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창2:5, 6)
AC.92
싸움이그칠때,곧탐욕과거짓으로말미암은불안이그칠때겉사람이누리는평화의평온이어떠한지는평화의상태를아는사람만이알수있습니다.이상태는너무나즐거워서즐거움에관한모든관념을뛰어넘습니다.그것은단지싸움이그친상태만이아니라내적인평화에서나오는생명이며,말로표현할수없는방식으로겉사람에게영향을미칩니다.그때평화의즐거움에서생명을얻는신앙의진리들과사랑의선들이태어납니다. The nature of the tranquility of peace of the external man, on the cessation of combat, or of the unrest caused by cupidities and falsities, can be known only to those who are acquainted with a state of peace.This state is so delightful that it surpasses every idea of delight: it is not only a cessation of combat, but is life proceeding from interior peace, and affecting the external man in such a manner as cannot be described; the truths of faith, and the goods of love, which derive their life from the delight of peace, are then born.
해설
AC.92는 앞에서 말한 ‘평화의평온’이 단순히 싸움이 끝난 뒤의 고요함이 아님을 밝힙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탐욕과 거짓으로 말미암아 싸움과 불안이 있었지만, 천적 인간이 되면서 그 싸움이 그칩니다. 그러나 싸움이 없어졌다는 사실만으로는 아직 평화의 본성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평온이 어떠한지는 실제로 평화의 상태를 아는 사람만이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 평화는 너무나 즐거워서 즐거움에 관한 모든 관념을 뛰어넘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매우 기분 좋은 감정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그 평화가 ‘내적인평화에서나오는생명’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의 평화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정지 상태가 아니라 생명이 흘러나오는 상태입니다. 그 생명이 겉 사람에게 미치는데, 그 방식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 설명은 AC.91의 ‘비’와 ‘안개’를 더욱 깊이 이해하게 합니다. 거기서는 평화의 평온이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적시고 이슬로 촉촉하게 하는 수증기와 같다고 했습니다. 이제 그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에게 미치는 것이 단순한 편안함이 아니라 ‘내적인평화에서나오는생명’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겉 사람은 단순히 싸움을 멈춘 것이 아니라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새로운 것을 산출하게 됩니다.
그 결과 태어나는 것이 ‘신앙의진리들’과 ‘사랑의선들’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진리와 선이 평화의 즐거움에서 ‘생명을얻는다’는 설명입니다. 진리와 선이 단지 사람의 기억 속에 있거나 지식으로 존재하는 것과, 실제 생명을 가진 상태는 같지 않습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 겉 사람에게 미치고, 그 평화의 즐거움으로부터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이 생명을 얻어 태어납니다.
따라서 AC.92의 평화는 싸움이 사라진 빈자리가 아닙니다. 탐욕과 거짓으로 말미암은 불안이 그친 자리에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 흘러들고, 그 생명이 겉 사람에게 미쳐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을 살아 있게 합니다. AC.90의 ‘평화의평온’, AC.91의 ‘비와안개’, 그리고 AC.92의 ‘내적인평화에서나오는생명’은 하나의 흐름을 이루며, 천적 인간의 안식이 얼마나 적극적이고 생명으로 충만한 상태인지를 보여 줍니다. (AC.92해설)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창2:5, 6)
AC.91
그러나사람이영적인간에서천적인간이되어가는동안그의상태가어떠한지를알지못하면,이말씀들이무엇을내포하고있는지는도저히퍼셉션할수없습니다.그것들이깊이감추어져있기때문입니다.사람이영적인간일때에는겉사람이아직속사람에게순종하고섬기려하지않으며,그러므로싸움이있습니다.그러나천적인간이되면겉사람이속사람에게순종하고섬기기시작하며,그러므로싸움이그치고평온이뒤따릅니다.(AC.87참조)이평온을‘비’(rain)와‘안개’(mist)가뜻합니다.그것은속사람으로부터겉사람을적시고이슬로촉촉하게하는수증기와같기때문입니다.그리고바로이평온,곧평화에서나오는평온이‘들의관목’(shrubofthefield)과‘들의초목’(herbofthefield)이라하는것들을산출합니다.이것들은구체적으로천적영적기원에서나오는이성에속한것들과기억지식에속한것들[rationaliaetscientifica]입니다. But what these things involve cannot possibly be perceived unless it is known what man’s state is while from being spiritual he is becoming celestial, for they are deeply hidden. While he is spiritual, the external man is not yet willing to yield obedience to and serve the internal, and therefore there is a combat; but when he becomes celestial, then the external man begins to obey and serve the internal, and therefore the combat ceases, and tranquility ensues (see n. 87). This tranquility is signified by “rain” and “mist,” for it is like a vapor with which the external man is watered and bedewed from the internal; and it is this tranquility, the offspring of peace, which produces what are called the “shrubofthefield,” and the “herbofthefield,” which, specifically, are things of the rational mind and of the memory [rationalia et scientifica] from a celestial spiritual origin.
해설
AC.91은 앞에서 계속 말해 온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를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영적 인간일 때에는 겉 사람이 아직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기 때문에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고, 그 결과 싸움이 그치며 평온이 뒤따릅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의 안식은 단순히 싸움이 없어졌다는 소극적인 상태가 아니라,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가 새로운 질서 안으로 들어간 상태입니다.
