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 영상은 상당히 거친 어조로 오늘날 신학생들의 공부 태도를 비판합니다. ‘기도를 많이 한다고 성서학자들의 수십 년 연구를 뛰어넘을 수 없다’, ‘전공자가 비전공자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한심하다’, ‘개론서도 소화하지 못하면서 특정 주제만 파고드는 것은 잘못된 독서다’, ‘영어도 하지 않으면서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겉핥기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표현만 떼어 놓고 보면 다소 모욕적으로 들리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거친 표현을 잠시 걷어내고 중심 문제의식만 보면 귀담아들을 내용이 적지 않습니다. 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열정을 표현하는 일이 아니며, 오랜 시간 축적된 지식과 연구 방법을 배우고, 자신의 생각을 검증받으며, 무엇보다 자기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 가는 훈련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도 영상의 문제의식과 상당 부분 만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지식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생애 자체가 놀라울 정도로 광범위한 학문적 탐구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는 광산학, 금속학, 수학, 천문학, 해부학, 생리학, 철학 등 여러 분야를 깊이 연구했고, 훗날 신학 저술을 시작한 뒤에도 성경 원문과 당시 이용할 수 있었던 여러 학문적 자료를 폭넓게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가르쳐 주실 것이므로 공부할 필요가 없다’거나 ‘기도만 많이 하면 학문적 훈련 없이도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식의 태도를 스베덴보리에게서 정당화하기는 어렵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이성과 지성 역시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영상이 ‘기초’를 강조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개론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 곧바로 어려운 주제나 독창적인 해석으로 뛰어드는 것은 신학에서만 문제가 되는 일이 아닙니다. 어떤 분야든 기초 개념과 기존 연구를 알지 못하면 자기가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미 오래전에 논의된 내용인지, 혹은 오래전에 반박된 주장인지조차 알기 어렵습니다. 이런 점에서 ‘1층도 없는 건물의 2층을 짓는다’는 영상의 비유는 꽤 적절합니다. 신학 역시 역사, 언어, 문헌, 교리, 철학적 배경을 차근차근 익히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여기서 매우 중요한 질문 하나가 생깁니다. ‘학문적으로 많이 아는 것’과 ‘말씀을 참으로 이해하는 것’은 과연 같은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여기서부터 영상의 주장과 스베덴보리 사이에 상당히 중요한 긴장이 나타납니다. 영상에서는 성서학자와 신학자의 오랜 연구가 일종의 지적 권위로 제시됩니다. 물론 전문 연구자의 축적된 지식을 존중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은 단순히 인간의 역사와 언어와 문헌을 연구하여 그 의미를 완전히 밝혀낼 수 있는 책이 아닙니다. 말씀에는 문자적 의미가 있고, 그 문자 안에는 영적 의미가 있으며, 더 깊은 차원에는 천적 의미가 있습니다. 이 내적 의미는 천국과 연결되어 있으며 궁극적으로 주님을 향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완벽하게 알고, 고대 근동의 역사와 문화를 깊이 연구하고, 교회사와 신학사의 방대한 문헌을 독파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말씀의 내적 의미에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런 공부가 필요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바로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학문을 무시하는 신앙주의’도 위험하지만 ‘학문이 말씀의 모든 것을 해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지성주의’ 역시 위험합니다. 전자는 이성을 버리고, 후자는 계시의 깊이를 인간 이성의 범위 안에 가두기 쉽습니다.

