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32 심화

4. 가인 계열의 생명 주기는 오늘날 기독교와 어떻게 겹쳐 보일 수 있는가?

 

가인 계열을 따라 읽다 보면 오늘날 기독교, 특히 개신교의 모습이 겹쳐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한 가지 경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것은 ‘가인 계열이 곧 오늘날 개신교다’라는 역사적 동일시가 아닙니다. AC.332가 오늘날 특정 교단을 직접 예언하거나 규정한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 가능한 것은 창4가 보여 주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분리될 때 나타나는 교회의 영적 패턴’을 오늘의 교회에도 적용하여 성찰해 보는 것입니다.

 

가인 계열의 시작에는 신앙 자체를 버리려는 의도가 없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문제는 그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 독립적인 것으로 만들고, 마침내 체어리티보다 높이는 데 있습니다. 이 점은 어느 시대 어느 교회에서도 반복될 수 있는 위험입니다.

 

살아 있는 종교 운동은 처음에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말씀에 대한 열정, 삶의 변화에 대한 강한 요구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교리와 제도와 신조가 정리됩니다. 이것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를 보존하고 다음 세대에 전하기 위해 필요한 일입니다.

 

문제는 어느 순간 그 교리적 형식이 그것을 낳은 생명보다 앞서기 시작할 때입니다. ‘어떻게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하는가?’보다 ‘어떤 명제를 정확하게 믿는가?’가 거의 전부처럼 여겨지고, 신앙의 정확성이 체어리티와 삶의 선에서 분리되면 가인으로 표상되는 원리가 다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개신교의 일부 모습이 창4와 겹쳐 보이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신조와 교리적 분화, 교단과 신학적 논쟁 자체가 곧 악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교리는 필요하고 진리의 분별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분화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는 삶보다 더 중요한 것이 된다면 우리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를 다시 살펴야 합니다.

 

AC.332의 라멕은 여기에서 특히 무거운 경고를 줍니다. 출발점에서는 신앙을 높였지만 마지막에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 오늘날 교회도 외적으로는 건물과 조직, 신학교와 교단, 설교와 성경공부, 선교와 교육이 매우 활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내적인 교회의 생명이 건강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교회의 외적 제도와 활동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라멕 상태’라고 판정해서도 안 됩니다. 외적인 것은 내적인 생명을 위한 귀중한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안에 선과 진리의 결합,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이 실제로 살아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아다와 씰라, 그리고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의 존재가 의미심장합니다. 한 교회적 상태가 내적으로 쇠퇴해도 그 안에서 신학, 예배, 음악, 교육, 선교, 연구, 사회적 봉사와 같은 유용한 외적 요소들이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것이 많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내적 상태를 자동으로 판단할 수도 없고, 반대로 내적 쇠퇴의 위험이 있다고 해서 그 안의 모든 것을 악하다고 버릴 수도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의 ‘종말’을 단순한 외적 붕괴와 동일시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외적 제도와 활동은 오래 지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내적인 생명, 곧 선과 진리, 체어리티와 신앙의 결합이 약해지고 마침내 사라지면 내적으로는 종말을 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원리를 오늘날 기독교에 적용할 때 가장 먼저 시선을 밖으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저 교단이 가인이다’, ‘저 교회가 라멕이다’라고 판정하는 순간 창4가 주는 말씀의 칼날을 다른 사람에게만 돌리게 됩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내 안의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를 알고 AC를 읽는 사람 역시 이 위험에서 면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속뜻과 상응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지식이 이웃을 사랑하고 악을 피하며 쓰임을 행하는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바로 그 AC 지식이 체어리티보다 앞서는 ‘가인적’ 기능을 할 수도 있습니다. 진리의 종류가 아무리 고상해도 선과 분리되면 위험합니다.

