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24(D1)-주일예배(2520, 눅2,8-20, 성탄주일),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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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24(D1)-주일예배.축도.성탄주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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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vxUaQXqyqoc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

 

 

8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15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16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18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 19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20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눅2:8-20)

 

 

사람의 영혼과 몸이 하나인 것처럼 주님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하나가 된 후, (기독교계의 교리에 따르면) 이 둘은 더 이상 둘이 아니라 한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주님은 신이신 동시에 인간이시라는 점에서 여호와이시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이어집니다. 이런 이유로 이것이 왜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구속주와 구세주라 하는지,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왜 구속주와 구세주를 여호와라 하는지 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에 관한 교리 34:4) As, therefore, after the unition of the human with the Divine in him, which was like that of the soul and body in man, they were no longer two but one person (according to the doctrine of the Christian world), it follows that the Lord is Jehovah and God as to both the Divine and the human. And this therefore is why it is said on the one hand that Jehovah and the holy one of Israel are the redeemer and savior, and on the other that the redeemer and savior are Jehovah, (Doctrine of the Lord, .34:4)

 

 

주님의 탄생을 교우님들과 함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천여 년 전 오늘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 주님의 탄생을 12월 25일로 정하고 지키기 시작한 것은 4세기 무렵이라고 합니다. 본래 12월 25일은 고대 로마 제국에서 지키던 동짓날로서, 일 년 중 해가 가장 짧은 날을 기념하던 절기인데 당시 로마 교주가 기독교가 이교도들을 정복했다는 의미로 이날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제정한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 정황상, 주님이 오신 가장 성경적인 날은 10월 1일 나팔절이라고 하며, 그 근거의 시작점이 바로 오늘 본문 8절,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에 나오는 ‘밖에서’라고 합니다. 좀더 자세한 내용은 류모세 저, ‘열린다 성경, 절기 이야기’ 15장, ‘예수님은 언제 태어나셨을까? 나팔절과 크리스마스’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오실 당시, 인류는 오래전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노예로 살았던 것처럼 자아와 세상의 노예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자아와 세상의 노예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언제나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를 바라보지 않고, 오직 세상만 바라보며 사는 것이지요. 왜 그렇게 됐을까요? 그것에 대해 ‘천국의 비밀’ 6373번 글과 ‘주님에 관한 교리’ 61번 글에서는

 

주님이 오실 당시 영계에서는 지옥의 세력이 천국을 압도하고 있었고, 그러므로 천국은 전처럼 순수하거나 강력한 힘을 갖지 못했다.

 

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 천국과 지옥의 균형이 지옥으로 기울어 있었고, 그로 인해 천국으로부터 지상의 교회로 흘러들어오는 신성에 속한 것들이 인간을 거듭나게 할 정도로 그렇게 순수하거나 강력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교회는 점점 더 타락했고, 인간의 자유의지 또한 제대로 작동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유의지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인간은 마치 감옥에 갇힌 것처럼 됩니다. 영적으로 지옥의 노예가 되는 것이지요. 그때 주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직접 세상에 오셔서 지옥을 완전히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지옥을 이기신 그 능력으로 영계와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질서를 회복시키셨고 말입니다. 이것이 왜 이천 년 전 그때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야만 하셨나 하는 그 배경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의 오심, 주님 성탄 소식을 이렇게 전합니다.

 

8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그리스도 탄생 소식은 밤새 양을 지키는 목자들에게 처음 전해졌습니다. 말씀에서 ‘목자’는 보통은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을 뜻하지만, 또 다른 의미로는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양’은 사람의 마음속 사랑과 체어리티(charity, 仁愛)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는 ‘진리가 무엇이고 선이 무엇인지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세상이 어두울 때에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그 사랑의 법도를 이웃에게 전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오시며, 그래서 천사는 목자들에게 보내심을 받아 주님 탄생의 소식을 전한 것입니다.

 

천사는 놀라서 불안해하는 목자들에게 무서워 말라고 말합니다. 말씀에는 주님의 환상을 보거나 천사를 만나는 사람들이 두려워 떠는 모습이 여러 곳에 나옵니다. 예를 들면, 요한 사도는 주님께서 계시를 보여 주실 때, 마치 죽은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다니엘 선지자 역시 주님의 환상을 보는 순간 온몸의 힘이 빠지고, 잠든 것처럼 되었습니다. 속뜻으로 볼 때, 주님이 임재하실 때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겸손한 자세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목자나 요한 사도 또는 다니엘이 느꼈던 두려움은 영적으로 한 단계 거듭나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겸손을 나타냅니다. 주님 앞에 겸비함이 없으면 결코 주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주님 앞에 겸손할 때, 주님은 우리들의 내면으로 오시어 영혼을 소생시키십니다. 그러므로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는 겸손한 자의 영혼을 그 순간 주께서 소생시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음 다니엘에게 허락된 환상을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이 사실을 좀 더 깊이 확인하겠습니다.

 

1바사 왕 고레스 제삼년에 한 일이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다니엘에게 나타났는데 그 일이 참되니 곧 큰 전쟁에 관한 것이라 다니엘이 그 일을 분명히 알았고 그 환상을 깨달으니라 2그 때에 나 다니엘이 세 이레 동안을 슬퍼하며 3세 이레가 차기까지 좋은 떡을 먹지 아니하며 고기와 포도주를 입에 대지 아니하며 또 기름을 바르지 아니하니라 4첫째 달 이십사일에 내가 힛데겔이라 하는 큰 강 가에 있었는데 5그 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순금 띠를 띠었더라 6또 그의 몸은 황옥 같고 그의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의 눈은 횃불 같고 그의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의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 7이 환상을 나 다니엘이 홀로 보았고 나와 함께 한 사람들은 이 환상은 보지 못하였어도 그들이 크게 떨며 도망하여 숨었느니라 8그러므로 나만 홀로 있어서 이 큰 환상을 볼 때에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 9내가 그의 음성을 들었는데 그의 음성을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느니라 10한 손이 있어 나를 어루만지기로 내가 떨었더니 그가 내 무릎과 손바닥이 땅에 닿게 일으키고 11내게 이르되 큰 은총을 받은 사람 다니엘아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깨닫고 일어서라 내가 네게 보내심을 받았느니라 하더라 그가 내게 이 말을 한 후에 내가 떨며 일어서니 12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하게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응답 받았으므로 내가 네 말로 말미암아 왔느니라 (단10:1-12)

 

천사가 목자들에게

 

10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하고 말했습니다. 천사들이 전하는 기쁜 소식이란 구주가 나신 것이며, 그분의 이름은 그리스도 주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그리스도’라고 부를 때는 주님의 두 가지 본질인 사랑과 진리 가운데 진리의 본질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주님을 ‘주’라고 부를 때는 사랑의 본질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구주가 나셨다는 것은 사랑 자체이시고 진리 자체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상에 오셨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에서는 왜 주님을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을까요? 그 첫 번째 이유는 만일 주님이 당신 스스로를 여호와라고 하셨다면 유대인들이 주님을 그대로 두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랬더라면 주님이 오신 목적을 이루지 못하셨을 수도 있었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세상에 오신 주님은 진리 그 자체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12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15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16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천사들이 떠나자 목자들이 아기 예수를 만나기 위해 베들레헴으로 달려갔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강보에 싸인 채 말 구유에 누워 계셨습니다. 말은 총명한 짐승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말’은 말씀에 대한 이해력을 나타냅니다. ‘구유’는 말의 양식이 담긴 곳이기 때문에 영적으로는 교회의 교리를 뜻합니다. 교리는 신앙인들을 영적으로 먹이는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싸고 있는 강보는 무슨 뜻일까요? ‘강보’는 주님으로부터 처음 나오는 가장 순수한 진리를 뜻합니다. 주님에게서 직접 나오는 진리가 가장 순수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문자로 표현할 때, 그만큼 순수함이 줄어듭니다. 진리 자체는 무한한 것이지만 문자는 유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는, 주님은 교회의 교리를 통해 오시는데 앞에서 말한 것처럼 가장 순수한 진리, 즉 내적 진리로 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18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 19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20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목자들이 천사들에게 들은 것을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보고 들은 것들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렸습니다. 말씀에서 ‘보는 것’(seeing)은 주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믿는다는 뜻이고, ‘듣는 것’(hearing)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목자들이 ‘듣고 본 그 모든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는 것은, 주님을 믿고, 그 믿음에 따라 행하는 사람들이 주님의 임재를 느끼는 것이고, 그때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한 단계 더 거듭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은 지금부터 2000년 전 초라한 마구간에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고 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지옥을 이기시고, 인간의 잃어버렸던 자유의지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주님이 다시 찾아주신 자유를 통해 이제는 누구나 지옥을 멀리하고 천국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지옥의 유혹을 끊기가 어려우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주님보다 자신과 세상을 더 사랑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밤에 양을 지키는 목자들은 어둡고 혼탁한 세상 속에서 사랑과 인애의 삶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오셔서 그들과 함께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십니다. 그것을 위해 주님은 지극히 높은 하늘로부터 낮고 낮은 마구간에 오셨습니다. 세상에는 재물이 많은 사람, 똑똑한 사람, 고고한 사람들이 차고 넘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하고는 친구가 되기가 어렵습니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왠지 주눅이 들고 자꾸 초라해지며 마음의 평화가 깨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셔서 모든 사람들의 친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각 사람의 처지에 맞게 대화하시고, 위로하시고, 힘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그렇게 낮아져야 합니다. 이웃을 자신의 눈높이에 맞추려 하지 말고 이웃의 눈높이에 자신을 맞춰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목자들처럼 강보에 싸인 아기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의 탄생을 고대하는 모든 성도들과 가정에 성탄의 기쁨과 평화가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 (출12:42)

 

아멘

원본

2021-12-26(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12-24(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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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7(D1)-주일예배(2519, 눅15,1-10), ‘잃은 양 한 마리, 잃은 드라크마 하나’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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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7(D1)-주일예배.축도.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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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JJ27_O64dh0

 

 

잃은 양 한 마리, 잃은 드라크마 하나’의 속뜻

 

 

1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5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7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8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9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10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눅15:1-10)

 

천사들은 사람에게 있는 선과 진리를 불러내 악령들이 선동하는 악과 거짓에 맞서게 한다. 그때 사람은 선으로도 악으로도 기울어지지 않는 자유의 상태에 있게 된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방법으로 천사들을 통해 사람을 이끄시고 또한 보호하신다. 그리고 이것은 매 순간, 그리고 순간의 순간마다 이루어진다. (AC.5992:3) Especially do the angels call forth the goods and truths that are with a man, and set them in opposition to the evils and falsities which the evil spirits excite. Thus the man is in the midst, and does not perceive either the evil or the good; and being in the midst, he is in freedom to turn himself either to the one or to the other. By such means do angels from the Lord lead and protect a man, and this every moment, and every moment of a moment; (AC.5992:3)

 

 

누가복음 18장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9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눅18:9-14)

 

