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2

여기서는 ‘가인’(Cain)이라 하는 신앙의 교리가 묘사됩니다. 이 교리는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함으로써, 사랑에서 나오는 체어리티에서도 신앙을 분리하였습니다. 교회가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이단들이 생겨납니다. 사람들이 신앙의 어떤 특정 조항 하나에 몰두하면 그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사고에는 이런 성향이 있어서, 어떤 한 가지에 몰두하면 그것을 다른 모든 것보다 앞세우며, 특히 그것을 자기 자신이 발견한 것이라고 상상할 때, 그리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그를 부풀게 할 때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그 생각과 일치하고 그것을 확증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며, 마침내 그것이 거짓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참이라고 맹세할 정도에 이르게 됩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가인’(Cain)이라 하던 사람들은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으며, 그 결과 사랑 없이 살게 되자 자기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환상이 서로 결탁하여 그들을 그 생각 가운데 더욱 굳어지게 하였습니다. The doctrine of faith called “Cain” is here described, which in consequence of separating faith from love, separated it also from charity, the offspring of love. Wherever there is any church, there arise heresies, because while men are intent on some particular article of faith they make that the main thing; for such is the nature of man’s thought that while intent on some one thing he sets it before any other, especially when his imagination claims it as a discovery of his own, and when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puff him up. Everything then seems to agree with and confirm it, until at last he will swear that it is so, even if it is false. Just in this way those called “Cain” made faith more essential than love, and as they consequently lived without love, both the love of self and the fantasy thence derived conspired to confirm them in it.

 

해설

AC.362는 가인의 문제가 어떻게 하나의 ‘교리’로 굳어졌는지를 본격적으로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글입니다. 앞의 AC.361에서 우리는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가인으로 표상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고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함께 할 수 없다는 설명을 보았습니다. 이제 AC.362에서는 한 걸음 더 들어가 ‘어떻게 그런 생각이 생겼으며, 어떻게 그것이 하나의 확고한 교리가 되었는가?’를 설명합니다.

 

첫 문장이 전체를 압축합니다. ‘가인’은 단순히 신앙 자체가 아니라 ‘신앙의 교리’입니다. 그런데 그 교리는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했고, 그 결과 사랑의 자손인 체어리티에서도 신앙을 분리했습니다. 여기서 ‘체어리티는 사랑의 자손(the offspring of love)’이라는 표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이 내적인 근원이라면 체어리티는 그 사랑이 이웃을 향하여 나타나는 삶입니다. 따라서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놓는 순간 그것은 자연스럽게 체어리티에서도 떨어져 나갑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를 서로 독립된 것으로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문제를 가인이라는 고대의 한 이단에만 한정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이단들이 생겨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사고에는 어떤 하나의 진리를 붙잡았을 때, 그것을 ‘전체’로 만들어 버리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단이 반드시 처음부터 완전히 거짓된 생각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신앙’처럼 실제로 중요하고 참된 것을 붙잡고, 그것을 다른 모든 것보다 앞세울 때 문제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가인의 시작과 정확히 맞닿습니다. 가인은 처음부터 ‘거짓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태고교회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에 속한 것을 하나의 구별되는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데서 출발했습니다. 문제는 그 ‘구별’이 ‘분리’가 되고, 분리된 것이 마침내 ‘주된 것’이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AC.362에서는 바로 그 과정의 심리적 원인을 설명합니다. 인간은 어떤 하나에 몰두하면 그것을 다른 모든 것보다 앞세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매우 날카로운 대목이 ‘그것을 자기 자신이 발견한 것이라고 상상할 때’입니다. 어떤 진리를 단순히 주님에게서 받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내가 이것을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다른 내적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 그 진리가 점차 ‘나의 진리’가 됩니다. 그러면 그 진리를 내려놓거나 수정하는 것은 단순히 생각 하나를 수정하는 일이 아니라 ‘나’를 부정하는 일처럼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자기 사랑이 그 교리와 결합합니다.

