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5

‘가축의 조상’(father of cattle)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에서 나오는 선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이 장 2절에 관하여 앞에서 설명한 내용으로부터 분명해집니다. 거기서는 ‘양 떼를 치는 자’(shepherd of the flock)가 체어리티의 선을 의미한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목자’(shepherd) 대신 ‘조상’(father)이라는 말을, ‘양 떼’(flock) 대신 ‘가축’(cattle)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야발이 ‘조상’(father)이라고 불리는 ‘가축’(cattle)이라는 말은 ‘장막’(tent) 바로 뒤에 나옵니다. 이로부터 그것이 사랑의 거룩한 것에서 나오는 선을 의미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또한 여기서 뜻하는 것은 가축을 위한 거처나 우리, 곧 장막과 가축 우리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조상이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들이 사랑의 천적인 것들에서 나오는 선들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말씀의 여러 구절에서 분명해집니다. 예레미야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That by the “father of cattle” is signified the good that is derived from the holy things of love, is evident from what was shown above, at verse 2 of this chapter, where it was shown that a “shepherd of the flock” signifies the good of charity. Here however the term “father” is employed instead of “shepherd,” and “cattle” instead of “flock”; and the word “cattle,” of which Jabal is said to be the “father,” follows immediately after “tent,” whence it is evident that it signifies the good that comes from the holy of love, and that there is meant a habitation or fold for cattle, or the father of them that dwell in tents and in folds for cattle. And that these expressions signify goods from the celestial things of love, is evident from various passages in the Word. As in Jeremiah:

 

내가 내 양 떼의 남은 것을 그 몰려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의 생육이 번성할 것이며 (렘23:3) I will gather the remnants of my flock out of all lands whither I have scattered them, and I will bring them again to their folds, that they may be fruitful and multiply. (Jer. 23:3)

 

에스겔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In Ezekiel:

 

좋은 꼴을 먹이고 그 우리를 이스라엘 높은 산에 두리니 그것들이 그곳에 있는 좋은 우리에 누워 있으며 이스라엘 산에서 살진 꼴을 먹으리라 (겔34:14) I will feed them in a good pasture, and upon the mountains of the height of Israel shall their fold be; there shall they lie down in a good fold, and in a fat pasture shall they feed upon the mountains of Israel, (Ezek. 34:14)

 

여기서 ‘우리들’(folds)과 ‘목초지들’(pastures)은 사랑의 선들을 나타내며, ‘기름짐’(fatness)도 그러한 선들에 관하여 말하는 표현입니다. 이사야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where “folds” and “pastures” denote the goods of love, of which “fatness” is predicated. In Isaiah:

 

네가 땅에 뿌린 종자에 주께서 비를 주사 땅이 먹을 것을 내며 곡식이 풍성하고 기름지게 하실 것이며 그날에 네 가축이 광활한 목장에서 먹을 것이요 (사30:23) He shall give the rain of thy seed wherewith thou shalt sow the ground; and bread of the increase of the ground shall be fat and full of oil; in that day shall he feed thy cattle in a broad meadow, (Isa. 30:23)

 

여기서 ‘떡’(bread)은 천적인 것을 의미하고, 가축이 먹는 ‘기름진 것’(fat)은 거기서 나오는 선들을 의미합니다. 예레미야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where by “bread” is signified what is celestial, and by the “fat” whereon the cattle should feed, the goods thence derived. In Jeremiah:

 

11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원하시되 12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여호와의 복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를 얻고 크게 기뻐하리라 그 심령은 물 댄 동산 같겠고 (렘31:11, 12) Jehovah hath redeemed Jacob, and they shall come and sing in the height of Zion, and shall flow together to the good of Jehovah, for the wheat, and for the new wine, and for the oil, and for the sons of the flock, and of the herd; and their soul shall be as a watered garden, (Jer. 31:11–12)

 

여기서는 ‘밀’(wheat)과 ‘기름’(oil)으로 여호와의 거룩한 것을, ‘새 포도주’(new wine)와 ‘양 떼와 소 떼의 새끼들’(sons of the flock and of the herd), 곧 ‘가축’(cattle)으로 거기서 나오는 선들을 묘사합니다. 또 다른 곳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where the holy of Jehovah is described by “wheat” and “oil,” and the goods derived from it by “new wine” and the “sons of the flock and of the herd,” or of “cattle.” Again:

 

목자들이 그 양 떼를 몰고 와서 주위에 자기 장막을 치고 각기 그 처소에서 먹이리로다 (렘6:3) The shepherds and the flocks of their cattle shall come unto the daughter of Zion; they shall pitch their tents toward her round about; they shall feed everyone his own space. (Jer. 6:3)

 

‘딸 시온’(daughter of Zion)은 천적 교회를 나타내며, ‘장막들’(tents)과 ‘가축 떼들’(flocks of cattle)은 그 교회에 관하여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The “daughter of Zion” denotes the celestial church, of which “tents” and “flocks of cattle” are predicated.

