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10을 끝까지 읽으면 한 가지 매우 흥미로운 대조가 나타납니다. 장의 처음에서는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지 않은 다른 불로 분향했다가 죽습니다. 그런데 장의 마지막에서도 명령대로 행하지 않은 일이 발생합니다. 속죄제 염소를 제사장이 먹어야 했는데 이미 불살라 버린 것입니다. 모세는 크게 노하지만 아론의 설명을 듣고 ‘좋게여겼습니다.’ 왜 앞의 일은 죽음으로 끝나고 뒤의 일은 받아들여졌을까요?
먼저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레10:19-20의 아론의 행동을 직접 상세하게 해설하여 두 사건의 차이를 항목별로 설명한 강한 원전은 이번 검토에서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이 마지막 장면에 세밀한 상응을 임의로 부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본문 자체가 보여 주는 차이는 분명합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여호와께서명령하시지아니하신다른불’을 적극적으로 가져와 예배에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주님에게서가 아닌 다른, 사랑과 말씀 이외의 다른 근원에서 나온 예배로 직접 해설합니다.
반면 아론의 경우에는 다른 불을 가져오거나 자기 방식의 예배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두 아들을 잃은 바로 그날, 자신에게 닥친 비극 가운데서 속죄제물을 먹는 것이 과연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실 일인지 묻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그 설명을 듣고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이 두 사건은 ‘하나님의규칙을한번어기면죽는다’는 동일한 범주로 묶이지 않습니다. 나답과 아비후 사건의 중심은 스베덴보리가 직접 설명한 대로 예배의 ‘근원’이 바뀐 데 있습니다. 주님의 불 대신 다른 불, 말씀에서 나온 교리 대신 다른 근원에서 나온 것이 거룩한 예배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마지막 사건은 오히려 외적 규례와 그 규례가 섬기는 내적 목적 사이의 관계를 생각하게 합니다. 아론은 규례를 무시하여 자기 뜻대로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 아니라 ‘오늘이런일이내게임하였는데이것을먹는것이여호와보시기에과연옳겠느냐’고 묻습니다.
여기에는 영적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욕망을 하나님의 뜻보다 위에 놓고 거룩한 것을 자기 방식으로 바꾸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뜻을 진실하게 따르려 하기 때문에 오히려 ‘이상황에서그뜻은무엇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종은 기계적 복종과 같지 않습니다. 참된 순종에는 분별이 있습니다. 물론 인간이 자기 편의대로 말씀을 고치는 것을 ‘분별’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외적인 문자만 지켰다는 사실이 자동으로 내적인 순종을 보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점에서 레10마지막은 10절의 ‘거룩하고속된것을분별하며부정하고정한것을분별하라’는 말씀과도 잘 어울립니다. 이 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순한 규칙 준수보다 더 깊은 분별을 요구합니다. 다른 불과 주님의 불을 분별하고,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하며, 마지막에는 주님께서 실제로 무엇을 기쁘게 여기시는지를 묻습니다.
그래서 레10은 엄격함으로 시작하지만 율법주의로 끝나지 않습니다. 거룩함은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외적 형식을 기계적으로 실행하는 데서 자동으로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거룩함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를 받아 그분의 뜻을 진실하게 분별하고 따르는 데 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다른불’을 가져왔고, 아론은 ‘여호와께서어찌좋게여기셨으리요?’라고 물었습니다. 바로 이 차이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는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거룩한 곳으로 가져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비통한 상황에서도 무엇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인지 묻는 것입니다. 거듭남이 깊어진다는 것은 규칙을 많이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주님의 사랑과 진리 안에서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을 점점 더 분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SWC.레10심화5)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창1:14-17)
AC.36
신앙을사랑에서분리한사람들은신앙이무엇인지조차알지못합니다.어떤이들은신앙을단지생각이라고여기고,어떤이들은주님을향한생각이라고여기며,또어떤이들은신앙의교리라고생각합니다.그러나신앙은신앙교리에포함된모든것을아는것과인정하는데에만있지않고,특히그교리가가르치는모든것에순종하는데에있습니다.그교리가가르치는가장중요한것,곧사람이반드시순종해야할것은주님을사랑하는것(lovetotheLord)과이웃을사랑하는것(lovetowardtheneighbor)입니다.사람이이사랑안에있지않다면,그는신앙안에있지않습니다.이점에대해주님은너무도분명하게가르치셔서,조금도의심할여지를남기지않으십니다.마가복음입니다. They who have separated faith from love do not even know what faith is.When thinking of faith, some imagine it to be mere thought, some that it is thought directed toward the Lord, few that it is the doctrine of faith.But faith is not only a knowledge and acknowledgment of all things that the doctrine of faith comprises, but especially is it an obedience to all things that the doctrine of faith teaches.The primary point that it teaches, and that which men should obey, is love to the Lord, and love toward the neighbor, for if a man is not in this, he is not in faith.This the Lord teaches so plainly as to leave no doubt concerning it, in Mark:
