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4

둘째로, ‘네가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고 하였는데, 이는 네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체어리티가 함께 있지 않고 오히려 악이 있다는 뜻입니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sin lying at the door)는 것이 들어올 준비를 하고 들어오기를 원하는 악을 뜻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가 없으면 무자비함과 증오가 있고, 따라서 온갖 악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는 일반적으로 ‘마귀’(devil)라 불리는데, 마귀, 곧 그의 지옥의 무리는 사람이 체어리티가 결여되어 있을 때 언제나 가까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귀와 그의 무리를 마음의 문에서 몰아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Secondly, it is sai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which signifies, If thou art not well disposed, there is no charity present, but evil. Everybody can see that “sin lying at the door” is evil ready and desirous to enter; for when there is no charity there are unmercifulness and hatred, consequently all evil. Sin in general is called the “devil,” who, that is, his crew of infernals, is ever at hand when man is destitute of charity; and the only means of driving away the devil and his crew from the door of the mind is love to the Lord and toward the neighbor.

 

해설

AC.364는 앞의 AC.363과 정확히 대칭을 이룹니다. AC.363에서는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를 설명하면서,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으면 체어리티가 함께 있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64에서는 그 반대편을 보여 줍니다. ‘네가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곧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체어리티가 함께 있지 않으며, 그 자리에 악이 있게 됩니다. 따라서 이 두 글을 함께 놓으면 ‘선한 의도와 체어리티’ 그리고 ‘체어리티의 부재와 악’이라는 선명한 대조가 나타납니다.

 

여기서 먼저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체어리티가 없다’는 상태를 어떤 중립적인 상태로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체어리티가 없으면 그저 ‘아직 사랑이 부족하다’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무자비함과 증오가 있고, 따라서 온갖 악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강한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체어리티는 단순히 여러 기독교적 덕목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인간의 삶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이 들어와 이웃을 향하여 흘러가는 근본적인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그 체어리티가 사라지면 그 자리를 인간의 proprium에서 나오는 자기 사랑과 그에 따른 악들이 차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들어올 준비를 하고 들어오기를 원하는 악’(evil ready and desirous to enter)이라고 풀이합니다. 아직 악이 완전히 안으로 들어와 모든 것을 차지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악은 ‘문에’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가인의 상태와도 정확하게 맞아떨어집니다. 가인은 이미 분노했고, 얼굴이 떨어졌지만 아직 아벨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체어리티를 향한 적대적인 애정이 생겼지만, 체어리티 자체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다음 행위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경계에서 악이 문에 엎드려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문’은 매우 의미심장한 경계입니다. 안과 밖이 만나는 자리이며, 무엇인가가 들어오거나 들어오지 못하게 되는 자리입니다. 다만 AC.364에서는 아직 ‘문’의 상응 자체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는 않으므로, 여기서 그 의미를 지나치게 확대하기보다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한 범위에 머무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금 분명한 것은 악이 인간 안으로 들어오려고 가까이 와 있으며, 체어리티가 없는 상태가 그 악에게 문을 열어 주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죄’를 일반적으로 ‘마귀’(devil)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이것도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그는 곧이어 ‘마귀, 곧 그의 지옥의 무리(his crew of infernals)’라고 덧붙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의 초점은 악을 단순한 추상적 개념으로만 보지 않는 데 있습니다. 인간이 체어리티를 잃으면 그와 상응하는 지옥의 악한 영향이 가까이하게 된다는 스베덴보리 특유의 영계 이해가 배경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귀가 와서 사람에게 악을 집어넣으므로 인간은 책임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유입의 질서에서 인간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으며, 양쪽으로부터 오는 유입 가운데 무엇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느냐와 관련하여 자유를 가집니다. 악한 영들이 가까이 있다고 해서 사람이 자동으로 악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악을 자기 의지와 결합하여 받아들이고 자기 것으로 삼을 때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는 표현에는 한편으로 악의 가까움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도 남아 있습니다.

 

이 점에서 바로 앞 AC.359-360이 다시 중요해집니다. 가인의 얼굴이 떨어지고 체어리티가 떠난 바로 그때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즉 주님께서는 악이 행위로 완전히 굳어진 뒤에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악이 인간의 마음 문 앞에 와 있을 때 미리 알게 하십니다. 가인이 분노를 느낀 것과 아벨을 죽인 것 사이에는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는 섭리의 모습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강제로 악을 제거하시지는 않지만, 악을 보고 거절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선과 진리의 길을 보여 주십니다.

 

AC.364의 마지막 문장은 그래서 이 글 전체의 결론이면서 매우 강력합니다. ‘마귀와 그의 무리를 마음의 문에서 몰아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악과 싸우려면 의지를 강하게 가져라’거나 ‘올바른 교리를 더 확실히 믿어라’고 하지 않습니다. 악을 마음의 문에서 물리치는 수단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가인의 이야기를 읽어 온 우리에게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이 부족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악이 문에 엎드려 있을 때 해결책이 ‘더 강한 신앙’이라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이 다시 사랑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질서로 돌아가야 합니다. 바로 그 사랑에서 체어리티가 나오고, 그 체어리티 안에서 신앙도 다시 생명을 얻습니다.

 

여기서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함께 말한 것도 중요합니다. 둘은 서로 분리된 두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면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웃을 향하여 그 사랑이 흘러가며, 이웃을 향한 참된 체어리티의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악을 물리치는 힘이 인간 자신의 선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받아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할 때, 주님의 선이 인간 안에서 악을 밀어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귀와 그의 무리를 몰아낸다’는 표현도 인간이 자기 힘으로 지옥과 싸워 이긴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면, 그 사랑과 함께할 수 없는 악과 거짓이 물러나는 것입니다. 실제로 싸우시고 이기시는 분은 주님이시며,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 주님의 선을 받아들이고 악에 동의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AC.363과 AC.364는 한 쌍을 이룹니다. AC.363에서는 ‘선을 의도함 → 체어리티가 함께 있음 → 얼굴이 들림’이라는 길을 보여 주고, AC.364에서는 ‘선을 의도하지 않음 → 체어리티가 없음 → 악이 문에 있음’이라는 반대의 길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갈림길에 서 있는 가인에게 주님께서는 아직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는 말씀은 단순히 무서운 경고만은 아닙니다. ‘아직 문에 있다’는 것은 아직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직 아벨은 살아 있고, 아직 체어리티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으며, 아직 주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인이 해야 할 일은 문 앞의 악과 자기 힘으로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다시 사랑의 질서 안으로 돌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결국 AC.364가 가르치는 것은 악을 이기는 길 역시 체어리티라는 사실입니다. 체어리티가 없어진 자리에 악이 들어오며, 체어리티가 회복되면 악은 물러납니다. 그래서 창4의 가인과 아벨 이야기는 점점 더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라는 교리 논쟁을 넘어 인간 마음의 생명과 죽음의 문제가 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에 덧붙이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악이 마음의 문을 넘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살아 있는 생명입니다.

 

 

 

AC.365, 창4:7,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겨울의 빛과 같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5 셋째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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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3, 창4:6,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3 ‘가인’(Cain)이라 불린 신앙의 교리가 어떤 성질의 것이었는지는 이 절에 대한 설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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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3

‘가인’(Cain)이라 불린 신앙의 교리가 어떤 성질의 것이었는지는 이 절에 대한 설명에서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체어리티가 신앙과 결합될 수는 있었으나,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먼저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uplifted)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네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체어리티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선을 행한다’(do well)는 것은 속뜻으로 ‘선한 의도를 가지는 것’을 뜻하는데, 선을 행하는 것은 선을 의도하는 데서(from willing what is good) 나오기 때문입니다. 고대에는 행위와 의지가 하나를 이루었습니다. 사람들은 행위를 보고 그 의지를 알았는데, 당시에는 위선이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낯을 듦’(uplifting)이 체어리티가 함께 있음을 뜻한다는 것은 앞에서 얼굴에 관하여 설명한 것으로 분명합니다. 곧 ‘얼굴을 든다’(lift up the face)는 것은 체어리티를 가지는 것이며, ‘얼굴이 떨어진다’(face to fall)는 것은 그 반대입니다. The nature of the doctrine of faith that was called “Cain” is seen from the description of it in this verse, from which it appears that charity was capable of being joined to faith, but so that charity and not faith should have the dominion. On this account it is first said,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uplifted?” signifying, If thou art well disposed, charity may be present; for to “do well” signifies, in the internal sense, to be well disposed, since doing what is good comes from willing what is good. In ancient times action and will made a one; from the action they saw the will, dissimulation being then unknown. That an “uplifting” signifies that charity is present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already said about the face, that to “lift up the face” is to have charity, and that for the “face to fall” is the contrary.

