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C.레1 심화

2. ‘번제는 정말 예수님의 대속 죽음을 의미하는가?’

 

그리스도인이 레위기 1장의 번제를 읽으면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떠올립니다. 흠 없는 제물이 사람을 대신하여 죽고 피를 흘린다는 모습이 주님의 죽음과 매우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흔히 구약의 희생제사를 ‘죄인이 받아야 할 형벌을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신 사건의 예표’로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번제는 예수님의 대속 죽음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도 희생제사와 번제의 최고 의미가 주님께 관한 것임을 인정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번제와 예수 그리스도는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관계는 매우 깊습니다.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관계하는가?’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2776(창22:2)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신 말씀을 해설하면서 ‘번제로 드리는 것’이 주님께서 자신을 신성에 거룩하게 하시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주님께서 시험과 승리를 통하여 자신의 인성을 신성과 하나 되게 하신 과정과 연결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주님의 ‘영화’입니다.

 

따라서 번제의 최고 의미에서 우리가 먼저 보아야 할 것은 ‘성부께서 죄에 대한 형벌을 요구하시고 성자께서 죄인 대신 그 형벌을 받으셨다’는 장면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성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지옥의 모든 세력과 싸우시고 시험을 이기시며, 자신의 인성을 완전히 신성하게 하신 구속과 영화의 과정입니다. 십자가는 그 과정에서 가장 마지막이며 가장 큰 시험이었습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형벌대속의 구조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면 성부는 진노하여 형벌을 요구하시는 분이고 성자는 그 진노를 대신 받아 인간을 구해 내시는 분처럼 이해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구속을 이루신 분은 한 분 주님이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인성을 입고 오셔서 인간을 붙잡고 있던 지옥의 권세를 이기시고, 인간이 다시 자유롭게 주님을 향할 수 있는 질서를 회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한 신적 위격이 다른 신적 위격을 만족시키기 위한 형벌의 지불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인간 구원을 위하여 끝까지 감당하신 마지막 시험과 승리의 절정으로 이해됩니다.

 

이렇게 보면 레위기 1장의 번제와 십자가의 관계도 훨씬 깊어집니다. 번제물 전체가 불 위에 드려지는 모습은 단지 ‘누군가 대신 죽는다’는 한 장면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인성을 완전히 신성에 결합시키시는 영화의 전 과정을 표상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번제와 희생제사의 세세한 의식들이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의 영화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AC.10057, 출29:18).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주님의 영화와 우리의 거듭남이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영화와 인간의 거듭남은 서로 전혀 관계없는 두 주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성을 영화롭게 하셨기 때문에 인간의 거듭남이 가능해졌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으로 지옥을 정복하시고 인성을 신성하게 하심으로써 이제 모든 인간에게 악과 거짓을 이길 수 있는 신적 생명과 능력을 공급하십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자신을 거듭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되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거듭납니다.

 

그래서 희생제사와 번제는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의 영화이고, 상대적 의미에서는 인간의 거듭남입니다. 이 두 의미는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주님 안에서 완전하게 이루어진 것이 인간 안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점차 이루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시험을 통하여 인성을 신성과 완전히 하나 되게 하셨고,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시험을 통과하면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점차 하나의 질서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말 자체를 버려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의 죽음까지 감당하셨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입니다. 다만 그 ‘우리를 위하여’를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의 정확한 양을 대신 받으셨다’는 의미로만 제한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지옥과 싸우셨고, 우리를 위하여 모든 시험을 이기셨으며, 우리를 위하여 인성을 영화롭게 하셨고, 그리하여 우리가 악과 거짓에서 벗어나 다시 주님과 결합할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그러므로 레위기 1장의 번제를 보면서 우리는 분명히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주님은 성부의 진노를 달래기 위해 희생당하는 별개의 신적 인격이 아니라, 친히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셔서 자신의 인성을 신성하게 하시고 지옥을 이기신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영화로 말미암아 오늘 우리 안에서도 거듭남이라는 또 하나의 번제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십자가는 우리에게 ‘주님이 다 하셨으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리가 아니라, 주님께서 이루신 구속의 능력 안에서 우리도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선과 진리의 삶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됩니다. 주님의 영화가 우리 안에서는 거듭남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번제와 십자가를 함께 바라볼 때 드러나는 더 깊은 연결입니다. (SWC.레1 심화 2)

 

 

 

SW.3 심화 3, ‘왜 내장과 정강이까지 물로 씻어야 했을까?’

