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창2:2, 3)

 

AC.88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될 때 그를 ‘하나님의 일’(work of God)이라 합니다. 주님 홀로 그를 위하여 싸우셨고, 그를 창조하시고, 형성하시고,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그분의 일을 마치셨다’(God finished his work on the seventh day)고 하며, 또 두 번이나 ‘그분의 모든 일을 마치고 쉬셨다’(he rested from all his work)고 합니다. 선지서들에서도 사람을 거듭 ‘여호와의 손과 손가락으로 하신 일’(work of the hands and of the fingers of Jehovah)이라 합니다. 이사야에서 거듭난 사람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When the spiritual man becomes celestial, he is called the “work of God,” because the Lord alone has fought for him, and has created, formed, and made him; and therefore it is here said, “God finished his work on the seventh day”; and twice, that “he rested from all his work.” By the prophets man is repeatedly called the “work of the hands and of the fingers of Jehovah”; as in Isaiah, speaking of the regenerate man:

 

11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또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느냐 12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내 손으로 하늘을 펴고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였노라, 18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21너희는 알리며 진술하고 또 함께 의논하여 보라 이 일을 옛부터 듣게 한 자가 누구냐 이전부터 그것을 알게 한 자가 누구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사45:11-12, 18, 21) Thus hath said Jehovah the holy one of Israel, and his former, Seek ye signs of me, signs concerning my sons, and concerning the work of my hands command ye me. I have made the earth, and created man upon it; I, even my hands have stretched out the heavens, and all their army have I commanded. For thus hath said Jehovah that createth the heavens, God himself that formeth the earth and maketh it; he establisheth it, he created it not a void, he formed it to be inhabited; I am Jehovah and there is no God else besides me (Isa. 45:11–12, 18, 21).

 

이로부터 새 창조, 곧 거듭남은 주님 홀로의 일이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창조하다’(create), ‘형성하다’(form), ‘만들다’(make)라는 표현들은 서로 아주 구별되게 사용됩니다. 위의 말씀에서도 ‘하늘을 창조하시고, 땅을 형성하시며, 그것을 만드시는 것’(creating the heavens, forming the earth, and making it)이라고 하며, 같은 선지서의 다른 곳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Hence it is evident that the new creation, or regeneration, is the work of the Lord alone. The expressions to “create,” to “form,” and to “make,” are employed quite distinctively, both in the above passage—“creating the heavens, forming the earth, and making it”—and in other places in the same prophet, as: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사43:7) Everyone that is called by my name, I have created him for my glory, I have formed him, yea, I have made him (Isa. 43:7),

 

창세기의 앞 장과 이 장에서도 마찬가지이며, 지금 다루는 말씀의 ‘하나님이 만드심으로 창조하신 그분의 모든 일을 마치고 쉬셨다’(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라는 표현도 그러합니다. 속뜻에서는 이러한 용법이 언제나 서로 구별되는 관념을 전달합니다. 주님을 ‘창조자’(creator), ‘형성자’(former), 또는 ‘만드시는 분’(maker)이라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and also in both the preceding and this chapter of Genesis; as in the passage before us: “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 In the internal sense this usage always conveys a distinct idea; and the case is the same where the Lord is called “creator,” “former,” or “maker.”

 

해설

AC.88은 앞의 설명을 하나의 중요한 원리로 모읍니다.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될 때 그를 ‘하나님의 일’이라 하는 까닭은 주님 홀로 그를 위하여 싸우셨고, 그를 창조하시고 형성하시고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AC.87에서 ‘싸움을 수행한 것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사람을 위하여 주님 홀로’라고 했다면, AC.88은 그 원리를 거듭남 전체로 넓혀 ‘새 창조, 곧 거듭남은 주님 홀로의 일’이라고 명시합니다.

 

이 때문에 창2에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일을 마치시고 쉬셨다는 표현도 사람의 거듭남과 직접 연결됩니다.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하나님의 창조 역사이며, 그 일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일곱째 날에 하나님께서 그분의 일을 마치고 쉬셨다고 합니다. 따라서 창세기의 창조를 사람의 거듭남으로 읽는 것은 단순히 창조의 각 대상을 인간의 여러 특성에 대응시키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 전체 과정의 행위자가 주님이시라는 사실이 그 해석의 중심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사야의 긴 말씀을 인용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거기에는 땅을 만들고 사람을 창조하며 하늘을 펴시는 여호와의 일이 함께 나오고,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거듭난 사람에 관한 말씀으로 제시합니다. 따라서 ‘하늘’, ‘땅’, ‘사람’의 창조는 앞에서 살펴본 속 사람과 겉 사람의 형성 및 사람의 새 창조라는 문맥과 연결됩니다. 이 인용은 새 창조가 인간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 여호와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뒷받침합니다.

 

그러나 AC.88 후반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가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조하다’, ‘형성하다’, ‘만들다’라는 세 표현이 아주 구별되게 사용되며, 속뜻에서는 언제나 서로 구별되는 관념을 전달한다고 명시합니다. 이것은 AC.84 마지막의 ‘사람이 창조되고, 형성되고, 만들어졌다’는 표현이 단순한 문체적 반복이 아니었음을 확인해 줍니다. 이사야에서도 ‘하늘을 창조하고, 땅을 형성하고, 그것을 만든다’고 하며, 사43:7에서도 한 사람을 두고 ‘창조하고, 형성하고, 만들었다’는 세 표현을 함께 사용합니다.

 

다만 AC.88은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경계선도 남깁니다. 세 표현이 서로 다른 관념을 전달한다는 사실은 분명히 말하지만, ‘창조하다’는 정확히 무엇을, ‘형성하다’는 무엇을, ‘만들다’는 무엇을 각각 뜻하는지는 아직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세 단어에 임의의 고정된 상응을 부여하기보다, 이후 스베덴보리가 그 차이를 직접 밝혀 주는지를 따라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지금 확실하게 붙들 수 있는 것은 세 표현이 우연한 동의어의 반복이 아니라 속뜻에서 실제로 구별된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거듭남은 주님 홀로의 일’이라는 말을 인간의 자유와 응답을 없애는 말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앞에서 사람은 실제로 싸움 가운데 있고 선과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존재로 묘사되었습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사람이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를 새롭게 창조하고 악을 이기게 하며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형성하시는 능력의 근원이 주님 홀로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거듭난 뒤에도 그 완성을 자신의 공로나 자기 힘의 결과로 돌릴 수 없습니다.

