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5:5, AC.492-495 심화

1. ‘유전적 악은 어떻게 대대로 누적되며, 우리는 조상의 죄까지 책임져야 하는가?’

 

AC.494는 태고교회가 쇠퇴한 주된 원인을 설명하면서 ‘유전적 악’(hereditary evil)이라는 매우 중요한 문제를 다룹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은 부모와 조상으로부터 악으로 기울어지는 성향을 물려받으며, 자신이 실제로 행하고 반복한 악을 거기에 더합니다. 반복된 악은 점차 그 사람의 본성처럼 되고, 이렇게 형성된 성향이 다시 자녀와 후손에게 전달됩니다. 그래서 세대가 계속되면서 유전적 악이 축적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내가 조상의 악을 물려받았다면 조상의 죄에 대한 책임도 내가 져야 하는가?’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분명히 ‘아니다’입니다. 유전되는 것과 개인에게 책임이 돌아가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사람은 유전적 악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그 악 자체 때문에 책망받지는 않습니다. AC.4563은 이 점을 아주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유전적 악은 사람이 성장하여 자신의 이해와 의지로 그것을 실제로 행하기 전까지는 숨어 있으며, ‘주님의 자비로 아무도 유전적인 것 때문에 책망받지 않고 실제적인 것 때문에 책망받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악한 성향과 내가 자유롭게 받아들여 실제로 행한 악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쉽게 분노하는 성향, 지나친 자기중심성, 물질에 대한 강한 집착과 같은 기울어짐을 물려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성향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사람의 개인적인 죄는 아닙니다.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의도적으로 즐기고 행할 때 비로소 ‘실제적인 악’(actual evil)이 됩니다. 그러므로 유전적 악은 우리에게 주어진 출발 조건에 가깝고, 실제적인 악은 그 조건 안에서 우리가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행함으로써 자신의 것으로 만든 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아담 한 사람의 범죄에서 모든 인류의 유전적 악이 시작되었다는 견해를 부정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AC.313은 오늘날 존재하는 모든 유전적 악이 최초의 한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고 명시합니다. 각 사람이 실제 죄를 반복함으로써 자신의 본성에 악을 더하고, 그것이 자녀에게 전달되며, 다시 그 자녀가 자신의 실제 악을 더함으로써 후손에게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인류의 유전적 악은 한 조상의 한 번의 범죄가 모든 사람에게 법적인 죄책으로 전가되는 구조라기보다, 수많은 세대의 실제 삶에서 형성된 악의 성향이 계속 축적되어 내려오는 구조입니다.

 

그러므로 ‘조상의 죄가 내게 유전된다’는 말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조상이 범한 구체적인 죄의 행위와 그 죄책이 그대로 내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달되는 것은 그 악에서 형성된 기울어짐입니다. 나는 그것을 선택하여 태어난 것도 아니고 그것이 내 안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정죄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안에서 일어날 때 그것을 받아들이고 실제로 행할 것인지, 아니면 악으로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물리칠 것인지 하는 문제는 나의 자유와 책임의 영역으로 들어옵니다. 이 때문에 유전적 악의 교리는 인간의 책임을 없애지도 않고, 반대로 조상의 책임을 후손에게 떠넘기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AC.494가 말하는 ‘유전적 악의 증가’는 왜 교회의 쇠퇴와 연결될까요? 한 세대가 악을 반복하여 그것을 본성처럼 만들면 다음 세대는 이전보다 더 복잡하고 강해진 악의 기울어짐을 출발점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다음 세대가 그것을 다시 실제 악으로 만들고 새로운 악을 더한다면 그 흐름은 더욱 강해집니다. 태고교회에서도 이러한 일이 세대를 거쳐 일어났고, 그 결과 처음의 온전한 퍼셉션이 점차 변질되어 마침내 소멸하게 되었다는 것이 AC.494의 설명입니다. 교회의 쇠퇴는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 안에서 선택한 악이 세대를 지나며 누적된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이 설명의 마지막은 결코 숙명론이 아닙니다. AC.494는 유전적 악이 ‘주님에 의해 거듭나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감소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악의 성향이 가문과 세대를 따라 내려왔다 하더라도 그것이 한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주님은 각 사람에게 선과 진리를 공급하시고, 사람이 자신의 악을 보고 인정하며 그것에 맞서도록 이끄십니다. 거듭남은 바로 이 오래된 악의 흐름이 한 사람 안에서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지배하지 못하도록 주님께서 새 질서를 세워 가시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부모의 책임도 새롭게 보입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완전한 상태만을 물려줄 수 없습니다. 자신도 여러 세대로부터 받은 유전적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부모에게 절망이나 과도한 죄책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에서 발견되는 악을 그대로 방치하고 반복하여 굳히느냐, 아니면 주님 앞에서 그것을 인정하고 거듭남의 길을 걷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모든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주님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시도록 허용함으로써 나를 통하여 계속되던 악의 흐름이 이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이어지지 않게 할 수는 있습니다.

 

따라서 유전적 악의 교리는 ‘나는 원래 이런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다’는 운명론도 아니고, ‘조상이 죄를 지었으니 나도 그 죄에 책임이 있다’는 집단적 죄책의 교리도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현실을 매우 깊이 인정하면서도 자유와 거듭남의 가능성을 동시에 붙듭니다. 우리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많은 성향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주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를 만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성향을 자신의 삶으로 확정하지 않고 주님께 돌이킬 때, 세대를 지나며 축적된 악의 힘은 거듭남 가운데 감소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AC.494가 말하는 태고교회의 역사는 오늘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한 세대의 삶은 그 세대에서 완전히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반복하여 자신의 본성으로 만드는 것은 다음 세대에도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의 역사가 세대를 넘어간다고 해서 주님의 역사가 거기에서 멈추는 것은 아닙니다. 유전적 악보다 더 근원적인 것은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주님의 사랑이며, 거듭남은 바로 그 사랑이 한 사람의 자유 안에서 악의 오래된 흐름을 꺾고 새로운 생명의 질서를 세워 가시는 역사입니다. (AC.492-495 심화 1)

 

 

 

창5:5, AC.492-495 심화 2,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오늘날의 양심은 어떻게 다른가?’