 

여기에 ‘세상 사랑’까지 더해집니다. 어떤 교리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그것으로 명성을 얻고, 자기 집단의 정체성과 권위를 세울 수 있게 되면 이제 그 교리를 지키는 데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함께 작동합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진리인가?’를 물었지만, 나중에는 ‘내가 틀릴 수 있는가?’, ‘우리가 틀릴 수 있는가?’의 문제가 됩니다. 진리를 사랑해서 교리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교리를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매우 위험한 단계가 시작됩니다. ‘모든 것이 그것과 일치하고 그것을 확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말하는 단순한 지적 오류보다 훨씬 깊은 영적 현상입니다. 이미 사랑이 방향을 정했기 때문에 이해성(understanding)이 그 사랑을 섬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결론을 먼저 정해 놓고, 말씀과 경험과 논리를 모두 그 결론을 지지하는 증거로 읽습니다. 반대되는 것은 보이지 않거나 중요하지 않게 여기고, 자기 생각을 지지하는 것은 작은 것까지 크게 보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거짓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참이라고 맹세할’ 정도가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정보를 잘못 알고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거짓이 자기 사랑과 결합하여 확증된 상태입니다. 처음에는 ‘나는 이것이 옳다고 생각한다’였지만, 나중에는 ‘이것은 반드시 옳아야 한다’가 됩니다. 그리고 결국 ‘이것과 다른 것은 틀렸다’가 됩니다. 여기에서 교리적 차이는 쉽게 상대방을 향한 분노와 배척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인의 길입니다. 가인들은 ‘신앙’을 버린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지나치게 높였습니다.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more essential)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표현이 AC.362의 핵심입니다. 문제는 신앙을 중요하게 여긴 것이 아니라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든 것입니다. 수단이 목적보다 위에 올라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앞의 AC.361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너는 그를 다스릴지니라’는 가인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는 상태였습니다. AC.362는 그 지배가 어떻게 교리적으로 정당화되는지를 설명합니다. ‘신앙이 더 본질적이다’라고 정하면 체어리티는 자연스럽게 신앙 아래로 내려갑니다. 사랑과 선한 삶은 ‘있으면 좋은 것’, ‘신앙의 결과’, 또는 ‘부차적인 것’이 되고, 무엇을 믿고 어떤 교리를 고백하는지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됩니다.

 

그런데 그 결과를 스베덴보리는 아주 간결하게 말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사랑 없이 살았다.’ 교리의 질서가 삶의 질서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사랑보다 신앙을 앞세운 것이 단순한 신학적 순서 문제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실제 삶에서 사랑이 사라졌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그토록 엄중하게 다루는지를 보여 줍니다. 교리의 잘못된 질서는 결국 삶의 잘못된 질서가 됩니다.

 

더 심각한 것은 사랑이 사라진 빈자리가 비어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환상’이 그들을 확증했습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떠난 자리에 자기 사랑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이해성은 그 자기 사랑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계속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신앙이 사랑보다 중요하다’는 교리는 단순한 지적 오류가 아니라 자기 사랑을 보호하고 강화하는 체계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fantasy’를 단순히 ‘상상’ 정도로 이해하면 약합니다. 여기서는 자기 사랑에서 생겨난 왜곡된 사고, 곧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참이라고 여기고, 그에 맞추어 현실과 말씀을 보는 일종의 ‘환상’입니다. 그래서 자기 사랑과 환상이 ‘conspired’, 곧 서로 결탁합니다. 사랑이 거짓된 방향을 원하고, 사고가 그것을 끊임없이 합리화합니다. 결국 악한 사랑과 거짓된 사고가 서로를 강화하는 구조가 됩니다.

 

이것은 앞으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을 이해하는 데도 결정적입니다. 아벨을 죽이는 것은 단순히 ‘신앙이 체어리티를 싫어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이미 그 전에 ‘신앙이 사랑보다 더 본질적이다’라는 교리가 형성되었습니다. 그 교리는 자기 사랑에 의해 확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는 이제 단순한 형제가 아니라 그 교리의 정당성을 위협하는 존재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다음 단계는 체어리티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62는 ‘이단이 어떻게 생기는가?’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매우 중요한 설명이기도 합니다. 이단은 반드시 성경을 버린 데서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의 어떤 한 진리를 붙잡아 그것을 전체 질서에서 떼어내고 절대화할 때 생길 수 있습니다. 신앙도 진리입니다. 사랑도 진리입니다. 체어리티도 진리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붙잡아 ‘사랑’과 ‘체어리티’를 그 아래에 종속시키면, 참된 것 하나를 붙잡고서 전체를 왜곡할 수 있습니다.

