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64 심화

‘에녹이 보존한 교리는 후대의 고대 말씀과 모세의 창세기 기록에 어떻게 이어졌는가?’

 

 

AC.464는 ‘에녹’이라 하는 교회가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그 교회가 퍼셉션한 것들로부터 교리를 형성했으며, 그 교리가 당시에는 쓸모가 없었지만 ‘후대의 쓰임을 위해’ 보존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에녹이 정돈하여 보존한 교리가 훗날 고대교회에 전해지고, 더 나아가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할 때 사용한 고대의 자료가 된 것일까요? 큰 흐름에서는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에녹의 교리 = 고대 말씀 = 모세오경’이라고 곧바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에녹의 역할부터 정확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태고교회는 천적 교회였으며,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서 선과 진리를 퍼셉션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후대처럼 체계적인 교리를 먼저 배우고 그것을 통해 무엇이 참인지를 판단하는 방식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상태가 변하면서 이러한 퍼셉션이 계속 유지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 ‘에녹’이라 하는 교회가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퍼셉션된 것들을 모아 교리의 형태로 정돈했습니다. 살아 있는 내적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것이 후대에도 전달될 수 있는 형태로 보존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는 창5:24의 속뜻과 연결됩니다. 에녹의 교리가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즉시 필요한 것이어서 널리 사용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당시에는 쓰이지 않으면서도 훗날 필요할 때를 위하여 보존되었다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사라질 것을 주님께서 아셨기 때문에, 그 안에 있던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까지 함께 사라지도록 두지 않으시고 다른 형태로 보존하신 것입니다. AC.464의 에녹은 이런 의미에서 ‘퍼셉션에서 교리로’ 넘어가는 중요한 전환점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에녹이 정돈한 교리를 곧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고대 말씀’ 전체와 동일시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 고대교회에 하나의 ‘고대 말씀’(Ancient Word)이 있었으며, 그것이 후대에는 소실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민21:14의 ‘여호와의 전쟁기’와 수10:13 및 삼하1:18에 언급되는 ‘야살의 책’ 등을 그 고대 말씀과 관련하여 설명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로부터 내려온 상응과 표상의 지식이 고대교회에서 말씀과 교리의 형태로 발전하고 보존되었던 더 넓은 전승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에녹의 교리화는 이 긴 전승의 매우 초기적이고 중요한 단계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모세와의 관계에서도 같은 주의가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앞부분의 기록이 모세 시대에 처음 아무 자료도 없이 생겨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태고교회와 고대교회에서 내려오던 고대의 기록과 전승이 있었으며, 모세가 그러한 자료를 사용했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창세기 원역사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태고교회와 고대교회로부터 전해 내려온 매우 오래된 교회적 전승이 상응적 서술의 형태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고대의 말씀과 상응 지식 자체는 후대에 상당 부분 소실되었지만, 그 내용과 표현의 일부는 섭리 가운데 후대의 말씀 안에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기록한 창세기와 에녹의 교리 보존 사이에는 ‘고대의 계시와 퍼셉션이 후대를 위해 보존되고 전승되었다’는 큰 연속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연속성을 ‘에녹이 책을 한 권 써 두었고 그것이 그대로 전해져 모세오경이 되었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464는 그런 직접적인 문헌 계보를 말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모세오경 전체가 에녹의 교리에서 유래했다고 할 근거도 없습니다. 보다 정확한 그림은 ‘태고교회의 계시와 퍼셉션 → 에녹이라 하는 교회의 교리화와 보존 → 고대교회에서의 전승과 발전 → 고대의 말씀과 여러 기록 및 전승 → 모세가 사용한 고대 자료’라는 긴 흐름입니다. 이 과정에는 여러 시대와 여러 형태의 전승이 놓여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에녹의 의미가 더욱 깊어집니다. 주님은 한 시대의 사람들이 누리던 특별한 영적 상태가 사라질 때 그들과 함께 모든 진리가 사라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사라졌지만, 그 퍼셉션으로 알았던 것 가운데 후대에 필요한 것은 교리와 전승의 형태로 보존되었습니다. 그리고 훗날 사람들이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직접 퍼셉션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보존된 진리는 다른 형태로 그들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AC.464가 ‘후대의 쓰임’이라고 한 말에는 바로 이러한 주님의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에녹에서 모세까지의 관계를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에녹이 정돈한 교리가 그대로 모세오경이 된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계시와 퍼셉션을 후대에 전달하기 위해 보존한 에녹의 사역이 고대교회의 오랜 전승을 거쳐 훗날 말씀의 기록으로 이어지는 큰 섭리적 흐름의 한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영적 상태가 변할 때마다 진리를 없애시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가 받을 수 있는 형태로 보존하고 전달하십니다. 에녹의 ‘들려감’은 바로 그 보존의 섭리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AC.464 심화)

