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C.레8 심화

1. ‘왜 제사장은 옷을 입기 전에 먼저 물로 씻어야 했을까?’

 

레8의 제사장 위임식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순서입니다. 모세는 아론에게 화려한 에봇이나 흉패부터 입히지 않습니다. 먼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물로 그들을 씻깁니다.’ 그 다음에야 속옷과 띠와 겉옷과 에봇과 흉패와 관을 입힙니다. 왜 거룩한 옷보다 씻음이 먼저일까요?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02(출29:4)는 이 장면을 매우 직접적으로 해설합니다. ‘물로 씻는 것’은 신앙의 진리들을 통한 정결을 의미합니다. 물은 진리를 나타내며, 인간의 정결과 거듭남은 진리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먼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말씀을 통해 보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씻음이 옷보다 먼저라는 것은 중요한 영적 질서를 보여 줍니다. 인간이 진리를 많이 ‘입는 것’과 그 진리에 의해 실제로 정결하게 되는 것은 다릅니다. 성경 지식과 교리와 신학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자기 악을 비추고 씻는 데 사용되지 않는다면, 거룩한 옷은 입었지만 몸은 씻지 않은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말씀의 진리는 먼저 우리를 꾸미기 위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씻기 위해 주어집니다. ‘이 말씀으로 다른 사람을 어떻게 가르칠까?’보다 먼저 ‘이 말씀은 내 안에서 무엇을 드러내고 있는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분노와 교만과 탐욕과 자기애를 비추고, 그것이 죄임을 인정하게 하며, 주님의 도움을 구하여 피하게 하는 것이 말씀의 첫 쓰임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후에 옷이 입혀집니다. AC.10003(출29:5)은 아론의 옷을 주님의 영적 나라의 표상으로 설명합니다. 정결하게 된 사람에게 진리가 입혀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악을 제거하는 소극적 과정이 아니라 새로운 진리를 받아 새로운 삶의 형태를 갖추는 적극적 과정입니다.

 

따라서 거듭남에는 ‘씻음’과 ‘입음’이 모두 필요합니다. 씻기만 하고 아무것도 입지 않으면 비어 있게 되고, 씻지 않은 채 옷만 입으면 겉만 종교적인 사람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진리로 우리를 씻으시고 다시 진리로 우리를 입히십니다. 같은 진리가 처음에는 악을 드러내는 물이 되고, 그 다음에는 새로운 삶을 형성하는 옷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8의 첫 위임 행위가 물로 씻는 것이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의 쓰임을 감당하는 사람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직책도, 지식도, 권위도 아닙니다. 말씀의 진리가 자기 자신에게 적용되어 악과 거짓으로부터 정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위임은 먼저 씻김에서 시작됩니다. (SWC.레8 심화 1)

 

 

 

SW.레8 심화2, ‘왜 관유를 아론의 머리에 부었을까?’

SW.레8 심화2. ‘왜 관유를 아론의 머리에 부었을까?’ 레8:12에서 모세는 관유를 아론의 머리에 붓고 그에게 발라 거룩하게 합니다. 기름을 손이나 옷에 조금 바른 것이 아니라 ‘머리에 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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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레8, ‘귀와 손과 발에 피를 바르고 - 제사장 위임식에 감추어진 거듭남과 쓰임의 아르카나’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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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4 심화

3. 스베덴보리는 왜 ‘성경’보다 ‘말씀’(the Word)이라고 하는가?

AC를 읽다 보면 스베덴보리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성경’이라는 말보다 ‘the Word’, 곧 ‘말씀’이라는 표현을 매우 자주 사용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단순한 경건한 표현일까요, 아니면 스베덴보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 용어일까요?

