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혈연이면 영원히 혈연인가 - 천국에서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한번 부모와 자녀가 되었으면 영원히 부모와 자녀인가? 형제자매는 영원히 형제자매인가?’ 이 질문은 사후세계와 천국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우리는 가족을 너무나 중요한 관계로 경험하기 때문에 천국에서도 지금의 가족관계가 그대로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대답은 ‘혈연이라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지만, 혈연관계가 영원한 관계를 결정하지는 않는다’에 가깝습니다.

 

자연계에서 혈연은 매우 중요합니다. 부모와 자녀, 형제자매라는 관계는 우연히 붙은 이름표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서로 사랑하고 돌보며 책임을 배우도록 주어진 질서입니다. 특히 부모가 어린 자녀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사랑에는 주님의 섭리가 깊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이 혈연을 하찮게 여긴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자연계에서 가족에게 맡겨진 책임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은 체어리티(charity)의 중요한 형태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영계에 들어가면 관계를 결정하는 원리가 달라집니다. 자연계에서는 ‘누구에게서 태어났는가?’가 가족을 결정하지만, 영계에서는 ‘무엇을 사랑하는가?’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결정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국 공동체는 혈통이나 국적, 혹은 지상 소속에 따라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비슷한 사랑과 선을 가진 사람들이 주님의 질서에 따라 결합하여 이루어집니다. 결국 자연적 친족관계보다 ‘영적 친화성’이 더 근본적 관계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주님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밖에서 찾나이다’라고 했을 때 주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고 물으신 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2:47-50). 이것은 육신의 가족을 무시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혈연보다 더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같은 선과 진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영적 친족관계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부자지간이었다고 해서 영원히 ‘아버지는 위, 아들은 아래’라는 관계가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계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낳고 양육했지만, 아들도 성인이 되고 두 사람 모두 영계에 들어가면 각각 독립된 영적 인간입니다. 그때는 ‘누가 누구의 아버지였는가?’보다 각 사람이 어떤 ‘지배적 사랑’(ruling love)을 형성했는지가 더 중요해집니다. 두 사람이 서로 비슷한 천국적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매우 가까이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적 사랑이 크게 다르다면 혈연이라는 이유만으로 영원히 같은 공동체에서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형제자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형제이지만, 영계에서는 두 사람의 내적 사랑이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선택하고 다른 사람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자신의 지배적 사랑으로 만들었다면, 자연적 혈연이 그 영적 차이를 없앨 수 없습니다. 천국에 있는 사람이 ‘내 동생이 지옥에 있으니 나도 그곳에서 함께 살아야 한다’고 할 수도 없고, 반대로 혈연 때문에 지옥의 사람이 천국 공동체에 머무를 수도 없습니다. 각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삶과 상응하는 곳으로 갑니다.

 

그러면 천국에 간 사람이 지옥에 간 가족 때문에 영원히 슬퍼하지 않을까 하는 문제가 곧 따라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별도의 주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천국의 행복이 기억상실에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지상에서의 혈연적 애착 때문에 천국에서 영원히 고통받는 것도 아닙니다. 사후에는 사람과 관계를 바라보는 기준 자체가 자연적 혈연에서 영적 선과 주님의 질서로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천국에 간 부모는 지옥에 간 자녀 때문에 슬퍼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으로 따로 다루면 상당히 깊은 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사후에 가족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에서는 사람은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잃어버리는 존재가 아닙니다. 지상에서 알던 사람들을 만나고 알아보는 과정이 있으며, 가족이나 친지들도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재회’와 ‘영원한 결합’이 같은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만나서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는 것과 영원히 같은 공동체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각 사람의 내면이 드러나고, 서로의 사랑이 조화를 이루는 사람들은 가까워지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서로 다른 곳으로 향합니다.

