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C.레5 심화

5. ‘모르고 지은 죄도 죄인가? - 무지와 이노센스, 그리고 책임의 문제’

 

레5:17은 읽는 사람을 멈추게 하는 말씀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를 부지중에 범하여도 허물이라 벌을 당할 것이니.’ 알면서 고의로 계명을 어긴 것이 아니라 ‘부지중에’, 곧 알지 못하고 범했는데도 왜 허물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이것만 떼어 읽으면 하나님께서 인간이 알지도 못했던 잘못까지 찾아내어 책임을 묻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원전을 함께 보면 이 문제는 훨씬 섬세하게 읽어야 합니다.

 

먼저 아주 중요한 원전이 있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3519(창27:9)는 제사에 사용되는 염소 새끼가 이노센스를 의미한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레5:6을 직접 인용합니다. 그리고 ‘실수로 범한 죄’는 ‘무지에서 비롯된 죄’이며, 그 무지 안에는 이노센스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몰랐어도 죄는 죄니까 고의로 지은 죄와 똑같이 책임져야 한다’고 단순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지 속에 이노센스가 있는가를 함께 봅니다.

 

AC.9262(출23:7)는 이 문제를 더욱 분명하게 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신명기의 한 정결 의식을 해설하면서 어떤 악한 결과가 ‘이노센스가 있는 무지’에서 비롯된 경우에는 ‘책임이 없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그 행위 자체가 잘못된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과 그 사람에게 돌아가는 죄책을 구별합니다. 무지 속에 이노센스가 있었다면 그 행위는 악한 결과를 낳았더라도 그 사람의 의지에서 악을 선택하여 나온 것과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레5:17의 ‘부지중에 범하여도 허물이라’는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여기서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은 ‘어떤 것이 객관적으로 신적 질서에 어긋나는가’와 ‘그것을 행한 사람에게 어느 정도의 죄책이 귀속되는가’입니다. 인간이 모르고 독을 마셨다고 해서 독이 물로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르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해서 그 상처 자체가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어떤 악을 악인 줄 모르고 행했다고 해서 그것이 갑자기 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적 질서에 어긋난 것은 여전히 바로잡혀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면서 의도적으로 선택한 사람과 정말 모르고 행한 사람의 내적 상태까지 같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레5 자체도 이 차이를 보여 줍니다. 2절과 3절에서는 어떤 사람이 부정한 것에 접촉했지만 ‘부지중’이었다가 나중에 그것을 깨닫는 상황이 나옵니다. 4절에서도 함부로 맹세한 일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그리고 17절에서도 ‘부지중’이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중요한 전환점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알지 못했던 때와 알고 난 뒤의 상태가 같지 않습니다. 알지 못했을 때에는 이노센스가 있을 수 있지만, 주님께서 말씀과 양심을 통해 그것을 보여 주신 뒤에도 계속 같은 악을 붙들고 있다면 더 이상 같은 의미의 무지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레5의 속죄제가 이해됩니다. 제사는 ‘몰랐으니 너도 고의범과 똑같이 유죄다’라고 정죄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직 알지 못하는 가운데 인간의 자연적 삶에 들어온 부정과 무질서를 주님께서 정결하게 하시는 길을 보여 줍니다. AC.3519가 실수로 범한 죄를 ‘무지에서 비롯된 죄이며 그 안에 이노센스가 있다’고 설명하면서 바로 레5의 속죄제를 연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노센스가 있는 무지는 주님께서 정결하게 하실 수 있는 상태입니다.

 

여기서 ‘이노센스’를 단순히 ‘아무것도 몰랐으니 나는 잘못이 없다’는 자기변명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노센스는 훨씬 깊은 상태입니다. 자기 자신에게서는 선과 진리가 나오지 않으며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고 주님의 인도를 받으려는 상태입니다. AC.9262는 이노센스를 바로 이런 태도와 연결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이노센스가 있는 사람은 ‘나는 몰랐으니까 책임 없어’라고 버티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잘못을 알게 되었을 때 ‘주님, 제가 몰랐습니다. 이제 보여 주셨으니 돌이키겠습니다’라고 응답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거듭남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거듭남을 시작할 때 자기 안의 모든 악을 한꺼번에 알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아주 거친 악만 보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배우고 양심이 형성되며 주님의 빛이 더 깊이 들어올수록 이전에는 아무 문제도 없다고 생각했던 말과 행동, 동기와 욕망 속에서도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제는 몰랐던 것을 오늘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어제의 무지를 이용해 우리를 정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 보여 주심으로 오늘부터 그것에서 자유로워질 길을 여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레5:17의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허물이라’는 말씀은 두려움을 조장하기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인간의 무지가 악을 선으로 바꾸지는 않는다는 엄중한 진리인 동시에, 아직 알지 못했던 잘못까지 주님께서 정결하게 하실 수 있다는 희망의 말씀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악에서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새롭게 발견되는 더 깊은 악과 거짓에서도 계속 정결하게 됩니다.

