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2 심화

1. 스베덴보리는 인용 구절들의 이런 속뜻을 어떻게 아는가?

 

AC.42를 처음 읽으면 놀라운 장면을 계속 만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겔29:3의 바로와 큰 악어, 겔32:2의 바다와 강을 휘젓는 악어, 사27:1의 리워야단과 바다의 용, 렘51:34의 삼키는 큰 뱀을 차례로 인용하면서 그것들이 기억 지식과 그 일반 원리, 그리고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신앙의 신비에 들어가려는 상태와 관계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먼저 분명히 할 것은 스베덴보리 자신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의 속뜻을 단순한 개인적 성경 연구의 결과라고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 저작 전체의 전제 자체가 말씀에는 문자적 의미 안에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내적 의미가 있으며, 그것이 주님의 자비로 밝혀졌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면 적어도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말씀의 내적 의미에 관한 계시를 받았다고 이해했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그러면 주님이나 천사가 옆에서 한 문장씩 불러 주었고 스베덴보리는 받아 적었는가?’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의 저술에는 영들과 천사들과의 대화, 영계에서 보고 들은 것, 어떤 것의 의미를 지각하거나 알도록 허락받았다는 진술 등이 매우 많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것들을 모두 하나의 방식으로 묶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천사가 구술한 책이다’라고 말하면 그의 저술 방식 자체를 지나치게 단순화하게 됩니다.

 

반대로 ‘성경을 펼치면 속뜻이 화면처럼 눈앞에 자동으로 나타났다’고 말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영계에서 실제로 보고 들었다고 기록한 경험과, 말씀의 내적 의미를 해설하는 작업은 서로 깊이 관련되어 있지만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가 어떤 한 절의 속뜻을 알게 되는 모든 순간에 정확히 어떤 인식 과정이 일어났는지를 우리가 재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실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으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일관된 상응의 연결’입니다. 예를 들어 AC.42에서 큰 물고기가 기억 지식의 일반적인 것을 뜻한다고 한 뒤, 스베덴보리는 그 뜻을 한 구절에만 기대지 않습니다. 여러 선지서의 서로 다른 구절을 가져와 같은 상징이 문맥에 따라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앞으로 AC를 계속 읽으면 물, 땅, 씨, 나무, 빛, 새, 짐승, 애굽, 앗수르, 바벨론 같은 표현들이 한 번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에서 서로 연결되어 해석되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속뜻을 ‘단어마다 비밀 암호 하나가 붙어 있는 것’처럼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물고기=기억 지식’, ‘새=이성적인 것’이라는 대응표를 외운 뒤 모든 성경 구절에 기계적으로 대입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같은 표현도 문맥과 그것이 놓인 관계, 긍정적 또는 부정적 의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AC.42에서 ‘큰 바다짐승’이 좋은 창조의 일부로 등장하면서도, 선지서에서는 인간 자신의 지혜와 결합된 부정적인 상태를 표현하는 데 사용되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내적 의미를 인간이 임의로 만들어 내는 비유적 해석으로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의 설명에서 상응은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주님께서 세우신 질서에 근거합니다. 따라서 그에게 속뜻은 ‘이 구절을 오늘 내 삶에 이렇게 적용해 볼 수 있겠다’는 설교적 적용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우리는 그의 해석에 동의할 것인지 검토할 수 있지만, 적어도 그가 무엇을 주장하는지는 정확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그는 자신이 성경에 재미있는 상징적 의미를 덧붙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스베덴보리의 속뜻 설명을 읽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가 계시를 받았다고 했으니 아무것도 묻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한 구절만 떼어 놓고 ‘문자만 보면 이런 뜻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며 즉시 버릴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AC를 계속 읽으면서 그가 같은 상징을 말씀 전체에서 어떻게 사용하는지, 서로 다른 구절의 해석이 일관되는지, 앞뒤의 교리적 맥락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AC.42의 겔32:2가 좋은 사례입니다. 그 한 절만 처음 보면 ‘기억 지식을 수단으로 삼아 자기 자신으로부터 신앙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이라는 해석은 매우 갑작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AC.40-42에서 물고기와 큰 물고기, 기억 지식과 그 일반적인 것, 인간의 지혜와 지성이라는 연결을 차례로 읽고 나면 적어도 스베덴보리가 어떤 구조 안에서 그 구절을 읽고 있는지는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AC 전체를 더 읽을수록 그 연결이 다른 곳에서도 반복되는지 검토할 수 있습니다.

