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9의 마지막은 장엄합니다. 아론이 모든 제사를 마치고 백성을 축복하고,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 다시 백성을 축복하자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갑자기 ‘불이여호와앞에서나와제단위의번제물과기름을’ 사릅니다. 백성은 그것을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립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불’만이 아니라 ‘여호와앞에서나와’입니다. 제단에는 이미 불이 있었고 제사장들도 제물을 불살랐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제사의 참된 근원이 어디인지를 보여 주듯 불이 주님에게서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불을 사랑과 매우 깊게 연결합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6832(출3:2)는 불이 좋은 의미에서는 신적 사랑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레6:12-13의 ‘제단의불은항상피워꺼지지않게하라’는 말씀을 직접 인용하면서 그 영속적인 제단 불이 신적 선 자체, 곧 신적 사랑을 표상한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레9마지막의 불을 인간의 종교적 열심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뜨거워져서 제사가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불은 ‘여호와앞에서’ 나옵니다. 예배에 생명을 주는 사랑의 근원은 인간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이것은 레6의 ‘꺼지지않는불’을 한층 더 깊게 이해하게 합니다. 레6에서는 제단의 불을 끄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불은 주님의 영원하고 끊임없는 사랑과 자비를 표상합니다. 레9에서는 이제 그 불의 출처가 명시됩니다. 그 사랑은 인간에게서 시작되어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인간에게 내려옵니다.
인간이 하는 일도 분명히 있습니다. 제물을 가져오고, 잡고, 피를 뿌리고, 씻고, 제단에 올리고, 규례에 따라 행합니다. 거듭남에서도 인간은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말씀을 배우고, 선을 행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노력 자체가 영적 생명을 만들어 내지는 못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그 안에 들어올 때 비로소 선은 살아 있는 선이 됩니다. 같은 구제를 해도 자기 명예를 위해 할 수 있고 체어리티에서 할 수 있습니다. 같은 설교를 해도 자기 지식을 보이기 위해 할 수 있고 사람의 영적 선을 위해 할 수 있습니다. 외적 행위가 같아도 그 안에 어떤 ‘불’이 있는지가 다릅니다.
따라서 레9의 불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무엇을하고있는가?’만이 아니라 ‘그일을움직이는불은어디에서오는가?’입니다.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불도 사람을 열심히 움직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불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불이 내려왔을 때 백성은 아론을 칭찬하지 않습니다. ‘온백성이이를보고소리지르며엎드렸더라.’ 모든 예배와 모든 쓰임의 마지막 방향이 여기 있습니다. 참된 신적 사랑이 나타날 때 인간의 proprium은 자신을 높이지 않고 주님 앞에 엎드립니다.
레8에서 인간의 귀와 손과 발이 준비되었습니다. 레9에서 그 준비된 인간이 실제 쓰임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성경은 다시 분명히 합니다. 거듭남을 시작하시고 완성하시며 쓰임에 생명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제물을 제단에 올리지만 불은 여호와 앞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지만 그 선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바로 이것이 레9마지막 한 절에 담긴 거듭남의 가장 깊은 아르카나입니다. (SW.레9심화5)
번제가 모두 타고 나면 남는 것은 재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제사는 끝났고 재는 치워야 할 폐기물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레6은 그 재를 처리하는 일까지 매우 세밀하게 규정합니다. 제사장은 세마포 긴 옷과 세마포 속바지를 입고 재를 제단 곁에 두었다가, 다시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그 재를 ‘진영바깥정결한곳’으로 가져갑니다.
여기서 가장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세마포의 의미입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959(출28:42)는 세마포를 외적 진리, 곧 자연적 진리와 연결하면서 바로 레6:10-11의 이 장면을 직접 인용합니다. 제사장이 재를 처리할 때조차 세마포 옷을 입어야 했던 것은 이 마지막 외적 처리까지 진리의 질서 안에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본문은 재를 단순히 ‘진영밖’에 버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진영바깥정결한곳’으로 가져가라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제물은 이미 불에 완전히 살라졌지만 그 결과물까지 아무렇게나 취급되지 않습니다. 제사가 끝난 뒤 남은 것에도 질서가 있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에서는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에 확보한 스베덴보리 원전 가운데 레6의 ‘재’ 자체를 직접적으로 세밀하게 풀이하는 강한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재는정확히무엇을상응한다’고 하나의 공식으로 못 박지는 않겠습니다. 오히려 확실한 본문의 구조를 붙드는 편이 좋습니다. 거룩한 제사의 마지막 결과까지 정결한 질서 속에서 처리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듭남에도 좋은 통찰을 줍니다. 어떤 악과의 싸움이 끝났다고 해서 그 경험 전체를 무가치한 것으로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어떤 시험에서 건져 내셨다면 그 과정에서 배운 진리와 겸손, 자기 인식은 이후의 삶에 남습니다. 그러나 지나간 악 자체를 계속 붙잡고 살아갈 필요도 없습니다. 끝난 것은 끝난 자리로 옮겨야 합니다.