창5:5, AC.492-495 심화2.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오늘날의 양심은 어떻게 다른가?’ AC.495는 태고교회가 ‘퍼셉션을 가진 교회’였으며 ‘오늘날에는 그러한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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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5, ‘태고교회의 쇠퇴를 이해하는 열쇠, 퍼셉션’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5태고교회가 어떻게 쇠퇴하였는지는 퍼셉션(perception)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태고교회는 퍼셉션을 가진 교회였으며, 오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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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2

이 세 교회, 곧 ‘사람’(man), ‘셋’(Seth), ‘에노스’(Enosh)는 태고교회를 이루지만, 퍼셉션의 완전성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교회의 퍼셉션 능력은 뒤를 이은 교회들에서 점차 감소하였고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되었는데, 이는 열매나 그 씨앗에 관하여, 그리고 뇌에 관하여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습니다. 완전성은 명료하게 퍼셉션하는 능력에 있습니다. 그런데 퍼셉션이 덜 명료하고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될 때 그 능력은 감소합니다. 그러면 더 분명했던 퍼셉션을 대신하여 더 흐릿한 퍼셉션이 뒤따르게 되고, 이와 같이 퍼셉션은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These three churches, “man,” “Seth,” and “Enosh,” constitute the most ancient church, but still with a difference of perfection as to perceptions: the perceptive faculty of the first church gradually diminished in the succeeding churches, and became more general, as observed concerning fruit or its seed, and concerning the brain. Perfection consists in the faculty of perceiving distinctly, which faculty is diminished when the perception is less distinct and more general; an obscurer perception then succeeds in the place of that which was clearer, and thus it begins to vanish away.

 

해설

AC.502는 지금까지 말해 온 태고교회의 ‘쇠퇴’가 구체적으로 무엇의 쇠퇴였는지를 아주 분명하게 밝혀 줍니다. ‘사람’, ‘셋’, ‘에노스’라는 세 교회는 모두 태고교회에 속합니다. 따라서 셋이나 에노스가 나타났다고 해서 태고교회가 끝나고 전혀 다른 종류의 교회가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세 교회 모두 같은 태고교회의 큰 계열 안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구별하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는데, 바로 ‘퍼셉션의 완전성’이었습니다.

 

여기서 AC.500의 ‘덜 천적’이라는 표현이 더욱 구체적인 의미를 갖게 됩니다. 셋이 최초의 태고교회보다 덜 천적이고, 에노스가 셋보다 더욱 덜 천적이었다는 것은 단순히 그들이 도덕적으로 더 나빠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천적 인간의 특징인 퍼셉션 능력이 점차 약해졌다는 뜻입니다. 최초의 ‘사람’ 교회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매우 명료하고 구체적으로 퍼셉션할 수 있었지만, 셋과 에노스로 이어지면서 그 퍼셉션이 점점 덜 명료해지고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교회의 쇠퇴는 무엇보다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분별하는 내적 능력의 쇠퇴’입니다.

 

특히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는 표현을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일반적’이라는 것은 퍼셉션의 대상이 넓어졌다는 긍정적인 뜻이 아니라, 세밀하고 분명하게 구별하던 것이 점차 뭉뚱그려지고 희미해졌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처음에는 여러 선과 진리의 차이와 그 각각의 성질을 분명하게 알아차렸다면, 후대로 갈수록 그것을 그렇게 세밀하게 구별하지 못하고 보다 막연하고 포괄적으로만 퍼셉션하게 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완전성은 명료하게 퍼셉션하는 능력에 있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입니다.

 

이 설명은 앞의 AC.501에서 사용한 열매와 씨앗, 그리고 뇌의 비유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가장 내적인 중심에는 본질적인 생명이 가장 충만하고, 거기서 바깥으로 나아갈수록 그것이 점차 일반적이고 외적인 형태를 취합니다. 마찬가지로 최초의 태고교회에는 퍼셉션이 가장 내적이고 명료한 형태로 존재했지만, 그 뒤를 이은 교회들에서는 그것이 점차 흐릿해졌습니다. 따라서 ‘사람 → 셋 → 에노스’라는 계승은 단순히 세 교회의 시간적 순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퍼셉션이 ‘명료한 상태에서 덜 명료한 상태로’, 그리고 ‘구체적인 상태에서 더욱 일반적인 상태로’ 변해 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퍼셉션의 쇠퇴를 ‘있음’과 ‘없음’의 두 단계로만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처음에는 분명한 퍼셉션이 있었고 어느 순간 갑자기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먼저 덜 명료해지고, 더욱 일반적이 되고, 더 흐릿해지면서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내적 생명이 쇠퇴하는 방식이 대개 점진적이라는 AC.497의 설명과도 일치합니다. 겉으로는 여전히 같은 태고교회이고, 퍼셉션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질과 명료함이 이미 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은 교회의 쇠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교회의 본질적인 것이 사라질 때 반드시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살아 있는 진리를 아주 분명하게 분별하던 것이 조금씩 흐릿해지고, 구체적인 선과 진리의 차이를 알아보던 것이 점차 막연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가 계속되면 외적인 형태는 상당 기간 남아 있어도 그 안의 내적 생명은 점점 희미해집니다. AC.501의 표현대로 하면 아직 열매의 모양은 남아 있지만 점차 그 속보다 껍질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오늘날 우리가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되찾아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AC.495에서 이미 스베덴보리는 오늘날에는 태고교회와 같은 퍼셉션의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이후의 영적 교회에는 말씀에서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삶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형성되는 양심이라는 다른 길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태고교회의 내적 감각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주신 말씀의 진리를 더욱 분명히 배우고, 그것을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받아들여 양심이 더욱 바르게 형성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흐릿해지면서 사라져 간 역사는 결국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를 점점 더 분명하게 보고 있는가, 아니면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실제로는 점점 더 막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AC.502 해설)