주님이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높이는 자였고, 세리는 자기를 낮추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듣기 위해 주님께 나아왔습니다. 이 ‘말씀을 듣기 위해 주님 앞에 나왔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들이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 주님 말씀에 따라 회개하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속뜻으로는, 진리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 광경을 보고,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수군거립니다. 앞에서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며 기도했던 바리새인들이 지금은 그들의 기도의 대상이셨던 그 주님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행동이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더라도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교만한 자들인지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향해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4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양 아흔아홉 마리’는 스스로 거룩한 것처럼 행세하는 바리새인들을 빗대어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잃어버린 양’은 누굴까요?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 주님 앞에 나와 말씀을 듣기 원하는 모든 세리와 죄인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 앞에 세리이며 죄인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자주 거역, 때로는 부정한 재물을 탐내며, 그러다가도 후회하고 반성하며 다시 주님 앞에 나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주님께 나아온 세리와 죄인을 닮았습니다.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나 좀처럼 양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양은 후미진 도랑에 빠졌을 수도 있고, 가시덤불에 걸려 오도 가도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슬피 웁니다. 목자가 이끄는 대로 왜 순진하게 따르지 않았는가 하고 후회를 합니다. 목자이신 주님은 당연히 당신의 양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당신을 찾고 있는지를 잘 아십니다. 주님은 전지하고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왜 양을 찾지를 못하실까요? 찾지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기다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회개의 진정성이 보이지 않을 때는 우리를 바로 구해내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또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목자가 양을 찾지 못한다는 것은 그런 상태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죄인들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십니다. 그러다가 회개의 진정성이 보일 때, 당신의 양을 도랑에서, 또는 가시덤불에서 건져내십니다. 본문 5절은 잃어버린 양을 찾으신 주님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5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주님을 떠났던 사람이 주님 앞에 돌아와 진심으로 회개할 때, 주님은 그를 어깨에 메고 기뻐하십니다. ‘양을 어깨에 멘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그때부터는 주님이 있는 힘을 다해 그를 지켜주신다는 뜻입니다. 말씀에는 능력이나 힘을 나타낼 때 주로 손이나 팔, 어깨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그중에서도 어깨가 가장 큰 힘을 나타냅니다. 잃어버렸던 양을 어깨에 메신다는 말씀에서 다시는 양을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주님의 각오가 느껴집니다. 계속해서 본문 6절과 7절에서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6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7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잃어버린 양을 찾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 안의 병든 진리와 선이 주님에 의해 깨끗하게 고침을 받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때 주님은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십니다. 벗과 이웃은 우리 안에 있는 건강한 진리와 선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벗과 이웃을 불러 모아 즐긴다는 것은 그때 주님이 다른 건강한 선과 진리들과 더불어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기뻐할까요? 신앙인들의 마음은 수많은 진리와 선으로 이루어지는데, 그것들은 각기 떨어져 있지 않고 서로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인체의 기관들이 유기적으로 연결이 된 것처럼 그렇게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가지 진리, 또는 선이 병이 들면 그것과 연결된 다른 진리와 선이 병이 들고, 그로 인해 마음 전체가 병이 들거나 고통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잃어버린 양을 찾았다’는 것은 주님에 의해 영적 성장을 가로막는 하나의 진리가 고침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나머지 진리와 선들이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깊이와 색깔이 다른 수많은 교인이 그들의 애정에 따라 서로 연결이 되고, 그런 연결들이 모여 교회 전체를 이룹니다. 그때 하나의 교인이 영적으로 길을 잃게 되면 그와 연결된 다른 교인들이 길을 잃고, 그렇게 해서 교회 전체에 나쁜 영향을 미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마리 양이 길을 잃지 않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본문 말씀에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라고 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의 진정한 회개는 주변의 이웃들과 천국의 천사들을 기쁘게 합니다. 다음 8절에서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8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이 말씀에서 ‘잃어버린 드라크마’는 앞에서 말한 잃어버린 양과 같은 의미입니다. 즉 영적인 병자, 또는 병든 진리를 뜻합니다. 드라크마는 주님 당시 통용되던 화폐 단위인데, 영적으로는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 여기서 잠깐, ‘드라크마’라는 화폐 단위 말씀을 좀 드리면, 예수님 당시 통용되던 화폐는 좀 복잡했는데요, 로마 화폐와 로마 이전부터 쓰던 헬라 화폐, 그리고 이 둘을 거부하는 이스라엘 자체 화폐가 뒤엉켜 쓰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운데 또 화폐, 즉 동전의 재료에 따라 달라지는데요, 먼저 구리 재료로는 로마의 ‘앗사리온’과 ‘고드란트’로 음역된 콰드란스, 헬라 구리 동전은 ‘렙돈’, 그리고 ‘호리’라는 것도 있는데 이는 로마 동전인 콰드란스인지, 헬라 동전인 렙돈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은의 경우, 로마는 ‘데나리온’, 헬라는 ‘드라크마’가 있습니다. 이들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열 드라크마는 당시 여인의 결혼지참금, 그러니까 혹시 이혼당할 때 보험용, 비상용으로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걸 열 드라크마밖에 갖고 있지 않은 걸로 보아 이 여인은 형편이 넉넉치는 않아 보입니다만, 그러나 숫자 ‘’(10)의 속뜻은 ‘전부’(all)인 걸 보면 말씀을 겉뜻으로만 읽을 경우, 상당히 엉뚱한 곁길로 나갈 수도 있음을 또 한 번 확인합니다. 그밖에 이스라엘 화폐, 즉 동전은 ‘세겔’이 있습니다.

 

따라서 열 드라크마를 가진 여인이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진리 가운데 하나가 병이 든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가 병이 들었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자아와 세상의 욕망으로 인해 진리가 오염되었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힘을 쓰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진리가 병이 들면 시험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진리에 따라 살려고 해도 뜻대로 잘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진리의 병을 고칠 수 있을까요? 본문에는 한 드라크마를 잃은 여인이 등불을 켜고 집을 쓴다고 했습니다. ‘등불을 켜는 것’은 진리를 가지고 자신의 생각이나 의도들을 비춰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빗자루로 집을 쓴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비로 방바닥을 쓰는 것처럼 자신의 삶의 궤적을 쫓아가면서 객관적으로 점검해 보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그동안 시험에서 왜 자주 넘어졌는지, 왜 진리에 따라 살려고 해도 뜻대로 잘 안됐는지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읽다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주님과 제자들을 비방하는 장면이 여러 곳에 나옵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주님과 제자들을 비방했을까요? 주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지독하게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사람들이었지만 이웃들 앞에서 또는 주님 앞에서는 세상 누구보다 의롭고 경건한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한때 그들을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신랄하게 나무라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대개는 이렇게 완곡하게 타이르셨습니다.

 

31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눅5:31-32)

 

오늘 말씀에서도 주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있다는 이유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로부터 비난을 받으십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4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이 양인 줄 아는 자, 의로운 줄 아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길 잃은 양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는 자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의 능력이 아니라 말씀의 능력으로 거듭나기를 원해야 합니다. 말씀을 듣기 위해 주님 앞에 나온 세리와 죄인들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주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하고 매일 기도하는데도 영적인 성장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입으로는 죄인이지만 마음으로는 언제나 바리새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경우는 주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죄에서 건짐을 받아도 다시 죄의 구덩이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십니다. 항상 자신의 내면의 상태에 집중해서 주님 앞에 충분히 낮아져야 합니다. 인간에 속한 것을 비우고, 또 비워야 합니다. 주님을 대할 때 진실하게 나아가는지 늘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회개의 진정성이 살아납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를 들어 올리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어깨 위에 안전하게 메어져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자기가 주님 앞에 죄인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모든 이웃과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눅15:10)

 

아멘

 

 

 

원본

2021-04-1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12-17(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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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0(D1)-주일예배(2518, 눅14,31-35),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의 속뜻.pdf
0.32MB
2023-12-10(D1)-주일예배.축도.pdf
0.22MB

 

https://youtu.be/8dz5vK-viOo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의 속뜻

 

 

31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33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34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35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눅14:31-35)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고, 그러므로 인간에게서 오는 악과 거짓을 따르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따르는 것이다. (천국의 비밀 10490:7)

 

 

주님께서는 부모와 처자와 형제를 미워하지 않는 자는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에서 ‘부모와 처자와 형제’는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악한 애정과 거짓된 생각들을 뜻합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마땅히 그러한 것들을 미워해야 합니다. 자아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 왜 악이며 거짓일까요? 그 이유는 인간의 자아는 이웃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 물질이나 육신에 속한 것에 집착하고, 사랑과 인애(仁愛, charity) 같은 영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아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사기와 보복, 잔인한 폭력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아와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만큼 세상은 지옥으로 변합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지옥으로 변해가는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 서로 미워하고 싸우는 사람들을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사람들로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위해 세상에 오셔서 신성한 말씀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직접 십자가를 지시고, 자아와 세상과 싸우는 모범을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자아의 감옥에서 벗어나 온전히 주님을 따라갈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31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1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어떤 임금, 왕이 다른 왕과 전쟁을 하는데, 군사 일만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저쪽의 군사 이만을 상대할 수 있을까 궁리를 합니다. 여기서 ‘왕들의 전쟁’은 신앙인들의 시험을 뜻합니다. 즉 진리와 거짓의 싸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은 진리 또는 거짓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쪽 왕의 군사가 만 명이고, 저쪽 왕의 군사가 이만’이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신앙인들의 진리가 지옥의 거짓을 이기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진리가 거짓을 이기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가 아니라 인간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진리를 가지고는 지옥의 거짓을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인간의 진리 안에는 힘의 원천인 선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옥을 이길 힘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 또는 사랑에서만 나옵니다. 시험이 올 때, 믿음이 깊은 사람은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 의지해 옳다 생각되는 일을 하고, 결과는 모두 주님께 맡기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믿음이 없는 사람은 걱정이 많습니다. 주님을 믿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시험이 오면 항상 집니다. 이것이 이쪽 왕의 군사는 만 명이고, 저쪽 왕의 군사는 이만 명인 상태입니다. 우리 자신이 이런 상태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에 대해 3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32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라고 합니다.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한다’는 것은 지옥과 타협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험이 오기 전에 주님을 의지, 미리 대비하는 것을 뜻합니다. 시험이 올 때는 갑자기 오지 않고, 그 전에 어떤 징후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면서 주님 앞에 얼마나 겸손한지, 주님의 생각보다 자신의 생각을 믿는 것은 아닌지를 스스로 점검해 봐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좋지 않은 의도나 버릇이 있다면 주님을 의지해서 끊어내야 합니다. 그런 방법으로 미리 대비를 하면, 시험이 오더라도 능히 이길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한다는 것은 지옥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도움을 청해 시험에 대비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3절 말씀입니다.