 

해설

AC.415는 야발에 관한 설명을 마무리하면서, 그가 왜 ‘가축의 조상’이라고 불리는지를 밝힙니다. 앞의 AC.414에서는 ‘장막’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말씀의 여러 구절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장막 바로 뒤에 나오는 ‘가축’에 주목합니다. 창4:20에서 장막과 가축은 서로 무관한 두 가지 생업으로 나열된 것이 아닙니다. 장막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나타내고, 가축이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을 나타내기 때문에 두 표현이 함께 놓인 것입니다. 이 번호의 중심은 ‘가축이 무엇을 뜻하는가?’라는 질문뿐 아니라, ‘그 선은 어디에서 나오는가?’라는 질문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창4:2의 아벨을 떠올리게 합니다.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그 표현은 체어리티의 선을 의미한다고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야발에 대해서는 ‘목자’ 대신 ‘조상’, ‘양 떼’ 대신 ‘가축’이라는 말이 사용됩니다. 더구나 ‘가축’은 사랑의 거룩한 것을 나타내는 ‘장막’ 바로 뒤에 나옵니다. 따라서 두 인물을 단순히 ‘둘 다 가축을 치므로 같은 뜻이다’라고 처리해서는 안 됩니다. 아벨의 경우에는 체어리티의 선이, 야발의 경우에는 장막이 나타내는 사랑의 거룩한 것에서 비롯되는 선이 강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표현과 그 배열을 함께 살펴 이러한 차이를 밝힙니다.

 

‘사랑에서 나오는 선’이라는 말은 사랑과 선을 서로 떨어진 두 가지로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여기서 사랑은 사람이 무엇을 진심으로 원하고 소중히 여기는가와 관계되며, 선은 그 사랑에서 비롯되는 좋은 것과 그에 따른 삶에 관계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사랑에 따라 선을 원하고 행하도록 이끌립니다. 그러나 외적으로 좋은 일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일의 내적인 근원까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AC.415가 말하는 것은 모든 선행을 무조건 천적인 선이라고 부르자는 뜻이 아니라, 야발의 ‘가축’이 특별히 사랑의 거룩한 것에서 나오는 선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축의 속뜻을 알려면 그 앞에 놓인 장막의 의미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렘23:3에서 주님은 흩어진 양 떼의 남은 자들을 모아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시고, 그들이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겔34:14에서는 양 떼를 좋은 꼴로 먹이시고, 좋은 우리에 눕게 하시며, 살진 꼴을 먹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말씀을 통해 ‘우리’와 ‘목초지’가 사랑의 선들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겔34:14의 ‘기름짐’도 그러한 선들에 관하여 사용되는 표현이라고 밝힙니다. 이 구절들에서 양 떼가 돌아오고 먹고 쉬는 모습은 주님께서 그들을 돌보시는 말씀과 함께 나타납니다. 따라서 우리는 단순한 울타리로, 목초지는 단순한 먹이의 장소로만 읽지 않고,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사랑의 선과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사30:23과 렘31:11-12에서는 먹을 것과 가축이 함께 등장합니다. 이사야서는 땅의 소산으로 만든 풍성한 떡과 넓은 초장에서 먹는 가축을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떡’이 천적인 것을, 가축이 먹는 ‘기름진 것’이 거기서 나오는 선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예레미야서는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속하신 뒤 백성이 밀과 새 포도주와 기름, 양 떼와 소 떼의 새끼들을 위하여 모여들며 그 영혼이 물 댄 동산 같아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에서 ‘밀’과 ‘기름’으로 여호와의 거룩한 것을, ‘새 포도주’와 ‘양 떼와 소 떼의 새끼들’로 거기서 나오는 선들을 설명합니다. 두 구절은 서로 다른 풍요의 모습을 그리지만, 이번 번호에서는 천적인 것과 그로부터 나오는 선의 관계를 밝히는 근거로 함께 사용됩니다.