 

AC.64 자체에서는 분명히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곧 ‘말씀의 속뜻’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속뜻을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이라고 합니다. 이어서 천사들이 ‘말씀’을 어떻게 지각하는지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이번 문맥에서 ‘the Word’는 단순히 책의 일반 명칭을 말하는 것 이상으로, 문자 안에 속뜻을 가지고 천사들에게 영적이고 천적인 것으로 지각되는 신적 계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과 ‘말씀’은 실제 교회생활에서는 상당히 겹쳐 사용됩니다. ‘성경을 읽는다’와 ‘말씀을 읽는다’가 같은 행동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라는 말은 낮고 ‘말씀’이라는 말만 영적이라고 구별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국어 단어 자체의 높고 낮음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the Word’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문맥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로 가면 ‘말씀’의 범위에 관한 별도의 설명이 나오고, 우리가 흔히 ‘성경 66권’이라고 부르는 범위와 그의 엄밀한 의미의 ‘the Word’가 어떻게 관계되는가 하는 문제도 생깁니다. 이것은 실제로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러나 AC.64 한 문장만 가지고 그 전체 정경론을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특히 ‘속뜻이 있는 책에는 주님의 생명이 있지만 다른 성경책에는 주님의 생명이 없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마치 성경 안에 신적인 책과 비신적인 책이 단순히 둘로 갈리고, 후자는 영적으로 가치가 없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정경과 속뜻에 관하여 무엇을 말하는지는 관련 본문들을 직접 모아서 따로 다루어야 정확합니다.

 

이번 AC.64에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말씀’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문자적 의미에서 드러나지 않는 속뜻이 있으며, 천사들은 그 말씀을 문자와 이름으로 지각하지 않고 그것들이 의미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으로 지각합니다. 따라서 ‘the Word’는 이 글에서 속뜻과 천사의 지각을 함께 품고 있는 매우 중요한 용어입니다.

 

그리고 이 점은 우리가 AC를 읽는 태도에도 중요합니다. ‘말씀의 속뜻’이라고 할 때 중심 명사는 ‘속뜻’만이 아니라 ‘말씀’입니다. 속뜻이 말씀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입니다. 아르카나 역시 AC가 말씀 밖에서 새로 만들어 내는 비밀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밝혀진다고 주장하는 아르카나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the Word’를 우리말로 ‘말씀’이라고 옮기는 것은 자연스럽고 의미도 잘 살아납니다. 한국 교회에서 ‘말씀’이라는 말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와 성경을 가리키는 익숙하고 권위 있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것을 근거로 일상적인 ‘성경’이라는 표현을 피해야 한다거나 잘못된 표현이라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AC와 성경의 관계를 뒤집지 않는 것입니다. AC.64가 ‘말씀의 속뜻’을 설명한다고 해서 AC가 말씀보다 높은 권위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주장은 자신이 말씀 밖에 새로운 계시 체계를 세웠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말씀 안에 문자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영적이고 천적인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왜 성경이 아니라 말씀이라고 하는가?’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겠습니다. 스베덴보리가 ‘the Word’라고 할 때 그는 단순한 종교 문헌의 명칭보다, 주님에게서 온 계시이며 그 문자 안에 내적 의미를 가진 말씀이라는 성격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말씀’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확한 범위와 어떤 성경책들이 스베덴보리의 엄밀한 의미에서 ‘말씀’에 속하는가 하는 문제는 별도의 관련 본문을 충분히 확인하여 다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독법에서는 한 가지를 더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말씀’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마다 AC를 높이기 위해 성경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AC가 끊임없이 독자를 말씀으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AC.64가 말하는 속뜻도, 아르카나도, 천사들의 지각도 모두 ‘말씀’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AC.64, 창1, 말씀의 속뜻 :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과 천사들의 지각 (AC.64-66)

AC.64이것이 바로 말씀의 속뜻(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이며,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입니다. 이는 문자적 의미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 안에 담긴 아르카나는 너무나 많아서, 그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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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4 심화 2, ‘속 사람’(internal man)은 영혼이나 마음과 같은 말인가?

