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은 다음 달 초 둘째를 볼 큰애가 아이 이름 관련, 조언을 구하는 가운데 나눈 글입니다.
‘초태생’(初胎生, firstborn), ‘처음 난 자’ 등에 대해 찾아보니,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1, 2)
까지 거슬러 올라가는구나.
여기서 잠시 어떤 배경 이야기를 좀 해야 하는데... 내가 직접 하기 보다, 원본을 그대로 좀 가져와 보마.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the man and Eve his wife)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대로, 태고 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를 말합니다. 그 첫 자식, 처음 난 자녀는 신앙(信仰, faith)인데, 여기 ‘가인’(Cain)이 바로 이 신앙을 말합니다. 그녀의 말,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는 ‘가인’이라는 사람들로 인해 신앙이라는 게 독립된 어떤 걸로 인식되고 인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전에 그들, 곧 인류 첫 교회인 태고 교회지요, 이 아담이라고 하는 교회는 신앙이 무엇인지에 관해 마치 무지한 듯 보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신앙의 모든 것에 관한 퍼셉션(perception, 특별히 학습하지 않아도 마치 천국 천사들처럼 주님으로 말미암아 직관하는 영적 통찰력)이 있었기 때문인데요, 그러나 이런 완전한 모(母) 교회로부터 나오기 시작한 자식 교회들의 경우, 사랑과 신앙이 한 몸이었던 모 교회로부터, 즉 모 교회의 교리로부터 굳이 신앙의 교리를 따로 구분하기 시작하면서, 전에는 퍼셉션으로 그냥 알던 것들을 굳이 가져다가 따로 교리화하였고, 그러면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한 것입니다. 마치 자기들이 뭔가 새로운 걸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지요. 이렇게 해서 전에는 그냥 심비(心碑)에 새겨지던 것들이 이제는 배워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두 번째 자녀는 ‘아벨’(Abel), ‘아우’(brother)로 상징된 체어리티(charity, 仁愛, 이웃 사랑)입니다. ‘양 치는 자’(a shepherd of the flock)는 체어리티라는 선을 행하는 사람을, ‘농사하는 자’(a tiller of the ground)는 체어리티 없는, 사랑과 분리된 신앙, 이런 건 전혀 신앙이 아닌데, 이런 절름발이 신앙, 거짓, 가짜 신앙에 있어서는 또 아주 제대로일 수 있는 그런 사람입니다.
교회의 두 번째 자녀가 체어리티인 것은, 교회는 신앙과 체어리티 말고는 잉태하고 해산할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분명합니다.
등... 인용은 이 정도만 하마.
이 정도로도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또는 교회, 교리)의 신앙이 어떤 건지, ‘아벨’이라 하는 사람들의 신앙이 어떤 건지와, 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는 표현이 무슨 의미인지를 살짝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어찌 보면, 인류의 역사는 이 두 신앙의 역사이지 싶구나. 주님은 이 둘의 하나 됨, 한 몸 됨을 정말 원하셨고, 그래서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까지 하셨는데...
다음 말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출13:2)
에서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Sanctify to Me all the firstborn)는 말씀은, 신앙, 곧 주님으로 말미암은 신앙을 뜻한다고 한다.
주님은 태고 교회의 후손들을 통해 잃으신 참 신앙을 되찾고 싶으셨던 것 같다.
‘열린다 성경’ 저자 류모세 선교사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일부로 전체를 대신한다’는 게 있댄다. 가장 대표적인 게 바로 ‘초실절’이라고... 아마 십일조 정신을 이렇게 연결해도 되지 싶다. 원래는, 즉 십일조의 기원은 리메인스이지만...
...‘저녁’은 모든 선행 상태(preceding state)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그늘 상태, 즉 거짓의 상태, 불신앙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아침’은 모든 뒤따르는 상태(subsequent state)입니다. 한 종류 빛이나 진리, 그리고 신앙 지식이 되는 상태이지요...
이런 내용은 지금의 저조차 그저 어렴풋이만 이해할 뿐 처음 접하시는 분께 밝히 설명드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계속 주님께 도우심을 구하며 고민하던 중, 아래 ‘천국과 지옥’ 17장, ‘천사들의 상태 변화’를 소개하는 정도로 우선은 만족해야지 싶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이해하고 나면, 창세기 1장의 무척 생소한 표현인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의 의미가 이해됩니다. 제 경우는 그랬습니다.
덧붙여 말씀드리면, 천국의 많은 것들은 비록 그곳에 직접 가서 직접 목격을 한다 한들, 그리고 밝히 이해를 했다 한들 지상에 돌아와서는 지상의 언어로 어떻게 형용이나 설명을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지상 생활을 하는 우리도 그러니까요. 예를 들면, 탈북자들이 대한민국에 와서 겪었던 일들을 북에 있는 가족에게 아무리 설명을 한들 ‘후라이까지 말라우’ 하며 안 믿는다지 않습니까? 안 믿는 게 아니라 못 믿는 거죠... 이런 걸 감안하면, 스베덴보리가 이 창세기, 출애굽기 주석을 주님으로부터 받아적을 때, 정말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걸 잘 아시는 주님은 그래서 27년 간 거의 매일 쉬지 않고, 스베덴보리를 천국으로, 영계로 들어 올려 생생하게 경험하게 하신 것이고요...
