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1

‘에녹’(Enoch)이라 불린 것은 그 모든 교리적 또는 이단적 가르침을 포함한 하나의 이단이었다는 사실은, 이 이름 자체에서도 어느 정도 분명합니다. ‘에녹’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시작되거나 형성되기 시작한 가르침(instruction so begun or initiated)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That it was a heresy with all its doctrinal or heretical teaching that was called “Enoch” is in some measure evident from this name, which means the instruction so begun or initiated.

 

해설

AC.401은 앞의 AC.399-400에서 설명한 ‘에녹’의 의미를 그 이름 자체에서 다시 확인합니다. AC.399에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분열 또는 이단이 자기 자신에게서 또 다른 분열 또는 이단을 산출했고 그것이 ‘에녹’이라 불렸으며, 가인이 쌓은 성읍은 거기서 나온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AC.400에서는 이것을 더 일반화하여 교회든 이단이든 서로 잉태하고 낳으면서 하나의 영적 계보를 형성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401은 왜 그 새로운 상태가 하필 ‘에녹’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는지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에녹이라는 이름이 ‘그렇게 시작되거나 형성되기 시작한 가르침’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번 에녹은 단순히 가인 다음에 등장한 또 하나의 이단이라는 의미만을 갖지 않습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이제 자기에게서 새로운 교리적 가르침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분리가 단순한 주장이나 태도로 머무르지 않고 가르칠 수 있는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399의 ‘성읍’과 AC.401의 ‘에녹’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에녹은 새롭게 산출된 분열 또는 이단이며, 성읍은 거기서 나온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의 분열된 원리가 생겨나고, 그 원리가 가르침으로 형성되며, 그 가르침에서 여러 교리적인 것들이 조직되어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흐름입니다. AC.399에서 ‘교리 체계’라는 표현을 조심스럽게 사용할 수 있었던 이유가 AC.401에서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이제 단순한 분열을 넘어 실제로 ‘가르침’이 형성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계보에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처음 가인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는 하나의 교리적 원리를 표상했습니다. AC.398에서는 그 결과 사랑 대신 신앙이, 의지 대신 이해가 지배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그렇게 독립한 이해와 신앙은 자기 나름의 가르침을 만들어 내기 시작합니다. ‘에녹’은 바로 그 단계와 관련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르침’ 자체가 악하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가르침의 존재가 아니라 그 가르침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번 문맥에서 에녹의 가르침은 가인, 곧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산출되었습니다. 따라서 그 가르침 역시 그 최초의 분리라는 성격을 품고 있습니다. 교리가 정리되고 가르침이 체계화되었다고 해서 그 근원의 문제가 저절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AC.400의 마지막 문장과 연결하면 그 위험이 더 잘 보입니다. ‘하나의 이단이 잉태되면 거기에서 수많은 이단이 태어납니다.’ 처음에는 하나의 잘못된 원리였지만 그것이 가르침으로 형성되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고, 그 가르침으로부터 다시 새로운 결론들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의 분리가 다음 분리를 낳고, 그것이 다시 가르침과 교리를 낳으면서 계보가 이어집니다.

 

이것은 교리의 ‘근원’을 살피는 일이 왜 중요한지도 보여 줍니다. 어떤 가르침이 매우 논리적이고 정교하며 많은 성경 구절을 사용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참된 교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가르침의 중심에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진리가 선을 섬기고 신앙이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도록 가르치는지, 아니면 신앙을 삶과 사랑에서 분리하여 그 자체로 구원의 본질인 것처럼 만드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원리를 다른 교회나 사람에게 ‘이단’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이번 본문의 목적과 거리가 있습니다. 오히려 가인의 계보를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는 편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 안에서도 어떤 잘못된 생각 하나가 받아들여지면 그것은 홀로 머물지 않습니다. 그 생각을 정당화하기 위한 다른 생각들이 생기고, 그것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하나의 자기 논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그 논리를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고 가르칠 정도로 확신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가인에게서 에녹이 태어나고 성읍이 세워지는’ 과정은 인간 마음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영적 과정입니다.

 

AC.401은 또한 같은 이름이 언제나 같은 상응을 갖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게 합니다. 창4의 가인 계열에도 에녹이 있고, 창5의 셋 계열에도 에녹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에서 ‘에녹’이라는 이름이 가르침의 시작과 관련된다는 사실만으로 두 에녹의 영적 질이 같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어떤 가르침이 시작되었느냐는 그 가르침이 속한 계열과 문맥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 점은 나중에 두 에녹을 비교할 때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가인 계열의 에녹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교리적 가르침이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반면 셋 계열의 에녹에서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에 속한 것들이 수집되고 교리적인 형태로 보존되는 전혀 다른 기능이 나타납니다. 같은 ‘에녹’과 ‘가르침’이라는 요소가 있어도 그것이 어느 계열에서 무엇을 보존하고 무엇을 전개하는가에 따라 영적 의미의 질은 달라집니다.