 

따라서 창4를 오늘의 개신교와 겹쳐 읽는다면 목적은 ‘개신교가 끝났다’는 선언을 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살아 있는 교회가 어떻게 교리적 형식을 만들고, 그 형식이 어떻게 생명에서 분리될 수 있으며, 분리가 계속되면 어떻게 처음의 신앙 자체까지 약화될 수 있는지를 성찰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희망도 있습니다. 한 특정 교회적 상태가 종말에 이른다고 해서 주님의 교회 자체가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AC 전체에서 주님께서는 교회의 종말 가운데서도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다음 교회를 준비하십니다. 인간의 형식은 쇠퇴하고 끝날 수 있지만 주님의 구원의 섭리는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창4와 겹쳐 볼 때 가장 중요한 질문은 ‘누가 가인인가?’가 아니라 ‘우리 가운데 무엇이 가인처럼 되고 있는가?’이며, 또 ‘개신교가 끝나는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지금도 무엇을 보존하시고 어떻게 선과 진리, 신앙과 체어리티를 다시 결합시키고 계시는가?’일 것입니다.

 

이러한 독법이라면 창4는 과거의 태고교회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어느 시대의 교회에도 적용될 수 있는 영적 거울이 됩니다. 그러나 그 거울을 다른 사람에게 들이대기 전에 먼저 자신과 자신이 속한 교회의 상태를 살피는 데 사용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도 유익한 적용입니다.

 

 

 

AC.332, 창4:18, 라멕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

bygrace.kr

 

AC.332 심화 3, 라멕에서 신앙이 사라졌는데 아다와 씰라의 계열에서는 왜 유용한 것들이 나타나는

AC.332 심화3. 라멕에서 신앙이 사라졌는데 아다와 씰라의 계열에서는 왜 유용한 것들이 나타나는가? AC.332에서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렇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18)

 

AC.332

이 하나의 이단에서 생겨난 여러 이단들 역시 각각 그 이름들로 불렸으며, 그 마지막이 ‘라멕’(Lamech)인데, 그 안에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18절) The heresies that sprang from this one are also called by their names, in the last of which, called Lamech, there was nothing of faith remaining. (verse 18)

 

해설

AC.332는 앞의 AC.331에서 말한 ‘이 이단의 확장’이 계속되어 마침내 어디에 이르는지를 보여 줍니다. AC.331에서 ‘에녹’은 가인으로 표상된 이단, 곧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가 더욱 확장된 상태를 나타냈습니다. 이제 창4:18에는 에녹에서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나타납니다. 문자적으로는 한 집안의 계보이지만, 스베덴보리의 속뜻에서는 하나의 교리적, 교회적 상태에서 여러 파생된 상태들이 생겨나며 점차 변질되어 가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AC.332가 먼저 말하는 것은 ‘이 하나의 이단에서 생겨난 여러 이단들’입니다. 처음의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였습니다.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분리가 한 번 일어나고 계속 유지되면 그것이 한 형태로만 머물지 않고 여러 파생된 교리적 상태들을 낳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창4의 ‘낳고, 낳고, 낳았다’는 계보의 언어는 속뜻에서 단순한 혈통의 계승만이 아니라 교리와 교회의 상태가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이어지는 영적 계승을 보여 줍니다.

 

여기에서 ‘이단’이라는 말을 오늘날 특정 교단을 정죄하는 의미로 곧바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324부터의 문맥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핵심은 본래 하나였던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면서 생겨난 교리적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여러 이단들이 생겨났다’는 말은 단순히 교파의 수가 늘어났다는 뜻이 아니라, 처음의 영적 분리에서 여러 변형된 교리적 상태들이 파생되었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정확합니다.

 

