호와 건강과 평안과 생계와 필요한 자연적 복을 구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무엇을 위해 구해지는가입니다. ‘나의지경을넓혀주십시오’가 ‘내소유를더늘려주십시오’, ‘나를더유명하게만들어주십시오’, ‘내사역을남들보다크게만들어주십시오’라는 자기중심적 욕망으로 변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반대로 주님께서 맡기신 쓰임을 더 잘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자연적 조건과 능력과 기회를 구한다면 같은 말도 전혀 다른 기도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외적 행위 자체보다 그 행위 안에서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목적으로 삼는지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야베스의 기도의 핵심은 ‘복을구했느냐, 복을구하지않았느냐’가 아닙니다. ‘그복의중심에누가있는가’입니다. 우리의 proprium은 복조차도 자기 자신을 향하게 만듭니다. ‘주님, 나의지경을넓혀주십시오’라고 하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내가더인정받게해주십시오’, ‘내이름이더높아지게해주십시오’, ‘내가다른사람보다성공하게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같은 ‘지경’을 구하면서 ‘제가더많은사람에게선을행할수있게하시고, 더큰책임을감당하게하시며, 주님께받은것을더넓게쓰게하십시오’라고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똑같은 기도라 하더라도 내적 의미에서는 전혀 다른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강사가 마지막 구절을 ‘내가다른사람에게고통을주지않게해주십시오’라고 읽은 것은 ‘스베덴보리의렌즈’와 놀라울 만큼 잘 만납니다. 스베덴보리는 반복해서 ‘악을죄로여겨피하는것’을 기독교적 삶의 첫째요 본질적인 것으로 말합니다. ‘신적섭리’ 265번에서도 악을 죄로 여겨 삼가는 것이 기독교 종교의 본질이라고 설명하며, ‘참된기독교’ 535번에서는 체어리티의 첫째가 악을 피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지 ‘나에게나쁜일이생기지않도록해주십시오’라는 기도보다 훨씬 깊습니다. ‘주님, 제안에있는악이다른사람에게흘러나가지못하게해주십시오. 제말과행동과욕망때문에다른사람이상처받지않게해주십시오. 그리고그악을단순히억제하는데서끝나지않고, 그것이주님께죄임을보고돌이키게해주십시오’라는 기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내가고통을일으키지않도록’이라는 기도조차 단순한 도덕적 착함을 넘어가야 합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좋은사람이되겠다’고 결심한다고 해서 자신의 내면을 정결하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외적 삶에서 악을 죄로 여기고 싸우며 물리칠 때, 실제로 그 악의 욕망을 내면에서 제거하시는 분은 주님이라고 설명합니다. ‘신적섭리’(Divine Providence, 1764)145번은 사람이 악을 죄로 여기고 그것을 그만두기로 결심하면서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싸움이 시작되고, 그 과정에서 주님께서 악한 욕망을 제거하고 선의 애정을 심으신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깊은 야베스의 기도는 ‘제가남에게피해를안끼치도록제성격을잘관리하겠습니다’가 아니라 ‘주의손이나와함께하사, 제가악을행하지않도록하시고, 제안에서악을일으키는것까지주님께서다스려주십시오’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야베스의 기도 가운데 ‘주의손으로나를도우사’라는 구절과도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따라서 ‘지경을넓혀주십시오’와 ‘주의손이나와함께하게하십시오’와 ‘악에서지켜주십시오’와 ‘내가고통을일으키지않게하십시오’를 서로 떨어진 네 가지 소원으로만 읽지 않고 하나의 거듭남의 흐름으로 읽어 볼 수도 있습니다. ‘주님, 제게주신선과진리의삶의영역을넓혀주십시오. 그러나그것을제힘으로소유하려하지않게하시고, 언제나주님의손이저와함께하게하십시오. 제안의악이그넓어진지경안으로흘러들지않게하시며, 제가받은능력과영향력이오히려다른사람을상하게하는도구가되지않게해주십시오.’ 이렇게 읽으면 ‘지경의확대’는 성공의 확대가 아니라 쓰임의 확대가 됩니다. 지위가 높아질수록 더 많은 사람을 지배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고, 재물이 많아질수록 더 많이 소유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선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며, 목회자의 영향력이 넓어질수록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더 많은 영혼을 주님께 연결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대상 4장 10절에 스베덴보리가 직접 붙인 속뜻이라고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거듭남과 쓰임의 교리 안에서 이 기도를 읽을 때 자연스럽게 열리는 적용입니다.
이 지점에서 한국 교회의 이른바 ‘야베스의기도열풍’도 조금 다르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지경을넓혀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는 사실 자체를 기복주의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지나칩니다. 성경에는 자연적 복을 구하는 기도가 있고, 주님께서는 우리의 자연적 삶도 섭리하십니다. 그러나 자연적 복을 최종 목적으로 만들 때 신앙의 질서가 뒤집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자연적인 것은 영적인 것을 섬겨야 합니다. 재물과 건강과 지위와 지식과 능력과 영향력은 모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선한 쓰임을 위한 수단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경을넓혀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버릴 것이 아니라 그 기도의 중심을 바꾸어야 합니다. ‘내지경을넓혀내것을크게해주십시오’가 아니라 ‘주님께서제게맡기실수있는쓰임의지경을넓혀주십시오’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영상의 가장 귀한 문장은 처음과 끝에 반복된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내가다른사람들에게고통을주지않도록그런내가될수있도록인도해달라.’ 이것은 매우 실제적인 회개의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저사람이나에게상처를주었습니다’, ‘저사람때문에내가고통받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시선을 다시 나 자신에게 돌리게 합니다. ‘그사람의악’은 그 사람이 주님 앞에서 다룰 문제이고, 내가 지금 살펴야 하는 것은 ‘내안의악’입니다. ‘나는누구에게고통을주고있지는않은가? 내proprium의자존심과지배욕과인정욕과탐욕과분노와냉혹함때문에가까운사람이힘들어하고있지는않은가?’ 이것을 보는 것이 자기 성찰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발견한 악을 ‘내성격이원래그래’라고 합리화하지 않고 ‘이것은주님께죄입니다’라고 인정하고 피하려 할 때 거듭남이 시작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악을죄로여겨피하는것’을 그토록 강조한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강사의 해석을 이렇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히브리어 주해 차원에서는 ‘내가고통을일으키지않도록’이라는 번역을 유일한 정답으로 밀어붙이기에는 조심할 점이 있습니다. 전통적인 ‘내가고통을당하지않도록’이라는 해석 역시 충분한 문법적·번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실제 마소라 본문 자체에도 난해한 부분이 있습니다. 또한 영상에서 KJV와 NKJV를 혼동한 작은 오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강사가 야베스의 기도를 자기중심적인 복의 청원에서 타인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구하는 기도로 전환한 것은 매우 좋은 신학적 통찰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렌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내게고통이없게하옵소서’와 ‘내가고통을주지않게하옵소서’ 가운데 하나를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둘이 함께 갈 수 있습니다. ‘주님, 악으로부터저를보호하여주십시오. 그러나무엇보다제가악의통로가되지않게하십시오. 제지경을넓혀주십시오. 그러나그것이제proprium의지경이아니라주님의선과진리가흘러갈쓰임의지경이되게하십시오. 주의손이저와함께하시되, 그손으로제주변의장애물만치워달라고하지않게하시고, 먼저제안의악을보게하시며그것을죄로여겨피하게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야베스의 기도는 더 이상 ‘고통없는인생과성공을보장받는주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복을받을수록더선한사람이되게하시고, 지경이넓어질수록더많은쓰임을감당하게하시며, 힘이커질수록아무도해치지않게하시고, 무엇보다그모든과정에서주님의손을떠나지않게해주십시오’라는 거듭남의 기도가 됩니다. 저는 야베스의 짧은 기도를 오늘 우리가 다시 드린다면, 바로 이 지점까지 가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번 영상은 앞서 다루었던 2020년 1월 5일의 티혼 수도사 이야기와 상당 부분 겹칩니다. 다만 이번에는 티혼 수도사의 극단적 금욕생활뿐 아니라 그가 연결되어 소개되는 아토스의 이비론 수도원, 그곳의 공동생활과 식사 규칙, 기도와 금식, 그리고 강문호 수도사가 실제로 그곳에서 경험한 일들까지 함께 펼쳐집니다. 따라서 이번 글에서는 앞서 이미 살핀 ‘금욕과거듭남’의 문제를 되풀이하기보다, 영상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과하나되는삶’, ‘외적질서와내적질서’, 그리고 ‘거룩한공동체란무엇인가’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추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 역사적으로 한 가지는 구별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영상에서는 1884년 러시아에서 태어난 티혼 수도사가 여러 수도원을 찾아다닌 끝에 이비론 수도원에 이르러 그곳에서 수도한 인물처럼 소개됩니다. 그러나 현재 확인되는 정교회 자료에서 티혼 골렌코프(1884-1968)는 아토스의 카프살라에서 살았던 러시아계 은수자로, 말년에는 스타브로니키타 수도원에 속한 성십자가 켈리에서 살았으며, 훗날 성 파이시오스의 영적 스승으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2026년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청이 그를 공식 성인 명부에 올렸습니다. 그러므로 티혼을 이비론 수도원이 ‘배출한대표적수도사’로 직접 연결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는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Cloud of Witnesses) 이것은 영상의 영적 메시지를 무너뜨리는 문제가 아니라, 수도원과 인물의 실제 관계를 구별해 두자는 정도입니다.
영상의 티혼 수도사 묘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극단적인 금욕입니다. 잠들지 않기 위해 목에 끈을 걸고 밤새 기도하고, 아주 적은 음식만 먹으며, 딱딱한 잠자리와 한 장의 담요로 겨울과 여름을 지낸 것으로 소개됩니다. 또한 ‘탐식은모든죄가들어오는현관문’이라는 생각 아래 배부름을 경계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전해지는 티혼의 생애에서도 극심한 가난과 지속적인 기도와 금욕은 중요한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Cloud of Witnesses) 이런 삶을 바라볼 때 우리는 먼저 그 진지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지기를 갈망하여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고 기도에 생애를 바친 사람의 열망 자체를 가볍게 볼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는 언제나 여기서 한 걸음 더 안으로 들어갑니다. 적게 먹는 것이 곧 탐욕을 제거하는 것은 아니며, 딱딱한 침대에서 자는 것이 곧 proprium을 제거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하루에 열매 반쪽만 먹으면서도 자기 금욕을 자랑할 수 있고,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도 감사와 절제 가운데 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음식의 양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지배하는 사랑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은 육체를 가능한 한 괴롭히는 과정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악한 욕망이 주님의 질서 아래 놓이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외적 절제는 내적 거듭남을 돕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지만, 둘을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배부르면음란해지고, 배부르면교만해지고, 배부르면자기자랑을하게된다’는 영상의 설명도 이런 구별이 필요합니다. 과식과 탐식이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고 영적 집중력을 흐릴 수 있다는 수도 전통의 경험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죄의 근원이 음식이나 배부름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악의 뿌리는 인간의 proprium 안에서 주님과 이웃보다 자신을 사랑하려는 질서의 전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탐식을 절제했는데도 사람을 지배하려 하고, 인정받기를 원하고, 자기 공로를 높이고, 타인을 업신여긴다면 근본적인 싸움은 아직 남아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음식에 대한 절제도 결국 이러한 내적 악과 싸우는 데 봉사할 때 영적 의미를 갖습니다.
티혼과 동물들의 관계를 전하는 부분은 따뜻합니다. 여우가 찾아오고, 멧돼지 새끼들을 보호하며, 사냥꾼에게 동물을 숨겨 주고, 심지어 곤충들에게 자신의 피를 먹게 했다는 성인전적 이야기까지 소개됩니다. 이런 세부를 모두 역사적으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전달하려는 방향은 분명합니다. 수도자의 거룩함이 인간에게만 친절한 데서 끝나지 않고 피조물 전체에 대한 온유함으로 확장되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론에서도 동물은 인간의 다양한 애정들을 표상합니다. 그렇다고 실제 여우나 멧돼지를 곧바로 특정 애정과 일대일 대응시킬 필요는 없지만, 인간 안의 거칠고 자연적인 것까지 주님의 질서 아래 평화롭게 놓이는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장면으로는 충분히 읽을 수 있습니다.
영상은 이런 혹독한 훈련 끝에 티혼이 ‘하나님과합일의단계’에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렌즈’는 중요한 구별을 하나 더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동일해지는 의미에서 ‘합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언제나 생명 자체이시고 인간은 그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유한한 피조물입니다. 인간이 주님과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내안의선은내것이아니라주님의것’임을 더욱 깊이 인정하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참된 결합은 ‘내가어떤높은영적단계에올랐다’는 자기의식보다, 자신의 생명과 선이 전적으로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점점 더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상태에 가깝습니다.
영상 중간의 우물 이야기에서도 같은 원칙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가뭄으로 우물이 말랐을 때 성자의 초상화를 우물에 넣고 수도자들이 기도하자 물이 차올라 초상화가 떠올랐다는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그리고 강문호 수도사는 ‘기도는응답이다. 기도는안되는것을되게하고, 불가능을가능하게하고, 닫힌문을연다’는 취지로 강조합니다. 이 이야기는 수도원 전승으로 받아들이면 충분하겠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본질을 ‘내가바라는불가능한일을하나님이이루어주시는능력’으로만 이해하면 기도가 어느새 인간의 뜻을 관철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참된 기도는 주님의 뜻을 내 뜻에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 뜻이 주님의 섭리와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응답이 내가 요구한 형태로 오지 않을 때에도 주님을 신뢰할 수 있는가가 오히려 더 깊은 기도의 시험일 수 있습니다.
이번 영상에서 매우 흥미로운 부분은 이비론 수도원의 공동 식사입니다. 원장이 먹기 시작하면 모두 함께 먹고, 원장이 수저를 놓으면 아직 다 먹지 못했어도 모두 수저를 놓으며, 식사 중에는 한 사람이 성경을 읽어 육신의 양식과 영의 양식을 함께 취한다는 설명입니다. 여기에 담긴 질서와 절제는 충분히 인상적입니다. 그러나 ‘수도원장이모든것의표준’이라는 표현은 영적으로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공동체의 운영에는 외적 질서가 필요하고 수도자는 자발적으로 그 질서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양심과 진리의 최종 기준은 인간 지도자가 아니라 주님과 말씀입니다. 인간 지도자에게 대한 순종이 주님께 대한 순종을 돕는 수단이라면 좋은 질서가 되지만, 지도자의 의지가 곧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다면 외적 순종이 내적 자유를 침범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수도원 밖의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강제로 거듭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와 이성을 보존하시면서 그가 선과 진리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이끄십니다. 따라서 가장 깊은 순명은 ‘한인간이시키는대로하는것’이 아니라, 자기 의지를 내려놓고 주님의 선과 진리에 기꺼이 순종하는 것입니다. 외적 규율이 그것을 훈련해 줄 수는 있지만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원장이 숟가락을 놓았기 때문에 나도 숟가락을 놓는 훈련보다 더 깊은 것은, 내 욕망이 ‘조금더먹고싶다’, ‘내뜻대로하고싶다’, ‘나는예외이고싶다’고 말할 때 그것을 주님의 질서 아래 놓는 내적 순종입니다.
강문호 수도사가 만난 일본 수도사가 ‘한국에서온수도사가없다. 한국과아토스의고리를만들어달라’며 자신을 붙들었다는 일화도 흥미롭습니다. 여기에는 ‘한국에도이런수도영성이생겼으면좋겠다’는 강문호 수도사의 오랜 열망이 드러납니다. 영상 마지막에도 ‘우리나라에도이런교회수도사들이많이배출되어하나님과함께사는사람들이많이나타났으면좋겠다’고 말합니다. 이 소망 자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현대교회가 활동, 성장, 재정, 조직, 프로그램에 치우칠 때 기도와 절제와 하나님 중심의 삶을 회복하자는 요청은 귀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수도사가많이배출되는것’과 ‘거듭난사람이많아지는것’을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수도복을 입은 사람의 수가 많아져도 자기 사랑과 공로의식과 지배욕이 그대로라면 천국이 가까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수도사라는 이름을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사람이 가정과 직장과 교회에서 자신의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정직한 쓰임을 행한다면 그는 실질적으로 천국의 질서를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수도 영성을 바라보면서 계속 외적 형식과 내적 상태를 구별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영상 마지막의 ‘하나님하고가까이하는사람들이많으면사막이도시가된다’, ‘아름다운사람들이살기때문에그곳이아름답다’는 취지의 말은 상당히 좋습니다. 다만 ‘아름다운사람’의 기준을 다시 주님께 돌려놓으면 훨씬 깊어집니다. 사람 자체가 스스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이 삶으로 흘러나올 때 그 사람을 통해 천국의 아름다움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천국의 아름다움도 천사들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 있는 주님의 사랑과 지혜가 외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이번 영상은 앞서 살핀 티혼 수도사 이야기보다 조금 더 넓은 질문을 우리에게 남깁니다. ‘거룩한수도자가되는법’보다 ‘거룩한공동체가어떻게형성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극단적인 금식, 긴 기도, 엄격한 규칙, 침묵, 수도원장의 권위가 공동체를 특별하게 보이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적 공동체의 진정한 표지는 구성원들이 얼마나 서로 사랑하며, 상대의 자유를 존중하고, 자신의 공을 내려놓으며, 각자의 쓰임을 통해 전체의 선을 섬기는가에 있습니다. 외적 질서가 이러한 내적 질서를 보호한다면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외적 질서 자체가 거룩함의 증표가 되는 순간 수도원 역시 세상의 다른 조직과 크게 다르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이번 영상에서 ‘스베덴보리의렌즈’가 가장 주의 깊게 바라보게 되는 문장은 어쩌면 ‘지독한훈련끝에드디어하나님과합일의단계에들어갔다’는 표현일 것입니다. 인간의 거듭남은 ‘지독하게하면도달하는영적고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자신의 악과 거짓을 인식하고 그것을 주님 앞에서 버리며, 주님께서 우리 안에 새 의지와 새 이해를 형성하시도록 허용하는 평생의 과정입니다. 인간이 노력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 자체를 구원의 원인으로 만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가장 깊이 거듭난 사람일수록 ‘내가여기까지올라왔다’보다 ‘주님께서나를여기까지이끄셨다’고 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티혼의 극단적 금욕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 이 영상에서 우리가 취할 결론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의 삶에서 받아들일 것은 ‘하나님을무엇보다우선하고싶었던갈망’, ‘욕망에끌려다니지않으려했던절제’, ‘기도를삶의중심에두려했던태도’, ‘피조물에게까지미친온유함’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오늘 우리의 형편 속에서 더 내적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음식을 조금 덜 먹는 것보다 탐욕을 덜 먹이고, 말을 조금 덜 하는 것보다 자기 자랑을 덜 말하며, 세상을 떠나 동굴로 들어가는 것보다 자기 안의 proprium을 발견하고 주님께 맡기는 것이 더 깊은 수도가 될 수 있습니다.
결국 아토스의 숲과 수도원이 ‘천국같은곳’인 이유가 있다면 건물이나 금식 규칙이나 수도복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 그것을 서로를 향한 사랑과 쓰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곳에 천국의 어떤 것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천국은 아토스에만 세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의 식탁에서도, 작은 교회에서도, 직장에서도, 병실에서도 주님의 질서가 인간의 의지와 생각 속에 받아들여지면 천국의 어떤 것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수도원의 외적 아름다움을 지나 ‘스베덴보리의렌즈’가 바라보게 하는 더 깊은 수도원, 곧 인간 안에 주님께서 세우시는 내적 질서일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의 가장 큰 장점은 성막을 단순히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 시설로 보지 않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보여 주는 하나의 거대한 상징 체계로 읽으려 한다는 점입니다. ‘성막하나를제대로보면성경전체가달리보이기시작한다’는 영상의 출발점은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도 매우 의미 있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에게 성막은 단순한 예표 정도가 아니라, 그 구조와 재료와 기구와 방향과 의식 하나하나가 천국과 주님,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에 상응하도록 주어진 거룩한 표상입니다. 그러므로 성막을 자세히 설명하는 출애굽기의 긴 기록은 불필요한 건축 설명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에서는 인간이 어떻게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며 어떻게 천국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지를 보여 주는 영적 설계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상은 먼저 ‘미쉬칸’, 곧 장막을 하나님께서 인간 가운데 거하시는 장소로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높은 하늘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에게 가까이 오시고, 모세와 ‘사람이자기의친구와이야기함같이’ 말씀하셨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 방향은 매우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멀리 계신 하나님을 인간이 힘겹게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에게 끊임없이 가까이 오시는 주님을 인간이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사랑과 진리를 끊임없이 흘려보내십니다. 문제는 주님이 멀리 계신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그리고 거기서 나온 거짓들이 그 유입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상의 ‘우리의기도가하늘까지힘겹게올라가는것이아니라이미곁에계신그분께건네는대화일지도모른다’는 표현은 아름답고도 의미 있는 통찰입니다.