 

이렇게 AC.88은 창조 이야기와 거듭남을 더욱 긴밀하게 결합합니다. 새 창조는 곧 거듭남이며, 그 거듭남은 주님 홀로의 일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설명하는 말씀의 ‘창조하다’, ‘형성하다’, ‘만들다’라는 표현 하나하나에도 서로 구별되는 속뜻의 관념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번호는 사람의 거듭남을 ‘하나님의 일’이라 함으로써 창조의 여섯 날과 일곱째 날 전체를 누가 이루셨는지를 다시 분명히 합니다. (AC.88 해설)

 

 

 

AC.89, 창2:4, ‘하늘과 땅의 내력 - 천적 인간의 형성은 속 사람에서 시작된다’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These are 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when he created them, in the day in which Jehovah God made the earth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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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7, 창2:2-3, '사람을 위하여 주님 홀로 싸우셨으므로 주님께서 쉬셨다고 한다'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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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창2:2, 3)

 

AC.86

‘여섯째 날’(sixth day)이 된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기 시작할 때, 곧 여기서 처음 다루는 상태에 들어갈 때가 ‘안식일의 저녁’(eve of the sabbath)입니다. 유대교회에서 저녁부터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킨 것은 이 상태를 표상한 것입니다. 천적 인간은 곧 설명할 ‘아침’(morning)입니다. When the spiritual man, who has become the “sixth day,” is beginning to be celestial, which state is here first treated of, it is the “eve of the sabbath,” represented in the Jewish church by the keeping holy of the sabbath from the evening. The celestial man is the “morning” to be spoken of presently.

 

이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눅23:54)

 

해설

AC.86은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넘어가는 경계를 ‘안식일의 저녁’이라 합니다. 영적 인간은 이미 ‘여섯째 날’이 되었지만, 이제 천적인 것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상태에 들어갑니다. AC.83에서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사랑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한다’고 했던 바로 그 전환이 여기서는 ‘안식일의 저녁’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사이가 단순히 끊어져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영적 인간이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지고 전혀 별개의 천적 인간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여섯째 날이 된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기 시작하는 상태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상태를 ‘안식일의 저녁’이라 하고, 유대교회에서 저녁부터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킨 것은 바로 이 상태를 표상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저녁’은 단순히 하루가 끝나는 자연적인 시간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86에서는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기 시작하는 특정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유대교회의 안식일 규례도 외적인 의식에 그치지 않고,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나아가는 거듭남의 질서를 표상하고 있었습니다. AC.85에서 유대교회의 제도 가운데 주님과 그분의 나라를 표상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고 한 설명이 바로 여기에도 적용됩니다.

 

그러나 ‘안식일의 저녁’이 마지막 상태는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곧이어 천적 인간을 ‘아침’이라 하며, 그것은 다음 번호에서 설명하겠다고 합니다. 따라서 AC.86은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 싸움과 안식 사이의 전환점을 보여 주는 짧은 연결 번호입니다. ‘저녁’은 천적 인간이 되기 시작하는 상태이고, ‘아침’은 그렇게 된 천적 인간의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AC.86은 앞에서부터 이어져 온 거듭남의 과정이 연속적인 질서를 가진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여섯째 날의 영적 인간에게서 사랑과 신앙이 하나를 이루고 사랑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하며, 이것이 ‘안식일의 저녁’입니다. 그리고 그 전환을 지나 천적 인간의 상태에 이르면 ‘아침’이 됩니다. 다음 번호는 바로 이 ‘아침’의 의미를 더 밝히게 됩니다. (AC.86 해설)

 

 

 

AC.87, 창2:2-3, '사람을 위하여 주님 홀로 싸우셨으므로 주님께서 쉬셨다고 한다'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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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5, 창2:2-3, ‘주님 자신이 안식일이시며, 천적 인간의 안식은 주님의 안식이다’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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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And on the seventh day God finished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he rested on the seventh day from all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God blessed the seventh day, and hallowed it; because that in it 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 (창2:2, 3)

 

AC.84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seventh day)입니다. 주님께서 여섯 날 동안 역사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그분의 일’(his work)이라 하며, 그때 모든 싸움이 그치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분의 모든 일을 마치고 쉬신다’(rest from all his work)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일곱째 날은 거룩하게 구별되었고, ‘안식’(rest)을 뜻하는 히브리어에서 유래하여 안식일이라 불렸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창조되고, 형성되고, 만들어졌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말씀 자체에서 매우 분명합니다. 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 day,” which, as the Lord has worked during the six days, is called “his work”; and as all combat then ceases, the Lord is said to “rest from all his work.” On this account the seventh day was sanctified, and called the sabbath, from a Hebrew word meaning “rest.” And thus was man created, formed, and made. These things are very evident from the words.

 

해설

AC.84는 앞에서 천적 인간을 ‘일곱째 날’이라 한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여섯 날 동안 이루어진 것은 근본적으로 주님의 역사이며, 그래서 그것을 ‘그분의 일’이라 합니다. 사람이 죽은 상태에서 영적 인간으로 형성되고, 마침내 천적 인간이 되는 거듭남의 과정에서 실제로 싸움을 겪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를 창조하고 형성하며 새롭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일곱째 날의 안식을 이해하려면 먼저 앞선 여섯 날의 역사가 누구의 일인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일곱째 날에 주님께서 ‘그분의 모든 일을 마치고 쉬신다’고 하는 이유는 ‘모든 싸움이 그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님의 안식을 인간처럼 수고하여 피곤해진 뒤 쉬시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안식은 거듭남의 싸움이 그친 상태와 관계됩니다. AC.81에서 영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으면서 승리하지만, 천적 인간은 같은 방식의 싸움 가운데 있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AC.84는 이제 그 차이를 창조의 여섯 날과 일곱째 날의 구조에 연결합니다. 싸움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여섯 날의 역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싸움이 그치고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 일곱째 날, 곧 안식의 상태가 됩니다.