 

 

 

창5:9, AC.503, ‘선을 행하는 기쁨과 쓰임 안에서 살아나는 퍼셉션’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3 태고교회의 퍼셉션 능력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퍼셉션하는 데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써 생기는 행복과 기쁨에도 있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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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9, AC.501, ‘열매의 속과 씨앗에서 껍질로, 교회의 점진적인 쇠퇴’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1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뒤를 이어 나타났고,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서 태어났다고 하는 교회들의 경우는 열매나 그 씨앗의 경우와 같았습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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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1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뒤를 이어 나타났고,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서 태어났다고 하는 교회들의 경우는 열매나 그 씨앗의 경우와 같았습니다. 그 한가운데, 곧 가장 내적인 곳에는 말하자면 열매의 열매 또는 씨앗의 씨앗이 있으며, 거기서부터 이어지는 부분들이 마치 일정한 질서를 따라 생명을 얻습니다. 가장 내적인 곳에서 둘레를 향하여 멀어질수록 그 안에는 열매나 씨앗의 본질이 점점 적어져, 마침내 열매나 씨앗이 끝나는 얇은 껍질이나 덮개만 남게 됩니다. 또는 뇌의 경우와도 같습니다. 뇌의 가장 내적인 부분에는 피질이라 하는 섬세한 유기적 형태들이 있으며, 거기서부터 그리고 그것들을 통하여 영혼의 작용들이 진행됩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일정한 질서를 따라 먼저 더 순수한 덮개들이 차례로 이어지고, 그다음에는 더 조밀한 덮개들이 이어지며, 마침내 뇌막이라 하는 일반적인 덮개들이 이어집니다. 이것들은 다시 더욱 일반적인 덮개들로 끝나며, 마지막에는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일반적인 덮개인 두개골에 이릅니다. As regards the churches that in course of time succeeded one another, and of which it is said that one was born from another, the case with them was the same as it is with fruits, or with their seeds. In the midst of these, that is, in their inmosts, there are as it were fruits of the fruits, or seeds of the seeds, from which live as it were in regular order the successive parts. For the more remote these are from the inmost toward the circumference, the less of the essence of the fruit or of the seed is there in them, until finally they are but the cuticles or coverings in which the fruits or seeds terminate. Or as in the case of the brain, in the inmost parts of which are subtle organic forms called the cortical substances, from which and by which the operations of the soul proceed; and from which in regular order the purer coverings follow in succession, then the denser ones, and finally the general coverings called meninges, which are terminated in coverings still more general, and at last in the most general of all, which is the skull.

 

해설

AC.501은 앞의 AC.497과 AC.500에서 말한 ‘교회의 본질적인 것들이 점차 감소한다’는 원리를 두 가지 놀라운 비유, 곧 ‘열매와 씨앗’ 그리고 ‘뇌와 그 덮개들’을 통해 설명합니다. 핵심은 단순히 시간이 흐르면 교회가 낡아진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최초의 교회에는 가장 내적인 생명과 본질이 풍성하게 있었지만, 거기서 후대의 교회들이 차례로 이어져 나오면서 그 본질이 점차 외적인 것으로 옮겨 가고 희미해진다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에서 셋으로, 셋에서 에노스로, 다시 게난으로 이어지는 창5의 계보가 바로 이러한 과정을 나타냅니다.

 

첫 번째 비유는 열매와 씨앗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가장 안쪽에 ‘열매의 열매’ 또는 ‘씨앗의 씨앗’과 같은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생명을 품고 다음 부분들을 발생시키는 중심을 가리킵니다. 그 중심에서 바깥쪽으로 갈수록 열매나 씨앗의 본질은 점점 적어지고, 마지막에는 껍질과 덮개에 이릅니다. 이 비유를 교회에 적용하면, 태고교회의 최초 상태에는 교회를 참으로 교회이게 하는 내적 생명, 곧 주님을 향한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퍼셉션이 중심에 있었지만, 후대의 교회로 갈수록 그 생명이 점차 약해지고 외적인 것들이 상대적으로 두드러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가장 내적인 것’과 ‘가장 외적인 것’을 단순히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나누어서는 안 됩니다. 열매의 껍질도 열매에 필요하고, 씨앗의 덮개도 씨앗을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문제는 껍질이 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껍질만 남고 그 안의 본질이 사라지는 데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리, 예배 형식, 제도, 언어와 전통 같은 외적인 것들은 그 자체로 불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적인 생명을 담고 보호하는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라는 내적 생명이 사라지고 외적인 형식만 남는다면, 그것은 마치 열매의 속과 씨앗은 없어지고 껍질만 남은 것과 같습니다.