그러나 에덴을 설명하는 부분부터는 조금 더 조심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영상은 아담을 ‘첫번째제사장’, 에덴을 ‘첫번째성전’으로 설명하면서, 창세기 2장의 ‘경작하며지키게하시고’라는 표현과 성막 봉사에 사용되는 히브리어를 연결합니다. 성경신학적으로 흥미로운 연결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에덴은 무엇보다 실제 지리적 정원이나 최초의 성전 건물을 가리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에덴동산은 태고교회 사람들의 내적 상태, 곧 사랑과 퍼셉션을 통해 주님과 직접 교통하던 천적 상태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에덴이 ‘성전’이었다고 말한다면 건축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태고교회 사람의 내면 자체가 주님이 거하시는 성전이었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더 깊습니다. 성막은 잃어버린 에덴이라는 장소를 복원하는 모형이라기보다, 인간 안에서 무너진 천국의 질서를 주님께서 다시 세우시는 과정을 표상한다고 보는 편이 스베덴보리에 더 가깝습니다.
영상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뒤 에덴 동쪽에 그룹과 불칼이 놓였고, 훗날 성막의 휘장에도 다시 그룹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연결하면서 ‘쫓아내신것으로끝내신게아니라돌아올길을다시짜고계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아름다운 연결이지만,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는 여기에도 한 단계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창세기 3장의 그룹은 단순히 화난 하나님께서 인간의 귀환을 막기 위해 세워 놓으신 경비병이 아닙니다. ‘생명나무의길’을 지키는 것은 타락한 인간이 거룩한 것에 함부로 접근하여 그것을 모독하지 못하도록 보호하는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닫힌 길조차 심판만이 아니라 보호입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거룩함에 접근하여 더 깊은 모독에 빠지는 것보다, 한동안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것이 오히려 구원의 섭리인 것입니다. 성막 휘장의 그룹 역시 그런 의미에서 ‘거룩한것의보호’를 나타냅니다.
성막 뜰의 동쪽 문 하나를 강조하는 부분도 흥미롭습니다. 영상은 ‘제사장이든평민이든족장이든이문하나로들어가거나아니면들어가지못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을 곧바로 ‘예수만이유일한문’이라는 교리적 공식으로만 읽기보다, 상응적으로 보면 더욱 풍성해집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길은 인간의 신분이나 지식이나 공로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특히 성경에서 ‘동쪽’은 주님과 주님을 향한 사랑에 상응합니다. 해가 뜨는 방향이라는 자연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영계에서 천사들이 주님을 영적 태양으로 바라보는 질서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막의 동쪽 입구는 단지 출입구 하나가 아니라 모든 영적 여정의 시작이 ‘주님을향함’에 있음을 보여 주는 상응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번제단에 이르러서는 영상과 스베덴보리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영상은 제물을 가져온 사람이 양의 머리에 손을 얹을 때 ‘내죄가바로그순간이양에게로옮겨가고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대속 신학에서 익숙한 설명이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죄가 어떤 법적 실체처럼 한 존재에게서 다른 존재에게 이전된다고 이해하지 않습니다. 죄는 인간의 의지와 사랑, 그리고 실제 삶에 속한 것이므로 다른 존재에게 법적으로 옮겨질 수 없습니다. 제물과 피는 죄의 물질적 이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드려지는 사랑과 선,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정결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제사의 중심은 ‘죄인이받을형벌을동물이대신받는다’는 데 있지 않고, 악으로 인해 무너진 인간의 질서가 주님께로 다시 돌아가고 회복되는 데 있습니다.
물두멍 역시 단순한 의식적 세척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성막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물로 씻는 것은 말씀의 진리로 삶을 정결하게 하는 것을 표상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물은 특히 자연적 차원에서의 진리에 상응합니다. 사람이 주님께 가까이 간다는 것은 어떤 신비로운 감정만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진리를 통해 자신의 실제 생각과 말과 행동을 살피고 고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영상이 ‘깨끗해져서가는것이아니라가면그자리에서씻기는구조’라고 말한 것은 목회적으로는 따뜻한 표현이지만,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여야 합니다. 주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 인간을 받아 주시지만, 받아 주신 인간을 있는 모습 그대로 내버려 두지는 않으십니다. 성막의 길은 받아들임의 길인 동시에 정결과 거듭남의 길입니다.
성소 안으로 들어가면 등잔대와 진설병과 분향단이 등장합니다. 영상은 등잔대를 ‘나는세상의빛’, 진설병을 ‘나는생명의떡’이라는 주님의 말씀과 연결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빛은 신적 진리를, 떡은 신적 선을 표상합니다. 인간에게 적용하면 등잔대의 빛은 이해를 밝혀 주는 진리이며, 떡은 의지를 살리고 영혼을 먹이는 사랑의 선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를 관통하는 ‘선과진리’, 또는 ‘사랑과지혜’의 결합과도 연결됩니다. 주님은 단순히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치시는 분만도 아니고, 사랑만 주시는 분도 아닙니다. 사랑과 지혜, 선과 진리가 주님 안에서는 완전히 하나이며, 거듭나는 인간 안에서도 이 둘이 다시 결합되어야 합니다.
향 역시 영상이 기도와 연결한 것처럼 성경에서 기도를 표상하지만, 스베덴보리에게는 단순히 인간의 말이 위로 올라가는 모습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참된 기도는 인간의 입술에서 나온 문장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사랑과 신앙이 주님께 향하는 내적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향기가 올라간다는 것은 주님께서 인간의 아름다운 문장을 들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주님을 향하는 선한 애정과 진실한 신앙을 받으신다는 뜻입니다. 말없이 드리는 기도도 기도이고, 때로는 무엇을 구해야 할지 몰라 침묵하는 것조차 주님을 향한 내적 애정이 있다면 깊은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지성소와 법궤에 대한 영상의 설명도 매우 인상적입니다. 다른 민족의 신전과 달리 이스라엘의 지성소에는 신상이 없고, 그룹 사이의 보이지 않는 공간이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낸다는 설명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은어떤자연적형상으로제한될수없는분’이라는 중요한 진리를 보여 줍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에게는 여기서 놀라운 전환이 하나 더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결국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이시는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보이지 않는 신성을 ‘아버지’, 나타난 신적 인성을 ‘아들’, 그리고 그분에게서 나오는 신적 활동을 ‘성령’으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성막의 가장 깊은 곳에 임재하시는 여호와와 복음서에서 우리 가운데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서로 다른 두 신적 존재가 아니라 한 분 주님의 계시입니다.
여기에서 영상이 속죄소, 곧 카포렛 위에 피가 뿌려지는 장면을 ‘하나님이위에서내려다보실때보이는건깨어진율법이아니라그위를덮은피였다’고 설명하는 부분은 특별히 분별해서 읽어야 합니다. 이 표현은 감동적이지만, 자칫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실제 악은 그대로 두시면서 피를 보고 법적으로 죄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신다는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구원은 그런 법적 선언이 아닙니다. 주님은 인간의 죄를 못 본 체하지 않으시며, 다른 존재의 의를 인간에게 외적으로 덮어씌우지도 않으십니다. 인간이 주님의 능력으로 악을 실제로 멀리하고 선을 행할 수 있도록 변화시키십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그러므로 ‘덮음’이 있다면 죄를 감추어 하나님께 보이지 않게 하는 덮음이라기보다, 주님의 자비와 선이 인간의 악을 제어하고 정복하며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대속죄일의 반복과 그리스도의 ‘단번에’ 이루신 일을 연결하는 영상의 흐름 역시 히브리서에 충실한 전형적인 기독교 해석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단번의사건’을 형벌 대속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는 성난 아버지를 달래거나 인간에게 내려질 형벌을 대신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시 인간에게 압도적으로 밀려 들어오던 지옥의 세력을 직접 만나 싸우고 정복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님의 지상 생애 전체는 연속적인 시험과 승리의 과정이었으며, 십자가는 그 마지막 시험이자 마지막 승리였습니다. 동시에 주님께서는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이 입으신 인간성을 완전히 신성하게 하셨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구속’과 ‘영화’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점에서 ‘휘장이찢어졌다’는 영상의 장면은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더욱 깊어집니다. 휘장은 단순히 하나님께 들어가는 법적 장벽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인성을 영화롭게 하심으로써 신성과 인성 사이의 모든 분리가 사라지고, 동시에 인간이 주님의 신적 인성을 통해 신성에 접근할 수 있는 완전한 길이 열린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인간은 알 수 없는 절대자를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나를본자는아버지를보았다’고 말씀하신 주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화를 풀어 주신 순간이 아니라, 주님께서 지옥을 정복하시고 자신의 인성을 완전히 신성하게 하심으로 인간과 천국 사이의 질서를 회복하신 결정적인 승리입니다.
영상이 요한복음 1장 14절의 ‘말씀이육신이되어우리가운데거하시매’를 성막과 연결한 부분은 매우 좋습니다. ‘거하다’에 사용된 헬라어가 장막을 치는 이미지와 연결된다는 것은 요한복음의 성육신 이해를 풍성하게 합니다. 광야에서 장막 가운데 임재하셨던 여호와께서 마침내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흐름입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잠시 인간의 옷을 입으셨다가 벗으신 사건이 아닙니다. 주님은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받은 유한한 인간적 요소를 시험과 승리를 통해 차례로 벗으시고, 그 자리에 자신 안의 신성으로부터 오는 신적 인간성을 입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다시 이전의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영원히 ‘신적인간’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성막이 가리키는 궁극적인 실체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고 영상은 에덴에서 성막으로, 성막에서 성육신으로, 십자가에서 요한계시록 21장의 ‘하나님의장막이사람들과함께있으매’로 이야기를 이어 갑니다. 이 큰 방향은 아름답습니다. 다만 마지막의 ‘더이상성막이필요하지않은날’은 단순히 먼 미래에 물리적인 새 지구가 만들어지고 그곳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산다는 그림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요한계시록의 새 예루살렘은 새 교회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장막이사람들과함께있다’는 것은 주님께서 그 교회의 선과 진리 가운데 거하시며, 궁극적으로는 거듭난 인간의 내면 가운데 거하신다는 뜻입니다. 성막의 완성은 건축물이 사라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주님의 성전이 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상 전체를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다시 바라보면, 성막은 ‘죄인이피를통해법적으로용서받아하나님께접근하는과정’보다 훨씬 더 크고 깊은 것을 보여 줍니다. 뜰에서 성소로,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은 인간의 겉 사람에서 점점 더 깊은 속 사람으로 들어가는 거듭남의 여정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놋에서 은으로, 다시 금으로 깊어지는 재료의 변화 역시 자연적 차원에서 영적 차원으로, 다시 천적 차원으로 깊어지는 질서를 생각하게 합니다. 물로 씻는 것은 진리에 의한 정결이며, 등잔대의 빛은 신앙의 진리이고, 떡은 사랑의 선이며, 향은 그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올라가는 예배이고, 가장 깊은 지성소는 주님과 인간의 내적 결합을 향합니다.
따라서 영상의 마지막 문장, ‘하나님은멀리계신적이없었습니다. 처음부터지금까지줄곧이쪽을향해걸어오고계셨던겁니다’는 이 영상 전체에서 가장 아름답게 건질 수 있는 문장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는 여기에 한 문장을 더 붙이고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향해 오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으로 들어오셔서 그 사람을 자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다시 만드시기를 원하십니다. 성막의 목적은 우리가 잠깐 하나님을 방문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 자체가 주님의 거처가 되는 데 있습니다.
처음 에덴에서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 안에 살았습니다. 그 질서가 무너지자 주님은 표상적인 성막과 성전을 통해 다시 천국의 질서를 보여 주셨고, 마침내 친히 세상에 오셔서 지옥을 정복하시고 자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말씀을 통해 각 사람의 마음 안에서 또 하나의 성막을 세우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막의 마지막 질문은 ‘성막의각기구가무엇을예표하는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더 본질적인 질문은 이것입니다. ‘지금내안에서주님이거하실성막은어떻게세워지고있는가?’
성막을 그렇게 읽기 시작하면 출애굽기의 낯설고 복잡한 치수와 재료와 기구와 의식들이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것들은 오래전에 사라진 종교 시설의 설계도가 아니라, 주님께서 한 사람의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그의 가장 깊은 속 사람까지 들어오시며 그를 거듭나게 하시는 질서의 표상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길의 중심에는 인간의 공로나 제물의 피 자체가 아니라 한 분 주님이 계십니다. 성막도 주님을 가리키고, 제사도 주님을 가리키며, 빛도 떡도 향도 법궤도 주님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주님께서 마침내 인간 가운데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내안에거하라나도너희안에거하리라.’
결국 성막의 이야기는 ‘어떻게죄인이무서운하나님에게가까이갈수있는가?’의 이야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더 깊게는 ‘어떻게주님께서타락한인간안으로다시들어오셔서그를천국의형상으로회복시키시는가?’의 이야기입니다. 그 관점에서 보면 성막은 건물이 아니라 거듭남의 지도이고, 지성소는 장소가 아니라 주님과 인간의 결합이며, 휘장이 열리는 것은 단순한 출입 허가가 아니라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까지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들어올 길이 다시 열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지금도 각 사람 안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사도행전 9장의 다비다 이야기를 ‘바늘로천국을만들었다’는 하나의 이미지로 풀어냅니다. 다비다가 과부들을 위해 속옷과 겉옷을 만들어 주었다는 성경의 짧은 기록에서 출발하여, 바늘의 작음, 꿰매는 기능, 소리 없음, 자신을 드러내지 않음, 이어 줌, 완성품을 만들어 냄, 흔적을 남김, 한 땀 한 땀 일함, 직접 손에 쥐고 일함, 일을 마치고 사라짐이라는 열 가지 영성을 끌어냅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자기가가진아주작은것으로도주변을천국으로만들수있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보면 이번 영상은 최근 영상들 가운데서도 특히 ‘쓰임’(use)이라는 중심 주제와 상당히 가까이 맞닿아 있습니다.
우선 다비다의 이야기를 ‘큰일을한사람’의 이야기보다 ‘자기손에있던것으로이웃에게선을행한사람’의 이야기로 읽은 점은 매우 좋습니다. 다비다는 왕도 아니고 사도도 아니며, 거대한 조직을 세운 사람도 아닙니다. 성경이 기억하는 것은 그가 ‘선행과구제하는일이심히많았다’는 사실과, 그가 죽었을 때 과부들이 그에게서 받은 옷을 들고 울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쓰임’과 매우 가까운 장면입니다. 천국적인 삶은 반드시 거대한 일을 해야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능력과 형편을 가지고 실제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데서 나타납니다. 바늘 하나와 손재주가 누군가에게는 추위를 막아 주고, 존엄을 지켜 주며, ‘나는혼자가아니다’라는 사랑의 표지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바늘은작은데큰일을한다’는 비유는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주님의 나라에서는 외적 크기보다 그 안에 담긴 사랑과 쓰임이 중요합니다. 세상에서는 수천 명을 움직이는 일을 ‘큰일’이라고 부르고 한 사람의 옷을 꿰매 주는 일을 ‘작은일’이라고 부르기 쉽지만, 천국의 질서는 그렇게 단순히 규모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진실한 체어리티에서 한 사람을 살리는 일이 주님 앞에서는 훨씬 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상의 ‘작은것을무시하지말자’는 메시지는 단지 ‘작게시작하면나중에큰일을할수있다’는 성공론으로 끝나기보다, ‘작은쓰임도그자체로주님의나라에속한다’는 데까지 가면 더 깊어집니다.
‘바늘은헤어진곳을꿰맨다’는 비유는 더 직접적으로 체어리티와 연결됩니다. 상한 것을 꿰매고, 아픈 곳을 어루만지고, 배고픈 것을 채워 준다는 설명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매우 아름답습니다. 체어리티는 추상적인 호감이 아니라 구체적인 유익을 행하는 사랑입니다. 누군가의 삶이 찢어진 곳을 발견했을 때 정죄하기보다 가능한 범위에서 그것을 이어 주는 것, 관계가 끊어진 곳에서는 화해를 돕고, 가난한 곳에서는 필요한 것을 채우며, 외로운 사람에게는 곁이 되어 주는 것, 이것이 ‘바늘의영성’을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실제 영적 삶으로 만드는 길입니다.
‘바늘은소리를내지않는다’, ‘바늘은자신을드러내지않는다’는 두 대목은 이번 영상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예수님은드러나고나는드러나지말아야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아주 중요한 원칙입니다. 선을 행하고 나서 ‘내가이것을했다’는 공로의식이 강해질수록 선 안에 proprium이 섞이기 쉽습니다. 선의 근원은 주님이고 인간은 그 선이 흘러가는 그릇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사람은 자기가 한 일을 자랑하기보다 감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늘은옷을다만들고나면보이지않는다’는 이미지는 이번 영상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만 여기에도 미세한 차이는 있습니다. ‘자신을드러내지말아야한다’는 것을 외적으로 완전히 숨어야 한다는 규칙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쓰임은 공개적으로 해야 하고, 가르치는 사람은 앞에 서야 하며, 지도자는 책임 있게 자신의 이름으로 말해야 합니다. 문제는 ‘보이는가, 보이지않는가’가 아니라 ‘누구의영광을구하는가’입니다. 사람들 앞에 서 있으면서도 마음으로는 주님께 공을 돌릴 수 있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봉사하면서도 마음속으로 ‘나는참겸손한사람’이라고 자기를 높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감추어짐은 외적 익명성보다 내적 비공로성에 있습니다.
‘바늘은이어준다’는 부분도 좋습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다비다와 과부들, 다비다와 예수, 과부들과 천국을 바늘이 이어 주었다는 식으로 설명합니다. 비유적 표현으로 받아들이면 의미가 있습니다. 다비다가 만든 옷은 단지 직물이 아니라 사랑의 관계를 남겼습니다. 사람이 죽은 뒤 과부들이 그 옷을 들고 울었다는 것은 다비다가 그들의 삶 속에 실제 쓰임으로 남아 있었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공동체를 실제로 결속시키는 것도 교리적 구호가 아니라 선과 진리가 삶에서 만날 때입니다. 진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보여 주고, 선은 그것을 행하게 하며, 체어리티는 사람과 사람을 살아 있는 관계로 연결합니다.
‘바늘은완성될때까지일한다’, ‘한땀한땀순서를지킨다’는 대목은 거듭남과 연결해서 읽을 만합니다. 거듭남은 한 번의 감동이나 한 번의 결단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이루어지는 질서 있는 과정입니다. 인간은 하루아침에 전혀 다른 존재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의 악을 보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피하고, 그 자리에 선한 습관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반복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땀한땀’은 상당히 좋은 비유입니다. 다만 ‘매뉴얼대로, 규정대로’라는 표현은 영적 삶에서는 조금 조심해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거듭남에는 주님의 질서가 있지만 모든 사람의 외적 과정이 동일한 매뉴얼을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섭리는 각 사람의 상태와 자유를 따라 놀랍도록 개별적으로 역사합니다.
‘바늘이지나간자리에는실이남는다’는 표현도 생각할 거리를 줍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바울이 지나간 자리에는 교회가 남고, 사람 역시 어디를 지나갔든 어떤 흔적을 남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 역시 ‘업적을남겨야한다’는 쪽으로 흐르지만 않는다면 좋은 가르침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무엇을남겼는가’보다 ‘어떤상태를남겼는가’가 중요합니다. 내가 지나간 자리에 내 이름과 기념물이 남는 것보다, 한 사람이 더 평안해지고, 한 관계가 회복되고, 한 사람이 주님께 더 가까워졌다면 그것이 훨씬 귀한 흔적입니다. 다비다가 남긴 가장 중요한 흔적은 바느질 공동체의 규모가 아니라 과부들이 몸으로 기억하고 있던 사랑이었습니다.
