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은 명절이 끝난 뒤 이혼이 늘어나는 현상에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영상이 실제로 다루는 것은 ‘명절 때문에 이혼하는 부부’가 아닙니다. 오랫동안 쌓여 있던 부부 관계의 균열이 명절이라는 특별한 환경에서 한꺼번에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영상의 표현대로 명절은 ‘원인이라기보다 촉매제’입니다. 시댁과 처가, 방문 순서, 음식 준비, 설거지, 육아, 용돈, 제사, 친척들의 질문과 비교가 며칠 안에 집중되면서 평소에는 감추어져 있던 관계의 질서가 밖으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영상은 그 수많은 갈등을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모읍니다. ‘우리는 정말 팀인가?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켜면 영상에서 말하는 ‘ ’이라는 표현이 훨씬 깊어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결혼은 단순히 두 사람이 공동생활을 하는 계약이 아닙니다. ‘결혼애(Conjugial Love, 1768, CL)에서 그는 참된 결혼의 본질을 두 마음(minds)이 하나를 향하여 결합되어 가는 데서 찾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육체적으로 한집에 사는 것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서로의 선과 진리가 결합하면서 두 사람의 삶이 점차 하나의 삶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결혼애에는 ‘하나가 되고자 하는 의지’가 있습니다(CL.215). 성경의 ‘둘이 몸이 될지니라(2:24)는 말씀 역시 단순히 육체적 결합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내적 결합의 질서를 품고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영상 속 지영 씨를 무너뜨린 것은 정말 전 몇 장이나 설거지가 아닙니다. 영상에서도 정확히 그 점을 짚습니다. 시어머니의 말은 여러 해 견뎠지만 남편이 ‘우리 엄마가 틀린 말했어? 네가 조금만 노력하면 되잖아’라고 말하는 순간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왜 그 한마디가 그렇게 무거웠을까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결혼을 통해 형성되어야 할 ‘우리’가 그 순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내가 요구했던 것은 남편이 어머니와 싸워 달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나는 하나의 새로운 삶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여전히 자신의 원가족을 중심으로 판단하고 배우자에게 그 질서에 적응할 것을 요구합니다. 외적으로는 결혼했지만 내적인 관계의 중심은 아직 이동하지 않은 셈입니다.

 

여기서 창세기 2장의 말씀이 놀랍도록 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몸을 이룰지로다(2:24). 이 말씀에서 ‘부모를 떠난다’는 것을 부모를 버리거나 효도를 중단한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문자적으로도 결혼은 부모와의 관계를 끊는 명령이 아닙니다. 그러나 결혼 후 관계의 질서에는 분명한 변화가 생깁니다. 이제 남편과 아내 사이에 새로운 가장 가까운 공동체가 형성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에 대한 사랑이 배우자와의 결혼적 결합을 지속적으로 침범하거나 파괴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많아서 생긴 문제가 아니라 사랑들의 ‘질서’가 뒤바뀐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상에서 특히 예리한 대목이 바로 ‘ 부모는 내가 챙긴다’는 제안입니다. ‘아들이 효도하고 싶은데 며느리가 일을 하고, 딸이 효도하고 싶은데 사위가 비용을 부담한다’는 지적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생각해 볼 만한 대목입니다. 선(good)은 단지 외적으로 선해 보이는 행동이라고 해서 선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행동 안에 들어 있는 사랑과 목적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선합니다. 그러나 ‘내가 효자가 되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배우자의 노동과 시간과 감정을 당연한 자원처럼 사용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외형은 ‘효도’이지만 그 안에는 자기 사랑(proprium)이 숨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집은 원래 그래’, ‘며느리라면 정도는 해야지’, ‘사위가 정도도 못하나’라는 말에는 전통이라는 이름을 입은 proprium이 숨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렌즈를 반대쪽에도 똑같이 적용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시댁을 비판하기 위한 렌즈도, 며느리나 사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렌즈도 아닙니다. 배우자가 언제나 ‘ ’을 들어야 한다는 주장 역시 잘못 이해하면 또 하나의 proprium이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배우자니까 내가 옳든 그르든 편이어야 ’라는 요구는 결혼애가 아닙니다. 참된 결혼적 결합은 두 사람이 서로의 자기성을 강화해 주는 동맹이 아니라 함께 주님의 질서 아래 들어가는 결합이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잘못했으면 부모의 잘못을 인정하고, 배우자가 잘못했으면 배우자의 잘못 역시 사랑 가운데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영상의 ‘ ’이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무조건 나를 편드는 사람’이 아니라 ‘나와 함께 선과 진리를 향해 서는 사람’으로 한 단계 정화되어야 합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부당한 말을 했을 때 남편이 ‘우리 엄마 원래 그래. 네가 참아’라고 말하는 것은 배우자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아내가 ‘당신 어머니가 저런 말을 했으니 이제 다시는 만나지 ’라고 요구한다면 그것 역시 반드시 올바른 질서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가장 건강한 반응은 영상이 제안한 것처럼 남편이 자신의 어머니에게 ‘엄마, 문제는 우리가 알아서 할게’라고 경계를 세우면서도 어머니를 미워하거나 모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히려 체어리티(charity)에 가깝습니다. 체어리티는 모든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영원한 선을 바라보며 질서를 세우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모 공경과 배우자 사랑은 본래 서로 경쟁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문제는 ‘누구를 사랑하느냐’가 아니라 각각의 사랑을 어느 자리에 놓느냐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질서의 나라입니다. 높은 사랑이 낮은 사랑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을 제자리에 놓습니다.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하면서도 배우자와 함께 형성한 새로운 가정의 경계를 지킬 수 있습니다. 오히려 제대로 세워진 결혼 관계 안에서 부모를 사랑할 때 그 효도 역시 더 자유롭고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배우자를 희생시켜 부모를 만족시키는 것은 결국 부모와 배우자 모두에게 좋지 않은 열매를 남깁니다.