특히 ‘다른옷을입고’ 진영 밖으로 나가는 장면은 제단에서 봉사하는 일과 그 결과를 밖으로 옮기는 일이 서로 다른 외적 질서를 필요로 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모든 영적 경험을 같은 방식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각 상태에 맞는 질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번제의 재는 적어도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남깁니다. ‘주님께서이미태워없애신것을나는아직제단위에붙들고있지는않은가?’입니다. 회개한 죄를 끝없이 되씹고, 이미 지나간 실패를 자기 정체성으로 붙들고 있는 것은 정결의 완성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끝내신 것은 정결한 질서 가운데 제자리로 옮겨 놓고, 제단에서는 다시 새로운 불과 새로운 번제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SWC.레6심화3)
레6에서 가장 강렬하게 반복되는 명령은 ‘불을끄지말라’는 것입니다. 번제물은 밤새도록 제단 위에 있고, 불은 아침까지 타고 있어야 합니다.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더 놓아야 하며, 13절에서는 마침내 ‘불은끊임이없이제단위에피워꺼지지않게할지니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의 해설이 놀랄 만큼 직접적입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2177(창18:6)은 레6:13-17을 직접 인용한 뒤, 제단에서 계속 타야 했던 불은 ‘주님의사랑,곧영원하고영속적인주님의자비’를 표상했다고 설명합니다. AC.6832(출3:2)역시 레6:12-13을 직접 인용하면서 이 영속적인 불이 신적 사랑을 표상했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처음부터 ‘우리의신앙열심을절대로식히지말라’는 명령으로 읽으면 중심이 인간에게 옮겨집니다. 제단의 불이 가장 먼저 나타내는 것은 인간의 사랑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입니다. 꺼지지 않는 것은 우리의 감정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입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의 영적 상태는 끊임없이 변합니다. 뜨거울 때도 있고 차가울 때도 있으며, 밝은 아침 같은 때도 있고 긴 밤 같은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밤이 되었다고 제단의 불까지 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주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때에도 주님의 사랑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불 위에 놓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영원하지만 인간에게는 날마다의 응답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어제의 예배로 오늘을 살 수 없고, 십 년 전의 뜨거웠던 체험으로 오늘의 악을 이길 수도 없습니다. 매일 말씀 앞에 서고, 오늘 보이는 악을 피하며, 오늘 행할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거듭남에는 두 방향이 동시에 있습니다. 하나는 위에서 아래로 끊임없이 오는 주님의 사랑과 자비이고, 다른 하나는 그 사랑을 날마다 받아들이고 응답하는 인간의 자유입니다. 전자가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후자가 없다면 주님의 사랑은 우리 안에서 삶이 되지 못합니다.
결국 ‘꺼지지않는불’은 레6전체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훔친 것을 돌려주고, 악과 거짓에서 정결하게 되고, 주님의 선을 받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는 이유는 그 모든 과정 아래에서 주님의 사랑이 한순간도 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불이 꺼질 때조차 주님의 불은 꺼지지 않습니다. 거듭남은 바로 그 영원한 불에 날마다 다시 자신의 삶을 가져가는 과정입니다. (SWC.레6심화2)
레위기 6장은 앞의 장들과 조금 다른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레4에서는 죄를 ‘깨닫는것’, 레5에서는 그것을 ‘자복하는것’과 ‘보상하는것’이 강조되었다면, 레6:1-7에서는 그 보상이 아주 구체적인 이웃 관계 안으로 들어옵니다. 맡긴 물건을 속이고, 전당물을 부인하고, 도둑질하고, 착취하고, 남이 잃은 물건을 주워 놓고도 모른다고 하며, 거기에 거짓 맹세까지 하는 경우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성경이 이런 행동을 단순히 ‘이웃에게신실하지못한것’이라고 하지 않고 ‘여호와께신실하지못하여범죄’한 것이라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이웃에게 행한 부정직이 곧 주님께 대한 범죄가 되는 것입니다. 체어리티와 예배를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이 제사의 법 한가운데서 드러납니다.
그래서 속건제의 순서도 중요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먼저 훔치거나 착취하거나 맡아 두었던 물건을 ‘돌려보내되곧그본래물건에오분의일을더하여’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숫양을 속건제물로 여호와께 가져갑니다. 레5에서 이미 보았듯이 속건제는 단순히 마음속에서 미안해하는 것으로 끝나는 회개가 아닙니다. 잘못으로 실제 손상이 생겼다면 가능한 범위에서 그것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가져가는 종교적 행위가 이웃에게 돌려주어야 할 것을 대신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이웃에게 바로잡을 것을 바로잡는 것과 주님 앞에서 속죄하는 것이 하나의 회개 안에 함께 들어 있습니다. 레6은 그래서 매우 강하게 말합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바로잡으려 한다면 이웃과의 관계에서 내가 저지른 실제 불의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까지가 레5후반의 속건제를 완성하는 부분이라면 8절부터는 시선이 크게 바뀝니다. 이제 ‘누가어떤제물을가져오는가’보다 제사장이 그 제물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가 중심이 됩니다. 번제, 소제, 속죄제의 규례가 다시 나오지만 레1, 2, 4의 단순한 반복이 아닙니다. 앞에서는 제물을 가져오는 사람의 입장에서 제사를 보았다면 여기서는 제단과 제사장의 입장에서 그 제사가 어떻게 계속되고, 어떻게 거룩하게 다루어지며,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레6은 레1-5에서 배운 제사의 의미를 한 단계 더 안쪽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심에 9절로 13절의 ‘불’이 있습니다. ‘제단의불이그위에서꺼지지않게할것이요’, ‘제단위의불은항상피워꺼지지않게할지니’, 그리고 다시 ‘불은끊임이없이제단위에피워꺼지지않게할지니라.’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이 부분에는 매우 분명한 스베덴보리의 직접 해설이 있습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2177(창18:6)은 레6:13-17을 직접 인용하면서 제단에서 계속 타고 있어야 했던 불은 ‘주님의사랑,곧영원하고영속적인주님의자비’를 표상했다고 설명합니다. AC.6832(출3:2)도 레6:12-13을 직접 인용하면서 제단 위의 영속적인 불이 신적 사랑 자체를 표상했다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이 불은 먼저 ‘우리의열심이꺼지지않아야한다’는 명령이 아닙니다. 인간의 사랑보다 먼저 꺼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을 향한 주님의 사랑과 자비입니다.
