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C.레5 심화

3. ‘죄를 깨닫고 자복한다는 것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할까?’

 

레4와 레5를 이어 읽으면 매우 중요한 변화가 보입니다. 레4에서 반복되는 말은 ‘그가 범한 죄를 깨달으면’이고, 레5에 들어오면 ‘잘못하였노라 자복하고’가 더해집니다. 깨달음에서 자복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경 본문 자체도 죄를 인식한 뒤 그것을 고백하도록 명시합니다.

 

그러나 죄를 ‘깨닫는 것’과 ‘자복하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기 잘못을 알아도 그것을 자기 죄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말을 심하게 한 것은 맞지만 그 사람이 먼저 시작했다’, ‘내가 거짓말한 것은 맞지만 상황상 어쩔 수 없었다’, ‘내가 화낸 것은 맞지만 그것은 정의로운 분노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악을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자복은 이 방어를 내려놓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했는가’보다 먼저 ‘나는 주님 앞에서 무엇을 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무조건 비난하는 자기혐오와 다릅니다. 오히려 매우 정확한 자기 인식입니다. 내가 하지 않은 죄까지 내 것으로 짊어질 필요는 없지만 내가 실제로 행한 악은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회개 교리에서 이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회개는 죄를 입술로 열거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기 삶을 살피고, 악을 발견하고, 그것을 죄라고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실제로 그 악을 피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복의 진실성은 결국 다음 삶에서 드러납니다. 같은 상황이 다시 왔을 때 이전과 다른 선택을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죄를 깨닫게 되는 순간은 두려운 순간이면서 동시에 은혜의 순간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악을 보여 주시는 목적은 그 사람을 절망시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악은 피할 수 없지만 보이기 시작한 악은 주님의 도움을 받아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자기 자신이 점점 더 완벽해 보이기보다 오히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미세한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빛이 밝아졌기 때문에 먼지가 더 잘 보이는 것입니다.

 

레5는 바로 그 순간에 ‘자복하라’고 합니다. 숨기지 말고, 다른 이름을 붙이지 말고,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미움이면 미움이라고, 거짓이면 거짓이라고, 지배욕이면 지배욕이라고 주님 앞에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것을 피하려는 실제 싸움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자복은 ‘저는 형편없는 죄인입니다’라는 막연한 자기비하보다 훨씬 구체적입니다. ‘주님, 저는 이 사람을 미워하고 있습니다’, ‘제가 인정받고 싶은 마음 때문에 이 일을 했습니다’, ‘제가 손해 보기 싫어서 진실을 숨겼습니다’처럼 말씀의 빛에서 발견된 실제 악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가 구체적일수록 무엇을 피해야 하는지도 구체적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레5 후반의 속건제가 보여 주듯 자복은 마침내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내가 잘못한 것을 인정했다면 가능한 경우 바로잡습니다. 그래서 레5에는 매우 아름다운 하나의 흐름이 있습니다. ‘깨닫는다 → 자복한다 → 피한다 → 바로잡는다.’ 이것은 죄책감의 계단이 아니라 자유의 계단입니다. 한 단계씩 올라갈수록 악은 인간을 붙잡을 힘을 잃고 주님의 선과 진리가 그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죄를 깨닫는 것은 거듭남의 실패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죄를 전혀 보지 못하는 것이 더 위험합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신 것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잘못하였노라’ 자복하며, 그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가능한 것은 바로잡을 때 인간은 실제로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레5의 자복은 입술에서 끝나는 고백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돌리는 고백입니다. (SWC.레5 심화 3)

 

 

 

SW.7 심화 4, ‘왜 속죄제의 고운 가루에는 기름과 유향을 넣지 않았을까?’

SW.7 심화4. ‘왜 속죄제의 고운 가루에는 기름과 유향을 넣지 않았을까?’ 레5:11은 레2를 이미 읽은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레2의 소제에서는 고운 가루에 반드시 기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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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7 심화 2, ‘왜 자복만으로 끝나지 않고 보상까지 해야 했을까?’

SW.7 심화2. ‘왜 자복만으로 끝나지 않고 보상까지 해야 했을까?’ 레5 전반부에는 ‘잘못하였노라 자복하고’라는 말씀이 나오지만 후반부의 속건제에 들어가면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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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4 심화

3. ‘왜 수송아지의 기름은 제단에서 불사르고 나머지는 진영 밖에서 불살랐을까?’