 

33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자기의 소유를 버리는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시험이 오기 전에 자신을 점검하고, 자아의 의도나 습관들을 미리미리 끊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아와 세상과의 싸움에서 넘어지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0절 이하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20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마19:20-21)

 

주님을 찾아온 어떤 부자 청년에게 주님께서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부자’는 진리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부자의 소유는 바로 진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들을 다 처분하고 주님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이유가 뭘까요? ‘부자의 진리’는 인간의 지혜요 세상의 지식일 뿐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기의 소유를 모두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진리 안에는 선한 것이 들어 있지 않고, 그러므로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4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35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버리느니라

 

소금을 쳐야 음식의 맛이 살아나는 것처럼 진리 안에는 진리를 온전하게 만드는 소금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 소금이 뭘까요? 선 또는 선한 애정입니다. 모든 진리 안에는 선이라는 생명이 들어있습니다. 선으로 말미암아 진리가 살아납니다. 선이 있는 진리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지옥 전체를 이길 힘이 있습니다. 진리 안에 들어있는 소금이 선이라면, 선 안에 들어있는 소금은 진리입니다. 이와 같이 진리와 선은 함께 있어야 온전한 것이 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악인에게 쫓기는 어떤 선한 사람이 자기 집 다락방에 숨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악인이 와서 그 사람의 행방을 묻습니다. 그때 그가 다락방에 숨어있다고 말하는 것이 진실일까요, 아니면 그 사실을 숨기는 것이 진실일까요? 당연히 숨기는 것이 진실입니다. 모든 진실은 선을 위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돈만 생기면 도박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돈을 빌리러 왔습니다. 돈을 빌려주는 것이 선일까요, 아니면 거절하는 것이 선일까요? 거절하는 것이 선입니다. 모든 선은 그 바탕에 진리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진리가 무엇입니까? 돈을 빌려주면 그 사람을 망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에게는 아무리 어려워도 돈을 빌려주지 않는 것이 선입니다.

 

인간의 진리 안에는 선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또 진리라고 하더라도 생각만 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진리에는 선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주님은 행동하는 진리 안으로 오셔서 그곳에 선으로 존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선이 없는 진리를 맛을 잃은 소금에 비유하시고 거름으로도 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레위기 2장 13절에서 여호와께서는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언약의 소금’이라고 하신 까닭은, 언약은 주님과의 결합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선이 들어있지 않은 진리를 가지고는 주님과 결합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끝으로, 주님께서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당시에도 그렇고, 오늘날에도 그렇고,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뿐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시는 것은 바로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즉 말씀을 이해하는 사람은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귀는 순종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 오늘도 주님의 제자가 되는 길에 대해 말씀을 함께 나눴습니다. 오늘 말씀을 공부하면서 주님께서 왜 부모와 처자와 형제를 미워하라고 하시는지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생각해 보니 별 생각 없이 했던 많은 일들이 주님을 위한 일이 아니라 자아와 세상을 위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삶의 곳곳에 그런 잘못들이 퍼져 있는 이유는, 그동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지 않고, 인간의 생각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생각만 하고 삶에 적용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진리, 또는 삶에 적용하지 않는 진리는 맛을 잃은 소금과도 같아서 쓸모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는 선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이 없는 진리를 가지고는 영적으로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을 차지도 덮지도 않은 미지근한 자, 롯의 아내처럼 늘 뒤를 돌아보는 자라고 하십니다. 주님 말씀을 따라 항상 진실하기를 원하고 낮아지기를 원하며 온유하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이제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는 모든 성도와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웃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31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32롯의 처를 기억하라 (눅17:31-32)

 

아멘

 

원본

2021-03-28(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12-10(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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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년생 대한민국 남자 기대수명이 21.8세... (2023/12/5)

 

완전생명표_성_연령별__20231206101440.xls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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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년생 여자는 23.7세입니다. 구글링을 하니 나오는, 여성정책연구원 통계DB 완전생명표에 나오는 수치입니다. 참고로, 39년생 여자는 7.7세, 46년생 여자는 12.5세, 43년생 남자는 7.9세 등이 그 남은 기대수명입니다. 저는 61년생인데... 그러면, 이 통계대로라면, 제게 남은 시간은 22년이 채 안 되는군요...

 

꼭 이걸 신봉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러나 유의미한 무슨 지표는 되지 싶습니다. 가령, 앞으로는 절대 시간을 허투루 쓰면 안 되겠다. 앞으로는 오직 천국 입국 조건, 즉 주님의 신성에만 올인해야겠다 결심하는 등 말이지요.

 

저의 경우, 스베덴보리의 저술들 번역하는 일만 하기에도 너무 빠듯할 것 같은데요, 여러 저술 중 백미인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년 시작, 총 8년에 걸쳐 저술된,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라틴 주석, 총 10,837개의 글)의 경우, 하루 다섯 개씩만 잡아도 6년!

 

이 외에도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232),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581), ‘결혼애’(Conjugial Love, 696), ‘하나님의 섭리’(Divine Providence, 435),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299), 그리고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851) 등 꼭 번역을 남기고픈 주요 저작들만 추려도 4,094개의 글이나 되는데다가...

 

스베덴보리의 책들은 그 내용이 내적(內的, internal)이요, 영적이기 때문에, 읽어보시면들 아시겠지만, 뇌가 마비될 정도로 그 내용이 깊고 높아 어렵습니다. 하여, 1차 결과물들인 번역들과 일반 독자들을 이어주는, 무슨 가교역할을 할, 좀 대중적 풀이들이 필요한데요, 사실 이 2차 결과물들이 더 요긴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어야 보배이기 때문이지요!

 

특별히 그의 모든 저작 중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의 경우, 그 엄청난 분량에도 불구, 이미 두 종류의 한글번역들이 나와 있는데요, 정말 고생고생하셔서들 번역하셨을 줄 믿기에 이 자리를 빌어 존경과 감사의 인사말씀 올립니다만... 그러나 저의 역량 때문인지 이 기존 번역들이 제게는 좀 맞지가 않더군요... 그래서 오랜 시간 고민하다가 그냥 제가 직접 번역하자 마음 먹게 된 것입니다.

 

번역 자체도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번역자 본인이 영계에 대한 나름의 이해와 그 내면이 열려야 하기 때문인데, 그래서 영어나 라틴을 좀 한다고 바로 번역할 수 있는 게 절대 아니고, 스베덴보리를 한 4, 5년 해야 겨우 제대로 된, 걸음마 수준의 번역이라도 할 수 있지요. 이 부분에서는 전문 번역가라도 예외가 없습니다. 번역의 전문성은 있지만 이 책에 합당한 내면이 열리지 않았을 경우, 그런 분의 번역은 도저히 감출 수 없는 어떤 엉뚱함, 살짝 영혼 없는 번역이 나타나거든요... 저 역시 이 문제 때문에 창세기 앞 부분만 일곱 번째 번역 중인데요, 이제는 더이상 유턴할 시간이 없어 이런 '처음부터 다시!'를 그만하고 그냥 쭈욱 가야만 할 것 같습니다. 지난 5년, 이런 되풀이를 반복한 것은 하다 보니 너무 바보같은 번역, 너무 어처구니 없는 실수, 마치 장님, 코끼리 만지듯 한 번역을 한 게 하고 나면 또 보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만 62세를 조금 넘었습니다. 제가 언제까지 이렇게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키보드를 칠 수 있을까요? 저는 한쪽 눈이 안 보이는, 그리고 다른 눈은 사분의 일이 안 보이는 경험을 한 2년 했습니다. 지금은 주님의 은혜로 많이 회복, 번역하는 데 큰 지장은 없습니다. 운전도 별 무리 없고요. 그러나 늘 긴장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 눈을 필히 영양가 있게 써야만 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저도 모르게 유튜브 보는 일에 넋 놓고 있을 때가 많아 참 안타깝습니다...

 

스베덴보리는 1688년에 태어나 1772년에 떠났습니다. 저도 저 위 기대수명만큼만 더 머물다가 간다면, 얼추 스베덴보리처럼 가게 되는데요... 그는 떠날 때, 자기가 떠나는 날을 알고 있었고, 저 위 마지막 저작, ‘참된 기독교’를 1771년에 끝마치고, 이듬해 어느 주일 오후, 아주 포근하고 향기롭게 눈을 감았습니다. 깔끔하게 떠났지요. 저 역시 떠나는 날까지 일하다가 깔끔하게 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자식들을 비롯, 주변 사람들 폐 끼치지 않고 갈 수 있으니까요... 저대로라면, 저희 사모는 제가 먼저 가고 한 이 년 후, 따라오겠네요. ㅎㅎㅎ

 

자식들은 이런 얘기하면 질색들을 하겠지만... 그러나 나름 또 유익도 있겠지요. 저는 어머님은 고3 때인 1980년 9월에, 아버님은 대졸 때인 1988년 2월에 제 곁을 떠나셨는데요, 만일 그 시절에 저런 통계가 존재했다면, 그래서 대략 부모님이 앞으로 얼마를 더 사시겠다 그 기대수명을 알고 있었더라면, 좀 더 다른 시간들을 보냈을 텐데 하는, 진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가령, 아버님의 경우, 옛날엔 화장실이 밖에 있었고, 그래서 특히 추운 겨울엔 방마다 요강이 있어 그 방안 요강으로들 해결했지요. 저는 그 시절, 중1에서 고1 때였는데, 제 기억에 아침에 요강 비우는 건 늘 칠순을 바라보시는 아버님이셨습니다. 저는 더럽다고 거의 손도 대지 않았거든요... 저는 지금은 이런 거 하나까지 다 후회가 됩니다. 그 시절, 불과 2년 후에 어머님이 그렇게 갑자기 떠나실 줄은, 그리고 아버님이 8년 후, 그렇게 또 어머니 뒤를 따르실 줄은 정말 몰랐거든요!

 

이제는 주신 소명 마치는, 이 쓰임새의 일에만, 그리고 그와 더불어 더더욱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의 삶에만 올인해야겠습니다. 아직도 이 나라, 특히 내년 총선 걱정이 크지만, 균형을 잡아야겠다, 이제 저 나라로 이민 갈 준비도 착실히 하면서... 하는 생각을 오후 잠시 쉬면서 이렇게 해봅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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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03(D1)-주일예배(2517, 눅14,25-30), '부모와 처자, 형제자매 및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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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03(D1)-주일예배.축도.pdf
0.23MB

 

https://youtu.be/SHW97au7zXo

 

 

'부모와 처자, 형제자매 및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의 속뜻

 

 

25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 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8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눅14:25-30)

 

 

주님 신앙 안에서 그의 계명에 따라 사는 사람들한테는 영적인 시험이 있는데, 이 시험은 그들이 자기들과 같이 있는 악한 영들을 쫓아낼 때 있습니다. 이 악한 영들은 그들의 욕망과 마치 한 몸처럼 행하는 자들입니다. 다음 말씀에 나오는 십자가는 바로 이 시험을 뜻합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마10:38) (계시록 속뜻 639:2) By “temptations” are here meant spiritual temptations, which exist with those who have faith in the Lord and live according to his commandments, when they drive away the evil spirits that are with them, who act as one with their lusts. These temptations are signified by “the cross” in the following passages: And he that taketh not his cross and followeth after me is not worthy of me (Matt. 10:38).