이것은 거듭남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영적 상태에는 아침과 저녁이 있고 뜨거울 때와 차가울 때가 있습니다. 어떤 날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충만하지만 어떤 날은 말씀을 읽는 것조차 힘들 수 있습니다. 만일 거듭남이 인간의 종교적 열심이라는 불에 달려 있다면 그 불은 오래전에 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단의 불은 인간이 처음 만들어 내는 불이 아닙니다. 주님의 신적 사랑이 먼저 끊임없이 흐르고 있으며 인간은 매일 아침 그 불 위에 나무를 놓고 번제를 벌여 놓습니다. 그러므로 ‘아침마다’라는 말씀과 ‘꺼지지않는불’이 함께 있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끊이지 않지만 인간은 날마다 새롭게 그 사랑에 응답해야 합니다. 거듭남은 한 번 뜨거워진 신앙으로 평생을 버티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흐르는 주님의 사랑을 매일 새롭게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과정입니다.
10절과 11절에서는 번제가 다 타고 남은 ‘재’가 등장합니다. 제사장은 세마포 옷을 입고 재를 제단 곁에 두었다가, 다시 옷을 갈아입고 그 재를 ‘진영바깥정결한곳’으로 가져갑니다. 여기에서도 세부를 함부로 상응시키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만, 세마포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AC.9959(출28:42)는 세마포가 외적 또는 자연적 진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하면서 바로 레6:10-11의 제사장이 재를 치울 때 세마포 옷과 속바지를 입었던 규정을 직접 인용합니다. 따라서 제사의 마지막 남은 것까지 진리의 질서 아래 처리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재가 ‘진영밖’으로 나가지만 아무 데나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정결한곳’으로 옮겨진다는 사실입니다. 제사가 끝났다고 해서 그 결과가 부정한 폐기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재 자체의 세부 의미에 대해서는 이번에 확보한 직접 원전보다 더 나아가 단정하지 않겠습니다.
14절로 18절의 소제 규례는 레2를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의 일부를 제단에서 불사르고 나머지를 아론과 그의 자손이 거룩한 곳에서 먹습니다. 그런데 AC.2177은 이 본문을 직접 해설하면서 고운 가루는 체어리티의 영적인 것을, 기름은 체어리티의 천적인 것을, 유향은 그렇게 주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한 움큼을 취하는 것은 온 힘과 온 영혼으로 사랑하는 것을, 누룩 없이 먹는 것은 순수하고 불결함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고 풀이합니다. 그리고 특히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남은 것을 먹는 것은 인간 편에서의 ‘상호성’과 ‘자기것으로삼음’을 표상하며, 그 결과 사랑과 체어리티를 통한 결합이 이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제물은 제단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께 드려진 선이 다시 인간에게 주어지고 인간의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레6에서 ‘먹는다’는 행동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AC.2187(창18:8)에서 거룩한 제물을 먹는 것은 ‘교통,결합,자기것으로삼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면서 레6:16, 18, 26을 직접 열거합니다. 제사장이 거룩한 것을 먹는 것은 단순히 제사장의 식량을 마련하기 위한 제도가 아니었습니다. 표상적으로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인간 안에 받아들여져 실제 생명의 일부가 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진리를 듣기만 하는 것과 그 진리가 내가 살아가는 선이 되는 것은 다릅니다. 말씀을 이해하는 것과 그것을 ‘먹어’ 자기 삶으로 만드는 것도 다릅니다. 거듭남은 결국 주님의 선과 진리가 내 생각과 의지와 행동 안으로 들어와 나의 삶이 되는 과정입니다.
19절로 23절에는 또 하나 특이한 소제가 나옵니다. 아론과 그의 자손이 기름 부음을 받는 날에는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아침과 저녁으로 나누어 드리되, 이 제물은 제사장이 먹지 않고 ‘온전히불사르라’고 합니다. AC.9993은 아론이 기름 부음을 받는 날 드리는 레6의 소제를 직접 언급하면서 누룩 없는 떡과 기름이 결합된 여러 형태가 천적 선의 서로 다른 층위를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는 모든 세부를 억지로 풀기보다 중요한 차이를 붙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일반 소제에서는 일부가 제사장에게 돌아가지만 제사장 자신을 위한 이 소제는 온전히 여호와께 돌려집니다. 주님께 봉사하는 직분 자체도 자기 소유가 될 수 없으며, 그것의 근원과 목적 전체가 주님께 있음을 보여 주는 매우 인상적인 규례입니다.
24절로 30절에서는 속죄제 규례가 다시 등장합니다. 여기서 반복되는 표현은 ‘지극히거룩하다’입니다. 죄를 다루는 제물인데 왜 오히려 ‘지극히거룩하다’고 부를까요? 스베덴보리는 정결이 단지 인간이 자기 악을 들여다보는 행위가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을 악과 거짓에서 실제로 건져 내시는 신적 역사라고 봅니다. AC.10132는 정결과 거듭남이 이노센스의 상태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속죄제와 속건제가 레6:17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지극히거룩하다’고 불렸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속죄제의 거룩함은 죄 자체가 거룩하다는 뜻이 아니라 죄를 제거하고 인간을 다시 주님의 질서 안으로 돌려놓으시는 주님의 정결케 하시는 역사가 거룩하다는 뜻입니다.
27절과 28절은 더욱 놀랍습니다. 속죄제의 고기에 접촉하는 것은 거룩하게 되고, 피가 옷에 묻으면 거룩한 곳에서 빨아야 하며, 고기를 토기에 삶았으면 그 그릇을 깨뜨리고 유기에 삶았으면 닦고 물로 씻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직접적인 원전이 있습니다. AC.10130(출29:37)은 레6:18, 27을 직접 인용하면서 ‘접촉’은 교통과 전달과 받아들임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AC.10105(출29:31)는 레6:28을 직접 인용하면서 토기는 ‘선과결합하지않는거짓’을, 유기는 ‘선이들어있는교리적인것’을 의미한다고 풀이합니다. 속죄제의 고기를 삶는 것은 악과 거짓에서 정결하게 되기 위한 준비를 의미하므로, 선과 결합할 수 없는 거짓은 ‘깨뜨려야’ 하지만 선을 담고 있는 교리적인 것은 버리지 않고 ‘닦고물로씻어’ 정결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레6의 가장 사소해 보이는 그릇 하나에도 거듭남의 놀라운 아르카나가 들어 있습니다.