 

레위기 4장의 속죄제에는 얼핏 보면 매우 이상한 대비가 있습니다. 같은 수송아지인데 일부는 제단으로 올라가고 일부는 진영 밖으로 나갑니다. 내장과 콩팥 주변의 ‘기름’은 거룩한 제단 위에서 불사르지만, 가죽과 고기와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과 똥, 곧 나머지 전체는 진영 밖으로 가져가 불사릅니다.

 

왜 같은 제물 안에서 이렇게 정반대의 처리가 이루어질까요?

 

여기에는 매우 분명한 상응이 있습니다. 레3에서 살펴본 것처럼 기름은 선을 표상합니다. 그래서 속죄제에서도 기름은 버려지지 않고 제단으로 올라갑니다. 인간이 정결하게 된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과 거짓은 제거되지만 주님에게서 오는 선은 보존되고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반면 수송아지의 나머지를 진영 밖에서 불사르는 장면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가 매우 직접적으로 설명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38(출29:14)은 수송아지의 살과 가죽과 똥을 진영 밖에서 불사르는 것이 그것들이 표상하는 악들을 지옥에 내어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진영은 천국과 교회를 표상하고, 따라서 진영 밖은 천국과 교회가 아닌 곳, 곧 지옥을 표상합니다.

 

이어 AC.10040은 속죄제 수송아지의 살이 여기서는 사랑의 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악’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같은 ‘살’이라는 상응도 문맥에 따라 정반대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속죄제라는 문맥에서는 제거되어야 할 악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상응을 읽을 때 매우 중요한 원칙을 가르쳐 줍니다. ‘살은 언제나 이것’, ‘불은 언제나 이것’, ‘동물은 언제나 이것’처럼 기계적으로 대응시키면 안 됩니다. 말씀의 문맥과 계열이 중요합니다. 같은 자연적 대상도 선한 계열에서는 긍정적 의미를, 악한 계열에서는 반대 의미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레4의 수송아지는 바로 이 원리를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기름은 제단으로 올라갑니다. 악을 표상하는 것은 진영 밖으로 나갑니다. 이것이 정결입니다.

 

우리의 회개도 이와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인격 전체를 없애 버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개성이나 재능이나 자연적 삶 자체를 파괴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악한 사랑과 거짓을 분리하여 물러나게 하시고, 주님에게서 받은 선한 것들은 보존하고 정결하게 하십니다.

 

예를 들어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의지 자체를 없애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자기 뜻을 관철하려는 지배욕은 제거되어야 하지만, 정결하게 된 강한 의지는 선한 일을 끝까지 수행하는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지적 능력이 뛰어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지성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보다 우월해지려는 교만은 진영 밖으로 나가야 하지만, 정결하게 된 이해는 진리를 보고 다른 사람을 돕는 귀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거듭남은 인간을 무색무취하게 만드는 과정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주신 고유한 능력과 쓰임을 없애지 않으시고 그것을 정결하게 하여 선을 섬기게 하십니다. 버려져야 하는 것은 악이며, 주님에게서 온 선은 주님께 돌려집니다.

 

여기서 ‘진영 밖’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악은 조금 고쳐서 성소 안에 보관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을 악으로 인정했다면 그것과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미움을 ‘정의감’이라고 이름 붙여 보관하고, 지배욕을 ‘책임감’이라고 이름 붙여 보관하며, 자기 자랑을 ‘간증’이라고 이름 붙여 성소 안에 들여놓아서는 안 됩니다.

 

진리가 그것이 악임을 보여 주었다면 진영 밖으로 내보내야 합니다. 이것이 ‘악을 죄로 여겨 피하는 것’의 실제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여기서도 자신의 힘으로 악을 지옥에 던질 수 없습니다. 악을 보고 인정하고 피하려는 것은 인간이 해야 하지만, 실제로 악을 물러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인간이 주님을 바라보며 악을 거부할 때 주님께서 그 악을 인간의 중심에서 밀어내십니다.

 

그래서 레4의 장면은 매우 역동적입니다. 한쪽에서는 기름이 제단의 불꽃 속으로 올라갑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악을 표상하는 것들이 진영 밖으로 나갑니다. 선은 주님께 돌려지고 악은 제거됩니다.