 

이 때문에 일곱째 날이 거룩하게 구별되고 안식일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안식일이라는 명칭 자체를 ‘안식’을 뜻하는 히브리어와 연결합니다. 따라서 안식일의 속뜻은 단순히 일정한 날짜에 일을 멈추는 외적인 행위에 머물지 않고,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역사하신 거듭남의 싸움이 그치고 천적 상태에 이르는 것과 연결됩니다. 다만 AC.84는 그 안식의 상태를 아직 상세하게 펼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왜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며 왜 그것을 주님의 안식이라 하는지 그 기본 원리를 밝히고 있습니다.

 

마지막의 ‘이와 같이 사람이 창조되고, 형성되고, 만들어졌습니다’라는 말은 앞선 여섯 날과 일곱째 날 전체를 한 문장으로 되돌아보게 합니다. 사람의 거듭남은 한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 안에서 질서 있게 진행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의 종착점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 싸움을 완수하여 스스로 안식을 획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가 그 사람 안에서 이루어져 싸움이 그치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AC.84에서 일곱째 날은 단순히 창조 이후에 덧붙여진 하루가 아니라, 앞선 모든 역사가 향하고 있던 천적 인간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AC.84 해설)

 

 

 

AC.85, 창2:2-3, ‘주님 자신이 안식일이시며, 천적 인간의 안식은 주님의 안식이다’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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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3, 창2:1,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사랑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한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창2:1) AC.83‘하늘과 땅과 그것들의 모든 만상’(heavens and the earth and all the army of them)이 ‘다 이루어졌다’(finished)고 하는 것은 사람이 ‘여섯째 날’(sixth day)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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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9

천적 인간은 그러한 동산입니다. 그러나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므로, 이 사람은 이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됩니다. (15절) The celestial man is such a garden. But as the garden is the Lord’s, it is permitted this man to enjoy all these things, and yet not to possess them as his own (verse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5절)

 

해설

AC.79는 앞에서 묘사한 에덴동산을 천적 인간 자신과 연결합니다. AC.77에서는 그의 지성이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묘사되고, 그 안의 나무들은 진리와 선에 대한 퍼셉션이며, 생명나무와 지식의 나무는 사랑과 신앙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AC.78에서는 동산의 강이 지혜이고, 그 지혜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에게 속한 여러 것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이제 AC.79는 이 모든 것을 종합하여 ‘천적 인간은 그러한 동산’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에덴동산은 천적 인간과 무관한 외부의 장소로만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지성과 지혜와 그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질서를 함께 보여 주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라고 합니다. 천적 인간이 동산이라고 하면서도 그 동산의 소유권을 인간에게 돌리지 않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퍼셉션, 사랑과 신앙, 지혜, 선과 진리, 앎, 이성, 기억지식 등은 모두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것들이지만, 그 근원을 사람 자신에게 둘 수는 없습니다. AC.78에서도 이 모든 것이 지혜에서 나오며 그 지혜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나온다고 했는데, AC.79는 이제 그 질서를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라는 말로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따라서 ‘누리는 것’과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것’의 구별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사람이 실제로 누린다는 사실은 부정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지혜와 지성,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가 실제로 있으며, 그는 그것들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처럼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아무것도 없으므로 아무것도 생각하거나 행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는 선하고 참된 것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지 않는 질서와 관계됩니다.

 

AC.79는 아직 이 문제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특히 ‘자기 것으로 소유한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이며, 인간에게 자기 자신의 것으로 보이는 것과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의 관계가 어떠한지는 뒤에서 더 깊이 다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후대의 ‘proprium’ 교리를 모두 앞당겨 넣기보다, 천적 인간이 모든 것을 풍성하게 누리면서도 그것을 자기에게서 나온 자기 소유로 삼지 않는다는 기본 질서를 먼저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천적 인간이 에덴동산이라는 말과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라는 말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질서 안에서 함께 성립합니다. (AC.79 해설)

 

 

 

AC.80, 창2:1-17 개요, ‘주님으로부터의 퍼셉션과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탐구’ (16-17절)

AC.80그는 또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하여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아는 것이 허락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렇게 해서는 안 되며,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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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8, 창2:1-17 개요, ‘에덴의 강과 네 강, 지혜에서 나오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것들’ (10-14절)

AC.78동산의 강은 지혜를 뜻합니다. 거기에서 네 강이 흘러나왔는데, 첫째는 선과 진리이고, 둘째는 선과 진리, 곧 사랑과 신앙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앎[cognitio]입니다. 이것들은 속 사람에게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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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6

그의 생명은 그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됩니다. (7절) His life is described by the breathing into him of the breath of lives (verse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7절)

 

해설

AC.76은 창2:7의 속뜻을 개요로 제시하면서 천적 인간의 ‘생명’에 초점을 맞춥니다. AC.75에서는 그의 기억지식과 이성이 안개로 적셔지는 지면에서 난 관목과 초목으로 묘사된다고 했고, 이제 AC.76에서는 그의 생명이 그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창2:5-7의 여러 표현은 서로 떨어진 장면들이 아니라 천적 인간에게 속한 것들을 차례로 보여 주는 하나의 흐름 안에 놓여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직 설명하지 않고, 그것이 ‘그의 생명’을 묘사한다고만 말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이 개요에서 ‘생명의 숨’을 곧바로 어떤 특정한 인간의 능력이나 기능 하나와 동일시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이 표현을 단순히 최초 인간의 육체가 처음 호흡하기 시작했다는 장면으로만 한정해서 읽는다면, 스베덴보리가 지금 설명하고 있는 거듭남의 연속적인 문맥을 놓치게 됩니다. 여기서 ‘그’는 AC.73부터 계속 다루고 있는 천적 인간입니다.