 

 

복음서에 보면 주님이 가시는 곳마다 많은 무리가 모였다고 합니다. 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이 있는데요, 가령 키가 작은 삭개오가 주님을 보려고 뽕나무 위로 올라간 이야기, 주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나 되는 무리를 먹였다는 에피소드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주님을 따라다녔을까요? 병을 고치려고 온 사람들도 있었을 테고, 단순히 기적을 보기 위해 온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님의 놀라우신 말씀을 듣기 위해 온 사람들이 더 많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께 나아왔던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자신들이 원하는 것들을 얻어갔습니다. 그러나 그 많던 무리 중 마지막까지 남아 주님의 곁을 지켰던 사람은 불과 몇 명이 안 되었는데요, 주님 골고다 십자가 마지막 현장까지 함께했던, 주님이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과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몇 명의 여인들뿐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많은 무리가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였습니다. 말씀에서 ‘무리(multitude)는 진리를 뜻하는데요, 그러므로 주님이 가시는 곳에 무리가 따라다닌다는 것은 진리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5, 6절입니다.

 

25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 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되려면, 부모와 처자, 형제와 자매 및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부모와 처자,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는 것은 신앙인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덕목입니다. 십계명에도 부모를 공경하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들을 미워하라고 하시는데요, 그 이유가 뭘까요? 여기 ‘부모와 처자, 형제와 자매’는 그 속뜻으로는, 실제 부모와 처자, 형제와 자매가 아니라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모든 악과 거짓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자아 사랑을 뜻하고, ‘어머니’는 세상 사랑을, ‘처자와 형제, 자매’는 그 사랑에서 나오는 온갖 악한 애정과 거짓된 생각을 뜻합니다. 그것은 모두 진리와 반대되는 것들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마땅히 그것들을 미워해야 합니다. ‘자기 목숨을 미워하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숨’은 자아라고 하는 인간의 타고난 생명을 뜻하기 때문인데, 인간의 자아는 악과 거짓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아를 사랑하는 사람은 선과 진리를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사랑한다면, 자신에게 이익이 될 때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도 선과 진리를 그 자체로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선하고 진실한 것을 그 자체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웃을 위해 자신을 버릴 수 있는, 그런 숭고한 마음이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도 사람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불교 신자들은 인간의 내면에 부처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그들이 말하는 부처는 바로 주님이시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러니까 그들은 사람이 곧 하나님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 교회에서는 사람 안에 계신 주님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결합해야 할 영원하고 무한한 존재이시지만, 그러나 그분이 곧 우리 자신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거듭난 사람들은 마치 자기가 주님인 것처럼 말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것은 내면에 계신 주님이 하시는 것이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복음서 여러 곳에서 부모와 처자, 형제와 자매를 미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부모와 처자, 형제와 자매 및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라 하신 주님이 27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7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자아와 세상에 속한 것을 미워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요, 왜냐하면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생명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버리는 일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아와 세상을 버리는 일은 한 번에 되지 않습니다. 많은 시험과 내적 싸움이 필요한데요, 주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신 것은 그래서입니다. ‘십자가’는 내적 싸움과 시험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먹을 것이나 입을 것, 또는 주거 문제와 같은 세상적인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물질 그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것들을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느냐, 곧 그 쓰임새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세상 것들은 주님과 이웃을 위해 쓰일 때, 비로소 가치가 있다는 인식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시험에 임할 때, 능히 시험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시험에는 내적인 시험이 있고, 외적인 시험이 있습니다. 내적인 시험은 자신의 자아, 또는 자아의 악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외적 시험은 뭘까요? 외적인 시험은 질병이나 불운 같은 것이며, 또는 주님이 바리새인들로부터 공격을 받으신 것처럼, 교리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교리적으로 공격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시험의 성격과 종류가 모두 다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외적인 시험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내적인 시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험이 다르다고 걱정할 일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각자에게 맞는 시험을 허용하시고, 그 시험을 통해 그들에게 있는 그들 고유의 악들을 몰아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28절에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28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망대는 적들이 쳐들어오는 것을 감시하는 탑입니다. 그래서 ‘망대를 세우는 것’은 영적으로는 진리를 획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는 시험이 올 때, 악과 거짓을 미리 감지하고 맞서 싸우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대해 “천국의 비밀” 8960번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시험은 사람의 악과 거짓 안에 있는 악령들이 끌어들이는 것이며, 그때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주님의 천사들은 신앙의 진리를 불러내 그것으로 악령들을 막아낸다.” 그러니까 신앙의 진리가 바로 영적인 망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망대를 준공하기까지 자기가 가진 것을 계산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신앙의 진리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시험에서 이겨야 하는데, 그것이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시험에서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시험의 악들과 맞서 싸우고, 한편으로는 쉬지 않고 주님께 도움을 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시험에서 한 번 두 번 이길 때, 주님으로부터 우리 마음속에 신앙의 진리가 심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내면에 세워지는 진리의 망대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진리를 소유하기 전에는 사실은 신앙이 있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냥 신앙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일 뿐이지요.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는 시험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29절과 30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9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기초’는 신앙을 형성하는 교리의 지식을 뜻합니다. 따라서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한다’는 것은 교리의 지식만 있고, 신앙의 진리는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많은 신앙인이 그런 상태에 있습니다. 교리에 대해 조금 안다고 해서 신앙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를 위한 싸움에서 이겨야 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사력을 다해 시험에서 이길 때, 주님께서 신앙의 진리를 주십니다. 그리고 신앙의 진리를 소유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점점 더 많은 시험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신앙의 진리 안에는 선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때부터가 신앙이 있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신앙의 진리가 아니라 교리의 지식만 가지고 있는 사람은 시험에서 항상 집니다. 기억 속에만, 즉 알고만 있고, 삶에 적용하지 않는, 즉 실천하지 않는 교리의 지식 안에는 선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의 믿음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늘 제자리걸음을 합니다. 앉은뱅이 신앙이지요. 바로 이런 사람들이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공사를 시작하고 마치지는 못하는 사람들이지요.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들을 비웃는다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이 이끄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선과 진리가 이끄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가 되고자 사람은 자아와 세상으로부터 오는 악을 미워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부모와 처자, 형제와 자매 및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라 하신 것은 그 때문입니다. 부모와 처자, 형제, 자매는 영적으로, 즉 그 속뜻으로는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오는 모든 악에 대한 애정과 거짓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자아와 세상에 속한 악은 한 번에 없어지지 않고, 단계적으로 천천히 없어집니다. 그 과정은 이렇습니다. 처음에는 말씀으로부터 교리를 배웁니다. 그래야 무엇이 자아이고, 자아의 악인지를 알기 때문이지요. 그다음에는 교리의 지식을 그때그때 삶에 적용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내적 싸움이 시작됩니다. 겉 사람의 저항 때문이지요. 그 싸움이 바로 각자가 짊어지고 갈 십자가입니다. 주님이 이런 말씀을 전하실 때, 알아듣는 사람이 몇이나 됐을까요? 대부분 알아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알아듣지 못할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 질문에 대해 주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듣고 죄를 지으면 더 큰 화를 입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차라리 그들이 모르는 게 낫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리 중에는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참된 진리로 다시 오신 주님을 알아보는 자가 거의 없습니다.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만 주님을 알아봅니다. 그런가 하면 진리를 알았음에도 막상 시험이 닥치면 그냥 주저앉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각자의 마음 상태가 모두 다르기 때문인데요, 우리 모두 얼마나 어렵게 이 진리를 만났습니까? 항상 자신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서 돌을 골라내고 가시덤불을 제거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의 씨가 깊이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주님께서는 망대를 높이 세우려다 기초만 쌓고 마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지옥의 악령들로부터 비웃음을 살 것입니다. 참된 진리로 다시 오신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진정 복된 사람들입니다. 진리의 망대를 높이 세우시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주님을 따르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막10:21)

 

아멘

 

원본

2021-03-2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12-03(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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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6(D1)-주일예배(2516, 눅14,15-24), '주님의 큰 잔치를 맛보는 사람들'.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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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6(D1)-주일예배.축도.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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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XSMx16Q-jKo

 

 

 주님의 큰 잔치를 맛보는 사람들

 

15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16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7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18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19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20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21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2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23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24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눅14:15-24)

 

 

만찬에서의 떡은 사랑의 선으로서 주님을 뜻하고, 포도주는 신앙의 진리로서 주님을 뜻하며, 동시에 인간이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이 두 가지가 교회의 본질이며, 그러므로 예배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천국의 비밀 10149)

 

 

※ 오늘 본문 역시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본문입니다. 특히 23절 말씀,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는 말씀은 교회들, 특히 본당이 큼지막하게 있는 교회들마다 대형 세로 표어에 써서 특히 전도와 선교, 복음 전파를 강조하는 그런 말씀이기도 하지요. 오늘도 우리에게 익숙한 본문을, 그러나 여전히 그 속뜻으로 살펴보는 시간을 우리는 갖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다들 너무 바빠 남의 잔치에는 관심이 없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이웃에게 만찬을 베풀려거든 가까운 사람을 부르지 말고, 대신 가난한 자, 몸 불편한 자를 먼저 부르라는 뜻일까요? 이 말씀에는 더 깊은 의미, 속뜻이 숨겨져 있는데요, 먼저 15절로 17절부터 보겠습니다.

 

15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16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7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여기서 잔치를 베푸는 집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잔치가 열리는 곳은 주님의 교회, 또는 천국이고요. 교회와 천국은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 마시는 것은 주님에게서 진리를 배우는 것이고, 먹는 것은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진리와 선을 먹고 마셔야 주님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인간의 생명은 겉으로는 생명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악과 거짓일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매일 같이 우리를 당신의 잔치에 초대하십니다. 그런데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 모두 자신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잔치에 참여할 수 없다고들 합니다. 본문에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하는데요,

 

18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19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20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첫 번째 사람은 밭을 샀기 때문에 잔치에 오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이 ‘밭을 산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한글 성경에는 ‘’으로 번역되어 있지만, 영어 성경에는 ‘ground’로 되어 있습니다. ground는 밭으로도, ‘’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데, 전자의 경우, 교회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항상 교회라는 밭에 진리의 씨를 뿌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ground는 교회가 아니라 ‘영적으로 가장 낮은 것’을 뜻하며, 그래서 밭이라고 번역하면 안 되고, 땅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가장 낮은 것이란 무엇입니까? 영적으로 높은 것은 천국에 속한 것이고, 낮은 것은 세상의 물질이나 명예 같은 세속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이 밭을 산다는 것은 교회 안의 사람들이 영적인 것에는 뜻, 관심이 없고, 오직 세상 것만을 좇는, 세속적인 것만 추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걸 그는 잔치에 갈 수 없다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 사람은 소의 겨리를 샀기 때문에 잔치에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소의 겨리가 뭘까요? 겨리라는 것은 소가 밭을 갈 때 사용하는 도구들인데, 예를 들면 쟁기나 멍에 같은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멍에는 무슨 뜻일까요? 멍에는 사람들을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세상 욕망을 뜻합니다. 욕망을 좇는 일은 어찌 보면 자유롭고 행복한,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지만, 그러나 이 욕망이라는 것은 만족을 모릅니다. 그 결과, 세상의 욕망은 사람을 가두고 속박하는 감옥이며 멍에입니다. 한편, 주님이 지워주시는 진리의 멍에도 있습니다. 그것은 욕망에 매인 사람을 구원하는 멍에입니다. 그것을 멍에라고 부르는 이유는 욕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진리로 자신을 강제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11:28-30)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소의 멍에를 산 사람이나 앞에서 땅을 산 사람이나 영적으로는 비슷한 사람들이지요. 즉 주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세상 즐거움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 물론 밭을 샀기 때문에 보러 가고, 새로 산 소 다섯 겨리를 시험하는 일이 무조건 악한 일은 아닌, 그저 일상의 일이지만, 그러나 다른 날에도 할 수 있는 이런 일을 굳이 이 큰 잔치에 특별히 초대받은 날에 하고자 하는 걸로 보아, 그리고 미리 선 초청을 한 상태로 일정 조정할 여유가 이미 충분히 있었음에도, 이들이 이러는 것은 이들은 그냥 가기가 싫었던 것이며, 이 큰 잔치를 베푼 주인과 평소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구나 짐작해 봅니다.