‘손은일하고마음은하나님께드린다’는 아홉 번째 원칙 역시 이번 영상에서 매우 좋은 문장입니다. 이것은 수도원적 영성과 일상적 쓰임을 연결할 수 있는 접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세상 일을 버리고 종교적 명상에만 몰두하는 삶보다, 자신의 직업과 가정과 사회적 의무 안에서 정직하게 쓰임을 행하는 삶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그러므로 바느질을 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음식을 만들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청소하고, 가르치고, 운전하고, 돌보고, 행정을 하는 동안에도 주님의 선을 이웃에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다비다는 수도원 밖에서 수도 영성의 핵심을 살았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영상에는 성경 본문과 설교적 확대를 구별해야 할 부분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여제자는다비다한명이다’라는 말은 사도행전 9장 36절에서 실제로 다비다에게 여성형 ‘제자’에 해당하는 표현이 사용된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지만, 그것을 근거로 다비다가 ‘예수님과행동을완전히똑같이하는특별한완전한종’이라는 하나의 신분명처럼 설명하는 것은 본문보다 많이 나아간 해석입니다. 본문이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은 다비다가 제자였고 선행과 구제가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상은 설교적 적용으로 구별해서 듣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 다비다의 회복과 고넬료 사건을 연결하여 ‘다비다의바늘하나때문에해외선교가시작되었다’고 하는 표현도 설교적 연결로서는 흥미롭지만, 사도행전 자체가 그렇게 인과관계를 명시하지는 않습니다. 베드로가 다비다 사건 이후 욥바에 머물렀고 그곳에서 고넬료의 사람들을 만나 가이사랴로 간 것은 본문 흐름상 맞습니다. 그러나 ‘다비다때문에이방선교가시작되었다’고 단정하면 성경이 말하는 것보다 한 걸음 더 나갑니다. 오히려 ‘다비다사건을계기로베드로가욥바에머무르게되었고, 바로그시기에고넬료사건이이어진다. 하나의쓰임이주님의섭리안에서예상하지못한다음쓰임과연결될수있다’ 정도로 말하면 훨씬 깊고 안전합니다.
죽은 다비다를 두고 사람들이 ‘베드로가오면반드시살아날것을믿었다’고 해석하는 부분 역시 본문은 그렇게까지 분명히 말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은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지체말고와달라’고 간청했다고 기록하지만, 그들이 이미 확실하게 부활을 기대했다고 명시하지는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베드로의 기도를 통해 다비다가 살아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이전 사람들의 내면을 ‘반드시살아날것을믿었다’고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 부분은 설교의 감동을 줄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말씀 자체와 우리의 아름다운 추론을 구별하기 위해서입니다.
반면 영상 후반에 강문호 수도사가 다비다에 관한 후대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지금부터이야기는믿을게아니라참고만하는전승, 전설’이라고 명확하게 선을 긋는 것은 매우 좋습니다. 다비다가 부활 후 더욱 열심히 구제했고 ‘욥바의어머니’라 불렸다는 이야기, 사람들이 다비다의 집에 모여 ‘바늘공동체’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성경과 같은 권위로 말하지 않고 전승으로 구별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도 이런 구별은 중요합니다. 전승은 영적 묵상의 재료가 될 수 있지만 그것을 계시된 사실과 동일한 층위에 놓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번 영상에서 조금 더 주의 깊게 바라볼 부분은 후반전 이야기입니다. 다비다의 전승을 소개한 뒤 강문호 수도사는 모세, 예수, 아브라함을 들어 ‘후반전이더커야한다’고 말하고, 자신의 아버지가 은퇴 후 29년 동안 해외에서 더 크게 일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자신도 ‘은퇴한지7년째인데이렇게열심히일하고있지않습니까?’라고 자신의 현재 활동을 연결합니다. 이 부분은 노년과 은퇴를 소극적 퇴장으로 여기지 않고 남은 삶에서도 쓰임을 찾자는 뜻에서는 매우 귀합니다. 사람은 몇 살이 되었든 주님께서 허락하신 상태 안에서 계속 이웃에게 유익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후반전은앞보다더커야한다’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는 조금 바꾸어 듣는 편이 좋겠습니다. 주님 앞에서 후반전이 더 ‘커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많은 책을 쓰고, 더 많은 나라를 다니고, 더 많은 일을 해야 영적으로 더 큰 삶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후반전은 오히려 외적으로 작아지면서 내적으로 더 깊어질 수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수천 명 앞에서 설교하던 사람이 노년에는 한 사람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는 것이 마지막 쓰임일 수도 있고,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병상에서 자신의 성급함과 자기의지를 내려놓는 것이 평생의 가장 깊은 거듭남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영상 안에는 묘한 대비가 있습니다. 앞에서는 ‘바늘은자신을드러내지않는다’, ‘일을다하면바늘은사라진다’, ‘예수님은드러나고나는드러나지않아야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후반에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아버지의 큰 사역과 자신의 은퇴 후 활동을 예로 듭니다. 이것을 곧바로 모순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예화로 사용하는 것은 설교에서 흔한 일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이 ‘스베덴보리의렌즈’가 가장 조용히 비추어 볼 만한 자리이기도 합니다. ‘바늘의영성’을 말하는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시험은 어쩌면 ‘내가바늘처럼일했다는사실조차말하고싶어지는마음’을 살피는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proprium은 노골적인 자랑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나는겸손합니다’, ‘나는주님만드러내고싶습니다’, ‘나는은퇴후에도쉬지않고일합니다’라는 종교적으로 선한 문장 안에도 아주 미세하게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강문호 수도사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 글을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모두에게 해당합니다. 참된 ‘바늘의영성’은 내가 얼마나 많은 천국을 만들었는지를 세는 것이 아니라, 일을 마친 뒤 ‘이일을하게하신분도주님이고, 선을주신분도주님이며, 내가한것은주님께서주신것을받아사용한것뿐입니다’라고 더 깊이 인정하는 데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늘로천국을만들었다’는 제목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한 번 더 깊게 읽을 수 있습니다. 인간이 천국을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인간 안에 형성됩니다. 그러나 다비다의 바늘은 그 천국적 선이 자연계에서 하나의 구체적 쓰임으로 나타나는 도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다비다가바늘로천국을만들었다’기보다 ‘주님께서다비다의사랑과바늘을통해천국의어떤것을이웃의삶가운데나타내셨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이번 영상에서 결국 ‘바늘’보다 ‘옷을들고울던과부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비다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기록한 이력서가 남은 것이 아니라,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그의 사랑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한 인간의 쓰임에 대한 매우 아름다운 증언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난 뒤 누군가가 ‘저사람은굉장한사람이었다’고 말하는 것보다 ‘저사람이내가힘들때나를도와주었다’, ‘저사람때문에내가다시일어날수있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훨씬 천국적인 흔적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영상의 ‘바늘의영성’을 ‘스베덴보리의렌즈’로 한 문장에 담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께받은작은능력을가지고상한것을이어주며, 소리없이이웃의필요를채우고, 그선을자신의공으로돌리지않은채, 한땀한땀끝까지쓰임을행하는것.’ 그렇게 살다가 일이 끝났을 때 바늘은 조용히 놓이고 옷만 남습니다. 그리고 더 깊이 보면 옷조차 우리의 공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 손을 빌려 누군가에게 입혀 주신 사랑의 흔적일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1부
이 영상은 처음부터 ‘장자권’이라는 교리를 차분히 설명하는 성경강의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약 35분 동안 찬양과 기도, 집회를 향한 기대와 사모함이 길게 이어지고, 그 가운데 반복해서 강조되는 것은 ‘이번집회를통하여하나님께서주시려는것을받아가자’, ‘이영환목사를통해주시려는것을취하고가자’는 태도입니다. 특히 인도자는 이영환 목사가 자신의 몸을 찢어 주듯 무엇인가를 전하려 한다는 상당히 강한 표현까지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이 영상의 ‘장자권’을 이해하려면 단순히 하나의 성경 주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는 ‘어떤영적유산을전달받고, 그것을다시가지고가는것’이라는 강한 전수의 분위기가 처음부터 형성되어 있습니다. 실제 영상 후반에는 ‘장자선교회’ 정기후원과 ‘장자권교재’가 소개되고, 이 교재를 그동안의 핵심 내용을 모은 일종의 ‘장자권의완결판교재’라고 설명합니다. 즉 ‘장자권’은 이 집회에서 우연히 선택한 한 번의 설교 제목이 아니라, 이미 하나의 체계적인 교육 내용과 운동으로 발전한 주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렌즈’는 처음부터 상당히 흥미로운 지점에 서게 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 역시 성경의 ‘장자’, ‘처음난것’, ‘장자권’을 결코 사소하게 다루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를 읽다 보면 아벨의 ‘양의첫새끼’에서부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에서와 야곱의 장자권 문제, 르우벤의 장자권에 이르기까지 ‘처음난것’과 ‘장자권’은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열쇠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장자권을강조한다’는 사실 자체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장자권을무엇으로이해하느냐’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일반적인 장자권 운동과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들어갑니다. ‘장자’는 단순히 집안에서 먼저 태어난 사람을 뜻하는 데 그치지 않으며, 더구나 ‘하나님의특별한복을남들보다먼저, 더많이받을권리를가진사람’이라는 의미로 고정되지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장자’는 무엇이 ‘첫째자리를차지하는가’, 다시 말해 사람과 교회 안에서 무엇이 우선권과 주도권을 갖는가 하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생각보다 아주 미묘합니다. 사람이 거듭나는 과정에서는 먼저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를 신앙으로 받아들인 뒤, 마침내 그것을 삶으로 살아 선에 이르게 됩니다. 시간적으로 보면 ‘진리와신앙’이 먼저 나타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말씀에서는 어떤 문맥에서 신앙이나 진리가 ‘장자’처럼 나타납니다. 그러나 실제 질서에서는 정반대입니다. 진리는 선을 위해 존재하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위해 존재합니다. 진리가 먼저 배워진다고 해서 진리가 목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가 사람 안에서 살아 있는 진리가 되는 것은 그것이 선과 결합할 때이며, 신앙이 살아 있는 신앙이 되는 것도 체어리티와 결합할 때입니다.
이것이 ‘장자권’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먼저나타난것’과 ‘실제로첫째인것’이 반드시 같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가 먼저 글자를 배우고 나중에 그 글자로 사랑의 편지를 쓴다고 해서 글자가 사랑보다 높은 것은 아닙니다. 의학을 먼저 공부하고 나중에 환자를 치료한다고 해서 의학지식 자체가 환자를 살리려는 사랑보다 궁극적인 목적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먼저 진리를 배우고 신앙을 형성하지만, 그 모든 것은 결국 선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사람이 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의미의 ‘장자권’은 단순한 특권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나를지배해야하는가’라는 질서의 문제입니다.
이 점에서 최근 우리가 살펴본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놀랍도록 직접 연결됩니다. 가인은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표상합니다. 처음에는 신앙이 먼저 등장합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면 가인이 ‘장자’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겨야 합니다. 사람이 진리를 배우는 이유는 결국 그 진리를 따라 선하게 살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자신을 첫째 자리에 놓고 체어리티와 분리되면 어떻게 됩니까? 가인이 아벨을 죽입니다. 이것이 단순한 형제 살인의 역사적 사건을 넘어, ‘신앙이사랑보다자신을높일때교회안에서체어리티가소멸한다’는 무서운 속뜻이 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장자권회복’을 말하려면 상당히 조심해야 합니다. 만일 그것이 ‘내가영적장자가되어특별한권세를얻는다’, ‘내가문이특별한복을받는다’, ‘내자녀에게축복이계승된다’, ‘내가남보다앞선영적위치를차지한다’는 방향으로 흘러간다면, 성경의 장자권을 자연적인 특권 체계로 되돌려 놓을 위험이 있습니다. 반대로 ‘내안에서무엇이첫째가되어야하는가’, ‘내가아는진리가사랑을섬기고있는가’, ‘내신앙이체어리티를낳고있는가’, ‘주님께서내삶의첫째자리를실제로차지하고계시는가’를 묻는다면 장자권은 대단히 깊은 거듭남의 주제가 됩니다.
특히 AC에서 ‘처음난것’이 궁극적으로 주님께 속한다고 설명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아벨이 드린 ‘양의첫새끼’가 거룩했던 까닭도 인간 자신이 어떤 영적 우월성을 소유하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사랑과 거기서 비롯되는 참된 신앙이 주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난것’을 여호와께 돌리는 표상은 ‘내가장자이므로이것은내권리다’라는 선언이라기보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내안에있는선도, 진리도, 사랑도, 신앙도그근원은내가아니라주님이십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사용자가 작업해 둔 AC 자료에서도 ‘처음난것은모두거룩했는데, 이는그것들이오직홀로장자이신주님을가리켰기때문’이며, ‘사랑과거기서비롯된신앙’이 장자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장자권’이라는 말은 오히려 인간의 특권의식을 꺾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참된 장자는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먼저 받았다면 그것은 남보다 높은 사람이 되라는 뜻이 아니라, 먼저 받은 것을 다른 사람의 선을 위해 사용하라는 뜻이 됩니다. 진리를 먼저 알았다면 진리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진리대로 먼저 살아야 하고, 은혜를 먼저 받았다면 그것을 자신의 영적 계급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내야 합니다. 직분을 먼저 받았다면 권위가 커지는 것이 아니라 쓰임의 책임이 커집니다. 이 의미에서 ‘장자권’은 ‘특권’보다 ‘쓰임’에 가깝습니다.
영상 초반의 뜨거운 찬양과 기도 역시 바로 이 기준으로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한분밖에는사랑할이가없다’, ‘주님의마음이있는곳에나의마음이있기원한다’는 고백 자체는 매우 귀합니다. ‘이집회를통해무엇인가를받아가겠다’는 사모함 역시 그 자체로 잘못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진리를 향한 애정이 필요하며, 냉랭한 지성만으로는 영적 생명이 자라기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도 사람의 의지와 애정이 실제 생명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거듭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이 집회의 뜨거움 자체를 경계할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매우 세심하게 보아야 합니다. 초반 인도자가 반복해서 ‘이영환목사를통해주시려는것’, ‘목사가찢어주듯주려는것’을 ‘취하여가자’고 강조하는 대목입니다. 이것을 선의로 이해하면 ‘한목회자가평생깨닫고살아온신앙의유산을배우자’는 뜻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신앙의 선배에게서 배우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도 반드시 하나의 안전장치를 둡니다. ‘사람에게서받은진리라해도그진리가참된것은그사람에게서나왔기때문이아니라주님과말씀에서나왔기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교사는 통로일 수 있지만 근원은 아닙니다. 어떤 목회자의 체험이나 교리 체계가 아무리 강력하더라도 그것이 말씀보다 높은 해석의 열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영상의 첫 35분을 단순히 ‘찬양이길다’ 정도로 지나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이 도입부가 이후 장자권 강의를 받아들이는 청중의 마음을 미리 형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청중은 단순히 ‘장자권이라는성경개념을공부하겠다’는 상태가 아니라 ‘이집회에는특별히받아야할무엇인가가있고, 이영환목사를통해그것이전달된다’는 기대 속에서 강의를 듣게 됩니다. 이것은 강력한 장점이면서 동시에 위험 가능성이기도 합니다. 선한 진리가 전달된다면 사람의 마음을 열어 주는 좋은 토양이 되지만, 특정한 인간의 해석이 지나치게 절대화될 경우에는 검증보다 수용이 먼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렌즈’는 이영환 목사나 장자선교회를 처음부터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방식으로 접근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아주 단순한 질문 하나를 끝까지 붙들면 됩니다. ‘여기서말하는장자권은결국누구를첫째자리에세우는가?’입니다. 주님을 첫째 자리에 세우는가, 아니면 장자권을 가진 인간을 특별한 사람으로 만드는가. 선과 사랑을 첫째 자리에 세우는가, 아니면 신앙의 지식과 영적 권위를 첫째 자리에 세우는가. 이웃을 섬기는 쓰임으로 나아가는가, 아니면 나와 내 가문이 특별한 복을 받는 체계로 나아가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영상 초반만으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이후 이영환 목사가 장자권을 실제로 어떻게 풀어 가는지를 충분히 들은 뒤 판단해야 합니다.
다만 출발점 하나만큼은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장자권’은 ‘내가남보다먼저복받을권리’가 아닙니다. 더 깊게는 ‘내안에서주님의선과사랑이첫째가되고, 진리와신앙은그것을섬기는질서로돌아가는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깊은 의미에서는 인간 누구도 스스로 장자가 아닙니다. 모든 선과 진리의 처음이시며 근원이신 주님만이 참된 ‘장자’이십니다. 따라서 인간이 장자권을 제대로 받는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자기 것으로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것이라고생각했던선과진리와능력까지주님께돌려드리는것’입니다.
이 기준을 세워 놓고 다음 2부에서는 이영환 목사가 본격적으로 ‘장자권’을 어떤 성경적 구조로 설명하는지 들어가 보겠습니다. 특히 ‘장자에게주어진복’, ‘장자의명분’, ‘아브라함·이삭·야곱과에서’,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의 성도와 가정과 다음 세대에 어떻게 적용된다고 보는지를 따라가면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먼저인진리와실제로첫째인선’, 곧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와 하나씩 대조해 보겠습니다.
2부
1부에서는 이 집회의 전체 분위기와 ‘장자권’이라는 주제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렌즈를 먼저 세웠습니다. 이번 2부부터는 그 렌즈를 조금 더 안쪽으로 가져가 보겠습니다. 이 집회에서 장자권은 단순히 ‘이스라엘사회에서맏아들이가졌던권리’라는 역사적 지식을 가르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장자선교회라는 조직과 교육용 교재가 따로 있을 만큼 하나의 영적 체계로 발전해 있습니다. 영상 끝에서도 현재 사용하는 교재를 이전 교재들의 핵심적인 장자권 내용을 모은 사실상의 ‘완결판교재’처럼 설명하고, 목회자 전문교재가 아니라 평신도 교육용으로 보급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분별해야 할 것도 단순한 설교 한 편이 아니라 ‘장자권이라는성경개념을오늘의그리스도인에게적용하는하나의해석체계’입니다.
이 점에서 먼저 인정할 것은 ‘장자권을소중히여기라’는 권면 자체에는 상당히 좋은 영적 직관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판 사건은 분명히 가볍지 않습니다. 눈앞의 욕구 때문에 하나님께 속한 더 높은 것을 하찮게 여겼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자권을 ‘눈앞의욕망때문에영적인것을팔아버리지말라’는 교훈으로 읽는 것은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실제 다른 관련 강의 자료에서도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판 것을 ‘식욕의지배를받아하나님이주신영적우선순위, 영적질서를파괴한행위’라고 설명합니다. 이 적용에는 귀담아들을 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사람의 낮은 자연적 욕망이 더 높은 영적인 것을 지배하게 되는 상태를 매우 심각하게 봅니다. 거듭남이란 결국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지배하던 질서가 뒤집혀, 영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을 다스리고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의 통치 아래 놓이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팥죽한그릇때문에장자권을팔지말라’를 ‘순간적인자연적욕망때문에영적인선과진리를희생하지말라’고 읽는다면,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인간론과도 상당히 가까워집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중요한 갈림길이 생깁니다. ‘에서가장자권을팔았다’는 것을 단순히 ‘에서는귀한영적복을가볍게여겼고야곱은그것을귀하게여겼다’ 정도로 읽으면 비교적 간단합니다. 그러나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의 속뜻으로 들어가면 에서와 야곱의 관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에서는나쁜사람, 야곱은좋은사람’, ‘에서는장자권을잃은사람, 야곱은장자권을쟁취하여복받은사람’이라는 도식만으로는 말씀의 내적 구조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에서와 야곱은 두 개인의 성격을 넘어 사람의 거듭남 안에서 일어나는 ‘선과진리의관계’를 표상합니다. 크게 말하면 에서는 자연적 차원의 ‘선’을, 야곱은 자연적 차원의 ‘진리’를 표상합니다. 그런데 거듭남의 초기에는 사람이 무엇이 선인지 아직 직접적으로 사랑하고 지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먼저 진리를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옳다’, ‘이렇게살아야한다’, ‘이것은주님의뜻이다’라는 진리를 배우고, 처음에는 그것을 의무와 순종으로 실천합니다. 그래서 시간의 순서에서는 진리가 앞에 나섭니다. 이 단계에서는 야곱이 앞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최종 질서가 아닙니다. 진리는 왕이 되기 위해 먼저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선을섬기기위해’ 먼저 들어옵니다. 사람이 거듭나면서 처음에는 ‘진리이기때문에선을행하지만’, 나중에는 ‘선을사랑하기때문에진리를행하는’ 상태로 바뀝니다. 처음에는 ‘주님께서하라고하셨으니해야한다’였다면, 나중에는 ‘그것이선하기때문에하고싶다’가 됩니다. 바로 이때 외적으로 먼저였던 진리가 본래 자리로 물러나고, 실제로 첫째인 선이 앞에 서게 됩니다. 이것이 장자권을 둘러싼 말씀의 역설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그래서 ‘누가장자인가?’라는 질문은 스베덴보리에게 단순히 출생순위를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사람안에서무엇이첫째가되어야하는가?’를 묻는 질문입니다. 진리가 먼저 배워지므로 진리가 장자처럼 보이지만, 실제 목적에서는 선이 먼저입니다. 신앙이 먼저 형성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생명에서는 체어리티가 먼저입니다. 사람은 ‘무엇을믿어야하는가’를 먼저 배우지만,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목적은 그를 교리를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선을사랑하고행하는사람’으로 만드는 데 있습니다.