 

이 원리는 신앙과 체어리티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특정 교리, 성경 번역, 예배 형식, 성례 이해, 종말론, 은사, 교회 정치, 특정 신학자의 가르침 등 무엇이든 그것을 전체보다 앞세우면 같은 위험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이 처음에는 상당 부분 참되더라도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가 되고, 이어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잘못되었다’가 되고, 마침내 그것을 중심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체어리티를 잃는다면 구조적으로 가인의 길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질문은 ‘내 교리가 맞는가?’만이 아닙니다. ‘그 교리가 나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가?’도 물어야 합니다. 참된 교리는 인간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인도합니다. 진리를 더 많이 알수록 겸손해지고,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며, 선한 쓰임을 더 충실히 행하게 해야 합니다. 반대로 진리를 많이 알수록 자기 우월감이 커지고, 다른 사람을 쉽게 정죄하며, 자기 해석을 지키기 위해 체어리티를 희생하게 된다면, 그 교리가 아무리 정교해도 이미 가인의 위험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스베덴보리를 읽는 우리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르카나’를 많이 알고 상응과 퍼셉션과 체어리티의 질서를 정확히 설명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가인의 위험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말씀의 속뜻을 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질서를 안다’는 생각이 자기 사랑과 결합하면 스베덴보리의 가르침 자체도 자기 우월성을 확증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이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체어리티를 잃는 역설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AC.362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진리를 적게 알라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언제나 그 목적 안에 두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사랑을 섬겨야 하고, 진리는 선을 섬겨야 하며, 교리는 삶을 섬겨야 합니다. 내가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어떤 진리도 전체 말씀과 교회의 질서,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목적 아래 놓여 있어야 합니다.

 

결국 AC.362는 가인의 비극이 ‘신앙을 버린 데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신앙을 지나치게 높인 데서’ 시작되었다는 역설을 보여 줍니다.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그 결과 사랑 없이 살게 되었으며, 사랑이 떠난 자리에 자기 사랑이 들어왔고, 자기 사랑에서 나온 환상이 그 교리를 계속 확증했습니다. 그렇게 참된 것 하나를 전체보다 앞세운 작은 질서의 뒤집힘이 마침내 체어리티 자체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래서 AC.362의 경고를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면 이렇겠습니다. ‘이단은 언제나 거짓을 사랑하는 데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하나의 진리를 너무 사랑하여 그것을 다른 모든 진리의 질서 위에 올려놓는 데서 시작됩니다.’ 다만 그때 실제로 사랑하는 것은 어느 순간부터 그 진리 자체가 아니라 ‘그 진리를 발견하고 소유한 나’가 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신앙의 교리는 가인의 교리가 됩니다.

 

 

 

AC.363, 창4:6,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3 ‘가인’(Cain)이라 불린 신앙의 교리가 어떤 성질의 것이었는지는 이 절에 대한 설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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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1, 창4:6,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1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If thou doest well, an uplifting)에서 ‘낯을 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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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7

‘가인의 분노가 타올랐다’(Cain’s anger was kindled)는 것이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뒤에서 그가 그의 아우 아벨을 죽였다고 기록된 사실에서 분명합니다. 아벨은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분노는 자기 사랑과 그 욕망들에 반대되는 모든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일반적인 결과입니다. 이것은 악한 영들의 세계에서 분명하게 지각됩니다. 그곳에는 주님을 향한 일반적인 분노가 존재하는데, 그 이유는 악한 영들에게 체어리티가 없고 증오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사랑(amori proprio)과 세상 사랑에 호의적이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 반발을 일으키며, 이것이 분노로 나타납니다. 말씀에서는 ‘분노’(anger), ‘진노’(wrath), 심지어 ‘격노’(fury)까지도 여호와께 자주 돌려지지만, 그것들은 인간에게 속한 것이며, 앞에서 언급한 이유로 그렇게 보이기 때문에 여호와께 돌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That “Cain’s anger was kindled” signifies that charity had departed is evident from what is afterwards related of his killing his brother Abel, by whom is signified charity. Anger is a general resulting from whatever is opposed to self-love and its cupidities. This is plainly perceived in the world of evil spirits, for there exists there a general anger against the Lord, in consequence of evil spirits being in no charity, but in hatred, and whatever does not favor self-love [amori proprio] and the love of the world, excites opposition, which is manifested by anger. In the Word, “anger,” “wrath,” and even “fury,” are frequently predicated of Jehovah, but they are of man, and are attributed to Jehovah because it so appears, for a reason mentioned above. Thus it is written in David:

 

49그의 맹렬한 노여움과 진노와 분노와 고난 곧 재앙의 천사들을 그들에게 내려보내셨으며 50그는 진노로 길을 닦으사 그들의 목숨이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하시고 그들의 생명을 전염병에 붙이셨으며 (시78:49-50) He sent against them the anger of his nostril, and wrath, and fury, and trouble, and an immission of evil angels; he hath weighed a path for his anger, he withheld not their soul from death. (Ps. 78:49–50)

 

여호와께서 실제로 누구에게 분노를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악한 천사들을 그들에게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들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의 노여움이 나아갈 길을 닦으시고 그들의 목숨이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하셨다’(hath weighed a path for his anger, and withheld not their soul from death)고 덧붙여 말한 것입니다. 또한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Not that Jehovah ever sends anger upon anyone, but that men bring it upon themselves; nor does he send evil angels among them, but man draws them to himself. And therefore it is added, that he “hath weighed a path for his anger, and withheld not their soul from death”; and therefore it is said in Isaiah,

 

내게 대한 어떤 자의 말에 공의와 힘은 여호와께만 있나니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갈 것이라 무릇 그에게 노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리라 그러나 (사45:24) “To Jehovah shall he come, and all that were incensed against him shall be ashamed” (Isa. 45:24),

 

이로부터 ‘분노’(anger)는 악을 의미하며, 같은 말로 하면 체어리티가 떠난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whence it is evident that “anger” signifies evils, or what is the same, a departure from charity.

 

