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8 심화

1. 넷째 날 요약, 정리

 

창1:14-19의 넷째 날에 해당하는 AC.30-38을 여기까지 읽고 나면 여러 내용이 한꺼번에 등장해서 조금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 순종, 교대와 다양함, 낮과 밤, 빛과 어둠이 연이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넷째 날이 끝나는 이 지점에서 전체 흐름을 한 번 묶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 넷째 날은 ‘빛이 처음 생기는 날’이라고 이해하면 정확하지 않습니다. 빛은 이미 첫째 날에 등장했습니다. 넷째 날에 새롭게 등장하는 것은 ‘광명체들’입니다. AC.30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사랑과 신앙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제 사랑과 신앙이 사람 안에서 빛을 비추고 삶을 이끌게 되는 상태를 설명합니다. 그래서 큰 광명체는 사랑, 작은 광명체는 신앙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앙이 사랑과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AC.31-34를 지나면서 이 점이 점점 분명해집니다. 사람은 처음에는 말씀과 교리를 배우고 신앙에 속한 것들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참된 영적 생명에서는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어 홀로 서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를 말하면서 사랑을 더 큰 것으로 두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신앙의 생명은 사랑에서 옵니다.

 

이것은 ‘사랑만 있으면 진리나 신앙은 필요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사랑과 신앙은 하나를 이루어야 합니다. 다만 그 질서에서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받습니다. 넷째 날의 해와 달은 바로 이 관계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많이 알고 말하는 것만으로 영적 생명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이 사랑과 결합되어 삶 안에서 살아 있어야 합니다.

 

별들도 등장합니다. 별은 신앙에 속한 여러 지식과 진리들을 나타냅니다. 해와 달과 별을 함께 보면 넷째 날의 모습이 조금 더 선명해집니다. 사람 안에 단지 하나의 막연한 ‘종교적 느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신앙과 그것에 속한 여러 진리가 서로 관계를 이루면서 영적 삶을 비추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AC.33에서는 이 빛의 근원이 더욱 깊이 설명됩니다. 사람의 생각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생명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랑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달라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사랑은 단순한 감정 하나가 아니라 인간 생명의 중심과 관계된 것입니다. 넷째 날에 큰 광명체인 사랑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도 이 흐름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4에서는 사랑과 신앙의 결합이 다시 강조됩니다. 사랑 없는 신앙, 곧 삶과 분리된 신앙은 참된 의미의 살아 있는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넷째 날의 핵심 가운데 하나가 분명해집니다. 거듭남은 사람이 진리를 머릿속에 많이 저장하는 과정만이 아니라, 그 진리가 사랑과 결합하여 살아 있는 신앙이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AC.35에서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인간의 두 능력인 ‘의지’와 ‘이해’가 등장합니다. 사람은 의지하고 이해하는 존재이며, 이 두 능력은 본래 하나의 생명을 이루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에게서는 의지와 이해의 관계가 크게 손상되었습니다. 주님의 자비로 사람이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이 보존되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의 악한 의지가 원하는 것과 다른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거듭남의 길이 열립니다.

 

이 대목은 넷째 날의 사랑과 신앙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사랑과 신앙이 하나가 된다는 말을 단순히 ‘내가 원하는 것을 옳다고 믿으면 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의지는 처음부터 선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진리를 통해 사람을 가르치시고, 사람은 그 진리를 받아들이며 점차 의지와 삶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참된 결합은 악한 의지와 거짓된 생각의 일치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하나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AC.36은 그래서 신앙을 ‘순종’과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단순히 무엇을 알고 인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특별히 순종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순종의 중심에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둡니다. 여기서도 신앙과 삶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무엇을 신앙한다고 말하는가만이 아니라, 그 신앙이 어떤 사랑과 삶으로 나타나는가가 중요합니다.