SW.3 심화3. ‘왜 내장과 정강이까지 물로 씻어야 했을까?’ 레위기 1장의 번제 규례 가운데 특별히 눈길을 끄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라는 규정입니다.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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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3 심화 1, ‘왜 하나님께서는 동물의 희생제사를 명하셨을까?’

SW.3 심화1. ‘왜 하나님께서는 동물의 희생제사를 명하셨을까?’ 레위기 1장을 처음 읽는 현대 독자에게 가장 먼저 생기는 질문 가운데 하나는 ‘왜 하나님께서는 굳이 동물을 죽여 제물로 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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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 심화

1. ‘주님’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면 성부와 성령은 어떻게 되는가?

 

AC.14에서 스베덴보리가 ‘주님’이라는 이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뜻한다고 말하면, 전통적인 삼위일체 교리에 익숙한 독자는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됩니다. ‘그러면 성부와 성령은 어떻게 되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성령보다 더 높은 분이라는 뜻인가?’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려는 것은 삼위 가운데 한 위격을 다른 두 위격보다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신적 삼위일체는 그 한 분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이 그의 핵심 주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삼위일체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영원 전부터 서로 구별되는 세 신적 인격으로 생각하고, 그 셋을 다시 한 하나님이라고 이해하려는 방식입니다. 그는 참된 기독교에는 신적 삼위일체가 있다고 보지만, 그것을 한 분 하나님 밖에 따로 존재하는 세 분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신적 삼위일체는 성육신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를 설명할 때 가장 중요한 구별은 ‘신성 자체’, ‘신적 인간’, ‘발출하는 신성’입니다. 성부는 주님 안에 있는 신성 자체, 곧 모든 것의 근원이신 신성을 가리키며, 성자는 그 신성이 세상에 오셔서 취하시고 영화하신 신적 인간을 가리킵니다. 성령은 주님에게서 발출하여 인간과 천사에게 역사하는 신성을 가리킵니다. 이것들은 세 하나님이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 있는 신적 삼위일체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는 말은 성부를 제외하고 성자만 하나님으로 섬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아버지께서 계시며, 주님에게서 성령이 발출한다는 뜻입니다. 바로 다음 AC.15에서 스베덴보리가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인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AC.14와 AC.15는 따로 떼기보다 서로 이어서 읽을 때 스베덴보리의 의도가 훨씬 분명해집니다.

 

성육신 이전과 이후의 관계도 중요합니다. 신성 자체는 영원부터 계셨지만, 주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인간성을 취하셨고 그 인간성을 영화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외적인 모습이나 임시적인 육체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영화된 인성은 신성과 완전히 하나가 된 ‘신적 인간’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은 단순히 하나님을 대신하여 권세를 받은 피조된 중개자가 아니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십니다.

 

스베덴보리가 때때로 사람의 영혼과 몸과 활동을 비유로 사용하는 것도 이 하나 됨을 이해시키기 위해서입니다. 한 사람에게 영혼과 몸과 그에게서 나오는 활동이 있다고 해서 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성 자체와 신적 인간과 발출하는 신성은 세 하나님이 아닙니다. 다만 이 비유 역시 하나님을 인간과 동일한 구조로 축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삼위가 한 분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도록 돕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AC.14에서 왜 ‘주님’이라는 이름을 예수 그리스도 한 분에게 적용하는지가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삼위 가운데 ‘성자’라는 한 위격만을 선택하여 높이는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오셔서 자신을 나타내시고 구원을 이루신 분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성부를 지나쳐 성자에게만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계신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기도와 예배에서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보이지 않는 성부를 따로 생각하고 그분께 나아가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중간 단계처럼 통과하는 구조가 중심이 아닙니다. 주님 자신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가까이 오신 분이며,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예배할 수 있도록 자신을 나타내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경배한다는 것은 하나님 가운데 한 분만을 골라 예배한다는 뜻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을 그분이 자신을 나타내신 신적 인간 안에서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AC.14의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는 선언은 성부와 성령을 밀어내는 선언이 아니라 오히려 신적 삼위일체를 한 분 하나님 안에서 다시 붙드는 선언입니다. 성부는 주님 안의 신성 자체이며, 성자는 그분의 신적 인간이고, 성령은 그분에게서 발출하는 신성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시선은 세 분 사이를 오가는 것이 아니라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께 향합니다. 그분 안에 신성의 충만함이 있으며, 그분에게서 모든 신적 생명과 사랑과 진리가 인간에게 옵니다. (AC.14 심화 1)

