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92 심화

1. 평화가 어떻게 ‘생명’일 수 있는가?

 

AC.92에서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의 평화에 관하여 매우 독특한 말을 합니다. 그것은 단지 싸움이 그친 상태가 아니라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평화를 갈등이나 불안이 없는 상태로 생각하는데, 어떻게 평화 자체가 ‘생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먼저 AC.92가 말하는 평화는 단순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정적 상태가 아닙니다. 그 직전까지 사람 안에는 싸움이 있었습니다. AC.91에 따르면 영적 인간일 때에는 겉 사람이 아직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기 때문에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이 되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고, 그 결과 싸움이 그치며 평온이 뒤따릅니다. 따라서 평화는 단순히 싸움 하나가 없어졌다는 데서 끝나지 않고, 사람 안의 질서가 달라진 결과로 찾아오는 상태입니다.

 

AC.92가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싸움이 그쳤기 때문에 생명이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전에는 싸움과 저항 때문에 충분히 나타나지 못하던 것이 이제 겉 사람에게까지 미치기 시작합니다. AC.91에서는 이것을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적시고 이슬로 촉촉하게 하는 수증기에 비유했습니다. 평화는 텅 빈 고요가 아니라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에게 생명이 미치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천적 인간의 안식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동적인 상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84부터 계속 나온 ‘안식’도 주님께서 피곤하여 일을 중단하신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주님 홀로 사람을 위하여 싸우셨고 그 일이 완성되어 싸움이 그쳤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완성된 질서 안에서 이제 평화로부터 생명이 흘러나옵니다.

 

이것은 자연의 모습으로 생각하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폭풍이 그쳤다고 해서 자연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요한 비와 이슬이 땅을 적실 때 식물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AC.90-91에서 ‘비’와 ‘안개’가 평화의 평온을 뜻하고, 그것에 의해 ‘들의 관목’과 ‘들의 초목’이 산출된다고 한 것도 같은 흐름입니다. 평화는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 공백이 아니라 생명이 자라날 수 있는 상태입니다.

 

다만 여기서 ‘평화가 곧 생명이다’라는 하나의 고정된 상응 공식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AC.92의 표현은 더 정확합니다. 그것은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입니다. 중요한 것은 평화가 어디에서 오며 무엇을 하는가입니다. 그것은 사람 자신이 만들어 내는 편안함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나와 겉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거기에서 선과 진리가 살아나게 하는 생명입니다.

 

따라서 AC.92에서 말하는 평화는 싸움의 부재보다 훨씬 적극적인 상태입니다. 탐욕과 거짓으로 말미암은 불안이 그친 뒤,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겉 사람에게 자유롭게 미치기 시작합니다. 그 생명으로 인해 사람 안의 선과 진리가 살아납니다. 이런 의미에서 천적 인간의 평화는 단순한 ‘쉼’이 아니라 생명으로 충만한 안식입니다. (AC.92 심화 1)

 

 

 

AC.92, 창2:5-6, '평화는 싸움의 그침만이 아니라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다'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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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심화

1. ‘일곱 번째 상태’와 수도원 전통의 ‘완덕’, ‘합일’의 비교

 

수도원 전통에서 말해 온 ‘완덕’이나 ‘합일’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일곱 번째 상태’ 사이에는 분명 서로 닿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두 개념을 그대로 같은 것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서로 닮은 영적 지향이 어디에 있으며, 그 지향을 설명하는 방식에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AC.13의 일곱 번째 상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에게 창조의 여섯 날은 인간이 거듭나는 상태들을 나타내며, 그 뒤의 일곱째 날은 안식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안식은 단순히 아무 일도 하지 않는 휴식이 아닙니다. 앞선 상태들에서 사람은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고 선을 행하는 것처럼 경험하지만,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실제로 싸우시고 역사하시는 분은 주님이심을 더욱 인정하게 됩니다. 따라서 일곱 번째 상태의 안식은 인간의 proprium이 주도권을 쥐는 상태가 아니라 주님께서 주된 분이 되시는 질서와 관련됩니다.