 

특히 ‘그에게 … 불어넣으심’이라는 표현은 그의 생명의 근원이 그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AC.76 한 문장만으로 그 생명이 정확히 무엇이며, 어떻게 주님으로부터 사람에게 오는지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이 개요가 직접 말하는 것은 천적 인간의 생명이 창2:7의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된다는 사실입니다. 그 표현의 구체적인 속뜻은 뒤따르는 상세 해설에서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따라서 AC.76은 매우 짧지만 AC.75와 함께 중요한 구별을 보여 줍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기억지식과 이성이 있고, 또한 그의 생명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전자는 관목과 초목 및 그것들을 적시는 안개의 모습으로, 후자는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합니다. 이 각각이 천적 인간 안에서 어떤 관계를 이루는지는 아직 개요에서 앞당겨 정하지 않고, 이어지는 설명의 순서를 따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AC.76 해설)

 

 

 

AC.77, 창2:1-17 개요, ‘에덴동산의 지성, 퍼셉션, 사랑과 신앙’ (8-9절)

AC.77그 다음 그의 지성은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묘사됩니다. 그 동산에서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들은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은 선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생명나무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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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5, 창2:1-17 개요, ‘안개로 적셔지는 지면의 관목과 초목, 기억지식과 이성’ (5-6절)

AC.75그의 기억지식과 이성[scientificum et rationale ejus]은 안개로 적셔지는 지면에서 난 관목과 초목으로 묘사됩니다. (5-6절) His knowledge and his rationality [scientificum et rationale ejus] are described by the shrub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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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4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십니다. (2-3절) 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 day, on which the Lord rests (verses 2–3).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2, 3절)

 

해설

AC.74는 창2:2-3의 속뜻을 한 문장으로 먼저 제시합니다. AC.73에서 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고, 그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이 된다고 하였는데, 이제 그 천적 인간을 창조의 ‘일곱째 날’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창1의 여섯 날과 창2의 일곱째 날은 단순히 자연계의 창조가 진행된 뒤 하루가 더해지는 순서로만 읽히지 않습니다. 앞의 여섯 날이 인간의 거듭남과 관계되어 있었다면, 그 뒤에 오는 일곱째 날 역시 그 거듭남의 연속선상에서 천적 인간의 상태와 관계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일곱째 날이 천적 인간을 의미한다’고 풀어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앞으로 안식일의 속뜻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창2:2-3에서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그가 하시던 일을 마치시고 쉬셨다는 말씀을 인간의 거듭남과 연결하여 읽을 때, 그 일곱째 날은 바로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이 된 사람의 상태와 관계됩니다. 다만 AC.74는 아직 왜 천적 인간을 일곱째 날이라고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그 대응 관계를 개요로 먼저 제시할 뿐입니다.

 

두 번째 명제인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다가 피곤해져 쉬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면 주님께서 ‘쉬신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AC.74가 아직 설명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뒤에서 일곱째 날과 안식, 거듭남의 싸움, 그리고 주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행하시는 일의 관계를 차례로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개요에서 그 설명을 모두 앞당겨 넣기보다,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는 두 명제를 그대로 기억해 두는 것이 좋습니다.

 

AC.74는 이렇게 AC.73에서 제시된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라는 변화를 창2의 일곱째 날과 연결합니다. 이제 독자는 두 가지 질문을 가지고 다음 설명을 따라가게 됩니다. 왜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인지, 그리고 왜 그 상태에서 주님께서 쉬신다고 하는지입니다. 이 질문들은 이 번호에서 미리 완성해서 답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뒤에서 직접 그 이유를 밝히는 순서를 따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AC.74 해설)

 

 

 

AC.75, 창2:1-17 개요, ‘안개로 적셔지는 지면의 관목과 초목, 기억지식과 이성’ (5-6절)

AC.75그의 기억지식과 이성[scientificum et rationale ejus]은 안개로 적셔지는 지면에서 난 관목과 초목으로 묘사됩니다. (5-6절) His knowledge and his rationality [scientificum et rationale ejus] are described by the shrub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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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3, 창2:1-17 개요, ‘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고,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이 된다’ (1

창2:1-17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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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1-17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And on the seventh day God finished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he rested on the seventh day from all his work which he had made.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And God blessed the seventh day, and hallowed it, because that in it 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 4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These are 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when he created them, in the day in which Jehovah God made the earth and the heavens.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And there was no shrub of the field as yet in the earth, and there was no herb of the field as yet growing, because Jehovah God had not caused it to rain upon the earth. And there was no man to till the ground.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And he made a mist to ascend from the earth, and watered all the faces of the ground. 7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And Jehovah God formed man, dust from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and man became a living soul.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And Jehovah God planted a garden eastward in Eden, and there he put the man whom he had formed. 9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And out of the ground made Jehovah God to grow every tree desirable to behold, and good for food; the tree of lives also, in the midst of the garden; and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10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And a river went out of Eden to water the garden, and from thence it was parted, and was into four heads.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The name of the first is Pishon; that is it which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Havilah, where there is gold.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And the gold of that land is good; there is bdellium and the onyx stone. 13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And the name of the second river is Gihon; the same is it that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Cush. 14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And the name of the third river is Hiddekel; that is it which goeth eastward toward Assyria; and the fourth river is Euphrates. 15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And Jehovah God took the man, and put him in the garden of Eden, to till it and take care of it.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And Jehovah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Of every tree of the garden eating thou mayest eat.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 for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dying thou shalt die. (창2:1-17)

 

AC.73

 

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된 다음,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이 됩니다. 지금 여기에서는 바로 이것을 다룹니다. (1절) When from being dead a man has become spiritual, then from spiritual he becomes celestial, as is now treated of (verse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1절)

 

해설

AC.73은 창2:1-17 전체의 첫 번째 개요이며, 동시에 창1과 창2를 이어 주는 매우 중요한 한 문장입니다. 창1에서는 영적으로 죽어 있던 사람이 거듭남의 여섯 날을 거치면서 영적 인간이 되는 과정이 다루어졌습니다. 그런데 거듭남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제 ‘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된 다음,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이 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창2는 창1과 별개의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창1에서 이루어진 거듭남이 더 깊은 상태로 나아가는 것을 다룹니다.