 

AC.37에서는 창1:14의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로부터 영적·천적 상태의 ‘교대와 다양함’이라는 중요한 원리를 설명합니다. 자연계에 아침과 낮과 저녁과 밤이 있고,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있듯이 영적 생명에도 서로 다른 상태들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교대와 다양함이 없다면 삶이 획일적이 되어 생명이 없게 되고, 선과 진리도 분별되거나 구별되거나 퍼셉션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다만 이것을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반드시 침체와 혼란과 악을 경험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37이 말하는 것은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의 교대와 다양함’입니다. 따라서 모든 영적 후퇴나 악한 상태를 주님께서 성장시키기 위해 주신 필수적인 계절이라고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영적 생명이 변화 없는 정지 상태가 아니라 교대와 다양함을 가진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사실입니다.

 

마지막 AC.38에서는 넷째 날을 마무리하면서 네 가지 대응을 매우 간결하게 제시합니다. ‘낮’은 선, ‘밤’은 악, ‘빛’은 진리, ‘어둠’은 거짓입니다. 그래서 선한 것들은 ‘낮의 일’, 악한 것들은 ‘밤의 일’이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요3:19, 21을 인용하여 빛과 어둠이 인간이 받아들이는 진리와 거짓, 그리고 그의 삶과 관계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AC.37의 ‘밤’과 AC.38의 ‘밤’을 기계적으로 똑같이 읽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AC.37에서는 하루의 변화 전체가 상태의 교대와 다양함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지만, AC.38에서는 낮과 밤의 대조를 통해 선과 악을 나타냅니다. 말씀의 상응은 단어 하나에 언제나 하나의 뜻만 붙여 놓은 고정된 암호표가 아니라, 문맥 안에서 그 의미를 살펴야 합니다.

 

이렇게 AC.30-38을 한 흐름으로 놓고 보면 넷째 날의 중심이 보입니다. 앞선 과정에서 사람이 선과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였다면, 이제 사랑과 신앙이 사람 안에서 광명체처럼 세워지고 영적 삶을 비추며 다스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랑과 신앙은 서로 분리된 두 생명이 아니라 하나를 이루어야 하며,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받고 순종과 삶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넷째 날을 단순히 ‘해와 달과 별의 창조’라고만 읽으면 그 속뜻의 중심을 놓치게 됩니다. 이 날은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신앙이 점차 살아 있는 빛으로 자리 잡고,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더욱 분명히 구별되며, 영적 생명이 그 빛 아래서 질서를 이루어 가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넷째 날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신앙이 사람 안에서 광명체처럼 세워져 영적 삶을 비추고 다스리며,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가 살아 있는 질서를 이루어 가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AC.38, 창1:18-19, ‘낮과 밤의 분별 : 행위로 드러나는 선과 악, 빛과 어둠의 기준’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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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 심화

2. 왜 교대와 다양함이 없으면 ‘생명이 없다’고 하는가?

 

위 AC.37 본문에 ‘이런 교대와 다양함(varieties)이 없다면 삶은 단조로워지고, 결국 생명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게 됩니다. 또한 선과 진리는 분별되거나 구별될 수 없고, 더 나아가 퍼셉션, 곧 지각될 수도 없습니다.’(Life without such alternations and varieties would be uniform, consequently no life at all; nor would good and truth be discerned or distinguished, much less perceived.)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진술은 참 놀랍습니다. 우리 중 대부분은 천국은,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면, 삶이 늘 행복, 만수무강하게 될 줄, 그리고 그래야만 하는 줄 알기 때문이지요...

 

 

AC.37에는 처음 읽으면 조금 놀라운 말이 나옵니다. 영적·천적인 것들에 ‘교대’(alternations)와 ‘다양함’(varieties)이 있으며, 만일 이런 교대와 다양함이 없다면 삶은 획일적이 되어 ‘결국 생명이 전혀 없게 된다’고 합니다. 변화가 없으면 단조롭다는 말까지는 쉽게 이해되는데, 왜 스베덴보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생명이 없다’고까지 말하는 것일까요?