 

 

 

AC.464, 창5, ‘에녹은 태고교회의 계시와 퍼셉션으로부터 교리를 형성한 교회이다’

개요 AC.464‘에녹’(Enoch)이라 하는 교회는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그 교회가 퍼셉션한 것들로부터 교리를 형성한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 교리는 당시에는 쓸모가 없었지만 후대의 쓰임을 위해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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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6 심화

2. 모세가 창조와 에덴동산의 기록을 태고교회 후손들에게서 받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66에는 처음 읽는 독자를 상당히 놀라게 할 만한 문장이 있습니다. ‘창조, 에덴동산 등에 관한 이 모든 내용, 곧 아브람 시대까지의 기록을 모세는 태고교회의 후손들로부터 전해 받았습니다.’ 우리는 흔히 창세기를 ‘모세가 기록한 책’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문장을 읽으면 곧 여러 질문이 생깁니다. ‘그러면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부터 아브람 이전까지의 내용을 모세가 직접 계시받아 기록한 것이 아니라고 보는가?’, ‘그렇다면 그 내용은 실제 역사가 아니라 전승된 이야기일 뿐이라는 뜻인가?’

 

먼저 AC.66의 문장을 약화시키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창조와 에덴동산 등을 포함하여 아브람 시대까지의 내용을 모세가 ‘태고교회의 후손들로부터’ 받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스베덴보리 자신의 설명에서는 이 부분의 자료가 모세에게서 처음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것입니다. 이것은 AC.66이 직접 말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을 이해하려면 바로 앞의 ‘첫째 스타일’ 설명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땅과 세상의 것을 말하면서 동시에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생각했고, 그러한 표상들을 ‘일종의 역사적 연속’으로 엮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설명 뒤에 한나와 시편을 인용한 다음, 창조와 에덴동산 등의 내용을 모세가 태고교회 후손들로부터 받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전승은 단순히 후대 사람들이 꾸며 낸 민담이라는 뜻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표상적 표현 방식과 연결된 오래된 자료입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이어지는 둘째 스타일과의 구별입니다. 아브람 이후의 모세오경과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기, 열왕기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가 ‘역사적 사실들은 문자적 의미에 나타난 그대로’라고 명시합니다. 반면 아브람 이전의 첫째 스타일에 대해서는 표상들을 ‘일종의 역사적 연속’으로 만들었다고 표현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두 부분을 의도적으로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아브람 이전은 역사가 아니고 아브람 이후부터만 역사이다’라고 한 줄로 정리해도 될까요? AC.66 하나만으로 그렇게까지 단정하는 것도 조심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이 글은 첫째 스타일과 둘째 스타일의 차이를 분명히 하지만, 창세기 앞부분의 각각의 인물과 사건이 어느 의미에서 역사적이며 어느 의미에서 표상적 구성인지를 세세하게 판정하지는 않습니다. ‘아담은 실제 개인이 아니었다’, ‘노아 홍수는 실제 사건이 아니었다’ 같은 결론을 AC.66 한 문장에서 바로 끌어내는 것은 본문보다 앞서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 문장을 없었던 것처럼 만들어 ‘창1부터 모든 내용은 아브람 이후와 똑같은 의미에서 문자 그대로의 역사라고 스베덴보리도 가르친다’고 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AC.66은 분명히 서로 다른 두 스타일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익숙한 선입견에 맞추어 그 구별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스베덴보리가 아담, 노아, 홍수, 족보 등을 실제로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따라가면서 조금씩 구체화하는 것입니다.