 

여기서 ‘죽어 있던’이라는 표현은 특히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바로 앞 AC.67-72에서 죽음 이후의 삶과 사람이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지는 일이 언급되었기 때문에, 문맥을 놓치면 육체의 죽음에서 영적 존재가 되고 다시 천적 존재가 된다는 식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73은 창2 본문의 개요로 돌아온 첫 번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거듭나기 전 인간의 영적 상태와 관계됩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사후세계에서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으로 승급한다는 설명이 아니라, 거듭남의 질서 안에서 인간에게 일어나는 변화에 관한 말입니다.

 

또한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이 된다’는 말을 단순히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올라가는 하나의 등급표처럼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지금 이 한 문장에서는 두 상태의 정확한 차이가 아직 설명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지는 번호들에서 일곱째 날, 주님의 안식, 퍼셉션, 사랑과 신앙, 속 사람과 겉 사람 등의 내용을 통하여 그 차이를 차례로 열어 갑니다. 그러므로 AC.73에서는 우선 창1에서 다루어진 영적 인간이 창2에서 천적 인간으로 나아간다는 큰 방향을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원문의 ‘then from spiritual he becomes celestial’은 천적 인간이 영적 인간과 아무 관계 없이 처음부터 별도로 만들어지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도 보여 줍니다. 여기서 다루는 것은 한 사람의 거듭남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고, 그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됩니다. 이것이 앞으로 창2:1-17의 여러 세부 사항을 읽을 때 놓치지 말아야 할 가장 큰 틀이며, AC.73은 그 전체 과정을 단 한 문장으로 먼저 제시하고 있습니다. (AC.73 해설)

 

 

 

AC.74,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2-3절)

AC.74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십니다. (2-3절) 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 day, on which the Lord rests (verses 2–3).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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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2, 창2 앞,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져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가는가’

AC.72그러므로 이 장의 끝에서,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져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가는지를 말하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습니다. At the end of this chapter, accordingly, I am allowed to tell how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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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4 심화

2. ‘속 사람’(internal man)은 영혼이나 마음과 같은 말인가?

AC.64는 창세기 1장의 속뜻이 인간의 거듭남을 다루며, 그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처음 AC를 읽는 독자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질문이 생깁니다. ‘속 사람’(internal man)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혼’과 같은 것일까요? 아니면 ‘마음’이라는 뜻일까요?

 

먼저 ‘속 사람’을 단순히 몸 안에 들어 있는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사람으로 상상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속 사람’과 ‘겉 사람’을 말할 때 이것은 육체의 안쪽과 바깥쪽이라는 공간적 구별이 아닙니다. 인간의 생명과 의식에 서로 구별되는 내적이고 외적인 차원이 있음을 설명하는 용어입니다.

 

그렇다고 ‘속 사람 = 영혼’이라고 바로 등식화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영혼’이라는 말은 문맥에 따라 인간의 생명 자체나 사후에도 사는 인간을 가리키는 등 여러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반면 ‘속 사람’은 ‘겉 사람’과 짝을 이루어 인간 안의 내적 차원을 설명하는 특정한 용어입니다. 따라서 두 말이 관련될 수는 있어도 언제나 서로 바꾸어 쓸 수 있는 동의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속 사람 = 마음’이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하면 생각, 감정, 의지 등을 매우 넓게 포함하여 말합니다. 그런데 AC에서는 겉 사람에게도 생각과 욕망과 판단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생각이나 감정이라고 해서 모두 자동으로 ‘속 사람’에 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눈에 안 보이는 정신 활동 = 속 사람’이라는 식으로 이해하면 너무 넓어집니다.

 

AC.64에서 특별히 주의할 것은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는 표현입니다. 이것을 보고 ‘그렇다면 주님의 생명은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들어가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별개의 질문입니다. AC 다른 곳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과 선과 진리가 사람 안으로 유입되는 질서를 설명할 때와, 여기서 사람이 거듭남 가운데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고 말할 때는 관점이 다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속 사람이 먼저 열리고 그다음 겉 사람이 바뀐다’ 또는 반대로 ‘겉 사람이 먼저 거듭난 다음 속 사람이 바뀐다’는 한 줄짜리 공식으로 AC.64를 정리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 이 문장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하는 것은 창1에서 다룬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그 진행과 주님의 유입 질서가 어떻게 함께 성립하는지는 관련 글들을 더 읽으면서 구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현 단계에서 속 사람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가장 안전하게는 ‘겉 사람과 구별되는 인간의 내적 차원’이라고 잡아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겉 사람은 자연계와 감각을 통하여 관계하는 인간의 외적 차원이고, 속 사람은 그보다 내적인 인간의 차원입니다. 그러나 이 정의도 앞으로 AC가 속 사람과 겉 사람을 더 자세히 설명하면서 점차 풍성해져야 합니다.

 

이것은 처음에는 조금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한 문장으로 딱 정의해 주면 편한데 왜 이렇게 여지를 남기는가?’ 싶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의 중요한 용어들은 뒤로 갈수록 여러 문맥에서 점점 더 구체적으로 설명됩니다. 처음 등장한 자리에서 우리가 너무 완성된 정의를 만들어 버리면 오히려 나중의 본문을 그 정의에 억지로 맞추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속 사람은 언제나 선하고 주님과 직접 연결되어 있으며 겉 사람은 세상적이고 악하다’고 처음부터 단정해 버리면 이후의 설명을 읽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내적’이라는 말 자체가 자동으로 ‘선하다’를 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인간의 내적이고 외적인 모든 것을 어떻게 질서 안으로 이끄시는가입니다.

 

AC.64가 이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도 바로 거듭남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은 단순히 사람의 외적인 생활 습관 몇 가지가 개선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자체가 주님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속 사람은 영혼인가, 마음인가?’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겠습니다. 속 사람은 영혼이나 마음과 관련될 수 있지만 그 어느 한 단어와 단순히 동일시하기보다, AC에서 겉 사람과 구별하여 인간의 내적 차원을 가리키는 고유한 용어로 익혀 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그 정확한 구조와 기능은 앞으로 관련 AC들이 설명할 때 하나씩 더해 가는 편이 스베덴보리의 글을 가장 안전하게 따라가는 방법입니다.

 

 

 

AC.64 심화 3, 스베덴보리는 왜 ‘성경’보다 ‘말씀’(the Word)이라고 하는가?