이 설명은 AC.87에서 말한 싸움의 종결을 인간 내부의 질서라는 측면에서 보충합니다. AC.87에서는 악한 영들이 물러가고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 옴으로써 싸움이 그친다고 했습니다. AC.91에서는 같은 변화를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에서 설명합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저항하는 동안에는 싸움이 있지만,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면 싸움이 그치고 평온이 뒤따릅니다. 두 설명은 서로 다른 각도에서 천적 인간의 안식을 보여 줍니다.
이제 AC.90에서 ‘비’와 ‘안개’를 ‘싸움이그칠때의평화의평온’이라 한 이유도 밝혀집니다. 그 평온은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적시고 이슬로 촉촉하게 하는 수증기와 같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움직임의 방향입니다. 천적 인간의 형성은 AC.89에서 말했듯이 속 사람에서 시작하며, 여기서도 평온이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으로 흘러나와 겉 사람을 적십니다. 따라서 ‘비’와 ‘안개’는 싸움이 끝난 뒤 단순히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으로 평화가 미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 평온은 또한 열매 없이 머물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이 ‘들의관목’과 ‘들의초목’을 산출한다고 하며, 이것들을 구체적으로 천적 영적 기원에서 나오는 ‘이성에속한것들과기억지식에속한것들’이라고 설명합니다. AC.90에서는 관목과 초목을 일반적으로 겉 사람이 산출하는 모든 것이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그 내용을 더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에게도 이성과 기억지식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며, 이제 그것들이 ‘천적영적기원’에서 나오게 됩니다.
이 점은 AC.75에서 개요로 제시했던 내용을 회수합니다. 거기서는 천적 인간의 기억지식과 이성이 안개로 적셔지는 지면의 관목과 초목으로 묘사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91에서 왜 안개가 그것들을 적시는지, 그리고 그 관목과 초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이성과 기억지식 자체가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원과 질서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질서가 바로 서면서 겉 사람에 속한 이성과 기억지식도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평온 가운데 새로운 상태에 놓입니다.
그러므로 AC.91은 천적 인간의 안식과 평온을 인간 내부의 질서와 연결하는 중요한 번호입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아직 저항하기 때문에 싸움이 있지만, 천적 인간에게서는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므로 싸움이 그칩니다. 그리고 그때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평화의 평온이 겉 사람을 적시며, 거기에서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이 산출됩니다. 이것이 창2:5-6의 ‘비’, ‘안개’, ‘들의관목’, ‘들의초목’ 안에 깊이 감추어진 내용입니다. (AC.91해설)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And there was no shrub of the field as yet in the earth, and there was no herb of the field as yet growing, because Jehovah God had not caused it to rain upon the earth. And there was no man to till the ground. And he made a mist to ascend from the earth, and watered all the faces of the ground.(창2:5, 6)
AC.90
‘들의관목’(shrubofthefield)과‘들의초목’(herbofthefield)은일반적으로그의겉사람이산출하는모든것을뜻합니다.겉사람은그가영적인간으로머물러있을때에는‘땅’(earth)이라하지만,천적인간이되면‘지면’(ground),그리고‘들’(field)이라고도합니다.곧이어‘안개’(mist)라하는‘비’(rain)는싸움이그칠때의평화의평온입니다. By the “shrubofthefield” and the “herbofthefield” are meant in general all that his external man produces.The external man is called “earth” while he remains spiritual, but “ground” and also “field” when he becomes celestial.“Rain,” which is soon after called “mist,” is the tranquility of peace when combat ceases.
해설
AC.90은 앞 번호에서 제기된 ‘땅’, ‘지면’, ‘들’의 차이를 곧바로 설명합니다. 이 셋은 모두 겉 사람과 관계되지만 아무 때나 서로 바꾸어 쓰는 말은 아닙니다. 사람이 아직 영적 인간으로 머물러 있을 때 그의 겉 사람을 ‘땅’이라 하고, 천적 인간이 되면 그 겉 사람을 ‘지면’, 또한 ‘들’이라 합니다. 따라서 창2에서 ‘지면’과 ‘들’이 새롭게 등장하는 것은 천적 인간의 형성을 다루기 시작했다는 AC.89의 설명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이 점은 천적 인간이 된다고 해서 겉 사람이 없어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여전히 겉 사람이 있지만 그 상태가 달라집니다. AC.89에서는 영적 인간의 개혁이 겉 사람에서 시작하는 반면 천적 인간의 형성은 속 사람에서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그 천적 인간의 겉 사람에서 산출되는 것들을 ‘들의관목’과 ‘들의초목’이라 합니다. 따라서 이 표현들은 자연계의 식물에 관한 묘사에 머무르지 않고, 천적 인간의 겉 사람이 산출하는 것들을 가리킵니다.