아, 방금 ‘받아적었다’ 했는데, 곧이곧대로 무슨 프린터 역할만 했다는 건 아니고, 어떤 메인 아이디어를 주시면 그걸 스베덴보리가 본인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 ‘주님, 그건 이렇게 표현하면, 이렇게 설명하면 어떨까요?’ 하면서 협업을 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주의 아르카나가 담긴 신구약 성경들 역시, 이사야면 이사야, 예레미야면 예레미야 등 그 기록자들의 퍼스낼러티 역시 고스란히 담겨 있는 걸 보면 말입니다.
...천국의 빛은 세상 빛 같은 자연적 빛이 아니라 영적 빛이다. 그 빛은 해로 계신 주께로부터 나온 것이고, 그 해는 신적 사랑(the Divine love)이기 때문이다. 해로 계신 주께로부터 발산되는 것을 천국에서는 신적 진리(Divine truth)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 본질은 신적 진리에 융합된 신적 선(Divine good united to Divine truth)이다. 이로부터 천사들은 열과 빛을 얻는다. 빛은 신적 진리에서, 열은 신적 선에서 얻는다. 천국의 빛과 열이 이 근원에서 나온다는 사실에서 그 빛과 열은 물질이 아니라 영적인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세상 해를 가지고 생각해 보면, 해 자체는 불덩어리요, 거기서 빛과 열이 나오는데, 둘은 하나로 융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지요. 이 세상 해의 이러한 속성은 천국 해의 상응으로, 이 세상 해와 그 속성을 잘 관찰함으로써 천국 해와 그 속성, 곧 주님과 주님의 신성을 알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 해에서 나오는 햇볕이 열과 빛으로 되어 있듯 천국 해로 계신 주님에게서 천국의 열인 신적 선과, 천국의 빛인 신적 진리가 나옵니다. 이 세상 해가 불덩어리인 것처럼 천국의 해는 주님의 사랑인데요, 천국이 광명한 나라인 것은 주님한테서 나오는 신적 진리가 그렇게 빛나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해로 계신, 즉 사랑으로 계신 주님으로부터 주님의 선, 곧 신적 선과 주님의 진리, 곧 신적 진리가 온 천국에 충만한 나라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 하셨습니다. 곧 우리 마음 상태가, 우리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받을 수 있는 상태, 곧 주님 사랑의 상태여야 천국이 우리 안에 임한다는 것이며, 그럴 때 위와 같은 천국의 빛이 우리 안에 충만하여 우리는 빛 가운데 거하며, 어둠은 우리로부터 물러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45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46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47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48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 (눅19:45-48)
기도에 의존하면 안 되는 이유는 하나님으로부터 하는 기도에는 그것이 유익한 것일지 어떨지 하는 것은 주님만이 아신다는 생각과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자는 기도를 들어주실지 말지는 주님께 맡기고, 주님이 겟세마네의 가장 가혹한 시험 중에 말씀하신 대로 나의 뜻이 아니라 주의 뜻을 이루시길 기도해야 한다. (AC.8179, 이순철 역) ...prayer is not to be relied upon. For in prayer from the Divine it is always thought and believed that the Lord alone knows whether it is profitable or not; and therefore the suppliant submits the hearing to the Lord, and immediately after prays that the will of the Lord, and not his own, may be done, according to the Lord’s words in His own most grievous temptation at Gethsemane (Matt. 26:39, 42, 44).
39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2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4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마26:39, 42, 44)
오늘 전해드릴 말씀은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일이 있기 전에 주님과 제자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을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으로 오시는 도중, 감람산 근처에 오셨을 때, 제자들에게 맞은편 마을에 가면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 새끼가 묶여 있을 터이니 풀어서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가서 보니 정말 나귀 새끼가 묶여 있어 그것을 풀어 끌고 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옷을 벗어 나귀의 등에 깐 다음, 주님을 거기 태워 예루살렘 성을 향해 옵니다. 여기까지가 앞 절의 내용입니다. 이 말씀에서 주님과 제자들에게 일어나는 일련의 일들은 영적으로는 교회의 마지막 때, 주님에 의해 새 교회가 세워지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첫째로, 감람산 맞은편 마을은 믿음, 그러니까 신앙(faith)만 중시하고, 인애, 곧 체어리티(charity)의 삶을 가벼이 여기는, 이른바 외적인 교회를 뜻합니다. 감람산은 사랑과 체어리티를 나타내고, 맞은편은 반대를 뜻하구요, 마을은 교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거기 매여있는 나귀 새끼는 외적 교회의 진리인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뜻합니다. 매여있다는 것은 문자적 의미에 매여 내적 의미가 밝혀지지 않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셋째, 제자들이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왔다고 했는데, 이 말의 의미는 새 교회를 통해 비로소 말씀의 내적인 의미가 밝혀지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주님의 제자들은 마지막 때 주님이 세우시는 새 교회의 사람들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넷째, 제자들이 옷을 벗어 나귀 위에 깔고 주님을 태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새 교회의 사람들이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와 그것을 통해 깨우친 내적 진리를 가지고 주님을 섬기고, 또한 이웃을 섬기는 걸 의미합니다. 제자들의 옷은 새 교회 사람들이 이해하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앞 절에서 살핀 본문은 교회의 마지막 때, 참된 진리가 ‘오직 믿음’의 교리를 가진 외적인 교회로부터 신앙과 체어리티의 신앙을 가진 내적인 교회, 즉 새 교회로 옮겨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 이 설교 원본에 있는 ‘믿음’과 ‘인애’(仁愛)를 저는 가급적 ‘신앙’과 ‘체어리티’(charity)로 수정하여 쓰고 있습니다. ‘믿음’은 개신교적 표현, ‘오직 믿음’이나 ‘믿습니다! 아멘!’ 같을 때만 그대로 사용하겠습니다. ‘인애’의 경우, 왠지 ‘체어리티’의 더욱 풍성한 뉘앙스를 많이 놓치는 것 같아 그렇습니다.