AC.64 심화3. 스베덴보리는 왜 ‘성경’보다 ‘말씀’(the Word)이라고 하는가?AC를 읽다 보면 스베덴보리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성경’이라는 말보다 ‘the Word’, 곧 ‘말씀’이라는 표현을 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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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4 심화 1, ‘아르카나’(arcana)란 무엇인가?

AC.64 심화 1. ‘아르카나’(arcana)란 무엇인가? AC.64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 안에 너무나 많은 ‘아르카나’(arcana)가 있어서 수많은 책으로도 그것들을 모두 펼쳐 내기에 충분하지 않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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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4 심화

1. ‘아르카나’(arcana)란 무엇인가?

AC.64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 안에 너무나 많은 ‘아르카나’(arcana)가 있어서 수많은 책으로도 그것들을 모두 펼쳐 내기에 충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아르카나’는 ‘속뜻’과 같은 말일까요? 또 AC에서 자주 만나는 ‘퍼셉션’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먼저 단어 자체를 보면 ‘arcana’는 라틴어 ‘arcanum’의 복수형으로, ‘감추어진 것들’, ‘비밀들’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그래서 Arcana Coelestia라는 제목도 문자 그대로 생각하면 ‘천적인 비밀들’, ‘천국의 비밀들’ 정도의 뜻이 됩니다. 다만 여기서 ‘비밀’이라고 할 때는 일부 사람만 알고 남에게 숨겨 두는 비밀 정보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AC.64의 문맥에서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깊은 내용들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아르카나’와 ‘속뜻’은 정확히 같은 말일까요? 완전히 같은 용어라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AC.64는 먼저 ‘이것이 말씀의 속뜻이며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이라고 말한 다음, ‘그 아르카나는 너무 많아서 수많은 책으로도 충분하지 않다’고 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이 문맥에서는 ‘속뜻’이 말씀의 내적 의미 자체를 가리킨다면, ‘아르카나’는 그 속뜻 안에서 밝혀지는 수많은 감추어진 내용들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너무 기계적으로 ‘속뜻 = 그릇, 아르카나 = 내용’이라는 공식으로 고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언제나 그런 철학적 구분표를 제시하면서 두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맥에 따라 서로 매우 가까운 의미 영역에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르카나’가 말씀 밖에 따로 감추어져 있는 비밀 지식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AC.64에서 말하는 아르카나는 바로 말씀의 속뜻과 관련하여 밝혀지는 감추어진 것들입니다.

 

창세기 1장이 좋은 예입니다. 문자에서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여섯 날을 읽습니다. 그런데 AC.6부터 AC.63까지 스베덴보리는 그 말씀 안에서 인간의 거듭남에 관한 수많은 내용을 밝혔습니다. 빛과 어둠, 물과 궁창, 식물과 씨, 해와 달과 별, 물고기와 새와 짐승, 하나님의 형상과 ‘심히 좋았더라’ 등이 거듭남과 어떻게 관계되는지를 설명했습니다. AC.64는 지금까지 제시한 이 모든 것조차 말씀 안의 아르카나 가운데 ‘극히 일부’라고 말합니다.

 

이 점에서 아르카나는 단순한 ‘상징의 뜻풀이’보다 넓습니다. ‘빛은 이것을 뜻한다’, ‘물은 저것을 뜻한다’는 대응 하나를 알아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거듭남의 질서와 상태, 주님의 역사를 밝혀 줍니다. 따라서 아르카나를 재미있는 성경 암호나 숨은 정보처럼 접근하면 AC가 말하려는 핵심을 놓치기 쉽습니다.

 

그러면 ‘퍼셉션’과는 어떻게 다를까요? 퍼셉션은 AC에서 별도로 설명되는 인간의 영적 상태와 인식에 관한 용어입니다. 따라서 아르카나와 퍼셉션을 ‘하나는 내용이고 하나는 그것을 알아보는 능력’이라고 간단히 짝지어 정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서로 관련될 수는 있지만 동일한 범주의 두 용어가 아닙니다. ‘아르카나’가 무엇인가를 묻는 이번 심화에서는 퍼셉션의 전체 교리까지 가져오지 않고, 그것이 아르카나의 다른 이름은 아니라는 정도로 구별하면 충분합니다.

 

무엇보다 ‘아르카나’라는 말을 들을 때 AC 자체가 성경보다 더 높은 비밀 지식을 담은 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밝힌다고 주장하는 아르카나는 AC 안에서 독립적으로 만들어진 비밀이 아니라 말씀 안에 있는 아르카나입니다. AC.64의 순서도 먼저 ‘말씀의 속뜻’을 말하고 그 안의 헤아릴 수 없는 아르카나를 말합니다.

 

따라서 Arcana Coelestia라는 책 제목도 결국 독자의 눈을 이 책 자체에 묶어 두기보다 말씀으로 돌려보냅니다. ‘천국의 비밀’은 스베덴보리가 새로 창조한 비밀이 아니라, 그의 주장에 따르면 주님께서 주신 말씀 안에 이미 있으나 문자적 의미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영적이고 천적인 내용들입니다.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AC.64에서 ‘아르카나’는 말씀의 문자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그 속뜻 안에 담겨 있는 수많은 감추어진 영적이고 천적인 내용들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을 다 설명한 이 자리에서도 자신이 밝힌 것은 그 가운데 ‘극히 일부’라고 말합니다.

 

 

 

AC.64 심화 2, ‘속 사람’(internal man)은 영혼이나 마음과 같은 말인가?

