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영상은 아주 사소한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남편이 처음 가는 길에서 차선을 하나 잘못 탑니다. 아내가 말합니다. ‘아, 진짜. 그것도 제대로 못 해?’ 조금 뒤 주차가 한 번에 되지 않자 ‘됐어. 그냥 내가 할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연애할 때도 이 남자는 운전을 잘하는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는 ‘괜찮아. 다시 가면 되지’ 하며 웃었습니다. 똑같은 사람이 똑같은 실수를 했는데, 10년 사이에 ‘웃을 일’이 ‘못난 일’이 되었습니다. 영상은 여기서 질문합니다. ‘사람은 그대로인데 왜 평가만 달라졌는가?’

 

영상이 내놓는 답은 ‘고마움이 사라진 자리에 채점표가 들어앉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연애할 때 집까지 데려다주면 고맙고, 밥값을 내면 고맙고, 퇴근길에 케이크 하나를 사와도 ‘내 생각이 나서 샀구나’ 합니다. 그러나 결혼 후에는 운전도, 월급도, 집안일도, 아이 돌보는 것도 모두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 됩니다. 물론 결혼하면 서로 책임을 지므로 어느 정도 당연해지는 것은 정상입니다. 문제는 ‘책임이 당연해지는 것’과 함께 ‘고마움까지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랑은 상대에게서 무엇을 받을 것인가를 먼저 세지 않지만, proprium은 끊임없이 계산합니다. ‘나는 이만큼 했는데 당신은 무엇을 했어?’, ‘남편이라면 이 정도는 해야 하는 것 아니야?’, ‘다른 집 남편은 저렇게 하는데 당신은 왜 못 해?’ 이렇게 상대가 ‘사랑하는 사람’에서 ‘나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순간, 부부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장부가 생깁니다. 그리고 그 장부의 특징은 매우 불공정합니다. 잘한 것은 ‘원래 해야 할 일’이어서 기록하지 않고, 못한 것만 기록합니다.

 

영상은 이것을 정확히 짚습니다. 남편이 매일 출근하고 월급을 가져오고, 주말에 아이를 데리고 나가고, 차에 이상이 생기면 정비소를 알아보고, 보일러가 고장 나면 기사를 부르는 일들은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재활용을 한 번 내놓지 않으면 ‘당신은 집에서 하는 게 뭐야?’라는 말이 나옵니다. 영상은 이 말이 아픈 이유를 ‘하나를 지적당해서가 아니라 하나로 사람 전체가 정리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참 예리한 지적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대하시는 방식은 이와 정반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오래 읽다 보면 거듭남 가운데 있는 인간이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지 거듭 만나게 됩니다. 주님은 그 불완전함을 모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 자신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아십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한 번의 실패로 그 사람 전체를 규정하지 않으시고, 그 안에 남겨 두신 선과 진리, 곧 리메인스를 보존하시며 끊임없이 그 사람을 선 쪽으로 이끄십니다. 그렇다면 결혼 안에서도 사랑은 상대의 결점을 못 보는 것이 아니라 ‘결점을 보면서도 그 결점으로 그 사람 전체를 규정하지 않는 것’에 가까울 것입니다.

 

영상에는 더 깊은 통찰이 하나 나옵니다. 결혼하면서 배우자 위에 ‘남편’이라는 자리가 덮인다는 것입니다. 연애할 때는 ‘이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해주었는가’를 보지만 결혼 후에는 ‘남편이면 이 정도는 해야 하는 것 아닌가?’로 기준이 바뀝니다. 더구나 그 ‘이 정도’라는 기준을 현실의 한 사람에게서 가져오는 것도 아닙니다. 돈은 가장 많이 버는 남편에게서, 집안일은 가장 잘하는 남편에게서, 육아는 가장 다정한 아빠에게서, 성격은 가장 무던한 남편에게서 하나씩 가져와 머릿속에 ‘이상적인 남편’을 조립합니다. 그리고 현실의 한 남자에게 그 모든 기준을 요구합니다. 영상의 표현처럼 ‘사람이 내려간 게 아니라 기준이 올라간 것’입니다.