다만 AC.90은 ‘들의관목’과 ‘들의초목’을 아직 서로 구별하여 각각 무엇이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두 표현을 함께 묶어 ‘일반적으로그의겉사람이산출하는모든것’이라고만 합니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서 관목에는 이것, 초목에는 저것이라는 식으로 별개의 의미를 미리 배정하는 것은 본문보다 앞서가는 해석이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후에 그 차이를 직접 밝히는지를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앞의 ‘안식’에 관한 설명과 창2:5-6을 연결합니다. 곧이어 ‘안개’라 하는 ‘비’는 ‘싸움이그칠때의평화의평온’입니다. AC.84-88에서 천적 인간이 될 때 싸움이 그치고 주님의 안식이 시작된다고 설명했는데, 이제 그 상태가 ‘비’와 ‘안개’라는 말씀의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평화는 단순히 마음이 조용한 심리 상태가 아니라, 앞서 계속 설명해 온 싸움의 종결과 연결된 천적 인간의 상태입니다.
이렇게 AC.90은 창2의 새로운 어휘들이 우연히 바뀐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영적 인간의 겉 사람은 ‘땅’이고, 천적 인간의 겉 사람은 ‘지면’과 ‘들’이며, 그 겉 사람이 산출하는 모든 것은 ‘들의관목’과 ‘들의초목’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싸움이 그친 뒤의 ‘평화의평온’은 ‘비’, 곧 이어지는 본문에서는 ‘안개’로 나타납니다. AC.89에서 시작된 천적 인간의 형성이 이제 창2의 세부 표현 하나하나를 통해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AC.90해설)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These are 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when he created them, in the day in which Jehovah God made the earth and the heavens.(창2:4)
AC.89
‘하늘과땅의내력’(nativitiesoftheheavensandoftheearth)은천적인간의형성을뜻합니다.여기서그의형성을다룬다는것은뒤이어나오는모든세부사항에서매우분명합니다.아직초목이자라지않았고,지면을경작할사람도없었으며,여호와하나님께서사람을형성하셨고,그후에모든짐승과하늘의새를만드셨다고하기때문입니다.그런데이것들의형성은앞장에서이미다루었습니다.이모든것으로부터여기서는다른사람을다룬다는것이분명합니다.그러나이것은이제처음으로주님을‘여호와하나님’(JehovahGod)이라한다는사실에서더욱분명합니다.앞에서영적인간을다루는구절들에서는주님을단지‘하나님’(God)이라하였습니다.또한이제는‘지면’(ground)과‘들’(field)을말하지만,앞에서는오직‘땅’(earth)만을말하였습니다. 이절에서는또한‘하늘’(heaven)을먼저‘땅’(earth)앞에말하고,그뒤에는‘땅’(earth)을‘하늘’(heaven)앞에말합니다.그이유는‘땅’(earth)은겉사람을,‘하늘’(heaven)은속사람을뜻하기때문입니다.영적인간의경우에는개혁이‘땅’(earth),곧겉사람에서시작하지만,여기서다루는천적인간의경우에는속사람,곧‘하늘’(heaven)에서시작합니다.The “nativitiesoftheheavensandoftheearth” are the formations of the celestial man.That his formation is here treated of is very evident from all the particulars which follow,as that no herb was as yet growing;that there was no man to till the ground,as well as that Jehovah God formed man,and afterwards,that he made every beast and bird of the heavens,notwithstanding that the formation of these had been treated of in the foregoing chapter;from all which it is manifest that another man is here treated of.This however is still more evident from the fact that now for the first time the Lord is called “JehovahGod,” whereas in the preceding passages,which treat of the spiritual man,he is called simply “God”;and,further,that now “ground” and “field” are mentioned,while in the preceding passages only “earth” is mentioned.In this verse also “heaven” is first mentioned before “earth,” and afterwards “earth” before “heaven”;the reason of which is that “earth” signifies the external man,and “heaven” the internal,and in the spiritual man reformation begins from “earth,” that is,from the external man,while in the celestial man,who is here treated of,it begins from the internal man,or from “heaven.”
해설
AC.89는 창2:4부터 왜 다시 사람과 땅과 동식물의 형성을 말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창1에서 이미 이러한 것들의 창조를 다루었는데도 창2에서는 아직 초목이 자라지 않았고 지면을 경작할 사람도 없으며,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을 형성하시고 다시 짐승과 새를 만드셨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반복으로 보지 않습니다. 앞에서는 영적 인간의 형성을 다루었고, 이제는 천적 인간의 형성을 다루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른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하늘과땅의내력’도 천적 인간의 형성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다른사람’이라는 표현은 역사적으로 또 하나의 별개의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거듭남의 상태가 달라졌다는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앞에서 ‘여섯째날’이 된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기 시작한다고 했고, 이제 창2:4이하에서는 그 천적 인간의 형성을 더욱 자세히 다룹니다. 따라서 창1과 창2의 차이는 동일한 창조 이야기를 단순히 두 번 되풀이한 것이 아니라, 속뜻에서 서로 다른 상태의 인간을 다룬다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전환을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증거로 하나님의 호칭에 주목합니다. 영적 인간을 다루던 앞부분에서는 주님을 ‘하나님’이라 하였지만, 이제 천적 인간을 다루면서 처음으로 ‘여호와하나님’이라 합니다. AC.89은 이 호칭의 변화가 우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지적하지만, 여기서는 아직 왜 이러한 차이가 생기는지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이유를 미리 고정하여 설명하기보다, 우선 이 호칭의 변화가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주제가 전환되었음을 보여 주는 표지라는 데 머무르는 것이 좋습니다.