 

이 점에서는 기독교 수도원과 신비 전통에서 말해 온 ‘완덕’이나 ‘합일’과 만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특히 서방 기독교 영성에서는 영적 여정을 ‘정화’, ‘조명’, ‘합일’이라는 틀로 설명해 온 전통이 있으며, 여기서 합일은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뜻과 더욱 깊이 일치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자기중심적인 의지가 약해지고 하나님의 뜻을 사랑하여 그 뜻에 따라 살고자 한다는 점에서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안식과 비교해 볼 만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수도원 전통 전체를 ‘신비 체험을 추구하는 영성’이라고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수도원과 신비 전통 안에서도 합일은 황홀경이나 특별한 관상 체험만을 뜻하지 않았으며, 순종과 사랑과 덕의 삶, 기도와 일상생활 전체가 하나님을 향하도록 변화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 흐름이 있습니다. 따라서 차이는 ‘수도원 전통은 체험이고 스베덴보리는 삶이다’라고 양분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의 질서를 설명할 때 특별한 종교적 체험 자체를 그 상태의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는 데서 찾는 편이 정확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사람이 어떤 황홀한 체험을 했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그 사람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가입니다. 진리를 알고 선을 행하더라도 여전히 자기에게서 한다고 생각하는 상태가 있고,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살아나기 시작하는 상태가 있으며, 더 나아가 사랑이 지배적인 원리가 되는 상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곱 번째 상태를 판단하는 핵심은 특별한 감각적·신비적 경험이 아니라 인간 안의 사랑과 의지와 삶의 질서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변화되었는가에 있습니다.

 

또한 이 상태를 수도원이나 세상과 격리된 특별한 생활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으로 볼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의 실제 무대는 인간의 삶 전체입니다. 가정과 직업과 인간관계와 맡겨진 쓰임 속에서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진리를 배우며, 선을 행하고, 그 선이 자기에게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삶이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따라서 일곱 번째 상태를 특정한 생활 형태나 수도 제도와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일곱 번째 상태를 누구나 쉽게 도달하는 일반적인 단계라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바로 AC.13에서 스베덴보리는 오늘날 사람이 실제로 이 여러 상태 가운데 어디까지 이르는지를 말하면서, 여섯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도 드물고 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상태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거듭남의 질서 안에서 이해해야 하지만, 실제 인간에게서 그 충만한 상태가 이루어지는 것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또 일곱 번째 상태의 ‘안식’을 이후에는 아무런 시험이나 영적 싸움도 없다는 절대적인 무전투 상태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핵심은 싸움의 주체와 인간의 내적 태도가 달라지는 데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악과 싸워 이긴다고 여기기보다 주님께 의지하며, 주님께서 싸우시고 선을 이루시는 분임을 인정하는 질서가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은 단순히 갈등이 사라진 심리적 평온이라기보다 주님의 질서 안에서 오는 영적 평안과 관련됩니다.

 

이렇게 보면 수도원 전통의 ‘완덕’이나 ‘합일’과 스베덴보리의 ‘일곱 번째 상태’ 사이에는 비교할 수 있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 다 인간이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변화를 말하며,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는 것을 중요하게 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일곱 번째 상태를 어떤 특정 수도 전통의 완덕론이나 신비적 합일론과 그대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창조의 여섯 날과 일곱째 날이라는 말씀의 속뜻 안에서, 인간이 주님에 의해 거듭나고 마침내 주님께서 주된 분으로 역사하시는 안식의 질서로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AC.13을 수도원 영성과 연결하여 읽을 때 가장 유익한 질문은 ‘어떤 특별한 합일 체험에 도달했는가?’가 아니라 ‘내 삶의 주도권이 실제로 누구에게 있는가?’일 것입니다. 내가 진리를 알고 선을 행하면서도 그것을 여전히 내 힘과 공로로 붙들고 있는지, 아니면 주님이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심을 인정하며 주님께서 나를 이끄시도록 내 삶을 맡기고 있는지를 묻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곱째 날의 안식은 세상을 떠나 얻는 특별한 종교적 경지가 아니라, 인간의 중심이 proprium에서 주님께로 옮겨 가면서 주님의 사랑과 질서가 삶을 다스리게 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AC.13 심화 1)

 

 

 

AC.13, 창1 개요, ‘모두가 같은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 거듭남의 현실’

AC.13거듭남 과정 중인 모든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 번째 상태까지만 이르고, 어떤 이들은 두 번째 상태까지만, 또 다른 이들은 세 번째, 네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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