AC.64 심화2. ‘속 사람’(internal man)은 영혼이나 마음과 같은 말인가? AC.64는 창세기 1장의 속뜻이 인간의 거듭남을 다루며, 그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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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4, 창1, 말씀의 속뜻 :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과 천사들의 지각 (AC.64-66)

AC.64이것이 바로 말씀의 속뜻(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이며,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입니다. 이는 문자적 의미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 안에 담긴 아르카나는 너무나 많아서, 그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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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4

이것이 바로 말씀의 속뜻(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이며,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입니다. 이는 문자적 의미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 안에 담긴 아르카나는 너무나 많아서, 그것들을 모두 풀어내려면 수많은 책으로도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다만 극히 일부만 제시되었는데, 그것도 이 말씀이 거듭남을 다루고 있으며, 그 거듭남이 겉 사람(the external man)에서 속 사람(the internal man)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것들뿐입니다. 천사들은 말씀을 이렇게 지각합니다. 그들은 문자 속에 있는 것들, 심지어 단어 하나의 가까운 의미조차도 전혀 알지 못합니다. 하물며 말씀의 역사서와 예언서에 매우 자주 등장하는 나라, 성읍, 강, 사람의 이름들은 더더욱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오직 그 말들과 이름들이 의미하는 것들만을 관념으로 가집니다. 그래서 낙원에 있는 아담을 통해 그들은 태고교회를 지각하지만, 그 교회 자체가 아니라 그 교회의 주님에 대한 신앙을 지각합니다. 노아를 통해서는 태고교회의 후손들에게 남아 아브람 시대까지 계속된 교회를 지각합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는 그 개인을 전혀 지각하지 않고, 그가 표상한 구원하는 신앙을 지각합니다. 이와 같이 천사들은 말과 이름에서 완전히 떠나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지각합니다. This then is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its veriest life, which does not at all appear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But so many are its arcana that volumes would not suffice for the unfolding of them. A very few only are here set forth, and those such as may confirm the fact that regeneration is here treated of, and that this proceeds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 It is thus that the angels perceive the Word. They know nothing at all of what is in the letter, not even the proximate meaning of a single word; still less do they know the names of the countries, cities, rivers, and persons, that occur so frequently in the historical and prophetical parts of the Word. They have an idea only of the things signified by the words and the names. Thus by Adam in paradise they perceive the most ancient church, yet not that church, but the faith in the Lord of that church. By Noah they perceive the church that remained with the descendants of the most ancient church, and that continued to the time of Abram. By Abraham they by no means perceive that individual, but a saving faith, which he represented; and so on. Thus they perceiv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entirely apart from the words and names.

 

해설

AC.64는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에 대한 해설을 마친 자리에서, 스베덴보리가 지금까지 자신이 무엇을 설명해 왔는지를 한 걸음 물러서서 밝히는 글입니다. 그는 이것을 ‘말씀의 속뜻’이라고 부르며, 그것이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창세기 1장을 읽으면 문자적으로는 천지와 빛, 궁창과 물, 식물과 해와 달과 별, 물고기와 새와 짐승, 그리고 사람의 창조가 나옵니다. 그런데 AC.6부터 AC.63까지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 안에 인간의 거듭남이라는 속뜻이 들어 있다고 설명해 왔습니다. AC.64는 이제 바로 그것이 말씀의 속뜻이며, 그 속뜻은 문자적 의미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문자적 의미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는 말을 ‘문자적 의미는 중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속뜻은 말씀을 버리고 그 밖에서 만들어 낸 별도의 영적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그 말씀 안에 있는 뜻입니다. 창1의 빛, 물, 식물, 해와 달과 별, 생물과 사람이라는 말씀의 표현들이 있기 때문에 그 안에 담긴 속뜻도 밝혀집니다. 따라서 AC를 읽으면서 문자와 속뜻을 서로 경쟁시키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문자는 낮고 속뜻은 높으니 이제 문자는 필요 없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말씀의 문자 안에 우리가 처음에는 알지 못했던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이 AC.64의 출발점입니다. 특히 우리의 독법에서는 언제나 말씀 자체가 먼저이고 AC는 그 말씀 안에 담긴 속뜻을 밝혀 주는 해설이라는 순서를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안의 아르카나가 너무 많아 수많은 책으로도 충분히 펼쳐 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창1을 설명하면서 자신이 제시한 것은 그 가운데 ‘극히 일부’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 말은 지금까지의 설명이 창세기 1장의 모든 속뜻을 다 밝혔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을 알려 줍니다. 그가 특별히 골라 제시한 것은 ‘이 말씀이 거듭남을 다루고 있으며, 그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아르카나들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을 ‘거듭남에 관한 여섯 단계’라고 이해했다고 해서 그 말씀의 내적 내용 전체를 다 파악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AC.64 자신이 지금까지 제시한 것은 극히 일부라고 선을 긋고 있습니다.

 

여기서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는 표현도 그대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에서 우리는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에 이른다는 질서도 여러 차례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AC.64의 이 문장은 지금 그것을 설명하는 문장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창1의 여섯 날에 나타난 거듭남의 진행이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 곧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이 두 표현을 성급히 하나가 틀리고 하나가 맞는 것처럼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에게서 생명이 유입되는 질서와, 사람이 거듭남을 경험하며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 인도되는 진행을 구별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문제는 이후 AC가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더 자세히 설명할 때 점차 분명해질 것입니다.

 

AC.64의 두 번째 큰 주제는 천사들이 말씀을 어떻게 지각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이 말씀의 문자에 있는 것들을 알지 못하며, 심지어 단어 하나의 가까운 의미조차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역사서와 예언서에 등장하는 나라와 성읍, 강과 사람의 이름도 알지 못하고, 오직 그 말들과 이름들이 의미하는 것들을 지각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천사들이 성경의 역사에 무지하다는 일반적인 지식론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말씀을 읽을 때 천사들에게 그 말씀이 어떻게 지각되는지를 설명하는 문맥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그 예가 아담과 노아와 아브라함입니다. 천사들은 낙원의 아담을 통해 태고교회를 지각하지만 거기에서도 태고교회라는 역사적 교회 자체에 머무르지 않고 그 교회의 ‘주님에 대한 신앙’을 지각합니다. 노아를 통해서는 태고교회의 후손들에게 남아 아브람 시대까지 계속된 교회를 지각하고, 아브라함을 통해서는 아브라함이라는 개인을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표상한 ‘구원하는 신앙’을 지각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통해 말씀의 고유명사들이 천사에게 단순한 역사적 이름으로 머무르지 않고 그 이름들이 의미하고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으로 지각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아담도 노아도 아브라함도 실제 인물이 아니었다’는 결론을 끌어내서는 안 됩니다. AC.64의 관심은 그 인물들의 역사성 여부를 논증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천사들이 말씀을 지각할 때 ‘아브라함’이라는 개인에게 머무르지 않고 그가 표상하는 것을 지각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속뜻을 인정하는 것과 문자에 기록된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을 무조건 부정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처음 AC를 읽는 독자에게는 이 구별이 특히 중요합니다.