 

결국 문제는 ‘몰랐는가, 알았는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알게 된 뒤 어떻게 하는가?’입니다. 무지 속에 이노센스가 있었다면 주님께서는 그것을 고의적인 악과 똑같이 여기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여 주신 뒤에는 새로운 자유와 책임이 시작됩니다. 그때 그것을 인정하고 피하면 어제의 무지는 오늘의 거듭남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레5의 부지중의 죄는 인간을 꼼짝 못 하게 만드는 죄책의 교리가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영역까지 조금씩 비추시고 정결하게 하여 마침내 더 온전한 자유로 이끄시는 거듭남의 아르카나입니다. (SWC.레5 심화 5)

 

 

 

SW.7 심화 4, ‘왜 속죄제의 고운 가루에는 기름과 유향을 넣지 않았을까?’

SW.7 심화4. ‘왜 속죄제의 고운 가루에는 기름과 유향을 넣지 않았을까?’ 레5:11은 레2를 이미 읽은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레2의 소제에서는 고운 가루에 반드시 기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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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4

악하고 거짓된 것은 무엇이든 인간의 proprium이 아니거나 인간의 proprium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proprium은 악 자체이며, 따라서 인간은 그 자체로는 악과 거짓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인간의 proprium에 속한 것들이 영계에서 보이도록 제시될 때, 더 추한 것은 묘사할 수 없을 정도로 흉측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통해 제게 분명해졌습니다. 다만 그 모습은 proprium의 성질에 따라 서로 다릅니다. 그러므로 proprium에 속한 것들이 눈에 보이도록 제시되는 사람은 공포에 사로잡혀 마치 악마에게서 달아나듯 자기 자신에게서 달아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에 속한 것들은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나타나며, 주님의 천적인 것이 적용될 수 있는 생명의 성질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실제로 체어리티를 부여받았거나 체어리티에 의해 생명을 얻은 사람들은 매우 아름다운 얼굴을 한 소년들과 소녀들처럼 나타나며, 이노센스 안에 있는 사람들은 벌거벗은 어린아이들처럼 나타납니다. 그들은 가슴을 두른 꽃 화환과 머리 위의 관으로 다양하게 단장하고, 다이아몬드 같은 기운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뛰놀고, 가장 깊은 내면으로부터 행복을 퍼셉션합니다. Nothing evil and false is ever possible which is not man’s own, and from man’s own, for the own of man is evil itself, and consequently man is nothing but evil and falsity. This has been evident to me from the fact that when the things of man’s own are presented to view in the world of spirits, they appear so deformed that it is impossible to depict anything more ugly, yet with a difference according to the nature of the own, so that he to whom the things of the own are visibly exhibited is struck with horror, and desires to flee from himself as from a devil. But truly the things of man’s own that have been vivified by the Lord appear beautiful and lovely, with variety according to the life to which the celestial of the Lord can be applied; and indeed those who have been endowed with charity, or vivified by it, appear like boys and girls with most beautiful countenances; and those who are in innocence, like naked infants, variously adorned with garlands of flowers encircling their bosoms, and diadems upon their heads, living and sporting in a diamond-like aura, and having a perception of happiness from the very inmost.

