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7

어떤 초보 영(novitiate spirit)이 내가 영에 관해 말하는 것을 듣고는 자신이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영이란 무엇입니까?’(What is a spirit?)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모든 사람 안에는 영이 있으며, 사람은 자신의 생명에 있어서는 영이고, 몸은 단지 사람이 땅 위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며, 살과 뼈, 곧 몸 자체는 전혀 살지도 생각하지도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하기에, 나는 그에게 영혼에 관해 들어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영혼이란 무엇입니까?’(What is a soul?)라고 되물으며, ‘나는 영혼이 무엇인지 모릅니다’(I do not know what a soul is)라고 대답했습니다.그때 나는 그에게 지금 그 자신이 영혼, 곧 영이라는 사실을 말해 줄 수 있도록 허락받았습니다. 그가 내 머리 위에 있으며 땅을 딛고 서 있지 않다는 사실로도 그것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이것을 지각할 수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달아나면서 ‘나는 영이다! 나는 영이다!’(I am a spirit! I am a spirit!)라고 외쳤습니다. A certain novitiate spirit, on hearing me speak about the spirit, asked, “What is a spirit?” supposing himself to be a man. And when I told him that there is a spirit in every man, and that in respect to his life a man is a spirit; that the body is merely to enable a man to live on the earth, and that the flesh and bones, that is, the body, does not live or think at all; seeing that he was at a loss, I asked him whether he had ever heard of the soul. “What is a soul?” he replied, “I do not know what a soul is.” I was then permitted to tell him that he himself was now a soul, or spirit, as he might know from the fact that he was over my head, and was not standing on the earth. I asked him whether he could not perceive this, and he then fled away in terror, crying out, “I am a spirit! I am a spirit!”

 

어떤 유대인은 자신이 전적으로 몸 안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좀처럼 납득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영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는데도, 그는 자신이 보고 들을 수 있다는 이유로 여전히 자기는 사람이라고 고집했습니다.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몸에 몰두하여 살아온 사람들은 이와 같습니다. 이와 같은 사례를 훨씬 더 많이 덧붙일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사람 안에서 감각을 행하는 것은 몸이 아니라 영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이 몇 가지 사례만 제시했습니다. A certain Jew supposed himself to be living wholly in the body, insomuch that he could scarcely be persuaded to the contrary. And when he was shown that he was a spirit, he still persisted in saying that he was a man, because he could see and hear. Such are they who, during their abode in this world, have been devoted to the body. To these examples very many more might be added, but these have been given merely in order to confirm the fact, that it is the spirit in man, and not the body, which exercises sensation.

 

해설

AC.447은 AC.443부터 계속되어 온 논의를 매우 직접적인 명제로 모아 줍니다. 앞에서는 사후의 삶이 희미한 것이 아니라는 것, 영은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유기적 실체라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영의 실재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 안에서 실제로 감각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합니다.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이 그 답을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사람 안에서 감각을 행하는 것은 몸이 아니라 영’입니다.

 

첫 번째 사례의 ‘초보 영’(novitiate spirit)은 사후 세계에 막 들어온 영을 가리킵니다. 그는 이미 몸을 떠나 영으로 존재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여전히 육체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영에 관해 이야기하자 ‘영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지식 부족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는 바로 자신이 영인데도 영을 자기 자신과는 별개의 어떤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영혼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만큼 생전의 영혼과 영에 대한 관념도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스베덴보리는 ‘모든 사람 안에는 영이 있다’고 한 뒤, 더욱 중요한 말을 덧붙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생명에 있어서는 영’이라는 것입니다. 몸은 사람이 땅 위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며, 살과 뼈로 이루어진 몸 자체가 독립적으로 살거나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몸을 무가치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핵심은 아닙니다. 오히려 몸에는 분명한 역할이 있습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지상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과 사고와 감각의 주체가 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이 이 글의 요점입니다.