 

이 원리를 생각하면 주님께서 자연계의 가족을 왜 그렇게 중요하게 주셨는지도 새롭게 보입니다. 가족은 영원히 유지해야 할 하나의 혈연집단이라기보다, 우리가 사랑과 책임, 희생과 용서와 돌봄을 배우도록 주어진 매우 중요한 ‘거듭남’(regeneration)의 자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소유하기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한 독립된 영혼이 주님을 향하여 성장하도록 돌봅니다. 자녀 역시 부모에게 영원히 종속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자연계의 가족관계는 영적인 사랑을 배우는 매우 중요한 학교인 셈입니다.

 

그래서 ‘한번 혈연이면 영원히 혈연인가?’라는 질문에는 두 층위로 답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내 아버지였고, 내 어머니였고, 내 아들이었고, 내 딸이었다는 지상의 역사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혈연관계가 영원히 우리의 관계를 결정하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영원한 세계에서 사람들을 결합시키는 것은 피가 아니라 사랑이며, 더 정확히 말하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함께 사랑하는 내적 조화입니다.

 

어쩌면 이것을 가장 간결하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자연계에서는 혈연이 우리를 가족으로 만나게 하지만, 영계에서는 사랑이 우리를 영원히 함께 있게 합니다.’

 

그리고 이 원리는 가족을 가볍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귀하게 만듭니다. 지금 부모와 자녀이고 부부이며 형제자매라는 이유만으로 영원한 결합이 자동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서로를 사랑하고 선을 행하며 함께 주님을 향해 살아가는 가운데 자연적 가족관계가 ‘영적인 관계’로 깊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경우는 지상에서 가족이었던 사람들이 단지 혈연 때문에 다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 비슷한 천국적 사랑을 이루었기 때문에 영계에서도 서로 가까운 사람들이 되는 경우일 것입니다.

 

 

 

SL.8, ‘나는 하나님의 자녀니까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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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1

그들이 이처럼 따로 떨어져 살면서 오직 집과 가족과 민족으로 구별되어 있었던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가 온전하게 보존되고 모든 집과 가족이 그들의 부모에게 의존하여 사랑과 참된 예배 안에 머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각 집은 다른 모든 집과 구별되는 고유한 성향(genius)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합니다. 자녀들뿐 아니라 먼 후손들까지도 부모로부터 어떤 특정한 성향을 물려받으며, 그 특징이 매우 뚜렷하여 얼굴과 그 밖의 여러 고유한 특징들을 통해서도 서로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뒤섞이는 일이 없이 정확한 구별이 유지되도록 하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그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거주하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는 주님의 나라를 살아 있게 표상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나라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동체들이 있으며, 각 공동체는 사랑과 신앙의 차이에 따라 다른 모든 공동체와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홀로 거함’(living alone)과 ‘장막에 거함’(dwelling in tents)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한 같은 이유로 주님께서는 유대교회가 집과 가족과 민족으로 구별되도록 하셨고, 각 사람이 자기 가족 안에서 혼인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The reason why they dwelt thus alone by themselves, distinguished only into houses, families, and nations, was that by this means the church might be preserved entire, that all the houses and families might be dependent on their parent, and thereby remain in love and in true worship. It is to be remarked also that each house was of a peculiar genius, distinct from every other; for it is well known that children, and even remote descendants, derive from their parents a particular genius, and such marked characteristics that they can be distinguished by the face, and by many other peculiarities. Therefore, in order that there might not be a confounding, but an exact distinction, it pleased the Lord that they should dwell in this manner. Thus the church was a living representative of the kingdom of the Lord; for in the Lord’s kingdom there are innumerable societies, each one distinct from every other, according to the differences of love and faith. This, as observed above, is what is meant by “living alone,” and by “dwelling in tents.” For the same reason also it pleased the Lord that the Jewish church should be distinguished into houses, families, and nations, and that everyone should contract marriage within his own family; but concerning this,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해설