해설

AC.357은 앞의 AC.355에서 짧게 제시했던 ‘분노는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뜻한다’는 말을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 번호는 가인의 분노만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인간의 악한 분노가 어디에서 생기는지, 악한 영들이 왜 주님께 분노하는지, 더 나아가 사랑 자체이신 여호와께 왜 말씀에서는 ‘분노’와 ‘진노’와 ‘격노’가 있는 것처럼 기록되는지까지 하나로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의 분노가 체어리티의 떠남을 뜻한다는 근거를 앞으로 일어날 사건에서 찾습니다. 가인은 결국 아벨을 죽이고, 아벨은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분노했다’는 것은 체어리티가 이미 떠난 상태가 드러나고 있으며, 마침내 체어리티 자체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를 내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고, 그 분리가 하나의 교리로 인정되며, 체어리티 없는 예배가 생기고, 이제 체어리티가 떠난 상태가 분노로 나타난 뒤 마침내 아벨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분노의 근원을 ‘자기 사랑과 그 욕망들에 반대되는 모든 것’에서 찾습니다. 이것을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자연적인 분노가 곧 자기 사랑이라는 일반 공식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불의와 악에 대한 정당한 분개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AC.357이 직접 다루는 것은 가인이 표상하는 악한 상태에서 나오는 분노입니다. 자기 사랑이 지배적 사랑이 되면 자기 뜻, 자기 이익, 자기 명예, 자기 판단이 관철되기를 원하고, 그것에 반대되는 것이 나타날 때 반발이 일어납니다. 이것을 가인에게 적용하면 그의 분노는 단순히 ‘동생의 제물은 받아 주셨는데 내 것은 받아 주지 않으셨다’는 형제간의 질투를 넘어섭니다. 가인이 의미하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체어리티보다 우위를 차지하려 하지만, 주님의 질서에서는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입니다. 바로 그 질서가 가인의 자기주장과 충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벨, 곧 체어리티 자체가 가인에게 불편한 것이 되고 마침내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까지 나타납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분노를 살필 때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이 ‘진리를 지키기 위해’ 분노한다고 생각할 때에도 실제로 지키려는 것이 주님의 진리인지, 아니면 자기의 교리적 위치와 명예와 판단인지 자기 안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원리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악한 영들의 세계’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는 그곳에 ‘주님을 향한 일반적인 분노’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들을 미워하거나 공격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 체어리티가 없고 증오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호의적이지 않은 모든 것이 그들에게 반발을 일으킵니다. 주님은 변하지 않으시고 주님의 사랑과 선도 변하지 않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존재의 상태가 다릅니다. 주님과 천국의 질서를 사랑하는 천사에게는 그 질서가 기쁨과 평안이지만,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지배적으로 삼은 악한 영에게는 같은 질서가 자기 욕망을 제한하는 것으로 경험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그들에게 분노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주님과 그분의 질서에 반발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AC.357은 말씀에 나타나는 ‘여호와의 진노’라는 매우 중요한 문제로 나아갑니다.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분노하시고 진노하시며 심지어 격노하시는 것처럼 표현된 곳이 많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이 ‘인간에게 속한 것이며, 그렇게 보이기 때문에 여호와께 돌려지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돌아서 악 가운데 들어가면 그 결과로 고통과 심판을 경험하며, 인간의 관점에서는 마치 하나님께서 진노하여 벌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말씀의 문자에는 이러한 외관에 따라 주님께서 행하시는 것처럼 표현되는 경우가 있지만, 속뜻에서는 악의 원인이 주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사랑과 질서에서 돌아선 데 있음을 밝혀 줍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시78:49-50을 인용한 이유가 중요합니다. 문자 그대로 읽으면 여호와께서 ‘맹렬한 노여움과 진노와 분노’를 보내시고 심지어 ‘재앙의 천사들’을 보내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인용 직후 이것을 직접 해석합니다. ‘여호와께서 실제로 누구에게 분노를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악한 천사들을 그들에게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들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시편 인용은 단순한 보조 구절이 아니라 ‘여호와의 진노’라는 말씀의 외관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것입니다. 이어지는 사45:24에서는 오히려 ‘그에게 노하는 자’가 부끄러움을 당한다고 말합니다. 시편의 문자에서는 여호와께서 인간에게 노하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사야에서는 인간이 여호와께 노합니다. AC.357은 이 두 표현을 통하여 실제 분노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악한 천사들을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들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긴다’는 말도 주의 깊게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의식적으로 악한 영을 불러들인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의 성질에 따른 영적 결합을 말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 이해에서는 같은 성질의 사랑이 서로 결합합니다. 사람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증오와 복수와 기만 같은 악을 자기 삶의 지배적 사랑으로 받아들일수록 그와 같은 사랑 가운데 있는 악한 영들과 내적으로 가까워집니다. 반대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사랑하고 체어리티 가운데 살수록 천국의 질서와 가까워집니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악을 방치하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주님은 끊임없이 악을 제한하시고 인간을 선으로 이끄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여 선을 강요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유 가운데 선택한 사랑의 결과가 허용되는 것과 주님께서 악 자체를 만들어 보내시는 것은 반드시 구별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시78:50의 ‘그는 진노로 길을 닦으사’라는 표현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자에서는 여호와께서 자신의 진노가 나아갈 길을 직접 마련하신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을 주님께서 악과 형벌을 적극적으로 만들어 내신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선택한 악의 결과가 진행되도록 허용되는 것이 인간에게는 주님께서 직접 행하신 것처럼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의 기원은 결코 주님에게 있지 않습니다. 동시에 이것이 악의 결과나 심판 자체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뜻도 아닙니다. 악은 실제 결과를 낳습니다. 다만 그 결과의 원인을 주님의 보복적 분노에서 찾지 않는 것입니다.

 