이것을 놓치면 장자권이 쉽게 ‘영적특권론’으로 변합니다. ‘나는장자권을가진사람이다’, ‘우리가정에는장자권의복이있다’, ‘내가이장자권을자녀에게물려준다’는 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장자권의 중심이 주님에게서 인간에게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물론 부모의 신앙과 삶이 자녀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부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모가 주님을 사랑하고 정직하게 살며 자녀에게 말씀을 가르친다면 그것은 자녀에게 귀한 영적 환경과 리메인스를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부모가가진영적신분이나권리가혈통을따라자녀에게이전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구원도, 거듭남도, 천국도 혈통으로 상속되지 않습니다. 선한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자녀가 선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목회자의 자녀라는 이유로 영적인 장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마다 자유 안에서 주님을 향하여 돌이키고,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여기며 피하고, 받은 진리를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장자권’이 있다면 그것은 특별한 영적 신분증이 아니라 ‘주님을사랑하고이웃에게선을행하는삶이무엇인지보여주는것’일 것입니다.
이 점에서 ‘처음난것’을 여호와께 돌리라는 성경의 명령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장자권이라고 하면 ‘장자가무엇을받는가’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오히려 ‘처음난것은누구의것인가’를 묻습니다. 그리고 대답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것’입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에서 ‘양의첫새끼’가 주님께 속한 것을 표상한다고 설명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처음 난 것은 거룩하게 구별되었으며, 궁극적으로는 오직 주님만이 참된 ‘장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거기서 비롯되는 신앙 역시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사용자가 번역·해설해 둔 AC 자료에서도 이 점을 분명히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성경의 장자권에는 놀라운 방향 전환이 일어납니다. 자연적인 인간은 ‘장자이므로더받는다’에 관심을 둡니다. 그러나 속뜻은 ‘처음난것이므로주님께돌린다’고 말합니다. 자연적인 인간은 ‘나에게어떤복이오는가’를 묻지만, 영적인 인간은 ‘내가받은것이누구에게서왔으며무엇을위해사용되어야하는가’를 묻습니다. 자연적인 장자권은 소유의 언어로 읽기 쉽지만, 영적인 장자권은 ‘귀속과질서와쓰임’의 언어로 읽어야 합니다.
따라서 장자권과 함께 ‘복’을 말할 때도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성경에서 복에는 자연적인 차원도 분명히 있습니다. 자녀, 토지, 풍요, 건강, 평안 같은 것이 복으로 표현됩니다. 이것을 억지로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연계의 좋은 것들도 모두 주님의 섭리 안에서 감사히 받을 수 있는 선물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영적 실체 그 자체로 만들어 버릴 때입니다. ‘장자권을회복하면사업이잘된다’, ‘가문이일어난다’, ‘자녀가성공한다’, ‘물질적인형통이따라온다’는 식의 공식이 만들어지는 순간, 말씀의 영적인 복이 자연적인 성공의 약속으로 축소될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진정한 복은 훨씬 안쪽에 있습니다. 사람이 주님과 결합하는 것,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게 되는 것, 진리를 단지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기쁨으로 행하게 되는 것, 자기중심적인 proprium의 지배가 약해지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사람의 삶을 이끌게 되는 것, 그리고 마침내 자신에게 주어진 쓰임을 이웃을 위해 기쁘게 감당하게 되는 것이 복입니다. 이런 사람이 부자가 될 수도 있고 가난할 수도 있습니다. 건강할 수도 있고 병들 수도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도 있고 이름 없이 살 수도 있습니다. 외적인 형편이 그의 장자권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에서의 팥죽 이야기도 한층 깊어집니다. 에서의 문제를 단순히 ‘먹는것을좋아했다’는 데 두어서는 안 됩니다. 팥죽은 눈앞에 있는 즉각적인 자연적 만족입니다. 장자권은 그보다 더 깊고 먼 질서에 속한 것입니다. 따라서 ‘팥죽한그릇에장자권을판다’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눈앞의자연적만족때문에영적인질서를뒤집어버리는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돈 때문에 양심을 버리는 것, 인정받고 싶은 욕망 때문에 진리를 왜곡하는 것, 교회 성장을 위해 체어리티를 희생하는 것, 교리를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사람을 미워하는 것, 영적 권위를 얻으려다 겸손을 잃는 것, 심지어 ‘장자권을얻겠다’는 열심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 싶은 욕망에 빠지는 것까지 모두 이 원리 아래에서 성찰할 수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경우는 역설적입니다. ‘장자권을귀하게여기라’는 가르침을 듣다가 오히려 ‘내가장자가되어야한다’는 자기 우월성에 사로잡힌다면, 장자권을 지키려다가 장자권의 속뜻을 잃어버리는 일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나라에서 첫째가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 위에 서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더 많이 받은 사람은 더 높은 사람이 아니라 더 많이 쓰임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진리를 더 많이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평가할 권리를 더 많이 받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먼저 그 진리대로 살아야 할 책임을 더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장자권을 ‘권세’보다 ‘책임’, ‘소유’보다 ‘귀속’, ‘특권’보다 ‘쓰임’으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장자권’보다 ‘주님의장자권’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내가 첫째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 안에서 첫째가 되셔야 합니다. 내 신앙이 첫째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통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체어리티가 첫째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가인과 아벨 이야기가 다시 연결됩니다. ‘양의첫새끼’를 드린 아벨은 체어리티를 표상합니다. 사용자가 작업한 AC.351 자료에서도 ‘양의첫새끼’가 오직 주님께 속한 것을 상징하며, ‘사랑과거기서비롯된신앙’이 ‘장자’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순서입니다. ‘신앙과거기서비롯된사랑’이 아니라 ‘사랑과거기서비롯된신앙’입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사실 장자권 전체를 뒤집습니다. 사람이 처음 거듭날 때에는 ‘신앙에서사랑으로’ 가는 것처럼 경험합니다.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믿고, 그 결과 선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관점에서 실제 유입의 질서는 ‘사랑에서신앙으로’입니다.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오고, 그 선으로부터 진리가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전자는 사람에게 ‘나타나는순서’이고 후자는 주님에게서 오는 ‘실제질서’입니다. 이 둘을 구별하지 못하면 신앙이 영원히 장자 자리를 차지하려 하고, 결국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상태, 곧 신앙이 체어리티를 억압하는 교회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장자권’이라는 주제가 오히려 ‘스베덴보리의렌즈’로 읽기에 아주 좋은 주제라고 봅니다. 일반적인 설교에서는 장자권을 ‘빼앗기지말아야할복’으로 읽기 쉽지만, 속뜻에서는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 ‘내안에서무엇이진짜장자인가’를 묻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내가장자인가?’라는 질문마저 내려놓게 합니다. 모든 선과 모든 참된 신앙의 근원이신 주님만이 참된 장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장자권을 회복한다는 것은 ‘내가특별한사람이되는것’이 아닙니다. ‘내안의질서가회복되는것’입니다.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섬기고, 진리가 선을 섬기며,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하고, 지식이 삶이 되며, 자기 사랑이 쓰임의 사랑 아래 놓이고, 마침내 나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 첫째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진다면 장자권이라는 표현을 굳이 사용하든 사용하지 않든 그 사람 안에서는 말씀의 ‘장자권’이 실제로 회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준을 가지고 보면 다음 단계에서 더 민감한 문제가 나타납니다. ‘그렇다면조상의신앙과죄, 부모와자녀, 가문과장자의관계는어떻게보아야하는가?’입니다. 제공된 자막에는 후반부에 한국의 전통적인 제사와 탈상, 장자에게 제사 음식을 먹이는 관습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나라는장자들이빨리죽는다’는 상당히 강한 주장까지 등장합니다. 이 지점부터는 단순한 ‘장자권의영적의미’ 문제를 넘어 ‘조상의죄와영적영향, 가문의저주, 제사와장자, 세대간영적계승’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훨씬 중요한 분별의 문제가 시작됩니다. 바로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유전악’, 영들의 유입, 인간의 자유, 책임, 섭리를 함께 놓고 보아야 정확히 풀립니다. 3부에서는 이 문제를 집중해서 살펴보겠습니다.
3부
2부 끝에서 저는 이영환 목사의 장자권 가르침이 ‘가문·조상·제사·유전적영적영향’의 문제로 들어간다고 예고했습니다. 그런데 자막의 해당 부분을 더 자세히 확인해 보니, 여기서는 한 가지를 먼저 바로잡아야겠습니다. 이영환 목사는 흔히 일부 영적 전쟁이나 가계치유 계열에서 주장하는 ‘가계의저주’를 오히려 매우 강하게 부정합니다. 그는 부모나 조상의 죄가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영적 저주로 계속 이어진다는 주장을 거부하면서, 갈라디아서 3장 13절의 ‘그리스도께서우리를위하여저주를받은바되사율법의저주에서우리를속량하셨다’는 말씀과 고린도후서 5장 17절의 ‘누구든지그리스도안에있으면새로운피조물’이라는 말씀을 근거로 듭니다. 부모가 살아온 문화와 정서가 자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을 ‘조상의죄때문에지금도저주받는다’는 영적 법칙으로 만드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아무리신령하고아무리대단해도가계를저주하면저주부분에서는잘못된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 부분은 앞서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건전하며, 정확하게 평가해 주어야 합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유전악’이라는 말을 분명히 사용하지만, 이것은 ‘조상이지은특정죄의형벌이후손에게영적저주로전가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유전되는 것은 조상의 죄책 그 자체가 아니라 악으로 기울어지는 성향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람은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축적된 자연적 성향을 물려받지만, 그 성향 때문에 곧바로 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자기 의지로 받아들여 실제 악으로 만들 때 비로소 자신의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집안에이런죄가있었으니나는영적으로묶여있다’, ‘조상이우상숭배를했으므로후손이그저주를끊어야한다’는 식으로 개인의 현재 상태를 조상의 행위와 기계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인간론과도 맞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영환 목사가 ‘삶의공간에서문화와정서는영향을줄수있다’고 구별한 대목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경험적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폭력적인 가정에서 성장하면 폭력적인 반응방식을 배우기 쉽고,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가정에서 성장하면 물질 중심의 가치관을 습득하기 쉽습니다. 반대로 정직과 섬김과 기도가 일상화된 가정에서 성장하면 그러한 삶의 형식들이 마음에 깊이 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적저주가혈통을타고흐른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전자는 인간의 유전적·심리적·문화적 조건이고, 후자는 조상의 죄책이 후손에게 영적으로 전가된다는 주장입니다. 이영환 목사가 이 둘을 구별하려 한 것은 좋은 지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더하면 이 문제는 오히려 인간의 자유를 더욱 선명하게 만듭니다. 사람에게 악으로 기울어지는 수많은 유전적 성향이 있다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을 그 성향 속에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어린 시절부터 선과 진리에 관한 수많은 상태를 사람 안에 보존하시는데, 이것이 우리가 계속 다루어 온 ‘리메인스’입니다. 사람에게 유전악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은밀하게 보존하시는 선과 진리의 상태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성장하여 자유롭게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여기며 싸우기 시작할 때, 주님은 그 리메인스를 사용하여 사람을 거듭나게 하십니다. 따라서 인간의 이야기는 ‘조상에게서무엇을물려받았는가’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주님께서내게주시는선과진리에내가어떻게응답하는가’입니다.
이것은 장자권 문제와도 직접 연결됩니다. 만일 영적 저주가 혈통을 따라 자동으로 전달되지 않는다면, 반대로 영적 장자권이나 축복 역시 혈통을 따라 자동으로 전달된다고 말하기 어려워집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가문의저주’를 부정하면서 ‘가문의영적특권’은 자동적으로 계승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양쪽에 같은 원리를 적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조상의 악 때문에 내가 자동적으로 정죄되지 않는 것처럼 조상의 선 때문에 내가 자동적으로 거듭나는 것도 아닙니다. 부모가 훌륭한 신앙인이었다고 해서 자녀가 자동으로 천국의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며, 반대로 부모가 악한 삶을 살았다고 해서 자녀가 그 때문에 지옥의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각 사람을 자유로운 존재로 대하십니다.
그렇다고 부모와 조상의 삶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매우 중요합니다. 다만 그 영향의 방식이 ‘영적신분의자동이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선하게 살면 자녀에게 좋은 환경을 만들어 줄 수 있고, 말씀과 기도와 체어리티의 삶을 보여 줄 수 있으며, 어린 마음에 귀한 리메인스가 형성되는 자연적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부모의 악한 삶은 자녀에게 매우 어려운 자연적 조건을 남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그 자녀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섭리는 그보다 훨씬 깊고 개별적입니다.
여기서 ‘장자’라는 말의 의미도 다시 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연적 가정에서는 장자가 부모의 유산을 물려받고 가문의 책임을 이어받을 수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에서도 장자에게 특별한 법적·종교적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그대로 영적 세계에 옮겨 ‘영적인장자도부모의영적권세와축복을상속받는다’고 하면 자연적 질서와 영적 질서를 혼동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자연계의 장자 제도는 영적 실재를 표상하는 하나의 형식입니다. 중요한 것은 형식 자체를 오늘날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형식이무엇을표상했는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강의에는 또 하나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 등장합니다. 이영환 목사는 한국의 전통적인 제사문화를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농촌에서 성장하며 실제로 보았던 옛 상례와 제례의 모습을 상당히 생생하게 회상합니다. 특히 탈상 때까지 죽은 이를 위해 밥을 차려 놓고, 그 음식을 장자가 먹던 풍습을 언급하면서 ‘그래서우리나라는장자들이빨리죽어버려요’, ‘조선시대부터장자들이빨리죽어버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 ‘제사문화는반드시없어져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는 앞의 ‘가계의저주’를 부정한 대목과 달리 상당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입장에서 조상을 신적 존재처럼 섬기거나 죽은 사람에게 종교적인 제의를 드리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제사음식을장자가먹었기때문에한국의장자들이빨리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주장입니다. 전자는 신앙과 예배의 대상에 관한 신학적 판단이지만, 후자는 역사적·의학적 인과관계에 관한 주장입니다. 제공된 자막 안에서는 ‘조선시대부터장자들이실제로다른형제보다일찍죽었다’는 통계나 역사적 근거가 제시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대목은 설교자의 어린 시절 경험과 해석을 일반화한 것으로 보는 것이 안전합니다.
더구나 조금 전까지 ‘경험도존재할수없고사람들의논리도존재할수없다’, 결국 진리가 선포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취지로 가계저주론을 비판했던 논리와도 긴장이 생깁니다. ‘우리집안에이런일이반복되니가계의저주다’라는 경험적 추론을 경계했다면, ‘내가농촌에서이런제사풍습을보았고장자들이일찍죽었다’는 경험 역시 같은 엄격한 기준으로 검증해야 합니다. 이 부분에서는 이영환 목사가 앞에서 세운 좋은 원칙을 자기 자신의 제사문화 해석에도 동일하게 적용했으면 훨씬 더 설득력 있었을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는 이 문제를 또 다른 방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사람이 죽으면 자연계 어딘가에 머물면서 제삿밥을 받아먹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물질적인 몸을 벗는 것이며, 사람은 영적 몸을 가진 채 영계에서 계속 살아갑니다. 따라서 죽은 조상이 제삿날 집으로 돌아와 차려 놓은 음식을 먹는다거나, 그 음식에 어떤 영적인 기운이 들어가 그것을 먹은 장자에게 죽음의 영향이 전달된다는 식의 사고는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 이해와 맞지 않습니다. 자연적인 음식은 자연계에 속하고 영은 영계의 질서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제사 행위의 ‘영적의미’가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음식 자체에 어떤 마력이 있느냐가 아니라 ‘그행위를하는사람의애정과의도’입니다. 사람이 죽은 조상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과, 그 조상에게 자신의 운명과 복을 맡기며 종교적인 숭배를 드리는 것은 다릅니다. 부모와 조상을 존경하고 그들의 선한 삶을 기억하는 것은 체어리티의 질서와 충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을 주님에게 속한 자리에 올려놓고 그에게 복과 화를 좌우하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핵심은 ‘제삿밥이라는물질’이 아니라 ‘예배와신뢰가누구에게향하고있는가’입니다.
이 구별은 한국 기독교가 제사 문제를 다룰 때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제사를 반대한다면서 조상에 대한 모든 기억과 존경까지 악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면 가족 간 갈등만 커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그냥문화일뿐’이라며 그 행위에 담긴 종교적 의미를 전혀 살피지 않는 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라면 외적인 형식만 보고 판단하기보다 그 형식 안에 있는 ‘애정과목적’을 보려고 할 것입니다. 주님께 돌려야 할 예배가 죽은 인간에게 향한다면 바로잡아야 하지만, 돌아가신 부모를 기억하며 감사하고 가족이 함께 모여 그들의 선한 삶을 되새기는 것까지 같은 범주로 묶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죽은조상이살아있는후손에게영향을미칠수있는가?’라는 더 미묘한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영들의 유입을 매우 실제적으로 말합니다. 사람의 생각과 애정에는 영계로부터 유입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우리할아버지의영이나를따라다닌다’, ‘우리가문의조상영들이후손에게붙어있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사람에게 결합되는 영들은 사람이 그들의 개인적 정체를 알아보고 관계를 맺도록 붙어 있는 것이 아니며, 유입은 주님의 섭리 아래 인간의 자유가 보존되는 질서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영계론을 한국적인 ‘조상신’ 개념이나 기독교 일부에서 말하는 ‘가계의영’과 섞어서는 안 됩니다.
이 점에서 오히려 이영환 목사가 ‘가계의저주’를 부정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와 만날 수 있는 중요한 접점입니다. ‘아버지와어머니가무슨죄를지었기때문에내가저주를받는다’는 사고에서 사람을 해방시키려는 방향은 옳습니다. 강의에서 ‘그리스도안에있으면새로운피조물’이라는 말씀을 붙들고 ‘옛것은지나갔다’고 강조하는 것도, 신약의 문자적 의미 안에서는 분명한 복음적 힘이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합니다. ‘새로운피조물’이 된다는 것을 단지 신분의 즉각적인 변경으로만 보지 않고 ‘거듭남’이라는 실제적인 과정으로 봅니다. 주님께 돌아섰다고 해서 오랜 세월 형성된 악한 성향과 습관이 순간적으로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죄책의 전가나 가계저주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지만, 내가 물려받고 스스로 강화해 온 악한 성향과는 평생 싸워야 합니다. 이것은 ‘저주가남아있기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을 자유롭게 거듭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믿었으니가계의저주는끝났다’에서 멈추면 사람은 자기 안의 실제 악을 너무 쉽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조상의죄때문에정죄받는사람이아니지만, 내안에는유전적으로기울어진수많은악의성향이있으며그것이실제악으로나타나지않도록주님앞에서날마다살펴야한다’고 이해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여기에는 두려움이 아니라 책임이 생깁니다. ‘우리집안이원래화를잘내니까어쩔수없다’고 할 수도 없고, ‘조상의분노의영을끊으면된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내가 분노를 악으로 인정하고, 그것이 행동으로 나오려 할 때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피해야 합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반대로 부모가 훌륭한 신앙인이었다고 해서 안심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집안은몇대째목회자집안이다’, ‘우리부모는기도의사람이었다’, ‘우리가문에는장자의복이흐른다’는 사실이 나의 거듭남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장자권 가르침에서 특히 지켜야 할 균형입니다. ‘저주는상속되지않지만복은자동으로상속된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자연적 환경과 영적 기회는 전달될 수 있지만, 사랑과 신앙 자체는 각 사람이 주님에게서 받아 자기 삶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모가 자녀에게 남겨 줄 수 있는 최고의 영적 유산은 ‘내가받은장자권을네게넘긴다’는 선언보다 훨씬 실제적입니다. 부모 자신이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 잘못했을 때 자녀에게 사과하는 것, 말씀을 삶보다 앞세우지 않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 어려운 사람을 섬기는 것, 돈과 명예보다 선한 양심을 귀하게 여기는 것, 자녀를 자기 소유가 아니라 주님께 맡겨진 한 사람으로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 속에서 자녀의 마음에는 수많은 선한 상태가 심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씨앗을 나중에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일은 결국 그 자녀 자신의 자유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보면 ‘가문의회복’이라는 말도 새로운 의미를 얻습니다. 가문의 회복은 어떤 영적 의식을 통해 조상의 저주를 끊는 일이 아니라, ‘나에게서부터악의반복을멈추는것’입니다. 할아버지가 폭력적이었고 아버지도 폭력적이었다면 ‘폭력의영을끊는다’는 선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분노와 폭력을 죄로 여기고 실제 삶에서 그것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집안이 대대로 돈 때문에 싸웠다면 ‘가난의저주’를 끊는 것보다 탐욕과 소유욕을 살피는 것이 먼저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억압해 왔다면 내가 내 자녀에게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 가문의 영적 질서를 바꾸는 실제적인 시작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거듭남과 훨씬 가깝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지점에서 ‘장자권’이라는 말을 아주 아름답게 다시 사용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내가우리가문의장자가되어복을독점하겠다’가 아니라 ‘내게서부터악의대물림을멈추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장자권’을 직접 이런 문장으로 정의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의 거듭남 교리를 오늘의 가정 문제에 적용한 표현입니다. 내가 먼저 용서하고, 내가 먼저 정직해지고, 내가 먼저 악을 끊고, 내가 먼저 이웃을 섬기며, 내 자녀에게 이전 세대와 다른 선한 환경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라면 ‘영적장자’라는 표현은 특권이 아니라 매우 무거운 책임을 뜻하게 됩니다.