 

이것은 비교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비교는 현실의 배우자와 현실의 다른 한 사람을 비교하지 않습니다. 여러 사람의 가장 좋은 부분만 잘라 붙인 ‘존재하지 않는 사람’과 내 배우자를 비교합니다. 그러므로 내 배우자가 이길 방법이 없습니다. 남편에게 적용하면 ‘돈도 잘 벌고, 집안일도 잘하고, 아이에게도 자상하고, 부모에게도 잘하고, 말도 다정하고, 아내 마음도 알아서 헤아리며, 취미도 건전하고, 외모 관리도 하는 남편’이 됩니다. 아내에게 똑같이 적용하면 역시 현실에 존재하기 어려운 여자가 만들어집니다.

 

여기서 영상 제목의 한계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결혼 후 남편을 무시하기 시작하는 여자들의 특징’이라고 되어 있지만, 이 현상은 여성에게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남편 역시 아내를 다른 여성들과 비교하며 똑같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누구 아내는 돈도 벌면서 집안일도 잘한다더라’, ‘누구 엄마는 아이 교육을 저렇게 한다더라’, ‘연애할 때는 안 그랬는데 왜 이렇게 변했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상 자체도 후반부에서 남편이 아내의 외모나 친정을 약점으로 공격하는 것 역시 관계를 무너뜨린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여자의 문제’로만 읽으면 영상에서 건질 수 있는 훨씬 깊은 진실을 놓치게 됩니다.

 

특히 눈여겨볼 것은 ‘말’입니다. 밖에서는 직장 동료나 친구에게 절대로 하지 않을 말을 배우자에게는 너무 쉽게 합니다. ‘그것도 못 해?’, ‘당신이 뭘 알아?’, ‘당신은 센스 없잖아’, ‘당신한테 시키면 두 번 일이야.’ 심지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우리 남편은 진짜 똥손이야’, ‘우리 집에서 제일 큰 애가 얘야’ 같은 말을 농담으로 합니다. 처음에는 모두 웃습니다. 남편도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웃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반복되면 농담이 아니라 그 가정에서 그 사람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됩니다.

 

이 대목은 영적으로 매우 무겁습니다. 말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에는 생각이 실리고, 생각에는 애정이 실립니다. 계속해서 상대를 낮추는 말이 입에서 나온다면 이미 내 안에서는 그 사람을 낮추어 보는 시선이 어느 정도 자리 잡았다는 뜻입니다. 더 무서운 것은 처음에는 화가 나서 그런 말을 하지만, 반복하다 보면 그 말에 맞추어 상대를 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원래 그런 사람이야’라는 말은 결국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든 틀 속에 상대를 가두는 일이 됩니다.

 

영상이 보여주는 악순환은 더욱 섬뜩합니다. 아내가 남편의 판단을 계속 고쳐줍니다. 무엇을 사오면 ‘왜 이것을 샀어?’, 의견을 내면 ‘당신이 뭘 알아?’, 일을 하면 ‘그렇게 하는 게 아니지’라고 합니다. 그러면 남편은 어느 순간부터 아내의 표정을 먼저 살핍니다. ‘이걸 사도 되나?’, ‘이 말을 하면 또 틀렸다고 하려나?’ 결국 자기 의견을 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아내가 다시 말합니다. ‘당신은 왜 자기 생각이 없어?’ 알아서 하면 지적받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알아서 하는 게 없다’고 지적받습니다.

 

