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에서 강사가 다루는 본문은 역대상 49-10절의 유명한 ‘야베스의 기도’입니다. 한때 한국 교회에서도 ‘나의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라는 구절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했던 기도입니다. 그 과정에서 ‘지경’은 사업의 확장, 재산의 증가, 사역의 성장, 영향력의 확대 같은 것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 야베스의 기도가 대표적인 ‘복을 구하는 기도’로 자리 잡았습니다. 강사가 문제 삼는 것도 바로 이 지점입니다. 그는 히브리어 본문을 자세히 살피면서 마지막 구절을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라고만 읽을 것이 아니라 ‘내가 고통을 일으키지 않게 하옵소서’라고도 읽을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그렇게 되면 야베스의 기도는 ‘하나님, 나를 잘되게 주십시오’라는 기도에서 ‘하나님, 내가 남을 아프게 하는 사람이 되지 않게 주십시오’라는 기도로 깊어집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볼 때 바로 이 방향 전환은 매우 주목할 만합니다.

 

먼저 히브리어 자체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역대상 49절에서 야베스의 어머니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고 말하는데, 여기 사용된 히브리어 ‘오체브(עֹצֶב)는 고통, 슬픔, 수고 같은 뜻을 가집니다. 그리고 ‘야베스(יַעְבֵּץ)라는 이름과 이 단어 사이에는 분명한 언어유희가 있습니다. 실제로 여러 번역과 주석도 이 점을 인정합니다. 다만 영상에서 설명하듯 야베스라는 이름이 단순히 ‘오체브의 자음 순서를 바꾼 단어’라고 어원적으로 확정하는 것은 조금 조심하는 편이 좋습니다. 본문이 두 단어의 유사한 소리를 이용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성경의 이름 풀이에서는 현대 언어학적 어원과 문학적인 언어유희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야베스라는 이름과 고통을 뜻하는 오체브 사이에 의도적인 말놀이가 있다’고 하는 정도가 가장 안전합니다. 더구나 고유명사 야베스의 첫 요드(י)를 곧바로 히브리어 미완료형의 접두사라고 분석하는 것 역시 지나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고유명사가 되면 그 자체로 이름이므로, 일반 동사의 활용형처럼 단순하게 역분석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본문 저자가 ‘야베스 - 고통 - 근심’이라는 음성적 연결을 독자에게 의식시키고 있다는 강사의 큰 관찰은 옳습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10절 끝의 ‘레빌티 오츠비(לְבִלְתִּי עָצְבִּי)입니다. 여기의 ‘오츠비’는 ‘고통하다, 슬프게 하다’와 관련된 동사의 부정사 형태에 1인칭 단수 접미사가 붙은 것으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부정사에 붙은 인칭 접미사는 문맥에 따라 행위의 주체처럼 이해되기도 하고 객체처럼 이해되기도 하기 때문에, 강사가 소개한 두 방향의 가능성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 영어 번역들도 갈립니다. NASBNET 같은 번역은 대체로 ‘그것이 나를 아프게 하지 않도록’, 곧 야베스가 고통받지 않도록이라는 방향으로 번역하지만, NKJVHCSB 계열은 ‘내가 고통을 일으키지 않도록’이라는 방향을 취한 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강사가 말하는 ‘내가 고통을 야기하지 않게 주십시오’는 임의로 만들어 낸 번역은 아닙니다. 다만 영상에서 ‘킹제임스 번역이 저처럼 해석했다’고 말한 부분은 정확히는 수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통적인 KJV는 ‘that it may not grieve me’, 곧 ‘그것이 나를 근심하게 하지 않도록’이라고 번역하며, ‘that I may not cause pain’이라고 한 것은 NKJV입니다. 작은 차이 같지만 히브리어 해석을 중심으로 하는 영상이므로 이 구분은 중요합니다.

