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39

앞의 세 장에서 ‘아담과 그의 아내’(man and his wife)가 태고교회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충분히 밝혀졌으므로, 이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을 인정한다면, 그 교회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잉태와 출생 역시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성격의 것이었음이 분명합니다. 태고인들에게는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으로 어떤 것들을 의미하게 하며, 그렇게 해서 계보를 구성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교회에 속한 것들은 서로 이러한 관계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곧 자연적인 출생에서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잉태되고 태어나는 것처럼, 교회에 속한 것들도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잉태되고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는 교회에 속한 것들을 ‘잉태’(conceptions), ‘출생’(births), ‘자손’(offspring), ‘갓난아이’(infants), ‘어린아이’(little ones), ‘아들’(sons), ‘딸’(daughters), ‘청년’(young men) 등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말씀의 예언적 부분에는 이와 같은 표현들이 매우 많이 나옵니다. In the three foregoing chapters it has been sufficiently shown that by the “man and his wife” is signified the most ancient church, so that it cannot be doubted, and this being admitted, it is evident that the conception and the birth effected by that church were of the nature we have indicated. It was customary with the most ancient people to give names, and by names to signify things, and thus frame a genealogy. For the things of the church are related to each other in this way, one being conceived and born of another, as in generation. Hence it is common in the Word to call things of the church “conceptions,” “births,” “offspring,” “infants,” “little ones,” “sons,” “daughters,” “young men,” and so on. The prophetical parts of the Word abound in such expressions.

 

해설

AC.339는 앞으로 이어질 창4의 이름과 계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매우 중요한 글입니다. 바로 앞 AC.338에서 스베덴보리는 ‘아담과 그의 아내’를 태고교회로, 그 교회의 ‘첫 번째 자손, 곧 처음 난 것’을 신앙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신앙이 사랑 안에 머물지 않고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기 시작한 상태를 ‘가인’으로 나타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태고교회가 어떻게 ‘잉태’하고 ‘낳으며’, 신앙이나 교리에 속한 것이 어떻게 그 교회의 ‘자손’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AC.339는 바로 이 문제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태고인들에게는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으로 어떤 것을 의미하게 하며, 그렇게 해서 계보를 구성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에 속한 것들’도 자연적인 혈연관계와 비슷한 발생 관계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자연적인 출생에서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서 잉태되고 태어나지만, 영적인 의미에서는 하나의 교회적 상태가 다른 상태에서 생겨나고, 하나의 교리적 원리가 또 다른 교리적 상태를 낳습니다. 그래서 말씀은 교회에 속한 것들을 ‘잉태’, ‘출생’, ‘자손’, ‘갓난아이’, ‘어린아이’, ‘아들’, ‘딸’, ‘청년’ 등의 가족과 출생의 언어로 표현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마지막에 ‘말씀의 예언적 부분에는 이와 같은 표현들이 매우 많이 나온다’고 덧붙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 원리는 창4의 이름들을 읽는 데 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속뜻 해설에서 가인과 아벨, 에녹과 이랏, 므후야엘과 므드사엘, 라멕 등을 읽을 때 중심이 되는 것은 개인들의 가족사를 재구성하는 일이 아니라, 그 이름들이 의미하는 교리적, 교회적 상태와 그 상태들의 발생 관계를 살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4의 계보를 읽으면서 우리가 계속 물어야 할 것은 ‘이 사람은 역사적으로 누구였는가?’만이 아니라 ‘이 이름은 무엇을 의미하며, 그것은 앞의 어떤 상태로부터 생겨났고 다시 무엇을 낳는가?’입니다. 그렇다고 곧바로 ‘그러므로 이것은 실제 역사가 아니라 지어낸 비유다’라고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AC.339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설명하려는 핵심은 역사성 여부를 논증하는 데 있지 않고, 말씀의 이름과 계보 안에 교회에 속한 것들의 영적 발생과 파생이 담겨 있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잉태’와 ‘출생’이라는 표현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39가 이 둘의 세부 상응을 각각 따로 정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핵심은 분명합니다. 교회에 속한 것들은 서로 아무 관계 없이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생겨납니다. 이 원리를 우리의 내적 상태에 적용해 보면, 어떤 생각이나 원리가 마음에서 받아들여지고 자라다가 마침내 하나의 확고한 신앙이나 삶의 형태로 나타나는 과정을 ‘잉태’와 ‘출생’의 이미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AC.339의 직접적인 단어별 정의라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제시한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잉태되고 태어난다’는 원리를 인간의 내적 삶에 적용하여 이해한 것입니다.