또 하나의 변화는 ‘땅’뿐 아니라 이제 ‘지면’과 ‘들’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스베덴보리가 직접 지적하는 본문의 변화입니다. 따라서 이 단어들을 모두 같은 말처럼 처리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AC.89은 여기서 ‘지면’과 ‘들’ 각각의 속뜻을 아직 설명하지 않으므로, 그 의미를 앞질러 정하지 않고 뒤의 설명을 기다리는 것이 안전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절의 어순도 중요합니다. 처음에는 ‘하늘과땅’이라 하여 하늘이 먼저 나오고, 뒤에는 ‘땅과하늘’이라 하여 순서가 바뀝니다. 스베덴보리는 ‘땅’이 겉 사람을, ‘하늘’이 속 사람을 뜻한다고 설명하면서 이 순서의 변화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형성 질서의 차이를 보여 준다고 합니다. 영적 인간의 개혁은 ‘땅’, 곧 겉 사람에서 시작하지만, 천적 인간의 형성은 ‘하늘’, 곧 속 사람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AC.89는 창1에서 창2로 넘어가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이미 다룬 사람과 피조물의 형성이 다시 등장하는 것, ‘하나님’에서 ‘여호와하나님’으로 호칭이 달라지는 것, ‘땅’뿐 아니라 ‘지면’과 ‘들’이 등장하는 것, 그리고 ‘하늘과땅’의 순서가 달라지는 것 모두가 이제 천적 인간의 형성을 다루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특히 영적 인간의 개혁은 겉 사람에서 시작하고 천적 인간의 형성은 속 사람에서 시작한다는 마지막 설명은, 두 상태의 차이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AC.89해설)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2:2, 3)
AC.88
영적인간이천적인간이될때그를‘하나님의일’(workofGod)이라합니다.주님홀로그를위하여싸우셨고,그를창조하시고,형성하시고,만드셨기때문입니다.그러므로여기서‘하나님이일곱째날에그분의일을마치셨다’(Godfinishedhisworkontheseventhday)고하며,또두번이나‘그분의모든일을마치고쉬셨다’(herestedfromallhiswork)고합니다.선지서들에서도사람을거듭‘여호와의손과손가락으로하신일’(workofthehandsandofthefingersofJehovah)이라합니다.이사야에서거듭난사람에관하여다음과같이말합니다. When the spiritual man becomes celestial,he is called the “workofGod,” because the Lord alone has fought for him,and has created,formed,and made him;and therefore it is here said,“Godfinishedhisworkontheseventhday”;and twice,that “herestedfromallhiswork.” By the prophets man is repeatedly called the “workofthehandsandofthefingersofJehovah”;as in Isaiah,speaking of the regenerate man:
이로부터새창조,곧거듭남은주님홀로의일이라는것이분명합니다.‘창조하다’(create),‘형성하다’(form),‘만들다’(make)라는표현들은서로아주구별되게사용됩니다.위의말씀에서도‘하늘을창조하시고,땅을형성하시며,그것을만드시는것’(creatingtheheavens, formingtheearth, andmakingit)이라고하며,같은선지서의다른곳에서도다음과같이말합니다. Hence it is evident that the new creation,or regeneration,is the work of the Lord alone.The expressions to “create,” to “form,” and to “make,” are employed quite distinctively,both in the above passage—“creatingtheheavens,formingtheearth,andmakingit”—andin other places in the same prophet, as:
창세기의앞장과이장에서도마찬가지이며,지금다루는말씀의‘하나님이만드심으로창조하신그분의모든일을마치고쉬셨다’(herestedfromallhisworkwhichGodinmakingcreated)라는표현도그러합니다.속뜻에서는이러한용법이언제나서로구별되는관념을전달합니다.주님을‘창조자’(creator),‘형성자’(former),또는‘만드시는분’(maker)이라하는경우도마찬가지입니다. and also in both the preceding and this chapter of Genesis;as in the passage before us:“herestedfromallhisworkwhichGodinmakingcreated.”In the internal sense this usage always conveys a distinct idea;and the case is the same where the Lord is called “creator,” “former,” or “maker.”
해설
AC.88은 앞의 설명을 하나의 중요한 원리로 모읍니다.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될 때 그를 ‘하나님의일’이라 하는 까닭은 주님 홀로 그를 위하여 싸우셨고, 그를 창조하시고 형성하시고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AC.87에서 ‘싸움을수행한것은사람자신이아니라사람을위하여주님홀로’라고 했다면, AC.88은 그 원리를 거듭남 전체로 넓혀 ‘새창조,곧거듭남은주님홀로의일’이라고 명시합니다.
이 때문에 창2에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일을 마치시고 쉬셨다는 표현도 사람의 거듭남과 직접 연결됩니다.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하나님의 창조 역사이며, 그 일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일곱째 날에 하나님께서 그분의 일을 마치고 쉬셨다고 합니다. 따라서 창세기의 창조를 사람의 거듭남으로 읽는 것은 단순히 창조의 각 대상을 인간의 여러 특성에 대응시키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 전체 과정의 행위자가 주님이시라는 사실이 그 해석의 중심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사야의 긴 말씀을 인용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거기에는 땅을 만들고 사람을 창조하며 하늘을 펴시는 여호와의 일이 함께 나오고,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거듭난 사람에 관한 말씀으로 제시합니다. 따라서 ‘하늘’, ‘땅’, ‘사람’의 창조는 앞에서 살펴본 속 사람과 겉 사람의 형성 및 사람의 새 창조라는 문맥과 연결됩니다. 이 인용은 새 창조가 인간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 여호와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뒷받침합니다.