마지막 30절에서는 속죄제 가운데서도 차이가 나타납니다. 어떤 속죄제는 제사장이 먹지만, 그 피를 회막 안 성소로 가지고 들어가 속죄한 제물은 먹지 않고 불살라야 합니다. 본문 자체가 이 둘을 분명히 구별합니다. 이것을 현재 확보한 원전 이상으로 세밀하게 상응시키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레6전체에서 한 가지 원리는 분명합니다. 제사의 모든 것이 똑같은 방식으로 처리되지 않습니다. 무엇은 제단에서 불살라지고, 무엇은 제사장이 먹으며, 무엇은 씻고, 무엇은 깨뜨리고, 무엇은 성소로 들어가고, 무엇은 다시 불살라집니다. 거듭남 역시 모든 것을 무조건 버리는 과정이 아닙니다. 악과 결합된 거짓은 깨뜨려야 하지만 선을 섬길 수 있는 진리는 정결하게 하여 보존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은 받아들여 자기 삶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서 레6은 놀랍도록 역동적인 장입니다. 처음에는 훔친 것을 ‘돌려보내라’고 하고, 마지막에는 속죄제의 그릇 하나까지 어떻게 정결하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그 모든 과정의 한가운데에는 ‘불은끊임이없이제단위에피워꺼지지않게할지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을 깨닫고, 자복하고, 돌려주고, 악과 거짓을 씻고,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삶으로 만들 수 있는 근원은 결국 우리의 의지력이 아닙니다. 꺼지지 않는 것은 우리의 열심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자비입니다. 그 영원한 불이 제단 위에 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오늘도 다시 정결하게 되고, 다시 선을 받아들이며, 다시 이웃에게 바로 행하는 삶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레6이 보여 주는 거듭남의 질서입니다. (SWC.레6해설)
레위기 1장의 번제 규례 가운데 특별히 눈길을 끄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내장과정강이를물로씻을것이요’라는 규정입니다. 소의 번제에서도 나오고 양이나 염소의 번제에서도 똑같이 반복됩니다. 제물을 어차피 모두 불태울 것이라면 왜 굳이 내장과 정강이를 먼저 물로 씻어야 했을까요? 위생을 위한 절차라고만 보기에는 스베덴보리가 이 부분에 매우 구체적인 영적 의미를 부여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49(출29:17)는 ‘내장을씻는것’이 가장 낮은 것들의 정결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에게는 속 사람에서부터 가장 바깥의 자연적 삶에 이르기까지 여러 층위가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낮은 것들은 자연계와 감각에 직접 접촉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자극과 자기 사랑, 세상 사랑, 감각의 즐거움과 오류가 쉽게 들어오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이어 AC.10050(출29:17)은 ‘정강이’를 자연적 인간의 외적인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내장과 정강이를 씻는다는 것은 단순히 인간의 생각이나 종교적 감정만 정결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낮고 바깥에 있는 자연적인 삶까지 정결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거듭남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영적인 변화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고, 말씀을 더 잘 이해하고, 기도할 때 감동을 받으면 자신이 많이 변화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레위기 1장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내장과정강이까지씻으라’고 합니다. 가장 낮은 것과 가장 바깥의 것까지 정결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내장과정강이’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을 문자적으로 일대일 대응시킬 필요는 없지만 그 원리는 우리의 일상생활에 충분히 적용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대할 때 무심코 튀어나오는 말, 돈을 사용하는 방식, 가족에게 보이는 태도, 아무도 보지 않을 때의 행동, 오래 굳어진 습관, 자기 이익이 걸렸을 때 내리는 선택, 다른 사람의 실수를 바라보는 마음, 몸의 감각적 즐거움을 다루는 방식 같은 것들입니다. 신앙생활과 별개라고 생각하기 쉬운 바로 이런 영역이 자연적 인간의 실제 삶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을 ‘물로’ 씻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씻는 의식이 내적 정결을 표상하며, 물은 인간을 정결하게 하고 거듭나게 하는 신앙의 진리와 관계한다고 설명합니다(AC.9088, 출40:31). 따라서 우리의 자연적 삶을 씻는 물은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입니다. 진리는 단순히 머릿속에 저장되는 교리 지식이 아니라 우리 삶을 비추어 ‘이것은악이다’, ‘이것은피해야한다’, ‘이것은주님께서원하시는선이다’라고 분별하게 하는 빛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에 의해 씻긴다는 것은 말씀을 많이 아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진리에 비추어 자기 삶을 살피고, 악이라고 알게 된 것을 실제로 피하는 것입니다. 거짓말이 악임을 아는 것과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은 다릅니다. 용서해야 한다는 진리를 아는 것과 실제로 원한을 내려놓기 위해 싸우는 것도 다릅니다. 체어리티를 이해하는 것과 불편한 이웃을 실제로 선하게 대하는 것도 다릅니다. 진리가 자연적 삶에 내려와 행동을 변화시키기 시작할 때 비로소 ‘씻음’이 일어납니다.
여기에는 또 하나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장과 정강이를 없애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씻으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자연적 인간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우리의 몸, 감각, 일, 재산, 인간관계, 취미와 일상생활 자체가 제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지배를 받으며 무질서해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연적 인간을 파괴하시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 정결하게 하셔서 속 사람을 섬기도록 질서를 회복하십니다.