 

바로 앞 AC.338의 가인과 연결하면 이 원리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태고교회에는 본래 사랑 안에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앙을 사랑 안에 있는 것으로만 보지 않고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식하고 인정하는 교리적 상태가 생겨났으며, 그것이 ‘가인’이라는 이름으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그 상태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원리가 자리 잡으면 그 원리에서 다시 다른 교리적 상태들이 파생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인에게서 에녹이 나오고, 다시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으로 계보가 이어집니다. AC.331에서 에녹을 이 이단의 ‘확장’이라고 했고, AC.332에서는 이 하나의 이단에서 여러 이단이 생겨났으며 그 마지막 라멕에게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AC.339는 바로 그러한 앞의 개요가 왜 ‘아버지-아들-후손’이라는 계보의 형식으로 기록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해석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우리가 앞서 창4와 창5의 관계를 살피면서 중요하게 구별했던 문제에도 빛을 줍니다.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을 단순히 두 집안의 연대기로 놓고 ‘가인 계열이 먼저 진행된 뒤 셋 계열이 시작되었는가?’, ‘두 가문은 정확히 어느 시점에 함께 존재했는가?’와 같은 질문만으로 접근하면 스베덴보리가 이 계보에서 읽는 핵심을 놓칠 수 있습니다. 이 계보들은 태고교회 안에서 나타난 교리적, 교회적 상태들의 계승과 파생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이 나란히 이어진다’고 말할 때에도 두 실제 가문의 정확한 역사적 병행 연표를 우리가 알고 있다는 뜻으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은 각각의 계보를 통하여 서로 다른 교회적 상태와 그 흐름을 보여 주며, AC.339는 그 계보를 무엇보다 그러한 영적 발생 관계로 읽도록 가르칩니다.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원리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영적 원리는 대개 혼자 머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된 진리가 선과 결합되어 받아들여지면 그것으로부터 또 다른 선한 생각과 애정이 생겨나고, 그것들은 다시 선한 말과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의 거짓된 원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 안에서 정당화하기 시작하면 그 거짓을 유지하기 위해 또 다른 거짓이 필요해지고, 그것이 다시 다른 악과 거짓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잉태하고 낳는’ 것입니다. 이것은 AC.339의 직접적인 역사 서술이라기보다, 이 번호가 제시하는 발생과 파생의 원리를 우리 자신의 영적 삶에 적용해 본 것입니다.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이시며, 반대로 악과 거짓은 인간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proprium으로 돌이킬 때 서로 연결되고 증식합니다.

 

