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05 심화

1.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고 단지 탐욕만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105에서 가장 강하게 들리는 문장은 아마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으며 단지 탐욕만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만 읽으면 인간에게는 의지 자체가 없으며, 우리가 무엇인가를 원하고 선택하고 결심하는 것은 모두 탐욕일 뿐이라는 뜻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와 책임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또한 거듭난 사람이 선을 원하고 행하는 것조차 실제로는 그의 의지가 아니라는 뜻일까요?

 

이 문장을 이해하려면 먼저 AC.105에서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설명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주제는 인간에게 선택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생명나무’가 왜 동산 ‘가운데’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동산 가운데’를 속 사람의 의지라고 설명하고, 말씀에서는 이 의지를 ‘마음’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무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선을 행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의지 또는 마음은 사람에게 속한 것으로 말해지기는 하지만 실제 생명의 근원으로서 사람 자신의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의지’는 단순히 일상적인 선택이나 결심의 능력만을 가리키는 말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문맥의 초점은 선을 사랑하고 원하는 생명의 중심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선한 의지의 생명이 인간 자신에게서 발생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반대로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을 자기 의지라고 부를 때, AC.105는 그것을 ‘탐욕’이라고 부릅니다. 매우 강한 표현이지만, 그 목적은 선의 근원을 인간 자신에게 돌리지 못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이 구별을 놓치면 두 가지 반대 방향의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에게는 아무런 의지도 없으므로 인간은 아무것도 선택하거나 행하지 않는다’는 식의 수동적인 이해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선을 원했으므로 그 선은 나에게서 나왔다’는 자기 공로의 이해입니다. AC.105의 논지는 어느 쪽도 아닙니다. 이 번호가 직접 강조하는 것은 사람이 선을 행하더라도 그 선의 생명과 근원은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생명나무’가 중요해집니다. AC.105는 생명나무를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이라고 한 뒤, 마지막에는 그것을 ‘주님의 자비’라고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모든 사랑과 신앙이 나오고, 따라서 모든 생명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다’는 강한 표현만 따로 떼어 놓으면 인간에 대한 부정적인 선언처럼 보이지만, 전체 문맥에서 보면 강조점은 인간의 무가치함보다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께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105가 보여 주는 주님의 모습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은 인간에게 ‘네 안에서 선한 의지를 만들어 내어 그것으로 내게 오라’고 요구하시는 분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하고 믿고 선을 원할 수 있게 하는 생명 자체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인간이 생명을 만들어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생명을 주시기 때문에 인간이 사랑하고 믿고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생명의 중심에 있는 ‘생명나무’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일까요? AC.105 하나만으로 인간의 자유와 의지에 관한 스베덴보리의 전체 가르침을 완성해서는 안 됩니다. 이 번호가 직접 다루는 범위에서는 인간의 모든 선택과 책임의 구조를 설명하기보다, 참된 선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밝히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적어도 분명히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선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고백과 ‘그러므로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결론은 같은 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결국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으며 단지 탐욕만 있다’는 말을 이해하는 열쇠는 그 바로 뒤에 있습니다. ‘생명나무는 주님의 자비이며, 주님으로부터 모든 사랑과 신앙이 나오고, 따라서 모든 생명이 나온다.’ 스베덴보리가 인간에게서 선의 독립적인 근원을 거두어 가는 까닭은 인간을 생명 없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생명의 참된 근원을 주님께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에덴동산 한가운데 생명나무가 있다는 것은 인간의 가장 깊은 생명의 중심에 자기 자신이 아니라 모든 사랑과 신앙과 생명을 주시는 주님의 자비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AC.105 심화 1)

 

 

 

AC.105, 창2:9, ‘동산 가운데의 생명나무, 의지의 중심에 있는 주님의 자비’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5‘생명나무’(tree of lives)는 사랑과 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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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5

‘생명나무’(tree of lives)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이며, ‘동산 가운데’(in the midst of the garden)는 속 사람의 의지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말씀에서 ‘마음’(heart)이라 하는 의지는 사람과 천사 안에서 주님께서 가장 먼저 소유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선을 행할 수 없으므로, 의지 또는 마음은 사람에 관하여 말해지기는 하지만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기의 의지라고 하는 것은 탐욕이며, 이것이 사람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지가 생명나무가 놓여 있는 ‘동산 가운데’(midst of the garden)이고,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으며 단지 탐욕만 있으므로, ‘생명나무’(tree of lives)는 주님의 자비이며, 주님으로부터 모든 사랑과 신앙이 나오고, 따라서 모든 생명이 나옵니다. The “tree of lives” is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in the midst of the garden” is in the will of the internal man. The will, which in the Word is called the “heart,” is the primary possession of the Lord with man and angel. But as no one can do good of himself, the will or heart is not man’s, although it is predicated of man; cupidity, which he calls will, is man’s. Since then the will is the “midst of the garden,” where the tree of lives is placed, and man has no will, but mere cupidity, the “tree of lives” is the mercy of the Lord, from whom comes all love and faith, consequently all life.