 

영상에서 가장 조심스럽게 살펴볼 대목은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한들 성서학자들의 수십 년의 연구물을 뛰어넘는 성경 이해를 갖출 수 없습니다’라는 주장입니다. 이 말을 ‘기도가 학문 연구를 대신할 수 없다’는 뜻으로 이해한다면 충분히 타당합니다. 성경의 역사적 배경이나 원문의 문법을 알고 싶으면서 기도만 하고 사전과 주석과 연구서를 펼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경건이라기보다 게으름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성경을 참으로 이해하는 깊이는 전문 연구자의 학문적 수준을 넘어설 수 없다’는 뜻으로 확대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말씀의 참된 이해에는 지식 이상의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삶’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를 행하는 것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진리를 단순히 기억 속에 저장한다고 해서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의지로 받아들이고 삶으로 행할 때 비로소 그것은 사람 안에서 살아 있는 진리가 됩니다. 그래서 지성적으로 대단히 뛰어난 사람이 말씀에 관한 수많은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정작 말씀의 영적 본질에는 멀리 있을 수 있고, 반대로 학문적 지식은 많지 않은 사람이 자신이 아는 작은 진리를 성실하게 살아냄으로써 그 진리의 본질에 더 가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는 신학의 학문적 서열만으로 측정하기 어려운 차원이 있습니다.

 

이 점은 영상의 두 번째 주장, 곧 ‘전공자가 비전공자의 이야기에 왜 그렇게 귀를 기울이느냐’는 주장과도 연결됩니다. 전문성의 가치를 강조하려는 의도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의학이나 법학에서도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판단을 동일하게 취급할 수 없듯이 신학 역시 전문적 훈련을 존중해야 합니다. 인터넷이나 유튜브에서 우연히 들은 주장 하나를 수십 년 연구한 학자의 견해보다 무조건 높게 평가한다면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특히 자신감 있게 말하는 것과 정확하게 아는 것을 혼동하기 쉬우므로 전문성에 대한 존중은 더욱 필요합니다.

 

그러나 ‘전공자가 비전공자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한심하다’는 데까지 나아가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진리는 학위에 의해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주장이 참인지 아닌지는 말한 사람의 학위가 아니라 그 내용과 근거를 통해 검토해야 합니다. 더구나 기독교 신앙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언제나 기존 종교 엘리트의 제도적 권위를 통해서만 말씀하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께서 부르신 제자들 가운데 당시의 전문적인 랍비 교육을 받은 종교 엘리트가 중심을 이루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전문성을 존중하는 것과 전문성을 진리의 최종 보증으로 삼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 자신은 매우 흥미로운 사례가 됩니다. 그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의미의 신학교 출신 전문 신학자가 아니었습니다. 오랫동안 자연과학과 철학을 연구한 학자였으며, 그의 인생 후반부에 전혀 다른 차원의 소명을 받아 성경과 신학에 관한 방대한 저술을 남겼습니다. 만일 ‘신학 전공자가 비전공자의 신학적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한심하다’는 원칙을 엄격하게 적용한다면 스베덴보리의 신학 저술은 애초에 읽어 볼 가치조차 없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질문은 ‘그가 어느 신학교를 졸업했는가?’가 아니라 ‘그가 무엇을 말했으며, 그것이 말씀과 얼마나 일관되게 연결되고, 인간의 거듭남과 주님을 사랑하는 삶을 어떻게 밝히는가?’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권위를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생각을 멈춘다면 그것 역시 이 영상이 비판하는 맹목성과 다른 형태일 뿐입니다. 그의 주장도 읽고, 비교하고, 문맥을 살피고, 말씀과 연결하여 숙고해야 합니다. 다만 처음부터 ‘비전공자’라는 이유로 들을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다면 우리는 진리를 판단하는 기준을 내용에서 신분으로 옮겨 버리게 됩니다.

 