AC.64 심화2. ‘속 사람’(internal man)은 영혼이나 마음과 같은 말인가? AC.64는 창세기 1장의 속뜻이 인간의 거듭남을 다루며, 그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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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4

이것이 바로 말씀의 속뜻(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이며,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입니다. 이는 문자적 의미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 안에 담긴 아르카나는 너무나 많아서, 그것들을 모두 풀어내려면 수많은 책으로도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다만 극히 일부만 제시되었는데, 그것도 이 말씀이 거듭남을 다루고 있으며, 그 거듭남이 겉 사람(the external man)에서 속 사람(the internal man)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것들뿐입니다. 천사들은 말씀을 이렇게 지각합니다. 그들은 문자 속에 있는 것들, 심지어 단어 하나의 가까운 의미조차도 전혀 알지 못합니다. 하물며 말씀의 역사서와 예언서에 매우 자주 등장하는 나라, 성읍, 강, 사람의 이름들은 더더욱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오직 그 말들과 이름들이 의미하는 것들만을 관념으로 가집니다. 그래서 낙원에 있는 아담을 통해 그들은 태고교회를 지각하지만, 그 교회 자체가 아니라 그 교회의 주님에 대한 신앙을 지각합니다. 노아를 통해서는 태고교회의 후손들에게 남아 아브람 시대까지 계속된 교회를 지각합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는 그 개인을 전혀 지각하지 않고, 그가 표상한 구원하는 신앙을 지각합니다. 이와 같이 천사들은 말과 이름에서 완전히 떠나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지각합니다. This then is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its veriest life, which does not at all appear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But so many are its arcana that volumes would not suffice for the unfolding of them. A very few only are here set forth, and those such as may confirm the fact that regeneration is here treated of, and that this proceeds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 It is thus that the angels perceive the Word. They know nothing at all of what is in the letter, not even the proximate meaning of a single word; still less do they know the names of the countries, cities, rivers, and persons, that occur so frequently in the historical and prophetical parts of the Word. They have an idea only of the things signified by the words and the names. Thus by Adam in paradise they perceive the most ancient church, yet not that church, but the faith in the Lord of that church. By Noah they perceive the church that remained with the descendants of the most ancient church, and that continued to the time of Abram. By Abraham they by no means perceive that individual, but a saving faith, which he represented; and so on. Thus they perceiv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entirely apart from the words and names.

 

해설

AC.64는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에 대한 해설을 마친 자리에서, 스베덴보리가 지금까지 자신이 무엇을 설명해 왔는지를 한 걸음 물러서서 밝히는 글입니다. 그는 이것을 ‘말씀의 속뜻’이라고 부르며, 그것이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창세기 1장을 읽으면 문자적으로는 천지와 빛, 궁창과 물, 식물과 해와 달과 별, 물고기와 새와 짐승, 그리고 사람의 창조가 나옵니다. 그런데 AC.6부터 AC.63까지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 안에 인간의 거듭남이라는 속뜻이 들어 있다고 설명해 왔습니다. AC.64는 이제 바로 그것이 말씀의 속뜻이며, 그 속뜻은 문자적 의미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문자적 의미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는 말을 ‘문자적 의미는 중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속뜻은 말씀을 버리고 그 밖에서 만들어 낸 별도의 영적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그 말씀 안에 있는 뜻입니다. 창1의 빛, 물, 식물, 해와 달과 별, 생물과 사람이라는 말씀의 표현들이 있기 때문에 그 안에 담긴 속뜻도 밝혀집니다. 따라서 AC를 읽으면서 문자와 속뜻을 서로 경쟁시키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문자는 낮고 속뜻은 높으니 이제 문자는 필요 없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말씀의 문자 안에 우리가 처음에는 알지 못했던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이 AC.64의 출발점입니다. 특히 우리의 독법에서는 언제나 말씀 자체가 먼저이고 AC는 그 말씀 안에 담긴 속뜻을 밝혀 주는 해설이라는 순서를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안의 아르카나가 너무 많아 수많은 책으로도 충분히 펼쳐 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창1을 설명하면서 자신이 제시한 것은 그 가운데 ‘극히 일부’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 말은 지금까지의 설명이 창세기 1장의 모든 속뜻을 다 밝혔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을 알려 줍니다. 그가 특별히 골라 제시한 것은 ‘이 말씀이 거듭남을 다루고 있으며, 그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아르카나들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을 ‘거듭남에 관한 여섯 단계’라고 이해했다고 해서 그 말씀의 내적 내용 전체를 다 파악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AC.64 자신이 지금까지 제시한 것은 극히 일부라고 선을 긋고 있습니다.