새 교회 교인이라고 처음부터 내적인 신앙을 가지는 건 아닙니다. 그분들 역시 새 교회로 오기 전에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진리의 전부라고 믿었고, 또 주류교회들의 신앙인 ‘오직 믿음’의 교리만이 진정한 신앙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밝혀주신 말씀의 내적 의미를 통해 신앙만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이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새 교회로 오기 전 그들의 신앙이 감람산 맞은편 마을에 묶여 있어 아직 아무도 태운 적이 없는 나귀 새끼와도 같은 신앙이라면, 새 교회로 온 후의 신앙은 그 매인 상태에서 풀려난 나귀 새끼가 주님을 태우고 예루살렘으로 힘차게 가는 것과도 같은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도착, 성전으로 들어가시니 그곳에는 장사하는 자들이 가득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그냥 장사하는 자들이 있었다고 하지만, 마태복음 21장 12절에는 돈을 바꿔주는 자들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이 성전에 가득히 들어와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마21:12)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는 영적으로 어떤 사람일까요? 하나님의 거룩한 것인 선과 진리를 가지고 사적인 욕심을 채우는 자들입니다. 이를테면 돈을 바꿔주는 자는 진리를 가지고 사욕을 채우는 자이고, 비둘기를 파는 자는 선을 가지고 욕심을 채우는 자입니다. 진리를 가르치는 목회자가 교인들의 구원에는 뜻이 없고, 높은 지위나 재물을 모으는 데만 관심이 있다면 그는 장사꾼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또 교회를 위해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 중에 그 목적이 사적 이득이나 명예를 얻는 데 있다면 그런 사람도 영적으로는 장사꾼에 불과합니다. 새 교회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본인 신앙의 순수함에 따라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 다음은 어떻게 이렇게 성전 안에 장사하는 자들이 득실댈 수 있었을까 하는 그 배경 이야기입니다.
...성전 벽 남쪽의 더블 게이트를 통해 들어가면 왕의 행각 지하를 거쳐서 성전 뜰 밖으로 나오게 된다. 밖으로 나오면 바로 왼쪽에 예수님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와 가야바가 직영하던 부스가 있었다. 가야바는 안나스의 사위다.
이 상점에서 성전 제사에 필요한 물건, 즉 소, 양, 비둘기, 밀가루, 올리브 기름, 포도주, 나무 등을 팔았고, 성전세로 바칠 반 세겔을 바꾸는 환전상도 이곳에 있었다. 이 상점은 대제사장인 안나스 가문이 직영으로 운영했고, 여기서 구입한 제물만 성전 제사에 적합한 규격품으로 인정받았다. 당연히 가격은 시중가의 몇 배나 비쌌고, 이들은 엄청난 폭리를 취했다.
성전 뜰에서는 물건을 사고파는 상행위를 할 수 없었지만, 안나스의 직영 상점은 원래의 성전 뜰인 마카베오 성전산의 바깥인 헤롯 성전산에 위치했기 때문에 법적으로 따지면 모세의 율법을 어긴 것은 아니었다. 이렇듯 성전을 중심으로 한 당시의 종교적 기득권층은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 가며,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었다...
(류모세 저, 열린다 성경 성전 이야기)
※ 오늘 본문에서는 ‘대제사장들’이라는 복수 표현, 그리고 위 이야기에서는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와 가야바’라는, 이런 좀 이해하기 힘든 표현들은, 왜냐하면 대제사장은 본래 한 명이어야 하니까요, 당시 극도로 부패, 혼란스러웠던 상황을 암시하는 표현들입니다.
※ 헤롯 성전은 원래의 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을 확장한 성전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역사를 성전 시대로 나누는데요, 먼저 솔로몬 성전 건축부터 멸망까지를 1차 성전 시대(BC.960-586)라 하고, 스룹바벨 성전 건축부터 AD 70년, 헤롯 성전 함락까지를 2차 성전 시대(BC.515-AD.70)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장사하는 자들을 보고 어떻게 하셨을까요? 45절과 46절에는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45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46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주님께서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모욕하고 폭행할 때도 묵묵히 참으셨던 분입니다. 그러나 장사하는 자들이 성전을 점령한 것을 보시고 참지 못하고 무섭게 그들을 내쫓으셨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는 단지 혈기를 누르지 못해서가 아니라 진리에 의해 교회가 정화되는 모습을 보여주시기 위해섭니다. 진리는 자체로 악과 거짓을 흩어버리는 힘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거듭나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이라면 그에게는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이 꼭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장사하는 자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시며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와 관련해 계시록 해설 325번 글은 ‘예배의 첫째는 체어리티의 삶이고, 둘째는 기도다’라고 합니다. 기도는 자신을 돌아보며 주님 앞에 죄를 고백하는 일이며, 또 죄를 이길 힘을 구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기도가 없으면 체어리티의 삶을 살 수 없고, 체어리티의 삶이 없으면 진실한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두 가지 예배가 모두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성전에는 기도와 체어리티의 예배는 없고, 오로지 장사하는 자들 뿐이었습니다. 주님이 그 모습을 보시고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신 것입니다.