 

그러면 세 번째 사람은 뭐라고 했나요? 장가를 가서 잔치에 참여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장가를 가는 것은 육신의 쾌락이나 세상 즐거움하고 결혼하는 것을 의미하는데요, 이 역시 거 참 이유치고는...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 사람들은 이렇게 세상의 욕망에 빠져 삽니다. 그것에 대해 마태복음 24장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37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39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마24:37-39)

 

노아의 홍수는 아담교회(태고교회)가 무너지고, 새로운 교회인 노아교회(고대교회)가 세워질 때의 진통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노아 시대에 사람들이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은 아담교회의 마지막 때, 사람들이 주님이 아니라 세상의 욕망과 결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모두 참여하지 못하겠다고 하자 종들이 주인에게 돌아와 그대로 고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화를 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1절 말씀입니다.

 

21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주님은 당신의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화를 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주인이 화를 냈다고 표현한 것은 인간에 대한 주님의 사랑, 또는 구원의 열정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여기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은 누구일까요? 주님을 믿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이웃을 사랑하는 교회 밖 선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을 몸 불편한 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행하는 선이 진리를 바탕으로 한 온전한 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결핍이 있는 것이지요. 선과 진리는 서로 균형을 이뤄야 하는데요, 선은 진리를 바탕으로 행해야 하고, 진리 또한 그 바탕에 선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주인이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한 것은 주님께서 교회 밖 선한 사람들을 데리고 새로운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스스로 주님의 교회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종들이 주인의 명에 따라 이들을 데리고 와 자리를 채웠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비어있는 곳이 있습니다. 종이 이 사실을 고하자 주인이 종에게 다시 말했습니다.

 

22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23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앞 절에서는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저들을 데리고 오라 하더니, 여기서는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합니다. 이 ‘길과 산울타리 가’, 곧 길에서 만난 자들과 울타리 근처에서 만난 사람들은 어떻게 다를까요? 둘 다 진리 알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선을 올바르게 행할 목적으로 진리를 구하는 사람들이고, 울타리 근처에서 만난 사람들은 세상 거짓과 맞서 싸울 목적으로 진리를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울타리는 거짓과 맞서 싸우는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진리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이웃을 올바르게 사랑하기 위해서거나 또는 악과 거짓에 맞서 싸워 이기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힘으로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고, 또한 악과 거짓과 싸워 이길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길에서 데리고 온 사람들과 울타리 근처에서 데리고 온 사람들은 모두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을 가진 사람들을 뜻합니다. 주님은 그런 순수한 사람들을 데리고 새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며, 절대로 진리를 강요하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하시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 속뜻은 이렇습니다. 새 교회가 처음 세워질 때의 모습은 마치 길에 나가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을 가진 사람들을 모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진리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극히 적고, 교세 또한 빈약합니다. 누구나 이 상태가 계속된다면 교회가 없어져 버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인간의 생각일 뿐이며, 주님께서 이 교회를 급하게 부흥시키실 때가 옵니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우리는 모르고, 오직 주님만이 아십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미약하나마 이 교회를 유지시켜야 하는 사명을 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들이 주인에게 자리가 아직 비어있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우리 새 교회인들이 ‘주님, 불과 몇 평도 안 되는 이 교회에 왜 이렇게 빈자리가 많습니까...’라고 하며 안타까워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때가 되면 주님께서 급하게 사람들을 모아 이 교회를 크게 부흥시키실 것입니다. 사람들을 강권하여 잔치에 데리고 오는 것은 바로 그때를 말합니다. 24절에서 주인이 말했습니다.

 

24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전에 청하였던 사람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주님 당시에는 유대교회 사람들이고, 오늘날에는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주류 기독교인들인데, 특별히 그 가운데 겉과 속이 다르며, 저들이 말하는 믿음과 사랑이 따로 노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겉으로는 진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하지만, 속으로는 진리를 부정하거나 파괴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런 자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잔치에 초대받았으나 아무도 응하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주님의 잔치에 참석하는 것보다 세상의 재물과 명성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며, 외적인 것, 곧 겉에 관한 것에 너무 사로잡힌 나머지 내적인 것, 곧 속에 관한 것의 가치를 전혀 몰랐기 때문입니다. 지상의 일에는 시력이 2.0, 3.0, 4.0에 가까웠으나 천국의 일에는 아주 깜깜, 장님이었기 때문이지요. 본문에는 그들을 땅을 산 사람, 소의 겨리를 장만한 사람, 장가를 간 사람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참된 진리를 찾기 위해 ‘시내의 거리와 골목’, ‘길과 산울타리 가’를 헤메다 주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잔치에 참여하게 된 우리는 복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잔치가 아직 끝난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의 잔치에 우리를 부르십니다. 천국의 진리와 선으로 먹이고 입히시기 위해서지요. 하지만 주님이 부르실 때 우리는 기꺼이 항상 응하고 있을까요? 그동안 우리 모습을 보면, 주님이 베푸신 밥상과 세상이 차려놓은 밥상 사이에서 갈등할 때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자아와 세상에 속한 것들이 더 달콤해 보였기 때문이지요. 이와 관련된 말씀이 계시록 3장 15절에 있습니다. 거기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계3:15)

 

차지도 뜨겁지도 않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신앙인의 상태가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는 것이고, 그러므로 두 주인을 섬기는 상태입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이 그런 상태에 있습니다.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 믿고, 인애, 체어리티, 이웃 사랑의 삶에는 전혀 관심이 없거나 마지못해 눈길 한번 주는 수준입니다. 우리 새 교회 교인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머리로는 진리를 아는데 행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지옥은 매 순간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때 자신의 힘으로 이기려 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그간 경험을 보면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의 것은 모두 내려놓고, 오직 주님의 지혜와 능력에 기대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이 집요한, 매 순간의 시험들을 완벽하게 이길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계2:17)

 

주님의 말씀을 믿으시고 매일 같이 이기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6:35)

 

아멘

 

원본

2021-03-07(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11-2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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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9(D1)-주일예배(2515, 눅14,7-14),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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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9(D1)-주일예배.축도.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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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JJ4ABNVwJLA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7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8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9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10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앉으라 하리니 그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11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12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13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14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눅14:7-14)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 또 그런 이유로 선을 행하는 것은 보상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공로를 일에 돌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고, 하나님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행하고 또한 생각하기 때문이다. (참된 기독교 440)

 

 

본문을 보면 주님께서 어떤 집에 초대를 받으셨는데 초대를 받은 다른 사람들이 서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그 모습을 보시고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7절로 9절의 말씀입니다.

 

7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8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9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이 말씀에서 혼인 잔치의 속뜻은 선과 결합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속뜻, 곧 영적인 의미로 남녀의 혼인은 선과 진리의 결합, 또는 신앙과 신앙에 따른 삶의 결합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 속에서 혼인 잔치가 열리는 곳은 어디일까요? 첫 번째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말씀을 통해 진리를 배우고, 그것에 따라 인애(仁愛), 이웃 사랑인 체어리티(charity)를 실천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직장입니다. 새 교회에서는 직장에서 맡은 일을 공정하고 정직하게 하는 것이 가장 큰 체어리티의 실천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거나 병든 사람을 보살피는 것, 교회와 자선단체에 큰돈을 기부하는 것도 체어리티입니다. 그러나 새 교회 교리에 의하면 그것은 체어리티의 첫 번째가 아니라 두 번째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난한 이웃을 열심히 구제하면서도 직업과 관련된 일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하지 않으면 체어리티를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보면 우리는 매일 같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느 곳에 있든지 주님께서는 항상 진리에 따라 체어리티의 삶을 살도록 권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혼인 잔치 집에서 스스로 높은 자리에 앉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이를테면 어디서나 자기가 중심이 되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궂은일, 힘든 일, 표 안 나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 미루고, 자기는 편한 일, 돋보이는 일만 하려는 사람입니다. 일 자체에는 뜻이 없고, 오직 대우만 바라는 사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늘 의식하는 사람입니다. 분수를 모르고, 콧대만 높은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며, 그러다 보면 중요한 일에서 제외되고 계속 사소한 일만 합니다. 집주인에 의해 끝자리로 보내진다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말씀에는 청한 사람에 의해 결국 끝자리로 보내졌다고 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자기 스스로 기회를 계속 놓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바로 다음 10절, 11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10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앉으라 하리니 그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11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일을 통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진리를 선으로 만들어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신 이유입니다. 혼인 잔치에 참석한 사람은 자기와 다른 사람을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어디 앉았는지 무슨 음식을 먹는지 알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주어진 자리에 앉아 차려진 음식을 맛있게 먹으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나 직장에서도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맡겨진 일을 성실히 하면 됩니다. 궂은일이나 단순한 일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하면 됩니다. 그것이 끝자리에 앉아 체어리티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담임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몇 년 전에 지하실 식당에 습기가 많아 의자에 온통 곰팡이가 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교우 한 분이 평일에 교회에 오셔서 집사람과 함께 그것을 닦았던 일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곰팡이 입자들이 많이 날아다녔을 것입니다. 또 곰팡이 제거액 때문에 약품 냄새도 독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개의치 않고 의자들을 모두 닦고 깨끗이 말렸습니다. 나중에 제습기를 비치해서 곰팡이가 모두 사라졌지만, 그때 기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 저도 비슷한 일이 하나 생각나 나눕니다. 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있었던 일인데, 당시 제게 맡겨진 여러 사역 중 하나가 미디어여서 그날도, 그날은 평일이었는데, 오전에 이쪽 주일학교 교육관 건물, 마침 3층에 있던 때였습니다. 무심코 창밖을 보니 오전이었는데, 어느 할머니께서 호미를 하나 들고 오시더니 도로변 화단에 들어가 흙을 깊이 긁어 뒤집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시력도 좀 그렇고, 거리도 좀 되어 뉘신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제법 긴 그 화단을 꾸역꾸역 다 마치 소 쟁기질하듯 그렇게 뒤엎으시고는 조용히 떠나시는 것이었습니다. 마침 교회 마당에 인적도 거의 없어 아마도 그걸 본 사람은 제가 유일하지 싶습니다. 봄이 시작되어 겨우내 얼어 단단해졌던 화단 흙을 그렇게 부드럽게 하신 건데, 저는 보는 내내 마음이 참 좋아 마침 들고 있던 캠코더로 그걸 조금 담아놓았습니다. 아마 하늘의 하나님도 지상을 두루 감찰하실 때, 마음이 그러시겠다 싶습니다. 지금도 그 교회 미디어실 자료를 찾아보면 아마 그 영상이 어디 있을 겁니다.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 스스로 끝자리에 앉는 것은 어쩌면 그런 모습일 수 있습니다.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대가 없이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낮은 자리에 앉아 묵묵히 맡은 일을 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어느 날 오셔서 벗이여 올라와 앉으라고 하십니다. 그때 그는 모든 사람 앞에 영광된 사람이 됩니다. 주님은 스스로 낮은 자리에 앉은 사람을 때가 되면 높이 들어 쓰십니다. 그래서 본문에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12절과 13절에서 주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2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13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이웃을 초대해 점심이나 저녁을 베풀 때는 벗이나 형제,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초대하지 말고, 차라리 가난한 자들, 몸 불편한 자들, 저는 자들, 맹인들을 초대하라고 하십니다. 점심이나 저녁을 베푸는 것은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벗이나 형제,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은 누굴까요? 요한복음 15장에서 주님은 내 명령대로 행하는 사람이 곧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14절)