그러나 AC.88후반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가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조하다’, ‘형성하다’, ‘만들다’라는 세 표현이 아주 구별되게 사용되며, 속뜻에서는 언제나 서로 구별되는 관념을 전달한다고 명시합니다. 이것은 AC.84마지막의 ‘사람이창조되고,형성되고,만들어졌다’는 표현이 단순한 문체적 반복이 아니었음을 확인해 줍니다. 이사야에서도 ‘하늘을창조하고,땅을형성하고,그것을만든다’고 하며, 사43:7에서도 한 사람을 두고 ‘창조하고,형성하고,만들었다’는 세 표현을 함께 사용합니다.
다만 AC.88은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경계선도 남깁니다. 세 표현이 서로 다른 관념을 전달한다는 사실은 분명히 말하지만, ‘창조하다’는 정확히 무엇을, ‘형성하다’는 무엇을, ‘만들다’는 무엇을 각각 뜻하는지는 아직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세 단어에 임의의 고정된 상응을 부여하기보다, 이후 스베덴보리가 그 차이를 직접 밝혀 주는지를 따라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지금 확실하게 붙들 수 있는 것은 세 표현이 우연한 동의어의 반복이 아니라 속뜻에서 실제로 구별된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거듭남은주님홀로의일’이라는 말을 인간의 자유와 응답을 없애는 말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앞에서 사람은 실제로 싸움 가운데 있고 선과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존재로 묘사되었습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사람이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를 새롭게 창조하고 악을 이기게 하며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형성하시는 능력의 근원이 주님 홀로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거듭난 뒤에도 그 완성을 자신의 공로나 자기 힘의 결과로 돌릴 수 없습니다.
이렇게 AC.88은 창조 이야기와 거듭남을 더욱 긴밀하게 결합합니다. 새 창조는 곧 거듭남이며, 그 거듭남은 주님 홀로의 일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설명하는 말씀의 ‘창조하다’, ‘형성하다’, ‘만들다’라는 표현 하나하나에도 서로 구별되는 속뜻의 관념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번호는 사람의 거듭남을 ‘하나님의일’이라 함으로써 창조의 여섯 날과 일곱째 날 전체를 누가 이루셨는지를 다시 분명히 합니다. (AC.88해설)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2:2, 3)
AC.87
천적인간이‘안식일’(sabbath),곧‘안식’(rest)인또하나의이유는그가천적인간이될때싸움이그치기때문입니다.악한영들은물러가고선한영들이가까이오며,천적천사들도가까이옵니다.이들이함께있을때에는악한영들이도저히머물수없어멀리달아납니다.그리고싸움을수행한것은사람자신이아니라사람을위하여주님홀로이셨기때문에,주님께서‘쉬셨다’(rested)고합니다. Another reason why the celestial man is the “sabbath,” or “rest,” is that combat ceases when he becomes celestial. The evil spirits retire,and good ones approach,as well as celestial angels;and when these are present,evil spirits cannot possibly remain,but flee far away. And since it was not the man himself who carried on the combat,but the Lord alone for the man,it is said that the Lord “rested.”
해설
AC.87은 천적 인간을 ‘안식일’, 곧 ‘안식’이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를 밝힙니다. 그가 천적 인간이 될 때 싸움이 그치기 때문입니다. AC.84에서는 ‘모든싸움이그친다’는 사실을 말했고, AC.85에서는 여섯 날의 싸움과 수고 뒤에 평화의 상태가 온다고 설명했습니다. 여기서는 그 싸움이 그칠 때 영계에서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악한 영들은 물러가고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 오며, 이들이 함께 있을 때 악한 영들은 머물지 못하고 멀리 달아납니다.
그러나 AC.87의 가장 중요한 설명은 마지막 문장에 있습니다. 앞선 여섯 날 동안 싸움이 있었지만, 그 싸움을 실제로 수행한 것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사람을위하여주님홀로’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싸움이 끝났을 때 말씀은 사람이 쉬었다고 하지 않고 주님께서 ‘쉬셨다’고 합니다. 창조의 여섯 날을 사람의 거듭남으로 읽으면서도 그 거듭남의 근원적인 행위자를 사람 자신에게 돌려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사람이 거듭남의 과정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AC.81에서도 영적 인간은 실제로 ‘싸움가운데있으며언제나승리한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싸움을 경험하고 악과 거짓에 맞서며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에 따라 살아가지만, 그 싸움에서 악을 이기게 하는 능력의 근원은 사람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AC.87이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경험과 응답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승리의 능력과 공로를 주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또한 악한 영들이 물러가고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 온다는 설명은 천적 인간의 안식이 단순한 심리적 평온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인간의 거듭남은 영계와 분리된 인간 내부만의 변화가 아닙니다. 사람이 천적 상태에 이르면서 그와 함께하는 영적 환경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악한 영들의 공격이 물러가면서 싸움의 상태도 그칩니다.