신앙인들의 내면에 있는 교회 안에는 진리를 방해하거나 파괴하려는 여러 종류의 도둑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정체는 지옥으로부터 자아를 통해 흘러들어오는 악한 욕망과 거짓된 망상들입니다. 그것들은 주님에 의해 일시적으로 쫓겨났다가도 경계가 느슨해지면 다시 들어와 어떻게 해서든지 진리를 파괴하려고 합니다. 본문에 주님을 죽이려고 기회를 엿보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바로 그런 악과 거짓들입니다. 제사장은 본래 사랑과 선을 표상하지만 여기서는 진리를 파괴하는 악한 욕망을 뜻하고, 서기관은 진리를 방해하는 거짓된 망상을 뜻합니다.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을 가진 사람은 진리를 통해 쉬지 않고 주님과 대화하면서 그런 악과 거짓들의 훼방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그것을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라는 표현으로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렇게 주님께서 가르치실 때, 48절에는,
48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
백성의 영어식 표현은 people인데, people의 속뜻은 진리, 또는 진리에서 비롯한 애정을 뜻합니다. 따라서 백성이 주님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은 새 교회 사람들의 진리의 애정이 주님을 향하여 열려 있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주님께 복종한다는 뜻입니다. 귀를 기울이는 것은 복종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복종할 때 악하고 거짓된 영들은 우리를 공격할 수 없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주님을 죽이려 꾀하나 방도를 찾지 못한다는 게 그런 것입니다. 요즘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이 많이 발전해서 그것만 있으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모두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젊은 사람이나 나이 든 사람이나 계속해서 스마트폰만 들여다봅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신앙인들은 그들과 좀 달라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스마트폰 속에 있는 세상의 일에 집착하다 보면 말씀을 가까이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별거 아닌 거 같아도 이러한 것들이 진리에 대한 애정을 빼앗아 갑니다. 진리에 대한 애정의 크기에 따라 진리를 파괴하는 악한 영들이 들고 일어나기도 하고 죽은 듯 잠잠하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에 대한 애정이 크고 순수한 만큼 우리의 겉 사람은 합리성과 가까워지고 합리성을 통해 속 사람 안에 계신 주님과 가까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이 ‘합리성’이라는 것은 영어로는 rational이라 하며, 우리의 겉 사람과 속 사람 간 가교 역할, 다리 역할을 하는 기능입니다. 쉬운 말로는 ‘이성’(理性, reason)으로 이해하셔도 됩니다. 어떤 사안, 어떤 진리에 대한 설명이 낯설지만, 그러나 매우 합리적일 때, 우리는 보다 쉽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 수용하게 되는 걸 생각하시면 됩니다. 다음은 이에 대한 보다 깊은 설명입니다.
늘 말씀드리는 것처럼 사람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는 주님이 거처하시는 곳, 즉 속 사람이라는 마음이 있고, 가장 바깥쪽에는 겉 사람이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는 합리적 사람, 또는 합리성이라는 마음이 있어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서로 연결하는 일을 합니다. 합리성과 겉 사람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야 주님은 합리성을 통해 겉 사람 안으로 오셔서 그 속에 있는 악하고 거짓된 것들을 몰아내실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겉 사람은 합리성과 만나 서로 결합할 수 있을까요? ‘천국의 비밀’ 3030:2번 글에 의하면,
합리성의 근본은 선이지만 그것이 겉으로 나올 때는 진리이다. 선은 내적인 경로를 통해 합리성 안으로 유입되지만, 진리는 외적 경로를 통해 유입된다. 선과 진리는 그렇게 합리성 안에서 하나로 결합한다. (AC.3030:2, 이순철 역) The genuine rational is from good, but comes forth [existit] from truth. Good flows in by an internal way; but truth by an external way. Good thus conjoins itself with truth in the rational,
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합리성이라는 의식은 선과 진리로 형성되는데, 합리성을 이루는 선은 주님에게서 오고, 그것과 결합할 진리는 겉 사람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합리성을 형성하는 진리는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까요? 좀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그것은 외적인 경로를 통해 흘러들어옵니다. 즉 겉 사람 안에는 기억이라고 하는 지식의 창고가 있는데 거기서부터 흘러들어온다는 겁니다. 사람의 기억 속에는 세상의 지식이나 말씀으로부터 얻은 지식 등 수많은 지식이 있습니다. 외적 경로를 통해 합리성 안으로 유입되는 진리란 이를테면 그러한 지식들을 말합니다. 단지 세상적인 흥미나 명예를 위해 그런 지식을 습득한다면, 그것은 진리에 대한 애정이 아닙니다. 지식을 추구하되 주님과 이웃을 섬길 목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진리에 대한 애정입니다. 그 애정이 기억 속에 있는 지식을 소환해 합리성의 선과 결합하도록 만듭니다. 그때 비로소 영적인 합리성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시는 영적 합리성은 세상의 합리성과는 전혀 다릅니다. 신앙인들은 그런 합리성을 통해 진리를 파괴하려는 악과 거짓과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이 있어야 합니다. 합리성의 선은 오염된 진리와는 결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의 진리가 주님을 향하고 있는지, 아니면 자아와 세상을 향하고 있는지를 늘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자아로부터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기도하도록 항상 힘써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마21:16)
오늘 이 20번 글은 창조의 첫날, 즉 거듭남이 시작된 사람의 첫 번째 상태에 관한 설명입니다.
선과 참, 선과 진리라는 게 있는데 이게 뭔가 그동안 자기가 알고 있던, 믿어왔던 것하고는 질적으로 다르며, 뭔가 더 높고, 품격 있고, 진짜라는 걸 느끼기 시작하는, 알기 시작하는 때라고 합니다.