 

마지막으로 렘6:3에서는 목자들과 가축 떼가 ‘딸 시온’에게 와서 그 주위에 장막을 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딸 시온’이 천적 교회를 나타내며, 그 교회에 관하여 ‘장막’과 ‘가축 떼’라는 표현이 사용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본문의 문자적 문맥도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렘6장은 예루살렘을 향한 위협을 선포하므로, 목자들이 장막을 치는 장면 자체를 평화로운 목축이나 천국의 안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에서 직접 밝히는 것은 ‘딸 시온’이 천적 교회를 나타내며, 그와 관련하여 ‘장막’과 ‘가축 떼’라는 표현이 함께 사용된다는 점입니다. 말씀의 속뜻을 살피는 일은 문자적 문맥을 지우는 일이 아닙니다.

 

이제 AC.412-415의 흐름을 돌아보면 야발의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AC.412는 야발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를 의미한다고 밝혔습니다. AC.413은 이 교리가 천적인 것에 속한다는 점을 설명했습니다. AC.414는 장막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나타내는 근거를 제시했고, 이번 AC.415는 가축이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을 나타내는 근거를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야발은 단순히 장막 생활과 목축을 시작한 사람이라는 문자적 기록을 넘어, 사랑의 거룩한 것과 거기서 나오는 선에 관한 교리를 나타냅니다. 성도들이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장막은 사랑, 가축은 선’이라는 대응표만이 아닙니다. 선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그 근원으로 삼는다는 질서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장막과 가축을 함께 살펴보는 이유입니다. (AC.415 해설)

 

심화

1. ‘우리와 목초지와 가축은 왜 사랑에서 나오는 선을 뜻하는가?’

 

AC.415 심화 1, ‘우리와 목초지와 가축은 왜 사랑에서 나오는 선을 뜻하는가?’

AC.414 심화1. ‘우리와 목초지와 가축은 왜 사랑에서 나오는 선을 뜻하는가?’ AC.415에는 양 떼와 가축뿐 아니라 우리, 목초지, 떡, 밀, 기름, 새 포도주가 잇달아 등장합니다. 이 많은 표현을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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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렘6:3은 심판의 장면인데 왜 천적 교회의 상응을 설명하는 데 인용되었는가?’

 

AC.415 심화 2, ‘렘6:3은 심판의 장면인데 왜 천적 교회의 상응을 설명하는 데 인용되었는가?’

AC.415 심화2. ‘렘6:3은 심판의 장면인데 왜 천적 교회의 상응을 설명하는 데 인용되었는가?’ AC.415의 마지막 인용인 렘6:3은 앞서 나온 양 떼와 목초지의 말씀들과 분위기가 다릅니다. 렘23: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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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6, 창4:20, ‘야발이 최초의 목축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6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이 의미된다는 사실은, 야발이 ‘장막과 가축의 우리에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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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4, 창4:20, ‘장막에 거주한다는 것은 왜 사랑의 거룩한 것을 뜻하는가? - 말씀의 장막과 성막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4‘장막에 거주한다’(dwell in tents)는 것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말씀에서 ‘장막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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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3

‘아다’(Adah)가 신앙의 천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그의 맏아들 야발이 ‘장막에 거주하는 자의 조상’(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이자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and of cattle)이라고 불리는 데서 분명해집니다. 이것들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로부터 나오는 선들을 의미하므로 천적인 것입니다. That by “Adah” is signified the mother of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is evident from her firstborn Jabal being called the “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 and of cattle,” which are celestial because they signify the holy things of love and the goods thence derived.

 

해설

AC.413은 앞 번호에서 밝힌 야발의 속뜻을 근거로, 그의 어머니 아다가 왜 신앙의 천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하는지 설명합니다. AC.412에서는 야발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로부터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를 뜻한다고 했습니다. 이번 번호는 그 설명을 거꾸로 따라 올라갑니다. 야발이 뜻하는 것들이 천적이기 때문에, 그를 낳은 아다는 신앙의 천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중심은 새로운 상응을 하나 더 제시하는 데 있지 않고, 아다와 야발의 의미가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밝히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성도들이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아다라는 인물의 개인적인 신앙이나 성품을 평가하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문자적으로 아다는 야발의 어머니이고, 야발은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모자 관계를 새 교회 안에서 생겨나는 것들의 관계로 읽습니다. 아다가 ‘어머니’라는 것은 그녀에게서 태어나는 것으로 표현된 것들이 어떤 성격을 지니는지 보여 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야발의 속뜻을 살펴보면 아다가 의미하는 바도 더 분명해집니다.