 

여기서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는 표현도 그대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에서 우리는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에 이른다는 질서도 여러 차례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AC.64의 이 문장은 지금 그것을 설명하는 문장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창1의 여섯 날에 나타난 거듭남의 진행이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 곧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이 두 표현을 성급히 하나가 틀리고 하나가 맞는 것처럼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에게서 생명이 유입되는 질서와, 사람이 거듭남을 경험하며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 인도되는 진행을 구별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문제는 이후 AC가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더 자세히 설명할 때 점차 분명해질 것입니다.

 

AC.64의 두 번째 큰 주제는 천사들이 말씀을 어떻게 지각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이 말씀의 문자에 있는 것들을 알지 못하며, 심지어 단어 하나의 가까운 의미조차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역사서와 예언서에 등장하는 나라와 성읍, 강과 사람의 이름도 알지 못하고, 오직 그 말들과 이름들이 의미하는 것들을 지각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천사들이 성경의 역사에 무지하다는 일반적인 지식론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말씀을 읽을 때 천사들에게 그 말씀이 어떻게 지각되는지를 설명하는 문맥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그 예가 아담과 노아와 아브라함입니다. 천사들은 낙원의 아담을 통해 태고교회를 지각하지만 거기에서도 태고교회라는 역사적 교회 자체에 머무르지 않고 그 교회의 ‘주님에 대한 신앙’을 지각합니다. 노아를 통해서는 태고교회의 후손들에게 남아 아브람 시대까지 계속된 교회를 지각하고, 아브라함을 통해서는 아브라함이라는 개인을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표상한 ‘구원하는 신앙’을 지각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통해 말씀의 고유명사들이 천사에게 단순한 역사적 이름으로 머무르지 않고 그 이름들이 의미하고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으로 지각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아담도 노아도 아브라함도 실제 인물이 아니었다’는 결론을 끌어내서는 안 됩니다. AC.64의 관심은 그 인물들의 역사성 여부를 논증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천사들이 말씀을 지각할 때 ‘아브라함’이라는 개인에게 머무르지 않고 그가 표상하는 것을 지각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속뜻을 인정하는 것과 문자에 기록된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을 무조건 부정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처음 AC를 읽는 독자에게는 이 구별이 특히 중요합니다.

 

또 ‘천사들은 말과 이름에서 완전히 떠나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한다’는 말을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사람 이름과 사건을 무시해야 한다는 지침으로 받아들여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자연계에서 문자로 주어진 말씀을 읽습니다. 천사의 지각 방식과 인간의 말씀 읽기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AC.64가 보여 주는 놀라운 점은 우리가 자연계에서 같은 말씀을 읽는 동안 그 말씀에는 천사들이 지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뜻도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인간과 천국을 잇는 방식으로 주어져 있다는 더 큰 주제의 입구가 여기서 열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AC.64는 ‘성경 이야기를 이제 역사로 읽지 말고 상징으로만 읽으라’는 선언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훨씬 깊습니다. 말씀에는 인간이 문자만 보아서는 알 수 없는 속뜻이 있으며, 그 속뜻이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입니다. 천사들은 바로 그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합니다. 인간에게는 아담, 노아, 아브라함이라는 이름과 이야기가 보이지만, 천사에게는 그 이름들이 의미하는 교회와 신앙에 관한 것이 지각됩니다. 자연계의 문자와 천국의 지각이 하나의 말씀 안에서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속뜻’은 인간이 본문을 읽다가 자유롭게 떠올리는 영적 감상과도 구별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을 읽으며 ‘나는 아브라함처럼 용감하게 살아야겠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고, 그것이 유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AC가 말하는 속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AC.64에서 아브라함은 그가 표상하는 ‘구원하는 신앙’과 연결됩니다. 속뜻은 독자의 주관적인 연상이나 감동이 아니라 말씀의 말과 이름들이 실제로 의미하고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에 관한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아르카나’라는 말도 중요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 안에 우리가 문자만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수많은 아르카나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재미있는 비밀 지식을 많이 안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창1에서 밝혀진 거듭남의 질서처럼 말씀 안에 감추어져 있는 깊은 내용들을 가리킵니다. ‘아르카나’와 ‘속뜻’이 정확히 같은 말인지, 서로 어떻게 구별되는지는 현재 연결된 심화에서 따로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 하나 처음 읽는 독자에게 자연스럽게 생길 질문은 ‘그렇다면 AC가 말하는 ‘말씀’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경 66권 전체와 정확히 같은 범위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중요한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the Word’라는 말을 상당히 엄밀한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문제를 잘못 설명하면 ‘어떤 성경책에는 주님의 생명이 있고 다른 성경책에는 없다’는 식으로 지나치게 단순화할 위험이 있으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충분히 구별하여 살펴보겠습니다.