그리고 씻긴 내장과 정강이는 마침내 다른 부분들과 함께 제단 위에서 불살라집니다. 이것이 참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처음에는 가장 낮고 바깥에 있어서 더럽혀지기 쉬웠던 것들이 진리의 물로 씻긴 후에는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번제의 일부가 됩니다. 인간의 가장 일상적이고 자연적인 삶까지 주님을 향한 사랑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신앙과 일상의 거리는 오히려 좁아집니다. 교회에 있을 때의 나와 집에 있을 때의 내가 달라서는 안 되고, 기도할 때의 나와 돈을 사용할 때의 내가 달라서는 안 되며, 말씀을 읽을 때의 나와 사람을 대할 때의 내가 서로 다른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속에서 받아들인 선과 진리가 가장 바깥의 말과 행동에까지 내려와야 합니다.
레위기 1장의 ‘내장과정강이를물로씻으라’는 짧은 규례는 그래서 매우 실제적인 거듭남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가장 고상한 부분만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가장 낮고 일상적인 부분까지 진리로 씻어 당신의 질서 안으로 가져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부분까지 사랑의 불 위에 놓일 때 비로소 번제는 ‘전부’가 됩니다. 삶의 일부가 아니라 삶 전체가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SWC.레1심화3)
그리스도인이 레위기 1장의 번제를 읽으면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떠올립니다. 흠 없는 제물이 사람을 대신하여 죽고 피를 흘린다는 모습이 주님의 죽음과 매우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흔히 구약의 희생제사를 ‘죄인이받아야할형벌을예수님께서대신받으신사건의예표’로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번제는 예수님의 대속 죽음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도 희생제사와 번제의 최고 의미가 주님께 관한 것임을 인정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번제와예수그리스도는관계가없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관계는 매우 깊습니다. 문제는 ‘어떤방식으로관계하는가?’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2776(창22:2)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드리라’고 하신 말씀을 해설하면서 ‘번제로드리는것’이 주님께서 자신을 신성에 거룩하게 하시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주님께서 시험과 승리를 통하여 자신의 인성을 신성과 하나 되게 하신 과정과 연결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주님의 ‘영화’입니다.
따라서 번제의 최고 의미에서 우리가 먼저 보아야 할 것은 ‘성부께서죄에대한형벌을요구하시고성자께서죄인대신그형벌을받으셨다’는 장면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성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지옥의 모든 세력과 싸우시고 시험을 이기시며, 자신의 인성을 완전히 신성하게 하신 구속과 영화의 과정입니다. 십자가는 그 과정에서 가장 마지막이며 가장 큰 시험이었습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형벌대속의 구조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면 성부는 진노하여 형벌을 요구하시는 분이고 성자는 그 진노를 대신 받아 인간을 구해 내시는 분처럼 이해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구속을 이루신 분은 한 분 주님이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인성을 입고 오셔서 인간을 붙잡고 있던 지옥의 권세를 이기시고, 인간이 다시 자유롭게 주님을 향할 수 있는 질서를 회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한 신적 위격이 다른 신적 위격을 만족시키기 위한 형벌의 지불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인간 구원을 위하여 끝까지 감당하신 마지막 시험과 승리의 절정으로 이해됩니다.
이렇게 보면 레위기 1장의 번제와 십자가의 관계도 훨씬 깊어집니다. 번제물 전체가 불 위에 드려지는 모습은 단지 ‘누군가대신죽는다’는 한 장면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인성을 완전히 신성에 결합시키시는 영화의 전 과정을 표상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번제와 희생제사의 세세한 의식들이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의 영화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AC.10057, 출29:18).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주님의 영화와 우리의 거듭남이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영화와 인간의 거듭남은 서로 전혀 관계없는 두 주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성을 영화롭게 하셨기 때문에 인간의 거듭남이 가능해졌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으로 지옥을 정복하시고 인성을 신성하게 하심으로써 이제 모든 인간에게 악과 거짓을 이길 수 있는 신적 생명과 능력을 공급하십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자신을 거듭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되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거듭납니다.
그래서 희생제사와 번제는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의 영화이고, 상대적 의미에서는 인간의 거듭남입니다. 이 두 의미는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주님 안에서 완전하게 이루어진 것이 인간 안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점차 이루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시험을 통하여 인성을 신성과 완전히 하나 되게 하셨고,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시험을 통과하면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점차 하나의 질서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우리를위해죽으셨다’는 말 자체를 버려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의 죽음까지 감당하셨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입니다. 다만 그 ‘우리를위하여’를 ‘우리가받아야할형벌의정확한양을대신받으셨다’는 의미로만 제한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지옥과 싸우셨고, 우리를 위하여 모든 시험을 이기셨으며, 우리를 위하여 인성을 영화롭게 하셨고, 그리하여 우리가 악과 거짓에서 벗어나 다시 주님과 결합할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그러므로 레위기 1장의 번제를 보면서 우리는 분명히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주님은 성부의 진노를 달래기 위해 희생당하는 별개의 신적 인격이 아니라, 친히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셔서 자신의 인성을 신성하게 하시고 지옥을 이기신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영화로 말미암아 오늘 우리 안에서도 거듭남이라는 또 하나의 번제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십자가는 우리에게 ‘주님이다하셨으니나는아무것도하지않아도된다’는 자리가 아니라, 주님께서 이루신 구속의 능력 안에서 우리도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선과 진리의 삶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됩니다. 주님의 영화가 우리 안에서는 거듭남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번제와 십자가를 함께 바라볼 때 드러나는 더 깊은 연결입니다. (SWC.레1심화2)
레위기 1장을 처음 읽는 현대 독자에게 가장 먼저 생기는 질문 가운데 하나는 ‘왜하나님께서는굳이동물을죽여제물로드리게하셨을까?’입니다. 소와 양과 염소의 목을 따고,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고, 몸을 각 뜨고, 그것을 불에 태우는 장면은 오늘날 우리의 감각으로는 상당히 낯설고 심지어 잔혹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정말 이런 동물의 죽음과 피와 불을 원하셨던 것일까요?