 

바로 이것이 속죄제의 정결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단지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이름 아래 그대로 두시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인간 안의 질서를 바꾸어 가십니다. 악은 밖으로, 선은 주님께로 향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레4의 속죄제는 우리에게 아주 실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지금 내 안에서 제단으로 올라가야 할 것은 무엇이며, 진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은 무엇인가?’입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선은 감사함으로 그분께 돌리고, 말씀의 빛에서 악으로 드러난 것은 붙들거나 변명하지 말고 피해야 합니다. 이 두 움직임이 함께 일어날 때 인간의 자연적 삶은 조금씩 정결하게 되고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SW.레4 심화 3)

 

 

 

SW.6, 레4, ‘그가 범한 죄를 깨달으면 - 속죄제에 감추어진 악의 인식과 정결의 아르카나’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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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6 심화 2, ‘속죄와 사함은 죄의 형벌을 대신 받는 것인가, 악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인가?’

SW.6 심화2. ‘속죄와 사함은 죄의 형벌을 대신 받는 것인가, 악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인가?’ 레위기 4장의 속죄제를 읽을 때 기독교인은 자연스럽게 십자가를 떠올립니다. 죄를 범한 인간 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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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4 심화

1. ‘부지중에 지은 죄도 왜 속죄가 필요할까?’

 

레위기 4장을 읽으면 현대 독자에게 가장 먼저 생기는 질문 가운데 하나가 있습니다. ‘일부러 지은 죄도 아닌데 왜 속죄해야 하는가?’입니다. 레4는 반복해서 ‘부지중에 범하여’라고 말합니다. 제사장도, 온 회중도, 족장도, 평민도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지 못한 상태에서 여호와의 계명을 범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부지중에 지은 죄’라는 말은 인간에게 책임이 전혀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억지로 죄로 계산하신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인간의 영적 상태에 관한 매우 깊은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인간에게는 아직 자기가 보지 못하는 악과 거짓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생각보다 잘 모릅니다. 어떤 행동을 선한 의도에서 했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훨씬 컸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바르게 가르친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상대를 지배하고 싶었던 마음이 섞여 있었을 수 있습니다. ‘진리를 지킨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의견을 사랑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까지 그 사람에게 그 악은 상당 부분 ‘부지중’에 있습니다.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악이 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미움은 내가 그것을 미움이라고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사랑이 되지 않으며, 교만은 내가 교만하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겸손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진리를 주십니다. 진리는 단지 교리를 많이 알게 하기 위한 빛이 아니라 인간 자신을 비추는 빛입니다. 그 빛이 삶에 들어오면서 어느 날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레4가 반복해서 ‘그가 범한 죄를 깨달으면’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죄를 깨닫는 순간은 정죄의 끝이 아니라 회개의 시작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39(출29:14)는 속죄제가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면서 레4의 속죄제 규정들을 직접 인용합니다. 따라서 속죄제의 목적은 인간을 죄책감 속에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라, 발견된 악과 거짓에서 인간을 정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깨닫기 전’과 ‘깨달은 후’입니다. 아직 보지 못할 때와 주님께서 보여 주신 뒤의 상태는 같지 않습니다. 보지 못했던 악을 보게 된 뒤에도 그것을 붙들고 정당화한다면 이제 문제는 더 깊어집니다. 반대로 그것을 죄라고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피하기 시작하면 거듭남이 진행됩니다.

 

그래서 영적 성장은 ‘나는 이제 죄가 별로 없다’는 느낌으로 측정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께 가까이 갈수록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더 미세한 동기와 욕망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퇴보의 표시가 아닙니다. 더 밝은 빛이 들어왔기 때문에 전에는 보이지 않던 먼지가 보이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발견했을 때 낙심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왜 아직도 이런 것이 내 안에 있는가?’라는 자기혐오가 아니라 ‘주님께서 이것을 왜 지금 보여 주셨는가?’입니다. 보여 주셨다면 피할 수 있도록 보여 주신 것입니다.

 

레4의 속죄제는 바로 그 희망을 담고 있습니다. 인간은 먼저 죄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깨닫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진리를 통하여 정결하게 되고 악이 물러나며, 마침내 사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부지중에 지은 죄도 왜 속죄가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것 때문에 우리를 함정에 빠뜨리려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직 알지 못하는 악에서도 우리를 건져 내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죄를 보게 하시는 것은 정죄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결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어둠 속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을 말씀의 빛에서 보게 되는 순간, 거듭남의 새로운 문이 열립니다. (SWC.레4 심화 1)

 

 

 

SW.6 심화 2, ‘속죄와 사함은 죄의 형벌을 대신 받는 것인가, 악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인가?’