AC.471은 앞 번호에서 설명한 ‘집-가족-민족’이라는 구조가 단순한 고대 사회의 생활 방식이 아니었음을 밝힙니다. 그들이 서로 구별되어 살았던 목적은 ‘교회가 온전하게 보존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각 집과 가족이 자기 부모에게 의존함으로써 그 부모로부터 이어진 사랑과 참된 예배의 고유한 성격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구별’이 곧 ‘분열’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서로 다르면서도 각자의 사랑과 신앙 안에서 주님께 속할 수 있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각 집에 고유한 ‘성향’(genius)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genius는 오늘날 흔히 말하는 ‘천재성’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후손에게 이어지는 고유한 성향과 기질, 내적 특성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서로 다른 집과 가족들이 무분별하게 뒤섞이지 않고 각자의 고유성을 유지하는 것은 단순한 혈통 보존 이상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 고유한 성향과 함께 사랑과 예배의 특정한 형태도 보존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구조가 중요한 가장 깊은 이유는 지상의 교회가 ‘주님의 나라를 살아 있게 표상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모든 천사가 똑같아지는 곳이 아닙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동체가 있으며, 각 공동체는 사랑과 신앙의 차이에 따라 서로 구별됩니다. 그럼에도 그 모든 공동체가 주님을 중심으로 하나의 천국을 이룹니다. 따라서 태고 시대의 집과 가족과 민족이 서로 구별되면서 하나의 교회를 이루었던 모습은 천국의 이러한 질서를 지상에서 살아 있게 나타내는 표상이었습니다.

 

이 점에서 ‘홀로 거함’과 ‘장막에 거함’의 의미도 분명해집니다. ‘홀로’라는 말은 다른 사람들과 단절되어 고립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각 공동체에 주신 고유한 사랑과 신앙의 질서를 다른 것과 혼동하지 않고 보존하는 것을 뜻합니다. ‘장막’ 역시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랑의 거룩한 것과 예배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서로 구별된 장막에 거한다는 것은 각 공동체가 자기에게 주어진 사랑과 예배의 고유한 형태를 보존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리고 AC.471은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창4와 창5의 관계에도 상당히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태고 시대의 교회가 처음부터 하나의 획일적인 집단으로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집과 가족과 민족’이라는 여러 공동체로 구별되어 있었고, 각 공동체가 서로 다른 고유한 성향과 사랑과 신앙의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한 공동체에서 교리적 변화나 분리가 일어났다고 해서 태고교회 전체가 동시에 똑같은 상태로 변했다고 전제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 교회적 계열이 서로 구별된 채 존재하고 변화할 수 있었던 구조적 배경이 이미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것만으로 창4와 창5의 두 계열이 정확히 어떻게 병행했는지를 확정하기보다는, 이후 AC의 설명을 계속 축적해 보아야 합니다.

 

결국 AC.471에서 주님이 보존하시는 것은 획일성이 아니라 ‘질서 있는 다양성’입니다. 천국의 수많은 공동체가 서로 다른 사랑과 신앙의 상태를 가지면서도 주님 안에서 하나의 천국을 이루듯, 지상의 교회 역시 서로 다른 집과 가족과 민족의 고유성이 주님 안에서 바르게 보존될 때 하나의 살아 있는 교회를 이룰 수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공동체 질서는 바로 그 천국의 질서를 지상에서 표상하고 있었습니다. (AC.471 해설)

 

 

 

AC.472, 창5:1, ‘창조함과 만드심,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2‘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날’(day in which God created man)이 그가 영적으로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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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0, 창5:1, ‘이름들은 사람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들을 뜻한다’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0‘계보의 책’(book of the births)이 태고교회에 속했던 사람들을 열거한 것이라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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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0

‘계보의 책’(book of the births)이 태고교회에 속했던 사람들을 열거한 것이라는 사실은 뒤에 이어지는 내용으로부터 매우 분명합니다. 여기서부터 11장, 곧 에벨(Eber)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름들은 결코 사람들을 의미하지 않고, 실제적인 것들(actual things)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태고 시대에 인류는 집(houses)과 가족(families)과 민족(nations)으로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하나의 집은 남편과 아내와 그 자녀들, 그리고 그 가족에 속하여 섬기는 몇몇 사람들로 이루어졌고, 하나의 가족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지만 함께 살지는 않는 많거나 적은 수의 집들로 이루어졌으며, 하나의 민족은 많거나 적은 수의 가족들로 이루어졌습니다. That the “book of the births” is an enumeration of those who were of the most ancient church is very evident from what follows, for from this to the eleventh chapter, that is, to the time of Eber, names never signify persons, but actual things. In the most ancient time mankind were distinguished into houses, families, and nations; a house consisting of the husband and wife with their children, together with some of their family who served; a family, of a greater or lesser number of houses, that lived not far apart and yet not together; and a nation, of a larger or smaller number of families.