이 점에서 창4의 계보는 하나의 점진적인 변질 과정을 보여 줍니다. 처음 가인은 신앙 자체를 없앤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 그것을 주된 것으로 높이려는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초기에는 아직 신앙에 속한 어떤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것이 AC.330에서 가인이 ‘표’를 받아 보존되는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이후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다시 심어져야 했기 때문에 신앙 자체가 그 자리에서 완전히 소멸되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보존되었다고 해서 분리된 신앙의 상태 자체가 승인된 것은 아닙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이 계속 체어리티와 결합되지 않은 채 전개되면 그 상태 역시 점차 변질될 수 있습니다. AC.331의 에녹은 그 첫 확장이고, AC.332에서는 다시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을 거쳐 라멕에 이릅니다. 각각의 이름은 앞의 상태에서 파생된 또 다른 교리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AC.332에서 가장 무거운 말이 나옵니다. ‘그 마지막이 라멕인데, 그 안에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출발점은 신앙을 높이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정작 신앙에 속한 것마저 잃어버립니다. 이것은 창4의 가인 계열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역설입니다. 체어리티보다 신앙을 앞세워 신앙을 지키려 했지만, 신앙을 그 생명인 체어리티에서 계속 분리한 결과 마침내 신앙 자체의 성질도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단지 어떤 교리를 알고 그것을 옳다고 인정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야 합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될 때 살아 있는 진리가 되고, 신앙은 삶의 선과 결합될 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따라서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계속 분리되어 있다면 처음에는 여전히 신앙의 지식과 형식을 유지할 수 있어도, 그 상태가 계속 진행되면서 신앙을 신앙답게 하는 내적 생명을 잃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는 말을 그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AC.332는 가인에서 파생되어 라멕에 이른 특정한 교리적 계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곧바로 ‘당시 인류 전체에서 신앙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창4와 창5, 그리고 이후 노아로 이어지는 전체 흐름을 함께 보면 주님께서 다른 방식으로 교회의 생명을 보존하시는 과정이 계속 나타납니다.

 

이 점은 AC.330의 ‘가인의 표’와도 모순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셨다는 것은 가인 계열의 모든 후손이 반드시 끝까지 참된 신앙을 유지하도록 강제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유 가운데 주님께서 보존하신 진리를 받아들이고 선과 결합할 수도 있으며, 반대로 그것을 계속 왜곡하여 잃을 수도 있습니다. 라멕은 바로 후자의 길이 끝까지 진행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가인에서 라멕까지의 흐름은 단순히 ‘한 이단이 여러 이단으로 갈라졌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더 깊게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가 한 번 무너진 뒤 그 분리가 계속될 때 어떠한 영적 붕괴가 일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사랑과 신앙의 분리였고, 이어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났으며,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지고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교리가 왜곡되었습니다. 그 왜곡이 계속 확대되자 마침내 처음에 그렇게 높였던 신앙 자체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창4의 계보 전체를 단순한 절망의 이야기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섭리는 특정한 한 계열의 성공이나 실패에 매이지 않습니다. 가인 계열이 라멕에서 신앙마저 잃는 상태에 이르더라도 주님의 구원의 질서가 함께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후의 말씀에서는 그 종말 가운데서도 어떤 것들이 보존되고, 또 새로운 교회적 상태가 어떻게 준비되는지를 보게 됩니다.

 

따라서 AC.332는 우리에게 매우 엄중하면서도 단순한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붙들고 있는 신앙은 무엇과 결합되어 있는가?’ 신앙을 많이 말하고 진리를 강하게 주장하는 것만으로 그 신앙이 살아 있다고 보장되지는 않습니다. 그 진리가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게 하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결합될 때 신앙은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채 자신만을 높이기 시작하면, 끝에는 체어리티뿐 아니라 신앙 자체까지 잃을 수 있다는 것이 라멕에 이른 가인 계열의 무거운 경고입니다.

 

심화

1. 왜 ‘분리된 신앙’은 결국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되는가?

 

AC.332 심화 1, 왜 ‘분리된 신앙’은 결국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되는가?

AC.332 심화1. 왜 ‘분리된 신앙’은 결국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되는가? AC.332에서 특별히 깊이 생각할 부분은 하나의 역설입니다. 가인의 출발점은 신앙을 없애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

bygrace.kr

 

2. 가인의 표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는 라멕에서 실패한 것인가?

 

AC.332 심화 2, 가인의 표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는 라멕에서 실패한 것인가?

AC.332.심화2. 가인의 표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는 라멕에서 실패한 것인가? AC.330에서는 주님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어 신앙이 침해받지 않도록 보존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도 분명했

bygrace.kr

 

3. 라멕에서 신앙이 사라졌는데 아다와 씰라의 계열에서는 왜 유용한 것들이 나타나는가?