바로 이 원리가 가인의 계보를 무겁게 만듭니다. AC.338에서 나타난 시작은 겉으로 보면 미세해 보입니다.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식하고 인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AC.339가 보여 주는 계보의 원리에 따르면 하나의 교리적 상태는 그 자체로 고립되어 머무르지 않고 다른 상태들을 낳을 수 있습니다. 사랑과 신앙의 분리가 다시 그 분리를 설명하고 정당화하는 교리를 낳고, 그 교리가 다른 왜곡을 낳으며, 그렇게 파생이 계속될 수 있습니다. 창4의 계보는 바로 이러한 영적 발생의 연속을 보여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의 작은 분리를 ‘이 정도는 괜찮다’고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 라멕의 상태가 완성되어 있었다는 뜻은 아니지만, 처음 받아들인 원리 안에 그다음 상태들이 파생될 수 있는 방향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는 우리 각 사람의 삶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도 생각과 애정은 서로 아무 관계 없이 흩어져 있지 않습니다. 하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실제 삶에서 살아가면 그 진리가 다른 선한 생각과 선택으로 이어질 수 있고, 반대로 하나의 거짓을 허용하고 자기 합리화하기 시작하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 또 다른 거짓을 받아들이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마음 안에서도 일종의 ‘계보’가 만들어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창4의 각 인물을 개인의 심리 단계와 기계적으로 일대일 대응시키는 방식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339의 직접적인 대상은 태고교회와 그 교회에 속한 것들의 발생 관계이며, 개인에게 적용할 때에는 ‘내가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이 무엇을 낳고 있는가?’라는 영적 자기 성찰의 원리로 사용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따라서 AC.339는 창4의 낯선 이름들을 읽기 위한 단순한 사전 설명이 아닙니다. 앞으로 가인의 계보를 읽을 때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하나의 중요한 해석 열쇠입니다. 이름을 보면서 단지 사람을 찾는 데 머물지 않고 그 이름으로 의미된 교리적, 교회적 상태를 보고, 출생을 보면서 생물학적 혈통만을 따라가는 데 머물지 않고 무엇이 무엇으로부터 생겨났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AC.339를 읽고 난 뒤 창4의 계보 앞에서 계속 던질 수 있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으로부터 태어났으며, 또 무엇을 낳고 있는가?’ 이 질문을 붙들고 가인의 계보를 읽으면 창4는 더 이상 낯선 고대 이름들의 목록으로만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의 교회적 상태가 다른 상태를 낳고, 그 상태가 다시 또 다른 상태로 이어지는 영적 계보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우리 안에서 지금 어떤 진리와 선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또는 어떤 거짓을 허용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앞으로 무엇을 ‘낳게’ 될지를 주님 앞에서 살피게 됩니다.

 

 

 

AC.340, 창4:1,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40‘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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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8, 창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AC.338-340)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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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4 심화

1. 창4와 창5는 어떻게 함께 읽어야 하는가? - 가인 계열과 셋 계열

 