 

해설

AC.363은 앞의 AC.361-362에서 제시된 가인의 문제를 한층 더 정확하게 밝혀 줍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 자체에 있지 않았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글 첫머리에서 체어리티가 신앙과 ‘결합될 수 있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문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함께 있느냐 없느냐만이 아니라, 둘이 함께 있을 때 ‘어느 것이 주도권을 가지느냐’였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 그대로라면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charity and not faith should have the dominion) 했습니다. 이것은 체어리티가 신앙을 억누르거나 무가치하게 만든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본래 결합되어야 하지만, 그 결합 안에서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기고 체어리티로 인도해야 하며, 체어리티가 신앙에 생명과 방향을 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62의 설명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신앙을 버린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신앙을 사랑보다 앞세우자, 신앙은 사랑에서 나오는 체어리티에서도 분리되었고, 결국 사랑 없이 살게 되었습니다. AC.361에서는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가인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함께 있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63은 그 반대의 정상적인 질서를 명시합니다. 체어리티와 신앙은 결합되어야 하되,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합니다. 바로 이 질서가 뒤집힌 것이 가인의 교리였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먼저 하신 말씀이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너는 이미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했으므로 끝났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아직 체어리티가 다시 신앙과 결합할 가능성이 남아 있습니다. 가인이 다시 선을 향한다면 체어리티가 그와 함께 있을 수 있고, 떨어졌던 얼굴도 다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4:7은 단순한 책망이나 심판의 선언이라기보다 가인에게 주어진 회복의 초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선을 행한다’(to do well)는 것을 단순히 외적으로 선한 행동을 한다는 뜻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속뜻으로는 ‘선한 의도를 가지는 것’(to be well disposed)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선을 행하는 것은 선을 의도하는 것에서(from willing what is good) 나오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행위의 외적 모양보다 그 행위가 흘러나오는 내적 의지입니다. 선한 행위가 참으로 선하려면 그 안에 선을 향하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가인의 제물과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가인에게도 행위가 있었습니다. 그는 땅을 경작했고, 그 소산으로 여호와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겉으로 보면 예배도 드렸습니다. 그러나 AC.348-349에서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 나온 행위를 ‘죽은 행위’로,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 예배를 ‘죽은 예배’로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가인에게 ‘선을 행하라’고 하신 말씀은 단순히 ‘이번에는 더 좋은 행동을 하라’거나 ‘더 합당한 제물을 드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외적 행위의 근원이 되는 내적 의지가 먼저 선을 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고대에는 행위와 의지가 하나를 이루었다’고 말합니다. 당시에는 사람의 행위를 보면 그 사람의 의지를 알 수 있었는데, 그 이유를 ‘위선(dissimulation)이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마음속으로 원하는 것과 밖으로 행하는 것이 오늘날처럼 쉽게 서로 갈라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의지에 있는 것이 행위로 나타났고, 행위는 그 사람 안에 있는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그래서 ‘선을 행한다’는 것과 ‘선을 의도한다’는 것이 서로 분리된 두 가지가 아니라 하나의 상태를 안과 밖에서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여기서 ‘고대에는’이라는 표현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일반적인 고대사 전체에 대한 진술이라기보다, 이 문맥에서 다루고 있는 태고교회 사람들의 특유한 내적 상태와 연결하여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곧 ‘고대에 살았던 모든 사람이 역사적으로 거짓말이나 위선을 전혀 몰랐다’는 뜻으로 확대하기보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의지와 행위가 아직 하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행위를 보면 그 사람의 의지를 알 수 있었으며, 속마음을 감추고 그와 다른 모습을 밖으로 꾸미는 위선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AC.363의 관심은 고대 인류 전체의 사회사를 설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 사람들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앞의 AC.358에서 살펴본 ‘얼굴’의 의미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얼굴은 인간의 ‘내적인 것들’을 상징합니다. 특히 태고교회와 관련해서는 내적인 애정과 상태가 얼굴에 그대로 나타났기 때문에 얼굴이 그 사람의 내면을 표상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얼굴이 떨어졌다’는 것은 단순히 화가 나서 표정이 어두워졌다는 뜻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떠남으로써 그의 내적인 것들이 변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반대가 바로 AC.363의 ‘낯을 듦’(an uplifting)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얼굴을 든다’는 것을 체어리티가 함께 있는 것으로 풀이합니다. 그러므로 창4:6-7에는 매우 선명한 대조가 있습니다. 가인의 얼굴은 떨어졌습니다. 체어리티가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하십니다. 다시 말해 가인이 선을 의도하고, 체어리티가 다시 그와 함께 있게 된다면, 변해 버린 그의 내적인 것들도 다시 올바른 질서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얼굴을 듦’은 곧 체어리티의 회복이며, 그에 따른 내적인 것들의 회복입니다.

 

여기서 AC.358 심화에서 살펴본 ‘여호와의 얼굴’까지 연결해 보면 더욱 깊은 그림이 나타납니다. 여호와의 얼굴은 주님의 자비를 뜻하며, 주님께서 그 얼굴을 들어 사람에게 비추신다는 것은 그 자비가 사람에게 유입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얼굴이 다시 들리는 것도 인간이 자기 힘으로 스스로를 개선하여 얻는 결과라고만 볼 수 없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자비를 받아 그것이 사람 안에서 체어리티가 될 때, 떨어졌던 인간의 얼굴, 곧 그의 내적인 것들이 다시 들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얼굴은 언제나 자비로 우리를 향하고 있으며, 문제는 인간이 그 자비를 받아 체어리티 안으로 돌아오느냐에 있습니다.

 

AC.363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의지’입니다. 참된 선은 단순히 행동의 외적 모양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선을 향하는 의지에서 선한 행위가 나와야 합니다. 다만 이 태고교회의 상태를 오늘날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홍수 후 영적 인간의 질서에서는 의지 자체가 처음부터 선을 직접 지각하여 행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말씀에서 선과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이해성(understanding) 안에서 받아들이며, 그 진리에 따라 양심적으로 살아가는 과정을 통하여 새로운 의지가 형성됩니다. 바로 앞 AC.359-360에서 우리가 퍼셉션과 양심의 차이를 조심스럽게 살펴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는 마음이 아직 충분히 원하지 않더라도 ‘이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선이기 때문에 행해야 한다’고 진리와 양심에 따라 순종하는 단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주님께서는 그 진리를 점차 의지 안에 심으십니다. 처음에는 ‘해야 하기 때문에’ 행하던 선을 나중에는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행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진리가 선과 결합되고,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되며, 아는 것과 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이 점차 하나를 향하게 됩니다. 태고교회의 ‘행위와 의지가 하나였다’는 상태를 오늘날 우리가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은 아니지만, 거듭남을 통하여 속과 겉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점차 하나가 되어 간다는 원리는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이렇게 보면 가인의 길은 거듭남의 방향과 정확히 반대입니다.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사랑에서 구별한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었지만, 그 구별을 분리로 만들었고, 분리된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보다 위에 세웠으며, 마침내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고 지배하려 했습니다. 그러면서 외적인 행위와 예배는 남아 있었지만, 그 안의 생명은 점차 사라졌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 가인에게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말씀하십니다. 다시 체어리티를 받아들이고, 신앙을 체어리티와 결합시키며, 외적 행위가 선을 향한 내적 의지에서 흘러나오게 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AC.363의 핵심은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둘은 반드시 결합되어야 합니다. 다만 그 결합에는 주님의 질서가 있습니다. 신앙이 체어리티 위에 서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하며, 진리는 선을 섬기고, 신앙은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면 가인의 질서가 되지만, 체어리티가 신앙에 생명과 방향을 주면 신앙은 비로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얼굴을 듦’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떨어진 얼굴을 다시 들게 하는 것은 더 많은 지식이나 더 강한 교리적 확신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받아 체어리티가 다시 신앙과 함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직 가인은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아직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할 길이 열려 있습니다. 그래서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는 말씀은 책망인 동시에 자비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체어리티에서 떠나 얼굴이 떨어진 가인에게도 여전히 돌아올 길을 보여 주고 계십니다.

 

 

 

AC.364, 창4:7,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 악을 물리치는 것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4 둘째로, ‘네가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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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2, 창4:6,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든 가인의 교리’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2 여기서는 ‘가인’(Cain)이라 하는 신앙의 교리가 묘사됩니다. 이 교리는 신앙을 사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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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2

여기서는 ‘가인’(Cain)이라 하는 신앙의 교리가 묘사됩니다. 이 교리는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함으로써, 사랑에서 나오는 체어리티에서도 신앙을 분리하였습니다. 교회가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이단들이 생겨납니다. 사람들이 신앙의 어떤 특정 조항 하나에 몰두하면 그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사고에는 이런 성향이 있어서, 어떤 한 가지에 몰두하면 그것을 다른 모든 것보다 앞세우며, 특히 그것을 자기 자신이 발견한 것이라고 상상할 때, 그리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그를 부풀게 할 때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그 생각과 일치하고 그것을 확증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며, 마침내 그것이 거짓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참이라고 맹세할 정도에 이르게 됩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가인’(Cain)이라 하던 사람들은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으며, 그 결과 사랑 없이 살게 되자 자기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환상이 서로 결탁하여 그들을 그 생각 가운데 더욱 굳어지게 하였습니다. The doctrine of faith called “Cain” is here described, which in consequence of separating faith from love, separated it also from charity, the offspring of love. Wherever there is any church, there arise heresies, because while men are intent on some particular article of faith they make that the main thing; for such is the nature of man’s thought that while intent on some one thing he sets it before any other, especially when his imagination claims it as a discovery of his own, and when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puff him up. Everything then seems to agree with and confirm it, until at last he will swear that it is so, even if it is false. Just in this way those called “Cain” made faith more essential than love, and as they consequently lived without love, both the love of self and the fantasy thence derived conspired to confirm them in it.