스베덴보리의 설명에서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제사자체가예배의본질이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Coelestia, 1749-1756, AC) 922(창8:20)는 번제와 희생제사가 내적 예배를 표상했다고 설명합니다. 소와 양과 염소와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가 각각 서로 다른 천적인 것들을 표상했으며, 크게 보아 짐승들은 체어리티의 선을, 새들은 신앙의 진리를 표상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신 것은 짐승 자체가 아니라 그 짐승들이 표상하고 있는 인간 안의 선과 진리, 사랑과 체어리티와 신앙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성경 자체에서도 반복해서 드러납니다. 사무엘은 ‘여호와께서번제와다른제사를그의목소리를청종하는것을좋아하심같이좋아하시겠나이까순종이제사보다낫고듣는것이숫양의기름보다나으니’라고 말합니다(삼상15:22). 미가 역시 수많은 번제물보다 ‘정의를행하며인자를사랑하며겸손하게네하나님과함께행하는것’을 말씀합니다(미6:6-8). 호세아에서는 더욱 직접적으로 ‘나는인애를원하고제사를원하지아니하며번제보다하나님을아는것을원하노라’고 하십니다(호6:6). 스베덴보리가 AC.922(창8:20)에서 바로 이러한 말씀들을 인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외적 제사는 내적 예배를 담고 있을 때만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외적인 제사 형식이 필요했을까요? 고대의 표상교회에서는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이 자연계의 사물과 행위들을 통해 표상되었습니다. 제단과 불과 피와 물, 그리고 서로 다른 종류의 동물들은 각각 천국의 실재를 표상했습니다. 그래서 제사의 세세한 규례도 임의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희생제사와 번제의 각 과정 안에 ‘천국의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설명합니다(AC.10057, 출29:18). 최고 의미에서는 그것들이 주님의 영화에 관한 것이며, 상대적 의미에서는 인간의 거듭남과 정결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레위기의 제사는 ‘죄를지었으니하나님께서화가나셨고,그화를풀기위해동물을죽여피를보여드려야한다’는 구조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피는 신적 진리를 표상하고(AC.10046, 출29:16), 물로 씻는 것은 진리에 의한 정결과 관계하며, 제단의 불은 사랑을 표상합니다. 짐승의 종류들 역시 인간 안의 서로 다른 선과 진리의 애정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제사 전체는 악과 거짓으로부터 인간이 정결하게 되고, 선과 진리가 그 안에 심어지고, 마침내 그것들이 결합하여 하나의 새로운 삶을 이루는 과정을 가시적인 의식으로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가장 분명하게 정리하는 것이 AC.10143(출29:42)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희생제사와 번제가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 선과 진리의 심음, 그리고 그 둘의 결합을 의미하며, 이 전체가 거듭남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제단 위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궁극적으로 짐승에게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에게 관한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무엇을 정결하게 하시고, 무엇을 새롭게 하시며, 어떻게 인간을 당신과 결합시키시는지를 보여 주는 표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동물의 죽음 자체가 아닙니다. 그 외적 의식이 표상하고 있던 내적 실재였습니다. 인간이 악을 버리고,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며, 체어리티의 선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참된 제사였습니다. 외적 제사가 그 내적 실재와 분리되는 순간 제사는 껍데기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그토록 강하게 제사를 책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사를 드리면서도 악을 행한다면 제사의 표상과 실제 삶이 완전히 분리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소와 양과 비둘기를 제단에서 불사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레위기의 제사가 우리와 무관해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제는 그 외적 표상이 가리키던 실재를 우리의 삶에서 살아야 합니다.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며, 이웃을 사랑하고, 우리의 자연적인 삶까지 주님의 질서 안으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짐승의 번제는 사라졌지만 그것이 표상하던 ‘살아있는예배’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레위기 1장을 읽으며 ‘왜하나님께서는이런제사를명하셨을까?’라고 묻는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피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을 통하여 표상되는 인간의 거듭남이었습니다. 제단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궁극적으로 우리 안에서 일어나야 할 일을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참된 제사는 짐승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악을 버리는 것이며, 참된 번제는 인간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가 주님의 사랑 안에서 새롭게 되어 삶 전체가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SWC.레1심화1)
레위기를 펼치면 현대의 그리스도인에게는 매우 낯선 세계가 나타납니다. 소와 양과 염소를 잡고,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고,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며,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고, 마침내 제물을 불태웁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제사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므로 레위기 1장은 자칫 오래전에 폐지된 제사 규정을 기록한 장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으면 전혀 다른 세계가 열립니다. 스베덴보리는 번제와 희생제사의 의식과 절차 안에 ‘천국의아르카나’가 있으며,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의 인성의 영화에 관한 것이고, 상대적 의미에서는 인간의 거듭남과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에 관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레위기 1장은 단순히 짐승을 어떻게 잡고 불사를 것인가를 가르치는 장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정결하게 하시고 선과 진리를 그 안에 심고 결합하셔서 마침내 인간 전체가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게 하시는가를 보여 주는 장입니다.