 

해설

AC.470은 창5의 이름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매우 분명하게 밝혀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창5에서 시작하여 창11의 에벨 시대에 이르기까지 등장하는 이름들이 ‘결코 사람들을 의미하지 않고, 실제적인 것들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실제적인 것들’은 이름을 가진 개인 자체가 아니라, 그 이름으로 표상되는 교회와 그 교회의 상태, 교리와 같은 실재적인 영적 내용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창5의 계보를 읽을 때 ‘이 사람 다음에 저 사람이 태어났다’는 문자적 흐름만 따라가서는 속뜻으로 기록된 교회사의 구조를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 설명을 ‘그런 이름을 가진 개인은 역사적으로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단순한 주장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AC.470의 초점은 이름들의 역사적 실재 여부를 판정하는 데 있지 않고, 말씀 안에서 그 이름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창5에서 창11의 에벨에 이르기까지 그 이름들이 속뜻으로는 개인이 아니라 그 이름으로 대표되는 교회적 실재를 가리킨다는 사실입니다.

 

이어지는 ‘집, 가족, 민족’에 관한 설명은 그러한 이름들이 어떻게 교회적 집단을 나타낼 수 있는지를 이해하게 합니다. 태고 시대의 사람들은 오늘날처럼 서로 분리된 개인들의 집합으로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먼저 한 부부와 자녀 및 그 집에 속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집’을 이루었고, 여러 집이 모여 ‘가족’을 이루었으며, 다시 여러 가족이 하나의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즉 개인에서 집으로, 집에서 가족으로, 가족에서 민족으로 확대되는 공동체적 구조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창5의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한 이름이 단지 한 개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공통된 신앙과 삶, 교리와 내적 상태를 공유하는 집단을 대표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셋 다음에 에노스가 태어났다’는 말씀도 속뜻으로는 단순한 생물학적 출생의 연속이 아니라, 한 교회적 상태로부터 또 다른 교회적 상태가 생겨나고 이어지는 과정으로 읽게 됩니다.

 

이 설명은 우리가 앞서 창4와 창5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제기했던 문제에도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가 이름들을 개인이 아니라 교회적 실재를 나타내는 것으로 읽고 있으며, 그 배경에 ‘집-가족-민족’이라는 복수의 공동체 구조가 있었다는 점은 앞으로 서로 다른 교회적 계열이 어떻게 형성되고 이어질 수 있었는지를 검토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합니다. 다만 AC.470만으로 창4와 창5가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병행했다고 결론 내리기보다는, 이후 설명을 더 살펴보면서 그 관계를 계속 확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결국 ‘계보의 책’은 단순히 누가 누구를 낳았는지를 기록한 명단을 넘어섭니다. 그 이름들 안에는 태고교회 이후 여러 공동체 가운데 나타난 교회의 상태와 변화가 담겨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개인 한 사람만이 아니라 집과 가족과 민족이라는 공동체 안에서도 교회를 보존하시고 이어 가셨으며, 창5의 이름들은 바로 그 교회적 역사를 드러내는 표지들이 됩니다. (AC.470 해설)

 

 

 

AC.471, 창5:1, ‘집과 가족과 민족으로 구별되어 살았던 이유’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1그들이 이처럼 따로 떨어져 살면서 오직 집과 가족과 민족으로 구별되어 있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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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69, 창5:1, '계보의 책, 영적으로 창조되어 천적으로 된 태고교회'(AC.469-474)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This is the book of the births of man. In the day that God created man, in the likeness of God made he him. (창5:1) AC.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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