 

해설

AC.362는 가인의 문제가 어떻게 하나의 ‘교리’로 굳어졌는지를 본격적으로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글입니다. 앞의 AC.361에서 우리는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가인으로 표상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고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함께 할 수 없다는 설명을 보았습니다. 이제 AC.362에서는 한 걸음 더 들어가 ‘어떻게 그런 생각이 생겼으며, 어떻게 그것이 하나의 확고한 교리가 되었는가?’를 설명합니다.

 

첫 문장이 전체를 압축합니다. ‘가인’은 단순히 신앙 자체가 아니라 ‘신앙의 교리’입니다. 그런데 그 교리는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했고, 그 결과 사랑의 자손인 체어리티에서도 신앙을 분리했습니다. 여기서 ‘체어리티는 사랑의 자손(the offspring of love)’이라는 표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이 내적인 근원이라면 체어리티는 그 사랑이 이웃을 향하여 나타나는 삶입니다. 따라서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놓는 순간 그것은 자연스럽게 체어리티에서도 떨어져 나갑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를 서로 독립된 것으로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문제를 가인이라는 고대의 한 이단에만 한정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이단들이 생겨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사고에는 어떤 하나의 진리를 붙잡았을 때, 그것을 ‘전체’로 만들어 버리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단이 반드시 처음부터 완전히 거짓된 생각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신앙’처럼 실제로 중요하고 참된 것을 붙잡고, 그것을 다른 모든 것보다 앞세울 때 문제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가인의 시작과 정확히 맞닿습니다. 가인은 처음부터 ‘거짓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태고교회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에 속한 것을 하나의 구별되는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데서 출발했습니다. 문제는 그 ‘구별’이 ‘분리’가 되고, 분리된 것이 마침내 ‘주된 것’이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AC.362에서는 바로 그 과정의 심리적 원인을 설명합니다. 인간은 어떤 하나에 몰두하면 그것을 다른 모든 것보다 앞세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매우 날카로운 대목이 ‘그것을 자기 자신이 발견한 것이라고 상상할 때’입니다. 어떤 진리를 단순히 주님에게서 받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내가 이것을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다른 내적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 그 진리가 점차 ‘나의 진리’가 됩니다. 그러면 그 진리를 내려놓거나 수정하는 것은 단순히 생각 하나를 수정하는 일이 아니라 ‘나’를 부정하는 일처럼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자기 사랑이 그 교리와 결합합니다.

 

여기에 ‘세상 사랑’까지 더해집니다. 어떤 교리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그것으로 명성을 얻고, 자기 집단의 정체성과 권위를 세울 수 있게 되면 이제 그 교리를 지키는 데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함께 작동합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진리인가?’를 물었지만, 나중에는 ‘내가 틀릴 수 있는가?’, ‘우리가 틀릴 수 있는가?’의 문제가 됩니다. 진리를 사랑해서 교리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교리를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매우 위험한 단계가 시작됩니다. ‘모든 것이 그것과 일치하고 그것을 확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말하는 단순한 지적 오류보다 훨씬 깊은 영적 현상입니다. 이미 사랑이 방향을 정했기 때문에 이해성(understanding)이 그 사랑을 섬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결론을 먼저 정해 놓고, 말씀과 경험과 논리를 모두 그 결론을 지지하는 증거로 읽습니다. 반대되는 것은 보이지 않거나 중요하지 않게 여기고, 자기 생각을 지지하는 것은 작은 것까지 크게 보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거짓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참이라고 맹세할’ 정도가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정보를 잘못 알고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거짓이 자기 사랑과 결합하여 확증된 상태입니다. 처음에는 ‘나는 이것이 옳다고 생각한다’였지만, 나중에는 ‘이것은 반드시 옳아야 한다’가 됩니다. 그리고 결국 ‘이것과 다른 것은 틀렸다’가 됩니다. 여기에서 교리적 차이는 쉽게 상대방을 향한 분노와 배척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인의 길입니다. 가인들은 ‘신앙’을 버린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지나치게 높였습니다.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more essential)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표현이 AC.362의 핵심입니다. 문제는 신앙을 중요하게 여긴 것이 아니라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든 것입니다. 수단이 목적보다 위에 올라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앞의 AC.361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너는 그를 다스릴지니라’는 가인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는 상태였습니다. AC.362는 그 지배가 어떻게 교리적으로 정당화되는지를 설명합니다. ‘신앙이 더 본질적이다’라고 정하면 체어리티는 자연스럽게 신앙 아래로 내려갑니다. 사랑과 선한 삶은 ‘있으면 좋은 것’, ‘신앙의 결과’, 또는 ‘부차적인 것’이 되고, 무엇을 믿고 어떤 교리를 고백하는지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됩니다.

 

그런데 그 결과를 스베덴보리는 아주 간결하게 말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사랑 없이 살았다.’ 교리의 질서가 삶의 질서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사랑보다 신앙을 앞세운 것이 단순한 신학적 순서 문제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실제 삶에서 사랑이 사라졌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그토록 엄중하게 다루는지를 보여 줍니다. 교리의 잘못된 질서는 결국 삶의 잘못된 질서가 됩니다.

 

더 심각한 것은 사랑이 사라진 빈자리가 비어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환상’이 그들을 확증했습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떠난 자리에 자기 사랑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이해성은 그 자기 사랑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계속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신앙이 사랑보다 중요하다’는 교리는 단순한 지적 오류가 아니라 자기 사랑을 보호하고 강화하는 체계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fantasy’를 단순히 ‘상상’ 정도로 이해하면 약합니다. 여기서는 자기 사랑에서 생겨난 왜곡된 사고, 곧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참이라고 여기고, 그에 맞추어 현실과 말씀을 보는 일종의 ‘환상’입니다. 그래서 자기 사랑과 환상이 ‘conspired’, 곧 서로 결탁합니다. 사랑이 거짓된 방향을 원하고, 사고가 그것을 끊임없이 합리화합니다. 결국 악한 사랑과 거짓된 사고가 서로를 강화하는 구조가 됩니다.

 

이것은 앞으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을 이해하는 데도 결정적입니다. 아벨을 죽이는 것은 단순히 ‘신앙이 체어리티를 싫어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이미 그 전에 ‘신앙이 사랑보다 더 본질적이다’라는 교리가 형성되었습니다. 그 교리는 자기 사랑에 의해 확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는 이제 단순한 형제가 아니라 그 교리의 정당성을 위협하는 존재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다음 단계는 체어리티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62는 ‘이단이 어떻게 생기는가?’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매우 중요한 설명이기도 합니다. 이단은 반드시 성경을 버린 데서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의 어떤 한 진리를 붙잡아 그것을 전체 질서에서 떼어내고 절대화할 때 생길 수 있습니다. 신앙도 진리입니다. 사랑도 진리입니다. 체어리티도 진리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붙잡아 ‘사랑’과 ‘체어리티’를 그 아래에 종속시키면, 참된 것 하나를 붙잡고서 전체를 왜곡할 수 있습니다.

 

이 원리는 신앙과 체어리티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특정 교리, 성경 번역, 예배 형식, 성례 이해, 종말론, 은사, 교회 정치, 특정 신학자의 가르침 등 무엇이든 그것을 전체보다 앞세우면 같은 위험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이 처음에는 상당 부분 참되더라도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가 되고, 이어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잘못되었다’가 되고, 마침내 그것을 중심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체어리티를 잃는다면 구조적으로 가인의 길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질문은 ‘내 교리가 맞는가?’만이 아닙니다. ‘그 교리가 나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가?’도 물어야 합니다. 참된 교리는 인간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인도합니다. 진리를 더 많이 알수록 겸손해지고,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며, 선한 쓰임을 더 충실히 행하게 해야 합니다. 반대로 진리를 많이 알수록 자기 우월감이 커지고, 다른 사람을 쉽게 정죄하며, 자기 해석을 지키기 위해 체어리티를 희생하게 된다면, 그 교리가 아무리 정교해도 이미 가인의 위험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스베덴보리를 읽는 우리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르카나’를 많이 알고 상응과 퍼셉션과 체어리티의 질서를 정확히 설명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가인의 위험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말씀의 속뜻을 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질서를 안다’는 생각이 자기 사랑과 결합하면 스베덴보리의 가르침 자체도 자기 우월성을 확증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이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체어리티를 잃는 역설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AC.362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진리를 적게 알라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언제나 그 목적 안에 두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사랑을 섬겨야 하고, 진리는 선을 섬겨야 하며, 교리는 삶을 섬겨야 합니다. 내가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어떤 진리도 전체 말씀과 교회의 질서,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목적 아래 놓여 있어야 합니다.

 

결국 AC.362는 가인의 비극이 ‘신앙을 버린 데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신앙을 지나치게 높인 데서’ 시작되었다는 역설을 보여 줍니다.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그 결과 사랑 없이 살게 되었으며, 사랑이 떠난 자리에 자기 사랑이 들어왔고, 자기 사랑에서 나온 환상이 그 교리를 계속 확증했습니다. 그렇게 참된 것 하나를 전체보다 앞세운 작은 질서의 뒤집힘이 마침내 체어리티 자체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래서 AC.362의 경고를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면 이렇겠습니다. ‘이단은 언제나 거짓을 사랑하는 데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하나의 진리를 너무 사랑하여 그것을 다른 모든 진리의 질서 위에 올려놓는 데서 시작됩니다.’ 다만 그때 실제로 사랑하는 것은 어느 순간부터 그 진리 자체가 아니라 ‘그 진리를 발견하고 소유한 나’가 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신앙의 교리는 가인의 교리가 됩니다.