더 깊게는 그 책임마저 ‘내힘으로우리가문을바꾸겠다’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의 주체는 주님이십니다. 사람은 ‘마치자기힘으로하는것처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지만, 실제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내가장자니까내가우리집안을구한다’가 아니라 ‘주님께서나부터고쳐주셔서, 나를통하여다음세대에조금더선한길이열리게하신다’가 되어야 합니다. 이때 장자권은 인간의 영적 영웅주의에서 벗어나 주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로운 협력이라는 질서 안으로 들어옵니다.
결국 이영환 목사의 이 부분에는 ‘함께보존해야할것’과 ‘분별해서내려놓아야할것’이 동시에 있습니다. ‘조상의죄때문에그리스도인이계속저주아래있다’는 가계저주론을 거부하는 것은 보존할 만합니다. 부모의 삶과 문화와 정서가 자녀에게 실제 영향을 미친다는 구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제사 음식을 장자가 먹었기 때문에 한국 장자들이 일찍 죽었다는 식의 주장은 근거가 충분하지 않으며, 앞서 자신이 가계저주론을 비판할 때 사용한 엄격한 기준과도 잘 맞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는 이 둘을 함께 볼 수 있게 합니다. 사람을 심판할 필요도 없고, 한 대목의 오류 때문에 그가 말한 모든 진리까지 버릴 필요도 없습니다. 반대로 좋은 가르침 몇 가지가 있다고 해서 검증되지 않은 주장까지 받아들일 필요도 없습니다. ‘조상의죄책은나의죄책이아니다. 그러나유전된악의성향은실제로존재한다. 그것은저주풀이로없어지는것이아니라주님안에서평생의거듭남을통해질서가바로잡힌다. 부모의선도자동으로나의선이되지는않는다. 나는주님에게서선과진리를직접받아자유롭게살아야한다.’ 저는 이 정도가 이 부분을 통과하는 가장 균형 잡힌 정리라고 봅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4부는 자연스럽게 ‘그러면장자에게주어진복이란도대체무엇인가?’라는 문제로 넘어갑니다. ‘복’을 가정과 자녀와 물질과 사역의 형통으로 읽을 것인지, 아니면 그 자연적 표현들 안에서 더 깊은 영적 실재를 읽을 것인지가 핵심입니다. 이 지점이 이 장자권 가르침을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분별할 때 사실상 가장 중요한 고비 가운데 하나입니다.
4부
앞의 3부에서는 이영환 목사가 ‘가계의저주’를 오히려 분명하게 부정한다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조상의 죄책이 후손에게 자동으로 넘어오는 것은 아니라는 그의 설명은 스베덴보리의 ‘유전악’ 개념과 구별하면서도 상당 부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4부에서는 장자권 가르침에서 더 중요한 문제, 곧 ‘복’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장자에게 복이 있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복을 ‘무엇’이라고 이해하느냐에 따라 장자권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는 이영환 목사의 다른 강의 자료에서 초보적 신앙의 성도가 좋아하는 것을 ‘주일성수, 교회봉사, 물질축복, 행복한가정’ 등으로 설명하면서, 그것을 신앙의 완성으로 보지 않고 이후 죄성과 정욕을 다루는 연단의 과정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대목도 함께 참고할 만합니다. 즉 그의 전체 가르침을 단순히 ‘장자권 = 물질축복’이라고 축소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장자에게 주어지는 복을 생각하면 먼저 ‘두몫’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신명기의 율법에서도 장자는 아버지 소유 가운데 다른 자녀보다 두 몫을 받았습니다. 이삭의 축복을 둘러싼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도 있고,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통하여 요셉이 사실상 두 지파의 몫을 받게 되는 모습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적 의미에서 ‘장자권’과 ‘더많은몫’이 연결되는 것은 성경에 근거가 있습니다. 문제는 이 자연적인 질서를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그대로 옮겨 ‘영적장자는다른사람보다더많은물질과성공과권세를받는다’는 공식으로 만드는 순간입니다. 그렇게 되면 표상이 가리키는 실재를 보는 대신 표상의 외형을 다시 붙잡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말씀 해석에서 이것은 매우 중요한 원칙입니다. 구약의 토지, 재산, 자녀, 장수, 승리, 풍요는 실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연적인 복이었습니다. 그것을 역사적 사실이 아니었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신적 말씀인 이유는 그 자연적인 사건들 안에 영원하고 천국적인 실재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땅’은 단지 부동산을, ‘곡식과포도주’는 단지 식량과 경제적 풍요를, ‘자손’은 단지 생물학적 후손의 증가를 의미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으로 들어가면 그것들은 선과 진리, 신앙과 체어리티, 교회의 번성, 거듭남에서 생겨나는 영적인 열매들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갑절의복’을 받는다는 것도 반드시 ‘연봉이두배가된다’, ‘사업규모가두배가된다’, ‘자녀가남보다크게성공한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가 풍성해지고, 그것을 이웃의 선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능력과 책임이 커지는 것으로 읽어야 합니다. 주님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받았다는 것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뜻보다 ‘더많이섬길수있게되었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복 개념과 정반대입니다. 세상은 ‘많이가진사람이복받은사람’이라고 말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질서에서는 ‘많이흘려보낼수있는사람이복받은사람’입니다. 세상에서는 권한이 커지면 나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지지만, 천국에서는 쓰임이 커집니다. 지혜가 많으면 사람들을 지배할 자격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에게 진리를 나눌 책임이 생깁니다. 재물이 많으면 그것 자체가 높은 영적 상태의 증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재물을 어떤 애정과 목적으로 사용하는지가 중요해집니다.
그래서 ‘장자의두몫’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다면 ‘두배의특권’보다 ‘두배의쓰임’이라고 읽는 편이 훨씬 안전합니다. 이것은 ‘두몫’의 모든 속뜻을 단순히 ‘쓰임’ 하나로 번역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말씀의 각 문맥마다 상응은 더 정밀하게 살펴야 합니다. 다만 오늘날 우리의 삶에 적용할 때, ‘장자는더받아누리는사람’보다 ‘먼저받아더많이섬기는사람’이라는 방향이 천국의 질서와 훨씬 잘 맞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물질적인복을구하면안되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계의 삶을 하찮게 여기지 않습니다. 집이 필요하고, 음식이 필요하고, 건강이 필요하며, 자녀가 평안하기를 바라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는 경제적 조건을 구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주기도문에도 ‘오늘우리에게일용할양식을주시옵고’가 있습니다. 문제는 자연적인 복 자체가 아니라 ‘질서’입니다.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섬기느냐, 영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되느냐입니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큽니다. ‘주님을사랑하니주님께서내사업을잘되게해주실것이다’와 ‘주님께서맡겨주신사업을통하여정직하게일하고사람들에게유익을주며얻은재물을선한쓰임에사용하고싶다’는 말은 겉으로는 모두 신앙과 사업을 연결하지만 안쪽의 방향이 다릅니다. 첫 번째에서는 주님이 나의 성공을 위한 수단이 되기 쉽고, 두 번째에서는 자연적인 사업이 주님의 선을 행하기 위한 수단이 됩니다. 전자는 종교가 자연적 욕망을 섬기는 방향으로 뒤집힐 위험이 있고, 후자는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목적을 섬기는 질서입니다.
바로 이것이 ‘장자권의복’을 분별하는 핵심입니다. 장자권을 배운 뒤 사람이 ‘이제우리가정이잘되고, 자녀가잘되고, 사업이잘되고, 경제적으로형통할것이다’라는 기대를 주로 갖게 된다면, 그 가르침이 아무리 성경 구절을 많이 사용하더라도 그 열매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반대로 장자권을 배운 뒤 ‘나는우리가정에서먼저회개해야겠다’, ‘내가먼저용서해야겠다’, ‘내가가진것을가족과이웃의선을위해사용해야겠다’, ‘자녀를내성공의연장이아니라주님께맡겨진독립된영혼으로대해야겠다’, ‘더많이받기를구하기보다더충실하게쓰임을감당해야겠다’는 방향으로 마음이 움직인다면 그 장자권 가르침은 상당히 다른 열매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자녀의복’은 매우 조심해서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부모라면 자녀가 잘되기를 원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건강하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지 않고, 사회에서도 인정받으며 살기를 바랍니다. 그것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복이 이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자녀에게 가장 큰 복은 ‘천국에적합한사람이되어가는것’입니다. 정직을 사랑하고, 악을 죄로 여기며, 이웃의 선을 기뻐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쓰임을 성실히 감당하며,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자녀가 세상에서 크게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건강하게 오래 살 수도 있고 뜻밖의 질병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외적인 사건 하나하나를 ‘장자권의복을받았는가, 잃었는가’를 판단하는 척도로 삼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시작하면 신앙은 필연적으로 결과 중심이 됩니다. 일이 잘되면 ‘하나님이복주셨다’고 하고, 일이 안 되면 ‘내가장자권을놓쳤나’, ‘가정에무슨문제가있나’, ‘신앙이부족한가’를 찾게 됩니다. 그러면 고난당하는 의인과 가난한 성도, 병든 사람을 설명하기 어려워집니다.
스베덴보리의 ‘신적섭리’는 이보다 훨씬 깊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사람을 이 세상에서 가능한 한 편안하고 성공하게 만드는 것을 최종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자연적 성공은 그 사람에게 허용될 수 있고, 어떤 성공은 오히려 막힐 수도 있습니다. 어떤 실패가 사람을 겸손하게 하여 더 깊은 선으로 이끄는 도구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큰 성공이 사람의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키워 영적으로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한 사건만 보고 그 섭리 전체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복 = 형통’이라는 공식은 영적으로 매우 위험합니다. 이 공식이 자리 잡으면 자연스럽게 ‘고난=복없음’이라는 반대 공식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 자신은 세상적인 의미에서 형통한 생애를 사신 분이 아닙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천국의 행복을 자연적인 부와 명예의 확대판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천국의 기쁨은 사랑과 쓰임에서 옵니다. 다른 사람의 선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기쁨,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자신을 통해 흘러간다는 기쁨이 천국의 행복과 연결됩니다.
이 점에서 이영환 목사의 전체 가르침에는 흥미롭게도 ‘번영신학’과 단순히 동일시하기 어려운 요소가 보입니다. 관련 강의에서 그는 초보적인 성도가 ‘물질축복받고행복한가정을꾸리는것’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자신의 죄성을 뼈저리게 발견하고 다루는 과정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또 부자 청년 본문을 설명하면서 예수께서 ‘소유를다팔라’고 하신 것을 단지 물질적 재산만이 아니라 사람 안의 ‘정욕, 죄성과정욕이라는소유’까지 내려놓는 문제로 확대합니다. 이것 역시 문자적 본문의 정밀한 속뜻 해석과는 별도로, 자연적인 소유보다 내면의 악을 더 근본적인 문제로 본다는 점에서는 주목할 만합니다.
따라서 이영환 목사의 장자권을 평가하면서 ‘결국돈많이벌고자녀잘되자는이야기’라고 단순화하면 그의 가르침에 있는 중요한 부분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영적 훈련과 죄의 처리, 헌신과 사명도 강조합니다. 오히려 문제는 그 여러 요소들이 ‘장자권’이라는 하나의 틀 안에서 어떻게 결합되느냐입니다. 자연적 축복과 영적 성숙이 함께 언급될 때 무엇이 목적이고 무엇이 수단인지 끝까지 지켜봐야 합니다. 이 구별 하나가 전체 가르침의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렌즈’가 특히 유용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적인 것을 없애지 않습니다. 자연적인 것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몸도 필요하고, 돈도 필요하고, 가정도 필요하고, 직업도 필요하며, 교회라는 외적 조직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그 안에 영적인 것이 담길 때 제자리를 찾습니다. 자연적인 것은 그릇이고 영적인 것은 그 안의 내용입니다. 그릇을 깨뜨릴 필요는 없지만, 빈 그릇을 내용 자체라고 착각해서도 안 됩니다.
그래서 ‘복된가정’도 새롭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아무 문제가 없는 가정이 반드시 복된 가정은 아닙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가정이 반드시 복된 가정도 아닙니다. 자녀들이 모두 사회적으로 성공한 가정도 그것만으로는 복된 가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서로 잘못했을 때 용서를 구할 수 있고, 약한 가족을 버리지 않으며, 돈보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갈등 속에서도 진리를 따라 자신을 돌아보며, 가족 구성원을 자기 소유물로 대하지 않는 가정이라면 그 안에는 천국의 질서가 조금씩 형성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복된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배우자, 높은 소득은 감사할 조건일 수 있지만 영적인 복의 척도는 아닙니다. 오히려 자녀가 자기 능력을 남을 누르는 데 쓰지 않고 쓰임에 사용하며, 성공했을 때 교만해지지 않고 실패했을 때 악한 길을 선택하지 않으며,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업신여기지 않고, 진실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성장한다면 부모로서는 그보다 더 큰 복을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복된장자’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남들보다 두 몫을 차지한 사람이 아니라 ‘두몫을맡은사람’입니다. 많이 받은 만큼 많이 책임지고, 먼저 깨달은 만큼 먼저 실천하며, 먼저 주님을 알게 된 만큼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을 정죄하기보다 섬기는 사람입니다. 장자의 권위가 있다면 그것은 지배할 권위가 아니라 섬길 책임에서 나오는 권위여야 합니다.
여기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첫째’의 역설이 장자권을 비추는 매우 좋은 빛이 됩니다. 제자들은 누가 큰가를 자주 다투었지만 주님은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장자권에 적용하면 놀라운 전환이 일어납니다. ‘장자이므로첫째다’에서 ‘첫째이므로가장먼저섬긴다’가 됩니다. ‘장자이므로더받는다’에서 ‘더받았으므로더많이내어놓는다’가 됩니다. ‘장자이므로내자녀가복받는다’에서 ‘내가먼저거듭나자녀에게더선한삶을보여준다’가 됩니다.
그리고 이 전환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가인과 아벨의 문제까지 다시 풀어 줍니다. 가인의 오류는 단순히 ‘신앙이있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우위에 서려 한 것입니다. 먼저 태어난 것이 실제로도 첫째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질서에서는 진리가 선을 섬겨야 하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겨야 합니다. 따라서 참된 장자권의 회복은 ‘신앙의우월권을회복하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이 자기 자리를 찾아 체어리티를 섬기는 것입니다.
여기에 AC.351의 ‘양의첫새끼’가 다시 결정적인 빛을 줍니다. 사용자가 작업한 해당 자료에는 ‘처음난것은모두거룩했는데, 이는그것들이오직홀로장자이신주님을가리켰기때문’이며, 이어 ‘사랑과거기서비롯된신앙이장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결정적인 문장이 뒤따릅니다. ‘모든사랑은주님에게서오는것이며, 인간에게서오는것은조금도없습니다. 그러므로오직주님만이장자이십니다.’
이 한 문장은 인간 중심의 장자권 이해를 근본에서 뒤집습니다. ‘내가장자다’가 최종 진리가 아닙니다. ‘주님이장자이시다’가 최종 진리입니다. 내가 받은 복의 근원도 주님이고, 내가 가진 진리의 근원도 주님이며, 내가 행할 수 있는 선의 근원도 주님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남보다 먼저 무엇을 받았다는 사실은 자랑할 근거가 아니라 감사하고 돌려드릴 이유가 됩니다. 장자의 첫 열매가 여호와께 속했던 것처럼, 내 삶의 첫째도 주님께 속해야 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장자권은 ‘성공의신학’에서 ‘헌신의신학’으로, ‘소유의신학’에서 ‘쓰임의신학’으로, ‘가문의특권’에서 ‘거듭남의책임’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저는 이 변화가 이영환 목사의 가르침 안에 있는 좋은 요소들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장자권을 훨씬 안전하게 이해하게 해 준다고 봅니다. 사명을 강조하는 것은 살릴 수 있습니다. 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것도 살릴 수 있습니다. 신앙의 유산을 전하자는 열망도 살릴 수 있습니다. 부모가 먼저 바로 서야 한다는 책임도 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중심에서 ‘장자인나’가 점점 커지는 것이 아니라 ‘참된장자이신주님’이 점점 커져야 합니다.
결국 ‘장자의복’은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얼마나받았는가?’가 아니라 ‘받은것이내안에서무엇이되었는가?’입니다. 재물이 선한 쓰임이 되었는가, 지식이 지혜가 되었는가, 신앙이 체어리티가 되었는가, 권위가 섬김이 되었는가, 자녀에 대한 사랑이 소유욕이 아니라 그들의 영원한 선을 구하는 사랑이 되었는가, 그리고 내가 받은 진리가 나 자신을 먼저 고치는 진리가 되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렇게 보면 장자권의 가장 큰 복은 어쩌면 ‘갑절의재산’이 아니라 ‘질서의회복’일 것입니다. 내 안에서 주님이 첫째가 되고, 선이 진리를 다스리며,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이 되고, 영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을 다스리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쓰임을 향해 배열되는 것, 이것이 이루어질수록 사람은 천국의 질서에 가까워집니다. 자연적인 형통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만, 이 질서가 사람 안에 이루어진다면 그는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5부에서는 조금 더 넓게 보겠습니다. 이영환 목사의 ‘장자권’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놓고 ‘무엇은보존할것인가, 무엇은재해석할것인가, 무엇은내려놓아야하는가’를 정리하겠습니다. 특히 ‘장자권이라는별도의교리체계가과연필요한가?’라는 질문까지 들어가 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장자권이 독립된 영적 특권의 교리라기보다 ‘선과진리의질서, 신앙과체어리티의질서, 거듭남과쓰임’이라는 훨씬 큰 질서 안에서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5부에서 이 영상 전체를 종합하겠습니다.
5부
이제 마지막 5부에서는 이영환 목사의 ‘장자권’ 가르침 전체를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겠습니다. 앞의 네 편에서 우리는 이 가르침 안에 분명히 보존할 만한 요소가 있다는 것과, 동시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과하면서 상당히 깊게 재해석해야 할 부분도 있다는 것을 함께 보았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결론을 ‘장자권은옳다’ 또는 ‘장자권은잘못되었다’ 가운데 하나로 단순하게 내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중요한 질문은 ‘성경의장자권이라는표상이궁극적으로우리를어디로데려가는가?’입니다. 이영환 목사의 장자권 가르침이 사람을 주님께 더 가까이 데려가고, 자기 안의 악을 살피게 하며, 받은 진리를 삶으로 옮기고, 가정과 교회와 이웃을 섬기는 쓰임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그 안에는 분명 보존해야 할 선한 것이 있습니다. 반대로 장자권이 ‘특별한사람’, ‘특별한가문’, ‘특별한복’, ‘특별한영적권세’를 소유하는 의식으로 굳어진다면 바로 그 지점에서 장자권의 속뜻과 멀어질 수 있습니다.