그런데 레위기의 첫 장은 인간이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장면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회막에서모세를부르시고그에게말씀하여이르시되’로 시작합니다. 먼저 부르시는 분은 여호와이십니다. 출애굽기 마지막에서 성막이 완성되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한 뒤, 바로 이어지는 레위기의 첫 음성이 ‘부르심’이라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784(출27:20)는 ‘회막’이 주님의 임재를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제사의 출발점은 인간의 종교적 열심이 아니라 인간 가운데 임재하시는 주님입니다. 거듭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먼저 주님을 찾아내고 무엇인가를 드려 주님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고 우리를 부르시며 인간은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께 나아갑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인간이 가지고 나오는 것이 ‘예물’입니다. 첫 번째로 등장하는 것은 소의 번제입니다. ‘그예물이소의번제이면흠없는수컷으로회막문에서여호와앞에기쁘게받으시도록드릴지니라.’ 스베덴보리는 제사에 사용되는 동물들이 아무렇게나 선택된 것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각각의 동물은 서로 다른 종류의 선과 진리, 그리고 서로 다른 예배의 상태를 표상합니다. 특별히 소 떼에 속한 동물들은 겉 또는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애정을 표상하며, 수송아지는 겉 또는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이노센스와 체어리티의 선을 의미합니다(AC.9391, 출24:5). 그러므로 번제는 우리의 종교적 생각이나 감정만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몸을 가지고 세상에서 살아가는 실제 생활, 곧 말과 행동, 습관과 관계, 일상의 선택까지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제물을 가져온 사람은 번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습니다. 이것 역시 단순한 의식적 접촉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는 것이 전달과 이전과 받아들임을 표상한다고 설명하며, 머리는 전체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AC.10023, 출29:10). 따라서 이 장면에는 인간 자신과 번제가 표상하는 예배 사이의 결합이라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번제는 나와 상관없는 짐승 하나가 대신 죽는 외적 사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번제가 표상하는 정결과 거룩하게 됨이 바로 나의 삶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변화되어야 하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나 자신이며, 나의 생각과 의지와 삶 전체입니다.
그 다음에는 피가 등장합니다. ‘아론의자손제사장들은그피를가져다가회막문앞제단사방에뿌릴것이며.’ 스베덴보리는 제사의 피가 신적 진리를 표상한다고 설명하고(AC.10046, 출29:16), 그 피가 제단에 뿌려지는 것은 신적 진리와 신적 선의 결합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AC.10047, 출29:16). 이것은 거듭남의 매우 중요한 질서를 보여 줍니다. 인간은 막연히 착해지고 싶다고 해서 거듭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가 우리 삶 안으로 들어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밝히고, 그 진리에 따라 악을 피하며 살아갈 때 정결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진리를 우리 안의 선과 결합하십니다. 그러므로 제단에 뿌려지는 피는 단순히 죽음의 흔적이 아니라 인간을 정결하게 하고 선과 진리가 결합하게 하는 신적 진리의 표상입니다.
이제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뜹니다. 이 두 행위에도 분명 내적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희생제사와 번제의 세세한 의식과 절차 안에 천국의 아르카나가 있으며, 그것들이 인간의 거듭남을 표상한다고 분명히 말하기 때문입니다(AC.10057, 출29:18). 그러나 여기서는 더 나아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가죽’이 말씀에서 일반적으로 가장 바깥의 것을 표상한다는 원리는 확인할 수 있지만, 레1:6의 ‘가죽을벗기는행위’ 자체를 스베덴보리가 정확히 어떻게 적용하는지 충분한 직접 근거가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럴듯한 의미를 만들어 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각을뜨는것’ 역시 의미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구체적인 상응은 현재로서는 보류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상응은 우리의 상상력이 아니라 말씀 안에 주님께서 두신 질서이므로, 확인되는 만큼만 읽는 것이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 충실합니다.
그러나 ‘그내장과정강이를물로씻을것이요’에서는 다시 매우 분명한 길이 열립니다. 스베덴보리는 제사의 내장을 씻는 것이 가장 낮은 것들의 정결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AC.10049, 출29:17), 이어 정강이는 자연적 인간의 외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AC.10050, 출29:17). 인간의 가장 낮고 자연적인 부분은 세상과 직접 접촉하기 때문에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감각적 즐거움과 오류에 쉽게 물듭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도 정결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에서 ‘물로씻는것’은 진리에 의한 정결과 관계합니다. 인간이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면서 악에서 돌이킬 때 자연적 인간도 점차 정결하게 됩니다.
여기서 레위기 1장의 거듭남 이해가 매우 실제적인 것이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자연적 인간을 없애려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몸도 없애지 않으시고, 일상생활도 없애지 않으시며, 인간의 자연적인 능력도 없애지 않으십니다. 그것들을 씻으십니다. 거짓과 악에 물든 것을 진리로 정결하게 하시고, 자연적 인간이 속 사람을 섬기며 주님의 선을 실제 삶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질서 안에 두십니다. 거듭남은 자연적인 것을 버리고 영적인 존재가 되는 과정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 안에서 바르게 표현되도록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질서 있게 결합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씻은 내장과 정강이는 버리지 않습니다. 제사장은 ‘그전부를제단위에서불살라’ 번제로 드립니다. 여기서 번제의 핵심이 드러납니다. ‘전부’입니다. 머리만도 아니고, 좋은 부분만도 아니며, 속 사람만도 아닙니다. 가장 낮은 자연적 부분까지 씻긴 후에는 모두 제단의 불 위로 올라갑니다. 스베덴보리는 ‘불’이 주님과 그분께 드리는 예배에 사용될 때 사랑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향기로운냄새’는 주님께 기쁘고 받아들여지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체어리티와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신앙으로부터의 예배라고 설명하면서 바로 레1:9, 13, 17을 인용합니다(AC.925, 창8:21). 그러므로 번제의 마지막은 인간의 소멸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인간 전체가 정결해져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가는 상태가 번제가 지향하는 내적 실재입니다.
따라서 ‘여호와께향기로운냄새’라는 표현도 문자적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짐승이 타는 냄새를 좋아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 향기로운 것은 제물의 연기가 아니라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살아 있는 예배입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사랑하며,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인간의 변화된 삶이 주님께 ‘향기로운냄새’가 되는 것입니다(AC.925, 창8:21).