 

먼저 여기서 말하는 ‘단조롭다’는 것을 단순히 ‘지루하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부족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원문은 `uniform`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한결같아서 차이와 변화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재미가 없으니 생명이 아니다’라는 뜻이 아니라, 생명에는 본래 상태의 차이와 다양함이 있다는 훨씬 근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AC.37은 그 이유를 바로 이어서 어느 정도 설명해 줍니다. 교대와 다양함이 없다면 ‘선과 진리가 분별되거나 구별될 수 없고, 더욱이 퍼셉션될 수도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스베덴보리가 왜 교대와 다양함을 생명과 연결하는지 중요한 실마리를 얻습니다. 살아 있는 영적 생명은 선과 진리가 아무런 차이 없이 하나의 평평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분별하고 구별하며 퍼셉션하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자연계의 생명을 생각하면 이해에 조금 도움이 됩니다. 하루에도 빛의 상태가 달라지고, 한 해에도 열과 빛이 달라집니다. 봄의 자연과 한여름의 자연, 가을과 겨울의 자연은 서로 다릅니다. 바로 그 변화 속에서 싹이 나고 자라고 열매를 맺고 다시 새로운 때를 준비합니다. 스베덴보리가 AC.37에서 자연계의 날과 해의 교대를 영적·천적 상태의 교대에 비유하는 이유를 이런 모습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그러므로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반드시 나쁜 상태를 겪어야 한다’고 결론 내리면 안 됩니다. AC.37이 말하는 ‘교대와 다양함’은 곧바로 ‘선과 악의 반복’을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의 교대’를 말합니다. 따라서 악에 빠지는 것 자체가 생명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거나, 신앙이 무너지고 사랑이 식어야 다음 단계로 성장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본문보다 앞서 나가는 해석입니다.

 

‘차이가 있어야 선을 알 수 있으니 악을 경험해야 선을 안다’고 말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AC.37은 악을 경험해야만 선을 퍼셉션할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교대와 다양함이 없다면 선과 진리가 분별되고 구별되거나 퍼셉션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양함’과 ‘악’을 같은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천국의 생명도 교대가 있다는 뜻일까요? AC.37은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에 교대가 있다고 말하므로, 적어도 영적 생명을 언제나 똑같은 강도의 빛과 사랑과 기쁨이 끝없이 지속되는 정지된 상태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실마리를 줍니다. 다만 천국에서 그 교대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경험되는지는 AC.37의 설명 범위를 넘어섭니다. 그 문제는 스베덴보리가 천국의 상태 변화를 직접 다루는 다른 글들과 함께 살펴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이 점은 우리가 흔히 가지고 있는 ‘완전함’에 대한 생각도 조금 바꾸어 줍니다. 우리는 완전한 영적 상태라면 아무런 변화도 없이 항상 최고조의 사랑과 빛 속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AC.37은 영적·천적 생명 자체에 교대와 다양함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변화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곧 불완전함이나 실패의 증거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변화를 ‘주님께서 주신 좋은 변화’라고 부를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실제 삶에는 자기 사랑 때문에 생기는 후퇴도 있고, 잘못된 선택의 결과도 있으며, 악과 거짓으로 기울어지는 상태도 있기 때문입니다. AC.37의 ‘교대’를 이런 모든 상태에 무차별적으로 적용하면 오히려 자신의 악을 영적 성장 과정으로 합리화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 가장 안전하게 붙들 수 있는 것은 ‘생명은 획일적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영적 생명에는 다양한 상태가 있고, 그 상태들은 서로 구별되며, 바로 그 안에서 선과 진리도 분별되고 구별되고 퍼셉션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살아 있는 다양함을 자연계의 날과 해, 빛과 열의 변화에 비유합니다.

 

이렇게 보면 AC.37의 ‘결국 생명이 전혀 없게 된다’는 표현도 조금 이해됩니다. 생명은 단순히 어떤 좋은 상태 하나를 얻은 뒤 그것을 영원히 얼려 놓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것은 다양한 상태를 가지며, 그 안에서 선과 진리가 서로 구별되고 퍼셉션됩니다. 적어도 AC.37이 보여 주는 영적 생명은 ‘변화 없는 정지’가 아니라 ‘교대와 다양함을 가진 생명’입니다.

 

우리의 거듭남을 바라볼 때도 이 원리는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어제와 오늘의 내적 상태가 다르다고 해서 그 사실 하나만으로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 변화를 무조건 정당화하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변화 자체를 두려워하거나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여러 상태 가운데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 주님 앞에서 더욱 분명히 분별해 가는 것입니다.