 

해설

AC.154는 인간의 proprium을 매우 강한 표현으로 규정하면서도, 동시에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얼마나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대조합니다. 첫 문장만 보면 ‘인간의 proprium은 악 자체이며 인간은 악과 거짓일 뿐’이라는 선언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번호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후반부에서는 바로 그 인간의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으면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따라서 AC.154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이 두 상태를 반드시 함께 보아야 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악과 거짓은 인간의 proprium에서 나오며, 인간의 proprium은 그 자체로 악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AC.150에서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믿는 사람이 악과 거짓을 자기에게 귀속시킨다고 한 설명과 이어집니다. 인간이 생명과 선과 진리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살려고 할 때, 그 proprium에서는 선과 진리가 나올 수 없습니다. AC.149-150에서 이미 생명은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proprium의 악은 단순히 인간이 개별적으로 몇 가지 잘못된 행동을 한다는 정도보다 훨씬 근원적인 문제를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다시 자신의 영계 경험으로 설명합니다. 인간의 proprium에 속한 것들이 영계에서 눈에 보이도록 나타날 때에는 더 추한 것을 묘사할 수 없을 정도로 흉측하게 보이며, 그것을 자기 앞에서 보게 된 사람은 공포에 사로잡혀 마치 악마에게서 도망하듯 자기 자신에게서 달아나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그 모습이 모두 똑같다고 하지 않고 ‘proprium의 성질에 따라’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고 덧붙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proprium은 획일적인 하나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루고 있는 생명의 성질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그러나’가 AC.154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에 속한 것들은 앞의 흉측한 모습과 정반대로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나타납니다. 이것은 AC.151에서 ‘여자’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했던 설명을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proprium을 없애 인간을 proprium 없는 존재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는 죽고 악한 proprium을 생명 있게 하신다는 지금까지의 흐름이 여기서 다시 확인됩니다.

 

이 때문에 AC.154는 AC.141과 함께 읽는 것이 특히 중요합니다. AC.141에서는 천적 인간과 천사에게도 proprium이 있으며, 그 proprium 안에는 주님의 것들이 있고 그것은 주님에 의해 다스려지므로 ‘가장 참된 천적인 것 자체’라고 했습니다. 반면 AC.154에서는 인간의 proprium은 악 자체라고 합니다. 두 문장은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다. AC.154 자체가 그 구별을 보여 줍니다. 인간에게서 나온 것으로서의 proprium은 악하지만,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은 아름답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러므로 proprium이라는 단어 하나만 보고 언제나 동일한 영적 성질을 가진 것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그 자체로서의 인간의 proprium인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인지 문맥을 살펴야 합니다.

 

후반부의 모습들은 이러한 차이를 영계의 표상으로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를 부여받았거나 체어리티에 의해 생명을 얻은 사람들은 매우 아름다운 얼굴의 소년들과 소녀들처럼 나타나고, 이노센스 안에 있는 사람들은 꽃 화환과 관으로 단장한 어린아이들처럼 나타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연계에서의 실제 나이나 외모가 아니라 그 사람의 내적 생명의 성질입니다. 앞에서는 proprium의 성질에 따라 그 흉측함이 달라진다고 했고, 여기서는 주님의 천적인 것이 적용될 수 있는 생명의 성질에 따라 아름다움도 다양하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영계에서 외적인 모습이 내적인 생명의 성질을 드러낸다는 설명이 이 대조 안에 들어 있습니다.

 

특히 ‘체어리티에 의해 생명을 얻는다’는 표현은 현재 문맥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AC.148에서는 가슴이 체어리티를 의미한다고 했고, AC.151에서는 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지는 것을 생명 없는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는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이제 AC.154에서는 체어리티를 부여받거나 체어리티에 의해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 아름답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따라서 ‘proprium이 생명을 얻는다’는 말이 점차 구체적인 내용을 얻고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근거로 아직 체어리티와 proprium의 관계에 관한 전체 교리를 미리 완성하기보다 이후의 설명을 더 기다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지막의 ‘가장 깊은 내면으로부터 행복을 퍼셉션한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상태의 아름다움은 단순히 외적인 모습의 아름다움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살아 움직이며 뛰놀고, 가장 깊은 내면으로부터 행복을 퍼셉션합니다. 따라서 앞부분의 죽음과 추함, 뒷부분의 생명과 아름다움과 행복은 서로 대응되는 대조를 이룹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려는 proprium 안에 갇혀 있을 때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살아 있을 때의 차이가 영계에서 보이는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결국 AC.154는 proprium에 관한 지금까지의 설명을 한쪽으로 단순화하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번호입니다. ‘인간의 proprium은 악 자체’라는 문장은 분명히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지만, 동시에 같은 번호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은 아름답고 사랑스럽다’고 말한다는 사실도 똑같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시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지워 버리는 방식이 아니라, 그 자체로는 죽고 악한 인간의 proprium을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으로 살아 있게 하시는 방식으로 묘사됩니다. 이것이 AC.141에서 시작하여 AC.147-154를 거치면서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는 proprium의 중요한 아르카나입니다. (AC.154)