이 모든 설명은 결국 다시 가인의 분노로 돌아옵니다. 창4:5에서 먼저 분노하는 분은 여호와가 아니라 가인입니다. 주님의 질서가 가인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가인이 나타내는 자기중심적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의 질서에 반발합니다. 앞의 AC.352-354에서 아벨의 ‘기름’은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을 의미했고, 그 모든 사랑이 주님에게서 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AC.357에서는 자기 사랑(amori proprio)이 등장합니다. 한쪽에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자기를 중심에 두는 사랑이 있습니다. 따라서 가인과 아벨의 갈등은 단순한 형제간의 갈등을 넘어, 무엇이 신앙과 삶을 지배할 것인가 하는 서로 반대되는 사랑의 질서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AC.357 마지막에서 ‘분노’가 ‘악’을 의미하며, 같은 말로 하면 ‘체어리티가 떠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한 결론은 이 번호 전체를 압축합니다. 체어리티가 떠난 자리에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하면 자기 욕망에 반대되는 것을 미워하고 공격하는 상태가 생깁니다. 가인의 분노는 바로 그 내적 상태가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다른 사람의 분노를 판정하는 도구로 사용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살피는 말씀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무엇이 내 안에서 거슬렸기에 내가 이렇게 분노하는가? 내가 지키려는 것은 주님의 선과 진리인가, 아니면 내 뜻과 명예와 판단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분노는 때때로 자기 안에서 무엇이 지배적 사랑이 되어 있는지를 드러내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AC.357은 동시에 주님에 관한 매우 중요한 진리를 보여 줍니다. 주님은 인간에게 악을 보내시는 분이 아니며, 악한 천사를 보내어 인간을 괴롭히시는 분도 아닙니다. 주님은 언제나 사랑과 선 자체이십니다. 변하는 것은 주님이 아니라 인간의 상태입니다. 인간이 체어리티에서 자기 사랑으로 돌아설 때 자기와 같은 악과 결합하고 그 결과를 경험하면서, 변함없는 주님의 질서조차 자기에게 대적하는 진노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이야기는 ‘분노하시는 하나님과 반항하는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주님 앞에서 인간이 체어리티를 떠나 자기 사랑으로 향할 때 그의 내면과 영적 환경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AC.358, 창4:5, ‘가인의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무엇인가 - 얼굴에 나타나는 내적 상태’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8‘안색이 변했다’(faces falling)는 것이 내적인 것들이 변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얼굴’(face)과 얼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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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6, 창4:5, ‘가인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신 이유 -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예배’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6‘가인’(Cain)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또는 그러한 분리가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교리를 의미한다는 것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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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창1:14-17)

 

AC.33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떤 사랑도 없이는 생명이라는 게 있을 수도, 그리고 사랑에서 흘러나오지 않는 기쁨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음을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명이 그러하고, 기쁨도 그러합니다. 만일 사랑(loves), 같은 말이지만 욕망(desires)을 제거한다면, 욕망은 사랑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즉시 멈추고, 사람은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 저는 이것을 생생히 본 적이 있습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The loves of self and of the world)에도 어떤 생명과 기쁨의 모습 같은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들은 참된 사랑과는 전적으로 반대됩니다. 참된 사랑이란 사람이 무엇보다도 주님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는 만큼, 그만큼 이웃을 미워하게 되고, 그 결과 주님을 미워하게 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그것들은 사랑이 아니라 미움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사랑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참된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이며, 참된 기쁨은 그 생명에서 나오는 기쁨입니다. 참된 사랑은 하나뿐이므로, 참된 생명도 하나뿐입니다. 그 하나의 생명에서 참된 기쁨과 참된 행복이 흘러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천국(heavens)의 천사들이 누리는 기쁨과 행복입니다. It is in everyone’s power very well to know that no life is possible without some love, and that no joy is possible except that which flows from love. Such however as is the love, such is the life, and such the joy: if you were to remove loves, or what is the same thing, desires—for these are of love—thought would instantly cease, and you would become like a dead person, as has been shown me to the life. The loves of self and of the world have in them some resemblance to life and to joy, but as they are altogether contrary to true love, which consists in a man’s loving the Lord above all things, and his neighbor as himself, it must be evident that they are not loves, but hatreds, for in proportion as anyone loves himself and the world, in the same proportion he hates his neighbor, and thereby the Lord. Wherefore true love is love to the Lord, and true life is the life of love from him, and true joy is the joy of that life. There can be but one true love, and therefore but one true life, whence flow true joys and true felicities, such as are those of the angels in the heavens.

 

해설

AC.33에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생명과 사랑의 관계를 매우 단순하면서도 근본적인 원리로 설명합니다. 사람에게 어떤 사랑도 없다면 생명도 있을 수 없고, 사랑에서 흘러나오지 않는 기쁨도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곧바로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명이 그러하고, 기쁨도 그러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AC.33 전체를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여기서 ‘사랑’은 단순히 우리가 흔히 말하는 따뜻한 감정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과 욕망(desires)을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원하고 추구하며 그것에서 기쁨을 느끼는가는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사랑을 제거하면 생각도 즉시 멈추고 사람은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된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자신이 실제로 생생하게 보았다고 덧붙입니다.