영상에서 영어 공부를 강조하는 부분은 상당히 현실적인 조언입니다. 번역은 언제나 선택과 해석을 동반하기 때문에 원문이나 원서를 직접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신학 연구에서 분명 큰 장점입니다. 영어권에서 생산되는 방대한 신학 연구에 직접 접근할 수 있다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 연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번역본은 매우 유용하지만 영어 번역본을 서로 비교하고, 필요하면 라틴어 원문까지 확인할 수 있다면 한 단어와 문장의 의미를 훨씬 세밀하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어 공부를 경시할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여기에서도 언어는 ‘도구’이지 ‘진리 그 자체’는 아니라는 구별이 필요합니다. 히브리어를 잘한다고 구약의 영적 의미가 자동으로 열리는 것도 아니고, 헬라어를 잘한다고 복음서의 내적 의미가 자동으로 드러나는 것도 아닙니다. 원어는 문자적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도구이지만,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더 깊은 층위는 ‘상응’을 통해 열립니다. 자연적 표현과 영적 실재 사이의 상응을 알지 못하면 문자 안에 담긴 영적 질서를 온전히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어 연구와 상응에 대한 이해 역시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차원의 작업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상 후반부에는 오리게네스, 아우구스티누스, 안셀무스, 아퀴나스, 루터, 칼뱅, 슐라이어마허, 리츨, 슈바이처, 불트만, 한스 큉 등 기독교 신학사의 거대한 이름들이 등장합니다. 이 전통을 공부하는 것은 분명 중요합니다. 2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과 그리스도, 성경과 구원, 교회와 인간에 대해 씨름하면서 남긴 사유의 유산을 무시하는 것은 지혜롭지 않습니다. 우리가 오늘 처음 신학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앞서 걸어간 수많은 사람이 있고, 그들의 성공과 실패 모두가 후대에게 귀중한 자료가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서도 하나의 구별을 덧붙여야 합니다. ‘위대한 신학사’와 ‘계시의 진리’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신학사는 인간이 계시를 이해해 온 역사이며, 따라서 위대한 통찰과 함께 시대적 한계와 오류도 포함합니다. 어느 시대의 거대한 신학자라 해도 그 사람의 모든 말이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루터와 칼뱅도, 아퀴나스와 아우구스티누스도 역사 속 인간입니다. 그들을 공부하되 그들의 권위 아래 말씀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들의 사상을 말씀 앞에서 살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특히 신앙과 체어리티가 분리되는 것을 매우 심각하게 봅니다. 이것은 오늘 영상의 주제를 바라보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신학을 아무리 많이 공부해도 그것이 사람을 선한 삶으로 이끌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아직 사람의 기억과 지성의 영역에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뜨거운 신앙을 말하면서 진리를 배우려 하지 않고 자기 확신과 감정만 좇는다면 그것 역시 온전한 신앙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은 진리를 필요로 하고, 그 진리는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움직여야 합니다. 따라서 ‘공부냐 신앙이냐’라는 양자택일 자체가 잘못된 질문일 수 있습니다.

 