마치 태생적으로 중화사상, 그러니까 온 세상의 중심은 중국이며, 세상 나라들은 중국에 머리를 조아려야 하고, 그래서 중국은 가장 선진국이라는 사상에 세뇌되어 살아온 중국인들, 특히 중국 청년들이 선진문명을 접하면서 그 실상에 눈을 뜨는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8번 글 설명에서도 말씀드렸듯, 비록 모태신앙으로 태어났어도 술, 담배만 안 했을 뿐, 그리고 교회만 다녔을 뿐, 모든 가치관이 세속적이었던, 그러니까 신앙생활도 나의 미래와 나의 행복을 위해서 하는 건 줄 알았던 그런 삶을 살다 갑작스런 모친 별세를 접하고는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나듯 첫 번째 눈을 떴던 것과도 같습니다.
오늘 20번 글에는 ‘빛’이 나오는데요, 이와 관련, ‘천국과 지옥’ 15장, ‘천국의 빛과 열’에서 글 몇 개를 인용합니다.
126. 천국에 빛이 있다는 것은 물질적 개념으로만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천국의 빛은 이 세상 대낮의 빛보다 몇 배 더 밝다. 그 빛을 나는 자주 보았고, 심지어 저녁과 밤에도 보았다. 나는 처음에 이 세상 빛은 천국에 비하면 그림자보다 조금 밝은 정도라는 천사들의 말을 듣고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내가 직접 보고 난 후에는 그 사실을 입증할 수 있게 되었다. 천국 빛의 밝기와 광휘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이다. 내가 천국에서 본 모든 것은 그 빛으로 본 것이며, 따라서 이 세상 사물보다 훨씬 명백하고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127. 천국의 빛은 세상 빛 같은 자연적 빛이 아니라 영적 빛이다. 그 빛은 해로 계신 주께로부터(from the Lord as a sun) 나온 것이고, 그 해는 신적 사랑(the Divine love)이기 때문이다. 해로 계신 주께로부터 발산되는(goes forth) 것을 천국에서는 신적 진리(Divine truth)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 본질은 신적 진리에 융합된 신적 선(Divine good united to Divine truth)이다. 이로부터 천사들은 열과 빛을 얻는다. 빛은 신적 진리에서, 열은 신적 선에서 얻는다. 천국의 빛과 열이 이 근원에서 나온다는 사실에서 그 빛과 열은 물질이 아니라 영적인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128. 천사들에게는 신적 진리가 빛이다. 그들이 자연적 존재가 아니라 영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영적 존재들은 영적 해의 빛으로 보고, 자연적 존재들은 자연적 해의 빛으로 본다. 신적 진리로 인해 천사들은 사고기능(understanding)이 있으며, 그들의 사고력(understanding)은 내적 시각(inner sight)이어서 이것이 그들의 외적 시각으로 흘러들고, 그 시각을 형성한다. 따라서 천국에서는 해로 계신 주님으로 인해 보이는 모든 것이 빛에 드러난다. 천국 빛의 근원이 이렇기 때문에, 그 빛은 사람이 주님의 신적 진리를 받는 정도에 따라, 즉 천사들의 지성과 지혜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천적 나라와 영적 나라의 빛이 다르고, 각 공동체마다 빛이 다른 것이다. 천적 나라에서 빛은 타오르는 불꽃 같다. 그곳 천사들이 해로 계신 주께로부터 빛을 받기 때문이다. 한편, 영적 나라의 빛은 광채 나는 흰색이다. 그곳 천사들이 달로 계신 주께로부터 빛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각 공동체마다 빛이 다르고, 그 사회 내에서도 중심부에 있는 이들은 더 밝은 빛에, 가장자리에 있는 이들은 덜 밝은 빛에 거한다. 한마디로, 천사들은 그들이 신적 진리의 그릇인 정도만큼, 즉 주께로부터 지성과 지혜를 받는 정도만큼 빛이 있다. 이것이 왜 천국 천사들을 빛의 천사라 하는가 하는 이유이다.
129. 천국에서 주님은 신적 진리이시고, 신적 진리는 그곳 빛이기 때문에, 말씀에서 주님과 주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진리를 ‘빛’이라 하였다. 다음 구절들이 그 예이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8:12)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요9:5)
35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36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46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요12:35, 36, 46)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3:19)
또 요한은 주님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요1:9)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마4:1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사42:6)
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사49:6)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계21:24)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시43:3)
이 구절들과 그 밖의 다른 곳에서 주님을 빛이라고 한 것은 그분께로부터 나오는 신적 진리 때문이다. 또 진리 자체도 빛이라고 한다. 천국의 빛이 해로 계신 주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에,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앞에서 변화하셨을 때에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마17:2)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막9:3)
주님의 옷이 이렇게 보이는 것은, 옷이 천국의 신적 진리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말씀 안의 ‘옷’도 진리를 의미한다. 따라서 다윗은 이렇게 노래한 것이다.
앞서 ‘혼돈’(混沌, void)은 선이 하나도 없는 상태, ‘공허’(空虛, empty)는 진리가 하나도 없는 상태라 하였고, 뒤이어 오늘 ‘흑암’(黑暗, thick darkness) 상태, 즉 어리석은 상태이지요, 주님 신앙(faith in the Lord)에 속한 모든 것에, 그 결과 영적, 천적(天的, heavenly) 생명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해 무지한 상태가 되는 것, 바로 ‘깊음’이 나오는데요, 이와 관련, 다음 글, 곧 지옥의 두 기둥 중 하나인 ‘자기 사랑’에 대한 글을 인용합니다. 한번 둘을 나란히 놓고 오늘 본문을 생각해 보세요.
※ 아랫글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3부 ‘지옥’편, ‘지옥의 모든 사람은 악과 허위 안에 있다’에 나오는 글입니다. 김은경 역입니다.