좀 성급한 질문일 수 있지만, 그리고 이미 몇 차례 거듭 고민했던 질문이지만... 창4, 창5를 시간순으로 읽어야 하나요? 이런 질문을 드리는 이유는, 가인 이후 이 여러 대가 흐르도록 태고교회는 처음엔 어두운 세월을 지내다가 셋 이후 회복된 걸로 보기에는 ‘태고교회’라는 위상(?)에 어딘가 좀 어색하기 때문입니다. 창4를 시간순으로 읽으면, 그러면 아담과 하와는 이 여러 대가 흐르도록 나이만 먹다가 수백, 수천 년이 흐른 후에야 셋이라는 자녀를 본 게 되는데... 이건 좀... 차라리 창4 따로, 창5 따로, 그러니까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이 나란히 동시대를 살다가 홍수를 맞이하는, 이런 이해가 더 나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창4와 창5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창4에서는 가인에게서 에녹,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으로 여러 대가 이어지고, 라멕에게서 다시 야발, 유발, 두발가인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긴 계보가 모두 소개된 뒤 창4:25에 와서 다시 ‘아담이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라고 합니다. 이것을 현대적인 연대기처럼 직선적인 시간순으로만 읽으면, 마치 가인의 여러 대 후손이 모두 지나간 뒤에야 아담과 하와가 셋을 낳은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초반을 해석하는 방식에서는 이러한 계보의 가장 중요한 의미가 개인들의 출생 연대를 정확하게 재구성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가인과 에녹, 이랏 등의 이름은 말씀의 속뜻에서 특정한 교리와 교회적 상태를 나타내며, 셋과 에노스 및 창5의 여러 이름들 역시 이어지는 교회적 상태들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창4와 창5의 관계를 이해할 때에도 먼저 ‘누가 정확히 몇 년 먼저 태어났는가?’보다 ‘말씀이 어떤 교회적 계열과 상태의 연속을 보여 주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창4는 특히 태고교회 안에서 갈라져 나온 교리들과 그 변화를 가인으로부터 이어지는 계열을 통하여 보여 줍니다.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구별되기 시작하고, 그 구별이 분리로 굳어지면서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나아가며, 그 뒤에도 그 교리적 상태가 여러 형태로 파생되는 과정이 이어집니다. 반면 창4 마지막의 셋과 에노스, 그리고 창5에서 다시 이어지는 계보는 태고교회 안의 또 다른 교회적 계승과 상태의 연속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창4의 가인 계열이 역사적으로 완전히 끝난 다음 창5의 셋 계열이 시작되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말씀은 한 계열의 영적 역사를 충분히 보여 준 뒤 서술의 초점을 다른 계열로 옮겨 그 계열의 상태들을 다시 처음부터 펼쳐 보일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창4와 창5를 태고교회라는 하나의 큰 시대 안에서 전개되는 서로 다른 교회적 계열의 서술로 함께 읽는 것은 충분히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여기서 ‘함께’ 또는 ‘나란히’라는 말을 역사적 동시성에 관한 정밀한 연대표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속뜻 해석이 직접적으로 밝히는 것은 각 이름이 나타내는 교회적 상태와 그 상태들의 연속이지, 가인 계열의 어느 인물이 셋 계열의 어느 인물과 정확히 같은 시기에 살았는지를 확정하는 연대기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두 계열이 같은 태고교회 시대 안에서 전개되었다’는 것과 ‘각 세대를 일대일로 맞추어 동시대라고 확정한다’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창4:25에서 셋이 등장하는 것도 훨씬 자연스러워집니다. 이것을 반드시 ‘가인의 여러 대 후손이 모두 지나간 뒤 비로소 셋이 태어났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 없이, 말씀의 서술 초점이 가인으로 표상되는 교회적 계열에서 셋으로 표상되는 다른 교회적 계열로 옮겨가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창5에서는 다시 아담에서 시작하여 셋과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로 이어지는 계열을 하나의 연속된 교회적 역사로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가인 계열을 단순히 ‘악한 계열’, 셋 계열을 ‘선한 계열’이라고 나누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은 처음부터 아무런 진리도 없는 순수한 악을 뜻한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이 하나의 독립적인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하고, 이후 점차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서 변질됩니다. 반대로 셋으로 이어지는 계열 역시 아무런 쇠퇴 없이 처음의 가장 순수한 천적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며 노아까지 이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태고교회 전체가 여러 상태를 거치며 결국 그 시대의 종말을 향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태고교회’라는 말 자체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태고교회는 단지 가장 처음의 순수한 ‘아담’ 상태 하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최초의 천적 상태에서 시작하여 여러 후속 교회와 상태들을 거쳐 그 교회 시대의 종말에 이르기까지의 큰 흐름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는 매우 높은 천적 상태도 있고, 점차 쇠퇴하는 상태도 있으며, 본래의 교회에서 갈라져 나온 교리적 상태도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창1-9의 속뜻을 당시 지상에 살던 모든 사람의 역사적 상태와 곧바로 동일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장들에서 직접 추적하는 것은 무엇보다 교회와 그 교회의 연속적인 상태들입니다. 물론 그 속뜻에 담긴 영적 원리는 오늘의 모든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도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될 수 있고, 한 교리나 지식을 전체보다 높일 수 있으며, 주님께서는 그런 상태에서도 다시 생명의 길을 마련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적 적용과 당시 모든 인류가 똑같은 교회적 상태를 동시에 거쳤다는 주장은 서로 다른 것입니다.

 

결국 AC.324에서 붙들어야 할 것은 두 가지 흐름입니다. 인간 편에서는 본래 하나였던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고 교리들이 독립하면서 여러 교회적 상태가 생겨납니다. 그러나 주님 편에서는 그 분열과 쇠퇴 가운데서도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시는 섭리가 계속됩니다. 창4와 창5를 이러한 관점에서 함께 읽으면, 가인과 아벨, 셋과 에노스, 그리고 창5의 긴 계보는 단순한 고대 가족사의 연속을 넘어 ‘교회가 어떻게 변화하고 쇠퇴하며, 그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어떻게 교회의 생명을 이어 가시는가’를 보여 주는 영적 역사로 열리게 됩니다.

 

 

 

AC.324, 창4, 교회에서 분리된 교리들과 에노스라는 새로운 교회 (AC.324-337)

창4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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