 

 

 

AC.14, 창1, ‘주님은 세상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AC.14이어지는 모든 글에서 ‘주님’이라는 이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을 뜻하며, 다른 이름을 덧붙이지 않고 단지 ‘주님’(the Lord)이라고만 부릅니다. 온 천국 전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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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데, 이는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이며, 그분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In the universal heaven they know no other father than the Lord, because he and the father are one, as he himself has said:

 

6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8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요14:6, 8-11)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Philip saith, Show us the father Jesus saith to him, Am I so long time with you, and hast thou not known me, Philip? He that hath seen me hath seen the father how sayest thou then, Show us the father? Believest thou not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Believe me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John 14:6, 8–11)

 

해설

AC.15는 바로 앞 AC.14의 선언을 한 단계 더 깊게 합니다. AC.14에서 스베덴보리는 앞으로 ‘주님’(the Lord)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가리킬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주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AC.15는 이에 대해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며, 그 이유를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AC.14와 AC.15는 서로 떨어진 두 선언이 아니라 하나로 이어집니다.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 주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주장을 자신의 신학적 설명만으로 제시하지 않고 요14:6, 8-11에 기록된 주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합니다. 이 긴 인용의 핵심은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라고 요청했을 때 주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대답하신 데 있습니다. 이어 주님께서는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믿으라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이 구절들이 AC.15에 인용된 이유는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한 ‘주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시다’라는 선언을 주님 자신의 말씀으로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씀은 아버지를 주님과 떨어진 또 다른 신적 존재로 찾아서는 안 된다는 AC.15의 논지를 뒷받침합니다. 또한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다’는 말씀은 두 분이 단순히 같은 목적을 가지고 협력한다는 정도를 넘어서는 하나 됨을 나타냅니다. 다만 AC.15는 여기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 전체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려는 단락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와 주님의 신적 인성에 관한 모든 교리를 이 짧은 번호 안으로 미리 끌어오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직접 밝히는 핵심, 곧 천국에서는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며 주님과 아버지가 하나이시라는 사실을 먼저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요14:6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는 말씀도 같은 문맥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주님은 단지 아버지께 데려다주는 외적인 통로나 중간 단계이고, 그 뒤에 주님과 별도로 만나야 할 또 다른 하나님이 계신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AC.15의 인용 흐름과 맞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은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며, 아버지께서 주님 안에 계시고 주님께서 아버지 안에 계심을 밝힙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들을 함께 인용한 것은 인간의 시선을 주님 너머의 또 다른 아버지에게 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주님 안에서 아버지를 알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AC.15는 짧지만 이후 AC를 읽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을 세웁니다. AC.14가 ‘주님은 누구이신가?’라는 질문에 세상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답했다면, AC.15는 ‘그러면 아버지는 어디에 계시는가?’라는 질문에 주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시며, 아버지께서 주님 안에 계신다고 답합니다.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요14:6, 8-11을 길게 인용한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이후 거듭남과 천국과 말씀의 속뜻을 읽으면서 ‘주님’을 만날 때 우리의 시선을 그분과 아버지 사이에서 둘로 나눌 필요가 없습니다.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 것은, 주님 자신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분이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께서 그분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AC.15 해설)

 

 

 

AC.16, 창1:1, ‘태초와 거듭남의 시작 : 사람의 새 창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창1:1) AC.16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를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 합니다. 선지자들은 여러 곳에서 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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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 창1, ‘주님은 세상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AC.14이어지는 모든 글에서 ‘주님’이라는 이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을 뜻하며, 다른 이름을 덧붙이지 않고 단지 ‘주님’(the Lord)이라고만 부릅니다. 온 천국 전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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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