557. 무엇이 자기 사랑인가는 천국의 사랑과 비교하면 알 수 있다. 천국의 사랑은 쓰임새를 위해 쓰임새를, 즉 선을 위해 선을 사랑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 동기는 교회와 조국과 인류 사회와 이웃 시민을 위하는 마음이다. 이것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모든 쓰임새와 모든 선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도 쓰임새와 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이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이 자신에게 봉사할 수 있기 때문에, 종으로 사랑할 뿐이다. 따라서 자기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교회와 나라와 인류 사회와 이웃 시민이 자기에게 봉사하기를 바라고, 자기가 그들에게 봉사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 사랑 안에 있는 정도만큼 그는 스스로 천국의 사랑에서 멀어지므로, 그만큼 자신을 천국으로부터 떼어놓는 것이다.What love of self is can be seen by comparing it with heavenly love. Heavenly love consists in loving uses for the sake of uses, or goods for the sake of goods, which are done by man on behalf of the church, his country, human society, and a fellow citizen; for this is loving God and loving the neighbor, since all uses and all goods are from God, and are the neighbor who is to be loved. But he who loves these for the sake of himself loves them merely as servants, because they are serviceable to him; consequently it is the will of one who is in self-love that the church, his country, human societies, and his fellow citizens, should serve him, and not he them, for he places himself above them and places them beneath himself. Therefore so far as anyone is in love of self he separates himself from heaven, because he separates himself from heavenly love.
558. 사람이 천국의 사랑 안에 있는 정도만큼 그는 주님의 인도를 받는다. 주님이 그 사랑 안에 계시고, 그 사랑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천국의 사랑을 이루는 것은 쓰임새와 선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것을 교회와 나라와 인류 사회와 이웃 시민을 위해 행하면서 마음의 기쁨으로 감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 사랑 안에 있는 정도만큼 자기에게 끌려간다. 그리고 사람은 자기에게 끌려가는 정도만큼 주의 인도를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는 만큼 스스로를 신성에서 떼어놓고, 따라서 천국에서 떼어놓는 결과가 된다. 자기에게 끌려간다는 것은 자기 본성에 이끌리는 것이다. 사람의 본성은 악을 빼면 아무 것도 없다. 사람의 타고난 악은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고, 천국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선을 행하면서 자기를 염두에 두면, 그때마다 자기 본성, 즉 자기가 타고난 악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왜냐하면, 그럴 때 그는 자신에게서 눈을 돌려 선을 바라보지 않고, 선에서 눈을 돌려 자기를 바라보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의 선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자기의 형상을 만들기 때문이다.Furthermore, so far as anyone is in heavenly love, which consists in loving uses and goods and being moved by delight of heart when doing them for the sake of the church, country, human society, and one’s fellow citizens, he is so far led by the Lord, because that love is the love in which the Lord is, and which is from him. But so far as anyone is in the love of self, which consists in performing uses and goods for the sake of himself, so far he is led by himself; and so far as anyone is led by himself he is not led by the Lord. And from this it also ollows that so far as anyone loves himself he separates himself from the Divine, thus also from heaven. To be led by oneself is to be led by what is one’s own; and what is man’s own is nothing but evil; for man’s inherited evil consists in loving self more than God, and the world more than heaven. Whenever man looks to himself in the good that he does he is let into what is his own, that is, into his inherited evils; for he then looks from good to himself and from himself to good, and therefore he presents an image of himself in his good, and not an image of the Divine.
뒤에 계속 이어지지만 이 정도로 줄이지요.
천국은 선과 진리의 나라이지만, 지옥은 그와 정반대, 곧 악과 거짓의 나라입니다. 다른 말로는, 천국은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의 나라이지만, 지옥은 ‘자기 사랑’, ‘세상 사랑’의 나라입니다.
천국의 필수 요소인 선과 진리가 없는 상태, 곧 아직 거듭남이 시작되지 않은 사람들의 상태를 이해하기 위해 지옥에 있는 사람들의 상태를 잠시 살펴보았습니다.
‘혼돈’(混沌, void)은 선이 하나도 없는 상태, ‘공허’(空虛, empty)는 진리가 하나도 없는 상태라는 오늘 본문을 생각할 때, 다음 글이 혹시 도움 될까 인용합니다.
7. 천사들이 이만큼 모여 있는 곳을 천국이라고 합니다. 천사들이 천국을 구성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천국을 이루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나와서 천사들 안으로 흘러 들어가 그들에게 수용되는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입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이 신성은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the good of love and the truth of faith)이기 때문에, 천사들도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이 선과 진리를 받는 정도만큼만 천사요, 천국입니다.The angels taken collectively are called heaven, for they constitute heaven; and yet that which makes heaven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is the Divine that goes forth from the Lord and flows into the angels and is received by them. And as the Divine that goes forth from the Lord is the good of love and the truth of faith, the angels are angels and are heaven in the measure in which they receive good and truth from the Lord. (HH.7)
이 글이 속한 장의 제목이 ‘천국을 만드는 것은 주님의 신성이다’(It Is the Divine of the Lord That Makes Heaven)인 것으로 보아, ‘혼돈’과 ‘공허’에 대한 저 설명은, 천국에 꼭 필요한 두 가지 요소가 없는 상태라는 말이며, 이는 곧 저대로 가만 놔두면 지옥 상태가 된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온 인류를 지옥 가게 하려고 지으시는 분이 아니시므로 필연적으로 인류를 구원코자 하시는 주님의 어떤 액션이 시작되는데요, 그것이 바로 19번 글에서 다룰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입니다.