 

이 말은 인간의 생각과 삶을 움직이는 더 깊은 곳에 사랑이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먼저 생각하고 그다음 무엇을 사랑한다고 여기기 쉽지만, AC.33은 그보다 더 근원적인 차원을 보여 줍니다. 어떤 것을 원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에 관한 생각이 일어나고, 그 사랑에 따라 기쁨도 생깁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명의 성질을 알려면 그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만 볼 것이 아니라,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에서 기쁨을 얻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중요한 구별이 나옵니다. 사랑이 생명을 움직인다고 해서 모든 사랑이 같은 생명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도 ‘생명과 기쁨의 어떤 모양’이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높이고 세상의 것을 얻는 데서 강한 욕망과 활력을 느낄 수 있고, 그것이 이루어질 때 큰 기쁨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이것도 분명히 하나의 ‘살아 있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참된 사랑과 분명히 구별합니다. 참된 사랑은 무엇보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하게 되면 사람은 자기 자신과 세상을 다른 모든 것보다 앞세우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는 만큼 이웃을 미워하고, 그 결과 주님을 미워한다고까지 강하게 말합니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말을 단순히 감정적으로 누군가를 싫어하는 것만으로 좁혀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33의 문맥에서 중요한 것은 지배적인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하면 이웃과 주님을 향한 참된 사랑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삶이 형성됩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사랑처럼 보이고 기쁨과 생명까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참된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이 구별 때문에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명이 그러하고, 기쁨도 그러하다’는 첫 문장이 더욱 중요해집니다. 문제는 단순히 ‘나는 무엇인가를 열심히 사랑하고 있는가?’가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무엇인가를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내가 사랑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 사랑은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는가?’입니다. 사랑의 성질에 따라 그 사람의 생명과 기쁨의 성질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참된 사랑, 참된 생명, 참된 기쁨을 하나의 근원으로 연결합니다. 참된 사랑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참된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이고, 참된 기쁨은 바로 그 생명에서 나오는 기쁨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참된 사랑의 근원이 사람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 안에 사랑이 있는 것처럼 경험되지만, 그 사랑의 참된 생명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것은 앞의 AC.30-32와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큰 광명체는 사랑이고 작은 광명체는 신앙이며,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천적 천사들은 자기들의 사랑과 생명과 행복이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며, 지각한다고 했습니다. AC.33은 이제 그 원리를 ‘생명과 기쁨’이라는 차원에서 더욱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따라서 AC.33이 광명체 본문 한가운데에서 갑자기 사랑과 생명과 기쁨을 이야기하는 것은 본문에서 벗어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앞에서 ‘더 큰 광명체’라고 한 사랑이 왜 그렇게 중심적인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단지 신앙 옆에 놓이는 하나의 종교적 덕목이 아니라 사람의 생명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랑이 사람을 지배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생명과 기쁨도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가 마지막에 천사들의 기쁨과 행복을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참된 사랑은 하나이고, 따라서 참된 생명도 하나이며, 그 생명에서 참된 기쁨과 행복이 흘러나옵니다. 천사들의 기쁨과 행복은 바로 이러한 사랑의 생명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행복은 단순히 좋은 환경을 얻거나 원하는 것을 마음껏 누리는 데서 생기는 행복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 근원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에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AC.33은 우리에게 매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살아 있는가?’라는 질문보다 먼저 ‘무엇이 나를 살아 있게 하고 있는가?’를 묻게 합니다. 사람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도 강렬한 활력과 기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활력이 있다는 사실이나 기쁨을 느낀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참된 생명이라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결국 분별의 기준은 사랑의 성질과 그 근원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참된 사랑, 그리고 주님에게서 오는 그 사랑의 생명이 사람 안에 있을 때 거기에서 참된 기쁨과 행복도 흘러나옵니다. 이것이 AC.33에서 스베덴보리가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명이 그러하고, 기쁨도 그러하다’는 말로 밝히는 핵심입니다.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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