 

 

 

AC.363, 창4:6,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3 ‘가인’(Cain)이라 불린 신앙의 교리가 어떤 성질의 것이었는지는 이 절에 대한 설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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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1, 창4:6,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1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If thou doest well, an uplifting)에서 ‘낯을 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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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Jehovah said unto Cain)가 양심이 말해 주었음을 뜻한다는 것은 별도의 확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와 비슷한 구절이 앞에서 이미 설명되었기 때문입니다. That “Jehovah said unto Cain” means that conscience dictated, needs no confirmation, as a similar passage was explained above.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창3:8)

 

해설

AC.360은 한 문장뿐인 매우 짧은 글입니다. 그러나 바로 앞 AC.359에서 우리가 만난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 양심이 말해 주었다’는 해석을 다시 한번 분명하게 확인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별도의 성경 인용을 동원하여 입증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이와 비슷한 구절이 앞에서 이미 설명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AC.360의 핵심은 새로운 교리를 제시하는 데 있지 않고, AC.359의 해석을 앞에서 이미 세워 놓은 해석 원리에 연결하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우리가 AC.359 심화에서 살펴본 ‘양심’(conscience)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AC.360에서도 다시 conscience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단순한 번역상의 우연이나 AC.359의 일회적인 표현으로 돌리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의도적으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인간 안에서 ‘양심이 말해 주는 것’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근거로 ‘가인은 홍수 후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과 동일한 양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퍼셉션에 의해 인도되었고, 홍수 후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에게는 진리에 관한 지식을 기초로 양심이 형성된다는 큰 구별은 그대로 유지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AC.359-360의 conscience는 그 시대적 차이를 무시한 채 후대의 양심 개념을 그대로 가인에게 옮겨 놓기보다, 가인의 타락한 상태에서도 여전히 그의 내면에 잘못을 알리고 제지하는 내적 딕테이트가 있었다는 문맥에서 조심스럽게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히려 AC.360에서 새롭게 눈여겨볼 부분은 ‘이와 비슷한 구절이 앞에서 설명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성경의 표현이 반드시 외부에서 음성으로 들려오는 말씀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내적 상태에 따라 퍼셉션이나 내적 딕테이트, 그리고 후대 영적 인간에게는 양심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알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여호와께서 이르셨다’는 표현을 만날 때에는 그때 그 사람 또는 교회의 내적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이것은 가인의 현재 상태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가인은 이미 자기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분노했고, 그의 얼굴이 떨어졌습니다. 체어리티가 떠났고 내적인 것들이 변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때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즉 악이 이미 애정 안에서 움직이고 있지만 아직 완전히 행위로 굳어지기 전에, 그 악을 보게 하고 돌이킬 수 있도록 하는 내적 경고가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59-360을 함께 읽으면 하나의 중요한 장면이 보입니다. 가인의 내적인 상태는 이미 나빠졌지만, 주님과의 모든 접점이 즉시 끊어진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여전히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이후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가인은 아무런 경고도 없이 갑자기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자신의 상태를 돌아볼 기회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그 내적 경고를 따르지 않고 계속 자기 방향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할 때에는 시대적 차이를 구별하면서 그 원리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홍수 후 영적 인간의 질서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가 말씀에서 배우고 받아들인 선과 진리를 통하여 양심을 형성하시고, 그 양심을 통하여 우리의 애정과 생각과 행위를 돌아보게 하십니다. 특히 분노나 질투, 자기 의가 일어날 때 그 상태를 정당화하는 목소리만 듣지 않고, ‘이것이 정말 체어리티와 일치하는가?’라고 묻게 하는 내적 경고에 귀 기울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AC.360은 짧기 때문에 별도의 심화가 필요한 글은 아니겠습니다. 오히려 이미 작성한 ‘AC.359 심화 1, 양심은 홍수 후 고대교회부터인데 왜 가인에게 ‘양심이 말해 주었다’고 하는가?’에 AC.360을 중요한 추가 근거로 반영하면 좋겠습니다. AC.359에서 한 번 사용된 conscience가 AC.360에서 다시 확인된다는 사실은 그 심화의 문제의식을 더욱 분명하게 해 줍니다.

 

 

 

AC.361, 창4:6,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1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If thou doest well, an uplifting)에서 ‘낯을 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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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9,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 양심을 통한 주님의 부르심’(AC.359-36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is thine anger kindled? And why are thy faces fallen? (창4:6) AC.35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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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is thine anger kindled? And why are thy faces fallen? (창4:6)

 

AC.35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Jehovah said unto Cain)는 양심이 말해 주었음을 뜻합니다. 그의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anger was kindled, and that his countenance fell)는 앞에서와 같이 체어리티가 떠났으며 내적인 것들이 변했음을 상징합니다. “Jehovah said unto Cain,” means that conscience dictated; that his “anger was kindled, and that his countenance fell,” signifies as before that charity had departed, and that the interiors were changed.

 

해설

AC.359는 짧은 글이지만 매우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바로 앞 AC.357-358에서 가인의 ‘분하여 함’은 체어리티가 떠난 것을, ‘안색이 변함’, 원어로는 ‘얼굴이 떨어졌다’는 내적인 것들이 변한 것을 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는 바로 그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아직 아벨을 죽이기 전입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그 상태가 최종적으로 굳어지기 전에 주님의 경고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이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가 ‘양심이 말해 주었다’(conscience dictated)는 뜻이라는 스베덴보리의 설명입니다. 이것은 얼핏 보면 지금까지 배운 내용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가인은 홍수 이전 태고교회의 후손을 다루는 계열에 속하는데, 태고교회의 특징은 양심이 아니라 퍼셉션이었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선과 진리를 외부에서 배운 지식을 토대로 양심적으로 판단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선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내적으로 지각했습니다. 반면 홍수 이후의 영적 인간에게는 이러한 퍼셉션 대신 진리의 지식을 기초로 양심이 형성됩니다. AC.310은 이 차이를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AC.359의 ‘conscience’를 곧바로 홍수 후 고대교회에 속한 영적 인간의 양심과 똑같은 것으로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스베덴보리가 사용한 ‘conscience’라는 말을 임의로 ‘perception’으로 고쳐서도 안 됩니다. 본문은 분명히 ‘conscience dictated’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가인이라는 상태가 태고교회의 처음 상태와도 다르고, 홍수 후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과도 다르다는 사실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가인은 태고교회의 순수한 천적 상태를 표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교회 안에서 본래 사랑과 하나였던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구별되고, 점차 분리되어 독립적인 교리가 되어 가는 상태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가인의 시대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온전히 보존된 상태가 아니라 그것이 점차 쇠퇴하고 무너져 가는 과정에 속합니다. 앞서 창3을 살펴볼 때에도 타락한 태고교회의 후손들에게 퍼셉션이 크게 약해졌지만 아직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확인했습니다.

 

이 점에서 AC.359의 ‘양심이 말해 주었다’는 표현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가인에게 아직 홍수 후 영적 인간에게 주어질 새로운 질서의 양심이 완성되어 있었다는 뜻이라기보다, 체어리티에서 벗어나고 있는 그에게 여전히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내적으로 알리고 제지하는 어떤 딕테이트(dictate)가 있었다는 뜻으로 조심스럽게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실제로 앞의 AC.224에서도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자비와 평화와 모든 선이 ‘퍼셉션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내적 딕테이트의 원인이 되고, 비록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양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라고 하여, 주님에게서 오는 내적 딕테이트가 인간의 서로 다른 영적 상태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여짐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창4:6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가인의 상태를 모르셔서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그의 내적 상태가 잘못된 방향으로 변하고 있음을 스스로 보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체어리티가 떠나면서 분노가 일어났고 내적인 것들이 변했지만, 그에게는 아직 자신의 상태를 돌아보고 돌이킬 가능성이 남아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주님의 섭리가 드러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이 분노하지 못하도록 그의 자유를 강제로 빼앗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그가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아무 말씀 없이 내버려 두시지도 않습니다. 분노가 일어나고 내적인 것들이 변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왜?’라고 물으십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면서도 악이 실제 행위로 굳어지기 전에 돌이킬 길을 열어 두시는 주님의 역사입니다.

 

따라서 AC.359의 중심은 ‘가인에게 양심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보다, 체어리티에서 떠나고 있는 가인에게도 주님의 내적 경고가 계속되고 있었다는 데 있습니다. 다음 절에서 그 경고는 더욱 구체적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가인은 아직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가고 있지만 아직 체어리티가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닙니다. 바로 그 결정적인 틈에서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할 때에는 여기서 시대적 차이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이 아니므로 그들의 퍼셉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말씀의 진리를 통하여 형성하시는 양심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서 분노와 질투와 자기 의가 일어날 때, ‘왜 내가 이렇게 분노하는가?’, ‘지금 내가 지키려는 것이 주님의 진리인가, 아니면 나의 proprium인가?’, ‘내 안에서 체어리티가 떠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묻게 하는 양심의 경고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다만 이것은 AC.359의 가인이 오늘날 우리와 동일한 종류의 양심을 가졌다는 뜻이 아니라, 그 말씀의 원리를 오늘날 우리의 영적 구조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결국 AC.359는 매우 중요한 순간을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가 떠났습니다. 내적인 것들이 변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고 해서 주님의 자비와 섭리가 먼저 그를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악을 선택하기 전에 그것을 보게 하시고 돌이킬 길을 마련하십니다. 가인의 이야기는 바로 이제 그 경고를 받아들일 것인지 거절할 것인지의 갈림길에 들어섭니다.

