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4:21)

 

AC.419

천적인 것들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인 것처럼, 영적인 것들은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입니다. 신앙에는 무엇이 참된 것인지만이 아니라 무엇이 선한 것인지도 이해하는 일이 속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에 관한 지식들은 이 둘을 모두 포함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은 천적인 것입니다. 신앙에는 이 두 가지가 모두 포함되므로, 그것들은 수금과 퉁소라는 두 악기로 의미됩니다. 수금은 누구나 알듯이 현악기이므로 영적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퉁소는 현악기와 관악기의 중간에 해당하므로 영적 선을 의미합니다. As celestial things are the holy things of love and the derivative goods, so spiritual things are the truths and goods of faith; for it belongs to faith to understand not only what is true, but also what is good. The knowledges of faith involve both. But to be such as faith teaches is celestial. As faith involves both of these, they are signified by two instruments, the harp and the organ. The harp, as everyone knows, is a stringed instrument, and therefore signifies spiritual truth; but the organ, being intermediate between a stringed instrument and a wind instrument, signifies spiritual good.

 

해설

AC.419는 앞의 AC.417-418에서 밝힌 유발의 속뜻을 한층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유발이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것은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두 악기를 함께 언급한 이유를 밝히고, 수금과 퉁소가 각각 무엇을 나타내는지 구별합니다. 수금은 영적 진리를, 퉁소는 영적 선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유발의 기록은 신앙을 단순히 참된 것을 아는 일로만 이해하지 않도록 이끕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을 구별합니다. 천적인 것들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이며, 영적인 것들은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입니다. 이는 앞서 야발과 유발을 구별한 설명과 이어집니다. 야발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를, 유발은 같은 교회의 영적인 것들에 관한 교리를 나타냅니다. 두 형제의 기록을 함께 읽으면 사랑에 관한 교리와 신앙에 관한 교리가 각각 어떤 내용을 다루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문장은 ‘신앙에는 무엇이 참된 것인지만이 아니라 무엇이 선한 것인지도 이해하는 일이 속한다’는 설명입니다. 우리는 신앙에 관한 지식이라고 하면 흔히 교리의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일부터 떠올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신앙에 관한 지식들이 참된 것과 선한 것을 모두 포함한다고 말합니다. 신앙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만이 아니라 무엇이 선한지도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내용을 이해하는 일에서 선에 관한 지식을 제외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곧이어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은 천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문장은 신앙의 선을 이해하는 일과 실제로 선하게 살아가는 일을 구별합니다. 무엇이 선한지 알고 그것을 이해하는 일은 신앙에 속하지만,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것은 천적인 것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앙의 선을 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그 선을 삶에서 실현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앎과 삶을 구별하면서도, 신앙이 가르치는 선이 실제 삶과 무관한 지식으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제 수금과 퉁소라는 두 악기가 등장하는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신앙에 관한 지식들이 진리와 선을 모두 포함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두 악기로 의미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수금이 현악기이므로 영적 진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반면 퉁소는 현악기와 관악기의 중간에 해당하므로 영적 선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이 악기 구분은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제시한 설명입니다. 따라서 현대 악기 분류에 맞추어 퉁소를 특정 악기로 확정하거나, 그 악기의 구조에서 새로운 상응을 만들어 내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앞의 AC.418에서는 마음의 애정이 천적이고 그 결과로 나오는 노래가 영적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번호는 그 설명을 이어받아 영적인 것 안에도 진리와 선이 함께 있음을 밝힙니다. 노래와 악기가 영적인 것을 나타낸다는 설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수금과 퉁소가 각각 영적 진리와 영적 선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유발에 관한 짧은 기록은 신앙의 내용을 더욱 세밀하게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성도들이 이 말씀을 읽을 때에는 ‘나는 무엇이 참된지 알고 있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나는 무엇이 선한지도 이해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천적인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진리와 선을 이해하는 일은 그 가르침을 삶에서 받아들이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앎에서 삶으로 나아가는 거듭남의 전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 관한 지식과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일을 구별하는 데 초점을 둡니다.