 

두 번째 비유인 뇌의 구조는 이 원리를 더욱 정교하게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장 내적인 곳에 있는 섬세한 유기적 형태인 피질에서 영혼의 작용이 시작되고, 거기서부터 점차 더 순수한 덮개, 더 조밀한 덮개, 뇌막,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개골에 이른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정한 질서’입니다. 안에서 밖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무질서한 붕괴가 아니라 하나의 질서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후대 교회들이 앞선 교회와 아무 관계 없이 우연히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앞선 것으로부터 차례로 이어져 나온다는 AC.500의 설명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따라서 창5의 ‘낳음’은 단순한 시간적 순서보다 훨씬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태고교회에서 셋, 에노스, 게난으로 이어질 때 각각의 교회는 앞 교회에서 무엇인가를 이어받지만, 최초의 중심으로부터 멀어질수록 그 교회의 본질적인 천적 생명은 점차 감소합니다. 이것이 AC.500에서 에노스를 셋보다 ‘더욱 덜 천적’이라고 한 이유입니다. 창5의 계보는 결국 최초의 태고교회가 지녔던 내적인 퍼셉션이 후대로 갈수록 어떻게 변화하고 약해지는지를 하나의 연속적인 구조로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를 단순한 비관적인 쇠퇴론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가장 내적인 것에서 시작된 생명이 여러 단계의 덮개를 거쳐 바깥까지 전달되듯이, 주님께서는 인간의 상태가 이전처럼 내적인 것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어도 그 상태에 맞는 방식으로 선과 진리가 이어지게 하십니다. 최초의 상태가 사라졌다고 해서 주님의 역사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형태 속에서 교회가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창5에서 한 교회가 다른 교회를 ‘낳는다’는 것은 쇠퇴인 동시에 보존이며, 변화인 동시에 연속입니다.

 

AC.501은 그래서 오늘날의 교회를 돌아보게 하는 매우 실제적인 기준도 제공합니다. 교회의 건강함은 겉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갖추고 있는가보다 그 모든 것의 ‘가장 안쪽에 무엇이 살아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말씀을 읽고, 교리를 알고, 예배를 드리고, 신앙의 형식을 갖추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중심에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의 선을 구하는 생명이 없다면 우리는 어느새 열매 자체보다 그 껍질을 붙들고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외적인 형식이 소박하더라도 그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의 생명이 살아 있다면 거기에는 교회의 본질이 있습니다. 결국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껍질의 화려함이 아니라 그 안에 살아 있는 ‘씨앗의 씨앗’, 곧 모든 진리와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 사랑의 생명입니다. (AC.501 해설)

 

 

 

창5:9, AC.502, ‘점차 흐려지고 일반적이 되어 간 태고교회의 퍼셉션’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2이 세 교회, 곧 ‘사람’(man), ‘셋’(Seth), ‘에노스’(Enosh)는 태고교회를 이루지만, 퍼셉션의 완전성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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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9, AC.500, ‘셋보다 더욱 덜 천적이었던 에노스와 그 뒤를 이은 게난’(AC.500-503)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And Enosh lived ninety years, and begat Kenan. (창5:9) AC.500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에노스’(Enosh)는 세 번째 교회를 의미하는데, 이 교회는 ‘셋’(Seth) 교회보다 더욱 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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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And Enosh lived ninety years, and begat Kenan. (창5:9)

 

AC.500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에노스’(Enosh)는 세 번째 교회를 의미하는데, 이 교회는 ‘셋’(Seth) 교회보다 더욱 덜 천적이었지만, 여전히 가장 오래된 교회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게난’(Kenan)은 앞선 교회들의 뒤를 이은 네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By “Enosh,” as before said, is signified a third church, still less celestial than the church “Seth,” yet one of the most ancient churches; by “Kenan” is signified a fourth church, which succeeded the former ones.

 

해설

AC.500은 창5의 계보를 따라가면서 태고교회 후대 교회들의 상태가 어떻게 점차 달라지고 있는지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 자체가 첫 번째라면 셋은 두 번째 교회였고, 이제 에노스는 세 번째, 게난은 네 번째 교회입니다. 따라서 창5의 이름들은 단순한 족보상의 인물 이름이 아니라 태고교회로부터 차례로 이어진 교회들을 나타내며, 스베덴보리는 그 순서까지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창5가 교회의 계승과 상태 변화를 기록한 장이라는 사실이 여기서 한층 선명해집니다.

 

특히 주목할 표현은 에노스가 셋보다 ‘더욱 덜 천적’이었다는 것입니다. AC.497에서 셋은 그 부모인 태고교회보다 덜 천적이었고, 그것은 교회가 시간이 흐르면서 본질적인 것들에 있어 점차 감소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에노스에서는 그 감소가 한 단계 더 진행됩니다. 태고교회에서 셋으로, 셋에서 에노스로 내려오면서 천적 교회의 고유한 생명, 특히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는 상태가 점차 약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갑작스러운 단절이나 배교라기보다 동일한 큰 계열 안에서 일어나는 점진적인 상태 변화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에노스 역시 ‘여전히 가장 오래된 교회들 가운데 하나’였다고 덧붙입니다.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더욱 덜 천적’이라는 말만 보면 에노스가 이미 태고교회의 성격을 잃어버린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에노스 역시 태고교회 계열에 속한 교회였고, 그 천적 성격도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다만 최초의 태고교회가 지녔던 퍼셉션의 충만함과 비교하면 그 상태가 낮아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쇠퇴는 ‘천적 교회에서 전혀 다른 교회로 갑자기 바뀜’이 아니라, 천적 상태 자체가 점차 약화되는 과정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어지는 ‘게난’(Kenan)은 ‘앞선 교회들의 뒤를 이은 네 번째 교회’라고만 설명됩니다. 이 글에서는 게난의 구체적인 상태를 아직 자세히 밝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계승의 연속성입니다. 태고교회에서 셋으로, 셋에서 에노스로, 다시 에노스에서 게난으로 교회가 이어집니다. 따라서 ‘낳았다’는 족보의 반복은 한 교회에서 다음 교회로 이어지는 영적인 계승을 표현하며, 각각의 교회는 앞선 교회와 연속성을 가지면서도 서로 다른 상태를 지닙니다.