 

심화

1. ‘양심’은 홍수 후 고대교회부터인데 왜 가인에게 ‘양심이 말해 주었다’고 하는가?

 

AC.359, 심화 1, ‘양심’은 홍수 후 고대교회부터인데, 왜 가인에게 ‘양심이 말해 주었다’고 하

AC.359.심화 1. ‘양심’은 홍수 후 고대교회부터인데, 왜 가인에게 ‘양심이 말해 주었다’고 하는가? AC.359를 읽다가 상당히 중요한 의문을 만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4:6의 ‘여호와께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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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0,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 다시 확인되는 양심의 딕테이트’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Jehovah said unto Cain)가 양심이 말해 주었음을 뜻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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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8, 창4:5, ‘가인의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무엇인가 - 얼굴에 나타나는 내적 상태’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8 ‘안색이 변했다’(faces falling)는 것이 내적인 것들이 변했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얼굴’(face)과 얼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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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6

‘가인’(Cain)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또는 그러한 분리가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교리를 의미한다는 것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셨다’(to his offering he looked not)는 것이 그의 예배가 받아들여질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That by “Cain” is signified faith separated from love, or a doctrine that admits of this separation; and that “to his offering he looked not” signifies that his worship was not acceptable, has been shown before.

 

해설

AC.356은 새로운 내용을 전개하기보다 바로 앞 AC.355의 첫 두 내용을 확인하고 정리하는 짧은 연결 단락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두 가지 모두 ‘앞에서 설명했다’고 밝힙니다. 첫째,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또는 그러한 분리가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교리를 의미합니다. 둘째, ‘그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셨다’는 것은 그러한 신앙에서 나온 예배가 받아들여질 수 없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번호의 역할은 이미 나온 내용을 다시 길게 설명하는 데 있다기보다, 이제 AC.357과 AC.358에서 이어질 ‘분노’와 ‘안색이 변함’의 속뜻을 설명하기 위한 전제를 분명하게 세우는 데 있습니다.

 

특히 ‘가인’의 의미에는 단순히 신앙과 사랑이 실제 삶에서 분리되어 있는 상태뿐 아니라 ‘그러한 분리가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교리’까지 포함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삶에서는 아직 체어리티가 충분히 나타나지 않는 것과, 사랑과 체어리티가 없어도 신앙은 그 자체로 참된 신앙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후자의 경우에는 분리가 하나의 교리적 원리로 정당화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신앙과 사랑을 개념적으로 ‘구별’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과 사랑을 구별하여 이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그 생명인 사랑에서 떼어 내고도 온전한 신앙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인정하는 ‘분리’에 있습니다.

 

‘그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셨다’는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가인이라는 개인을 주님께서 미워하시거나 그의 제물을 보고 감정적으로 거절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의 AC.349에서 살펴본 것처럼 외적 예배는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그것들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습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라는 내적 생명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오는 예배는 외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어도 살아 있는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주님께서는 신앙은 기뻐하지 않으시고 체어리티만 기뻐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AC.353은 오히려 신앙 역시 사랑에서 비롯될 때에는 천적이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의 대비는 ‘신앙 대 체어리티’가 아니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과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생명을 얻는 신앙’의 대비입니다. 아벨이 의미하는 체어리티는 신앙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에 생명을 줍니다.

 

이렇게 보면 AC.356은 짧지만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중요한 연결점입니다. 지금까지는 ‘가인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의 제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그 예배가 받아들여질 수 없는가’를 설명했다면, 이제부터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인간의 내적인 것들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가 드러납니다. 가인은 제물을 계속 드리고 있으므로 외적인 종교생활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예배의 내적 생명인 체어리티가 떠나면 외적인 예배만으로 그 결핍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상태에서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는 다음 말씀이 이어집니다. 따라서 AC.356이 다시 확인하는 핵심은 단순합니다. 신앙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홀로 살아 있을 수 없으며, 예배 역시 체어리티에서 생명을 얻을 때 살아 있는 예배가 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랑과 선의 생명은 인간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AC.357, 창4:5, ‘가인의 분노는 무엇을 뜻하는가 - 자기 사랑과 체어리티의 떠남’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7‘가인의 분노가 타올랐다’(Cain’s anger was kindled)는 것이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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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5, 창4:5,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한 이유 - 체어리티가 떠날 때 내면에 일어나는 변화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But to Cain and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창4:5) AC.355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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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7

‘세월이 지난 후에’(end of days, ‘날들의 끝에’)가 ‘시간이 흐른 뒤’를 뜻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합니다. 처음에는, 그리고 그 교리 안에 단순함이 있었을 때에는, 여기서 ‘가인’(Cain)이라 하는 교리가 후에 그렇게 된 것만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그들이 자기들의 자손을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a man Jehovah, ‘여호와인 사람’)라고 했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합니다. 따라서 처음에는 신앙이 ‘날들의 끝에’, 곧 시간이 흐른 뒤에 이르렀을 때만큼 사랑에서 멀리 분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참된 신앙의 모든 교리에서 흔히 일어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That by the “end of days” is signified in process of time, is evident to all. At first, and while there was simplicity in it, the doctrine here called “Cain” does not appear to have been so unacceptable as it became afterwards, as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y called their offspring a “man Jehovah.” Thus at first faith was not so far separated from love as at the “end of days,” or in process of time; as is wont to be the case with every doctrine of true faith.

 

해설

AC.347은 바로 앞 AC.346의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표현을 설명하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의 분리가 한순간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심해졌다는 사실을 밝혀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처음에 그 교리 안에 ‘단순함’이 있었을 때에는 여기서 ‘가인’이라 하는 교리가 후에 그렇게 된 것만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처음에는 신앙이 시간이 흐른 뒤에 이르렀을 때만큼 사랑에서 멀리 분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가인 해석을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 줍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의미하지만, 그 분리가 처음부터 마지막 상태와 똑같은 정도였던 것은 아닙니다. 이미 신앙을 사랑 안에 있는 것으로만 보지 않고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구별하여 인식하는 방향이 시작되었지만, 처음에는 사랑과의 거리가 아직 그렇게 멀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거리가 더욱 벌어졌고, 결국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행위와 예배가 나타나는 상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단순함’(simplicity)을 단순히 지식이 적거나 사고가 미숙한 상태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47의 문맥에서는 아직 신앙에 관한 교리가 자기 자신을 독립적인 것으로 강하게 세우면서 사랑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초기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이 초기 상태를 곧 ‘가인은 처음에는 온전한 참된 신앙이었다’고 표현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AC.338에서 이미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신앙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기 시작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AC.340에서도 이전에는 사랑 안에서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따로 꺼내어 구별된 교리로 만들기 시작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성격은 처음부터 이미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다만 AC.347이 새롭게 알려 주는 것은 그 분리가 처음부터 최종적인 형태로 완성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점차 심화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에서 ‘구별’과 ‘분리’를 다시 정확히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과 사랑을 개념적으로 구별하여 이해하는 것 자체가 악은 아닙니다. 특히 후대의 인간에게는 진리를 배우고 신앙에 관한 교리를 분명하게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구별된 신앙이 사랑과 결합되어 있어야 한다는 본래 질서를 잃고, 점차 사랑과 별개로 존재할 수 있는 독립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데 있습니다. AC.347의 표현을 빌리면 문제는 신앙이 사랑에서 점점 ‘멀리 분리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간격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신을 사랑과 체어리티에 의해 살아 있게 되는 것으로 보지 않고 그 자체로 충분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하면, 그 거리는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커질 수 있습니다. 결국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밀어내는 상태에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표현은 바로 이 점에서 중요합니다. AC.346에서는 이 말을 우선 단순하게 ‘시간이 흐른 뒤’라고 설명했습니다. AC.347은 이제 그 시간이 흐르는 동안 신앙과 사랑의 관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신앙이 후대만큼 사랑에서 멀리 분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분리가 심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창4:3에서 가인은 ‘땅의 소산’을 여호와께 제물로 가져옵니다. AC.346에서 이것은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와 거기에서 나온 예배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세월이 지난 후에’는 단순히 달력상의 어느 기간이 지나갔다는 사실만을 알려 주는 데 그치지 않고, 이 문맥에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의 상태가 시간이 흐르면서 어떻게 더 멀리 사랑에서 분리되었는지를 이해하게 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초기 상태가 후대만큼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는 아니었다는 근거로 그들이 자기들의 자손을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했다는 사실을 듭니다. 이것은 앞의 AC.338과 AC.340에서 이미 자세히 살펴본 창4:1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표현을 근거로 ‘초기의 가인은 완전한 신앙이었다’고 되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직 신앙이 사랑에서 아주 멀리 떨어지지 않았고, 그들이 신앙에 속한 것을 주님과 관련하여 인식하는 상태가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상태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한 덩어리의 완성된 악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신앙을 따로 인식하기 시작한 작은 분리가 있었고, 그 분리가 점차 깊어져 나중에는 신앙이 체어리티와 멀리 떨어지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AC.347의 마지막 문장은 이 문제를 가인이라는 특정 교리에만 한정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참된 신앙의 모든 교리에서 흔히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엄중한 경고입니다. 참된 교리는 처음부터 거짓이기 때문에 타락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신앙에 속한 것을 담고 있는 교리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사람들의 상태에 따라 본래의 사랑과 생명에서 점점 멀어질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주님을 더 잘 알고, 말씀을 더 바르게 이해하며, 이웃에게 선을 행하도록 돕기 위해 교리를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관심이 ‘이 진리에 따라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누가 이 교리를 더 정확하게 알고 고백하는가?’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 교리가 자기 집단의 우월성을 증명하거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사용된다면, 교리의 문장은 그대로 남아 있어도 그것을 움직이는 사랑의 성질은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교리가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타락한다거나, 교리를 명료하게 정리하고 보존하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문제는 교리 그 자체보다 그것과 사랑의 관계입니다. 참된 교리를 보존한다는 것은 문장을 정확하게 전승하는 것과 함께 그 교리가 지향하는 생명도 보존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고, 자기 안의 악을 죄로 보아 피하게 하며,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와 실제 쓰임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교리를 정확하게 보존하면서도 그 교리가 체어리티와 결합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리적 정확성을 지키는 일과 사랑을 지키는 일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 함께 가야 합니다. 진리는 선을 보호하고 방향을 주며, 선은 진리에 생명을 줍니다.