 

결국 AC.419의 핵심은 신앙에 진리와 선이 모두 포함된다는 사실, 그리고 그 진리와 선을 아는 일과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일이 구별된다는 사실입니다. 수금과 퉁소는 신앙의 두 측면을 나타내며, 유발은 이러한 영적인 것들에 관한 교리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신앙을 참된 것을 아는 데에만 한정하지 않고, 선을 이해하며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일까지 함께 살펴보게 됩니다. (AC.419 해설)

 

심화

1. ‘신앙의 선을 아는 것과 그 선대로 살아가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AC.419 심화 1, ‘신앙의 선을 아는 것과 그 선대로 살아가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AC.419 심화1. ‘신앙의 선을 아는 것과 그 선대로 살아가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AC.419에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에 관한 지식들이 진리와 선을 모두 포함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곧이어 신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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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0, 창4:21, ‘말씀에 여러 악기가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4:21) AC.420말씀에는 여러 가지 악기가 언급되며, 각 악기에는 저마다 고유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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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8, 창4:21, ‘수금과 퉁소는 왜 신앙의 영적인 것들을 의미하는가?’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4:21) AC.418앞 절은 사랑에 속하는 천적인 것들을 다루었지만, 이 절은 신앙에 속하는 영적인 것들을 다루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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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11 심화

2. ‘왜 기어 다니는 곤충 중 메뚜기 종류는 먹을 수 있었을까?’

 

레11의 음식법 가운데 상당히 뜻밖의 규정이 하나 있습니다.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 다니는 곤충은 일반적으로 가증하게 여기라고 하시면서도 ‘그 발에 뛰는 다리가 있어서 땅에서 뛰는 것’은 먹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메뚜기와 베짱이와 귀뚜라미와 팥중이 종류가 예외가 됩니다. 왜 이런 작은 차이가 정함과 부정함을 가르는 기준이 되었을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가 놀라울 만큼 직접적인 설명을 남겼습니다.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1759, AE) 543(계9:3)은 바로 레11:20-22를 인용하면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런 메뚜기 종류를 먹도록 허용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다리’는 영적 선과 결합된 자연적 선을 의미하고, ‘발’은 그 선에서 나오는 자연적 진리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에서 나오는 진리는 인간에게 받아들여지고 결합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런 곤충을 먹는 것이 허용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원리를 보여 줍니다. 메뚜기는 땅 가까이 사는 낮은 생물입니다. 가장 높은 천적인 것을 직접 표상하는 동물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선과 결합되어 있고, 거기에서 자연적인 진리가 나온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자연적인가 영적인가의 단순한 대립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이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에서 자연적 인간은 제거되어야 할 인간이 아닙니다. 자연적 인간도 거듭나야 합니다. 우리의 몸과 직업과 돈과 음식과 휴식과 인간관계와 일상의 즐거움은 그 자체로 악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 지배되는가, 아니면 영적인 선과 체어리티를 섬기는가입니다.

 

예를 들어 돈을 버는 것은 매우 자연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돈 자체를 사랑하고 그것으로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려 한다면 자연적인 것이 자기애와 결합한 것입니다. 반대로 가족을 책임지고 다른 사람을 돕고 선한 쓰임을 하기 위해 정직하게 일하여 돈을 번다면 같은 자연적 활동이 영적인 선과 연결됩니다. 음식과 휴식과 취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들이 삶의 목적이 될 때와 선한 쓰임을 위한 몸과 마음을 돌보는 수단이 될 때는 그 내적 질이 다릅니다.

 

그래서 이 작은 곤충의 ‘뛰는 다리’는 자연적인 삶을 무조건 버리지 말라는 중요한 가르침을 품고 있습니다. 다만 물리적으로 위로 뛰는 행위 자체를 영적 상승이라고 단순하게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강조하는 핵심은 ‘영적 선과 결합된 자연적 선’과 ‘그 선에서 나오는 자연적 진리’입니다.

 

거듭남은 인간을 세상에서 떼어내어 순수하게 영적인 존재로 만드는 과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평범한 자연적 삶까지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과정입니다. 일하고, 먹고, 쉬고, 가족을 돌보고, 사람을 만나고, 작은 친절을 행하는 모든 일이 체어리티와 연결될 때 자연적인 삶도 천국의 질서를 섬기게 됩니다.

 

따라서 레11의 메뚜기 규례는 뜻밖의 희망을 보여 줍니다. 땅에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자연적인 것이라도 영적인 선과 결합되어 그 선에서 진리가 나오면 인간에게 받아들여져 삶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자연적인 삶을 버리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삶까지 거듭나게 하십니다. (SWC.레11 심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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