 

또 이것을 곧 현대 성서학의 문서설이나 구전 전승론과 동일시할 필요도 없습니다. 현대 성서학도 모세오경의 자료와 전승을 연구하지만, 그 학문적 이론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태고교회 후손들로부터 받은 표상적 역사’는 출발점과 목적이 다릅니다. 용어상 ‘전승된 자료’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해서 같은 이론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AC.66은 현대적인 문헌비평을 제시하는 글이 아니라 말씀의 네 가지 스타일과 그 속뜻을 설명하는 글입니다.

 

그러면 모세가 이전 자료를 받았다는 것이 말씀의 신적 권위를 약화시키는 것일까요? 반드시 그렇다고 볼 이유는 없습니다. 성경의 권위가 성경의 모든 문장이 기록자의 머릿속에 아무 선행 자료 없이 직접 받아쓰기처럼 들어왔다는 방식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AC.66에서 중요한 것은 모세 이전부터 태고교회의 표상들이 전해졌고, 그것이 말씀의 창세기 앞부분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자료의 인간적 전달 경로를 밝혀 말씀을 낮추는 데 있지 않고, 그 오래된 표상적 기록 속에 영적이고 천적인 의미가 들어 있음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오히려 이 설명은 지금까지 창세기 1장을 왜 그렇게 읽었는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빛과 궁창과 물, 식물과 광명체, 물고기와 새와 짐승, 사람의 창조를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의 상태로 읽은 것은 후대의 문자 기록에 임의로 상징을 붙인 것이라고 그 자신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AC.66에 따르면 바로 이런 방식으로 자연적인 것을 말하면서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생각하던 태고교회의 표현 방식이 창세기 앞부분의 배경에 있습니다.

 

또 하나 기억할 것은 모세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직접 받은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후손들’에게서 받았다고 한다는 점입니다. 즉 매우 오래된 표상적 자료가 후손들을 통해 보존되어 모세에게 전해졌다는 그림입니다. 그 구체적인 전승 과정이 몇 세대를 거쳤고 어떤 형태의 문헌이었는지 AC.66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빈칸을 우리가 상상으로 채울 필요도 없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설명이 성경에 대한 익숙한 생각을 흔드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를 읽는 과정에서는 바로 이런 곳에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가’를 먼저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미리 가지고 있던 성경관에 맞지 않는다고 문장을 약화시키지도 않고, 반대로 한 문장을 가지고 AC가 아직 말하지 않은 결론까지 확대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 가장 정확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조와 에덴동산 등을 포함하여 아브람 시대까지의 기록을 모세가 태고교회 후손들로부터 받았다고 실제로 말합니다. 그는 그 부분을 태고교회의 표상적 스타일과 연결하며, 아브람 이후의 역사적 스타일과 구별합니다. 그러나 이 한 문장만으로 창세기 앞부분의 개별 인물과 사건의 역사성 여부를 모두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관련 AC들이 직접 설명하는 내용을 따라가며 판단해야 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이 문장은 말씀의 권위를 낮추기보다 오히려 창세기 1장을 지금까지 왜 ‘거듭남의 아르카나’를 담은 표상적 연속으로 읽어 왔는지를 이해하게 해 줍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에게 중요한 독법 하나를 가르쳐 줍니다.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는 것과 스베덴보리가 성경의 형성과 스타일에 대해 실제로 한 말을 정직하게 읽는 것은 서로 반대되는 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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