모든 지혜와 지성은 주님의 선과 진리로부터 나옵니다. 그래서 이런 ‘혼돈’과 ‘공허’ 상태 속에서는 필연적으로 ‘무지’가 뒤따르는데, 이를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라 합니다. 이는 바로 다음 글인 18번 글에서 다룹니다.
창세기 1장 2절은, 모든 사람의,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 상태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것만 보아도 왜 우리가 힘써 주님에 대하여, 천국에 대하여 주변에 전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지구의 생성 연대와 그 방법 등에 대해서는, 그러니까 고고학, 지질학, 인류학 등이 무척 궁금해하는 주제들에 대해서는 입을 꾹 다물고 있습니다. 가끔 입을 열어도 그냥 대략, 대충 언급하고 지나갑니다. 가령, 오늘 본문처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식으로 말이죠. 우리가 사는 이 지구에 대해서 이 정도니 우주에 가득한 저 항성, 즉 별들을 포함, 우주 생성에 관해서는 뭐,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창조’라는 주제와 관련, 스베덴보리 저, ‘Divine Love and Wisdom’ 4장, ‘[The Method of Creation]’을 보아도 저들 소위 학자들이 듣고 싶어 하는 그런 표현들은 없지요...
그래서 창조론이다, 진화론이다 싸우고 있고, 또 지구 나이에 대해 성경에 나오는 족보를 가지고 계산한 6, 7천 년 입장과, 순수 지질과학으로 측정한, 지구 나이 45억 년 입장이 있습니다. 전에 대전에 있는 한국지질자원연구원에 박사로 재직 중이시던 어느 목사님께 이 문제를 여쭈었더니 본인은 개신교 목회자이시면서도 지구 나이는 45억 년이라고 잘라 말하시더군요. 저는 그때 아직 스베덴보리를 모르던 때였는데, 속으로 ‘이분은 창조론을 신봉하는 수많은 개신교 목회자들 사이에서 마치 저 옛날 고독하게 지동설을 주장하던 갈릴레오 갈릴레이 같으시겠구나...’ 한 적이 있었습니다. 참고로, 저는 지구 나이 45억 년을 지지하는 입장입니다. 그 이유는... 나중에, 그러니까 누가 몇백 년을 살았다라는 본문 나올 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창세기 주석에 의하면, 인류의 역사는 교회의 역사이며, 크게 지금이 네 번째 교회 시대이고, 이제 다섯 번째인 새 교회 시대가 시작된다고, 어떤 의미에선 이미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과거 교회 시대를 순서대로 나열하면, 태고 교회, 고대 교회, 이스라엘 교회라고 합니다. 다음은 각 교회에 대한 브리핑입니다.
첫 번째 교회 시대인 태고 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는 창1, 아담이라는 교회로 시작, 노아라는 교회로 마감하는 교회입니다. 태고 교회의 종말을 우리가 잘 아는 대홍수, 곧 노아의 홍수로 표현했습니다.
두 번째 교회 시대인 고대 교회(古代, The Ancient Church)는 노아 교회로 시작, 시내산 십계명 전까지의 교회입니다. 이 기간, 제1, 제2 및 제3의 고대 교회로 나눕니다. 제2는 에벨에서 야곱까지, 제3은 이후 모세까지입니다.
※ 제가 창세기 11장까지의 등장인물들을 자꾸 어느 한 개인이 아닌, 교회로 언급하는 것은 그들이 사실은 그 시대를 풍미했던 신앙, 교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며, 그래서 ‘노아’ 역시 노아라는 신앙으로 모이던 교회, ‘셈’하면 노아라는 신앙에서 갈라져 나와 ‘셈’이라는 새로운 신앙으로 모이던 교회, ‘함’, ‘야벳’ 역시 마찬가지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교회 시대인 이스라엘 교회는 모세의 시내산 십계명 선포로 시작, 주님의 초림 때까지입니다. 표상, 표징교회라고도 합니다.
네 번째 교회 시대는 현 기독 교회이고,
다섯 번째 교회 시대는 주님이 다스리실 새 교회, 새 예루살렘 교회입니다.
이 교회 시대들에 관한 놀라운 사실들을 몇 가지 말씀드리면,
첫째, 교회의 종말, 최후의 심판이라는 것이 사실은 각 교회 시대마다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 교회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교회 시대가 시작되기 위해서는 이전 교회 시대가 철저히 타락, 황폐해져야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며, 그렇다면, 주님 오셔서 새로운 교회 시대가 시작되려면, 현 기독 교회 역시 철저히 황폐해져야 함 또한 알 수 있습니다. 교회가 황폐해진다는 것은 그 안에 주님의 선과 진리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 그렇다고 새로운 교회 시대를 일으키기 위해 주님이 억지로 현 교회 시대를 황폐케 하신다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항상 어긋나게 행하는 주체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늘 그 뒤치닥거리를 하시는 거고 말입니다...
둘째, 창세기 1장부터 11장, 데라까지는 실제 역사가 아닌, 태고인들이 즐겼던 스피칭 스타일로 기술된 역사라는 것입니다. 짐작할 수도 없는 장구한 태고 및 고대 교회 시대 모든 교회들의 상태를 스토리 텔링 식으로 기술한 것입니다. 실제 역사는 아브람부터라고 합니다.