영상은 이를 ‘몇 년에 걸쳐 서로가 제일 싫어하는 모습을 서로에게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남편이 무엇을 해도 고쳐주다 보니 남편은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고,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남편을 보면서 아내는 ‘역시 이 사람은 내가 시켜야만 움직인다’고 확신합니다. 이 부분은 거듭남이라는 관점에서도 생각할 거리가 많습니다. 인간관계에서 우리는 상대의 악을 단지 발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우리의 태도로 그 약점을 더욱 강화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남편의 무책임이나 게으름을 모두 아내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무책임한 남편도 있고, 가족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남편도 있으며, 모든 결정을 배우자에게 떠넘기면서 편하게 살아온 사람도 있습니다. ‘아내가 잔소리를 해서 남편이 이렇게 되었다’는 하나의 설명으로 모든 부부를 해석한다면 그것 역시 영상이 경계하는 ‘채점표’와 다르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먼저 향해야 합니다. ‘상대가 왜 저렇게 되었는가?’보다 먼저 ‘나는 이 관계 안에서 무엇을 만들어 내고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영상에서 특히 아픈 부분은 배우자가 서로의 약점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는 대목입니다. 배우자는 회사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돌아온 얼굴도 보고, 승진에서 밀린 날도 알고, 돈 걱정으로 잠들지 못하는 밤도 압니다. 좋은 배우자는 그 약점을 알기 때문에 지켜줍니다. 그러나 관계가 상하면 바로 그 지식이 무기가 됩니다. ‘그러니까 회사에서도 인정 못 받지’, ‘당신이 그러니까 승진을 못 하는 거야.’ 가장 믿었던 사람이 가장 아픈 곳의 정확한 위치를 알고 거기를 누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혼의 친밀성이 가진 두 얼굴입니다. 친밀함은 상대의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갈 수 있는 특권입니다. 동시에 그만큼 깊은 상처를 줄 수 있는 능력이기도 합니다. 낯선 사람은 내가 어디가 아픈지 모릅니다. 배우자는 압니다. 그래서 결혼애에서 친밀함은 단순히 서로 많은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알게 된 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상대의 약점을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을 보호하는 데 사용하는가, 싸움에서 이기는 데 사용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때 체어리티가 매우 구체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체어리티는 막연하게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감정이 아닙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약점을 이용하지 않는 것, 상대의 실수를 사람 전체의 평가로 확대하지 않는 것, 내가 옳더라도 상대의 인격을 짓밟는 방식으로 그 옳음을 행사하지 않는 것 역시 체어리티입니다. 특히 부부 싸움에서 ‘사실인 말’이 가장 잔인한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거짓말이라서 상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어서 더 깊이 박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비교입니다. 결혼할 때 남편의 월급에 만족했던 아내가 몇 년 뒤 주변 친구들의 남편과 비교하기 시작합니다. 누구는 대기업으로 옮겼고, 누구는 서울에 집을 샀고, 누구 집 아이는 학원을 여러 개 다닙니다. 그러자 어제까지 성실하게 출근하고 월급을 가져오며 아이를 사랑하던 남편이 갑자기 부족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영상은 ‘바뀐 건 남편이 아니라 비교 대상이 하나 생겼다는 것뿐’이라고 지적합니다.

 

비교는 감사의 반대편에 있습니다. 감사는 ‘내게 주어진 것’을 보지만 비교는 ‘내게 없는 것’을 봅니다. 감사는 지금 내 곁의 사람을 보지만 비교는 다른 사람의 장점을 끌어와 내 곁의 사람을 재판합니다. 그리고 비교에는 끝이 없습니다. 내 배우자보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도 언제나 있고, 더 다정한 사람도 있고, 더 집안일을 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기준을 따라가기 시작하면 배우자의 가치는 계속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영상에서 가장 안타까운 변화는 결국 남편이 ‘말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설명합니다. 다음에는 다툽니다. 그다음에는 피합니다. 마지막에는 ‘응’, ‘알았어’, ‘그래’ 세 마디만 남습니다. 아내는 ‘당신은 왜 나랑 대화를 안 해?’라고 하지만 남편은 이미 ‘말해서 뭐 하나? 어차피 틀렸다고 할 텐데’라는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영상 마지막 질문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우리 남편은 왜 나랑 대화를 안 해요?’가 아니라 ‘그 사람은 언제부터 말을 안 하게 됐을까요?’입니다.

 