 

AC.64를 읽고 나면 지금까지의 창1 해설도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첫째 날의 빛부터 여섯째 날의 사람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따라온 것은 단순히 스베덴보리가 창세기에 임의로 붙인 영적 비유가 아니라, 그가 ‘말씀의 속뜻’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를 설명하면서 천사들의 말씀 지각을 제시합니다. 천사들은 인간이 보는 문자와 이름에 머무르지 않고 그 말과 이름이 의미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설명의 출발점과 돌아갈 곳은 여전히 말씀입니다. AC를 많이 읽을수록 성경의 문자가 시시해지고 AC의 설명만 중요해지는 방향으로 간다면 오히려 순서가 뒤집힌 것입니다. AC.64가 말하는 아르카나는 말씀 밖에 있는 비밀이 아니라 말씀 안에 있는 아르카나이고, 속뜻 역시 말씀의 속뜻입니다. 따라서 AC의 역할은 말씀을 대신하는 데 있지 않고, 우리가 읽고 있던 바로 그 말씀 안에 얼마나 깊은 생명이 들어 있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AC.64의 첫 문장을 그대로 붙드는 것이 가장 좋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의 속뜻이며,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입니다.’ 창세기 1장의 말씀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말씀 안에서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 신앙과 사랑에 관한 영적이고 천적인 세계가 열립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지금까지 자신이 보여 준 것조차 그 헤아릴 수 없는 아르카나 가운데 ‘극히 일부’라고 말합니다. AC.64는 그래서 창1 해설의 결론인 동시에, 앞으로 우리가 말씀과 AC를 어떤 관계로 읽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중요한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심화

1. ‘아르카나’(arcana)란 무엇인가?

 

AC.64 심화 1, ‘아르카나’(arcana)란 무엇인가?

AC.64 심화 1. ‘아르카나’(arcana)란 무엇인가? AC.64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 안에 너무나 많은 ‘아르카나’(arcana)가 있어서 수많은 책으로도 그것들을 모두 펼쳐 내기에 충분하지 않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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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속 사람’(internal man)은 영혼이나 마음과 같은 말인가?

 

AC.64 심화 2, ‘속 사람’(internal man)은 영혼이나 마음과 같은 말인가?

AC.64 심화2. ‘속 사람’(internal man)은 영혼이나 마음과 같은 말인가? AC.64는 창세기 1장의 속뜻이 인간의 거듭남을 다루며, 그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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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스베덴보리는 왜 ‘성경’보다 ‘말씀’(the Word)이라고 하는가?

 

AC.64 심화 3, 스베덴보리는 왜 ‘성경’보다 ‘말씀’(the Word)이라고 하는가?