 

여기서 창5와 창4의 차이도 조금씩 더 또렷하게 보입니다. 창5에서는 스베덴보리 자신이 셋을 ‘두 번째 교회’, 에노스를 ‘세 번째 교회’, 게난을 ‘네 번째 교회’라고 순서대로 명시하면서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지는 한 계열의 교회들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창4에서 가인으로부터 여러 이단과 분파가 전개되는 모습과는 서술의 성격이 다릅니다. 다만 이 차이가 창4와 창5의 두 계열이 역사적으로 정확히 어떤 방식과 시기로 서로 병존했는지까지 곧바로 확정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 이 글에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창5가 태고교회 자체로부터 이어진 후대 교회들의 연속적인 계승을 보여 준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계승 가운데 반복해서 드러나는 것은 인간의 쇠퇴만이 아니라 주님의 보존입니다. 최초의 상태가 그대로 유지되지 못하고 천적인 것이 점차 감소하지만, 주님께서는 곧바로 교회의 계보를 끊지 않으십니다. 셋이 있고, 에노스가 있으며, 다시 게난이 이어집니다. 완전했던 처음 상태가 약해지는 가운데서도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의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며 다음 교회가 이어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5의 계보는 한편으로는 퍼셉션을 지닌 태고교회의 점진적인 쇠퇴를 보여 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쇠퇴 가운데서도 교회를 계속 이어 가시는 주님의 오래 참으심과 섭리를 보여 줍니다. (AC.500 해설)

 

 

 

창5:9, AC.501, ‘열매의 속과 씨앗에서 껍질로, 교회의 점진적인 쇠퇴’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1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뒤를 이어 나타났고,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서 태어났다고 하는 교회들의 경우는 열매나 그 씨앗의 경우와 같았습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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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7-8, AC.499, ‘날들과 연수, 아들들과 딸들, 그리고 죽음의 의미’

7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Seth lived after he begat Enosh eight hundred and seven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Seth were n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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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창5:6)

 

AC.497

‘셋’(Seth)이 그 부모인 태고교회보다는 덜 천적인 두 번째 교회이면서도, 여전히 가장 오래된 교회들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은 위에서 셋에 관하여 말한 것(3절)으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That “Seth” is a second church less celestial than the most ancient church, its parent, yet one of the most ancient churches, may appear from what was said above concerning Seth (verse 3).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앞에서 말한 것처럼 교회의 경우는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지나면서 앞서 언급한 원인으로 인해 본질적인 것들에 있어 점차 감소해 간다는 것입니다. The case with churches, as we have said, is that by degrees, and in process of time, they decrease as to essentials, owing to the cause above mentioned.

 

해설

AC.497은 바로 앞의 AC.496에서 ‘셋은 태고교회보다 덜 천적이었다’고 한 이유를 한 걸음 더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창5:3에서 다룬 셋에 관한 설명을 다시 가리킵니다. 특히 AC.481-485에서 셋은 태고교회와 같은 천적 교회의 계열에 속하면서도, 그 퍼셉션의 상태가 태고교회 자체와는 달랐음을 살펴보았습니다. 따라서 ‘덜 천적’이라는 말은 셋 교회가 전혀 다른 종류의 교회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같은 천적 질서 안에서도 그 본질적인 생명과 퍼셉션의 충만함이 이전보다 감소했다는 뜻입니다.

 

이 글에서 핵심이 되는 표현은 ‘본질적인 것들에 있어 점차 감소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쇠퇴는 먼저 외형이 사라지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교리도 남아 있을 수 있고, 예배도 계속될 수 있으며, 앞선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의 언어와 형식도 상당 기간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있어야 할 본질, 곧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 그리고 그 사랑과 선에서 나오는 진리의 생명이 약해지면 교회는 겉모습을 유지하면서도 내적으로는 점차 이전 상태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경우에는 특히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직접 퍼셉션하던 천적 생명이 그 본질적인 것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앞서 언급한 원인’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앞 절 하나만을 가리키기보다, 앞에서 설명해 온 교회 쇠퇴의 원리를 배경으로 합니다. 특히 AC.494에서는 유전적 악이 세대를 거치며 누적되고, 사람들이 실제적인 악(actual evil)을 자기 삶으로 만들어 갈 때 그것이 다시 후대의 유전적 성향에 더해진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세대를 거치면서 쇠퇴한다는 것은 단순히 시간이 오래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시간 자체가 교회를 타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악을 실제 삶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이 반복되고 굳어지면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능력이 점차 약해지는 것입니다.

 

이 점은 ‘부모인 태고교회’라는 표현도 더욱 의미 있게 만듭니다. 자녀가 부모에게서 생명을 이어받으면서도 부모와 완전히 동일하지 않은 것처럼, 셋 교회 역시 태고교회로부터 그 천적 성격을 이어받았지만 동일한 정도의 퍼셉션을 지니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는 앞으로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으로 이어지면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따라서 창5의 계보는 이름만 바뀌는 기록이 아니라, 같은 큰 계열 안에서 교회의 내적 상태가 세대를 따라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보여 주는 기록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점은 ‘후대일수록 무조건 더 악하다’는 식의 단순한 역사 법칙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글이 말하는 것은 태고교회에서 시작하여 지금 다루고 있는 일련의 교회들이 그 최초의 천적 상태로부터 점차 멀어져 간 특정한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 쇠퇴 속에서도 주님은 교회를 단번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앞선 교회로부터 다음 교회가 이어지도록 하십니다. 셋으로부터 에노스가 나오고, 다시 그 뒤를 이어 여러 교회가 계속되는 창5의 구조 자체가 바로 그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AC.497은 교회의 생명을 판단하는 기준을 외적인 규모나 제도의 지속에 두지 않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교회의 진정한 생명은 ‘본질적인 것들’이 살아 있느냐에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가 살아 있고, 신앙의 진리가 그 사랑과 결합되어 삶으로 나타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외적인 것은 오랫동안 남아 있으면서도 본질적인 것은 감소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은 쇠퇴하는 시대 속에서도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고 그것으로 다음 상태를 준비하십니다. 창5의 계보는 바로 그러한 쇠퇴와 보존, 그리고 계승의 역사를 함께 보여 주고 있습니다. (AC.497 해설)