더 무서운 것은 싸움마저 사라지는 순간입니다. 남편은 퇴근하고 지하주차장에서 휴대전화를 보다가 올라가고, 아내는 아이와 친구와 취미에 집중합니다. 같은 집에서 ‘관리비 냈어?’, ‘아이 학원 데려다줘’, ‘택배 받아줘’ 같은 기능적인 말만 합니다. 겉으로는 조용합니다. 그러나 영상은 ‘조용한 집을 사이 좋은 집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싸움이 없어진 게 아니라 기대가 없어진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결혼애’(Conjugial Love, 1768, CL)에서 스베덴보리가 결혼을 바라보는 핵심에는 두 마음의 결합이 있습니다. 몸이 한집에 산다고 결합된 것이 아닙니다. 함께 돈을 쓰고 아이를 키운다고 자동으로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서로의 내면을 향해 열리고, 서로의 선을 기뻐하며, 점점 하나가 되기를 원하는 방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영상 속 ‘조용한 부부’의 문제는 싸움이 없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두 사람의 내면이 서로에게 닫혔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영상은 남편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말합니다. 많은 남편이 ‘참는 것이 가정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공개적인 비하나 모욕을 그냥 웃고 넘깁니다. 그러나 영상은 필요하다면 ‘그 얘기는 그만하자’, ‘그런 말 듣는 것 싫어. 앞으로는 하지 마’라고 차분히 선을 표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역시 중요한 균형입니다. 체어리티는 무조건 참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가 악한 습관을 계속하도록 방치하는 것도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선을 긋는다’는 것을 보복이나 권력투쟁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나를 무시했으니 나도 당신을 무시하겠다’가 아니라 ‘우리 사이에서 이런 방식의 말은 서로에게 좋지 않으니 여기서 멈추자’는 것입니다. 상대를 굴복시키기 위한 경계가 아니라 관계를 보호하기 위한 경계입니다. 사랑은 무조건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위해 질서를 세우기도 합니다.

 

영상이 제시하는 회복의 출발점은 의외로 작습니다. 거창한 ‘우리 대화 좀 하자’가 아니라 상대가 한 일을 하나씩 다시 알아보는 것입니다. ‘오늘 그것 챙겨줘서 편했어’, ‘이거 당신이 알아본 거지?’ 영상은 이를 ‘잔소리를 줄이는 것’과 구별합니다. 잔소리만 줄이면 집이 조용해질 뿐이지만 ‘잘한 것을 세기 시작하면 사람이 다시 말을 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표현하면 ‘선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에게는 악과 거짓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심어 두시고 보존하신 선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관계가 나빠질수록 상대 안의 선은 보지 않고 악과 결점만 수집합니다. 마치 검사가 유죄 증거만 모으듯 지난 몇 년의 사건들을 모아 ‘봐, 당신은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는 판결문을 작성합니다. 회복은 그 판결문을 찢는 데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상대의 잘못을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잘못 때문에 보이지 않게 된 선을 다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더 깊은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나는 왜 배우자를 무시할 때 은밀한 만족을 느끼는가?’ 상대가 틀리고 내가 옳다는 것을 확인할 때 proprium은 만족합니다. 내가 더 현명하고, 더 책임감 있고, 더 희생하며, 이 가정이 유지되는 것은 ‘내가 붙잡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상당히 달콤할 수 있습니다. 영상에서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남편을 깎아내리는 이유 중 하나를 ‘자기가 인정받고 싶어서’라고 분석합니다. 남편이 얼마나 못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그런 사람을 데리고 이 집을 이만큼 꾸려가는 나’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렌즈는 남편에게서 아내에게로, 그리고 다시 영상을 보고 있는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와야 합니다. ‘저런 여자와 살면 얼마나 힘들까?’에서 멈추면 이 영상은 또 하나의 남녀 갈등 콘텐츠가 됩니다. 그러나 ‘나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어떤 채점표를 들이대고 있는가?’라고 묻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배우자뿐 아니라 자녀, 부모, 교회 공동체의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오랜 관계일수록 그렇습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는 작은 친절에도 감사하지만 가족이 수십 년 동안 해온 수고에는 좀처럼 감사하지 않습니다. 낯선 사람이 문을 잡아주면 ‘감사합니다’라고 하면서 배우자가 매일 차려주는 밥, 벌어오는 생활비, 운전, 설거지, 장보기, 병원 동행, 아이 돌봄에는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가족이니까 당연하지’라는 말은 어느 순간 사랑을 가장 빠르게 메마르게 하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영상 마지막의 말이 그래서 오래 남습니다. ‘상대 아래에 있는 사람처럼 대하지 않는 것. 밖에서는 절대 안 할 말을 가족이라는 이유로 하지 않는 것. 상대의 약한 자리를 안다는 이유로 거기를 누르지 않는 것. 남의 집 배우자를 기준으로 내 옆 사람의 값을 매기지 않는 것.’ 이것은 단순한 부부관계 기술을 넘어 체어리티의 매우 실제적인 모습과 맞닿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결혼은 상대가 내 기대를 얼마나 잘 충족시키는지를 평가하는 긴 시험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가까운 한 사람을 통해 내 proprium이 얼마나 끈질긴지를 발견하고, 그것을 주님 앞에서 내려놓으며,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거듭남의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배우자의 결점은 분명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두 길이 갈립니다. ‘당신은 왜 그것도 못 해?’라고 상대를 내려다보는 길과, ‘이 사람의 부족함 앞에서 지금 내 안에서는 무엇이 올라오고 있는가?’라고 자신을 돌아보는 길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결혼생활에서 가장 위험한 날은 크게 싸운 날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상대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된 날, 잘해도 아무 느낌이 없고 못하면 짜증만 나는 날, 서로의 마음보다 기능만 주고받는 날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회복의 시작도 거창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 배우자가 해온 아주 작은 선 하나를 다시 발견하고 그것을 입 밖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고마워.’