SW.6 심화2. ‘속죄와 사함은 죄의 형벌을 대신 받는 것인가, 악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인가?’ 레위기 4장의 속죄제를 읽을 때 기독교인은 자연스럽게 십자가를 떠올립니다. 죄를 범한 인간 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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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6, 레4, ‘그가 범한 죄를 깨달으면 - 속죄제에 감추어진 악의 인식과 정결의 아르카나’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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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에서 강사가 다루는 본문은 역대상 4장 9-10절의 유명한 ‘야베스의 기도’입니다. 한때 한국 교회에서도 ‘나의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라는 구절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했던 기도입니다. 그 과정에서 ‘지경’은 사업의 확장, 재산의 증가, 사역의 성장, 영향력의 확대 같은 것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 야베스의 기도가 대표적인 ‘복을 구하는 기도’로 자리 잡았습니다. 강사가 문제 삼는 것도 바로 이 지점입니다. 그는 히브리어 본문을 자세히 살피면서 마지막 구절을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라고만 읽을 것이 아니라 ‘내가 고통을 일으키지 않게 하옵소서’라고도 읽을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그렇게 되면 야베스의 기도는 ‘하나님, 나를 잘되게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에서 ‘하나님, 내가 남을 아프게 하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로 깊어집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볼 때 바로 이 방향 전환은 매우 주목할 만합니다.

 

먼저 히브리어 자체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역대상 4장 9절에서 야베스의 어머니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고 말하는데, 여기 사용된 히브리어 ‘오체브’(עֹצֶב)는 고통, 슬픔, 수고 같은 뜻을 가집니다. 그리고 ‘야베스’(יַעְבֵּץ)라는 이름과 이 단어 사이에는 분명한 언어유희가 있습니다. 실제로 여러 번역과 주석도 이 점을 인정합니다. 다만 영상에서 설명하듯 야베스라는 이름이 단순히 ‘오체브의 자음 순서를 바꾼 단어’라고 어원적으로 확정하는 것은 조금 조심하는 편이 좋습니다. 본문이 두 단어의 유사한 소리를 이용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성경의 이름 풀이에서는 현대 언어학적 어원과 문학적인 언어유희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야베스라는 이름과 고통을 뜻하는 오체브 사이에 의도적인 말놀이가 있다’고 하는 정도가 가장 안전합니다. 더구나 고유명사 야베스의 첫 요드(י)를 곧바로 히브리어 미완료형의 접두사라고 분석하는 것 역시 지나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고유명사가 되면 그 자체로 이름이므로, 일반 동사의 활용형처럼 단순하게 역분석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본문 저자가 ‘야베스 - 고통 - 근심’이라는 음성적 연결을 독자에게 의식시키고 있다는 강사의 큰 관찰은 옳습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10절 끝의 ‘레빌티 오츠비’(לְבִלְתִּי עָצְבִּי)입니다. 여기의 ‘오츠비’는 ‘고통하다, 슬프게 하다’와 관련된 동사의 부정사 형태에 1인칭 단수 접미사가 붙은 것으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부정사에 붙은 인칭 접미사는 문맥에 따라 행위의 주체처럼 이해되기도 하고 객체처럼 이해되기도 하기 때문에, 강사가 소개한 두 방향의 가능성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 영어 번역들도 갈립니다. NASB와 NET 같은 번역은 대체로 ‘그것이 나를 아프게 하지 않도록’, 곧 야베스가 고통받지 않도록이라는 방향으로 번역하지만, NKJV와 HCSB 계열은 ‘내가 고통을 일으키지 않도록’이라는 방향을 취한 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강사가 말하는 ‘내가 고통을 야기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는 임의로 만들어 낸 번역은 아닙니다. 다만 영상에서 ‘킹제임스 번역이 저처럼 해석했다’고 말한 부분은 정확히는 수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통적인 KJV는 ‘that it may not grieve me’, 곧 ‘그것이 나를 근심하게 하지 않도록’이라고 번역하며, ‘that I may not cause pain’이라고 한 것은 NKJV입니다. 작은 차이 같지만 히브리어 해석을 중심으로 하는 영상이므로 이 구분은 중요합니다.