 

 

 

창5:6, AC.498, ‘셋으로부터 이어져 나온 또 하나의 교회 에노스’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창5:6) AC.498그가 ‘에노스를 낳았다’(begat Enosh)는 것은 그들로부터 ‘에노스’(Enosh)라 하는 또 하나의 교회가 이어져 나왔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 장에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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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6, AC.496, ‘셋으로부터 이어진 또 하나의 교회 에노스’(AC.496-498)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And Seth 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 and begat Enosh. (창5:6) AC.496‘셋’(Seth)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두 번째 교회로서, 그 부모인 태고교회보다는 덜 천적이었지만,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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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5

태고교회가 어떻게 쇠퇴하였는지는 퍼셉션(perception)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태고교회는 퍼셉션을 가진 교회였으며, 오늘날에는 그러한 교회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퍼셉션은 그 구성원들이 천사들처럼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주님으로부터 퍼셉션하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과 진리는 시민 사회에서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가 하는 것이라기보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주님을 믿는 신앙의 선과 진리입니다. 삶으로 확증되는 신앙고백으로부터 퍼셉션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존재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How the most ancient church decreased cannot appear unless it be known what perception is, for it was a perceptive church, such as at this day does not exist. The perception of a church consists in this, that its members perceive from the Lord what is good and true, like the angels; not so much what the good and truth of civic society is, but the good and truth of love to the Lord and of faith in him. From a confession of faith that is confirmed by the life it can be seen what perception is, and whether it has any existence.

 

해설

AC.495는 창5:5의 마지막 해설이면서, 앞으로 태고교회의 쇠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앞의 AC.492와 AC.494는 ‘죽었다’는 것이 그 교회를 특징짓던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도대체 퍼셉션이 무엇이기에 그것이 사라진 것을 교회의 죽음이라고 하는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AC.495는 바로 그 질문에 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태고교회를 ‘퍼셉션을 가진 교회’라고 규정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단지 지식이 많거나 판단력이 뛰어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퍼셉션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주님으로부터 퍼셉션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외부에서 어떤 교리를 듣고 논증을 거쳐 그것이 옳다고 결론 내리는 것보다 훨씬 내적인 방식으로, 주님으로부터 유입되는 선과 진리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들의 퍼셉션을 ‘천사들처럼’(like the angels)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퍼셉션을 막연한 직감이나 느낌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왠지 이것이 맞는 것 같다’고 느끼는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은 아닙니다. 자신의 욕망이나 선입견도 매우 강한 확신으로 느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AC.495가 퍼셉션의 내용을 ‘주님을 향한 사랑과 주님을 믿는 신앙의 선과 진리’라고 한 것은 바로 이 점에서 중요합니다. 퍼셉션의 근원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며, 그 내용 역시 자기 욕망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믿는 삶에 관한 선과 진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또 여기서 시민 사회의 선과 진리를 구별합니다. 이것은 사회생활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가 말하려는 것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주로 사회적 규범이나 세상사의 옳고 그름을 알아내는 특별한 능력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것이었으며,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 속한 선과 진리를 내적으로 지각하는 능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퍼셉션은 일종의 초자연적인 정보 획득 능력이나 미래를 알아맞히는 능력과도 다릅니다.

 

특히 마지막 문장이 중요합니다. ‘삶으로 확증되는 신앙고백’(a confession of faith that is confirmed by the life)으로부터 퍼셉션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존재하는지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을 단순한 내적 느낌에 맡겨 두지 않습니다. 입으로 고백하는 신앙과 실제 삶이 서로 일치할 때, 그 삶을 통하여 그 사람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어떠함이 드러납니다. 참된 퍼셉션은 말로만 ‘나는 이것이 진리라고 느낀다’고 주장하는 데 있지 않고, 그 진리가 사랑과 선의 삶으로 나타나는 데서 확인됩니다.

 

이 점은 태고교회가 왜 쇠퇴했는지를 이해하는 열쇠가 됩니다. 그들의 교회적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는 데 있었으므로, 사랑의 상태가 변질될수록 퍼셉션 역시 온전하게 유지될 수 없었습니다. 앞의 AC.494에서 설명한 것처럼 악이 반복되고 세대를 거쳐 유전적 악이 증가하면서 태고교회의 처음 상태가 점차 손상되었습니다. 사랑이 변하면 그 사랑에서 나오는 지각도 변합니다. 마침내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던 상태가 사라졌을 때, 말씀은 그것을 그 교회가 ‘죽었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창5에서 각 교회가 퍼셉션의 차이에 따라 구별된다는 AC.483의 설명과도 연결됩니다. 셋, 에노스, 게난 등은 단순히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각각 다른 상태의 교회들을 나타내며, 그 차이의 중심에는 퍼셉션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창5의 계보를 따라간다는 것은 단순히 세대가 바뀌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에 있던 퍼셉션이 여러 교회를 거치면서 어떻게 변화하고 마침내 소멸해 가는지를 따라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독자에게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오늘날에는 그러한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읽다가 어떤 진리를 깊이 깨닫거나, 기도 중에 무엇이 옳은지를 강하게 느끼거나, 양심을 통해 어떤 행동을 해야 한다고 깨닫는다고 해서 그것을 곧바로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후대의 영적 인간에게 주님은 주로 말씀의 진리와 신앙, 그리고 그 진리로 형성된 양심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그와 구별되는 천적 교회의 고유한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퍼셉션이라는 개념이 오늘날 우리와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신앙의 본래 목적이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진리는 단지 머릿속에 저장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삶 안에서 선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AC.495가 퍼셉션을 설명하면서 마지막에 ‘삶으로 확증되는 신앙고백’을 제시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태고교회와 같은 퍼셉션을 가지고 있지는 않더라도,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가르치시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실제 삶에서 살아갈수록 신앙은 단순한 지식이나 주장에 머물지 않고 우리의 내면과 삶을 변화시킵니다.