먼저 이영환 목사의 장자권 가르침에서 긍정적으로 보아야 할 것은 ‘신앙을다음세대에전해야한다’는 강한 책임의식입니다. 영상 마지막까지 ‘장자선교회’라는 이름으로 후원과 교재 보급이 이루어지고 있고, 장자권에 관한 여러 내용을 하나의 교재로 정리하여 평신도들도 배우게 하려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이영환 목사에게 장자권이 단순히 설교를 위한 흥미로운 소재가 아니라 자신의 목회와 사역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주제임을 보여 줍니다. 이런 열심 자체를 가볍게 볼 필요는 없습니다. 한 세대가 받은 신앙을 자기 세대에서 소비하고 끝내지 않고 다음 세대에 전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오늘날 교회에도 매우 중요합니다.
또 하나 보존할 것은 ‘가계의저주’를 함부로 말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3부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영환 목사는 조상의 죄 때문에 오늘의 그리스도인이 영적인 저주 아래 있다는 주장을 분명히 거부합니다. 부모의 삶과 문화와 정서가 자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과 조상의 죄책이 영적으로 후손에게 전가된다는 것을 구별합니다. 이것은 장자와 가문을 강조하는 가르침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가문을 강조하다 보면 쉽게 ‘가문의저주’와 ‘가문의복’이라는 양극단으로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영환 목사의 전체 가르침을 단순한 ‘물질축복론’으로 규정하는 것도 공정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 관련 강의에서는 물질 축복과 행복한 가정을 신앙생활의 최종 단계로 보지 않고, 사람이 자기 안의 죄성과 정욕을 발견하고 다루는 더 깊은 과정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 점은 중요합니다. 장자권과 복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곧바로 ‘번영신학’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면 실제로 그가 말하고 있는 더 넓은 신앙의 구조를 놓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 가장 먼저 조정해야 할 것은 ‘장자권’이라는 개념 자체의 위치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장자권은 기독교인의 삶 전체를 설명하는 독립된 중심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말씀 안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매우 중요한 ‘표상’이며, 그 표상이 가리키는 것은 궁극적으로 ‘선과진리의우선순위’, ‘사랑과신앙의질서’, 그리고 더 깊게는 주님 자신입니다. 따라서 장자권을 하나의 거대한 교리 체계로 확대하여 성경 전체와 신앙생활 전체를 그 틀로 설명하려 하면, 본래 더 큰 질서를 설명하기 위해 주어진 하나의 표상이 오히려 전체를 지배하는 해석의 틀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성경 주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언약’을 붙들고 성경 전체를 언약 하나로만 읽을 수도 있고, ‘성전’을 붙들고 모든 것을 성전으로 설명할 수도 있으며, ‘영적전쟁’을 중심에 놓고 모든 문제를 귀신과 전쟁으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각각의 주제에는 분명 성경적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진리가 다른 모든 진리를 흡수하기 시작하면 균형이 깨집니다. 장자권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자권은 중요하지만, ‘모든것을설명하는열쇠’는 아닙니다. 말씀 전체의 중심은 장자권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오직주님만이장자이시다’는 설명이 결정적인 기준이 됩니다. 사용자가 작업한 AC 자료에는 ‘처음난것은모두거룩했는데, 이는그것들이오직홀로장자이신주님을가리켰기때문’이며, 이어 ‘사랑과거기서비롯된신앙’이 장자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더욱 결정적으로 ‘모든사랑은주님에게서오는것이며, 인간에게서오는것은조금도없으므로오직주님만이장자이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을 장자권 가르침의 맨 중심에 놓으면 많은 것이 저절로 정리됩니다. ‘내가장자가되는법’보다 ‘주님이내안에서첫째가되시는가?’가 중요해집니다. ‘장자의복을어떻게받을것인가?’보다 ‘내가받은모든선과진리가주님에게서왔음을인정하는가?’가 중요해집니다. ‘장자의권세를어떻게행사할것인가?’보다 ‘내가받은것을어떤쓰임에돌릴것인가?’가 중요해집니다. 장자권의 초점이 인간에게서 주님에게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우리가 최근 AC에서 계속 만나 온 ‘가인과아벨’의 문제가 정확하게 들어옵니다. 가인이 먼저 태어났습니다. 외적인 시간의 순서에서는 가인이 장자입니다. 가인은 신앙을 표상하고 아벨은 체어리티를 표상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거듭날 때 경험하는 순서와도 닮았습니다. 사람은 먼저 진리를 배우고 신앙을 형성한 뒤 그것을 따라 살아가면서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것처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먼저’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 질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위해 존재합니다. 진리는 선을 위해 존재합니다. 사람이 진리를 배우는 목적은 진리에 관한 지식을 축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하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시간적으로 먼저 나타난 신앙이 자기 자신을 본질적으로도 첫째라고 주장하는 순간 질서가 뒤집힙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은 바로 이 비극을 표상합니다. ‘사랑과분리된신앙’이 자신을 첫째 자리에 놓으면서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장자권 운동을 바라볼 때 매우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장자권을 그렇게 열심히 강조하면서도 그 결과 사람이 더 사랑하지 못하고, 더 용서하지 못하고, 더 섬기지 못하며, 오히려 ‘나는특별한영적권리를가진사람’이라는 의식이 강해진다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반대로 장자권을 배운 사람이 ‘내가먼저회개하겠다’, ‘내가먼저용서하겠다’, ‘내가먼저악을죄로여기고피하겠다’, ‘내가먼저가족을섬기겠다’고 한다면 그 가르침은 체어리티를 향하고 있습니다. 결국 나무는 열매로 분별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가문’이라는 말도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장자권 가르침에서는 자연스럽게 ‘우리가문’과 ‘다음세대’가 중요해집니다. 이것에는 좋은 면이 있습니다. 현대사회가 지나치게 개인화되면서 신앙도 ‘나와하나님사이의개인적인문제’로 축소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가 자녀에게 영향을 주고, 한 세대의 선택이 다음 세대의 환경을 바꾸며, 내가 받은 선한 것을 다음 사람에게 전해야 한다는 책임의식은 소중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반드시 ‘자유’를 놓습니다. 나의 거듭남을 자녀에게 물려줄 수는 없습니다. 내가 받은 천국의 상태를 유산처럼 자녀에게 넘길 수도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좋은 환경을 마련하고 말씀을 가르치며 선한 삶을 보여 주고, 주님께서 그 어린 마음에 귀한 리메인스를 보존하시는 데 자연적 도구가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그 자녀 역시 자기 자유 안에서 주님을 향하여 돌아서야 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의 유산은 ‘영적신분의상속’이 아니라 ‘거듭남에유리한선한환경과본보기의전달’이라고 하는 편이 훨씬 정확합니다.
이렇게 보면 부모가 자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도 달라집니다. ‘너는우리집안의장자권을이어받았다’고 가르치는 것보다 ‘나는주님앞에서이렇게살려고애썼다. 너도사람을두려워하기보다선과진리를사랑하고, 악을죄로여기며, 네게맡겨진쓰임을찾아살아라’고 삶으로 보여 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부모의 신앙이 진짜였다면 자녀가 물려받아야 할 것은 부모의 영적 지위가 아니라 부모가 사랑했던 ‘선과진리’입니다.
‘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자권을 말할 때 자연적인 복이 자꾸 중심으로 올라오면 경계해야 합니다. 건강, 물질, 성공, 자녀의 형통은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장자권을 가진 사람이라는 증거가 아닙니다. 4부에서 살펴보았듯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의 최종 목적은 사람을 자연계에서 가능한 한 성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에게는 성공이 허용되고 다른 사람에게는 실패가 허용될 수도 있습니다. 자연적인 결과만 가지고 주님의 복을 측정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놓치면 장자권 신앙은 매우 고통스러운 역설을 만들 수 있습니다. 열심히 믿었는데 자녀가 잘되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장자권을 붙들고 기도했는데 사업이 망하면 어떻게 합니까? 병이 낫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사랑하는 가족이 일찍 세상을 떠나면 어떻게 합니까? 그때 ‘장자권을제대로행사하지못했다’, ‘믿음이부족했다’, ‘무엇인가영적원리를어겼다’는 설명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복음이 오히려 사람을 짓누르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섭리는 그런 공식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장자권의 ‘두몫’을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한다면 ‘두배의소유’보다 ‘더큰쓰임’으로 읽는 편이 좋다고 봅니다. 먼저 받은 사람은 먼저 섬깁니다. 많이 배운 사람은 많이 가르치기 전에 먼저 많이 살아야 합니다. 재물이 많은 사람은 그만큼 더 넓은 쓰임의 가능성을 갖습니다. 권위가 있는 사람은 더 큰 책임을 집니다. 부모는 자녀보다 먼저 태어났기 때문에 지배자가 아니라 돌보는 사람이 됩니다. 목회자는 성도보다 높은 계급이기 때문에 목회자가 아니라 말씀과 사람을 섬기는 쓰임을 맡았기 때문에 목회자입니다.
그렇게 읽으면 ‘장자’라는 말이 오히려 무거워집니다. 장자가 되려고 경쟁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장자권이 특권이 아니라 책임이라면 ‘내가장자다’라고 주장하는 것보다 ‘내가먼저섬기겠다’고 하는 것이 장자의 실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천국의 첫째 자리 역시 바로 이런 역설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제사’ 문제 역시 마지막으로 이 기준에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영환 목사가 제사문화를 강하게 비판하는 배경에는 ‘예배의대상은오직하나님이어야한다’는 신앙적 의도가 있습니다. 그 핵심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사음식을먹은장자들이일찍죽었다’는 식의 경험적 주장은 별도로 검증되어야 하며, 신학적 확신과 역사적 인과관계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죽은 조상을 기억하고 존경하는 것과 그들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도 구별합니다. 외적 형식만 보지 않고 그 행위 안의 애정과 목적을 살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영적전쟁’ 역시 장자권과 결합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 천사와 악한 영들의 실재를 매우 분명하게 말합니다. 인간에게 영계로부터 유입이 있다는 것도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모든 실패와 질병과 가정 문제를 어떤 특정한 영이나 조상에게 연결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유가 보존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악한 영이 있다고 해서 ‘내가악을행한책임’을 악한 영에게 넘길 수 없습니다. 선한 천사가 있다고 해서 ‘내가선하다’고 자랑할 수도 없습니다. 선의 근원은 주님이고 악은 인간이 자기 것으로 만든 proprium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장자권의 회복도 어떤 특별한 영적 선언 한 번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거듭남’이라는 긴 과정이 필요합니다. 오늘 진리를 하나 배우고, 그 진리의 빛으로 자기 안의 악 하나를 발견하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실제로 피하고, 그 자리에 반대되는 선을 행합니다. 그리고 또 넘어지고 다시 일어섭니다. 그렇게 수없이 많은 상태를 지나면서 주님께서 사람의 내적 질서를 조금씩 바꾸십니다.
그러므로 ‘장자권회복’이라는 말을 굳이 스베덴보리식으로 번역한다면 저는 ‘질서의회복’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물론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직접 ‘장자권회복=질서의회복’이라는 용어로 정의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전체 교리를 바탕으로 오늘의 장자권 담론을 재해석한 표현입니다. 내 안에서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 아래 놓이고, 거짓이 진리에 의해 밝혀지고, 진리가 선을 섬기며,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하고, 자기애가 쓰임의 사랑 아래 놓이고, 궁극적으로 모든 것이 주님의 통치 아래 배열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장자권’이라는 말을 사용해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아주 깊은 말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무엇을더받을까?’가 먼저 떠오르느냐, ‘내안에서무엇이첫째가되어야할까?’가 먼저 떠오르느냐입니다. 전자는 자연적인 장자권의 욕망으로 내려가기 쉽고, 후자는 거듭남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영환 목사의 장자권 가르침에서 가장 귀하게 건질 수 있는 부분도 바로 이 방향이라고 봅니다. ‘내세대에서끝내지말자. 다음세대를생각하자. 받은것을전하자. 먼저선사람이책임을감당하자.’ 이런 정신은 버릴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오늘날 개인주의적인 신앙에 필요한 부분도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가문의특별한영적권리’에서 떼어 내고 ‘선과진리를다음세대에삶으로전달하는책임’으로 바꾸면 훨씬 깊어집니다.
그러면 장자선교회의 ‘장자’도 새로운 의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남들과다른특별한장자들이다’가 아니라 ‘우리가먼저들었으니먼저살자’입니다. ‘우리가장자의복을받자’가 아니라 ‘먼저받은만큼먼저섬기자’입니다. ‘우리자녀에게장자권을물려주자’가 아니라 ‘우리자녀가주님을자유롭게선택할수있도록우리가먼저선과진리를살아보여주자’입니다. 이렇게 바뀐다면 장자라는 이름은 우월성의 이름이 아니라 책임의 이름이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렌즈’가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면서도 가르침을 분별하는 이유가 드러납니다. 이영환 목사의 내면이 어떠한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오랜 목회 가운데 어떤 사랑으로 장자권을 가르쳤는지, 주님 앞에서 그 사역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도 우리가 최종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말한 내용은 말씀 앞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 안에 진리가 있다면 받아들이고, 자연적 의미에 머문 부분은 영적으로 더 깊게 읽고, 충분한 근거가 없는 주장은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됩니다. 사람을 버리지 않으면서 오류를 분별하고, 오류를 발견했다고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으며, 진리를 발견했다고 그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두 문장을 붙들면 장자권을 지나치게 높일 필요도, 반대로 장자권이라는 성경의 귀중한 표상을 버릴 필요도 없습니다. 장자권은 그 자체가 목적지가 아니라 주님께로 향하게 하는 하나의 표지판이 됩니다. 그 표지판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나의권리’에서 ‘주님의질서’로, ‘나의복’에서 ‘이웃을위한쓰임’으로, ‘내가문의특별함’에서 ‘모든사람을향한주님의섭리’로, ‘신앙의우월성’에서 ‘신앙과체어리티의결합’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자리에서 우리는 다시 아벨의 ‘양의첫새끼’를 만나게 됩니다. ‘처음난것’은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사랑도 주님에게서 오고, 그 사랑에서 살아나는 신앙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장자권의 완성은 결국 ‘내가장자권을얻었다’는 선언이 아니라 ‘주님, 처음것도마지막것도모두주님의것입니다’라는 고백일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영환 목사의 ‘장자권’이라는 긴 가르침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과하면서 아주 뜻밖의 자리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장자가되어라’에서 출발했지만 마지막에는 ‘참된장자는오직주님이시다’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남는 것은 장자의 특권이 아니라 ‘먼저받은만큼먼저사랑하고, 먼저섬기며, 먼저살아내는쓰임’입니다. 저는 바로 그 지점에 이 영상에서 건져 올릴 수 있는 가장 깊고 아름다운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미르사바 수도원을 바라보며 가장 깊이 주목하는 것은 ‘침묵’입니다. 영상 앞부분에는 물이 솟아난 이야기, 수도원 설립자 사바의 유해에서 향기가 난다는 이야기, 병자의 치유와 기도 응답 같은 여러 기적 이야기가 등장하지만, 정작 강문호 수도사가 이 수도원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붙드는 것은 그것들이 아닙니다. ‘침묵은말안하는게침묵이아니고,하나님의음성을듣는것이침묵입니다.’ 이 한 문장이 사실상 영상 전체의 중심입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보아도 이번 영상에는 상당히 귀하게 받아들일 만한 것이 있습니다. 다만 그 침묵을 단순히 ‘말하지않는수도규칙’에서 ‘의지와생각까지주님앞에서잠잠해지는내적상태’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영상에 소개되는 미르사바 수도원의 극단적인 자연환경은 수도생활의 외적 모습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찾아보기 어려운 유대광야의 절벽 사이에서 사람들이 오랜 세월 기도하며 살아왔다는 사실 자체는 깊은 인상을 줍니다. 세상의 소음과 편의를 뒤로하고 하나님께 집중하려 했던 사람들의 열망을 가볍게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광야의 진정한 의미는 단순히 사람이 없는 지리적 공간에 있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광야’는 흔히 진리와 선이 결핍된 상태, 또는 시험과 준비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실제 유대광야에 들어갔다고 해서 자동으로 내적 광야를 통과하는 것은 아닙니다. 서울 한복판에서도 자신의 악과 거짓을 직면하며 주님을 찾는 사람은 영적 광야를 통과할 수 있고, 반대로 깊은 수도원 안에서도 자기 생각과 자기 의로 가득하다면 내적으로는 아직 광야의 의미를 배우지 못할 수 있습니다.
영상에 소개되는 세 가지 ‘기적’에 대해서도 같은 원칙이 필요합니다. 수도원을 세운 뒤 많은 사람이 사용할 만큼 물이 솟아났다는 이야기, 사바의 유해에서 향기가 난다는 이야기, 그곳에서 병자가 치유되고 수많은 기도 응답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오랜 수도원 전승과 신앙적 증언의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것들을 모두 사실이라고 확정해야 수도원의 영적 가치가 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역사적으로 하나하나 입증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수도원에서 수많은 사람이 드린 기도와 헌신까지 무가치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 중요한 것은 기적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사람을 어디로 이끄느냐입니다. 기적을 보고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악에서 돌아선다면 선한 쓰임이 있지만, 기적 자체를 신앙의 중심으로 삼거나 특별한 장소와 사람의 영적 권위를 입증하는 증거로 사용하기 시작하면 오히려 본질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영상이 세 가지 기적을 지나 마침내 ‘침묵’으로 들어가는 것은 오히려 의미가 있습니다. ‘말을배우는데는3년이걸리고침묵을배우는데는50년이걸린다’는 수도원의 격언은 인간의 영적 현실을 상당히 정확하게 건드립니다. 사람은 말을 배우는 것보다 자기 말을 멈추는 것을 훨씬 어려워합니다. 더욱이 입술만 멈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옳다’, ‘내생각을알아주어야한다’, ‘내가설명해야한다’, ‘내가판단해야한다’는 내면의 목소리를 멈추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외적 침묵은 내적 침묵을 위한 좋은 훈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다시 한 단계 깊어집니다. ‘하나님의음성을듣는다’는 것은 반드시 귀에 어떤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무엇보다 말씀의 진리를 통해 인간의 이해성(understanding), 즉 이해하는 능력을 밝히시고, 그 진리를 삶에 적용하려는 사람의 의지(will)를 이끄십니다. 따라서 참된 침묵은 단순히 주변의 소리를 차단하여 어떤 신비한 음성을 기다리는 상태라기보다, 자신의 proprium에서 올라오는 욕망과 자기합리화와 자기주장을 잠잠하게 하고, ‘주님의진리는무엇을말씀하는가’를 받아들이는 상태에 가깝습니다.
이렇게 보면 ‘침묵에는두가지가있다. 하나는말하지않는것이고,다른하나는듣지않는것이다’라는 영상 속 표현도 흥미로워집니다.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이면 세상과 단절하라는 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읽으면 매우 깊어질 수 있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외부에서 들어오는 말과 자신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말에 영향을 받습니다. 명예욕, 경쟁심, 정욕, 탐욕, 분노, 자기연민, 자기과시를 부추기는 소리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일종의 ‘듣지않는침묵’입니다. 모든 소리를 듣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들을것인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질서에 반하는 소리에는 귀를 닫고, 선과 진리를 향해서는 귀를 여는 것입니다.