AC.36은 매우 직접적인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신앙을사랑에서분리한사람들은신앙이무엇인지조차알지못합니다.’ 상당히 강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신앙’이라고 부르는지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는 어떤 교리를 머리로 알고 참이라고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아직 신앙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신앙을 여러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을 종교적인 생각이라고 여기고, 어떤 사람은 주님을 생각하는 마음이라고 여기며, 어떤 사람은 올바른 교리를 알고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것들이 전혀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원문은 신앙이 신앙 교리에 포함된 것들을 ‘아는것과인정하는데에만있지않고’라고 말합니다. 즉 ‘앎’과 ‘인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더 필요할까요? 스베덴보리는 ‘특히그교리가가르치는모든것에순종하는데에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순종’은 AC.36을 이해하는 중요한 말입니다. 신앙은 머릿속에 있는 교리로 끝나지 않고, 그 교리가 가르치는 것을 실제 삶에서 따르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처음 읽는 독자에게 질문이 하나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기독교신앙이란결국계명을잘지키는것인가?’ AC.36은 곧바로 그 오해를 막아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순종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수많은 규칙을 외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사랑하는것’과 ‘이웃을사랑하는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교리가 가장 먼저 가르치며 사람이 순종해야 할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신앙은순종이다’라는 말을 ‘명령을잘따르는것이신앙이다’라는 뜻으로만 이해하면 부족합니다. 어떤 순종인가가 중요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이이사랑안에있지않다면그는신앙안에있지않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독립적인 영적 실재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예수그리스도를믿습니다’라고 진심으로 고백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AC.36의 논점은 신앙의 고백이나 교리의 인정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사랑과 삶으로부터 분리하는 데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주님께서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치신 사랑을 삶에서 완전히 떼어 놓는다면,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온전한 신앙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이를 확증하기 위해 AC.36은 스베덴보리 자신의 철학이나 신학 체계를 먼저 제시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합니다. 막12:29-31에서 주님은 모든 계명 가운데 첫째로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을, 둘째로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을 말씀하시며 ‘이보다더큰계명이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스베덴보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신앙의 중심에 두는 직접적인 근거입니다.
이어 마22에서도 같은 두 계명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더욱 중요한 말씀이 덧붙습니다. ‘이두계명이온율법과선지자의강령이니라.’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율법과선지자’가 ‘신앙의보편적교리이며말씀전체’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성경의 수많은 가르침 가운데 두 항목을 골라 중요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가 달려 있는 중심 원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리는중요하지않고사랑만있으면된다’는 말과도 다릅니다. 오히려 참된 교리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교리는 무엇이 참인지 가르치고, 사람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 교리를 아무리 정확하게 알고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AC.36의 기준에서는 신앙의 본래 목적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반대로 사랑을 강조한다고 해서 진리를 아무렇게나 생각해도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AC.36자체가 ‘신앙의교리’와 그것이 ‘가르치는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무엇에 순종할지를 알려면 먼저 무엇이 참인지 배워야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대립시키는 것은 ‘교리냐사랑이냐’가 아니라 ‘삶과분리된교리적신앙’과 ‘사랑안에서살아움직이는신앙’이라고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이렇게 보면 앞의 AC.35와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AC.35에서는 이해가 하늘을 향하면서도 의지가 그 반대 방향을 향할 수 있는 인간의 분열을 다루었습니다. AC.36에서는 그 문제가 신앙의 언어로 다시 나타납니다. 이해로 교리를 알고 인정하는 것과 실제로 그 교리가 가르치는 사랑 안에서 사는 것이 갈라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6은 우리에게 단순히 ‘당신은무엇을믿습니까?’라고만 묻지 않습니다. ‘당신이믿는다고하는것이당신의사랑과삶에서는어떻게나타나고있습니까?’라고도 묻습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빠진 신앙은 아무리 많은 지식과 올바른 고백을 가지고 있어도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앙의 본질에는 아직 이르지 못합니다.
결국 AC.36에서 신앙은 머리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알고 인정한 진리가 사랑과 만나고, 그 사랑이 순종하는 삶으로 나타날 때 신앙은 신앙답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는 순간 신앙 자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된다고 말합니다. 신앙의 중심에는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두 큰 계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심화
1. ‘주님사랑’(love to the Lord),‘이웃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