 

이 원리는 개인의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경고가 됩니다. 처음 말씀을 배우거나 AC를 공부할 때에는 ‘주님을 더 알고 싶다’, ‘내 삶을 고치고 싶다’, ‘말씀의 속뜻을 통하여 주님의 뜻을 더 잘 따르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식이 쌓이고 익숙해지면서 어느 순간 관심이 ‘나는 이것을 안다’는 데로 옮겨 갈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이 가진 지식을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자신의 영적 우월성을 확인하는 데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리 자체가 거짓으로 변한 것은 아니지만, 그 진리와 우리의 사랑 사이의 관계가 달라진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AC.347은 다른 교회나 다른 시대의 교리 타락을 분석하는 도구가 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의 신앙을 살피는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AC 번역과 해설 작업에도 이 원리는 매우 직접적입니다. 처음에는 말씀의 속뜻을 더 정확하게 알고 그것을 삶과 목회에 사용하기 위해 시작한 공부가 시간이 지나면서 ‘정확한 번역’, ‘정확한 상응’, ‘정확한 교리’를 갖추는 것 자체에만 만족하게 될 위험은 언제든 있습니다. 물론 정확성은 중요하며 결코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정확성이 우리를 주님께 더 가까이 이끌고, 자기 안의 proprium을 더 분명히 보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는 체어리티와 쓰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AC.344에서 말한 신앙의 목적을 놓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진리를 보존하는 일과 그 진리의 생명을 보존하는 일을 함께 붙들어야 합니다.

 

결국 AC.347이 보여 주는 것은 ‘처음의 상태가 끝의 상태를 자동으로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은 처음부터 후대와 똑같이 사랑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을 사랑과 별개의 것으로 세우는 방향이 계속되면서 그 거리는 점점 커졌습니다. 그래서 ‘세월이 지난 후에’ 이르러서는 체어리티가 없는 행위와 예배가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신앙의 생명을 한 번 얻고 끝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진리는 계속 사랑을 향하고, 신앙은 계속 체어리티와 결합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AC.347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나는 처음에 무엇을 믿었는가?’에 머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흐른 지금, 내가 가진 신앙은 사랑과 더 가까워지고 있는가, 아니면 점점 멀어지고 있는가?’입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짧은 표현 속에 바로 이 엄중한 자기 성찰이 담겨 있습니다.

 

 

 

AC.348, 창4:3, 가인의 ‘땅의 소산’ - 체어리티 없는 죽은 행위와 살아 있는 열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8‘땅의 소산’(fruit of the ground)이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내용에서도 분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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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6, 창4:3,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도 행위와 예배는 나올 수 있습니다’(AC.346-349)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창4:3) AC.346‘날들의 끝에’(end of days)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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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5

‘농사하는 자’(tiller of the ground)가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낸다는 것, 곧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안에 아무리 깊이 있다 하더라도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내며,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는 사실은 뒤에 이어지는 내용에서 분명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고, 그가 자기 형제를 죽였기 때문입니다. 곧 그는 ‘아벨’(Abel)이 의미하는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가리켜 ‘땅을 경작하는 사람들’(till the ground)이라고 했다는 것은 창3:19, 23에서 분명합니다. 거기에는 사람이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져 땅을 경작하게 되었다’(cast out of the garden of Eden to till the ground)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That a “tiller of the ground” is one who is devoid of charity, however much he may be in faith separated from love, which is no faith, is evident from what follows: that Jehovah had no respect to his offering, and that he slew his brother, that is, destroyed charity, signified by “Abel.” Those were said to “till the ground” who look to bodily and earthly things, as is evident from what is said in Gen. 3:19, 23, where we read that the man was “cast out of the garden of Eden to till the ground.”

 

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23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창3:19, 23)

 

해설

AC.345는 창4:2의 마지막 표현, 곧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의 속뜻을 설명하면서 AC.341부터 이어진 가인과 아벨의 대비를 마무리합니다. 아벨은 ‘양 치는 자’이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자연적인 직업의 우열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343에서 양 치는 자는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고 사람을 그 선으로 인도하는 사람을 나타냈고, AC.344에서는 신앙에 관한 모든 지식과 교리의 목적이 체어리티라고 했습니다. 이제 AC.345는 그 반대편에 있는 가인을 보여 줍니다. 그는 신앙에 속한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체어리티가 없는 상태이며, 바로 그런 상태를 여기서는 ‘농사하는 자’라고 합니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말씀에서 ‘농사하는 자’나 ‘땅을 경작하는 자’가 언제나 악한 의미를 가진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자연적인 농사나 노동 자체가 부정적인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말씀에서 ‘땅’은 문맥에 따라 좋은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따라서 ‘아벨은 목축을 했으므로 선하고 가인은 농사를 지었으므로 악하다’는 식으로 읽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려는 속뜻과 전혀 다릅니다. AC.345에서 ‘농사하는 자’가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가인이 의미하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상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상응과 표상의 의미는 단어 하나에 언제나 똑같이 붙어 있는 고정된 암호가 아니라 말씀의 문맥과 그 안에서 나타나는 영적 상태에 따라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앞으로 일어날 두 사건을 통하여 확인합니다. 하나는 여호와께서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인이 자기 형제 아벨을 죽인 것입니다. 특히 두 번째 사건은 결정적입니다. 아벨이 체어리티를 의미하므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가인은 신앙 자체가 전혀 없는 사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안에 아무리 깊이 있다 하더라도’라고 말합니다. 외적으로는 신앙이 매우 강해 보일 수도 있고, 신앙에 관한 지식과 교리가 풍부하며 그것을 열심히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있다면 스베덴보리는 다시 한번 단호하게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AC.341에서 나온 선언이 AC.345에서 그대로 반복되는 것은 이것이 가인의 정체를 이해하는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44와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과 인식 지식과 교리가 아무리 많아도 그것이 사람을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만들지 못하고 체어리티라는 목적에 이르지 못한다면 ‘텅 빈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했습니다. AC.345의 가인은 바로 그 위험이 실제로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문제는 신앙에 속한 지식과 교리를 가지고 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체어리티를 향하지 않고 사랑에서 분리된 채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기고 선으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결된 것으로 여겨질 때, 신앙은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AC.345가 이 지점에서 창3:19, 23으로 돌아가는 것도 중요합니다. 창3에는 사람이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져 ‘땅을 경작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AC.345에서 ‘땅을 경작하는 사람들’을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바라보는 사람들’과 연결합니다. 따라서 창4의 가인이 ‘농사하는 자’라는 말은 앞 장에서 나타난 이 상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에덴으로 표상된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서 신앙에 속한 것들을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 질서에서 멀어지면서 시선은 점차 더 낮고 외적인 것에 향하게 됩니다. AC.345는 그러한 상태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사이의 관계를 ‘땅을 경작함’이라는 같은 표현을 통하여 연결해 보여 줍니다.

 

여기서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바라본다’는 말을 자연계의 삶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몸을 돌보고, 일하고, 돈을 관리하고, 가족을 부양하며, 자연계에서 맡겨진 수많은 쓰임을 수행해야 합니다. 자연적인 것들은 그 자체로 악하지 않으며 오히려 영적인 목적을 실현하는 중요한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듯 무엇을 ‘바라보는가’입니다. 곧 무엇을 중심과 목적으로 삼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자연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과 쓰임을 섬긴다면 그것들은 질서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과 종교까지 자기 명예와 이익, 우월감과 세상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하게 된다면 질서는 뒤집힙니다. 신앙에 속한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신앙의 시선과 목적이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이 ‘농사하는 자’ 가인이 보여 주는 위험입니다.