 

결국 창5:5의 ‘죽었더라’를 이해하려면 먼저 무엇이 죽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AC.495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고유한 생명이었던 퍼셉션이 사라져 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퍼셉션의 본질은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신앙의 선과 진리를 알아차리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의 쇠퇴는 단순한 조직의 쇠퇴나 교리 지식의 감소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던 내적 생명의 쇠퇴였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창5의 ‘죽음’을 통해 보여 주는 교회의 죽음이며, 동시에 모든 시대의 교회가 자신의 생명이 과연 어디에서 오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AC.495 해설)

 

 

 

창5:5, AC.492-496 심화 1, ‘유전적 악은 어떻게 대대로 누적되며, 우리는 조상의 죄까지 책임져야

창5:5, AC.492-496 심화1, ‘유전적 악은 어떻게 대대로 누적되며, 우리는 조상의 죄까지 책임져야 하는가?’ AC.494는 태고교회가 쇠퇴한 주된 원인을 설명하면서 ‘유전적 악’(hereditary evil)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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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2-495 심화 2,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오늘날의 양심은 어떻게 다른가?’

창5:5, AC.492-495 심화2.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오늘날의 양심은 어떻게 다른가?’ AC.495는 태고교회가 ‘퍼셉션을 가진 교회’였으며 ‘오늘날에는 그러한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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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6, AC.496, ‘셋으로부터 이어진 또 하나의 교회 에노스’(AC.496-498)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And Seth 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 and begat Enosh. (창5:6) AC.496‘셋’(Seth)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두 번째 교회로서, 그 부모인 태고교회보다는 덜 천적이었지만,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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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4, ‘퍼셉션의 죽음과 유전적 악의 누적’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4그가 ‘죽었다’(died)는 것이 그러한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죽다’(die)라는 말의 의미에서 분명합니다.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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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4

그가 ‘죽었다’(died)는 것이 그러한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죽다’(die)라는 말의 의미에서 분명합니다. 곧 어떤 것이 이전에 그러했던 것과 같은 상태이기를 그치는 것입니다. 계시록에서는, That he “died” signifies that there was no longer such perception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word “die,” which is, that a thing ceases to be such as it has been. Thus in John:

 

1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2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계3:1, 2) Unto the angel of the church in Sardis write, These things saith he that hath the seven spirits, and the seven stars; I know thy works, that thou art said to live, but art dead; be watchful, and strengthen the things which remain, that are ready to die; for I have not found thy works perfect before God. (Rev. 3:1–2)

 

라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야에서는, In Jeremiah:

 

내가 너와 너를 낳은 어머니를 너희가 나지 아니한 다른 지방으로 쫓아내리니 너희가 거기에서 죽으리라 (렘22:26) I will cast out thy mother that bare thee, into another country where ye were not begotten, and there shall ye die, (Jer. 22:26)

 

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어머니’(mother)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교회는 점차 쇠퇴하고 타락하여 처음의 온전함을 잃게 되는데, 그 주된 이유는 유전적 악의 증가입니다. 뒤를 잇는 모든 부모는 자신이 물려받은 악에 새로운 악을 더하기 때문입니다. 부모 안의 모든 실제적인 악(actual evil)은 일종의 본성을 띠게 되고, 그것이 자주 반복되면 그들에게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 그들의 유전적 악에 더해지며, 자녀들에게 그리고 그렇게 후손들에게 전달됩니다. 이런 식으로 유전적 악은 후손들 안에서 엄청나게 증가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자녀들의 악한 성향이 그 조상들의 악한 성향과 아주 흡사하다는 사실에서 분명합니다. 우리 안에 아담으로부터 심어졌다고 주장되는 것 외에는 유전적 악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견해는 전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AC.313 참조). 진실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실제적인 죄들(actual sins)로 유전적 악을 만들고, 자신이 물려받은 악들에 그것을 더하며, 이런 식으로 그것이 축적되어 모든 후손 안에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에 의해 거듭나고 있는 사람들에게서만 감소합니다. 모든 교회에서 이것이 타락의 주된 원인이며, 태고교회에서도 그러하였습니다. where “mother” signifies the church. For as we have said, the case with the church is that it decreases and degenerates, and loses its pristine integrity, chiefly by reason of the increase of hereditary evil, for every succeeding parent adds new evil to that which he has inherited. All the actual evil in the parents puts on a kind of nature, and when it often recurs, becomes natural to them, and is added to their hereditary evil, and is transmitted into their children, and so to posterity. In this way the hereditary evil is immensely increased in the descendants. That this is so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evil dispositions of children are exactly like those of their progenitors. Quite false is the opinion of those who think that there is no hereditary evil except that which they allege to have been implanted in us from Adam (see n. 313). The truth is that everyone makes hereditary evil by his own actual sins, and adds it to the evils that he has inherited, and in this way it accumulates, and remains in all the descendants, nor is it abated except in those who are being regenerated by the Lord. In every church this is the principal cause of degeneration, and it was so in the most ancient church.