10절부터는 양이나 염소의 번제가 이어집니다. 절차는 소의 번제와 매우 비슷하지만 제물의 종류가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소 떼의 동물들과 양 떼의 동물들을 구별하며, 전자가 겉 또는 자연적 인간 안의 선과 진리의 애정을 표상한다면 후자는 속 또는 영적 인간 안의 선과 진리의 애정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AC.9391). 이것은 번제가 인간의 겉 생활만이 아니라 속의 애정과 의도까지 관계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사람은 겉으로 선한 일을 하면서도 속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고, 반대로 선한 뜻을 품고 있다고 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그것을 행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거듭남은 어느 한쪽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속과 겉이 함께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소의 번제에서 양과 염소의 번제, 다시 새의 번제로 이어지는 순서를 거듭남의 시간적인 ‘1단계,2단계,3단계’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각각의 제물이 서로 다른 종류의 선과 진리 및 예배 상태를 표상한다고 설명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레1의 배열 자체를 인간이 차례로 통과하는 세 단계라고 직접 설명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세 종류의 번제는 거듭나는 인간 전체 안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층위와 상태를 보여 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층위가 결국 하나의 목적, 곧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는 상태를 향한다는 것입니다.
14절에서는 다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제 짐승이 아니라 ‘산비둘기나집비둘기새끼’가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노아가 번제를 드린 창8:20을 해설하면서 레1:3-17을 직접 언급합니다. 그는 번제에 사용된 소와 어린양과 염소와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가 각각 특별한 천적인 것을 의미했으며, 큰 구별에서 짐승은 체어리티의 선을, 새는 신앙의 진리를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AC.922, 창8:20). 또한 비둘기는 거듭나는 사람에게 있는 신앙의 진리와 선, 특별히 신앙의 이해에 속한 것들과 관계합니다(AC.870, 창8:8-9). 따라서 주님께서는 인간의 애정만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생각과 이해, 곧 진리를 받아들이고 분별하는 능력까지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러나 신앙의 진리 역시 그 자체가 최종 목적은 아닙니다. 말씀을 많이 알고 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거듭남의 완성은 아닙니다. 진리는 인간을 선으로 인도하고, 마침내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을 이루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새의 번제도 마지막에는 똑같이 ‘이는화제라여호와께향기로운냄새니라’로 끝납니다. 소의 번제도, 양이나 염소의 번제도, 새의 번제도 마지막 목적지는 같습니다. 서로 다른 선과 진리, 서로 다른 인간의 상태가 결국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새의 번제에는 ‘모이주머니와그더러운것은제거하여제단동쪽재버리는곳에던지고’, ‘날개자리에서그몸을찢되아주찢지말고’라는 매우 특이한 규정도 있습니다. 이것들 역시 아무 의미 없는 절차는 아닐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희생제사와 번제의 세부 규정 안에 천국의 아르카나가 있다고 분명히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재 확인된 원전만으로 ‘모이주머니는이것이다’, ‘날개자리에서찢는것은이것이다’, ‘아주찢지않는것은이것이다’라고 단정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말씀을 읽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즉시 상징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확인된 상응에는 충실하고 아직 확인되지 않은 곳에서는 멈출 줄 아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제 레위기 1장 전체를 다시 보면 처음 보았던 피와 죽음과 불의 장면 뒤에서 하나의 놀라운 거듭남의 서사가 나타납니다. 주님께서 회막에서 인간을 부르십니다. 인간은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께 나아갑니다. 번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자신과 그 예배가 결합합니다. 피, 곧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진리가 인간을 정결하게 하고 선과 결합합니다. 가장 낮은 자연적 삶까지 진리의 물로 씻깁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함께 질서 안으로 들어옵니다. 신앙의 진리와 체어리티의 선이 함께 주님께 향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전부’가 불 위에 놓입니다. 인간 전체가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전체 과정을 매우 간결하고 실제적으로 정리합니다. 희생제사와 번제는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 선과 진리의 심음, 그리고 선과 진리의 결합을 표상하며, 이것이 바로 거듭남이라고 설명합니다(AC.10143, 출29:42). 그리고 악과 거짓에서 정결해진다는 것은 그것들을 삼가고 피하며 싫어하는 것이고, 선과 진리가 심어진다는 것은 선하고 참된 것을 생각하고 의지하며 말하고 행하는 것이며, 선과 진리의 결합은 그것들로 이루어진 삶을 사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번제는 종교적 감정의 한 순간이나 ‘모든것을바치겠다’는 결단에 머물지 않습니다. 실제 삶 전체가 주님의 선과 진리에 의해 변화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레위기 1장이 오늘 우리에게 묻는 질문은 ‘나는하나님께무엇을희생할것인가?’보다 더 깊습니다. ‘내안에서아직진리의물로씻기지않은것은무엇인가?’, ‘내속사람과겉사람은서로하나가되어있는가?’, ‘내가알고있는진리는실제선한삶과결합하고있는가?’, ‘나의가장자연적이고일상적인삶까지주님의질서안으로들어오고있는가?’, 그리고 ‘내삶전체는사랑으로부터주님을예배하고있는가?’입니다.
번제와 희생제사 자체가 예배의 본질이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내적 예배를 표상하는 외적 형식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외적 제사가 내적 예배와 분리되면 참된 예배가 될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AC.922). 그러므로 오늘날 동물의 번제가 사라졌다고 해서 레위기 1장의 말씀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외적 표상이 사라진 지금 우리는 그 표상 안에 감추어져 있던 내적 실재, 곧 실제 삶에서 이루어지는 거듭남을 읽어야 합니다.
레위기 1장의 번제는 인간이 하나님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악과 거짓에서 정결하게 하시고, 선과 진리를 그 안에 심으시며, 그것들을 서로 결합하셔서 마침내 인간의 가장 깊은 애정에서 가장 바깥의 일상생활까지 주님을 향하게 하시는 이야기입니다. 그때 인간의 예배는 더 이상 입술이나 의식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삶 전체가 예배가 됩니다. 이것이 ‘그전부를제단위에서불살라’라는 번제의 아르카나이며, 주님께 ‘향기로운냄새’가 되는 살아 있는 예배입니다. (SWC.레1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