영상이 비판하는 ‘성령의 조명’이라는 표현도 같은 방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셨다’는 말이 공부하지 않는 자신의 태도를 정당화하거나 다른 사람의 검증을 거부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면 매우 위험합니다. 자기 생각을 곧바로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확신하기 시작하면 사람은 교정받기 어려워집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을 빌려 생각하면 인간의 proprium은 종교적 언어를 사용할 때조차 자기 자신을 높일 수 있습니다. ‘나는 성령께 직접 배웠다’는 확신이 오히려 자기 지성에 대한 가장 강력한 신뢰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성령의 조명’이나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단순한 종교 수사 정도로 취급해서도 곤란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하나님은 연구 대상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연구하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다르고, 그리스도에 관한 명제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과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도 다릅니다. 신학은 하나님에 관한 학문이지만 기독교 신앙은 결국 사람이 주님을 향하여 삶의 방향을 바꾸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학문적 신학이 이 차원을 잃으면 하나님을 연구하면서 정작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역설도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이 영상의 마지막 말, ‘신학은 단순한 종교 수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치열한 학문입니다’라는 선언에는 충분히 동의할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 한 문장을 더 붙이고 싶습니다. ‘그러나 신학은 치열한 학문인 것으로 끝나서도 안 됩니다.’ 신학의 목적이 신학자를 만드는 데만 있다면 그것은 아직 절반입니다. 진리를 배우는 목적은 결국 그 진리가 사람의 삶이 되게 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오늘날 신학교의 위기는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도 아니고 ‘기도를 너무 많이 해서’도 아닐 것입니다. 공부와 신앙, 지성과 삶, 진리와 체어리티가 서로 분리되어 버린 것이 더 근본적인 문제일 수 있습니다. 학문 없는 열심은 쉽게 맹목으로 흐르고, 삶 없는 학문은 쉽게 지적 자부심으로 흐릅니다. 한쪽에서는 ‘성령께서 알려 주셨다’며 배움을 거부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나는 전공자다’라며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겉으로는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두 태도의 깊은 곳에는 뜻밖에도 같은 위험, 곧 ‘내가 안다’는 자기 확신이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많이 아는 사람이기 이전에 자신이 아는 진리를 선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지식은 필요합니다. 공부도 필요합니다. 원어와 영어도 필요하고, 신학사와 성서학도 공부할 가치가 있습니다. 좋은 개론서를 정독하고 위대한 학자들의 연구를 읽으라는 이 영상의 권면도 충분히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지식은 목적지가 아니라 길입니다. 그 길의 끝에는 ‘내가 얼마나 많이 아는가?’가 아니라 ‘내가 아는 진리가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 영상은 신학생들에게 꽤 필요한 경고를 던집니다. 다만 그 경고를 한 단계 더 깊게 가져갈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만 하지 말고 공부하라’에서 멈추지 않고, ‘공부하되 그 공부를 우상으로 만들지 말라’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비전공자의 말을 무비판적으로 좇지 말라’에서 멈추지 않고, ‘전공자의 권위도 진리 그 자체로 여기지 말라’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령의 조명이라는 말로 무지를 합리화하지 말라’에서 멈추지 않고, ‘인간의 학문으로 성령의 역사를 대신할 수도 없음을 기억하라’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결국 삶이 남습니다. 수천 권의 신학서를 읽고 히브리어와 헬라어와 라틴어를 자유롭게 읽으며 신학사 전체를 꿰뚫는다 해도, 그 지식이 이웃을 사랑하고 악을 멀리하며 주님을 향하는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천국의 관점에서 그 지식은 아직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반대로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배우기를 즐기며, 배운 진리를 조금씩 삶에 옮기고, 더 밝은 진리 앞에서 자기 생각을 기꺼이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참된 의미에서 ‘신학하는 사람’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학은 분명 치열한 학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한마디를 더 보탠다면 이렇습니다. ‘참된 신학은 마침내 삶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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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 심화

1. 스베덴보리는 인용 구절들의 이런 속뜻을 어떻게 아는가?

 

AC.42를 처음 읽으면 놀라운 장면을 계속 만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겔29:3의 바로와 큰 악어, 겔32:2의 바다와 강을 휘젓는 악어, 사27:1의 리워야단과 바다의 용, 렘51:34의 삼키는 큰 뱀을 차례로 인용하면서 그것들이 기억 지식과 그 일반 원리, 그리고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신앙의 신비에 들어가려는 상태와 관계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먼저 분명히 할 것은 스베덴보리 자신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의 속뜻을 단순한 개인적 성경 연구의 결과라고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 저작 전체의 전제 자체가 말씀에는 문자적 의미 안에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내적 의미가 있으며, 그것이 주님의 자비로 밝혀졌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면 적어도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말씀의 내적 의미에 관한 계시를 받았다고 이해했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그러면 주님이나 천사가 옆에서 한 문장씩 불러 주었고 스베덴보리는 받아 적었는가?’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의 저술에는 영들과 천사들과의 대화, 영계에서 보고 들은 것, 어떤 것의 의미를 지각하거나 알도록 허락받았다는 진술 등이 매우 많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것들을 모두 하나의 방식으로 묶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천사가 구술한 책이다’라고 말하면 그의 저술 방식 자체를 지나치게 단순화하게 됩니다.