 

AC.332 심화 3, 라멕에서 신앙이 사라졌는데 아다와 씰라의 계열에서는 왜 유용한 것들이 나타나는

AC.332 심화3. 라멕에서 신앙이 사라졌는데 아다와 씰라의 계열에서는 왜 유용한 것들이 나타나는가? AC.332에서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렇

bygrace.kr

 

4. 가인 계열의 생명 주기는 오늘날 기독교와 어떻게 겹쳐 보일 수 있는가?

 

AC.332 심화 4, ‘가인 계열’ 이야기와 현 기독교, 개신교 생명 주기의 오버랩

AC.332 심화4. 가인 계열의 생명 주기는 오늘날 기독교와 어떻게 겹쳐 보일 수 있는가? 가인 계열을 따라 읽다 보면 오늘날 기독교, 특히 개신교의 모습이 겹쳐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bygrace.kr

 

 

 

AC.333, 창4:19-22, 아다와 씰라, 야발, 유발, 두발가인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

bygrace.kr

 

AC.331, 창4:17, 에녹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331 심화

1. 창4의 ‘에녹’과 창5의 ‘에녹’은 같은 의미인가?

 

AC를 처음 읽는 분에게는 여기서 매우 자연스러운 혼란이 생길 수 있습니다. 창4에도 ‘에녹’이 나오고 창5에도 ‘에녹’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창4의 에녹은 가인의 아들이고, 창5의 에녹은 야렛의 아들이며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기록된 인물입니다. 이름은 같지만 스베덴보리가 두 에녹에게 부여하는 속뜻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창4의 에녹은 AC.331에서 매우 간단하게 정의됩니다. ‘이 이단의 확장을 에녹이라 합니다.’ 여기서 ‘이 이단’은 가인으로 표상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입니다. 따라서 창4의 에녹은 가인이라는 분리된 신앙의 교리적 상태가 더 전개되고 확장된 것을 나타냅니다.

 

반면 창5의 에녹은 전혀 다른 문맥에서 설명됩니다. 그곳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으로 알게 된 것들을 모아 교리적 지식으로 정리하고 보존한 상태와 에녹을 연결합니다. 그러므로 창4의 에녹과 창5의 에녹을 단지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같은 상응이나 같은 교회적 상태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은 말씀의 속뜻을 읽을 때 매우 중요한 원리를 보여 줍니다. 상응은 단순한 암호표가 아닙니다. ‘에녹이라는 이름은 언제나 하나의 뜻’, ‘성은 언제나 하나의 뜻’, ‘물은 언제나 하나의 뜻’이라고 기계적으로 대입하여 해독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어떤 인물과 사물과 장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그것이 놓인 전체 문맥과 계열, 그리고 그 앞뒤에서 설명되는 영적 상태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따라서 같은 이름이 두 번 등장한다고 해서 반드시 같은 상태를 뜻하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이름이 다르다고 해서 전혀 관계없는 상태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각각의 문맥에서 그 이름을 어떤 교회적 또는 영적 상태와 연결하는가입니다. 창4의 에녹은 가인의 계열 안에서 읽어야 하고, 창5의 에녹은 그 장에서 전개되는 태고교회의 계승과 퍼셉션의 변화라는 문맥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이 점은 창4와 창5의 계보를 읽는 방식에도 중요한 도움을 줍니다. 두 장을 단순히 하나의 시간표로 이어 붙여 ‘누가 누구와 정확히 같은 시대에 살았는가’를 재구성하는 데 초점을 두기보다, 각 계보가 어떤 교회와 교리의 상태 변화를 보여 주는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설에서 중심은 생물학적 연대 계산이 아니라 교회적 상태의 계승과 변화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창4와 창5의 두 계열이 역사적으로 정확히 어떻게 병행되었는지를 AC.331만으로 확정할 수도 없습니다. 속뜻에서 서로 다른 교회적 계열과 상태를 읽을 수 있다는 것과, 각각의 세대가 시간적으로 정확히 일대일 대응하여 동시에 존재했다고 말하는 것은 서로 다른 주장입니다. 그러므로 ‘두 계열이 같은 태고교회 시대의 서로 다른 흐름을 보여 준다’는 큰 그림은 가능하지만, 그것을 세밀한 연대표처럼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두 에녹의 차이를 가장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창4의 에녹은 ‘분리된 신앙의 교리가 더 확장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반면 창5의 에녹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으로 알려진 것들을 수집하여 교리적으로 보존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하나는 이미 일어난 분리가 더 전개되는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사라져 가는 퍼셉션의 지혜를 보존하는 방향입니다.