 

또 누가복음 8장 21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내 어머니요 형제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한 마디로, 친구와 형제는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이며,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좋아할 만한 성품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즐겁습니다. 그들의 말투나 행동, 그리고 물질적으로 서로 주고받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친구나 형제에게 선을 베푸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 저는 자들, 맹인들과 사귀는 것은 다릅니다. 속뜻으로 가난한 자들, 몸 불편한 자들, 저는 자들, 맹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진리와 선이 무엇인지 모르는 교회 밖의 사람들이며, 그럼에도 진리를 알기 원하는 진실하고 선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이 주변에 있을 때, 그들에게 먼저 사랑을 베풀고, 그들이 원하는 진리를 가르쳐 주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 저는 자들과 맹인들에게 점심과 저녁을 베푸는 일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14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14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그동안 다른 교회에 다니는 분들과 새 교회 교리에 대해 몇 번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친절하게 대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랬던 이유는 진리를 배우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편견을 버려야 하는데 그분들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 각자 믿고 싶은 대로 믿으면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만났던 분들, 즉 진리를 모르면서도 안다고 논쟁을 걸어왔던 분들이 사실은 가난한 자요 몸이 불편한 자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점에서 그분들에게 친절하게 대하지 못한 것을 반성합니다.

 

※ 위 사례는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 사례이지만, 제게도 남의 얘기가 아닌 듯하여 그대로 옮겼습니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선 상대가 진리를 원해야 하고, 또 배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최선을 다해 친절하게 대해야 합니다. 그것이 보상을 바라지 않고, 맹인과 저는 자에게 인애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할 때 복이 있다 하시고, 의인의 부활 시에 갚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의인이란 세상 살 때 이웃에게 체어리티의 선을 행했던 사람입니다. 그들은 사후에 주님 앞에 나갈 때 주님으로부터 상을 받습니다. 그 상은 어떤 것입니까? 진리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영적 총명함, 그리고 지혜입니다. 그리고 그 지혜와 총명함에서 나오는 천국의 기쁨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지혜와 그 지혜에서 비롯한 기쁨이 어떤 것인지는 세상 살 때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상 그 어떤 재물이나 명예 따위와는 전혀 비교할 수 없이 고귀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는 스스로 높은 자리에 앉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며 스스로 낮아지고자 하는 자는 때가 되면 주님께서 높이시고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또 이웃에게 선을 베풀 때는 보상을 바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할 때 의인의 부활 시에 받을 상이 크다고 하십니다. 누구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근거 없는 자부심이나 교만 같은 것이 있습니다. 사람을 사귀어도 힘 있는 사람, 아는 게 많은 사람, 부유한 사람하고만 사귀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누구나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가 도와줄 테니 그 모든 것을 이겨내라 하십니다. 교만함과 보상을 바라는 마음, 육신의 정욕과 복수심이 없어지려면 죽을 것 같은 영혼의 고통과 십자가 시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 시험 가운데서 우리의 자아가 마치 죽은 자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를 의인의 부활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것에 대해 주님은 요한복음 12장 24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하셨습니다. 또 요한복음 5장 21절에서는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요5:21)

 

라고 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 열매란 어떤 것입니까? 교만한 마음, 보상을 바라는 마음을 버리는 것이며, 온갖 정욕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이웃을 섬기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처럼 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며, 주님께서 함께하셔야만 합니다. 스스로 낮은 자리를 택해 앉으며, 보상을 바라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는 은혜가 서울 새 교회와 한결같은 교회의 모든 성도, 그리고 진리를 사랑하는 이웃들과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눅6:35)

 

아멘

 

 

원본

2021-02-2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11-19(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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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2(D1)-주일예배(2514, 눅14,1-6), '안식일에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들어가신 주님'.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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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s9KrXJTXEo

 

 

안식일에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들어가신 주님

 

 

1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2주의 앞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3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4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5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6그들이 이에 대하여 대답하지 못하니라 (눅14:1-6)

 

 

주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해서 주님에 대한 표상(表象)이 끝났을 때, 안식일은 신성한 것을 가르치는 날이 되었고, 그러므로 일에서 벗어나 휴식하는 날, 구원과 영생에 대해 묵상하는 날,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날이 되었다. (참된 기독교 301)

 

 

오늘부터 누가복음 14장을 들어갑니다. 원래 11월 첫 주인 지난주부터였는데 지난주는 저의 장인, 장모 이장(移葬) 날짜가 갑자기 주일로 앞당겨 잡히는 바람에 주일예배를 이장 예배로 대신 드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장 예배는 개장(開葬), 화장(火葬) 및 납골(納骨), 이렇게 세 번의 예배로 드렸는데, 모두 교회 유튜브와 블로그에 올렸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COVID-19이 지속되던 시절, 코로나가 가져온 많은 변화 중 가장 두드러졌던 한 가지는 바로 많은 일들이 비대면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는데요, 물건을 구입할 때도 인터넷으로, 사람들끼리의 모임도 인터넷 공간에서 말이지요. 심지어 예배도 각자의 집에서 인터넷으로 드리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었었지요. 세월이 그렇다 보니 이제 본격적으로 비대면의 시대가 오는 것이 아니냐 하고 우려하는 분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새 교회에서는 가장 작은 천국이나 교회는 개인의 마음속에 있다 가르치는데요, 그렇다면 꼭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려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으시죠? 그러나 ‘천국의 비밀’ 3147번 글의 10번 항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외적 예배 의식에 묶어두시는 이유는 그 의식이 표상하는 내적인 것들을 통해 주님과의 교류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예배 의식이 표상하는 내적인 것들을 통해 주님과의 교류가 끊어지지 않는다고 하는데요, 그렇다면 이 내적인 것들을 표상하는 예배 의식들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예를 들면, 주님 친히 침례 요한에게 받으셨던 침례 의식이라든가, 십자가의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손수 포도주를 따라 주시고, 떡을 떼어주시면서 이 일을 오랫동안 기억하라 하신 성찬 의식 같은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외적 예배를 통해 주님과의 교류가 계속 끊어지지 않고 이어질 수 있다 하십니다. 주님은 또 마태복음 18장 20절에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다’ 하셨는데요, 여기서 ‘두세 사람’은 사람의 숫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그리고 ‘내 이름으로 모인 곳’이란 사랑과 신앙으로 예배드리는 곳, 즉 교회를 뜻합니다.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끼리 정기적으로 만나 예배를 드릴 때, 영적으로 더 많은 성장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의 사람들을 통해 나타나는 다양한 선과 진리를 통해 서로 배우는 것이 많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주님은 밤에는 감람산에서 기도하시고, 아침이 되면 직접 사람들을 만나 말씀을 전하시고 병자들을 고치셨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주님은 안식일에 어떤 바리새인의 집으로 가셔서 그곳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치십니다. 본문 1절에서는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1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주님께서 안식일에 어떤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을 방문하셨다고 합니다. 바리새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주님께서는 자주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외식(外飾)하는 자들이라 하셨는데요, 외식하는 자들은 겉으로는 경건하게 행동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거짓을 말하고, 진리를 혐오하는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외식하는 자는 위선자입니다. 위선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진리를 모르는 교회 밖의 사람들의 위선이 있고, 교회 안의 사람들의 위선이 있습니다. 주님 당시 바리새인이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위선은 교회 안의 사람들의 위선입니다. 그들은 말씀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지만, 그러나 속으로는 그와는 정반대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교회 밖의 사람이라고 해서, 그리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이라고 해서 다 위선자라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중 많은 분이 진실한 삶, 말씀을 실천하는 삶을 살고 계십니다. 여기서는 그러나 그 가운데 그렇지 못한 분들, 위선의 삶을 살고 계시는 분들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새 교회인들의 위선도 있습니다. 입으로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말하면서 정작 행하지는 않는 경우입니다. 어쩌면 본문에서 말하는 바리새인의 지도자는 바로 그런 새 교회인들을 나타내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가장 높은 차원의 진리를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다면 위선 중에서도 아주 큰 위선이기 때문입니다.