 

그렇다면 야발이 뜻하는 것은 왜 천적인 것입니까? AC.413은 그 이유를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로부터 나오는 선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라고 직접 밝힙니다. 여기서 천적이라는 말은 단순히 고상하거나 종교적인 것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이번 문맥에서는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에 관계된 것을 가리킵니다.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로부터 나오는 선들이 천적이므로, 그것들에 관한 교리를 뜻하는 야발도 천적인 것과 관련됩니다. 이처럼 스베덴보리는 ‘천적’이라는 이름만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천적인지를 사랑과 선의 관계에서 설명합니다.

 

특히 ‘그로부터 나오는’이라는 표현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선은 사랑과 무관하게 따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옵니다. 사랑이 무엇을 원하고 소중히 여기는가에 관계된다면,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은 그것이 실제로 나타나는 모습과 관계됩니다. 물론 겉으로 비슷한 일을 한다고 해서 언제나 그 일을 움직이는 사랑까지 같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선을 말하면서도 그 근원인 사랑을 함께 말합니다. 이번 번호의 순서는 사랑의 거룩한 것들이 먼저이고,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들이 그다음입니다.

 

이 설명은 앞서 가인의 계보를 읽으며 반복해서 살펴본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가인의 계보에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고, 그 분리가 깊어져 마침내 신앙마저 소멸하는 상태가 나타났습니다. 이제 새 교회의 계보에서는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로부터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가 등장합니다. 다만 AC.413이 새 교회의 모든 성격을 한꺼번에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번호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야발이 의미하는 교리의 천적인 성격과, 그 성격을 통해 밝혀지는 아다의 의미입니다.

 

성도들은 이 대목에서 ‘아다가 천적인 것들의 어머니’라는 표현을 낯선 상응 하나로만 기억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 곧 야발이 의미하는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로부터 나오는 선들이 천적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의 연결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사랑과 선을 함께 말하되, 선이 사랑에서 나온다는 질서를 기억해야 합니다. AC.413은 아다와 야발의 관계를 통해 새 교회의 천적인 것들이 무엇과 관련되는지를 한층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AC.413 해설)

 

 

 

AC.414, 창4:20, ‘장막에 거주한다는 것은 왜 사랑의 거룩한 것을 뜻하는가? - 말씀의 장막과 성막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4‘장막에 거주한다’(dwell in tents)는 것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말씀에서 ‘장막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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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2, 창4:20,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 야발 - 사랑의 거룩한 것과 그로부터 나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창4:20) AC.412‘아다’(Adah)는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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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And Adah bare Jabal; he was the 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 and of cattle. (창4:20)

 

AC.412

‘아다’(Adah)는 앞에서와 같이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합니다. ‘야발’(Jabal), 곧 ‘장막에 거주하는 자의 조상’(the 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이자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and of cattle)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로부터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를 의미하며, 이것들은 천적인 것입니다. By “Adah” is signified, as before, the mother of the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of faith; by “Jabal, the 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 and of cattle,” is signified doctrine concerning the holy things of love, and the goods thence derived, which are celestial.

 

해설

AC.412는 창4:20에 등장하는 야발의 속뜻을 밝히는 첫 번째 번호입니다. 앞서 AC.405에서 아다는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아다의 아들 야발에게서 그 가운데 천적인 것에 관한 교리를 봅니다. 창4:20은 야발을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라고 소개합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장막 생활과 목축의 시작을 알려 주는 기록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계보를 새 교회 안에서 어떤 가르침이 생겨났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조상’이라는 표현을 이해할 때에는 한 생업의 최초 발명자라는 문자적 의미와 함께, 그에 해당하는 교리가 시작되는 모습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장막에 거주하는 일과 가축을 치는 일이 왜 사랑과 선에 관한 교리와 연결됩니까? AC.412는 그 대응 관계를 먼저 제시할 뿐, 장막과 가축의 속뜻을 각각 입증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이 번호만으로 ‘장막은 언제나 이것, 가축은 언제나 저것’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이번 문장에는 분명한 순서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사랑의 거룩한 것들’을 말하고, 이어서 ‘그로부터 나오는 선들’을 말합니다. 사랑이 먼저이고 선이 그 사랑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순서를 놓치면 야발의 의미를 단순히 종교적 지식이나 선행의 기술에 관한 가르침으로 축소하기 쉽습니다. 여기서 다루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그 사랑이 사람의 삶에 나타내는 선에 관한 교리입니다.