 

결국 AC.37이 말하는 ‘교대와 다양함’은 영적 생명이 죽은 평면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놀랍게도 바로 그 다양함 속에서 선과 진리가 분별되고 구별되며 퍼셉션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변화가 있으니 생명이 있다’는 단순한 말보다, ‘살아 있는 영적 생명에는 선과 진리가 퍼셉션될 수 있는 교대와 다양함이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AC.37의 뜻에 더 가깝겠습니다.

 

 

 

AC.37, 창1:14-17, ‘영적 생명의 리듬 : 낮과 밤, 계절처럼 반복되는 거듭남의 질서’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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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 심화 1,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

AC.37.심화 1.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 위 AC.37 본문에 ‘이 말 속에는 지금 당장 다 펼쳐 보일 수 없을 만큼 많은 아르카나가 담겨 있지만’(In these words are contained more arcana than can at present be unf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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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And God blessed them, saying,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waters in the seas, and the fowl shall be multiplied in the earth.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fth day. (창1:22, 23)

 

AC.43

주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지니게 된 모든 것은 크게 열매 맺고 번성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육신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다지 드러나지 않지만, 다른 삶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그러합니다. 말씀에서 ‘열매 맺다’(be fruitful)라는 표현은 사랑에 속한 것들에 대해 사용되고, ‘번성하다’(multiply)라는 표현은 신앙에 속한 것들에 대해 사용됩니다. 사랑에 속한 ‘열매’(fruit) 안에는 ‘씨’(seed)가 들어 있는데, 이 씨로 인해 그것은 크게 번성합니다. 또한 말씀에서 주님의 ‘축복’(blessing)은 열매 맺음과 번성을 뜻하는데, 이 모든 것이 축복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Everything that has in itself life from the Lord fructifies and multiplies itself immensely; not so much while the man lives in the body, but to an amazing degree in the other life. To “be fruitful,” in the Word, is predicated of the things that are of love, and to “multiply,” of the things that are of faith; the “fruit” which is of love contains “seed,” by which it so greatly multiplies itself. The Lord’s “blessing” also in the Word signifies fruitfulness and multiplication, because they proceed from it.

 

해설

AC.43은 창조의 다섯째 날에 처음 나타난 살아 있는 것들이 왜 곧바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을 받는지를 설명합니다. 앞의 AC.39-41에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지각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참으로 살아 있는 것들이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43은 그렇게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은 것에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고 ‘열매 맺고 번성한다’는 것입니다.

 