 

더구나 이 절의 히브리어는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습니다. ‘웨아시타 메라아’(וְעָשִׂיתָ מֵּרָעָה)라는 부분 자체가 해석상 어려움이 있는 표현입니다. 많은 번역본은 문맥을 따라 ‘나를 악에서 지켜 주시고’, ‘재앙으로부터 보호하시고’와 같이 이해하지만, 마소라 본문의 문법을 문자 그대로 풀면 매끄럽지 않습니다. NET 성경도 이 대목의 히브리어가 어렵다는 점을 주석에서 명시하고 다른 본문 가능성까지 논의합니다. 그러므로 10절 마지막을 하나의 문법 분석만으로 완전히 해결됐다고 말하기보다는, ‘본문 자체가 여러 해석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가운데 내가 고통을 일으키지 않도록이라는 이해도 실제 번역 전통 속에 존재한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오래된 유대교 주석 전통에서는 대체로 야베스 자신에게 손해와 고통이 닥치지 않게 해 달라는 의미로 읽어 왔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남에게 고통을 주지 않게’라는 해석은 매우 아름답고 문법적으로 가능한 독법 가운데 하나이지만, 전통적 해석을 폐기하는 결정적 번역이라고까지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나에게 고통이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곧바로 기복주의라고 규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주님께 보호와 건강과 평안과 생계와 필요한 자연적 복을 구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무엇을 위해 구해지는가입니다. ‘나의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가 ‘내 소유를 더 늘려 주십시오’, ‘나를 더 유명하게 만들어 주십시오’, ‘내 사역을 남들보다 크게 만들어 주십시오’라는 자기중심적 욕망으로 변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반대로 주님께서 맡기신 쓰임을 더 잘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자연적 조건과 능력과 기회를 구한다면 같은 말도 전혀 다른 기도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외적 행위 자체보다 그 행위 안에서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목적으로 삼는지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야베스의 기도의 핵심은 ‘복을 구했느냐, 복을 구하지 않았느냐’가 아닙니다. ‘그 복의 중심에 누가 있는가’입니다. 우리의 proprium은 복조차도 자기 자신을 향하게 만듭니다. ‘주님, 나의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라고 하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내가 더 인정받게 해 주십시오’, ‘내 이름이 더 높아지게 해 주십시오’, ‘내가 다른 사람보다 성공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같은 ‘지경’을 구하면서 ‘제가 더 많은 사람에게 선을 행할 수 있게 하시고, 더 큰 책임을 감당하게 하시며, 주님께 받은 것을 더 넓게 쓰게 하십시오’라고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똑같은 기도라 하더라도 내적 의미에서는 전혀 다른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강사가 마지막 구절을 ‘내가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고 읽은 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놀라울 만큼 잘 만납니다. 스베덴보리는 반복해서 ‘악을 죄로 여겨 피하는 것’을 기독교적 삶의 첫째요 본질적인 것으로 말합니다. ‘신적 섭리’ 265번에서도 악을 죄로 여겨 삼가는 것이 기독교 종교의 본질이라고 설명하며, ‘참된 기독교’ 535번에서는 체어리티의 첫째가 악을 피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지 ‘나에게 나쁜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보다 훨씬 깊습니다. ‘주님, 제 안에 있는 악이 다른 사람에게 흘러나가지 못하게 해 주십시오. 제 말과 행동과 욕망 때문에 다른 사람이 상처받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 악을 단순히 억제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것이 주님께 죄임을 보고 돌이키게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내가 고통을 일으키지 않도록’이라는 기도조차 단순한 도덕적 착함을 넘어가야 합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한다고 해서 자신의 내면을 정결하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외적 삶에서 악을 죄로 여기고 싸우며 물리칠 때, 실제로 그 악의 욕망을 내면에서 제거하시는 분은 주님이라고 설명합니다.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1764) 145번은 사람이 악을 죄로 여기고 그것을 그만두기로 결심하면서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싸움이 시작되고, 그 과정에서 주님께서 악한 욕망을 제거하고 선의 애정을 심으신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깊은 야베스의 기도는 ‘제가 남에게 피해를 안 끼치도록 제 성격을 잘 관리하겠습니다’가 아니라 ‘주의 손이 나와 함께하사, 제가 악을 행하지 않도록 하시고, 제 안에서 악을 일으키는 것까지 주님께서 다스려 주십시오’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야베스의 기도 가운데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라는 구절과도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따라서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와 ‘주의 손이 나와 함께하게 하십시오’와 ‘악에서 지켜 주십시오’와 ‘내가 고통을 일으키지 않게 하십시오’를 서로 떨어진 네 가지 소원으로만 읽지 않고 하나의 거듭남의 흐름으로 읽어 볼 수도 있습니다. ‘주님, 제게 주신 선과 진리의 삶의 영역을 넓혀 주십시오. 그러나 그것을 제 힘으로 소유하려 하지 않게 하시고, 언제나 주님의 손이 저와 함께하게 하십시오. 제 안의 악이 그 넓어진 지경 안으로 흘러들지 않게 하시며, 제가 받은 능력과 영향력이 오히려 다른 사람을 상하게 하는 도구가 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읽으면 ‘지경의 확대’는 성공의 확대가 아니라 쓰임의 확대가 됩니다. 지위가 높아질수록 더 많은 사람을 지배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고, 재물이 많아질수록 더 많이 소유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선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며, 목회자의 영향력이 넓어질수록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더 많은 영혼을 주님께 연결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대상 4장 10절에 스베덴보리가 직접 붙인 속뜻이라고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거듭남과 쓰임의 교리 안에서 이 기도를 읽을 때 자연스럽게 열리는 적용입니다.