 

결국 이 영상의 제목 ‘당신은 왜 그것도 못 해?’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뒤집으면 우리 자신을 향한 질문 하나가 남습니다. ‘나는 왜 가장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의 선은 당연하게 여기면서, 그의 부족함은 그렇게 쉽게 세고 있는가?’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배우자의 성적표가 아니라 내 손에 들린 ‘채점표’를 바라보게 됩니다. 어쩌면 주님께서 먼저 내려놓게 하시는 것은 상대의 결점이 아니라 바로 그 채점표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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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은 명절이 끝난 뒤 이혼이 늘어나는 현상에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영상이 실제로 다루는 것은 ‘명절 때문에 이혼하는 부부’가 아닙니다. 오랫동안 쌓여 있던 부부 관계의 균열이 명절이라는 특별한 환경에서 한꺼번에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영상의 표현대로 명절은 ‘원인이라기보다 촉매제’입니다. 시댁과 처가, 방문 순서, 음식 준비, 설거지, 육아, 용돈, 제사, 친척들의 질문과 비교가 며칠 안에 집중되면서 평소에는 감추어져 있던 관계의 질서가 밖으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영상은 그 수많은 갈등을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모읍니다. ‘우리는 정말 한 팀인가?’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켜면 영상에서 말하는 ‘한 팀’이라는 표현이 훨씬 깊어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결혼은 단순히 두 사람이 공동생활을 하는 계약이 아닙니다. ‘결혼애’(Conjugial Love, 1768, CL)에서 그는 참된 결혼의 본질을 두 마음(minds)이 하나를 향하여 결합되어 가는 데서 찾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육체적으로 한집에 사는 것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서로의 선과 진리가 결합하면서 두 사람의 삶이 점차 하나의 삶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결혼애에는 ‘하나가 되고자 하는 의지’가 있습니다(CL.215). 성경의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창2:24)는 말씀 역시 단순히 육체적 결합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내적 결합의 질서를 품고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영상 속 지영 씨를 무너뜨린 것은 정말 전 몇 장이나 설거지가 아닙니다. 영상에서도 정확히 그 점을 짚습니다. 시어머니의 말은 여러 해 견뎠지만 남편이 ‘우리 엄마가 틀린 말했어? 네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되잖아’라고 말하는 순간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왜 그 한마디가 그렇게 무거웠을까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결혼을 통해 형성되어야 할 ‘우리’가 그 순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내가 요구했던 것은 남편이 어머니와 싸워 달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나는 하나의 새로운 삶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여전히 자신의 원가족을 중심으로 판단하고 배우자에게 그 질서에 적응할 것을 요구합니다. 외적으로는 결혼했지만 내적인 관계의 중심은 아직 이동하지 않은 셈입니다.