첫 문장이 이 글 전체의 중심입니다. ‘그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은 엄청나게 열매 맺고 번성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무엇인가의 수가 많아진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지금 스베덴보리는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은 사랑과 신앙에 속한 것들이 열매 맺고 번성하는 것을 창1:22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매우 흥미로운 말을 하나 덧붙입니다. 이러한 열매 맺음과 번성은 사람이 육신 안에서 사는 동안에는 그다지 크게 나타나지 않지만 ‘다른 삶’에서는 놀라울 정도라고 합니다. 여기서 ‘놀라울 정도’가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인지, 또 왜 사후에는 그렇게 되는지를 AC.43은 더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어지기 때문에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식으로 구체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글에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입니다.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은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보다 다른 삶에서 훨씬 더 놀라운 열매 맺음과 번성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오히려 우리에게 중요한 주의를 줍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영적 성과의 크기로 그 사람 안에 있는 생명의 모든 가능성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 역시 ‘지금 아무 변화가 없어 보여도 사후에는 자동으로 엄청나게 성장한다’는 약속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43의 주어는 분명히 ‘그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가진 모든 것’입니다. 강조점은 인간 자신의 잠재력이 아니라 그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다음 스베덴보리는 ‘열매 맺다’와 ‘번성하다’를 구별합니다. 말씀에서 ‘열매 맺다’는 사랑에 속한 것들에 대해 말하고, ‘번성하다’는 신앙에 속한 것들에 대해 말한다고 합니다. 창1:22의 두 동사가 단순히 같은 뜻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속뜻에서는 사랑과 신앙이라는 서로 구별되는 것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말씀에서 ‘열매’와 ‘번성’ 같은 표현을 만날 때에도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사랑에 속한 ‘열매’ 안에 ‘씨’가 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씨로 말미암아 열매가 크게 번성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너무 멀리 나가 ‘씨는 언제나 정확히 무엇을 뜻한다’는 별도의 체계를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AC.43이 강조하는 것은 사랑에 속한 열매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다시 번성할 수 있는 씨를 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연의 열매 속에 씨가 들어 있어 다시 새로운 생명을 낳듯, 이 표현을 통해 사랑에 속한 것과 신앙에 속한 것의 열매 맺음과 번성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마지막으로 AC.43은 ‘주님의 축복’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설명합니다. 말씀에서 주님의 ‘축복’은 열매 맺음과 번성을 뜻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축복에서 나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창1:22의 순서를 그대로 설명합니다. 먼저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라고 하고, 이어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합니다. 곧 생육과 번성의 근원이 그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복’이라고 하면 건강, 형통, 보호, 물질적 풍요 등을 먼저 떠올릴 수 있습니다. AC.43은 여기서 그러한 모든 의미를 포괄적으로 정의하려는 글은 아닙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복은 언제나 외적인 복과 관계없고 오직 내적 성장만을 뜻한다’고 일반화해서도 안 됩니다. 이 글이 분명히 밝히는 것은 창1:22의 문맥에서 주님의 축복이 ‘열매 맺음과 번성’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이 사랑과 신앙에 속한 것들 안에서 열매 맺고 번성하게 되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축복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보면 AC.43은 앞의 몇 글을 아름답게 마무리합니다. AC.39에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살아난다고 했고, AC.40에서는 기억 지식과 이성적·지적인 것들이 살아 있는 물고기와 새로 나타났으며, AC.41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것에는 실제로 생명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AC.42에서는 그 기억 지식의 개별적인 것들을 포괄하는 일반적인 것들까지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AC.43에서는 그렇게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은 것들이 ‘열매 맺고 번성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글의 중심은 ‘나는 얼마나 많은 영적 열매를 만들어 냈는가?’라는 자기 평가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시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갑니다. 열매 맺음과 번성은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은 것의 성질이며, 그것이 가능한 것 자체가 주님의 축복입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영적 생명을 만들어 내고 증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사람 안에서 사랑에 속한 열매를 맺고 신앙에 속한 것들을 번성하게 합니다. 창조의 다섯째 날에 하나님께서 살아 있는 것들을 만드시고 곧바로 복을 주신 장면은 바로 이 거듭남의 질서를 보여 줍니다.

 

 

 

AC.44, 창1:24-25,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A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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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 창1:21, ‘큰 바다짐승들’

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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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창1:14-17)

 

AC.37

광명체들로 하여금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고 합니다. 이 말 속에는 지금 당장 다 펼쳐 보일 수 없을 만큼 많은 아르카나가 담겨 있지만, 문자적 의미만 보면 그런 깊은 뜻은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다만 이것만 말씀드리는 걸로 충분한데요, 곧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에는 일반적으로도, 또 개별적으로도 교대(alternations)라는 게 있으며, 이것이 날과 해의 변화(changes)에 비유된다는 점입니다. 날의 변화는 아침에서 정오로, 다시 저녁으로, 그리고 밤을 거쳐 다시 아침으로 진행합니다. 해의 변화도 이와 같아서, 봄에서 여름으로, 다시 가을로, 그리고 겨울을 지나 다시 봄으로 진행합니다. 여기서 열과 빛의 변화가 생기고, 또한 땅의 산물들도 이에 따라 달라집니다.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의 교대 역시 이러한 변화에 비유됩니다. 이런 교대와 다양함(varieties)이 없다면 삶은 단조로워지고, 결국 생명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게 됩니다. 또한 선과 진리는 분별되거나 구별될 수 없고, 더 나아가 퍼셉션, 곧 지각될 수도 없습니다. 이런 교대를 선지자들은 ‘규례’(ordinances, [statuta])라 하는데, 예레미야에 보면 나옵니다. It is said that the luminaries shall be “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 In these words are contained more arcana than can at present be unfolded, although in the literal sense nothing of the kind appears. Suffice it here to observe that there are alternations of things spiritual and celestial,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which are compared to the changes of days and of years. The changes of days are from morning to midday, thence to evening, and through night to morning; and the changes of years are similar, being from spring to summer, thence to autumn, and through winter to spring. Hence come the alternations of heat and light, and also of the productions of the earth. To these changes are compared the alternations of things spiritual and celestial. Life without such alternations and varieties would be uniform, consequently no life at all; nor would good and truth be discerned or distinguished, much less perceived. These alternations are in the prophets called “ordinances” [statuta], as in Jeremiah:

 

35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는 해를 낮의 빛으로 주셨고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정하였고 바다를 뒤흔들어 그 파도로 소리치게 하나니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36이 법도가 내 앞에서 폐할진대 이스라엘 자손도 내 앞에서 끊어져 영원히 나라가 되지 못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31:35, 36) Said Jehovah, who giveth the sun for a light by day, and the ordinances of the moon and of the stars for a light by night, . . . these statutes shall not recede from before me (Jer. 31:35–3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주야와 맺은 언약이 없다든지 천지의 법칙을 내가 정하지 아니하였다면 (렘33:25) Said Jehovah, If my covenant of day and night stand not, and if I have not appointed the ordinances of heaven and earth (Jer. 33:25).

 

이러한 것들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창세기 8장 22절에서 더 말씀드릴 것입니다. But concerning these things, of the Lord’s Divine mercy, at Genesis 8: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창8:22)

 

해설

AC.37은 창1:14의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설명하면서 뜻밖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몇 단어 안에 지금 다 펼쳐 보일 수 없을 만큼 많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설명하지 않고 한 가지 원리만 먼저 알려 줍니다.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에는 ‘교대’(alternations)가 있으며, 그것이 자연계에서 날과 해가 변하는 모습에 비유된다는 것입니다.

 

‘교대’라는 말이 처음에는 조금 낯설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언제나 똑같은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상태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자연의 하루를 보면 아침에서 정오로, 정오에서 저녁으로, 밤을 거쳐 다시 아침으로 갑니다. 한 해도 봄에서 여름으로, 가을을 지나 겨울로 가고 다시 봄을 맞습니다. 그에 따라 빛과 열이 달라지고 땅에서 나는 것들도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천적인 것들에도 이와 비교할 수 있는 상태의 변화가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인생에도 좋은 날과 나쁜 날이 있다’는 정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교대와 함께 ‘다양함’(varieties)을 말하면서, 이런 교대와 다양함이 없다면 삶은 획일적이 되어 결국 생명이라 할 만한 것이 없을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더 나아가 선과 진리도 분별되고 구별될 수 없으며, 더욱이 퍼셉션될 수도 없다고 합니다. 영적 생명 자체에 상태의 차이와 다양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처음 읽는 독자라면 여기서 ‘왜 변화가 없으면 생명이 없다는 것일까?’라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AC.37은 그 원리를 더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자연계의 모습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하루가 한 시각에 멈추고 계절도 하나뿐이라면 자연의 생명은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일 것입니다. 아침과 낮과 저녁과 밤,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빛과 열도 달라지고 그에 따라 땅의 산물도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자연의 질서를 영적·천적 상태의 교대를 설명하는 비유로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영적 삶에서도 신앙이 강해졌다 약해졌다 하고 사랑이 뜨거워졌다 차가워졌다 하는 것이 모두 정상이며 좋은 것이라는 뜻일까요? 여기서는 조심해야 합니다. AC.37은 모든 영적 침체와 후퇴, 모든 악과 거짓의 상태를 ‘필요한 겨울’이라고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영적·천적인 것들에 교대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악이나 신앙의 후퇴를 보고 ‘지금은 겨울이니 괜찮다’고 합리화하는 것은 이 글이 직접 말하는 바를 넘어섭니다.

 

반대로 영적 상태가 늘 똑같지 않다고 해서 곧 거듭남이 실패했다고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은 AC.37에서 우리가 조심스럽게 받을 수 있는 중요한 도움입니다. 사람은 한 번 진리를 깨달았다고 언제나 똑같은 정도로 밝게 느끼는 것도 아니고, 한 번 주님 사랑을 경험했다고 언제나 같은 정서 상태에 머무는 것도 아닙니다. AC.37은 영적 생명을 정지된 한 상태가 아니라 교대와 다양함이 있는 생명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교대’를 선과 악의 단순한 반복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의 교대’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아침은 무조건 선, 밤은 무조건 악이라는 식으로 이 글을 단순화해서도 안 됩니다. 자연의 날과 계절은 영적 상태의 변화를 보여 주는 비교이며, 각각의 구체적인 의미는 문맥에 따라 더 살펴보아야 합니다.