 

더구나 이 절의 히브리어는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습니다. ‘웨아시타 메라아(וְעָשִׂיתָ מֵּרָעָה)라는 부분 자체가 해석상 어려움이 있는 표현입니다. 많은 번역본은 문맥을 따라 ‘나를 악에서 지켜 주시고’, ‘재앙으로부터 보호하시고’와 같이 이해하지만, 마소라 본문의 문법을 문자 그대로 풀면 매끄럽지 않습니다. NET 성경도 이 대목의 히브리어가 어렵다는 점을 주석에서 명시하고 다른 본문 가능성까지 논의합니다. 그러므로 10절 마지막을 하나의 문법 분석만으로 완전히 해결됐다고 말하기보다는, ‘본문 자체가 여러 해석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가운데 내가 고통을 일으키지 않도록이라는 이해도 실제 번역 전통 속에 존재한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오래된 유대교 주석 전통에서는 대체로 야베스 자신에게 손해와 고통이 닥치지 않게 해 달라는 의미로 읽어 왔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남에게 고통을 주지 않게’라는 해석은 매우 아름답고 문법적으로 가능한 독법 가운데 하나이지만, 전통적 해석을 폐기하는 결정적 번역이라고까지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나에게 고통이 오지 않게 주십시오’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곧바로 기복주의라고 규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주님께 보호와 건강과 평안과 생계와 필요한 자연적 복을 구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무엇을 위해 구해지는가입니다. ‘나의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가 ‘ 소유를 늘려 주십시오’, ‘나를 유명하게 만들어 주십시오’, ‘ 사역을 남들보다 크게 만들어 주십시오’라는 자기중심적 욕망으로 변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반대로 주님께서 맡기신 쓰임을 더 잘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자연적 조건과 능력과 기회를 구한다면 같은 말도 전혀 다른 기도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외적 행위 자체보다 그 행위 안에서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목적으로 삼는지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야베스의 기도의 핵심은 ‘복을 구했느냐, 복을 구하지 않았느냐’가 아닙니다. ‘ 복의 중심에 누가 있는가’입니다. 우리의 proprium은 복조차도 자기 자신을 향하게 만듭니다. ‘주님, 나의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라고 하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내가 인정받게 주십시오’, ‘ 이름이 높아지게 주십시오’, ‘내가 다른 사람보다 성공하게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같은 ‘지경’을 구하면서 ‘제가 많은 사람에게 선을 행할 있게 하시고, 책임을 감당하게 하시며, 주님께 받은 것을 넓게 쓰게 하십시오’라고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똑같은 기도라 하더라도 내적 의미에서는 전혀 다른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강사가 마지막 구절을 ‘내가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지 않게 주십시오’라고 읽은 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놀라울 만큼 잘 만납니다. 스베덴보리는 반복해서 ‘악을 죄로 여겨 피하는 ’을 기독교적 삶의 첫째요 본질적인 것으로 말합니다. ‘신적 섭리265번에서도 악을 죄로 여겨 삼가는 것이 기독교 종교의 본질이라고 설명하며, ‘참된 기독교535번에서는 체어리티의 첫째가 악을 피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지 ‘나에게 나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주십시오’라는 기도보다 훨씬 깊습니다. ‘주님, 안에 있는 악이 다른 사람에게 흘러나가지 못하게 주십시오. 말과 행동과 욕망 때문에 다른 사람이 상처받지 않게 주십시오. 그리고 악을 단순히 억제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것이 주님께 죄임을 보고 돌이키게 주십시오’라는 기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내가 고통을 일으키지 않도록’이라는 기도조차 단순한 도덕적 착함을 넘어가야 합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한다고 해서 자신의 내면을 정결하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외적 삶에서 악을 죄로 여기고 싸우며 물리칠 때, 실제로 그 악의 욕망을 내면에서 제거하시는 분은 주님이라고 설명합니다.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1764) 145번은 사람이 악을 죄로 여기고 그것을 그만두기로 결심하면서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싸움이 시작되고, 그 과정에서 주님께서 악한 욕망을 제거하고 선의 애정을 심으신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깊은 야베스의 기도는 ‘제가 남에게 피해를 끼치도록 성격을 관리하겠습니다’가 아니라 ‘주의 손이 나와 함께하사, 제가 악을 행하지 않도록 하시고, 안에서 악을 일으키는 것까지 주님께서 다스려 주십시오’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야베스의 기도 가운데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라는 구절과도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따라서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와 ‘주의 손이 나와 함께하게 하십시오’와 ‘악에서 지켜 주십시오’와 ‘내가 고통을 일으키지 않게 하십시오’를 서로 떨어진 네 가지 소원으로만 읽지 않고 하나의 거듭남의 흐름으로 읽어 볼 수도 있습니다. ‘주님, 제게 주신 선과 진리의 삶의 영역을 넓혀 주십시오. 그러나 그것을 힘으로 소유하려 하지 않게 하시고, 언제나 주님의 손이 저와 함께하게 하십시오. 안의 악이 넓어진 지경 안으로 흘러들지 않게 하시며, 제가 받은 능력과 영향력이 오히려 다른 사람을 상하게 하는 도구가 되지 않게 주십시오.’ 이렇게 읽으면 ‘지경의 확대’는 성공의 확대가 아니라 쓰임의 확대가 됩니다. 지위가 높아질수록 더 많은 사람을 지배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고, 재물이 많아질수록 더 많이 소유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선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며, 목회자의 영향력이 넓어질수록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더 많은 영혼을 주님께 연결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대상 410절에 스베덴보리가 직접 붙인 속뜻이라고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거듭남과 쓰임의 교리 안에서 이 기도를 읽을 때 자연스럽게 열리는 적용입니다.