따라서 AC.87에서 ‘주님께서쉬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피곤하여 활동을 중단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을 위하여 싸우신 분이 주님 홀로이시므로 그 싸움이 그친 상태를 주님의 안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AC.84에서 시작된 ‘왜주님께서쉬신다고하는가?’라는 질문은 여기에서 가장 직접적인 답에 이릅니다. 여섯 날의 싸움도 주님의 역사이고, 그 싸움이 끝나 천적 인간의 평화에 이른 것도 주님의 역사이므로, 그 완성된 상태가 주님의 ‘안식’입니다. (AC.87해설)
AC.86은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넘어가는 경계를 ‘안식일의저녁’이라 합니다. 영적 인간은 이미 ‘여섯째날’이 되었지만, 이제 천적인 것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상태에 들어갑니다. AC.83에서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사랑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한다’고 했던 바로 그 전환이 여기서는 ‘안식일의저녁’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사이가 단순히 끊어져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영적 인간이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지고 전혀 별개의 천적 인간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여섯째 날이 된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기 시작하는 상태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상태를 ‘안식일의저녁’이라 하고, 유대교회에서 저녁부터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킨 것은 바로 이 상태를 표상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저녁’은 단순히 하루가 끝나는 자연적인 시간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86에서는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기 시작하는 특정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유대교회의 안식일 규례도 외적인 의식에 그치지 않고,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나아가는 거듭남의 질서를 표상하고 있었습니다. AC.85에서 유대교회의 제도 가운데 주님과 그분의 나라를 표상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고 한 설명이 바로 여기에도 적용됩니다.
그러나 ‘안식일의저녁’이 마지막 상태는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곧이어 천적 인간을 ‘아침’이라 하며, 그것은 다음 번호에서 설명하겠다고 합니다. 따라서 AC.86은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 싸움과 안식 사이의 전환점을 보여 주는 짧은 연결 번호입니다. ‘저녁’은 천적 인간이 되기 시작하는 상태이고, ‘아침’은 그렇게 된 천적 인간의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AC.86은 앞에서부터 이어져 온 거듭남의 과정이 연속적인 질서를 가진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여섯째 날의 영적 인간에게서 사랑과 신앙이 하나를 이루고 사랑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하며, 이것이 ‘안식일의저녁’입니다. 그리고 그 전환을 지나 천적 인간의 상태에 이르면 ‘아침’이 됩니다. 다음 번호는 바로 이 ‘아침’의 의미를 더 밝히게 됩니다. (AC.86해설)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2:2, 3)
AC.85
천적인간이‘일곱째날’(seventhday)이라는것과,그러므로일곱째날을거룩하게구별하여안식일이라한것은지금까지밝혀지지않은아르카나입니다.천적인간의본성이무엇인지아는사람이아무도없었고,영적인간의본성을아는사람도거의없었기때문입니다.이러한무지로말미암아사람들은둘사이에큰차이가있음에도영적인간을천적인간과같은것으로여겨왔습니다.그차이는AC.81에서볼수있습니다.일곱째날에관하여,그리고천적인간이‘일곱째날’(seventhday),곧‘안식일’(sabbath)이라는것에관하여는주님자신이안식일이시라는사실에서분명합니다.그러므로주님께서는이렇게말씀하십니다. That 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day,” and that the seventh day was therefore hallowed,and called the sabbath,are arcana which have not hitherto been discovered.For none have been acquainted with the nature of the celestial man,and few with that of the spiritual man,whom in consequence of this ignorance they have made to be the same as the celestial man,notwithstanding the great difference that exists between them,as may be seen in n.81.As regards the seventh day,and as regards the celestial man being the “seventhday” or “sabbath,” this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Lord himself is the sabbath;and therefore he says:
이말씀은주님께서사람자체이시며안식일자체이심을함축합니다.하늘과땅에있는주님의나라는주님으로말미암아안식일,곧영원한평화와안식이라합니다.which words imply that the Lord is man himself,and the sabbath itself.His kingdom in the heavens and on the earth is called,from him,a sabbath,or eternal peace and rest.