AC.64 심화3. 스베덴보리는 왜 ‘성경’보다 ‘말씀’(the Word)이라고 하는가?AC를 읽다 보면 스베덴보리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성경’이라는 말보다 ‘the Word’, 곧 ‘말씀’이라는 표현을 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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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5, 창1, ‘영광’이라 불리는 말씀의 내적 의미 : 천사들의 지각

AC.65제가 말씀을 읽고 있을 때, 어떤 이들이 하늘의 첫 입구 뜰까지 들려 올라갔고, 그곳에서 저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는 말씀 속의 어떤 단어나 글자도 전혀 이해할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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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3, 창1:31, 주님이 싸우시는 거듭남의 전투 : 신앙과 사랑의 결합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3그동안 주님은 계속해서 인간을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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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 심화

4. ‘신적 진리’(Divine Truth)란 무엇인가?

 

AC.1 해설을 읽다가 ‘신적 진리’(Divine Truth)라는 표현이 무엇인지 궁금해질 수 있습니다. 먼저 분명히 할 것은 AC.1 원문 자체에는 ‘Divine Truth’라는 표현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 말은 말씀의 내적인 것과 그 근원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해설에 사용된 스베덴보리의 중요한 신학 용어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AC.1의 어떤 단어를 신적 진리라고 번역한 것인가?’가 아니라 ‘해설에서 말한 신적 진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적 진리’는 단순히 인간이 알고 있는 옳은 정보나 참된 명제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 근원이 주님께 있는 진리입니다. 인간은 수많은 사실과 진리를 알 수 있지만, ‘신적’이라는 말이 붙을 때에는 그 출처가 인간의 지식이나 추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신적 진리는 말씀과도 깊이 연결되고, 인간에게 빛을 주며 선으로 인도하는 주님의 역사와 연결됩니다.

 

그러나 ‘진리는 인간의 이해 속에 있는 것이고, 그것이 사람을 변화시키기 시작할 때 비로소 신적 진리가 된다’고 구별해서는 안 됩니다. 신적 진리가 신적인 것은 인간에게 어떤 효과를 일으켰기 때문이 아니라 그 근원 자체가 주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그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그 신적 진리를 자신의 이해와 삶 안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입니다.

 

이 점은 AC.1과도 잘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구약의 외적 의식과 규례와 역사처럼 보이는 것들 안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적인 것들이 있으며, 그것들이 주님과 주님의 천국과 교회 등에 관계한다고 선언합니다. 이때 말씀을 단순한 인간의 종교 문헌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것으로 이해하기 위해 ‘신적 진리’라는 개념은 앞으로 매우 중요해집니다. 다만 AC.1 자체가 아직 그 교리를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니므로 여기서는 그 의미를 미리 지나치게 확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따라서 AC.1과 관련하여 ‘신적 진리’를 기억할 때에는 우선 두 가지만 붙들면 충분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참인 정보’를 뜻하는 말이 아니며, 그 근원이 주님께 있는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AC를 읽으면서 말씀과 주님, 선과 진리, 신적 유입에 관한 설명이 쌓이면 ‘신적 진리’라는 말의 깊이도 점차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AC.1 심화 4)

 

 

 

AC.1, 서문, ‘말씀 안에 담긴 하늘의 비밀들’

AC.1구약의 말씀을 단순히 겉 글자로만 보아서는, 그 안에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들어 있으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종교적인 믿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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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 심화 3, AC.1의 ‘층위’에 직접 대응하는 원어가 있는가?

AC.1 심화3. AC.1의 ‘층위’에 직접 대응하는 원어가 있는가? AC.1 해설과 심화 2에서 ‘층위’라는 말을 사용하면 자연스럽게 ‘그렇다면 스베덴보리의 원어에서는 층위가 무엇인가?’라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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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66권 중에서 속뜻(internal sense, inner meaning)이 있는 성경, 곧 그 안에 주님의 아르카나(arcana, 秘義, 말씀의 내적 의미)가 담긴 성경을 ‘말씀’(The Word, 총 34권)이라 하며,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구약 : 창, 출, 레, 민, 신, 수, 삿, 삼상, 삼하, 왕상, 왕하, 시, 사, 렘, 애, 겔, 단, 호, 욜, 암, 옵, 욘, 미, 나, 합, 습, 학, 슥, 말 (29권)

 

신약 : 마, 막, 눅, 요, 계 (5권) (AC.10325)