 

따라서 AC.401의 짧은 설명은 AC.399-400을 한 문장으로 묶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가인이라는 분열에서 또 다른 분열인 에녹이 태어났고, 그 분열은 단순한 생각으로 끝나지 않고 ‘가르침’으로 시작되고 형성되었으며, 그로부터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가 성읍으로 나타났습니다. ‘분리된 신앙’이 이제 ‘가르쳐지는 분리된 신앙’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결국 AC.401에서 중요한 질문은 ‘우리는 교리를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그 교리는 무엇으로부터 시작되었는가?’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서 진리를 이해하고 가르치는 것인지, 아니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출발점으로 삼아 그 위에 가르침을 세우는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가인의 에녹은 하나의 분리가 가르침으로 형성되기 시작할 때 그것이 더 넓은 교리적 세계를 만들어 갈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참된 교리의 생명은 단지 올바른 문장과 정교한 체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교리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에 뿌리를 두고 그것을 섬기는 데 있습니다. (AC.401 해설)

 

 

 

AC.402, 창4:17, ‘성읍은 왜 교리를 의미하는가? - 거룩한 예루살렘에서 가인의 성읍까지’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2가인이 ‘쌓은 성읍’(city that was built)이 그 이단에서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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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0, 창4:17, ‘하나의 이단이 잉태되면 수많은 이단이 태어납니다 - 잉태와 출생과 계보의 속뜻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0‘가인이 그의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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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led the name of the city after the name of his son, Enoch. (창4:17)

 

AC.399

‘가인이 그의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았다’(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는 이 분열 또는 이단이 자기 자신에게서 또 다른 분열 또는 이단을 산출하였고, 그것이 ‘에녹’(Enoch)이라 불렸음을 의미합니다. ‘그가 쌓은 성읍’(the city which he built)은 거기서 나온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분열 또는 이단이 ‘에녹’(Enoch)이라 불렸기 때문에, ‘그 성읍의 이름을 그의 아들의 이름을 따라 에녹이라 하였다’(the name of the city was called after the name of his son, Enoch)고 한 것입니다. The words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signify that this schism or heresy produced another from itself that was called “Enoch.” By “the city which he built” is signified all that was doctrinal and heretical therefrom, and because the schism or heresy was called “Enoch,” it is said that “the name of the city was called after the name of his son, Enoch.”

 

해설

AC.399부터 가인 계열의 계보가 시작됩니다. 문자적 의미에서는 가인이 아내와 동침하여 에녹을 낳고 성읍을 건설하여 아들의 이름을 따라 그 성읍을 에녹이라고 부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계보를 단순한 가족사의 기록으로 읽지 않습니다. ‘가인’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하나의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했듯이, 가인에게서 태어난 ‘에녹’은 그 분열이 자기 자신에게서 다시 산출한 또 다른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낳는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하나의 교리적 원리가 받아들여지면 그것은 그 상태에 머물지 않고 그 원리에서 다시 다른 결론과 교리를 산출합니다. 가인의 최초 문제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체어리티와 분리되어도 그 자체로 신앙일 수 있다’는 원리가 일단 자리 잡으면, 거기에서 여러 후속적인 생각과 교리들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러한 파생을 계보의 ‘출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인이 에녹을 낳았다’는 것은 단순히 한 이단 뒤에 우연히 또 다른 이단이 나타났다는 뜻보다 더 깊습니다. 원문은 ‘produced another from itself’, 곧 ‘자기 자신에게서 또 다른 것을 산출하였다’고 합니다. 새로운 분열은 이전 분열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 있던 원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 최초의 원리가 새로운 형태로 전개되고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어 ‘성읍’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쌓은 성읍을 ‘거기서 나온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발전입니다. 처음에는 하나의 분열된 원리였던 것이 이제 여러 교리적인 내용들을 갖추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해 단순한 생각이나 주장 하나가 아니라, 서로 연결된 가르침들이 형성되면서 하나의 체계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읍’은 분리된 신앙이 교리적으로 조직되고 정착된 상태를 나타낸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AC.399의 원문이 직접 ‘교리 체계’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원문은 ‘all that was doctrinal and heretical therefrom’, 곧 ‘거기서 나온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라고 합니다. 따라서 ‘성읍 = 교리 체계’는 이 표현을 이해하기 쉽게 요약한 말로 사용할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가 이번 번호에서 직접 그렇게 정의했다고까지 말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여러 교리적·이단적 내용이 산출되고 그것들이 하나의 성읍으로 표상된다는 데 초점을 두면 충분합니다.