 

이렇게 보면 ‘양 치는 자’ 아벨과 ‘농사하는 자’ 가인의 대비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이고, 양 치는 자는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AC.343에서 보았듯 참된 목자는 양 떼를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고, 체어리티는 모으고 결합합니다. 반면 AC.345의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붙들면서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바라보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한쪽은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선과 쓰임으로 나아가는 방향이고, 다른 한쪽은 신앙이 사랑에서 떨어져 점점 자기 자신에게 머무는 방향입니다. 이 차이는 처음에는 아주 작아 보일 수 있습니다. 신앙과 사랑을 서로 구별하여 생각하는 것처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계속 살펴보았듯 문제는 구별 자체가 아니라 분리입니다. 구별된 신앙이 사랑과 다시 결합되지 않고 독립적인 것이 되면, 마침내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고 그 체어리티를 밀어내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AC.345는 앞으로 일어날 아벨의 죽음을 이미 해석하고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갑자기 일어난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AC.338부터 설명해 온 분리의 결과입니다. 본래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신앙에 속한 것을 따로 꺼내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정하고,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을 단지 지식으로 알게 되며, 신앙을 체어리티라는 목적에서 분리한 결과가 마침내 ‘형제를 죽이는’ 데까지 이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을 인간의 모든 교리적 구별에 적용하여 ‘교리를 세우는 것 자체가 결국 체어리티를 죽인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후대의 인간에게는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교리로 이해하며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 진리가 주님께서 주시는 체어리티와 결합하느냐, 아니면 사랑에서 분리되어 자기 완결적인 신앙으로 남느냐에 있습니다.

 

결국 AC.345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나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내 신앙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으며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입니다. 말씀과 교리를 많이 알고 신앙을 강하게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진리가 우리로 하여금 자기 안의 악을 죄로 여겨 피하게 하고, 주님을 더 사랑하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실제 쓰임을 행하게 한다면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기 우월성을 확인하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거나 세상적인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 되고,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낸다면 우리는 ‘농사하는 자’ 가인의 모습을 우리 자신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인의 비극은 신앙을 버린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붙들면서 그 신앙의 생명과 목적인 사랑과 체어리티를 잃은 데 있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이것이 AC.341에서 시작하여 AC.345에서 다시 한번 확정되는 창4:2의 결론입니다.

 

 

 

AC.346, 창4:3,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도 행위와 예배는 나올 수 있습니다’(AC.346-349)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창4:3) AC.346‘날들의 끝에’(end of days)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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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4, 창4:2, ‘신앙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 목적은 체어리티입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4신앙, 곧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memory-knowledge, scientia)과 인식 지식(knowledge, cognitio), 그리고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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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40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라는 말은 ‘가인’(Cain)이라 하는 사람들에게서 신앙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이 장의 처음에서 말한 것으로 분명합니다. 이전에는 그들이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퍼셉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마치 알지 못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신앙에 관한 구별된 교리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 이전에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것들을 가져다가 교리로 정리하였고, 그것을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마치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하여 이전에는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이 이제는 단지 지식으로 아는 것이 되었습니다. 고대에는 새로운 것이 생길 때마다 그것에 이름을 붙였으며, 이런 식으로 그 이름 안에 담긴 것들을 나타냈습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라는 말로 설명되고(창16:11), That the words “I have gotten a man, Jehovah” signify that with such as are called “Cain” faith is recognized and acknowledged as a thing by itself, is evident from what was said at the beginning of this chapter. Previously, they had been as it were ignorant of what faith is, because they had a perception of all the things of faith. But when they began to make a distinct doctrine of faith, they took the things they had a perception of and reduced them into doctrine, calling it “I have gotten a man, Jehovah,” as if they had found out something new; and thus what was before inscribed on the heart became a mere matter of knowing. In ancient times they gave every new thing a name, and in this way set forth the things involved in the names. Thus the signification of the name Ishmael is explained by the saying, “Jehovah hath heard her affliction;” (Gen. 16: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창16:11)

 

르우벤은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므로’(Jehovah hath looked upon my affliction)라는 말로(창29:32), that of Reuben, by the expression, “Jehovah hath looked upon my affliction;” (Gen. 29:32)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창29:32)

 

시므온은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Jehovah hath heard that I was less dear)라는 말로(창29:33), the name Simeon, by the saying, “Jehovah hath heard that I was less dear;” (Gen. 29:33)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창29:33)

 

유다는 ‘이번에는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This time will I praise Jehovah)라는 말로 설명됩니다(창29:35). and that of Judah by, “This time will I praise Jehovah;” (Gen. 29:35)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창29:35)

 

또한 모세는 자신이 세운 제단을 ‘여호와 닛시’, 곧 ‘여호와는 나의 깃발’(Jehovah my banner)이라고 불렀습니다(출17:15). and an altar built by Moses was called, “Jehovah my banner.” (Exod. 17:15)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출17:15)

 

이와 같은 방식으로 여기서는 신앙의 교리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 곧 ‘가인’(Cain)이라고 한 것입니다. In like manner the doctrine of faith is here denominated “I have gotten a man, Jehovah,” or “Cain.”

 

해설

AC.340은 바로 앞 AC.338에서 말한 ‘신앙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었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주의할 것은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전혀 새로운 거짓 신앙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그들이 교리로 정리한 것은 이전부터 태고교회 안에 있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이었습니다. 달라진 것은 진리의 내용 자체라기보다 그것을 알고 받아들이는 방식이었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서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퍼셉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역설적으로 그들이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마치 알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고 합니다. 신앙에 무지했다는 뜻이 아니라, 신앙이 사랑과 분리된 하나의 독립적인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을 따로 떼어 정의하고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에게 신앙에 속한 것은 이미 사랑과 생명 안에 들어 있었고, 말하자면 ‘마음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전에는 사랑 안에서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하나씩 따로 꺼내어 구별하고, 그것들을 ‘신앙에 관한 교리’로 정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변화를 ‘이전에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이 이제는 단지 지식으로 아는 것이 되었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그들이 정리한 모든 내용이 갑자기 거짓이 되었다는 뜻도 아니고, 교리를 만들었다는 행위 자체가 악이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문제는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에서 본래 사랑 안에 살아 있던 신앙이 점차 사랑으로부터 구별되고, 마침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처럼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AC.338에서 보았듯 가인의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라 사랑 안에 있어야 할 신앙을 사랑과 별개로 성립할 수 있는 무엇으로 세우기 시작한 데 있습니다. AC.340은 그 분리가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퍼셉션으로 알던 것’과 ‘지식으로 알게 된 것’의 대비를 통하여 보여 줍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발견한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에 전혀 몰랐던 진리를 처음 발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사랑 안에서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것을 따로 꺼내어 교리적으로 정리하고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는 말로 표현됩니다. 무엇인가를 새로 ‘얻었다’고 여겼고, 그렇게 얻었다고 여긴 신앙의 교리를 ‘가인’이라 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미묘한 역설이 있습니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전에 가지고 있던 더 내적인 앎의 방식을 잃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진리를 사랑 안에서 살아서 알았는데 이제는 그것을 자기 앞에 하나의 대상으로 세워 지식으로 알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이 생명 안에서 알려지는 것에서 신앙에 관하여 아는 것으로 옮겨 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퍼셉션은 좋고 지식은 나쁘다’, 또는 ‘교리가 없는 신앙이 교리가 있는 신앙보다 더 높다’는 일반적인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특수한 천적 상태를 설명하는 문맥이기 때문입니다. AC.337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에게서는 사랑이 먼저였고 그 사랑을 통하여 신앙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퍼셉션이 주어졌다고 설명하면서, 곧이어 ‘오늘날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고 했습니다. 후대의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며,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말씀을 배우고 교리를 공부하며 선과 진리를 구별하여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거듭남에 필요한 과정입니다. 문제는 그 진리가 지식에만 머물러 체어리티와 결합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이 단지 지식이 되어 가는 방향으로 쇠퇴가 나타났다면, 후대 인간에게서는 주님께서 지식과 신앙으로 받아들인 진리를 다시 사랑과 삶 안으로 이끄셔서 체어리티와 결합하게 하십니다. 따라서 두 시대의 질서를 단순히 같은 공식으로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AC.340 후반에 이스마엘, 르우벤, 시므온, 유다, 그리고 ‘여호와 닛시’가 차례로 인용되는 이유도 바로 이 ‘가인’이라는 이름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마엘은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는 말과 함께 이름이 주어지고(창16:11), 르우벤은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므로’라는 말과 연결되며(창29:32), 시므온은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라는 말과 연결됩니다(창29:33). 유다는 ‘이번에는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말에서 그 이름이 주어지고(창29:35), 모세가 세운 제단에는 ‘여호와 닛시’라는 이름이 붙습니다(출17:15).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들을 인용한 것은 여기서 이스마엘이나 르우벤, 시므온, 유다의 속뜻을 각각 해설하거나 ‘여호와 닛시’의 상응을 따로 밝히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 모든 예가 보여 주는 공통점은 고대에는 어떤 상태나 사건의 성질을 이름 안에 담아 나타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 역시 단순한 호칭으로만 읽을 것이 아니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는 말로 표현된 교회적, 교리적 상태를 담고 있는 이름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바로 앞 AC.339와도 정확히 이어집니다. AC.339에서는 태고인들이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으로 어떤 것들을 의미하게 하였으며, 교회에 속한 것들이 자연적인 출생처럼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잉태되고 태어나는’ 관계를 이루기 때문에 그러한 이름들로 계보를 구성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340에서는 그 원리를 실제 성경의 여러 이름을 통하여 확인합니다. 그러므로 이 다섯 인용구절은 각각 독립된 다섯 가지 주제를 여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설명을 여러 사례로 뒷받침합니다. ‘이스마엘’, ‘르우벤’, ‘시므온’, ‘유다’, ‘여호와 닛시’가 각각 그 이름과 관련된 상태와 의미를 담고 있듯이, ‘가인’이라는 이름에도 태고교회 안에서 일어난 특정한 변화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AC.339와 AC.340은 서로 떨어진 설명이 아니라, ‘교회에 속한 것들이 어떻게 이름과 계보로 표현되는가’를 설명하는 하나의 연속된 해석 원리가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가인의 시작이 얼마나 미묘한지를 다시 보게 됩니다. 처음부터 ‘사랑은 필요 없다’, ‘체어리티는 중요하지 않다’고 선언한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신앙에 속한 것을 따로 구별하여 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본래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것을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신앙은 점차 사랑으로부터 독립된 위치를 갖게 됩니다. 이후 창4의 흐름에서 이 분리는 더 분명해져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고,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곧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AC.340은 단순히 ‘옛사람들은 이름을 어떻게 지었는가?’를 설명하는 글이 아닙니다. 가인이라는 교리적 상태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번호입니다. 마음에 새겨져 있던 신앙이 지식의 대상이 되고, 그 지식이 사랑 안에 다시 머물지 않고 그 자체로 하나의 것이 될 때 신앙과 사랑의 본래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이 대목은 AC를 읽고 공부하는 우리에게도 매우 실제적인 경고가 됩니다. 우리는 ‘상응’, ‘퍼셉션’, ‘리메인스’, ‘속 사람과 겉 사람’,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 같은 개념을 배우면서 이전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이 아는 것과 그 진리가 우리 안에서 살아 있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적 지식이 많아질수록 그것을 ‘내가 얻은 것’으로 여기고, 그 지식 때문에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더 밝은 사람으로 생각하는 위험도 생길 수 있습니다. 진리는 우리가 소유하여 자신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수단입니다. 배운 진리를 통하여 자기 안의 악을 보고 그것을 죄로 여겨 피하며, 주님을 더 사랑하고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는 체어리티와 쓰임으로 나아갈 때 그 진리는 비로소 우리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그러므로 AC.340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나는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가?’보다 더 깊습니다. ‘내가 아는 진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머리에만 있는가, 아니면 주님의 역사하심으로 마음과 삶에도 새겨지고 있는가?’ 바로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가인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의 신앙을 판단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 살아 있는지를 살피게 하는 말씀으로 읽게 됩니다.