 

해설

AC.494는 창5:5의 ‘죽었더라’를 설명하다가 매우 중요한 주제인 ‘유전적 악’으로 들어갑니다. 먼저 ‘죽다’의 속뜻부터 분명히 합니다. 죽음은 ‘어떤 것이 이전에 그러했던 것과 같은 상태이기를 그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아담으로 표상된 태고교회가 ‘죽었다’는 것은 그 사람들의 육체적 죽음 자체가 속뜻의 중심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 교회를 특징짓던 퍼셉션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상태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계3:1-2의 사데 교회가 좋은 예입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라는 말씀은 육체적으로 죽었다는 뜻일 수 없습니다. 교회로서 외적인 이름과 형태는 남아 있지만 그 안의 영적 생명이 쇠퇴한 상태를 ‘죽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고 하신 것을 보면, 죽음과 생명이 한 사람이나 교회의 내적 상태를 가리킬 수 있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렘22:26에서 ‘어머니’(mother)가 교회를 의미한다는 설명도 같은 맥락입니다. 말씀은 교회의 발생과 쇠퇴와 종결을 가족의 출생과 죽음이라는 언어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왜 교회가 죽어 가는가?’라는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나아갑니다. 그가 제시하는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가 ‘유전적 악의 증가’입니다. 사람은 앞선 세대로부터 악에 기울어지는 성향을 물려받는데, 거기에 자신의 삶에서 실제로 행하고 반복한 악을 더합니다. 반복된 악은 점차 그 사람에게 일종의 본성처럼 자리 잡으며, 이렇게 형성된 것이 다시 후대에 유전적 성향으로 전달된다는 설명입니다. 따라서 세대가 거듭되면서 악에 대한 기울어짐이 누적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유전적 악’과 ‘실제적인 악’(actual evil)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려받은 악은 자신이 직접 행하여 만든 악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악으로 기울어지는 여러 성향을 물려받지만, 그것을 자신의 자유 안에서 실제로 받아들이고 행할 때 그것은 자신의 실제적인 악이 됩니다. 그리고 그 악을 반복하여 삶의 일부로 만들면 다음 세대에 전달되는 유전적 악에 다시 무언가를 더하게 됩니다. AC.494가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세대 간 누적입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유전적 악을 오직 아담 한 사람의 범죄에서 모든 인류에게 전달된 것으로 보는 견해를 명시적으로 부정합니다. AC.313에서도 그는 유전적 악이 부모에게서 자녀에게 전해지고 세대를 거치며 축적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창3의 타락을 한 개인이 범한 최초의 죄가 법적 책임의 형태로 모든 후손에게 전가된 사건으로만 이해하는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유전되는 것은 조상의 죄에 대한 개인적 죄책 자체라기보다 악을 향하여 기울어지는 성향이며, 각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 안에서 그것을 실제 악으로 만들 수도 있고 주님에 의해 거듭나면서 그 지배에서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AC.494의 마지막 문장이 중요합니다. 유전적 악은 ‘주님에 의해 거듭나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감소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여러 세대에 걸쳐 축적된 악의 경향을 뿌리째 제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으시면서 선과 진리를 심으시고, 사람이 악을 악으로 인정하여 물리치고 주님께로 향하도록 이끄십니다. 거듭남은 단지 개인의 도덕적 개선이 아니라 세대를 거쳐 내려온 악의 흐름이 한 사람 안에서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지배하지 못하게 되는 주님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이 설명은 태고교회의 쇠퇴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태고교회가 처음부터 갑자기 악한 교회였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들은 매우 깊은 퍼셉션을 가진 천적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세대가 지나면서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악한 방향으로 사용하고 그것을 반복하면서 악의 성향이 누적되었고, 그 결과 후대의 사람들은 앞선 세대보다 더 강한 유전적 악의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점차 변질되고 마침내 사라져 간 배경에 이러한 인간의 세대적 변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후대 사람은 앞선 세대보다 무조건 더 악하다’는 단순한 공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494 자체가 동시에 거듭남이라는 반대 방향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악이 세대를 따라 축적될 수 있는 것처럼, 주님은 각 세대의 각 사람에게 새롭게 역사하시며 그 악의 힘을 감소시키십니다. 인간에게는 유전적 성향이 있지만 그것이 그의 운명을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 사람에게 주어진 구체적인 상태 안에서 거듭남의 길을 여십니다.

 

따라서 창5:5의 ‘죽었더라’는 한 교회의 종결을 알리는 짧은 표현이면서 동시에 인간과 교회가 왜 쇠퇴하는가를 보여 주는 깊은 진단이 됩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것이 아니라 세대를 지나며 인간의 악이 반복되고 누적되는 가운데 점차 그 처음의 온전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AC.494의 결론은 쇠퇴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그 누적된 흐름을 거슬러 사람을 다시 살리시는 분은 주님이시며, 그 역사가 바로 거듭남입니다. ‘죽음’의 역사가 아무리 오래 누적되어도 주님은 그 가운데서 다시 생명으로 향하는 길을 여십니다. (AC.494 해설)

 

 

 

창5:5, AC.495, ‘태고교회의 쇠퇴를 이해하는 열쇠, 퍼셉션’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5태고교회가 어떻게 쇠퇴하였는지는 퍼셉션(perception)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태고교회는 퍼셉션을 가진 교회였으며, 오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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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3, ‘시간과 척도를 넘어 상태를 나타내는 말씀의 숫자’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3‘날들’(days)과 ‘해들’(years)이 시대들과 상태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세상에서는 시간들과 척도들이 반드시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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