 

이 지점에서 한국 교회의 이른바 ‘야베스의 기도 열풍’도 조금 다르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는 사실 자체를 기복주의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지나칩니다. 성경에는 자연적 복을 구하는 기도가 있고, 주님께서는 우리의 자연적 삶도 섭리하십니다. 그러나 자연적 복을 최종 목적으로 만들 때 신앙의 질서가 뒤집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자연적인 것은 영적인 것을 섬겨야 합니다. 재물과 건강과 지위와 지식과 능력과 영향력은 모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선한 쓰임을 위한 수단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버릴 것이 아니라 그 기도의 중심을 바꾸어야 합니다. ‘ 지경을 넓혀 것을 크게 주십시오’가 아니라 ‘주님께서 제게 맡기실 있는 쓰임의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영상의 가장 귀한 문장은 처음과 끝에 반복된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지 않도록 그런 내가 있도록 인도해 달라.’ 이것은 매우 실제적인 회개의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 사람이 나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 사람 때문에 내가 고통받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시선을 다시 나 자신에게 돌리게 합니다. ‘ 사람의 ’은 그 사람이 주님 앞에서 다룰 문제이고, 내가 지금 살펴야 하는 것은 ‘ 안의 ’입니다. ‘나는 누구에게 고통을 주고 있지는 않은가? proprium 자존심과 지배욕과 인정욕과 탐욕과 분노와 냉혹함 때문에 가까운 사람이 힘들어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것을 보는 것이 자기 성찰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발견한 악을 ‘ 성격이 원래 그래’라고 합리화하지 않고 ‘이것은 주님께 죄입니다’라고 인정하고 피하려 할 때 거듭남이 시작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악을 죄로 여겨 피하는 ’을 그토록 강조한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강사의 해석을 이렇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히브리어 주해 차원에서는 ‘내가 고통을 일으키지 않도록’이라는 번역을 유일한 정답으로 밀어붙이기에는 조심할 점이 있습니다. 전통적인 ‘내가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이라는 해석 역시 충분한 문법적·번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실제 마소라 본문 자체에도 난해한 부분이 있습니다. 또한 영상에서 KJVNKJV를 혼동한 작은 오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강사가 야베스의 기도를 자기중심적인 복의 청원에서 타인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구하는 기도로 전환한 것은 매우 좋은 신학적 통찰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내게 고통이 없게 하옵소서’와 ‘내가 고통을 주지 않게 하옵소서’ 가운데 하나를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둘이 함께 갈 수 있습니다. ‘주님, 악으로부터 저를 보호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무엇보다 제가 악의 통로가 되지 않게 하십시오.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 그러나 그것이 proprium 지경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가 흘러갈 쓰임의 지경이 되게 하십시오. 주의 손이 저와 함께하시되, 손으로 주변의 장애물만 치워 달라고 하지 않게 하시고, 먼저 안의 악을 보게 하시며 그것을 죄로 여겨 피하게 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야베스의 기도는 더 이상 ‘고통 없는 인생과 성공을 보장받는 주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복을 받을수록 선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지경이 넓어질수록 많은 쓰임을 감당하게 하시며, 힘이 커질수록 아무도 해치지 않게 하시고, 무엇보다 모든 과정에서 주님의 손을 떠나지 않게 주십시오’라는 거듭남의 기도가 됩니다. 저는 야베스의 짧은 기도를 오늘 우리가 다시 드린다면, 바로 이 지점까지 가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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