셋째, 태고 교회가 시작된 실제 역사가 몇천, 몇만, 아니면 수십, 수백, 수천만 내지는 수억 년 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실제 지구 나이인 45억 년을 염두에 두고 생각할 때, 참으로 장구한 세월을 이어 온 이 교회 시대들의 부침(浮沈)은 인류를 늘 자신과 연결되어 있게 하고자 하신 주님의 사랑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많은 다른 사실들이 있지만, 그건 그때그때 만나기로 하고요, 우선은 이 정도만 하지요... ^^
AC.15 설명, 천국의 모든 것 되시는 ‘주님의 신적 인성’(the Lord as to the Divine Human) (2024/6/10)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Arcana Coelestia’(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주석) 7211번 글입니다. 이 글은 출애굽기 6장 8절 말씀 중, 아래 본문에 대한 주석 일부입니다.
좀 어려울 수도 있는 내용을 먼저 이렇게 소개하는 이유는, 천국에서 주님, 특히 주님의 신적 인성(the Divine Human)이 어떤 역할, 어떤 위치인지를 아는 것이, 그래서 오늘 AC.15번 글의 ‘주님’에 대한 이해를 더욱 생생하게 확장시켜 줄 수 있어서입니다.
참고로, 주님은 신성(the Divine, 여호와 하나님, 사람의 영에 해당)과 신적 인성(the Divine Human, 예수 그리스도, 사람의 육에 해당), 그리고 신적 활동(the Divine Operation, 성령, The Holy Spirit, 사람의 활동에 해당)으로 되어 있으신 분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신적 삼위일체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신성은 선과 진리로 되어 있는데, 주님의 신성 중 선에 대한 호칭이 '여호와', 진리에 대한 호칭이 '하나님'이며, 또한 주님의 신적 인성 중 선에 대한 호칭이 '예수', 진리에 대한 호칭이 '그리스도'입니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And I will bring you unto the land where I lifted up my hand to give it to Abraham, to Isaac, and to Jacob.
이 말씀은 신적 능력(the Divine power)에 의해 천국, 곧 주님의 신적 인성(the Divine Human of the Lord)이 모든 것인 곳으로 들어 올려짐을 의미하는데요, 이는 ‘땅으로 인도하고’(bringing to the land)의 의미, 즉 가나안으로 인도하고의 의미가 천국으로 들어 올려지는 것이라는 사실로부터(※ ‘가나안 땅’(the land of Canaan)이 주님의 나라, 즉 천국을 가리킨다는 7196번 글 참조), 그리고 ‘맹세한’(lifting up the hand)의 의미, 즉 이 말의 의미가 여호와, 곧 주님이 하실 때는 신적 능력에 의해서라는 사실로부터(※ 여기 ‘손’(hand)이 능력을 가리킨다는 것은 글 번호 878, 4931–4937, 5327–5328, 6947, 7011 참조), 그리고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이 표상하는 바가 주님의 신성 자체와 신적 인성(the Lord as to the Divine itself and as to the Divine human)인데, 여기서는 후자, 곧 신적 인성에 관한 주님이시며, 그 이유는 이것, 곧 주님의 신적 인성이 천국의 모든 것이기 때문이라는 사실로부터(※ 글 번호 6804, 6847 참조) 분명합니다. 신적 인성이 왜 천국의 모든 것인가 하는 것은, 그곳 어느 누구도, 심지어 가장 내적 천국, 곧 삼층천 천사들조차 신성 그 자체(the Divine itself)에 대해서는 그 어떤 아이디어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요한복음에서 다음과 같이 주님이 하신 말씀으로 알 수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No one hath ever seen God, 요1:18),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Ye have neither heard the voice of the Father at any time, nor seen his shape, 요5:37) 천사들은 유한하며, 유한한 것은 무한한 존재에 대해 그 어떤 아이디어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며, 그래서 그들은 천국에서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은 사람 형상(a human shape)이라는 아이디어를 갖고 있지 않으면, 그들은 아이디어라는 걸 전혀 가질 수 없거나 무슨 이상한 아이디어를 갖게 되고, 그 결과 그들은 신앙으로나 사랑으로나 신성과 결합할 수 없게 되는데요, 바로 이것이 천국에서 천사들은 신성을 사람 형태(a human form)로 지각한다는 케이스가 됩니다. 모든 천국에서 신적 인성은 그들의 관점에서 모든 것이며, 그래서 그들의 신앙과 사랑에서도 모든 것이고, 바로 이 점이 구원이 시작되는 결합(the conjunction through which is salvation)이 오는 지점입니다. That this signifies an uplifting by the Divine power to heaven, where the Divine human of the Lord is all,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bringing to the land,” namely, to Canaan, as being to uplift to heaven (that the “land of Canaan” denotes the Lord’s kingdom or heaven, see n. 7196); from the signification of “lifting up the hand,” when said of Jehovah or the Lord, as being by Divine power (that “hand” denotes power, see n. 878, 4931–4937, 5327–5328, 6947, 7011); and from the representation of Abraham, Isaac, and Jacob as being the Lord as to the Divine itself and as to the Divine human (n. 6804, 6847); here the Lord as to the Divine human, because this is the all in heaven. The reason why the Divine human is the all in heaven, is that no one there, not even an angel of the inmost or third heaven, can have any idea about the Divine itself, according to the Lord’s words in John: “No one hath ever seen God” (John 1:18); “Ye have neither heard the voice of the Father at any time, nor seen his shape” (John 5:37). For the angels are finite, and what is finite cannot have an idea of the infinite; and therefore unless in heaven they had in respect to God the idea of a human shape, they would have no idea, or an unbecoming one; and thus they could not be conjoined with the Divine either by faith or by love; and this being the case, in heaven they perceive the Divine in a human form; whence it is that the Divine human in the heavens is the all in their regards, and hence is the all in their faith and love; whence comes the conjunction through which is salvation (n. 6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