 

10325. The books of the Word are all those which have an internal sense; and those which have not an internal sense are not the Word. The books of the Word in the Old Testament are the five books of Moses, the book of Joshua, the book of Judges, the two books of Samuel, the two books of Kings, the Psalms of David, the Prophets Isaiah, Jeremiah, Lamentations, Ezekiel, Daniel, Hosea, Joel, Amos, Obadiah, Jonah, Micah, Nahum, Habakkuk, Zephaniah, Haggai, Zechariah, and Malachi; and in the New Testament the four Gospels, Matthew, Mark, Luke, and John; and Revelation.

 

그러므로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성경들, 곧 내적 존재인 천사들이 보았을 때, 아무 아르카나도 없는 성경들인 구약의 룻, 대상, 대하, 스, 느, 에, 욥, 잠, 전, 아 등 10권과, 신약의 행, 롬, 고전, 고후, 갈, 엡, 빌, 골, 살전, 살후, 딤전, 딤후, 딛, 몬, 히, 약, 벧전, 벧후, 요일, 요이, 요삼, 유 등 22권에서 어떤 교리를 뽑아내는 것은 안전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지난 교회사의 오랜 정경화(正經化) 작업은 그만큼 인류가 주님의 신성이 깃든 말씀을 분별할 수 있는 퍼셉션(perception, 현재 천국 천사들과 주님간 커뮤니케이션 방법, 이것이 지상에도 있었던 시대를 태고교회라고 함. 아담으로 시작된 이 시대는 노아의 홍수로 마감됨)이 없어, 어떤 성경이 참된 말씀인지를 보는 영적 역량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 글들이 현 성경 66권에 포함된 것은, 마치 태고교회 시절, 에녹이라는 교회가 자신들의 모호하고 흐릿해진 퍼셉션을 보완할, 그 시대에는 아직 있어서는 안 되는, ‘교리’라는 것들을 만들 때, 주님이 그것을 아예 시작도 못하도록 막지는 않으신 것과 유사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 시대는, 비록 갈수록 사람들의 악과 거짓으로 퍼셉션이 희미해져 갔지만, 여전히 퍼셉션의 시대, 즉 주님이 직접 그들을 가르치는 시대, 사람들은 선과 진리에 관한 걸 주님으로 말미암은 퍼셉션으로 직접 아는 시대였지, 무슨 인간이 만든 교리, 세상으로 말미암은 걸로 공부하여 아는, 학습하여 아는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들이 만든 걸 후대가 사용하도록 따로 보관하셨습니다. 퍼셉션이 사라진 인류, 즉 홍수 후 인류는 주님의 퍼셉션으로 살았던 홍수 전 인류와 달리 주님을 교리로 배워 알아야 하는 신 인류였고, 그래서 이들 후대를 위해 폐기 대신 따로 보관하셨는데요, 이것이 창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에 담긴 아르카나입니다.

 

천사들은 내적(內的) 존재여서 오직 내적인 것만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는 자연적 존재여서 자연계에 있는 것들만 볼 수 있는 것과 같지요. 이는 주님이 정하신 많은 원칙들 중 하나인데요, 그럼에도 가끔 천사들을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육의 눈으로 본 게 아니고, 영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며, 그것은 오직 주님의 허락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이 자연계의 사물을 보는 것 역시 사람의 눈을 통해서만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천사들이 읽을 수 있는 성경은 오직 속뜻이 있는 성경, 곧 ‘말씀’ 뿐이라는 걸 상기시켜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천사들이 우리를 통해 가령, 룻기나 역대서, 사도행전이나 로마서 같은, 그 안에 속뜻, 곧 내적 의미가 없는 글들, 아르카나가 담기지 않은 글들을 읽을 땐, 그때는 그들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출애굽기나 마태복음, 계시록 등 주님의 신성이 담긴 말씀들을 읽을 땐, 그때는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거기 담긴 주님의 무궁하신 신성을 접하며, 온몸으로 감동, 감격합니다. 이런 사실은 매우 놀랍지만, 그러나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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