이어지는 모든 글에서 ‘주님’이라는 이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을 뜻하며, 다른 이름을 덧붙이지 않고 단지 ‘주님’(the Lord)이라고만 부릅니다. 온 천국 전체에서 그분만이 주님으로 인정되고 경배를 받으시는데, 이는 그분께서 하늘과 땅에서 모든 권세를 가지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도 자신을 그렇게 부르라고 명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In the following work, by the name Lord is meant the savior of the world, Jesus Christ, and him only; and he is called “the Lord” without the addition of other names. Throughout the universal heaven he it is who is acknowledged and adored as Lord, because he has all sovereign power in the heavens and on earth. He also commanded his disciples so to call him, saying,

 

너희가 나를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요13:13) Ye call me Lord, and ye say well, for I am (John 13:13).

 

그리고 그분의 부활 후에 제자들은 그분을 ‘주님’(the Lord)이라 불렀습니다. And after his resurrection his disciples called him “the Lord.”

 

해설

AC.14는 창세기 1장의 개별 표현을 해설하기에 앞서, 앞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전체를 읽는 데 필요한 중요한 용어 하나를 분명히 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지는 모든 글에서 ‘주님’(the Lord)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때 그 이름이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을 뜻한다고 선언합니다. 따라서 이후 AC를 읽다가 ‘주님’이라는 표현을 만나면 누구를 가리키는지 별도로 추측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선언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오직 그분만’이라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신적 존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 가장 높은 자리를 드린다는 의미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AC.14가 직접 밝히는 것은 온 천국 전체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으로 인정되고 경배받으신다는 사실이며, 그 이유는 그분께서 하늘과 땅에서 모든 권세를 가지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부와 성령의 관계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곧 이어지는 AC.15와 이후 주님에 관한 가르침을 함께 보아야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우선 ‘주님’이라는 이름이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집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설명만으로 이 명칭을 정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합니다. ‘너희가 나를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요13:13)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것을 주님 자신이 옳다고 확인하신 것입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부활 후 제자들이 그분을 ‘주님’이라고 불렀다는 사실도 덧붙입니다. 따라서 AC.14의 논지는 매우 단순하면서도 분명합니다. ‘주님’이라는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되며, 그 호칭은 주님 자신의 말씀과 제자들의 증언에 근거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후 AC의 속뜻을 읽을 때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으로 인간의 거듭남, 천국, 교회, 말씀의 속뜻을 설명하면서 끊임없이 ‘주님’을 언급합니다. 그때마다 막연한 신적 원리나 이름 없는 절대자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앞의 AC.7-13에서 거듭남의 여러 상태를 살펴본 직후 이 선언이 놓여 있다는 점에서, 그 모든 거듭남의 역사를 이루시는 분이 누구인지도 자연스럽게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AC.14는 짧지만 이후 전체 저작의 독법을 정해 주는 중요한 단락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여러 중개자 가운데 한 분이 아니며, 온 천국이 인정하고 경배하는 ‘주님’이십니다. 다만 이 짧은 단락 하나에서 삼위일체와 주님의 신적 인성에 관한 모든 교리를 한꺼번에 끌어낼 필요는 없습니다. 바로 다음 AC.15에서 아버지와 주님의 하나 되심이 이어지고, 이후 관련 가르침들이 점차 펼쳐집니다. AC.14에서는 먼저 이 한 가지를 분명히 붙들면 됩니다. 앞으로 AC에서 말하는 ‘주님’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AC.14 해설)

 

심화

1. ‘주님’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면 성부와 성령은 어떻게 되는가?

 

AC.14 심화 1, ‘주님’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면 성부와 성령은 어떻게 되는가?

AC.14 심화1. ‘주님’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면 성부와 성령은 어떻게 되는가? AC.14에서 스베덴보리가 ‘주님’이라는 이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뜻한다고 말하면,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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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 창1, ‘주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시다’

AC.15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데, 이는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이며, 그분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In the universal heaven they know no other father than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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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 창1 개요, ‘모두가 같은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 거듭남의 현실’

AC.13거듭남 과정 중인 모든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 번째 상태까지만 이르고, 어떤 이들은 두 번째 상태까지만, 또 다른 이들은 세 번째, 네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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