[2] 여기서다루는태고교회는그뒤에이어진모든교회보다더욱주님의안식일이었습니다.그뒤의주님의모든가장내적인교회도역시안식일이며,거듭난모든사람도천적인간이될때에는안식일입니다.그가주님의형상이기때문입니다.그에앞서여섯날의싸움또는수고가있습니다.이러한것들은유대교회에서수고하는날들과일곱째날인안식일로표상되었습니다.그교회에서는주님과그분의나라를표상하지않는것은아무것도제정되지않았기때문입니다.이와같은것이궤가나아갈때와쉴때에도표상되었습니다.광야에서궤가이동한것은싸움과시험을표상했고,궤가쉰것은평화의상태를표상했기때문입니다.그러므로궤가떠날때모세는이렇게말했습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which is here treated of,was the sabbath of the Lord above all that succeeded it.Every subsequent inmost church of the Lord is also a sabbath;and so is every regenerate person when he becomes celestial,because he is a likeness of the Lord.The six days of combat or labor precede.These things were represented in the Jewish church by the days of labor,and by the seventh day,which was the sabbath;for in that church there was nothing instituted which was not representative of the Lord and of his kingdom.The like was also represented by the ark when it went forward,and when it rested,for by its journeyings in the wilderness were represented combats and temptations,and by its rest a state of peace;and therefore,when it set forward,Moses said:
천적인간의성질은자기자신의바람에따라행하지않고주님의선하신뜻에따라행하는것이며,그주님의뜻이그의‘바람’(desire)이됩니다.그리하여그는내적인평화와행복을누리는데,이것은여기서‘땅의높은곳에올려짐’(beingupliftedovertheloftythingsoftheearth)으로표현되며,동시에외적인평온과즐거움도누리는데,이것은‘야곱의기업으로길러짐’(beingfedwiththeheritageofJacob)으로나타납니다. Such is the quality of the celestial man that he acts not according to his own desire,but according to the good pleasure of the Lord,which is his “desire.” Thus he enjoys internal peace and happiness-here expressed by “beingupliftedovertheloftythingsoftheearth” -and at the same time external tranquility and delight,which is signified by “beingfedwiththeheritageofJacob.”
해설
AC.85는 천적 인간이 왜 ‘일곱째날’, 곧 ‘안식일’인가를 한층 더 깊이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은 아르카나였다고 하면서 그 직접적인 이유를 천적 인간의 본성이 알려져 있지 않았고 영적 인간의 본성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두 인간 사이에는 AC.81에서 본 것처럼 큰 차이가 있는데도 사람들이 그 차이를 알지 못하여 둘을 같은 것으로 여겨 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조의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의 차이를 이해하려면 먼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AC.85에서 더 근본적인 설명은 ‘주님자신이안식일이시다’라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 ‘인자는안식일에도주인이니라’고 하신 말씀을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사람 자체이시며 안식일 자체이심을 함축하는 말씀으로 읽습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에 있는 주님의 나라도 주님으로 말미암아 안식일, 곧 영원한 평화와 안식이라 합니다. 결국 천적 인간이 안식일인 까닭도 그 안식이 인간 자신에게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는 교회와 개인에게 함께 적용됩니다. 태고교회는 뒤에 이어진 모든 교회보다 더욱 주님의 안식일이었고, 이후의 모든 가장 내적인 교회도 안식일입니다. 또한 거듭난 사람도 천적 인간이 될 때에는 주님의 형상이므로 안식일입니다. 그러나 그 안식에 앞서 ‘여섯날의싸움또는수고’가 있습니다. 유대교회의 수고하는 날들과 안식일, 그리고 광야에서 궤가 나아가고 쉬었던 일은 이 질서를 표상합니다. 궤의 이동은 싸움과 시험을, 궤의 쉼은 평화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AC.84에서 말한 ‘모든싸움이그친다’는 것은 AC.85에서 ‘평화의상태’라는 적극적인 내용으로 한층 더 분명해집니다.
이사야의 안식일 말씀은 그 평화가 어떤 상태인지를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천적 인간은 자기 자신의 바람에 따라 행하지 않고 주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행하며, 더 나아가 주님의 뜻이 바로 자기의 ‘바람’이 됩니다. 이것은 외적인 강제로 자기 욕망을 억누르는 상태와 다릅니다. AC.81에서 천적 인간은 겉으로 드러나는 결박에 의해 제어되지 않고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 가운데 자유롭다고 했는데, AC.85는 그 자유의 내적인 모습을 보여 줍니다. 주님의 뜻과 사람의 바람이 대립하여 억지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하신 뜻을 기뻐하는 것이 그 사람 자신의 바람이 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의 안식은 단순한 무활동이나 싸움의 부재가 아닙니다. 그에게는 내적인 평화와 행복이 있고 동시에 외적인 평온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전자를 이사야의 ‘땅의높은곳에올려짐’으로, 후자를 ‘야곱의기업으로길러짐’으로 설명합니다. 결국 안식일의 깊은 중심에는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주님의 질서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며, 주님의 뜻이 자신의 바람이 된 데서 오는 평화와 기쁨이 있습니다.
이로써 AC.74와 AC.84에서 이어져 온 질문도 상당히 분명해집니다.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인 것은 여섯 날의 싸움과 수고 뒤에 오는 주님의 안식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며, 주님께서 쉬신다고 하는 것은 피로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서 싸움이 그치고 주님의 평화가 자리 잡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안식의 궁극적인 근원은 ‘주님자신이안식일이시다’라는 데 있습니다. (AC.85해설)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5, ‘면류관 벗어서’, 찬69, ‘온 천하 만물 우러러’입니다.
오늘은창2 첫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1절로 3절, AC 글 번호로는 82번에서 84번입니다만, 창2 여는 글들 및 개요 글들 포함, 67번부터 다루겠습니다. 여기 ‘여는 글들’은 아래 71번 글을 참고하세요.
본문 함께 읽습니다.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창2:1-3)
이 본문을
일곱째 날, 곧 천적 인간의 상태
이라는 제목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시티아’(Arcana Coelestia)본문 및 해설,그리고 심화 리딩 주일설교시작합니다.