 

여기서 창세기 2장의 말씀이 놀랍도록 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 이 말씀에서 ‘부모를 떠난다’는 것을 부모를 버리거나 효도를 중단한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문자적으로도 결혼은 부모와의 관계를 끊는 명령이 아닙니다. 그러나 결혼 후 관계의 질서에는 분명한 변화가 생깁니다. 이제 남편과 아내 사이에 새로운 가장 가까운 공동체가 형성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에 대한 사랑이 배우자와의 결혼적 결합을 지속적으로 침범하거나 파괴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많아서 생긴 문제가 아니라 사랑들의 ‘질서’가 뒤바뀐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상에서 특히 예리한 대목이 바로 ‘내 부모는 내가 챙긴다’는 제안입니다. ‘아들이 효도하고 싶은데 며느리가 일을 하고, 딸이 효도하고 싶은데 사위가 비용을 부담한다’는 지적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생각해 볼 만한 대목입니다. 선(good)은 단지 외적으로 선해 보이는 행동이라고 해서 선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행동 안에 들어 있는 사랑과 목적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선합니다. 그러나 ‘내가 효자가 되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배우자의 노동과 시간과 감정을 당연한 자원처럼 사용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외형은 ‘효도’이지만 그 안에는 자기 사랑(proprium)이 숨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집은 원래 그래’, ‘며느리라면 이 정도는 해야지’, ‘사위가 그 정도도 못하나’라는 말에는 전통이라는 이름을 입은 proprium이 숨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렌즈를 반대쪽에도 똑같이 적용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시댁을 비판하기 위한 렌즈도, 며느리나 사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렌즈도 아닙니다. 배우자가 언제나 ‘내 편’을 들어야 한다는 주장 역시 잘못 이해하면 또 하나의 proprium이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내 배우자니까 내가 옳든 그르든 내 편이어야 해’라는 요구는 결혼애가 아닙니다. 참된 결혼적 결합은 두 사람이 서로의 자기성을 강화해 주는 동맹이 아니라 함께 주님의 질서 아래 들어가는 결합이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잘못했으면 부모의 잘못을 인정하고, 배우자가 잘못했으면 배우자의 잘못 역시 사랑 가운데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영상의 ‘내 편’이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무조건 나를 편드는 사람’이 아니라 ‘나와 함께 선과 진리를 향해 서는 사람’으로 한 단계 정화되어야 합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부당한 말을 했을 때 남편이 ‘우리 엄마 원래 그래. 네가 참아’라고 말하는 것은 배우자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아내가 ‘당신 어머니가 저런 말을 했으니 이제 다시는 만나지 마’라고 요구한다면 그것 역시 반드시 올바른 질서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가장 건강한 반응은 영상이 제안한 것처럼 남편이 자신의 어머니에게 ‘엄마, 그 문제는 우리가 알아서 할게’라고 경계를 세우면서도 어머니를 미워하거나 모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히려 체어리티(charity)에 가깝습니다. 체어리티는 모든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영원한 선을 바라보며 질서를 세우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모 공경과 배우자 사랑은 본래 서로 경쟁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문제는 ‘누구를 더 사랑하느냐’가 아니라 각각의 사랑을 어느 자리에 놓느냐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질서의 나라입니다. 높은 사랑이 낮은 사랑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을 제자리에 놓습니다.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하면서도 배우자와 함께 형성한 새로운 가정의 경계를 지킬 수 있습니다. 오히려 제대로 세워진 결혼 관계 안에서 부모를 사랑할 때 그 효도 역시 더 자유롭고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배우자를 희생시켜 부모를 만족시키는 것은 결국 부모와 배우자 모두에게 좋지 않은 열매를 남깁니다.

 