 

이 새 교회 사람들의 위선 얘기가 나왔으니 잠시 제 얘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며칠 전 밤, 아내의 부탁으로 음식물 쓰레기를 한 봉지 버리러 날이 꽤 춥지만 내려갔습니다. 우리 208동은 가장 산 쪽이라 특히나 더 바람이 불고 춥습니다. 음식물 쓰레기통을 여는데 세상에! 그 안에 커다랗고 하얀 비닐봉지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별생각 없이 꺼내는데 잘 들리질 않아요. 봤더니 아이고, 그 안에 종류별로 담아 묶은 작은 여러 봉지가 예닐곱 개 정도 들어있어 무거워서 그랬던 거지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툭 던져버리고 가면 어쩌라고... 어찌어찌 쏟아 큰 비닐은 꺼내 저쪽 비닐들만 넣는 통에 넣을 수 있었는데, 이 쏟아진 작은 비닐들은... 아... 어찌해야 하나, 이미 음식물에서 흘러나온 액체들로 뒤범벅이 되어 하나하나 뒤적이며 그 짜맨 걸 풀어 비닐들만 따로 버리기가 쉽지 않더군요. 옷도 가볍게 입고 나와 벌써 굉장히 춥기도 하고 말이지요... 그러다가 에이, 뭐 나중에 저쪽 검사 과정에서 걸러지겠지 하고는 내가 들고 간 것만 한쪽에 쏟아버리고는 돌아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그렇게 찝찝합니다. ‘그래도 너는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 하는 양심의 소리! 그래도 애써 무시하고 그냥 들어와 버렸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이런 양심의 소리에 귀를 막음, 이런 게 한두 번 반복되다가 그만 딱딱해지고 익숙해질 텐데... 큰일났습니다. 아무도 안 보는 데서 제 일상이 이렇게 큰 구멍이 쑹쑹 나고 있어서인지 제 삶에 능력이 사라지는 걸 느낍니다. 저는 이렇게 비겁한 사람입니다. 말씀의 속뜻이니 아르카나니 하고 있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저는 이렇게 말씀의 속뜻을 모르는 사람들, 아니 교회 밖의 사람들보다도 더 비겁하고 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의 집으로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집은 사람의 마음을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리새인의 집으로 들어가셨다는 것은 주님이 위선자의 마음속으로 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떡을 잡수신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위선자에게 선한 애정을 심어주시고, 그 애정을 통해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할 수 있도록 만드시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위선자와 함께 떡을 드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떡은 선, 또는 선한 애정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위선자는 겉과는 달리 속으로는 진리를 거부하는 사람을 말하는데요, 그럼에도 주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으로 들어가실 수 있었던 것은 그 사람이 본질적으로 진리를 거부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어쩌면 그는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그러므로 주님의 능력으로 위선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그의 집으로 들어가실 수가 있었고, 그와 함께 떡을 드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사람들이 주시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주님을 주시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위선자의 내면에서 주님이 일하시는 것을 바라보는 시선들입니다. 우리도 가끔 그런 경험을 합니다. 시험에서 넘어져 주님,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저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라고 고백하는데 문득 주님의 손길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어떻게 나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는지 지켜 보자.’라는 마음이 듭니다. 본문에서 주님이 일하시는 모습을 엿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2주의 앞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그런데 그때 주님 앞에 수종(水腫)병 걸린 어떤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수종병은 혈액에 문제가 생겨서 몸이 붓는 질병입니다. 속뜻으로는 말씀의 진리를 왜곡하는 질병입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의 집에서 수종병 든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은 위선자에게 진리를 왜곡하는 버릇이 있었음을 뜻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언제 진리를 왜곡할까요? 진리를 이용해 거짓된 생각을 관철하려고 할 때이거나, 또는 자아로부터 오는 악한 욕망을 정당화하려고 할 때입니다. 예를 들면, 대면 예배보다 비대면 예배를 지지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앞에서 말씀드린 성도들끼리의 만남이나 예배 의식으로 표상되는 내적인 것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오히려 말씀의 다른 구절들을 왜곡, 그것으로 자신의 생각을 증명해 보이려고 합니다. 그것이 자아의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진리를 왜곡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참된 진리 안에 들어오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그릇된 지식이나 신념들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붙잡고 있는 경우입니다. 그럴 경우, 그 지식이나 신념에 맞지 않는 진리는 버리고 맞는 것만 받아들이며, 그렇게 해서 결과적으로 진리를 왜곡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새 술은 반드시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전에 가지고 있던 낡은 지식을 가지고는 새로운 진리를 담아낼 수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를 왜곡하는 병과 바리새인의 위선은 서로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진리를 왜곡하는 것은 결국 진리 앞에 완전히 굴복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진리 앞에 굴복하지 않으면 시험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계속 넘어집니다. 그러다 보면 입으로는 진리를 말하면서 행동은 마치 진리를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결국 위선자가 됩니다.

 

주님께서 병자를 고치시기 전에 율법교사와 바리새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3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여기서 율법교사와 바리새인들은 누굴까요? 그들 역시 위선자의 마음속에 있는 것들인데, 이를테면 스스로 진리를 많이 안다 자부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왜 그들에게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물으셨을까요? 그 이유는 안식일에 대한 그들의 생각에 따라 진리 앞에 굴복하는지, 굴복하지 않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 것이 합당합니다”라고 하면, 그는 그동안의 생각을 버리고 진리 앞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합당치 않습니다”라고 하면 그것은 진리 앞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며, 만약 그렇다면 주님은 그의 병을 고쳐 주실 수 없습니다. 그가 진리이신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병을 고쳐 주시기 전에,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물으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믿었던 이유는, 십계명에 6일 동안은 힘써 일하되 7일째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6일 동안은 일하고 7일째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6일 동안 일하는 것은 거듭나기 전의 내적 싸움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7일째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거듭난 다음의 상태, 즉 내적 싸움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누구나 내적 싸움을 합니다. 그 이유는 그때에는 말로는 주님을 의지한다 하면서 사실은 자기가 가진 것들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란 신앙의 진리라든가 선한 애정 같은 것입니다. 신앙의 진리와 선은 모두 주님이 주신 것이지만, 그럼에도 거듭나기 전 사람들은 자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올 때, 마치 빛이 매질을 통과할 때 굴절되는 것처럼 굴절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거듭나기 전 선과 진리는 순수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주님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리와 선이 순수하지 않으면 그 능력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지옥의 영들이 아직 거듭나기 전인 사람을 공격할 수 있는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그들의 순수하지 않은 진리와 선으로는 지옥을 압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다음에는 사정이 전혀 다릅니다. 거듭난 사람들은 전적으로 주님을 믿고 따르기 때문에 싸움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앞에서 인도하시는 주님을 지옥이 감히 대항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듭난 다음에는 싸움이 없고 항상 평화롭습니다.

 

4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주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과연 합당하냐 물으시자 본문에는 그들이 아주 잠잠했다고 말합니다. 잠잠하다는 것은 한글 성경 번역이고요, 영어 성경에는 그들이 계속해서 평화의 상태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평화는 속뜻으로는 순진함(이노센스, innocence)에서 오는 기쁨을 뜻합니다. 그러면 순진함은 뭘까요? 어린아이와 같이 전적으로 주님을 믿고 따르는 마음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잠잠했다는 것은 그 위선자가 자신의 생각을 모두 내려놓고 주님만을 믿고 따르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뜻입니다. 신앙인들이 순진하게 주님을 믿고 따를 때 마음의 평화가 있습니다. 마침내 주님께서 수종병 든 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5절에서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5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이 말씀을 영어 성경의 번역으로 옮기면 ‘너희 중에 누가 나귀나 소가 구덩이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끌어내지 않겠느냐’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아들이라 하지 않고 나귀라고 했고요, 우물이라 하지 않고 구덩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말씀에서 나귀는 겉 사람의 진리를 뜻하고, 소는 겉 사람의 선을 뜻합니다. 겉 사람의 진리는 신앙인들이 일상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겉 사람의 선은 그러한 말과 행동의 바탕에 깔려 있는 선한 애정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나귀와 소가 구덩이에 빠졌다 했습니다. 구덩이에 빠지는 것은 진리와 선이 왜곡되거나 더럽혀지는 것을 말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신앙인들이 자아의 욕망에 빠져있을 때는 진리를 왜곡하기도 하고, 진리에 반하는 행위를 함으로써 진리를 더럽히기도 합니다. 그것이 자기의 나귀와 소를 구덩이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귀와 소를 구덩이에서 끌어내는 것은 왜곡되거나 더럽혀진 진리와 선을 주님께서 회복시키시는 것을 의미하며, 그 일을 안식일에 하시는 것은 안식일은 완전한 진리와 선을 통해 주님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태복음 12장 8절에서 주님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성한 진리를 통해서만 인간은 주님과 하나가 될 수 있으며 완전히 거듭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인자는 신성한 진리를 뜻하고, 안식일은 주님과 인간이 하나 되는 상태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새 교회 교인들은 모두 주님의 진리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는다 믿습니다. 그러나 머리로는 그렇게 믿으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생각을 믿을 때가 많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우월감을 가지기도 하고, 자아와 세상의 유혹들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이 시험에서 넘어지는 것은 바로 그러한 생각들 때문입니다. 시험에서 그렇게 자주 넘어지고 실패가 반복될 때, 그는 점점 위선자가 됩니다. 입으로는 진리를 말하면서 속으로는 거짓말을 하고 악을 행하게 되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안식일에 찾아가신 바리새인의 지도자는 어쩌면 시험을 극복하지 못하고 열등감과 우월감 사이를 왕래하는 위선적인 새 교회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새 교회인들은 누구보다 높은 차원의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행동으로 옮기는 데는 여러모로 서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바리새인의 위선이 영적인 수종병에서 온다 진단을 하시고 그의 병을 고쳐 주시려고 합니다. 영적 수종병이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좋을 대로 진리를 왜곡하는 병입니다. 어떤 것은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밀어내며, 또 어떤 것은 자신의 생각대로 고치면서 그렇게 진리를 받아들이는 병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자아와 세상에 속한 욕망들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불순한 욕망들을 버리고 마음의 병을 고칠 수 있을까요? 안식일의 주인인 나를 믿느냐 하고 주님께서 물으실 때 “네, 주님만이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우리의 고백에 진정성이 담길 때, 주님은 우리의 영적 수종병을 고쳐 주시고요, 나아가서 위선의 병으로부터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시면서 나는 어느 때 주님을 믿지 않는지, 어느 때 주님 앞에 꼿꼿이 머리를 드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병을 아는 것이 치유의 시작입니다. 수종병과 위선을 치유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새 교회의 모든 성도와 또한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웃과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또 내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고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노라 (겔20:12)

 

아멘

 

 

원본

2021-02-07(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11-12(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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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05(D1)-주일예배(2513, 마7,24-27), '납골(納骨) 예배'.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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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fj86WPkVc_E

 

시작

 

故 권성조와 故 김정자, 두 분의 이장(移葬) 관련, 마지막 세 번째 예배인 납골(納骨)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찬송

 

235장 보아라 즐거운 우리 집

 

1절

보아라 즐거운 우리 집

밝고도 거룩한 천국에

거룩한 백성들 거기서

영원히 영광에 살겠네

거기서 거기서

기쁘고 즐거운 집에서

거기서 거기서 거기서

영원히 영원에 살겠네

 

2절

앞서간 우리의 친구들

광명한 그 집에 올라가

거룩한 주님의 보좌 앞

찬미로 영원히 즐기네

거기서 거기서

기쁘고 즐거운 집에서

거기서 거기서 거기서

찬미로 영원히 즐기네

 

 

설교

 