 

그러므로 두 에녹에게 공통적으로 ‘교리적인 것’과 연결되는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교리의 성격과 기능은 매우 다릅니다. 창4에서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더욱 발전하는 쪽이고, 창5에서는 퍼셉션으로 받은 것을 잃지 않도록 모아 보존하는 쪽입니다. 같은 이름이지만 서로 다른 교회적 상태를 표상하는 좋은 사례입니다.

 

이 차이는 오늘 우리가 교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에도 의미 있는 통찰을 줍니다. 교리화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교리화하며 무엇을 위해 보존하는가입니다. 생명에서 분리된 진리를 체계화할 수도 있고, 반대로 주님께 받은 선과 진리를 다음 상태를 위해 충실하게 보존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교리가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그 교리가 어떤 사랑과 결합되어 있으며 어떤 쓰임을 위해 존재하는가입니다.

 

따라서 창4와 창5의 두 에녹은 오히려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하나는 분리가 굳어지고 확장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 주고, 다른 하나는 사라져 가는 퍼셉션의 지혜를 교리적으로 보존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말씀의 속뜻을 읽을 때 이름 자체보다 문맥과 계열, 그리고 그 교리가 생명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는 것을 잘 보여 줍니다.

 

 

 

AC.331, 창4:17, 에녹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324 심화

1. 창4와 창5는 어떻게 함께 읽어야 하는가? - 가인 계열과 셋 계열

 