 

특히 ‘선과 진리가 분별되거나 구별될 수 없고, 더욱이 퍼셉션될 수도 없다’는 말은 흥미롭습니다. 상태의 교대와 다양함이 단순히 지루함을 막아 주는 장치가 아니라 선과 진리를 경험하고 분별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AC.37은 여기서 그 과정이 정확히 어떻게 이루어지는지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어둠을 경험해야만 빛을 알 수 있다’, ‘악을 겪어야 선을 배운다’는 식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악 자체가 선을 가르치는 필수 교사라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 이러한 교대를 선지자들이 ‘규례’(ordinances)라고 부른다고 하면서 렘31:35-36과 렘33:25을 인용합니다. 해가 낮을 비추고 달과 별이 밤을 비추는 규례, 주야의 언약과 천지의 규례가 말씀에 등장합니다. 자연계의 일정한 변화가 무질서한 우연이 아니라 정해진 질서 안에서 이루어지듯, 스베덴보리는 영적·천적 상태의 교대도 ‘규례’라는 말과 연결하여 보여 줍니다.

 

여기서도 한 걸음 이상 앞서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예레미야의 이 구절들이 AC.37에서 인용되었다고 해서 ‘어떤 영적 겨울이 와도 반드시 곧 봄이 온다는 약속’이라고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AC.37이 이 구절들을 가져오는 직접적인 이유는 ‘교대’를 선지자들이 ‘규례’라고 부른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마지막에 스베덴보리는 이 주제를 창8:22에서 다시 다루겠다고 예고합니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입니다. 흥미롭게도 그는 지금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AC를 읽을 때 이런 대목도 중요합니다. 어떤 표현의 의미를 한 글에서 완전히 끝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다른 곳에 이르렀을 때 다시 돌아와 더 깊이 펼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37에서 지금 붙들어야 할 중심은 비교적 단순합니다. 영적 생명은 언제나 똑같은 상태로 고정되어 있는 생명이 아닙니다.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에는 교대와 다양함이 있으며,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아침·낮·저녁·밤과 봄·여름·가을·겨울의 변화에 비유합니다. 그리고 이런 교대와 다양함이 생명에 속하며 선과 진리를 분별하고 퍼셉션하는 것과도 관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알고 나면 자신의 영적 상태가 어제와 오늘 다르다는 사실만으로 지나치게 놀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냉각과 후퇴를 ‘영적 계절의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정당화해서도 안 됩니다. AC.37은 우리에게 영적 생명이 ‘변화 없는 고정 상태’가 아니라는 중요한 원리를 먼저 가르치고, 그 교대의 더 깊은 아르카나는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다고 남겨 둡니다.

 

심화

1. ‘징조’(signs), ‘계절’(seasons), ‘날’(days), ‘해’(years)

 

AC.37, 심화 1, ‘징조’(signs), ‘계절’(seasons), ‘날’(days), ‘해’(years)

AC.37.심화1. ‘징조’(signs), ‘계절’(seasons), ‘날’(days), ‘해’(years) 위 AC.37 본문에 ‘이 말 속에는 지금 당장 다 펼쳐 보일 수 없을 만큼 많은 아르카나가 담겨 있지만’(In these words are contain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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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 교대와 다양함이 없으면 ‘생명이 없다’고 하는가?

 

AC.37, 심화 2, 왜 교대와 다양함이 없으면 ‘생명이 없다’고 하는가?

AC.37.심화2. 왜 교대와 다양함이 없으면 ‘생명이 없다’고 하는가? 위 AC.37 본문에 ‘이런 교대와 다양함(varieties)이 없다면 삶은 단조로워지고, 결국 생명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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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 창1:18-19, ‘이는 넷째 날이니라’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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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 창1:14-17, '신앙이란 무엇인가?'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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