 

 

 

AC.341, 창4: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AC.341-345)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And she added to bear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 (창4:2) AC.341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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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9, 창4:1, ‘창4의 계보를 읽는 매우 중요한 해석 원리’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39앞의 세 장에서 ‘아담과 그의 아내’(man and his wife)가 태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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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8 심화

2. 주님께서는 왜 ‘가인의 분리’를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을까?

 

AC.338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질문이 있습니다. 태고교회 안에서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보기 시작했을 때, 주님께서는 이미 그 분리가 장차 어디까지 갈 것인지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실제로 창4의 흐름을 따라가면 신앙은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고,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곧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상태에까지 이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그 분리가 처음 나타났을 때 강제로라도 막지 않으셨을까요?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 그것을 ‘방치’하신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 이해에서 주님은 인간이 악과 거짓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무관심하게 바라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선으로 이끄시고 악을 억제하시며, 사람이 돌이킬 수 있도록 진리를 공급하십니다. 다만 그 모든 일을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는 방식으로 행하십니다.

 

따라서 ‘왜 막지 않으셨는가?’라는 질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없애는 방식으로 막지 않으셨다’고 대답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인간이 주님과 결합하려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강제로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사람의 행동을 외적으로 통제할 수는 있어도 그 사람으로 하여금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만일 인간이 잘못된 선택을 전혀 할 수 없도록 의지와 사고가 강제된다면, 겉으로는 질서 있는 행동이 나타날지 몰라도 자유로운 사랑의 결합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허용’의 원리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악을 허용하신다는 것은 악을 원하시거나 승인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는 가운데 그 자유가 잘못 사용되는 것까지 허용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허용’과 ‘방치’는 전혀 다릅니다. 방치는 인간을 내버려 두는 것이지만, 주님의 허용 안에는 끊임없는 억제와 인도와 보존이 함께 있습니다. 사람이 악으로 기울 때에도 주님께서는 그 악이 가능한 한 더 멀리 진행되지 않도록 억제하시고,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며, 다시 돌아설 수 있는 길을 계속 마련하십니다. 창4의 가인 이야기에서도 주님께서는 가만히 계시지 않습니다. 가인이 분하여 안색이 변했을 때 주님께서는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가인이 더 멀리 나아가기 전에 다시 선으로 돌아오도록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AC.328에 따르면 체어리티는 신앙이 자신을 주된 것으로 삼아 체어리티보다 높아지지만 않는다면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은 ‘신앙을 버려라’는 뜻이 아니라, 신앙이 다시 선과 체어리티와 올바른 관계 안에 놓이도록 부르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지막 선택을 강제로 빼앗지 않으십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지 못하도록 그의 내면을 강제로 조종하시거나 다른 생각밖에는 할 수 없도록 만드시지 않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유가 거듭남과 결합에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선을 보여 주시고 진리로 깨우치시며, 악을 억제하시고 내적으로 경고하시며, 돌아올 길을 열어 두십니다. 그러나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마지막 자리까지 대신 차지하지는 않으십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이 자유를 잘못 사용한다고 해서 주님의 섭리가 실패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가인은 결국 아벨을 죽이고, 속뜻에서는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킵니다. 인간 편에서 보면 매우 깊은 실패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표를 주십니다. AC.330은 장차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질 것이기 때문에 신앙에 속한 것이 보존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보존된 것은 분리된 신앙의 잘못된 상태 자체가 승인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장차 선한 목적에 사용하실 수 있는 신앙에 속한 것을 보존하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가 인간의 방식과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 줍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 잘못되면 그것을 통째로 없애 버리고 싶어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이 왜곡한 것 가운데에서도 장차 구원의 질서 안에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을 보존하십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분리된 신앙은 잘못되었지만 신앙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그것을 사랑에서 떼어 냈지만 주님께서는 신앙이라는 수단 자체를 버리지 않으시고, 이후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될 수 있도록 보존하십니다.

 

이 점은 바로 뒤의 셋과 에노스에서도 보게 됩니다. AC.335에서는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시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심으셨다고 합니다. 따라서 인간이 신앙을 잘못 사용했다고 해서 주님께서 신앙 자체를 폐기하신 것이 아닙니다. 더 넓은 이후의 AC 문맥에서는 태고교회의 종말 가운데에서도 주님께서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마침내 노아로 표상되는 새로운 교회가 일어나도록 준비하시는 흐름도 나타납니다. 다만 이것은 AC.338 한 번호가 직접 말하는 내용이라기보다 이후 AC에서 더 넓게 전개되는 섭리의 맥락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실패와 주님의 섭리는 동시에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유를 오용하여 사랑과 신앙의 질서를 깨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자유를 빼앗지 않으면서도 가능한 한 악을 억제하시고,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며, 새로운 회복의 길을 준비하십니다.

 

‘왜 주님께서는 가인의 분리를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왜 인간에게 잘못 선택할 수 있는 자유까지 허용하셨는가?’라는 더 깊은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자유가 주님과의 결합에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다만 ‘자유롭게 사랑하려면 반드시 실제로 악을 행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유란 악을 행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인간이 강제가 아니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악을 선택할 가능성은 자유의 오용에서 따라오는 것이지 주님께서 원하시는 목적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의 섭리는 인간이 한 번도 잘못 선택하지 못하도록 모든 길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역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유와 이성을 보존하면서 선으로 이끄시고, 악을 억제하시며, 잘못 선택했을 때에도 가능한 한 회개의 길을 열어 두십니다. 이것이 ‘허용’과 ‘방치’의 차이입니다. 방치는 인간을 포기하는 것이지만, 섭리는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면서도 한순간도 구원의 목적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인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유를 억지로 없애지는 않으시지만, 동시에 그가 다시 선으로 돌아설 길도 계속 마련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섭리를 ‘왜 더 강제로 개입하지 않으셨는가?’라는 기준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가장 깊은 섭리는 때로 인간의 자유를 유지하면서 안에서 선을 향해 이끄시고, 인간의 실패 가운데에서도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여 다시 구원의 질서 안에서 사용하시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가인의 이야기는 바로 그것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사랑과 신앙을 분리할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그 분리 자체를 선이라고 하시지 않으면서도 신앙에 속한 것을 보존하시고, 다시 체어리티와 결합될 길을 마련하십니다. 인간의 실패는 실제이지만, 그 실패보다 주님의 섭리가 더 깊습니다.

 

 

 

AC.338, 창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AC.338-340)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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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8 심화 1, ‘가인’은 처음부터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신앙’이었나?

AC.338 심화1. ‘가인’은 처음부터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신앙’이었나? AC.338을 읽다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질문이 생깁니다. 앞의 개요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을 분명히 ‘사랑에서 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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