 

반대로 ‘성경을 펼치면 속뜻이 화면처럼 눈앞에 자동으로 나타났다’고 말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영계에서 실제로 보고 들었다고 기록한 경험과, 말씀의 내적 의미를 해설하는 작업은 서로 깊이 관련되어 있지만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가 어떤 한 절의 속뜻을 알게 되는 모든 순간에 정확히 어떤 인식 과정이 일어났는지를 우리가 재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실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으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일관된 상응의 연결’입니다. 예를 들어 AC.42에서 큰 물고기가 기억 지식의 일반적인 것을 뜻한다고 한 뒤, 스베덴보리는 그 뜻을 한 구절에만 기대지 않습니다. 여러 선지서의 서로 다른 구절을 가져와 같은 상징이 문맥에 따라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앞으로 AC를 계속 읽으면 물, 땅, 씨, 나무, 빛, 새, 짐승, 애굽, 앗수르, 바벨론 같은 표현들이 한 번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에서 서로 연결되어 해석되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속뜻을 ‘단어마다 비밀 암호 하나가 붙어 있는 것’처럼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물고기=기억 지식’, ‘새=이성적인 것’이라는 대응표를 외운 뒤 모든 성경 구절에 기계적으로 대입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같은 표현도 문맥과 그것이 놓인 관계, 긍정적 또는 부정적 의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AC.42에서 ‘큰 바다짐승’이 좋은 창조의 일부로 등장하면서도, 선지서에서는 인간 자신의 지혜와 결합된 부정적인 상태를 표현하는 데 사용되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내적 의미를 인간이 임의로 만들어 내는 비유적 해석으로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의 설명에서 상응은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주님께서 세우신 질서에 근거합니다. 따라서 그에게 속뜻은 ‘이 구절을 오늘 내 삶에 이렇게 적용해 볼 수 있겠다’는 설교적 적용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우리는 그의 해석에 동의할 것인지 검토할 수 있지만, 적어도 그가 무엇을 주장하는지는 정확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그는 자신이 성경에 재미있는 상징적 의미를 덧붙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스베덴보리의 속뜻 설명을 읽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가 계시를 받았다고 했으니 아무것도 묻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한 구절만 떼어 놓고 ‘문자만 보면 이런 뜻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며 즉시 버릴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AC를 계속 읽으면서 그가 같은 상징을 말씀 전체에서 어떻게 사용하는지, 서로 다른 구절의 해석이 일관되는지, 앞뒤의 교리적 맥락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AC.42의 겔32:2가 좋은 사례입니다. 그 한 절만 처음 보면 ‘기억 지식을 수단으로 삼아 자기 자신으로부터 신앙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이라는 해석은 매우 갑작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AC.40-42에서 물고기와 큰 물고기, 기억 지식과 그 일반적인 것, 인간의 지혜와 지성이라는 연결을 차례로 읽고 나면 적어도 스베덴보리가 어떤 구조 안에서 그 구절을 읽고 있는지는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AC 전체를 더 읽을수록 그 연결이 다른 곳에서도 반복되는지 검토할 수 있습니다.

 

결국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어떻게 알았는가?’라는 질문에는 두 층의 답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의 주장에 따르면 말씀의 내적 의미는 인간의 독창적인 추론으로 발명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밝혀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계시가 매 구절마다 정확히 어떤 심리적·지각적 과정으로 전달되었는지를 우리가 하나의 공식으로 재구성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그의 저작에서 실제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영계와의 열린 교통을 주장했고, 말씀의 내적 의미가 주님으로부터 밝혀졌다고 증언했으며, 그것을 방대한 성경 구절과 상응의 연결 속에서 체계적으로 설명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어떻게 이런 뜻이 나오지?’라는 어리둥절함을 그대로 가지고 읽어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그 질문을 가지고 계속 읽는 것이 좋습니다. 한두 구절에서 모든 것을 납득하려 하기보다 AC 전체를 따라가면서 같은 상응이 어떻게 되풀이되고, 문맥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며, 전체 말씀의 내적 의미 안에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확인하는 것 자체가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검토하는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AC.42, 창1:21, 큰 바다짐승들 : 기억 지식을 묶는 일반 원리

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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