 

해설

AC.105는 창2:9의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라는 말씀을 통하여 생명의 가장 깊은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생명나무’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을 뜻하고, 그것이 있는 ‘동산 가운데’는 속 사람의 의지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이 의지를 ‘마음’이라고도 한다고 하면서, 그것이 사람과 천사 안에서 주님께서 가장 먼저 소유하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생명나무가 동산의 가장자리가 아니라 ‘가운데’에 있다는 것은 이렇게 사람의 생명의 중심과 관계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설명은 매우 강합니다. 아무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선을 행할 수 없으므로 의지 또는 마음은 사람의 것이 아니며, 사람이 자기 의지라고 부르는 것은 오히려 ‘탐욕’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인간에게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동하는 능력 자체가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그가 묻고 있는 것은 ‘선한 의지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가?’입니다. 그 생명의 근원을 인간 자신에게 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참으로 선을 원하고 행하게 하는 선의 생명은 자기 자신에게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이것은 앞의 AC.99와 AC.104에서 계속 밝혀진 질서와도 이어집니다. 천적 인간은 자신의 지성이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든다는 것을 퍼셉션하며, 퍼셉션 자체도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감각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105는 그보다 더 중심으로 들어갑니다. 사람의 지성만이 아니라 사랑하고 선을 원하는 의지의 생명 역시 그 근원이 주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 한가운데 있는 생명나무는 인간이 자기 안에 독립적으로 가지고 있는 어떤 생명의 원천이 아니라, 모든 사랑과 신앙과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왜 스베덴보리는 인간에게 있는 것은 ‘단지 탐욕’이라고까지 말할까요? 이 표현은 인간을 비하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것과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것을 철저히 구별하려는 문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이 선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여기기 시작하면 생명의 근원을 자신에게 돌리게 됩니다. 그러나 AC.105가 가리키는 생명의 질서는 그 반대입니다. 선한 의지와 사랑과 신앙과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며, 인간은 그것들을 주님으로부터 받아 살아갑니다. 바로 이것이 생명나무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를 뜻한다고 하는 이유입니다.

 

여기서 주님의 모습이 매우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주님은 사람에게서 생명을 요구하시면서 그 생명을 스스로 만들어 내라고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선한 의지를 만들어 내어 먼저 주님께 가져가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AC.105가 말하는 질서에서는 오히려 주님께서 그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사랑도 주님으로부터 오고,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도 주님으로부터 오며, 따라서 모든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생명나무’를 마지막에는 ‘주님의 자비’라고까지 풀이합니다. 생명나무의 중심에는 인간의 성취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없애기보다, 우리가 가진 선의 근원을 어디에 둘 것인가를 묻습니다. 선을 행하면서도 그 선의 생명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고, 사랑하고 믿고 살아갈 수 있는 것 자체가 주님의 자비로 말미암음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AC.105가 보여 주는 천적 질서와 맞닿아 있습니다. 에덴동산 가운데 생명나무가 있다는 것은 결국 인간 생명의 가장 깊은 중심에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과 그분의 자비가 계셔야 함을 보여 줍니다. (AC.105 해설)  

 

심화

1.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고 단지 탐욕만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105 심화 1,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고 단지 탐욕만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105 심화1.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고 단지 탐욕만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105에서 가장 강하게 들리는 문장은 아마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으며 단지 탐욕만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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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6, 창2:9, ‘퍼셉션과 생명나무와 지식의 나무의 본성은 뒤에서 더 밝혀진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6그러나 ‘동산의 나무’(tree of the gar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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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4, 창2:9, ‘퍼셉션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일종의 내적 감각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4오늘날에는 퍼셉션이 무엇인지 알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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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1 심화

1. ‘understanding’을 왜 ‘이해’라고 번역하는가?