 

또 ‘천사들은 말과 이름에서 완전히 떠나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한다’는 말을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사람 이름과 사건을 무시해야 한다는 지침으로 받아들여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자연계에서 문자로 주어진 말씀을 읽습니다. 천사의 지각 방식과 인간의 말씀 읽기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AC.64가 보여 주는 놀라운 점은 우리가 자연계에서 같은 말씀을 읽는 동안 그 말씀에는 천사들이 지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뜻도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인간과 천국을 잇는 방식으로 주어져 있다는 더 큰 주제의 입구가 여기서 열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AC.64는 ‘성경 이야기를 이제 역사로 읽지 말고 상징으로만 읽으라’는 선언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훨씬 깊습니다. 말씀에는 인간이 문자만 보아서는 알 수 없는 속뜻이 있으며, 그 속뜻이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입니다. 천사들은 바로 그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합니다. 인간에게는 아담, 노아, 아브라함이라는 이름과 이야기가 보이지만, 천사에게는 그 이름들이 의미하는 교회와 신앙에 관한 것이 지각됩니다. 자연계의 문자와 천국의 지각이 하나의 말씀 안에서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속뜻’은 인간이 본문을 읽다가 자유롭게 떠올리는 영적 감상과도 구별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을 읽으며 ‘나는 아브라함처럼 용감하게 살아야겠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고, 그것이 유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AC가 말하는 속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AC.64에서 아브라함은 그가 표상하는 ‘구원하는 신앙’과 연결됩니다. 속뜻은 독자의 주관적인 연상이나 감동이 아니라 말씀의 말과 이름들이 실제로 의미하고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에 관한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아르카나’라는 말도 중요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 안에 우리가 문자만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수많은 아르카나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재미있는 비밀 지식을 많이 안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창1에서 밝혀진 거듭남의 질서처럼 말씀 안에 감추어져 있는 깊은 내용들을 가리킵니다. ‘아르카나’와 ‘속뜻’이 정확히 같은 말인지, 서로 어떻게 구별되는지는 현재 연결된 심화에서 따로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 하나 처음 읽는 독자에게 자연스럽게 생길 질문은 ‘그렇다면 AC가 말하는 ‘말씀’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경 66권 전체와 정확히 같은 범위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중요한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the Word’라는 말을 상당히 엄밀한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문제를 잘못 설명하면 ‘어떤 성경책에는 주님의 생명이 있고 다른 성경책에는 없다’는 식으로 지나치게 단순화할 위험이 있으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충분히 구별하여 살펴보겠습니다.

 

AC.64를 읽고 나면 지금까지의 창1 해설도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첫째 날의 빛부터 여섯째 날의 사람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따라온 것은 단순히 스베덴보리가 창세기에 임의로 붙인 영적 비유가 아니라, 그가 ‘말씀의 속뜻’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를 설명하면서 천사들의 말씀 지각을 제시합니다. 천사들은 인간이 보는 문자와 이름에 머무르지 않고 그 말과 이름이 의미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설명의 출발점과 돌아갈 곳은 여전히 말씀입니다. AC를 많이 읽을수록 성경의 문자가 시시해지고 AC의 설명만 중요해지는 방향으로 간다면 오히려 순서가 뒤집힌 것입니다. AC.64가 말하는 아르카나는 말씀 밖에 있는 비밀이 아니라 말씀 안에 있는 아르카나이고, 속뜻 역시 말씀의 속뜻입니다. 따라서 AC의 역할은 말씀을 대신하는 데 있지 않고, 우리가 읽고 있던 바로 그 말씀 안에 얼마나 깊은 생명이 들어 있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AC.64의 첫 문장을 그대로 붙드는 것이 가장 좋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의 속뜻이며,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입니다.’ 창세기 1장의 말씀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말씀 안에서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 신앙과 사랑에 관한 영적이고 천적인 세계가 열립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지금까지 자신이 보여 준 것조차 그 헤아릴 수 없는 아르카나 가운데 ‘극히 일부’라고 말합니다. AC.64는 그래서 창1 해설의 결론인 동시에, 앞으로 우리가 말씀과 AC를 어떤 관계로 읽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중요한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심화

1. ‘아르카나’(arcana)란 무엇인가?

 

AC.64 심화 1, ‘아르카나’(arcana)란 무엇인가?

AC.64 심화 1. ‘아르카나’(arcana)란 무엇인가? AC.64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 안에 너무나 많은 ‘아르카나’(arcana)가 있어서 수많은 책으로도 그것들을 모두 펼쳐 내기에 충분하지 않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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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속 사람’(internal man)은 영혼이나 마음과 같은 말인가?

 

AC.64 심화 2, ‘속 사람’(internal man)은 영혼이나 마음과 같은 말인가?

AC.64 심화2. ‘속 사람’(internal man)은 영혼이나 마음과 같은 말인가? AC.64는 창세기 1장의 속뜻이 인간의 거듭남을 다루며, 그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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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스베덴보리는 왜 ‘성경’보다 ‘말씀’(the Word)이라고 하는가?

 

AC.64 심화 3, 스베덴보리는 왜 ‘성경’보다 ‘말씀’(the Word)이라고 하는가?

AC.64 심화3. 스베덴보리는 왜 ‘성경’보다 ‘말씀’(the Word)이라고 하는가?AC를 읽다 보면 스베덴보리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성경’이라는 말보다 ‘the Word’, 곧 ‘말씀’이라는 표현을 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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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5제가 말씀을 읽고 있을 때, 어떤 이들이 하늘의 첫 입구 뜰까지 들려 올라갔고, 그곳에서 저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는 말씀 속의 어떤 단어나 글자도 전혀 이해할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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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3, 창1:31, 주님이 싸우시는 거듭남의 전투 : 신앙과 사랑의 결합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3그동안 주님은 계속해서 인간을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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