영상에서 소개되는 ‘필요한말은짧게낮은목소리로하라’, ‘병자를위로하고봉사하기위한말은할수있다’는 원칙도 특히 눈에 들어옵니다. 여기에는 침묵의 목적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있습니다. 만일 침묵 그 자체가 최고의 덕이라면 병자를 위로하는 말도 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고통받는 사람을 위한 말에는 침묵의 규칙보다 우선권을 줍니다. 이것은 결국 ‘체어리티’가 외적 규율보다 위에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말하지 않는 것이 이웃에게 유익하면 침묵하고, 말하는 것이 이웃에게 유익하면 말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중요한 것은 ‘내가말을했는가, 하지않았는가’가 아니라 ‘그말과침묵이어떤사랑에서나왔는가’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도 매우 잘 만납니다. 말 자체는 인간 내면의 표현입니다. 같은 침묵이라도 사랑에서 나온 침묵과 미움에서 나온 침묵은 전혀 다릅니다. 누군가에게 화가 나서 입을 닫고 냉랭하게 외면하는 것도 침묵이고, 상대방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기 위해 말을 삼키는 것도 침묵입니다. 외적으로는 똑같이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하나는 악에서 나온 침묵이고, 다른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나온 침묵입니다. 반대로 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말을 하더라도 이웃을 살리고 진리를 전하며 위로하기 위한 말이라면 선한 쓰임이 될 수 있고, 몇 마디 하지 않더라도 상대를 깎아내리고 자신을 높이는 말이라면 악한 쓰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혀가길면안된다’는 수도원의 가르침도 단순히 말을 적게 하라는 규칙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야고보서가 혀를 작은 지체이면서도 큰 불을 일으킬 수 있는 것으로 말하듯, 인간의 말에는 그 사람의 내면이 흘러나옵니다. 하지만 입술만 통제한다고 내면이 정결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미움을 품고 있으면서 말하지 않는다고 미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교만하면서 입을 다문다고 교만이 겸손으로 변하는 것도 아닙니다. 참된 거듭남에서는 ‘악한말을하지않는단계’를 지나 ‘왜그런말을하고싶어하는가’를 살피게 됩니다. 결국 주님께서 다루시는 것은 혀보다 그 혀를 움직이는 사랑입니다.
영상 후반의 ‘최고의달변은말없음’이라는 표현도 이런 관점에서 읽으면 좋겠습니다. 침묵을 말보다 우월한 영적 행위로 절대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때로 침묵하셨지만 때로는 가르치셨고, 책망하셨고, 위로하셨고,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말없는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쓰실수있는입술’을 갖는 것입니다. 말해야 할 때 말하고,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하는 것입니다. 그 기준은 내 기분이나 체면이 아니라 선과 진리, 그리고 이웃의 유익입니다. 이것이 침묵을 ‘쓰임’의 관점에서 보는 방법입니다.
이 때문에 저는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마지막에 ‘이런거룩한수도원들이우리나라에도많이생겼으면좋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부분도 조금 다르게 확장해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실제 수도원이 많이 생기는 것도 하나의 쓰임이 될 수 있습니다. 바쁜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이 잠시 세상의 소음을 떠나 기도하고 말씀을 읽으며 자신을 돌아볼 공간은 분명 필요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더 중요한 것은 ‘수도원의숫자’가 아니라 ‘수도원의정신이사람안에서어떻게살아나는가’입니다.
어쩌면 수도원의 가장 깊은 형태는 건물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세워져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루 종일 세상에서 일하고 사람을 만나며 가족을 돌보는 사람도 자기 안에 작은 ‘침묵의방’을 가질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말을 듣다가 즉시 반박하고 싶을 때 잠시 멈추는 것, 다른 사람의 허물을 말하고 싶을 때 입을 닫는 것, 자신의 공을 드러내고 싶을 때 그것을 주님께 돌리는 것, 분노가 올라올 때 바로 말하지 않고 자신의 의도를 살피는 것, 그리고 말씀 앞에서 ‘내생각이무엇인가’보다 ‘주님께서무엇을원하시는가’를 먼저 묻는 것, 이것들이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수도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 침묵의 가장 깊은 적은 단순한 수다가 아니라 ‘proprium의목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proprium은 끊임없이 자신을 변호하고, 자신의 공을 세우고,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합니다. 입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마음속에서는 하루 종일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외적 침묵보다 훨씬 어려운 것이 내적 침묵입니다. 그리고 그 내적 침묵은 생각을 없애는 무념무상의 상태가 아니라, 자기중심적 의지가 주님의 선과 진리 앞에서 한 걸음 물러나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보면 미르사바 수도원의 오랜 침묵 전통은 우리에게 매우 좋은 하나의 ‘표지판’이 됩니다. 그러나 표지판 자체가 목적지는 아닙니다. 침묵은 거룩함 그 자체가 아니라 거룩함을 향하도록 도울 수 있는 그릇이며, 수도원은 천국 그 자체가 아니라 천국의 질서를 배우도록 도울 수 있는 학교입니다. 결국 사람이 배워야 하는 것은 ‘말하지않는법’만이 아니라 ‘내말을내려놓고,주님의말씀을받아들이는법’입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의 마지막 질문은 ‘나는얼마나오래침묵할수있는가?’보다 이것이면 좋겠습니다. ‘나는내안에서끊임없이말하고있는proprium의목소리를얼마나분별하고있는가?’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는침묵속에서들은주님의진리를이웃을향한선한쓰임으로살아내고있는가?’입니다. 침묵 끝에 체어리티가 없다면 그것은 아직 완성된 침묵이 아닙니다. 그러나 침묵을 통해 자기주장이 낮아지고, 다른 사람의 말을 더 잘 듣게 되고, 판단이 줄어들며, 필요한 때에는 상처 입은 사람에게 따뜻한 한마디를 건넬 수 있게 된다면, 그 침묵은 이미 거듭남을 섬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미르사바 수도원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도 결국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세상의소리를얼마나완벽하게차단했는가’가 아니라 ‘자기의소리를낮추어주님의음성을듣고, 들은것을삶으로옮길수있는가.’ 1,500년 넘게 이어진 광야의 침묵보다 더 깊은 침묵은 바로 인간의 proprium이 주님 앞에서 잠잠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침묵에서 다시 나오는 말이라면, 많든 적든 누군가를 살리고 위로하며 주님의 선과 진리를 전하는 말이 될 것입니다.
앞의 신성종 목사의 설교를 ‘스베덴보리의렌즈’로 살펴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이 죽은 뒤 다시 자연적 육체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함께 영계에서 영적 몸으로 깨어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바울은 왜 고린도전서15장에서 마치 죽은 육체가 장차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말했을까요? ‘죽은자들이어떻게다시살아나며어떠한몸으로오느냐’는 질문에 씨앗을 예로 들고, ‘썩을것으로심고썩지아니할것으로다시살아나며’, ‘육의몸으로심고신령한몸으로다시살아난다’고 말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 문제를 다룰 때 가장 먼저 조심해야 할 것은 ‘그러면바울이틀렸다는말인가?’라고 너무 빨리 결론짓는 것입니다. 반대로 ‘바울도사실스베덴보리와완전히똑같은사후세계관을가르쳤다’고 만드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15장을 쓴 역사적 상황과 목적을 먼저 살펴보고, 그가 무엇을 말하려 했으며 무엇까지 말하지 않았는지를 구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고린도전서15장의 직접적인 문제는 바울 자신이12절에서 밝힙니다. ‘그리스도께서죽은자가운데서다시살아나셨다전파되었거늘너희중에서어떤사람들은어찌하여죽은자가운데서부활이없다하느냐.’ 여기서 고린도교회 일부 사람들이 부인하고 있었던 것은 일차적으로 그리스도의 부활 자체라기보다 ‘죽은자의부활’이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이 장에서 가장 먼저 지키려고 했던 것은 사후세계의 세밀한 구조나 부활의 물리적 메커니즘이 아니라 ‘죽음이인간의생명을끝내지못한다’, ‘그리스도의부활과그분에게속한사람들의부활은분리될수없다’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소망이었습니다.
이 점을 놓치면 고린도전서15장을 마치 ‘마지막날무덤속시체가어떤과정을거쳐다시만들어지는가’를 설명하는 장처럼 읽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바울은 그런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그는 흩어진 뼈와 육체의 원소가 어떻게 다시 모이는지 말하지 않고 오히려 ‘씨앗’을 이야기합니다. ‘네가뿌리는것은장래형체를뿌리는것이아니요다만밀이나다른것의알맹이뿐이로되하나님이그뜻대로그에게형체를주시되각종자에게그형체를주시느니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분명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함께 있습니다. 심어진 것과 나타나는 것이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심어진 바로 그 형체가 그대로 되돌아오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바울의 씨앗 비유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도토리를 땅에 심었는데 나중에 땅에서 거대한 참나무가 올라왔다고 합시다. 도토리와 참나무는 모양도, 크기도, 기능도 전혀 다릅니다. 그렇다고 참나무가 그 도토리와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의 연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비유를 통해 부활을 단순한 ‘원상복구’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그뜻대로그에게형체를주신다’고 합니다.
더욱 주목할 구절은44절입니다. ‘육의몸으로심고신령한몸으로다시살아나니육의몸이있은즉또신령한몸도있느니라.’ 여기서 바울은 ‘몸’과 ‘영혼’을 대조하지 않습니다. 헬라어로 양쪽 모두 ‘소마(sōma)’, 곧 ‘몸’입니다. ‘소마프쉬키콘(sōmapsychikon)’과 ‘소마프뉴마티콘(sōmapneumatikon)’, 곧 한 종류의 몸과 다른 종류의 몸을 대조합니다. 따라서 바울이 말하는 부활은 ‘몸을버리고몸없는영혼이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이 점에서는 신성종 목사의 지적도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그는 ‘신령한몸’을 흐릿하고 비물질적이며 유령 같은 무엇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 이해와도 중요한 접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사후의 인간을 몸 없이 떠다니는 의식이나 그림자 같은 존재로 설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사후에도 완전한 인간이며, 인간의 형상을 가진 영적 몸으로 보고, 듣고, 말하고, 걷고, 다른 사람들과 만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지점에서 전통적인 육체 부활론과 스베덴보리의 설명이 갈라집니다. ‘신령한몸’이 있다는 것과 ‘무덤에들어간자연적육체가먼훗날다시살아나그신령한몸으로변한다’는 것은 같은 명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15장에서 전자를 강하게 말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후대 기독교가 그 말씀을 바탕으로 발전시킨 ‘마지막날시체의재결합과육체부활’이라는 구체적인 그림까지 바울이 이 장에서 모두 설명했다고 보아야 하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특히 고린도전서15장50절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혈과육은하나님나라를이어받을수없고또한썩는것은썩지아니하는것을유업으로받지못하느니라.’ 바울 자신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연적 상태의 ‘혈과육’이 그대로 하나님 나라를 상속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썩을것이썩지아니함을입고죽을것이죽지아니함을입어야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15장의 중심을 단순히 ‘현재의물질적육체가다시돌아온다’는 명제로 축소하면 바울 자신의 언어가 가진 훨씬 풍부한 긴장을 놓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설명이 매우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스베덴보리도 ‘부활’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인간이 죽음 후에 부활한다고 매우 분명하게 말합니다. 다만 ‘무엇이부활하는가?’와 ‘언제부활하는가?’에 대한 설명이 전통적인 육체 부활론과 다릅니다. 부활하는 것은 무덤 속에 남겨진 자연적 육체가 아니라 ‘그사람자신’이며, 그 부활은 수천 년 뒤 우주의 마지막 날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죽은 뒤 자연계에서 영계로 깨어날 때 일어납니다. 자연적 육체는 자연계에 남지만 사람 자신은 영적 몸으로 영계에서 계속 살아갑니다.
이렇게 보면 ‘몸은소중하다’는 말과 ‘자연적육체가다시살아나야한다’는 말을 반드시 동일시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연적 몸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체어리티와 쓰임을 행하도록 주어진 귀한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몸을 악한 것, 영혼을 가두어 놓은 감옥, 아무 가치 없는 껍데기로 여기는 것은 기독교적인 인간 이해와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연적 몸이 귀하다는 사실이 곧 그 몸의 물질이 영원히 보존되거나 마지막 날 다시 조립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연적 몸은 자연계에 속하고, 영적 몸은 영계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신성종 목사의 설교에 등장하는 ‘화장하면어머니의몸은나중에어떻게부활합니까?’라는 질문에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조금 다른 대답을 할 수 있습니다. 화장하든 매장하든 어머니 자신에게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어머니 자신이 그 자연적 육체 속에 남아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연적 몸은 자연계에 남겨지지만 그 사람 자신은 이미 영적 몸으로 영계에서 깨어납니다. 그러므로 화장이 부활을 방해할 수도 없고, 매장이 부활을 더 안전하게 보장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이것을 ‘사람은죽는즉시영계에서영적몸으로깨어난다’고 스베덴보리처럼 명료하게 설명하지 않았을까요? 여기서는 바울 서신의 성격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독특한 이해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도들의 서신을 모세오경과 예언서, 복음서와 계시록처럼 연속적인 내적 의미, 곧 아르카나가 들어 있는 ‘말씀’과 동일한 범주에 두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사도서신을 무가치하거나 잘못된 글이라고 보는 것도 아닙니다. 사도들은 초기 기독교회를 세우고 사람들에게 주님에 대한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을 가르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을 영계의 구조와 사후 인간의 상태를 완전히 계시받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사람으로 읽기보다는, 당시 교회가 처한 문제 속에서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언어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가르치는 사도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고린도전서15장에서 바울의 가장 큰 관심은 ‘죽은뒤정확히몇단계의상태를거쳐천국에들어가는가?’가 아닙니다. 그의 관심은 ‘죽음이끝이라고생각하지말라.그리스도께서살아나셨으며너희도그분안에서살아날것이다.그러므로지금주안에서살아가는너희의삶은헛되지않다’는 데 있습니다.
실제로 바울 자신의 다른 글들을 보면 사후 상태에 관한 표현이 언제나 하나의 완성된 조직신학 체계처럼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고린도후서에서는 ‘몸을떠나주와함께거하는것’을 말하고, 빌립보서에서는 ‘떠나서그리스도와함께있을욕망’을 말합니다. 이런 표현들은 죽은 사람이 아주 먼 미래의 부활 때까지 사실상 아무런 삶도 없이 기다린다는 그림과는 잘 맞지 않습니다. 반면 고린도전서15장과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미래의 부활과 주님의 오심이라는 종말론적 언어를 강하게 사용합니다. 후대 기독교 신학은 이러한 여러 표현을 종합하여 ‘죽음→영혼의중간상태→마지막날→육체부활’이라는 체계를 세웠지만, 그 완성된 체계를 그대로 바울 자신의 명시적인 설명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사실스베덴보리와똑같은사후세계관을가지고있었는데표현만다르게했다’고 주장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역사적 바울에게 스베덴보리의 계시를 거꾸로 투영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당시 유대교의 부활 신앙과 초기 기독교의 종말론적 언어 속에서 말하고 있으며, 스베덴보리는 훨씬 후대에 사후 인간의 깨어남, 영적 몸, 중간영계, 천국과 지옥의 상태 등을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둘 사이에는 실제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균형 있게 말한다면 이렇습니다. ‘바울은부활이라는진리를강력하게가르쳤지만,사후세계의메커니즘전체를밝힌것은아닙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15장에서 붙들고 있는 핵심은 인간이 죽음으로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 주님의 부활이 우리의 생명과 분리된 사건이 아니라는 것, 부활한 인간에게는 ‘몸’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몸은 지금의 썩고 약하고 죽는 자연적 상태와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부활’과 ‘영적몸’이 실제로 무엇이며 인간에게 언제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훨씬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고린도전서15장의 씨앗 비유도 새로운 의미로 다가옵니다. 씨앗과 나무 사이에는 분명한 연속성이 있지만 동일한 외적 형체가 반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적 몸과 영적 몸 역시 동일한 물질의 재조립이라는 의미에서 하나가 아닙니다. 그러나 죽기 전의 사람과 죽은 뒤의 사람이 서로 다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사람’이라는 인격과 생명의 연속성은 그대로 이어집니다. 죽음은 한 인간을 없애고 나중에 복제품을 만드는 사건이 아니라 자연계에서의 삶이 영계에서의 삶으로 이어지는 경계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고린도전서15장의 마지막58절이 매우 중요해집니다. ‘그러므로내사랑하는형제들아견실하며흔들리지말고항상주의일에더욱힘쓰는자들이되라이는너희수고가주안에서헛되지않은줄앎이라.’ 바울은 부활에 관한 긴 논의를 ‘그러므로죽은뒤의일을많이연구하라’로 끝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지금주의일에힘쓰라’고 끝냅니다. 사후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현재의 삶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와 쓰임의 가르침과도 깊이 만납니다. 사람이 영원으로 가지고 가는 것은 자연적 육체를 구성했던 물질이 아니라 그가 세상에서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을 의도했으며, 그 사랑을 어떻게 실제 삶의 쓰임으로 나타냈는가 하는 그의 내적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병든 사람을 돌본 손,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을 건넨 손, 교회와 가정과 사회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묵묵히 감당한 손으로 행한 사랑은 헛되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그 손 자체가 영원히 보존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손을 움직였던 사랑과 의도와 삶이 그 사람 자신 안에 영원히 남기 때문입니다.
결국 고린도전서15장을 ‘스베덴보리의렌즈’로 읽는다는 것은 바울을 틀렸다고 버리는 것도 아니고, 바울의 모든 표현을 억지로 스베덴보리와 일치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이 당시 고린도교회를 향해 증언한 부활의 핵심 진리를 먼저 존중하고, 그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은 사후세계의 실상을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통해 더 깊이 살펴보는 것입니다.
바울의 외침은 분명합니다. ‘죽음이끝이아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매우 구체적인 설명을 더합니다. ‘그렇습니다.사람은죽음과함께사라지는것이아니라영계에서영적몸을지닌완전한인간으로깨어납니다.’ 그리고 두 가르침은 마침내 삶을 향한 한 질문 앞에서 만납니다. ‘그렇다면나는오늘어떻게살아야하는가?’
그 답 역시 고린도전서15장의 마지막에 이미 놓여 있습니다. ‘너희수고가주안에서헛되지않은줄앎이라.’ 죽음 이후에도 생명이 계속되기 때문에 오늘의 사랑이 중요하고, 영원이 있기 때문에 지금의 체어리티와 쓰임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부활에 관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쩌면 ‘내몸의물질이마지막날어떻게다시모일것인가?’가 아니라 ‘영원으로이어질오늘의삶을나는어떤사랑으로살아가고있는가?’일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설교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신성종 목사가 죽음을 ‘교리문제’로 시작하지 않고 ‘사람의두려움’에서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화장장에서 어머니의 유골함을 받아 든 아들이 ‘이렇게다태웠는데나중에부활할때어머니몸은어떻게됩니까?’라고 묻자, 그는 그 질문의 밑바닥에 ‘내가어머니한테몹쓸짓을한것은아닙니까?’라는 죄책감이 있음을 알아차립니다. 이것은 목회적으로 매우 중요한 통찰입니다. 사람이 죽음 앞에서 묻는 질문은 표면적으로는 신학적이어도 실제로는 사랑, 상실, 죄책감, 두려움의 언어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좋은데가셨어요’, ‘천국가셨으니너무슬퍼하지마세요’라는 말이 실제 유가족에게 별 위로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그의 고백도 진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이런 태도는 충분히 귀하게 볼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는 먼저 상대방의 실제 상태를 살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죽음이두렵다고해서신앙이없는것은아니다’, ‘슬퍼하지말라는것이아니라소망없는사람처럼슬퍼하지말라는것이다’, ‘예수께서도나사로의무덤앞에서우셨다’는 설교 후반의 권면도 좋습니다. 신앙을 인간의 자연적 정서 자체를 억압하는 도구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육체를 입고 자연계에 사는 동안 사람에게 죽음은 이별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눈앞에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슬픔 자체가 신앙의 실패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 슬픔이 절망으로 닫히느냐, 아니면 주님을 향한 신뢰 가운데 통과되느냐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성종 목사의 ‘무섭지않은것이믿음이아니라무서운데도손을놓지않는것이믿음’이라는 표현은 목회적으로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설교는 여기서부터 스베덴보리와 매우 중요한 갈림길에 들어섭니다. 신성종 목사는 고린도전서 15장을 통해 ‘몸은버려지는껍데기가아니다’라는 명제를 세우고, 당시 헬라 철학의 영혼-육체 이원론을 비판합니다. 그는 ‘육신의옷을벗고하늘나라로갔다’, ‘몸은껍데기이고,진짜는영혼이다’ 같은 기독교 장례식의 익숙한 표현 안에 사실 헬라적 사고가 들어 있다고 지적합니다. 여기까지는 상당히 생각해 볼 만한 문제 제기입니다. 인간을 영혼이라는 ‘진짜인간’과 아무 가치 없는 육체라는 ‘껍데기’로 단순 분해하는 사고는 분명 조심해야 합니다. 자연계의 몸 역시 주님이 인간에게 주신 것이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랑하고 섬기고 일하고 체어리티를 실천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제3의 길이 열립니다. 그것은 ‘물질적몸이껍데기가아니므로그물질적몸이다시살아나야한다’도 아니고, ‘물질적몸은아무가치가없고영혼만진짜다’도 아닙니다. 인간은 사후에도 완전한 인간이며, 몸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다만 그 몸은 이 자연계의 물질로 이루어진 몸이 아니라 영계의 실체에 상응하는 ‘영적몸’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 자연계의 육체는 자연계에 남겨 두지만, 그 사람 자신은 몸 없는 의식이나 구름 같은 영혼이 되어 떠도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사람의 형상을 그대로 지닌 영으로 깨어나고, 보고 듣고 말하고 걷고 사람을 만나며 살아갑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영계에서의 인간이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처음에는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삶의 연속성을 경험한다고 거듭 설명합니다.