 

AC.61에는 앞으로 AC에서 매우 자주 만나게 될 두 단어가 함께 나옵니다. ‘understanding’과 ‘will’입니다. 여기서는 각각 ‘이해’와 ‘의지’로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처음 읽는 분에게는 ‘understanding’을 왜 그냥 ‘이해’라고 번역하는지 조금 낯설 수 있습니다. 한국어에서 ‘이해’라고 하면 흔히 ‘그 설명을 이해했다’, ‘이제 무슨 뜻인지 알겠다’처럼 무엇인가를 알아들은 결과를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반면 AC에서 ‘understanding’은 그런 한 번의 이해 행위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속한 하나의 능력을 가리키는 용어로 계속 사용됩니다. AC.61에서도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모든 것’이 인간의 understanding에 속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번역할 때 ‘이해력’, ‘지성’, ‘사고력’ 같은 표현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각각 장점이 있습니다. ‘이해력’은 능력이라는 점을 쉽게 전달하고, ‘지성’은 하나의 정신 능력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각각 아쉬움도 있습니다. ‘이해력’은 한국어 문장에서 반복되면 다소 딱딱하고 능력의 정도, 곧 ‘이해력이 좋다, 나쁘다’는 느낌을 줄 수 있습니다. ‘지성’은 철학적이거나 지적 수준을 뜻하는 말처럼 들릴 수 있고, ‘사고력’은 생각하는 능력 일반으로 범위가 넓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AC 전체의 기본 번역어로는 간결하게 ‘이해’를 사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독자는 여기서 말하는 ‘이해’를 ‘무엇인가를 알아들은 결과’만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신앙에 관한 지식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능력이라는 뜻으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즉 ‘이해’라는 번역어 자체를 바꾸기보다 처음 등장할 때 그 뜻을 충분히 설명해 두고, 이후에는 계속 ‘이해’라고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번역어의 일관성도 유지하면서 처음 읽는 독자의 혼란도 줄일 수 있습니다.

 

특히 ‘will’과 함께 놓으면 이 선택의 장점이 더 분명해집니다. AC에서는 understanding과 will이 자주 짝을 이루어 등장합니다. 이것을 ‘이해와 의지’라고 하면 간결하면서 두 용어의 대응 관계도 잘 드러납니다.

 

여기서 ‘의지’ 역시 일상적인 ‘의지력이 강하다’는 뜻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61은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속한 모든 것이 인간의 ‘의지’에 속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의지는 단순히 어떤 목표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정신력보다 훨씬 깊은 뜻으로 사용됩니다.

 

필요하다면 처음 설명할 때 ‘이해하는 능력’이라고 풀어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정식 번역어로 매번 사용하면 문장이 지나치게 무거워질 수 있습니다. ‘인간의 이해하는 능력에 속한다’보다 ‘인간의 이해에 속한다’가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의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설명을 위해 ‘원하고 뜻하는 능력’ 정도로 풀 수는 있지만, 정식 번역어는 ‘의지’로 유지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특히 ‘의도하는 능력’이라고만 하면 의지가 단순히 어떤 행동을 계획하거나 의도하는 기능으로 좁아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해와 의지를 흔히 ‘머리와 가슴’이라고 설명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이해를 돕는 비유로만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understanding과 will은 신체의 머리와 가슴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생명에 관한 용어입니다.

 

AC.61 자체가 이 두 용어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출발점을 제공합니다.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것은 이해에 속하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속하는 것은 의지에 속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AC에서 ‘이해’라는 말을 만날 때 단순히 ‘알고 있다’는 뜻으로만 읽지 않고, 신앙에 관한 지식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인간의 능력을 함께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의지’를 만날 때에는 단순한 결심이나 의지력이 아니라 사람이 무엇을 원하고 사랑하는가와 관계된 능력으로 읽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해’라는 평범한 한국어 단어가 AC 안에서는 점차 하나의 중요한 용어로 자리 잡게 됩니다. 처음에는 조금 낯설더라도 같은 번역어를 일관되게 사용하면서 그 뜻을 차근차근 익혀 가는 편이, 문맥마다 ‘이해력’, ‘지성’, ‘사고력’ 등으로 바꾸어 사용하는 것보다 AC 전체의 사유 구조를 따라가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understanding은 기본적으로 ‘이해’, will은 ‘의지’로 번역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처음 접하는 독자가 이 말을 일상적인 의미로 너무 좁게 읽지 않도록, 필요한 자리에서는 ‘이해하는 능력’, ‘원하고 사랑하는 데 관계된 의지’라고 풀어 설명하면 충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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