 

 

 

AC.155, 창2:22, ‘주님의 신부와 아내 -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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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3, 창2:22, ‘짓다 -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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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5절)

 

AC.136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이 proprium 안에 스며들게 되어, 그 proprium이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되지 않도록 하십니다. (25절) And innocence from the Lord is instilled into this own, so that it still might not be unacceptable (verse 2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5절)

 

해설

AC.136은 창2:25의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의 속뜻을 미리 요약하면서, AC.132부터 이어져 온 proprium의 문제가 어떤 상태에 이르게 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인간에게 proprium이 허락되고,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그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보이게 된 데 이어, 이제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그 proprium 안에 스며들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 proprium이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되지 않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이노센스의 근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인간의 proprium 안에 이노센스가 있다고 하지 않고,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계속 확인해 온 질서와 일치합니다. 지혜와 지성, 이성과 지식이 주님의 것이며,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도 주님께서 부여하신 것이었습니다. 이제 proprium 안에 들어오는 이노센스 역시 인간 자신에게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졌다고 해서 생명과 선의 근원이 인간 자신에게 옮겨간 것은 아닙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노센스가 proprium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스며든다는 점입니다. AC.134에서는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졌고, AC.135에서는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그 proprium에 결합되었습니다. 그런데 AC.136에서도 proprium 자체를 제거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그 안에 스며들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흐름만 놓고 보면, 주님께서는 인간이 proprium으로 기울려는 성향을 단순히 없애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허용하시면서도, 그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이노센스가 함께할 수 있도록 다루고 계십니다.

 

이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되지 않도록’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이 문장은 proprium 그 자체를 아무 문제 없는 것으로 선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그 안에 스며들어야 그것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AC.136까지 읽은 단계에서는 인간의 proprium을 독립적으로 선한 것이라고 볼 수도 없고, 반대로 주님께서 단순히 제거하시는 대상으로만 볼 수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시고 생명을 결합하시며 이노센스를 스며들게 하시는 과정 전체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 설명은 창2:25의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를 읽는 방향도 미리 보여 줍니다. 아직 ‘벌거벗음’과 ‘부끄러워하지 않음’ 각각의 구체적인 속뜻은 뒤의 설명을 기다려야 하지만, AC.136에 따르면 이 구절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proprium 안에 있는 상태와 관계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벌거벗음은 곧바로 수치나 죄의 상태를 뜻한다고 미리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창3에서 벌거벗음을 부끄러워하게 되는 상태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이후 설명을 따라가며 확인해야 합니다.

 

AC.132부터 AC.136까지를 함께 보면 이제 하나의 흐름이 드러납니다. 인간은 주님께만 인도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proprium으로 기울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인간에게 자신이 받은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알게 하셨지만, 인간은 여전히 proprium으로 기울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proprium의 상태로 들어가도록 허용되고 proprium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그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보이게 되었고, 이제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그 안에 스며들게 됩니다. 인간의 proprium을 허용하시면서도 그것을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는 주님의 질서가 조금씩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AC.136에서 아직 ‘이노센스란 정확히 무엇인가?’를 후대의 교리까지 끌어와 완성해서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현재 독자가 붙들어야 할 것은 더 단순하면서도 중요합니다.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졌지만,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독립된 자기 생명의 근원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 안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영적 생명이 결합되고, 다시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스며듭니다. 바로 이 상태가 창2:25의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한’ 상태를 이해하는 문을 열어 줍니다. (AC.136)

 

 

 

AC.137, 창2:18-25 배경, ‘태고교회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 천적 인간에서 proprium으로 기울어진 후

AC.137창세기의 처음 세 장은 전체적으로 태고교회를 다루는데, 이 교회는 그 처음 시기부터 멸망한 마지막 시기에 이르기까지 ‘사람’(man) [homo]이라 합니다. 이 장의 앞부분은 태고교회가 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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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5, 창2:18-25 개요,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보이다’ (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4절) AC.135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인간의 proprium에 결합되어, 그것들이 하나처럼 보이게 됩니다. (24절) Celestial and 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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