이 점에서 신성종 목사가 ‘신령한몸’을 ‘유령같은비물질적인무엇’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 것은 뜻밖에도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가까운 지점까지 옵니다. 차이는 그다음입니다. 신성종 목사는 그 ‘신령한몸’을 마지막 날 현재의 육체가 변화하여 얻는 몸으로 이해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죽는 순간 자연적 몸을 벗고 이미 영적 몸으로 영계에 들어간다고 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는 수천 년 동안 무덤 속에서 몸의 부활을 기다리는 영혼이라는 상태가 없습니다. 아담 시대의 사람도, 오늘 죽은 사람도 사후에는 영계에서 인간으로 살아갑니다. 마지막 날에 무덤으로 돌아와 옛 물질을 다시 모아 몸을 만드는 과정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설교의 출발점이 된 ‘화장하면나중에어머니의몸은어떻게됩니까?’라는 질문에 스베덴보리는 신성종 목사보다 훨씬 더 직접적으로 대답했을 것입니다. ‘화장하든매장하든어머니자신에게는아무차이가없습니다. 어머니는그육체속에남아계시지않기때문입니다.’ 자연적 육체는 이 자연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잠시 입었던 몸이며, 죽음과 동시에 인간 자신은 영적 몸으로 영계에서 깨어납니다. 따라서 화장은 부활을 어렵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애초에 사후의 인간이 다시 사용해야 할 몸을 훼손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매장된 시신도 다시 필요한 것이 아니고, 화장된 재도 다시 모을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설교의 ‘씨앗’ 비유도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다르게 읽힙니다. 신성종 목사는 고린도전서 15장의 ‘썩을것으로심고썩지아니할것으로다시살아나며’를 장례와 미래의 육체 부활로 연결합니다. ‘어머니는지금땅에심겨있는거네요’라는 유가족의 말은 이 설교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입니다. 목회적 위로로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정확히 말해 ‘어머니가땅에심겨있는것’이 아닙니다. 땅에 있는 것은 어머니가 자연계에서 사용하던 육체입니다. 어머니 자신은 이미 영계에서 깨어나 삶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 정확한 위로는 ‘어머니는사라진것도아니고,땅속에서기다리고있는것도아닙니다. 이미다른세계에서사람으로살아계십니다’가 될 것입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사후세계 이해 전체를 바꿉니다. 전통적 육체 부활론에서는 ‘죽음→영혼의중간상태→마지막날→육체부활’이라는 구조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집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죽음→영계에서깨어남→중간영계에서내면이드러남→자신의지배적사랑에따라천국또는지옥으로들어감’이라는 흐름입니다. 따라서 부활은 먼 미래에 있을 사건만이 아니라 죽음과 함께 인간에게 실제로 일어나는 사후의 깨어남과 깊이 연결됩니다. 이것은 유가족에게 주는 위로의 내용까지 크게 달라지게 합니다. ‘언젠가다시살아날것입니다’보다 ‘그사람은지금도주님의섭리아래존재하며살아있습니다’라는 쪽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더욱 세심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신성종 목사는 부활하신 예수가 만져질 수 있었고, 음식을 드셨으며, 못 자국도 있었다는 사실을 들어 우리의 미래 부활 몸 역시 이와 같은 물질적 몸이라는 논증을 펼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부활은 일반 인간의 사후 과정과 동일한 사례가 아닙니다. 주님은 인간처럼 자연적 몸을 버리고 영으로 살아난 분이 아니라, 지상 생애 동안 인성을 신성과 하나 되게 하시는 영화의 과정을 완성하시고, 신적 인성(Divine Human)으로 부활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무덤에 주님의 몸이 남아 있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일반 인간의 죽음과 다릅니다. 이것을 모든 인간의 시체가 마지막 날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직접적인 모델로 삼으면 스베덴보리의 기독론과 사후세계론에서는 중요한 구별 하나가 사라집니다.
그렇다고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보이고 만져지고 함께 음식을 드신 사건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영적인것은물질적이지않으므로실체도없다’는 우리의 자연적 선입견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영계는 희미하고 추상적인 의식의 세계가 아닙니다. 그곳에는 사람, 집, 길, 공동체, 산과 들, 식물과 수많은 환경이 있으며, 사람들은 서로 보고 말하고 살아갑니다. 그것들은 자연계 물질이 아니라 영적 실체와 그 상응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몸이없으면어떻게서로알아봅니까?’라는 질문 자체가 스베덴보리에게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영들은 몸 없는 영혼들이 아니라 사람의 형상을 지닌 인간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머니를다시만나면알아볼수있습니까?’라는 설교 속 질문에도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매우 적극적입니다. 알아볼 수 있습니다. 다만 천국에서의 재회는 단순히 얼굴을 기억하여 알아보는 차원을 넘어섭니다. 영계에서는 사람의 내면이 외면에 더욱 직접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자연계에서는 몸과 사회적 역할과 여러 외적 조건이 사람의 내면을 가릴 수 있지만, 영계에서는 점차 그 사람의 지배적 사랑과 실제 성품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진정한 결합은 단순한 혈연만으로 영원히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내적 사랑과 삶의 상태가 서로 조화를 이루느냐와 관계됩니다. 이 부분은 ‘죽으면가족이모두그대로모여영원히함께산다’는 식의 단순한 위로와는 구별해야 합니다.
설교에서 또 하나 크게 갈라지는 부분은 요한계시록 21장의 ‘새하늘과새땅’입니다. 신성종 목사는 ‘성경의마지막그림은우리가하늘로올라가는것이아니라하늘이내려오는것’이라며, ‘새로워진몸을입은우리가새로워진땅에서하나님과함께사는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흙냄새, 밥 짓는 냄새, 손을 잡는 감촉, 함께 밥 먹는 시간 같은 자연적 삶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정서적으로 매우 따뜻하고 매력적인 그림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새하늘과새땅’ 해석은 이것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새하늘과새땅’은 물질 우주가 폐기되고 새로운 물질 지구가 만들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영계에서 이루어지는 새 하늘과 그에 상응하여 자연계에 세워지는 새로운 교회, 곧 새로운 영적 질서를 가리킵니다. ‘새예루살렘’ 역시 하늘에서 물리적으로 내려오는 거대한 도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새 교회의 교리와 삶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설교에서 가장 조심해서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천국은결국새로워진지구이며,우리는부활한물질적몸으로그곳에서다시산다’는 그림은 성경의 문자적 이미지를 매우 충실하게 붙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에게는 그 문자 안의 속뜻을 자연적 차원에 고정한 해석이 됩니다. 요한계시록의 ‘새하늘’, ‘새땅’, ‘새예루살렘’을 자연적 공간과 물질적 도시로 읽기 시작하면, 계시록 전체에 흐르는 상응적 언어를 놓치게 됩니다.
그렇지만 신성종 목사가 이 교리를 통해 도달한 윤리적 결론은 매우 귀합니다. 그는 고린도전서 15장이 58절에서 ‘그러므로 … 항상주의일에더욱힘쓰는자들이되라. 이는너희수고가주안에서헛되지않은줄앎이라’로 끝난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교회 화장실을 청소한 사람, 새벽에 난로를 피운 사람, 김치를 담가 홀로 사는 노인에게 가져다준 사람, 수십 년 동안 주보를 접은 사람들의 손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도 아주 중요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천국을 이루는 것은 단순히 올바른 교리를 알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실제 삶의 유용한 일, 곧 쓰임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손이다시살아납니다’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다시 해석해야 합니다. 관절이 붓고 굳은살이 박힌 바로 그 물질적 손의 원자들이 다시 모인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손으로 행했던 사랑과 쓰임이 그 사람의 영원한 인격 안에 남는다고 보는 편이 더 가깝습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을 의도했고, 그 사랑을 어떻게 삶으로 행했는지가 그 사람의 내적 생명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는 신성종 목사의 ‘부활이있으므로지금하는일이헛되지않다’는 결론과 스베덴보리의 ‘사람이세상에서형성한지배적사랑과삶의상태를가지고영원으로들어간다’는 가르침이 뜻밖에 깊이 만납니다. 결론의 영적 방향은 가까운데 그 결론을 설명하는 사후세계의 구조가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 설교를 읽으며 특별히 눈여겨볼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중심 본문이 고린도전서 15장이라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울 서신을 포함한 사도들의 서신을 복음서나 계시록과 같은 의미에서 ‘말씀’으로 보지 않으며, 그 안에 연속적인 내적 의미, 곧 아르카나가 담겨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사도서신이 무가치하거나 읽을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교회를 가르치고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을 권면하는 중요한 교훈이 그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5장의 ‘씨’, ‘썩을것과썩지아니할것’, ‘육의몸과신령한몸’을 창세기나 계시록의 상응처럼 하나하나 아르카나로 풀어내기보다, 사도 바울이 당시 교회에 가르치려 했던 교리적 가르침으로 읽고 그것을 말씀 전체와 조화시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는 더 적절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설교는 아주 흥미로운 역설을 보여 줍니다. 신성종 목사는 ‘몸없는영혼이천국으로간다’는 통속적 기독교 관념을 헬라 철학의 영향이라고 비판하면서 성경적 사후세계를 회복하려 합니다. 문제 제기 자체에는 중요한 진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대안으로 ‘마지막날무덤에서육체가부활하여새지구에서살아간다’는 방향으로 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그림 모두를 넘어섭니다. 인간은 몸 없는 영혼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시 자연적 육체를 입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은 죽는 순간 자연적 몸을 내려놓고 영적 몸으로 깨어나며, 그 몸으로 영계에서 완전한 인간의 삶을 계속합니다. 저는 이번 설교를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볼 때 바로 이 지점이 가장 중요한 분별점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처음 화장장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면, 세 관점의 차이가 아주 선명해집니다. ‘어머니의몸을태워버렸는데어떻게부활합니까?’라는 질문에 통속적인 영혼불멸론은 ‘몸은중요하지않고영혼만천국에갔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신성종 목사는 ‘그몸은씨앗이며하나님께서마지막날썩지않는몸으로다시살리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머니자신은그유골함안에도, 무덤안에도계시지않습니다. 자연적육체는그곳에남았지만어머니는이미영적몸으로영계에서깨어나셨습니다’라고 대답하게 됩니다. 세 답은 비슷하게 유가족을 위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이 ‘지금어디에있으며어떤상태로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세계관을 전제합니다.
그럼에도 이 설교 전체를 오류 때문에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처음부터 끝까지 흐르는 ‘죽음을두려워하는사람을정죄하지말자’, ‘유가족의슬픔을억누르지말자’, ‘화장때문에죄책감을갖지말자’, ‘몸으로행한작은사랑의수고를하찮게여기지말자’, ‘죽음이마지막이므로현재의삶이허무한것이아니라영원이있으므로오늘의사랑과수고가중요하다’는 목회적 메시지는 충분히 귀합니다. 특히 이름 없이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돌본 사람들의 작은 수고를 기억하는 부분은 체어리티와 쓰임이라는 스베덴보리의 핵심 가르침과 매우 아름답게 만납니다.
결국 ‘스베덴보리의렌즈’가 이 설교에 던지는 질문은 ‘신성종목사의부활신앙이옳으냐그르냐’ 정도가 아닙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부활이란정확히무엇인가?’입니다. 자연적 육체의 재생인가, 아니면 인간이 죽음을 통과하여 영적 세계에서 자신의 참된 몸으로 깨어나는 것인가? ‘새하늘과새땅’은 미래의 물질 우주인가, 아니면 주님이 이루시는 새로운 영적 질서와 새 교회인가? 그리고 예수의 부활은 우리 육체 부활의 단순한 견본인가, 아니면 주님의 인성이 완전히 영화되어 신성과 하나 된 유일무이한 사건인가? 이 질문들 앞에서 신성종 목사의 설교는 오히려 좋은 출발점을 제공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의 목회적 고백을 그대로 귀하게 남겨 두어도 좋겠습니다. ‘무섭지않은것이믿음이아니라무서운데도손을놓지않는것이믿음입니다.’ 여기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을 덧붙인다면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가 붙드는 소망은 ‘언젠가흩어진육체의원소가다시모일것’이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소망은 ‘죽음조차주님이주신생명의연속을끊을수없다’는 데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과 함께 무(無)로 사라졌다가 먼 훗날 다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문을 통과하여 영계에서 계속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장례는 한 사람의 존재가 끝나는 자리가 아니라, 우리의 눈에서는 닫히지만 그에게는 다른 세계가 열리는 경계가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설교가 품고 있는 따뜻한 목회적 위로와 스베덴보리의 놀라울 만큼 구체적인 사후세계의 가르침이 서로 만날 수 있다고 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먼저 영상에서 매우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거룩하게살고싶다’는 열망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1,600년 동안 그곳에서 수도하다 세상을 떠난 수도자들의 유골을 보면서 끔찍함보다 오히려 ‘향기가났다’, ‘고개를숙이고흠모하는마음으로기도하게되었다’고 말합니다. 또 게라시모스가 기도하던 동굴과 그곳에 얽힌 이야기들을 소개하면서 마지막에는 자신도 ‘그런영이임하게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 마음 자체는 가볍게 볼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무엇을 더 얻고 높아질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하면하나님께더가까이갈것인가’를 사모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수도 전통이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도 바로 이 지점일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거룩함의중심이어디에있는가’를 한 번 더 묻게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룩함은 어떤 장소에서 오래 기도하고, 육체를 극도로 절제하고, 세상을 떠나 고독하게 산다는 사실 그 자체에서 생기지 않습니다.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오직 주님이며,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실제 삶에서 살아갈 때 그 삶이 거룩해집니다. 그러므로 수도원도 거룩함을 돕는 장소가 될 수 있고, 광야의 동굴도 그럴 수 있지만, 그것들이 그 자체로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수도원 안에서도 proprium은 얼마든지 살아 있을 수 있고, 오히려 ‘나는세상사람들과다르게산다’, ‘나는이렇게많이기도한다’, ‘나는이런금욕을견뎌냈다’는 영적 자기의가 더 미세한 형태로 자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수도생활을 부정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수도생활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제자리에 놓아 줍니다. 침묵, 금식, 기도, 독거, 절제, 단순한 생활은 모두 훌륭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의 목적은 ‘수도자가되는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가 주님께 굴복하고,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주님께 받은 선을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데 있습니다. 결국 천국의 삶은 세상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었는가보다 ‘무엇을사랑하며살았는가’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 영상에서 특별히 아름다운 대목은 게라시모스와 사자의 이야기입니다. 게라시모스가 발에 가시가 박힌 사자를 치료해 주었고, 그 뒤 사자가 그를 따르며 도왔으며, 마침내 게라시모스가 죽은 뒤에도 그의 무덤 곁을 떠나지 않았다는 전승입니다. 이것을 역사적으로 어디까지 사실로 받아들일 것인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영상 자체도 수도 전통에서 전해 내려오는 성인전적 이야기의 성격으로 읽는 것이 안전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동물은 매우 흥미로운 존재입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동물들은 인간의 여러 정서와 애정을 표상합니다. 온순하고 유익한 동물들은 선한 애정들을, 사납고 해로운 동물들은 악한 애정들을 표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현실의 사자 한 마리를 곧바로 어떤 하나의 영적 의미와 기계적으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영적 그림은 상당히 아름답습니다. 인간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야생의 힘이 사랑과 돌봄 앞에서 적대성을 잃고 봉사하는 힘으로 바뀝니다. ‘가시를빼주는것’에서 시작하여 ‘곁을지키는것’으로 끝나는 이 이야기는, 인간 안의 거칠고 자연적인 것조차 주님의 질서 아래 들어오면 선을 섬기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그림으로 읽어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도 한 가지는 조심해야 합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마지막에 ‘동물과도친해지고, 동물도알아주고, 하나님이알아주는것은물론사람들이다인정하는신성한영’을 구하는 취지로 기도합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사람들이알아보는거룩함’이 아닙니다. 심지어 ‘동물까지알아보는성자같은사람이되는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구해야 하는 것은 ‘주님께서기뻐하시는사람이되는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성자라고 생각하는지, 영성이 깊다고 인정하는지는 본질적으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대단히 중요합니다. ‘저수도자처럼거룩한사람이되어야지’라는 열망은 아름답게 출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중심이 ‘주님’에서 ‘거룩한나’로 옮겨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끊임없이 인간의 proprium을 경계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얼마나거룩해졌는가’를 바라보는 순간, 거룩함은 어느새 자기 소유물이 되기 쉽습니다. 반대로 ‘내안에는선한것이하나도없으며, 모든선과진리는오직주님에게서온다’는 것을 점점 깊이 인정하는 사람은 자신을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려고 애쓰기보다 주님께서 자기 안에서 일하시도록 자신을 내어 드리게 됩니다.
영상에 등장하는 광풍도 이런 관점에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앞을 제대로 보기 어려울 만큼 거센 바람과 먼지가 부는 날에도 동굴을 향해 걸어갔고, 안내자는 ‘게라시모스는이런날에도굴하지않고계속기도했던성인’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분명 인상적인 장면입니다. 그러나 영적 삶에서 더 중요한 광풍은 바깥의 날씨가 아니라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시험입니다. 기도하기 좋은 분위기가 깨졌을 때,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할 때, 내가 옳다고 생각한 것이 무너질 때, 자존심이 상할 때, 내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에도 주님을 향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훨씬 깊은 문제입니다. 외적 광풍을 견디는 수도보다 ‘proprium의광풍’을 견디는 내적 싸움이 더 어렵습니다.
또 한 가지, 영상에는 한국 목회자들이 악천후에도 동굴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강문호 수도사가 ‘역시한국사람들은한국사람이구나’ 하며 감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역시 그 현장에서 느낀 반가움과 감동의 표현으로 받아들이면 충분하겠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누가더독하게기도하는가’가 영성의 척도가 되지는 않습니다. 오랜 시간 기도하는 것도 귀하고, 새벽기도도 귀하며, 금식도 귀합니다. 그러나 기도의 열매는 결국 그 사람이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나타납니다. 더 온유해졌는가, 자기 생각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는가, 타인의 허물을 덜 정죄하게 되었는가, 자신의 악을 더 분명하게 보게 되었는가, 이웃에게 더 유익한 사람이 되었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영상의 핵심을 ‘게라시모스처럼되어야한다’에서 한 걸음 더 안쪽으로 옮겨 읽고 싶습니다. 게라시모스의 동굴도, 1,600년의 수도 전통도, 수도자들의 유골도, 광풍 속의 기도도, 사자의 충성도 모두 우리를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가리켜야 할 마지막 대상은 ‘위대한수도자’가 아니라 ‘사람을거룩하게하시는주님’이어야 합니다. 성자의 삶이 귀하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서 주님의 어떤 것이 비쳐 나왔기 때문이지, 그 사람이 스스로 거룩함의 원천이 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특히 사자 이야기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을 저는 ‘사자가성인을알아보았다’는 데서 찾기보다 ‘고통받는존재의가시를빼주었다’는 데서 찾고 싶습니다. 이것은 아주 작은 차이 같지만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는 큰 차이입니다. 사자를 굴복시킨 영적 능력이 중심이 아니라, 아파하는 생명에게 다가가 그 고통의 원인을 제거해 준 체어리티가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발에 박힌 ‘가시’를 발견하고 그것을 빼 주는 사람, 상처받은 사람에게 다가가 고통을 덜어 주는 사람, 그리고 그 일을 자신의 공으로 돌리지 않는 사람이라면, 수도복을 입고 있든 평범한 옷을 입고 있든 이미 수도 영성의 깊은 중심에 가까이 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영상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기도도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주님, 사람들이알아보는성스러운사람이되게하소서’라기보다 ‘주님, 제안의악을보게하시고,그것을죄로알고피하게하시며, 제게주시는선을제것이라여기지않게하시고, 오늘제곁에있는존재의가시하나라도빼주는사람이되게하소서.’ 저는 이것이 게라시모스의 이야기를 ‘스베덴보리의렌즈’로 통과시켰을 때 남는, 더 조용하지만 더 깊은 수도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