영상에서 명절의 또 다른 특징은 평소 숨겨져 있던 것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거듭남의 관점에서 특히 흥미롭습니다. 우리는 평온할 때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피곤하고, 돈이 들고, 교통이 막히고, 아이가 울고, 부모가 압박하고, 배우자가 예민해지면 평소 숨어 있던 자기 사랑과 지배욕과 인정 욕구가 밖으로 올라옵니다. 그렇다면 명절은 단순히 피해야 할 스트레스 기간만은 아닙니다. 영적으로 보면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여 주는 작은 시험(temptation)의 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왜 아내가 우리 부모에게 이것밖에 못 하지?’, ‘왜 남편은 우리 친정에서는 저렇게 무뚝뚝하지?’, ‘왜 내가 손해 봐야 하지?’ 하는 감정들이 올라올 때, 우리는 그 감정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상 제목인 ‘존버의 경제학’도 이 렌즈 아래에서는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결혼에서 무조건 오래 버티는 것이 선은 아닙니다. 그러나 불편함이 생길 때마다 관계를 포기하는 것 역시 결혼의 깊은 의미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참느냐, 떠나느냐’라는 이분법보다 ‘이 관계 안에서 무엇이 거듭나고 있는가?’입니다. 일곱 번의 명절 동안 한 사람이 계속 참고 다른 사람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참음이 반드시 거듭남으로 이어진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참음이 사랑에서 나온 인내가 아니라 두려움과 체념으로 굳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갈등을 계기로 남편과 아내가 자기 안의 proprium을 발견하고 서로의 고통을 듣고 관계의 질서를 다시 세운다면, 바로 그 갈등이 거듭남의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영상 마지막의 질문은 매우 좋습니다. ‘오늘 뭐 불편한 거 없었어?’ 겉으로 보면 아주 평범한 한마디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것은 상당히 깊은 질문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당신 마음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알고 싶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결혼적 결합은 상대를 소유하는 데서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내면을 존중하며 알려고 하는 데서 깊어집니다. 다만 여기에 한마디를 더 보탤 수 있겠습니다. ‘오늘 내가 당신을 힘들게 한 것은 없었어?’입니다. 첫 질문이 상대의 고통을 듣는 질문이라면 두 번째 질문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질문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proprium의 벽에 작은 틈이 생깁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결혼의 최종 목적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완벽한 배우자가 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두 사람 모두 불완전한 인간이며 각자 자기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혼의 중심에 배우자만 놓으면 결국 서로에게 감당할 수 없는 요구를 하게 됩니다. 참된 중심은 주님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도,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는 것도 결국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서로에게 흘려보내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결혼은 스베덴보리에게 단순한 행복의 제도가 아니라 거듭남의 매우 깊은 학교가 됩니다. 가장 가까이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 proprium이 가장 많이 드러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가장 깊은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도 있는 관계입니다.

 

결국 이 영상이 묻는 ‘우리는 정말 한 팀인가?’라는 질문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팀’이라는 것은 배우자가 무조건 내 편이 되어 부모와 싸워 주는 것이 아닙니다. 두 사람이 부모를 공경하면서도 서로를 희생시키지 않고, 서로의 잘못을 감싸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바로잡으며, 각자의 proprium을 상대에게 관철시키는 대신 함께 주님의 질서 아래 서는 것입니다. 그렇게 남편과 아내가 ‘내 부모’, ‘네 부모’, ‘내 돈’, ‘네 시간’, ‘내 희생’을 넘어 조금씩 ‘우리’가 되어 갈 때, 창세기의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는 말씀은 결혼식 날 읽고 끝나는 문장이 아니라 수십 년에 걸쳐 이루어지는 거듭남의 말씀이 됩니다.

 

그러므로 명절은 어쩌면 결혼을 무너뜨리는 날이라기보다 결혼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드러내는 날인지도 모릅니다. 시댁도 처가도, 전도 설거지도, 용돈도 방문 순서도 그 자체가 본질은 아닙니다. 그것들을 통하여 ‘나는 배우자를 사랑하는가, 아니면 배우자를 통해 내 뜻을 이루려 하는가?’, ‘나는 부모를 공경하는가, 아니면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배우자를 사용하고 있는가?’, ‘배우자가 힘들다고 말할 때 나는 그의 고통을 듣는가, 아니면 즉시 나도 힘들었다며 자기변호를 시작하는가?’가 드러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명절은 불편하지만 정직한 거울입니다.

 

그리고 그 거울 앞에서 발견한 것이 아름답지 않더라도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거듭남은 자기 안에 악이 없음을 확인하는 과정이 아니라, 주님의 빛 가운데 그것을 발견하고 돌이키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명절에 싸웠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싸움 이후입니다. ‘누가 옳았는가?’만 묻는 대신 ‘이번 일을 통해 주님께서 내 안의 무엇을 보여 주셨는가?’라고 묻기 시작할 때, 명절의 갈등조차 결혼을 파괴하는 사건에서 두 사람을 조금 더 하나로 만들어 가는 거듭남의 재료로 바뀔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 영상을 통해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한 번 더 비추어 볼 수 있는 지점입니다.

 

 

 

SY.103, 존버의 경제학, ‘명절 이혼이 많은 진짜 이유’ - 부모의 입장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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