 

‘사랑의 거룩한 것들’이라는 표현부터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룩함은 사람이 자기 노력으로 사랑에 덧붙이는 성질이 아닙니다. 사랑의 근원이 주님께 있기 때문에,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에 속한 것들이 거룩합니다. 그러므로 야발이 의미하는 교리는 ‘사람이 어떻게 하면 스스로 훌륭한 사랑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를 가르치는 교리가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알고 받아들이며, 그 사랑이 자신의 삶을 이끌도록 하는 일과 관련된 가르침입니다. 성도들이 여기서 사랑을 단지 따뜻한 감정이나 사람 사이의 호감으로 이해하지 않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번 번호의 사랑은 교회의 천적인 것과 관련된 사랑이며,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까지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이어지는 ‘그로부터 나오는 선들’도 중요합니다. 사랑과 선은 같은 말의 단순한 반복이 아닙니다. 사랑이 사람의 내면에서 무엇을 원하고 소중히 여기는가와 관계된다면, 선은 그 사랑이 실제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와 관계됩니다.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이웃에게 필요한 선을 행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랑이 삶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겉으로는 선한 일을 하더라도 그 일을 움직이는 사랑이 무엇인지는 별도로 살펴야 합니다. AC.412는 이 모든 문제를 상세히 풀이하지는 않지만,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로부터 나오는 선들’을 함께 제시함으로써 사랑과 선을 떼어 놓지 않도록 이끕니다. 사랑은 선의 근원이며, 선은 사랑이 삶에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야발이 의미하는 것은 사랑이나 선 자체가 아니라 왜 ‘그것들에 관한 교리’입니까? 이 구별은 새 교회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 필요합니다. 사랑과 선의 근원은 주님이시지만, 교회는 그 사랑과 선에 관하여 배우고 가르칩니다. 무엇이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인지, 그 사랑에서 어떤 선이 나오는지, 사람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삶으로 나타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가르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리와 삶은 동일하지 않지만 서로 무관하지도 않습니다. 사랑에 관한 교리는 사랑의 삶을 대신할 수 없고, 사랑의 삶 또한 무엇이 참된 선인지 알려 주는 진리의 가르침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야발이 ‘교리’를 의미한다는 설명은 새 교회 안에 사랑과 선에 관한 가르침이 있다는 뜻이지, 교리를 아는 것만으로 이미 사랑과 선을 소유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대목은 가인의 계보에서 지금까지 살펴본 흐름과 나란히 놓을 때 더욱 선명해집니다. 가인에게서 시작된 문제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앞서 지배하도록 한 데 있었습니다. 그 분리는 라멕에게 이르러 신앙마저 남아 있지 않은 황폐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새 교회의 계보를 설명하면서 야발에게서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를 봅니다. 여기서 곧바로 ‘야발이 가인의 모든 잘못을 바로잡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앞의 계보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가 문제였다면, 이제 새 교회에 관한 설명에서는 사랑과 선에 관한 교리가 등장한다는 대비는 분명히 살펴볼 만합니다. 교회의 가르침이 무엇을 중심에 두어야 하는지를 다시 묻게 되는 자리입니다.

 

성도들이 AC.412를 읽고 기억해야 할 것은 야발이라는 이름에 낯선 뜻 하나를 더 외우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내가 배우는 신앙의 진리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알도록 이끄는가? 그 사랑이 내 삶에서 선으로 나타나도록 돕는가?’라는 질문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동시에 장막과 가축의 속뜻을 이번 번호에서 모두 이해했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야발이 의미하는 교리의 전체 내용을 먼저 밝히고 있으며, 그 표현들이 왜 그러한 뜻을 지니는지는 이어지는 설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AC.412는 새 교회의 가르침을 살펴보는 출발점입니다. 그 출발점에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중심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입니다. (AC.412 해설)

 

 

 

AC.413, 창4:20, ‘아다가 신앙의 천적인 것들의 어머니인 이유 - 야발이 뜻하는 사랑과 선’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3‘아다’(Adah)가 신앙의 천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그의 맏아들 야발이 ‘장막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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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1, 창4:19, ‘새 교회가 일어나기 전에 왜 황폐의 마지막 때가 오는가? - 예언서에 나타난 황폐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11새 교회가 일어나기 전에 황폐의 마지막 때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주님께서 예언서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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