최근 개신교 어느 교회 예배에 참석, 오랜만에 참 익숙하지만, 그러나 무척 낯설었던 시간을 가졌는데요, 참 익숙했던 건, 제가 개신교에서 50대 후반까지 머물렀었기 때문이고, 또 무척 낯설었던 건 예배와 설교 전반에 아르카나, 즉 ‘속의 언어’가 아닌, 세상 언어, 곧 ‘겉의 언어’가 많이 섞인 예배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제가 아르카나를 처음 접하던 초창기처럼 무슨 반감이 들거나 그러진 않았는데요, 스베덴보리가 죽는 날까지 자신의 배경인 루터교회를 출석했던 거나 주님이 안식일마다 유대교 회당을 찾으셨던 것처럼, 저 역시 전심으로 그 예배에 참여, 함께 손을 들어 주님을 찬양하고, 말씀에 귀 기울이며, 함께 웃고 즐거워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두 세계의 언어가 섞인 예배였지만, 속으로 실시간 통역을 하면서 ‘아, 이걸 이렇게, 저걸 저렇게 표현한 거구나!’ 하면서 드렸습니다. 우리 안에 와있는 천사들 역시 우리의 일상 일거수일투족 중 그렇겠구나 싶었습니다.
이 아르카나 순도 8, 90%의 예배는 지상에서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100%는 천국에서나 가능하겠지요. 어쩌면 주님이 훗날을 위해 미리 우리 교회를 통해 이것저것 테스트를 진행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겉’과 ‘속’은 같이 갑니다. ‘속’은 ‘겉’이라는 그릇에 담기며, ‘겉’이라는 옷을 입고 생활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동안 자연적 인간과 영적, 천적 인간 역시 같이 갑니다. 우리의 영적, 천적 인간은 겉으로 보기엔 ‘자연적 인간’으로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쉽진 않으시겠지만, 항상 이 ‘균형’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And on the seventh day God finished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he rested on the seventh day from all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God blessed the seventh day, and hallowed it; because that in it 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창2:2, 3)
AC.84
천적인간은‘일곱째날’(seventhday)입니다.주님께서여섯날동안역사하셨기때문에그것을‘그분의일’(hiswork)이라하며,그때모든싸움이그치기때문에주님께서‘그분의모든일을마치고쉬신다’(restfromallhiswork)고합니다.이런이유로일곱째날은거룩하게구별되었고,‘안식’(rest)을뜻하는히브리어에서유래하여안식일이라불렸습니다.이와같이사람이창조되고,형성되고,만들어졌습니다.이러한것들은말씀자체에서매우분명합니다.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day,” which, as the Lord has worked during the six days, is called “hiswork”; and as all combat then ceases, the Lord is said to “restfromallhiswork.” On this account the seventh day was sanctified, and called the sabbath, from a Hebrew word meaning “rest.” And thus was man created, formed, and made. These things are very evident from the words.
해설
AC.84는 앞에서 천적 인간을 ‘일곱째날’이라 한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여섯 날 동안 이루어진 것은 근본적으로 주님의 역사이며, 그래서 그것을 ‘그분의일’이라 합니다. 사람이 죽은 상태에서 영적 인간으로 형성되고, 마침내 천적 인간이 되는 거듭남의 과정에서 실제로 싸움을 겪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를 창조하고 형성하며 새롭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일곱째 날의 안식을 이해하려면 먼저 앞선 여섯 날의 역사가 누구의 일인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일곱째 날에 주님께서 ‘그분의모든일을마치고쉬신다’고 하는 이유는 ‘모든싸움이그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님의 안식을 인간처럼 수고하여 피곤해진 뒤 쉬시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안식은 거듭남의 싸움이 그친 상태와 관계됩니다. AC.81에서 영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으면서 승리하지만, 천적 인간은 같은 방식의 싸움 가운데 있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AC.84는 이제 그 차이를 창조의 여섯 날과 일곱째 날의 구조에 연결합니다. 싸움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여섯 날의 역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싸움이 그치고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 일곱째 날, 곧 안식의 상태가 됩니다.
이 때문에 일곱째 날이 거룩하게 구별되고 안식일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안식일이라는 명칭 자체를 ‘안식’을 뜻하는 히브리어와 연결합니다. 따라서 안식일의 속뜻은 단순히 일정한 날짜에 일을 멈추는 외적인 행위에 머물지 않고,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역사하신 거듭남의 싸움이 그치고 천적 상태에 이르는 것과 연결됩니다. 다만 AC.84는 그 안식의 상태를 아직 상세하게 펼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왜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며 왜 그것을 주님의 안식이라 하는지 그 기본 원리를 밝히고 있습니다.
마지막의 ‘이와같이사람이창조되고,형성되고,만들어졌습니다’라는 말은 앞선 여섯 날과 일곱째 날 전체를 한 문장으로 되돌아보게 합니다. 사람의 거듭남은 한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 안에서 질서 있게 진행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의 종착점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 싸움을 완수하여 스스로 안식을 획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가 그 사람 안에서 이루어져 싸움이 그치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AC.84에서 일곱째 날은 단순히 창조 이후에 덧붙여진 하루가 아니라, 앞선 모든 역사가 향하고 있던 천적 인간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AC.84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