 

이것은 AC.397-398과도 매우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가인은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가 놋 땅에 거했으며, 전에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과 전에 체어리티가 지배하던 합리적 마음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AC.398에서는 사랑 대신 신앙이, 의지 대신 이해가 지배하게 되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399에서는 바로 그 이해와 신앙이 독립적으로 지배하는 상태에서 새로운 교리적 산물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중요한 영적 원리가 있습니다. 이해가 사랑과 선을 섬길 때에는 진리가 삶을 인도하는 수단이 됩니다. 그러나 이해가 사랑에서 분리되어 스스로 지배하려 하면, 사람은 자신이 세운 전제에서 계속 새로운 논리와 교리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처음의 전제가 잘못되어 있어도 그 위에 매우 정교하고 일관된 체계를 세울 수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정교하다는 사실 자체가 그 교리가 살아 있는 진리라는 보증은 아닙니다. 그것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는지를 함께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교리’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도 분명히 구별해야 합니다. 문제는 교리가 존재한다는 데 있지 않고, 어떤 근원에서 그 교리가 산출되었느냐에 있습니다. 선과 체어리티에서 나온 진리의 교리는 사람을 주님과 이웃에게로 이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원리에서 산출된 교리는 아무리 정교하게 조직되어도 그 최초의 분리를 계속 품을 수 있습니다. AC.399의 성읍은 바로 후자의 문맥에 있습니다.

 

이 점에서 ‘그 성읍의 이름을 그의 아들의 이름을 따라 에녹이라 하였다’는 표현도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분열 또는 이단 자체가 에녹이라고 불렸기 때문에 그로부터 나온 교리적·이단적 전체도 에녹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즉 그 성읍의 성격은 그것을 낳은 원리와 분리되지 않습니다. 성읍을 구성하는 여러 교리가 아무리 많아져도 그 전체를 규정하는 것은 그것들의 근원이 된 ‘에녹’이라는 분열의 성격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반드시 구별해 두어야 할 것이 ‘가인 계열의 에녹’과 훗날 창5에 등장하는 ‘셋 계열의 에녹’입니다. 이름은 같지만 스베덴보리의 속뜻에서는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번 AC.399의 에녹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파생된 분열 또는 이단입니다. 반면 창5의 에녹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에 속한 것들을 모아 교리적인 형태로 보존한 것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성경에 같은 이름이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동일한 상응을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두 에녹을 나중에 함께 보면 매우 흥미로운 대조가 생깁니다. 가인 계열에서는 교리화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전개하고 굳히는 방향으로 나타나는 반면, 셋 계열의 에녹에서는 쇠퇴해 가는 퍼셉션의 지혜를 보존하기 위한 교리화가 나타납니다. 하나는 생명에서 분리된 교리의 발전이고, 다른 하나는 잃어 가는 생명의 지혜를 보존하기 위한 교리의 형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창5의 해당 AC 번호에 이르렀을 때 충분히 다루는 편이 좋겠습니다.

 

AC.399는 또한 ‘가인의 표’가 왜 신앙의 모든 문제를 즉시 해결한 것이 아니었는지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셨다는 것은 그 신앙이 곧바로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보존된 신앙은 여전히 인간의 자유 안에서 사용될 수 있었고, 가인의 계열에서는 오히려 새로운 분열과 교리적 체계를 산출하는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주님의 보존 섭리는 인간의 자유를 없애는 강제적인 교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신앙을 보존하신 것은 필요했습니다. 앞의 AC.393-398에서 반복해서 보았듯이, 인간이 태고교회와 같은 퍼셉션을 잃은 뒤에는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받을 길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이해 능력과 신앙의 지식이 한편으로는 분리된 교리 체계를 만들어 낼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님께서 사람을 체어리티로 이끄시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결정적인 것은 신앙의 지식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사랑과 결합되고 무엇을 섬기느냐입니다.

 

따라서 AC.399는 가인의 후손들을 단순한 고대 족보로 읽기보다, 하나의 잘못된 영적 원리가 어떻게 자기에게서 또 다른 원리를 낳고, 그것이 다시 교리적인 것들을 형성하면서 발전하는지를 보여 주는 출발점입니다. ‘가인이 에녹을 낳았다’는 것은 분열이 또 다른 분열을 산출한 것이며, ‘성을 쌓았다’는 것은 그로부터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가 형성된 것입니다.

 

결국 이번 번호가 던지는 질문은 ‘교리가 얼마나 정교한가?’보다 더 깊습니다. ‘그 교리는 어디에서 태어났는가?’입니다.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나온 신앙인가, 아니면 사랑에서 분리되어 스스로 지배하려는 신앙인가 하는 것입니다. 가인의 에녹과 성읍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도 자기 나름의 후손을 낳고 교리를 만들며 하나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의 생명은 교리의 규모나 논리적 정교함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이 다시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에 결합되어 있느냐에 있습니다. (AC.399 해설)

 

 

 

AC.400, 창4:17, ‘하나의 이단이 잉태되면 수많은 이단이 태어납니다 - 잉태와 출생과 계보의 속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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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8, 창4:16, ‘의지 대신 이해가, 사랑 대신 신앙이 지배하다 - 에덴 동쪽에 거한 가인의 속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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