 

이 지점에서 한국 교회의 이른바 ‘야베스의 기도 열풍’도 조금 다르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는 사실 자체를 기복주의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지나칩니다. 성경에는 자연적 복을 구하는 기도가 있고, 주님께서는 우리의 자연적 삶도 섭리하십니다. 그러나 자연적 복을 최종 목적으로 만들 때 신앙의 질서가 뒤집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자연적인 것은 영적인 것을 섬겨야 합니다. 재물과 건강과 지위와 지식과 능력과 영향력은 모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선한 쓰임을 위한 수단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버릴 것이 아니라 그 기도의 중심을 바꾸어야 합니다. ‘내 지경을 넓혀 내 것을 크게 해 주십시오’가 아니라 ‘주님께서 제게 맡기실 수 있는 쓰임의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영상의 가장 귀한 문장은 처음과 끝에 반복된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지 않도록 그런 내가 될 수 있도록 인도해 달라.’ 이것은 매우 실제적인 회개의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저 사람이 나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저 사람 때문에 내가 고통받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시선을 다시 나 자신에게 돌리게 합니다. ‘그 사람의 악’은 그 사람이 주님 앞에서 다룰 문제이고, 내가 지금 살펴야 하는 것은 ‘내 안의 악’입니다. ‘나는 누구에게 고통을 주고 있지는 않은가? 내 proprium의 자존심과 지배욕과 인정욕과 탐욕과 분노와 냉혹함 때문에 가까운 사람이 힘들어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것을 보는 것이 자기 성찰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발견한 악을 ‘내 성격이 원래 그래’라고 합리화하지 않고 ‘이것은 주님께 죄입니다’라고 인정하고 피하려 할 때 거듭남이 시작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악을 죄로 여겨 피하는 것’을 그토록 강조한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강사의 해석을 이렇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히브리어 주해 차원에서는 ‘내가 고통을 일으키지 않도록’이라는 번역을 유일한 정답으로 밀어붙이기에는 조심할 점이 있습니다. 전통적인 ‘내가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이라는 해석 역시 충분한 문법적·번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실제 마소라 본문 자체에도 난해한 부분이 있습니다. 또한 영상에서 KJV와 NKJV를 혼동한 작은 오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강사가 야베스의 기도를 자기중심적인 복의 청원에서 타인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구하는 기도로 전환한 것은 매우 좋은 신학적 통찰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내게 고통이 없게 하옵소서’와 ‘내가 고통을 주지 않게 하옵소서’ 가운데 하나를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둘이 함께 갈 수 있습니다. ‘주님, 악으로부터 저를 보호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무엇보다 제가 악의 통로가 되지 않게 하십시오. 제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 그러나 그것이 제 proprium의 지경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가 흘러갈 쓰임의 지경이 되게 하십시오. 주의 손이 저와 함께하시되, 그 손으로 제 주변의 장애물만 치워 달라고 하지 않게 하시고, 먼저 제 안의 악을 보게 하시며 그것을 죄로 여겨 피하게 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야베스의 기도는 더 이상 ‘고통 없는 인생과 성공을 보장받는 주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복을 받을수록 더 선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지경이 넓어질수록 더 많은 쓰임을 감당하게 하시며, 힘이 커질수록 아무도 해치지 않게 하시고, 무엇보다 그 모든 과정에서 주님의 손을 떠나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는 거듭남의 기도가 됩니다. 저는 야베스의 짧은 기도를 오늘 우리가 다시 드린다면, 바로 이 지점까지 가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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