좀 성급한 질문일 수 있지만, 그리고 이미 몇 차례 거듭 고민했던 질문이지만... 창4, 창5를 시간순으로 읽어야 하나요? 이런 질문을 드리는 이유는, 가인 이후 이 여러 대가 흐르도록 태고교회는 처음엔 어두운 세월을 지내다가 셋 이후 회복된 걸로 보기에는 ‘태고교회’라는 위상(?)에 어딘가 좀 어색하기 때문입니다. 창4를 시간순으로 읽으면, 그러면 아담과 하와는 이 여러 대가 흐르도록 나이만 먹다가 수백, 수천 년이 흐른 후에야 셋이라는 자녀를 본 게 되는데... 이건 좀... 차라리 창4 따로, 창5 따로, 그러니까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이 나란히 동시대를 살다가 홍수를 맞이하는, 이런 이해가 더 나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창4와 창5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창4에서는 가인에게서 에녹,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으로 여러 대가 이어지고, 라멕에게서 다시 야발, 유발, 두발가인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긴 계보가 모두 소개된 뒤 창4:25에 와서 다시 ‘아담이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라고 합니다. 이것을 현대적인 연대기처럼 직선적인 시간순으로만 읽으면, 마치 가인의 여러 대 후손이 모두 지나간 뒤에야 아담과 하와가 셋을 낳은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초반을 해석하는 방식에서는 이러한 계보의 가장 중요한 의미가 개인들의 출생 연대를 정확하게 재구성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가인과 에녹, 이랏 등의 이름은 말씀의 속뜻에서 특정한 교리와 교회적 상태를 나타내며, 셋과 에노스 및 창5의 여러 이름들 역시 이어지는 교회적 상태들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창4와 창5의 관계를 이해할 때에도 먼저 ‘누가 정확히 몇 년 먼저 태어났는가?’보다 ‘말씀이 어떤 교회적 계열과 상태의 연속을 보여 주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창4는 특히 태고교회 안에서 갈라져 나온 교리들과 그 변화를 가인으로부터 이어지는 계열을 통하여 보여 줍니다.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구별되기 시작하고, 그 구별이 분리로 굳어지면서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나아가며, 그 뒤에도 그 교리적 상태가 여러 형태로 파생되는 과정이 이어집니다. 반면 창4 마지막의 셋과 에노스, 그리고 창5에서 다시 이어지는 계보는 태고교회 안의 또 다른 교회적 계승과 상태의 연속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창4의 가인 계열이 역사적으로 완전히 끝난 다음 창5의 셋 계열이 시작되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말씀은 한 계열의 영적 역사를 충분히 보여 준 뒤 서술의 초점을 다른 계열로 옮겨 그 계열의 상태들을 다시 처음부터 펼쳐 보일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창4와 창5를 태고교회라는 하나의 큰 시대 안에서 전개되는 서로 다른 교회적 계열의 서술로 함께 읽는 것은 충분히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여기서 ‘함께’ 또는 ‘나란히’라는 말을 역사적 동시성에 관한 정밀한 연대표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속뜻 해석이 직접적으로 밝히는 것은 각 이름이 나타내는 교회적 상태와 그 상태들의 연속이지, 가인 계열의 어느 인물이 셋 계열의 어느 인물과 정확히 같은 시기에 살았는지를 확정하는 연대기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두 계열이 같은 태고교회 시대 안에서 전개되었다’는 것과 ‘각 세대를 일대일로 맞추어 동시대라고 확정한다’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창4:25에서 셋이 등장하는 것도 훨씬 자연스러워집니다. 이것을 반드시 ‘가인의 여러 대 후손이 모두 지나간 뒤 비로소 셋이 태어났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 없이, 말씀의 서술 초점이 가인으로 표상되는 교회적 계열에서 셋으로 표상되는 다른 교회적 계열로 옮겨가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창5에서는 다시 아담에서 시작하여 셋과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로 이어지는 계열을 하나의 연속된 교회적 역사로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가인 계열을 단순히 ‘악한 계열’, 셋 계열을 ‘선한 계열’이라고 나누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은 처음부터 아무런 진리도 없는 순수한 악을 뜻한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이 하나의 독립적인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하고, 이후 점차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서 변질됩니다. 반대로 셋으로 이어지는 계열 역시 아무런 쇠퇴 없이 처음의 가장 순수한 천적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며 노아까지 이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태고교회 전체가 여러 상태를 거치며 결국 그 시대의 종말을 향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태고교회’라는 말 자체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태고교회는 단지 가장 처음의 순수한 ‘아담’ 상태 하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최초의 천적 상태에서 시작하여 여러 후속 교회와 상태들을 거쳐 그 교회 시대의 종말에 이르기까지의 큰 흐름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는 매우 높은 천적 상태도 있고, 점차 쇠퇴하는 상태도 있으며, 본래의 교회에서 갈라져 나온 교리적 상태도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창1-9의 속뜻을 당시 지상에 살던 모든 사람의 역사적 상태와 곧바로 동일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장들에서 직접 추적하는 것은 무엇보다 교회와 그 교회의 연속적인 상태들입니다. 물론 그 속뜻에 담긴 영적 원리는 오늘의 모든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도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될 수 있고, 한 교리나 지식을 전체보다 높일 수 있으며, 주님께서는 그런 상태에서도 다시 생명의 길을 마련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적 적용과 당시 모든 인류가 똑같은 교회적 상태를 동시에 거쳤다는 주장은 서로 다른 것입니다.

 

결국 AC.324에서 붙들어야 할 것은 두 가지 흐름입니다. 인간 편에서는 본래 하나였던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고 교리들이 독립하면서 여러 교회적 상태가 생겨납니다. 그러나 주님 편에서는 그 분열과 쇠퇴 가운데서도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시는 섭리가 계속됩니다. 창4와 창5를 이러한 관점에서 함께 읽으면, 가인과 아벨, 셋과 에노스, 그리고 창5의 긴 계보는 단순한 고대 가족사의 연속을 넘어 ‘교회가 어떻게 변화하고 쇠퇴하며, 그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어떻게 교회의 생명을 이어 가시는가’를 보여 주는 영적 역사로 열리게 됩니다.

 

 

 

AC.324, 창4, 교회에서 분리된 교리들과 에노스라는 새로운 교회 (AC.324-337)

창4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