 

초보 영이 ‘나는 영이다! 나는 영이다!’라고 외치며 달아나는 장면은 이 차이를 매우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그는 죽은 뒤에도 자신을 자기 자신으로 느끼고 있었고, 생각하고 대화하며 주변을 지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이미 육체를 떠났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지금까지 ‘나’라고 느끼며 보고 듣고 생각하던 존재가 바로 영이었다는 사실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AC.443에서 사후의 삶이 희미해지지 않는다고 했던 이유와 AC.444에서 영을 단순한 생각이라고 할 수 없다고 했던 이유가 이 사례 안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두 번째 유대인의 사례도 같은 사실을 다른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그는 사후에도 보고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이 여전히 육체를 가진 사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생각에는 ‘보고 듣는다’는 것과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너무 강하게 결합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이 사례를 제시하는 이유는 정반대의 결론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몸을 떠난 뒤에도 보고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은 그의 설명 안에서는 감각의 근원적 주체가 육체 자체가 아니라 영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몸에 몰두하여 살아온’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모든 육체적 삶이나 육체에 대한 관심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사례에서 문제는 인간 자신을 사실상 몸과 동일시하여, 몸을 떠난 뒤에도 살아 있고 생각하며 감각하는 영적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생전에 ‘나는 곧 이 몸’이라는 관념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있으면, 사후에도 자신의 감각이 계속된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몸을 떠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AC.447 전체를 읽는 열쇠입니다. ‘감각을 행하는 것은 몸이 아니라 영’이라는 말은 눈이나 귀 같은 육체의 감각 기관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몸은 영이 이 자연계에서 보고 듣고 느끼기 위한 기관으로 기능합니다. 그러나 감각 기관 자체가 지각의 최종 주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눈이 ‘보는 나’인 것도 아니고 귀가 ‘듣는 나’인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서는 눈과 귀를 통해 보고 듣는 주체가 사람의 영이며, 그렇기 때문에 육체를 벗은 뒤에도 영은 자신의 세계에서 계속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AC.443-447은 하나의 질문을 점점 더 깊게 파고들고 있습니다. 육체가 죽으면 삶이 희미해지는가, 영은 단지 생각에 불과한가, 보이지 않는 영을 실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실제로 보고 듣고 느끼는 주체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AC.447의 답은 매우 선명합니다. 인간은 생명에 있어서는 영이며, 육체는 지상 생활을 위한 기관입니다. 따라서 죽음은 ‘나’라는 감각하고 생각하는 주체가 사라지는 사건이 아니라, 그 주체가 지상 생활을 위해 사용하던 육체를 벗는 사건으로 이해됩니다. 바로 이것이 초보 영이 자신이 이미 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토록 놀랐던 이유이며, 스베덴보리가 이 사례들을 통해 확인하려는 사후 인간의 연속성입니다. (AC.447 해설)

 

 

 

AC.448, 창4 뒤, ‘육체의 삶보다 더 밝고 분명하게 이어지는 사후의 삶’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8나는 이 세상에서 알고 지냈던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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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6, 창4 뒤,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영의 실재를 부정하는 오류’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6나는 오늘날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견해, 곧 영은 눈으로 볼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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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Some Examples Drawn from Experience with Spirits Concerning What They Had Thought during Their Life in the Body about the Soul or Spirit

 

AC.443

다른 삶에서는 사람들이 육체 안에서 살았을 때 영혼과 영, 그리고 사후의 삶에 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분명하게 지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육체의 상태와 비슷한 상태에 놓이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며, 그들의 생각은 마치 소리 내어 말하는 것처럼 분명하게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의 경우,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는 그가 살아 있을 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지각했으며, 그 자신도 그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는 영의 존재를 믿기는 했지만, 죽은 뒤에는 영이 어떤 희미한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육체의 생명이 거두어지면 희미하고 흐릿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는 생명이 육체 안에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영을 하나의 유령 같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또한 짐승들도 사람과 거의 마찬가지로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이러한 생각을 더욱 굳혔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영들과 천사들이 가장 큰 빛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총명과 지혜와 행복 가운데서 살아가며, 거의 묘사하기 어려울 만큼 완전한 퍼셉션을 누린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은 희미하기는커녕 가장 완전하게 밝고 분명합니다. In the other life it is given to perceive clearly what opinions people had entertained while they lived in the body concerning the soul, the spirit, and the life after death; for when kept in a state resembling that of the body they think in the same way, and their thought is communicated as plainly as if they spoke aloud. In the case of one person, not long after his decease, I perceived (what he himself confessed) that he had indeed believed in the existence of the spirit, but had imagined that it must live after death an obscure kind of life, because if the life of the body were withdrawn there would remain nothing but what is dim and obscure; for he had regarded life as being in the body, and therefore he had thought of the spirit as being a phantom; and he had confirmed himself in this idea from seeing that brutes also have life, almost as men have it. He now marveled that spirits and angels live in the greatest light, and in the greatest intelligence, wisdom, and happiness, attended with a perception so perfect that it can scarcely be described; consequently that their life, so far from being obscure, is most perfectly clear and distinct.