 

영상에서 명절의 또 다른 특징은 평소 숨겨져 있던 것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거듭남의 관점에서 특히 흥미롭습니다. 우리는 평온할 때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피곤하고, 돈이 들고, 교통이 막히고, 아이가 울고, 부모가 압박하고, 배우자가 예민해지면 평소 숨어 있던 자기 사랑과 지배욕과 인정 욕구가 밖으로 올라옵니다. 그렇다면 명절은 단순히 피해야 할 스트레스 기간만은 아닙니다. 영적으로 보면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여 주는 작은 시험(temptation)의 장이 될 수도 있습니다. ‘ 아내가 우리 부모에게 이것밖에 하지?’, ‘ 남편은 우리 친정에서는 저렇게 무뚝뚝하지?’, ‘ 내가 손해 봐야 하지?’ 하는 감정들이 올라올 때, 우리는 그 감정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상 제목인 ‘존버의 경제학’도 이 렌즈 아래에서는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결혼에서 무조건 오래 버티는 것이 선은 아닙니다. 그러나 불편함이 생길 때마다 관계를 포기하는 것 역시 결혼의 깊은 의미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참느냐, 떠나느냐’라는 이분법보다 ‘ 관계 안에서 무엇이 거듭나고 있는가?’입니다. 일곱 번의 명절 동안 한 사람이 계속 참고 다른 사람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참음이 반드시 거듭남으로 이어진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참음이 사랑에서 나온 인내가 아니라 두려움과 체념으로 굳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갈등을 계기로 남편과 아내가 자기 안의 proprium을 발견하고 서로의 고통을 듣고 관계의 질서를 다시 세운다면, 바로 그 갈등이 거듭남의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영상 마지막의 질문은 매우 좋습니다. ‘오늘 불편한 없었어?’ 겉으로 보면 아주 평범한 한마디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것은 상당히 깊은 질문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당신 마음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알고 싶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결혼적 결합은 상대를 소유하는 데서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내면을 존중하며 알려고 하는 데서 깊어집니다. 다만 여기에 한마디를 더 보탤 수 있겠습니다. ‘오늘 내가 당신을 힘들게 것은 없었어?’입니다. 첫 질문이 상대의 고통을 듣는 질문이라면 두 번째 질문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질문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proprium의 벽에 작은 틈이 생깁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결혼의 최종 목적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완벽한 배우자가 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두 사람 모두 불완전한 인간이며 각자 자기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혼의 중심에 배우자만 놓으면 결국 서로에게 감당할 수 없는 요구를 하게 됩니다. 참된 중심은 주님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도,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는 것도 결국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서로에게 흘려보내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결혼은 스베덴보리에게 단순한 행복의 제도가 아니라 거듭남의 매우 깊은 학교가 됩니다. 가장 가까이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 proprium이 가장 많이 드러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가장 깊은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도 있는 관계입니다.

 

결국 이 영상이 묻는 ‘우리는 정말 팀인가?’라는 질문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이라는 것은 배우자가 무조건 내 편이 되어 부모와 싸워 주는 것이 아닙니다. 두 사람이 부모를 공경하면서도 서로를 희생시키지 않고, 서로의 잘못을 감싸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바로잡으며, 각자의 proprium을 상대에게 관철시키는 대신 함께 주님의 질서 아래 서는 것입니다. 그렇게 남편과 아내가 ‘ 부모’, ‘ 부모’, ‘ ’, ‘ 시간’, ‘ 희생’을 넘어 조금씩 ‘우리’가 되어 갈 때, 창세기의 ‘둘이 몸을 이룰지로다’라는 말씀은 결혼식 날 읽고 끝나는 문장이 아니라 수십 년에 걸쳐 이루어지는 거듭남의 말씀이 됩니다.

 

그러므로 명절은 어쩌면 결혼을 무너뜨리는 날이라기보다 결혼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드러내는 날인지도 모릅니다. 시댁도 처가도, 전도 설거지도, 용돈도 방문 순서도 그 자체가 본질은 아닙니다. 그것들을 통하여 ‘나는 배우자를 사랑하는가, 아니면 배우자를 통해 뜻을 이루려 하는가?’, ‘나는 부모를 공경하는가, 아니면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배우자를 사용하고 있는가?’, ‘배우자가 힘들다고 말할 나는 그의 고통을 듣는가, 아니면 즉시 나도 힘들었다며 자기변호를 시작하는가?’가 드러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명절은 불편하지만 정직한 거울입니다.

 

그리고 그 거울 앞에서 발견한 것이 아름답지 않더라도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거듭남은 자기 안에 악이 없음을 확인하는 과정이 아니라, 주님의 빛 가운데 그것을 발견하고 돌이키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명절에 싸웠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싸움 이후입니다. ‘누가 옳았는가?’만 묻는 대신 ‘이번 일을 통해 주님께서 안의 무엇을 보여 주셨는가?’라고 묻기 시작할 때, 명절의 갈등조차 결혼을 파괴하는 사건에서 두 사람을 조금 더 하나로 만들어 가는 거듭남의 재료로 바뀔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 영상을 통해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한 번 더 비추어 볼 수 있는 지점입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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