 

결국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어떻게 알았는가?’라는 질문에는 두 층의 답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의 주장에 따르면 말씀의 내적 의미는 인간의 독창적인 추론으로 발명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밝혀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계시가 매 구절마다 정확히 어떤 심리적·지각적 과정으로 전달되었는지를 우리가 하나의 공식으로 재구성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그의 저작에서 실제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영계와의 열린 교통을 주장했고, 말씀의 내적 의미가 주님으로부터 밝혀졌다고 증언했으며, 그것을 방대한 성경 구절과 상응의 연결 속에서 체계적으로 설명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어떻게 이런 뜻이 나오지?’라는 어리둥절함을 그대로 가지고 읽어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그 질문을 가지고 계속 읽는 것이 좋습니다. 한두 구절에서 모든 것을 납득하려 하기보다 AC 전체를 따라가면서 같은 상응이 어떻게 되풀이되고, 문맥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며, 전체 말씀의 내적 의미 안에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확인하는 것 자체가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검토하는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AC.42, 창1:21, 큰 바다짐승들 : 기억 지식을 묶는 일반 원리

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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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AC.464

‘에녹’(Enoch)이라 하는 교회는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그 교회가 퍼셉션한 것들로부터 교리를 형성한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 교리는 당시에는 쓸모가 없었지만 후대의 쓰임을 위해 보존되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에녹이 더 이상 있지 아니하였으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기 때문이라’(Enoch was no more, because God took him)고 한 것입니다. (22-24절) The church called “Enoch” is described as framing doctrine from what was revealed to and perceived by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doctrine, although of no use at that time, was preserved for the use of posterity.This is signified by its being said that “Enoch was no more, because God took him.” (verses 22–24)

 

22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22-24절)

 

해설

AC.464는 앞의 AC.463에서 일곱 번째 교회로 제시된 ‘에녹’이 다른 교회들과 구별되는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 줍니다. 에녹이라 하는 교회는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그 교회가 퍼셉션한 것들을 모아 ‘교리’로 형성하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에녹이 새로운 진리를 스스로 만들어 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태고교회가 주님으로부터 계시받고 퍼셉션을 통해 알았던 것들을 일정한 교리 형태로 정리한 것입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상태와 이후 교회의 상태가 달라지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태고교회는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교리로 배워서 아는 교회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 안에서 그것을 퍼셉션하던 천적 교회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퍼셉션이 살아 있던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이 이미 내적으로 알고 있는 것을 따로 교리 형태로 정리하여 배우는 일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AC.464가 에녹이 형성한 교리가 ‘당시에는 쓸모가 없었다’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리는 ‘후대의 쓰임을 위해’ 보존되었습니다. 이 짧은 표현 안에는 교회의 상태가 앞으로 달라질 것이라는 사실이 들어 있습니다. 태고교회와 같은 퍼셉션이 계속 유지된다면 별도의 교리가 필요하지 않았겠지만, 그것이 사라져 갈 때에는 이전에 퍼셉션으로 알았던 것들을 다른 방식으로 보존하고 전달할 필요가 생깁니다. 에녹이라 하는 교회가 한 일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살아 있는 퍼셉션으로 받아들였던 것들을 교리 형태로 남김으로써 후대가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교리’는 퍼셉션을 대신하여 에녹이 만들어 낸 인간적인 사상이 아닙니다. 그 근원은 여전히 주님으로부터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퍼셉션된 것들입니다. 다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교회의 상태가 달라짐에 따라, 이전에는 내적으로 직접 퍼셉션하던 것이 이제는 가르치고 배우며 보존할 수 있는 형태로 옮겨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에녹은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이후 교회가 사용할 교리 사이에 놓인 중요한 전환점을 보여 줍니다.

 

이와 연결되는 말씀이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입니다. 장 개요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에녹이라는 교회가 형성한 교리가 ‘후대의 쓰임을 위해 보존되었다’는 뜻으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는 말씀은 장 개요의 속뜻으로는 에녹이라는 교회의 역할과 그 교리가 보존된 일을 가리킵니다. 이 표현의 보다 구체적인 의미는 뒤의 본문 해설에서 다시 자세히 다루어집니다.

 

AC.464에서 특히 눈여겨볼 것은 주님께서 한 교회의 상태가 변해 가는 가운데서도 다음 시대에 필요한 것을 미리 보존하신다는 점입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계속 같은 방식으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들에게 계시되고 퍼셉션된 것이 함께 사라지도록 두지 않으셨습니다. 에녹이라 하는 교회를 통하여 그것을 교리 형태로 보존하여 후대의 쓰임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에녹의 이야기는 단순히 한 교회의 상태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상태가 달라질 때에도 진리가 다음 세대에 전달될 길을 마련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함께 보여 줍니다. (AC.464 해설)

 

심화

‘에녹이 보존한 교리는 후대의 고대 말씀과 모세의 창세기 기록에 어떻게 이어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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