 

해설

AC.443부터 AC.448까지는 창4의 속뜻에 대한 해설을 마친 뒤 이어지는 체험 기록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부분에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라는 제목을 붙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부터는 창4의 특정 구절을 직접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세상에서 영혼과 영, 사후의 삶에 관해 품었던 생각이 사후에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여러 실제 사례를 통해 보여 줍니다.

 

첫 사례의 사람은 영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영이 존재하고 사람이 죽은 뒤에도 살아간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문제는 그가 그 사후의 삶을 어떻게 상상했느냐에 있었습니다. 그는 생명이 근본적으로 육체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육체가 사라지면 생명의 대부분도 함께 사라지고, 영에게는 희미하고 흐릿한 어떤 존재 상태만 남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사후의 삶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현세의 육체적 삶보다 훨씬 희박하고 불완전한 삶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가 영을 ‘유령’(phantom)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는 말은 이러한 관념을 잘 보여 줍니다. 그에게 실재성이 강한 것은 육체였고, 영은 육체에서 생명이 빠져나간 뒤 남는 희미한 잔상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짐승들도 인간과 거의 마찬가지로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그는 자신의 생각을 더욱 굳혔습니다. 육체를 가진 동물에게도 생명이 있으므로 생명은 육체에 속한 것이며, 그렇다면 육체가 없어지면 인간에게 남는 생명도 매우 희미할 것이라고 추론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그 추론을 일반적인 교리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생전에 실제로 품고 있었던 생각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사후에 직접 경험한 것은 자신의 예상과 정반대였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영들과 천사들이 ‘가장 큰 빛’ 가운데 있으며, ‘가장 뛰어난 총명과 지혜와 행복’을 누린다고 말합니다. 더욱이 그들의 퍼셉션은 거의 묘사하기 어려울 정도로 완전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후의 삶이 단순히 계속된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육체가 사라진 뒤 의식과 지각이 희미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이 더욱 밝고 분명해진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의 ‘가장 완전하게 밝고 분명하다’(most perfectly clear and distinct)는 표현은 이 글의 핵심을 잘 압축합니다. 이 사람은 육체를 생명의 중심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육체가 없어지면 삶도 희미해진다’고 여겼지만, 사후에는 오히려 그 반대를 발견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체험에 따르면 영적 삶은 육체적 삶의 흐릿한 그림자가 아니라, 지각과 사고와 의식이 더욱 선명한 삶입니다. 따라서 육체에서 벗어나는 것은 인간의 의식이 점차 꺼져 가는 과정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다만 여기서 ‘영들과 천사들이 가장 큰 빛과 총명과 지혜와 행복 가운데 산다’는 표현을 모든 영이 사후 즉시 똑같은 천국적 행복을 누린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 글의 논점은 사후의 모든 사람의 상태가 동일하다는 데 있지 않고, ‘육체가 사라지면 영의 삶은 희미해질 것’이라는 생각을 반박하는 데 있습니다. 선한 영과 악한 영의 상태, 천국과 지옥의 차이 등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AC.443이 강조하는 것은 육체의 죽음이 인간의 영적 의식과 삶을 희미한 그림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첫 사례가 AC.443-448의 맨 앞에 놓인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사후의 삶을 생각할 때 사람은 자신이 지금 경험하는 육체적 감각을 기준으로 삼기 쉽습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느끼는 현재의 삶을 가장 실재적인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몸이 없어지면 삶도 덜 실재적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 그 전제를 뒤집습니다. 육체가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면 육체의 죽음은 생명의 소멸이나 희미해짐을 뜻하지 않습니다. AC.443의 놀라움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생전에 영의 존재를 믿었던 사람조차 사후에 이르러 자신이 영의 삶을 얼마나 희미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AC.443 해설)

 

 

 

AC.444, 창4 뒤, ‘영은 단지 생각일 뿐이며 아무런 형체도 없는가?’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4이 세상에 살 때 영은 아무런 연장(extension)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믿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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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2, 창4:26, ‘태고 시대에도 교회에서 분리된 많은 교리와 이단이 있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42앞에서 설명한 이 장의 내용으로부터, 태고 시대에도 교회에서 분리된 많은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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