이곳은 이제 두 분을 새롭게 모실 새로운 곳입니다. 저쪽 포천 황동묘원 때와는 달리 이곳은 이제 언제든지 자유롭게 오실 수 있는 곳이어서 참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부분 그래도 수도권에 사시며, 가까이들 사시니까요. 두 분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 사랑, 함께함이 생각나실 때마다 오시기 바랍니다. 오셔서 바쁘고 복잡한 세상일에서 잠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영원과 사후세계를 생각하시는 시간들 가지시기를 권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그러나 사후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될 곳은 천국이며, 그래서 지상에 남기고 가는 이 유골은 지상에서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자손들에게만 의미가 있을 뿐, 이미 천국에 들어가신 분들에게는 전혀라는, 이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즉 조상이 후손에게 무슨 복을 주고 그러거나, 돌아가신 부모님이 하늘에서 보고 계신다거나 하는, 그런 일은 없다는, 그래서 이런 말씀이 살짝 좀 불편하시고 이상하시더라도 말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즉 세상 떠나신 고인들의 경우, 기억하는 것은 우리이지, 그분들은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기억하지 않으신다, 아니 못하신다 말씀드리는 이유는, 사람이 사후 육체를 떠나 천국에 들어간다는 건 뭐랄까... 일종의 초기화, 리셋(reset) 된다고나 할까요? 생전의 모든 자연적 기억과 경험들이 모두 휴면 상태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래도 주님이 원하시면 언제든지 다시 꺼내어져 재생되지만 말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오직 사람의 영뿐이며, 이 영은 오직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으로만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저 세상 살면서 학습을 통해 지식으로 습득하기만 한 걸로는, 그래서 그걸 통해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며, 지역 사회와 자기가 속한 공동체 및 나라와 민족, 인류에게 무슨 유익을 끼치는 삶을 살지는 않았던, 즉 그걸 통해 창조주가 원하셨던 무슨 쓰임새의 삶을 살지는 않았던 사람들, 그 지식과 경험, 환경 가지고 그저 자기만 사랑하고, 세상 사랑하는 데만 전념했던 사람들은, 사후에는 자기가 그동안 생전에 그렇게 애써 익혔던, 그리고 성취했던 모든 지식과 경험이 자기 것, 곧 영이 되어 있지를 않아, 미안하지만 자신과 분리가 되어 모두 휴면 상태에 들어가게 되고, 그래서 천국에는 가지고 가실 수 없는 상태가 되며, 그래서 당연히 이런 사람의 영은 함량 미달로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실상은 들여보내 줘도 본인이 못 견디고 뛰쳐나오는 건데요, 마치 글로벌 초우량 기업에 낙하산으로 입사한들 실제 본인의 업무역량이 안 받쳐주면 못 견디고 나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참 놀라운 얘기이지요? 보통은 예수 믿고 교회 다니면 천국 갈 수 있다 가르치고 그렇게 배우기 때문인데요, 물론 그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절반만 맞습니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그러면서 또한 ‘듣고 행하는’ 삶이 뒤따라야 하는데요, 왜냐하면, 사람의 영, 천국에 들어가는 영은 ‘듣고 행할’ 때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진리라는 건, 그냥 글자 형태로만 있으면 그냥 ‘진리’일 뿐이지만, 그 진리가 실천되는 순간, ‘’이 됩니다. 진리를 실천하면서 살 때, 그 사람의 영은 천국을 향해 무럭무럭 자라나며, 천국은 이런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이런 걸 주님은 마태복음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셨습니다.

 

24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6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마7:24-27)

 

이 말씀 자체가 한 편의 설교, 정수(精髓)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이란 무엇이며, 사람의 임종 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사람이 천국 또는 지옥에 가는 그 과정과 절차는 어떤지, 더 나아가 천국은 어떤 곳이며, 지옥은 어떤 곳인지 등에 대해 정말 많은 걸 알려 드릴 수 있으나 오늘은 시간 관계상 어렵고, 다만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그리고 두 분의 이장 관련 예배이니만큼 절제하겠습니다.

 

결론입니다. 천국은 천국에 합당하게 준비된 영들이 가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천국 가기를 원하신다면, 지금부터라도 자신의 ‘영 준비’에 신경 쓰셔야 합니다. ‘자신의 영을 준비한다’는 것은, 일단 천국은 영의 나라요, 육신은 이 세상에 벗어버리고 가기 때문이고요, 영이란 ‘듣고 행한’ 걸로만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이란, 자신의 영을 천국을 위해 잘 준비할 수 있는 기간이며, 주님은 사랑이셔서 그 기간을 넉넉히, 아주 충분히 주시는 것입니다.

 

천국은 영원한 곳입니다. 사람의 영은 천국에서 가장 젊을 때의 상태로 지내게 되는데요, 수백, 수천 년이 지날수록 더욱 더 젊어진다고 합니다. 그 모습 또한 가히 지상의 언어로는 형용할 수가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하는데요, 두 분은 각각 91세, 79세의 노인으로 생을 마감하셨으나 지금 계신 곳에서는 눈이 부시다 못해 도저히 뜨지 못할 정도로 아름다우신 모습들이실 줄 믿습니다. 두 분 생전에 옷처럼 입고 지내신 육신은 지금 이렇게 뼛가루가 되어 유골함에 모셔져 있지요. 즉 살아생전 건강에 신경 쓰시는 것도 좋지만, 너무, 잠시 후 벗어버리고 갈 육체에 너무 그러지 마시고, 더욱 중요한 게 무엇일지, 곧 자신의 영인데요, 이 영 준비에 가급적 올인하시라는 말씀입니다.

 

부디 남은 삶, 자신의 영, 자신의 속 사람을 더욱 아름답게 가꾸시는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그래서 나중에 천국에서 두 분, 영광 가운데 큰 기쁨으로 재회할 수 있게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 받들어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찬송

 

3절

우리를 구하신 주님도

거룩한 그 집에 계시니

우리도 이 세상 떠날 때

주님과 영원히 살겠네

거기서 거기서

기쁘고 즐거운 집에서

거기서 거기서 거기서

주님과 영원히 살겠네

 

4절

우리의 일생이 끝나면

영원히 즐거운 곳에서

거룩한 아버지 모시고

기쁘고 즐겁게 살겠네

거기서 거기서

기쁘고 즐거운 집에서

거기서 거기서 거기서

기쁘고 즐겁게 살겠네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여호와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빛과 도우심의 그 은혜와 사랑이 오늘, 아침부터 지금까지 두 분 고 권성조, 고 김정자의 이장에 참여, 두 분을 기억하며, 주신 세 번의 말씀 마음으로 받아 새 힘, 새 결심하고 떠나는 모든 심령 가운데, 그리고 생활과 삶 가운데 이제부터 영원토록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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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05(D1)-주일예배(2512, 겔37,1-14), '화장(火葬) 예배'.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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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ldH-lYlZnds

 

시작

 

故 권성조와 故 김정자, 두 분의 이장(移葬) 관련, 두 번째 예배인 화장(火葬)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찬송

 

606장 해보다 더 밝은 저 천국

 

1절

해보다 더 밝은 저 천국

믿음만 가지고 가겠네

믿는 자 위하여 있을 곳

우리 주 예비해 두셨네

 

2절

찬란한 주의 빛 있으니

거기는 어두움 없도다

우리들 거기서 만날 때

기쁜 낯 서로가 대하리

 

후렴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설교

 

애석하게도 성경에는 오늘날의 이런 화장처럼 고인의 유골을 납골을 위해 불로 태워 빻아 가루로 만드는 예가 없습니다. 무엇을 태워 빻아 가루로 만드는 예를 굳이 찾자면 아래와 같은 경우인데요,

 

4왕이 대제사장 힐기야와 모든 부제사장들과 문을 지킨 자들에게 명령하여 바알과 아세라와 하늘의 일월 성신을 위하여 만든 모든 그릇들을 여호와의 성전에서 내다가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밭에서 불사르고 그것들의 재를 벧엘로 가져가게 하고 5옛적에 유다 왕들이 세워서 유다 모든 성읍과 예루살렘 주위의 산당들에서 분향하며 우상을 섬기게 한 제사장들을 폐하며 또 바알과 해와 달과 별 떼와 하늘의 모든 별에게 분향하는 자들을 폐하고 6또 여호와의 성전에서 아세라 상을 내다가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시내로 가져다 거기에서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어 그 가루를 평민의 묘지에 뿌리고 (왕하23:4-6)

 

이처럼 우상과 제단, 그리고 우상숭배 때 사용된 모든 제기(祭器)라면 몰라도 사람의 유골을 가지고 그렇게 하지는 않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이런 새로운 화장 및 납골 문화는 매장지가 부족한 오늘날 현실적 필요에 따라 자연스럽게 생긴 것이므로 굳이 무슨 영적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지 싶고, 그래서 이 시간엔 특별히 ‘’에 대하여 아래 에스겔 본문을 가지고 살피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1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2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3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4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5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6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7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8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9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10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11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12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13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한즉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14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겔37:1-14)

 

마른 뼈’(the dry bones) 본문으로 유명한 이 본문은 사실은 사람의 거듭남을 설명하는 본문입니다. 사람의 거듭남이란,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 한평생 천국 생활에 합당하게 잘 준비되어 사후(死後), 천국에 갈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사실은 생전 그 사람의 상태가 천국 상태여야 갈 수 있는 곳입니다. 지옥은 이미 그 상태가 지옥인 사람이 가는 곳이고요. 이에 대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0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17:20-21)

 

천국이니 지옥이니 하는 곳들은 사실은 시공간의 나라가 아닌, 상태와 그 상태변화의 나라입니다. 상태란 천국과 지옥 등 영계 전체와 이 자연계를 모두 다스리시는 만유의 대 주재이신 주님께 대한 상태를 말합니다. 한평생 살면서 그 주님을 얼마나 닮은 상태인가에 따라 사후 운명이 정해지는 것이지요. 영계라는 곳은 비슷하면 가까이, 다르면 멀어지는 곳인데요, 그래서 주님을 닮은 사람, 주님과 비슷한 사람은 천국, 즉 천국 상태에 있게 되고, 주님을 안 닮은 사람, 주님과 비슷한 점이 없는 사람은 정반대인 지옥, 즉 지옥 상태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위 에스겔 본문에서 말하는 ‘생기’는 주님으로 말미암는 생명이며, 14절,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에 나오는 ‘’과 같은 말입니다. 영어로는 같은 ‘spirit’인데 한글 번역을 이렇게 다르게 했네요. ‘’란 이 생명이 거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처음 태어날 때, 바로 이 ‘’ 상태로 태어납니다. 그렇게 태어나 누구는 일찍 하나님을 만나고, 누구는 한평생 하나님을 못 만난 채 살아갑니다. ‘하나님, 곧 주님을 만난다’는 것은, 곧 그분의 생명을 받아 위 본문의 뼈들처럼 마침내 ‘살아나는’ 것을 말하지요. 그것이 다른 말로는 ‘거듭남’(regeneration)이며, 이 상태가 바로 천국을 갈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닮은 상태인 것이지요.

 

주님은 우리가 모두 지상 생활을 마치고 천국에 갈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치고 처음부터 지옥 가기 위해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주님한테서 비롯되는데요, 즉 모든 영혼의 근원은 주님이신데, 그래서 주님은 선인이든 악인이든 끝까지 사랑하시고, 끝까지 책임을 지십니다. 부디 비록 뼈 상태로 출발은 하여도 하늘 아버지 되어 우리네 인생 끝까지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동행하시며 보살피시는 주님을 붙드시고, 인생 마칠 때 영광의 하늘나라에 무사히 들어가시는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주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찬송

 

3절

이 세상 작별한 성도들

하늘에 올라가 만날 때

인간의 괴롬이 끝나고

이별의 눈물이 없겠네

 

4절

광명한 하늘에 계신 주

우리도 모시고 살겠네

성도들 즐거운 노래로

영광을 주 앞에 돌리리

 

후렴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아멘

 

 

마침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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